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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없는 사회주의 : 아나키즘
미하일 바쿠닌/ 역자 미상
프랑스 혁명에 의해 선포된 대원리의 효과
프랑스 혁명이 대중에게 그 복음 즉 신비적이지 않고 합리적이며, 내세가 아니라 현세의, 하늘의 복음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복음, 즉 인권의 복음을 헌사할 당시부터, 혁명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모든 사람에게는 자유와 평등이 주어져 있다고 선언한 이래로, 기독교라는 아편에 마비되면서부터 빠져들었던 굴종 상태의 잠으로부터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전유럽 국가의 대중들 그리고 전문명 세계의 대중들은 그들 역시도 평등, 자유 그리고 인간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자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자마자, 본능만이 아니라 탄복하리만치 건강한 의식에 의해 인도되는 인민들은 자신들의 실질적인 해방 혹은 인간화의 첫번째 조건이 무엇보다도 경제 상황의 근본적 변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용할 빵의 문제는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제일의 문제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바대로 사람은 사고하고, 자유로움을 느끼며, 사람노릇 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물질적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관해서 부르조아들은 그 문제를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인민의 유물론적 요구에 반대한다고 그토록 소란스럽게 소리질러대면서, 관념론에 따른 금욕을 인민에게 설교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말만 늘어놓았지 실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민들에게 부각되는 두번째 문제, 즉 노동 후 여가는 인간 생존의 필수적 조건입니다. 그러나 현 사회의 근본적 이행 없이는 빵과 여가를 쟁취할 수 없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이 그 자체의 원리가 가지는 함의에 따라 전진하면서 사회주의를 탄생시킨 까닭입니다.
사회주의는 정의이다
사회주의는 정의입니다. 우리가 정의에 관해 언급할 때는 나폴레옹 법전이나 로마법에 담겨있는 정의가 아니라, 이것들은 완력으로 밀어붙이는 폭력, 기독교 교회나 이교도 교회에서 행하는 기도에 의해 신성시되는 폭력이라는 엄청난 범죄에 기초하고 있으며, 절대원리처럼 떠받들어져 그로부터 논리적 추론과정을 통해 모든 법률이 유추되는 그런 정의입니다. 우리는 그런 정의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 양심에 기초한 정의, 모든 사람의 의식 심지어 어린이의 의식에서조차 발견되는 그런 정의를 말하는 것으로, '공정'(equity)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무력과 종교적 영향력 때문에 정치계, 사법계, 경제계 내에 여태 확립되지 못한 이러한 보편적 정의는 새로운 세계의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보편적 정의 없이는 자유도 없고, 공화정도 없고, 번영도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연후에 그것은 우리가 평화 정착을 위해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의지를 장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는 극히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자진해서 방어하고, 정치적 자유와 함께 경제적, 사회적 해방을 요구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사회주의의 기본원리
우리는 여기서, 여러분들께 이러저러한 사회주의 체계를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존재가 자신의 모든 인간성을 계발할 물질적, 도덕적 수단을 가져야 한다는 프랑스 혁명의 대원리를, 우리가 보기에 다음과 같은 과제로 해석되어야 하는 원리로 다시금 선포하는 것입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각 개인이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일 속에서 각자의 다양한 재능을 계발하고 이용하기 위해 대략 동등한 수단을 발견해야만 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할 것. 그리고 누구의 노동도 착취 불가능하게 하면서, 각 개인이 사실상 집단적 노동에 의해 생산된 사회적 부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러나 그 부의 생산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한에서만 향유할 수 있게 하는 사회를 조직할 것.
국가 사회주의의 거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물론 수세기에 걸친 계발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그 임무를 제기했으며, 앞으로 우리 스스로 극도로 무능력하다고 자학하지 않는 한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다 우리는 개인과 조직의 완전한 자유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사회조직, 혹은 어떠한 통제권력일지라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조직을 꾀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한다는 점을 긴급히 추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조직, 경제, 정치의 유일한 기반이자 유일한 창조적 원리로서 인식하고 있는 자유(freedom)라는 이름으로, 국가공산주의 혹은 국가사회주의를 조금이라도 닮아가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 맞설 것입니다.
상속법의 철폐
국가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상속법을 가능한한 이른 시일 내에 완전히 철폐하기 위하여 먼저 그 법을 조금씩 수정하는 것입니다. 그 법은 순전히 국가의 창조물이며 권위주의적 신성 국가의 존재조건 중의 하나인 바, 자유에 의해서 폐지될 수 있으며 폐지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결국 국가는 정의의 원리에 따라 자유롭게 조직된 사회로 해소되어야 합니다. 상속권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은, 그것이 존재하는한 개인의 자연적 불평등이 아니라 계급의 인위적인 인간 불평등인 세습되는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할 것이고, 후자는 심성을 계발하고 형성하는데 있어 항상적으로 세습적 불평등을 낳아, 계속해서 모든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의 원천이자 정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의 임무는 만인을 위한 평등을 확립하는 것인데, 평등은 만인이 소망하는 삶에 필요불가결한 것이고 경제적, 정치적 조직사회에 의존하는 바, 만인은 그 자신의 본성에 인도되어 자기 노력의 결과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재산은 남녀 어린이의 수련과 교육을 위한 사회기금으로 돌려져서,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의 양육비까지 뒷받침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본적인 사회구상은 슬라브족과 러시아인들처럼 동시대인의 일반적이며 전통적인 본능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의 재산을 존속시키는 것이되, 그 재산은 직접 경작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소유되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원리는 정당하며, 중대한 모든 사회개혁의 본질적이고 불가결한 조건이며, 비록 프랑스와 같이 경작은 자신들이 하지만 현재 횡행하고 있는 정치, 경제체계의 불가피한 결과로서 초래되는 토지의 처분으로 말미암아, 농민 대다수가 이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고마는 그런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그 원리의 실현이 어려울지라도, 결과적으로 서구 유럽도 이 원리를 인식하고 수용하는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토지문제에 관한 더이상의 제안은 삼가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다음과 같은 선언을 제안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사회주의 선언
"우리는 지금 전세계가 자랑스레 여기는 모든 재부를 생산하고서도 그 댓가로 단지 조그만 빵조각 밖에 받지 못해 내일의 생계를 장담하기 어려운 인구 대다수가, 사실상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휴식도 여가도 없는 노동, 그리고 가난 때문에 기본적 욕구를 박탈당하고 있는 한 그리고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볼품없는 노예상태에 운명지워져 있는 한 자유, 정의, 평화의 엄중한 실현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극히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으며, 그들에게 빵의 문제는 정신적 해방의 문제이고, 자유와 인류애의 문제라고 확신 합니다."
"우리는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화되고 정의롭지 못하며, 자유 없는 사 회주의는 노예제이며 야만일 뿐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평화와 자유를 위한 동맹은 자본과 재산소유자의 멍에로부터 인민의 노동을 해방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 경제의 근본적 재건설, 사법적 정의나 신학적, 형이상학적 정의가 아닌 인간 정의에 다름 아닌 엄밀한 정의 그리고 실증과학과 광대한 자유에 근거하는 재건설의 급진적 필요성을 소리 높여 선포하는 바입니다."
정치권력의 자리에 생산담당자의 조직을
원리상으로나 실제상으로도 정치권력이라 부르는 것을 완전히 철폐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존재하는한 지배자와 피지배자, 주인과 노예,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권력이 일단 철폐된다면 생산담당자 조직과 경제서비스 단체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근대 국가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순논리상 그 발전의 최종 국면에서 부조리한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와 국가원리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이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역경을 딛고선 대중과 경제 단체로 이뤄진 자유사회조직이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해방을 향해 다가서고 있으며, 낡은 국가의 모든 국경선과 민족 차별이 철폐되고 있고, 사회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공통 관심사를 가지는 바, 그 토대로서 생산적 노동, 인간화된 노동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인민의 이상
물론 인민들에게는 이러한 이상이 무엇보다도 우선 집단노동을 통하여 만인에게 균등하고 의무적인 방식으로 결핍을 충족시키고, 소유를 소멸시키며, 모든 물질적 욕구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지배의 종식이자, 인민들이 자신들의 욕구와 부합하는 삶을 국가에서 보여지는 내리먹힘 방식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자유롭게 조직화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인민들 스스로 일체의 정부 및 의회와는 무관한 조직 - 농촌과 공장 노동자들, 나아가 코뮨, 지역 그리고 전국적 수준의 조합, 마침내 먼 미래에는 국가가 모두 무너져내린 폐허 위에 찬란하게 빛나는 될 보편적 인류 동포애의 조합을 결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사회의 강령
국가형태의 공화정인 마찌니 체제 말고는 코뮨의 공화정, 연합의 공화정, 사회주의적이며 참다운 인민의 공화정인 아나키즘 체제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은 국가의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혁명의 정치이자, 연합을 통해 아래로부터 건설된 조직, 극히 자유로운 경제조직의 정치입니다.
... 정치적 지배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정부는 공통 관심사의 단순한 관리체로 전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강령은 다음 몇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평화, 해방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행복.
모든 압제자와 약탈자에 대한 전쟁.
노동자에게로 전면 환수 - 모든 자본, 공장, 노동도구, 원료는 결사체에게로, 토지는 직접 경작자에게로.
자유, 정의 그리고 지상의 모든 인간 사이의 우애.
만인을 위한 평등.
그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계발, 교육, 양육의 수단과 일하면서 평등하게 살아갈 가능성을 제공할 것.
농업과 공업, 문학과 과학 등에 있는 노동자협회의 자유로운 연합을 통해 아래로부터 사회를 조직할 것. 처음에는 코뮨으로, 그리고 코뮨연합에서 지역으로, 지역은 전국으로, 각 나라들은 국제적 우애협회로.
혁명 기간에 합당한 전술
사회혁명 기간에, 사회혁명은 모든 측면에서 정치혁명과 정반대되는데, 개인의 행동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반면에, 대중의 자생적 행동이 결정적 중요성을 가집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민중적 본능과 부합하는 사상을 명확하게 밝히고, 선전하며, 실행하는 것 그리고 이에 더하여 대중의 자연스런 권력체인 혁명조직에 그칠 줄 모르는 노력을 보태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 기대할 것은 없습니다. 그 나머지는 인민 스스로가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이와는 다른 방법을 구사한다면 정치적 독재로 귀결되고, 국가가 재출현하여 국가의 압제, 불평등과 특권이 부활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인민 대중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노예상태가 재구축될 것입니다.
바아랭(Varlin)과 그의 친구들은 모두, 신실한 사회주의자들처럼 그리고 인민들에게서 태어나고 자란 모든 보통 노동자들처럼, 고립된 개인들의 주도권과 탁월한 개인들에 의한 지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지배가 철두철미하게 관철되어 똑같은 선입견과 불신을 자기 사람들에게까지 전파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너무나도 정당한 성향을 수준 높게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법령 뿐인 혁명은 실패하고야 만다
사회혁명이 독재 혹은 헌법의회를 통해 발효되거나 조직될 수 있다는, 제가 보기엔 정말 사악한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친구 파리의 사회혁명-사회주의자들은 인민들의 그룹이나 결사의 자생적이며 지속적인 대중행동을 통해서만 혁명이 가능하며, 완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파리 친구들은 너무나도 정당했습니다. 사실 그럴 의도가 없기 때문에, 설혹 제 아무리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혹은 탁월한 수백명의 집단적 독재를 입에 올릴 수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인민의 집단의지를 구성하는 무한정 다양하며 이질적인 실질적 이해관계, 열정, 의지, 욕구를 포용할 수 있는 지식인 조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회조직을 고안할 수 있는 지성은 없습니다.
그러한 조직은 얼마간 국가의 사주를 받은 폭력으로 늘상 사회를 불행으로 몰고가는 프로크루스트의 침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혁명이 대중, 그룹, 코뮨, 협회 그리고 심지어 개인까지도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그리고 국가의 실체인 폭력 일체의 역사적 근거를 단호하게 파괴함으로써 끝장을 내야만 하는 것은 바로 강제력에 기반한 이처럼 낡은 조직체계입니다. 국가의 몰락에는 사법권의 부정과 국가 숭배자의 갖가지 기만을 파괴하는 과정이 수반될 것인데, 사법권과 이들 숭배자들은 언제나 국가가 대표하고 보증하며 인정한 모든 폭력을, 현실에서 뿐 아니라 관념에서도 불만은 있을지라도 신성시해 왔을 따름입니다.
국가가 사라질 때에라야만이, 인류가 자유를 쟁취하고, 사회, 그룹, 지역조직의 이익과 모든 개인들의 참된 이해관계가 실질적으로 충족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폐지된 국가의 뒤를 이을 자유조직
국가와 교회의 폐지는 사회가 [국가로부터] 실질적으로 해방되기 위한 가장 화급하고도 불가결한 조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회는 이런 이후에라야 재조직화에 착수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재조직화는 위로부터 진행되거나, 소수의 현자 및 똑똑한 사람이 구상한 이상적 계획에 따라 실행되어서는 안 되며, 일부 독재권력 혹은 설령 보통선거로 선출된 국민의회일지라도 이들이 제출한 법령을 통해 이뤄어져서도 안 됩니다. 앞서 언급했던 그런 체계는 불가피하게 정부 관료귀족, 즉 인민대중과는 아무런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들게 되는 바, 확언하건대 이 계급은 공공 복리나 국가를 구한다는 허울 아래 다시 대중을 착취하고 노예처럼 부려먹게 될 것입니다.
자유는 평등과 함께 가야한다
나는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평등 없이는 나라의 번영과 개인의 자유, 정의, 인간 존엄, 도덕, 복지는 모두 허망한 것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인간애의 제1의 조건인 자유의 옹호자이기 때문에, 평등이 결단코 국가의 초월적 감독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과 집단적 번영을 위한 자생적 조직에 의해, 코뮨으로 그리고 코뮨의 자유로운 연합으로 확대될 생산자협회라는 자유조직에 의해 확립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권위주의적 혁명과 자주적 혁명의 차이점
사회주의적 혹은 혁명적 집산주의자가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자, 국가의 절대적 주도권에 대한 지지자와 주요하게 갈리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양자의 목표는 똑같습니다. 양 세력은 만인에게 평등한 경제적 조건 하에서, 즉 생산도구의 집단적 소유 하에서 오로지 집단노동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하길 원합니다.
다만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조아 급진세력의 도움을 받아 노동계급, 주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을 발전시키고 조직화하는 것을 통해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일체의 모호한 동맹을 적대시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대조적으로 이러한 공동의 목표는 정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비록 상류계급으로 태어났지만 자기 의지에 따라 과거와 단절하고 공공연히 프롤레타리아트 편에 가담하여 그 강령을 수용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도시와 촌락 노동대중의 사회 (따라서 반정치적인) 조직과 권력을 통해서 쟁취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방법
이로부터 두가지 서로 다른 방법이 도출됩니다. 공산주의자는 국가의 정치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물리력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국가를 파괴하려는,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국가를 끝장내 버리려는 의도로 조직화합니다. 공산주의자는 권위의 원리와 그에 따른 실천을 옹호하는 반면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자유로운 신념만을 간직합니다. 이 둘은 똑같이 과학의 옹호자인데, 과학은 미신을 파괴하고 신앙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는 과학을 인민에게 강요하고 싶어합니다. 반면 혁명적 집산주의자는 인민들에게 과학과 지식을 확산시켜, 그 결과로 인간사회의 여러 그룹들이 자신감을 갖게 되어, 소수 '잘난' 사람이 무지몽매한 대중에게 강요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된 계획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연스런 경향과 실질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하거나 자생적으로 연합으로 결합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학식있는 박사나 자칭 인류의 스승이라는 자들의 심오한 생각보다는 인민대중의 본능적 열정과 실질적 욕구 속에 훨씬 더 많은 실천적 이성과 지성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 자들은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무수한 시도가 이미 하나같이 실패로 돌아간 비참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려 합니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그와 반대로 인류는 장구한 세월동안 자기지배 상태였다고 믿으며, 인류 불행의 원천은 이러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도 어느 특정 정부형태에 있는 것도 아니라, 본질이 어떠하든 정부의 원리와 존재 그 자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인들이 발전시켰고 미국과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된 과학적 공산주의와, 라틴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광범위하게 발전시켜 궁극적인 결론에까지 이르렀으며, 오늘날까지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프루동주의 사이에 현재 존재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확인된 바 있는 견해상의 이러한 차이입니다. 혁명적 사회주의는 찬란하고도 실천적인 모습을 파리 코뮨에서 최초로 드러낸 바 있습니다.
범독일인들의 깃발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있습니다.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국가를 유지, 강화시켜라. 반대로 우리의 깃발, 사회혁명가의 깃발에는 핏빛 찬연한 글씨로 이처럼 적혀 있습니다. 모든 국가의 파괴, 부르조아 문명의 일소, 억누를 수 없는 백성과 해방된 전인류의 조직인 자유결사를 통해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건설되는 자유조직, 그리고 보편적 신인간세계의 창조.
이러한 새로운 조직을 창조하거나, 혹은 새로운 조직을 창조하도록 인민을 돕기에 앞서, 승리를 쟁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하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 국가부터 파괴해야 합니다...
▒▒The Autonomy Review
바꾸닌의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
이 종 훈
서강대 사학과 박사과정 학위 논문(1994)
목차
Ⅰ. 서론
Ⅱ. 바꾸닌 사상의 형성 요소
A. 프루동 사상의 영향
B.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인민의 정서
C. 헤겔의 변증법과 피히테의 주의론
Ⅲ. '연대적 자유'
A. 자유의 본질
B. 민족의 자유와 인민의 자유
C. 연맹주의의 성격
Ⅳ. 자유 쟁취를 위한 혁명
A. '사회 혁명'의 성격
B. 대중과 인텔리겐챠의 혁명적 역할
C. 혁명과 자유 사회의 건설
Ⅴ.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A. 정치적 혁명 및 개혁 노선 비판
B. 엘리뜨주의와 권위주의 비판
C. 결정론 비판
Ⅵ. 결어
Ⅰ. 서 론
19세기 유럽 사회 사상 중 아나키즘의 대두는 사회주의와의 관련에서 주목될 만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1860년대부터 이딸리아, 에스빠냐, 프랑스, 서부 쉬스 등지에서 아나키즘은 "대중적 지지를 획득했던 사회주의 운동의 한 갈래"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19세기 아나키즘 운동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지닌 인물로서 바꾸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이 지적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정부, 국가, 권위, 지배 등에 반대하는 이론이자 자유, 주의론(voluntarism), 분권화 등을 제시하는 이론'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바꾸닌은 이러한 아나키즘이 순수한 이론이나 단순한 사고 실험 단계에서 벗어나도록 이를 국제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킨 인물이었다. 즉, "바꾸닌 없이도 아나키즘은 존재했겠지만, 아나키즘 운동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바꾸닌은 실로 아나키즘 운동의 "진정한 창시자(le fondateur re?l)"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바꾸닌의 이러한 위치는 한편으로 그가 '독창적인' 아나키즘 사상가라는 점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근-현대사 연구가인 Gu?rin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의 아나키즘의 비교적 통일성을 유지하며 발전하게 된 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사람의 대표적인 사상가, 즉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65)과 바꾸닌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체계가 잡혔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서양 근대사에서 본격적인 아나키즘 사상이 처음으로 제시된 것은 W. Godwin(1756-1836)의 <<정치 정의론>> (1793)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 저작이 정작 아나키스트들로부터 M. Stirner(1806-56)의 <<유일자와 그 소유>>(1844)와 아울러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의 일이기 때문에, 1860년대부터 사회주의 운동의 한 갈래로 대두한 아나키즘 운동에 미친 Godwin이나 Stirner의 영향은 극히 제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Miller가 아나키즘의 역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서들이 가드윈이나 쉬티르너 같은 비-사회주의적인 초기 아나키스트에 상당한 관심을 집중시킨 반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녔던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을 무시하여 왔다고 지적한 것도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살펴볼 때 아나키즘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이 드러나는 것은 프루동이 노동자의 입장에서 단순히 국가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까지 신랄히 비판하는 사상을 제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아나키즘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이 더욱 분명해진 것은 바꾸닌을 통해서였다. 그는 프루동 사상을 계승하고 표방하였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에서 그의 스승과 다른 사상을 펴 나아갔다. 즉, 바꾸닌은 사유재산제 및 혁명 전략에 대하여 타협적인 자세를 취한 프루동과 입장을 근본적으로 달리함으로써 그 사상의 수용 못지않게 극복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Gu?rin이나 Rocker는 바꾸닌이야말로 프루동의 성과를 여과하며 풍부하게 하고 진일보시키면서도 프루동이 제시한 명제들을 한층 차원 높게 체계화한 매우 중요한 아나키스트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바꾸닌의 아나키즘 사상에 나타나고 있는 사회주의적 성격은 아나키즘의 두 유형을 비교함으로써 더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꼬뮌주의적 아나키즘(Anarchist Communism; Communist Anarchism)과 개인주의적 아나키즘(Individualist Anarchism)으로 양분될 수 있다. 1860년대부터의 유럽 아나키즘은 바꾸닌과 그 지지자들이 피억압 민중의 자유를 위해 경제적 독점 및 사유재산제의 폐지와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를 강력히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명백히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 규정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인데 그 신봉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반권위적 꼬뮌주의(communisme anti-autoritaire), 또는 리버태리언 꼬뮌주의(communisme libertaire) 등으로 명명함으로써 권위주의적 성격이 짙은 마르크스주의[communisme autoritaire]와 구별하려고 하였다. 바꾸닌은 "자유 없는 사회주의는 조종과 참혹"인 반면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이자 불의"라고 강조하면서 반권위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이 이념은 집산주의적 아나키즘(Collectivist Anarchism)으로 통칭되기도 하며, 크게 보아서 무정부적 생디낄리슴(anarcho-syndicalisme)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물론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꼬뮌주의적 아나키즘 사이에 몇가지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양자는 모두 국가와 정부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국립공장 제도나 국유제를 포함한 국가 사회주의 체제를 배격하며, 아울러 경제의 탈-중앙집권화와 자발적 협동 조직(voluntary associations)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단지 국가 및 정치 권력의 간섭으로 야기된 독점을 배격하여 그 결과 자본이 좀 더 광범위하게 분산될 수 있는 자유시장 체제를 고수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유경쟁과 최소한의 정부 기능을 허용하는 자유주의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라는 공통된 전제에서 출발한 아나키즘의 두 유형은 어떻게 사회 및 경제 체제에 대한 판이한 결론에 도달하였는가? 그것은 자유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 자유를 '타인에 의한 간섭과 강제의 배제'라는 정도로 소극적으로 규정하였다면,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은 이를 '사회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욕구 충족의 기회'로 규정될 수 있다.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은 자기 자신의 자유 및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의 관계에서 상호대립적 관계를 부정하며, 타인의 행복 증진을 위해 일하는 공동체 이외에서는 결코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사회관이 원자론적인 것에 가깝다면,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은 연대성(solidarity)을 강조하는 일종의 유기체적 사회관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자가 바로 바꾸닌 및 그 지지자들의 입장이었다. 즉, 바꾸닌을 포함한 대부분의 19세기 유럽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적 연대성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이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반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미국을 제외하면 그 세력이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미국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Josiah Warren과 그 계승자들인 S. Andrews, L. Spooner, W.B. Greene, 그리고 Benjamin F. Tucker 등의 사상과 프루동 사상 사이에 존재했던 부분적인 친화성이다. 특히 R. Owen의 이상적 공동체 건설에 참여한 바 있는 Warren은 1827년부터 자신이 건설한 공동체 안에서 '노동과 노동의 교환'을 경제 활동의 원칙으로 해서 노동시간을 교환 가치의 기준으로 삼고 지불 수단으로는 화폐 대신 노동권(labor notes)을 도입했는데, 이는 그뒤 프루동이 독자적으로 도달한 결론인 상조론(mutuellisme)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것이었다. 프루동은 여기에 더하여, 소생산자가 자신들의 생산도구를 집단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전제하고 이들에 대한 제한없는 무이자 은행 대부를 계획했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프루동의 이론은 미국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외래 사상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Warren의 계승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Miller가 프루동의 상조론을 가리켜 사유재산제와 공산제 사이의 '일종의 타협'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음미해 볼만하다.
이러한 성격의 푸루동 사상에 비해서 바꾸닌 사상은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표방했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의 새로운 전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양자 간의 입장 차이는 첫째로 사유재산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프루동은, 오히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과 유사하게, 자유를 보장하는 요소로서 사유재산을 옹호하였다. 산업과 관련해서도 그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는 상조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바꾸닌은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프루동의 상조론을 거부하였다. 바꾸닌은 "개인의 재산 상속 폐지"와 아울러 "집단적 내지는 사회적 소유"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둘째로 자본주의 국가 체제를 극복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양자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프루동은 1850년대부터 국가의 완전 폐지 가능성에 회의를 느껴 연맹주의(f?d?ralisme)라는 차선책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혁명에 대한 입장이 자연히 모호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꾸닌은 자본주의를 일소할 혁명적 수단을 주장하였떤 것이다. 따라서 혁명을 전제한 바꾸닌의 연맹주의는 프루동의 연맹주의와는 외형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전제와 의도 면에서 판이한 것이었다.
바꾸닌의 이러한 급진적 노선에 대해 결국 프루동주의자들까지 포함한 당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이 동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근대 유럽 아나키즘은 바꾸닌에 의해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으로서 그 성격이 분명해졌으며 아울러 아나키즘 조직 및 국제적 노동계급 운동과 연계됨으로써 정치운동화 하였던 것이다. 그 중심은 제1인터내셔널(국제 노동자 협회)으로서, 그것은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였다. 바꾸닌은 아나키즘을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킴에 있어서 제1인터내셔널의 조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바꾸닌주의자들은 이 조직을 자신들의 이념을 설파하는 연단으로 간주하였다. 이딸리아, 에스빠냐, 쉬스 서부 및 벨기에, 프랑스 남동부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바꾸닌지지자들은 1869년 이후 제1인터내셔널 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바꾸닌의 세력 확대는 총무위원회(General Council)를 통해 제1인터내셔널을 사실상 장악했떤 마르크스파에게 최대의 위협이 되었다. 특히 사유재산 및 상속권 철폐에 관한 선언문 채택을 놓고 양파 사이에 의견 대립을 보였던 4차 총회(1869년 Basel)에서 바꾸닌파는 더 많은 지지표를 획득함으로써 마르크스파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제1인터내셔널 총회가 총무위원회의 권위에 힘입어 제출된 의안을 단호히 거부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제1인터내셔널 안에 마르크스와 대등한 역량의 지도자, 즉 바꾸닌의 출현이었다. 이후 곳곳에서 마르크스파는 바꾸닌파의 도전에 직면하여 사면초가에 처했다. 따라서 마르크스파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자파에 유리한 대의원 수를 확보한 뒤 헤이그에서 개최한 5차 총회(1872년)에서 바꾸닌을 제명하고 총평의회를 서둘러 뉴욕으로 이전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을 더 이상 장악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자 이를 "사보타지" 했는데 이는 "인터내셔널을 죽여서라도 바꾸닌주의자들로부터 인터내셔널을 구하는" 고육책이었다고 표현될 수 있다. 그후 아나키스트가 주도한 6차 총회(1873년 Gen?ve)에서 5차 총회의 결정이 무효라고 선언되고 아나키즘 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즉, 5차 총회에서 "조작된 다수(une majorit? factice)"가 채택한 결의안들이 인터내셔널의 "거의 전원(la quasi-totalit?)"에 의해 거부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뉴욕으로 본부를 이전하면서 유명무실해진 마르크스파의 인터내셔널과는 별도로 아나키스트들이 주축이 된 인터내셔널이 존속하게 되었다. 더욱이 1872년 양대 세력의 충돌 이후에는 사태가 마르크스보다는 바꾸닌에게 더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왜냐하면 사건 직후 마르크스는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는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 바꾸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치하고 상호 각축을 벌이는 집단이었음과 함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형성하는 양대 주류였던 것이다.
바꾸닌의 사후에 전개된 바꾸닌주의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꾸닌주의는 생디깔리슴, 그리고 더 나아가 노동자 평의회(sovet; conseil) 운동과 관련하여 주목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디깔리슴의 경우 그 사상적 맹아는 이미 프루동이 표방했던 노동자주의(ouvri?risme)과 비정치성(apolitisme)에서 나타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루동의 사상이 혁명적 생디깔리슴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상을 계승한 제자들의 매개 역할 때문이었는데 바로 그 대표적 예가 바꾸닌이었던 것이다. 또한 바꾸닌파는 노동조합 운동에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프랑스, 에스빠냐, 이딸리아 등지에서는 1895-1910년에 무정부적-생디깔리슴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노동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제1인터내셔널 정신의 부활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바꾸닌은, 국가의 근본적 폐지를 지향하는 인터내셔널이 직종별-산업별 조합의 자유로운 동맹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국가 조직과는 다른 이러한 조직이야말로 부르조아 세계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 질서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바꾸닌주의는 소볘뜨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좀 더 정확한 역사적-정치적 의미에서 소볘뜨는 산업에 있어서의 일종의 자주관리(autogestion) 기관으로서 전형적인 직접민주주의 형태를 지니며 사회적-정치적 혁명 지향성의 사회 하층 집단[예: 장인, 노동자, 농민, 경우에 따라서는 군인]을 대변하는 혁명적 기구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바꾸닌이 지향한 제목표 - 국가로부터의 해방, 자주관리, 생산자 협동조합의 연맹, 지역 꼬뮌의 자치와 연맹 등 - 는 바로 소볘뜨라는 관념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은 명백히 20세기 소볘뜨 이론의 선구자로 평가받을 수 있다. 러시아 혁명과 에스빠냐 내전 초기에 바꾸닌의 노선에 따른 평의회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특히 끄론쉬따뜨(Kronshtadt)의 꼬뮌과 까딸루냐(Cataluna) 지역의 노동자 평의회가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바꾸닌은,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꼬뮌을 구성하고, 각 꼬뮌의 연맹이 지역 단위를 이루고, 각 지역 연맹은 국민 단위를 형성하며, 각 국민적 연맹은 국제 형제단을 이루는 식으로 "자유연맹(la libre f?d?ration)에 의한 밑으로부터 위로의 사회 조직화"를 제시한 바 있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후일 러시아 혁명기의 평의회 체제의 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바꾸닌의 사회조직론은 '건설적 아나키즘(l'anarchisme constructif)'의 결정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바꾸닌 내지 바꾸닌주의자들의 사상 및 활동의 역사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존 연구에서 이것이 평가 절하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바꾸닌에 대한 기왕의 연구 성햐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앞서 우선 그 근본적 원인을 살펴보자면, 그것은 우선 아나키즘과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밖에 평가하지 않았으며, 다음으로는 아나키즘 운동이 20세기 초반에 좌절하고 말았다는 인식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아나키즘의 실패 원인을 이념의 열등성으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결과론적 해석과 맞물려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인식이 만연하게 된 배경에 관해 부연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근-현대 국가에서 아나키즘의 도전을 물리치고 대표적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은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모두 아나키즘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다. 우선 자유주의의 입장은 어떠한 것인가? 자유주의는 개인이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개인 및 사회 전체와의 갈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서로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질서 유지를 위한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이러한 전제와 정부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아나키즘에 비판적인 것이다. 또한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아나키즘이 경제적 독점 및 정치적 억압을 일소하여 소수의 특권을 종식시키고 자유 향유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구하는 혁명과 국가제도의 파괴는 오히려 그 수행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를 폭력으로 유린할 가능성을 지닌 위험한 것이며 자유 추구의 명분으로 자유를 침해하는 모순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아나키즘이 개인의 자유라는 추상적 관념에 집착하는 한 대중적-계급적 기반을 갖춘 사회 혁명의 수행에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고 보았다. 예컨대 스딸린은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차이를 "모든 것을 개인에게"와 "모든 것을 대중에게"로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아나키스트가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거부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스딸린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나키즘의 자유 관념을 개인주의적인 부르조아-자유주의의 자유 관념과 동일시하는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오류는 사회주의와 러시아사 연구의 권위자인 E.H.Carr의 인식에서도 나타날 정도다. Carr는 비록 바꾸닌의 자유관이 부르조아 자유주의의 자유 관념과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극단적 개인주의와 같다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아나키즘에 대한 역사적 저평가의 근원을 지적하면, 흔히 아나키즘은 20세기 초에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서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는 통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렇게 인식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근본적 원인이 바로 이념 자체의 열등성에 있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결과론적 해석이 자리잡고 있다. 아나키즘의 이른바 내재적 한계성 [폭력 예찬과 파괴의 맹목성, 파괴를 통한 자유의 실현이라는 모순성, 이론상의 일관성 결여와 비체계성, 계급성 미약과 비조직성, 비현실성, 시대착오적 복고지향성, 확고한 미래상 부재 등] 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귀결이 바로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그 운동의 역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관점을 지닌 Lindeman에 의하면, 아나키스트는 서양 근현대사의 주요 투쟁, 즉 구체적으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19세기 마르크스주의자와 제2인터내셔널, 볼쉐비끼, 파시스트에 대한 투쟁 등에서 늘 패배자였으며, 더 넓게 보아서 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모두 불가피한 추세로 받아들였던 유럽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패배자였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견해를 지녔던 Lichtheim 역시 아나키즘 운동이 한때 수십만명의 추종자를 끌어 모았던 나라에서조차 쇠퇴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단지 역사적 과거로서의 의미만 지닐 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반적 인식의 잘못을 주장하는 견해도 못지않게 제시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이라 할 Avrich는 1960-70년대의 사회적 격동 속에서 이미 아나키즘 운동의 부활이 목격되었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부활의 시점에 일부 역사가들이 실로 안일하게 이 운동의 "묘비명"을 써 놓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1960년대 후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출된 신좌파 운동 및 학생 운동으로부터 오늘날의 환경 운동, 반전-평화 운동, 여성 운동, 탈-중앙집권화 운동(municipalism)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아나키즘의 근본 정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볼 때 19세기 아나키즘의 의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동시에 현대사회에서의 맥락을 명확히 재조명하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작업으로서 우선 필자는 바꾸닌 사상을 중심으로 아나키즘의 현재적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바꾸닌 사상은 아나키즘이 지닌 지속적 생명력을 집약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나키즘이 사상적으로나 사회운동으로 강점을 갖게 된 근거는 i) 아나키즘 사상 자체에 내재된 이상주의적 성격 및 ii) 현대 국가 및 사회에 내재된 문제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특히 바꾸닌의 자유관에서 잘 나타난다. 후자와 관련해서 바꾸닌 사상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 및 제3세계의 사회 혁명까지 포함하는 현대 사회 전반의 문제를 통찰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아나키즘의 이상이 갖는 보편성은 인간의 자유이며 이를 억압하는 모든 제도와 관습에 대한 투쟁에 있다. 이 점은 특히 바꾸닌의 자유론에서 극명하게 표출된다. 그에게서 인간의 자유는 천부적-생래적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부단히 창조해 나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바로 인류 역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완전한 자유로서, 질서의 명분으로 부분적 양도를 전제하는 사회계약론에서의 자유와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또한 완전한 자유를 목표하기에 그에 대한 추구는 부단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 사상으로 대표되는 아나키즘의 이상주의적 성격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바꾸닌에게 비판적이거나 아나키즘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연구자들까지도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Carr는 바꾸닌이 구현하고자 했던 자유를 가리켜 "어떠한 인위적 제도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여전히 실현되지도 않고 실현될 수도 없는 이상"이지만 "인간성의 최고 표현이자 열망의 불가결한 부분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역사상 아나키즘 운동의 종언을 단언한 Woodcock마저도 아나키즘 사상이 지닌 영속적 가치를 인정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Ritter와 Crowder는 현대에서의 아나키즘의 지속적 힘을 인정하고 그 이유가 "좀더 보편적이고 변치 않는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점"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이제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이 적어도 모든 사람의 마음 한 구석에서 펄럭이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나키즘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간적이고 더 나아가 영감의 원천으로 인식되는,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의 비젼이라는 것 만큼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둘째로 현대 국가와 사회, 특히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과 관련하여 아나키즘의 의미가 진지하게 고려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우선 현대사회에서는 19세기에 보편적이던 국가의 자유방임적 성격이 사라졌다. 그대신 증대되는 행정의 전문관료화 경향, 정부 권력의 비대화와 경제적 독점화의 추세 등으로 개인에 대한 통제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기 때문에, 아나키즘이 추구한 인간의 자유라는 이상은 역설적으로 이론적 형성기였던 19세기보다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 점이야말로 1960년대 이후 아나키즘 사상에 대하여 증대되고 있는 관심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산업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간을 노동과 궁핍으로부터 해방시킬 잠재력도 커졌지만 이것이 사회 구성원들을 지배하는 권위의 자동적인 감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컴퓨터와 첨단 통신 기술은 오히려 권위의 증대를 초래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것은 이미 120여년 전에 바꾸닌이 국가권력 기반으로서의 과학-기술이 지니는 의미를 예리하게 분석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는 전신 기술이 초래한 정치 권력의 가공할 집중 현상을 지적한 바 있다. 한편으로 기술 발전에 따른 일상 생활의 만족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생활의 내용을 빈곤하게 만들고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여가 생활 중에도 끊임없는 상업 광고로 사회 구성원의 소외감을 심화시키는 것에 선진 자본즈의 사회의 주요한 모순이 존재한다. Miller는 이에 대한 반발이 신좌파(New Left) 출현의 배경을 이루며 그 근본정신이 아나키즘이라고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기성 체제와 권위의 타파를 외쳤던 버클리에서 빠리에 이르는 1960년대 학생 운동은 "파괴의 욕구가 곧 창조의 욕구"라는 경구로 상징되는 바꾸닌 사상의 재등장이라고 간주되었다. 또한 인간 예속을 심화시키는 기술관료 정치 및 군산복합체의 전조에대한 바꾸닌의 경고와, 또한 그가 제시한 자치 꼬뮌을 기본 단위로 한 분권화된 사회조직론과 여성해방론도 역시 아나키즘 정신의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나키즘의 현재적 의의는 구미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세계와 제3세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960년대 유럽 학생운동의 주역들은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와 공산당의 권위주의에도 세찬 비판을 가하였다. 이에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동유럽의 역사가들도 이들의 주장을 바꾸닌주의의 부활로 해석할 정도였다. 또한 구 소련의 역사가 루드니쯔까야(Rudniskaia)와 즈야꼬프(D'iakov)는, "파괴의 욕구는 ㅊ조의 욕구"라는 바꾸닌의 경구를 내건 서방 세계의 청년 봉기가 자본주의 기성사회 구조 전반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며 이를 비난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 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의 붕괴를 목도하는 시점에서, 거수기로 전락한 소볘뜨, 일당 독재로 귀착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멘끌라뚜라의 지배,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 체제가 역설적으로 심화시킨 생산의 무정부성과 '국가 자본주의' 등의 문제는 당대의 볼쉐비즘을 포함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바꾸닌주의자들의 비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동유럽 구 사회주의권에서는, 독재와 자유, 중앙집권주의와 연맹주의, 자주관리와 당의 역할 등, 한마디로 사회 재건의 제반 문제로 인하여 바꾸닌 사상이 새롭게 주목받기도 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20세게 유럽의 주변부[러시아, 에스빠냐]나 제3세계[중국, 꾸바]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그 성격상 마르크스적이라기보다는 바꾸닌적이라는 점이다. 즉, 20세기에 있어 사회주의 혁명의 무대는 마르크스주의 주장대로 혁명 조건이 성숙된 구미 자본주의 사회보다는, 바꾸닌이 주목했던 상대적으로 낙후된 사회였다. 아울러 혁명 주도 세력도 마르크스가 강조한 산업 프롤레타리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꾸닌의 주장대로 농민, 실업 대중, 지식인에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경우, Beyme가 지적했듯이, "왜 집산주의적 아나키즘과 유사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 산업 국가에서보다는 러시아에서 더 성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규명이야말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의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과 비슷한 문제 인식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레닌의 경우 1905-1917년에 멘쉐비끼가 수용한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이론보다는 항상 "인민에 대한 신뢰와 이상주의적 활력과 아나키즘적 기조를 지닌 러시아 혁명 전통"에 더 근접하여 있었다는 Anweiler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코민테른이 결성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일부 역사가들과 전투적인 공산주의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오히려 바꾸닌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1920년대에 러시아의 볼세비끼 역사가인 Steklov 및 Polonskii - 물론 이들은 스딸린의 독재권력 강화 과정에서 숙청되었지만 - 등이 바꾸닌을 러시아 혁명과 볼쉐비즘의 선구자로 기꺼이 인정하려고 했다는 점과 이들이 주도한 가운데 1926년 바꾸닌 서거 50주기에 상당한 규모의 기념식이 조직되고 바꾸닌에 관한 많은 연구 논 문들이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그런가하면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하였으며 볼쉐비끼와 대립하게 되었던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자 신들이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르크스의 적인 바꾸닌을 "볼쉐비즘의 선구자(Vorl?ufer des Bolschewimus)"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평가 및 해석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경제 결정론적 성격이 강한 마 르크스주의에 맞서서, 인간의 의지와 실천, 직접행동(l'action directe)에 역점을 둔 바꾸닌 사상에 대한 재음미가 요구되는 바 이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살펴 볼 때, 아나키즘 특히 바꾸닌 사상은 20세기 선진 자본주의 사회[제1세계]와 동유럽 구 사회주의 사회 [제2세계]에 노정된 제문제를 통찰력 있게 예시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주변부 및 아시아-중남미[제3세계]에서의 사회 혁명의 여건과 양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예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바꾸닌 사상이 갖는 현대적 의미는 물론, 역사적 의의조차도 이제까지 연구에서는 대체로 간과되거나 또는 단편적으로만 인정되거나 혹은 부정되어 왔다. 더욱이 그 의 이름은 '어둠의 세력'에서 '파괴의 사도', '거칠은 반항 청년', 심지어 '짜르의 밀정'에 이르기까지 악의에 찬 온갖 불명예스 러운 수식 어구와 결부되어 있는 형편이다. 구 사회주의권에서 나왔던 바꾸닌 관계 저작들도 대부분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바꾸 닌에 대한 가차없는 매도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방적인 매도로는 바꾸닌 사상 및 활동이 지니는 역사적 위치는 물 론 현대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바꾸닌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의 가장 커다란 한계로서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빈약하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따. 이러한 형편들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그의 사상 연구와는 거리가 먼 인물 연구, 일화 소개, 심리 및 정신 분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기류가 기존 연구의 주종을 이루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연구 경향의 원조이며 전형이라고 할 Carr의 연구서는, 바꾸닌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시사를 던져 준 것이 사실이지만, 방대한 자료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 고 바꾸닌 사상에 대한 명쾌한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바꾸닌의 주저인 <<국가주의와 아나키(Gosudarstvennost' i anarkhiia)>>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며 오히려 바꾸닌 활동에 대한 희화화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이후에 나온 전기물에 대체로 답습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이론가나 사상가로서의 바꾸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Carr에 앞서서 이미 Diehl, Masaryk, Polonskii 등이 사상면에서의 바꾸닌의 기여를 부정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자리잡은 데에는 바꾸닌 자신에게서 비롯된 문제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바꾸닌 자신이 이론의 완전성이나 절대성을 부정하고 이론가이기보다는 실천가 이기를 자처했던 탓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자신이 "이론적으로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자부가히도 했던 점에 유념 할 필요가 있다. 사상가로서의 바꾸닌의 독보적 위치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Steklov를 비롯해서 비교적 최근에는 Leval, Saltman 등의 연구서가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Steklov 및 Pyziur는 바꾸닌 사 상 전반에 대한 균형잡힌 분석보다는 특정한 부분만을 부각시켜 이를 볼쉐비즘 및 볼쉐비끼 혁명과 직결시켰다. 특히 Steklov는 바꾸닌을 가리켜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창시자라고 하는, 상당히 무리한 해 석을 시도하였다. Leval의 저서는, 바꾸닌 사상에 대한 주제별 분류를 통한 체계적 이해를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인 연구서라기보다는 사상 선집의 수준에 머문 것이었다. Saltman은, 기존의 연구가 바꾸닌 사상의 형성 요소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프루동의 영향을 거의 무시하고 있으며 바꾸닌이 언급조차 한 바 없었던 라마르크의 영향 을 크게 부각시키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따라서 Saltman의 연구서도 바꾸닌 사상의 이해를 위해 올바른 사상 형성의 계보를 파악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바꾸닌에 대한 기존 연구의 또 한가지 문제점은 그의 사상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가운데 그의 단편적 활 동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1850년대 러시아에서의 수형 생활 중에 바꾸닌이 짜르 니꼴라이 1세 앞으로 써서 제출한 <참회록(Ispoved')>의 성격, 냉혈적인 러시아의 혁명가 녜차예프와의 관계, 슬라브 민족 해방을 위한 다양한 활동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중에서 비교적 중요성을 지닌 것이 마지막 문제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바꾸닌을 러시아 패권주의자나 이와 유사한 범슬라브주의자로 왜곡하였으며, 심지어 Nettlau나 Gu?rin처럼 바꾸닌의 아나키즘에 공감하는 연구자들마저도 슬라 브 민족 해방을 위한 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든지 아나키즘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하는 이해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Venturi, Kohn, Lavrin의 연구에서도 바꾸닌의 활동을 그의 아나키즘 사상과 관련지어 파악하려는 시도는 찾아 볼 수 없다. 이것 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바꾸닌의 아나키즘 사상이 1863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체계가 잡혀 나간다는 점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 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반해 필자는 바꾸닌 사상이 1840년대부터 줄곧 일관성을 유지하며 발전되어 갔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 면 벌써 이때부터 그의 아나키즘의 중심 사상을 이루는 것으로 연대성을 강조하는 그의 독특한 자유관 및 반-국가주의가 나타나 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에 Cahm은 유일하게 이러한 관점에서 바꾸닌의 민족 해방 운동을 다룬 연구 논문을 발표한 바 있 다. 이상과 같은 기존 연구에 대한 검토를 통해 더욱 그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바꾸닌 사상 전반에 대한 체계적 연구라고 하겠 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우선적으로 바꾸닌 사상에 대한 종합적 이해에 있으며 더 나아가 그를 통하여 그 현대적 의미까지도 재조명해 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바꾸닌이 쓴 격문 및 논문, 비밀결사의 강령, 신문 기고문, 서신 등의 내용을 분석하고 그 사상의 변화와 발전을 각 시대 상황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방법을 취하고자 한다. 아울러 자료를 해석함에 있어서 몇가지 유념하 려는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스스로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했던 바꾸닌의 삶에서 저술활동 - 비록 정력적으로 전개되고 방대 한 양의 문헌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 은 부차적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혁명 이후 신질서 수립 의 정연한 이론적 문제를 신세데의 몫으로 돌리고 혁명의 의미를 무엇보다도 기성 질서 파괴에 두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혁명의 구체적 전략과 전술에 집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저술은 여러가지 상황 변화에 따른 선전-선동이라는 매우 특수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어서, 그 형태에 있어서 격문, 강령, 소책자, 편지 등의 대부분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일견하기에는 서로 모순된 내용과 일관성이 결여된 면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료의 이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행간의 진정한 의미를 규명함으로써 바꾸닌 사상에 대한 종합적 이해는 가능하며 그 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리라고 필자 는 믿는다.
Ⅱ. 바꾸닌 사상의 형성 요소
바꾸닌 사상은 어떠한 지적 배경에서 형성되었는가?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은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들과 같은 의견을 교환하였 는가? 자유의 추구에 장애가 되는 기성의 제도와 권위에 대하여 단호한 투쟁을 시도한 그의 아나키즘은 간단히 말해서 반국가적, 반권위적이며 동시에 혁명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특성들이 i) 프루동 사상, ii)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가치 관과 인민의 정서, iii) 독일 관념론 철학, 특히 헤겔과 피히테의 사상에서 연유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세가지 요소에 대 한 고찰을 통하여 바꾸닌 사상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우선 바꾸닌의 사상에 기본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프루동이었다.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를 주된 활동 무대로 삼 으며 여기에서 마르크스와 대립하던 바꾸닌은 자신의 노선을 "폭넓게 발전되고 최종 결론에 이른 프루동주의"로 요약 한 바 있다. 이러한 규정은 그의 지지 기반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제1인터내셔널 내에서 바꾸닌은 대부분이 프랑스인, 벨기에 인, 이딸리아인, 에스빠냐인으로 구성된 연합 세력을 이끌었다. 프랑스, 벨기에, 프랑스어권 쉬스에서 바꾸닌은 프루동의 계승자 로 간주되었으며, 수백만 에스빠냐 사람들에게 바꾸닌의 메시지가 계시와 같은 충격을 준 것도 그가 프루동의 전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프루동의 광기"가 "바꾸닌에 의해 확산"되었다고 하였으며, 쁠레하노프는 바꾸닌을 가리켜 "가증스런 공산주의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까지 뒤섞인 프루동주의자"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밀접한 지적 연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Gu?rin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프루동과 바꾸닌 사이에 유의해야 할 몇가 지 차이점이 주목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출신 계급이 판이하다. 프루동이 프랑스 농촌 태생의 노동자 출신인데 반하 여 바꾸닌은 러시아 토지 구족 출신의 인텔리겐챠다. 그렇다면 러시아 귀족이 프랑스 노동자 출신 사상가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 었던 심리적, 정신적 기반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19세기 러시아의 인텔리겐챠가 갖는 독특한 가치관관 인민의 정서 속에서 실마 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러시아 정신사 속에 배태된 인민 예찬과 권력국가 배격의 논리를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양 자 간의 단절을 보여주는 측면, 즉 바꾸닌이 프루동을 극복한 측면도 없지 않다. 바꾸닌은 특히 자본주의 하의 사유재산제에 대 한 비판적이면서도 장인층의 생산 도구 소유를 전제로 한 프루동의 상조론(mutuellisme)을 배격하고 집산주의(collectivisme)를 내세우며 오히려 프루동의 옛 추종세력을 흡수할 수 있었던 점도 러시아 사상 속에서 어느 정도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다 음으로 러시아의 농민반란 전통을 중시한 바꾸닌은, 만년에 보수 성향으로 기운 프루동과는 대조적으로, 사회혁명의 기폭제로서 의 민중봉기에 시종 강한 집착을 보였다. 집산주의와 민중봉기에 대한 집념은 러시아 인민에 대한 예찬과 이상화 속에서 태동하 였다.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은, Miller가 주장하였듯이, "러시아의 인민주의와 유럽 아나키즘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바꾸닌 사상의 형성에서 독일의 관념론 철학, 특히 피히테와 헤겔의 사상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세기 러시아 인텔 리겐챠의 사상 형성에 끼친 독일 철학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바꾸닌도 예외일 수 없었다. 바꾸닌은 피히테를 통하여 자유의지 의 관념을 다듬었으며, 헤겔로부터는 현실의 모든 기존 권위를 부정하는 변증법적인 혁명 논리를 발전시켰다. Lichtheim에 따르 면, "1865년 프루동의 죽음이 그의 프랑스인 추종자들을 고아로 만들었을 때 바꾸닌이 프루동의 외투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 기반은 "바꾸닌이 1836-42년에 피히테, 헤겔을 읽음으로써 얻게 된 하나의 철학 내지는 세계관"이었다. 바로 이것이 훗날 바꾸닌의 추종자들이 "libertarianism"으로 불렀던 것이다.
A. 프루동 사상의 영향
바꾸닌 사상에 나타나고 있는 프루동의 영향은 i) 노동자주의(ouvri?risme) 내지는 노동자 중심적 관점, ii) 반국가주의, iii) 경제적 연맹주의(f?d?ralisme)로 요약될 수 있다. 바꾸닌은 1848-51년의 혁명기에 집필된 프루동의 저작, 특히 <한 혁명가의 고백>(Les confessions d'un r?volutionnaire)과 <19세기 혁명의 일반 이념>(L'id?e g?n?ral de la r?volution au ⅩⅨe si?cle)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정치적 국가의 철폐"와 "경제적 연맹에 의한 사회의 조직화" 즉, 반국가주의와 경제적 연맹주의가 두 저작의 중심 사상이라고 파악하였다. 프 루동에 있어서 이 두가지는 바로 노동자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노동자주의란 노동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지식인의 지도와 후견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결정하며 이를 직접행동(l'action directe)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조 직해 나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프루동 및 노동자주의의 관점에서, 국가란 노동을 착취하는 유산 계급의 지배 도구이 기 때문에 노동자의 의사에 반하여 그 권위와 지배 의지를 강요하는 적대 세력을 의미하며, 또한 노동자들의 자율적 활동에 따른 사회 조직 원리인 연맹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반국가주의는 연맹주의와 아울러 노동자주의 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 세가지는 바꾸닌이 인터내셔널에서 프루동주의의 이름으로 표방했던 노선의 기본원리인 것이다. 그러면 바꾸닌에 있어서 노 동자주의는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그는 인터내셔널의 노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일상적 노동으로 탈진한, 무식하고 비참한 노동 대중이다. 그들은, 여하한 의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편견으로 자신의 양심을 얼룩지게 하거나 부분적으로 지배한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인 사회주의자 "(socialiste sans le savoir)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능의 밑바닥에서부터 그리고 그들이 처한 입장 때문에, 그렇지 못한 과학적 사회주의자들 및 부르조아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진지하고 훨씬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것이다.
바꾸닌이 볼 때, 노동 대중에게 굳이 결여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사상일 뿐인데 그들은 이미 그들 자신의 물질적 존재 조건에 의해서 사회주의자였던 것이다. 반면에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은 단지 자신들의 사상적 필요 때문에 사회주의자였던 것이 다. 바꾸닌에 따르면, 존재의 필요는 항상 사상의 필요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행사하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사상이란 주로 존 재의 표현이며 그 후속적 발전의 반영에 불과하며 결코 그 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들이 처한 참담한 존재 조건을 극 복하려는 모든 진지한 노동자야말로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선 표명은 특히 인터내셔널의 총무위원회(General Council)를 장악하고 있던 마르크스파에게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사 실 바꾸닌은 비공개적으로 프루동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꾸닌으로서는 최대의 경쟁 세력 인 마르크스파를 권위적 사회주의자, 국가사회주의자, 지식인 사회주의자로 매도하며 이를 통해 한편으로 프랑스, 쉬스, 이딸리 아, 에스빠냐 회원들을 규합하기에는 노동자주의에 입각한 프루동 사상이 가장 편리한 도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프루동의 노동자주의는 어떻게 태동하였으며 발전하여 갔는가? 우선 그 자신이 프랑스 농촌 태생의 노동자(인쇄공) 출신 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 형성 과정에서 리용 지역 견직공들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1831년과 1934년 봉기 에 참가한 투사들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모임이 중간계급의 지식인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 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에 프루동은 더욱 일체감을 갖게 되었다. 프루동은 사회주의자 지식인들이 노동계급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현실적이고 권위적인 주장들을 비판하고, 사상의 독자적인 표현과 조직에 대한 노동계급의 내재적 역량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노동운동이 "초월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이를 노동계급 내부의 것으로 대체하는 "내재성의 철학(la philosophie de l'immanence)"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회 이론은 "프랑스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 노동자의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숙련 노 동자인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산업화로 인하여 오히려 새로이 나타나는 공장 노동자들보다 더 커다란 상대적 박탈감을 맛본 계층 이었다. 프랑스 노동운동은 이러한 도시 숙련 노동자들의 창안이며,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도 그들의 진정한 사회 경험과 열망에 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루동 사상도 똑같은 근본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여러가지 동일한 희 망과 이상을 공유하였던 것이다. 바꾸닌은 1844년 빠리에서 프루동과 차를 수없이 마셔가며 온 밤을 지새우는 동안 태동하고 있 는 노동자 운동에 대한 통찰력을 갖추게 되었다.
프루동에게 특히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은 1828년 견직업의 작업반장들(chefs d'atlier)에 의해 창립된 '리용 상조회'(la Soci?t? de Devoir mutuel)였다. 작업반장들은 분명히 임금생활자에 속하나, 전문기술자로서 작업장의 운영과 조직에 대하 여 일정한 권한을 지니기 때문에 공장주의 권능에 맞서 일정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전적으로 외적 의지에 종속되 거나 소외되지는 않았다. 이들이 원한 조직도 국가와 공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발전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이들은 정치 권력으 로부터 비롯되는 질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회 혁명 내지는 이들의 표현대로 '해방과 쇄신'의 도정에 들어서려 했다. 그러 한 의미에서 이들은 상조회를 결성한 1828년 6월 28일을 '재생 원년'(an I de la R?g?n?ration)의 제1일로 삼았 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집단 심성을 프루동도 공유했던 것이다.
1840년대에 프루동이 자신의 사상을 특징짓고자 'anarchie'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되풀이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즉, 노동계급에게 예속을 뜻하는 모든 세속적 전통과 결벌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바꾸닌은 이러한 프루동을 가리켜 "혁명 가의 진정한 본능"을 지녔으며 "합리적인 부정에 있어서 가공할 힘을 지닌 위대한 혁명적 이론가"라고 평한 바 있다. 프루동의 노동자주의는 기성 권위에 대한 평가절하와 신성모독을 수반한다. 즉 반권위주의적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가 및 종교에 대한 부정은 노동계급에 가해지는 특권 계급과 그 제도의 압박을 제거하고, 여기에 노동계급의 제가치를 대립시 키고자 하는 것이다. 기성 종교에 대한 비판은 노동계급을 전통적인 제가치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것이며, 국가에 대한 비난은 권 력이 주도하는 것에 대한 노동계급의 저항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특히 국가에 대한 부정은 노동계급에게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권 리, 즉 외적 권위 또는 프루동 자신의 표현대로 "초월적" 권력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판의 결론은 단순히 정치 형태의 수정일 수 없으며, 오직 사호, 경제 관계의 근본 변혁일 뿐이다. 혁명은 새로운 국가 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파괴 내지는 정치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프루동은 루이 블랑, 까베, 블랑끼 등과 대립하면서, 혁명이란 경제적 재조직 속에서 모색되어야 하며 정치 제도의 개혁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루동의 이러한 주장은 리용 노동자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리용 노동자들의 1789년 및 1830년 혁명의 경험 에서 얻은 교훈은 정치적 혁명만으로는 권력의 원천만 바뀔 뿐이라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해결할 문제는 새로운 영역에서 제기되 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즉 확실한 혁명은 정치적 봉기나 유산계급과의 공모가 아니라, 생활조건의 향상을 위한 조직적 행위로서 생산자들 자신이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바꾸닌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노동자들은 부르조아지와 부르조아 사회주의자들의 유혹의 소리에 홀려 탈선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경제해 방이라는 이 중대한 문제에 자신들의 노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경제해방은 다른 모든 해방의 원천이어야 한다. 인민에게 주된 문 제는 그들의 경제적 해방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해방을 야기하며, 그 뒤를 이어 사상적, 도덕적 해방을 야기한다.
여기에서 노동자주의의 특징인 비정치성(apolitisme)이 드러난다. 이러한 입장은 리용 지역을 비롯한 프랑스 숙련 노동자들로부 터 프루동과 바꾸닌을 거쳐 19세기 말 생디깔리슴의 노선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Kiegel은 생디깔리슴 운동 속으로 프루동 사상이 스며들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사상적 계보는 그를 스승으로 삼는 다른 사상가들의 매개 역할을 통해 계승되었고 그 대표적인 예로 바꾸닌을 거명하였다.
또한 리용 상조회의 창립규약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토론을 금지시켰다. 아울러 리용 상조회의 역사는 다양한 의견에 대한 관용 을 보여주면서도 정치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요소가 프루동 사상과 그 지지세력의 주장을 통 하여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 정신과 바꾸닌 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 점은 바꾸닌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서 극명하게 드러 난다.
인터내셔널의 창립자들은 ... 그 강령에서 모든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처음부터 배제함으로써 매우 현명 하게 행동하였다. 물론 그들 자신에게 정치적 견해나 명쾌한 반종교적 견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령 속에서 이에 대한 표명을 자제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된 목표가 문명세계의 모든 노동 대중을 하나의 공동 행위 속에 규합하는 것이 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미몽 속에 있건 간에 이와 상관없이 스스로 진지한 노동자, 즉 지속적으 로 착취당하고 고통받아온 사람들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든 노동자들이 동의하고 또한 동의해야 하는 하나의 공통 기반, 간명 한 일련의 원리를 반드시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후일 바꾸닌이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제시한 혁명 노선에 다시 나타났다. 물론 바꾸닌 자신은 철두철미한 무신 론자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민들로 하여금 종교 문제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인민의 대의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바꾸닌에 따르면, 교회는 "일종의 하늘나라 선술집(rod nebesnogo kabaka)"인 것이었다. 교회에서 인민은 선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소한 잠시만이라도 굶주림과 박해와 굴욕을 잊어 버리며, 한쪽에서는 신앙으로써 또 다른 쪽 에서는 술로써 자신들의 일상적 고난의 기억을 진정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의 종교성은 소위 자유사상가들의 추 상적이고 공론적인 선전에 의해 일소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사회 혁명에 의해 일소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여타의 모든 문제 들보다도 그 해결에 그들의 해방이 가장 크게 달려 있는 중대한 문제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그들이 처한 바로 그 상황, 그들의 존재 전체에 의해서 제시된다. 그것은 경제적이며 역설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다. 그것은 사회 혁명이라는 의미에서 경제적이며, 국가 파괴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이었던 것이다.
프루동과 바꾸닌은 모두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을 중시하였다. 두 사람 모두 대중의 각성을 위하여 소수 사상가나 선전 조직 이 개입하는 불가피한 경우를 인정했지만 그로부터 어떠한 권위도 대중에게 강제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프루동이 1848년 혁명 기에 되풀이하여 주장하였듯이 아나키즘 사회는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그리고 "대중 주도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바꾸닌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처럼 혁명 주체의 문제에서 표출된 노동자주의는 한편으로 국가사회주의 내지는 권위적 사회주의의 제경향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권위적 사회주의자들은 마치 후견권을 갖고 노동을 조직화하려는 허세를 부리기 때문이었다. 즉 생산자들을 새로운 외적 속박에 종속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관리업무는 노동자에게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과 기업가에 맡겨지는 것이 다. 이렇게 이해된 이성이나 과학은 새로운 전제정을 수립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 속에 뿌리를 두지 않아서 이들을 이해하지 못 하는 지식인들, 특히 유토피아 사상가들이 프루동으로부터 경멸받은 것도 그들의 제안에 통제와 권위에 대한 찬양의 요소가 있었 기 때문이다. 바꾸닌은 프루동과 여타의 사회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규제는 1848년 이전에 오직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공통된 열망이었다. 까베 , 루이 블랑, 푸리에주의자, 생시몽주의자는 하나같이 미래에 대하여 교조적 이론을 내세우거나 조직화하려 하였다. ... 그러나 여기에 프루동이 나타난다. 그는 농민의 아들이다. 이러한 사실로 해서,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는 이러한 모든 교조적, 부르조아 적 사회주의자들보다 백배나 더 혁명적이었다. ... 이 모든 국가사회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그는 권위에 자유를 대립시키면서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대담하게 선언하였던 것이다.
프루동은 이성이란 "초월적 지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집단적 이성"을 실현하는 생산자들 자신 의 만남 속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그대로 본받은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그토록 많은 어설픈 시도에다 아직도 자기들의 노력을 더하는 척하는 모든 박 사들과 인류의 선생들의 심오한 지성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인민 대중의 본능적 열망과 진정한 욕구 속에 훨씬 더 많은 실천적 이성과 정신이 있다.
여기에서 노동자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인 지식인 불신이 나타나는데 이는 또 다른 특징인 비정치성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노 동 계급은 궁극적으로 국가 체제를 인정하는 정당 활동, 선거 참여, 정부 참여를 배격해야 하는데 특히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이러한 활동을 노동 계급에 권고하였기 때문에 불신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프루동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란 노동에 대한 착취 계급의 지배 도구이며, 노동 계급에게는 그들의 주체적 삶과는 양립될 수 없 는 대표적인 소외 현상이었다. 우선 "정치체제는 예나 지금이나 경제조직의 반영"이라는 것이 프루동의 지론이었다. 재산의 원리는 그 자체가 권위의 원리로서 가진 자에 대한 못 가진 자의 예속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원리가 전반적으로 발전되는 것은 자본주의 아래서다. 재산의 집중과 이로부터 야기되는 노자 대립은 노동자들에 대항하는 유산가들의 동맹과 점증하는 계급 불평등을 가져오며 또한 그로부터 비롯되는 강제적인 물리력의 법제화를 초래한다. 즉 자본주의의 혼란 상태는 사회적 갈등을 억누르는 강제를 필요로 한다. 특히 루이 필립 통치 하의 국가는 노동자들에게 적대하는 부르조아 동맹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본주의 국가의 전제정은 경제, 사회적 기반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문제는 권력과 독점을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는 바꾸닌의 국가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꾸닌은 국가를 "모든 경제적, 사회적 노예화의 정치적 이 유" 또는 "대중에 대한 유산 계급의 조직된 권위와 지배와 힘"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또한 국가 파괴에 관한 저 서의 집필을 구상하면서 바꾸닌은 무엇보다도 프루동의 저작을 참조하고 있다고 동료인 게르샬과 오가료프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밝힌 바 있다. 바꾸닌은 자신의 주저인 <<국가주의와 아나키>>(Gosudarstvennost' i anarkhiia)에서 지배 계급의 도 구로서의 국가의 착취적, 폭력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최근의 자본주의 생산과 금융 투기는, 그 자신의 최대 발전과 완벽한 발전을 위해, 이러한 거대한 국가적 중앙집권화를 요구한다. 오직 이것만이 수백만의 근로 인민 대중을 착취할 수 있다.
인민의 욕망과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소유 계급 및 지배 계급으로서는 결정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남게 되는 유 일한 방도는 국가적 폭력, 한마디로 국가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폭력을 지니며 또한 폭력을 의미하며 폭력으로써 지배하기 때문 이다.
그러면 바꾸닌과 프루동의 국가관에서 어떻게 연맹주의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 있는가? 프루동에 따르면 국가의 필연적 운동이란 흡수 운동 즉, 모든 형태의 자치, 자율에 대한 파괴 운동이다. 이러한 "국가의 속성은 개인적, 협동적, 꼬뮌적, 사회적 주 도권을 희생시켜서 끊임없이 확대된다." 국가는 자율적 노동과 자유를 부단히 노리는 "함정"에 비유된다. 따라서 국가는 철폐되어야 하고 정치는 종식되어야 하며, 각 생산자 및 생산집단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연맹주의 원리에 따라 사회는 조직되어야 한다.
바꾸닌의 지적대로, "개인적, 집합적 자유와 자유로운 결사의 자발적 활동에 기초한 그(프루동)의 사회주의는 ... 정치를 사회의 경제적, 사상적, 도덕적 이해관계 밑에 두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연맹주의로 귀결되는 것"이다. 프루동의 연맹주의는 직종별 노동조직과 각 지역단위 자치체를 근간으로 한 사회 조직 원리이다(Vincent는 이것을 직종별 연맹주의와 지역별 연맹주의의 결합이라고 본다).
또한 바꾸닌이 용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민주주의 형태도 생산자들의 자치정부에다 국민국가를 지역 자치 단위로 분할하는 형식 을 가미한 것이다. 따라서 Gu?rin은 바꾸닌이 프루동의 연맹주의 사상을 단지 발전시키고 보강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Pyziur에 따르면, 바꾸닌은 프루동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 1848년 3월 혁명기에 이미 슬라브 민족 해방운동과 관련하여 지역별 연맹주의에 대해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꾸닌은 프루동 연맹주의의 어느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는가? 그것은 프루동의 직종별 연맹주의였다. 사실상 이것은 프루동의 초기 주장에 속한다. 프루동은 1850-60년대에 지역별 연맹주의를 주장했으나 이에 앞서 1848년에 직종별 연맹주의를 제 시한 바 있다. 직종별 연대주의는 바꾸닌의 표현에 의하면 "경제적 연맹에 따른 사회의 조직화" 내지는 "노동 조 직에 대한 연맹주의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민주적으로 조직된 작업장들과 산업체들이 전국적 차원에서 "직종별, 산업별로 연맹하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 연맹은 각 집단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각 집단 간의 관계는 계약에 근거한 것으로 상호 협력의 요구에 부응하 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 행위로써 각 생산집단은 일정 기간 자신들의 자유를 일부 유보하는 듯하면서도 자신들의 자율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각 집단들은 전체적으로 총회를 조직하여 공공 토목공사, 공중 보건, 사법제도 운영 등 전국적 차원의 문제 를 다룬다. 이러한 가운데 각 생산집단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율성과 자유를 유지하면서 연맹주의라는 모델 속에서 국가에 의한 궁극적 흡수에 맞서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장은 바꾸닌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훗날 생디깔리슴이 지향하는 사회조직론의 주요 내용을 이루게 된다.
B.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인민의 정서
두번째로 바꾸닌의 아나키즘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러시아의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인민의 정서에서 오는 영향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i) 인민 예찬, ii) 권력 국가의 배격, iii) 집단적 소유 내지는 공유제에 대한 신봉, iv) 농민 봉기의 심성과 전통 등으로 요약된다. 이 중에서 i)이 순수하게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관련된 것이라면 iv)은 거의 전적으로 인민의 정서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ii)와 iii)은 양쪽에 공통된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바꾸닌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일원으로서 공유한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하는 것과 아울러 바꾸닌은 어떠한 점에서 동시대의 인텔리겐챠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 성향을 지녔는지 하는 것이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
인민 예찬은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이상으로서 그들의 독특한 사회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향유하는 문화가 비참하게 살아 가는 인민의 노동과 희생의 대가로 이룩된 것임을 자각하는 무거운 책임 의식 같은 것이었다. 바꾸닌이 청장년기를 보낸 1840년대의 러시아 인텔리겐챠들은 대체로 귀족 출신이었는데, Berdyaev에 따르면 이 시대에 인텔리겐챠나 토지귀족의 일원임을 자각하는 것은 인민에 대한 죄의식이며 의무감을 의미하였따. 즉, '참회하는 귀족'은 자신들의 기생적 성격을 자각하고 반성하는 데서 비롯된 독특한 러시아적 현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Berdyaev는 농노제의 불의에 마음의 상처를 받고 고뇌하였다고 최초로 표명한 라지시체프의 글 <뻬쩨르부르그에서 모스끄바로의 여행(1790)>에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탄생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바꾸닌은 유럽에서 혁명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후 러시아로 압송되어 수형 생활을 하며 짜르 니꼴라이 1세에게 제출해야 했던 <참회록>(Ispoved')에서 인텔리겐챠로서의 고뇌와 인민에 대한 신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저는 이른바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평범한 인민, 선량한 러시아인, 모든 이로부터 억압받는 농부가 현재 처한 불행한 상황에 가장 놀랐으며 괴로와하였습니다. 저는 다른 어떠한 계급보다도 더 크게, 그리고 범용하고 방탕한 러시아 귀족 계급보다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게 그들에게 공감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갱생의 모든 희망을, 러시아의 위대한 미래에 대한 모든 믿음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저는 신선함, 위대한 영혼, 외국의 부패함에 감염되지 않은 빛나는 지혜, 그리고 러시아의 힘을 보았습니다.
인텔리겐챠에게는 인민이 핍박받는 속에서도 보여 주는 생명력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바꾸닌은 1845년 빠리의 급진적인 언론지인 <라 레포름 La R?forme>지에 게재한 공개 서한에서, 러시아 인민이 "결코 부패되지 않았으며, 단지 불행할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들의 "반쯤 야만적인 성격" 속에는 "무엇인가 활력적이고도 원대한 것"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인텔리겐챠는 인민 속에 진정한 사람의 비밀, 교육받은 지배계급에게는 은폐된 비밀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었다. 슬라브주의자, 도스또예프스끼, 똘스또이는 인민 속에 종교적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한편 비종교적이거나 종종 반종교적인 게르샬, 바꾸닌 등은 인민 속에 사회적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바꾸닌에 따르면, 러시아 인민은 혹독한 노예제와 온갖 충격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민주적인 본능과 자세"를 지닌 존재였다.
이러한 인민에 대한 절대적 신봉, 진리와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인민에 대한 예찬이 바로 러시아 인민주의의 토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민이 의미하는 것은 동포에 대한 착취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근로 인민, 특히 노동계급과 농민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비종교적이고 혁명적인 인민주의자 뿐만 아니라, 슬라브주의자와 도스또예프스끼 및 똘스또이 같은 종교적 인민주의자까지도 인식을 같이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프루동이 프랑스 노동계급을 '보편계급'이라고 도덕적으로 이상화한 점과 흡사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이러한 가치관을 공유한 바꾸닌으로서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의 노동자주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즉 러시아 인민주의는 인민의 대다수인 '농민에 관한 이념'이지 농민에 의해 형성된 이념이 아니며, 또한 농민 속에 뿌리를 내린 이념도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최근의 연구에서 Hughes는, 슬라브주의자들의 농노제에 대한 반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전기 작가들이 언급하는 지주인 슬라브주의자들과 농노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완전히 감상적 허구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는 바꾸닌이 여느 인텔리겐챠와 크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Carr의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다. 바꾸닌은 1862년 런던에서 <인민의 대의: 로마노프, 뿌가쵸프 또는 뻬스샹리?>(Narod- noe delo: Romanov, Pugachev ili Pestel?)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러시아 농노 출신의 망명객 마르쨔노프의 영향을 받아 쓰여진 것이다. 바꾸닌 같은 지식인이 어떻게 무식한 농민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그의 동료인 게르샬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게르샬이 러시아 인민을 이상화하였지만, 자신의 사상을 한 농노로부터 빌려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상화한 마르크스가 한 직공으로부터 자신의 사상을 차용하는 것과 같았다. 오직 계급 차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았던 바꾸닌만이 농노 출신의 마르쨔노프와 스스럼 없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이 자신을 인민에 일치시키고 인민 정서에 될수록 공감하려는 자세는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 속에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프루동처럼 지식인의 후견과 권위를 부정하는 노동자주의에 심정적으로도 공감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프루동의 노동자주의가 반국가주의로 귀결되듯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인민예찬은 권력국가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났다. 슬라브주의자들, 좌파 인민주의자들, 인텔리겐챠에게 국가는 인민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인민의 몸 속에 붙어 있는 기생충이었다. 이들에게 광대한 국가나 제국은 인민에 대한 배신이며 러시아적 이념의 왜곡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아나키즘적 요소는 19세기 러시아의 여러 사회사조 속에서도 나타난다. 러시아 인텔리겐챠 중에서 국가를 좋아한 사람은 거의 없으며 국가를 스스로의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성향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레온찌예프마저도 권력국가에 대한 러시아적 이론은 오히려 따따르-독일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러시아 인민이나 슬라브인의 세계는 본래 무정부적인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진단은 바꾸닌도 이미 내린 바 있다. 그는 "따따르-독일적 멍에와 슬라브의 위대한 자유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며, "슬라브인들이 스스로 발전하도록 방치되었더라면 결코 국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바꾸닌은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은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전체 러시아 제국의 형성의 역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여기에 참여했던 것은 따따르의 압제, 비잔틴의 축복[종교], 독일적인 행정-군사-경찰의 계몽주의 등이다. 불쌍한 대러시아 인민과 그 다음에 제국에 합병된 소러시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인민들이 제국 창건에 단지 그 배후에서 참여했었다. 따라서 슬라브인들이 결코 스스로 앞장서서 그들 자신의 국가를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슬라브인들은 주로 평화적인 농경 종족이다. 이들은 게르만 제종족이 고취시키는 호전적인 정신에 생소하며, 따라서 일찌기 게르만족들에게서 나타나는 국가주의적 열망에도 생소하였던 것이다. ... 공동체들 사이에 영속적인 정치적 유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외족의 침입 같은 공통된 위험이 닥쳐올 때는 임시적인 방위 동맹이 결성되었다. 위험이 지나가면 이내 정치적 통합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요컨대 슬라브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바꾸닌에게 있어 국가란 무엇보다도 독일적 - 나중에는 마르크스주의까지 포함한 - 영향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슬라브인의 정서와는 합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들은 어느 정도 과장된 것으로 러시아의 역사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인은 한편으로 전제국가의 형성을 온순하게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인의 심성에는 대제국 형성에 대한 수동적 동의가 내재되어 있었다. 바꾸닌도 이 점을 시인하였는데, 특히 뾰뜨르 대제 시대에 "인민의 본능"은 "위대한 미래에 대한 예감으로 자극받고 있어서 규율과 통일과 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로부터 도피하고 대항하려는 성향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바꾸닌은 뾰뜨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1세까지의 시대를 인민에게 "강제된 지속적인 폭력의 역사"라고 하였으며, "인민은 이에 예속"되어 "인민 스스로 현명한 척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그들의 내면적 본성은 이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Berdyaev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그들'이라고 하면 국가, 제국, 권위를 말했으며, '우리'라고 하면 인텔리겐챠, 사회, 인민, 해방운동을 의미하였다. 즉 국가는 '그들'이었으며 '타인들'이었다. 러시아인이 말하는 '우리'는 모든 국가로부터 낯선 별개의 차원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러시아인의 이러한 부정적 국가관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배태된 것인가? 이러한 국가관 형성의 주요 계기는 1660년대에 시작된 교회 분열과 1700년대부터 본격화된 뾰뜨르 대제의 개혁이었다. 정교회 분리파 내지는 정통신앙 고수파(staroobriadtsy)에 아나키즘 성향이 존재하였다. 1660년대 교회분열의 근저에는 '제3의 로마'로서의 러시아 제국이 진정한 정교의 나라인가에 대한 의혹이 깔려 있다. 본래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신앙만이 정교이며 참된 신앙이었다. 참된 신앙은 참된 국가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야말로 참된 국가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참된 제국은 지상에 이미 그림자도 없었다. 1660년대부터 러시아에는 적그리스도의 지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참된 제국은 공간적으로는 지하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었고, 시간적으로는 묵시론적으로 채색된 미래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교제국은 지하로 들어갔다. 참된 왕국은 어떤 호수의 밑바닥에서 발견될 도시 '끼쩨쉬'(Kitezh)였던 것이다.
분리파의 입장에서, 국가로부터의 이탈은 국가에는 진리도 정의도 없다는 주장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국가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였다. 따라서 국가는 신국, 그리스도의 나라에 반역하여 세운 케사르의 국가였다. 이러한 관점이 19세기 인텔리겐챠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 똘스또이, 호먀꼬프는 모두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바꾸닌도 이 문제에 대하여 대동소이한 견해를 지녔다. 그는 분리 종파(religioznye sekty)의 반국가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땅을 갈거나 수렵, 어로에 종사하는 러시아 인민, 농민, 이른바 서민(chernyi narod)은 200여개의 분리 종파로 갈라져 있는데 모두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의 질서를 거부하고 짜르의 권력을 적그리스도의 권력으로 간주하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모스끄바 정부가 이미 1660년대에 교회 분열로 인민의 의식 속에 종교적 회의를 낳게 하였다면, 이 회의는 뾰뜨르 대제 시대에 와서 더욱 굳어졌다. 뾰뜨르는 적그리스도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정교의 정신 토양에서 형성된 문화 유형을 신봉하는 슬라브파의 입장에서 뾰뜨르의 서구화 개혁은 러시아에 대한 배반이었따. 뾰뜨르 대제의 개혁으로 유럽화한 일부 러시아인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식민주의자'가 되었으며 반면에 인텔리겐챠는 이후 더욱 소외되었다. 뻬쩨르부르그 제국에 대한 모스끄바의 오랜 원한은 슬라브주의자인 꼰스딴찐 악사꼬프를 통해서 표출되었다. 그는 뾰뜨르 대제의 개혁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인민 공동체와 도덕의 이름으로 국가주의와 법치주의를 부정하였다. 악사꼬프는, 마지못해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수를 줄임으로써 이른바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취지에서 기묘하게도 독재군주정을 옹호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꾸닌이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되도록 자극을 준 최초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1867년의 한 서신에서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미 그 당시[1830년대 말]에도 꼰스딴찐 세르게비치[악사꼬프]와 그 친우들은 뻬쩨르부르그 국가와 국가 일반에 대한 적이었으며, 이러한 태도 속에서 그는 이미 우리를 예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슬라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바꾸닌은 뾰뜨르를 "러시아 인민의 대박해자"로 규정하고 뾰뜨르의 개혁과 그가 건설한 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러시아 국가는 인민에게 "소외감"을 더욱 심화시켰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인민에게 비인간적 외래 문명이 강요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정복국가를 지향하면서 "인민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정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인민에게 강제된 유럽 문명은 주로 "독일"의 것이었는데, 바꾸닌에 따르면, "그 당시 독일에서는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법들에 무관심"하였으며 자국 "인민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이 그들을 팔아 넘기고 감정도 없는 물건인 양 흥정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한 뾰뜨르는 러시아를 "외국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기계"로 만들었으며, 그것이 "대외적으로 한층 확대될수록 대내적으로는 자국 인민에게 한층 생소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정복 지향적인 기계적 국가는 자국 인민의 "삶의 근본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정부에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양의 병사와 돈을 제공하는 기계" 즉 "정복 기계"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자국 인민을 피정복민처럼 냉대하며, 대외적으로 그렇듯이 대내적으로도 억압적인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의 국경이 한층 확장될수록 돈과 병사가 한층 더 요구되었으며, 그럴수록 정부는 한층 더 억압적으로 되었던 것"것이다. 1840년대 말에 행해진 러시아 국가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후일 바꾸닌의 아나키즘의 기저를 이루는 반국가주의와 특히 1870년대 독일 군국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슬라브주의자들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한 사람으로서 바꾸닌이 보여준 인민 예찬과 권력국가 배격의 논리에는 프루동의 노동자주의 및 반국가주의와 쉽사리 결합될 수 있는 친화성이 있었다. 그러나 바꾸닌은 이상적인 재산 소유 형태에 대하여 프루동과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였다. 바꾸닌은 자타가 인정하는 프루동의 후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산업 운용에 있어서 집산주의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옛 스승과는 달랐다. 그는 노동과 과학의 전분야에 걸친 협동적인 사회조직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서 "모든 자본과 노동 용구가 토지까지 포함해서 집단적 소유의 이름으로 노동에 귀속"되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에 비해 프루동은 생산도구를 개별적으로 소유한 장인들의 협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Lichtheim에 따르면, 그 이유는 바꾸닌이 게르샬과 공유하였던 촌라 공동체에 대한 애정 탓에 집합체도 존립의 권리를 갖는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Lichtheim의 견해는 바꾸닌이 표명한 집산주의에서 그 러시아적 기원을 지적한 것이다.
인텔리겐챠에게 러시아 촌락 공동체가 갖는 의미는 서유럽의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바꾸닌은 자신의 <참회록>에서 서유럽 사회에 팽배한 이기주의를 신랄히 비판한 바 있는데 이는 니꼴라이 1세마저도 "경탄할 진실"이라는 메모를 여백에 남길 정도로 러시아인 대부분이 공감하는 문제였다. 또한 그의 동료인 게르샬은 서유럽 사회주의와 노동자들 속에서까지 부르조아 정신이 승리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본 서유럽 노동자는 '부르조아 무산자'였다. 부르조아지를 움직이는 것이 '탐욕'이라면,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질시'였던 것이다. 게르샬은 이러한 세상을 구할 사람이란 러시아 농민이라고 믿었으며, 부르조아화한 유럽인에게서보다는 농노제 하의 계몽되지 못한 러시아 농민에게서 더 위대한 인격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러시아의 촌락 자치체나 경제적 후진성에서 구원을 찾았으며, 따라서 서유럽보다는 러시아에서 더 용이하게 사회주의가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었다. 게르샬은 이러한 러시아 사회주의의 개념을 발전시켜가던 1847년에 바꾸닌을 다시 빠리에서 만났다. 이러한 만남에서 바꾸닌은 서유럽주의자였던 게르샬의 사상적 변화를 느끼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슬라브주의자들도 서유럽의 부르조아 자본주의 문명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서유럽 사회의 부패 원인이 부르조아 문명과 이로 인한 사람의 통일성의 훼손에 있다고 보았다. 악사꼬프는 이와 대비하여 러시아 인민 공동체에서 이기주의와 독선이 배제된 개성이 자유롭게 발현되는 이른바 '합창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슬라브주의자들은 게르샬 유형의 인민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특유의 유기적인 경제 생활구조로 파악하였던 촌락 공동체의 옹호자였다. 바꾸닌의 경우, 비록 공동체의 가부장제가 지닌 권위주의에는 비판적이었지만, 그 역시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였다. 그에 따르면, 슬라브인들은 안으로는 "촌로들이 주도하되 선출제에 입각한 가부장제 관습에 따라 다스려지는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밖으로는 "국가에 대한 단호한 대립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의 거의 절대적인 자치" 속에서 "인간적인 형제애의 관념"을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구현하면서 "모두 평등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촌락공동체에서 바꾸닌이 무엇보다도 주목했던 것은 바로 토지 공유제(obshchinnyi uklad)였다. 토지는 공동체에 속한 것이며, 개개 농민은 단지 그에 대한 용익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용익권도 근원적으로는 토지를 개인에게 한시적으로 분배하는 공동체에 속한 것이다. 토지 재분배는 20-25년마다 실시된다. 상속권은 동산에서만 존재하며 토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바꾸닌은 슬라브인들이 공동체 속에서 "모두 동일하게 공유지를 활용하여 사는 가운데 귀족계급을 갖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토지는 그것을 땀으로 적시고 자기 손의 노동으로 비옥하게 하는 인민에 속한다는 전인민적 확신"이야말로 러시아 인민의 이상의 기반을 이룬다고 바꾸닌은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후일 "땅은 그 모든 부대 자원과 아울러 모든 사람의 소유이나, 그것을 경작할 사람들에 의해서만 점유"되어야 한다는 혁명 강령 속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농민이 짜르, 국가나 영주의 이름으로 경작하는 땅이 본래는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마치 농민이 모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되며" 아울러 "공유제를 파괴하는 것"은 제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지주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은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바꾸닌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텔리겐챠에게 널리 퍼져 있던 것이었다. 슬라브주의자로서 대지주였던 먀꼬프도 유일한 토지 소유주인 전체 인민이 자신에게 토지의 부를 양도하고 토지 점유권을 위탁한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조건에서 사유재산의 개념은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촌락공동체를 예찬했던 러시아인에게 일반적으로 로마법적인 재산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다. 즉 서유럽인들이 사유재산에 대하여 갖는 절대적 개념은 부정되었따. 모스끄바 시대의 러시아에서는 짜르가 명목상 유일한 토지 소유주였기 때문에 토지 소유상의 범죄를 몰랐다고 전해진다. 재산이나 절도에 관한 러시아 법률의 판결은 사회제도로서의 재산에 대한 태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태도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러시아 정신에서 중요한 것은 재산의 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바로 여기에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부르조아 정신과 투쟁하고 부르조아 사회의 수용을 거부하게 되는 요소가 있었다. Berdyaev가 주장하였듯이, 바로 이러한 러시아인의 부정적인 재산관념 때문에, 사회주의 - 이 말을 교조적 의미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할 경우 - 는 러시아적 특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며,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이 당시 러시아인의 지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프루동은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재산만을 거부하였을 뿐, 생산자들이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도구를 소유하는 사회에 대한 비젼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는 소농이나 장인의 경제적 독립성을 옹호하였을 뿐 아니라 예찬하였다. 특히 그는 국가 권력의 위협에 대한 견제력으로서의 사유재산을 지지하였다. 프루동이 배격한 것은, 사용료 징수권(프루동의 표현으로는 droit d'aubaine)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재산이었다. 이러한 재산권 행사로 인한 소득은 자보에 대한 이윤, 토지에 대한 지대, 대부에 대한 이자 등의 불로소득으로서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프루동이 원했던 것은,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재산 증식으로부터 사유재산제를 정화시키는 것이지, 재산을 집단적으로 소유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즉 가가 요구한 것은 불의의 폐지였지, 불평등의 폐지가 아니었다. 프루동은 이렇게 말했다. "재산은 공동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물어뜯는 방식으로 광견병을 치유할 수는 없다." 요컨대 프루동은 집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바꾸닌은 프루동의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부분적인 원인은 Lichtheim의 주장대로, 바꾸닌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알게 된 데에 있었다. 독일어를 전혀 몰랐으며, <자본론> 제1권이 발간되기 전에 죽었던 프루동과는 달리, 바꾸닌은 마르크스의 중요성과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그럼으로써 바꾸닌은 프루동의 이름과 결부된 반자본주의 이론에 어느 정도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슬며시 가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일 마르크스주의자인 쁠레하노프가 바꾸닌을 가리켜 "가증스러운 공산주의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까지 뒤섞인 프루동주의자"라고 비난했던 사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바꾸닌은 "노동 도구의 집단적 소유화(l'appropriation collective)"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의 창조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유하는 목표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Lichtheim이 앞서 지적한대로 바꾸닌에게서 나타나는 러시아인이 전통적 가치관 속에서 규명되어야 한다.
바꾸닌은 1849년 라이프치히에서 발행된 <러시아 상황>(Russische Zu-st?nde)이라는 소책자에서 토지공유제에 대한 신념이 러시아 인민의 특징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러시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농노제, 즉 개인의 자유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토지에 대한 권리에 관해서이다. 농민들은 이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 주인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nasha) 땅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사회혁명으로서의 러시아 혁명의 성격은 미리부터 결정되어 있으며, 또한 인민들의 전반적 성격 속에, 그리고 그 공유제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꾸닌의 이러한 가치관에서, 훗날 프루동의 '시대에 뒤진 개인주의적 유산'을 '반권위주의적 집산주의'로 대체할 수 있었던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꾸닌은 혁명 전략에서도 러시아 농민 봉기(bunt)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비폭력적 수단을 고수하였던 프루동과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었다. 바꾸닌은 근로 인민에게 숨겨진 진리와 계몽되지 못한 대중을 신봉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으뜸가는 반란 민중으로 간주한 러시아 인민을 신봉하였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인민주의자였다. 이 점에서 바꾸닌은 게르샬과도 달랐다. 게르샬이 느낀 농민층의 매력은 주로 그들의 공동체 제도에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게르샬도 한때 혁명적 파괴에 매력을 느낀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과적인 것이었다. 반면에 바꾸닌은 집단 폭력과 방화의 전통을 지닌 러시아 농민층에 점점 더 이끌리게 되었다.
바꾸닌은 스쩨빤 라진과 뿌가쵸프를 자신의 정신적 선구로 인정하였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러시아인으로서 이들에 대한 기억은 인민들 사이에 간직되어 있었다. 러시아인은 스스로를 대제국 건설의 도구와 재료로 순순히 바치는 심성도 지니고 있었지만 동시에 봉기, 소요, 아나키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인민 속에 내재된 탈법적인 라진-뿌가쵸프적 요소를 이상화하였다. 인민의 원초적 힘을 신뢰하였던 바꾸닌은 그저 인민을 반란에 참여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나 뜨까체프와도 달랐다.
바꾸닌의 이러한 인식에는 일종의 러시아-슬라브적 메시아 정신이 스며 있다. 그는 빛은 동방에서 온다고 보았다. 전세계를 휩쓸 대화재가 러시아에서 인민에 의해 일어나, 서구 부르조아 세계의 암흑을 밝혀줄 것이라는 기대가 여기에 서려 있다. 1842년 바꾸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끝없이 넓고 눈덮인 제국, 아마도 위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나라인 러시아에서조차 뇌우를 예고하는 검은 구름들이 모여들고 있다! 오, 대기는 불안하며 폭풍을 잉태하고 있도다!
바꾸닌은 구세계의 파괴를 원하였다. 또한 구세계의 폐허와 잿더미 속에 신세계가 자연스럽게 대두하리라고 믿었다. 그는 그 누구도 최소한 신질서에 대한 막연한 생각도 없이 파괴를 목표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미래상이 생생하게 잡힐수록 파괴력은 가일층 강해지는 것이다.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라는 그의 경구는 이러한 정서를 집약하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자치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국가는 깨끗이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이러한 영감의 원천이 바로 농민 봉기의 전통이었다. 바꾸닌은 농민 봉기가 지닌 파괴력의 원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본성상 자연발생적이며 혼란스러우며 무자비한 인민 봉기는 항상 재산에 대한 광범위한 파괴를 전제한다. 노동 대중은 이러한 희생의 태세가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웅적 위업을 가능케 하는,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목표의 수행을 가능케 하는, 거칠고 야만스러운 힘을 이들이 형성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재산을 별로 또는 전혀 갖고 있지 않기에 그로 인해 부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어의 편법이나 승리를 위해 필요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촌락이나 도시에 대한 파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재산이 인민에 속해 있지 않는 만큼, 그들은 매우 자주 파괴에 대한 적극적 욕망을 드러낸다.
이에 대한 Lichtheim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바꾸닌은 하나의 추상물로서의 국가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건과 재료, 즉 건물과 도시, 문화 유산까지 실제로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러시아 농민층이 자신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문명에 대하여 어렴풋이 느낀 것을 바꾸닌이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바꾸닌은 러시아 인민이 지닌 봉기의 심성과 정서로부터 억압적 권위를 분쇄하는 동력을 찾고자 하였으며 헤겔과 피히테에서 그 철학적 표현을 찾았던 것이다.
C. 헤겔의 변증법과 피히테의 주의론
바꾸닌은 헤겔과 피히테를 나름대로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혁명적이고 실천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게 되는 이론적 근거를 확립하였다. 그는 헤겔 변증법 속에서 부단히 새로운 상태를 창출하는 원동력으로서의 부정에 주목하여 이를 자신의 변혁 논리로 삼았다. 바꾸닌은 이러한 논리를 연장하여 스스로 급진적 이론가에 머물지 않고 행동하는 실천가로 나선 것이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불굴의 의지와 신념이었다. 바꾸닌은 헤겔을 수용하기 전에 이미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피히테의 주의론을 통하여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바꾸닌에 있어서 헤겔 철학 수용의 새로운 이정표가 된 것은 1842년에 쥘 엘리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글 <독일에서의 반동>(Die Reaktion in Deutchland Ein Fragment von einem Franzosen)이었다. 바꾸닌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Carr이지만 이 글에 대해서는, 그의 글 중에서 '가장 그럴 듯하고 정치한' 글, '대중적인 글 치고는, 존엄한 헤겔을 혁명의 철학자로 일변시켜 놓은 걸작' 또는 '진보 진영 내에서 유럽적 명성을 가져다 준' 글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 글은 헤겔주의에 대한 급진좌파적 해석을 최초로 시도한 대표적 예에 속한다. 이 글에 이론적으로 좀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은 부정의 원리와 행동 철학의 문제였다.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바꾸닌이 생각하였던 헤겔의 공헌은 적대 요소의 대립, 투쟁이라는 개념과 부정의 절대적인 정당성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어떻게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삶의 내재적 조건으로서 자신에 대한 부정을 자기 외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지니는 것을 통해서만 살아 있게 되는가 하는 점과, 만일 그것(모든 살아 있는 존재)이 단지 긍정적일 뿐이며 부정을 자기 외부에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정태적이며 죽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였던 것에 헤겔의 커다란 공로가 있지 않은가? ...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체는 자기 내부에 자신의 죽음의 씨앗을 지님으로써만 살아 있게 된다.
그러나, Walicki에 따르면, 바꾸닌은 대립 요소가 화해, 조정되는 순간을 배격함으로써 부정에 대한 해석에서 헤겔과 결별하였다. 즉 그는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각 단계별 결과로서 나타나는 지양(Aufhebung)을 부정과 보전의 공존상태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선행 단계(과거)에 대한 완전 파괴로 보았다는 점에서 헤겔과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모순 대립의 본질은 균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우세에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긍정에 대한 결정 요소로서 오직 부정만이 그 자체 내에 모순의 총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부정만이 절대적인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귀결로서 바꾸닌은 미래의 창조가 기존 현실의 파괴에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라는 그의 경구는 "모든 삶의 영원한 창조적 원천"으로서 파괴를 수행하는 영원한 정신에 대한 신념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바꾸닌은 이러한 관점에서 적대 요소(세력) 간의 화해를 추구하는 몇몇 유형의 절충적 타협론자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반동과 민주주의 사이의 생사를 건 투쟁에서 양자의 타협 가능성을 믿는 절충론자들에게 대오각성을 촉구하였다. 2x2=4를 주장하는 좌파와 2x2=6을 주장하는 반동 세력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하는 절충론자들의 입장은 마치 2x2=5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이다. 또한 바꾸닌은 전쟁에서 폴란드인과 러시아인 모두를 편들다가 결국 양쪽으로부터 처형받은 폴란드계 유태인의 운명을 교훈으로 제시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바꾸닌으로 하여금 비타협적이고 혁명적인 인텔리겐챠로 일관하게 만든 헤겔 사상의 요소인 것이다.
바꾸닌이 수용한 헤겔 사상의 핵심 요소는 부정의 원리로서, 이 원리는 역설적으로 헤겔 사상을 포함한 철학 전반에 적용되었다. 그것은 행동을 위해 사변적 철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였다. <독일에서의 반동>이 지닌 중대한 함의는 행동 철학의 탄생이다. 그것은, Carr의 규정대로, 바꾸닌에 있어서 '헤겔 시대의 절정'이자 동시에 '헤겔과의 작별'이기도 하였다. 이 글을 발표한 수년 후, 바꾸닌은 한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론가이기를 그쳤다. 나는 마침내 내 안에 자리 잡았던 형이상학과 철학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실천의 세계로, 현실적 행위와 현실적 삶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꾸닌이 <독일에서의 반동>을 발표하며 사용한 '쥘 엘뤼자르(Jules Elysard)'라는 프랑스식 필명은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인들의 관점에서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행동과 혁명의 나라였기 대문이다. 이 시기에는 청년 마르크스를 포함한 사상가들의 독일적 요소[철학]와 프랑스적 요소[행동, 정치]의 결합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바꾸닌에게서 그의 동료인 아르놀트 루게가 기대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이었다. 그는 바꾸닌을 가르쳐 "독일 철학을 이해하고 교정하는 프랑스인"이라고 소개하였으며, 바꾸닌의 자극으로 독일인들이 "이론 영역에서의 자만심"을 떨쳐 버리게 될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바꾸닌 자신은 철학과 행동의 결합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의 관점에서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부정 뿐이었고, 미래는 행동가에 속한 것이었다. 후일 그 자신의 지적에 따르면, 신의 세계 전체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그 자체까지도 부정하게 되는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한 혁명적 헤겔학파의 거두 포이어바흐마저도 결국은 형이상학자에 불과하였으며 뷔흐너 같은 그의 계승자들도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사유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독일에서의 반동>을 집필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바꾸닌은 라므네의 <인민의 정치>(Politique du peuple)와 로렌츠 폰 쉬타인의 <프랑스 현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Der Sozialismus und Kommunismus der heutigen Frankreichs, 1841)를 읽었다. 전자에서 독일 형이상학의 존재가 아예 무시된 것을 보고 바꾸닌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후자에는 생시몽, 푸리에, 삐에르 르루, 프루동 사상이 소개되어 있었는데(1844년 바꾸닌이 빠리에서 프루동을 만났을 때는 이미 그의 사상을 열렬히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은 추상적인 독일 철학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바꾸닌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일관되게 기저를 형성하는 독일 철학의 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피히테의 주의론이다. 바꾸닌은 1840년 한 서신에 피히테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여기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있습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곧바로 지침없이 나아가기 위하여, 생소하고 외적인 모든 환경으로부터 그리고 통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추상해내는 그의 능력을 나는 항상 부러워하였습니다. ... 내게도 그러한 능력이 있지만, 아직은 독자적으로 그리고 외적인 모든 것에 도전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정치적 급진주의로 전화될 수 있는 주의론적 성향을 예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꾸닌은 피히테 철학의 주의론으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던 것인가?
우선 피히테 철학의 주의론적 성격은 자유의 문제가 의지와 실천의 문제로 직결되는 데서 강하게 드러난다. 피히테에 있어서 자유는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제가 된다. 즉 자유란 결코 당장 현실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마땅히 존재해야 하며 달성해야 할 최고의 과제이다. 이 과제를 실천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의미이며 목적이다.
이러한 자유관은 바꾸닌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바꾸닌은 1836년의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절대적 자유, ...이것이 우리의 목표다. 인류와 전세계의 해방,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피히테에 따르면 이러한 자유의 실현은 도덕적 의지에 의해 달성된다. 이 과정에서 주체와 객체(객관의 세계; 자연의 세계; 외적 세계; 비아)의 분열은 극복된다. 물론 후자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 체계 내에서 진정하고 근원적인 존재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의 완전한 자기 실현 즉, 자유의 실현을 위해 요구되는 질료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자유를 실현하고자 행위함에 있어서, 후자의 저항을 받게 되는데 이에 굴복함으로써 비롯되는 나태, 무기력, 수동성은 죄악이 된다.
이러한 피히테의 관점은 바꾸닌이 1836년에 썼던 서신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바꾸닌은 관능적인 생활을 비판하였으며, 피히테가 형식주의 도덕이라고 불렀던 바, 인간을 굴종시키고 인간 의지를 마비시키는 실제적 도덕 규범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내었다. 또한 그는 "개인적, 가족적, 민족적 이기심"의 타파를 주장하였으며, "절대적인 것에 대한 안목"을 상실하지 말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따. 아울러 바꾸닌은 자신의 목표에 대한 강한 집념과 의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길 위에 있다. 그 길이 슬프고 고독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가치있는 것이 될 것이다."
바꾸닌에게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피히테 철학의 주의론적 요소는 현실이라는 객관성을 강조한 헤겔 철학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었는가? Kelly의 지적에 따르면, 헤겔이 변증법을 통하여 현실 내지는 외적 세계를 자아에 대치시킨 궁극적인 목적은 자아를 좀더 확실하게 변증법 체계에 들어맞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헤겔 철학에서의 외적 세계 또는 객관의 세계는, 아무리 참신하고 독특한 성격을 지녔어도, 결국은 이전의 주관적 관념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관념에 의한 창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파라독스야말로 바꾸닌에게는 물리칠 수 없는 매력의 비밀이었다. 피히테 식으로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하다고 보는 세계를 종속시키는 것보다, 헤겔처럼 자아로부터 엄연히 독립된 현상 세계를 인정함으로써 바꾸닌은 결과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현실에 대하여 더 커다란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즉 바꾸닌은 헤겔 철학을 통하여 Kelly의 표현대로, '피히테적인 환상'에 '객관성이라는 환영'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헤겔로 인하여 바꾸닌은 자신이 이미 갖추고 있었던 '거대한 자기중심주의'(colosal egocentrism)에 보다 확고한 기반을 제공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실에서 가장 제어하기 힘든 것까지도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자아의 궤도로 끌어 들일 수 있었다.
그 결과 바꾸닌의 전생애를 통해 지속된 심대한 낙관주의가 형성되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내적 갈등과 분열이 이전에는 좌절의 요인이었으나 이제는 승리의 원천인 자신감으로 나타났다. 바꾸닌은 1838년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험난한 길이 내게 놓여 있다. 나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정이 클수록 투쟁이 거셀수록, 조화와 화해는 심대할 것이다.
이러한 전투적 낙관주의는, '불일치 없는 완전 조화란 없다'라든지 '삶과 행복에 대한 인간의 권리는 부정의 힘에 비례한다'라는 그의 소신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상의 고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꾸닌에 있어서 피히테에 대한 기질상의 친화성은 헤겔적 정통에 대한 요구보다 훨씬 강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바꾸닌이 헤겔을 연구하기 전인 1836년 초에 쓴 한 편지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나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외에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 이 목표에 대한 나의 전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분쇄할 것이다. 인간을 희생시켜서 그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건에, 그리고 그와 관련된 ... 모든 관념에 저주가 있으라. 모든 거짓된 것은 가차없이 그리고 착오없이 파괴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진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이처럼 진지하게 바꾸닌은 낡은 세계가 분쇄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헤겔에 대한 보수적 해석에서 벗어나 그로부터 변혁의 논리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Ⅲ. '연대적 자유'
바꾸닌의 아나키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자유에 관한 것이다. Cole의 지적처럼, 그의 사상은 자유에서 시작하여 자유에서 끝났다. 또한 Carr는 바꾸닌을 가리켜 역사상 자유 정신의 가장 완벽한 구현의 일례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꾸닌 스스로가 자유에 대한 "광적인 애호가(un amant fanatique)"로 자처하였다. 그의 자유관은 그 자신의 사상적 기초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슬라브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그의 참여(1848-63)와 새로운 사회 조직의 원리로서 그가 제시한 연맹주의에 대하여 이해의 단서를 제공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바꾸닌이 추구한 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 의식에 투철한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외없이, 즉 평등하게 누리는 자유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연대적 자유(la libert? par la solidarit?)", "평등 속의 자유(la libert? dans l'?glit?)"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연대적 공동체 안에서 각 개인들의 자유가 상충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는 "전체의 자유로 인하여 제약받지 않는 각 개인의 자유(la libert? illimit?e de chacun par la libert? de tous)"를 신봉하였기 때문에 개인들의 자유가 상충되는 것임을 전제로 한 루쏘의 사회계약론적 견해를 배격하였다. 그는 "루쏘 학파나 여타의 모든 부르조아 학파들"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자유"는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가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다.
바꾸닌의 저술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는 이러한 자유관이야말로 그의 아나키즘의 기반이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딸리아에서 바꾸닌의 비밀결사 활동기(1863-67)에 집필된 강령들에서 나타나는 자유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바꾸닌에 대하여 비판적인 E.H. Carr는 이 기간에 조직된 비밀결사의 실체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는 바꾸닌이 기초한 몇가지 비밀 결사 강령도 그러한 조직의 허구성을 반증할만한 근거가 못된다고 본다. 그러한 조직은 오직 바꾸닌과 그의 몇몇 추종자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실제로 바꾸닌은 단명했거나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직의 강령을 진지하게 구상하고 집필하였던 것이다. Lehning은 이 점을 부인하지 않지만, 조직의 실재 여부나 가동 실태 보다는 오히려 강령 집필을 통하여 바꾸닌의 아나키즘 사상이 체계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 간 점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강령들 중에는 1865-66년에 집필된 <혁명 교리문답>과 <인류 해방 추진 국제 비밀 결사> 등이 있다. 전자는 Gu?rin의 말대로 "바꾸닌의 아나키즘 저술 중에서 가장 안 알려진 것이면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글의 초안에 해당하는 후자가 최근에야 발견되어 공개된 바 있다. 이 강령은 이딸리아에 있던 바꾸닌이 스웨덴을 잠시 방문하였던 1864년 가을에 그곳의 민주주의자인 August Sohlman에게 써 준 것으로, 그 원고가 후일 암스테르담의 국제 사회사 연구소(Internationaal Instituut voor Sociale Geschiedenis)의 문서고에서 발견되어, Mervaud에 의해 전문이 다시 발행되고 소개되기 전에는 다만 Lehning에 의해 문서고의 원고 상태로 부분 인용되었을 뿐이다.
이에 덧붙여 이딸리아를 떠난 직후 쥬네브의 한 국제회의에서 행한 연설의 원고인 <연맹주의, 사회주의, 반신학주의>의 내용도 고찰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회의란 1867-68년에 수차에 걸쳐 쥬네브에서 개최된 평화와 자유연맹(Ligue de la Paix et de la Liber?)의 총회로서 국제적 명사로는 J.S. Mill, Garibaldi 등이 창립대회에 참가한 바 있다. 이 글은 이딸리아에서 이제 막 형성된 그의 사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의 아나키즘에 관한 자료로서는 당시에 최초로 공개된 자료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하여 바꾸닌의 아나키즘이 형성되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자유관이 어떻게 확립되어 가는지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바꾸닌의 활동과 사상적 발전에 대하여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필자로서 역점을 두려는 것은 바꾸닌의 이러한 자유관이 그의 아나키즘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기 이전인 1848-63년, 즉 그가 슬라브 민족 해방 운동에 투신하던 시기에 이미 제시되고 있음을 규명함으로써 일부 연구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바꾸닌 자신이 1848년부터 줄곧 일관된 사상 체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여 왔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역점을 두려는 것은 자유의 문제와 민족 문제에 대한 고심의 귀결인 연맹주의에 관해서다. 이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바꾸닌이 어떻게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자유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를 조직해 나아가려고 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A. 자유의 본질
바꾸닌의 자유론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가 자유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한 점에 있다. 그는 이웃의 자유가 자기 자신의 자유에 대한 필수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으로는,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필연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좀더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자유는 개개인의 그리고 모든 사람의 전체적인 연대성 속에서만 정당하고 완전하다. 고립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자유)은 성격상 본질적으로 상호적이며 사회적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지상의 한 인간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민족의 자유와 인민 대중의 자유를 위한 민족 해방 운동과 사회 혁명에 대한 그의 집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는 "한 민족의 자유"와 "단 한 명의 개인적 자유"에 대한 훼손도 "나의 권리와 인간성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렇다면 바꾸닌에 있어 자유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꾸닌은 자유에 각별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즉 자유는 "인간의 징표(le signe de l'homme)"로서 인간을 야수와 구별짓는 것이며 "인간성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다. "자유롭게 되는 것(etre libre)"은 인간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자 "사명"이다. 또한 자유를 향하여 장구한 세월에 걸쳐 계속된 이행 과정에 "역사의 모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하는 바는 바꾸닌에 있어서 자유란 자유주의자들이 인식하듯이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 또는 본원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후천적으로 각성되고 창출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바꾸닌에 따르면, 인간들은 애초에 야수와 다름없는 존재로 출발하였다. 이 상태에서 자유란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인간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다가 마침내 서로 동료, 형제임을 인식하게 되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인간의 이성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원시적, 야만적 상태에 안주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로써 인간은 야수성(la bestialit?)을 탈피하여 "제2의 특성인 인간성(l'humanit?)"을 만들어 낸다. 또한 이성은 연대성의 본능을 양심으로 변환시키는 유일한 원인이다. 이성을 통해 인간은 끝없이 이어지는 엄청난 역사적 진화와 변천을 겪으며 자연 상태의 사회를 지성, 정의, 권리에 따라 조직되는 사회로 변모시켜 가며 "자신의 자유를 창조해낸다(il cr?e sa libert?)."
따라서 자유를 증대시키는 것이 역사 발전의 추세이며 또한 역사의 의미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의무이자 사명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 구성원의 자유가 클수록 그 사회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유를 감소시키고 위축시키고 말살하려는 시도는 그 비인간성, 야수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바꾸닌은 자유의 제한을 합리화하는 시도, 특히 루쏘나 자유주의자들의 사회계약론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류의 사회계약론이 공공의 안녕이나 사회 전체의 이해를 위하여 개인적 자유의 부분적 양도 또는 유보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며, 결국은 국가에 의한 절대적 지배로 귀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계약론자들의 관점에서는 개개인의 자유의 일부를 단지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한 완전한 보장을 위해서 떼어낼 뿐이다.
반면에 바꾸닌의 입장에서, "자유란 쪼개어질 수 없는 것이다(La libert? est indivisible)." 즉 자유의 일부를 떼어 양도한다는 것은 자유 전체에 대한 훼손을 의미한다. 이것을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대가 떼어 간 이 작은 부분, 그것이 내 자유의 진수 그 자체다. 그것은 전체다." 떼어낸 부분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자유에 대한 의식은 정확하게 바로 그 부분에 집중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이며 억누를 수 없는 운동인 것이다. 바꾸닌은 모든 안락함을 희생할 각오로 단 하나의 금기를 깨뜨린 아담과 이브, 그리고 뻬로(Charles Perrault)의 설화집에 등장하는 잔혹한 성주 푸른 수염(Barbe-Bleue)의 일곱번째 아내를 예로 들며, 이러한 설화의 함의가 자유를 향한 최초의 행위라고 강조하였다.
바꾸닌은 사회계약론자들이 전체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개인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고 더 나아가 부정하려는 데서 국가의 출현을 보았다. 즉 계약론자들이 계약체결과 더불어 성립한다고 본 사회란 바꾸닌에게는 국가를 의미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계약의 이론 체계 속에 사회를 위해 배려된 자리는 없으며 오로지 국가만이 존재하며 설사 사회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에 의해 흡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꾸닌과 사회계약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관의 근본적 차이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양자 간의 자유관이 판이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약론자들에게 있어서 인간 사회는 오로지 계약 체결과 더불어 성립된다. 이에 반해 바꾸닌에게 사회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여 사회란 모든 계약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인간 집단성의 본원적 존재 양식(le monde naturel d'existence de la collectivit? humaine)"인 것이다. 즉 인간은 본능적으로나 운명적으로나 사회적 존재로서 개미나 벌과 마찬가지로 사회 속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인 연대성의 내재적 법칙(une loi inh?rente de solidarit? naturelle)"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가장 원시적인 미개인들도 함게 모여 사는 것이다. 결국 계약론자들이 사회 이전의 단계로 가정하는 자연상태까지도 바꾸닌에게는 엄연히 사회적인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자연상태의 사회에서의 자유의 존재 여부에 대하여 바꾸닌과 사회계약론자들은 다시 상반된 입장을 견지한다. 계약론자들에 따르면, 이 상태에서 즉 계약 이전 단계에서 자연인(l'homme naturel)은 절대적인 자유를 누린다. 바꾸닌의 관점에서는 이른바 자연 상태에서의 자유란 끊임없이 괴롭히는 외적 세계에 대한 "고릴라급 인간(l'homme gorille)"의 절대적 예속에 불과한 것이다. 오세아니아의 가장 낙후된 섬사람들의 경우에서 나타나듯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원시적 야만 상태 속에서도 양도할 "단 한 조각(une parcelle)"의 자유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야수성 상태 속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할 뿐더러 설사 계약을 맺고자 하더라도 계약의 전제가 되는 이성을 아직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꾸닌의 관점에서 사회계약론자들의 자유관의 좀더 심각한 문제점은 자유의 연대성 내지는 사회성에 대한 부정에 있었다. 바꾸닌은 "한 사람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계약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유인들은 서로 접촉하지 않는 한, 즉 개별적인 고립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이러한 논리 때문에 사회계약론자들은 계약 이전 단계인 자연상태를 사회로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개개인의 자유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더 나아가 개개인의 자유는 모든 타인들의 자유에 대한 부인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계약론자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자유들은 서로 접촉하게 되면서 서로 모순되고 제한되고 축소되고 결국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자유들이 완전히 무너지는 극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계약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바꾸닌이 느꼈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사회계약론자들이 사회질서를 위하여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그 일부나마 제약 내지는 규제의 대상으로 보았던 점이다. 바꾸닌이 보기에, 루쏘의 정치이론은 크리스트교의 정치이론처럼 인간성과 개인적 자유의 성격을 부분적이나마 악한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바꾸닌은 계약론자들이 자유를 야수성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바꾸닌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는 자신의 야수성의 폐허 위에서 주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계약론자들의 부정적인 자유관은 권위주의적인 해법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는 점에서 바꾸닌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질서란 사회 구성원들인 개개인 자유에 대한 제약이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개인적 자유의 무한한 확대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질서는 자유의 기반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영예로운 완성(couronnement)"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바꾸닌은, 자유의 고립성과 야수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자유를 제약하는 권위주의로 귀결될 필연성을 지닌 사회계약론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자유의 연대성 내지는 사회성이라는 관념을 고수함으로써 평등의 문제를 제시한다. 그는 "자유란 연대성, 즉 상호성의 산물 및 최고 표현이기 때문에 평등 속에서만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바꾸닌에 따르면, "인간은 마치 거울에 비쳐지듯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양심에 의해서 자유롭게 인식되고 대변되는 자신의 자유가 그들의 자유 속으로 무하한 확대를 발견할 경우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만일 나의 권리가 나보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의 감정에 의해서 보증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자유 의식이 아니라 특권 의식을 주게 된다. 이 경우 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특권이야말로 자유에 역행하는 것이디 때문이다. 나의 자유는 완전하고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의 자유 속에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보다 덜 자유로운 단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의 자유를 방해하고 훼손하고 제약하고 결국 부정하는 것이 된다. "나는 나와 똑같이 자유로운 사람들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라든지 "개개인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평등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바꾸닌은 이처럼 자유의 실현 요건으로서 평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차이의 균일화나 개인의 지적, 도덕적, 신체적 획일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개인의 성격, 지성, 역량의 다양함은 물론, 인종, 국민, 남녀, 연령의 차이까지도 "인류(l'humaie esp?ce)"와 "인간성(l'humanit?)"의 풍요로움을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사유재산이 개개인의 능력과 생산적 에너지와 절약의 산물인 한, 경제적.사회적 평등이라고 해서 더 이상 개인 재산의 균등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바꾸닌이 주장하는 평등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사회 조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 속에 태어난 개개인이 유년에서 노년에 이르도록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자질과 역량을 발전시키고 발휘"함에 있어서, 즉 자유를 누림에 있어서, 동등한 수단 내지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사회 조직이다. 결국 바꾸닌이 주장한 것은 일종의 기회의 평등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출발선의 평등(l'?galit? du point de d?part)"이다.
B. 민족의 자유와 인민의 자유
'자유의 연대성'이라는 바꾸닌의 관념은 민족 해방 운동과 사회 혁명에 대한 그의 활발한 참여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민족 운동에 대한 바꾸닌의 최우선 관심사는 이러한 운동들이 자유 - 반드시 그 자신이 이해하는 자유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 를 위한 투쟁과 관련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1848년 혁명 이후 그가 슬라브 민족 해방 운동에 적극 투신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연구자들은 바꾸닌을 러시아 패권주의자나 이와 유사한 범슬라브주의자로 왜곡하였으며, Nettlau나 Gu?rin처럼 바꾸닌의 아나키즘에 공감하는 연구자들마저도 1848-63년 동안의 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든지 아나키즘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하는 이해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들 연구자들은 1863년 폴란드 봉기 실패 후 바꾸닌의 주된 관심이 민족 해방 운동에서 사회 혁명으로 전환된 사실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이미 1848년 당시부터 바꾸닌에게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인민의 자유와 사회 혁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취급하는 문제점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후 유의하여 살피고자 하는 것은 '자유의 연대성'이라는 관념이 이미 1848년경부터 민족 문제와 관련하여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 인민 대중의 자유를 위한 사회 혁명의 요소를 민족 해방 운동에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민족주의 운동에 잠재된 위험성 내지는 반동성이 어떻게 지적되고 있는가 등의 문제들이다.
바꾸닌의 자유론의 핵심을 이루는 '연대적 자유'라는 관념은 1864-67년에 집필된 각종 강령 속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되기 훨씬 이전인 1848년 혁명기에 이미 그의 글 몇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다. 바꾸닌은 1848년 6월 프라하에서 개최된 범슬라브족 대회에 대의원으로 참여한 뒤 여러 슬라브족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소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슬라브 정책의 기초>라는 슬라브족 통합 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글에서 바꾸닌은 슬라브족 사이의 긴밀한 '연대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이들[슬라브인들]의 관점에서는 그들 자신의 자유에 대한 제1의 요건이 된다. ... 어느 한쪽의 행복과 불행은 동시에 다른 한쪽의 행복과 불행이 되어야 하며, 나머지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는 한,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한쪽의 박해는 다른 한쪽의 박해가 된다.
이러한 사상은 이듬해에 집필된 <슬라브인들에 대한 호소>에서 민족의 자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표출되고 있다.
제민족은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유럽 어느 곳에서든 아직도 억압 아래 살고 있는 단 하나의 민족이라도 존재하는 한, 제민족의 복지는 보장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또한 제민족의 자유가 아무 곳에서나 친숙한 것이 되려면 그것은 모든 곳에서 친숙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들은 사실상 한 입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의 자유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것은) 진정하고 완벽한 자유, 유보와 예외와 제약 없는 자유입니다.
슬라브 민족의 자유에 대한 바꾸닌의 이러한 주장은 폴란드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당시 시대 분위기의 일단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Carr의 지적대로, 프랑스 혁명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유란 개인의 자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생각으로는 민족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의지에 반해서 전제군주나 외국인에 의해 지배받지 않을 권리를 지녔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점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정치적 정의를 위한 동맹 관계에 있었으며, 19세기를 통하여 이에 대한 모범적 예로 손꼽힌 것이 바로 폴란드였다. 폴란드는 민족주의 정수와 민주주의 정수를 동시에 대표하였던 것이다.
하물며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론이 지닌 문제점을 신랄히 비판할 정도로 19세기의 가장 극단적인 자유 옹호자로 평가받는 바꾸닌이 민주주의와 아울러 민족주의를 예찬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폴란드에서 그 최초의 구체적 대상을 발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찌기 바꾸닌은 1845년 1월 <레포름>지에 게재된 공개서한과 1847년에 행한 폴란드 봉기(1830년) 17주년 기념 연설에서 박해받는 러시아와 폴란드의 공통된 운명과 양국 인민의 유대를 강조한 바 있다.
자유는 바꾸닌에 있어서 민족 운동의 정당성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이었다. 그는 민족의 권리를 "자유라는 최고원리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결과"로서만 인정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자유에 역행하거나 자유 밖에 존재"할 경우 더 이상 권리일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준은 폴란드 문제에 대한 시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바꾸닌은 폴란드의 경우를 포함하여 민족 운동에 일차적으로 공감을 표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민족 운동이 제한적이나마 폭정과 억압에 대한 항거와 관련되는 한, 자유를 위한 전반적 투쟁에서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1863년의 봉기 실패로 폴란드 민족 운동이 그 한계성을 이미 드러낸 뒤에도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제국을 타도하려고 할 경우 이를 지원해야 한다고 러시아 청년들에게 호소할 정도였다. 더 나아가 폴란드 귀족의 "자랑스러운 자유정신"을 한편으로 찬양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마치 좁은 곳에라도 제대로 비추기만 하면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엄청난 활력소인 "태양"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의 "자유"가 노동 대중에게는 항상 "노예제"를 의미해온 것을 바꾸닌은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는 폴란드 귀족들의 농민 탄압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폴란드 민족 운동의 약화 원인은 반란 귀족에 대한 농민들의 적대감이었으며, 1863년 당시 러시아 짜르 정부는 이를 적절하게 활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폴란드 귀족들이 "조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노동 대중에게는 "감옥"을 의미하였다. 여기에서 바꾸닌은 민족의 이름으로 정치적 통합과 독립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의 자유가 인민 대중의 자유와 유리되고 더 나아가 이를 억압할 수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통합과 독립의 목표가 본질적으로 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바꾸닌은 거의 모든 나라 사람이 "애국적"이라는 말과 "혁명적"이라는 말을 혼동하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애국적인 동시에 반동적"일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모든 국가와 정부는 외관상 아무리 민주적이라고 하여도 바꾸닌의 관점에서는 다수를 희생시켜 소수의 수중에 권력을 집중하려는 속성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지배계급만의 자유를 추구하는 민족 운동은 인민 대중을 포용하지 못함으로써 근본적인 한계를 노정하게 되는 것이다. 바꾸닌에 따르면, 그토록 초기에 승승장구하던 혁명과 자유를 위한 투쟁을 겪은 후에도 유럽이 아직껏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는 원인은 진정으로 대중이 움직이지 않은 데 있었다. 폴란드는 바로 이러한 예의 전형이다. 조국 해방을 위한 폴란드 귀족들의 투쟁의 한 세기는 노동 대중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무모한 것임이 드러났다고 바꾸닌은 단언하였다.
폴란드 민족 운동에 대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냉담함의 원인을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계급 문제에서 찾았다.
귀족들이 농민의 팔로 경작하고 그들의 땀과 피로 그 땅을 적시게 하는 한, 폴란드인, 독일인, 유태인 자본가들과 공장주들의 장인들과 공장 노동자들을 통하여 번돈으로 주머니를 채우는 한, ... 귀족과 노동자들의 이 두 세계는 심연을 사이에 두고 갈라질 것이다.
바꾸닌은 1864년 마르크스와 만난 자리에서 폴란드 봉기 실패 원인이 "처음부터 폴란드 귀족들이 농민적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선언하기를 거부"한 데에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또한 바꾸닌은 이 자리에서 폴란드 봉기가 실패한 마당에 앞으로 사회주의 운동에만 전념하겠다는 각오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바꾸닌은 이미 1848년 혁명기에 민족 문제와 결부된 계급 문제 내지는 사회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슬라브인들에 대한 호소>의 초안에서 두 문제를 지칭하는 "안팎으로부터 동시적인 제인민의 해방(?mancipation des peuples ? l'interieur et ? l'ext?rieur ? la fois)" 또는 애초부터 드러난 "우리들의 숭고한 혁명의 양대 성향"이란 표현을 써 가며, "피억압 민족체들에 대한 구원"과 짝을 이루는 "대중들의 사회적 해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이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을 요구하였던 것은 어떤 개인이나 한 당파가 아니라 바로 대중의 찬탄할 본능이었습니다. 누구나 깨닫게 된 사실입니다만, 인구의 대다수가 비참한 존재로 영락한 곳에서, 그리고 교육과 여가 생활과 빵을 박탈당한 채 힘있고 돈있는 자들의 발판으로서 봉사하도록 운명지워진 곳에서, 자유란 거짓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꾸닌은 독립을 추구하는 슬라브족들을 향하여, 러시아 제국을 통하여 나타나는 대러시아족의 외형적 독립의 허구성을 폭로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독립이, 밖으로 여전히 폴란드에 대한 재앙을 의미하며 안으로 자유 부재를 의미하는 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따. 이처럼 바꾸닌은 인민의 자유에 무관심하거나 때로는 적대적인 민족주의의 문제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C. 연맹주의의 성격
바꾸닌은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사회 조직의 원리로서, 자유의 정신에 입각한 연맹주의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장차 사회 구성의 유일한 원리이어야 한다. 또한 인류의 억누를 수 없는 성향의 하나가 통합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가 자유를 기반으로 삼을 경우에도 필연적으로 통합에 이른다고 낙관한다.
그러나 역으로 통합으로부터 자유에 이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본다. 자유를 배제하는 통합은 개인들과 인민들의 존엄성과 복지에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바꾸닌은 애국주의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기왕의 정치적 통합태로서의 모든 국가는 자유에 대립되는 권위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질서와 정치 및 사회 조직이 위로부터 아래로, 그리고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이루어져 자연적으로 도처에서 위계적 규율이 형성되고 모든 부분의 자유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꾸닌은 자유 밖에서 이루어진 통합을 파괴함으로써만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그는 혁명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그것[혁명 목표]은 역사적 권리(droits historiques)의 폐지, 정복권의 폐지, 외교상 권리의 폐지이다. 그것은 신적, 인간적 권위의 멍에로부터 개인들과 결사체들의 완전 해방이다. 그것은 지방 행정 구역에 꼬뮌들이, 그리고 국가에 지방들과 피정복민들이 강제적으로 통합된 것을 모두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군사적, 관료적, 통치적, 행정적, 사법적, 세속적 제도 일체와 더불어 중앙집권적, 후견적, 권위적 국가의 근본적 해체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 집단, 결사체, 꼬뮌, 지방, 지역, 민족들에게 반환된 자유(la libert? rendure)이며 이러한 자유를 연맹으로 상호 보장(la garantie mutuelle de cette libert? par la f?d?ration)하는 것이다.
바꾸닌은 이러한 원리가 민족 문제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자유 의사에 따른 결정의 원리, 즉 자결권에 놓여 있다. 크고 작은 모든 민족들 뿐만 아니라 지방들과 꼬뮌들도, 모든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웃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 한, 양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치권과 자결권을 지닌다. 이들은, 이른바 역사적 연고권과 기성 국가들의 정치적, 전략적, 상업적 이해 관계 및 그에 따라 결정된 국경선을 전혀 고려할 필요 없이, 자신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스스로의 일을 처리하고, 스스로를 내부적으로 조직하며, 원하는 집단과 동맹하거나 이미 결성된 연맹에 자유롭게 가입하거나 탈퇴할 수 있다. 특히 자유로운 가입과 탈퇴의 권리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연맹이란 은폐된 중앙집권화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 행사에 의해서 온갖 사회 조직 간의 분열이 심화된다면, 자유에 기초한 사회들이 필연적으로 통합에 이른다는 바꾸닌의 전망은 지나치게 낙관적일 뿐만 아니라 자가당착이지 않을까? 바꾸닌은 심지어 한 민족 가운데서 분립하기를 원하는 어떤 지방이 민족 통합체 내의 잔류나 가입을 강요받을 경우, 반란까지도 열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고립을 자초하는 독립의 경우는 연대성에 의한 혜택과 자원과 보호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지방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고립적 자의를 조용히 누리도록 내버려둘 경우, 생필품 수요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필요의 압력으로 인해서 그 지방은 제 발로 그리고 신속히 통합체에 복귀 또는 가입하게 된다는 것이 바꾸닌의 생각이다. 즉 개인이나 여러 사회조직이 경제적 필요에 반하여 반발하지는 않지만, 자유와 권리에 대한 모든 침해에 대해서는 반발한다는 점이다.
바꾸닌에 따르면, 1863년 폴란드인들이 바로 이 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그들의 봉기가 실패한 원인이었다. 당시 바꾸닌은 그들에게 폴란드 분할(1772) 이전의 국경선을 더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간청하였으나 허사였다고 토로한다. 옛 국경선의 복원이 의미하는 것은, 비록 러시아의 탄압에 똑같이 시달리는 처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를 결코 사랑해 본 적이 없으며 또 사랑할 이유도 없는 루테니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전체를 폴란드인 마음대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봉기한 폴란드인들이 옛 국경을 말하는 대신에 인민의 자유를 대의명분으로 내걸고 러시아에 대한 투쟁에 동참할 것을 모두에게 호소하였더라면, 루테니아인들은 우선 함께 봉기하였을 것이며 그후 인민적 연대에 의해 폴란드에 통합되기를 원하였을 것이라고 바꾸닌은 아쉬워한 바 있다. 결국 폴란드인들에게는 자유에 대한 신념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이후 바꾸닌은 폴란드 봉기 실패를 교훈 삼아 민족 문제와 자유 일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게 된다. 그는 이른바 "민족체의 원리를 단지 자유라는 지고의 원리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결과로서만 여길 수 있되, 이것이 자유에 반하거나 자유 밖에 머물 경우 더 이상 권리가 되지 못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1864년만 하더라도 "민족체의 원리"라는 표현을 쓰던 바꾸닌이 그로부터 삼년 후에는 "민족체"라는 것이 "원리"일 수 없음을 선언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원리에는 보편성이 요구되는 데 반하여 민족체가 함축하는 것은 배타적이고 분열적인 것으로서 사회 통합의 진정한 원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 정신에 입각한 사회 통합의 원리, 즉 연맹주의에 따라 사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 우선 "자유 결사와 자유 연맹의 원리에 의해서(par principe d'association et de f?d?ration libres)" 질서와 조직이 "아래로부터 위로" 그리고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형성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들을 꼬뮌으로, 꼬뮌들을 지방(province)으로, 지방들을 민족으로, 민족들을 우선 유럽 합중국으로 그 다음에는 전세계 합중국으로 결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맹주의 조직 방식에서 정치적 기본 단위는 꼬뮌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결사체들 뿐만 아니라 여기에 가담하지 않은 개인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작은 세계로서, 선출된 담당자들에게 행정 업무가 위임되며, 공공 교육이 실시된다. 또한 선거에 의해 구성된 법원이 꼬뮌 구성원들 사이의 논쟁 및 이견에 대하여 판정을 내린다.
꼬뮌들은 연맹하여 지방을 구성한다. 또한 지방들의 연맹은 민족을 형성한다(즉 바꾸닌에게 민족이란 연맹주의 이론 체계 내에서는 지방들의 연맹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각 꼬뮌의 헌장이 자유의 원리에 부합되는 것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지방의 판정과 승인을 받아야 하며, 각 지방의 헌장은 민족에 의해서 승인되어야 한다. 각 지방의 운영을 담당하는 것은 입법의회(une assembl?e l?gislative), 행정처(une pr?sidence), 선거로 구성된 법원(un tribunal ?lus) 등이다. 이러한 체제와 방식은 민족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여러 등급의 사회 조직에서 유기적 자치가 확립된다. 이러한 식으로 결국 바꾸닌은 국가에 의한 중앙집권화 뿐만 아니라 절대적 자치로 인한 고립을 거부함으로써 균형과 연대를 선택한다. 최종적으로 국제연맹이 여기에 가입을 원하는 민족들로 구성된다.
바꾸닌의 연맹주의 이론 내에는 꼬뮌 이외에 또 하나의 기본 단위로 노동자들의 협동적 조합(les associations coop?ratives ouvri?res)이 자리잡고 있다. 전자가 정치적 기본 단위라면 후자는 경제적 기본단위이다.
그러면 바꾸닌에게서 노동자 조합은 의미는 무엇인가? 바꾸닌은 영국, 프랑스, 벨기에, 쉬스 등에서 1840년대부터 그리고 그후 이딸리아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야말로 격동의 19세기를 상징하는 "최대의 사건"이며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결정적인 사실"이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로써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꾸닌은 노동자들이 고립 상태에서는 모력할 뿐만 아니라 노예제 하에 영원히 신음하게 되리라고 본다. 반면에 이들이 결속(associ?s)하기만 한다면, 즉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면, 막강한 자본가들보다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더 강력하게 되며 마침내 그들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가능성의 단적인 예는 역설적으로나마 나뽈레옹 3세가 프랑스 인민을 상대로 직접 채권을 두차례 공모하는 데서 이미 암시된 것이다. 귀족 은행이나 부르조아 은행의 개입이 일체 없었던 가운데, 인민들만의 협력을 통하여 모금액은 수주만에 10억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모든 은행들이 단합하여 이룰 수 있는 모금 액수의 총규모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평민들의 결속(l'association des petites gens)" 즉 민주주의가 거둘 승리의 위력을 예고하는 것이다.
바꾸닌은 동일한 결속 내지는 조합의 법칙이 소농민들에게도 적용되어 이들의 기계 영농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여기에 "협동 노동력(la force du travail associ?)"을 부여함으로써 대재산의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소농민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노동조합들이 현존하는 꼬뮌, 지방, 심지어 국가들의 경계선까지도 무너뜨리면, 세계는 더 이상 민족 단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산업 집단으로 나뉘게 되며, 정치에 대한 요구에 따라서가 아니라 생산에 대한 요구에 따라 조직되는 새로운 체제가 인류 사회 전체에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합들이 하나의 거대한 경제 연맹을 형성하게 되리라고 바꾸닌은 전망한다. 이 연맹은 당시로서는 생각해 볼 수 없는 세계적 규모의 정확하고 상세하며 방대한 통계에 근거하여 정보를 제공받는 거대한 회의 기구를 갖게 되며, 상업 및 산업의 공황과 원치 않는 불경기와 재앙과 유실되는 자본 및 노동이 없도록, 여러 지역 사이에서 세계 산업 생산량에 대한 관리, 결정, 분배(gouvemer, d?terminer, r?partir)를 제시하고 요청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세상의 모습은 일신된다. Lihning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제1인터내셔널 내의 이딸리아 및 에스빠냐 연맹들이 바꾸닌의 결정적인 영향 속에 자신들의 이념으로 삼았던 "혁명적 집산주의"인 것이다.
Ⅳ. 자유 쟁취를 위한 혁명
바꾸닌에게 있어서 자유를 쟁취하는 유일한 길은 혁명이다. 그런데 바꾸닌은 혁명을 "전쟁"으로 규정하였다. 즉 혁명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파괴를 내포한다. 그는 인류가 진보를 위한 좀더 평화로운 수단을 창안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자유가 파괴를 통해 달성될 수 밖에 없다는 논거는 무엇인가? 그러면서도 그는 "사회 혁명"의 파괴성보다 인도주의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도대체 이러한 논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사회 혁명"의 개념은 무엇이며, "정치 혁명"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한 바꾸닌은 "범세계적" 또는 "보편적" 혁명으로서의 사회 혁명을 강조하였다. 보편성은 사회 혁명의 본성이자 성공의 필수 요건이라고 주장된다. 이상의 제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선 '사회혁명'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인민 대중과 인텔리겐챠의 역할을 중심으로 혁명의 주체와 노선에 관한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어떠한 점에서 바꾸닌이 혁명적 생디깔리즘의 사상적 선구자의 하나인지 살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어떠한 이유에서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농민도 혁명의 주역이 되도록 고심하였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끝으로 자유로운 미래 사회 건설의 과제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A. '사회 혁명'의 성격
바꾸닌에게 자유와 "사회 혁명"의 의미, 그리고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바꾸닌이 강조하는 자유는 "연대성에의한 자유" 또는 "평등 속의 자유"이다. 그런데 사회 혁명은 "보편적인 위대한 자유"와 "세상 만인의 경제적, 사회적 평등화에 의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바꾸닌에 의하면 자유란 "개개인의 잠재 능력 상태에 따라 나타나는 모든 물질적, 지적, 도덕적 역량의 완전한 발전"이다. 이것이 또한 바로 사회 혁명이 추구하는 바다. 즉 사회 혁명의 목표는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개인들이 말 뜻 그대로 인간적으로 될 수 있는 것,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계발할 권리 뿐만 아니라 모든 재능의 계발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향유하는 것, 평등 속에서 그리고 형제애를 통하여 자유롭고 행복하게 되는 것"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왜 사회 혁명은 파괴를 수반하는가? 이 혁명의 목표가 평화적으로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완전한 자유의 실현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가로막는 각종 장애물은 힘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문제를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회 혁명이 대중, 집단, 꼬뮌, 결사체 그리고 개인들에게까지 완전한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폭력의 역사적 원인 일체와 국가의 권력 및 그 존재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종식시켜야 하는 것은 다름아닌 힘에 의한 조직의 이 낡은 체계이다.
이제 힘을 분쇄하고 격퇴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대부분 문명국들의 현재의 정치적, 사법적, 종교적, 사회적 조직 하에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해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를 달성하고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서 모든 현존 제도를 파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것은 국가, 교회, 법정, 대학, 행정, 군대, 경찰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에 적대하는 특권계급에 의해 구축된 요새들일 뿐이다.
현재 문명 세계의 모든 나라에 오로지 단 하나의 범세계적 문제, 단 하나의 세계적 관심사가 존재한다. 그것은 경제적 착취와 국가의 억압으로부터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인 것이다. 이 문제가 피비린내나는 가공할 투쟁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바꾸닌은 역사상 "그 어느 시기에 혹은 그 어느 나라에서 거리낌없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힘과 두려움에 내몰리지 않은 상태에서 양보하였던 특권 지배 계급의 예가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라고 반문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상 전진을 향한 모든 발걸음은 "피의 세례"를 거친 후에야만 비로소 가능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바꾸닌은 사회 혁명이 수반하는 파괴에 두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그 첫째는 낡은 것의 파괴는 새로운 것의 창조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좀더 중요한 문제인데, 사회 혁명의 파괴는 제도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것이며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첫번째 경우는 "파괴의 욕구가 곧 창조의 욕구"라는 바꾸닌 자신의 유명한 경구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바꾸닌은 그 누구도 최소한의 신질서에 대한 막연한 생각도 갖지 못할 경우 파괴를 목표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미래상이 생생하게 잡힐수록 파괴력은 가층 강해지는 것이다. 바꾸닌은 인민 대중의 봉기가 본성상 자연발생적이고 무질서하고 무자비한 것이며 항상 재산에 대한 대량 파괴를 전제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파괴적, 부정적 욕망은 숭고한 혁명적 대의와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욕망 없이 혁명적 대의는 실현될 수 없다고 바꾸닌은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파괴를 통해서만 신세계는 태동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사회 혁명 및 바꾸닌 사상의 휴머니즘과 직결된 문제다. 바꾸닌은 이딸리아의 지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 바 있다.
그대들을 억압하는 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일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그대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적들의 힘을 무너뜨린 후, 인정의 움직임에 따르라, 그리고 이제 해롭지 않고 무장해제된 쓰러진 불쌍한 악마들에게 인정을 보여라. 그들을 그대들의 형제로 간주하고 사회적 평등이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 그대들과 더불어 살고 일하도록 초청하라.
사회 혁명 및 사회주의는 정치 혁명 및 쟈꼬뱅주의보다 "천배나 더 인간적이며 결코 잔인하지 않다"고 바꾸닌은 단언한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개인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그리고 그에게 계속 영향을 주는 자연 및 사회 환경의 타의적 산물(des produits involontaires)"이라는 바꾸닌의 인간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왕들, 억압자들, 모든 종류의 착취자들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와 사회가 그들에게 만들어 준 사회적 지위의 숙명적인 산물(le produit fatal)"에 불과하며, 비록 악행을 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일반 범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현 사회 조직의 타의적 산물들"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모든 혁명가 뿐만 아니라 현 사회 조직의 희생자들로서 당연히 그 가슴이 복수심과 증오로 가득차 있을 피억압자들과 고통받는 자들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혁명 후의 신사회는 구사회의 억압자들을 자동적으로 신사회 구성원으로 포용해야 하는 것이다. 풍요롭지만 사치가 줄어든 신사회에는 오히려 "이제껏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된 종류의 사치" 즉 "휴머니티의 사치"가 넘치게 되는 것이다. 바꾸닌에 대하여 비판적인 Lechtheim마저도 그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파괴의 열정이 "철저하게 관대한 심성"과 "인간의 본질적인 선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수반한 것이라는 점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물론 바꾸닌은 인민들이 그 분노를 처음 터뜨릴 때 가장 가증스럽고 가장 악착스러우며 가장 위험스러운 사람들 중에서 몇몇 사람을 죽이지 못하도록 확실히 저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폭풍우가 가져 온 재앙만큼이나 불가피하지만 무익한 불행에 비유될 만한 것이다. 그러나 태풍이 일단 지나가면 냉혈적으로 조직된, 위선적, 정치적, 사법적 살륙에 전력을 다해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 혁명에 수반되는 학살은 도덕적이지도 유용하지도 못하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는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활동이 부진했다고 할 수 없는 1793년의 기요띤은 프랑스에서 귀족 계급을 분쇄하지 못하였다. 완전히 분쇄되지는 못한 귀족 계급이 그나마 심대하게 타격을 받았다면 그것은 기요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재산에 대한 몰수와 매각에 의해서였다. 즉 정치적 살륙은 그 어떠한 파당도 죽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특권 계급에 대하여 무력함을 드러내었다. 힘이란 것이 사람 속에 있다기 보다는 사물들의 조직, 즉 국가 제도와 그 자연스런 기반이자 결과인 사유재산제가 특권자들에게 만들어주는 지위 속에 있는 한 정치적 살륙은 무력한 것이다. 바꾸닌은 사회혁명을 통하여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농촌 프롤레타리아를 제외한 여타의 모든 계급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서 사라져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계급의 물질적 기반이 분쇄되어야 하는 것이다. 혁명을 근본적(급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혁명을 위태롭지 않게 하면서 인간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되는 정당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지위와 사물에 대해서는 단호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산과 그 필연적 귀결인 국가를 일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혁명의 모든 비결"이 있다고 바꾸닌은 강조하였다.
이 점에서 사회 혁명은 정치 혁명과 확연히 구분된다. 쟈꼬뱅주의자들과 블랑끼주의자들은 사물에 대한 근본적(급진적) 혁명을 원치 않으며 오히려 인간을 적대하는 유혈 혁명을 꿈꾼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독재, 즉 국가 중앙집권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재산의 재확립을 야기한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혁명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이들은 독재자이며, 혁명의 통제자이며 후견인들로서, 군주국, 귀족 국가, 현재의 부르조아 국가들이 분쇄되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혁명국가의 창건을 꿈꾼다. 따라서 쟈꼬뱅이나 블랑끼주의자들의 승리는 혁명의 죽음을 의미하다.
바꾸닌은 정치 혁명이 사회 혁명에 우선해야 한다는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견해가 심대하고 치명적인 오류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사회 혁명에 우선하며 따라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정치 혁명은 필연적으로 부르조아 혁명으로 되며 그리고 부르조아 혁명이란 오직 부르조아 사회주의만을 촉진시킬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좀더 위선적이고 교묘하면서도 못지 않게 억압적인 새로운 착취로 귀결되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 평등을 그 당면 목표로 삼지 않는 모든 정치 혁명은, 인민의 이해와 권리의 관점에서, 위선적이고 은폐된 반동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민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제적 해방이기 때문이다. 인민의 정치적, 사상적, 도덕적 해방은 바로 경제적 해방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회 혁명은 보편성과 범세계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즉 경제적 착취와 국가의 억압으로부터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은 문명 세계의 모든 나라에 공통된 관심사로서 유일한 범세계적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 혁명은 "한 국민의 단일 혁명일 수 없으며, 그 본성상 국제 혁명"이라고 바꾸닌은 규정한다.
이에 비추어 그 어떠한 혁명도 보편성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즉 "국가를 파괴하며 평등과 정의를 통한 자유를 창조하는 뚜렷한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면, 결코 국경을 넘을 수 없으며 보편적 성격을 지닐 수 없다. 위대하고 유일하게 진정한 세기적 세력, 즉 노동자들을 움직이고 자극하고 고무할 수 있는 한가지 힘은 "세습적 재산 제도와 자본을 보호하는 모든 제도들의 폐허 위"에 이루어지는 진정하고 완전한 "노동 해방"이다.
또한 노동 해방 투쟁에서 국가, 교회, 법정, 대학, 군대, 경찰 등의 권위적, 억압적 제도들을 어느 한 나라에서 타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나라에서 이러한 것들을 타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17-18세기에 근대 국가들의 출현과 더불어 이러한 모든 제도들 사이에는 모든 국경을 초월하여 날로 증대되는 결속과 강력한 국제적 동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구체적인 혁명의 실천 방안이 제기되는 것이다.
B. 대중과 인텔리겐챠의 혁명적 역할
혁명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꾸닌에 따르면 그것은 인민 대중, 즉 노동자들과 농민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혁명의 발발에 있어 개인의 역할을 극히 제한적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혁명은 개인들의 의지나 비밀 결사의 음모와는 무관하게 항상 "사태의 힘"(la force des choses), 즉 "제사건과 제사실의 움직임"에 의해서 야기되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 혁명의 임박을 예감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폭발을 임의로 앞당길 수는 없는 것이다. 바꾸닌에 의하면 혁명은 "인민 대중의 본능적 의심의 심부"에서 오랜 준비기간을 거쳤다가 종종 일견하기에 하찮은 원인들로 야기되는 것이다. 특히 사회 혁명에서는 정치 혁명의 경우와 정반대로 개인들의 활동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대중의 자연발생적 활동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그렇다면 개인 또는 비밀 결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혁명의 조역으로서의 인텔리겐챠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혁명적 인텔리겐챠의 구성원은 "헌신적이고 정력적이고 명민한 개인들로서 야심과 허영심이 없는 진지한 인민의 벗"으로서 "혁명 사상과 인민 본능 사이의 매개역"으로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우선 인민 대중의 본능에 부합하는 사상을 명료하게 체계화하고 이를 대중 속에 전파함으로써 혁명의 조산원으로 일하는 것이다.
만일 모종의 혁명 사상이 인민 대중의 본능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사상은 틀린 것이다. 틀린 사상은 인민에 의해 반드시 거부된다. 반대로 이러한 사상이 인민의 본능과 진정한 생각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라면, 그것은 반항적 대중의 마음 속에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이렇게 인민 대중의 공감을 얻은 사상은 한층 그 실현 가능성이 고조된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 제까브리쓰드(Dekabrist: 12월 당원)들의 좌절은 귀중한 교훈을 준다. 이들의 실패 요인으로 바꾸닌이 지적하는 것은 첫째, 귀족 신분인 이들이 인민과 활발히 교류하지 못함으로써 인민에게 요구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이며, 둘째로 자기 계급의 언어로 대중에게 말하고 인민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함으로써 혁명에 요구되는 신념과 열정을 인민 속에 일깨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텔리겐챠의 또 하나의 역할은 부단한 노력으로 대중의 타고난 역량을 혁명적으로 조직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인텔리겐챠의 조직은 혁명 투쟁의 주역인 "혁명군"(l'arm?e de la r?volution)이 아니라 일종의 "혁명참모부"(?tat-major-r?volutionnaire)인 것이다. 개인들과 결사체가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앞서의 단 두가지 역할 뿐이다. 여타의 모든 것은 "오로지 인민 대중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또 이루어질 수 있다. 바꾸닌의 주장대로 혁명군은 항상 인민이어야 한다.
이딸리아에서의 비밀 결사 활동을 마감하고 1867년부터 쉬스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게 된 바꾸닌은 "새로운 발전의 이니셔티브가 인민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아울러 그는 쁘띠 부르조아지가 "그들 스스로 여하한 종류의 이니셔티브라도 잡기에는 너무 소심하고 비겁하고 회의적으로 되고 말았다"고 비판하였다. 그가 말하는 인민은 서유럽에서는 "공장 및 도시 노동자들"을, 그리고 러시아, 폴란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슬라브 국가에서는 "농민"을 의미하였다.
그러면 바꾸닌은 도시 노동자들과 농민의 양자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1870년 9월 그는 특히 서유럽의 경우 "농민들을 봉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도시 노동자들이 혁명의 이니셔티브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바꾸닌이 보기에 당시로서는 노동자들만이 "사회 혁명의 본능과 명확한 의식과 사상과 그리고 그 반영된 의지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당시 "국가의 존재에 대한 모든 위협은 오로지 도시 프롤레타리아에게 집약되어 있다"고 바꾸닌은 단언하였다.
그렇다면 바꾸닌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어떠한 상황 판단에 근거한 것인가? 당시 빠리에서는 프로이쎈에 대한 패전에 분격한 주민들이 나뽈레옹 3세의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언하였으며 빠리 사수를 결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빠리 노동자들이 주도한 것은 바꾸닌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앞서 유럽 각지에서 전개된 노동자들의 파업에서도 바꾸닌은 커다란 시사를 받았다. 즉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힘을 조직해 나아가는 역량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 후 바꾸닌은 조직 역량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그 자신의 대의 명분에 부합하는 정의에 대한 인식은 프롤레타리아의 경우 승리할 수 있는 세력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현재 프롤레타리아에게 이러한 인식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이 아직도 결여된 경우가 있다면 노동자들 사이에 이를 확립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 그러나 단지 이러한 정의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프롤레타리아는 여기에 더하여 그 자신의 힘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팔 부는 소리에 여리고(J?richo) 성벽이 무너질 때는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힘을 분쇄하고 격퇴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은 노동자 파업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에 따르면 파업이야말로 부르조아 권력과 국가를 무너뜨리고 신세계의 기반을 마련할 "노동자 부대"(rabochee voisko)를 창건하고 조직하는 것으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유럽 노동운동과 관련된 새소식은 한마디로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물론 파업 때마다 노동자들은 고통과 희생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필요하다고 바꾸닌은 역설한다. 왜냐하면 파업 없이는 대중을 사회적 투쟁으로 불러일으킬 수 없으며 이들을 조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파업은 일반 노동자의 의미 없고 즐거움고 희망 없는 고립 상태로부터 그를 끌어내어 동일한 열망과 목표 아래 다른 노동자들과 결속시켜 준다. 그리고 그것은 승리를 위한 강고한 조직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준다.
파업은 모든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사회 혁명적 본능을 일깨워 준다. 경제 투쟁에 의해 이러한 본능이 일깨워지면 사회 혁명 사상의 선전은 훨씬 용이해진다. 왜냐하면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가 자본가 및 재산 소유자들의 이해관계와 절대로 병립할 수 없다는 것, 즉 계급간 화해의 불가능성을 깨닫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부르조아지의 기만적 주장에 미혹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이 보기에 파업은 노동자들을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떼어 놓는 최적의 수단인 것이다.
바꾸닌에게 있어서 유럽 각지의 파업 확산이 의미하는 것은 부르조아지의 뿌리깊은 맹목적 이기심으로 인해서 노자 대립이 더욱 거세지고 자본주의의 "경제적 무질서 상태"가 날로 증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무질서 상태의 종착점인 사회 혁명을 향한 커다란 움직임이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각지의 파업이 규모가 커지고 더욱 치열해지면서 주변지역으로 확산됨으로써 바야흐로 "총파업"의 조건이 무르익는 것이다. 총파업의 유일한 귀결점은 사회의 모습을 일신할 "대지각변동"이다. 바꾸닌은 당시 모든 일이 아직 그러한 종극점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곳을 향해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하였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강고한 인민 대중의 조직이 더욱 필요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할 때 바꾸닌에게서 혁명적 생디깔리슴의 사상적 선구자로서의 한 면모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농민이었다. 총파업으로 치닫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아무리 가열차게 진행되더라도 농민의 협력과 지원 없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유럽에서 그 어느 곳보다 사회 혁명의 가능성이 높다고 바꾸닌이 지목한 이딸리아와 에스빠냐의 경우, 인민 대중의 대다수가 농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농민이 혁명의 성공 여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큰 것이었다. 특히 1871년 빠리 꼬뮌을 결성한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이 농촌의 무관심과 냉담함 속에 좌절하고 만 것은 바꾸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이를 계기로 바꾸닌은 노동자들이 혁명에서 농민을 끌어 들여 제휴하는 문제를 더욱 진지하게 고려하였다. 바꾸닌은 빠리 꼬뮌의 봉기가 진압된 수개월 후에 이딸리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촉구하였다. 즉 사회 혁명의 이름으로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할 것, 이를 행함에 있어 동일한 준비 조직 속에 그들을 농촌의 인민들과 함께 통합할 것 등이다. 왜냐하면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는 단지 정치 혁명만이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치 혁명은 필연적으로 그에 대항하는 농촌 인민들의 자연스럽고 정당한 반발만을 야기할 뿐이다. 이러한 반발 또는 단지 농민들의 냉담함은 빠리 꼬뮌의 좌절에서 나타나듯이 도시의 혁명을 질식시키게 된다. 오로지 범세계적 혁명만이, 부유한 계급들의 자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국가의 조직된 힘을 전복하고 분쇄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범세계적 혁명은 사회 혁명이며, 또한 농촌 및 도시 인민들의 동시 혁명이다.
C. 혁명과 자유 사회의 건설
바꾸닌이 무엇보다도 혁명의 전략 및 전술 문제에 집착했던 것은 그 자신이 혁명의 의미를 무엇보다도 기성 질서의 파괴에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서 혁명 이후 신질서 수립의 정치적 계획을 다음 세대의 몫으로 넘기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혁명 이후 사회의 기본 특성을 몇가지로 예시한 바 있다. 첫째로 그것은 자유로운 연맹에 입각하여 건설되는 사회다. 둘째로 무계급 평등 사회다. 첫번째 문제는 이미 그의 연맹주의에 관한 고찰[제3장 3절]에서 언급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두번째 문제에 중점을 두어 살피고자 한다.
이상적인 미래 사회상으로 무계급 사회를 제시한 바꾸닌의 최대 관심사는 기존 사회에서 계급 구조 및 격차를 심화시키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요인으로 무엇보다도 지배 계급에 의한 부와 지식, 즉 자본과 과학의 독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러한 불평등 구조를 지속시키는 존재는 바로 다름아닌 국가였다. 왜냐하면 국가는 재산 소유권과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며, 과학 발전의 성과에 힘입어 이로부터 소외된 인민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에게 있어서 자본과 과학의 독점을 분쇄하는 것은 국가 타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바꾸닌은 양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본 및 토지에 대한 집단적 소유, 그리고 과학 및 노동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는 "포괄적 교육"(instruction int?gral)을 혁명의 과업으로 제시하였다. 아울러 가는 이러한 과업의 선결 요건, 즉 자유로운 미래사회 건설의 전제로서 상속권의 폐지, 그리고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적용되는 육체 노동의 의무를 주장하였다.
바꾸닌은 상속권의 문제를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란 평등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권리가 존재하는 한, 계급, 지위, 부의 세습적 차이, 한 마디로 사회적 불평등이 법적으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실상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바꾸닌의 관점에서, 사실상의 불평등은 사회에 내재된 법칙에 따라 항상 권리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즉 "사회적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불평등이 된다." 정치적 평등 없이는 보편적, 인간적, 그리고 진정으로 민주적 의미에서의 자유 또는 정치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치적 평등은 경제적, 사회적 평등이 존재할 경우에만 가능해진다. 그렇지 못할 경우, 불평등한 두 부분으로 분열된 사회 속에서 인민 대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부분이 항상 또 다른 부분에 의해 억압되고 착취당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상속권 폐지에 대하여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고 바꾸닌은 보았다. 첫째, 유산을 상속시키려는 개인의 희망 내지는 자유 의사를 짓밟는 일은 타인의 자유의 존중을 강조한 바꾸닌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상속권 폐지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남겨 주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 의욕을 꺾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일부에서 주장되듯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수십만 내지는 백만 프랑을 벌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재산을 상속시킬 권리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이는 자연권 침해 또는 부당한 약탈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꾸닌은 이를 "법의 보호를 받는 도둑"이 죽는 경우에 비유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였다. 일개 노동자의 생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몇몇 개인들이 그토록 많은 재산을 모았다는 것은 특권, "법제적으로 합리화된 불의"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재산상의 모든 이득은 본질적으로 "국가의 재가와 보호를 받은 개인들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노동의 절도"인 것이다.
다음으로 죽은 사람의 유언 내지는 유지의 계승이라는 것도 바꾸닌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일 뿐만 아니라 불평등 구조를 존속시키는 국가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우선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유나 권리나 개인적 의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만 속해 있는 세상을 유령이 지배하거나 억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재산가들이 사후에도 계속 의지를 관철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법제적 허구"나 "정치적 기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즉 죽은 자들이 직접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이름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모종의 권력, 즉 국가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바꾸닌은 상속권 폐지가 국가 타도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상속권 폐지에 대한 또 하나의 있음직한 반론은 이러한 조치가 자식에게 재산을 남겨 주기 위해 일하는 자들의 노동 의욕을 말살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바꾸닌의 논박의 출발점은 노동 욕구란 인간에게 내재된 것으로 열심히 일하는 미혼 청년의 경우에서 나타나듯이 부정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노동 욕구란 다름아닌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마치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말하려는 본능과 같다는 것이 바꾸닌의 입장이었다. 이것은 간단한 실험으로도 증명될 수 있는데, 사람을 며칠간 무위도식하게 한다든지 별로 무지도 않은 돌을 하루종일 아무런 성과 없이 이리저리 옮기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이내 불쾌감과 반발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노동 욕구가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이라면, 놀고 먹는 나태한 자들, 즉 특권계급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 원인은 왜곡된 부정적 노동관에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에 대한 경멸 및 무위에 대한 선망, 그리고 노동과 지성의 분리이다. 전자의 경우 그 연원은 인간에 대한 "여호아의 저주의 산물"이라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여전히 "필요악" 정도로 간주되는 것이다. 물론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 노동의 자유와 "노동의 법적 복권"이 선언되었지만 아직도 노동은 수치스럽고 예속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노동이 삶을 만끽하며 살아갈 가능성을 사람들에게서 박탈하기 때문이며, "여가"(le loisir)의 실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위도식의 가능성이 오히려 영예의 특권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노동관은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소수의 사람이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존속하는 한, 다시 말해서 상속권이 엄존하는 한 바로 잡을 수 없으며 더 나아가 평등 사회의 수립은 불가능하다고 바꾸닌은 보았던 것이다.
한편 노동과 지성의 분리 또는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의 구별은 상속권 존폐의 차원을 넘어서는 좀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르조아 내지는 지배 계급이 내세우는 이른바 '역할 분담론'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지배 계급에 의한 과학 및 지식의 독점을 야기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존 사회에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구별은 예술 뿐만 아니라 연구, 발명, 행정, 산업 경영 등을 포함하는 고상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과 순전히 기계적인 육체 노동에 시달리는 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육체 노동이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일 자체가 고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성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 개명된 사람들도 매일같이 힘겹고 불유쾌한 "수노동(travaux manuels)"에 종사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수의술, 조산원, 해부학자, 유독 물질을 분석하는 화학자 등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통념은 이들의 작업을 평가절하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들의 노동에는 사상 내지는 지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모든 산업 및 농업에서의 노동도 지성과 결합되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배고픔을 면하려는 노동자에게 기계적 작접을 강요해 온 지배 계급의 지식 독점을 극복하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미래의 평등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일해야 하며 동시에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역할 분담론에 입각한 지배계급의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은 모든 사람이 과학 또는 학문에 종사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굶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일부가 교육받고 연구한다면, 또 다른 일부는 생산해야 하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정신 노동자들을 위해서이다. 정신 노동자들도 자신들만을 위해서 과학 발견 및 예술 창작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꾸닌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왜냐하면 기성 사회 조직 안에서는 산업 및 상업 발전이 프롤레타리아의 상대적 빈곤을 심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 발전이 프롤레타리아의 상대적 무지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즉 불평등 사회 속에서는 정신적 진보와 물질적 진보가 공히 프롤레타리아의 노예 상태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는 평등을 원한다. 그리고 평등을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포괄적 교육을 원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반론은 두 가지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첫째는 평등이라는 명분 속에 전체적인 수준이 하락된다는 것이며, 둘째로 아무리 평등한 실시하여도 성과마저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자와 관련하여 역할 분담론자들이 표명함직한 우려는 노동자는 저급한 학자가 되고 학자는 서투른 노동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이 전체적으로 퇴보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학자가 육체 노동을 생소하게 여기지 않게 될 때, 그의 지식은 좀더 성과적이고 유용하고 폭넓은 것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교육받은 노동자의 노동은 좀더 지혜롭고 결과적으로, 무식한 노동자의 노동보다, 좀더 생산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따라서 더이상 노동자 과학자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인간들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노동과 과학 양쪽 모두의 이해에 합치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바꾸닌은 평등한 교육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한시적 정체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에 따르면 뛰어난 학자도 줄어들지만 아울러 무식한 노동자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상화도 경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학자도 노동자도 인간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반에서 과학과 일상 생활에서 넘치는 휴머니티는 이제까지의 성과를 압도하게 된다고 바꾸닌은 낙관했던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들이 과연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시종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이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바꾸닌이 정작 중요시한 미래 평등 사회의 기반은 "출발선의 평등(l'?galit? du point de d?part)"이었다. 평등이 일단 확립된다고 해서 개인 능력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오히려 인류의 자산이 된다. 이러한 다양성으로 인해서 사회 구성원들은 상호 의존하게 되며 연대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과학도 역시 무수한 전문 분야의 하나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은 과학적 사고력을 배양하는 일반 과학에 대한 기본 교육이다. 다만 과학의 전문 분야는 기성 사회에서처럼 특권계급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 노동에 대한 아무런 편견 없이 그 분야에 종사하려는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장애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육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의무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과 분리된 신체적 힘이 우매해지듯이, 육체적 활동에서 분리된 지성은 쇠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 누구라하더라도 어떠한 타인의 노동도 착취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모든 개인이 사람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다양한 자질 개발과 발휘를 위한 평등한 조건을 구비한 사회가 건설되는 것이다.
Ⅴ. 마르크스의 권위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바꾸닌의 아나키즘은 제1인터내셔널(국제 노동자 협회)의 주도권을 놓고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국가 사회주의 노선과 대립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사상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문제는 바꾸닌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자유론 및 혁명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바꾸닌 사상에서 국가란 자유를 억압하는 지배와 권위의 원천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혁명에서는 제1차적인 타도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유로운 무국가 사회의 건설이라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에 공통된 이상에도 불구하고, 국가 권력의 장악을 당면 목표로 정치적 혁명 및 개혁 노선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바꾸닌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꾸닌은 마르크스의 주장에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엘리뜨 지배를 합리화하는 권위주의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의 건설을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획일적이고 전제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마르크스주의 역사 철학의 기반을 이루는 경제적 '결정론'은 선진 공업국의 공장 및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 발전 상태가 낙후된 사회에서, 즉 바꾸닌의 지지세력이 형성된 사회에서, 피억압 인민 대중이 주도하는 혁명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꾸닌은 마르크스 사상이 자유 쟁취의 원동력인 인민 대중의 반란 본능과 의지를 무시하고 경제적 요소만을 강조한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A. 정치적 혁명 및 개혁 노선 비판
바꾸닌은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근본적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아나키스트가 국가의 파괴를 목적으로 삼는 데 반하여 마르크스주의자는 "국가의 정치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며, 전자가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데 비하여 후자는 권위의 원리 및 실제에 대한 옹호자"인 것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마르크스를 비스마르크와 동일한 국가주의자로 단정한다. 그의 표현을 빌면, 마르크스는 "비스마르크의 계승자(le continuateur)"인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목표가 거대한 "인민국가(Etat populaire: Volksstaat)"의 수립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작 '인민국가' 건설을 주창했던 것은 마르크스라기보다는 라쌀(F. Lassalle)이었다. 그렇다면 바꾸닌은 어떠한 근거에서 마르크스를 라쌀과 동일시하고, 더 나아가 비스마르크와 같은 부류라고 매도하였는가?
우선 바꾸닌이 마르크스를 또 하나의 비스마르크로 규정한 것은, 프로이쎈-프랑스 전쟁 발발 직후인 1870년 7월 20일 마르크스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보내어 당기관지인 <폴크스쉬타트(Volksstaat)>지 (9월 11일자)에 게재된 편지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정복될 필요가 있다. 만일 프로이쎈인들이 승리한다면, 국가 권력의 중앙집권화는 독일 노동계급의 중앙집권화에 매우 유용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독일의 부상은 유럽 노동운동의 무게 중심을 프랑스로부터 독일로 옮겨놓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쎈의 승리 후 마르크스의 분신이라고 할 엥겔스도 한 서신에서 비스마르크가 자국에서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이룩함으로써 혁명에 크게 봉사했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한편 바꾸닌은 이러한 내용의 서신에 접한 후, 프랑스의 재앙이 마르크스의 마음 속에 강한 희망을 일깨웠으며 동시에 비스마르크의 승리가 그에게 커다란 부러움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프로이쎈 왕정의 승리가 결국은 자신을 후견인으로 하는 위대한 "인민국가"의 승리로 조만간 귀결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엥겔스와 더불어 자위하였다는 것이다. 바꾸닌은 이러한 근거에서 마르크스를 비스마르크와 다를 바 없는 국가주의자로 규정하였다.
다음으로 바꾸닌은 어떠한 근거에서 라쌀의 '인민국가' 수립론을 바로 마르크스의 목표라고 주장하였는가? 바꾸닌은 라쌀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혁명이 아닌 평화적 개혁을 추구했다는 것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렇다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바꾸닌이 어떻게 개혁 노선보다 혁명적 노선을 추구한 마르크스를 라쌀과 동일시했느냐 하는 것이다. 방법론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꾸닌이 양자의 공통점으로 강조한 것은 어떠한 내용이며, 그러한 바꾸닌의 주장에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양자에 공통된 국가주의 및 권위주의 경향에 대한 배격이었다.
라쌀이 자신이 조직한 당의 최우선적 목표로 내세운 것은 국가의 입법부와 행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보통선거권의 쟁취였다. 그런데 이 당은 엄격한 규율과 그 자신의 독재에 기초한 위계에 입각한 것이라고 바꾸닌은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라쌀과의 노선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터내셔널 속에서 이룩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라쌀의 생각으로는 당의 노력에 의해 합법적 개혁으로 보통선거권을 쟁취한 후 인민들이 자신들의 대의원을 단지 인민 의회에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의회는 일련의 법령에 의해서 인민에 적대적인 부르조아 국가를 '인민국가'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인민국가의 첫번째 과업은 노동자들의 생산 및 소비 협동조합에 무제한의 신용 대부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 후에야 비로소 이 조합들은 부르조아 자본과 경쟁할 수 있게 되며 얼마되지 않아 이를 이겨내고 흡수하게 된다. 이 흡수 과정이 완료되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혁되는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쌀의 프로그램이며,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프로그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라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에 속하는 것이라고 바꾸닌은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1848년의 <공산당 선언>과 1864년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 임시총무위원회 명의로 작성한 첫번째 <국제협의회 선언>을 제시하였다. 후자에는 '노동계급의 제일의 의무는 그 자신을 위한 정치 권력의 쟁취에 있다'는 표현이 있었다. 또한 전자에는 '노동자 혁명을 향한 제1보는 프롤레타리아를 지배계급의 단계로 고양시키는 데 있으며,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바꾸닌은 라쌀과 마르크스의 이론이 똑같이 노동자들에게 최종적인 이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당면한 중대 목표로서 '인민국가'의 수립을 권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인민국가'란 바로 '지배계급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배계급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통치의 정상부에 있게 된다는 것인가? 바꾸닌은 여기에 강한 회의를 표시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인의 수만해도 약 4천만명인데 이들이 모두 정부 요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꾸닌은 전인민이 지배하게 된다는 이른바 '인민국가'의 내재적 모순을 국가의 속성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전인민이 지배하게 되고 지배받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정부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국가가 존재하게 된다면, 지배가 존재하게 되고 노예제가 존재하게 된다. ... 노골적이든 은폐되었든 노예제 없는 국가란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국가의 적인 이유다.
국가를 말하는 자는 지배를 말하는 자다. 그리고 지배를 말하는 자는 착취를 말하는 자다. 그리고 이것이 증명하는 바는, 불행히 아직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의 표어가 되고 있는 '인민국가'라는 말이 가소로운 모순이며 허구이며, ... 또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매우 위험한 함정이라는 점이다. 국가는 아무리 인민적 형태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지배와 착취의 도구가 될 것이며, 따라서 인민 대중에게는 노예제와 빈곤의 영원한 근원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해답은 결국 대의제뿐이라고 바꾸닌은 지적하였다. 라쌀 노선과 마찬가지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구성원 선출을 위한 인민의 보통선거권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결론이었다. 즉, 이들이 의미하는 '인민정부'란 결국 인민에 의해 선출된 소수 대의원들을 통한 인민의 지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수 지배층의 전제를 은폐하는 것으로서 인민 의지의 거짓 표현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고 바꾸닌은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인민국가'의 지배층이 왕년의 노동자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일단 지배자나 인민의 대의원만 되면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며, 지배자의 높은 자리에서 육체 노동의 세계 전체를 내려다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자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바꾸닌은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 프롤레타리아 수천명에 의한 권력 행사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바꾸닌은 보았다. 결국 선출된 소수 집단에 권력이 위임되기 마련인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기만적인 대의제 내지는 부르조아 지배체제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바꾸닌은 자신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사람에 대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반론도 예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인민은 실제로 스스로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에 복종하는 것이 이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후견적, 지배적 소수의 자의에 종속되는 것이거나 또는 자의로 노예가 되는 것 이외의 것은 결코 아니다.
바꾸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 소수자의 독재가 암시적인 것이며 단명할 것이라는 단서를 붙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시적 독재의 유일한 관심과 목적이 일정한 단계까지 인민을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교육시키고 양육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지배가 이내 불필요해지고, 국가는 그 정치적 성격, 곧 그 지배적 성격을 상실하여 경제적 이해관계와 공동체들의 완전히 자유로운 조직으로 저절로 변모되는 단계이다. 바꾸닌의 관점에서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모순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만일 그들의 국가가 진정으로 인민의 국가라면, 왜 그것은 해체되어야 하는가? 만일 그 폐지가 인민의 진정한 해방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감히 그것을 인민적인 것[국가]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결국 마르크스 및 라쌀의 국가주의 성향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바꾸닌은 '인민국가'를 포함하여 여하한의 국가도 전제와 노예제를 초래하는 "굴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이미 너무 오래도록 지배받아 왔는바 그 불행의 원천이 이런 저런 형태의 지배(정부: gouvernement)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류를 막론하고 지배(정부)라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는 것이었다.
B. 엘리뜨주의와 권위주의 비판
자유의 열렬한 옹호자인 바꾸닌은 마르크스 사상에 내재된 권위주의 및 엘리뜨주의의 요소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특히 이러한 요소가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함의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것은 '과학'의 이름과 그 권위로 일반 대중을 지배하려는 소수 지식인의 독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고 해서 바꾸닌이 과학 자체를 배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모두 미신을 끝장내고 신앙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과학에 대한 옹호자"라고 보았다. 양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가 과학을 "전파(propager)"하고자 노력하는 데 반해서 후자는 이를 "부과(imposer)"하고 싶어 한다는 데 있다. 바꾸닌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전파로 마침내 확신을 얻은 인간 집단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에 부합하는 그들 자신의 운영에 의해서 창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밑에서부터 위로 스스로 조직하고 연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몇몇 우월한 지성인들에 의해서 미리 검토되고 "무식한 대중들에게(aux masses ignorantes)" 부과되는 계획에 의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꾸닌의 생각으로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그토록 많은 어설픈 시도에다 아직도 자기들의 노력을 더하는 척하는 모든 "박사들과 인류의 선생들"의 심오한 지성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인민 대중의 본능적 열망과 진정한 욕구 속에서 훨씬 더 많은 실천적 이성과 정신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권위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활발한 논의, 즉 노동자 세계 속에서 그 나름의 사상적 발전을 죽이게 되는 것은 바로 공식적 이론의 존재이다. 이러한 비상하게 위대한 두뇌의 고립된 활동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발견된 공식적 진리(v?rit? officielle)가, ... 즉, 마르크스의 시나이 산정에서 선포되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는 진리가 있게 되는 순간부터 토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꾸닌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과학적' 사회주의의 노선에 입각한 혁명이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국가와 소수 엘리뜨의 독재 체제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아나키즘의 이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 노선에 따른 혁명 과업이란 구체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에 의한 재산가 및 자본가의 착취"와 "토지 및 자본의 몰수"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대한 경제적, 사회적 사명을 수행하려면 이러한 국가는 강력하고도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정부는 대중을 정치적으로 통치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활동 - 생산, 부의 분배, 농업, 공장 건설, 무역의 조직과 통제, 유일한 은행인 국가에 의한 생산부문 투자 - 을 자기 수중에 집중시키며, 대중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방대한 과학(une science immense)"과 아울러 이를 담당하는 두뇌 집단을 필요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과학적 지성의 통치(le r?gne de l'intelligence scientifique)"로서 모든 지배체제 중에서 "가장 귀족적이고, 가장 전제적이고, 가장 오만하고, 가장 고압적"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새로운 계급, 새로운 지위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과학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소수"와 "무지한 대다수"로 양분되는 것이다. 라쌀과 마르크스의 저작과 연설에서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는 '학식있는 사회주의자', '과학적 사회주의' 같은 말들이 오로지 증명하는 점은 이 사이비 인민국가라는 것이 새로운 "소수의 실제적인 귀족들"이나 "사이비 지식인들"에 의해서 인민대중에게 자행하는 전제적 지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배우지 못한 인민들은 그 때문에 모든 지배 업무로부터 해방되어 모두 지배당하는 무리로 편성된다. 바꾸닌은 "웬 해방이냐!(Khoroshcho, osvobodenie!)"라고 개탄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유는 지켜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병영 체제(un r?gime de casernes)"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획일화된 남녀 노동자들이 북소리에 마추어 기상하고 취침하며 일하고 살아 가는 것"이다. 반면에 능력과 지식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배의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꾸닌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란 오직 독재 - 물론 그들의 - 만이 인민의 의지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그 어떠한 독재도 그 자신을 영속화시키는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용인하는 인민 속에 오로지 노예제만을 잉태시킨다. 자유는 자유를 통해서만 ... 창조될 수 있다.
C. 결정론 비판
바꾸닌은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을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이 이론은 역사적 발전 단계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선진국의 사회주의 혁명과 이를 담당할 공장 노동자 및 도시 프롤레타리아에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바꾸닌의 지지 기반인 라틴권 유럽에서의 사회 혁명을 역사 발전에 역행하는 것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꾸닌은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 및 혁명의 추동력과 주체를 획일적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바꾸닌은 우선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과 그의 혁명 노선 사이의 불일치를 지적함으로써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바꾸닌은 그의 국가론에서 비판을 시작하였다. 바꾸닌은 마르크스가 경제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비경제적 요소들을 지나치게 무시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에 있어서 국가란 "경제 여건의 산물"이자 그 "충실한 반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빈곤(la mis?re)" 즉 경제적 착취구조가 "정치적 노예제, 즉 국가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결론은 '국가를 바꾸려면 경제를 바꾸라'였다. 그 역은 마르크스에게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역이란 바로 바꾸닌의 노선이었다. 즉 "정치적 노예제인 국가는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서 빈곤[경제적 착취 구조]을 주체적으로 재생산하고 유지시키기 때문에 빈곤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분쇄해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경제적 결정론자인 마르크스는 아나키스트들이 정치적 노예제, 즉 국가를 빈곤의 실제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이와는 완전히 모순되게 자파 세력,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에게는 정치 권력 장악과 정치적 자유 획득을 경제 해방의 필수불가결한 선행조건으로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엄격히 경제적 차원에서 생각하여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선진국에서만 혁명을 선도, 장악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역사적 발전단계론에 입각하여 아나키스트들을 비판하는 점은 "역사의 완만한 진행을 재촉하고 앞서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연속적인 진화의 확고한 법칙(la loi positive des ?volutions successives)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꾸닌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에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외면했던 것이다. 즉, 각 종족 및 민족의 기질 및 특성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경제적, 역사적 제조건에 의해서 형성되지만, 일단 형성되면 경제적 조건과는 별도로 한 나라의 경제력의 운명과 발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바꾸닌은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은 "반란 본능의 정도(l'intensit? de l'instinct de r?volte)"였다. 그는 독일 민족성에는 많은 장점이 있으나, 이것만은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바꾸닌은 이러한 문제를 다가오는 사회 혁명의 주체와 직결시켰다. 즉 반란 본능이 결여된 "독일 프롤레타리아"가 사회 혁명을 주도하기보다는 오히려 혁명이 다른 곳으로부터, 아마도 "남국으로부터(du Midi)" 이들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바꾸닌은 예상했던 것이다. 바꾸닌이 말하는 남국이란 남부 유럽, 즉 이딸리아 및 에스빠냐, 그리고 더 넓게는 프랑스를 포함한 라틴 문화권을 의미하였다. 또한 남부 유럽과 러시아에는 공업이 낙후되어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세력이 미약하지만 그만큼 부르조아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빈민 대중이 있었다. 바꾸닌에게는 이들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꽃(fleur du prol?tariat)"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꽃이란 무엇보다도 이 엄청난 대중, 문명화되지 못하고 혜택받지 못했으며 비참하고 글을 모르는 이 수백만의 사람들이다. ... 바로 정부의 이 영원한 먹이(cette chair ? gouvernement ?ternelle), 이 엄청난 천민 대중(cette grande canaille populaire)이다. 이들은 부르조아 문명에 의해서 거의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내부에, 자신들의 열정, 본능, 열망 속에, 그리고 자신들의 집단적 위치에서 비롯되는 모든 궁핍과 빈곤 속에, 미래 사회주의의 모든 씨앗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들만이 오늘날 사회 혁명을 유발하고 승리로 이끌기에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꾸닌은, 마르크스가 경제 결정론에 근거하여 그리고 특히 독일 프롤레타리아를 염두에 두고 주목했던 공장 노동자와 도시 프롤레타리아보다는 반란 본능을 지닌 라틴권 유럽과 러시아의 노동자, 농민, 빈민, 천민을 포함한 인민대중을 사회 혁명의 주체로 파악했던 것이다.
Ⅵ. 결 어
바꾸닌은 1876년 7월 1일 베른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아나키즘의 종말이라기보다는 아나키즘 운동의 본격적인 서막이었다. 바꾸닌이 제1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그 이론 체계를 세웠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으로부터 19세기 말 - 20세기 초 아나키즘 운동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이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의 대표적 이론가인 끄로뽀뜨낀을 포함하여 Elis?e Reclus, Jean Grave, Sebastien Faure, Emile Pouget (이상 프랑스), Carlo Cafiero, Enrico Malatesta, Covelli (이상 이딸리아), R. Mella, A. Lorenzo (이상 에스빠냐), Johann Most (독일), August Spies, Albert Parsons (이상 미국), P.L. Lavrov (러시아) 등은 모두 바꾸닌의 계승자로 볼 수 있다.
바꾸닌 이후 아나키즘 운동의 전개는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로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다만 본 논문의 테두리 안에서 아나키즘 운동과 관련하여 필자로서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은 아나키즘 사상, 특히 바꾸닌 사상에 내재된 실천적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바꾸닌 사상의 핵심적 부분인 자유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가 추구한 자유는 물론 개인의 자유이지만, 좀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개인의 자유'였다. 바꾸닌은 이를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그는 자유의 연대성 내지는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유의 고립성을 전제하는 사회계약론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즉 계약으로 자유의 일부를 양도함으로써 성립되는 사회 이전의 상태 -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던 이른바 '자연상태' - 에서 가장 완벽한 자유가 존재한다는 계약론의 전제에 바꾸닌은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본원적인 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바꾸닌에게 있어 자유란 인간이 사회 속에서 만들어 가고 확대해 가는 것이었다. 즉 자유란 실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었다.
자유가 연대적이라는 논리와 자유가 인간의 실천에 따라 창출된다는 논리의 결합은 바꾸닌으로 하여금 자유의 전사가 되도록 하였다. 바꾸닌의 자유론에서 한 개인의 자유는 얼마든지 한 민족의 자유로도 치환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피억압 민족이나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봉기의 성공 가능성 여부에 개의치 않고 어디든지 달려 갔던 것이다. 그는 빠리에서 1848년 2월 혁명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848년 6월 프라하 봉기와 1849년 5월 드레스덴 봉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시베리아 유형 생활에서 탈출한 뒤로 비록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지원하는 원정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1870년 9월 보불전쟁의 와중에서 발발한 리용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1874년 8월 불발로 끝난 볼로냐 봉기에 참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바꾸닌의 이러한 행동주의와 혁명 지향성이 바로 그의 자유론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본다.
▒▒The Autonomy Review
아나키즘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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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사상사는 한번 요동하는데 수세기를 요하는 진자(?子)의 요동을 연상케 한다. 장기간의 수면기를 지난 후에 각성의 기간이 오는 것이다. 그때 사상은 당국자―즉 지배자, 입법자, 승려―들이 세심히 주의하여 사상을 속박하여 놓았던 사슬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다.
사상은 사슬을 끊어 부순다. 사상은 지금까지 자기를 잘 익혀 오던 모든 것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자기를 양육하여 준 종교적 정치적 법률적 편견이 공허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찾아나갈 연구로 출발한다. 그 신발견을 가지고 우리들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새로운 과학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의 적년(積年)의 적―지배자, 입법자, 승려―은 졸지의 그들의 패배로부터 회복한다. 그들은 점차 그들의 허물어진 힘을 다시 집결하여 새로운 요구에 그들을 적합시키도록 그들의 신앙과 법전을 개작(改作)하고 다음에 그들이 대단히 유효하게 교양해 오던 사상과 성격의 노예성을 이용하고 또 사회의 일시적 혼란도 이용하고 다시 어떤 사람들의 나태와 기타의 탐욕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최대의 희망을 이용하여 저 자들은 먼저 교육에 의하여 아동들을 잡고 파고 들어가서 슬금슬금 저희들의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동의 의지는 연약한 것이다. 그들을 위협하거나 유혹하기는 대단히 용이하다. 그들(지배자, 입법자, 승려)은 그것을 실행한다. 그들은 아동을 아주 겁쟁이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는 지옥의 고민상(苦憫狀)의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들려준다. 그들은 벌을 받은 사람들의 고뇌와 용서할 줄을 모르는 신의 복수를 아동들 앞에서 가장 당연한 일처럼 허풍을 치며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그들은 아동으로 하여금 ‘질서의 벗’답게 만들기 위하여 형벌과 고문의 무서움을 지껄여가면서 어떤 혁명가의 폭동의 경우를 실증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승려는 아동으로 하여금 법률관념에 습관이 들도록 하고, 그 ‘신의 율법’이라고 불려지는 것에 대하여 무엇보다 더 잘 복종하도록 시킨다. 또 법률가는 국가의 법률을 잘 준수하도록 신의 율법을 늘어놓아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굴종의 습관이라고 하는 것을 말로는 익히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마는 노예적이면서 동시에 강권적인 종교적 성벽(性癖)은 이 굴종의 습관에 의하여 다음 세대 사람들의 사상이 보수(保守)하고 지지(支持)하여 가는 것이다. 노예적이며 동시에 강권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양자가 항상 서로 제휴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수면기의 막간에는 도덕과 같은 것은 아주 논의도 되지 않는다. 종교적 제의와 법률적 위선이 대용으로 된다. 민중은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무의식적으로 그저 습관과 무관심에 끌려간다. 그들은 기성의 도덕에 대하여는 이것을 옹호하는 일도 이것을 반대하는 일도 조금도 괘념(掛念)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행동이 자기들의 직업과 일치하게 되도록 외관을 장식하기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사회의 도덕적 평면은 점차로 저하하여 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퇴폐기의 로마의 도덕이나 구제도의 도덕이나 혹은 중산계급 우월기의 종말의 도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 있어서 선하다, 위대하다, 관용하다, 혹은 독립적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조금씩 곰팡이가 피어서 내버려둔 주머니칼 모양으로 동녹이 쓸고 만다. 허위가 덕행으로 되고 평범이 의무로 되어진다. 자기를 부유하게 하고 자기의 기회를 붙잡아 가지고 사물의 여하를 막론하고 자기의 지혜와 열심과 정력을 다한다고 하는 것이 부유계급의 표어가 되어 있다. 다음에 지배계급과 법관, 승려와 좀 유복한 계급의 타락이 격심하여 짐에 따라 사람들의 반항을 환기하게 되어 마침내 진자(?子)는 다른 방향으로 동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점차 청년은 자기를 해방한다. 그들은 그 편견을 내던져버리고 비판을 하기 시작한다. 사상은 최초 소수자들 사이에 어렴풋이 눈이 떠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각성은 대다수에까지 파급되어 간다. 이와 같이 하여 충동은 일어나지고 반항과 혁명이 이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마다 도덕의 문제가 재연된다. “어째서 나는 이 위선적 도덕의 원리에 따르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하고 종교적 공포로부터 해방된 두뇌는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도덕이라는 것은 의무로서 속박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다음에 민중은 모든 기회에서 봉착하지만 그들 자신으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도덕적 감정에 대하여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이 인간성에 한하여서만 있는 특권이라고 믿고 있는 한, 즉 그들이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동물이나 식물이나 암석에 이르기까지 더듬어 가보지 않는 한에는, 그들은 도덕을 설명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해답을 그 시대의 과학에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전통적 도덕이라고 할까, 아니 차라리 도덕의 본거(本據) 그것을 봉쇄하고 있는 위선의 근저가 동요할 것 같으면 동요할수록 더욱 더욱 사회의 도덕적 평면이 앙양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민중이 도덕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있을 때 바로 이러한 때야말로 도덕적 감정이 가장 진보하는 것이다. 도덕이 성장하고 앙양되어 정련되는 것은 바로 이때다.
이러한 일이 18세기에 일어났다. 즉 1623년에 이르러 그 저작 『꿀벌 이야기』와 그것에 첨부한 주해를 가지고 영국을 매도한 저명의 작가 맨드빌(Mandeville)은 도덕의 미명하에 알려지고 있는 사회적 위선을 대담하게 공격하였다. 그는 소위 도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과 또는 우리가 그 시대의 도덕법전에 의하여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욕이 얼마나 반대로 이 법전의 통제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욱 더 악한 방면으로 나가고 있는가를 교시하였다. 그는 푸리에(Foulier)와 같이 정욕에 대하여 자유의 천지를 주장하였다. 이 자유의 천지가 없이는 정욕은 잔악한 행위로 타락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시대에 있어서의 동물학적 지식의 결핍 즉 동물의 도덕을 무시하였던 점에서 그는 자기깐에 유누(遺漏)없이 도덕적 관념의 기원을 양친과 지배계급과의 재미있는 아첨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설명하였다.
얼마 후에는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및 백과전서가들에 의하여 도덕적 관념에 대한 맹렬한 비평이 나오기 시작하게 된 것은 세인의 주지하는 바이다. 또 우리들은 1790년경의 자유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기억하고 다시 또 우리들은 법률 준수자들 사이에도 또 애국자들 사이에도 심지어는 “지상존재자(至上存在者)”(신)에 대한 의무나 도덕적 비준에 대하여 현혹하고 있는 쟈코방(Jacobin)당이나 큐이요(Cuyau)와 같이 의무도 도덕적 비준도 일체 부정하는 하바아트(Hebertistes)파의 무신론자들 사이에도 도덕적 정감의 더욱 더 높은 발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째서 도덕적이 아니면 아니 되나?”―이것이 12세기의 유리주의자(唯理主義者)나 16세기의 철학자나 18세기의 철학자와 혁명가들이 직면했던 문제이었다. 그 후대에 와서 이 문제는 영국의 공리주의자 벤담(Bentham)과 밀(Mill)들 사이에 또 뷰히네르(Buchner)와 같은 독일의 유물론자들 사이에 다시 또 1860년으로부터 1917년까지의 러시아의 허무주의자들 사이에 그리고 자유사회주의 윤리학(사회도덕과학)의 유명한 청년창설자―유감스럽게도 너무 일찍이 요절한 큐이요―에게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최후로 이것은 금일의 청년 자유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인 것이다.
아! 좋다!
20년전 러시아 청년들은 이 문제로 인하여 열정적으로 떠들어댄 일이 있었다. 한 젊은 허무주의자1)가 그 친구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부도덕한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그는 그 친구에게 하등의 평온한 생각을 주지 못하던 사상을 행동으로 나타냈다. “나는 부도덕자가 되겠다. 그런데 어째서 부도덕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가?” 그것은 성서(聖書)의 의지인 까닭인가. 그러나 성서라고 하는 것은 바빌로니아인이나 헤브라이인의 전통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바스크(Basque)인의 시나 몽고인의 신화를 지금도 아직 수집하고 있지만,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면 나는 동양의 반개인종(半開人種)의 정신상태로 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나는 칸트2)가 지상명령에 대하여 즉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그것의 심저(深底)로부터 나에게 주어져온 그 신비적인 명령에 대하여 말씀하였고 나에게 도덕적이 되라고 경고하였다고 하여서 그 까닭으로 나는 도덕적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이 “지상명령”이 가끔 나에게 술을 마시라고 명령할 수 있는 어떤 다른 명령보다도 큰 권위를 나의 행동상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은 우리의 무지를 은폐하기 위하여 발명되어진 “섭리”라든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그 어구와 같이 언어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닌 어구에 불과한 것이다.
“혹은 하천 독류에 떨어진 지나가던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하천으로 뛰어들어 내가 빠져 죽는 편이 그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내가 보고서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행복스럽다”고 나에게 믿도록 설복하는 벤담3) 덕택으로 나는 도덕적이 아니어서는 아니 되는가?
“혹은 또 이와 같이 교육되었기 때문에 나는 도덕적이 아니면 아니 되는가? 나의 모친이 나에게 도덕을 교훈하였던 까닭으로 그대로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친 우리들의 인자하시고 순박하지마는 무식하신 모친이 이와 같은 허풍선이 사례를 얼마든지 교훈하여 주셨다고 말하는 그러한 이유만으로 나는 교회에 거서 무릎을 꿇고 여왕을 찬미하고 재판관 앞에 머리를 수그리는 것일까?”
“나는 편견을 받아가진―그 누구 모양으로 나는 그러한 편견으로부터 자기를 해탈시켜야 하겠다. 가령 부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혐오할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억지로 나 자신을 부도덕으로 나가게 하겠다. 흡사히 내가 어린아이인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유치한 노릇을 하지 않도록 자기로서 억지의 노력을 하던 것과 같이.”
“종교에 의하여 남용되던 무기를 싹둑 꺾어 버리는 것은 부도덕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감행하겠다. 가령 그것이 도덕이라고 하는 미명이 씌워진 어구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의 머리 위에 덮어씌운 위선에 대하여 방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모양으로 러시아의 청년은 그들이 구세계의 편견과 결연히 손을 끊은 때에 생각하기를 그리고 강권이 얼마나 존경되어져 있다손 치더라도 어떠한 강권의 앞일지라도 무릎을 꿇지 않고 이성에 의하여 확립되어져 있지 않는 한에는 어떠한 원칙일지라도 인정하지 않는 까닭에 이 허무주의 아니 자유사회주의의 기치를 들고나서는 것이었다.
다시 한 마디 더 부과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의 교훈을 쓰레기통 속에 던져버리고 일절 도덕의 체계를 불살라 버린 뒤에 허무주의의 청년들은 그들의 선조가 “복음”이라던가 “양심”이라던가 “지상명령”이라던가 혹은 공리주의자의 “승인된 편익”(L'interet bien Conpels)이라던가 하는 것들의 통제하에 실행하여 온 도덕보다도 무한히 탁월한 도덕적 습관의 핵심을 그들의 한가운데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나는 도덕적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 문제가 여기에서 적당하게 제기되어 있는가 않은가를 고찰하고 인간의 행동의 동기를 분석하여 보자.
2
인간은 각종각양의 방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의 선조가 설명하려고 할 때에 그들은 대단히 단순한 방식을 가지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이 설명을 하는데 카톨릭교의 어떠한 우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나서 자기의 길을 자기가 걸어 나가고 있지만 그러나 조금도 느끼는 바가 없이 자기의 왼편 어깨에 악마를 얹어놓고 오른편 어깨에 천사를 메고서 걷고 있다. 악마가 그로 하여금 악을 하라고 독촉할 것 같으면 천사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못하도록 만류하려고 한다. 그래서 만약 천사가 이겨서 그 사람이 덕을 떠나지 않고 나갈 것 같으면 다른 3명의 천사가 그를 떠메고서 천당으로 데려간다. 이 모양으로 무슨 일이나 감탄할 만큼 잘 꾸며대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러시아의 나이 많은 유모들은 애기의 셔츠칼라 단추를 빼지 않고서 어린 애기를 침상에 결코 눕히지 말라 턱밑의 따뜻한 곳에는 호위의 천사가 잘 수 있도록 열어 놓아두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는 애기가 자고 있는 틈이라도 애기를 들볶아댈 것이라고 여러분에게 타이를 것이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개념은 지금은 벌써 과거지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옛 이야기는 없어질는지 모르나 그 근본적 관념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상당히 교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벌써 악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관념은 유모의 그것에 비하여 그리 많이 합리적으로 되어 있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철학의 명목을 가지고 채색을 한 학구적 술어하에 악마와 천사를 가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에 와서 “악마”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肉)”이라던가 “정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사”는 “양심” 또는 “영혼”이라고 하는 말로 바꿔놓아지고 “창조신의 사상의 반영”이라던가 또는 석공이 말하는 것처럼 “대건축사(大建築師)”라고 하는 말로 대용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은 두 개의 서로 적대하는 요소간의 투쟁의 결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들 두 개의 요소 중의 하나―영혼 또는 양심―이 다른 요소―육 또는 정욕―에 대하여 우승하는 정도에 정비례하여 인간은 도덕적이 되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영국의 철학자, 그 후에 백과전서가4)들이 이들 원시적인 관념에 반대하고서 악마도 천사도 인간의 행동에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선이건 악이건 유용하건 유해하건 간에 모두가 단일한 동기 즉 쾌락의 욕구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때 우리의 증조부들께서 놀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모든 종교적 결사, 그 중에도 바리새5)의 다수 종파들은 “부도덕한”자들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들은 사상가들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이 사상가들을 종교의 난적(亂賊)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후대 세기가 점점 진전함에 따라 마찬가지 사상이 벤담, 존 스튜어트 밀6), 체르니 체프스키(Tcherny Chevsky)7)와 기타 다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재차 채용되었을 때, 또 그들의 사상가가 이기주의, 즉 쾌락에 대한 욕구가 우리 인간의 행동의 참으로 모든 동기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입증하기 시작한 때 저주는 배가하였다. 저자(著者)는 언론억압 모의(謀議)에 의하여 금지되고 저자는 악인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이론으로부터 그래도 더욱 진실한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어린아이에게서 최후 한 조각의 빵을 탈취하여 먹었다고 하자. 온 세상 사람들은 이 남자녀석은 무서운 이기주의자이며 또 이 남자녀석은 단지 자기애에만 끌리는 욕심쟁이라고 지칭하는데 일치하리라.
그러나 여기에 별개의 한 사람이 또 있어서 그 사람은 온 세상 사람들이 보고서 유덕(有德)한 사람이라고 다들 일치하게 칭찬한다고 하자. 그는 자기의 최후 한 조각의 빵을 기한(飢寒)에 쓰러지는 사람에게 내어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히기 위하여 단 한 벌밖에 없는 코트를 벗어주었다고 하자. 그런데 도덕론자들은 그 종교적 망상에 집착하여 즉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기부정의 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 사람은 이기주의자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감정에 끌려가고 있다고 하리라. 그러나 조금 반성하여 볼 것 같으면 우리는 이 양자 행동의 인도(人道)에 대한 결과에는 얼마만한 큰 상위가 있다 할지라도 그 동기는 오히려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 동기는 즉 쾌락의 탐구이다.
만약에 최후 한 매의 셔츠를 벗어준 사람이 그 셔츠를 벗어주는 데서 하등의 쾌락도 느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어린아이로부터 빵을 탈취하는 데에 쾌락을 느꼈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짓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짓은 실제 그 사람에게는 불쾌천만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까닭에 주는 것이다.
만약에 일반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의의를 가진 어휘를 새로운 의미로 사용하여서 혼란을 일으키는 불편이 없다고 하면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이 사람들은 이기주의라는 충동하에 행동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상을 자극하는 형식에서 그것을 표현하는데 의하여 사상을 명석하게 하고 관념을 정확하게 하는 동시에 이들 두 가지 행동은 두 가지 상이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화를 타파하기 위하여 실상은 전술(前述)과 같은 말을 한 것일 것이다. 그들은 쾌락의 추구 또는 그것과 맞먹는 고통의 회피라고 하는 동일한 동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가장 잔인한 악당, 즉 35,000인의 파리인을 학살한 지론드당의 한 사람이나 또는 주색에 탐하여 전가족을 몰살한 암살범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그 순간 영예 또는 금전에 대한 욕망이 모든 다른 욕망에 비하여 우월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연민의 정이나 또는 동정심까지도 이 한 가지 욕망 이 한 가지 갈망에 의하여 그 순간 그만 사라지고만 것이다. 그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그들의 본성의 요구를 만족케 하도록 행동한 것이다. 또는 이러한 강렬한 격정을 일으킬 일은 별문제로 치고 자기의 친구에게 사기치고 누구에게서든지 맥주값을 구하려고 할 때마다 거짓말을 하고 또는 아마 까닭없이 허풍치는 것이 좋아서 거짓말을 하고 또는 교활한 까닭에 남을 항시 속이는 비열한 남자를 예로 들어보라. 또 자기의 처나 애첩에게 보석패물을 사서 주기 위하여 노동자를 학대하는 고용주를 예로 들어보자. 그 외에 여러분의 마음대로 어떠한 악한이라도 예로 들어보라. 그자들도 역시 충동에 끌려서 행한 것밖에 아니다. 그자들은 욕망의 만족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자들은 자기에게 곤고(困苦)를 피하려는 요구의 만족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전생애를 피압추자(被壓追者)의 해방을 위하여 희생을 바치다가 급기야는 단두대에 올라간 러시아의 허무주의자와 같은 사람들과 이러한 상기의 악한들과 비교하여 말하는 것부터 우리는 수치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들 두 개인의 생활의 결과는 인도(人道)에 대하여 거대한 차이가 있다. 그 까닭으로 우리는 일방에 대하여는 존경과 숭배를 바치도록 느끼지만 타방에 대하여는 천시하고 배척하고 싶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마는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순교자, 지금 막 처형을 하게 된 부인과 이야기를 하여 본다면 그녀가 방금 교수대로 걸어가며 최후의 시간이 일초 일초 가까워 오는 그때일지라도 그녀는 자기의 생이나 사가 노동자로부터 도취(盜取)한 금전으로 생활하는 비열한 악한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교환하기는 진저리나게 싫다고 말할 것이다. 그녀의 생활에서 즉 괴물과 같은 권력과 투쟁하는 데에서 그녀는 자기의 최고의 환희를 통절히 느끼는 것이다. 투쟁이외의 일체 즉 자본벌(資本閥)의 추악한 환락도 비루한 곤고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조소할만한 것이며 번뇌할만한 것이며, 또 연민할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여러분은 살고 있어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먹기만 하는 밥버러지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그녀는 대답하리라. “나는 지금 죽어도 영혼이 살아 있다”고 하리라.
우리는 물론 우리의 생활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무의식의 거대한 계열 즉 기계적 행위에 불과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지금 여기에는 말하기를 그만 두기로 하고 인간의 사려있는 의식적 행위에 대하여서 우선 말하는 바이다. 인간은 그 사려있는 의식적 행위에서 항상 자기에게 쾌락을 주는 것을 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대단히 술을 잘 마신다. 그리해서 자기의 신경계통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신경의 흥분을 술에서 구하는 까닭에 매일 매일 금수 상태에까지 자신을 저하시키고 만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술을 도무지 마시지 않는다. 가령 술이 유쾌하다는 것은 알지만 술을 마시는 것보다도 다른 좋은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까닭에 자기의 사상을 신선히 지니고 자기의 정력을 풍부하게 지니고 싶은 까닭에 아무런 주류도 마시지 아니한다. 그러나 정교한 요리 메뉴판을 한번 보고서 자기가 가장 즐겨하는 것을 충분히 먹기 위하여 즐기는 음식일지라도 거부하는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재판관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어떻게 행동을 할 것일까?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쾌락을 구하거나 또는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다.
어떤 부인이 초면의 내방객에게 주기 위하여 자기의 최후의 한 조각 빵을 내놓을 때, 또 자기도 기선 갑판 위에서 떨고 있기는 하지만 추위에 고통하고 있는 다른 부인에게 입히기 위하여 자기의 한 겹의 남루한 의복을 벗어 줄 때, 그 부인은 자기가 떨고 굶주림을 느끼는 것보다도 다른 주린 사람이나 추위에 떨고 있는 여자를 보는 편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까닭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부인은 고통을 회피한 것이며 그 고통에 대하여는 다만 그것을 느낀 그 사람만이 그 느낀 아픔의 정도를 알고 있는 것이다. 큐이요8)가 인용한 이야기의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자기가 아직 친족의 피살을 복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관념하에 그 고민으로 쇠약하여 갈 때, 또 그가 자기의 비겁을 통탄하는 데에서 수척해지고 창백해져서 복수행위를 감행하기까지는 생기가 돌아서지 않을 때, 그는 자기를 포로하고 있는 감정으로부터 해방하고 쾌락의 최고인 내적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러한 행위를 하고 때로는 영웅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원숭이의 한 무리가 사냥꾼에게 사살되어 쓰러진 자기들의 한 동료를 보고서 그 사냥꾼의 천막을 포위하고 총으로 위협됨에도 불구하고 그 동료의 시체를 요구할 때, 그리고 마침내 그 떼거리들 중의 장로라고 할만한 놈이 기세당당하게 천막 안으로 들어와서 우선 사냥꾼을 위협하고 그 다음에는 애원을 하다가 최후에는 애처롭게 읍소(泣訴)하기를 마지아니하다가 사냥꾼이 감동되어 그 시체를 내버려줄 것 같으면 그것을 신음하며 호읍(呼泣)하던 무리가 삼림 속으로 운반하여 갈 때, 그 원숭이들은 제 한 몸뚱이의 안전을 고려하기보다도 훨씬 강한 동료에 대한 연민의 정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감정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다른 감정에 비하여 우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동료란 놈이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동안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생활은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감정은 미물금수로 하여금 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갖은 짓을 다 해보지 않으면 안될 만큼 고통스럽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칭하는 저 사악한 짐승같은 것이 불을 질러놓은 화재 밑에 불구덩이가 된 개미집 속으로 개미가 수천 마리씩 덤벼들어서 그들의 유충을 구출하려다가 죽어갈 때, 그들은 역시 그들의 자손을 구출하려는 열망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중의 허다한 부인들이 그 자녀에게 베풀고 있는 주의보다도 훨씬 심심한 주의를 가지고 양육해 온 그들의 유충을 운반해 가져가려고 갖은 방법을 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곤충이 너무 강렬한 열선을 피하여 미온한 광선을 찾아갈 때, 또는 식물이 그 꽃잎을 태양 편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하고 또는 야음(夜陰)이 접어드는데 따라 그 잎을 오므려 모을 때, 이들의 생물은 역시 고통을 피하여 쾌락을 구하는 요구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서 이 점은 개미도 원숭이도 오스트레일리아인도 순교하는 기독교도도 또는 자유사회주의자도 다 동일하다.
쾌락을 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은 유기계(有機界)의 행동의 한 순서(혹은 세인은 법칙이라고도 한다)이다. 유쾌를 탐구하는 일이 없이 생활 자체는 불가능하리라. 유기조직은 붕괴하고 생활은 정지되고 말리라.
이와 같이 인간의 행동과 행위의 계통이 어떠하였던지 인간은 그 천성의 열망에 복종하는 데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행동일지라도 무관심한 행동이나 가장 마음을 끄는 행동이나 똑같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개인의 요구에 대하여 일체 똑같이 지도되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대로 자기로 하여금 행동케 하여라. 그는 그 행동에 있어서 쾌락을 발견하고 혹은 고통을 피하고 또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이런 행동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십분 확립된 사실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이기주의설이라고 칭하는 것의 진수를 파악하고 있다.
매우 좋다. 그러나 이 발전적 결론에 도달하고서 우리는 무엇인가 개량됨이 있는가?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진리를 정복한 것이다. 모든 편견의 근저에 가로놓여 있는 한 개의 편견을 타파하여 놓은 것이다. 모든 유물론적 철학은 그 인간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이 결론 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은 모두 무관심하다고 어떤 사람들은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나 그러나 그것이 될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검토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이다.
3
우리는 인간의 행동은(인간의 사려있는 의식적 행동을 말함이다. 무의식적인 습관에 대하여는 후장에서 논술코자 한다.) 일체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검토하였다. 도덕적이라고 명칭되는 행위, 부도덕이라고 명칭되는 행위, 대단히 존경할 헌신과 비열한 배신, 인심을 끌만한 행위와 배척할만한 행위, 이런 것 일체는 공통의 근원으로부터 출발하고 모든 것이 개인 천성의 어떤 요구에 응답하여 행하여지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그 목적으로서 쾌락의 추구와 고통회피의 염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전장에서 이 점을 검토하였으나 그것은 이 견해를 지지하기 위하여 제공할 수 있는 다수사실을 심히 간략하게 종괄(綜括)하였음에 불과하다.
이 설명이 종교적 원리에 지금도 아직 침염(浸染)되어 있는 자들로 하여금 얼마나 절규되고 있는지는 용이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초자연을 용납할 하등의 여지도 없다. 그것은 영혼불멸의 관념을 포기한다. 만약 인간이 자기천성의 요구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뿐이라고 하면, 만약 인간이 일로 치면 『의식이 있는 자동기(自動機)』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면 불후의 영혼이라는 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너무나 불소(不少)한 쾌락을 갖고 너무나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나 다른 세상에서 어떠한 종류의 대상을 받을 것을 몽상하는 사람들의 최후은닉처적인 영혼불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편견 속에서 자라나고 또 너무도 자주 민중을 기만하던 과학에 대하여 거의 신뢰를 하지 않고 있는 민중의 사상보다도 오히려 감정에 의하여 유도되고 있는 민중은 그들의 최후희망을 그들로부터 탈취하여가는 그런 설명을 거부한다.
그러나 전세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혁명가들이 처음으로 인간의 행위의 자연과학적 설명(상관이 없다면 이기주의설이라고 말해도 좋다)에 대하여 들을 적마다 이상에서 말한바 청년허무주의자와 동일한 결론을 그것으로부터 끌어내고 그리고 열심히 『도덕을 타파하라』고 부르짖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가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인가?
또 인간은 자기의 천성의 요구에 응하여 각양의 행동을 하는데 불과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 이 인간의 행동은 일절 선악 무차별한 것이다. 선도 악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의 생명을 내던져버리기까지 해서 물에 빠져 죽게 되는 사람을 구출하는 것이나 혹은 또 자기가 방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익사케 하는 것이나 양자 공히 똑같은 가치의 두 행위이다. 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활동한 후 교수대 위의 이슬로 쓰러지는 순교자나 자기의 친구에게서 물건을 도적해 오는 비열한 무뢰한이나 양자가 똑같은 동일한 인간이다―양자가 다 같이 자기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는 까닭에―라고 결론을 내리기에 바쁘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나는 어떠하다고 말하면 좋을까?
만약 그들이 더욱 진일보하여 좋은 향내도 나쁜 냄새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장미화는 방향(芳香)이요 얼초(蘖草)는 악취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가 공히 분자의 진동인 것밖에 다를 것이 없는 까닭이다. 또 씀바귀의 쓴맛이나 수밀도(水蜜桃)의 감미나 다 같이 분자의 진동일 뿐인 까닭에 좋은 맛 나쁜 맛의 구별이 있을 리가 없다. 육체에 있어서도 미추(美醜)의 구별도 없을 것이며, 현우(賢愚)의 구별도 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미추, 현우는 역시 유기체의 세포 내에 작용하는 화학적 물리학적인 진동의 결과에 불과한 까닭이다라고 이론을 붙여 말한다면―만약에 그들이 이와 같이 억설(臆說)을 한다면 그들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광인의 논리를 가지고 횡설수설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논리를 위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무엇이라 결론을 내려야 좋을 것인가?
우리의 대답은 단순하다. 그 저서 『꿀벌 이야기』에서 1724년에 그와 같이 논술한 만데뷰와 1860년 내지 70년경 러시아의 허무주의자와 또 오늘날의 어떤 파리 청년 아나키스트 등이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은 그들이 순전히 무의식적으로 지금도 아직 편견 즉 기독교적 교육의 편견의 와중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얼마나 무신론적이며 얼마나 유물론적이며 또 얼마나 자유사회주의자답게 그들은 자기를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교회의 신부나 불교의 개조(開祖) 등이 논술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행동은 만약 그 행동이 육에 대한 영의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면 그것은 선이며 만약 육이 영에 대한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악이요. 만약에 그 행동이 이 양자 중에 어느 편의 승리도 아닐 것 같으면 그것은 선악 무차별일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에 의하여서만 행동이 선인지 혹은 악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라고 함은 이런 존경하는 장로님의 말씀일 것이요, 그리고 우리 어린 친구들이 기독교나 불교의 교부들을 모방하여 역시 “이에 의하여서만 우리는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다”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일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말한다. “보라, 금수들을. 그것들은 불멸의 영혼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의 행동은 단지 그들의 천성의 요구에 응하여 행할 것뿐이다. 이것이 금수들 사이에는 선인 행동도 악인 행동도 없는 일절이 무차별하다는 이유다. 그리고 금수들에게는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응보도 없으며 형벌도 없다는 이유다”라고. 그리고 우리 어린 친구들은 어거스틴(St. Augustine)이나 석가모니 등의 중언복언(重言復言)하는 어구를 채용하여 “인간은 금수에 불과하다. 그 행위는 단지 천성의 요구에 응하여 행하여지는 것뿐이다. 이것이 인간들 사이에는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있을 수 없는 이유다. 일절은 선악 무차별이다”라고 말한다.
이성에 역행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말하면 그것은 지금도 아직 형벌과 응보라는 이 저주할 관념이다. 또 그것은 만약에 행위가 초자연적 영감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선이요 만약 초자연적 기원이 결여하여 있다면 그것은 선악 무차별하다고 하는 종교적 교육, 종교적 교훈의 배리적(背理的) 유물이다. 다시 또 그것은 오른편 어깨 위의 천사와 왼편 어깨 위의 악마의 전설에 대하여 “악마도 천사도 다 쫓아버려라. 그리하면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다른 표준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러 이러한 행위가 선인지 악인지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일러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큰 소리로 조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까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똑같은 구(舊)관념이다.
악마와 천사를 어깨에 얹어놓고 있는 목사가 상주(常主)로 존재하고 있어서 모든 유물론적인 덧칠도 그것을 은폐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나쁜 일은 재판관이 갑에게 대한 태형의 선고와 을에 대한 법적 응보를 가지고 상주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자유사회주의의 원리를 가지고서 말할지라도 형벌과 응보와의 관념을 근절하기에는 그다지 충분치 못한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도 재판관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단순히 얼초는 악취가 나는가? 독사는 나를 무는가? 거짓말쟁이는 나에게 사기치는가? 그리고 식물 파충류와 인류는 각각 그 천성의 요구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인가? 라고 말할 것뿐이다. 좋다. 그러면 나는 나로서 악취의 식물이나 독을 가지고 남을 죽이는 독사나 동물보다도 더욱 유해한 인간이 나를 증오하는 나의 천성의 요구에 응종(應從)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 결과 내가 아직 지기(知己)가 될 광영(光榮)을 갖지 못한 악마나 내가 독사보다도 더 증오하는 재판관에게 의논하거나 하지 않고서 행동할 것이다. 나와 나의 반감을 공통히 갖고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모두 우리들의 천성의 요구에 응종하는 것이다. 양자 어느 편에 이론이 있는가? 따라서 어느 편에 힘이 있는가를 검토하여 보자.
이것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검토하려고 하는 바이며 성 어거스틴이 선악의 판별을 하는데 특별히 다른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면 더욱더 유효한 다른 기초를 동물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연구 그 자체에 의하여 발견하리라. 일반 동물계에서는 곤충으로부터 인류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를 성경이나 철학에 문의하지 않고서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원인은 그것들의 천성의 요구 중에 있는 것이다. 즉 ‘종족보존과 따라서 각개인의 최대가능성의 행복에 있는 것이다’.
4
모세교(유대교), 불교, 기독교 및 회교 등의 신학자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의 영감에 의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은 야만이거나 문명이거나 무학(無學)이거나 유식이거나 사악하거나 친절하거나 정직하거나 교활하거나 자기는 선한 행위를 하고 있는가, 악한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항상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반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그것은 신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은 자기들의 입장으로부터 양심이라든가 신비적인 ‘명령’이라든가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설명을 한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문구가 다른 것 외에 종교가와 하등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를 형성하여 생활하는 동물도 역시 인간과 똑같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가 있다는 대단히 단순하고도 더욱 대단히 현저한 사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선악 개념은 인간의 그것과 동일성질의 것이다. 각종 동물류 중의 가장 잘 발달해온 대표―어류, 곤충, 조류, 포유류―중에도 그 개념은 동일한 것이다.
18세기의 사상가는 이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망각해 버렸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이 사실의 전(全)의의를 제창하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요 역할이다.
개미의 연구 관찰자로서 그를 도저히 추종할 수 없는 포렐(Forel)은 꿀을 먹어 밥통을 잘 배불린 개미가 배고픈 다른 개미를 만났을 때에 후자 즉 배고픈 개미는 즉시 전자 즉 배부른 개미에게 먹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작은 곤충들 사이에는 주린 동료가 자기와 같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꿀을 토해 내놓는 것이 배부른 개미의 의무인 것이다. 자기가 자기 차례에 돌아온 몫을 가진 때에 같은 개미굴에 사는 다른 동료 개미에게 먹이를 나누어주기를 거절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지 부당한 일인지는 개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틀림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은 극히 나쁜 일이라고 대답하리라. 이러한 이기적인 개미는 다른 종족의 적보다도 한층 가혹한 취급을 받으리라. 만약에 이러한 일이 두 개 다른 종족간의 전쟁 중에 일어나는 일이 있다면 개미들은 그 이기적인 동료를 처치하기 위하여 전투를 중지할 것이다. 이 사실은 실험에 의하여 입증한 것으로써 어떠한 의혹도 용납되지 않는다.
또 무슨 빵조각이나 쌀 같은 것이 떨어져 있어서 모두 와서 식물을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을 때에 그 작은 사회전체에 통고하지 않고서 혼자만 알고 먹는다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여러분의 정원에 살고 있는 참새들에게 물어 보라. 지푸라기를 절도한 새가 자기가 사방에서 탐색하여 모으기가 귀찮다고 해서 인접한 딴 새집에서 다른 새가 주워 모은 지푸라기를 절취하는 것이 정당한 행위인지 아닌지를 울타리에 앉은 참새들에게 물어보라. 그 참새는 그놈은 대단히 나쁜 놈이라고 대답하고서 절도새에게 날라 모여와서 그놈을 쪼아 자빠뜨릴 것이다.
혹은 같은 집단에서 사는 한 모르못트가 다른 모르못트에게 대하여 자기의 지하 저장소에 접근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그 모르못트 집단에게 있어서 정당한 일인지 아닌지를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라고 대답하고서 그 인색한 놈과 모든 방법을 다하여 싸움을 하리라.
최후로 동일종족의 일원이 부재중에 그 사람의 천막에 있는 식물을 다른 일원이 먹는 것은 정당한지 아닌지를 원시인 예컨데 쥬크제(Tchoukche)인에게 물어 보라. 그는 만약에 그 사람이 자기로서 자기의 식료(食料)를 구해 얻을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하였다면 그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라고 대답하리라. 다른 면에 있어서 만약에 그 사람이 쇠약하였다던가 혹은 궁핍하여 있었다면 그 사람은 식물을 발견한 장소에서 식사를 취하여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는 그 사람은 자기의 모자나 혹은 칼 또는 매듭을 맺은 노끈이라도 좋으니까 그것을 그 장소에 놓아두고 가야 한다. 그것은 부재의 동족 엽수(獵帥)가 귀가하여서 친구가 다녀간 것으로 도둑이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여두면 좋은 것이다. 이러한 용심(用心)이 천막부근에 약탈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으로부터 동료를 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유사한 수천의 사실이 인용될 수 있다. 또 선악의 개념은 인간들 사이에 있어서도 또 다른 동물들 사이에 있어서도 얼마나 동일한 형태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수많은 서적이 저술될 수 있는 것이다.
개미, 새, 모르못트, 원시인은 칸트의 저서를 읽은 일도 없었으며 교회의 교부나 모세의 서적같은 것도 읽은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 선악에 대하여 동일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제군이 이 관념의 밑바닥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를 잠시 반성하여 볼 것 같으면 여러분은 개미, 모르못트 및 기독교도 혹은 무신론의 도덕학자들 사이에 선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종족보존에 ‘유용’한 일인 것이며, 또 악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종족보존에 유해한 일인 것임을 즉시 알게 되리라. 벤담이나 밀이 발표한 바와 같이 선이라는 것은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종족에 대하여 선량한 것을 일컬음이다.
선악의 관념은 이와 같이 종교나 신비적 양심과는 하등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의 종족보존상에 자연적 요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시조, 철학자 및 도덕학자가 우리에게 신의 실재나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들은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 한 마리 한 마리의 참새가 그 조그만 사회에 있어서 실행하고 있는 일을 개작하고 있음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 있어서 유용한가? 그러면 그것은 선이다. 그것은 유해한가? 그러면 그것은 악이다.
이 관념은 하등 동물들 사이에서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또 일층 진보한 동물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하게 실행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진수는 항상 동일한 것이다.
개미들 사이에서는 그것은 개미굴 이상에는 확대하여 있지 않다. 그 모든 사회적 습관, 그 모든 선행의 규칙은 그 한 개미굴 중의 개개원에게만 통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개미굴에는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개미굴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의 개미굴은 다른 개미굴을 동일종족에 속하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단 어떤 예외인 사정 밑에서 공통의 재해가 양자상에 떨어질 때는 별문제이다. 마찬가지로 파리의 룩셈부르크(Luxembourg) 공원의 참새는 자기들끼리 상호간에 놀랄 만한 양식으로 상호부조를 하지만 룩셈부르크 공원으로 감히 모험하고 간 몽그(Monge) 거리로부터 날라온 참새와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리라. 그러므로 야만인들은 타부락의 야만인들을 자기네 부락의 풍습을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 사람에게는 물건을 팔아도 관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판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사는 사람으로부터 다소간이고 도둑질한다는 것이다. 사는 사람이거나 파는 사람이거나 어느 편이거나 간에 하나는 언제나 ‘팔려지고’있는 것이다. 쥬크제인은 자기와 같은 부락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같은 부락사람에게 대하여는 하등의 토의를 하지 않고 주고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인은 마침내 그들과 더욱이 가장 단순한 파포(Papouas)인과의 관계, 즉 최초 언듯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호관계이지만 그러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그는 그들의 연대성의 원리를 전인류에게 그리고 동물에게까지도 점차 확대시키리라. 관념은 확대한다. 그러나 그 근저의 진수는 동일한 것이다.
다른 면에 있어서 선악의 개념은 이미 받아가진 지성 또는 지식의 정도에 따른 것이다. 그것에 관하여 불가변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원시인은 그 연로한 양친이 사회의 무거운 짐으로 되었을 경우에―주로 아주 대단히 무거운 짐처럼 되었을 경우에―이 연로한 양친을 잡아먹는 것을 대단히 정당한 일 즉 인종적 입장으로 보아서 유리한 일―처럼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또 원시인은 각가족에게 두 세 명의 자식을 보육할 뿐으로 그 이상 새로 출생하는 자식은 살해하여 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친은 자식이 3세가 되기까지 젖을 먹이며 기르는 그 자식의 신상(身上)에 모친의 애정이 더욱 더 충분히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회를 위하여 유리하다고 생각하였을는지도 모른다.
현대에 와서는 관념이 변하여졌다. 뿐만 아니라 생존 지지(支持)의 수단이 벌써 석기시대의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문명인은 두 개의 악, 즉 연로한 어버이를 잡아먹을까, 그렇지 않으면 만인의 불충분한 영양을 취하여 가지고 졸지(猝地)에 연로한 어버이나 연소한 자식이나 쌍방이 다 같이 살아갈 수가 없게까지 될 것인가. 이 양자의 악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야만인의 가족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당시 존재하여 있던 사정에 있어서 미개인은 그것으로 십분 정확히 사고하여낸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전에 우리의 심경으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 자신을 바꿔 놓지 않으면 안된다. 실로 선교사가 오세아니아사람들에게 그들의 연로한 친족이나 그들의 적을 잡아먹는 것을 폐지하도록 교양한 이후 그들이 괴혈병의 참사를 입어 희생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9)
사고의 방식은 변화할 수 있다. 인종에 있어서 무엇이 유용한지 또 무엇이 유해한지를 평가하는 관념은 변화한다. 그러나 근저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동물계의 모든 철학을 한마디 말로 종괄하려면 우리는 개미, 새, 모르못트, 인간이 다 같이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도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너희가 하고자 원치 않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부언하기를 “그리하면 너희들은 지옥으로 보내질 것이다”라고 한다.10)
전동물계의 관찰로부터 발생한 도덕은 다음 말로 종괄할 수가 있다. 즉 “동일한 경우에 있어서 너희들이 남에게 원하는 바를 너도 타인에게 행하라.”
그리고 거기에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이것은 단순히 ‘충고’라는 것을 알아라. 그렇지만 이 충고는 사회를 형성하고 사는 모든 동물들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얻은 경험의 성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도 포함한 사회적 동물의 대군중들 사이에는 이 원칙상에서 행동하는 것이 습관적으로 되어 있다. 진실로 이것이 없었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각인종은 자기들이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될 자연의 장애물을 정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 동물과 인간의 사회를 관찰함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은 확실히 이것이 대단히 단순한 원리인가? 또 그것은 통용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여서 이 원리가 습관으로 변하였으며, 부단히 발달을 하는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검토하려고 하는 문제이다.
5
선악의 관념은 인간성 그 자체 내에 존재한다. 인간은 지적 발전이 어떠한 단계에 도달하여있던지 간에, 또 얼마만한 정도의 관념이 편견과 개인적 이해의 생각에 의하여 애매하게 되어 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생활하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유용한 것을 일반으로 선이라고 고찰하고 거기에 대하여 유해한 것을 악이라고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그것이 감정과 구별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막연한 이 개념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인류에 대하여 결코 반성하여본 일이 없는 기만인(幾萬人)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부족 또는 종족만을 알고 있으며 민족을 거의 알지 못하고 인류라는데 가서는 더구나 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류라는데 대하여 유용한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의 좁은 이기적인 이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부족들과의 연대성의 감정에까지도 도달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사실은 언제 어느 시대에서나 대단히 사상가들의 두뇌를 점령하고 있던 문제로써 지금도 아직 그것은 그들의 두뇌를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나의 견해를 표시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의 설명은 변할지라도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곤란한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할 즈음에 논술하여 두기로 한다. 그런데 나의 설명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 그것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사실은 그 인류에 미치는 결과와 함께 여전히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혹성의 기원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혹성은 변함이 없이 공전을 계속하고 그 중의 한 개는 우리들을 그것과 함께 공간(空間)에 운행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종교적 설명에 대하여 말하였다. 만약 인간이 선악을 판별한다 할지라도 이 관념을 인간들에게 불어넣는 것은 신이다라고 신학자들은 말을 한다. 유용하다던가 말하는 것은 인간들에 있어서 토구(討究)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다만 그 창조주의 명령에 따르고 있기만 하면 좋은 것이다. 우리는 야만인의 무지와 공포의 성과인 이 설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나쳐 보아두자.
또 다른 자(예컨데 토마스 홉스)는 이 사실을 ‘법률’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즉 인간들 중에 정사선악(正邪善惡)의 생각을 발전시켜 놓은 자는 법률임에 틀림없다고 독자 여러분은 자기 혼자서 이 설명을 판단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법률은 인간의 천성이 복종을 거절하는 그 착취를 일삼는 소수자에게 유용한 각종의 명령을 인간이 수락하는 도덕적 계율 속에 끌어넣기 위하여 인간의 사회적 감정을 단순히 이용하였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다. 법률은 정의의 생각을 발전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역용(逆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도 지나쳐 보아두자.
또 우리는 공리주의자의 설명에 그쳐두지도 말자. 인간은 자기의 이해관념으로부터 도덕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리라. 그래서 전인류들 사이의 연대감이 그 기원은 무엇이 되었든지 현재도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공리주의적 설명에도 어떠한 진리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면적인 진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더 전진하여 보자.
우리가 도덕적 감정의 기원을 추론하는데 대하여 일부분에 있어서 확실히 도움되는 것은 역시 19세기의 사상가이다.
종교적 편견에 의하여 침묵 중에 재워지고 또 확실히 반종교적인 사상가들 사이에서까지도 거의 알지 못하고 있던 『도덕적 감정의 이론』이라고 하는 명저에서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도덕적 감정의 진정한 기원에 관한 연구에 비로소 손을 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신비적 종교적 감정 중에서 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단순히 동정(同情)이라는 생각 중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여러분은 어린 아이를 때리는 사람을 본다. 여러분은 맞는 아이가 아파할 것을 알리라. 여러분의 상상은 아이 신상에 가해진 고통을 여러분 자신이 역시 고민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가련한 고민 그대로 안색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겁쟁이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아이를 때리고 있는 맹수같은 자에 달려들어 그 아이를 그 자에게서 구해내리라.
이 예증은 그 자체에서 거의 일체의 도덕적 감정을 설명한다. 여러분의 상상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여러분은 생물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것들이 느끼는 바를 더욱더 잘 여러분 자신의 생각 속에 그려볼 수가 있을 것이고 마침내 여러분의 도덕적 감정은 첨예화하고 미묘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여러분 자신을 바꿔놓도록 마음이 끌리면 끌릴수록 더욱더 여러분은 그 사람 신상에 떨어진 고통, 그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모욕, 그 사람을 희생하도록 한 부정의를 통감하고 마침내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 고통, 그 모욕, 그 부정의를 방지할 수 있도록 행동화하도록 촉진을 하게 되리라. 그래서 여러분이 경우에 따라 환경에 따라 또는 여러분 자신의 사상과 상상과의 예민성에 따라 여러분의 사상과 상상이 촉진하는대로 행동하도록 관습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도덕적 감정은 여러분들 사이에 성장하고 더욱 더 그것이 습관적으로 되리라.
이상이 아담 스미스가 풍부한 예증을 열거하여 전개한 바이다. 그가 이 책을 저작할 때는 아직 연소하였을 때였다. 이 책은 경제학에 관한 그의 노년시대의 저작에 비하면 훨씬 우수한 것이다. 종교적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그는 도덕성의 설명을 인간천성의 물리적 사실에서 탐구하였다. 그러나 어용신학이나 비어용신학의 편견 이것이 이 논문으로 하여금 1세기간이나 검정책 뚜껑 속에 간직해 둘 수밖에 없었던 소이(所以)이었다.
아담 스미스11)의 오직 한 가지 오류는 이 동일한 동정의 생각은 그 습관적 계급에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동물들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윈이 말사스로부터 아무 것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을 잊어버린 다윈학도들 중의 속화(俗化)된 자들은 그야말로 모르지만 연대성의 감정은 사회를 형성하고 생활하는 모든 동물들의 주요한 특징이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독수리는 새를 탐식(貪食)하고 이리는 모르못트를 탐식한다. 그러나 독수리거나 이리거나 다 각각 사이(飼餌)를 사냥할 때에 있어서는 상호부조를 한다. 참새도 모르못트도 다만 영리하지 못한 것만이 포획되는 것으로 맹수 맹조에 대하여 대단히 유효 적절하게 그들 자신들의 결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동물사회에 있어서 연대성은 지배계급이 우리들을 업신여기는데 가장 적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 공덕을 칭송하는 저 생존경쟁설보다도 훨씬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자연법칙이다.
우리가 동물계를 연구하여 생존경쟁은 재해가 있는 경우와 침범하는 적에 대하여 각생물들이 지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연대성과 평등의 원칙이 동물사회에 발달하여 있다면 있을수록 또 적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진출할 기회를 많이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 아는 바이다. 사회의 각성원이 타성원 각자와의 연대성을 느끼는 것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모든 진보의 주요한 요인이 되는 두 가지 성질 즉 한 편에는 용기, 다른 편에는 자유스러운 개인발의가 그들 모든 성원중에 더욱 더 완전히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동물사회 또는 동물의 소집단이 이 연대성의 감정을 상실하면 상실할수록―그것은 극도의 결핍이거나 극도의 풍부이거나의 결과로써 일어날 수 있는―더욱 더 진보의 두 가지 요인, 즉 용기와 개인발의가 멸살(滅殺)된다. 마침내 그것들은 소실되어서 패퇴에 빠지고 그 적의 앞에 도괴(倒壞)되고 마는 것이다. 상호신뢰가 없다면 투쟁은 불가능하고 용기도 발의도 연대성도 없어진다. ―그래서 아무런 승산은 없는 것이다. 패배는 확실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날 재론하기로 한다. 우리는 얼마나 동물계와 인간계에 있어서 상호부조가 진보의 법칙이요, 또 얼마나 상호부조가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용기나 개인발의와 함께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소질을 가지고 있는 종족에게 승리를 확보케 하는가를 허다한 실례를 가지고 증명할 수가 있다. 지금은 사실을 열거하기만 하면 족하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 우리가 제기한 이 문제에 있어서 상호부조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기로서 평가할 수가 있으리라.
거기에서 우리는 지구상에 출현한 동물생활의 창조초로부터 차차 연속하여온 기백만년간 이 연대성의 감정이 작용하여 왔다는 것을 상정하자. 나는 어떻게 이 감정이 점차로 습관으로 되고 유전에 의하여서 가장 미소한 유기체로부터 그 자손―곤충류, 조류, 파충류, 포유류, 인간―에게로 계승되어 왔다는 것을 상정하자. 그래서 우리는 동물에 있어서는 식물(食物)이나 혹은 그것을 소화하는 기관과 같이 필요불가결한 도덕적 감정의 기원을 이해하게 되리라.
이 이상 태고로 소급하여 올라가서 단순한 미생물의 군거로부터 시발한 복잡한 동물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지라도 도덕적 감정의 기원은 이것쯤으로 좋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문제를 수페이지의 한계 안에 압축하기 위하여 극히 간략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신비적인 것 아무런 감상적인 것이 없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미 충분히 논술하여두었다. 개체와 종족과의 이 연대성이 없이는 동물계는 결코 발달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 그 현재의 완전에까지 도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구상의 가장 진보하였다는 생물도 지금도 아직 수중에 유영하고 있는 미세한 점과 같은 것의 하나로 되어 있을 것이요, 현미경하에 놓고 볼지라도 거의 식별할 수 없을 만한 그러한 것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까지라도 가지고 있었을까? 왜냐하면 세포자체의 초기 군단(群團)은 투쟁에 있어서 연합의 일례인 까닭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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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동물계를 편견이 없이 관찰하는데 의하여 대개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이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한다. 이 원칙이라는 것은 즉 ‘동일 경우하에 있어서는 네가 대우받고 싶다고 원하는 바와 같이 타인을 대우하라’고 말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물계의 진화를 세밀히 연구할 때, 우리는 전술의 원칙, 즉 한마디 말로 번역할 것 같으면 ‘연대성’은 개인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개인들 사이에 행하여지는 투쟁으로부터 결과하는 모든 순응작용보다 훨씬 무한히 대단한 역할을 동물계의 발전상에 연출하여 왔다고 하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대단한 정도의 연대성이 발견되게끔 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동물의 계급에 있어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원숭이의 사회에서도 연대성을 실행하고 있는 경탄할만한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방향으로 향하여 더욱 일보를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자연이 그 도정상에 퍼부워놓은 온갖 장애물들 사이에 생존하면서 인간들로 하여금 그 약소한 종족을 보존케 하고 그 지능을 발전시키는 일을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아직 석기시대 정도에 있는 원시사회에 대한 주도한 관찰은 얼마나 대단한 정도에까지 동일사회의 성원이 그들 사이에 연대성을 실행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실천적 연대성이 결코 정지하지 않고 역사상 최악의 시대에서일지라도 정지하지 않았던 소이이다. 지배, 노예제도, 착취 등 일시적 사정이 이 원칙을 부인케 한 때일지라도 오히려 그것은 허다한 사람들의 사상의 심저에 횡재(橫在)하여 가지고 악제도에 대하여 강경한 반발을 가져오도록, 즉 혁명을 초래하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회는 사멸하고 말았으리라.
동물이나 인간의 대다수에 있어서는 이 감정은 습득한 습관, 즉 행동에 있어서는 부단히 망각되었을 때일지라도 마음 속에는 항상 현존하고 있는 원칙으로 되어 있는 것이요, 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되어 있는 것은 동물계의 전(全)진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진화는 오랜 전부터 대단히 장구한 세월을 두고 계속하여 왔다. 그것은 수억 년으로 셀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도덕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보다는 사지를 네 발로 삼아 기어다니는 습관을 가지려는 편이 도리어 인간에게 용이하리라, 동물진화의 과정에서는 도덕적 감정이 발생한 편이 인간의 직립자세의 발생보다도 선행하였던 것이다.
도덕의식은 후각이나 촉각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구비되어 있는 자연적 기능이다.
법률이나 종교도 역시 이 원칙을 선전해 오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단순히 자기들 자신의 명령과 정복자, 착취자, 승려 등의 이익을 위한 법률명령을 장식하려는 데에서 이 원칙을 절취하였음에 불과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승인된 정의인 연대성의 이 원칙이 없이 그들은 어떻게 인심을 포착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들은 제각기 이 원칙을 의복으로 삼아 자기들을 은폐하고 있다. 강자에 대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보호자로서의 자세로 분장하여 그 지위를 유리하게 하는 강권도 마찬가지다.
법률이나 종교나 강권을 내던져버림에 의하여 인류는 자기네들로부터 빼앗아갔던 도덕적 원칙의 파악을 회복할 수가 있다. 그것을 비판할 수 있기 위하여 회복하라. 그리고 승려와 재판관과 지배자들이 도덕적 원칙을 오손(汚損)하고 지금도 아직 오손하면서 있는 그 간음행위로부터 도덕적 원칙을 깨끗이 해놓으라.
그러나 교회와 법률이 도덕적 원칙을 이용하였다는 이유로 도덕적 원칙을 부정한다는 것은 “코란에 매일 목욕하라고 교훈하였다고 하여서 나는 목욕을 하지 않겠다. 위생가 모세가 헤브라이인에게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금하였다고 하여서 나는 돼지고기를 탐식하겠다. 샤리앗트(코란의 보유(補遺))가 삼년간 경작하지 않고서 내버렸던 토지는 일체 공동체의 소유로 될 것을 요구하였다고 하여서 나는 토지의 공유에 반대하겠다”고 호언하는 것과 같은 일로서 동일히 불합리한 것일 것이다.
아나키즘의 근본원칙은 자기가 대우받고자 원하는 것과 같이 타인을 대우하라고 하는 것이 원칙 외에 즉 평등으로서의 이 원칙 그것 이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또 누구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고서 어떻게 자기를 아나키스트로서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남에게 지배됨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실 그 자체에 의하여 나는 아무 사람에게 대하여도 지배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기만됨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항상 진실 외에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이 사실 그것에 의하여 우리는 아무 사람에게도 기만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항상 진실을 말하고 진실 외에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전(全)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을 약속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노동의 성과를 우리로부터 절도 당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이 사실 그 자체에 의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노동의 성과를 존중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실로 어떠한 권리에 의하여 우리는 자기의 경우에는 어떠한 방식을 가지고 취급되기를 요구하지만 타인을 취급할 경우에는 전연 그와 반대의 다른 방식을 가지고서 대하기로 결정할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의 평등의 생각은 이러한 관념에는 반항한다. 상호관계에 있어서 평등은 그로부터 생기는 연대성과 함께 생존경쟁에 있어서 동물계의 가장 유력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평등이라 함은 공평이라는 말이다.
우리 자신에게 나는 아나키스트다라고 공언하는 데 의하여 우리는 우리가 그런 대우는 받고 싶지 않다고 사전에 이미 공언하고 있는 바이다. 또 우리는 우리들 중의 어떠한 자가 그의 힘이나 교지(巧智)나 능력을 사용함에 당하여 우리에게 반대하고서 그러한 지능을 사용케 하는 것은 곤란케 될 그러한 방식을 가지고 사용하기를 용인하는 그런 불평등을 이미 관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바이다. 공평과 동의어인 만사에 있어 평등 이것이 행위 그 자체에 있어서 아나키즘이다. 우리가 투쟁을 선언하는 것은 법률과 종교와 강권과의 추상적 삼위일체에 대하여서 뿐만 아니다. 아나키스트로 되는데 의하여 우리는 법률, 종교, 강권의 일체 나의 심중에 주입해 놓은 바의 그 허위와 교지(巧智)와 통치와 타락과 악행과―한마디로 불평등―의 대파란에 대하여 투쟁을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의 방식에 대하여 그들의 사고의 방식에 대하여 투쟁을 선언한다. 지배되는 자, 기만당하는 자, 통지 당하는 자, 매음시켜지는 자 등이 그 중에 다른 사람보다도 우선하여 우리의 평등의 관념은 상해 당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매음하지 않고 통치하지 않고, 기만하지 않고, 남자가 여자도 지배하지 않는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평등이라는 이름에서이다.
“그러나 만약에 자네가 대우받고 싶은 그대로 항상 남을 대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자네가 생각한다면 사정의 여하를 불구하고 자네는 어떠한 권리를 가지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인가? 여하한 권리를 가지고 자네는 자네네 국가에 침입하여온 야만인이거나 문명인에 대하여 대포를 겨눌 것인가? 여하한 권리를 가지고 자네는 통치자를 축출할 것인가? 여하한 권리를 가지고서 폭군뿐만 아니라 독사 한 마리일지라도 죽일 것인가?”라고 아마 따지는 말을 들을는지도 모른다―가끔 와서 이렇게 묻는 자도 있다.
여하한 권리? 법률에서 채용하여온 이러한 말 한마디로 여러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분은 내가 이러한 일을 하여서 행동을 잘 하였다고 내가 자신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고 싶은가? 내가 존중하는 사람들은 내가 잘 하였다고 생각할 것인지 여부를 알고 싶은가? 이것이 여러분의 묻는 바인가? 만약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다. 확실히!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런 유해한 일도 하지 않았던 미얀마인이나 소오르인을 침략하러 갔었다고 하면 우리 자신은 ?맹한 야수와 같이 살해될 것을 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자식이나 친구에게 “만약 내가 침략자에게 가담하여 있었다면 나를 죽여다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다 확실히! 만약 우리가 우리의 원칙을 거짓말로 ??하여 가지고 선조로부터 전해온 유산을 가지고 타인을 통치하기 위하여 사용하려고 점유하였다면 우리는 추방되어야 할 것을 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에.
그렇다. 확실히! 만약에 본심으로부터 사람이 유해한 인간이 된다면 그 사람을 죽여달라고 미리 요구할 것인 까닭에. 만약 그가 폐위된 폭군의 지위에 있다고 한다면 총검을 그의 심장에 쏘아 박아달라고 애걸할 것인 까닭에.
처자를 가진 백 사람 중에 구십 구 사람까지는 만약 자기 자신이 미쳤다고 하는 것을 본정신이 들어 감지한다면 애지중지하는 처자에 대하여 어느 때 어디서 그들에게 위해를 가할까 보아서 공?하는 나머지 그는 자살하려고 기도할 것이다.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가 자기의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자기 자신이 위험물로 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그가 그렇게 되기 전에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느날 일쿠스크에서 한 사람의 네덜란드인 의사와 사진사가 광견에게 물렸다. 사진사는 그 상처를 작열한 철로 지져 버렸으나 의사는 단지 자기의 상처에 부식제를 발라두었을 뿐이었다. 그는 나이도 젊었고 외양도 아름다웠으며 원기가 창일(漲溢)하였었다. 그는 민중운동에도 헌신하였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처벌되어 기결감에 투옥되었다가 최근에 막 출옥한 때였었다. 박학다재하고 그 중 지성에 탁월하였던 그는 경이적인 치료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환자들은 그를 숭배하였다.
육주일 후에 그는 개에게 물린 팔이 퉁퉁 부어 올라온 것을 발견하였다. 의사인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못보았을 리가 없었다. 공수병(恐水病)이 속발한다는 것을 무심히 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는 급급히 그와 한가지로 의사로서 유형을 받고 있는 한 친구에게 달려와서 “스토리키니네를 조금 다오! 얼른 자네 부탁하네! 이 내 팔뚝을 봐라.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 시간도 채 못지나서 나는 미친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자네에게도 다른 친구들에게도 달려들어서 막 물어댈 것이다. 어서 주게나! 스토리키니네를 조금! 나는 죽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자기가 위험스럽게 되어졌다는 것을 느끼자 죽여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주저하였다. 그는 공수병에 대하여 어떠한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다. 용감한 일부인의 조력을 구하여 가지고 그는 시작하였다. ―그러나 두 시간 후에 그 청년의사는 친구와 부인에게 달려들어서 입으로 거품을 내뿜으면서 물려고 덤벼들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그는 본정신이 들었다. 다시 스토리키니네를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나 공수병의 발작은 다시 일어났다. 무서운 경련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류의 사실을 얼마든지 많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 중에서 인용할 수가 있다. 양심있는 사람은 자기가 타인에 대하여 죄악의 원인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독사나 폭군을 죽인 때 자기 자신은 잘 하였다고 하는 의식을 느끼는 소이연(所以然)이며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상찬(賞讚)이 자기 진정(眞情)에서 우러나오는 소이이다.
페로브스카야12)와 그 동료들이 러시아의 황제를 죽였다. 전인류는 유혈의 참극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농노의 해방13)을 허락한 사람에게 대하여 동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한 것과 같이 그들이 그렇게 권리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행동이 일반에게 유용하다고 인정하였던 까닭은 아니다. 세 사람 중의 두 사람까지는 그것이 유용하였던가 여부를 지금도 아직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황금을 갖다준대도 페로브스카야와 그 동지들은 자기들이 폭군이 되기를 수긍하지 않을 것을 느꼈던 까닭이다. 이 활극에 대하여는 하등의 아는 바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이것이 혈기왕성한 청년의 허장객기가 아니라는 것과 궁중간신배적 음모가 아니라는 것과 또 권세를 잡으려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를 희생해서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폭군을 증오한 까닭이다.
“이들의 남자와 여자들은 죽일 권리를 획득하고 있던 것이다”라고 말들을 하였다. 흡사히 루이스 밋셀14)에 대하여 “그녀는 강탈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들을 하고 혹은 또 좁쌀빵으로 생활을 하면서 게다가 기시네푸가(家)의 재보(財寶) 일 이만을 탈취함에 있어 총검을 단단히 들고서 재보를 지키고 있는 호위병에게 일체 책임을 지우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될 수 있는대로 모든 준비를 다한 테러리스트 동지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들은 도취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하던 것과 같이.
방한(防寒)에 대하여 행사하였다거나, 혹은 십자가의 그늘 밑에서 행사하였다거나, 인류는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획득한 사람들의 두상에 폭력을 가할 권리를 부정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행동이 인심에 심각한 인상을 갖게 한다면 ‘그 권리는 획득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없다고 하면 이러한 행동은 그것이 유용하거나 안하거나에 불구하고 단순한 야수적 사실로 되고 말 것이며 사상의 진보에 있어서 하등의 중요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민중은 그 중에 폭력의 교체환치하여서 단지 한 통치자에 교대하여 다른 통치자로서 환치하는 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리라.
7
우리는 지금까지 의식적인 사려가 있는 행동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에 대하여 논술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적 생활과 병립하여 그보다 훨씬 광범한 무의식적 생활을 우리는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무의식적 생활의 관념을 파악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에 있어서 연출하는 거대한 역할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어제 밤에 잃어 버린 것을 알고 있는 단추를 무심코 끼울려고 할 때 자기가 뻔히 다른 데 옮겨 놓은 물건을 무심코 집으려고 손을 내밀기도 한다. 어떻게 우리는 매일 아침 의복을 입는지를 주의하여 보면 잘 알 것이다.
무의식행위는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분의 삼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지껄이는 말씨, 미소를 하는 모양, 눈썹을 찌푸리는 시늉 내지는 논쟁이 벌어졌을 때 열중하거나 냉담하거나 하는 그 태도 등은 무목적 무의식한 것으로서 우리의 조상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이전의 조상으로부터 유전해 받아 온 습관의 결과이거나(성낸 인간과 성낸 짐승과의 사이에 그 표정이 유사한 것을 좀 주의하여 보라) 그렇지 않으면 의식적이건 무의식이건 습득한 것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대한 행동의 양식은 이렇게 습관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가장 도덕적인 습관을 습득한 사람은 악마가 자기에게 악을 행하도록 촉진할지라도 지옥의 고통과 천당의 환락을 상기함에 의하여 비로소 자기가 악을 행하기를 정지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일삼는 소위 선량한 기독교도보다는 확실히 우량(優良)하리라. 자기가 대우받고 싶은대로 타인을 대우하는 것은 인간에게도 모든 사회적 동물에게도 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습관으로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이거나 이러이러한 사정하에서는 어떻게 자기는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자기에게 반문할 것조차 일반적으로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주저할 일이 있고 그의 뇌수(腦髓)의 각종 부분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는 일이 있다고 하면―왜냐하면 뇌수는 매우 복잡한 기관으로써 그 모든 각종의 부분은 어느 정도까지 독립하여 동작하는 까닭이다―그것은 사정이 예외적인 것으로 어떠한 복잡한 경우이거나 혹은 강렬한 정열하에 있을 때에 한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생길 때는 그 사람은 상상함에 있어 자기를 자신에게 반대하고 나오는 사람과 처지를 바꾸어서 자기가 이러한 방식으로써 취급되고 싶은가 않은가를 자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로 인하여 장차 품위와 이익을 손상당하게 되어 있는 사람과 자기와를 귀일(歸一)하기가 가능하면 가능할수록 더욱 그 사람의 결의는 도덕적으로 될 것이다. 어떠한 한 사람의 친구가 들어와서 “자네를 그 사람의 위치에 바꾸어 놓고서 상상해 보아라. 그 사람이 자네에게서 대우받는 것과 같이 자네가 그 사람에게서 대우받는데 의하여 자네는 번뇌할 작정인가?”라고 묻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것으로 중분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물어물할 때 평등의 원칙에 호소할 뿐이며 백중 구십 구의 경우는 습관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술하여 온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는 아직 무슨 일이나 훈계할 작정으로 한 말이 없었다는 것은 명료하다. 우리는 다만 동물계나 인류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실의 양식을 제시하였음에 불과한 것이다.
이전은 교회가 인간을 도덕화하기 위하여 지옥을 끌어내다가 인간을 협박하여 왔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반대로 인간을 부도덕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재판관은 그들이 사회로부터 절취하여 온 사회적 원칙이라는 명의하에서 연옥과 태형과 교수대를 가지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재판관은 목사 장로 등과 동시에 지구상으로부터 소멸하여 버릴 수 있다는 사상 그것은 모든 색채의 강권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의 재화가 왔다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판관과 그 자들의 선고와를 항쟁하기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비유, 도덕에 대한 의무까지도 폐기한다. 우리는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바를 하여라. 자네가 원하는대로 행동하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류의 대다수는 그 교양의 정도와 그들이 현행하고 있는 궤도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는 완전성의 정도에 비례하여 사회에 유용한 방향으로 향하여 항상 행동하고 행위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는 까닭이다. 흡사히 자식들은 인류라고 칭하는 족속에 속하고 있는 부친으로부터 출생하였다는 단순한 이유로 자식은 이 다음 두 발로 보행할 것이며 네 발로 보행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확신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충고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충고를 함과 동시에 우리는 “이 충고는 만약에 자네 자신의 경험과 관찰이 이 충고에 순종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네 자신에게 인정되지 못한다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부언하여 둔다.
우리는 한 청년이 몸을 구부리고 가슴과 폐를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우리는 그에게 단정하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머리를 들고 가슴을 쭉 펴도록 충고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폐를 압축하지 말고 심호흡을 하도록 충고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폐결핵에 대한 그의 최선의 예방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가 폐의 기능을 이해하고 자기로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자세를 택할 수 있도록 그에게 생리학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을 우리는 도덕의 경우에서도 할 수가 있다. 우리는 다만 충고할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으로 그리고 이에 대하여 “그것이 자네에게 있어서 선이라고 생각될 것 같으면 그것에 순종하여 행하여라.”고 부언할 것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치고, 또 누구든지 범할 수 있는 비사회적 행동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서라도 사회는 공공연히 그 사람을 벌할 권리가 없는 것이라고 치고,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선이라고 보이는 것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있어서 악이라고 보이는 것을 미워할 자격을 기각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미워하라. 그것은 어떻게 미워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아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 자격을 보유한다. 그리고 이것만이 동물들의 모든 사회에 있어서의 도덕적 감정을 기대하고 또 발전케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까닭에 그것은 인류에게 있어서도 더욱 더 중요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한 가지 일을 원할 뿐이다. 그것은 현재사회에 있어서 이런 두 개 감정의 자유 발전을 조애(阻碍)하는 일체의 것, 우리의 판단을 사도(邪道)로 유도하는 모든 것―제왕, 교회, 착취 및 재판관, 승려, 지주, 통치자―를 배제하는 일이다.
무뢰한이 가장 빈곤한 가장 처참한 부인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제1 감정은 증오 그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악한이 주막집 숙박료를 내달라고 요구하는 주인노파를 살해한 그날 우리가 그 악한을 노상에서 만났다면 그 남자보다도 그 주막집 노파의 머리에 탄환을 쏘아대는 것이 좋지나 않을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대뜸 그 악한의 대가리에 탄환을 쏘아댈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남자를 여기까지 이르도록 만들어 논 모든 가증가악(可憎可惡)한 일을 우리가 상기할 때 또 그 남자가 음란한 서적으로 인하여 부랑해진 환상이나 되지 못한 서적으로부터 암시를 받은 사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암흑한 중에 그들이 방황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감정은 분열한다. 그래서 만약 다른 날에 무뢰한이 모든 무뢰한을 일괄 통합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남자나 여자나 아동을 냉연히 살해하여 온 재판관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들었다면 또 만약에 이 남자가 이러한 생각을 가진 광열병자중의 한 사람의 수중에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다면 그때 무뢰한에 대한 우리의 모든 증오는 소실되리라. 그것은 비겁한 위선적인 사회와 그 승인된 소위 대표자들에 대한 증오로 변해지리라. 악행이 법률이라는 명칭하에 행하여질 때 그 장원(長遠)한 계열의 앞에는 무뢰한의 모든 악행은 소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워하는 바는 이것들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우리의 감정은 부단히 이와같이 분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많았거나 적었거나 간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현사회의 방조자라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구태여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가? 통치와 굴종 위에다가 기초를 두고 존립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성질은 퇴폐한다.
그러나 굴종이 소실될 때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리라. 그때 우리는 지금 인용한 바와 같은 복잡한 경우세서일지라도 우리의 감정중에 미워하고 또 사랑할 힘을 느끼게 되리라.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동정과 반감과의 감정에 대하여 이미 자유의 경지를 시여(示與)하였다. 우리는 부단히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도덕력을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가 도덕적으로 박약한 것과 비겁한 것을 증오한다. 끊임없이 우리의 저서와 언론은 비겁에 대하여 기만에 대하여 음모에 대하여 도덕적 용기의 결핍에 대하여 느끼는 바 증오를 표시하여 왔다. 우리는 세속적 교육의 감화를 받아 왔기 때문에 평등관계가 우리들 사이에 수립되는 날에는 소멸되어 버리리라는 그 허위의 외관하에 우리의 부자유를 은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혐악의 생각을 배반한 것을 느끼는 바이다.
선악의 개념을 일정한 수준에 보유하고 그것을 상호간에 상통케하는 데에는 이 생각만으로 충분하다. 이 생각은 벌써 사회에 재판관도 목사도 승려도 없어지게 된 때 도덕적 원칙이 그 의무적 성질을 사실하고 단순히 상호간평등의 관계로써 생각하게 될 때 더욱 더 유력하게 되리라.
그뿐 아니라 그러한 관계가 수립되어지는데 비례하여 더욱 고도의 도덕적 관념이 사회에 앙양되리라. 우리가 지금 분석하려고 하는 것은 이 개념이다.
8
이상 우리가 논술하여 온 분석은 다만 평등의 단순한 원칙을 제시하였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신이 대우받고 싶다고 생각한 바와 다른 방식으로 타인을 대우할 권리가 있다고 억단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또 자신은 기만되고 통치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 그러나 타인에게 대하여는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반항하고 또 반항하도록 타인을 유도하고 왔었다. 허위와 야수적 행위와 증오해야 할 것이라고 우리가 논술하여 온 이유는 그것들이 도덕의 법전에 의하여 상찬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는 만인평등심에 위배되는 까닭이요, 만인에게 대하여 평등은 공허한 한 구절의 언사만은 아닌 까닭이다. 그중에도 그것은 그 사상과 행동과의 방식에 있어서 진실한 아나키스트인 사람들에게 위반하는 까닭이다.
만약 이 단순한 자연스러운 명백한 원칙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면 대단히 고귀한 도덕 모든 도덕론자들이 교육하여 온 일체를 포함하는 바 도덕이 그 결과로서 생겨나리라.
평등의 원칙은 도덕의 교훈을 종괄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이상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 이보다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은 즉 개인을 존중하는 일이다. 우리의 도덕인 평등을 선언함에 의하여 아나키즘을 선언하는데 의하여 우리는 도덕론자가 항상 주장하는 바를 자신들에게 다 인수하여 놓은 한 권리 즉 어떤 이상의 명칭하에서 개인을 절단하는 권리를 상정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이 권리를 용인치 않으며 우리 자신에게 대하여도 또 다른 어떠한 사람에게 대하여도 우리는 개인의 충분하고도 완전한 자유를 승인한다. 우리는 개인에게 대하여 풍부한 생존과 그의 능력의 모든 자유발전을 원한다. 우리는 개인들에게 아무 것도 부과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 도덕에 반대하고 푸리에15)가 설정한 원칙에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때 푸리에는 말하기를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로 자유롭게 하여라. 그들을 절단하지 말라. 오늘날까지 종교가 너무도 많이 갔다가 다녀온 것과 같이. 그들을 자기들이 하는대로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들의 격정 그것까지도 두려워하지 말라. ‘자유사회’에서는 격정은 결코 위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유에 대하여 기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또 만약 여러분이 타인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또 만약에 아무개라 하는 자의 자의 광폭한 비사회적인 격정에 대하여 여러분도 똑같이 여러분의 강력한 사회적 격정을 가지고 대항케 한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유를 두려워 할 아무 것 것도 갖지 않을 것이다.16)
우리는 어떠한 이상의 명칭하에서일지라도 개인을 절단하는 관념을 부정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적당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으로 보이거나 악으로 보이건 간에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동정이나 반감을 기탄없이 표현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를 기만하였다고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버릇이요. 또 그의 성격이다. 과연 그렇다. 그러나 거짓말쟁이를 경멸하는 것도 역시 우리의 성격이며 또 버릇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성격인 까닭에 우리는 기탄없이 하겠다. 경멸하겠다. 지금도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러한 놈에게 달려가서 그놈을 우리의 품에 안아 주거나 또는 그놈과 친절하게 악수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맹렬히 그 자에게 대하여 우리의 적극적인 격정을 가지고 대항하리라.
이것이 우리가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전부이다. 이것이 사회에 있어서 평등의 원칙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의무의 전부이다. 그것이 평등의 원칙의 실행인 것이다.
그러나 살인범이나 자녀유괴한에게 대하여는 어떠한가? 단순히 피의 갈증으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는 극히 희소하다. 이러한 인간은 치료를 요하는 환자이며 회피해야 할 광인이다. 유괴한에 관하여는 우리는 먼저 그것에 관하여 사회가 아동의 감정을 사도(邪道)로 유혹도발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고찰하여 보자. 그러면 우리는 방탕아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일체 이러한 일은 도덕적 폐퇴의 대근원인 자본주의, 종교, 사법, 정부가 생존을 소실하기까지는 완전히 소청(掃淸)될 수가 없다고 언명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늘부터라도 실행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실행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회가 이 평등의 원칙밖에는 알지 못한다면 또 만약 각 사람사람이 단지 장사꾼의 공평만을 실행하고 종일 자기가 타인에게서 수득(受得)하는 이상의 아무 물건도 타인에게 주지 않으려고 고심하고 있게 된다면 사회는 자멸하게 되리라. 평등의 원칙 그것이 우리 관계에서 소멸하리라.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지지되게 될 형편이라면 단순한 공평이라는 것보다도 더욱 더 웅대하고도 더욱 애정적이며 또 더욱 생기발랄한 무엇이 부단히 생활 이면의 근저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정의보다 위대한 것이 여기에 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온정과 지성과 선의에 충일(充溢)하고 그 감정과 지성과 활력을 하등의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서 인류봉사에 바친 위대한 인물이 결핍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정신과 감정과 또는 선의의 풍부는 모든 면에서 적당한 형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주변에 있는 우매한 자의 주장에 반대해서 스스로 진(眞)이요, 정(正)이라고 믿는 일에 향하여 탐구의 걸음에 내디디기 위하여 자기의 정력을 경주할 수 있도록 일체의 다른 쾌락을 거부하고서 진리를 따라나가는 열렬한 추구자 중에도 있다. 그것은 날마다의 자기의 식사까지도 버리고 세계의 양상을 일변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자신하는 발명을 추구하면서도 그에게 시중을 드는 한 부인이 자기 자식에게 대하듯이 그를 봉양하려고 가져 온 빵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서 생활하는 발명가 중에도 있다. 그것은 예술이나 과학의 환락도 가정생활까지도 그것들이 만인에게서 공존공영공동향유하게 될 수 없는 한에 이것이 도리어 고통꺼리라고 생각하고 세계의 후생(厚生)을 위하여는 불행도 박해도 우습게 생각하면서 활동하는 열렬한 혁명가들 중에도 있다. 그것은 침략의 흉폭을 듣고서 문자 그대로 애국심의 영웅담에 의하여 의용대에 그 이름을 등록하고 풍설(風雪)과 기아 중에 용감히 진군하여 마침내 쏟아지는 탄환 밑에 쓰러져가는 청년 중에도 있다. 그것은 그 유소(幼少)한 동포와 한가지로 성뢰로 향하여 달리고 빗발같이 쏟아지는 포탄 중에 엄연히 서서 “코뮨 만세”라고 절규하면서 서거한 저 기민한 지성의 소지자, 혐오와 동지를 훌륭히 구별 선택할 힘을 가진 파리의 무의무탁한 유랑아 중에도 있다. 그것은 악을 목격하고서 그결과가 자기에게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자문할 여가도 없이 반항하고서 다른 모든 사람들은 등을 굽힐지라도 자기만은 직립하고 서서 부정의를 폭로하고 공장의 비열한 전제공장주, 감독의 대폭군인 통치자에게 낙인을 찍어 놓은 사람 중에도 있다. 최후도 만약 우리가 우리들의 산눈을 뜨게 할 수고를 한다면 그리고 인간생활의 그 근저에 횡존(橫存)하고 그들이 받는 통치와 압제에도 불구하고 각양각종의 방식으로 그 자신을 전개할 수가 잇게 만들어 놓은 것은 무엇이었던가를 주목한다면 모든 무수한 봉사적 행위 즉 너무 저명하지 않고 따라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또 거의 항상 보답도 없는 무수한 봉사적 행위가 부단히 관찰될 수가 있는 것으로서 (특히 부인들 사이에) 이러한 행위 중에도 그것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남자와 여자들 중의 어떤 사람은 매몰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큰 장면내부에 있어 배후역을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진보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이런 것이 인류가 이러한 사람들을 존경을 가지고 포옹하고 신화를 가지고 포장한 소이이다. 그것은 그들을 친미한다. 그들을 옛이야기와 시가와 비사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의 많은 사람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바 용기와 선과 사랑과 헌신적 정신을 상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기억을 청소년들에게 전한다. 그것은 가정과 친구와의 좁은 범위 내에서만 활동하던 사람들을 상기도 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가정전설로써 존중한다.
이러한 남자나 여자가 진정한 도덕 그 이름에 상부(相符)하는 유일의 도덕을 이루어놓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모든 관계상에서 단순한 평등에 불과하다. 그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인류는 비열한 돈셈이나 하고 지나는 탁류 중에서 늙어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미래의 도덕 즉 우리의 자손이 돈셈이라 하는 일을 폐지할 때, 그리고 모든 정력과 용기와 사랑을 가장 적용하는 일은 이러한 힘이 필요가 가장 강하게 느낀 경우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하는 관념하에 성장할 때 거기에 출현할 그 도덕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곧 이러한 남녀들이다.
이러한 용기 이러한 헌신은 어느 때든지 존재하였었다. 그것은 사회적 동물들 사이에도 발견된다. 그것은 가장 폐퇴한 시대에서일지라도 인간들 중에 발견된다.
그러므로 종교는 항상 그것을 유용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유통화폐로 변하고 말았다. 만약 종교가 지금도 아직 생명이 붙어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그들이 이 헌신과 용기에 항상 호소하는 까닭이다. ―무지는 별문제로 치고 그리고 혁명가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호소하는 것도 이것이다.
이것은 설명하려는 데에서 각종의 학파들의 도덕론자가 이전에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은 오류에 함입하고 있다. 모든 신비적인 힘에서도 또 영국의 공리주의학파에 의하여 묘한 형태로 상정된 장사꾼 식의 회계에서도 똑같이 독립하여 이러한 용기나 헌신의 진실한 기원을 지시한 것은 젊은 철학자로 무의식적으로 자유사회주의자이었던 기요(Guyau)이다. 칸트 파도 실증주의자도 또는 진화론적 철학자도 똑같이 실패한 이 점에서 이 자유사회주의의 철학자는 진로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용기와 헌신과 같은 이러한 성질의 기원은 자기 자신의 힘의 느낌이다라고 기요는 말하였다. ‘그것은 확대하는 것을 요구하는 창일(漲溢)한 생명이다’ “자기 속에 자기가 행동할 수 있는 성능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동시에 무엇을 행동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인가를 의식하는 것이 된다.”
각인이 그 생활에 있어서 느끼는 바 그 의무에 관한 도덕적 감정, 즉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로써 설명하려고 하든 의무에 관한 도덕적 감정은 그 자체를 행사하고 자기로 하여금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바 생활의 과잉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힘의 의식이다.“라고 기요가 말하였다.
모든 축적된 힘은 그 선행되어 있던 장애에 대하여 압력을 창조한다. 행동하려고 하는 힘이 행동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많은 말을 허비하고 많은 저서로 되어진 이 도덕의 “의무성”은 모두 ‘생활지지의 조건은 생활의 확대이다’라는 개념에 귀착하는 것이다.
“식물은 개화하는 일로부터 자기를 방어할 수가 없다. 때로는 개화하는 것은 사거(死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심려는 무용한 짓이다. 수액은 변함없이 빨아올린다”고 청년 아나키즘의 철학자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의 힘과 정력에 충일한 때도 역시 동일하다. 힘은 그의 체내에 축적한다. 그는 그의 생활을 확대한다. 그는 타산 없이 공급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도 꽃과 같이 꽃피는 때 죽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걱정할 것 없다. 수액은 빨아올린다. 만약 수액이 있다고만 하면.
강건하여라. 정서와 지적능력을 가지고 충일하여라. 그리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성과 여러분의 애정과 여러분의 행동력을 타인들 사이에 광범하게 살포하게 되리라. 이것이 모든 도덕적 교훈이 동양의 금욕주의의 위선을 탈피하고서 도달할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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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진실한 도덕인에게서 상찬을 받게 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서 그들의 지성과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행동을 제공하도록 그들을 촉진하는 그들의 정력과 생명의 충일 그것이다.
강대한 사상가 지적 생명이 창일하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의 사상을 살포하기를 요구한다. 만약에 사상이 타인에게 전파되지 않는다면 사색은 아무 쾌락도 없는 법이다. 자기가 고통을 인내해 가면서 어떠한 사상을 탐구한 후, 그것을 깊이 주의하여 은닉해 두었다가 이 다음 자기의 명의를 가지고 그것에 꼬리표를 붙이려는 사람은 극히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이다. 강력한 지성의 사람은 사상을 가지고 달려나가서 제 힘껏 그것을 살포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 사람이 그 사상을 다른 사람과 함께 향유하지 못하고 사방에 그것을 살포할 수 없다면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그의 생명이 있는 까닭이다.
이 점은 감정에 관하여도 동일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뇌가 요구하는 이상의 눈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의 존재가 정당화할 수 있는 이상의 환희의 수용력을 가지고 있다.”고 기요는 자연으로부터 파악한 상찬할 만한 두어 마디 말로써 도덕의 전(全)문제를 이와 같이 종괄하여 말하였다. 고독한 존재는 불행하다. 불안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존재는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타인과 함께 향유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어떤 위대한 쾌락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느끼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생활하고, 우리가 분투하고, 우리가 투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원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의지, 우리의 활동정력을 행사할 필요를 느낀다. 행동하고 활동하는 일은 인류의 대다수가 요구하는 바이다. 이러한 까닭에 불합리한 사정이 남녀로 하여금 유용할 일로부터 분리할 때는 그들은 해야 할 무엇인가를 고찰하고 그들의 활동정력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무슨 무용하고 의의 없는 의무까지도 발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론과 종교와 “사회적 의무” 등을 발견한다. ―그들도 무엇이나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자신이 갖기 위하여 그들이 무용(無踊)을 할 때 그것은 자선을 위한 일이다. 그들이 사치한 의복을 만들기에 자기가 몰락할 때 그것은 귀족의 체면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주의(主義)에 적합하다고 한다.
“우리는 동포를 부조하기를 요구하고 인류가 애를 써가면서 멋을 부리며 오던 마차에 손질을 좀 해달라고 요구한다. 아무리 하여도 우리는 그 주위를 떠들어대면서 빙빙 돌기만 하고 있다.”고 기요는 비유해 말하였다. 이 손질을 해달라는 요구는 대단히 큰 것으로서 그것은 아무리 저급한 동물이라도 모든 사회적 동물 사이에는 발견될만한 일이다. 연일 정치면에 있어서 소용없이 낭비되는 활동력의 거대한 양은 인류라는 마차에 조력하려는 의욕 아니 죽어도 그 주위에서 떠들어대기만 하고 서두르기만 하는 그 표현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물론 이 “의지의 풍요” 즉 행동에 대한 갈망이 감정의 빈약과 ‘창조력이 없는 적성’에 의하여 수반할 때에는 나폴레옹 1세나 비스마르크와 같은 세계를 역행하도록 강행하려는 가면자(假面者)밖에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으리라. 한편, 충분히 발달한 감수성을 결한 정신적 풍요는 지식의 진보를 방해하는데 불과한 문학적 과학적 학구와 같은 그러한 불모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리라. 최후로 위대한 지성에 의하여 인도되고 있지 못한 감수성은 자신이 모든 애정을 경주하는 남자의 어떠한 수성(獸性)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일체를 희성(犧性)에 공하려고 하는 여자와 같은 그러한 인물을 생겨나게 하리라.
만약 생활이 진실로 풍요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그것은 동시에 지성에 있어서나 감정에 있어서나 또 의지에 있어서나 풍요하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모든 방면에 있어서 풍요한 것이 진정한 생활이라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유일한 것이다. 이러한 생활의 일순간을 위하여 그 일섬광이라도 파악한 사람은 불로장생의 생명을 맛보는 것이리라. 이러한 창일한 생활이 없다면 인간은 일찍부터 노쇠해 버리는 것이며 무능한 존재가 되어서 꽃이 피기도 전에 위축하고 마는 식물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생명없는 생활은 만년쇠퇴하도록 내버려두라”고 청년은 부르짖는다. 살아서 생명을 사방에 살포하기를 요구하는 수액에 충만한 진정한 청년은 부르짖는다. 대개 사회가 폐퇴에 돌입할 적마다 이러한 청년으로부터 나오는 돌격은 새로운 생활이 진흥할 여지를 조성하려고 구(舊)경험적, 정치적, 도덕적 형태를 파괴한다. 가령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투쟁에 있어서 쓰러질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수액은 아직도 오르고 있다. 청춘에 있어서 산다는 일은 그 결과의 여하에 불구하고 꽃이 피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그 결과를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영웅시대에 대하여는 말하지 말고 일상생활만을 생각할지라도 자기의 이상과 일치하지 않고서 산다는 일이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대의 사람들은 이상을 조소한다는 것을 가끔 듣는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를 이해하기는 용이하다. 이 이상이라는 말이 너무도 가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하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그 반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건전한 일이다. 우리도 역시 왕왕 이렇게 모욕되던 “이상”이라고 하는 말을 새 관념과 일치하는 더욱 새로운 말로써 대치해 놓기를 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말은 무엇이 되었던지 사실은 동일하다. 모든 인류는 그 이상을 가지고 있다. 비스마르크도 자기의 이상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기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즉 피와 철과 정부라고 하는 이상이었다. 비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이상을 가지고 있다. 가령 그것이 감벳다의 은의 욕장(浴場)과 쓰롬벳트를 요리하는 일이거나 쓰롬벳트와 욕장을 매수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수많은 노예를 가지고 강제하는 그러한 귀찮음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그러한 것들 외에 더욱 숭고한 이상을 의식하고 온 사람들이 있다. 금수의 생활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굴종, 허위, 악신앙, 음모, 인간관계의 불평등은 그에게 증오의 생각으로 충만케 하였다. 자신도 그 대신에 굴종하고 거짓말쟁이가 되고 음모가가 되고 타인의 신상에 권세를 부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 어떻게 그에게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만약에 인간들 사이에 더욱 좋은 관계가 존재하여 있었던들 생활은 얼마나 더 훌륭히 좋은 것이 될 수 있었을까를 별견(瞥見)하고 있다. 그는 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욱더 좋은 관계를 수립하기에 성공할 힘을 자기 자신에게서 느끼고 있다. 그는 이상이라고 칭하고 있는바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상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어떻게 해서 그것은 일방으로는 유전에 의하여 타방에 있어서는 생활의 인상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최대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서전에서나 다소간이나마 진실로 그 이야기를 고백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목전의 사실이다. ―가변적이며, 진보적이며, 항상 살아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외계의 영향에 들어 내놓아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활력의 최대다량, 생의 환락의 최대다량을 주워주는 그것에 대한 대부분 무의식적인 감정이다.
인생은 이 이상의 감정에 응답하는 조건에서만 신선하고 풍요하고 감각에 풍부한 것이다. 이 감정에 ‘거슬러서’ 행동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이 그 자체상에 반발적으로 왜곡되어 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벌써 화합되지 못하는 그 생기를 잃고 있다. 여러분의 이상에 생생히 불충실하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지와 여러분의 활동력을 마비하는데 의하여 종언을 고하리라.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전에 알고 있던 생기와 결의의 발랄성을 벌써 회복하지 못하게 되리라. 여러분은 무기력한 사람이 되리라.
한번 여러분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독립해서 활동하는 신경중추와 뇌중추의 합성물로써 바라볼 때는 거기에 하등의 신비하다는 것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경쟁하고 있는 각종의 감정들 사이를 준순(浚巡)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문득 유기체의 조화를 파괴하게 되리라. 그리고 여러분은 의지가 없는 병자가 되게 되리라. 여러분의 생활의 예리성은 감멸(減滅)되고 말리라. 여러분은 쓸데없이 타협을 요구하리라. 여러분의 행동이 여러분의 뇌수의 이상적 개념과 일치하고 있었을 시대의 여러분과 같은 벌써 여러분은 완전히 강력한 생기 발랄하였던 사람은 아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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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것을 결론내기기 전에 우리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라고 하는 이 두 개 용어 관하여 한 마디 하려고 한다. 이 두 개의 용어는 부단히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 영국의 학파가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여기에 대하여 논술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는 영국의 도덕학자들이 수립하려고 노력하던 이 구별을 두 개 용어 중에 볼 수가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하여 주기를 원하는 바와 같이 너도 타인에게 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것을 이타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차라리 우리를 더 한층 높은 처지를 취하여 가지고서 각개인의 행복은 자기의 주위의 모든 사람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르긴 모르되 비교적 행복한 생활이 타인의 불행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혹 수년간은 가능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사상누각(砂上樓閣)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영속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사세(些細)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파종(破綜)될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평등인의 사회에서 가능한 행복에 비교하면 실로 비참한 것이며 비열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반적인 선을 지향하고 나갈 때는 반드시 여러분은 선량한 행동을 하게 되리라고 말하는 바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이타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단지 사실을 진술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는 기요의 말을 의역하여 보자. “강건하여라. 여러분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위대하라. 여러분의 생명을 모든 방면에 발전시키라. 정력에 있어서 될 수 있는 한 풍부하여라.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하여 생물 중에서 가장 사회적인 또 사교적인 것이 되라. 만약 여러분이 충분하고도 완전한 풍요한 생활을 향락하기를 원한다면 항상 충분히 발달한 지성에 의하여 인도되어 투쟁하고 위험한 속으로 모험을 하여라―왜냐하면 위험은 그 자체의 큰 쾌락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여러분의 역량을 투입하라. 그것을 타산 속에 붙여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위대하고 선량하다고 느낀 모든 것들 속으로 투입하라. 그리하면 여러분은 행복의 최대량을 향락하게 되리라. 대중과 일체가 되라. 그리하면 생애에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일이 생길지라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심장이 여러분의 그것과 일체가 되어 고동됨을 느끼리라. 다른 면에 있어서 여러분의 비겁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심장이 여러분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하 때 우리는 이타주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투쟁하고 위험에 직면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물 속에 뛰어드는 일 등은 인간에만 한한 일은 아니다. 고양이에게도 있다. 우리에게 역행하는 불평등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보리밥덩이로 생활하는 일, 애정에 불타는 것과 같은 사람들과 우리 자신이 조화하는 것을 느끼는 일 또는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끼는 일. 이런 사실은 뢰약(瀨弱)한 철학자들에게는 모르면 모르되 희성(犧性)을 의미하리라. 그러나 정력과 힘과 생기와 청춘에 충일한 남녀에게는 그것은 생명의 의식적 환락이다. 이것은 이기주의인가? 혹은 이타주의인가?
통칙적으로 이타주의적 감정과 이기주의적 감정의 사이에 예상되든 충돌상에 그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도덕론자들은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충돌이 진실하다면 또 만약 개인의 이해가 실제로 사회의 그것과 충돌하고 있는 것이라면 인류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동물의 어떠한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 현재의 발달에까지 도달하지 못하였을 것이 확실하다. 만약 군체(群體)의 행복을 위하여 노작(勞作)하는 것이 모든 개미들에게 있어서 큰 쾌락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 개미의 군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개미는 현재의 상태―곤충류 중의 최고의 발달을 한 동물 즉 확대경 밑에서도 감별하기가 곤란할 만한 뇌수를 가지고 그리고서도 인간의 보통뇌수와 거의 한가지로 유력한 뇌수를 가진 동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조류가 그 이동함에 있어서 또 새끼를 양육하기 위하여는 조치(調治)한 용의(用意)에 있어서 또 맹조로부터 그들의 사회를 방어하기 위한 공동동작에 있어서 심심한 쾌락을 발견함이 없었더라면 조류는 지금 현실에 도달하여 있는 것 같은 발달상태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류의 형은 진보하기는커녕 그 대신 퇴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펜서가 각성원의 복지가 종족의 복지 중에 융화하리라는 시기를 미래에 전망함에 당하여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였었다. 즉 ‘만약에 각개성원과 사회의 양자가 모든 시대에 있어서 귀일(歸一)하여 있지 않았더라면’ 진화는 동물계의 그만한 것까지도 결코 실현될 수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각개성원의 복지와 종족의 그것이 확실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개체성원이 불소(不少)히 동물계에도 인류의 종족 중에도 존재하여 있었으며 또 지금도 아직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강렬한 생활을 생활하는 것이 각개인의 목적인 동시에 생활의 최대강도는 최대의 사교성에서 또 자기와 타인가의 가장 완전한 귀일성에서 발견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지성의 결함, 오성(悟性)의 결함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유한한 지성의 사람들이 존재하여 있었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우둔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의 시대에 있어서도 또 지질학적 시대에 있어서도 결코 개인의 이해와 사회의 이해가 충돌하였던 일은 없었다. 태고적부터 이 양자는 귀일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항상 완전한 생활을 향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구별은 우리의 견해로서는 배리(背理)이다. 인간이 그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두 개 감정간에 실현하고 있는바 그 타협(만약 우리가 공리주의를 믿는다면)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타협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평등의 원칙과 일치하게 생활하기를 원할 때 생활현상에 있어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도처에서 평등의 원칙이 유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느끼는 바이다.
우리의 식물(食物)이나 우리의 침상이 아무리 변변치 아니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리 밑에서 자는 사람이나 보리밥 한 덩이도 변변히 못 얻어먹는 허다한 사람에게 비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로스차일드(로스차일드는 영국의 세계적 대부호이다)이다. 우리가 지적 예술적 쾌락을 누리는 정도가 아무리 근소할지라도 근육노동에 의하여 극도로 피로해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예술이고 과학이고 쾌락을 느낄 수 없이 그런 것들의 고상한 환락은 애당초 알지도 못하고 살다가 죽고 마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비하면 우리는 오히려 로스차일드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평등의 원칙을 그 결론까지 실현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정과 타협을 하지 않으리라.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반역하는 바이다. 그러한 등등의 사정은 우리의 심경에 대단한 괴로움과 증오감으로 억색(抑塞)케 하는 바이다. 그러한 등등의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혁명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거슬리는 것들과 장사꾼의 에누리흥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타협을 배격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에 대하여는 죽기까지 싸울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이 중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 확신을 얻은 사람은 만사는 자연히 변하여 가는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품고서 조용히 재워주기를 원치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이 제목의 최종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도덕적 개념이 전연 변화할 시대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지금까지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일이 가장 심각한 부도덕이라고 지각한다. 어떤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부도덕인 것은 습관이며 존중되던 전통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우리는 도덕조직이 한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하다. 나는 그러한 도덕들을 내던져버리고 “혁명적 항쟁을 시작하라”고 부르짖어 외친다. 그리고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의무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는 비판의 시대인 까닭에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환영하자. 그러한 것은 사상이 사회에 움직이고 있는데 대한 착오없는 상징이다. 보다 더 높은 도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도덕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연구를 기초로 하여 채택함에 의하여 원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대중이나 사상가들의 관념 속에 그 자체를 형성하고 있는 도덕의 종류를 고찰하여 보았다. 이 도덕은 하등의 명령을 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나 법률이나 또는 정부에 의하여 개인들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이 추상적 관념에 따라서 개인들을 판에 박아놓다시피 하는 것을 절대로 거부하리라. 그것은 각 개인 개인에게 충분하고도 완전한 자유를 맡겨두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의 단순한 기록에 불과한 것이다. 즉 신학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신학은 인간에게 경고하리라. “만약에 자네가 자네네들 중에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만약 자네들의 정력이 강렬한 인상도 없고 심심한 환락도 없고 그렇다고 또 심각한 비애도 없는 무미단조한 생활을 하기에 족할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면 자네는 평등이라는 말뿐인 단순한 원칙에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평등의 관계에 있어서 자네는 자네네들의 박약한 정력에 알맞는 그만한 행복의 최다량을 아마 발견하리라.”
“그러나 만약에 자네가 자네들 중에 청춘다운 힘을 느낀다면 또 만약 자네네가 살려고 원한다면 더욱 또 만약에 자네네가 완전히 충실하고 창일하는 생활을 향락하려고 원한다면―즉 생물이 염원할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알고 있다고 하면 강건하라, 위대하라, 자네가 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활력이 있으라.”
“자네의 주위에 생명의 씨를 뿌리라. 만약 자네가 기만하고 거짓말을 하고 모략을 하고 사기를 한다면 자네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네 자신을 비열하게 만들고 위축하게 하고 자네 자신의 박약하다는 것을 미리 고백하고 자기 자신의 주인놈 보다도 악렬하다는 감을 느끼고 있는 아내에게 노예의 역할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 주의하라. 만약에 그리하는 것이 자네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해 보라. 그러나 인류는 자네를 야비한 모욕을 받을 만한 뢰약한 자라고 멸시를 하고서 거기에 해당한 대우를 자네에게 하리라. 자네 자신의 힘이 있다는 입증을 갖지 못한 까닭에 인류는 자네에게 대하여 불쌍한―다만 불쌍히 여길뿐인―놈이라고 치고 행동하리라. 이와 같이 자네가 자기 자신의 멋대로 자네의 정력을 마비할지라도 인류에게 죄를 돌리지 말라. 다른 면에 있어서 강건하라. 그리고 한번 자네가 부정의를 보고서 그것을 이러 이러한 것―생활에 있어서 불평등, 과학에 있어서 허위 또는 타인에게서 받은 고민―이라고 인정한다면 그 불공평, 그 허위 또는 부정의에 대하여 반항하기 위하여 분기하라.”
미주
1) 러시아의 허무주의는 중국의 노자장자의 허무주의와는 달라서 혁명적인 것으로 러시아의 초기사회운동의 핵심이 되어 있었다. 알렌산더 삐어크맨은 러시아의 자유사회주의자들의 일을 허무주의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역자주)
2) 칸트는 18세기의 독일의 철학자로서 그가 말하는 “지상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양심의 명령은 개인의 이익이라든가 편익이라든가의 방편이 아니라 1에 2를 더하면 3이 된다고 하는 것이 필연적이 되는 것과 같이 양심의 명령도 이성의 필연적 형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 벤담은 18세기로부터 19세기에 걸쳐서 영국의 윤리학자로서 그의 학설을 공리주의라고 명칭하고 있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행복을 구하는 곳에 도덕을 갖게 되는 것이다.
4) 백과전서가(百科全書家)는 프랑스의 철학자 듸테로를 주창자로 한 계몽운동가로서 지적 운동에 의햐여 민중의 해방을 획책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로서 그 사업으로써 백과전서를 간행하였다. 이것이 프랑스의 인심에 절대한 영향을 끼쳐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으로 되었다.
5) 바리새는 유태의 종지(宗旨)의 하나로써 예수시대에 전성하였던 것이다. 극단의 형률(刑律)을 지키는 것을 특색으로 하고 도덕적 결벽을 주의로 삼았다. 금일에 와서는 위선자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6)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의 철학자요, 경제학자로서 벤담의 사상을 계승하여 공리설을 완성하였으나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서 벗어나 질적 공리주의를 주창하였다. 경제학에 있어서는 스미스, 리칼도, 말서스를 종합하여 자본주의의 정통학파를 완성하였으나 만년에는 사회문제를 논하고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졌다.
7) 체르니 체프스키는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귀족의 농민에게』라고 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하는 소설을 저작하였다. 유물론자로서 경제학자이었다. 윤리설은 역시 공리주의를 취하였다. 맑스는 그를 대단히 상찬하였다고 한다.
8) 큐요는 프랑스의 사상가였으며 윤리학, 미학, 종교학에 대하여 사회적 연구의 필요를 주장하고 생의 존재는 일절존재의 핵심이며, 개체의 생명은 사회적으로 확대하여 연대성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주장하고 또 이것을 도덕, 예술, 종교에 공통한 원리로 하였다. 크로포트킨은 상당히 큐요의 설을 칭찬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아나키스트의 철학자로고 평하였다.
9) 이것은 미클류 맥클레이(Miklukho McClay)가 말한 바이나 뒤의 관찰은 신빙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 교조(敎祖)의 말에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그와 같이 하라.” 적극적 명령을 소극적 형태로 고쳐 말한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2절)
11) 아담 스미스는 영국의 경제학자로서 특히 자본주의경제학자로서 유명하고 그의 저서 「국부론」은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청년시대에 도덕철학자였으며 29세시에 글라스고 대학의 도덕철학교수로 있었다. 그의 논리학설에는 크로포트킨도 상당히 경복(敬服)하고 있었으나 그의 경제학에는 절대로 반대하였다. 어째서 스미스는 이와 같은 경제학자로 급변하였을까? 그것은 그가 대학교수를 사임하고 한 청년귀족의 보호를 받게끔 되었던 까닭이다.
12) 페로브스카야는 러시아의 여성 혁명가요, 귀족계급에서 출생한 허무주의자다.
13) 농노를 해방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를 두고 한 말이다.
14) 프랑스의 아나키스트로서 여성의 몸으로 대단한 투쟁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 투옥되었었다. 후에 런던에서 국제학교를 창립한 웅변가였다. “노동자의 여신”이라고까지 지칭받던 사람이었으며 「사회의 미생물」은 그의 명저서이다.
15) 푸리에는 프랑스의 초기사회사상가로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지칭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상한 미래사회의 구상도(파란지라고 이름하는)에는 공상도 있고 수긍할 수 없는 점도 있다. 그러나 그 표현한 사상에는 자유사회주의와 자유연합주의에 흡사 상통하는 점이 있다. 어느 누구든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는 일 자체가 공상이 아닐 수 없고 공상이라면 공상가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16) 이 근대작가 중 노르웨이의 입센이 그의 희곡 중에서 이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The Autonomy Review
크로포트킨 / 역자 : 성정심
청년에게 호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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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호소함」은 처음 1880년에 『반역자』(Le Revolte)에 발표되었는데, 이 아나키스트 정기간행물은 제네바에서 그 전년에 크로포트킨에 의하여 발간되었다. 그 때로부터 이 책은 여러 나라말로 많은 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이 판에는 H. M. Hyndman에 의한 번역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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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우리는 1948년도의 냉소적인 전후의 비관주의와 함께 크로포트킨을 만난다. 이 소책자들 처음 읽으면 이 책의 내용이 19세기 급진주의자들의 곤혹스런 낙천주의와 관념주의에 절망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는 가장 저주할 만한 반대의 내용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들의 인도적인 감수성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호소, 이성적인 사람은 부정을 영원히 참지는 않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 ― 그의 주체적인 생각들이 이 세상의 현실적인 배경에서 조명된다면 이러한 생각들은 참으로 이상한 개념들처럼 보인다. 비록 우리들이 세파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 처음 읽으면 ― 우리들은 원자폭탄을 알지 못했던 과거 인간들을 향하여 약간의 우월성에 대한 느낌과, 그리고 그들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만 생각해보면, 크로포트킨의 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잇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미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유하여 크로포트킨이 살고 있었던 유럽의 사람들만큼 가난하고 병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세계의 다른 10분의 9의 사람들은 미국인과 반비례하여 훨씬 더 가난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러한 “재산”은 잔인한 전쟁과, 세계정복과 그리고 전쟁과 돈벌이를 위해 인간적인 감정과 연민을 희생시킴으로서 얻어진 것임을 기억나게 한다. 전문가가 어떤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를 크로포트킨은 지적하였다. 과학자가 죽음의 공장에서 일하고, 학생이 군징집을 기다리며, 그리고 의사, 기계공 심지어 예술가들 모두가 전쟁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면, 우리 시대는 어떻게 되겠는가? 문제는 반세기 전 못지 않게 의미 깊고 또 비극적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이익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능력과 훈련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민감한(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세상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심어 주기 위해 어디에 헌신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크로포트킨의 호소가 그다지 어리석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분명히 혁명적 변화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나리라는 크로포트킨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확실한 낙천주의에 우리는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에게 낙천주의를 거부하는 바로 그 비참함(재난)이 아나키즘을 더욱 긴박하고 진실되게 만든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정확하게 정의되지 아니한 때에,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은 그가 아나키즘을 나타내고 싶을 때 “사회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 운동”을 이야기하였다.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급진주의는 공통된 목표와 공통된 기본적 신념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크로포트킨은 이 소책자에서 구체적으로 아나키즘에 대하여 결론을 내릴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결론이 이해되지 않으면, 섬세한 열정과 그리고 가장 순수한 분노가 다만 더 나쁜 폭정에 종사할 뿐임을 우리는 배워왔다.
19세기의 급진적 사상인 아나키즘만이 그 진실성과 응용가능성을 유지해 왔다. 오늘날에는 아주 소수만이 자유의지론자의 사회가 중앙집권화된 정부 관료정치에 의해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소련과 영국의 노동당이 활동하는 것을 보아 왔다. 전체주의와 전쟁은 우리에게 자유를 위한 운동이 개개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어떠한 사회적인 변화도 “지도자”, “엘리트” 혹은 “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 자유와 개인의 발달의 진정한 보상을 위해 너그러운 독재하의 잘못된 안전의 보상을 무시해야만 한다는 것도 배웠다.
이러한 생각들이 아나키즘적인 사고의 핵심이다. 아나키즘은, 가령 우리들이 우리들만 고립되어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 모두를 위해 합리적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와 협동의 사고들을 지금 당장 적용시킬 필요성을 강조한다. 아나키즘은 우리에게 방법―우리들의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즉각적 행동의 방법―을 제공해 준다.
비록 미래가 핵전쟁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감정을 가진 사람을 위한 다른 가능한 방법은 없다. 모든 사람들의 인류 속에 있는 최고의 것을 억누르려는 분명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직과 친절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이 남아 있다고 크로포트킨은 깊이 믿는다. 그는 인간의 희망이 무엇인지를 표현해 주고 서로서로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이 아직 죽지 않았음과, 혹은 죽었던 감정이 일깨워 질 수 있음을 표현해 준다.
- David Thorean Wieck
Ⅰ
오늘 내가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상대는 바로 바로 청년들이다. 나이든 사람―물론 마음과 이성이 늙은 사람을 의미한다―은 이 소책자로 그들의 눈을 피곤하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이 18세 혹은 20세, 여러분이 여러분의 훈련이나 교육을 막 끝마쳤던가, 혹은 여러분이 이제 막 삶을 시작하려고 새로운 삶의 첫 단계에 들어섰다고 가정해 본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미신을 믿지는 않을 것이고, 여러분은 지옥을 두려워 하지도 않으며, 그리고 목사나 신부의 호언장담을 들으러 가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더 나아가서 공원에서 그들의 바지나 원숭이 같은 얼굴을 과시하는, 쇠퇴하는 사회의 슬픈 산물인 맵시꾼들은 어떤 대가를 치루고라도 쾌락을 쫓으려 하지만, 반대로 여러분들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때문에 나는 여러분 청년들에게 호소한다.
여러분에게 던질 첫 번째 질문은 여러분이 자신에게 종종 물었던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젊었을 때, 사회의 비용으로 무역 또는 어떤 학문을 공부한 것은 그가 획득한 학식을 약탈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지성, 능력과 지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도울 날이 있을 것을 꿈꾸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악덕으로 침식된 타락한 인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은 그러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좋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
나는 여러분이 어떠한 계층에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 운명에 행운이 깃들어 여러분은 과학적 연구를 해 왔는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의사, 변호사, 문학가, 혹은 과학자가 되려는지도 모른다 : 여러분 앞에 폭넓은 분야가 펄쳐져 있다. 여러분은 광범위한 지식과 훈련된 지성으로 삶을 시작할 것이다. 혹은 아마도 여러분의 학문적 지식이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작은 것에 국한되는 정직한 노동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힘들게 수고하는 노동자들이 체험하여 얻는 삶의 직접적 지식의 장점을 가졌다.
나는 이제 첫 번째 가정을 접어두고 두 번째 가정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나는 당신이 학문적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가정한다. 당신이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내일 누더기 옷을 입은 여자가 당신을 아픈 여자에게 모셔가기 위해 올 것이다. 그가 당신을 통행자의 머리 위로 반대편 이웃이 악수라도 할 수 있을 만큼의 가난한 좁은 뒷골목으로 데려갈 것이다. 당신은 작은 등불이 깜박거리는 계단을 하나, 둘, 셋 올라가고, 그리고 차갑고 어두운 방에 더러운 이불을 덮고 보료 위에 누워 있는 아픈 여자를 발견한다. 흙빛의 창백한 이이들이 엷은 옷을 입고 떨면서 큰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남편은 그의 평생동안 하루 12시간 혹은 13시간 일해 왔고, 이제 그는 3개월 동안 실직이 된 상태이다. 그의 직업에서 실직은 흔하다. 매년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가 실직되었을 때, 그의 부인이 파출부일로 가계를 도왔다. 하루에 30 수우(프랑스 화폐단위)를 받고 당신의 셔츠를 빠는 것 등의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두 달간 아파 누워서 그 가족은 이제 참담한 곤경에 빠져 있다.
의사인 당신은 그 아픈 여자를 위해 어떻게 처방을 내릴 것인가? 한 눈에 그녀의 질병이 영양부족과 신선한 공기의 결핍으로 인한 빈혈증임을 알았을 때 당신은 어떤 처방을 할 수 있겠는가? 매일 좋은 식사를? 시골에서 약간의 운동을? 환기가 잘되는 침실을 당신이 처방할 것인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만약 그녀에게 그러한 것이 제공되었더라면, 당신의 충고를 기다리기 위해 그렇게 누워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친절한 마음, 훌륭한 언변, 정직한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족은 당신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칸막이 저편의 여자가 가난에 찌든 냉소주의자라는 것, 계단을 좀 내려가면 모든 아이들이 열이 있다는 것, 1층 여자가 내년 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옆집에는 상황이 더욱 나쁘다는 이 모든 것들을 얘기해 줄 것이다.
이 모든 환자들에게 당신은 무지하다고 말할 것인가? 그들에게 훌륭한 식이요법, 기후(환경)의 변화, 과로를 피할 것 등을 추천할 것인가?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슴 아픈 채로 나오며, 당신의 입술에 저주를 담을 것이다.
다음날 당신이 아직도 그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신의 부인이, 전하기를 어떤 하인이 당신으로 모시러 왔었다는 것과, 이번에는 마차를 갖고 모시러 올 것임을 알려 준다. 그는 훌륭한 집의 소유자이고, 그의 처는 그녀의 전 생애를 의상, 방문, 무도회, 어리석은 남편과의 말다툼으로 보내고 불면의 밤 때문에 병이 났다. 당신의 친구는 그녀를 위해 좀 덜 불합리한 생활습관, 저지방 다이어트, 신선한 공기, 적절한 노동, 침실에서 약간의 미용체조를 처방해 주었다.
한 사람은 그녀의 생애동안 충분한 음식과 충분한 휴식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며, 다른 한 사람을 태어난 이래로 노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수척해진다……
만약, 당신이 아무 것에나 지신을 적응시키는 가장 경멸할 만한 순간에도 부드러운 한숨과 맥주 한 잔으로 자신을 달래는 개성 없는 인간들 중의 하나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점차 그러한 대조에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쾌락을 선호하는 동물을 본성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쾌락추구의 흐름의 대열에 참여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진실한 인간이라면, 만약 당신 안의 동물성이 아직 지성을 말살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계속되어서는 안 돼.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우리는 그것을 예방해야만 해. 약간의 좋은 생활과 지적인 발달이 환자와 질병의 반을 감소시켜줄 것이다.” 약은 악마에게나 줘라! 신선한 공기, 좋은 음식, 과로하지 않을 것―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외의 모든 의사란 직업은 기만과 술수에 불과하리라.
그날에 당신은 사회주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사회주의(아나키즘)를 좀더 철저하게 알기를 원하게 되고, 만약 당신이 자연주의적 사회주의자의 서막인 이 사회적인 문제들을 연구하게 된다면, 당신은 서서히 우리들(아나키즘)의 대열에 끼게 될 것이고, 그리고 사회적 혁명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일하고 있는 그대로, 당신도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 실천적인 일은 악마에게나 맡겨라! 천문학자, 심리학자, 화학자로서 나는 나 자신의 학문에만 전념할 것이다. 순수과학이 만약 미래 세대만을 위한 것이라면, 항상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학문에 전념함으로서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이해하도록 우선 노력해보자. 그것은 다만 쾌락인가―의심할 바 없이 상당한 쾌락이다― 우리들의 정신적 능력을 이용해서 자연의 신비를 연구함으로써 주어지는 상당한 쾌락인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인생을 유쾌하게 지내기 위해 과학을 추구하는 과학자가 포도주를 마심으로 만족을 얻는다면, 만족을 추구하는 술주정뱅이와 어떻게 다른지 나는 묻는다. 의심할 바 없이 과학자는 그의 즐거움을 좀더 현명하게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훨씬 더 깊고 큰 지속적인 기쁨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다! 술주정뱅이와 과학자는 둘 다 똑같은 이기적인 목적, 개인적 만족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당신은 이런 이기적인 삶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에 종사함으로써 당신은 인류를 위해 일하고 싶어하고, 이러한 생각이 당신의 탐색을 지도해 줄 것이다.
매력적인 인생! 우리가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할 때 한 순간이라도 이러한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만약 당신이 참으로 인류를 염려한다면, 당신이 참으로 당신의 학문에서 인류의 번영을 꾀한다면, 굉장한 질문이 야기될 것이다. 당신의 비판적인 정신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과학은 소수의 삶을 더 기쁘게 만들 뿐이지 인류 전부에게는 미칠 수 없는 사치한 종목임을 당신은 단번에 관찰해야만 한다.
1세기 전에 과학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건전한 가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섭렵하였거나 혹은 비판적인 참된 과학적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가? 야만인 같은 편견과 미신을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 천명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종교적 사기꾼의 꼭두각시로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과학이 신체적 도덕적 건강을 위한 이성적 기초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살펴보자. 과학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신체의 건강을 유지할지를 말해 주고, 그리고 도덕적 지적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들 책 속에 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이 몇몇 특권층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 임금 노동자와 자본주의 주인들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진 사회가, 이성적 삶의 원칙의 모든 가르침을, 인류의 10분의 9를 위해 아픈 아이러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더 많은 예를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단하게 끝내려고 한다. 다만 파우스트의 책장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먼지 가득한 창문이 그의 책으로 가득한 책장에 햇빛을 통과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둘러보라. 매순간마다 이러한 생각을 지지하는 신선한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더 이상 과학적 진실과 발견을 축적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이미 얻은 진실을 퍼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또 그것들을 공동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인류가 그것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과학은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기초가 될 것이다. 정의가 이것을 요구한다.
더욱이 고학의 바로 그 관심이 이것을 요구한다. 과학은 그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진보를 하게 된다. 하른과 클라우슈스가 오늘날 공식화시킨 열역학 이론은 비록 19세기에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 지식의 전파가 그것을 대중이 받아들이도록 할 때까지 80년 동안 학문적 기록에서 사장되어 있었다. 에라스무스 다윈의 종의 변이에 대한 이론이 그의 손자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리고 대중이론의 압박없이 학문적 과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기까지 3세대가 흘러가야만 했다. 과학자는 시인이나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항상 그가 활동하고 가르치는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이러한 생각을 고취하게 되면 당신은 다른 대부분의 인간들이 과학자들의 5세기 혹은 10세기 이전의 상태―확립된 진리를 완성할 수 없는 노예나 기계의 상태―에 머무르는 반면에, 과학자들이 과학적 진실들에 가득 둘러싸여져 있다는 것을 비난하는 상태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주어져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 폭이 넓고 깊은 인간적인, 그리고 심오하게 과학적인 생각을 고취하게 되는 날, 그날에 당신은 순수과학에 대한 당신의 취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변화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탐색에다 당신의 과학적 연구를 이끌어 준 객관성을 부여하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의 대의명분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궤변론적인 추론을 그만 두게 될 것이고, 그리고 우리들에게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 몫을 가진 소집단을 위해 일하는데 지쳐서, 당신은 당신의 정보와 헌신을 억압받는 자를 위해 곧바로 바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무가 성취된다는 느낌과 당신의 감성과 행동간에 진정한 조화가 당신이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힘으로 드러날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언젠가―교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멀지 않은 장래에 올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학은 그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연대된 노동자들의 강력한 힘과 집단 및 과학적 노동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서 진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보는 오늘날의 느린 진보가 초보자의 기초연습이었던 것처럼 보이게끔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과학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기쁨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쁨이 될 것이다.
Ⅱ
당신이 이제 법률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가 되고자 한다면, 아마도 당신 역시 당신의 미래 활동에 대해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나는 당신이 이타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가정한다. 당신은 아마 생각할 것이다. 나의 삶을 부정에 대한 끊임없는 항거에 바치는 것―이 어느 직업보다 더 숭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당신이 선택한 직업에 자신을 갖고 인생의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좋다. 법의 보고서를 사심없이 한 번 살펴보고 실제 생활이 당신에게 뭘 말해 주는지 한번 고찰해 보자.
여기에 한 부유한 토지소유자가 있다고 하자. 그의 소작인이 세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를 쫓아낼 것을 요구한다. 법적으로 이 사건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소작료 지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전답을 빼앗겨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토지소유주는 그가 소작세 받은 것을 쾌락 추구에 탕진하였다. 소작인은 항상 일만 하였다. 토지소유주는 그의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땅은 50년만에 3배로 값이 올랐다. 철도건설, 새 고속도로 건설, 택지의 배수시설, 황무지 건설과 공유지의 사유화 등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땅값 상승의 상당 부분에 헌신한 소작인은 파산을 하였다. 그는 관리인의 손에 넘어가고, 빚더미에 앉게 되어, 더 이상 땅주인에게 아무 것도 지불할 수가 없게 되었다. 법이 부자의 편에 있음은 명백하다. 땅주인이 옳다고 한다. 그러나 정의감이 법적인 허구에 의해 아직 질식되지 아니한 당신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그 농부가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야 하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그것이 법이 주장하는 것이다― 혹은 당신은 그 땅주인이 농부에게 농부의 수고로 인해 땅값이 올라간 만큼 농부에게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 이것이 평등이 요구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편을 들 것인가? 법의 편에서 정의를 거역할 것인가? 혹은 정의의 편에서 법을 거역할 것인가?
혹은 15일간 노동자들이 예고 없이 파업을 할 때, 그때 당신은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위기의 순간에 가공할만한 이익을 취한 고용주를 편드는 법의 편에 설 것인가? 혹은 그들의 처자식이 여위어 가는 걸 보며 하루에 2.5프랑만을 지불받은 노동자의 편에 서서 법을 거역할 것인가? 당신은 ‘계약의 자유’란 허구 편에 설 것인가? 혹은 당신은 좋은 성찬을 먹는 사람과 그리고 먹기 위해 그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 사이 ― 강자와 약자의 사이 ―의 계약이 아예 계약이 될 수 없다는 평등을 주장할 것인가?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파리에서 한 남자가 식육점 가까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비프스테이크를 훔쳐서 그것을 갖고 달아났다. 체포해서 심문한 결과 그는 실직 노동자임이 판명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이 4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다. 식육점 주인은 그를 용서해 줄 것을 요청받지만 그러나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는 고소를 하고 그 실직 노동자는 6개월형을 받는다. 눈먼 정의의 여신이 그렇게 원한 것이다. 당신이 매일 이와 비슷한 판결을 들을 때 당신의 양심은 법과 사회에 대한 반항을 느끼지 않는가?
혹은 다시, 어린시절부터 학대받고 조롱받은 이 남자가 자라면서 한 마디 동정의 말도 듣지 못했고, 그리고 끝내는 일백수우를 훔치기 위해 그의 이웃을 살인함으로써 그의 생애를 마치게 된 이 사람에 대해 법의 집행을 요구할 것인가? 당신은 그가 범죄행위 이상으로 병들어 있음을 잘 알고, 또 이러한 경우에 우리 사회가 그의 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야 한다는 것을 요구할 것인가? 혹은 그 대신에 20년간의 징역을 요구할 것인가?
당신은 분노의 순간에 제분소에 불을 지른 직공이 감옥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왕관을 쓴 암살자에게 총을 쏜 사람이 유죄라고 주장할 것인가? 바리케이트 뒤에 미래의 깃발을 꽂은 반정부 운동가들에게 총을 쏘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배운 것을 되풀이 하지 않고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이 법을 분석하고 법의 기원을 가리는 허구의 연막을 벗긴다면, 이 법의 허구는 강자의 권리가 되고 또 피의 역사로 얼룩지게 만든 인류에게 전승된 모든 독재자들을 위해서 계승되어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법에 대한 당신의 경멸을 심각할 것이다.
당신이 법률의 봉사자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은 매일 양심의 법에 반대하고 양심을 깍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불분명하게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양심에 대해 침묵하고 악한이 되거나, 혹은 전통을 깨뜨리고 모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부정을 폐지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사회주의자가 되고,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을 산업에 적용시킴으로서 노동자들의 운명을 개선하려는 꿈을 가진 젊은 엔지니어인 당신에게 얼마나 슬픈 환상이 기다리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젊은 에너지를 가파른 절벽을 깍아내리고 커다란 산에 터널을 만들어서 자연으로 나누어진 두 나라를 하나로 연결하는 철도계획에 바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일이 시작되었을 때 전노동자들 가운데 이 힘든 터널 작업에서 질병와 궁핍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또 몇몇 사람은 몇 푼의 돈과 결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당신은 그 작업의 곳곳에서 사악한 탐욕이 가져온 인간 시체의 흔적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철로가 완성되었을 때 그것이 침입자들의 포병대를 위한 물자수송로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신은 생산을 단순화시키기 위한 한 발명품을 만드는데 당신의 젊음을 바친다. 그리고 충분히 수면도 취하지 못한 수많은 노력 뒤에 마침내 이 가치 있는 발명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하자. 당신은 그것을 작업장에서 실제로 사용한다. 그 결과가 당신의 희망을 깨트려 버린다. 왜냐하면 10명, 20명, 혹은 수천명이 실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대부분은 어린아이이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기계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3명, 4명, 10명의 자본주의자가 재산을 모으고는 샴페인을 가득 들이킨다…. 그것이 당신의 꿈이었던가?
마지막으로 당신은 최근 산업의 진보를 연구한다. 그리고 재봉틀의 발견으로 재봉사가 아무 것도 벌지 못한다는 것,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이아몬드 시추기에도 불구하고, 성 고타르(St. Gothard)의 노동자들은 관절이 마비되어 죽어간다. 지파르(Giffard) 승강기 앞에서 석공과 일일 노동자가 실직이 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기술을 인도해준 독립정신을 갖고 사회적 문제를 토론한다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사유재산과 임금노동제 하에서는 모든 새로운 발명이 노동자들의 복지를 향상시키기는커녕, 그의 노예상태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그의 노동을 더욱 헐값으로 만들고, 약간이라도 여유있었던 노동을 더욱 숨가쁘게 만들고, 그의 불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자는 바로 다름 아닌 이미 그 자신을 위해 모든 쾌락을 가진 자본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당신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될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아마 그럴싸한 논쟁으로 당신의 양심을 침묵시킴으로써 묵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에 당신은 당신의 젊은 시절의 정직한 꿈에 안녕을 고하고, 당신 혼자 힘으로 기쁨과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 당신은 개발자의 진영으로 들어갈 것이다. 혹은 당신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당신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 “아니야, 지금은 발명을 위한 시간이 아니야, 우선 먼저 생산 체계를 바꾸도록 일해보자,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모든 새로운 산업의 진보가 인류 모두에게 혜택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기계가 되어 버린 노동자 대중이 연구와 기술로 강화된 지성을 산업에 적용하는 생각(사고)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기계적 생산이 더욱 앞서가게 되고 50년 내에 우리가 오늘날 꿈꾸어보지도 못한 것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학교 교사에게는 내가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의 직업을 지루한 잡일로 여기지 아니하고, 유쾌한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생기있는 시선과 행복한 웃음 가운데서 편안함을 느끼고 이들 작은 머리 속에 그 자신이 어렸을 때 품었던 인류에 대한 생각을 심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나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종종 당신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또 나는 무엇이 당신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지를 안다. 오늘날 당신의 생도가 라틴어에 능숙하지 못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마음을 갖고 있고, 열정적으로 윌리엄 텔의 이야기를 낭송하기도 한다. 그의 눈은 반짝이고, 그는 그곳의 모든 독재자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러한 열정으로 쉴러의 정열적 싯귀를 읊조린다.
노예 앞에서, 그가 그의 쇠사슬을 부러뜨릴 때,
자유인 앞에서, 떨지 말라.
그러나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엄마, 아빠, 삼촌이 목사나 경찰에게 그가 존경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꾸중을 한다. 그들은 그에게 “전제, 권위에 대한 존경, 복종”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쉴러를 옆으로 비켜 놓고 “세상을 사는 법”을 읽게끔 만든다.
그리고 어제 다시 당신은 당신의 훌륭한 생도들이 모두 나쁘게 변했다는 것을 듣게 된다. 사람은 유니폼을 꿈꾸기만 한다 : 또 다른 사람은 그의 고용주와 연합해서, 노동자들에게서 빈약한 임금을 빼앗는다 : 그리고 이러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품었던 당신은 이제 삶과 이상 사이의 슬픈 대조를 생각하게 된다.
당신은 아직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 2년이 지나, 실망과 실망을 거듭한 끝에, 당신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을 선반에 올려 두고, 텔은 분명히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조금 정신이 나갔다고 말할 것이다 : 또 시가 특히 하루 종일 복리법에 관해 가르친 후에 난로가에서 읽기는 최상의 것이지만, 그러나 시인은 항상 구름 속에 있고, 또 그의 시는 삶이나 학교 검열관의 다음 방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혹은 한편 젊은 시절의 꿈이 성숙한 사람의 확고한 신념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학교 안에서 또는 바깥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폭넓은 인간적인 교육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것이 불가능함을 보고, 당신은 부르조아 사회의 근본적인 토대를 공격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교육부에 의해 해고되고, 학교를 떠나 우리들에게로 와서 동참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지식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인류가 무엇을 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칠 것이다. 당신은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위해서 사회주의자와 함께 일하게 될 것이고, 평등, 진정한 형제애, 세계의 끊임없는 자유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젊은 예술가, 조각가, 화가, 시인, 음악가인 당신은, 당신의 선조에게 영감을 고취시켰던 신성한 불이 오늘날의 사람에게는 부재함을 관찰하지 못하는가? 예술이 일반적이고 평범한 영역임을 보지 못하는가?
그것이 다를 수 있겠는가?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위해 참조되었던 고대 세계를 재발견하는 기쁨, 자연의 원천에 의해 다시 불붙는 기쁨이 우리 시대의 예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적 이상이 지금까지 그것을 차갑게 버려 두었고, 이상이 부족하여 현실 속에서 그 기쁨을 찾는다. 식물 앞에서 이슬방울을 칼라로 사진 찍을 때, 소다리의 근육을 모방할 때, 혹은 하수구의 숨막히는 오물이나, 창녀의 침실 따위를 운문으로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 등에서 기쁨을 찾게 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고 당신은 말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잇다. 만약 당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신성한 불이 연기를 내는 심지보다 못한 것이라면 그러면 당신이 하고 있던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예술은 빠르게 가게장식인이나 삼류 오페레타의 연예소설 혹은 크리스마스 기념행사 이야기나 조달업자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당신들은 이미 그러한 단계까지 충분히 타락해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마음이 인류애의 사랑으로 고동친다면, 만약 진정한 시인처럼 당신이 삶에 대한 귀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둘레에 파도치는 이 고통의 바다 가운데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자들, 광산에서 쌓여진 시체들, 바리케이트 위에 더미로 놓여진 손발이 잘려진 시신들, 시베리아 벌판(눈판)이나 열대섬에 자신을 묻으려고 가는 망명의 행렬들 가운데서, 정복된 자의 고통과 승자의 향연의 외침, 이 커다란 전투 가운데서, 또 영웅이 될 것인가 겁쟁이가 될 것인가의 와중에서 불의에 앞서려는 고귀한 결단력 앞에서 당신은 중립인 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은 와서 억압받은 자의 편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삶 그 자체―이 빛을 위해, 인류를 위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들의 편에 서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침내 나를 가로막는다.
“도대체 무엇을!”
당신은 말한다.
“그러나 만약 추상적 과학이 사치이고, 그리고 의술이 기만에 불과하다면, 만약 법이 부당하고 기계공의 발명이 착취의 수단에 불과하다면, ‘실천’인 지혜를 거부하는 학교가 극복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혁명적 생각이 없는 예술이 타락된 것이기만 하다면, 내가 해야 할 일로 무엇이 남을까?”
나는 대답할 것이다 :
광대하고 흥미있는 일, 당신의 활동이 당신의 양심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작업,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열적인 자연을 일으키는 작업.
어떤 작업? 이제 나는 당신에게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
Ⅲ
당신은 당신의 양심에게 뇌물을 주어(매수하여) “내가 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또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도록 내버려둘 만큼 어리석은 한에 있어 인류는 멸망해도 좋다”라고 말하며 끝낼 수도 잇다. 혹은 당신이 사회주의자의 대열에 동참해서 사회의 완전한 개혁(변화)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분석해본 결과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것이 또 그의 주위의 사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리고 중산층 교육에 의해 제시된 궤변과 그의 친구들의 관심있는 견해를 무시하는, 모든 지성인의 논리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면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노동자를 야만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당신의 환경을 떨쳐 버리고, 사람들 가까이로 가라. 그러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특권층과 억압받는 자가 있는 곳에서 당신은 노동자 계층의 엄청난 개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개혁은 자본주의 봉건제도의 노예제도를 영원히 파괴하고 그리고 정의와 평등에 기초를 둔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의 슬픔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의 노래 속에서 표현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8세기 농노들의 노래나 오늘날 여전히 노래하는 슬라브 농부들의 노래로도 충분하지 못하다.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인식하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삶이 인류의 4분의 3에게 저주인 상태에서 벗어나 인류 모두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 그는 사회의 가장 힘든 문제들을 공격하고, 그리고 그의 상식, 관찰, 그리고 그의 힘들었던 경험을 갖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불행한 그의 동료들과의 공통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그룹을 형성하거나 조직한다. 그는 조직을 형성하는데, 기부금이 빈약하여 난관에 부딪친다. 그는 국경을 넘어 이해 받기를 노력하고, 이 땅에서 국가간에 전쟁이 불가능한 날이 서둘어 올 수 있도록 모든 인도주의적인 수사학자보다 그 이상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의 형제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들과 더 잘 친숙해지기 위해, 그의 사상을 완전하게 만들고 또 전파시키기 위해―그는 그의 빈곤과 희생을 대가로 노동신문을 출판한다.
마침내 그날이 올 때 피로 붉게 물들어진 바리케이트의 보루 위를 그는 분연히 일어나서, 부자와 강자가 그들의 특권을 위해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꿔놓은 자유를 정복하는데 투신한다.
얼마나 끊임없는 노력의 연속인가! 얼마나 끊임없는 투쟁인가! 얼마나 쉼없이 다시 시작되는 노동인가. 때로는―지쳐서, 타락해서, 혹은 박해 때문에― 떠났다가 생겨난 갭을 메우기 위해, 때로는 조총사격대나 대포에 의해 감소된 대열을 재조직하기 위해, 때로는 대량학살로 중단된 연구를 회복하기 위해 노동은 끊임없이 새로 시작되었다.
그 신문들은 그들 자신에게서 음식과 수면을 빼앗아감으로써 사회로부터 지식 조각들을 낚아채야만 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어려운 때는 빈곤한 사람들이 마른 빵을 먹고 모은 푼돈으로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인이 그의 노동자가, 그의 노예가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노동자들은 그들 가족들의 궁핍을 끊임없이 염려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당신이 그 사람들 사이로 가게 되면 보게 될 것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끝없는 투쟁 가운데서 얼마나 자주 노동자는 난관에 부딪치고 또 헛되이 외쳐보는가. “우리들의 희생 위에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공부할 동안에 우리가 옷을 입혀 주고 먹여준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거운 짐에 등이 굽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집을 지으며, 학교를 짓고, 박물관을 지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우리가 읽을 수도 없는 이 멋있는 책을 창백한 얼굴로 인쇄하였는가? 인류의 학문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들은 어디에 있는가? 또 누구를 위해 인류는 그 희귀한 착취자 만한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것인가? 자유를 설교하며, 매일 짓밟히는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눈에 눈물을 머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을 도우려 하지 않는 작자들, 시인들, 화가들 이 모든 위선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몇몇 사람은 수치스런 무관심 속에서 그들의 상황에 순응하며 즐긴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민을 경멸하고 그리고 서민들이 그들의 특권을 건드리면 갑자기 공격할 준비도 되어 있다.
그 장면에 센세이션을 찾는 혹은 북소리와 바리케이트를 꿈꾸는 젊은이가 때때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리케이트로 가는 길이 멀고, 일은 힘들며, 그가 기대하는 면류관이 가시밭길임을 알고는 사람들은 대의명분을 저버린다. 대개 이러한 젊은이들은 야망에 가득찬 모험가들이다. 그들은 첫 번째 시도에 실패한 후에, 사람들의 표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나중에 사람들이 그들(지도자)의 선포한 원칙을 감히 적용하면 제일 먼저 그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것이다. 또 아마도 그들 지도자들이 명령을 내리기 전에 감히 움직이면 그 노동자 계층에게 포를 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에 덧붙여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만한 경멸과 비겁한 중상모략을 듣게 되고, 그리고 당신은 이제 중산층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강력한 사회적 전개 속에서 사람들에게 주는 그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 당신은 물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모든 젊은이가 그들이 시작한 그들의 광범위한 기업에서 사람들을 도와줄 그들의 젊은 혈기와 지성과 쓸 수 있는 많은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순수과학의 애호가인 당신이, 만약 사회주의의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였다면, 모든 과학이 새로운 원칙과 조화를 이루며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당신이 여기에서 성취해야 할 과학적 혁명이 18세기의 과학적 혁명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임을 알지 못하겠는가? 당신은 역사가―오늘날 위대한 왕,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국회의원들에게 동의받은 후― 쓰여진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역사 그 자체가 인간 발달에서 대중의 성취의 관점에서 쓰여져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경제학―오늘날 자본주의 약탈의 (신)성화인―이 그것은 수많은 적용과 마찬가지로 그 근본적 원칙에 있어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인류학, 사회학, 윤리학이 완전히 개조되어야 하고 그리고 새로운 관점에서 보여진 자연과학 그 자체도, 자연현상의 개념과 표현 방법에 있어서, 크게 수정되어야 함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좋다. 그렇다면 하라! 당신의 능력을 좋은 대의명분의 처분에 맡기자. 특히 우리들이 편견과 싸우고 더 나은 조직의 기호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당신의 분명한 논리로 우리를 도우라. 나아가서 우리에게 우리들 일상의 투쟁(논쟁)에서 진정한 과학적 연구의 두려움이 없음을 적용할 수 있도록 도우라. 그리고 예를 들어 설교를 함으로써, 우리에게 사람이 어떻게 진리의 승리를 위해 생명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라.
의사인 당신들은 쓰라린 경험에 의해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배웠다. 그러나 인간이 만약 이 상태로 계속한다면 인류가 서둘러 멸망할 것임을, 오늘, 내일, 매일 그리고 모든 기회에 지치지 말고 얘기하자. 인류의 99%가 과학의 충고에 정반대되는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한 당신의 처방(약)이 효과가 없을 것임을 얘기하라. 질병의 원인이 제거되어야 함을 얘기하라. 그리고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얘기하라.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이 사회에 메스를 가하라. 이성적 존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얘기하라. 진정한 의사로서 회저병에 걸린(병든) 사지를 온몸이 전염되기 전에 잘라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라.
과학을 산업에 적용하기 위해 일한 당신은, 당신이 발견한 결과를 우리에게 와서 솔직하게 얘기하라. 미래를 향해서 용감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자에게 현재 우리의 지식이 어떠한 새로운 발명을 태동시킬 수 있으며, 더 좋은 조건하에서 산업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만약 인간이 항상 생산을 증가하고 싶을 때 인간이 무엇을 쉽게 생산할 수 있는가를 확신시켜 주라.
화가, 시인, 조각가, 음악가 당신들이 당신들의 진정한 임무가 무엇이고, 예술 그 자체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면, 우리들에게로 오라. 당신의 펜, 연필, 끌, 사상들을 혁명을 위한 봉사로 사용하라. 당신들의 우아한 문체와 인상적인 그림으로 압제자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거인적 항거에 대해 얘기하라. 당신들의 마음에 우리 조상들에게 영감을 고취시켰던 훌륭한 혁명적 열정으로 불을 붙이라. 아내들에게 사회적 해방의 위대한 대의명분에 생명을 바치는 남편들의 헌신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얘기해 주라. 사람들에게 실제 그들의 삶이 얼마나 추한가를 보여주고 왜 그것이 추한가를 설명해 주라(정확히 지적해 주라). 만약 모든 단계에서 현재 사회적 질서의 불합리가 없다면 삶이 어떠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얘기하라.
마지막으로, 지식과 재능을 가진 여러분 모두가, 만약 당신이 심장을 갖고 있다면, 당신과 당신의 모든 동료들이 와서 당신들의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라. 그러나 만약 당신이 온다면, 당신이 주인으로서 오는 게 아니라, 미래를 정복하기 위해 나아가는 새로운 삶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당신 혼자서 힘을 얻기 위해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가르치기보다 많은 자의 열망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신성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서두르거나 쉬지 않고 젊음의 모든 열정으로 일하기 위해, 그리고 삶 속에 있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때에 그리고 그때에만이 당신은 완전한, 고귀한, 이성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길 위에서 당신의 모든 노력이 풍성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한 번 성취되기만 하면 당신의 양심의 명령과 행동간의 숭고한 조화가 당신에게 당신이 결코 꿈꾸어보지 못한 힘을 가져다 줄 것이다.
진리, 정의 그리고 사람간의 평등을 위한 투쟁 ― 삶에서(인생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당신을 찾을 수 있겠는가?
Ⅳ
나는 앞의 세 장에서 인생이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딜레마의 관점에서, 부유층인 여러분이 용기있고 진지하다면, 와서 사회주의자와 함께 일하고 그들과 함께 사회적 혁명의 대의명분을 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 그러나 부르조아 환경의 영향을 느낀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보면, 또 얼마나 많은 궤변론과 투쟁을 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편견을 극복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가 개입된 반대를 물리쳐야 하는가?
오늘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간단하게 얘기하기는 쉽다. 여러분이 사고하고 행동할 만한 조그마한 용기라도 가지고 있다면, 사건의 긴박감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자가 되게끔 만들 것이다. 사실 현대 사회주의는 사람들의 깊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만약 부르조아계급(유산계층)에 의해 나타난 몇몇 사상가가 과학을 신성화시키고 철학을 지지한다면, 그들이 발표한 사상의 기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연합된 정신의 산물이다. 이성적 국제 사회주의는 직접적인 대중의 영향하에서 노동자 조직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이 사업에 동참한 문필가들은 이미 노동자들 사이에 일어난 열망을 단지 명료하게 공식화한데 불과하지 않은가?
사회주의의 승리에 헌신함이 아니고 노동자계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그 사람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오해하는 것이고 그의 대의명분과 역사적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렸을 때, 어느 겨울날 어두운 안마당에 놀기 위해 내려갔을 때를 기억하는가? 냉기가 당신의 엷은 옷을 뚫고 들어와 어깨가 움츠려지고, 닳아빠진 신발 속으로는 진흙이 들어왔었다. 그때에 멀리서 화려하게 옷을 차려 입은 부유한 아이들이 경멸의 눈초리로 당신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것을 봤을 때 당신은 이들 예쁘게 차려 입은 원숭이들이 지성, 상식, 에너지에 있어서 당신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더러운 공장에서 아침 5시나 6시부터 12시간 동안 힘들게 일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훌륭한 학교, 학원, 대학에 교육을 받기 위해 편안히 다니고 있다. 또 당신보다 덜 지성적이지만 더 잘 교육을 받은 바로 이 아이들이 당신의 주인이 되고 모든 삶의 기쁨과 문명의 이익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당신에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좁은 평수에 5, 6명이 웅크리고 모여 사는 어둡고 습기찬 좁은 아파트로 당신은 돌아간다. 그곳에서 당신의 어머니는 세우러보다는 근심에 나이들고 삶에 지쳐서, 당신에게 당신의 유일한 식사인 마른 빵과 감자와 커피를 준다. 그리고 당신은 끊임없이 똑같은 질문을 갖고 당신의 생각을 괴롭힌다. 내일 빵값은 어떻게 지불하지, 그리고 다음날은 주인에게 집세를 어떻게 지불하지?
당신의 부모가 30 - 40년 동안 힘들게 살아온 똑같은 삶을 당신이 또 그렇게 살아야 하다니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빵 한 조각을 위해 영원히 걱정해야 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번영, 지식, 예술의 기쁨을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신의 평생을 수고함이 옳은가? 극소수의 상전에게 모든 사치를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신 자신을 헌신하고,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모든 것을 영원히 포기함이 옳은가? 곤경의 때가 올 때에 노동에 지쳐서 고통과 비참으로 끝날 것인가? 이것이 당신이 인생에서 갈망하는 것인가? 아마 당신은 포기할 것이다 : “몇 세기 동안 사람들이 똑같은 운명을 살아왔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도 역시 또한 복종해야만 한다. 열심히 일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잘살려고 노력해보자!”라고.
아주 좋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삶 그 자체가 당신을 계몽시키는데 수고를 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불경기의 날이 올 것이다. 예전처럼 일시적인 불경기가 아니라 전 산업을 파괴하고, 노동자를 비참 속에 빠트리고 그 가족들을 빈곤 속으로 몰고 가는 불경기의 날이 올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지금 그러한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눈 앞에서 당신의 아내, 아이들, 친구들이 어떻게 서서히 궁핍에 찌들려서, 또 여위어 가는지를 보게 된다. 음식이 부족하고, 보살핌과 의료시설이 부족하여, 그들은 비참한 고통 속에서 운명을 다한다. 그러나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람들과(당신들과) 상관없이 대도시의 햇빛 가득한 거리에는 유쾌한 삶들이 즐겁게 영위된다. 그때에 당신은 이 사회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이 불경기의 원인을 생각하게 되고 또 극소수 상전들의 탐욕에 수백만 인간이 희생되는 이 혐오의 깊이를 세밀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사회학자들이 우리의 현사회가 밑바닥부터 꼭대기 끝까지(하층에서부터 상층까지) 재조직되어야 하고, 또 재조직될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들일 옳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 한번은 당신의 고용주가 자신의 재산을 더욱 늘리기 위해 그리고 당신에게서 몇푼이라도 더 착취해 내기 위해 임금 감소를 시도할 때, 당신은 항거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만하게 대답할 것이다 : “만약 내가 제안하는 임금으로 일하지 않으려면, 가서 풀을 먹고 살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주인이 양의 털을 깍듯이 당신을 착취하고, 또 당신을 마치 열등한 종류의 동물인 것처럼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만족하지 않고, 그는 모든 면에서 당신을 노예로 만들려 한다. 당신은 그의 앞에 엎드려 인간의 고귀함을 다 포기하고 모든 굴욕의 고통을 감내하거나, 혹은 피가 솟구쳐 당신을 쓰러뜨리는 그 노동에 몸을 떨고, 거리에 나와 사회개혁자들이 “반역하라! 경제노예제도에 항거해서 반역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노예제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그들이 얼마나 옳은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에 당신은 와서 사회주의자들의 대열에 자리를 잡고, 경제적?정치적?사회적 ― 모든 노예제도의 완전한 파괴를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또 언젠가 당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한 젊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걸이에, 솔직한 태도와 유쾌한 대화를 소유한 자였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세상 모든 고통과 싸운 뒤에, 그녀는 마을을 떠나 대도시로 간다. 그녀는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러나 벌어서 최소한도로 정직하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어떤 자본주의자의 아들에게 구애를 받고 그의 꾀임에 넘어가 자신을 내맡겨 버린다. 젊음의 열정으로 자신을 내던지지만 1년 뒤 아이를 가진 채 버림을 받고 만다. 그녀는 더욱 용감하게 투쟁하지만, 추위와 굶주림의 이 부당한 싸움에서 패배하고,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어리석은 말로 이 불쾌한 기억을 쫓아낼지도 모른다. “1등도 아니자만 꼴찌도 아니야.”라고 당신은 말하고 그리고 어느날 저녁 한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는 가운데서 그 젊은 여자가 모욕 받는 것을 듣게 된다. 한편 이 기억이 당신의 심장을 사로잡고, 당신은 그 저주받을 유혹한 남자를 찾아내어, 그녀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당신은 이와 같은 매일의 사건들의 원인들을 통해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한편에는 비참한 자들이, 또 다른 한편에는 그럴싸한 사탕발림의 말과 짐승같은 욕구를 가진 플레이 이들이 있는 한 ― 즉 사회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한 그러한 불행은 계속 되풀이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이제 이 나뉘어져 있는 불평등을 종식시켜야 할 시간임을 깨닫고, 서둘러서 사회개혁자들에게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 여자들은 냉정하게 방관만 할 수 있는가? 당신 옆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예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만약 사회 조건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운명이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지 당신은 생각해 보지 않는가? 당신의 막내 동생이나 당신의 자식들의 미래가 어떠할지 생각해 보지 않는가? 당신 아들도, 당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루하루 빵 얻는 것 외에는 다른 걱정없이, 술집 외에는 다른 기쁨없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당신은 원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아들과 남편이 재산을 물려받은 유산자의 처분에 맡겨지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아들과 남편이 재산을 물려받은 유산자의 처분에 맡겨지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그들이 주인을 위한 노예, 단순한 전투에서 대포에 희생되는 병사, 부자의 목초지를 비옥하게 하는 비료가 될 것을 원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하다! 당신의 남편이 결단력을 갖고 열정적으로 파업을 하다 손에 수갑을 차고 따라서 그의 삶은 끝장이 나며, 그 오만한 자본가가 몇 년 형일 지를 결정한다는 것을 당신이 들을 때 당신의 피가 끓을 것임을 안다. 당신은 스페인 민중봉기 때 군인의 총칼에 자신을 내맡긴 스페인 여자를 존경할 것임을 나는 안다. 또 감히 사회주의자 죄수를 분노케 한 간수의 가슴에 총알을 박은 한 여자의 이름을 경탄하며 언급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파리의 여자들이 억수처럼 쏟아지는 총알들 속에서 그들의 남편들을 어떻게 격려했는가를 읽을 때 당신의 가슴이 뛸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도 결국은 미래를 정복하기 위해 일하는 자들과 동참하기 위해 우리의 운동에 합류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진지한 젊은이, 남녀, 농부, 노동자와 군인,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권리를 생각하고 우리에게로 올 것이다 : 당신은 당신의 형제와 함께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에게 올 것이고, 그 혁명은 모든 노예제도를 폐지하며, 모든 구속을 끊어버리고, 옛 전통을 깨뜨리며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의 지평선을 열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혁명은 마침내 인류사회에서 진정한 평등과 진정한 자유를 마침내 성취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라. 그들 노동의 열매를 마음껏 즐기기 위해, 그들 능력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 또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행복한 삶을 위해 일하라.
우리가 목표로 하는 유익한 것을 성취하기에는 우리 집단이 너무 연약하다고 말하게 하지 말라.
부정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농부들, 그들 자신은 왕겨를 먹고 주인을 위하여 곡식을 남기는 농부들 ―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수많은 대중인 것이다. 우리는 넝마를 입고 비단과 벨벳을 짜는 노동자들 ― 우리도 또한 대중인 것이다. 공장이 고동을 울릴 때 우리는 거리로 나가 성난 바다처럼 달려들 수 있다. 우리들의 장교가 십자훈장이나 리본을 받을 수 있도록 총알받이가 되는, 엄한 훈련을 받는 우리 군인들은, 어리석게 우리 형제를 쏘기도 하는 우리 어리석은 군인들은 ― 우리는 다만 방향을 바꾸어(전향하여) 우리에게 명령하고 이 리본을 멘 장교가 창백하게 되도록 만들기만 하면 된다. 고통받으며 분노하는 우리 모두가 대중인 것이다. 우리가 바로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바다(대양)인 것이다. 우리가 뜻만 가진다면, 정의의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The Autonomy Review
해리 클리버 / 역자 : 김경종(밥풀)
크로포트킨, 자기가치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Anarchist Studies 2(1994): pp. 1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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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가 크로포트킨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에 주최한 <피터 알렉세이비치 크로포트킨 회의>를 위해 작성, 제출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이 회의는 1992년 12월 8일부터 14일 사이에 모스크바, 성 페테르스부르크, 디미트로프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런 회의로는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땅에서는 최초로 열린 것입니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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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기층대중의 광범위한 저항으로 초래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서구 자본주의의 계속되는 위기는 온갖 유파의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현 사회의 이행 문제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재검토 대상에는 초기 혁명가들이 과거 사회격변 시기에 겪었던 경험은 물론 그들의 사상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행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의 재창조 문제에 대한 유사한 접근방법으로 마땅히 새로운 관심과 비교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아나코-코뮤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통에는 새로운 사회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물질성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한 피터 크로포트킨의 분석과, 노동계급 '자기가치화' - 새로운 존재방식과 사회관계 형태를 정초하기 위한 이질적인 자율주의적 노력 - 의 현재적 과정 내부에서 미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자율주의적'(autonomous)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이 포함된다. 이 논문은 이들 두가지 접근방법을 검토하고, 자본주의의 대안을 건설하는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비교, 대조한다. 현재적 위기에 이들 접근방법을 적용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현 지구적 위기 - 동구 국가사회주의의 몰락과 서구 자본주의의 스테그네이션, 남부의 새로운 저발전 - 의 한복판에서, 지난날의 혁명적 사상과 경험에 대한 재검토는, 현재 속에서 창조적 답변을 내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1905년에서 1917년에 이르는 러시아 혁명 시기의 피터 크로포트킨이, 그의 동료와 러시아 인민이 다양한 정치변화의 경로에 놓여 있는 가능성 [1]과 위험에 대하여 사고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방법으로,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뮨의 교훈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고고학(archaeology)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것은 그가 1921년에 사망할 당시 몰두하고 있었던 기획 - 10월 혁명의 격랑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을 의도로 윤리학사를 연구했었던 것과 동일한 류의 고고학적 기획이다.
이 글에서는 혁명적 변혁과 사회의 진화에 관한 크로포트킨의 사상 중 하나의 특정측면 - 탈자본주의 사회의 출현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 - 만을 집중조명할 것이다. 나는 그의 접근방법이 오늘날 엄청난 중요성을 가질 뿐 아니라, 서구의 소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사했던 방법과도 가깝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유사성이 존재한다면, 물론 나야 그렇게 생각하지만, 소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작업은 크로포트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는데, 이들이 크로포트킨으로부터 자신들의 영감을 찾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크로포트킨과 자본주의의 이행
현 사회질서를 넘어서거나 혹은 "이행"한다고 하는 일반적 개념과 관련해서는 서로 다른 수많은 쟁점들이 존재한다. 크로포트킨은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투쟁의 수많은 실천적 쟁점과 관련된 논쟁에 활발하게 개입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사회의 본성과 사회진화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좀더 일반적인 이해로부터 자신의 판단 근거를 구하고자 하였다. "상호부조"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동물사회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에도 각 개체들이 자기 종의 다른 구성원들과 협력하여 만인 대 만인의 전쟁처럼 경쟁하기 보다는 서로 돕는 고유한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아나코-코뮤니즘 정치학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크로포트킨은, 이처럼 인간사회의 지속적이고도 발전하고 있는 측면에 대한 분석 위에 자신의 정치학을 정초함으로써, 자신을 새로운 사회 창조에 관한 모든 유토피아적 접근과 차별지운다. 한편, 그는 "근대 사회주의자"라고 불린 일부 선구자들의 노력에 분명히 우호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혁명적 중앙집중주의자들의 "쟈코뱅식 유토피아"에는 적대적이었다.[2] 그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려는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매우 뚜렷이 하였다. 1887년에 "아나키스트의 방법으로 말하자면, 유토피아 사상가들의 방법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아나키스트는 인간사회를 과거나 현재 모두 있는 그 상태대로 연구하고... 인간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경향, 그리고 증가하는 지적, 경제적 욕구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며, 이상 속에서 진화의 방향을 지적할 뿐이다."라고 썼다.[3] 이런 연유로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1892)를 유토피아라기 보다는 "제안"(proposition)이라고 규정지은 우드코크의 주장은 함량 미달이다. 그 책에서 크로포트킨은, 탈자본주의 사회의 요소를 구성하는 현사회의 구체적 발전들에 관한 연구의 결과물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류의 사회가 출현할런지도 모를 방법"을 소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미래가 이미 현재 속에서 어떻게 출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4]
이처럼 경향들에 촛점을 맞추는 그의 접근방법은 정치학(윤리학 포함)의 근거 를 "이미 발전하고 있는 것"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 두기 위하여 칸트의 순수 합리적인 "의무"를 폐기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5] 푸리에나 오웬도 팔랑헤스타로부터 협동체에 이르기까지, 사회가 조직되어야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꼼꼼히 기술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레닌과 볼셰비키도 노동이 조직화되어야 하는 방식(테일러주의와 경쟁)과 사회의 의 사결정 과정이 조정되어야 하는 방법(당 지도부와 중앙 계획을 통한 내리먹힘 식)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6]
크로포트킨은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에 현재 속의 구체적 동향에 관한 연 구를 심화시킬 즈음, 사회의 실질적 작동에 대한 검토를 통해 농촌이 살아남 을 수 있었던 것뿐 아니라 급속한 산업화 과정 역시도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 이 늘상 주장하는 "경쟁"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커나가는 협동과 그 위력 때문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산업화 과정에 있어, 예전과 마찬가지로 밀접한 상호교류가 확실히 상호투쟁보다 훨씬 더 이득이 된다"고 썼다.[7] 그리고 만약 상호부조의 발전과 확장이 인류 진보의 핵심으로 자리잡는다면, 정치학과 윤리학 모두가 이러한 인식에 의거하는 것 만이 논리적일 것이다. 아나키스트의 임무는 이러한 발전의 걸림돌을 공격하 고 상호부조가 확대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8]
계속된 연구에서, 크로포트킨은 이들 두가지 모순된 경향, 협동과 경쟁의 체현 물을 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상대적으로 이 연구는 쉬운 편이었다. 예를 들 어, 농촌 코뮨이 살아남아 있는 것이나 재형성되고 있는 현상은 지리적, 문화 적으로 비교적 고립된 곳에서 나타났으며, 이들 공동체의 제도와 행위는 직접 연구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인민주의자들이 수행한 바 있었다. 길닦기와 도랑 치우기, 산림을 돌보고 수확을 거들기, 우유 및 일용품 생산, 집짓기, 신부의 혼수 준비 등 서로 다른 수많은 지역의 농민들이 노동과 생활 속에서 어떻게 협동해 왔는가를 예증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9]
그러나, 그가 연구했던 사회적 현상이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의 발흥 및 세계 시장에 의해 재주조되면 될수록, 그의 분석은 더욱 어려워지고 미묘해져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현지 작업장과 지역산업으로부터 경제의 지구적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층위에서, 모든 것을 철저히 분할하려는 자본주의적 경향과 는 정반대의 목적으로 작동하는 협동과 상호부조의 징후적 힘을 찾아내 규명 해야만 했다. 그가 연구에 쏟은 노력은 인상적인데, 그였기에 가능했던 것이 다. 그는 사회의 모든 층위에 사회적 협동이 존재함을 깨닫고 논증하기 위하 여 수사학과 경쟁의 실제성을 극복하였다. 경제학자들이 정태적 비교이익을 강조한 반면, 크로포트킨은 산업들 사이에서 증가하는 복잡성과 상호의존성 (협력) - 지식과 경험의 멈출 수 없는 국제적 순환과 밀접히 결부된 발전을 향한 동태적 반경향을 증명하였다. 경제학자들(그리고 최근의 노동 사회학자 들)이 생산전문화의 효력과 생산성을 찬양한 반면, 크로포트킨은 바로 그 생산 성이 경쟁이 아니라, 단지 형식적으로 분할된 노동자들의 상호연계된 노력 위 에 어떻게 기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자면, 그가 산업의 도시화와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농업 생산간의 관계 에 주의를 기울렸을 때, 단지 전자만을 공격하고 후자를 애석해 한다거나 과 거의 전원적 이미지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었던 것은 아니다. 대신에 생태적으 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러한 절름발이 전문화가 이미 극복되고 있었던 환경 들, 실례로 파리 외곽의 야채밭처럼 도시의 쓰레기가 땅과 다시 합쳐져 모두 에게 이득이 되고 있는 곳을 찾아나섰다.[10] "공장들 이 촌락으로 이주하려는 현저한 경향"과 소규모 생산단위들이 대규모 생산단 위보다 더욱 효율적인 경향을 규명하고자 하였을 때, 희망사항에 빠져있거나 단지 예언만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11] 이러한 성격의 크로포트킨 저작은 경험적 관찰에 기반하고 있으며, 자료값과 일치하 는 분석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과학적"이었다.
크로포트킨 연구의 이러한 측면 중에서 나의 현재적 관심은 그의 관찰과 기여 의 정확성 보다는 작업 방법에 있다. 누군가 했던 것처럼, 그가 규명했던 경향 들 가운데 어느 것이 지배적이었으며, 어느 것이 사라졌거나 압도당했는가를 연구하는 것은 유용하다.[12] 그러나, 그의 작업은 미 래에 대한 정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와 자본주의 체제로 부터 벗어나는 대안적 경로를 제공하는 현재 속의 경향들을 발견하는 방법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가 글을 쓴 이후에도 계속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그가 주목했던 대안들 중 일부는 흡수되어 더이상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일부는 살아남았다. 불가항력적으로 또다른 대안도 출현 하였다. 우리의 과제는 그 대안들을 인식하고 검토하는 것이며, 이 과제가 적 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 대안들의 발전을 지지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이행문제
중대하게도, 마르크스주의 - 마르크스주의자라 자칭하는 자들의 활동으로 이 해한다 - 는 20세기 내내 위기 상태에 처해 있었다. 크로포트킨이 매우 명료 하게 보았던 것처럼, 처음에는 사민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이후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흥기함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배이데 올로기가 되었다.[13] 서유럽에서 권력을 다투는 사민 주의자들이건 소련에서 집권하고 있는 레닌-스탈린주의자들이건, 마르크스주 의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노동자의 자기해방투쟁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적 투쟁 의 이론적 분석으로부터 집중화된 권력과 사회주의적 축적에 대한 이론적 정 당화로 전화되었다. 이것이 전세계에서 다양한 분장을 하고 있는 "정통 마르 크스주의"의 참모습이다.
소련 내에서는 즉각적인 관심사였지만,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단지 이론적 중요성만을 가졌던 주요 쟁점은 자본주의가 이행될 수 있는 과정에 관한 것이 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이 문제를 "이행"의 문제라고 정식화 하였으며, 그 해결책은 "사회주의"였다. 모든 사회가 경유해야만 하는 선형적이며 목적론적 인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공산주의를 낳게 될 이행과정(사회 주의라 불리움)을 통해 대체되어야만 했다. 서구 사민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 에 대한 소소한 수정을 통해 그러한 이행을 추구하였다. 소련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통제하는 국가와 중앙계획을 통해 신속히 이행을 달 성하려 계획하였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경우 모두에서 "사회주의 적" 축적은 자본주의적 축적과 별반 다를게 없었으며, 대다수 인민의 생활은 기업이나 국가의 감시 하에서 쳇바퀴 같은 끝없는 노동에 계속 종속되어 갔 다. 정말이지 인민들은 서방 뿐 아니라 소련에서도 투쟁을 통해서만 얼마간의 개량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는,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속아 넘어갔던 사람들 조차도, 단지 권력과 착취를 더욱 합리화시켜주는 것일 뿐이라고 인식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일반적인 위기는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물이라 간주하여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킨 이러한 과정 외부에 이에 반하는 다양한 혁명적 경향들이 존재하였는데, 이 경향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고취하고자 여전히 마르크스의 작업에 의존하였으며, 마르크스 이론의 사민주 의적 그리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해석을 모두 거부하였다. 이들 중 가장 흥 미로운 경향은, 이 글의 의도와도 관련되는 것으로, 반자본주의 투쟁에 있어 인민의 자기행동성과 창조성을 우선시할 것을 주장했던 경향이다.[14] 이러한 경향들의 공간 내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에 대한 정합적인 비판이 발전해 갔으며, 이 비판에는 "이행" 개념에 대한 거 부 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한 크로포트킨의 사고와 상당히 유사한, 자본주의 이행문제에 대한 재개념화가 포함된다.
이와 같이, 자본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나 당과 같은 "공식적"(official) 계급조 직에 대하여 노동계급 자기행동성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 일반노선 및 이와 관련된 정치학을 지시하기 위하여 자율주의적(autonomist) 마르크스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행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자의 자 율성에 대한 강조로 탈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는 유일한 경로는 인민의 이름으 로 국가를 통제하는 당이 관리하는 사회주의적 이행질서를 통해 가능하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을 거부하게 되었다. 대조적으로, 새로운 사회 건설 과정은 혁명과정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당이나 국가가 아닌] 인민 자신의 과 업이거나, 혹은 시작부터 그 운명이 결정지워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 출현하였는데, 그 중 가장 먼저 출현 한 정치적 경향 중의 하나는 "평의회 공산주의"였으며, 독일의 "노동자 평의 회", 러시아의 소비에트를 인민에 의해 건설된 새로운 조직형태로 사고하였다. 아나키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접수(노동조합의 접수 역시 마찬가지)를 혁명의 파산이자 지배와 착취로의 반동이 개시된 것으 로 간주하였다.[15]
수년동안 노동계급의 자율성을 강조하다보니 계급투쟁의 양면적 성격을 밝혔 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재해석하여, 촛점을 자본(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선점) 으로부터 노동자에게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동으로 다수의 새로운 인 식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적어도 노동계급 자체가 자본의 범주 - 모든 사람 들이 피해가거나 탈출하고자 투쟁해 왔던 조건을 표시하는 범주 - 는 아니라 고 인식하게 되었다.[16]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을 노동자(전통적인 공장 임금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임금이 없는 농민, 주부, 학생에 이르기까지)로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사람들의 투 쟁은 이러한 종속화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대안적 존재방식을 건설하려는 노력 에 이르기까지 양측면에 걸쳐있다는 것이다.[17] 자율 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방금 말한 이같은 현상에 대한 관찰과 연구로부터, 자 본주의적 지배와는 정반대의 목적으로 작동하는 상호부조의 경향을 발견하고 자 노력하였던 크로포트킨의 연구와 동일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론틀은 얼 마간 다를지라도, 작업의 성격은 동일하였다.
물론, 이론틀의 차이점이 크로포트킨은 마르크스의 계급분석을 피해갔다는 점 에서 발견될 수 있다. 생산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게 된 역사적 기원과 같은 자본주의 분석의 여러 측면이 상당부분 중복되긴 하지만, 마르크스와는 매우 달리 크로포트킨이 일관되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인간본성과 사회에 관한 이론이었다. 그가 상호투쟁 및 상호부조의 "법칙"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은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및 소외되지 않은 협동에 관한 이론과 유사한 점이 거의 없다. 크로포트킨이 명확하게 밝힌 것처럼, 그에게 상호투쟁 및 상호부조의 법 칙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 고유한 경향들인 반면, 마르크스에게 있어 계급투쟁은 역사상 계급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무계급사회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소외와 협동에 관한 독자적 분 석에서 서로 밀접하게 가까워진다. 양자는 자본가가 노동을 분할하고 노동자 들끼리 싸우게 만듦으로써 개인들이 비참해지는 것을 목격하고서는 안타까워 한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생산성 수준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협동의 근본 적 힘을 인식하고 분석하였다. 더구나, 상호부조의 경향이 드러나는 방식에 관 한 크로포트킨의 주장과, 노동자가 자본의 착취에 대응하여 자기조직을 확장 시켜나간다는 마르크스의 주장 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특히 {그룬트리세}(1857)와 {자본론}(1867- )에서 노동계 급의 주체성 보다는 자본주의적 지배에 관하여 더욱 상세한 역사적 분석을 제 공하였다.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들 텍스트로부터,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에 관한 연구에 필적하는 노동계급의 자율성을 도출해내고 체계적 분 석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10여년 이상이 걸렸을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 었다. 이 작업은 자본주의적 발전유형이 어떻게 노동계급의 부정성(변화를 차 단 혹은 강제)에 의해 결정되는가에 관한 연구에서부터 노동자 투쟁의 긍정적 내용(자본이 억압하거나 흡수하려는 것)에 대한 연구까지를 망라한다.
이런 분석이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본의 가치증식에 대항하는 노동계급 의 '자기가치화' 개념이 접합하게 된 것은 중요한 진전이었다. 자기가치화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와 미국에서 벌어진 격렬한 계급투 쟁과 문화혁명 속에서 창출된 개념으로, 노동자의 자기행동성 뿐 아니라 단순 저항이나 부정을 넘어 새로운 존재방식을 창조해가는 투쟁의 측면을 더욱 전 문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이론적 수준에서, "자기가치화" 개념은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에서 행한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18] 마르크스는 노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산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 여 창조적이며 구성적인 사회적 힘인가를 밝힐 뿐 아니라, 노동의 자율성이 자본의 착취에 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결정하는 발전을 추구하면서 자신 을 끊임없이 집단적 계급주체로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재구 성해 가는 과정을 폭로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가치화"는, 자본이 자신의 발전 을 위해 재통합하려 하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구성하 는 새로운 인간행위를 정초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탈주하는 자기결정하는 노 동에 관한 주장을 가리킨다. 우리는 자기가치화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마르크 스주의가 전통적으로 촛점을 맞춰온 노동 - 자본주의적 지배 속에서 강요된 노동의 중심성에 의해 정당화된다 - 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비노동행위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으며, 이러한 비노동 역시도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적 대안을 구성하는 자율주의적 기획의 일부가 되는 공간과 방법, 수위를 탐색할 수 있 다.[19]
보충설명을 하자면, 자기가치화 개념은 노동계급의 자결성을 단일한 것이 아 니라 이질적인 것으로 개념화하는 방식으로 개발되어 왔으며, 그 결과 자율주 의적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정치적 전통이 자율성을 단지 노동계급의 자율성만 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자율성 - 예를 들면 백인과는 다른 흑인 투쟁의 자 율성,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자율성 - 으로 인정하게 되는 이론적 접합을 제 공하였다.[20] 이론적으로, 이질성을 이처럼 존중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 행위 자체의 이질성을 인정한 것으로부터 근원을 찾 을 수 있다. 인간이 비인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히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노동의 이질성이 끝없는 노동의 강제 속에서 통일된 사회통제의 기 획에 종속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만이 가능하다.[21] 혁명적 주체의 발전 속에서 노동(그리고 비노동)의 이질성은 작업(그리고 비 작업)상태의 이질성이라는 형식을 띠며, 그 결과 각이한 집단의 사람들이 자신 들의 행동과, 성차, 인종, 종족 등의 사회적 관계를 서로 다른 수많은 방향으 로 재구성하려는 창조적 자율결정성 프로젝트의 다중성을 구축해 가는 형태를 취한다.
자본이 지배하고자 하는 이질적인 인민들의 모두 다른 행위와 같은 것에서 기 원하는 자기가치화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에는 정치학 전반에 걸 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탈자본주의의 유일성이라는 사회주의의 전통적 이행개념을 거부하고, 현재로부터 현 자기가치화 형태의 미래로의 가공 (elaboration)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재정의 하는 하는 것이다.[22] 이러한 거부가 함의하는 정치 학은 자본주의 지배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투쟁의 순환을 조직하는 연계 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며, 적의를 최소화하는 가운데 차이를 존중하는 새로운 차원의 공적 상호작용을 건설하려는 것이다.[23]
환언하면, 코뮤니즘은 크로포트킨의 관점과 매우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재개 념화된다.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유토피아가 아니라, 커질수록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만을 요구하는 살아있는 현실. 이 재개념화는 또한 대부분의 정 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래전에 포기해버린 바 있는 마르크스의 개념 - "우 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독일 이데올로기}) - 과도 일치한다.[24]
크로포트킨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현재로부터 미래를 발견하려는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노력은 집단적 주체성에 관한 이론 뿐 아니라 실천 속의 실제 노동자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도 의존하여 왔다. 크로포트킨이 현재를 알 고자 과거를 연구했던 것처럼, 이들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역시 마찬가 지였다. 그가 농업과 공업간의 상호관계와 내적 경향을 연구했던 것처럼, 이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그렇게 하였다. 크로포트킨이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뮨으 로 거슬러 올라갔다면, 이들 연구자들은 1780년 런던 뉴게이트 감옥의 석방, 1791년 산도밍고의 노예반란, 1910년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투쟁, 1918년과 1919년의 독일 노동자 평의회, 1930년대 공장 대중노동자의 점거투 쟁, 1950년대 이탈리아 공장 노동자의 노조에 대한 반란, 1956년 헝가리의 노 동자 평의회, 1960년대의 학생운동과 여성운동, 1970-80년대 멕시코의 농민, 도시빈민투쟁 등과 같은 계급투쟁과 노동자 계급의 자기행동성의 계기들을 탐 구하였다.[25] 이러한 연구들은 자기행동성에 촛점을 맞춰 수행되었으며, 연구대상이 늘어갈수록 새로운 사회협력 형태에 연구가 집중되었다.
크로포트킨의 사례연구에서 보이듯이, 농촌지역 그리고 촌락 농민의 자기행동 성에 대한 연구로부터 얼마간의 명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20세기 내내 계속된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농민문화가 살아남아, 성장, 발전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농민문화가 고립으로 인해 분석하기 용이한 것으로 보였을 것 이다. 그러한 고립은 다만 상대적일 뿐이며, 농민문화의 자기행동성은 시골과 도시에서 서로 다른 집단간의 접속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는 연구결과가 이미 제출되었다. 크로포트킨이 목격했던 류의 협동이 다수 남아있을 뿐 아니 라,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 고립성을 넘어서는, 심지어 국경 너머로까지 공동체 의식을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정보와 투쟁의 순환수단을 제공해왔다. 멕시코에 서 그러한 네트워크는 "해먹"(hammocks)이라 불렸는데, 걸려든 사람을 곤경 에 빠뜨리기보다는 현지의 고유한 요구와 기획에 맞게 적응하였기 때문이 다.[26]
이 같은 농촌지역 연구, 특히 제3세계 농촌지역 연구와 유사한 것으로 도시 공업지역에서의 지배와 투쟁의 전개유형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마르크스 와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거의 배타적으로 공장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반면, 자 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사회생활 전반에 걸친 자본주의적 지배의 팽창 을 추적하여 "사회적" 공장 - 예를 들어, 사적 생활(가정, 학교 등)의 자본주 의 재생산에로의 통합 - 의 출현을 개략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서구의 비 판이론과는 달리, 이러한 팽창은 노동의 의미와 사회적 협력 및 상호부조의 내용을 변화시키고 있는 갈등과 투쟁의 동일한 팽창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연구의 목표는 사라졌거나 출현하고 있는 협력의 유형들에 관한 발견 물, 특히 반복적으로 자본주의적 제도화의 구속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협력유 형들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현 시기의 위기 및 재구조화와 관련하여, 노동계급 자율성을 지지하는 이탈리 아와 프랑스의 어떤 이론가들은 현 자본주의 위기의 핵심에 대중노동자의 주 체성을 대체해 나가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노동계급 주체성이 있다고 제안하 였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통제를 파열시키고 종속화 기도에 계속해서 도전하 고 있는 새로운 주체성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이, 이같은 노 력과 뜻밖의 해방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새로운 주체성(실 제로는 주체의 이질성으로 관찰된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초창기의 시도 중 하 나는 새로운 "몰의 부족"(tribe of moles) - 고도로 유동적인 실직 및 임시노 동자, 정시제(part-time) 학생, 지하경제 참여자, 사회적 공장의 대중노동자 조 직의 붕괴와 위기를 강제하는, 사회생활의 일시적이며 끝없이 변화하는 자율 지대의 창조자들로 구성되는 느슨한 공동체 - 이라는 규정이다.[27] 또다른 시도로는 "사회화된 노동자"라는 규정이 있 는데, 자본주의적 통제의 망에 도전하는 어느 한 주체의 생의 모든 계기에 걸 친 자기행동성에 의해 사회적 공장의 위기가 어떻게 정확히 파생되었는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28] 이들 이론가들은, 사회화된 노동자들이 "컴퓨터와 정보사회"로 결합되어 있는 개인간 상호작용과 정보의 교환 내에서, 증가하는 "소통"(communication)의 집단적 전유(예를 들어, 장 악)를 확인했다고 믿는다.
그 분석은 다음과 같다. 대량생산의 시기(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는 모든 집단 적 상호소통 체계로의 일상적 참여를 극소수 숙련노동자(예, 기술자와 과학자) 로 제한하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내외부의 근본적 분할(공장 안팎에서)로 특 징지어졌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이 모두 비난했던 그러한 분할이 었다.[29] 그러나, 계급투쟁의 동학은 이들 분할을 무 너뜨려 가고있는 노동의 시공간적 재구성을 점차로 강제해 갔다. 다른 한편, 갈수록 자동화는 단순 육체노동의 역할을 "서비스" 부문 뿐 아니라 제조업에 서도 극적으로 감소시켰다. 동시에, 지구적 협조와 지속적인 혁신에 대한 요구 는 정신노동의 역할 뿐 아니라, 정신노동의 집단적 성격마저도 확장시켰는데, 이로 인해, 정보흐름의 조작, 생산과정 상의 지적이며 정보력에 바탕한 의사결 정, 독자적 재량, 창조성 그리고 복잡한 사회협력망의 조율을 요구하는 수없이 많은 직업이 창출되었다.[30]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 이의 분할을 극복하려는 이러한 경향은, 지식의 독점화가 지식의 국제적 순환 으로 인해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크로포트킨이 분명 깊은 관 심을 가지고 지켜봤을 그러한 것이다.[31] 요점은, 사 회적 수준에서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자본주의적 명령이 증가하는 독립적 집 단 주체의 출현에 적응하는끔 구체화되며, 본질적으로 지적(따라서 "비물질 적")인 노동과 유희인 집단적 주체의 자기조직화는 자본의 구속력과 통제력을 반복적으로 넘어선다.[32]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와 베네토 지역의 여러 공업지대에서 발견된 패턴은 크로포트킨이 19세기에 깨달았던 촌락운동의 독특한 현대판이다. 크로포트킨 이 목격했던, 대규모 생산보다는 소규모 생산에서의 우월한 유연성이 1980년 대 "이탈리아의 기적"과 같은 급속한 성장의 핵심이었다.[33]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이 강조했던 것은 이와 같은 분산된 공장(fabbrica diffusa)의 건설이, 자본이 수용할 수 밖에 없 을 정도로 그렇게 강력했으며 자율적이었던, 다름아닌 노동자에 의해 어떤 방 법으로 추동, 진행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파리의 의류산업에서 보이는 유사한 진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는 고도로 독립적인 노동자들의 새로운 차원의 협 력적 자주관리가 드러났었다.[34]
더욱 폭넓게 보자면, 참으로 전세계의 제한된 지역에서나마, 하루가 다르게 컴 퓨터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대중이 직접 활용할 목적으로 전유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원래는 자본의 도움으로 기술발전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구축, 운영되었으나(알파넷), 오늘날의 네트워크(인터넷, 비트넷)는 대개 탈집중화되고 유연한 자신들의 조직에서 확고부동한 자율성을 간직하고 있는 모임들에 의해 구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재전유화 기도와 이 에 맞서, 다수 이용자 자신들이 창조했고 또 재창조해 나가곤 하는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이용의 자유를 옹호하고 "운동"에 대한 뜨거운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간의 항상적인 갈등의 영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자율성 및 이와 관련된 대립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가장 눈에 띄는 실례는 해커와 국가 사이 의 갈등으로, 해커들은 이들 네트워크에 족쇄를 채워 통제하려는 의도로 자본 이 구축한, 자유로운 이동을 막고 있는 벽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려 한다.[35] 최근 그들의 행위를 분쇄하고 탄압할 것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부당한 국가행위로 말미암아 미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가 되 었다.[36]
많은 주의를 끌고 있지는 못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기관(학술, 기 업 혹은 국가)이 운영하고 있는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로, 그들은 테크놀로지를 단지 "공식적" 노동을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과 친구 들)의 관심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몇년간 두드러 졌던 점은 거의 전적으로 현 질서의 전복과, 순전히 욕구가 같다는 이유만으 로 비위계적이며 리좀적(rhizomatic) 방식으로 접속되고 있는 동호인들의 자율 적 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네트워크들이라는, 확산되고 있는 네트워크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한 예로는, 평화넷, 에코넷, 유럽 대항네크워트와 같은 독립 네트워크 뿐 아니라, 비트넷 내의 진보적 경제학자 네트워크 (Pen-L), 활동가 메일링 리스트(the Activist Mailing List)와 같은 공식망 내 의 급진적 네트워크 또한 포함된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네트워크들은 이질적인 상황과 제도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다. 진보적 경제학자 네트워크(PEN) 같은 곳에는 학자들이 우선적으로 참여할 것이며, 평화넷이나 유럽 대항네트 워크와 같은 곳에는 다양한 활동과 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 다. 미국(가장 앞서가는 지역)내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관련하여 주목해왔 던 점은,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더라면 고립되었을 사람과 운동을, 소통과 동 참에의 길로 급속히 연계시켜 왔던 방법이다. 사회적 존재를 (텔레비젼과 마 찬가지로) 스크린에 달라붙은 순전히 반동적인 단세포로 퇴락시키고 있는 것 으로 해석되어 왔던 아케이드형 컴퓨터 게임의 제1세대와 현저히 대조되는 것 으로, 모뎀과 커뮤니케이션망의 확산은 극적인 방식으로 상당한 규모의 집단 적 사회협력이 튼실하게 성장하는게 기여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투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얼마간의 이러한 협력은 자본주의적 지배에 대 한 저항과 관련되어 있다. 동시에, 사회적 재조직화에 대한 협력적 접근을 종 종 무화시키고자 하는 시도 또한 존재한다. 현재 보여줄 수 있는 한가지 좋은 사례로는 캐나다, 미국, 멕시코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그리고 미약하나마 GATT에도 반대하는)에 반대하는 수백여 단체들이 연합하여 컴퓨터 네트워크 를 국제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저항의 노력 내에서도, 소 통의 과정은 새로운 상호 공동 관심사에서부터 노동자 권리, 환경위협, 노동의 국제적 분업을 다루는 토론 및 협의를 포괄해 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미 약하나마 일찌기 북아메리카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대륙차원의 풀뿌리 연대를 구성한다.
함의
자본주의 이행문제에 대한 이들 두가지 접근이 가지는 공통요소는 현재 속에 서 미래를 모색한다는 점이며, 사회협력과 존재방식에 관한 새로운 대안형태 가 구체화되고 있는 기존의 활동들을 규명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색 과 그에 따른 결론은 크로포트킨의 연구와 저작이 과거 생존 당시 그토록 호 소력있게 만들어 자극제가 되었으며, 여전히 그 신선함으로 영감을 불러일으 키고 있다. 그가 비록 운명론적이긴 하지만, 밝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낙천주의자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미래로 열린 더 나은 길의 출발점을 발견할 줄 알았고, 다른 사람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행하고 있는 최신의 작업에 많은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도 동일한 특성 때문이다. 그들은, 피폐화되고 실패했으며 거부된 정통 성을 대신하여 한층 활력있고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 실제 인민의 투쟁 속에 서 혁신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인민의 자기가치화에 대한 욕구의 일 부 요소와 이를 위한 프로젝트를 접합시킬 수 있었던 마르크스주의를 제안한 다.
두가지 경우에서 사용된 접근방법으로부터 함의를 이끌어내 보자. 오늘날, 위 기를 "해결"하려는 공식적이며 조합적인(corporate) 전략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길은 다른 곳 - 인민 자신의 자기행동성 - 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곳에 서만이 진실로 새로운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라야 그러한 해결 책을 밀고나갈 힘을 모을 수 있다. 1917년, 크로포트킨은 위기 속에서 위험을 보았다. 백군의 반동과 붉은 혁명으로 위장한 위험 - 의회주의 혹은 볼셰비즘. 1994년 우리는 민족국가의 정부 혹은 다국적 기업이던 국제통화기금(IMF)이 던 그 속에 있는 위험의 정체를 다시 규명하고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다. 1917년, 크로포트킨은 또한 이러한 위험에 대항할 힘을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 는지, 러시아 인민이 자기들의 해결책을 정초할 공간을 어디에서 창조해야 하 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노동자, 농민의 자기행동성. 1994년 그러한 힘이 존재 할 것만 같은, 힘을 규합할 수있는 곳을 찾기 위하여 다시 우리 주위를 둘러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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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저스티스 / 역자 : HanDDol
아나키즘을 정의하기
아나키즘(anarchism)은 수많은 방식으로 정의되어 왔다.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는 두 마디의 그리스어가 어원인 아나키(anarchy)라는 말로부터 나왔다. 아나키는 그리스어 av(의미: 없음[an으로 발음])과 apxn(의미: 권력 집단이나 정부["arkhe"로 발음됨])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아나키즘의 사전적 정의는 여전히 정부가 없다는 의미이다. 현대 사전이 아나키즘을 이렇게 정의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아나키스트들의 저작과 행동에 기초한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라는 단어가 실천적 이론을 뜻한다고 이해한다. 아나키즘 역사가와 괜찮은 사전과 백과 사전에서도 역시 그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대중매체와 같은 외부에서는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자주 오용하며, 그래서 오해를 낳는다.
주요한 현대 사전인 Webster's Third International Dictionary는 짧지만 정확하게 아나키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모든 형태의 정부와 유사한 형태의 속박에 반대하고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자발적 협동과 자유로운 연대를 주장하는 정치적 이론." 다른 사전들도 비슷한 의미로 아나키즘을 설명한다. Britannica-Webster 사전은 아나키즘을 "모든 정부 권력이 불필요하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개인과 집단의 자발적 협동에 기반한 사회를 주장하는 정치적 이론"으로 정의한다. New Webster Handy College Dictionary와 같은 더 작은 사전은 아나키즘을 "모든 형태의 정부는 폐지해야만 한다는 정치 학설"로 정의한다.
이러한 아나키즘에 대한 비슷한 사전적 정의는 아나키스트 지식인과 단체에 의해 가능했던 아나키즘 이론의 발전을 반영한다. 결과적으로 사전적 정의는 공평하긴 하지만 아나키즘이라는 말의 정수를 빠뜨렸다. 사실, 촘스키(Noam Chomsky) 교수는 아나키즘을 "정치 학설"로 설명한 American Webster Handy College Dictionary의 정의를 반박해 왔다. 촘스키 교수에 의하면, "... 아나키즘은 학설이 아니다. 사상과 행동의 역사적 경향이다. 이 경향은 계속해서 개발하고 발전 중인 수많은 길을 가지고 있으며, 내 생각에는 인류의 역사가 있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다른 현대적 정의는 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운동, 사람, 생각의 역사로서만 설명할 수 있다. 사실 Encyclopedia of the American Left은 아나키즘의 역사를 세 페이지로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린 적이 없다.
아나키즘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전에는 아나키즘와 같은 의미였던 "자유론적 사회주의(Libertarian Socialism)"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자유론적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18세기에 멕시코 원리주의자에 의해 많이 쓰였다. 고드윈(William Godwin)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했으며, 처음으로 아나키즘에 대해서 저술하였다. 그는 북 캠브리지셔(Cambridgeshire)의 수도인 Weisbech에서 1756년에 태어났다. 후에 페미니스트인 Mary Wollstonecraft와 결혼했으며,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쉘리(Mary Shelley)를 낳았다. 고드윈은 아나키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처음으로 소개한 정치적 정의(Political Justice)라는 책을 1973년에 출판하였다. 그러나 고드윈은 잊혀졌으며, 그의 사후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이 세계의 아나키즘을 이끄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책인 소유란 무엇인가?(What is Property?)는 아나키즘이라는 단어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다: 아나키즘은 기존의 권력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토지나 재산의 소유를 반대하는 이론이 되었다.
아나키즘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인 바쿠닌(Mikhail Bakunin:1814-1876)과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1842-1921)이 나옴으로서 정형화된 이론으로 만개하게 되었다. 바쿠닌은 영향력이 있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아나키즘을 소개했다. 크로포트킨은 바쿠닌에게서 영감을 받은 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에 대한 많은 책을 썼으며, 아나키즘 이론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책으로는 농장과 공장에서의 상호 원조(Muitual Aid,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가 있다. 크로포트킨은 1910년에 Encyclopedia Britannica 의 11판에 포함된 처음으로 사전에 수록된 아나키즘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작성했다. 그의 정의는 15페이지 길이였다. 그는 아나키즘이란 단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
지배 체제가 없는 사회에서의 생활과 행동에 관한 이론의 주요 원칙에 주어진 이름 - 문명화된 존재의 무한히 다양한 필요와 소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생산과 소비를 위해서 자율적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법의 준수나 어떤 권위에 대한 복종에 의해서가 아닌 다양한 그룹, 지방, 직업간의 자율적인 합의에 얻어지는 조화. 이런 방식으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자발적인 연합이 국가의 기능을 대치하면서 그 보다 훨씬 더 확장될 것이다.
크로포트킨 이후, 톨스토이(Leo Tolstoy)가 아나키즘의 의미를 더욱 발전시켰다. 톨스토이는 기독교(Christian) 아나키즘(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신 안에서 믿음을 찾음)을 만들어서 아나키즘의 의미를 넓혔다. 아나키즘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던 톨스토이는 "기존의 상황하에서 권력이 없다면 권력의 폭력보다 더 나쁜 폭력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옳다."라고 이야기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아나키스트 저술가와 운동의 발전으로 아나키즘은 절정을 맞기 시작했으며 아나키즘의 정의도 확실해졌다. 시카고에서 1986년에 있었던 8명의 아나키스트들의 체포와 투옥은 미국에서의 아나키즘의 발전을 촉발시켰다. Voltairnine de Cleyre와 Lucy Parsons와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Haymarket Eight"에 속해 있었다. Parsons는 노예로 태어났으며, 후에 아나키스트가 되어, 열정적인 웅변가와 노동계급 반정부 주의자로 활동했다; 시카고 경찰은 Parsons를 "... 수천명의 폭도보다 더 위험하다"라고 기록했다. Emma Goldman 또한 Chicago Martyrs로 인해 아나키스트 운동의 일부가 되었다. "저주받을 아나키스트 암캐"로 묘사된 Goldman 역시 아나키즘의 의미를 넓혔으며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아나키스트 페미니즘에서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사상을 만들어냈다.
Emma Goldman의 삶의 긴 동지였던 Alexander Berkman도 아나키즘이란 단어를 정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아나키즘을 정의하고 설명한 ABC of Anachism이란 책을 썼다. Berkman은 "아나키즘은 당신이 자유로워야만 함을 의미한다; 아무도 당신을 노예화할 수 없으며, 지배할 수 없으며, 빼앗을 수 없으며, 강요할 수 없다. 이것은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할 자유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의 정의가 이론만이 아닌 그 이상임을 증명했던 커다란 아나키즘 운동이 아나키즘을 실행에 옮겼다. 아나키즘적인 공동체적 노력은 19세기 초의 파리 꼬뮌에서 나타났고, Ricardo Flores Magon 같은 아나키스트들과 Emiliano Zapata 같은 혁명가들은 멕시코 노동자 계급 반군을 혁명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했고, 1936-39 사이의 스페인 혁명은 세계의 조그만 구역 안에서 아나키즘을 만들어낸 아나키스트들의 능력을 증명했다. 물론 현재도 스페인의 Mondragon과 같은 곳에서 진행 중인 아나키즘을 볼 수 있다. 그 곳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이 공동으로 일하며, 지배 권력 없이 자유롭게 살려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나키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긴 하지만(사전이나 아나키스트의 역사에 의해서 정의된 대로), 현재도 여전히 자주 오용되며 오해된다. 아나키즘을 폭력이나 혼란으로 오용하고 있는 이들은 역사적으로도 그래 왔고, 현재도 그렇지만, 보통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기존의 권력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 사가인 George Woodcock은 "아나키스트가 폭탄이나 던지고, 폭력이나 테러에 의해 사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이 폭탄을 던지지거나 폭탄을 던지도록 돕지도 않았던 소수였을 때 이런 죄가 아나키스트들에게 씌워진 것은 아나키즘 옹호자들 사이의 흥미로운 둔감함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Alexander Berkman은 오래 전에 아나키즘이 혼란이라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어떤 것이 아나키즘이 아님을 말해야겠다. 아나키즘은 폭탄, 무질서, 혼란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강도질이나 살인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모든 것에 대항하는 전쟁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미개 시절이나 야생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아나키즘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정반대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이런 전형적인 반박들은 아나키즘이란 단어를 대중적으로 오용함으로서 무시된다. 대중 매체들이 중동 국가에 "완전히 무정부 상태(아나키)," 같은 문장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 일은 아나키즘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고 아나키즘이란 단어가 현재의 의미를 가지도록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는 사람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현재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 그 정통성과 역사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의 아나키즘은 권력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권력이란 단순히 국가 권력뿐만 아니라, 기업체의 권력과 개인과 조직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다른 아나키스트들이 anarcho-syndicalism과 계급 투쟁에 머물러 있는 동안, L. Susan Brown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실존적 개인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또한, 아나키즘과 반인종주의, 노동자들과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자급 자족을 소개하는 음악과 Crass와 같은 밴드에 의해서 전세계로 퍼져 갔다. Black Panther 이전의 Lorenzo Kom'boa Ervin과 같은 다른 아나키스트들은 인종주의에 반대하여 단체를 구성하고 직접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더 나아가, 생태 아나키즘 사상과 Earth First!와 같은 자유 사상가 조직에 의해서 아나키즘은 생태주의에 통합되었다. 또한 멕시코와 미국에서 Love and Rage와 같은 아나키스트 신문으로, 미국과 영국에서는 AK Press와 같은 아나키스트 서적 출판사로, Anarchist Black Cross와 같은 양심수 지원 모임과 같은 방법으로 이론적으로든 실제 생활에서든 아나키즘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아나키스트들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와 본 바와 같이, 아나키즘이란 단어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그리스어 어원의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아나키스트들의 철학과 행동이 아나키즘이라는 단어에 적당한 정의를 부여한다.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사전적 정의는 때때로 공정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아나키즘이란 단어의 오용은 불행한 일이며, 지난 세기 동안 아나키스트들이 해결해야만 했던 문제였다. 아나키즘이란 단어의 오용과 단순화된 사전적 정의, 서로 다른 해석으로 인하여 아나키즘은 매우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진정한 의미는 아나키스트의 역사, 글, 행동에서만 찾을 수 있다.
다음 번은 바로 당신입니다
▒▒The Autonomy Review
리즈 A. 하일리맨 / 역자 : 조약골
무엇이 아나키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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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88년에 리즈와 (지금은 없어진)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의 아나키스트 그룹 블랙 로즈에 의해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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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나키즘인가?
아나키즘은 오해로 둘러싸인 하나의 정치철학이다. 이것은 대부분 아나키즘이 다양한 사고방식이어서 단순한 슬로건이나 당 노선들로써 특징지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사실, 10명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아나키즘의 정의를 묻는다면, 아마도 당신은 10개의 각각 다른 대답들을 얻을 것이다. 아나키즘은 단순히 하나의 정치철학 이상이다; 그것은 삶의 방식으로서 정치적, 실용적, 개인적 국면들을 모두 포괄한다.
아나키즘의 기본적 주장은 위계적 권위--그것이 국가이든, 교회이든, 가부장제 혹은 경제엘리트 이든--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의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데 본래적으로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은 창조성, 협동, 그리고 상호존중에 기초하여 자신의 일을 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권력은 원래 부패하게 되고, 권력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영구집권과 권력을 늘리는데만 신경을 쓰게 되어 주민들에겐 관심을 쏟지 않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윤리는 개인적 문제이며,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회의 안녕에 기반을 두어야지 사법부나 종교계의 압력에 의한 법제정(미국의 헌법 같은 것들)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 철학자는 개인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신봉한다. 가족주의적 권위자들은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을 배양하여,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여 행동하기 보다는 엘리트들이 대신 결정을 내리고, 요구를 대신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게 된다. 권위가 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결정들, 예를 들어 무엇이 가치있는 죽음이고, 죽일 만한지 (군대징집 혹은 낙태 등)를 억지로 지배하려 할 때, 인간의 자유는 현격히 감소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다양한 형태의 억압--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이성애중심주의, 계급지상주의, 국수주의를 포함하여--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며, 다른 억압들이 엄존함에도 단 한 곳에만 저항의 촛점을 맞추는 것이 쓸모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세계를 바꾸는 방식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반드시 상반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아나키스트들은 현존하는 폭력적인 제도장치들의 전복을 위한 공식적인 조직과 폭력적 행동을 포함한 전략과 전술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지만, 거의 대부분은 단순히 현존 질서를 파괴하는데가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새롭고 더욱 인간적이며 더욱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내는데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역사속의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들은 역사적으로 혁명적 운동들에서 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1798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강력한 원시-아나키스트적 요소를 지녔다. 피에르 조셉 프루동, 피터 크로포트킨, 미하일 바쿠닌, 그리고 에리코 말라테스타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혁명적 아나키스트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나키스트들은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에서의 혁명적 운동에 본질적인 공헌을 하였으나, 볼셰비키가 권력을 공고히 하자마자, 아주 무자비하게, 억압당하였다. 1936-1939년의 스페인 혁명은 아나키스트 실천을 대규모적으로 드러내 보인 무대가 되었으며, 그 속에서 아나코-생디칼리스트, (무정부- 노동조합주의자) 조직인 FAI 와 CNT는 실현가능하고 비위계적인 사회, 경제적 대안을 성공적으로 창조해 내었다. 멕시코와 라틴 어메리카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노동조합 운동(예를 들어 '전세계 산업노동자들')은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의 영향을 받았다.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과 같은 주요한 아나키스트들은 1900년대 초반에 걸쳐 다양한 급진적 움직임들에 참여했다. 많은 사회적 변화와 1960년대의 대안적 삶의 형태 운동들(일부 페미니스트운동, 게이해방운동과 반전, 언론자유 운동 등을 포함하여)에는 강력한 아나키스트의 조류가 있었다. 비록 많은 경우에 그들은 맑스주의자/레닌주의자/마오주의자 에게 억눌렸거나 그늘에 가려졌다.
아나키즘은 무엇이 아닌가?
아나키즘을 해명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공산주의: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공동체주의와 집산주의를 중시하는 반면, 아나키스들은 현존하는 그리고 최근에 무너진 공산주의자(더욱 정확하게는 맑스-레닌주의)국가들의 전체주의를 거부한다. 아나키스트와 맑시스트의 분열은 1870년대에 아나키스트들이 맑시스트들이 다양한 명목으로 (독재적) 권위주의를 지속시키고 있다고 인식하면서부터 심화되었다. 맑스-레닌주의 그룹들은 전통적으로 전위당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상, 즉 기본적으로 반권위주의적이며 최대의 개인적 자유를 강조하는 아나키스트들과 정반대되는 사상을 강조해왔다. 정통 맑시즘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가는 "소멸해갈" 것이라고 예상하는 반면에, 우리들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 정권들의 국가권력의 강화와 이에 따르는 억압, 순응에 대한 강조를 반복해서 보아왔다.
자유의지주의: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자주 아나키스트과 혼동되며, 사실 많은 점에서 중복되기도 한다. 둘은 모두 개인적 자유와 국가체제를 없애고 싶은 욕망을 강조한다. 많은 자유의지주의자들은 개인을 가장 중요시하며 분별있는 사리사욕추구의 원칙을 강조한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서로 돕고 그 지역 모든 구성원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을 보다 중요시 한다. 자유의지주의는 그 경제적 관점에 의해 가장 자주 특징지워지는데, 그것은 제한없는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가장 중요시하며(몇몇 옹호자들은 스스로를 "무정부-자본주의자들" 이라 부른다),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무력의 사용을 용인하며, 개인의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는 어떤 정부의 간섭도 반대한다. 그리고 경제적(일반적으로 금전적)용어로 판단되지 못하는 가치들은 무시해버린다. 자유의지주의자들이 반국가적인 반면, 그들은 자주 모든 형태의 지배와 위계질서(자유의지주의 철학은 종종 "적자생존" 혹은 "(경제적)힘이 곧 정의"를 위해 노력한다)와 모순되지 않으며, 사회의 권력관계(특히 경제적 권력에 기초한)들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더욱 사회주의적인 관점을 갖는 경향이 있고, 부유한 자들은 더많은 이득을 보고, 운이 없는 자들은 불공평한 고통에 시달리게 만드는 어떤 체제라도 폐지할 것을 선호한다. 아나키스트들은 개인적 솔선수범, 지능, 그리고 창의력을 중요시하기도 하지만, 그런 능력을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 역시 당연히 존중받고 공정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객관주의들은 자유의지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자유의지당은 상대적으로 온건하며, 선거개혁, 마약법률폐지, 그리고 정부의 조정을 줄이는 문제 등에 관심을 쏟는 경향이 있다. 많은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어떤 형태의 정부는 필요하나 그것은 가능한한 최소화되고 간섭이 없어야 된다고 믿는 "중도-아나키스트"들이다. 아나키스트 사회에서는 어떤 형태의 경제체제가 존재할 것인가의 문제는 미해결의 문제이다. 어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형태의 자본과 시장경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다른 이들은 노동자소유제와 완벽한 참여민주주의를 촉진시키는 체제를 선호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아직도 서로 자신의 체제와 가치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한 다양한 경제체제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자유주의": 이 나라(미국)에 퍼져있는 정치적 관념은 아나키즘을 좌익과, 그리고 좌익을 자유주의와 같다고 생각하지만, 양에서도 질에서도 실질적인 차이들이 있다. "좌익"의 생각은 많은 현대 정치학이 전통적인 좌익(자유주의)/우익(보수주의) 스펙트럼에서 벗어나는 경향이므로 1990년대에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이 "진보적인" 주장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은 전통적인 정치적 스펙트럼에 포함되지 않는다. 어떤 이론가들은 경제적 권위주의의 정도와 사회적 권위주의의 정도를 두개의 분리된 축으로 바라보는 (이론적) 기반을 제안해왔다; 경제적 자유를 두둔하는 이들은 자주 사회적 자유를 적대시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현대의 진보적 정치학은 개인의 주요한 관심과 협력관계는 인종, 성 그리고/혹은 성적 성향에 기초하여 만들어져야 한다는 "정체성 정치학(identity politics)"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비록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정체성 정치학에 많은 시간을 쏟지만, 더욱 깊이있는 아나키스트 철학은 그렇게 (인종, 성 등으로) 나누는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게될 날을 열망한다. 자유주의자들은 현존하는 제도를 개혁하는 노력(투표, 로비, 조직적인 시위같은 수단들을 통해서)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더욱 근본적인 관점을 갖고 있고, 썩은 사회제도들을 완전히 갈아치우길 갈망하며, 어떠한 형태의 국가주의자들의 간섭에도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을 통하여 더욱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를 바란다.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혁명적 변화 뿐만아니라 진화적인 변화의 유효성 또한 인정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진정한 재조직을 위해서는 어디든 존재하는 위계적 지배관계를 뿌리째 뽑는 것이 필수적임을 인정한다. 아나키스트들은 권력 자체의 구조(그것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민주적"이든 획일적이든 간에)가 문제의 근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해결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어떤 아나키스트들은 비록 소규모의 지역적인 개선이라도 가치가 있다는 믿음으로 투표에 참여하고 조직적 저항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런 행동들이 단지 임시적인 행보에 지나지 않으며,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런 행동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무정부적 허무주의(니힐리즘): 니힐리즘의 신조인 "모든것에 반대함"과는 달리, 아나키스트들은 무작위적인 폭력, 파괴 그리고 "모두 자신만을 위하자" 라는 무법혼란을 조장하지 않는다(비록 이런 철학을 갖고서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부르는 부류는 항상 있지만). 아나키는 혼돈과 같다는 일반적 인식은 권력을 쥔 자들이 주입시킨 유행성 믿음에서 비롯된, 한심스러운 오해이다. 아나키스트들은 효율적이고, 잘 조직된 그대로의 사회가 비위계질서적, 탈중앙집중적, 그리고 참여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성립될 수 있다고 믿는다.
논쟁의 몇가지 이슈들
아나키스트들은 여러 이슈들에 관해 전혀 다른 관점들을 갖고 있다. 의견불일치의 대표적 영역중 하나는 개인 대 지역사회의 문제이다. 개인주의 아나키스트들은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요시 하는 반면, 아나코-공산주의자들(그리고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그룹의 이익에 초점을 둔다. 상호부조론자들은 그 사이 어느 쯤엔가 존재한다. 이상적인 아나키스트의 사회에서는 전체로서 지역사회의 요구들이 개인들의 자유의지와 자기결정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고 충족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또다른 논쟁은 생태환경론과 테크놀로지 이슈들에 관련된다. 고전적인 아나키즘은 과학과 합리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맑스주의 견해들과 유사성을 보이며, 기술적 진보는 일반적으로 사회에 이로울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준다. 많은 현대 아나키스트들은 기술은 본래 선하거나 악하지 않으나,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에 영향받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최대로 도움이 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방법으로 면밀히 조사되고,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다른 동시대의 아나키스트들은 반-기술적, 환경중심적 시각(가장 극단적인 원시주의자들과 새롭게 등장한 기술혁신반대주의자들)을 견지하며, 아나키스트 사회는 오로지 기술적 진보를 거부하고 더 원시적이고 지역화된 환경조화적 삶을 통해 달성된다고 믿는다.
민족주의 문제 또한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은 국제주의(혹은 그보다 '무국'주의)를 옹호하고,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국가가 인공적인 분리를 인민들에게 조장함으로써 그 권력을 증대시켜려는 시도의 명백한 표시로 인식한다. 민족국가는 인구의 하층계급은 전세계에 걸쳐 비슷한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는데도 다양한 엘리트들의 이해를 위해 복무하는 구성물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어떤 민족해방투쟁들(중동에서의 팔레스타인, 미국의 흑인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전세계 억압받는 토착인민들의 노력같은 것들)은 지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작은 독립국가들은, 권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착취를 자행하며 획일적인 제국들보다 더 낫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현대 아나키스트 운동의 조류들
오늘날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더욱 정확히는 다양한 정치적, 철학적 특징을 공통적으로 갖는 서로 다른 운동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다. 고전적 아나키즘의 원칙들을 기초로 삼는, 그리고 가끔은 그것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동시대 아나키즘의 범위를 넓히고 전통적 아나키의 견해를 재정의하는 다양한 그룹들이 있다.
아나카-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의 이상을 융합한다. 아나카-페미니스트들은 고전적 아나키스트들보다 여성해방과 남성중심제의 역할에 더많은 관심을 쏟지만, (일부 페미니즘이 해왔던 것처럼) 다른 형태의 억압들을 제외하지는 않는다. 모든 여성 아나키스트들이 자신을 아나카-페미니스트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이 아나카-페미니스트가 꼭 여성일 필요는 없다 -- 그 구별은 대부분 자신의 가치들이 얼마나 "여성 중심적" 인가와 지배에 대한 어떤 관점이 강조되는가의 문제이다. 다른 많은 현재의 정치적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성분리의 문제는 미해결인 체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위계적이고 부계적인 사회적 질서에 의해 강요되어온 인위적인 성적 역할의 분리가 아나키스트 운동에서도 지속되는 것은 아나키스트들이 성취하기를 바라는 진정한 평등의 창조 그리고 장벽들의 제거와 서로 상충될 수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지배해온 운동에서 여성의 자리를 지킬 필요를 느끼며, 또한 여성문제에 대한 정당성은 반드시 연합이 이루어지기 전에 인식되고 조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나카-페미니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여성문제들에 대한 국가주의적 대처방안들(여성들에 대한 폭력을 줄이기 위하여 시도되는 포르노에 대한 검열 등)을 거부하고, 자기-능력발휘와 직접적 행동을 지지한다. 아나카-페미니스트 조직은 탈중앙집중화, 참여적인 의사결정, 풀뿌리 단계에서의 활동 등에 대한 강조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아나카-페미니스트 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잠재능력의 실현이 전통적인 성분리 역할들을 뛰어넘으며, 모든 인간들에서 유익한 "남성적" 이고 "여성적" 특질들의 발달과 모든 관계들에서 평등을 장려함으로써 가장 잘 성취된다는 것을 믿는다.
많은 현대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의지와 자기결정의 이상들을 그들의 개인적 삶에 적용시키는데 집중한다. 이런 경향중에는 성, 가족, 그리고 개인들간의 관계들의 영역에서 다양한 옵션들을 인정할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관계들은 자유로운 선택과 모든 개인들의 동의에 기반해야 하며, 정부나 종교 혹은 사회의 제한들에 제약당해서는 안된다. 많은 퀴어 아나키스트들 --게이, 레즈비언, 성전환자, 그리고 특히 양성애자 --이 존재한다; 아나키즘이 이런 전통적인 범주화 획책들을 깨부수기 위해 쏟는 노력은 특히 비관습적인 그리고/혹은 주변화된 성 정체성을 가진 이들과 관련되는 것 같다. 페미니스트들 처럼, 어떤 게이/레즈비언/퀴어 그룹들은 반권위주의적 원칙들과 직접 행동들(예를 들면 지하에서 주사기교환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에이즈 활동가들과 비공인 마약 판매 클럽 등)을 포용한다. 결혼, 아버지중심의 핵가족제도, 강요되는 자녀양육 등이 당연시되는 것은 권력에 있는 자들의 이해에 복무하기 위해 마련되어 온 것인데, 아나키스트들은 더 널리, 오랫동안 행해져온 이런 옵션들보다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대안적 관계의 추구, 즉 비일부일처제, 대가족, 공동육아 등을 강조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동성애관계를 (정부로부터) 승인해받기를 바라기 보다는 개인적 관계들을 인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기를 원한다. 아나키스트 동성애자들 역시 일반적으로는 군대같은 공격적인 사회기관에 게이들의 숫자를 늘리려는 시도를 반대한다.
고전적 아나키즘의 무신론적 집착(크게는 전통적, 권위적인 종교기관의 유해한 영향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된)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현대 아나키스트들은 다양한 다른 종교들과 기존 교단에서 파생한 해방신학의 영적인 성질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간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의 이성 뿐만 아니라 그 인격과 문화의 정신적이고도 초월적 측면들까지도 필요로 한다는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도덕의 영역에서, 이런 성향의 아나키스트들은 법적, 도덕적 권위를 선언하기 보다는 개인적 책임과 타인들에 대한 배려를 더 중요시 한다. 정신적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삶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들의 믿음은 보통 환경보호적, 자연중심적 아나키스트들의 사상과 맏닿아 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는 "성스러움" 이라는 관념과 "상부명령"에 대한 의존이 전통적인 계급질서의 이념을 강화하며 완전한 자유의 충족에 적대적이라고 믿는 풍부한 무신론적 요소들이 남아있다.
펑크(punk), 대안미술, 레이브(rave), "죽은머리(deadhead)"와 급진적 학생들의 문화는 보통 아나키스트들의 이상을 신봉한다. 이런 젊은이들은 집단동거, 무단점거생활 (squatting), 정보소통같은 직접적 행동과 주체적 방법들 그리고 식량협동조합, 독립적이고 법인을 통하지 않은 음악제작, 배급같은 경제적 대안 마련 등에 기반하여 저항적 지역사회를 조직하고, 이것을 통해 소비사회에서 만연하는 부정과 삶으로부터의 소외 등을 탈피해 나가려 한다. 이런 젊은이들은 고전적 아나키즘(이라는 라벨을 붙이지는 않지만)의 많은 교리들을 받아들이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저항적 활동과 일상생활에 있어서 반권위주의적이고 자결주의적 원칙들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적용시키는데 더욱 노력한다. 그러나 어떤 현시대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생활방식주의(lifestylism)"를 피하며, 그대신에 더넓은 사회변혁을 위해 모양을 갖춘 그룹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더욱 집중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비공식적인 한시기적 잡지에서 꾸준히 지속되는 신문과 책 출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의 출판 인쇄 계획에 참여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점점 더 많이 인터넷을 비롯한 다른 전자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사용하고 있다. 종종 인터넷은 아나키의 살아있는 예가 되어왔고, 중앙정부의 권력없이 성장하여 번영해왔다. 전자커뮤니케이션은 국가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방법을 제공하며 또한 인종이나 성 같은 문화적 장벽이 갖는 중요성을 최소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증가하는 의존도는 "가진자" 와 "못가진자" 로 정보세대의 사회를 갈라 놓는 경제적 장벽들을 강화시킨다는 뚜렷한 위험을 갖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전자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여 이벤트를 계획하고, 중요한 뉴스를 널리 알리며, 정보를 교환해왔다; 스펑크 프레스 같은 야심찬 기획 뿐만아니라 이메일 발송명단, 유스넷 뉴스그룹들 같이 아나키즘과 반권위주의에 공헌하는 것들이 있다. 명백히 정부는 인터넷의 자유를 두려워하고, 인터넷에서의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한다(음란과 테러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아나키스트들은 전자커뮤니케이션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중재된",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는 관계들을 거부하며, 기술이 환경에 끼치는 해악 때문이다.
결론
요약해보면, 아나키즘은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정의되는 철학으로서, 스스로를 노골적으로 "아나키스트"라고 부르지 않는 수많은 개인들과 그룹들에 의해 어떤 형식으로든 적용되어 왔다. 아나키즘은 삶의 모든 국면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자유, 자기 결정, 개인적 책임, 직접 행동, 그리고 자발적 행동의 창조, 상호보완성 등을 강조하면서, 아나키즘은 통찰력과 신축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개조하기 위한 실행가능한 방법을 제공하며, 그것은 세계를 개혁할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사회변화를 위해 작용한다.
▒▒The Autonomy Review
크로포트킨/ 역자 : 역자미상
질서에 관하여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토록 놀라게 했던 '아나키'라는 단어를 당파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서 종종 꾸지람을 듣곤 한다. "당신네 사상은 훌륭하다. 그러나 당신네 당파명은 불운한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흔히 아나키는 무질서 그리고 혼돈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 단어는 이해관계의 충돌, 개인들의 투쟁으로 인하여 조화로운 체제를 성립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상을 연상시킨다"라고 말이다.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당파, 새로운 경향을 대표하는 당파는 이름을 독자적으로 선택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는 것부터 지적하기로 하자. 후일 널리 알려지게 된 그들의 이름을 지은 것은 브라반(Brabant)의 거지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일종의 별칭으로, 잘 고른 이름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 당파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널리 인정되었고, 이내 곧 자랑스러운 간판이 되었다. 이 단어 역시 사상 전반을 집약했던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또한 1793년의 생-뀔로뜨는 어떠한가? 이 이름을 지은 자들은 바로 민중혁명의 적들이었지만, 이 이름은 사상 전체를 기가 막히게 요약하고 있다. 즉, 옷만 말쑥하게 잘 차려입은 이른바 애국주의자나 쟈코뱅이라고 불린 모든 왕당파와 대립하였던, 누더기를 걸쳐입고 가난에 찌든 인민들의 반역 사상. 그 자들은 그 잘난 연설과 부르조아 역사가들의 찬양에도 불구하고, 생-뀔로뜨의 가난과 자유, 평등정신 그리고 혁명적 열정을 심대하게 경멸한 바 있는 인민의 실질적 적이었다.
니힐리스트라는 이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이름은 기자들을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종교색 짙은 특정분파가 아니라 실질적인 혁명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까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심하게 말장난치도록 만들었다. 그 말은 투르게네프가 자신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 지어냈는데, '아버지'가 채용하여 '아들'의 불복종에 대해 분풀이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그 별칭을 받아들였고, 나중에 그 이름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고 제거하려 하였지만 불가능하였다. 언론과 여론이 그 러시아 혁명가를 다른 이름으로 묘사하려 들지는 않았을 터이다. 어쨌든 그 이름은 결코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닌데, 이 역시도 사고방식을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을 토대로 하는 현존 문명의 행위 일체에 대한 부정 - 현 경제체제에 대한 부정을 표현한다. 지배와 권력에 대한 부정, 부르조아 도덕성에 대한 부정, 착취자를 위한 예술에 대한 부정, 괴이하거나 구역질나는 위선적 유행과 예절에 대한 부정, 현 사회가 과거로부터 상속받은 모든 것에 대한 부정 : 한마디로 하자면 오늘날 부르조아 문명이 존귀하게 다루는 일체의 것에 대한 부정.
아나키스트의 경우도 똑같다. 인터내셔날 내에서 협회에 대한 권위를 부정하고 또한 모든 형태의 권위에 거역하는 한 당파가 출현했을 때, 그 당파는 처음엔 '연합주의자', 다음에는 '반국가주의자' 혹은 '반권위주의자'라 자칭했다. 실제로 그 당시에 그들은 '아나키스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길 꺼려했다. 'an-archy'라고 표기된 그 단어는 그 당파를 프루동주의자들과 너무나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당시 경제개혁에 관한 프루동주의자들의 견해는 인터내셔날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세력들이 그 이름을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으며, 결국 아나키스트라는 명칭으로 그들의 유일한 포부가 결과야 어찌됐든 무질서와 혼돈을 조성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나키스트 당파는 반대세력이 붙여준 이름을 재빨리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an과 archy 사이에 하이픈을 사용하여,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an-archy가 "무강권"을 뜻하는 것이지 "무질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곧 그 단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읽는이의 혼란을 막을 별도의 수정작업이나 그리스 어원의 참뜻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단어는 1816년 영국의 철학자 벤담이 "악법을 개혁하고픈 철학자는 악법을 어기라고 설파해서는 안된다... 아나키스트는 매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여, 법의 정당성을 거부한다. 또한 법률로서 인정하기를 거부하게 하여 집행을 저지하고 나서도록 선동한다"라고 표현한 것과도 같은, 기본적이며 보통의 상식적인 의미로 되돌아갔다. 오늘날, 그 단어의 의미는 좀더 확장되었다. 즉 아나키스트는 현행법뿐 아니라 일체의 기성권력, 모든 권위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핵심 - 일체의 권력과 권위에 대한 반항 - 은 여전히 동일하며, 그들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명칭이 질서를 부정한다고 연상시켜, 결과적으로 무질서 혹은 혼돈의 사상을 떠올린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서로들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확인해 보자. 과연 어떤 질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질서는 우리 아나키스트들이 꿈꾸는 것과 일치하는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잇속을 위해 희생당하는 계급분할이 사라졌을 때 자유롭게 들어설 인간관계와 일치하는가? 모든 사람이 하나의 같은 가족일 때, 그리고 개개인의 노동은 만인을, 만인의 노동은 개개인을 위한 것일 때 이해관계의 결합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출현하는 질서와 일치하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아나키가 질서를 부정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은 이와 일치하는 미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들은 현사회에서 통용되는 질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나키가 파괴하고자 하는 그러한 질서는 무엇인지 보기로 하자.
오늘날 그 자들이 뜻하는 질서란, 열에 아홉명이 노동하여 한줌 게 으른 자들에게 사치와 쾌락을 제공하고, 극히 역겨운 열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질서란, 열에 아홉이 번듯한 생활과 지적 재능의 정당한 발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나 예술적 창조에 의해 인간에게 제공되는 쾌락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돼지 상태로 열에 아홉명이 전락하는 것이다. 질서란 이런 것이다!
질서란, 가난과 기근이 사회의 일상상태가 되는 것이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일랜드 농민이며, 디프테리아와 열병 그리고 식량부족에 뒤이은 기근으로 죽어가는 러시아 제3 제정의 농민이다. 당시 창고의 곡물은 해외로 반출되고 있었다. 또, 시골의 옥토를 버리고, 겨우 몇달 가량 버티다가 함께 파묻힐지 모를 토굴을 찾아 유럽 전역을 유랑하게 된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부자를 먹일 짐승을 기르기 위해 농민으로부터 빼앗은 땅이다. 농사라도 짓자는 사람에게 반환되기 보다는 차라리 놀고 있는 땅이다.
질서란,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몸파는 여성이다. 공장에서 말이 없어졌거나,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다. 기계 상태로 전락한 노동자이다. 부자를 괴롭히는 노동자의 유령이며, 지배에 반대하여 출몰하는 백성의 유령이다. 질서란, 극소수가 권좌에 오르는 것이며, 이런 이유로 소수 권력자는 대다수를 기만하고, 사기, 부패, 폭력, 학살 등으로 같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식들에게 나중에 같은 권좌를 차지하도록 키운다.
질서란, 사람과 사람, 무역과 무역, 계급과 계급, 나라와 나라 사이에 계속되는 전쟁이다. 끊이질 않는 유럽의 대포소리이며, 황폐화된 시골이며, 전투에 참가한 전세대가 희생되는 것이며, 수세기에 걸친 중노동으로 이룩한 재부가 순식간에 파괴되는 것이다.
질서란, 노예제이며, 족쇄 채워진 사상이며, 칼과 창으로 버텨나가는 인종의 타락이다. 수백명의 광부가 폭발에 의해 급사하거나 호흡곤란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탄광주의 탐욕으로 매년 수백명씩 폭사하거나 매몰되며, 어렵게 불만을 털어놓자마자 총살되거나 무력으로 짓밟힌다.
마지막으로, 질서란 피로 물들은 파리코뮨이다. 포격에 산산히 부서지고, 총살당하고, 파리 도로 아래 석회 속에 매장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 3만명의 죽음이다. 투옥되고, 시베리아 눈밭에 묻히고, 잘해야 순수파로 가장 헌신적인 경우라면 교수형에 처해진 러시아 청년의 얼굴이다.
질서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무질서 - 그 자들은 무엇을 무질서라 부르는가?
그것은 치욕스러운 질서를 거부하고자 속박을 끊고 족쇄를 부숴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인민들의 봉기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이다.
그것은 임박한 혁명 전야에 닥친 사상의 반역이며, 수세기 동안 변함없이 인정되고 있던 가설들의 전복이다. 신사조 혹은 과감한 발명이 봇물 터지는 밀려오는 것이며, 과학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무질서는 고대 노예제의 폐지이다. 코뮨이 생성되고, 봉건 농노제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며, 경제적 노예상태를 철폐하려는 시도이다.
무질서란 왕을 전율케 하고, 일할 권리를 선포했던 1848년이다. 신사상을 위해 투쟁하였던 파리 인민이다. 그들은 학살 당하면서 인류에게 자유코뮨의 사상을 남겼으며, 우리가 다가갈 수 있다고 느끼는 자유코뮨의 혁명 즉, 사회혁명을 향한 길을 열어제꼈다.
그 자들이 무질서라고 부르는 무질서란, 과거 노예제를 철폐하는데 전 세대가 중단없는 투쟁을 벌여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앞장서 몸을 바쳤던 시기이다. 민중의 천재성이 자유 비행을 감행하여, 불과 몇년만에 장족의 진척을 보였던 시기이며, 그러지 못했다면 고대 노예상태에 머물거나 가난에 찌들어 허리를 펴지 못했을 것이다.
무질서는 엄청났던 열정과 이루 말할수 없었던 희생과의 단절이며, 지고지 순한 인간애의 서사시이다.
이같은 질서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고 있으며,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아나키라는 말은, 보다 나은 미래를 쟁취하고자 투쟁하고 있는 당파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선택 아닌가?
▒▒The Autonomy R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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