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자 우관 이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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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 창립을 주도한 초대 회장 우관 이정규 선생은 일제 강점기 시절엔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추진하며 동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청년 동지들과 연대하여 반권력,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운동을 하였고 해방 후엔 교육계에 투신하여 인재 양성에 매진하면서 인류공동체의 생존적 자유권 탈환이라는 대과업을 민중 스스로의 자주협동적 역량으로 개척, 건설해 나갈 길을 트기 위해 정진하였다. 선생은 평생을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자유‧평등‧상호부조의 사회 건설에 진력한 아나키즘운동의 실천가였다.
1897년 10월 7일(음) 경기도 옹진군 북도면 장봉리에서 출생하다.
1911년(15세) 인명소학교를 졸업, 관립 인천실업학교에 입학하다.
1914년(18세)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호농공漢湖農工은행에 취직, 공주지점에 근무하던 중 일본인 주임과 충돌하여 사직, 귀가 후 일본 유학을 결심하다.
1915년(19세) 3월 하순 동경으로 건너가 정칙正則영어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준비하다.
1916년(20세) 경응의숙慶應義塾대학 예과에 입학하다.
1917년(21세) 출신 지역 별 등으로 흩어져 있던 한인 유학생 조직을 '학우회'라는 단일조직으로 재조직하는 데 일역을 담당하다.
1918년(22세) 경응대학 예과 수료 후 학부 이재학과(경제학과) 1학년에 입학하다.
1919년(23세) 동경 유학생 2‧8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3월 초 3‧1독립선언문과 일본 각계에 보내는 통고문을 한기악韓基岳, 계인상桂麟常, 안승한安承漢과 인쇄, 배포하다.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3월 말 귀국, 신의주, 안동현을 거쳐서 봉천, 천진, 남경을 경유, 4말 상해에 도착, 6월 말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고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교통망 설치를 위해 9월 말 강 태동姜泰東과 잠입, 귀국하다. 10월부터 강태동, 김춘기金春箕(의친왕 이강李堈의 처남), 중형仲兄 이을규李乙奎와 의친왕 망명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다.
1920년(24세) 1월에 대동단사건으로 중형 이을규가 피체되었으나 여러 동지들과 진용을 재정비하여 상해, 안동,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완성하다.
1922년(26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북경사대 교수 노신魯迅 형제, 러시아 맹인시인 예로생코, 대만 혁명동지 범본량范本梁 등과 교유하면서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李石曾, 동 대학총장 채원배蔡元培의 호의로 북경대학 경제학부 2년에 편입, 사상문제 연구에 열중하다.
1923년(27세) 북경대 동창 진공산陳空山 등과 북경세계어전문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부속 여명黎明중학 교원에 피임되다. 무정부주의자인 북경대 동창 진위기陳偉器와 호남성湖南省 한수현漢水縣에 이상농촌 양도촌洋濤村 설립을 입안하고 이회영 선생의 지도를 받다.
1924년(28세) 4월 우당 이회영, 회관悔觀 이을규,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 구파 鷗波백정기白貞基, 우근友槿 유흥식柳興湜(子明)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정의공보正義公報』를 간행하다 9월 상해로 건너가 영국인 주물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고 노공勞工강습소를 차려 공회工會(노조) 조직활동을 하다 해고되다.
1925년(29세) 3월 상해 전차공사에 취직, 상해교통공회를 조직하고 상해 5‧30 총파업에 상해 대학생인 대만인 옹택생翁澤生, 장홍수莊洪殊, 상해출판노조인 공단연합회의 모일파毛一波 등과 합세하여 활동하다.
1926년(30세) 중국 동지들과 연락이 끊기고 극도의 곤궁 중에도 우당 선생의 격려를 받으며 영국 런던의 프리덤 프레스(Freedom Press)사 간행 크로포트킨의 『법률과 강권』, 『무정부주의자의 도덕』 등 10여 편의 소책자를 번역하고 11월에 중형 이을규와 천진을 떠나 상해로 가다.
1927년(31세) 4월 말 중국동지인 상해 입달立達학원 교수 오극강吳克剛,심중구沈仲九의 요청으로 노동운동의 요원 양성을 위한 국립상해노동대학 설립 준비에 중형과 함께 참가하다. 또한 복건성福建省 동지 진망산秦望山, 양용강梁龍江 등과 농민의 자주‧자활, 협동방위의 농민자주운동을 위하여 7월부터 복건성 남부 천주泉州에 민단편련처 조직 활동을 하다. 이는 뒤에 천영이속민단편련처泉永二屬民團編練處로 개편되다.
1928년(32세) 5월 말 남경에서 한‧중‧일‧대만 등 각국 동지들과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를 열고 기관지 『동방東方』을 발행하고 아울러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기관지 『탈환奪還』을 간행하다. 9월부터 상해노동대학에 출강하였으나 10월 말 상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12월 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되다.
1929년(33세) 3월 치안유지법 위반 명목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다.
1932년(36세)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다.
1934년(38세) 10월 여러 동지들과의 회식이 일경日警에 문제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명목으로 채은국蔡殷國과 함께 예심에 회부되다.(제일루사건)
1936년(40세) 2월 징역 3년형 판결을 받다.
1938년(42세) 5월에 출옥하여 10월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옥중에서 습득한 기술로 표구점을 개업하다. 이후 계속 요시찰 인물로 일경의 감시를 받다.
1939년(43세) 1월 말 화재로 표구점이 소실되어 폐업하고 경기도 양평 구둔九屯에서 금광을 경영하고 해방될 때까지 광업을 빙자하여 평북과 함‧남북 지역의 광산지대를 편력하다.
1945년(49세) 8‧15 해방을 맞아 9월 말 무정부주의자의 결집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조직선언을 발표함과 아울러 조선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조직, 그 선언‧강령을 기초하고 해설을 발표하다.
1946년(50세) 9월 국학대학에 출강하여 경제학을 강의하다.
1947년(51세) 46년 국대안國大案을 반대하는 좌익들에 의한 맹휴로 개교 후 휴교 상태인 성균관대학에 출강을 의촉 받고 3월 교수로 취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학장을 보좌하여 휴교사태를 수습하고 부학장에 피임되다. 4월 서울 중구 예관동에서 국민문화연구소를 발기하다.
1951년(55세) 3월 윤재남尹在南, 이동준李東俊, 김기남金基南, 유정렬劉正烈, 이을규 등과 더불어 세계반소토공反蘇討共연맹을 발기하고 선언‧강령을 기초하다.
1953년(57세) 2월 성균관대학이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어 부총장으로 취임하다.
1955년(59세) 성균관대 부총장에서 해임되다.
1958년(62세) 3월 청주대학교 학장에 취임하다.
1958년(62세)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고 외친 4‧25 전국대학교수단 시국선언 발표 및 시위행진에 참여하다.
1961년(65세) 청주대학 학장직을 퇴임하다.
1963년(67세) 4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 관선이사로 피선되고 6월 성균관대학교 제7대 총장에 취임하다.
1964년(68세)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5월 국민문화연구소 회장에 피선되다.
1966년(70세)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사임하다. 국민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대학생 농촌활동을 지도하며 농어촌 영세층의 자주‧협동적 생산생활능력 향상을 위한 국민수산授産운동에 진력하다.
1971년(75세) 11월 전국농촌운동자회의를 소집, 농촌 자주협동체제의 방향을 제시하고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 창립의 산파역을 하다.
1973년(77세) 3월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를 창립하다.
1974년(78세) 회혼回婚 기념으로 6월 『우관문존又觀文存』을 간행하다.
1978년(82세) 유일한 재산인 잠실주공아파트를 국민문화연구소에 기증하다.
1984년(88세) 12월 10일 향년 88세로 서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