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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티미에 국제 아나키스트 회합 참가기
다나카 히카루 [역 : 김창덕]
1. 들어가는 말
생티미에란?
2012년 8월 8일부터 12일까지, 스위스의 생티미에(Saint-Imier)에서 열린 국제아나키스트 회합에 참가했다. 생티미에는, 인구 약 4,800명의 소도시로 19세기 후반에 시계회사 론진공장이 설립되었으며 인구는 19세기말에 7,500명을 넘었다. 20세기 전반까지 시계산업으로 번영했지만, 20세기 후반에 시계 산업이 쇠퇴하면서, 이에 인구가 오늘의 수준으로까지 감소했다. 생티미에는, 베른 주?쥬라 행정구에 있지만, 「쥬라」라는 말은 생티미에를 포함한 스위스 북서방면과 프랑스와의 국경에 걸쳐있는 쥬라산맥에서 유래한다. 「쥬라기 공원」의 「쥬라기」라는 말도, 쥬라산맥에 유래하고 있다. 이 산맥은 최고지점에서도 표고 1,700미터 정도며, 알프스에 비교하면 완만하다. 생티미에도 쥬라의 산악지대에 있기 때문에, 표고는 해발「820」미터로, 주도인 베른보다 300미터 정도 높다. 마을 전체가 경사면에 있기 때문에, 이번 회합에서도, 계곡 쪽에 있는 북페어 회의장(스케이트 링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회의장(가톨릭 교회 소속의 홀)까지 상당히 급격한 계단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했다. 걸어서 돌아다니기에는 체력이 필요한 장소였다. 또한 숙박시설로 산 쪽에 캠프장도 확보되어있었지만, 케이블카로 오르내리지 않으면 안 되고, 시내 중심부보다도 표고가 높기 때문에, 더운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낮았다. 그러나 이번 국제회합 개최에 관해 중요한 점은, 주도 베른이 독일어 지역인데 비해, 생티미에를 포함한 쥬라지역이 프랑스어 지역이라는 점이다. 프랑스령이었던 시기도 있었으며, 스위스의 독일어권보다는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더구나 생티미에에서 100킬로 정도 가면, 거기에는 프루동과 프리에가 태어난 도시 브장송이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는 오늘날 「프루동 그룹」이라는 아나키스트 그룹이 활동하고 있어, 이번 국제회합 개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처럼 양자의 협력관계를 이해하면, 브장송이 「프랑스」보다도 쥬라산맥 주변에 있는 같은 「쥬라지방」이라는 역사적, 문화적 공동체 속에 속해있다는 관점이 중요하게 생각된다.
2.「회의」가 아니라 「회합」
이어서, 「국제 아나키스트 회합」이라는 번역어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 영어로는 International Anarchist Gathering(또는 Meeting) at St-Imier, 프랑스어로는 Rencontre Internationakes de I’Anarchisme St-Imier, 독일어로는, Internationales anarchistisches Treffen in St-Imier라 불렸다. 후술하겠지만, 회합을 실현시킨 것은, 주로 프랑스어권의 아나키스트들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어의 rencontre로 보면, 이 말은「만남」「조우」「회견」「회의」등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 gathering 또는 meeting, 독일어로는 Treffen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즉 모두 「만남」「회합」이라는 의미로 번역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의 회합은 「회의」「대회」가 아니라 「회합」이라 불렸지만, 실제로도 그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대의원증」과 「참가자격」등 모두 불필요했다. 나는 사전에 참가의사를 조직위원회에 메일로 보내, 숙박 장소를 확보해주었고, 쥬네브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었으며, 생티미에 시내까지 자동차로 1시간 이상 걸려서 안내해 주었다. 위원회가 외부로부터의 참가자를 맞이하기 위해 확실한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참가자격」을 묻는 일은 없었다. 확실히 메일로 참가여부에 대해 확인했을 때는, 아나키스트연합 인터내셔널(IFA)의 어느 멤버로부터 「어디 조직의 대표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 조직대표도 아니고, 개인 참가」라고 회답하자, 그 후 「대표」에 관한 질문이 나온 적이 없었다. 처음에 내가 참가를 결정한 것은 「어떤 차별도 하지 않는다.」는 회합의 방침이, 조직위원회에 의해 시작된 홈페이지와, 회합의 개최를 알린 독일 아나키스트에 의한 잡지 「개도(改道:Gai Dao)」에 명확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직위원회가 사전에 보여준 성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회합의 [중략] 전 세계의 아나키즘 운동뿐만 아니라,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조직위원회는 참가자의 승낙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지만, 그것은 [중략] 어떤 인종 차별도, 성 차별도, 외국인 차별도, 동성애자 차별도, 그리고 어떠한 폭력도 차별도 허용하지 않는다, 는 이념과 실천에 따라 행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중략] 이미 말한 원칙에 따라, 모든 개인, 지부, 조직의 참가가 환영받고, 회합의 운영, 시사가 풍부한 전시, 토론, 강연, 퍼포먼스 등의 참가가 환영받았다. 또한 이전의 「국제회의」에서라면, 모든 참가국의 현황보고가 있고, 사전 또는 사후에 제출된 의제에 대해 대의원회의가 한 곳에서 토의되며, 마지막으로 공동선언이나 결의를 하고 종료, 라는 스케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예를 들면, 1968년 이탈리아의 카라라에서 개최되어, 오사와 마사미치(大?正道)와 오세키 히로시(尾??)씨가 참가한 국제아나키스트대회에서는, 사전에 의제와 참가자격이 표시되고, 본회의에서는,「대회선언」을 낭독하고, 「인터내셔널」합창이 있었으며, 각국 대표에 의한 「긴 연설」이 이어지고, 「참가자격」을 둘러싸고 대립과 혼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大?正道「국제아나키스트 연맹대회보고」『자유연합(自由聯合)』1968년 11월호, 3-4항 또는 『전후아나키즘운동자료2』綠陰書房,586-587항, 및 尾??『현대 아나키즘운동』三一書房, 1971년의 제2장을 참조). 또한, 칼라라 대회 기간 중에 당시의 베테랑들과 젊은이들이들 간의 협력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아나키스트연합, 그리고 프랑스에 망명중인 불가리아인·아나키스트연합이 국제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오늘날의 IFA다. IFA는, 제9회 대회를 이번 「회합」기간 중에 개최했다. 이 「대회」는, IFA에 가맹한 단체의 멤버 및 초대받은 모든 단체의 멤버만 참가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공개토론회도 계획되어있으며, 여기에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IFA의 「대회」는 이번의 「회합」에 맞춰서 개최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회합」은, 다양하고 무수한 집회?보고회 등의 이벤트가 8곳의 회의장에서 5일간에 걸쳐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시에 열려, 카페나 노상에서 초대면의 동지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3.개최의 역사적 배경과 행정의 협력
생티미에는 지금부터 140년 전인 1972년 9월 15?16일에 바쿠닌과 마르크스가 출석한, 소위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어 회의가 개최된 장소다.(渡?孝次 『시계공과 마르크스(時計職人とマルクス)』同文館,1994년을 참조) 여기서 잠시 이번 회합을 주최한 조직위원회에 의한 설명을 보기로 하자.
1864년에 제1인터내셔널이 설립되자, 스위스 쥬라 지역의 라쇼드 퐁, 루 로쿨, 생티미에등 각지의 지부가 참가했다. 그 멤버의 대다수는 시계 가내공업에 종사하는 직공들이었으며, 책을 많이 읽고, 또한 독립심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1869년에 이 지역을 찾아온 바쿠닌과 그들 시계직공들과의 사이에서 생겨난 교류는 결실이 있었다. 여기서 생긴 사상적인 수렴을 통해, 쥬라연합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치하는 리버테리언 사상?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 내부의 반대파에 대해 마르크스는 분개하여, 제1인터 내부의 쥬라 사람들이 형성한 색다른 조류를 배제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했다. 1872년, 마르크스는 그 같은 그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마르크스는 그의 지지자 대다수를 결집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수명의 대의원은, 존재하지 않는 지부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같이 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다수파에 의해, 마르크스는 바쿠닌과 제임스 기욤의 제명을 찬성 다수로 가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데말 슈빗츠 벨에 대해서는, 몇 표의 찬성표가 모자라 제명할 수 없었다. 이상 3명은, 쥬라연합의 대의원이었다. 반권위주의적인 조류에 공감을 품고 있었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미국의 모든 지부는, 마르크스의 행동에 충격을 받아, 생티미에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극히 아나키즘적인 결의를 가결시켰다. 여기서 생긴 반권위주의 인터는, 19세기말경까지 존속하게 된다. 이 생티미에 대회로부터 140년 후인 오늘날, 노동자의 착취와 소외는 당시와 마찬가지로 가혹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환상은 공산주의 독재와 함께 소멸했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오늘날에는 환경의 위기를 포함한 다수의 위기를 거쳐 살아남아있다.
그러면, 이번 회합의 목적은 무엇인가.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번의 「회합」은, 원래, 마르크스가 주도한 제1인터에서 반권위주의적인 멤버가 추방된 후, 생티미에에서 아나키스트?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서 140주년을 기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확실히, 생티미에에는, 140년 전에 반권위주의 인터가 결성된 회의가 개최된 건물(구 시청사 홀)이 남아있으며, 역사적 건물로 현창하는 플레이트가 시에 의해 설치되어있다. 거기에는 바쿠닌, 기욤, 슈빗츠겔의 사진이 걸려있으며,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다. 「1860년대와 70년대의 쥬라에서 시계공들은 독립의 기풍이 강하고, 그것은 위대한 혁명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갖게 할 정도였다. 1872년, 그들 시계공들에 의해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어, 그것이 아나키즘 사상의 탄생으로 이후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 플레이트에는 「시계 에너지」라는 타이틀 새겨있지만, 이것은 주로 베른 주가 출자해 2000년에 생티미에에 설립된 「베르나 쥬라 조사?기록센터」라는 지방사의 역사자료 수집과 공개를 하고 있는 공적기관에 의해 설치된 것이다. 「시계 에너지」란 표제가 붙어있는 플레이드는, 마을 곳곳에 설치되어있다. 또한 이 플레이트의 내용을 해설하는 가이드북도 무료로 입수할 수 있으며, 이들 플레이트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시내를 산보하면, 마을의 역사순례를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이 가이드북에서도,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이 결성된 장소로서, 앞서 말한 플레이트가 설치된 건물이, 「구 시청사와 아나키즘 인터내셔널」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되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1881년, 마지막 아나키스트 인터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아나키스트들은, 특별히 생티미에 회의에서 채택된 모든 혁명적 테제를 상기하고 그것들에 구애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립적인 노동자연합에 의한 제휴라는, 제임스?기욤에 의해 옹호된 이념이 채택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1881년의 국제대회란, 크로포트킨과 마라테스타등이 출석한 런던에서의 회의를 말하며, 「모든 혁명적 테제」 및 「자립적인 노동자연합에 의한 제휴」란, 생티미에 회의에서 채택된 「모든 정치권력의 파괴」와「자유와 연대를 기초로 하는 생산자그룹의 자유스러운 연합」을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한 해설에서는 지역의 시계공이었던 기욤에 의한「연합」사상이, 「혁명적」인 주장보다도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서, 행정이 아나키즘을 관광자원으로 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쥬라지방, 또는 생티미에 시에 있어서, 아나키즘, 특히 「연합」의 기풍은, 이 지방에서 보호 육성되어, 오늘에 이르는 지장산업(地場産業)의 추진력인 「시계 에너지」가 만들어낸 것 중의 하나이며 내외로 어필할 수 있는 역사적인 자원인 것이다. 지금까지 본 것 같은 관광안내에서, 아나키즘적인 사상과 운동이, 바쿠닌에 의해 설명된 폭력혁명론으로서가 아니라, 쥬라지방의 시계공들의 사상, 특히 지방자치 또는 연합주의적인 사상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이같이 이해 할 수 있다. 아나키즘의 역사와 쥬라의 역사를 설명하는 또 다른 하나의 플레이트는, 크로포트킨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으로, 이것 역시 시의 중심부에 있다. 거기에는, 그가 『어느 혁명가의 회상』에 기록한, 쥬라지방에 처음으로 머물렀을 때의 한 구절이, 프랑스어?독일어?영어등의 3개 국어로 적혀있다. 「그러나 내가 쥬라지방에서 찾아낸 평등주의적인 인간관계, 노동자 사이에서 발전한 사고와 발언의 독립성, 그리고 운동을 향한 끝없는 헌신은, 그것보다 더욱더 내 마음을 감동시켰다. 시계공들의 지역에 1주간 머문 후에 쥬라를 뒤로 했을 때,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은 확실했다. 나는 아나키스트가 된 것이다.」(크로포트킨, 高杉一郞역 『어느 혁명가의 회상』하, 岩波文庫, 1979년, 78-79항을 일부 변경) 이처럼, 생티미에 시는, 아나키즘과 시 또는 쥬라지방과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이번의 회합에 대해서도, 회의장으로 스케이트 링크와 체육관, 가톨릭교회의 홀 등 공공시설을 빌려준 점을 생각하면 행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충 세계각지에서 수천면의 「아나키스트」가 5일간에 걸쳐 머문다는 계획을, 생티미에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받아주려는 지방자치체가 있을 것인가. 140년 전부터의 아나키즘과의 연결을 행정이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현상 역시 이번의 회합을 실현시킨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4. 과거 기념 이벤트와의 비교
단, 여기서 다시 한 번,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 140주년기념과 이번 회합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면, 그것이 단순한 과거의 회고와 현창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행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140년 동안 [중략] 세계는 상당히 변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적인 조류는 시대에 적응해 왔다. 이것을 이번 회합은 증명할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가장 약한 자에 대한 가장 강한 자에 의한 억압은 완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회합에서는, 그 같은 억압에 대해 여러 형태로 전개되는 다양한 저항의 모습이 제시될 것이다. [중략] 개최되는 국제회합은, 아나키즘의 역사, 과거의 이념, 지금까지 실현된 것, 과거의 희망과 패배, 현상, 그들 독자의 투쟁,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투쟁, 즉, 반군국주의, 반인종차별, 반성차별, 자주관리, 탈 성장, 교육, 페미니즘, 국제주의, 비폭력주의 등등을 재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여기에서 이번의 회합이, 140년 전의 회의를 현창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140년간의 총괄, 및 현재진행형인 사상?운동을 평가하기 위해 개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러한 동시대의 운동에 대해 논의함과 동시에 과거를 기념한다고 하는 두 가지 의미로 개최된 회의로서는, 1872년 회의의 50주년을 기념해서 1922년 9월 16?17일에 개최된 국제회의가 있다. 이 회의에는 72년의 회의에 참가한 마르테스타가 고령을 무릅쓰고 참가하고, 기념회의 전날에 근처의 빌 시에서 개최된 집회에서, 산디칼리즘을 둘러싸고 코로멜등과 격렬한 논쟁을 주고받았다. 17일에는 앞에서 본 생티미에의 구시청사에서 200명이 참가한 회의가 개회되어, 그 자리에서, 이듬해에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국제회의가 개최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오스기 사카에(大杉?)가 초대 받은 것은 이 회의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독일혁명과 「붉은 2년간」이라 불린 이태리에서의 사회운동의 고양을 경험한 직후의 시기며, 혁명과 미래사회를 논의하는 것은, 유럽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스기 사카에게도 무척 액추얼한 것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로잔느의 CIRA가 발행하는 팸플릿에 의하면, 1872년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1972년 7월 17일에도, 상세한 것을 잘 모르지만, 생티미에에서 소규모의 기념집회와 피크닉이 개최되었다. 참가자명부는 없지만, 남겨진 사진에서 참가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또한 시내의 레스토랑을 빌려 집회가 열렸다. 또한 피크닉은 생티미에 시내에서 레스토랑 「아 라 크레후 a la clef」였던 건물까지의 도보 수키로의 거리였던 것 같다. 이 건물은 바쿠닌이 1871년 5월에 노동자를 모아 3번의 강연회를 연 회의장이며, 그 후에도 가끔 집회장소로 쓰였지만, 그 후 개인소유물로 되어, 당시에는 아직 해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건물을 견학하는 피크닉이 열렸다고 생각한다. 이번 국제회합에서도, CIRA의 M?엥켈 씨가 2번에 걸쳐, 아마 그 건물이 있었던 장소까지의 2시간정도의 도보여행을 했던 것 같다. 이 레스토랑 사진과 스케치그림은, 베르나?쥬라조사?기록센터의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비교해 보니, 1922년에 개최된 50주년기념회의는, 대규모였으며, 또한 액추얼한 테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에 비래, 1972년에 개최된 100주년기념 이벤트는, 대규모가 아니었으며, 그 목적은 오로지 과거의 회고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럼 이번의 회합은 어떤가.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50년 단위로 기념이벤트가 개최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150년째가 아니라 140년째인 올해 국제회합이 개최되었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5.경제위기와 배경
이번에 아나키즘의 역사에 관한 보고회와 상영회도 있었지만, 현재의 문제에 관한보고는 그 이상으로 많았다. 예를 들면, 나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8월 10일의 10시부터 문화?여가센터에서 스페인의 조직이 실시한 「경제위기, 노동의 변용, 채무위기, 건설적 선택지」, 또는, 11일, 9시부터 체육관에서 아일랜드의 조직에 의한 「유로 권에서의 채무위기와 모든 PIGGS국가」라는 보고 등이다. 슬로베니아의 아나키스트조직이 배포한 포스터에 있는 「자본주의는 위기에 있다」라는 메시지는 이런 보고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독일의 조직이 배포한 전단지에 게재한 「우리들은 스스로 획득한 것을 받을 뿐이다. 그들의 부채를 자신들이 갚아야 할 것이다.」 또는 이와 비슷한 슬로건은, 국제금융위기와 현재의 채무위기에서, 위기에 빠진 금융기관에 대한 공적자금의 투입이 논의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나키스트와 좌익조직 등이 사용해 온 것이다. 서브 프라임(subprime)문제와 리만쇼크(Lehman Shock)에서 시작된 세계동시불황 아래, 구미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실업과 불안정?저임금노동 속에서 곤궁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거대화하는 글로벌기업, 자신들의 실책으로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 거대금융자본, 그들을 세금으로 구제하는 정부, EU, 정치가들에 대한 강한 분노를 거대한 데모나 항의행동을 통해 계속 표명하고 있다. 그 가운에 사회민주주의정당등 기성좌익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나키즘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생겨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009년 무렵부터 시작된 그리스 재정위기가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으로 파급하자, 그들 각국(머리글자를 따서 「PIGGS諸國」라는 호칭은, 그들을 비하하는 사람들에 의한 경멸의 뜻이다.)에서 경제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고, 특히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극히 높아졌다. 그들 나라들에 대해 「재정개혁」이 요구되었을 때, 「개혁」으로 구제된 것이 부유층들이며, 노동자는 희생되었다, 는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외친 슬로건 속에도, 앞에서 말한 것이 들어있었다. 독일은, 유럽에서 예외적으로 경제상황이 악화되지 않고, 그리스에 대해 자신들의 세금이 투입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그리스에 냉담한 견해를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2012년 3월 31일, 프랑크프루트에서는, 그리스의 반체제세력과 연대행동으로, 「반자본주의 유럽행동데이」라 이름 붙여진 데모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아테네, 밀라노, 키예프, 모스크바, 빈,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Zagreb),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Utrecht)와 동시에 개최된 것이며, 프랑크푸르트에서는 6,000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는, 유럽중앙은행, 경찰본청사, 단기노동알선기업의 점포, 그 밖에 고급품을 판매하는 점포 등에 돌과 페인트폭탄 등을 던졌다. M31의 대변자(spokesman)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의 데모로 유럽각국에 의한 채무위기대책에 대한 명확한 반대의지를 나타냈다. 그런 정책은 노동자를 희생시켜 유럽자본의 경쟁력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유리가 몇 장 깨졌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은 우리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2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유럽과 세계각지에서 긴축재정정책이 사람들을 과혹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탄압을 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같은 성명과 데모 상황에서, 국제적인 회합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최근 2년 정도 사이에 강해졌다고 나는 추측한다.
6.에스파스 노왈과 모든 프랑스어권 조직의 주도
실제로 필자가 들은 바로는, 1-2년 정도 전에 브장송과 생티미에라는 국경을 끼고 같은 「쥬라지방」에 있으며 근접한 프랑스어권에서 활동하는 조직의 젊은이들이 의견을 교환하던 중 국제회합의 아이디어가 생기고, 이 1년에 구체적인 준비가 진행되어왔다고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브장송에는 「프루동 그룹」이라는 독자의 도서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직이 있으며, 생티미에에는 이번의 회합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에스파스 노왈」이라는 협동조합 및 같은 이름이 붙여진 지상 3층, 지하1층의 복합시설이 있다. 생티미에 시에서 이 에스파스 노왈 이라는 그룹과 그들이 운영하는 복합시설, 거기서 개최되는 여러 가지 문화이벤트가 있음으로서, 아나키즘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것이다. 이 건물은, 19세기에는 시계공방으로 사용되었던 것이지만, 1984년부터 카페, 극장, 라이브하우스, 영화관, 서점, 갤러리 그리고 주거로서 아나키스트들에게 이용되고, 요즈음은, 라디오국의 방송스튜디오도 설립되어, 프랑스 아나키스트 연합에 의한 「라디오 리베텔」이라는 창립 30년이 되는 방송국의 방송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 건물에도 앞에 소개한 베르너? 쥬라 조사?기록센터에 의해 설치된 플레이트가 걸려있으며, 거기에는 에스파스 노왈이 「19세기말에 생티미에에서 태어난 아나키즘 운동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을 자인」하는 협동조합이며, 「사회적 행동과 연대의 장을 제공하면서」「주변지역의 문화적 발전을 목표로 한다.」고 설명되어있다. 이어서 국제회합의 조직위원회의 명부를 보니, 다음과 같은 멤버들로 되어있다. 에스파스 노왈, 아나키스트연합(프랑스/벨기에), 산악리베텔연합(스위스?쥬라), IFA, 리베텔 사회주의자조직(프랑스), AnarKismo.net(모든 조직의 대표로 이루어진 콜렉티브에 의해 운영되는 웹사이트). 여기에 브장송의 그룹의 이름이 없는 것은, 프랑스 아나키스트연합에 가입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의 조직들이 이번의 「회합」을 주도하고 있는 조직위원회의 멤버이지만, 여기에 협찬하고 있는 조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나와 있다. 리베텔?얼터너티브(프랑스), 아나키스트그룹?코디네션(프랑스), 공산주의 아나키즘연합(이탈리아), 블랙?루츠?아우토메(IFA 가맹조직: 이스탄불/스위스), 리베텔 공산주의자조직(프랑스), 빈터토어?리베텔?액션(스위스 빈터토어), 직접민주주의 포럼(스위스),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연합(FAI), 시칠리아 아나키 연합(이탈리아), 스페인 노동총동맹(CGT-E). 이와 같이, 주도한 여섯 그룹 가운데 국제적인 연합조직 IFA와 AnarKismo.net을 제외하면, 모두 프랑스어권에서 활동하는 조직이며, 그 중 2그룹은 스위스 조직이다. 또한 프랑스의 아나키스트연합은 IFA에 가맹해있지만 IFA에 하나로 통일되어있지 않고, 제각각 단독의 조직으로 되어있는 점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협찬하는 모든 그룹을 나라별로 보면, 터키와 스위스가 각 1조직, 이탈리아가 3조직, 프랑스가 3조직, 그리고 스위스의 독일어권이 2조직, 스위스주재 터키인에 의한 1조직이 있다. 단 조직을 이렇게 나라별로 보게 되면, 실태를 잘못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터키와 스위스에 각각의 그룹이 있으면서 1조직으로 등록하고 있는 터키인 조직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또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번 국제회합을 주도한 것은, 유럽의 프랑스어권에서 국경을 끼고 접근해있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직이었다. 그런 모든 조직들은, 「스위스」와「프랑스」라는 국가별로 나누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의 회합이, 프랑스어권 아나키스트에 의한 주도라는 것은 확실하다.
7.보고회?워크숍?영화?콘서트
이번 회합에서는, 시내 8곳의 회장에서 아침 9시부터 밤 7시 또는 10시 넘어서 까지 갯가기 테마로 보고회, 워크숍, 상영회, 콘서트 등의 이벤트가 동시병행으로 이루어졌다. 프로그램에서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하루에 20이상의 이벤트가 개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연히, 혼자서 모든 곳을 돌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이벤트회장의 하나는 앞에서 말한 에스파스?노왈이다, 1층 카페로 가면 많은 사람들과 사귀게 되고, 정보교환도 가능하다. 기둥이나 벽에는 모조지가 붙어있어, 카풀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정보가 적혀있다. 1층에는 카페 외에 조직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는 사무실이 있다. 쥬네브공항에서 자동차로 안내받아 처음 들어간 곳이 이 사무실이다. 담당자가,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의 명부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고, 숙박시설을 배당하는 수속이 있었다. 회합의 운영에 관한 업무는 대개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듯하다. 그 옆에는 라디오방송 스튜디오가 있다. 뒤로 나가면 넓은 정원이 있고 매일 티셔츠와 뱃지등을 판매하는 부스가 나오며, 저녁부터는 맥주와 소시지의 가판대가 문을 연다. 지하에는 좁지만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과 라이브하우스가 있다. 동행한 히구치(?口)씨에 의한 일본의 반원전운동에 대한 보고는, 이 라이브 하우스에서 3일째인 8월 10일 6시부터 열려 회장엔 사람들로 빈틈없이 대성황이었다. 다음날, 나는 다른 일본인과 일본어를 할 수 있는 F?페르체씨와 함께 라디오?리베텔의 스튜디오에 들어가, 1시간 정도의 생방송에 참여했다. 테마는 일본의 반원전운동이었으며, 페르체씨가 히구치씨에게 인터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외에도, 회합 개최 기간 중에 각지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방송이 있었다고 들었다. 에스파스?노왈에 이어 중요한 회장은, 동시통역의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체육관이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개최된 이벤트에 출석한 것은, 첫째 날 페미니스트들에 의한 라운드?테이블뿐이었다. 이야기의 테마는, 이번 회합에서 여성이 안심하고 숙박할 수 있는 세이프?스페이스를 어떻게 확보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출석자는 남녀 30명 정도로, 의자를 원형으로 배치해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자유로운 토론을 했다. 하지만 토론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이 마구 섞여, 첫날엔 통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이프?스페이스를 둘러싼 토론은 오전 11시부터 1시간 이상 이어졌으며, 함께 있었던 20세의 젊은 남성은 기다리다 지쳐 「남녀의 문제는 소유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어째 이런 것을 지루하게 토론하는가.」라 하며, 토론에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 라운드 테이블은 마지막 날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문제에 대해 토론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지금, 여기서 자신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공간을 어떻게 실현할까, 라는 것이 현대의 아나키즘운동에서 무척 중시되며, 그것은 prefigurative politics(예시적 정치)라 불린다는 것은 문헌 등에서 얻은 지식일 뿐이었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수확이었다. 「문화?여가센터」라는 시의 공공시설에 있는 커다란 홀도 이번 회합의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 3일째인 8월 10일, 이 회의장에서 그리스의 현황에 관한 보고회가 있었다. 회의장은 보고회가 열리는 오후 2시전부터 만원이 되어, 복도 앞으로도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것을 보고자의 한 사람이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의논을 시작해, 그 자리에서 방침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에서 이 보고회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회의장에서 모든 의자를 철거해 공간을 만들고, 가능한 한 많은 참가자가 회의장에 앉을 수 있도록 하게 했다. 이 작업이 끝나고서 겨우 보고가 시작되었다. 그 정도로 이 보고회에 관심이 모여졌던 것은 그리스에서 아나키즘 운동이 무척 활발할 뿐만 아니라, 회의장에 있었던 참가자의 발언을 참고하면, 그리스의 문제는 자기 자신들의 문제이며, 그리스의 아나키스트를 지원하는 국제적 연대행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의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독일인에 의한 영어 보고는, 간명하고 듣기 쉬었다. 한편, 프랑스어로 보고한 사람은,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역사에 바탕을 둔 현재의 그리스에서의 저항운동을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본 주제인 「현 상황(現狀況)」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이 발표시간만 길었다. 이에 대해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있었다. 더구나, 회의장에 있었던 그리스에서 온 젊은 활동가가, 19세기까지의 역사와 현재 그리스의 아나키즘운동과는 관계가 없다, 고 확실하게 잘라 말하는 등, 이 보고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계속 이어졌다. 독인인 보고자는, 현재의 운동에 관한 슬라이드를 준비했는데, 회의장에 있었던 몇 명의 그리스인이 그리스어로, 또 다른 보고자에 대해, 아마 비판적인 발언을 계속해, 그것들에 관한 프랑스어와 영어에 의한 통역을 듣게 된 것이 메인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도 뭔가를 당장에 결말지으려는 조급함보다는, 전원이 납득할 때까지 의견을 주고받는 자세가 보고자와 참가자 사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보고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독일인 보고자도 마찬가지 였으며, 그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어에 의한 의견교환을 참을성 있게, 더구나 재미있는 듯이 듣고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리스어와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만원이었던 회의장도, 도중에 점점 사람들이 나가버렸다. 또한 회의의 마지막에, 여러 가지 비난을 내뱉은 그리스인 보고자가, 프랑스어가 아닌 모국어인 그리스어로, 무척 강한 어조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이윽고 회의 시간이 되어 열리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비난받은 것에 대해 항의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고 혼자 상상해 보았다. 이상과 같은 약간 혼란스러운 상태 속에서, 나는 독일인 보고자에게 「슬라이드에 대해 해설해 주지 않겠나.」고 말을 걸었지만, 「이미 시간이 없으므로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메일주소를 받고, 다음 기회에 다시 연락을 하기로 했다. 여기 이『아나키즘(アナキズム)』지의 보고에서, 그로부터 받은 보고와 거기서 찍은 사진을 게재하려했는데, 그 후 그로부터 도착한 메일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그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메일의 내용은, 아나키스트, 반권위주의자, 그리고 좌익적 사고를 가진 의사, 간호사, 임상심리사 등에 의해 테살로니키(Thessalon?ki)에서 시작된 사회적 진료소에 근무하는 소아과의사에 대한 인터뷰기사 원고였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한다. -원래 그리스에서는 의료보험이 정비되어있지 않았지만, 재정위기 이후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값싸게 의료를 받을 수 없는(즉, 사실상 의료를 거의 받지 못하는)사람들이 증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수백 명의 이민이 체재허가를 요구하면서 단식투쟁(Hunger strike)을 시작해, 그들 중 일부를 의료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2012년 11월, 그들 이민을 대상으로, 「테살로니키 연대 사회진료소(SSKTH) 」를 유지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 후 그리스인도 진료하게 되어, 환자의 반수를 넘게 되었지만, 그와 함께, 의약품을 포함한 의료품이 부족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의료품은, 자택에 있는 비축품를 반출해 주는 개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왁진과 의치 등을 구입하기 위해 매월 5천유로(약 721만원)가 드는 점이다. 의료보험에 들어가 있지 않은 어린아이는 고액의 종두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진료소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는 자금이 없다, 자금과 인적지원을 요청하고 싶다.- 이야기를 회합으로 돌아가자. 마지막 날인 8월 12일 오전 중, 아나키즘과 교육에 관한 보고회가, 그리스 보고회가 있었던 같은 장소에서, 참가자들이 꽉 들어찬 가운데 개최되었다. 도중에 참가했는데,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동시에 평이한 독일어로 통역하고 있는 인물이 있어 사람들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가 털썩 주저앉으니, 「자 이쪽으로!」하면서 다른 참가자에게 의자를 부탁해 앉게 해주어 마지막까지 통역을 계속 들을 수 있었다. 메인보고가 끝난 후 질문 가운데, 세계각지에서 실천되고 있는 여러 가지 교육활동에 대해, 복도에 있는 참가자들로부터 계속 보고가 이루어졌으며, 또는 몬테소리 등의 이론과 실천과의 관계에 대해 의견이 제시되었다. 마지막으로 보고자의 한 사람이, 회의장에서 나온 의견에 근거해, 섹터 적으로 갇혀진 교육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러 사상과 운동으로 연결된 열린 교육을 목표로 할 필요가 있다, 총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같은 날 체육관 1층에 있는 회의실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R?F?마곤이 주장한 사상을 지지하는 마고니스트들에 의한 멕시코 혁명기의 운동에 관한 보고가 있었으며, 이것도 도중에 참가했다. 멕시코에서 온 4-5명 정도의 보고자가, 스페인어로 차례대로 이야기를 하는, 조금 변형된 보고방법이었다. 장발에 피어싱하고 멋진 치장에 위엄 있는 체격의 인물이, 스페인어를 알기 쉬운 영어로 동시통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옆에 앉아 듣기로 했다. 영어가 놀랄 만큼 알기 쉽고, 통역이 무척 매끄러웠다고 마지막에 인사말을 건네니, 자기는 포르투갈어 밖에는 모르지만 스페인어를 유추해서 영어로 통역했다고 대답했기 때문에 나를 포함해 주위의 사람들이 더 놀랬다. 이 밖에도, 각국에서 공문서 기록소(archive)?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조직이 모이는 워크숍이 열려, 여기에도 참가해, 일본의 아나키즘 문헌센터에 대해 설명했다. 이런 이벤트 외에, 사전의 프로그램에는 없었던 워크숍의 고지가 계속해서 벽에 게시되었다. 그런 고지를 놓치기 않고 예정을 변경해 거기에 참가하다는 것이 중요하든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보고회와 워크숍 이외에 중요한 이벤트로는, 에스파스?노왈에서 가장 먼 장소에 있는 스케이트링크에서 둘째 날부터 개최된 아나키즘계 출판사와 조직이 부스를 내어, 서적, 팜플랫, 잡지, 기관지, 리플렛, 핀뱃지, 티셔츠, CD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렇게 얇은 책자가 어째서 그렇게 고가일까 라고 생각되는 것에서부터, 무료로 제공되는 것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유럽과 남북아메리카에서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와 라이브는 거의 참가하지 못했지만, 영화는, 에스파스?노왈뿐만 아니라, 스케이트링크장 옆에 있었던 텐트 안에서도 상영되었으며, 스크린은 작지만, 마흐노와 록커의 기록영상을 포함해, 흥미 깊은 영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라이브에 대해서는 매력 있는 뮤지션을 불렀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입장료의 매상은 회합의 운영비에 쓰인 것 같다.
8. 의사소통의 문제
이번 회합에는, 약 3 ?4천명이 모였다고 한다.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보면, 유럽과 남북아메리카, 남아프리카, 일본에서 참가했으며,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에서의 참가도 예정되어있었다. 그밖에 터키출신 및 중국출신으로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참가했다. 조직위원회는, 특히 남미와 아프리카등 먼 곳에서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비를 내주는 듯 했으며, 그 총액은 5만유로(약 7천2백만 원)가 지출되었다고 한다. 참가지역을 보면, 「아시아가 적으므로 국제적이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가능한 한 「지구촌」사람들이 오도록 한 조직위원회의 노력은 무시 할 수 없다. 조직위원회 가운데는 일본체재의 경험이 있어 서투른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인물도 있었다. 또한 구미(歐美)의 대도시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등지에서 수많은 이민이 유입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아나키스트들도 많다. 일상적으로 「외국인」「이문화(異文化)」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일본인보다도, 복수언어를 말하고,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들 쪽이 훨씬 「국제적」이지 않을까. 그렇다고는 하지만, 참가자의 대다수가 유럽언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신지가 다양해지면 의사소통이 큰 문제로 된다는 것을, 이번 회합에서 알게 되었다. 어느 회의장에서도 그 지역의 언어인 프랑스어, 그리고 실질적으로 공통언어로 되어있는 영어뿐만 아니라, 이탈리어아, 스페인어, 독일어, 포르투칼어가 마구 뒤섞였다. 보고회 등에서 메인으로 쓰이는 언어는, 대개 프랑스어나 영어였지만, 토론이 시작되면 더욱 많은 언어가 쓰이기 때문에, 동시 통역자가 말하는 영어로 보고와 토론의 내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그것이 무척 곤란한 일이었다. 동시통역 기계가 배치된 곳은 체육관뿐이었다. 마이크를 통해 진행되는 회의장의 발언은, 통역자들이 있는 부스에 무선으로 수신된다. 이것을 각각의 통역자가 담당하는 언어로 통역한다. 그들의 음성은 각기 다른 주파수로 보내진다. 회의장에 있는 참가자는, 무선 레시버를 대여 받아, 자신이 듣고 싶은 언어로 설정된 채널에 맞추어 통역의 음성을 무선으로 수신한다. 그러나 통역자 모두는 자원봉사자로 저마다 한계가 있다. 듣는 쪽에도 각각 능력의 한계가 있다. 더구나 다른 회의장에서는 이 같은 기계가 없었다. 그 때문에, 보고자나 참석자 가운데 발언자가 한마디 하면, 그것을 수 명의 통역자원봉사자가 자신의 담당 언어로 번역해 회의장에 전달하고, 동시에, 그들 자원봉사자 주변을 각각의 언어화자가 둘러싸고 있어, 발언자는 통역이 끝날 때까지 다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다, 는 광경은 어느 회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동행자인 히구찌씨의 보고가 있었던 다음날, 다른 회의장에서 독일인이 말을 걸어, 히구찌의 보고가 잘 이해가 안되었으니, 보고한 내용의 문서를 얻을 수 없는가는 내용이었다. 문서를 보면 이해하겠지만, 말만 들으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나와 같은 문제를 이 사람 역시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이 사람과는 메일로 의견교환하게 되었으며, 독일에서의 반원전운동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처럼 언어를 모른다는 것을 이유로 이해하기를 포기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 많았다.
9.대립인가 다양성(Diversity)인가
19세기말 아나키즘 운동에는 공산주의 vs 집산주의 vs 개인주의, 20세기 전반에는 산디칼리즘 vs 아나키즘, 후반에는 사회적 아나키즘 vs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 이라는 대립축이 있었다. 이번 회합에서는, 특히 각 회의장마다 붙은 여러 가지 메시지에 주목함으로서 여러 가지 「대립」을 알 수 있었다. 체육관 옆에 있는 공간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남성중심주의를 중지하라」 「여기는 남성중심주의의 장이 아니다」라는 벽보가 있었다. 배경은 불확실하지만, 남성중심주의적인 태도와 언동이 이번 회합의 어디에선가 있었다는 것을 추축할 수 있었다. 또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스파스 노왈의 뒷마당에서는 매일 밤 맥주와 소시지의 노점이 있었는데, 동물해방파?채식주의자가 4일째 토요일 밤에 소시지 노점 앞에서 요란스런 항의행동을 일으켰다. 그 같은 행동은, 이미 벽보로 예고되었다. 거기에는, 「아! 개똥이 에스파스 노왈의 바비큐 통 위에 있다! 고기는 살생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소, 돼지, 새가「너는 너 자신을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채식주의자가 되라」라고 말하는 만화가 그려져 있으며, 그 옆에 「시칠리아 리베라∇시칠리아 아나르키카?」라는 서명이 있었다. 또 하나의 벽보에는 「어째서 이 이벤트는 돈뿐이냐」라는 메시지 아래에, 「주의하라 누군가가 에스파스 노왈의 바비큐 통에 개똥을 올려놓았다. 왜냐면 고기는 살생이기 때문이다. AFL(동물해방전선)」,「고기도 없고 주인도 없는」이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이것이 앞서 말한 4일째 밤에 일어난 항의운동의 예고 일 것이다. 문헌에서 밖에 몰랐던 「동물해방전선」의 주장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수확이었다. 환경문제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채식주의자의 사상은 나치등 보수?우익에게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식물이 아닌 동물의 「해방」만을 호소하는 태도가, 예를 들면 일본에서 널리 받아들여질까 는 의문이다. 그러나 앞에 본 페미니즘과 같이, 내가 직접 목격한 바로는, 이번의 회합에서 행동과 함께한 눈에 뛴 주장을 전개한 것은, 채식주의자와 동물해방파였다. 또한 매일 아침 점심 저녁 3끼 식사를 10스위스 프랑(8유로)로 제공한 것도, 독일과 스위스의 채식주의자용 식사를 만드는 그룹과 개인에 의한 집합체이며, 회합에 참가한 대다수 사람들이 그들로부터 식사를 제공 받았던 것이다. 식사가 제공되었던 장소의 하나였던 체육관의 옆 벽에는,「여기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채식식품뿐. 동물로 만들어진 제품을 반입하지 마십시오.」라는 메시지가 붙어있어, 채식주의식품의 영역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같은 주장이 아나키즘이라는 생각에서 보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를 떠나서, 이것 역시 prefigurative politics 라고 불리는 태도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도, 동물해방파를 포함한 채식주의자는, 대립을 만들어 내면서도, 스스로의 주장을 행동으로 실천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 내가 체험한 대립을 예로 들어본다. 내가 숙박하고 있던 아파트의 부엌에서 만난 펑크족은 짧은 영어로 「이 회합은 프롤레타리아 만세라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라고 하더라도 , 그 녀석들은 차를 사고 텔레비전을 보며 소비하고 있을 뿐, 결국 시스템의 일부가 아닌가. 우리들 펑크족은 시스템에 대한 반역rage를 함으로서 세계각지에서 억압을 받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펑크족이 체포되어 머리가 잘리고, 이라크에서는 펑크족이 처형되고 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사회주의적인 아나키즘을 지지하고 있는 루마니아의 젊은 아나키스트에게 말하지, 「저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라며 펑크족의 주장을 낮은 지적레벨이라는 관점에서 무조건 부정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립」은, 오늘날의 아나키즘 운동에는 「다양성diversity」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이 「다양성」역시, 현대 아나키즘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번의 회합에서는 여러 가지 「대립」이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대립」을 다양성의 반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며, 그런 사람들이 존재함으로서 회합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마지막으로 ? 일본으로부터의 정보 발신력-
대규모의 집회와 회합이 열릴 때는, 공식적인 모임이 아니라, 비공식적이며 개인적인 만남이나 의견교환이 더 중요할 경우가 많으며, 이번에는 정말로 그랬다. 고런 만남 가운데, 반원전운동을 포함해, 일본에 관한 정보가 없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일본 쪽에서, 구미언어에 의한 정보발신을 해 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 배경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ZENKOKU-JIREN 이라는 것이 일본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동구에서 온 젊은 참가자들의 입에서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회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남미의 어느 참가자에게, 일본에서는 아나連이 1968년 해산되고 나서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전국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더니 「어째서 해산했는가.」라는 질문이 있었지만, 나도 모르는 일이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세계의 여러 사람들과 그런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와 같은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이상한 소통이 계속될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