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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 자전해설
한 혁명가의 회상
李 文 昌
목 차
1. 머리말
2. 19세기의 아나키즘운동
3. 크로포토킨의 사상
4. 크로포트킨의 말년과 러시아혁명
1. 머리말
요사이 젊은이들 사이에 2000년대 대안으로서의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크로포트킨의 저술들이 다시 빛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서 30년간이나 먼지 속에 묻혀있던 크로포트킨 자전의 이 원고뭉치까지도 다시 끄집어 들게 되고 보니 실로 감개무량한 바 없지 않다.
크로포트킨의 저술들이 우리 글로 소개되기 시작한 연대를 적확히 고증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략 3 1운동 이후 항일 독립운동 지사들 사이에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던 때와 시기를 같이할 것으로 추측된다. 1920년대 초의 ‘노동공제회’ 기관지 『공제』 7호에는 夫의 『개미와 벌의 상호부조』가 소개되었고, 같은 호에 無我生 옮김의 『청년에게 소함』이 실려 있다. 1928년 6월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의 『탈환』 창간증보호에도 晦觀 옮김의 『청년에게 소함』이 보이는데, 역자 주로 이 글의 원문은 크로포트킨이 프랑스에 체류할 때 불어로 저술한 것으로 이미 세계 20여 개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조선말로도 일본 동경의 “근독사”에서 펴낸 적이 있으나 동지의 입장으로 옮긴 것이 못되어 오역과 누락 심하다’는 것을 지적하여 흥미롭다. 李丁奎 연보(又觀文存) 1926년 항에는 London Freedom Press 간행의 크로포트킨 시리즈 『법률과 강권』, 『무정부주의자의 도덕』 등 10여 편의 소책자를 번역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들이 어떤 형식으로 간행까지에 이르렀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일제의 칼날이 번득이는 당시의 제약 속에서 이러한 사회사상 저서들이 단편적으로나마 우리 글로 소개되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8 15 해방으로 잠시나마 사회사상의 백화제방기를 맞아 『청년에게 호소함』, 『빵의 쟁취』 등 아나키즘 소책자들이 거리에 나돌기는 했지만, 그 어수선하고 짧았던 기간에 크로프토킨의 저술들이 제대로 소개될 만큼 여유로웠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중에서도 유일한 크로포트킨 저서로서 成仁基(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옮김의 『상호부조론』이 1948년 판으로 서점가에 출회했던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크로포트킨의 저서가 본격적으로 우리 글 단행본으로 나돌기 시작한 것은 6 25 동란을 겪고도 한참 후부터일 것이다. 1973년 李乙奎 옮김의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이 창문사 간으로 출시하였고, 바로 그 무렵 박정희 유신정치의 긴급조치 하에서 河岐洛 옮김의 『청년에게 호소함』을 민주통일당 (당수 梁一東)이 청년당원 교육용으로 출간하기 직전 중앙정보부기 원고채 압수해 갔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전원 공장 작업장』 (하기락 역, 1983년 10월 형설출판사), 『상호부조론』 (하기락 역 83년 12월 형설출판사), 『한 혁명가의 회상』 (박교인 옮김, 85년 한겨레), 『빵의 약취』 (백낙철 역, 88년 5월 우리), 『청년에게 호소함』 (성정심 옮김, 93년 9월 신명),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하기락 옮김, 93년 8월 신명), 『빵의 약취』 (백낙철 올김, 93년 7월 신명) 등등 비교적 많은 크로포트킨의 저서들이 햇빛을 보기 시작하였지만, 정말 제대로 된 번역물에 접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한 혁명가의 회상』(Memoirs of a Revolutionist)은 「아트란틱 먼스리」지상에 1898년 9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연재했던 것을 약간 추가해서 출간한 자서전이다. 그러나 이 자서전에서 크로포트킨은 자기 자신의 심리보다도 오히려 그가 살던 동시대의 심리를 묘사하기에 힘쓰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관료체제 하에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 멈칫거리면서도 전진하는 러시아와 정체 속의 러시아의 심리를 여실히 보여 준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의 역사보다도 동시대의 역사에 대해 논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 그의 생활기록은 그가 살던 동안의 러시아의 역사와 19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유럽 노동운동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1899년 영문으로 처음 간행된 이래, 판수를 거듭하면서 수십 개 나라 말로 번역되는 등, 크로포트킨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명저이다. 무엇보다도 구절구절마다 풍기는 그 드높은 휴머니즘의 감각이 독자를 감동으로 몰아드리는 것 같다.
이런 여망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도 그간 이 책이 우리말로 소개된 적이 없지는 않았으나, 아쉽게도 크로포트킨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할 입장이 못되었던 데서 무리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차제에 새로 햇빛을 쏘이려는 이 원고의 사연에 대한 설명을 남기는 것이 지나간 분들에 대한 도리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 아울러 몇마디 부연하는 데 대해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한 마디로 총 2000매에 가까운 이 원고는 70년대 중반 金裕坤씨가 당시 같은 직장인 고려대학교의 교무과장이던 趙漢膺씨의 부탁으로 작성해놓은 것이었다. 조씨는 이에 앞서 1973년 그의 장인이 되는 晦觀 李乙奎 역의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을 역자의 서거 1주기 추모판으로 사비를 들여 상재한 바 있다. 조씨는 크로포트킨 전집 등 아나키즘의 도서를 출판 보급하는 것을 자기의 평생 숙원사업으로 여기고 정년퇴직 후 출판사를 차리는 등 의욕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던 분이다. 그의 서가에는 항시 새로 구입한 원서들이 잔뜩 꽂혀 있었는데 그 중에는 『Mutual Aid』, 『Ethics』, 『The Conquest of Bread』, 『An Appeal to the Young』 『Memories of a Revolutionist』 등 크로포트킨의 원저서가 많이 있었다. 사실 그 당시의 체제하에서 이런 책들이 수월하게 햇빛을 보기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1977년 조씨가 간암으로 급서하고 보니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크로포트킨의 자전 원고도 잠재워 둘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크로포트킨 저서의 우리말 소개에 헌선적이었던 조한응은 과연 어떠한 분이었던가? 『한국아나키즘운동사』는 그 국내편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관해 언급하면서 ‘보성고보의 趙漢膺, 南相沃, 高信均, 李錫圭, 具자익, 중앙고보의 河岐洛, 張현직, 중동고교의 高순욱 등은 교내에 학생아나키스트서클을 만들어 동경과의 연락을 취하여 학생운동을 펴나갔으며, 3년간 복역 후 출옥한 又觀 李丁奎와 자주 접촉하면서 그의 지도를 받았다.’라고 언급한 후, 조한응에 대해
‘보성고보 졸업 후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張鉉稷, 高순욱 등과 함께 학생아나키즘운동을 계속했으며, 1935년 晦觀 李乙奎의 영애이자 그의 동지인 李仁玉과 결혼하고 197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생을 아나키즘운동으로 일관했다.’
고 끝을 맺고 있다. 해방 직후 조한응은 청년그룹을 이끌고 본격적인 아나키즘운동에 뛰어들어, 자유사회건설자연맹 결성에 가담하는 것을 시발로 조선농촌자치연맹, 노동자자치연맹 등의 대중조직에 앞장선다. 또한 자유청년동지회 국민문화연구소(설형회) 등의 청년들을 위해 자유교양활동을 지도하는가 하면 愛美社라는 출판사의 문헌소개활동을 통해 자유연합 상호부조의 아나키즘 이념을 전파하기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때 스페인혁명의 자료를 알기 쉽게 풀이해서 소책자로 배포한 것을 받아 읽던 기억이 난다. 그가 살던 정릉 청수장 근처 자택에는 언제나 청년 학생들이 모여들어 밤늦게까지 아나키즘 사상 토론으로 떠들썩했다. 특별히 재주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평소에 말수도 적었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남다른 매력이 있어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청년학생들이 모이게 마련이었다.
그리고는 그들을 끈끈한 공동체의 유대감으로 엮어나가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李何有 河岐洛 李錫圭 李鍾燕 邊純濟 李邦錫 蔡永哲 金善積 鄭永(光龍) 白械鉉 金成漢 李鍾翊 필자 등 쟁쟁한 중견활동가들이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그후 6 25 동란으로 약간 움츠러들기는 하였으나 이런 식의 자유그룹활동은 수복 후 종로빌딩 38호실 모임으로 맥이 이어졌으며 그 배후에서 뒷바라지를 하는 사실상의 간사역은 언제나 조한응의 몫이었다. 그는 그 무렵 직장을 성균관대학에서 고려대학으로 옮겨가 계속 교무과 책임을 맡고 있었다.
4 19 학생혁명의 열기를 업고, 조한응의 관심은 단연 청년 학생들의 자유교양 증진과 농촌운동 현장활동 쪽으로 경주되었다. 고향인 양평 출신 각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향토학술활동(경천학술연구원)을 펴는가하면 국민문화연구소의 학생농촌활동대를 안내하여 농촌授産운동전개의 길을 닦기도 했다.
키가 작고 다부지면서도 근엄한데가 있는 그였지만 일단 청년들과 어울려 술이 한잔 얼근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홍안소년으로 돌변하여 젊은이들과 얼싸안고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는 모두 함께 『전원 공장 작업장』의 농촌설계에 대해 꽃을 피우고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황홀경으로 도취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조한응은 젊은이들과 어울려 자유사회운동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리는 것으로 생애의 낙을 삼았고,
그것을 위해 크로포트킨의 중요한 저서들을 하나하나 우리말로 옮겨 간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공명하여 번역의 노고를 사양하지 않았던 분이 바로 金裕坤씨였는데, 그 또한 그후 직장을 옮겨 얼마 전까지 20여 년간이나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새 천년 3월 어느날 국민문화연구소의 한 아나키즘 연구모임 자리에서 우연치 않게 크로포트킨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 논의되었고, 그런데서 오래 동안 잠재워두었던 크로포트킨의 자전 원고를 다시 들추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텔레파시가 서로 통했다고나 할까(?) 까맣게 잊고 있던 김유곤 역자와의 연락이 다시 닿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승인하에 출판논의가 급류를 탈 수 있게 된 것이다. 원고의 완벽성을 입증하기 위한 영문원서를 다시 찾는 것이 문제가 되었으나, 일본동지 龜田 博(가메다히로시)씨가 동경에서 이 소식을 전해듣고 교오도까지 연락하여 左近 毅(사공 다까시)씨 소장의 귀중한 원본을 빌려받게 된 것은 더없이 다행한 일이었다. 이 지면을 통해 그분들에게도 사의를 표해 둔다.
크로포토킨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나키즘이란 어떤 사상이며 어떤 궤적에 따라 걸어왔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아나키즘 운동 내에서의 그의 정확한 위상을 점쳐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반적인 윤곽을 그려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고, 여기서는 다만 본문과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19세기 유럽 아나키즘운동의 추이와 크로포트킨 사상의 개요를 더듬어 본 다음, 끝으로 러시아혁명기의 그의 마지막 생애를 살펴보는 것으로서 해설에 가름하고자 한다.
2. 19세기의 아나키즘운동
<사회주의 아나키즘>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이 다양하다는 것은 정평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각기 서로 상반된 이질적인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얼른 보기에 슈티르너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도 역시 개인주의자이고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도 역시 굳이 스스로 표명하기를 꺼리지만 훌륭한 사회의 일원일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아나키즘은 인간 존중과 무엇으로도 양보할 수 없는 개인의 절대 자유를 모든 발상과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출발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점에 아나키즘이 다른 사회주의와 그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전략전술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세기 초 유토피아사상으로 출발한 초기사회주의는 로버트 오웬, 생 시몽 등 당시의 인테리겐챠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사회의 미래상까지는 구상할 수 있었지만, 그 미래상이 현존의 지배권력을 어떻게 배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만한 성찰을 제시한 것이 없었다. 지배권력은 자기들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의 지대였었다. 그런데서 유토피아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고, 유토피아인 이상 권력 쪽에서도 굳이 그들을 건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후 노동자계급이 생기고, 자기네의 경제적 생활조건을 자연발생적 조합 형식으로 개선하고자 꿈틀거리게 됨에 따라되고 보면 사정이 전혀 달라져서 노동자의 운동이 사회주의사상과 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사회주의는 이미 단순한 사상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권력과 정면 대결하는 사회적 세력으로 다가서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권력이 방관할 리 없고, 사회주의 측은 사회주의 측대로 현존 지배권력과 어떻게 대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절실한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권력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사회주의는 두 가닥으로 갈리게 된 것이다. 한 가닥은 권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도 권력형으로 개편하고, 그 권력에 의해 반혁명세력을 배제하면서 이상사회에 도달한다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그 대표격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권력에 대한 증오가 골수에 사무치니 어떠한 권력도 싫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은 인텔리겐챠 출신 지도자로서 대중조직을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기구를 안출해 낸다. 이것이 마르크스로부터 출발하여 레닌에 이르는 계보이다. 계급과 계급간의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정치라고 하는 지극히 리얼리스틱한 사고방식이다. 이에 반해 권력부정의 사회주의는 노동자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태동한다. 노동자들 사이의 지극히 인간적인 신뢰가 그대로 미래사회의 인간적인 연대로 이어진다는 목가적 믿음이다.
이론 정비가 뛰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텔리겐챠 쪽이겠지만, 노동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는 권력 부정 쪽이 우세했다. 제1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가 다수파로 버텨나가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쇠사슬 이외에 더 잃을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19세기 후반의 노동자계급의 궁핍한 생활을 타파하려는 개혁의지를 반영한 말이었다. 당시에 노동자들이 반항하는 최대의 동기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정치적인 해방이 가져다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경제적 자유만이 진정한 해방이라고 인식한 데에서 노동자들이 정치보다도 경제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또한 노동자가 인텔리겐챠의 대중조작 수단인 정치에 대해 기질적으로 반감을 나타낸 데서, 그들이 마르크스보다도 친근감을 주는 바쿠닌 쪽을 선호하게 된 주요 원인의 하나였다.
사회주의 중에서도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의 권력 부정은 인간의 개인존엄 사상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같은 인간이면서 피땀 흘리는 노동자가 궁핍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보았으며, 인간은 이 굴욕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존중은 아나키즘의 일관된 신조이니, 아나키스트들의 인간존중은 또한 인간신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나키즘 신봉자 중에는 이상사회로 가는 수단으로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앙집권적 혁명당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반란을 혁명의 모델로 삼았다. 그들은 혁명이 기존의 권력을 배제하고 나면 인간은 모두가 본래의 사회적 본성에 의해 자연적 조화의 상태로 복귀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혁명의 엘리뜨를 전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신뢰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이었다.
권력적 사회주의 파는 바로 이 점에서 아나키즘에 양보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제1인터내셔널에서 지도부로서의 총무위원회General Council에서 손을 떼려 하지 않은 것이라던가, 레닌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국외 중앙지도부의 권한을 꽉 쥐고 트로츠키에게 양보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나키즘의 특성 중 하나는 그 이론의 다원성이다. 일체 권력의 부정은 개인 사상 중심으로의 사상 통일을 거부하게 된다. 따라서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과제를 둘러싼 이론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주의처럼 하나의 세계관에 의해 교조주의적으로 지속하기를 의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권력적 기구의 부정과 결합해서 아나키즘의 사회적 세력화에 지장을 주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제1 인터내셔널>
제1 인터내셔널이 런던에서 결성된 것은 1864년이었다. 마르크스는 이 조직을 통해서 1848년 혁명의 교훈을 되살려 보고자하였다. 1848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혁명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은 혁명가 개개인의 용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도 혁명정당에 이끌린 노동자대중 때문임을 깨닫게 된 데서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일상투쟁 과정에서 이미 모습을 갖춘 노동조합을 새로운 조직의 모체로 등장시키려 했다. 그런 까닭에 제1 인터내셔널이 제2, 제3과는 달리 노동조합의 연합으로 출발한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영국에서는 1860년 건축쟁의 과정에서 런던노동조합 London Trade Council이 생겨났다. 이 조합의 초청으로 1862년 국제박람회 관광을 명목으로 런던을 방문한 프랑스노동조합과의 사이에 국제적인 노동조합을 조직하자는 것이 거론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당시 노동조합 조직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나폴레옹 3세는 부르조아계급을 견제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이용하고 있었으며, 그런데서 프랑스 대표단의 박람회 견학도 묵인해 준 것이었다.
1864년 런던을 방문한 프랑스 대표 중의 드렌, 리무장, 후리푸르는 프루동의 제자들로, 노동조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는 반대하는 편이었다. 영국노동조합 대표도 그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축사에서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정면으로 제기하지를 않고, ‘노동의 협동’Cooperative Labour라는 말을 빈번히 사용해서 노동자 대표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인터내셔널에 걸었던 정치적 기대가 충족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창립대회 최종순간까지 프랑스 대표단은 정치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려고 하지 않았다.
인터내셔널 규약 전문에 영어로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이 최대의 목적이고 어떠한 정치적 운동도 수단으로서는 이것에 종속되어야 한다.”라고 되어있는 것을 프랑스어 역으로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이 최대의 목적이고 모든 정치적 운동은 이에 종속되어야 한다.”라고 바꾸어 놓았다. 마르크스를 격노케 한 이 오역은 프랑스 대표 다수가 신봉하고 있던 프루동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었다.
여기서 프루동의 사상을 소개해 보자. “아나키즘이란, 나의 견해를 말한다면, 과학과 법률의 발달로 형성된 공사간의 지식이 단지 질서를 유지하고 또한 모든 종류의 자유를 확보하기에 알맞는 하나의 정치형식 내지 결합 이어서, 여기에 강권의 원리, 경찰제도, 금제수단, 관료주의, 조세 등이 가장 단순한 것에 이르기까지가 제한되며, 고도의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가―연합제도와 지방자치로 대치되어― 소멸된 정치형식 내지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정치생활과 사적 존재가 같은 의미의 것이 된다면, 또한 사회적 이해와 개인적 이해 사이에 개재하는 경제적인 문제의 해결에 의해 평등이 확립되게 된다면, 그때에는, 우리는 당장 모든 강제의 소멸로 인해, 완전한 자유, 즉 아나키의 상태 가운데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트라우 ‘아나키즘사상사’)
프루동의 ‘경제적인 문제의 해결’은 상호주의(Mutualite)와 협동(Cooperation)에 의해 달성된다. 프루동은 자본이 이자를 낳는 것이 경쟁과 재산의 불평등을 야기시킨다고 생각했으므로 일체의 자본을 인민은행으로 집중시키고, 거기서 무이자로 생산자에게 빌려주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독자적인 직인과 농민 또는 노동자의 조합이 노동시간을 환산의 단위로 해서 물물교환을 한다는 것이다.
프루동은 이런 경지까지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적 혁명이 동원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노동자가 투표방식에 의해 대표자를 내세우는 것도 탐탁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1846년, 마르크스가 아직 프루동과 협력 할만 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마르크스가 내미는 손을 프루동은 보기좋게 거절했다. 프루동은 마르크스의 편지에 담긴 ‘행동의 순간’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현재로서 어떠한 개혁도 기습적인 방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요. 기습을 지난날에는 혁명이라고 했으며, 실제로 충격을 일으키자는 것에 틀림 없습니다. 그 의견은 알만합니다. 또한 그런 논의에 이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 또한 오 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나의 최근의 연구 결과로 해서 그런 의견 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혁명이 꼭 성공의 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겉껍데기 수단은 폭력이나 자의적인 호소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이어서 말하자면 자가당착이 되고 말겠지요. 그래서 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합니다. 즉 경제적 인 결합에 의해 사회로부터 탈취 당한 재부를 다른 경제적 결합으로 사회에 환원시키자는 것입니다.”(Woodcock)
1846년 마르크스를 향해 혁명을 부정해 놓고서도, 1848년 혁명이 파리를 엄습했을 때 프루동은 용감하게 거리로 나와 싸웠다. 노동자의 혁명은 노동자 자신이 해결할 일이지, 정부나 인텔리겐챠에게 위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가 프랑스 노동자로부터 압도적인 신뢰를 받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바쿠닌과 마르크스>
제1 인터내셔널은 1866년 제네바에서 제2차 대회를 열었다. 보다 상세한 규약을 제정하기 위해서였다. 이 규약 심의에 중대한 문제를 프랑스 측에서 제기했다. 인터내셔널 가입자격을 순수한 노동자로 만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프랑스 대표는 정치운동보다도 파업과 경제투쟁에 중점을 두었고, 브띠부르조아 출신의 급진적 정치가들이 설치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다. 이 제안은 그 자리에 출석하지 않았던 마르크스를 놀라게 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다수의 지지를 받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 대회에서 8시간 노동제의 제정과 아동교육의 국고부담을 선언한 것 정도로 프루동 파를 눌러 놓은 것으로 치부했다. 사회개혁의 수단으로서 국가권력을 이용한다는 원칙을 확인시킨 것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프루동파를 제압했다고 생각했던 마르크스는 프루동보다도 훨씬 힘겨운 반대파와 부닥치게 되었다.
1867년 일찍이 생 시몽주의자인 샤르르 루마니에의 발의로 광범위한 부르조아 급진파 명사들을 모와 ‘평화자유동맹’이라는 반전(反戰)운동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더 한층 혁명적인 노동자 단체로 개조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인사들이 1868년 거기서 탈퇴하고 ‘사회민주주의동맹’을 창립했다. 이 집단의 지도자가 바쿠닌이었다.
러시아의 유복한 귀족 출신인 바쿠닌은 1840년 친구 겔첸의 지원으로 독일로 망명하여 헤겔 좌파에 가담했다. 1848년에는 프라하에서, 다음 해에는 드레스덴에서 혁명적 반란을 조직하다가 실패, 섹스냐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고, 러시아로 송환되어 베들 파우로 요새의 정치감옥에서 6년간 유폐되었다가 다시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그는 극적인 탈출에 성공, 일본 미국을 거쳐 지구를 일주해서 1861년 다시 유럽으로 복귀했고, 이탈리아에서 혁명비밀조직 ‘혁명형제동맹’을 만들기도 했었다.
호방 활달한데다 불을 토하는 듯한 열변, 그리고 태어난 선동가의 기질 등으로 해서 바쿠닌은 성격적으로 마르크스와는 대조적이었다. 바쿠닌과 마르크스의 상이점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바쿠닌이 베른에서 열린 ‘평화자유동맹’ 자리에서 행한 연설 내용이다.
“나는 공산주의가 싫다. 그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 없이 인간 적인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사회의 모든 세력을 한 곳으로 집중하여 국가에 흡수시키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불가피하게 재산을 국가 의 손에 집중시켜 주게 된다. 이에 반해 나는 국가의 폐지를 바라는 자이다. 국가는 도덕과 문명이라는 구실 아래 인간을 노예화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며 약탈한다.
나는 사회조직, 집산조직 쪽에 서는 자이다. 자유로운 연합에 의한 저변으로부터의 사회재산 형성에 찬성하는 자이다. 어떠한 종류이건 위로부터의 권위에는 반대한다. 국가의 폐지를 외치는 나는 재산의 개인 상속도 폐지할 것을 외치는 자이다. 개인 상속은 국가제도, 국가원리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여러분은 내가 집산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유를 이해했으리라고 생각한다.“(G.D.H.Cole: Marxism and Anarchism) 이런 바쿠닌이 ‘사회민주주의동맹’을 내걸고 인터내셔널에 단체 가맹하겠다고 했을 때, 마르크스가 주재하는 총무위원회가 순순히 응낙할 리가 없었다.
바쿠닌이 인터내셔널에 최초로 출석한 것은 1869년 바젤회의 때였다. 마르크스 자신은 출석하지 않고 그의 부하인 에카리우스를 출석시켰다. 바젤회의에서도 재산 상속의 폐지를 결의시키려 했던 바쿠닌은 에카리우스와 예리하게 대립했다. 마르크스가 볼 때 재산상속의 폐지는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근본적인 과제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쿠닌으로 볼 때 재산상속의 폐지라는 슬로건은 국가의 전 제도를 공격하는 꼬투리인 동시에 강권적 정부를 폐지하기 위한 제1보였던 것이다. 절대다수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바쿠닌의 제안을 찬성하는 쪽이 마르크스의 원칙론을 찬성하는 자보다도 많았다.
바젤회의 결정에서 보다 중요했던 것은 총무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문제가 승인되었다는 점이다. 총무위원회는 총회의 승인을 받기까지 잠정기간, 인터내셔널에의 가입 허가, 지부 자격 박탈 등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 바쿠닌이 이것을 찬성한 것은 ‘사회민주주의동맹’이 인터내셔널 제네바 지부의 선전부로 승인된 것과 맞바꾼 것이었다.
바젤회의의 또 다른 의미는 이 회의에서 토지의 국유화게획이 일단 승인되어, 프루동이 말하는 토지사유자의 상호부조가 부정되었다는 일이다. 바쿠닌이 프루동의 대타역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후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싸움판이 되어 자체붕괴를 면치 못하지만, 이 내분도 실은 인터내셔널이 입은 중상으로 인한 단말마적 고통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이 중상을 입게 된 것은 다름 아닌 1871년의 파리코뮨의 패배로 인한 것이었다.
파리코뮨만큼 여러 가지 해석이 가해지는 사건도 많지 않을 것이다. 파리코뮨은 비유해 말하자면 난파선 위에 겨우 남아서 제각기 살아나려고 아비규환을 하는 인간 군상과 같은 것이었다. 파리라고 하는 유람선이 보불(普佛)전쟁이라고 하는 풍랑을 만나 중허리에 구멍이 뚫렸을 때, 선장이어야 할 시장은 재빨리 구명보트에 고급선원들만 태워 베르사이유로 피난을 가버렸고, 돈이 있는 승객들도 각자 구명대를 구해 가지고 배에서 떠나버렸다. 남아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 하급관리, ‘사상경향이 좋지 않은’ 저널리스트 및 예술가들 뿐 이었다. 이런 무리들이 배가 가라앉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일심협력해서 안출해 낸 기구가 파리코뮨이었다.
자코방 잔당, 블랑키주의자, 프루동의 제자, 인터내셔널 가맹자 등등 다종다양한 색조의 무리들이 코뮨에 참가했다. 그들은 코뮨을 각자의 주의주장에 따라 해석했다. 실제로 코뮨은 그 성질상 그런 해석을 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 장이었다. 인터내셔널리스트는 마르크스에 의해 ‘프랑스에서 일어난 내란’인만큼 노동자계급을 선출 모체로 하여 성립될 새로운 국가권력을 탄생시킨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실상은 부자들이 도망쳐버린 결과로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블랑키주의자는 혁명적 엘리트가 일으킨 모범적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독재를 해야할 때에 민주제를 도입한 인터내셔널파를 어리석은 짓이라고 나무랐다.
프루동의 제자들은 코뮨을 국가권력을 부정한 자유로운 자치체의 연합이라고 규정했다. 코뮨에 건 다양한 꿈에도 불구하고 난파선 <파리>는 침몰하고 말았다. 코뮨의 패배는 프랑스 노동자의 패배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각국의 노동자는 유럽혁명에 대한 꿈을 잃었다. 이로써 정치투쟁에 매달릴 계절은 지나간 것이다. 각자 자기 나라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일의 예외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이었다. 여기는 바쿠닌의 영향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제1 인터내셔널의 종말>
유럽노동자운동을 침체의 늪에서 구해내기 위해 마르크스가 고안해낸 처방은 각국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만들어 국가권력을 장악시키는 방향으로 전체운동을 개편한다는 것이었다.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가 장악하지 않는 한 사회주의도, 그것이 이상으로 하는 아나키즘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싸움은 철저한 정치투쟁의 방향으로 나가야 하니, 그 과정에서 아직 부르조아 권력이 확립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부르조아 중의 급진파와 동맹을 맺어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서 인터내셔널은 당연히 전 유럽 정치투쟁의 참모본부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이 이런 처방에 동조할 리가 없다. 권력의 집중은 지역적 창의를 압살하게 되며 대중의 혁명적 도약을 억누른다. 그런데도 부르조아와 손을 잡는다는 따위의 망언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터내셔널 연차대회는 1870년에는 파리코뮨 관계로 열리지 않았고 1871년 9월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인터내셔널의 특별회의를 소집하였다. 프랑스 대표로는 망명자들을 대신 끼워 넣고,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 각 1명, 벨기에 6명, 독일은 보불전쟁 결과로 불참했고, 스위스 대표는 ‘자본론 번역사기사건’으로 출석이 거부되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에카리우스 등은 영국대표 자격으로 출석했다. 이런 구성으로 보아 정상적인 국제대회라고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여기서 마르크스는 극히 중대한 명령조의 선언을 했다. 즉 각국노동자는 각자의 나라에서 부르조아 정당과는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정당을 만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언이 나온 것은 아나키스트들이 이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던 데다 프랑스 대표란 것이 블랑키주의자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던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이 그대로 수긍할 리가 없다. 동년 11월 스위스의 아나키스트들은 손비리에에 따로 모여 관련된 결의를 기초로 회람을 만들어 각국 인터내셔널 지부에 돌렸다.
“우리가 총무위원회를 공격하는 것은 악의적인 것이 아니다. 총무위원회 멤버들은 숙명적 인 희생자들이다. 그들은 순전히 선의에서 그들의 특수한 신조를 승리로 이끌 목적 아래 인터내셔널 내부에 권위주의적 정신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상황은 그러한 경향이 세를 타는 듯 하다. 노동자계급의 권력 탈취를 이상으로 하는 그들이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태의 결과로 인해 인터내셔널의 조직을 변경해서 총무위원회가 지배하고 지도하는 히에라키적 체제로 만들고자 하는 심정은 알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과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들은 우리들이 목적한 사회혁명의 명분상 그들과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사회혁명의 강령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즉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손으로> 이다. 어떠한 지도적 권위도 사양한다. 설사 그 권위가 노동자 자신이 동의했고, 임명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인터내셔널에서 지부의 자치권 원칙이 확립되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종래에도 우리들의 연합의 기초로서 인정되어 왔던 것이다. 총무위원회의 직능은, 바젤회의의 행정적 결정으로 강화되었지만, 아무래도 정상적 기능으로 복귀되어져야 할 것이다. 총무위원회는 통신과 통계의 사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미래사회는 현재 인터내셔널이 체현하고 있는 조직의 보편화 이외의 그 무엇일 수도 없다. 우리들은 그 때문에 이 조직을 우리들의 이상에 다가서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미래 인류사회의 맹아로서의 인터내셔널은 이미 오늘날에 있어서의 자유와 연합이라는 우리들의 원칙이 충실하게 반영된 것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권위주의와 독재로 향하는 어떠한 원리도 거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회람의 효과가 충분히 나타나, 1872년 9월 2일 헤이그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마르크스는, 바쿠닌을 제명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마침내 다수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인터내셔널이 아나키스트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마르크스는 총무의원회를 런던에서 멀리 뉴욕으로 옮겨갔으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제1 인터내셔널은 두 번 다시 전체회의를 열어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권위주의를 배제한 리버타리안 그룹은 9월 7일 인터내셔널 대회가 끝나기가 바쁘게 9월 15일 싼 디미에에서 대회를 열었다. 아나키즘운동의 역사상 쟁쟁한 인물이 가장 많이 모였던 대회였다. 싼 디미에 대회의 선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프롤레타리아가 이행해야 할 최대의 의무는 일체의 정치 권력을 파괴할 것. 둘째, 정치적 권력을 파기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건 이른바 혁명적 임시정부의 권력과 같은 조직은 모두가 또 다른 기만에 불과하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를 위해서는 일체의 기성지배권력과 동일하게 위험한 것이다. 셋째, 일체의 부르조아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가 사회혁명 수행을 위해 일체의 타협을 배제하고 혁명적 행동을 위한 연대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싼 디미에의 참가자가 모두 아나키스트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대회는 전체적으로 바쿠닌의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대회에서 결정한 어느 부분은 완전히 바쿠닌의 사상 그대로였다. 예를 들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은 노동과 평등에 의거하여, 완전히 자유로운 경제조직과 연합을 창 출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그것은 어떠한 정치적 지배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이러한 조 직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자연발생적 행동, 프롤레타리아의 조합, 자유코뮨에 의해 초래된 다.”와 같은 부분이 그렇다.
<바쿠닌의 사상>
바쿠닌은 철저하게 지금 ‘당장’을 산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지금 ‘당장’을 뺀 다른 모든 것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가 되고 만다. ‘당장’ 배가 고프니 어떤 친구로부터 돈을 빌린다 치자. 아니, ‘당장’ 어떤 동지가 밥을 굶으니 그를 위해 돈을 빌려준다 치자. 그게 곤란하다면 그것뿐이다. 언제 어떻게 갚느냐 따위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또한 ‘당장’ 난처한 문제에 봉착했다고 치자. 그것은 ‘당장’ 오늘 끝장을 봐야지 내일까지 끌고 갈 필요가 없다는 식이 바쿠닌의 사고방식이다.
그는 ‘당장’ 눈앞의 사람을 믿고 더 없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보육원에서 대학까지 동원해서 이상적인 인간형이 만들어진다는 식의 미래를 믿지 않는다. ‘당장’ 눈앞의 인간은 더 없이 선량하다. 그러나 그 인간의 선량성은 국가와 사유재산으로 해서 여지없이 왜곡되어 버렸다. 그 테를 풀어헤쳐 자유롭게 해주면 인간은 곧장 원래의 선량성에로 되돌아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가 있다.
사회는 국가와 같은 인공적인 산물이 아니다. 사회는 자연의 질서이다. 바쿠닌은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공격했다. 사회계약설은 역사적으로는 거짓말이며, 인간의 인간에 대한 압제를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최초에 국가가 출현했을 때, 계약 운운하는 공리적이고 합리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인간이 이기주의적인 선악을 판별할 능력이 없는 존재였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았으며, 국가가 생기기 이전부터 선악을 판단할 줄 알았다. 국가는, 인간의 양심을 배양시켜준 것이 아니라, 마비시켜놓았다.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가 다른 형식의 국가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다. 거기서는 인간의 인권에 대한 압제가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서는 관료와 정치가가 서민을 착취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이전의 국가 형태와 다를 게 없다.
국가에 대한 바쿠닌의 증오는 국가를 뒷받침하는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예리하다. 신의 관념은 인간의 자유와 절대적으로 상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용인할 수 없다. 신의 관념은 평등의 관념에 배치된다. 만약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노예적 평등이다.
그러나 인간 내부에 신앙의 충동이 있어서 인류 발전사에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던 것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신의 관념이 인간의 언어사용의 혼란 속에서 발생한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작업가설’(作業假說)이 형이상학으로까지 승화한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은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Creature)이 아니고 창조주(Creator)이다. 이 창조력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며, 자랑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미래를 제어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야말로 미래로 향하는 ‘건설적 이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쿠닌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으로서 조직되어, 계급의식을 가지고 무장한 프롤레타리아는 아니다. 그것은 파리의 부랑인이어도 좋고, 바로셀로나의 (하역인부)실업자라도 좋다. 노동자로서의 자발적 행동 속에서 그들의 사회적 협동의 본능이 되살아나는 것을 바쿠닌은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바쿠닌의 사상은 소집단 속에 있는 원시적인 평화상황이 그대로 국제사회와 같은 대집단으로까지 넓혀질 것에 틀림없다는 신념에 의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코뮨연합의 기본인 코뮨은, 일찍이 유럽에 존재했던 원시집단으로, 그가 남부 이탈리아의 농민취락에서 보았던 것을 따온 모델이다. 그것은 다시 그가 러시아에서 본 농민공동체인 미르의 형상과 중첩된다. 더욱더 심층의 체험을 더듬는다면 그가 어렸을 시절 6남 4녀의 형제자매의 평화로운 대가족 사이에서 자라났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행동적 아나키즘의 새 국면>
바쿠닌의 눈부신 활동에 힘입어 아나키즘은 제1 인터내셔널이라는 프롤레타리아적, 비정치적, 국제적 성격의 대중운동에 일단 자기 자신을 접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후 아나키스트들은 ‘초기의 지나치게 소심한 인터내셔널’을 비웃고 ‘강력한 인터내셔널’로 바꾸어 놓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공소한 허장성세였을 뿐 실제로는 아나키즘운동이 점차 당파성과 소수자의 행동으로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되었고, 노동운동권과도 거리가 멀어지는 등 고립상태로 기울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급속한 산업발전과 노동자를 의회적 개량주의로 더욱 가깝게 하는 참정권의 신속한 보급이 한몫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됨으로, 부르조아적 통치권력의 합법적 쟁취와 일상적 요구의 만족 추구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자에 의한 국제노동운동의 독점현상이 초래케 된 것이다.
제1 인터내셔널이 붕괴하고 1872년 반권위적 리버타리안 파의 싼 디미에 대회가 있은 후부터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한 1889년 제2 인터내셔널이 결성되기까지를 보통 흑색 인터내셔널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흑색 인터내셔널이 각국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 하에서 정기적인 국제대회를 순조롭게 치루기는 힘들었다. 제네바(1873년), 브룻셀(1874년), 페룬(1876년) 등 각지에서 대회를 여는 한편, 1877년에는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포함한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꾀하는 회의를 칸느에서 열었지만, 인터내셔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회복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바쿠닌의 사망(1876년), 쥬라의 맹주 기욤의 은퇴(1878년) 등으로 아나키즘의 국제적 활동은 현저하게 위축되었고, 스페인, 이탈리아, 쥬라 등의 각 연맹이 독립된 활동을 하는 데 그쳤다.
대체로 이 시기부터를 바쿠닌 이후의 행동적 아나키즘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은 당시의 절박한 사회 상항이 전제된 것이긴 하지만, 이 시기 아나키즘운동의 주요과제는 크게 ‘사실(행동)에 의한 프로파갠더(선전)’와 순수 아나키즘 이론으로서의 ‘아나르코 코뮨주의’ 노선의 정립 등 두 가지 가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인 아나르코 코뮨주의 사상은 1876년 경부터 주로 쥬라연합 주변에서 바쿠닌의 집산주의가 자취를 감춘 대신 대두된 행동적 경향으로 후일 크로포트킨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뒷장 참조). 다만 여기서 한마디 언급할 것은 순수성을 강조한 나머지 독단주의가 침입하게 되고, 그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와의 대립이 한층 격화되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 내의 다른 계파에 대해서도 배타적이게 되었으며, 이제까지 폭넓었던 아나키즘 사상의 흐름이 지나치게 협소해지고, 다양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후자인 ‘사실(행동)에 의한 선전'은 다시 기관지 등 홍보물 제작 배포와 직접행동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시기 활동의 주역이 단연 크로포트킨이었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1876년 바쿠닌의 뒤를 이어 쥬라연합에 나타난 크로포트킨은 ‘사실에 의한 선전'의 실천 과제를 안고, 그의 가장 활발한 선동자, 평론가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이 언저리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본문으로 미루기로 하고, 다만 크로포트킨 자신은 시종 폭력주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행동적 아나키즘으로서의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었음을 밝혀 둔다.
행동적 아나키즘의 봉기주의는 바쿠닌의 파괴의 교의에 연원한다. 1876년 마라테스타와 카피로가 기초한 다음의 문장 한 구절이 당시의 그들의 사상을 잘 나타낸다. ‘이탈리아연맹은 행동에 의해 사회주의의 제원리를 확인할 것을 지향하는 봉기행위가 가장 효과적인 프로파갠더의 수단임을 믿는다.’
이 사상에 의해 이탈리아 각지에서 수시로 봉기를 계획하고 지도했다. 그들의 방식은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지방에 뛰어들어 민중의 불만을 부축이고 단숨에 관청과 경찰을 습격하여 공문서를 불사르고, 부호의 집을 털어 재물을 주민들에게 분배해 준 다음 사회혁명을 선언한다는 식이었다. 이런 식의 봉기주의가 희생이 너무 많은 데서 자취를 감추자, 1880년대부터 테러리즘이 전 유럽에 유행했다.
최초로 불을 당긴 것은 러시아에서였다. 직접 아나키즘운동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나르도니키가 계획한 일련의 테러가 성공을 거두자, 그것이 유럽의 아나키스트들을 크게 자극했다. 게다가 알렉산더 2세가 암살되고 나서부터는 테러리즘이 전염병처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등으로 번져 고위정치가의 생명을 빼앗고, 공공건물,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등 한때 각국의 권력층을 크게 긴장시켰다.
이와 함께 혁명운동을 테러리즘으로 몰아넣어 운동 탄압의 구실을 만들고, 그에 의해 민중과 격리시키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행동적 아나키즘이 감쪽같이 이 덫에 걸려 오늘날까지도 회복키 어려운 상처를 입히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관헌의 음모로 조작된 좋은 예가 바로 메이데이의 기원으로 잘 알려진 시카고의 헤이마켓 사건 같은 것이다.
1886년 5월 1일에 이어 4일, 파슨스 등의 지도하에 행해진 8시간 노동제 획득을 위한 집회를 경찰대가 습격,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이에 격분한 대규모 항의집회가 6일 열렸고 그것이 끝날 무렵 경찰대가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왔을 때, 돌연 폭탄이 폭발하여 6명의 경관이 사망했다. 정부는 즉각 이 사건을 아나키스트와 결부시켜 충분한 심리도 없이 5명을 사형(링그는 옥중 자살), 그리고 다른 3명을 장기형에 처했다 이 사건이 날조였다는 것이 7년 후 일리노이주 지사 죤 알드겔트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메이데이는 이들 순난(殉難)자를 기념하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1889년 파리에서 창립된 제2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숨길이 가장 세게 작용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을 배경으로 조직된 것이어서 처음부터 요한 모스트, 윌헤름 핫센 등 아나키스트들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출발하였다. 1891년 브룻셀 대회에서는 불청객으로 출석한 아나키스트들을 밀고해서 체포당하게 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1893년 쥬리히 대회에서는 ‘그들(아나키스트)은 강령도 없고 원칙도 없다. 그들의 공통의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부르조아보다도 더 적대시하는 사회민주주의자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다. 우리는 그자들을 상대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여 아나키스트들을 장외로 축출했던 것이다. 한편 이 대회에서 는 프랑스대표가 제출한, 정치행동을 인증하는 사회주의자만이 제2 인터내셔널에 가입할 수 있다고 하는 제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행동이란 의회내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1896년, 런던대회 때는 크로포트킨을 위시한 마라테스타, 루이스 미셀, 에리제 루크류, 장 그라브 등 쟁쟁한 아나키스트들이 대거 참석을 시도했다. 그러나 교묘한 운영조작으로 인한 참가 반대 동의에 봉착, 프랑스노동조합 대표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 제외가 공시결의로 채택되어 영구히 문전박대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혁명적 생디칼리즘>
파리코뮨의 실패는 프랑스의 노동운동, 사회운동을 장송의 무덤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유럽혁명운동도 바쿠닌이 걱정했던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당시 유럽 혁명운동의 주력을 이루던 프랑스는 코뮨의 패배로 많은 훌륭한 투사들을 빼앗기거나 혹은 국외로 추방당해 사실상 혁명운동에서 탈락해버렸기 때문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던 제1 인터내셔널 내의 집산주의적, 생디칼리즘적 사회주의는 20년 가까이 답보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에 대체해서 독일식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랏사르, 마르크스 류)가 대두하게되었다.
프랑스에서의 노동운동, 혁명운동이 본격적으로 부활한 것은 1880년 이후 루이스 미세르 등 파리코뮨 투사들이 특사를 받아 귀국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나 10년의 공백과 그 동안의 독일사회민주당의 발전은 프랑스에도 강한 영향을 미쳐, 1880년대의 노동운동은 이를 정당운동화하려는 게트파에게 끌려 다니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8년 노동조합법이 생긴 것을 계기로, 1892년 비로소 반 게트파 사람들이 모여 노동중계소연합(Federation des Bourses de Travail, 속칭 브루스연합)을 창설하고, 정당 종속을 명분으로 하는 게트파 노조에 대립하여 노동자 자신의 조합으로서의 생디칼리즘 색채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노동중계소란 노동조합이 관리하는 일종의 직업소개소로 각 지역마다 자치체의 보조를 받아 운영되었던 것이다. 1895년, 페르낭 뻬루티에(Fernand Pelloutier)가 이 연합의 서기가 됨으로서 생디칼리즘의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노동운동 부활의 물결을 타고 두각을 나타낸 뻬루티에는 제네스트 사상에 공명하여, 1893년 파리로 옮겨온 이후 장 그라부 등과 접촉하면서 열렬한 아나키즘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895년, 그는 ‘아나키즘과 노동운동’이란 제하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아나키스트가 혁명적 생디칼리즘운동에 뛰어들 것을 호소하여,
‘아나키즘은 노동조합의 실천적 학교가 되어야 한다. 선거를 위한 투쟁을 떠나서 아나키즘 적으로 운영되는 경제투쟁의 실험실이야말로 사회민주주의의 직업적 정치가들의 나쁜 영향에 대항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혁명적인 리버타리안 조직이 아닐 것인가.’라고 강조하였다. 뻬루티에는 계속해서 아나키즘의 최종목표인 아나르코 코뮨주의사회에 노동조합을 연결시켜, ‘현존사회를 계승할 준비를 갖추고 사실상 모든 통치권력을 배제할 수 있는 리버타리안적 조직, 그 각 부분은 생산수단의 주인일 것이고 그 구성원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하여 자주권을 가지고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그러한 조직이 거기에 발견되지 않을 것인가.’라고 매듭지었다.
한편 게트파의 노동조합전국연합 내부에도 그후 아나키스트적 사고가 점차 침투되어 두 노조의 전국조직이 1902년 노동총연합(Confederation Generale de Travail, 약칭 CGT)으로 통합되었으며, 1906년 CGT 아미안대회에서는 혁명적 생디칼리즘운동의 원칙을 규정하는 이른바 아미안 강령이 채택되었다. 아미안 강령은 특히 생디칼리즘의 경제행동주의 및 정당운동배격을 규정한 데 의의가 있다. 그 골격을 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일체 정당, 정파를 떠나 사용자와 피사용자를 소멸시키기 위해 투쟁하려는 노동자의 단결 촉구.
2. 조합 밖에서 각 개인이 사상 혹은 정치상의 자기 의견에 맞는 운동에 가입하는 절대적 자유의 인정.
단, 외부에서 발표한 자기의 의견을 조합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의 절대 금지.
3. 일상투쟁 사안인 노동시간의 단축, 임금인상 등 일시적 개량의 실현으로 노동자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한 노동자의 협력요구.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는 생디칼리즘운동의 극히 작은 부분이고, 생디칼리즘은 자본의 수용(收用)에 의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는 완전한 해방을 준비하기 위해 제너럴스트라이크를 그 활동방법으로 간주하고, 오늘의 저항조직이 장래에는 생산과 분배의 조직이 되고 사회개조의 기초가 될 것으로 전망.
그후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은 프랑스의 CGT에 이어, 이탈리아(CGL), 스페인(CNT) 등 라틴계제국으로 번져나갔으며 미국, 독일, 스웨덴, 러시아, 일본 등지로까지 확대되어, 한때 세계 프롤레타리아운동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디칼리즘의 대두는 순수파 아나키스트에 대립하여 아나키즘을 양분하는 현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1907년 암스텔담에서 열린 아나키즘 국제대회에서 프랑스의 생디칼리스트 피엘 모나트는 ‘아나키스트는 노동운동을 혁명적 노선으로 이끌어주고 직접행동의 사상을 보급하는 데 이렇다 할 공헌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에 대해 당시의 아나키스트의 최고 이론가 마라테스타는 ‘노동조합운동은 목전의 이익추구에 어두워 노동자를 최종적인 투쟁에서 빗나가게 하고 있다’고 응수하면서 노동운동에 의해서만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순수 아나키스트파는 생디칼리즘이 일상투쟁론을 내세워 ‘산적(山賊)으로 타락하는 것’을 경계했고, 생디칼리즘 파는 ‘순정론자’들이 교조적 권위주의에 빠져 혁명대망론으로 고립되어가고 있음을 비웃었다.
결국 양파간의 갈등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는 1914년 발발한 세계 제1차 대전과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기력을 상실하고 좌절하는 쓴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사족을 단다면 1936년 스페인 혁명에서 생디칼리즘 조직인 CNT와 아나키즘 조직인 FAI가 복합적으로 연대한 데서 상당한 저력을 발휘했던 것은 앞으로의 아나키즘운동 발전에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3. 크로포트킨의 사상
1886년부터 영국에 체류한 약 30년간, 크로포트킨은 오로지 아나키즘 이론의 건설이라는 한가지 일에 몰두했고, 그리하여 아나키즘사상사에 더없이 귀중한 저술들을 연속적으로 펴냈다. 그 중의 중요한 것으로는 『빵의 쟁취』(1892년), 『전원 공장 작업장』(1898년), 『한 혁명가의 회상』(1999년), 『근대과학과 아나키즘』(1901년), 『상호부조론』(1902년), 『러시아문학에서의 이상과 현실』(1905년), 『프랑스혁명사』(1909년) 등이 있다. 그밖에도 『반역자의 말』(1885년, 『반역자』에 실렸던 논문들), 『윤리학』(1925년, 러시아 혁멱 중 집필한 미완성 작) 등이 있지만, 이것만 보아도 영국 망명기간이 그의 저술활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기간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저술들에 내포된 크로포트킨의 사상이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제부터 크로포트킨이 생각했던 아나키즘의 혁명이론, 아나키즘의 공동체건설 이상, 근대과학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위상, 그리고 상호부조론 등을 중심으로 그 특징만을 짚어 소개코자 한다.
<아나키즘의 혁명이론>
크로포트킨의 혁명이론에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회상이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그가 『프랑스혁명사』라는 대저를 낸 것도 따지고 보면 대혁명에서의 민중운동의 생생한 교훈을 후세에 일깨우려는 안타까운 심정에서가 아니었을까. 그는 1881년 『반역자』지에 발표한 「혁명의 연구」라는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혁명이 진화의 주요한 한 부분이라는 것을 어슴프레 짐작하게 되었다. 자연 속에서의 어떠한 진화도 변혁 없이 행해지는 일은 없다. 지극히 완만한 변화의 시기 다음에 가속도가 붙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가 온다. 그러니 혁명은, 그것을 준비하는 완만한 변화나 그 뒤에 따르는 급격한 변화와 동일하게, 진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혁명은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폭풍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과 동일하게 인간의 역사에 불가피하게 돌출하는 것으로, 한번 혁명이 일어났다 하면, 개개인의 의지나 행동 따위는 큰 풍랑을 만난 일엽편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혁명에 직접 불을 지르는 것이 민중이라는 것을 크로포트킨은 부인하지 않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고, 생활에 대한 아우성, 빵에 대한 절규가 폭발음으로 변할 때 프랑스 민중들은 혁명의 봉화를 높이 들었다. 그들은 부정해야 할 것, 타도해야 할 것, 파괴해야 할 것을 잘 알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렇게 하는데 그들은 더없이 대담하고 용감했다. 그러나 『반역의 정신』에서 그는 다시 말한다.
‘혁명의 이튿날 아침에, 만약에 국민대중이 그렇게 바랬는데도 손에 들어온 것은 말뿐이라면, 만약에 그들이 명백하고 분명한 사실에 의하여 상황이 유리하게 변혁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만약에 변혁이 인물과 신조의 변화만으로 끝난다면, 아무 것도 달성된 것 이 없을 것이다......혁명이 말 이상의 어떤 것이기 위하여........’
바꾸어 말하면 혁명은 두 가지 사항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꼽는다. 즉, 첫째로 자멸적인 일탈, 즉 혁명정부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여하한 기도도 분쇄할 것, 둘째로 사회적 평등을 향햐여 실질적으로 나갈 것 등이다. 여기서 크로포트킨은 파리코뮨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71년 3월의 선거 이상으로 자유로운 선거는 없었다. 그것은 코뮨의 적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압도적 다수의 선거인이 최상의 인재, 미래의 인물, 진정한 혁명가를 정권의 자리에 앉히고자 마음먹고 그대로 실행했다. 모든 저명한 혁명가가 압도적 다수로 선출되었다. 자코방파, 블랑키파, 인터내셔널파, 이 3파가 코뮨의회를 대표했다. 어떤 선거도 이 이상 좋은 정부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기껏 낡은 전철을 답습하여 구정부가 하던 일의 흉내를 내는 것 이외에는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
크로포트킨은 더욱 나쁜 실례로서 ‘혁명적 독재론’이 튀어나왔던 것을 지적했다.. ‘정부를 타도한 당이 정부에 대체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은 권력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혁명적 방법으로 처리할 것이다. 낡은 제도를 폐지하고 국가방위를 위한 비상시국에 대처한다. 혁명의 전진을 위해 요구되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수하를 불문하고 모두 기로찐행이다.’
이쯤 되면 민중은 앞문으로 호랑이를 내쫓고, 뒷문으로 늑대를 끌어들인 꼴이 된다. 혁명을 일으킨 목적이 고작 이것이었단 말인가! 여기서 크로포트킨은 실패의 원인이 인간에 있다기보다 제도에 있음을 질타한다.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이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이외에는 하등 쓸모 없는 낡은 권력장치에 왜 계속 안주하려드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단순한 지배자의 교체가 아니다. 인민에 의한 온갓 사회적 자본의 수용이다. 인간성의 발전을 오랜동안 저해하여 온 모든 폭력의 폐지다. 그러나 이 거대한 경제혁명을 한낱 정부가 내놓는 법령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혁명은 법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자본의 수용이 실현되려면 인민이 자유로워야 하고, 그들이 오랜 동안 길들임을 당했던 노예근성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들 마음대로 행동하고, 누구의 명령을 기다림이 없이 전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민중은 혁명에 즈음해서 정치가 또는 지도자에 의지하거나, 의회다 관청이다 하는 곳을 점령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훨씬 대담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오직 각자의 자주적 역량과 이웃 사이의 연대에 의거한 모두의 힘으로 토지, 공장, 상점, 학교, 교통기관, 주택 등등을 수용해서 사회화할 것을 선언해야 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그들 제기관을 운영해 나가겠다는 혁명프로그램이 확실하게 각자의 마음속에 심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운동의 당면과제이며 그 과제가 착실하게 수행되고 있는지 여부가 혁명의 성패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는 것이 크로포트킨의 생각이다. 그 경우 혁명 주체가 소수라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또한 그의 주장이다.
언제 어떤 세상이건 정의로운 일 앞에 용감하게 앞장을 서는 소수는 있게 마련이다. 이 무명의 소수자가 올바르게 생각하고, 그들의 발의 또는 발안이 대중의 희망, 대중의 요구에 합치한다면, 그러면서도 그들이 아무 사심 없이 고원한 이상으로 고무되어 있다면 민중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말이다.
크로포트킨의 이런 생각의 근저에는 그가 청년시절 참가했던 나르도니키 류의 관념이 엿보이며, 봉기주의와 테러리즘에 의한 전술이 실패로 끝난 데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동시에 그 당시 점차 유력해지던 사회민주주의의 의회주의적 정치혁명론에 대한 반발도 가미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쿠닌 식의 봉기주의에는 혁명을 자각적으로 일으키려는 쿠데타적 의식이 남아있으며(물론 평지풍파를 일으키자는 것은 아니고, 혁명적 정세를 전제로 하겠지만), 동시에 혁명에 즈음 해서의 민중의 건설능력에 지나친 신뢰를 부여한 느낌이 없지 않다. 테러리즘은 봉기주의를 더욱 압축한 형태에 불과하며, 극히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술로서의 유효성이 발휘되기 어려웠다.
이런 점에서 크로포트킨은 그때까지의 행동적 아나키즘 이론에 수정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혁명은 의식적으로는 일으킬 수 있는 것이 못되며, 그런 혁명은 정치혁명, 즉 권력자의 교체로 끝나고 만다. 그러니 민중의 마음 속에 뿌리내려 있는 권력혁명에 대한 관념을 일소시키고, 혁명프로그램을 이해시키는 작업이 우선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을 완전히 자연발생적인 데 내맡기고, 혁명운동 과업을 오로지 민중의 의식개혁 쪽으로 단순화시킬 때, 그것이 그후 계몽적 아나키즘의 설교주의로 흘러, 운동에너지를 형편없이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지 않았던가 하는 의념을 되씹게 하는 바 있다.
<아나르코 코뮨주의>
크로포트킨이 혁명이론을 그의 사상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아나르코 코뮨주의로 바꾼 것은, 전장에서도 약간 비친 바 있지만, 당시 쥬라연합 노동자들 사이에 일기 시작했고, 뒤이어 행동적 아나키즘의 기본적 프로그램으로까지 이것이 인정받게 되어간 데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아무튼 집산주의에서 공동체주의로 발전한 이 이론은 보통 생산수단뿐 아니라 소비재까지를 사회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바쿠닌의 생각을 한층 철저화시킨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전개방식이 그렇게 단순했던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생산수단이라 할 노동자 농민의 자주적 단체에 의한 사회화라는 바쿠닌의 구상은 마르크스에 의해 이론화된 노동가치설을 발판으로 하고 있지만, 크로포트킨의 사회화 사상은 생산수단 또는 부 일체의 사회화를 하자는 것이어서 오히려 노동가치설을 부인하는 것이 기점이 된다. 이 경제학설상의 입장차이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는 집산주의와 코뮨주의의 차이, 나아가서는 혁명방법론에서 바쿠닌 방식과 크로포트킨 방식의 차이, 그리고 크로포트킨주의의 근본을 파악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크로포트킨은 그의 코뮨주의 이론을 기초짓는 새로운 경제학, 즉 ‘인간의 여러 가지 욕구와 인간 에너지의 가능한 최소 소비로써 그들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연구’를 제창하고 있다. ‘사회생리학’이라고도 하는 이 이론에 의해, 크로포트킨은 아담 스미스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는 지금까지의 경제학이 부의 생산을 중심이슈로 다루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경제학은 인간의 욕망을 최소한의 노동으로 충족시키는 방법과 수단을 탐구하는 과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주장이 지금까지의 경제학의 약점을 찌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설사 이러한 욕망의 과학이 성립될 수 있다 치더라도, 그에 의해 현실경제, 나아가서는 정치나 사회 일반의 정세를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을 것인지가 문제다. 다만 최근에 와서 소비자 중심주의, 소비자 주권문제 같은 것이 사회의 새로운 이슈로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크로포트킨의 선견은 경탄할 만한 것이 사실이다. 그 밖에 욕망의 충족을 실마리로 해서 진행시킨 연구의 성과에는 극히 중요한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코뮨주의와 자유는 공존이 가능할 뿐 아니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까지 하다는 논리의 발견이다. 크로포트킨은 이에 대해 “빵의 약취”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아나키는 코뮨주의로 통하며, 코뮨주의는 아나키로 통한다. 양자는 다같이 현대사회의 지배적 경향인 평등의 추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코뮨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와 자유가 상호보완으로 나가는 데서 각기 완전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바쿠닌이 제창한 바 있다. 그러나 프루동이나 바쿠닌은 오히려 코뮨주의를 자유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크로포트킨은 이제까지 인류가 경험했고, 혹은 실험해온 공산제의 역사를 검토한 바, 그들이 실패로 끝난 원인이 위로부터의 권력이 눌러 억지로 배당한 평등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그러한 권력지배를 제거함으로서 비로소 공동체주의가 성공할 수 있다고 논증한 것이다.
둘째는 노동생산물의 분배기준을 어디에 두느냐하는 당시 사회주의자간에 논의되던 문제에 대해 전혀 새로운 결론을 도출해낸 일이다. 분배의 기준을 노동시간이나 노동의 질의 차이, 혹은 노동의 생산고 등에서 구한다 할 때, 거기에는 각각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으로 납득이 갈 만한 충분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 가치의 산정은 결국 상대적인 것이어서 불평등 혹은 악평등을 낳기 쉽다. 그러나 각인의 욕망은 각인에게 있어 절대적인 것이어서 이 욕망을 분배의 기준으로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방법일 것이라는 것이 크로포트킨이 도출해낸 결론이다.
크로포트킨은 이 결론을 임금제도의 폐지라는 형식으로 정식화시켰다. 그것을 다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취한다’는 유명한 슬로건으로 표현해서 내걸었다. 이런 크로포트킨의 주장에 대해 욕망이 각인에게 있어 절대적이겠지만 실제로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말하자면 무한대로 팽창할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분배의 기준을 욕망에 둘 때 사회질서가 엉망이 되리라는 반론도 있다.
그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본래부터 결코 필요 이상을 구하지는 않으며, 각인의 필요량은 저절로 정해져 있다. 인간이 자기의 필요 이상을 바라는 것은 그 물자가 부족할 때나, 부족할 우려가 있을 때여서, 물건이 풍부해지면 저절로 코뮨주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생길 것으로 생각된다. 그 하나는 인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생산력은 인간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 줄만큼 고도의 것이냐의 여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만약 인간의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켜 줄만큼의 생산력에 달하지 못할 경우 어찌하면 좋은가 하는 점이다.
앞의 문제에 대한 연구결과가 『전원 공장 작업장』에 취합된 것이겠지만, 거기서 크로포트킨은 당시의 생산력이 모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 정도에 달하지 않은 것을 여러 가지 통계상의 숫자로 논증하고, 그 원인을 당시의 사회체제, 즉 자본주의체제 고유의 결함에서 찾고 있다. 결국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의 추구라는 원칙에 의해서 생산이 행해진 결과,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라도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생산이 제한되고, 불요불급한 것이라도 돈벌이만 된다면 척척 생산된다. 이와 같은 왜곡이 생산기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식량생산의 기술 따위는 전혀 진보하지 않는데 반해, 중공업방면의 기계기술은 눈부신 진보를 나타낸다. 농업과 공업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능률 본위의 분업제도 때문에 두뇌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열이 더욱 심화된다.
따라서 이 체제가 바로잡아지고, 생산 역시 인간의 욕망의 필요에 따라 재편성되지 않으면 모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만한 물자의 생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생산의 재편성의 원칙으로 자급자족의 수공업제도를 제안하고 있다.
크로포트킨이 말한 생산재편성의 원칙은 앞서 말한 임금제도의 폐지와 함께 코뮨주의의 무너뜨릴 수 없는 명분을 제시 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한가지 빠트린 것은 앞서 말한 후자의 문제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생산력이 인간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 줄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생산력을 그 단계까지 높이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원칙에 근거해서 생산을 재편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할 때, 혁명에 의해 생산수단의 수용과 그 재편성을 단행하고, 생산력의 급속한 상승을 꾀할 경우, 그것이 코뮨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단계에 달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세월이 소요될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도기의 분배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또한 이 기간의 정치양태와도 관련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거의 말한 것이 없다. 바쿠닌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독재’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크로포트킨은 어찌된 셈인지 이 중대한 과도기에 있어서의 운동방법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이것 또한 앞서 말한대로 아나르코 코뮨주의의 취약점과 연관되는 문제라고 할만 하다.
그러나 크로포트킨도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아나르코 코뮨주의의 행동적 측면의 취약성을 절감했던 듯, 대중조직에 의한 혁명적 생디칼리즘운동에 기대를 걸었던 흔적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이면적으로나마 마푸노 농민운동을 격려한 것이라든지, 도미드로프의 협동조합 회원들을 가까이 하면서 그들에게 혁명프로그램의 이념교육을 시도했던 것 등을 지나칠 수 없다.
궁극적으로 혁명 속에서 국가 없는 자유코뮨주의에로의 제1보를 내딛고자 하는 아나키즘은 어떤 근거에서 기원했으며, 어떤 원칙, 어떤 연구방법을 통해 그런 체계에 도달했는가? 근대과학의 지적운동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크로포트킨은 이를 위해 아나키즘의 체계를 자연과학적 종합철학의 토대 위에서 수립하려고 시도했고 그 논리적 귀결로서 저술한 것이 바로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이었다. 이 저서를 통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이 19세기 자연과학에서의 지적운동의 불가피한 결론이었음을 단언하고 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개념이나 변증법과 같은 유추(類推)방법에서 벗어나, 오직 귀납과 연역의 방법에 의해 자연과학의 사실, 나아가서는 원칙을 그대로 인류사회에 적용하는데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연구방법에 의해, 일체의 과학적 결론을 검증하려 하였고, 인간의 사회생활을 포함한 전자연 현상에 대한 역학적 해명을 기도하는 데서 아나키즘의 우주관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이 저서에서, 우선 근대의 모든 자연과학의 경향 및 사회과학의 추세에 대해 상세히 논했다. 그런 다음, 동일하게 사실에 대한 귀납적 연구방법에 의거하여, 프랑스혁명 이후 민중운동의 실지생활 속에서 골격을 잡아 나간 아나키즘, 특히 아나르코 코뮨주의가 근대 사회혁명의 불가피한 결론으로서 도출된 것임을 입증하기에 주력했다. 요컨대 크로포트킨은 자연과학적 귀납법에 의해 얻어진 개괄적 결론으로서의 행동적 아나키즘의 실천을 인류의 모든 생활단위에까지 적용하는데서, 자유 평등 박애의 도상에 있는 인류 장래의 행진을 성선설(性善說)의 입장에서 입증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호부조론>
『진화의 한 요인으로서의 상호부조론』은 크로포트킨이 무려 13년간이나 심혼을 기울여 다듬은, 아나키즘 사상에 생물학적 기초를 부여한 명저이다. 이 책을 통해 크로포트킨은 단적으로 생물계 진화의 요인으로서 생존경쟁과 함께 상호부조의 원칙이 있다는 것을 실증한 것이지만, 그가 왜 이런 착상을 하게되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19세기 후반 유럽의 지적사조의 흐름을 염두에 새겨 둘 필요가 있다.
1860년을 전후한 5, 6년 사이에 유럽 과학계의 각종 분야에 나타난 저작들은 인간의 자연관, 생명관 특히 사회생활에 관한 견해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변혁을 가져오게 했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것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다. 『종의 기원』을 통한 다윈의 일관된 사상은 동물의 각 군(群)간에 먹이와 안전을 구하고 또 자손을 남기기 위한 본래의 경쟁, 본래의 투쟁이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과도한 번식에서 자연히 경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자주 말하고 ‘생존경쟁은 동종의 동물 및 그 변종 사이에 가장 격렬하다.’고 단언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난 후에 다윈은 『인류의 기원』에서 ‘생존경쟁’이란 개념을 훨씬 광범위하고, 비유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각개 개체가 지닌 사회적 본능이 자기보존의 본능보다 훨씬 강력하고 영구적일뿐더러 훨씬 활발하다’는 생각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후의 진화론자들에 이르러서는 무턱대고 동물계가 피에 굶주린 아수라장이며, 개개의 이해를 위해서 끊임없이 잔인한 투쟁을 하는 것이 생물계의 원칙이라고까지 논하게 되었다. 다위니즘의 가장 유력한 설명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는 토마스 학스리는 생존경쟁을 이런 좁은 의미로 고정시키고, 다시 그것을 인류사회에까지 적용시키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생존경쟁과 그것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원시 인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약한 자, 가장 어리석은 자는 멸망하고, 가장 흉포한 자, 가장 표독한 자, 즉 주위 환경과 대항하는데 가장 적합한 자가 살아 남는다. 인생은 끊임없는 자유투쟁의 싸움터다.’ 이와는 별도로 “종합철학”의 완성자 허버트 스펜서는 생존경쟁의 의미를 전혀 부당한 방식으로 이해하여 서로 다른 종의 동물간의 싸움(늑대가 토끼를 잡아먹고, 조류가 곤충을 먹으며 살고 있다는 등의)뿐만 아니라 동일종에 속하는 개체간에 있어서의 생존수단을 둘러싼 격렬한 싸움으로서의 생존경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원시인을 <이빨과 발톱을 갖고서> 이웃사람이 쥐고 있는 식물의 최후의 한 조각까지 탈취함으로써 생존을 유지하는 야수와 같은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오류에 빠진 것은 스펜서만이 아니었다. 홉스에 충실한 19세기의 전 철학은 원시인을 금수의 무리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들은 소가족으로 분립하여 살며, 상호간에 식물과 여자를 구하여 싸우고 있어, 자비로운 권력이 나타나서야 비로소 그들 사이에 평화가 도래한다는 견해를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우리나라 민족운동계에도 구한말 이후 이런 유의 사회진화론이 흘러 들어와 소위 ‘민족자강운동’이 판을 친 적이 있었다. 일찌감치 그 비를 깨닫고 단재 신채호 같은 분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의해 아나키즘의 독립운동 노선을 채택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로만 볼 수 없는 일이다.
베델부르그 대학에서 이수학을 전공했고, 러시아지리학협회 정회원이기도 했던 크로포트킨은 일찍부터 모든 사물을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는 믿지 않으며, 잠시도 사실의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과학적 탐구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데서 그는 이미 시베리아 탐험시절부터 다위니즘의 소위 생존경쟁설에 의혹을 품고 있었고, 또한 상호부조라는 사상이 그의 넓은 가슴 속에 싹트고 있었음을 이 저서의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의 젊은 시절 동부시베리아와 북만주를 여행했을 때,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동물생활의 두 측면이었다...........’
1883년 프랑스의 그레르보감옥에 있을 때, 크로포트킨는 베델부르그대학 총장 게스렐이 러시아박물학자대회에서 행한 「상호부조의 법칙에 대해서」라는 발표 원고를 뒤늦게 받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게스렐의 의견은 자연계에는 상호투쟁의 법칙 외에 상호부조의 법칙이 있는데 이 후자의 법칙 쪽이 생존경쟁 상의 성공을 위해서나 종의 진보적 진화를 위해서도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게스렐의 강연은 다윈의 「인류의 유래」 중에서 논한 사상을 조금 더 부연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더구나 그는 1881년 아깝게도 일찍 세상을 떴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이 사상을 한층 확대 발전시키는 것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곧 자료 수집에 나섰다.
1888년 학스리가 생존경쟁의 전투적 선언이라 할만한 「생존경쟁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발표했을 때, 크로포트킨은 이것을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이 이론을 근본적으로 반박하는 붓을 들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주위로부터의 독려도 큰 격려가 되었다. 1890년부터 7년간 5차에 걸쳐 『19세기』지에 연재한 그의 「상호부조론」은
1. 동물간의 상호부조,
2. 원시인의 상호부조,
3. 미개인의 상호부조,
4. 중세도시의 상호부조,
5. 근대사회의 상호부조
등 5편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지는데 다시 6년을 소요하고 있다.
그 내용에서, 크로포트킨은 곤충에서 최고의 포유류에 이르는 전 동물계를 통하여 ‘고립한 또는 소가족으로 생활하는 종은 비교적 적고, 그 수는 한정되어 있다.’고 시작한다. 종종 그러한 종은 퇴화하는 종에 속하고, 또는 자연의 균형을 인간이 파괴하는데서 만들어진 인위적 상태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 자신이나 다른 과학자의 인상깊은 일련의 관찰에 의하여 보여주듯이, 사실상 상호부조는 보다 번영하고 있는 종들에 있어서의 법칙으로서 나타나있고, 그것은 실제로 진화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그는 논증했다.
사회생활은 가장 약한 동물, 가장 약한 새, 그리고 가장 약한 포유동물로 하여금 그들의 가장 무서운 맹금이나 맹수에 저항하게 하고, 또는 그 공격에서 그들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끔 한다. 그것은 장수를 보장한다. 그것은 종이 정력의 낭비를 가장 적게 해서 자손을 가꾸고, 출산율이 극히 낮다하더라도 그 수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한다. 그럼으로 힘이나 민첩함이나 보호색이나 교묘함이나 공복과 냉한에 대한 내구력이 개체 또는 종족으로 하여금 이런 환경에서 최적자가 되도록 한다는 다윈이나 월레스의 의견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하한 환경 아래서도 사회성을 생존경쟁의 최대의 무기라고 주장한다. 자진해서 사회성을 버리는 종의 운명은 반드시 멸망한다. 그렇지만 단결의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동물은 지적 능력을 제외하고 비록 다윈과 월레스가 열거한 능력의 하나 하나에 있어 다른 동물에 떨어져있다 할지라도 생존하고 다시 진화할 기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고찰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크로포트킨은 다음과 같은 관찰에 의하여 원시인은 생존을 위하여 부단히 닥치는대로 투쟁하고 있었다고 하는 학스리의 견해에 반대한다. 즉 실제의 원시사회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같은 법률대신에 협동과 상호부조를 확실케 하는 관습과 타부 속에서 생활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로운 요구가 새로운 비약을 인류에게 촉구하게 되었고, 지역(촌락공동체)과 직종(길드)이 이중의 망상으로 얽혀 도시조직을 출현케 했다고 크로포트킨은 주장한다. 더욱이 길드는 일정한 기술과 직업의 공동수행에서, 또는 상호지지와 상호방위의 필요에서 중세 제도시의 부유한 코뮨생활을 상호부조 세계의 정점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로마제국을 본뜬 개인주의적 국가의 발달이 상호지지를 위한 중세도시제도를 송두리채 힘으로 때려부셨던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런 양상이 오래 계속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여러모로 증명하기에 힘쓴다. 요컨대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이지와 심정에 깊이 뿌리내린 인간 연대의 감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4. 크로포트킨의 말년과 러시아 혁명
크로포트킨의 자전 “한 혁명가의 생애”는 유감스럽게도 1899년 57세의 시점에서 끝막았고, 그후 사망하기까지 20여 년 동안이 공백으로 남아있다. 특히 혁명으로 귀국한 후부터의 크로포트킨의 생활은 볼셰비키정권에 의해 완전히 역사의 암흑부분으로 봉인되어 드러난 것이 별반 없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이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평가했으며 무엇을 구상했는지 등이 완전히 망각지대에 놓이게 되어, 소련이 붕괴된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제대로 판명된 것이 없는 상태다. 다만 그후 외부로 탈출한 엠마 골드만 등 측근 아나키스트들의 증언 또는 N. M. 비르모봐 등 러시아 연구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크로포트킨의 말년의 면모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여기에 그 개략적 윤곽을 조립해 독자의 참고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귀국 후의 크로포트킨의 마지막 여생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을 이루는 러시아혁명이 볼셰비키 정권의 등장으로 어떻게 변질되어 갔으며, 거기에 대응하는 아나키즘 진영의 입지는 어떠했던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유부단한 케렌스키 체제를 무너뜨리고 권력탈취에 성공한 볼세비키는 그때부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원래의 혁명적 목표보다도 모든 역량을 정치적 권력의 기반 강화에 집중시키는 극히 현실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기 위해 레닌은 헌법제정회의 소집에 대한 공약을 얼버무리는가하면 대중의 염전사상에 편승하여 브레스트 리토브스크 강화조약을 협박적으로 밀어붙이는 인기전술을 써서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반을 닦았다. 노동자는 공장을 탈취했고, 농민은 토지를 확보했으며 병사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볼셰비키는 이 모두가 자기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반혁명이 복권하고 혁명은 실패했으리라고 선전했다.
아무튼 볼셰비키는 방대한 대중이 혁명편에 서줌으로서 비로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권력을 잡고 나자,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과도적 독재권력이 필수적이라는 지론을 내세운다. 이 지론에 대한 레닌의 성실성에는 전혀 의심이 갈 여지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조작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갖는 속성 상 불가피하게 특권적 지위가 부여되게 마련이라는 것이 볼린의 주장이다.
‘권력은 혁명을 인계 받아 혁명의 주인이 됨으로서 관료적 강제장치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지배하고 착취하는 데 흥미를 느끼는 모든 종류의 분자를 재빠르게 자기의 주위에 끌어들여 조직화한다. 이리하여 권력은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점차 경제적으로 새로운 특권계급의 제도를 형성한다. 즉, 지도자, 관료, 장교, 경찰 등은 그 새로운 특권계급 제도에 의존해 있으며, 그 때문에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원리”나 “정의” 같은 것을 백안시하고 오직 특권계급을 그 밖의 모든 것으로부터 방위하는 일에만 충성을 다한다. 그것은 도처에 불평등의 씨를 뿌려 전 사회기구에 병독을 퍼트리며, 그 결과 대중은 그러한 병독과 싸우다가 지쳐버려 점점 소극적이게 되고, 새로운 가면을 덮어쓴 부르조아적 원리에의 복귀에 호의를 갖게 된다.’
1918년 봄까지 볼셰비키 권력은 정치적 국제적 조직―경찰, 군대, 관료기구―을 모두 상당한 수준까지 완비했다. 독재제도의 기반이 완비됨에 따라 그 기구는 그것을 창설하고 유지해 가는 사람들의 완전한 종속물이 되어버렸다. 볼셰비키는 이 고도로 훈련되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고압적 조직의 힘으로 각처에서 야기하는 봉기시도를 분쇄하고 국민대중의 무조건 복종과 소극성을 확보하게 됨에 따라 공략방향을 아나키스트 쪽으로 돌렸다.
10월 혁명 때까지 볼셰비키의 아나키스트에 관한 정책은 “투쟁”과 “파괴”의 측면에서 이용할 수 있는 한 이용하고 필요하면 무기도 대주지만, 잠시도 감시를 늦추지는 않는다는 그런 태도였다. 그러나 혁명에 승리하고 권력을 잡은 다음부터는 태도를 일변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철저한 소탕작전으로 나왔다. 레닌 정부는 브레스트 리토브스크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좌파 반대세력(좌파 사회혁명당원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고 본 것이다.
1918년 4월 12일 밤 중무장을 한 군대와 경찰은 모스크바의 전 아나키스트 조직본부(모스크바 아나키스트 연맹을 위시한)를 포위 습격했다. 이와 함께 모든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도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습격이 있었다. 2주간에 걸친 ‘아나르코 산적’에 대한 총검거를 끝낸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정부는 드디어 쇠빗자루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을 일소했다’고 호언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 최초의 검거는 아직 서막이요,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문제는 도시의 식량문제에서 발단되었다. 그 원인을 농민의 이기심, 부르조아 정신, 도시에 대한 적개심의 발작 때문으로 돌린 레닌은 초기의 자유방임정책을 버리고 경직된 국가권력을 농민 억압에 총동원했다. 수확물의 공출이 강요되고 자유매매가 금지되었다. 투기억제를 명목으로 철도에도, 가도에도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었으며, 수 천명의 농민 또는 시민들이 매매규제법을 범한 죄목으로 체포되고 총살당했다.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농민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기아와 궁핍에 허덕이는 도시 노동자는 노동자들대로 울분에 떨며 다시 또 거리로 나왔다.
필연적으로 아나키스트는 재차 그 공공연한 투쟁에 있어서 기만되고 압박 받는 대중과 일체가 되었다. 그들은 노동자를 지지하고 노동자와 그 조직을 위해서 정치가의 개입 없이 제품을 관리할 권리를 요구했다. 아나키스트는 또한 농민을 지지하고 그들을 위해서 독자적으로 자유로이 노동자들과 거래할 권리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자와 농민 양자의 이름으로 혁명에 있어서 그들이 성취했으나 볼셰비키 권력에 의해 무효로 된 것의 반환, 그리고 특히 ‘참된 자유로운 소비에트 제도’의 부흥, 모든 ‘혁명적 조류의 정치적 자유’의 재건 등등을 요구했다. 요컨대 그들 아나키스트들은 1917년 10월 획득한 것을 인민자신 곧 노동자와 농민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1918년 봄의 검거선풍에 이어 아나키스트는 몇몇 지방조직에서도 습격을 받았다. 볼셰비키가 발을 들여놓은 지방이면 어디서나 아나키스트 그룹이 추방당하고 투사들이 체포되었으며, 출판물은 압수당하고, 강연회는 금지되었다. 이들의 행위는 모두 경찰, 군대 또는 행정명령으로 집행되었으며 죄명도 법적 절차도 없이 멋대로 자행되었다. 이와 같은 행동의 표본은 1918년 봄 트로츠키가 임의로 세운 선례에 의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1919년 여름 이른바 마프노 운동의 불법화를 선언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네스트로 마프노의 농민자위군이 소탕됨과 동시에 러시아 전국토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체포되었고 대개의 경우 적군 장교의 명령만으로 즉결 총살되었으며, 아나키스트 조직에 대한 박해는 주로 첵카나 자포자기적인 일부 적군 병사에 의해 저질러졌다. 투사들은 남녀 구분 없이 범죄인 취급을 당해 난폭하게 다루어졌으며, 그들의 건물은 파괴되고 서적은 불살라졌다. 그 해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조직이 습격을 당했고, 동년 세모에는 러시아내 아나키스트 운동이라고는 겨우 잔당만 남을 정도였다. 바로 여기에 기묘한 사태가 벌어졌다. 1920년 10월 초 소비에트 권력은 우파 반혁명세력인 피요트로 우랑게리 남작의 ‘백군’과 대결하게 되었다. 이 싸움에 밀리게 된 데서 적군은 혁명적 마프노 농민 자위군의 협조가 필요해졌고, 마프노와 다시 화해하여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 동맹의 협정에 따라 투옥되거나 추방당한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석방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어디서나 공공연히 활동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 덕으로 기소가 각하되고 몇 사람의 투사가 석방되었다. 그런데 우랑게리가 패퇴하고 위기를 넘기자 소비에트적군은 태도를 표변하여 마프노군을 역습하고 다시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격렬한 탄압으로 나타났다.
11월 말 당국은 합법적인 회의를 열려고 하리코프로 모여든 각지 아나키스트들을, 패퇴하여 은신중인 우랑게리와 함께, 일망타진하였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지역에서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섰으며, 마프노 농민군의 양친과 처자들까지 인질로 잡아갔다. 그것은 흡사 조금 전에 부득이 취한 양보에 대한 복수심으로 치를 떠는 것 같았으며, ‘아나키스트라는 나쁜 인종’을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멸종이라도 시킬 기세였다.
이 파렴치한 처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볼셰비키 정부는 마프노와의 결렬이 그가 범한 대역죄 때문이었다고 변명하고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대음모’를 기묘하게 날조해 퍼뜨렸다. 마프노측 대표는 소비에트정부에 대해 투옥 또는 추방된 인원수를 줄잡아 20만 이상으로 확인하고 이들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그들 중에 얼마만큼의 ‘의식적인 아나키스트’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 이 시기에 여러 지방에 있는 비공개의 비밀감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총살되거나 행방불명으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21년 3월 크로슈탓트 수병 반란 때 볼셰비키 정부는 아나키스트와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에 대한 또 다른 마녀사냥을 감행했고 이에 대해 감히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려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투옥시켰다. 그것은 소비에트 정부가 국외에 퍼뜨린 거짓말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실상 혁명 초기의 아나키스트 세력이란 보잘 것이 없을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다. 1917년 7월 초 해외망명으로부터 귀국하여 베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볼린은 볼셰비키의 선전물이 거리마다 덕지덕지 나붙은 것에 놀랐다며 당사의 아나키스트 진영의 실망스러운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수도에 단 하나의 아나키스트 신문도 어떠한 아나키스트 연설도 접한 것이 없어 실망했다. 겨우 두서너 개의 극히 초보적인 아나키스트 그룹이 있기는 했다. 그리고 크론슈탓트에는 약간 영향력 있는 소수의 아나키스트가 있었다. 하나 이들의 조직은 아직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서도, 정력적인 볼셰비키 프로파갠더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유효한 활동을 할만한 힘을 갖지 못했다. 대혁명이 일어난 지 5개월이 되는데도 단 하나의 아나키스트 신문도 연설회도 수도에서 볼 수 없었다.’
이렇게 빈약하고 불리한 상황이었는데도 아나키스트가 순식간에 거의 도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되고 볼셰비키로 하여금 무력으로 아나키스트 정벌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 요인은 무엇이었던가? 정치적 국가나 정부 또는 여하한 독재제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변혁하려는 사상이 대중에게 먹혀들기 위해서는 프로파갠더에 의한 계몽과 함께 상당한 시간과 역사적 경험이 필요했다. 이런데서 초기에는 지극히 미약할 수밖에 없었던 아나키스트 사상의 영향력이 대규모 사건이 돌발하고 확대되어감에 따라 그 세가 증대되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추세였다. 1917년 여름 아나키스트들은 한정된 인원에다 경제적 약점, 조직의 미비에도 불구하고 말과 행동만으로 농민운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또한 10월 봉기 훨씬 이전에 각처에서 노동자가 공장의 경영권을 탈취하고 자기관리를 시도했을 때,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의 편을 들었다.
10월 혁명 과정에서 아나키스들은 베트로그라드의 크론슛타트 수병활동, 모스크바에서의 도빈스키 전투, 그리고 프레스니아 시가전에서 수십명의 희생자를 낸 노동자들의 가두투쟁 등을 통해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여기서 아나키스트는 새로운 공산당 권력에 대해 사상 및 방법상의 이견에 따라 결별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대목적을 위해서는 계속 인내와 헌신으로써 온갖 지원을 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진작에 예견했던대로 헌법제정회의가 혁명의 장애물이 되었을 때 그 해산의 물꼬를 튼 것이라든지, 1919년~20년 사이 데니킨 우랑게르 등 백색반혁명군을 남부의 우크라이나에서 마주쳐 노동자, 농민의 빨치산 부대와 함께 무수한 희생자를 내가며 혁명방위의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다름 아닌 아나키스트였다.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는 동부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의 코르자크 해군대장에 대한 전투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거기서도 많은 투사와 동조자들을 잃었다.
도처에서 아나키스트를 포함한 빨치산 부대는 정규의 적군보다 많은 일을 했으며 위기에 몰린 정부군을 구원한 것은 언제나 아나키스트 빨치산 부대들이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아나키스트는 사회혁명의 근본원리, 즉 참된 해방을 목표로 전진하는 노동자, 농민대중의 행동의 독립과 자유를 방위하는 데 희생이 되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혁명에의 아나키스트의 참가는 비단 전장에서의 활약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권력 사회건설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노동자 대중에게 퍼뜨리려고 애썼다. 이런 주의주장을 창도하고 가능한 한 실천에 옮기기 위해 기관지와 문헌을 출판하고 유포했다. 당시의 가장 활동적인 아나키스트 조직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아나르코 산디칼리스트 프로파갠더 연합>
1917년 여름에서 1918년 봄에 걸쳐 수도 베트로그라드에서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 사상을 노동자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한 단체, 나중에는 잠시 모스크바에서도 활동. 「고로스 도루우다」(노동자의 소리)라는 기관지를 주간으로 발행했고,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 인쇄소도 설립했으며, 뒤에는 일간으로까지 발전시키는 성장세를 보였다.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자 온갖 방법으로 이 활동 전반에 제동을 걸었으며, 특히 출판활동을 방해했다. 마침내 1918년에서 19년 사이 볼셰비키 정부는 프로파갠더 연합을 완전히 해산시키고 이어서 인쇄소도 폐쇄시켰으며, 관계자 전원을 투옥 또는 추방시켰다.
2. <모스크바 아나키스트 연맹>
1917년에서 18년에 걸쳐 모스코바와 그 근방에서 강력한 프로파갠더 활동을 전개한 비교적 큰 조직. 이 조직은 아나르코 코뮨주의적 경향의 일간지 「아나키」를 간행하는 한편 아나키스트인쇄소를 가지고 있었다. 노동조합보다는 행동, 변화, 건설의 기초로서 자유코뮨과 그 연합을 중요시하는 점에서 생디칼리즘과는 입장차이가 있었다. 1918년 4월 소비에트 정부에 의하여 피습 당한 후에도 그 운동의 1부가 1921년까지 잔존했으나, 크로포트킨 사망 후, 연맹의 최후의 발자취마저 지워져버리고, 여기에 관여했던 투사들이 모두 압살 당했다.
3.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조직 나바도연맹>
1918년 말 우크라이나에서 창설.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볼셰비키가 아직 독재권을 행사하기 이전의 시기였으므로 나바도연맹은 도처에서 적극적, 구체적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비권력적 사회구조 형태를 위한 직접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우크라이나 도처에서 아지테이션과 프로파갠더를 통한 아나키즘 사상의 보급에 크게 공헌했다. 그 주요한 기관지인 「나바도」(경종)는 유파를 초월하여 우크라이나 모든 아나키스트그룹이 총단결할 것을 호소하고, 또한 범러시아 아나키스트연맹도 창설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이 연맹은 중앙의 탄광지대에서도 활동을 전개하여 혁명적 빨치산, 농민, 도시노동자 그리고 이 운동의 중핵인 마프노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연맹은 백색 반혁명군과의 싸움에 활발히 참가했으며, 이들과의 전투에서 가장 우수한 투사들이 거의 모두 희생되었다. 나바도연맹의 이런 활동을 볼셰비키정부가 그대로 방치해 둘 리 만무했지만, 우크라이나의 특수한 상황으로 해서 그들은 정부의 지령에 의한 거듭된 공격에도 잘 버티어냈다. 그러나 1920년 말 볼셰비키 관헌에 의한 최후의 공격으로 마침내 완전히 도륙을 당하고 말았다.
이들 3개 조직 외에 아나르코 개인주의와 같은 그룹은 생디칼리즘, 아나르코 코뮨주의 및 공산주의에 대해 다같이 회의적이었고, 오로지 새로운 사회의 기초로서 개인의 자유로운 협회만을 인정했었다.
이렇듯 상당히 큰 규모의, 그리고 상당히 광범한 지역에서 활약한 이들 조직으로 해서, 1917-18년에는 러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 아나키스트 그룹의 운동이나 조류가 번져나갔었다. 이들은 각처에서 혹은 독자적으로, 혹은 위에서 말한 3개 조직 중 어느 하나와 제휴해서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의 운동은, 주의나 전략상의 다소간의 상치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방향에서는 동일했던 까닭에 기회가 닿는 한 힘껏 혁명과 아나키즘에 대한 의무를 수행했으며, 노동자 대중 속에 반권력적 자유연합조직을 해산시키기에 주력했다. 그런데서 그들은 나바도 회의에서와 같이 3개 경향의 그룹이 일치해서 아나키스트연합운동을 전개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모두가 결국 볼셰비키 관헌의 잔학한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리지만.
1917년 2월 혁명 후 크로포트킨은 40여 년간의 망명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여생을 고국에 이바지하기 위해 귀국했다. 임시정부 수반 케렌스키는 국제적 혁명가로 이름높은 그를 역두까지 나가 맞아들였으며 각료직 취임을 제의함으로 자기정권의 권위를 높이려들었다. 사상을 배우려는 것보다도 단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그들의 심산을 모를 이 없는 크로포트킨이 거기에 동조할 이가 만무했다.
이에 앞서 크로포트킨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시 연합국의 대독선전을 지지하는 이른바 ‘16인 선언’을 발표하여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로 인해 그는 전쟁반대의 전통적 입장에 섰던 아나키스트 동료들과 사이가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동지들과의 관계가 다시 복원된 것은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였다. 정권탈취에 성공한 레닌정권은 어느 면에서는 아나키스트의 주장에 따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표방하는 볼셰비키의 저의를 간파하고 ‘이것은 혁명의 장송’이라고 예언했다. 과연 비밀경찰의 포악한 박해는 좌파 이외의 모든 사회주의 세력들에 대하여 가차없이 자행되었다. 아나키스트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크로포트킨은 재삼 레닌을 만나 권력의 장악 아닌 혁명의 대도로 나갈 것을 촉구했으며, 1920년 1월에는 공개서한으로 볼셰비키의 인질정책을 준열히 규탄했다.
‘.........새로운 나라의 건설자가 되고자하는 당신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불쾌한 행동과 이렇게 수긍할 수 없는 방법의 사용에 동의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어쩌면 당신은, 인질의 억류로써, 당신의 사업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당신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것이나 아닐는지 의심스럽소........ 그처럼 당신은 권위주의적 관념의 포로가 되셨단 말입니까. 유럽코뮤니즘의 지도적 위치에 있으시면서, 당신은 부끄러운 방법으로 당신이 방어코자하는 사상을 더럽힐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에 앞서 크로포트킨은 1919년 어느 날 본디 프르헤비치의 집에서 레닌과 단독회견을 한 적이 있었다. 본디의 말에 의하면, 레닌은 그 자리에서, 아나키스트에 대해 무자비한 처단정책을 쓰던 것과는 태도를 달리하여, 크로포트킨의 저서 『프랑스대혁명사』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정부가 이 책을 수십 만 부 인쇄하여 전국 각 기관에 넓이 보급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자기를 통해 표명하더라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이런 출판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정부인쇄소가 아닌 소비조합과 같은 임의기관에서 취급케 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이에 대해 레닌은 ‘물론 그렇게 희망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지요. 우리들은 전적으로 당신이 편하신 형식으로 출판하겠습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은 앙연히 되받아 ‘우리들이란 누군가요? 정부 말인가요?’ 레닌은 약간 허를 찔린 듯, 그러나 크로포트킨을 향하여 눙치면서, ‘아니 그럴 리는 없습니다. 정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자유출판사들이 있으니까요. 문학가, 대중교양에 종사하는 노동조합 등....’ ‘그렇다면 별문제지만....’
이 약속은 영원히 공수표가 되고 말았지만, 레닌의 크로포트킨에 대한 예우는 언제나 각별한 데가 있었던 것을 짐작케 한다. 언뜻 보기에 크로포트킨이 조용한 모스크바 교외의 도미도로프에 은거하게 된 것은 혁명원로로서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게도 했다. 사실 그렇게 해석하는 논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가당치도 않은 억측이라는 것은 위의 공개서한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로포트킨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혁명 러시아의 한 모통이에서, 볼셰비키와는 또 다른 진정한 혁명의 생애를 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폐렴으로 병사했다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압력을 받아 압살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크로포트킨이 죽기 바로 3개월 전 마푸노 농민운동의 근거지였던 그라이포레가 트로즈키에 의해 급습 당해 마지막 희망의 한 가닥마저 끊겨 버렸으며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체포 투옥 당하는 끔직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찍이 1918년 네스톨 마푸노는 모스코바에서 드미드로프로 반강제 이주를 해야할 팽팽한 시기에 노혁명가와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헤어지면서 크로포트킨이 던진 단 한마디 말이 불굴의 전사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전투에 감상은 금물이오. 희생정신, 불퇴전의 결의, 목적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모든 것을 이겨낼 것이니. 이점을 잊지 말고 건투하기 바라오!’
한편 이 젊은 투사에게서 받은 강렬한 충격이 노혁명가의 가슴에서 쉽게 지워질 수 없었음은 헤아리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때 이미 이 노소 두 거인의 개체로 체현된 반권력의 사상과 행동을 박멸하려는 볼셰비키의 음험한 포위망은 점점 더 좁혀들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 11월 마침내 마푸노 농민운동의 총본거지 그라이포레가 같은 동맹군이던 적군에 의해 도륙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런 충격적 소식에 접한 크로포트킨은 병이 도지지 않을 리 없었고, 그후 병상에서의 그의 마음을 졸이게 한 것은 언제나 아나키스트동지들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서였다.
크로포트킨이 모스크바 교외의 도미드로프에 이주한 것은 1918년 여름의 일이었다. 거처로 정해진 곳은 공원 뒤쪽 큰길가에 있는 옛 귀족의 저택이었다. 마을 외곽에 기차역이 있고, 거기서 길 윗 쪽으로 정갈한 과수원 한복판 담장으로 둘러싸인 집이었다. 주위에는 자작나무 고목들이 우거져 봄이 되면 산까마귀들이 모여 둥지를 트느라 부산한 풍경이었다.
옛 귀족의 집이라고는 하지만 원래가 별장용인데다 방이 다섯으로 크로포트킨은 북쪽 창이 달린 작은 방을 침실 겸 서재로 쓰고 있었다. 집에는 부인 소피아와 딸 알렉산드라 세 식구가 살고 있었으며 겨울에는 난방을 할 수 없어 방 하나에서 생활할 때가 많았다. 엠마 골드만의 방문기(1920년)에 의하면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은 크로포트킨이 매우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먹거리나 연료에 조금도 군색함이 없도록 보장한다고 되풀이 말했지만 막상 방문하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소피아부인이 식물학 전공지식을 활용하여 한 마리의 젖소에다 감자, 레터스 등 채소를 가꾸어 부식과 사료를 보태었고, 우크라이나의 동지들, 특히 마푸노가 이따금 특별식품을 보내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노인의 병환으로 인한 영양식문제만 아니면, 어떻게든 생활이야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이 소피아부인의 설명이었다는 것이다. 유럽 망명시절부터 심장질환으로 고생을 하는 크로포트킨은 휴식, 산책 등 비교적 규칙적인 일과생활에 의해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산책 때의 옷차림은 검은색 코트에 넓은 차양의 둥근 모자를 썼고, 손에는 단장을 들고 다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크로포트킨이 이주해와서 최초로 얼굴을 내비친 곳은 도미드로프 협동조합연합회 사무실이었다. 그곳에는 도서실과 향토박물관 시설이 있었으며 그는 2층의 도서실에 자주 드나들었다.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 도미드로프는 크로포트킨으로 하여금 새삼 깊이 생각할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데는 그곳 조합원들과의 인적교류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여기서 크로포트킨은 사회주의 목표를 달성할 점진적이고도 가장 확실한 방도를 협동조합에서 발견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특히 높은 기술수준을 갖춘 영국식의 수공업협동조합을 끌어들일 가능성에 대해 그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도서관에 드나든 직접적인 목적은 『윤리학』 집필을 위한 참고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시골 도서실에서 전문서적을 찾기는 어려웠고, 기껏 백과사전 정도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정 필요한 자료는 모스크바에 나가는 인편에 부탁해서 구해오기도 했던 것으로 전한다.
크로포트킨이 이사왔을 무렵 향토박물관은 마침 개설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상냥한 크로포트킨은 곧 상담역을 자담하고 나서서 지리학자, 지질학자로서의 본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여기저기서 전시할 물건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1918년 말경부터는 당지 협동조합 대의원 집회에 초대되어 혁명론이나 협동조합론에 대해 연설을 하게 되었다. 어느 때는 혁명주기설을 주장하면서 러시아혁명과 같은 변혁은 120-30주년 주기로 발생하는 것이어서 그럴 때마다 생산력과 지적 수준이 눈에 띠게 제고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러니 자유원리에 기초한 생활을 실현하기 위해 조합원들은 각자가 소지한 최대의 역량과 지식을 투입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런 집회에 크로포트킨이 마지막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0년11월 14일 연합회 창립5주년 기념집회 때였다. 크로포트킨은 그 자리에서 극히 주목할만한 화제를 끄집어내어 주위를 긴장시켰다. 즉 자기는 1890년대부터 이미 생디칼리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계적 규모의 노동조합국제연합 조직을 제창한 바 있었다. 1905년의 러시아혁명 때는 아나키스트가 소비에트에 참가하여 새로운 생디칼리즘 조직을 성립시킬 것을 기대했었다. 그 새로운 기대가 도미드로프에서의 생활체험을 매개로 러시아농촌의 협동조합 조직에 매력을 느끼게된 연유였다고 자신의 입장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협동조합은 소비에트권력이나 볼셰비키 정권에 의한 관리체제의 중심부에 끌려들어 가서는 안되며, 지방적 코뮨의 자치가 확보된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천명했다. 그는 프랑스의 생디칼리즘의 예를 들어 특히 그 반(反)중앙권력성에 주목할 것을 강조하고, 러시아농촌의 지방협동조합이 지방소비에트정부의 개입을 배제하는 생활양식으로 정착하여 자유로운 공동사회로 발전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점에서 크로포트킨은 이곳 도미드로프 또한 자기가 최후의 안식처로 의지할 곳이 못됨을 직감하게되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당지 협동조합 지도자들이 모조리 체포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실인즉 그보다도 크로포트킨을 더한층 고민에 빠지게 한 원인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크라이나에서의 마푸노운동의 귀추에 대해서였으니, 그 당시가 바로 마푸노가 볼셰비키 적군과 협력하여 우랑게르 백군을 괴멸시키던 시점이었다. 크로포트킨이 이 전투의 진전상황이나 적군과의 일시적 군사협정내용에 대해 어디까지 정확하게 파악했고, 분석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단 1개월 전까지만 해도 적군과 마푸노 사이는 쫓고 쫓기는 관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니, 공동의 적이 소멸된다는 것은 동맹군끼리가 다시 적대관계로 되돌아갈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케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크로포트킨의 최종연설이 있은 지 불과 10일 후 일찍이 수만을 과시하던 용맹스러운 마푸노 농민군은 적군의 기습으로 ‘혁명의 적’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괴멸의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이 비극적인 소식을 노혁명가가 몰랐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크로포트킨이 모스크바를 떠난 것은 결코 자기 뜻만은 아니었다. 물론 조용한 곳에서 집필하고 싶은 심정이야 언제고 어찌 없었겠는가. 그보다도 당시 크로포트킨이 놓였던 정치적 처지는 1918년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 놓였던 전반적 정치환경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러시아혁명사에서의 1918년은 정히 혁명과 테러리즘이 격렬하게 교차하던 한해였으니 말이다.
1917년 3월 재빨리 모스크바에 모여든 여러 계통의 아나키스트들이 결성한 ‘모스크바연맹’은 볼셰비키에 의해 잇달아 남조되는 정부기관, 특히 감찰역할을 하는 인민위원회 조직을 비판했으며, 그에 따른 ‘코미싸르의 지상권’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이러한 볼셰비키정권에 대한 비판캠페인은 프레스트 리토프스크조약의 체결로 최고조에 달했으며, 국경 근처에서는 흑색방위대를 비밀히 조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긴박한 분위기가 감도는 1918년 4월 첵카 비밀경찰은 행동을 개시하여 모스크바의 아나키스트본부를 제압하고 500여명을 검거 투옥시켰다. 그리고 5월에는 샤피로 등의 「노동자의 소리」지 편집국도 폐쇄 당했다. 이런 사태 속에서 이해 여름에는 레닌의 암살미수사건 등 요인에 대한 개인 테러가 격발되었으며, 지하로 잠입한 아나키스트 일부는 ‘다이너마이트 시대’의 도래를 공언했던 것이다.
이렇듯 착종하는 정치적 긴장상황은 아나키스트의 이념적 지도자로 지목되는 크로포트킨을 국외자로 방치해 둘 리가 없었다. 더욱이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잇달아 터지는 혁명과정 한복판에 뛰어들어 중개자 역할을 할 위치도 아니니, 방관자의 입장에 몰릴 수밖에 없는 크로포트킨의 심경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었다. 더욱이 그때까지 개인테러를 반대해온 크로포트킨이었지만 이 준엄한 혁명현실을 나몰라라 할 수만도 없는 것이 아니던가.
수도 모스크바에서 벼랑 끝에 홀로 선 크로포트킨의 유일의 위로수단이 집필활동이었다. 특히 ‘연합주의자연맹’이 기획한 『연합주의 백과사전』 전 4권에 정력적으로 관여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그 제 1권 간행을 목전에 두고 돌연 도미드로프로 이주하게 된 경위만 보아도 그의 이주가 자의만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일체 그런 사실에 대해 군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이 도미드로프에서 『혁명적 윤리학』을 집필한 것이 미완으로 끝난 사실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상호부조론』의 후속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혁명사』를 집필한 적이 있는 크로포트킨이 안전에 전개된 러시아혁명의 현실을 감안하여 민중자결의 또 다른 “러시아혁명사”를 구상했던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없지 않아 궁금증을 더하게 했다. 아무튼 볼셰비키혁명에 비판적 관점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본론은 마침내 햇볕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조용하고 시간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도미드로프에는 그가 최후의 대저를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져있지 못 했다. 모스크바에서처럼 많은 참고문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곁에 협력해 줄 사람도 없었다. 초기에는 협동조합 타자수가 호의적으로 타자를 쳐주었으나 그녀가 퇴직하여 귀향한 후 그것도 어려워졌다. 돈을 주고 타자를 맡길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1920년 5월부터는 거의 스스로 정서작업을 했다.
이럭저럭하는 가운데 죽음의 조짐을 잉태한 최후의 날들이 닦아왔다. 산책을 나가지만 가슴을 찍어누르는 고통 때문에 마음놓고 걸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새해부터는 무리한 외출이 탈이 되어 폐렴이 덮쳤다. 병상을 돌보던 딸 알렉산드라의 급보로 1월 19일 모스크바에서 6명의 의사와 1명의 간호사가 도착했다. 레닌과 줄이 닿는 본디 프르헤비치의 주선에 의해서였으며, 그 자신도 직접 도미드로프로 달려왔다.
그러나, 당시 간호사의 증언에 의하면, 크로포트킨은 환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의연한 데가 있었으며 그 무엇인가를 늘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색이 극점에 달하면 쓰다 비켜둔 원고를 다시 펼쳐, 다시 읽고 다시 쓰고 하더라는 것이다. 하다 남은 일이 최후까지 머리에서 떨쳐지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그보다도 병상에서의 크로포트킨이 더욱 괴로움을 느낀 것은 자신의 무력감과 회의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 혁명의 부정적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 러시아민중을 위한 자유코뮨의 세계를 개척해 나갈 것인가. 글을 쓴다고 하는 자기에게 남겨진 최후의 무기에 의해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러한 자책감에다 골똘히 파고드는 상념으로 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 ‘아나키즘적 코뮨의 장래계획’에 대해 떠오르는 착상을 글로 옮기려고 밤을 지새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허탈에 빠진 듯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크로포트킨의 병세는 일진일퇴하면서 날로 악화되었고, 마침내 1921년 2월 8일 새벽 3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크로포트킨 사망의 비보에 접한 측근의 아나키스트들은 곧 행동에 나서 장의위원회(위원장 알렉산더 버그만)를 발족시키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소식을 전세계에 알렸다. 장의절차는 허세를 싫어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동지장으로 치루기로 했고,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차단했다. 장례식은 모스크바에서 치루기로 했고, 그를 위해 도미드로프 주민들의 애틋한 전송을 받으며 시신을 모스크바로 옮겼다. 수도에 도착한 영구는 조문을 받기 위해 노동조합회관에 2일간 안치되었으며, 10월 혁명이래 초유의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장의위원회는 장의 진행을 위해 최소한 두 가지 요구서를 내어 당국과 승강이를 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크로포트킨의 팜플렛 2점이 담긴 “기념 특집”을 발간하는 것이었는데, 당국은 선선히 허가하는 체 해놓고는 선의를 가장한 내용 검열을 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되도록 시간을 끌어 장례식의 효과를 반감시키려는 수작이 들어다 보였다. 낌새를 알아챈 장의위원들은, 단호히 직접행동으로 나서, 아나키스트의 인쇄설비에 붙여 놓은 봉인을 파기하고 “기념특집” 인쇄물을 장례 당일에 맞추는 데 성공했다.
다른 하나는 형무소에 수감중인 아나키스트들을 일시 가석방하여 고인과 마지막 고별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것인데, 레닌은 그러기로 약속하고, 공산당실행위원회의 판단에 따라 아나키스트들을 가석방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실무자로부터 모스크바 형무소에는 아나키스트가 한 명도 없다는 등 핑계를 대어 불응할 태도로 나오자 장의위원들은 단연코 들고일어나 레닌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한 공산당 제조직이 봉정한 조화들을 모조리 철거하겠다고 위협했다. 많은 외국기자들이 보는 앞이라, 다급해진 가메네프(첵카 총수)는 20분 이내에 석방할 것을 엄숙히 약속했다. 그로 인해 장례식은 1시간이나 지연되었고, 얼어붙는 듯한 추위에 떨면서도 군중들은 이 뜻하지 않은 볼거리에 흥미를 돋구었다. 마침내 첵카의 구치소에 수용됐던 7명의 아나키스트들이 군중의 박수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고, 마지막 떠나는 스승의 관을 메는 영광을 차지했다. 첵카 측은 파타키형무소에서도 아나키스트들이 풀려나 방금 오고있는 중이라고 보증했지만 그것은 끝내 허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모스크바 교외 ‘데빗찌묘지’까지 2시간에 걸친 긴 행진이 고인의 최후를 장송했다.
끝
크로포트킨 年譜
1842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탄생. 양친 모두 명문 귀족 출신으로 4형제 중 막내.
1846년(4세) 4월 모친 에카트리나 사망.
1847년(5세) 부친 알렉세이 재혼.
1852년(10세) 형 알렉산드로가 모스크바 육군유년학교에 입학.
1853년(11세) 모스크바 제1중학교 입학.
1854년(12세) 문필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일기를 쓰기 시작.
1857년(15세) 베델부르그 귀족유년학교 입학.
1861년(19세) 최초의 저작 엔 베 셸그노프 저 『프랑스와 영국의 노동프로레타리아트』 서평 간행. 수석 성적으로 상사계급 수여 받음.
1862년(20세) 5월 귀족유년학교 졸업. 6월24일 시베리아의 코자크기병연대에 부임. 9월 이르 크즈크 도착. 10월 『모스크바신문』에 「동시베리아의 길」이란 제목의 르포 기고. 바이칼호 주변 조사.
1863년(21세) 6월~9월 군량수송부대를 이끌고 아무르강을 처음으로 항행하고. 9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그 당시의 사고 보고를 위해 베델부르그 행. 일크즈크 귀임 후 동 시베리아총독 부속 무관이 됨.
1864년(22세) 4월부터 6월까지 대흥안령 조사여행. 아무르강의 니코라에스크까지 두 번째 여 행. 7월~8월 숭가리강 답사.
1865년(23세) 5월~6월 레나강 항행. 연안지역의 지질구조를 조사. 파돔산괴(山塊)를 거쳐 보이보강 유역으로 나옴. 7월~9월 오료크마 비침을 답사하고, 오료크마강과 비 침강의 분수령을 확인했으며 지질, 지리의 복합적 조사를 행함. 12월 러시아 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 수여 받음.
1867년(25세) 1월 군에서 퇴역. 4월 지진 계측장치를 실험. 시베리아를 하직. 가르가현의 지 질조사. 「레나강 여행」을 『리더스 시리즈』 제1호에 발표. 9월 베델부르그대학 이수학부 수학과에 입학. 「오료쿠마지방 여행」을 베델부르그 지질학협회 잡지 에 독일어로 발표. 형과 함께 페이지 저 「지질철학」을 번역.
1868년(26세) 러시아 지리학협회의 정식회원으로 선출됨. 오료크마 비침 답사관계자료를 정 리.
1869년(27세) 3월 베델부르그 자연과학자협회의 정회원에 선출됨. 빙하 등에 관한 연구논문 수 편을 지리학협회 잡지에 발표.
1870년(28세) 1월 모스크바 자연과학자협회의 명예회원에 선출됨. 또한 러시아 지리학협회의 자연지리학분과위의 사무국원이 됨. 북빙양에 군도가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추론. 후에 젬리아 프란쓰 요시프도라 명명됨
1871년(29세) 2월 지리학협회 분과위에서 러시아 북빈양의 탐험계획에 대해 보고. 7월~9월 . 핀란드와 스웨덴을 답사하여 고대빙결 흔적을 연구하고, 그 조사결과를 러시 아지리학협회 잡지에 발표. 핀란드의 농업사정에 대해 『농업신문』에 집필. 여행 중 자연지리학 분과위의 사무국장에 피선되었으나 취임를 사양. 부친 알렉세이 병사. 내무성의 9등문관이 됨.
1872년(30세) 2월~5월 해외출장 허가를 받아 스위스 여행. 아나키스트계의 쥬라연합 멤버와 접촉. 6월~7월 베르기 여행 귀국 후 베델부르그에서 혁명클럽인 ‘챠이코프스키단’과 접촉하고, 그 멤버 중의 한 사람인 그라프친스키와 특히 친해짐. 노동자들과 함께 혁명 프로파갠더 활동 전개. 스펜서의 『생물학의 기초』를 형과 함께 번역.
1873년(31세) 1월 경 챠이코프스키단의 강령적 수기 「미래체제의 이상 검토에 착수할 것인 가」를 집필. 「동시베리아 산악지개설」 「에니세이현 미느신스크 및 그라스노 얄스크 지역의 산악적 특질」, 「오료크마 비침 답사보고서」 등 간행.
1874년(32세) 3월 러시아지리학회에서 핀란드와 스웨덴에서의 빙하연구 발표. 바로 그 다음 날 체포되어 표트르 파우에르 요새감옥에 수감, 비밀경찰의 심문을 받음. 학회의 탄원과 구원서명의 덕분으로 옥중에서 빙하기 연구의 저술을 계속함. 니콜라이 대공이 독방의 크로포트킨을 방문. 스위스에 가있던 형 알렉산드로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급거 귀국했으나 또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됨.
1875년(33세) 감옥생활 중 류마티즘과 괴혈병에 걸림.
1876년(34세) 재판이 겨우 예심을 끝내고 결심으로 넘어감. 5월 병이 악화하여 감옥병원으로 지정된 니콜라라이 위수병원에 수용됨. 병상이 호전되자, 외부와 비밀리에 연락하여 탈주계획을 세움. 6월 마침내 병원을 탈출하는데 성공하고, 핀란드와 노르웨이를 경유, 영국에 도착하여 그라스고를 경유. 런던으로 이주. 영국에서 『네이쳐』지에 처음으로 집필. 그 동안 「빙하기의 연구」가 베델부르그에서 러시아지리학회에 의해 간행됨.
1877년(35세) 스위스의 쇼 드 폰을 경유하여 제네바로 옮김. 쥬라연합 기관지에서 일함. 3월 베르린에서 열린 파리코뮨 기념집회와 데모에 참가. 그 무렵 에리제 루크류를 알게 됨. 9월 헨드(베르기)에서의 아나키스트세계대회에 참석했다가 베르기 경찰에 쫓기어 런던으로, 다시 파리로 이주함.
1878년(36세) 프랑스경찰의 체포를 피해 다시 스위스로 돌아옴. 3월 소피 그리고리에브나 와 결혼하고 조용한 그라랑으로 이주. 이 에스 포랴코프와 함께 알프스의 빙하를 견학. 4월 쥬라연합의 『아방갸르드』지 협력.
1879년(37세) 2월 제네바에서 『르 레볼트(반역자)』지를 독자적으로 창간
1880년(38세) 에리제 루크류를 도와 『세계지리학대계』 편찬작업 협력.
1881년(39세) 7월 런던의 아나키스트대회 참석. 스위스로부터 국외 추방을 당해 영국으로. 『뉴캐슬 크로니클』지, 『19세기』지 등에 집필. 다시 프랑스로 들어감.
1882년(40세) 12월 프랑스 관헌에 의해 리용에서 체포됨.
1883년(41세) 1월 인터내셔널 가입의 죄목으로 리용에서 재판을 받음. 5년 금고형 언도를 받고 3월 그레르보 감옥으로 이송됨. 지식인들이 국제적 여론을 일으키고 석방운 동을 전개. 옥중에서도 『엔사이크로페디아 브리타니카』 및 『19세기』지를 위한 논 고 집필. 옥중에서 교양강연의 강사 역할을 함..
1884년(42세) 옥중에서 괴혈병과 말라리아에 걸렸으나 부인의 정성스러운 간호로 병세 호전.
1885년(43세) 에리제 루크류가 『반역자』지의 논설을 모아 『반역자의 말』이란 제목으로 편집하고, 자신의 서문을 붙여 간행. 보석을 위한 국제캠페인이 계속됨.
1886년(44세) 형기를 맞추기 전에 루이스 미셀과 함께 석방됨. 영국으로 이주. 망명한 차이코프스키단의 멤버와 친교. 7월 형 알렉산드로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자살. 10월 영국 최초의 아나키스트계 신문 『프리덤』의 발간에 참획. 11월 장녀 알렉산드라 탄생.
1887년(45세) 영국 스코트랜드지방에서 감옥과 아나키즘을 테마로 강연여행. 또한 영국 협동 조합 조직을 견학하고 연구하기 시작.
1888년(46세) 잡지 『19세기』지의 과학란 담당.
1889년(47세)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계기로 파리의 『반역』지를 시작하고, 각처에서 관련논고를 모아 게재.
1890년(48세) 『19세기』지에 상호부조론의 1부로서 최초의 생물학적 논문을 게재.
1891년(49세) 『반역』과 『19세기』지를 중심으로 정력적인 집필활동을 전개. 또한 유럽 각국어로 그 논고들이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
1892년(50세) 파리에서 『반역』지의 논문을 『빵의 약취』로 취합 간행.
1893년(51세) 영국학술협회 회원이 됨. 말라리아에 걸림. 런던 윤리협회에서 정의와 도덕에 대해 강연.
1894년(52세) 자연지리학에 관한 논문 수 편을 『지리학 저널』에 발표.
1895년(53세)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지리학대회에 참가.
1896년(54세) 파리의 『신시대』지에 대한 기고수가 늘어남. 『반역자의 말』이 각국어로 번역됨.
1897년(55세) 캐나다에서 열린 영국학술협회 총회 참가를 기회로 최초의 도미 여행. 캐나다 철도로 태평양 연안까지 여행. 『아트랜틱 먼스리』지의 요청에 의해 자서전 연재 시작.
1898년(56세) 캐나다 관찰의 결과에 따라 러시아에서 박해받는 도호볼 교도의 이주후보지로 추천.
1899년(57세) 자서전 『한 혁명가의 회상』이 단행본으로 간행됨.
1900년(58세) 영국의 중소기업을 조사.
1901년(59세) 제2차 캐나다, 미국 여행. 보스턴에서 러시아 문학사 강의. 가벼운 심장병 발작. 그러나 이 기회에 러시아에서 캐나다로 이주해온 도호볼 교도의 공동체 방문.
1902년(60세) 『한 혁명가의 회상』 프랑스어 판, 러시아어 판이 간행됨.
1903년(61세) 러시아 귀환의 향수에 젖음. 망명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빵과 자유』 지 발행 협력.
1904년(62세) 암스테르담의 반전대회에 축전을 쳐줌. 연말에 심장병 발작.
1905년(63세) 제1차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귀국을 고려했으나 결국 단념함. 여러 편의 러시아 혁명론을 발표.
1906년(64세) 8월 파리에서 『빵과 자유』신문을 발간. 10월 런던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대표자회의에 참석. 다음 해까지 처음으로 러시아어로 된 저작집을 준비했으나 제4권 간행으로 끝냄.
1907년(65세) 4월 런던에서 열린 왕립지리학협회 회의에서 유러시아 대륙의 건조화를 테마로 강연. 5월부터 6월까지 런던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대회가 열려 내빈으로 참석. 고리끼와 알게 됨. 여름쯤 『빵과 자유』지의 간행을 중지. 남해안의 브라이든에서 전지요양.
1908년(66세) S L파.(사회혁명당)에 의한 경찰스파이 재판에 참가.
1909년(67세) 『프랑스대혁명사』를 런던에서 초판 간행.
1910년(68세) 상호부조의 테마를 중심으로 『19세기』지에 집중적으로 집필.
1912년(70세) 세계 각지에서 고희(古稀)를 축하하는 기념집회 열림.
1913년(71세)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출간.
1914년(72세) 대 독일전을 지지하여 많은 논의를 야기시킴. 「현하의 정세에 대한 편지」가 『러시아신보』에 게제됨.
1917년(75세) 6월 스칸디나비아를 경유하여 베트로그라드로 귀국, 대환영을 받음. 케렌스키내 각의 각료 취임 종용을 거절.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정회의에 참가. 연합주의 자연맹 설립. 모스크바에 계속체류. 10월 혁명을 냉정하게 수용.
1918년(76세) 모스크바 체재중 마푸노의 방문을 받음. 6월 모스크바 교외의 도미드로프로 이 전. 도미드로프의 교원집회에서 강연. 현지 협동조합연합회의 회합에 참석. 향토 박물관 개관 협력. 『윤리학』 집필
1919년(78세) 빙하기에 대해 강연. 베드로그라드 명예회원에 추대됨. 『상호부조론』을 비롯한 그 때까지의 모든 저서를 입수하여 교정에 전념. 5월 레닌과 회견.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함.
1920년(79세) 4월 모스크바대학에 초대되어 지리학 강의. 지방박물관의 의의에 대해 강연. 8 월 ‘전술센터사건’ 재판에 반대하여 레닌에 항의. 11월 도미드로프 협동조합연합회 설립 5주년 기념집회에서 강연. 12월 제8회 전러시아 소비에트대회에 공개장을 발송하여 언론 출판의 자유를 강하게 옹호함. 심장병이 악화.
1921년(79세) 1월 중태에 빠짐. 2월 8일 심장질환에 폐렴까지 겹쳐 도미드로프에서 별세. 다 음 날 국내 각 신문에서 일제히 보도되고, 전세계에도 타전. 유해를 모스크바로 옮겼고, 노동회관에서 동지장.
1922년 최후의 미완 저작 『윤리학』이 모스크바와 베드로그라드에서 간행됨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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