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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kkccdd@hanmail.net
작성일 2015-10-07 조회수 3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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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대과학과 아나키즘, 아나키즘의 도덕 크로포트킨 저, 이 을 규 역

현대과학과 아나키즘,  아나키즘의 도덕

   

 

 

크로포트킨 저

이 을 규 역  

 

 

 

텍스트 해제 및 범례

 

이 논문은 처음 1901년에 러시아어로 발표되었다. 그 후 영어판 및 프랑스어판에서는 저자 자신이 상당히 자유로운 의역意譯을 하고 있다.

1921년에는 저자의 감역監譯이란 형식으로 러시아판이 나오고 있다.

상기의 각판 중에서 프리덤사의 영어 판이 가장 짧고 프랑스 판에는 영어 판에 없는 장문의 보충이 여러 군데 첨가되고 있다. 본서는 프랑스어 판을 대본으로 했다.

본문에서 [ ]부호는 원저原著의 보설補說, ( )은 역자 주기註記 또는 보역補譯, 방점傍點을 붙인 구절은 원문의 이탤릭체를, 《 》내는 대문자로 쓰인 부분을 표시한다.

서명書名 또는 신문, 잡지의 명칭은 『 』, 인용문은 ‘ ’을 썼다. 푸트 노트의 ( )는 저자주, )는 역자주를 표시한다.

 

 

 

 

 

 

 

 

 

 

 

 

 

 

 

 

 

 

 

 

 

 

 

 

 

 

 

 

 

 

차 례

 

 

 

 

1. 현대과학과 아나키즘

2. 아나키즘의 도덕

 

크로포트킨 연보

이을규 연보

편집후기

 

 

 

 

 

 

 

 

 

 

 

 

 

 

 

 

 

 

 

 

 

 

 

 

현대과학과 아나키즘

 

 

 

 

 

 

 

 

 

 

 

 

 

 

 

 

 

 

 

 

 

 

 

 

 

 

 

 

 

 

 

 

 

 

 

 

 

 

 

 

 

 

 

목 차

 

 

1. 아나키즘의 기원

2. 18세기의 지적 운동

3. 19세기 초두의 반동

4. 꽁트의 실증철학

5. 1856?1862년에 있어서의 각성

6. 스펜서의 종합철학

7. 사회에 있어서의 법의 역할에 대하여

8. 근대과학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지위

9. 아나키즘의 이상의 선행의 제 혁명

10. 아나키즘

아나키즘의 제 이념 - 고대 - 중세

프루동 - 슈티르너

11. 아나키즘()

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사회주의의 제 이념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자와 상호주의자

인터내셔널에서의 사회주의의 제 이념

생 시몽주의

12. 아나키즘()

인터내셔널에서의 사회주의의 제 이념

푸리에주의

파리코뮌의 준 충격 - 바쿠닌

13. 아나키즘()

현상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관념

국가의 부정 개인주의적 조류

14. 아나키즘의 약간의 결론

15. 행동의 수

16. 결론

 

 

 

 

 

 

1. 아나키즘의 기원

 

아나키라는 관념은 어떤 과학적 연구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어떤 철학체계에서 나온 것도 또한 아니다. 사회과학은 지금도 아직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정확성을 가지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풍토나 기후의 연구에 있어서 조차 1개월 또는 1주일 뒤에 어떤 날씨가 될지 미리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물며 사회학과 같은 미숙한 학문을 가지고 바람이나 비 따위 보다 무한히 복잡한 사물을 다루어 장래에 일어날 사태를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하겠다. 우리는 과학자 역시 보통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그들이 대부분 상류계급에 속해 있다는 것, 따라서 그 계급의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더욱이 그들이 대부분 국가의 봉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아나키란 관념이 대학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사회주의 일반과 마찬가지로, 또한 다른 어느 사회운동과도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은 민중 속에 기원起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민중의 운동으로 전개되는 한에서만 그것은 활력과 창조력을 발휘한다.

예로부터 인간사회의 내부에는 사상과 행동의 두 개의 조류가 서로 싸워 왔다. 한편으로 대중 또는 민중은 자기네의 생활방식에 따라 사회적 생활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분쟁을 조정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 협력을 요하는 온갖 상황 아래 상호부조를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숱한 제도를 만들어 내었다. 미개인 부락의 풍속, 습관, 촌락공동체, 그 후는 중세기 도시들의 산업길드, 이들의 도시 상호간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국제법의 기본원리들과 기타 허다한 제도는 법률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대중의 창조적 정신에 의하여 형성되고 발달하여 왔다.

다른 한편, 어느 시대에나 마법사, 요술사 , 기우사祈雨師, 예언자, 승려, 신관神官 등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의 최초의 소유자였다. 또한 각종 종교적 예배(태양 숭배, 자연력 숭배, 조상 숭배 등등)를 처음으로 만들어 내었다. 동시에 각 종족간의 연결을 확보하기 위한 각종의 의식을 창조했다.

이 시대에는 자연연구(천문학, 천기 예보, 의학 등)의 최초의 맹아萌芽는 여러 가지 의식과 예배에 표현된 온갖 미신과 불가분하게 결부되고 있었다. 예술이나 기예技藝도 또한 여기에 기원을 갖고 있으며, 연구와 함께한 미신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신비적인 형식으로 정식화定式化되어 비전秘傳 전수자에게만 전하여지고 민중의 손에 닿지 않도록 신중히 보존되고 있었다.

이들의 과학 및 종교의 최초의 대표자들과 병행하여, 켈트족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이나 아일랜드의 브레흔 또는 스칸디나비아 제 민족 간에 있던 법률 구술인들과 같이 의견대립이나 불화가 발생하는 경우 누구나 그 재결裁決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전통과 인습의 전승자로 간주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법을 자기의 기억 속에 보존했다(때로는 기호記號의 도움을 빌려 보존했으니, 그것이 본래 문학의 시초였다). 그리하여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그들은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다.

끝으로 전투단의 임시 지휘자가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 승리하는 마법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들은 무기에 바르는 독약의 비방秘方, 기타 군사적 비밀을 쥐고 있었다.

3종의 인간은 자고로 상호간에 비밀조직을 구성하여 그 전문지식의 비법을 보존함과 함께(장기간에 걸친 고통스런 습득에 의하여) 다음 세대로 전승했다. 가끔 그들 사이에 내분이 있을 때도 있으나 결국 서로 협력을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대중을 지배하고 복종시키고 통치하고, 그리고 자기네를 위하여 부려먹기 위하여 서로 굳게 단결하고, 결속하고, 지원해 왔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아나키즘은 이러한 두 조류 중의 첫째에 속한다. 즉 소수 지배자에 대항하여 자기네를 옹호하기 위하여 관습법적 제도를 만들어낸 대중의 창조적, 건설적 힘을 대표한다. 다름 아닌 이 대중의 창조력과 현대과학과 기술의 힘에 바탕을 둔 민중의 건설 활동에 의거하여 아나키즘은 오늘날 사회의 자유로운 발달을 보증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제도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아나키즘이 대항하려고 하는 것은, 가혹한 규율을 갖고 민중 위에 군림하여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소수의 통치자에 의한 입법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이다.

이 의미에서 우리는 어느 시대에나 아나키스트와 국가주의자가 대립하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 어느 시대에나 모든 제도가 본래는 평등, 평화 및 상호부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최선의 제도조차도 노화함에 따라 고정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들의 제도는 그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소수 야심가의 지배하에 귀속하여 점차 일층 더 사회가 발달하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변하고 만다. 그럴 적에 다소간에 고립한 개인들은 이러한 제도에 반역하게 된다. 불만을 품은 이런 사람들이 노화老化하여 억압적인 것으로 되고만 제도에 반역하여 그것을 대중의 이익에 맞도록 개혁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이러한 제도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그 지배하에 거두어들인 권력을 타도하려고 노력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자들은 사회제도(부족, 촌락공동체, 길드 등등)로부터 이탈하여 오로지 그 밖에, 그리고 그 위에 서려고 하며, 사회의 다른 성원을 지배하여 그 희생을 발판으로 자기네의 부를 구축하려고 기도한다.

무릇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개혁자는 이 두 가지 카테고리 중의 전자에 속하고 있다. 이들의 개혁자 중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형의 인물이 있었다. 즉 그 동포의 모두가, 아니 그 소수자마저 같은 견해에 물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진하여 압제에 반역하고 나서서, 다소라도 많은 군중을 조직하기도 하나 따르는 군중이 없을 때는 단신으로 싸우기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어느 세상에나 이러한 형의 혁명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혁명가 자신들도 두 가지 다른 방향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 한편은 사회의 내부에 발생한 권력에 대하여 반역하기는 했으나 이 권력을 근절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수중에 넣으려 했을 뿐이다. 노후화하여 억압적으로 된 권력 대신에 그들은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려고 노력하고 그 권력의 소유자가 되려고 했다. 그들은 종종 선의로 이 새로운 권력이 민중의 이익을 희구하는 것이고, 민중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얼마 안가서 반드시 그들이 망각하게 되거나 아니면 파기되거나 했다. 이리하여 로마에 있어서의 황제들의 권력, 그리스도교 등장 후 최초의 몇 세기 동안의 교회의 권력, 중세의 도시공화제 쇠망기에 있어서의 독재자들의 권력 등이 탄생하였다. 같은 조류는 봉건시대 말기에 있어서의 유럽의 왕권의 형성에 이바지 하는 바 컸다. ‘인민주의의 황제 시저에 대한 신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주의의 조류와 병행하여 기성제도를 재검토하려는 시기에는 다른 하나의 조류가 대두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옛날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어느 시대에나 다음과 같은 개인과 사상과 행동의 조류가 있었다. 즉 그것은 한 권력을 다른 권력으로 바꿔놓는 것이 아니라 민중적 제도 위에 덮어씌워진 권력을 배제하고 그런 연후에 그 자리에다 다른 권력을 창설하려고 하지 않는 개인과 사상과 행동의 조류가 곧 그것이다. 그들은 개인과 민중과의 주권을 선언하고 민중적 제도를 이상異常비대한 권력으로부터 해방하려고 했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대중의 집단적 정신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고, 또한 새로운 생활조건과 생존의 필요에 따라서 민중의 재능이 상호부조와 상호보호의 제도를 다시 한 번 자유로 개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제 도시나, 특히 중세의 제 도시(피렌체, 프스코프 등)에서 이러한 투쟁의 많은 실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개혁자와 혁명가 중에는 한편으로 자코뱅주의자와 다른 편으로 아나키스트라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나키스트적 성격의 인상을 띤 강력한 민중운동도 과거에 발생하고 있었다. 촌락이나 도시가 강권强權의 원리에 반항하여 봉기하고, 국가의 제 기관 및 재판소와 그 법률에 저항하여 인권의 절대권을 선언한 것이다. 그들은 일체의 성문법을 부인하고 각인이 자기의 양심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와 같이 하여 평등과 완전한 자유와 노동의 원칙에 바탕을 둔 사회를 건설코자 했다. 아우구스투스 제의 치세 하에 로마의 법률, 로마의 국가, 당시의 도덕 또는 부도덕에 반대하여 유태에서 시작된 그리스도 교도의 운동에는 확실히 분명한 아나키스트적 요소가 있었다. 그런데 이 운동은 점차 고대 헤브라이 교회와 로마제국 자체를 모방하여 구성된 교회의 운동으로 타락해 갔다. 그 결과, 창립 당시에 간직했던 그리스도교의 아나키스트적 요소는 드디어 질식하고 그리스도교회에 로마적 형태가 가하여져 이윽고 권력, 국가, 노예제 및 억압의 지주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도입된 기회주의의 최초의 종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속에 벌써, 적어도 신약성서를 구성하는 이들의 문서의 편찬 속에 명백히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또, 종교개혁을 발달시켜 그것을 도래케 한 저 16세기의 재세례파의 운동에도 극히 많은 아나키즘적 요소가 있었다. 허나 이 운동은 제후諸侯와 결탁하여 농민의 반란에 대항한 루터를 지도자로 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분쇄되고 농민과 도시의 빈민들의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에 의하여 탄압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우익 종교개혁자들은 점점 타락하여 마침내 자기의 양심과 국가와의 타협을 도모했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의 프로테스탄티즘인 것이다.

요컨대 이렇게 해서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를 낳은 저 비판적 및 혁명적인 항의에서 아나키즘도 또한 탄생한 것이다. 헌데 일부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을 부정하고 또 자본에 의한 노동의 예속에 바탕을 둔 사회기구를 부인할 뿐, 그 이상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의 진짜 힘을 구성하는 것 - 즉 무엇보다도 우선, 권력과 자본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진 국가와 그 주요한 지주가 되는 권력의 중앙집권화, (항상 변함없이 소수자에 의하여 제정되고 소수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법률 및 재판 등에 대하여 반항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아나키스트는 이들의 제 제도의 비판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자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지주支柱에 대해서도 감히 신성神聖을 모독하는 칼날을 세워 항거했다.

 

 

2. 18세기의 지적 운동

 

그러나 비록 아나키즘이 다른 모든 혁명적 조류와 같이 민중 속의 투쟁에서 발생한 것이지 학자의 연구실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늘날 존재하는 각종의 과학적 철학적 사조思潮 속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가를 아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아나키즘은 이들 각종 사조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이들의 사조 중에 어느 것에 아나키즘은 주로 의거하려고 하는가. 또한 아나키즘은 자기의 결론을 기초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연구방법에 의존하려고 하는가. 바꿔 말하면 아나키즘은 어느 학파에 속하는가? 아나키즘은 근대과학의 어떤 조류와 가장 접근해 있는가?

사회주의자들의 서클 안에서 최근 보이고 있는 경제학적 형이상학에의 몰두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미상불 흥미 있는 문제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간결하게 어려운 용어는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면서 이 문제에 대답해 보겠다.

19세기의 지적 운동은 18세기 중엽에서 말기에 걸친 영국 및 프랑스의 철학자들의 저작著作에 기원을 갖고 있다.

그 당시 시작된 사상의 고조는 모든 인간 지식을 하나의 전반적 체계 - 자연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려는 소망을 갖고 이들의 사상가를 고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세의 스콜라철학이나 형이상학을 모두 포기하고 대담하게도 전 자연 - 별의 세계, 태양계, 지구, 지구 표면의 식물, 동물 및 인간사회의 발달 -을 자연과학의 일관된 방법에 의하여 연구해야할 일련의 제 사실로서 내다보려고 했다.

참된 과학적 방법 - 즉 귀납?연역적 방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 그들은 자연계에서 관찰되는 일체의 현상 - 그것이 별의 세계에 속하거나 동물계에 속하거나 -을 자연과학이 물리학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연구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처음에 먼저 사실을 신중히 수집했다. 다음으로 이것을 일반화하려고 할 때, 그들은 귀납법으로 이를 수행했다. 그들은 일정한 가설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 가설에 대하여 다윈이 생존경쟁에 의한 신종의 기원에 관한 가설이나 멘데레프가 그 주기율週期律에 대하여 부여한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설을, 일시적 설명을 제공하고 사실을 수집하여 그 연구를 용이케 하기 위한 가정假定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들의 가정이 다수의 사실에 적용되는지 어떤지를 검토하고 또한 연역적 방법에 의하여 확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들의 가설이 이러한 검증에 붙여져 그것들이 표현하는 상호간의 항상적恒常的 관계의 원인이 밝혀지기까지는 법칙’(증명된 일반화)이라 생각되는 일은 없었다.

18세기의 철학운동의 중심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옮겨진 때,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그들에 고유한 체계구성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자연과학도 역사과학도 모든 인간지식을 보편적 계획에 의하여 동일의 원리 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편적 지식을 - 즉 전 우주와 그 생활의 철학을 엄밀히 과학적 형태로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그럴 적에, 전 시대의 철학자들이 구축한 일체의 형이상학적 구성을 포기하고 지구의 기원과 발달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된 물리적(즉 역학적) 제력諸力의 운동에 의하여 모든 현상을 해명하려고 했다.

나폴레옹 1세가 라프라스를 향하여 그의 우주체계론에는 어디에도 신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했을 때 라프라스는 나는 그러한 가설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프라스는 그것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 현상의 불가해성不可解性, 또는 애매하고 어중간한 현상 파악 및 제 사실을 계산할 수 있는 양으로써 구체적 형식으로 고찰하는 능력의 결여를 배후에 숨기고 있는 저 허장성세의 형이상학적 미사여구에 호소하려 하지를 않았다. 라프라스는 조물주라는 가설과 함께 형이상학도 폐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우주체계론은 조금도 수학적 계산을 포함하지 않고도 교육받은 독자면 누구나 알만한 말로 쓰여 있었는데 수학자들은 후일 이 책에 서술된 개개의 사상을 정확히 수학방정식으로, 즉 계산될 수 있는 양의 상호간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프라스는 그만큼 정확히 생각하고 표현했던 것이다.

라프라스가 천체역학에 관하여 수행한 것을 18세기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당시의 과학의 한계 내에서 생명현상의 연구에 대하여, 또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연구(심리학)에 대하여 행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 선구자들이나 그 후의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저작에 전개된 형이상학적 사변思辨을 폐기했다.

사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 감정을 증명코자 하여 그것이 지상명령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또 행위의 격률格率이 의무로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칙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경우라고 논하였다. 그러나 이 정의에 사용된 용어는 어느 것이나 주지의 도덕적 사실을 설명하는 대신에 애매모호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것(‘명령이니 지상이니 법칙이니 보편적이니 하는)을 표시하고 있다.

프랑스의 백과사전파는 이러한 거창한 말을 갖고 하는 설명에 만족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나 영국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인간이 어디로부터 선악의 관념을 얻어왔는가를 증명코자 할 적에 괴테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상의 공허함을 숨기기 위한 언어를 삽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간을 연구했다. 그리고 이미 1725년에 하치슨이 한 것처럼, 또한 그 후 아담 스미스가 명저 도덕적 감정의 기원에서 한 것처럼, 그들도 또한 인간의 도덕적 감정은 괴로워하고 있는 자에 대하여 느끼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우리 자신을 타인과 동화한다고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능에서 발생했다는 것, 우리의 면전에서 아동이 매 맞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거의 생리적 고통을 느끼게 되고 우리의 천성은 이러한 행위에 반항한다는 것을 그들은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은 관찰과 만인주지의 사실에서 출발하여 백과전서파는 광범한 일반화에 도달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복잡한 현상인 도덕적 감정을 보다 단순한 제 사실에 의하여 실제로 설명한 것이다. 그들은 주지의 이해하기 쉬운 제 사실 대신에 지상명령이니 보편적 법칙이니 하는 종류의, 아무것도 전혀 설명하지 않는 불가해하고 애매한 용어를 쓰지는 않았다.

백과전서파의 방법이 지니는 이점利點은 명료하다. ‘천계天界로부터의 영감을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대신에, 도덕적 감정에 관한 인간계 이외의 초자연적 기원을 말하는 대신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이 지상에 출현한 이래 인간 속에는 언제나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동포를 관찰하는 데서 확인되고 차차 사회생활의 경험에 의하여 완전한 것으로 된 감정이다. 우리의 도덕관념은 이 감정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리하여 18세기의 사상가들은 그 연구방법을 변경하지 않고 천체의 세계에서 화학적 반응의 세계로, 그리고 물리적 세계와 화학적 세계에서 동식물의 세계로, 다시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형태의 발달로, 또한 종교 기타의 진화로 옮아갔다. 방법은 언제나 동일했다. 과학의 모든 부문에서 그들은 언제나 귀납법을 적용했다. 그들은 종교의 연구에 있어서, 도덕적 감정의 분석에 있어서, 또한 사유 일반의 해부에 있어서, 그들의 방법이 실패하여 다른 방법을 필요로 했다는 단 하나의 예에도 마주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어떤 경우라도 형이상학적 개념(초월적 존재에 의하여 고취된 신이니, 불사의 영혼이니, 생명력이니, 지상명령이니 하는)이나 변증법적 방법에 호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은 동일한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전 우주와 그 전 현상을 해명하려고 한 것이다.

현저한 지적 발달이 성취된 이 시대에 백과전서파는 저 기념비적인 가치가 있는 백과전서를 작성했다. 라프라스는 우주체계론, 돌바흐자연의 체계를 발표했다. 라보아제는 물질의 불멸, 따라서 또한 에너지와 운동의 불멸을 주장했다. 러시아의 로마노소프는 베이르의 자극을 받아 이 무렵에 벌써 열에 관한 역학적 이론을 구성하고 있었다. 라마르크는 동식물의 무한한 변종의 출현을 상이한 환경에의 적응에 의하여 설명했다. 디도르는 천상계天上界로부터의 영감에 호소하지 않고서 도덕적 감정과 습속, 원시적 제 제도와 종교를 설명하려고 했다. 루소는 정치제도의 탄생을 설명코자 사회계약에, 즉 인간의 의지적 행위에 의거하려고 노력했다. 요컨대 사실을 기초로 하여 사실의 관찰과 경험에 의하여 검증된 자연과학적 귀납과 연역이란 동일의 방법에 의하여 기도되지 않은 연구 영역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거대하고 대담한 시도에 오류를 범한 예가 없는바 아니다. 이 당시에는 아직 지식이 부족한 분야에서는 때로는 앞질러 나간, 때로는 전혀 그릇된 가정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방법이 인지의 전 부문에 적용되었으며 이 방법의 덕택으로 오류 자체도 뒷날에 손쉽게 발견되고 정정되었다. 19세기는 이리하여 강력한 연구방법을 계승했다. 그리고 이 방법이야 말로 우리의 세계관을 과학적 기초 위에 구성할 수 있게끔 했으며, 그것은 또 난관을 회피하려고 하는 악습의 결과 도입된 우리의 세계관을 흐리게 하는 편견이나 또는 무의미하고 애매모호한 용어의 일소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3. 19세기 초의 반동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프랑스대혁명의 패배 이후 유럽은 정치의 영역에서나 과학과 철학의 영역에서나 일반적 반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부르봉 왕가의 백색 테러, 자유주의 이념과 싸우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황제들 간에 1815년에 맺어진 신성동맹, 유럽의 상류사회 층에 유행하기 시작한 신비주의와 경건주의, 도처에 출현한 국가경찰 등이 모든 방면에서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혁명의 근본 원리는 사멸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반노예적 상태에 얽매어 왔던 농민과 도시노동자의 해방, 법의 앞에서의 평등, 대의정치 - 이들의 세 가지 원리는 프랑스혁명에 의하여 선언되고 혁명군에 의하여 멀리 폴란드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에 전파되어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전 유럽에 진출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대원칙을 최초에 선양한 혁명 뒤에 점차적 근대화 - 즉 제도의 점차적 변화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1789년에서 1793년까지의 동안에 선언된 일반적 원칙이 일상생활 속에 적용되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명된 원리가 그 후 진화의 길을 따라 실현을 보게 됨은 사회발전의 일반 법칙이라고 봐서 무방할 것이다.

비록 사회와 국가 및 과학마저 혁명이 자유?평등?우애라는 자기의 부르짖음을 써넣은 깃발을 짓밟고 있었다 할지라도, 또 설사 현존 질서에의 적합이 당시는 철학에서 마저 일반적 슬로건으로 되었다 할지라도, 자유의 대원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 속에 침투해 갔다. 허기야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군이 일찍이 폐지한 농노제와 이단규문異端?問제도가 이제 다시 재건되기는 했지마는, 그러나 이미 이들의 제도에 치명상이 가해져 있어 거기에서 회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해방의 물결은 우선 최초에 서부 독일에 미쳤고, 계속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밀어닥쳤고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의 반도에 번져갔다. 다시 동방으로 흘러가 1861년에는 러시아에 다다랐고, 1878년에는 발칸 제국諸國에까지 흘러갔다. 북아메리카에서는 1863년에 노예제도가 자취를 감추었다. 동시에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과 대의정치의 이념도 또한 서방에서 동방으로 확대하여 19세기 말에는 러시아와 터키만이 전제專制의 굴레를 쓴 채 남게 되었다 - 물론 그나마 극히 취약화한 전제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뿐이 아니다. 18,19 양 세기의 경계에 경제적 해방이란 이념이 소리높이 선언되고 있다. 1792810일 파리의 민중이 왕권을 무너뜨린 직후, 특히 179362일에 지롱드당을 타도한 후에 파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대도시에서의 혁명 지부支部나 지방 소도시의 공청公廳의 대부분도 이 방향으로 행동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평등이 단순한 구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사실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혁명이 음모자 - 국왕들에 대하여 수행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전쟁의 과정에서 그 중압이 무엇보다도 먼저 빈민층 위에 덮어 씌워진 결과, 민중은 국민공회의 위원들에게 약간의 공산주의적, 즉 평등주의적 정책을 취하게끔 강요했던 것이다.

국민공회 자신도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나가도록 강제되어 빈곤의 근절재산의 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조치를 채택했다. 1793531일에서 62일 간의 봉기에 의하여 지롱드파가 정부에서 축출된 후, 공회는 토지뿐만 아니라 상업의, 적어도 생활필수품의 교역의 국유화를 기도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뿌리 깊은 이 운동은 17947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때에 지론드당의 부르주아 반동파가 왕당파와 결탁하여 테르미도르 9일에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리하여 이 운동은 단기간밖에 계속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19세기에 자기의 명백한 각인을 - 즉 가장 진보적인 형태의 공산주의적 및 사회주의적 경향성을 부여했다.

1793?94년의 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 민중 출신의 변사辯士가 나타나 이 운동의 이념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프랑스의 문필가들 중에는 이들의 이념[당시 그것은 마라를 넘어서라 불리고 있었다]에다 이론적 표현을 부여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속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겨우 영국에서 1793년에 고드윈이 등장하여 참으로 주목할 만한 저 노작勞作 정치적 정의 및 그 사회도덕에 대한 영향에 관한 고찰을 공간公刊했다. 고드윈은 이 책에서 자주인적사회주의 즉 아나키즘의 최초의 이론가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바부프[아마도 보나로티의 영향을 받고는] 1795년에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즉 국가사회주의의 최초의 이론가로서 나타났다.

다음으로 19세기가 되어 앞서 말한 것처럼, 18세기 말에 선양된 원리를 발전시키면서 현대사회주의의 3인의 시조始祖가 중요한 3학파를 대표하고 출현했다. 푸리에, 생 시몽, 로버트 오언이 곧 이들이다. 다시 40년대로 내려가면 푸르동이 등장하여 고드윈의 노작을 아는 바 없이 새로 아나키즘을 기초해 놓았다.

이리하여 강권적 및 반강권적 쌍방의 사회주의의 과학적 기초는 19세기 초 경에 벌써 풍부하게 개척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금일의 사람들에게 등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인터내셔널의 창립에 비롯한 근대사회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만 - 그것은 극히 중요한 점인데 - 이들의 사회주의 창시자들 보다 전진하고 있다. 그 하나는 근대사회주의가 혁명적으로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1848년까지 즐겨 말해지던 사회주의자?혁명가로서의 크리스트라는 관념을 씻어 없앤 점이다.

근대사회주의는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혁명이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 이 경우 사회혁명이란 것은 산업혁명이니 과학혁명이니 말할 때 쓰이는 의미에서의 혁명이 아니라 용어의 정확하고 명료한 의미에서의 혁명, 즉 사회의 기초 자체의 전반적이고 즉각적인 변혁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사회주의는 약간의 그리스도교적 개혁자들이 제창한 천박하기 짝이 없는 센티멘틀한 개혁에 자기의 견해를 혼동시키기를 그만 두었다. 물론 이 점은 이미 고드윈, 푸리에, 로버트 오언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행정, 중앙집권, 권력과 규율에의 궤배?拜와 같은 것은 인류가 신정주의神政主義와 로마제국의 법률에서 배운 것인데, 라브로프가 분명히 지적한 이들의 어두운 과거의유물은 여태껏 많은 사회주의자를 완전히 얽어매고 있다. 그들은 이 점에서 프랑스나 영국의 선구자들의 수준에도 미달한 형편이었다.

프랑스대혁명 후에 기승을 부리던 반동이 과학의 발달에 끼친 영향에 관하여 여기에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해 두면 족하겠다. 즉 현대과학이 금일 자랑하는 성과의 전부가 벌써 18세기 말에 시사되고 있었다는 것, 아니 시사뿐 아니라 때로는 정확한 과학적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역학적 열 이론, 운동 불멸설[에너지 항존恒存], 환경의 직접적 영향 하에서의 종의 변화, 생리학적 심리학, 역사?종교?법의 인류학적 고찰, 사상의 발전 법칙 -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의 과학적 세계관과 종합철학[물리적, 화학적, 생물적 및 사회적인 전 현상을 전체적,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철학]18세기에 벌써 소묘素描되었고 부분적으로는 완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프랑스혁명이 끝난 후 반동이 승리함과 동시에 반세기에 걸쳐 이들의 발견을 억압하려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반동적 학자들은 이들의 발견을 비과학적이라 불렀다. 처음에 먼저사실을 연구하고자료를 수집한다고 하는 구실을 앞세워 그들은 학계에서 단순한 측정에 불과한 연구마저 배척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형세구안에 의하여, 그 후 쥬르에 의하여 수행된 열의 작업당량作業當量의 결정법[일정의 열량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기계적 마찰 양]도 배척되었던 것이다. 금일의 영국 과학아카데미에 해당한 왕립협회마저 쥬르의 연구를 비과학적이라 하여 출판을 거절했다. 더욱이 힘의 통일에 관한 글로브의 주목할 만한 저작은 1843년에 쓰였는데 1856년에 이르기까지 전혀 등한시되고 있었다.

19세기 전반의 과학사를 읽으면 프랑스혁명 패퇴 후 유럽에 얼마나 깊이 암운이 덮여 있었던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구름의 막은 돌연 50년대 말에 걷히기 시작했다. 이 때 서방에서는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 가르바르디의 궐기, 이탈리아의 해방, 아메리카에서의 노예제 폐지, 영국에서의 자유주의적 개혁 등이 나타났다. 러시아에서는 동일한 이 운동의 결과가 농노제와 태형笞刑의 폐지로서 나타났고 철학에서는 쇠링과 헤겔의 권위 실추를 일으키고 니힐리즘이란 이름으로 불린 정신적 예속과 일체의 권위에의 궤배에 대한 대담한 부정을 산출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시의 지적 발달을 회고할 때 다음과 같은 것이 우리에게 명료하게 된다. 즉 과학을 짓누르고 있던 속박을 타파하기를 도운 것은 30?40년대에 행하여진 공화주의적 및 사회주의적 이념의 선전이고 또한 1848년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점은 상술할 것까지도 없어 다만 다음의 사실을 주목하는 것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즉 앞서 말한 세구안도, 오귀스탄 티에리[중세에 있어서의 코뮌의 민중적 기구와 연합주의적 이념의 연구의 창시자]도 시스몬디[이탈리아 자유도시에 관한 역사가]도 모두 19세기 전반의 3인의 사회주의의 시조 중의 한 사람인 생 시몽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다윈과 때를 같이하여 자연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의 이론에 도달한 알프레드 R 월레스는 청년시대에 로버트 오언의 열렬한 귀의자歸依者였다.

오귀스트 꽁트는 생 시몽주의자였고 리카도도 벤담도 또한 오언주의자였다. 다른 편으로 유물론자 칼 포크트G. 루이스는 글로브, , 허버트 스펜서, 기타 여러 사람들과 같이 30년대와 40년대의 영국의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운동에서 그들은 각기 과학적 작업에 있어서의 용기를 길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1856년에서 1862년에 이르는 불과 5,6년의 단기간에 글로브, 쥬르, 베르트로, 헤름 호르츠, 멘데레프 등의 업적, 다윈, 끄로드 베르나르, 스펜서 모레쇼트, 포크트 등의 여러 저작, 인류의 기원에 관한 라이에르, 베인, , 뷔르노프의 여러 저작, 이러한 업적이 한꺼번에 꽃핀 결과, 당시의 학자들의 기본적 견해에 일대 변혁이 생기고 과학은 일제히 새로운 길로 매진하게 되었다. 인지人知의 전 부문은 놀라운 속도로 정비되었다.

생명의 과학[생물학], 인류의 제 제도의 과학[인류학과 민족학], 이성, 의지 및 감정의 과학[생리심리학], 법과 종교의 역사 등은 우리의 안전眼前에 급속히 성장하고 그 일반화의 대담성으로 말미암아, 또한 그 결론의 혁명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충격을 주었다. 전세기에서는 단지 막연한 가정에 불과하고 가끔 추측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야 저울과 현미경으로 증명되어 수천 회의 관찰과 실험에 의하여 검증된 것으로 되었다. 저술방식 자체도 아주 달라졌다. 앞서 말한 학자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귀납법의 특징으로 되고 있는 문체의 간결함과 정확함과 아름다움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러한 문체는 형이상학을 폐기한 18세기의 문필가들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금후 과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추이해 갈 것인지는 예언할 수 없다. 학자들이 오늘과 같이 부자와 정부에 의존하고 있는 한, 그들의 과학은 불가피하게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겠고, 19세기 전반에 보던 바와 같은 과학의 침체기가 재현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즉 오늘 보는 바와 같은 과학에 대해서는 라프라스가 그 것 없이도 해나갈 수 있던 저 가설이라든지 괴테가 조소嘲笑한 그런 형이상학적 잠꼬대같은 것은 무용의 사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기적 생과 인류의 생의 발달을 포함해서 저 대자연이란 서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서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조물주라든지 신비적 생명력이라든지 불사의 영혼 따위에 의뢰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한 헤겔의 3부작을 참조할 것도, 우리 자신의 실재를 부여하고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 상징의 배후에 우리의 무지를 숨길 것도 필요치 않다. 기계적 현상 - 그것은 물리학에서 인생의 제 사실로 나아감에 따라 점점 복잡하게 되나 여전히 항상 기계적 현상이다 - 만으로 자연의 전모를 설명하고 다시 이 지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유기적 지적 사회적 생활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 우주에는 아직 여러 가지가 알려지지 않아 애매하고 불가해한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식의 공백을 메워감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공백이 다시금 입을 벌린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두 개의 당구의 공이 부딪칠 때라든지, 돌멩이가 구를 때 일어나는 단순한 물리적 사실과, 또한 우리의 주변에 나타나는 화학적 사실에 눈을 돌릴 때, 우리가 이들의 현상을 설명 못할 영역은 하나도 없다. 자연의 전 생활을 해명하는 데에 이러한 기계적 사실에만 주목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이들의 사실이 우리를 기만한 일은 없으며, 기계적 제 사실만 가지고는 불충분한 그런 영역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여태껏 그런 영역의 존재를 추측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 꽁트의 실증철학

 

과학이 이상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의 모든 성과를 포섭하는 종합철학을 구성하려는 기도가 시험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철학자들은 우리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대접하는데 사용해온 공상의 산물, 실체우주의 이념이니 생의 목표니 하는 따위의 상징적 표현에 헛된 시간을 낭비할 것 없이, 또한 의인관擬人觀 - 즉 자연과 물리적 제력諸力에다 인간적 자질이나 의도를 부여하는 따위의 작풍으로 귀중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허송할 것 없이, 우리의 전 지식의 종합적, 통일적인 또한 이성적인 총괄을 제시하는 그런 철학을 구성하려고 시도함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이 철학은 단순한 것에서 복합적인 것으로 점차 상승함으로써 우주적 생의 근본 원리를 해명하고 자연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하여 이 철학은 사물 상호간의 새로운 관련을 - 즉 새로운 자연법칙의 발견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연구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동시에 또한, 설사 그것이 아무리 시대의 통설과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의 결론의 정당성을 신뢰하도록 고무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많은 기도가 19세기에 실제로 시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오귀스트 꽁트와 허버트 스펜서의 기도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확실히 종합철학의 필요성은 이미 18세기에 백과전서파에 의하여, 또 금일까지 여전히 기념비적 노작勞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저 찬연히 빛나는 철학사전에 있어서의 볼테르에 의하여, 그리고 튀르고에 의하여, 내려와서는 생 시몽에 의하여 일층 명료하게 자각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오귀스트 꽁트는 같은 모양의 저술을 자연과학의 최근의 진보에 적응하는 엄격히 과학적인 형태로 계획하고 있었다.

주지하듯이 수학과 정밀과학에 관해서는 꽁트가 그 과제를 훌륭히 성취했다 하겠다. 또한 그가 실증과학의 영역 안에 생명의 과학[생물학]과 인간사회의 과학[사회학]을 도입한 것이 완전히 옳았음은 일반의 승인을 얻고 있는 바라 하겠다. 그리고 꽁뜨의 실증철학이 19세기 후반의 여러 사상가와 학자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음도 주지하는 바다.

그렇지만 이 위대한 철학자의 찬미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꽁뜨는 그 실증정치학에서 근대의 제 제도의 연구, 특히 윤리, 즉 도덕관념의 연구를 시도함에 있어서 저토록 유약한 태도 밖에 취하지 못했을까.

어찌하여 꽁트와 같이 광대하고 또 실증적인 지성이, 만년에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종교와 어떤 종류의 예배의 창시자가 되고 말았을까.

그의 제자 중의 혹자는 꽁트의 만년의 단계와 이전의 노작과를 조화시키려고 이 철학자가 실증철학실증정치학이란 두 저작에 있어서 동일한 방법에 의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때문에 꽁트철학의 두 사람의 정통적 제자 리토레와 존 스튜어드 밀은 다 같이 실증정치학을 꽁트철학의 일부라고 조차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이 저작을 지성이 쇠퇴한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꽁트의 두 저작 - 실증철학실증정치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극히 특징적인 것으로 그것은 오늘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의 몇 가지에 빛을 던져주고 있다.

꽁트가 그의 실증철학강의를 완성했을 때 가장 중요한 사항, 즉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기원 및 이 감정이 인간과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가 아직 자기의 철학 속에 논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났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감정의 기원을 연구하고 또 그것을 꽁트가 생의 전체를 설명하는데 쓰던 것과 같은 원인에 의하여 설명하는 것이 분명히 필요한 것이었다. 어째서 인간은 그 어떤 초자연적인 힘의 간섭 없이 이 감정에 복종하고 혹은 적어도 그것을 고려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가를 그는 설명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꽁트가 여기에 바른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은 극히 주목할 만하다. 후년에 영국의 위대한 박물학자 다윈이 인류의 기원에서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발생을 설명코자 했을 때, 꽁트가 걸은 이 길을 이어 받았던 것이다. 사실 꽁트는 실증정치학에서 탄복할만한 여러 절을 쓰고 있는 바, 이 대목은 동물계에 있어서의 사회성과 상호부조 및 이러한 사실들의 윤리적 의의를 그가 결코 간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실에서 그럴법한 실증주의적 결론을 이끌어내기에는 그것이 저술된 당시 아직 생물학의 지식이 충분치 못했고 꽁트 자신도 거기에 필요한 대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을, 다시 말하면 인간이 도덕적이기 위하여 예배하고 기도드리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기성 종교의 신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대문자로 쓴 인류로 바꿔 놓았다. 이 새로운 우상 앞에 무릎 꿇고 절하기를, 그리고 또 우리 속에 있는 도덕적 감정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그것 앞에 기도드리기를, 그는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다. 일단 이렇게 되어 인간이 자기 밖에, 또는 자기 위에 자리하는 어떤 것을 우러러 절해야 한다고 승인됨으로써 인간적 동물이 의무의 길을 밟도록 밖으로부터 시켜지고 보면, 이에 따라 나머지 것은 저절로 따라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의 종교적 의식도 동방에서 발생한 옛 종교들을 본으로 해서 구성된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감정이 그 사회성이나 사회 자체와 똑같이 인간 이전의 기원을 갖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연계의 관찰과 인간의 사회생활의 체험의 축적에 의하여 인간 속에 보강된 동물적 사회성의 일층 진화하고 발달한 것임을 꽁트가 인식하지 못한 결과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꽁트는 인간의 도덕적 감정이 그 육체적 조직과 같은 정도로 인간의 본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리고 이 양자가 다 대단히 긴 세월의, 과거의 수만 년 간 계속된 진화의 과정에서 생긴 유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꽁트는 동물계에 사회성이 있고 상호간에 동정의 감정이 있다는 생각은 했으나 당시 대권위자로 인정되고 있던 동물학자 큐비에의 영향 때문에 뷔폰과 라마르크가 이미 밝히고 있던 것 - 즉 종의 변이성變異性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동물에서 인간에로 부단히 계속되는 진화과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다윈이 이해한 바를, 즉 인간의 도덕적 감정은 최초의 유인적類人的 동물이 이 지상에 출현하기보다 훨씬 이전에 동물사회 속에 발달한 상호부조 본능의 일층의 진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꽁트는 우리가 오늘날 잘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개개인은 아무리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인류가 멸망기에 들어가지 않은 이상 인간성 속에는 도덕적 원리가 본능으로서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것, 이 인간성에서 나오는 도덕적 감정에 위배되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타인 속에 반동을 일으키리라는 것, 그것은 흡사히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 역학적 움직임이 반동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는 것 등이다. 개개인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이와 같은 반응의 능력 속에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도덕적 감정과 사회성의 습속을 필연적으로 버티어 주는 자연적인 힘이 뿌리박고 있어, 그것은 동물의 사회에 있어서 그것들을 일체의 밖으로부터의 개입 없이 지탱하고 있는 것과 똑 같은 것이고, 더욱이 이 힘은 여하한 종교나 여하한 입법자의 명령보다도 무한히 강력한 것이라는 것을 꽁트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꽁트가 이것을 승인하지 못한 결과 그는 새로운 신성神性인 인류와 새로운 의식 및 새로운 예배를 발명하고, 이 신종교가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생활의 길을 걷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꽁트는 생 시몽과 같이, 또한 푸리에와도 같이, 자기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공세貢稅를 바쳤다. 평등한 힘을 가진 악의 원리와 선의 원리와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또한 인간이 악의 대표자에 대한 싸움에서 자기를 강화하기 위하여 선의 대표자에 의거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교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이념으로 침투된 꽁트는 도덕과 이 도덕을 인간의 감정 및 관념 속에 강화해야할 수단에 관한 문제에 마주치자마자 단박에 이 그리스도교적 이념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인류교는 그에 대하여 인간을 악의 파멸적 영향으로부터 구출할 수단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5. 1856 - 1862년 사이의 각성

 

꽁뜨는 인간의 제 제도의 연구 - 특히 도덕관념의 연구 -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가 실증철학실증정치학을 쓴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갑자기 과학의 지평선이 활짝 열리고 교양 있는 인사의 세계관의 수준이 높아진 저 1856?1862년보다 훨씬 전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5,6년의 짧은 기간에 과학의 각종 분야에 나타난 노작은 우리의 자연관과 생명관, 특히 인간의 사회생활에 관한 우리의 견해에 완벽한 변혁을 초래했는바, 이와 같은 변혁에 필적할 것으로는 과거 20세기 간의 전 과학사의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만한 것이었다.

백과전서가가 단지 예견만 했던 것, 오히려 예감한데 불과했던 것, 또한 19세기의 최고의 지성들이 그때까지 간신히 해명한 것이, 이제 문득 일반적 지식의 성과에 편입되게끔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과학의 귀납?연역적 방법의 덕택으로 완벽하고도 전면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연구방법은 벌써 불완전하고 허위적이고 무효과적인 것으로 생각하여지도록 되었을 정도다.

여기서 잠깐 머물러 서서 이 시기에 과학이 달성한 성과를 조망해 보자.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하여 착수된 종합철학 구성의 기도를 좀 더 잘 평가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6년간에 글로브, 크라우쥬스, 헤름호르츠, 쥬르 등등 일군一群의 물리학자, 천문학자들은[이 중에는 화학적 스펙토르 분석의 발견에 의하여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천체인 별의 화학적 구성을 알 수 있도록 한 키르히호프도 포함되겠다] 19세기 전반기에는 물리학의 영역에 있어서의 대담하고 광범한 일반화 작업을 학자들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한계를 드디어 돌파했다. 그들은 수년간에 모든 무기적無機的 세계에 있어서의 자연의 통일을 증명하고 확립했다. 이때 이후 무슨 신비적인 유체流體에 대하여 - 일찍이 물리학자들이 각종의 힘을 해명하기 위하여 호소해 왔던 열소熱素, 자기나, 전기 기타의 유체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되었다. 이제야 광열, 전기, 자기 등을 포함한 모든 물리학적 현상은 바다의 파랑이나 베르 또는 음우音又의 진동이 생기게 하는 것과 똑같은 분자의 역학적 진동의 결과라는 것이 명료하게 되었다.

뿐더러, 우리는 낙하하는 돌이나 진행 중의 열차의 운동의 에너지를 측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불가시적인 운동을, 분자의 진동을 측정하기를 - 다시 말하면 그 에너지를 계산하기를 - 배워서 알게 되었다. 물리학은 이리하여 역학의 한 부문으로 되었다.

나아가서는 또, 동일한 이 수년간에,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 - 은하계 속에 무수히 발견되는 태양조차 - 가 지구상의 모든 물체가 구성되어 있는 것과 똑같은 단순한 물체 또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또한 지구상에 발견되는 것과 절대로 같은 분자의 진동이 같은 물리적 화학적 결과를 수반하여 거기서도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공간을 운행하고 있는 저 천체운동 자체도 아마 대우주의 별들 사이의 공간을 몇 10, 몇 조 킬로라는 거리에 걸쳐 전파하는 진동의 결과에 불과할 것이다.

화학적 현상을 설명할 적에도 이것과 동일한 열과 전기의 진동만으로 족할 것이다. 화학은 분자역학의 일장一章에 불과하다. 그리고 온갖 형태로 표현되는 동식물의 생명마저도 모든 생물의 생명조직이 성립하고 있는 복잡한, 그런 까닭으로 또한, 해체하기 쉬운 화학적 물체의 광범한 계열에 있어서의 분자[또는 분자 속의 원자]의 교환에 불과하다. 생명이란 요컨대 극히 복잡한 분자들의 일련의 화학적 분해와 재결합 - 즉 화학적, 무기적 발효의 영향 아래 생기는 발효작용의 계열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같은 이 연간年間, 신경계통의 세포의 생활과정과 자극을 하나에서 타로 전달하는 능력이 식물 및 동물의 신경생활에 있어서의 자극 전달의 기계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임이 이해되고, 계속해서 1890?1900년 사이에 승인되고 증명되도록 되었다. 이들의 연구의 결과 우리는 이제 순전히 생리학적 관찰의 영역에 머물러 그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해서 심상心像이나 일반적으로 인상印象이 우리의 뇌수腦髓에 심어지며,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서로 작용하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것들에서 개념이나 관념이 생기게 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리하여 지금은 연상聯想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해서 새로운 인상이 묵은 인상을 재생시켜가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사유思惟의 메커니즘 자체를 또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방면에서 모든 것을 다 알기까지에는 아직 도저히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겨우 최초의 일보를 내디뎠을 뿐이고 아직 무한히 많은 것을 밝혀 나가야 하겠다. 과학은 오랫동안 자기를 질식시키고 있던 형이상학으로부터 간신히 해방되었을 뿐이고, 생리학적 심리학이란 이 광대한 영역의 연구에 막 착수했을 뿐이다. 그러나 금후의 연구를 위한 공고한 기초는 벌써 닦아진 셈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확립하려고 노력한, 두 개의 별개로 독립한 영역으로 갈라놓는 케케묵은 구분 - 즉 그의 시간, 공간 내에서 연구해야할 현상계[물리적 영역]시간 내에서만 연구되는 또 하나의 영역[정신현상의 영역]이란 구분은 이제 소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일찍이 러시아의 유물론자 세쵸노프 교수가 제기한 다음과 같은 문제 - ‘심리학은 어디에 귀속하며 어떻게 배워야 할 것인가’ -에 대하여 해답은 이미 주어지고 있다. 심리학은 생리학에 속하고 생리학적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로 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최근의 생리학자들의 연구는 사유의 메커니즘과 인상의 발생과 기억에로 인상이 고정해가는 과정 및 그 전달 등에 관하여 지금까지 형이상학이 우리에게 제공해온 번쇄煩?한 고찰보다 훨씬 많은 광명을 던져주고 있다.

이리하여 형이상학은 일찍이는 의심할 바 없이 자기의 영토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던 아성에 있어서조차 패퇴한 것이다. 심리학의 영토는 자연과학과 유물론철학에 의하여 점령되고 말았다. 이 분야에 속하는 사유의 메커니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일찍이 보지 못한 스피드로 전진시킨 것은 이들의 자연과학과 유물론철학이었다.

 

그러나 이 5,6년간에 나타난 노작 중에서 여타의 모든 명성을 압도한 발군의 저작이 있으니 그것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다.

이미 전세기[18세기]에는 뷔폰이,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경계선에서는 라마르크가, 이 지구상에 생존하는 동?식물의 다양한 종은 영구불변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 즉 종은 가변적이어서 환경의 영향 아래 부단히 변화한다는 것을 감히 주장하려고 했다. 일정한 군에 속하는 상이한 종 사이에 발견되는 동과적同科的 유사성은 이들의 종이 공통한 선조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리하여 우리가 초원이나 소지沼地에서 보는 각종의 모간毛?은 동일종의 선조들의 자손이 아닐 수 없다. -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서로 다른 생존의 제 조건 속에서 마주치게 된 변화와 적응의 결과로서 변종해온 자손인 것이다. 또한 낭, , 산견山犬, 와 같은 금일의 종은 기왕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 대신에 몇 세기 간에 금일의 낭, , ,산견을 발생시킨 일종의 동물이 있었던 것이다. , 당나귀, 노새 등에 관해서는 그것들에 공통한 선조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려져 있고 그 뼈의 화석이 고대의 지질층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와 같은 이단적 견해를 토로한다는 것은 위험천만이었다. 이보다 훨씬 경미한 이설異說을 말한 탓으로 뷔폰은 교회 재판소의 박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고, 결국 그는 그의 박물지에서 자기의 설을 철회하도록 강제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교회는 아직도 강력했으니 승려들에게 불유쾌하기 짝이 없는 이단적 언설을 주장하려고 결심한 박물학자는 감옥이나 고문이나 정신병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이단자들은 극히 신중히 조심조심 말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1848년의 혁명 후에는 다윈과 월레스가 동일한 이단설을 과감히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윈은 용감히 부언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즉 인간도 또한 완만한 생리학적 진화의 길을 따라 발달한 것이고 인간은 유인원類人猿에서 유래했으며 인간의 불사의 영혼도덕적 정신은 침팬지나 개미의 지혜 및 사회적 습관과 동일한 방식으로 발달해왔을 뿐이다, 라고.

당시 교회의 장로들의 다윈과 그의 용감하고 유식하고 총명한 학도 헉슬리의 머리 위에 얼마나 무서운 벼락을 떨어뜨렸던가는 주지하는 바다. 헉슬리는 다윈주의의 결론에서 모든 종교의 승려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빠뜨린 것을 끄집어내서 이를 강조했던 것이다.

투쟁은 격렬했다. 허나 다윈주의가 드디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로부터 우리들의 안전에 전혀 새로운 과학, 생물학이 - 다시 말하면 생명의 모든 현상에 관한 과학이 성장했다.

다윈의 노작은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 물질의 활동, 유기체의 생활, 사회생활 등 모든 종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방법을 또한 제공하게 되었다. ‘계속적 발달진화란 이념과 제 조건의 변화에 따라 개체와 사회가 새로운 조건에 점차적 적응을 해나간다는 이념 - 이 사상은 새로운 종의 기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보다 광대한 분야에도 적용되었다. 이 사상이 자연일반의, 나아가 인간과 그 능력이나 사회 제 제도의 연구에 도입된 때, 그것은 새로운 지평선을 열고 인지人知의 전 부문에 걸쳐 가장 어려운 사실로 보이던 것을 해명할 가능성을 제공했다. 그처럼 많은 성과를 내포한 이 원리에 의거함으로써 비단 유기체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제 제도의 역사까지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되었다.

스펜서를 매개해서 생물학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했다. 즉 지구상에 생식生息하는 모든 종류의 동식물이 당초 지상에 존재했던 약간의 훨씬 단순한 유기체에서 출발하면서 어떻게 해서 발달해 왔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헥켈은 인간을 포함한 각종에 걸쳐 가능한 계보의 약도를 그렸다. 그것만 하더라도 벌써 훌륭한 성과였다. 그러나 다시 그 위에 인간의 습속, 관습, 신앙, 제도에 관한 역사에 약간의 최초의 과학적 기초를 닦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 19세기의 오귀스트 꽁트에게 전혀 결여되었던 것은 바로 이 지식이었던 것이다. 금일 우리가 이 역사를 쓸 적에 벌써 헤겔의 형이상학적 정식定式에 호소할 필요도 없고 생득관념生得觀念에도, 칸트의 실체에도, 위로부터 주어지는 영감에도 의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정식에 의뢰함이 없이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이 정식이야말로 탐구정신을 질식시키고 그 배후에 흡사히 구름이 덮고 있듯이 매양 한결같은 무지와 구태의연한 미신을 감추어 덮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박물학자들의 저작과 다른 편으로 원시사회의 제 제도와 그것에 수반하는 법률의 연구에 동일한 귀납적 방법을 적용한 헨리 메엔 및 그 후계자들의 저작 덕택으로 인류 제 제도의 발달사는 최근 50년간에 동식물의 발달사와 마찬가지로 확고한 기초 위에 놓일 수 있도록 되었다.

물론 19세기 30년대 프랑스의 오귀스탄 티에리의 학파와 독일의 마우러게르마니스트들의 학파 - 러시아에서의 그 계승자는 코스토마로프와 베리야에프 등등 이었다 - 에 의한 저작들을 잊어서는 부당할 것이다. 진화론적 방법은, 물론 훨씬 이전부터 백과전서파의 시대 이래 습속과 제도, 나아가서는 언어의 연구에도 적용되어 왔다. 그렇지만 참으로 과학적인 결과가 얻어지도록 된 것은, 수집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박물학자들이 식물 또는 새로운 종의 기관器官의 점차적 발달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관찰하는 태도가 학습된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형이상학적 정식도 그런대로 당시는 대체의 일반화를 하는데 유용하기도 했다. 그것은 잠자는 사상을 일깨워서 자연의 통일과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모호한 암시를 줌으로써 사상을 자극했다. 19세기의 최초의 10년대에 지배했던 것과 같은 반동의 시대에 백과전서파와 그 영국 및 스코틀랜드의 선구자들의 귀납적 일반화는 망각되고 더욱이 신비주의가 개가를 올리고 있는 앞에서 물질계와 정신계와의 통일에 대하여 감히 논술하는 데는 도덕적 용기가 요구된 때 - 그런데 철학자들에게는 바로 이 용기가 결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 독일인의 잠꼬대 같은 형이상학마저 확실히 일반화에의 경향을 육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화는 혹은 변증법적 방법에 의하여, 혹은 반의식적인 귀납법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으로 그 결과는 절망적으로 막연한 것이었다. 그 중의 전자, 즉 변증법적 방법이란 본질적으로 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단정斷定에 바탕하고 있어 그것은 꼭 고대 그리스인들이 유성遊星은 우주공간을 원형으로 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논증함에 있어서 원은 가장 완전한 곡선이기 때문이라는 따위의 근거에 기하여 있었던 것과 동곡이음同曲異音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단정의 소박한 정도와, 그리고 또 증명이 전연 없음을 엄폐하고 있던 것은 막연한 의론과 애매모호한 용어 및 불명료하고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무겁고 따분한 문체였을 따름이다. 다른 한편으로 반의식적인 귀납법에 의하여 얻어진 일반화에 관하여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언제나 관찰 사례의 극도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 그 좋은 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최근 한바탕 파란을 일으킨, 극히 한정된 사실에 바탕을 두고 행하여진 와이즈만의 거창한 일반화일 것이다. 이 경우 귀납은 반의식적인 것에 불과했는데 그 의심스러운 결론의 가치는 경솔하게도 과장되어, 그것이 마치 다툴 여지도 없는 법칙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결과가 되었다. 허나 그것은 사실인즉 단순한 가정 - 가설, 일반화의 맹아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 결과를 실지로 관찰된 사실과 비교함으로써 기초적인 검증에 붙여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이들의 일반화는 - 헤겔의 ??이 그 예이거니와 - 너무도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상가가 실천적 귀결을 끄집어내려고 할 때 어떠한 귀결이라도 이끌어내기를 허용한 것이다. 이래서 이 정식에서 [실제로 하여진 바와 같이] 바쿠닌의 혁명정신과 그 도레스렌봉기도 도출될 수 있었고 마르크스의 혁명적 자코뱅주의도,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을 현실과의 화해, 다시 말하면 전제專制와의 화해로 이끌어간 헤겔의 이른바 존재하는 것의 용인, 어느 것이나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의 면전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빠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경제학적 오류를 상기한다면 충분할 것이다. 이들의 사회주의자는 변증법적 방법과 경제학적 형이상학에 집념하는 나머지 모든 국민의 경제생활에 대한 현실적 제 사실의 연구를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이다.

 

 

 

 

 

 

 

 

 

 

 

 

 

 

 

 

 

 

 

 

 

 

 

 

 

6.스펜서의 종합철학

 

인류학 [즉 인간의 생리학적 발달과 종교 및 제 제도의 역사적 연구]이 다른 자연과학의 연구와 같은 방법으로 연구되도록 된 이래 인류사의 주요한 근본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드디어 가능케 되었다. 동시에 또한, 일찍이 지질학의 연구를 방해해온 성서의 전승과 같이, 역사 연구를 방해하여온 형이상학을 최종적으로 일소하는 것도 가능케 되었다.

따라서 허버트 스펜서가 19세기 후반에 자기의 종합철학의 구성에 착수했을 때, 꽁트의 실증정치학에 보였던 그러한 오류에는 벌써 빠질 리 없을 터이라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펜서의 종합철학은 일보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긴 했으나 [이 철학 속에는 종교나 종교의식을 용납할 여지는 없었다] 그 사회학적 부분에는 꽁트의 노작에 못지않은 큰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다음 점에 있었다. 즉 스펜서가 사회심리학에 도달했을 때, 그는 이 분야를 연구할 적에 자기의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고, 이 방법이 도출해야할 귀결을 승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예컨대 스펜서는 토지가 사유재산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승인했다. 지주는 자기 마음대로 소작료를 인상한 권리를 가지기 위하여 토지에서 실제로 일하는 소작인들이 집약集約경작으로 토지에서 수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 지주는 토지를 개간하지 않고 놀려두면서도 자기 토지의 주위에서 다른 농민들이 악착같이 일한 결과 자기의 지가가 오르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제도는 - 스펜서는 당장 승인 한다 - 사회에 대하여 해롭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토지에 관하여 이러한 폐단을 인정하는 한편, 이것과 같은 결론을 기타의 축적된 부에 대하여 - 공장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광산이나 도크에 대해서도 인정하려 하지를 않았다.

다음으로 또한, 그는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엄격히 비판하여 그의 저작의 하나에다 혁명적 강령을 표시하는개인 대 국가라는 표제를 붙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차차 국가의 방위적 활동을 보전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결국 현존 형태 그대로 국가를 완전히 복권하고 다만 근소한 제한을 그것에다 붙여 놓았을 뿐이다.

이런 종류의 모순을 초래한 이유의 절반은 확실히 다음과 같은 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스펜서가 자기의 철학의 사회학적 부분을 구성한 것은 그가 자연과학의 부문을 집필하기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고, 당시 그는 영국의 철학적 급진주의운동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는 1851년에 사회정학社會靜學을 썼는데 그 당시 인간의 제 제도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는 아직 맹아상태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여하튼 결국 스펜서도 꽁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제 제도를 연구함에 있어서 과학 이외의 영역에서 채용한 선입견에 의하지 않고 대상을 그 자체로서 고찰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스펜서는 사회철학에 착수하는 대목에 이르자마자, 물리학적 제 사실의 연구에서는 전혀 이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극히 기만적인 방법 - 즉 유사類似[유추類推]의 방법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방법에 의하여 그는 숱한 선입관념을 정당화 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금일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과 사회학이란 두 부문에 걸쳐 동일의 방법에 의하여 구성된 참다운 종합철학은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스펜서는 미개발인의 원시적 제도를 연구하는 데는 가장 부적당한 인물이었다는 것도 부언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그는 태반의 영국인에 공통한 결함 - 즉 타국민의 습속 또는 관습에 대한 몰이해를 일층 확대하고 있다. 제임스 롤즈와 같이 극히 총명하고 날카로운 영국인도 일찍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로마법적 인간인데 아일랜드인은 관습법의 인간이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우리의 상호이해는 가로막혀 있다.”. 그런데 이질의 문명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 이 특성은 일단 영국인이 열등 인종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 이르면, 다시 더욱 명백한 것으로 된다. 스펜서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자기의 부족에 대하여 품는 미개인의 존숭尊崇의 염이나 아이슬란드의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의무로 본 혈수血讐를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 중세 제 도시에 있어서의 투쟁으로 장식된 파란만장의 진보적인 생활을 또한 그는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 이들의 시대에 존재했던 권리의 관념은 스펜서에게 전혀 불가해한 것이었다. 그러한 것 속에 그는 야만, 미개, 잔인성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 점에서 그는 오귀스트 꽁트에 비해서도 완전히 후퇴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꽁트는 제 제도의 진보적 발전 중에서 중세가 수행한 중요한 역할 - 그것은 당시 프랑스에서 너무도 등한시된 관념이었다 -을 이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 더욱이 이 점은 가장 중대한 오류였지만 - 스펜서는 헉슬리와 기타의 여러 사람들과 같은 식으로 생존경쟁의 의미를 전혀 부당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즉 그는 이종의 동물간의 싸움[늑대가 토끼를 잡아먹고, 많은 조류가 곤충을 먹으며 살고 있다는 등의] 뿐만 아니라 각각의 종의 내부에서 동일종에 속하는 개체간에 있어서의 생존수단을 둘러싼 격렬한 싸움으로서 생존경쟁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스펜서나 기타의 다윈주의자들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격렬한 투쟁은 물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부당한 생존경쟁관에 다윈 자신이 얼마만큼 책임이 있는가를 여기서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은 확실하다. 종의 기원이 나오고서 12년이 지나 다윈이 인류의 기원을 썼을 때 그는 생존경쟁이란 개념을 각개의 종의 내부에 있어서의 격렬한 투쟁이라기보다 훨씬 광범위의, 좀 더 비유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이 제2의 저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상호적 동정과 사회성의 감정이 가장 잘 발달하고 있는 동물의 종은 자기의 생존을 보존하고 또 많은 자손을 남기고 보다 많은 기회를 가진다.”.

그리고 그는 각개 개체가 지닌 사회적 본능이 자기보존의 본능보다 훨씬 강력하고 항상적일뿐더러 훨씬 활발하다고 하는 생각을 전개하기조차 했다. 이러한 견해는 몇 사람의 다윈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정반대다.

인류의 기원에서 다윈이 이 문제를 다룬 여러 장은 일반적으로 인간사회의 성질과 발달에 관한 극히 시사示唆적인 관념을 만들어낼 기초로 될 수 있었을 것이다[이를테면 괴테는 근소한 사실에 기초하여 이것을 벌써 예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여러 장은 주의를 끌지 않고 간과되어 왔다. 그러다가 겨우 1879년에 이르러서야 러시아의 동물학자 케스레르가 행한 강연에서 생존경쟁과 상호부조와의 사이에 자연 속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발견한다.

종의 진보적 진화를 위해서는’ - 그는 약간의 예를 들면서 말한다 - ‘상호부조의 법칙은 상호투쟁의 법칙보다 훨씬 큰 의의를 갖고 있다.

그로부터 1년 지나 라느산은 생존경쟁과 투쟁을 위한 결합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때를 같이해서 뷔히네르사랑이란 저작을 간행했는데 거기서 그는 최초의 도덕적 관념의 발달에 대하여 동물간의 동정심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다만 그럴 적에 그는, 오로지 친자 간의 사랑과 보살핌의 정에만 주목한 결과 자기의 탐구의 범위를 공연스레 좁히게 되고 말았다.

나는 1890년에 졸저 상호부조론에서 케스레르의 이념을 논증, 발전시켜 정확한 자연관찰과 인간의 제도사制度史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 의거하면서 이 이념을 인간에까지 확대했는데 그것은 손쉬운 과제였다. 상호부조는 실제로 동물의 개개의 종이 그들에 적대적인 자연력에 대하여, 또한 다른 적대적인 종에 대항하여 자기의 생존경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도구였을 뿐더러 동시에 진보적 진화의 주요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상호부조는 가장 약한 동물에 대해서조차 오래 사는 기회를 [따라서 또한 경험의 축적을] 주고 그들에게 자손과 지적 발달을 보증한다. 그 결과 상호부조를 보다 많이 실행하는 동물의 종이 다른 종보다도 살아남을 뿐더러 그것들이 육체적 구조와 지적 발달의 우월성의 덕택으로 - 각기의 강[곤충류, 조류, 포유류] 중에서 - 1등의 지위를 차지하는 소이연所以然이다.

스펜서는 자연의 이 근본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각기의 조이 내부에 있어서의 생존경쟁, 한 조각의 식물食物을 둘러싼 이빨과 발톱을 갖고서 하는사정없는 싸움을, 스펜서는 아무런 증명도 요하지 않는 원리로서, 공리公理로서 승인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이 검사劍士의 피로 더럽혀진자연이라 묘사한 것이 동물세계에 관한 스펜서의 관념이었다. 겨우 1890년이 되고서야 그는 19세기지상誌上에 발표한 논문에서 어느 정도까지 동물의 세계에서의 상호부조[오히려 동정의 감정]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이 방면에서의 사실의 수집과 관찰에 착수했다. 그러나 스펜서는 마침내 죽을 때까지 원시인을 이빨과 발톱에 의한이웃사람의 수중에서 먹이의 최후의 한 조각까지 탈취함으로써 생존을 유지하는 야수와 같은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릇된 전제를, 결론을 도출하는 기초로서 승인한 스펜서가, 일련의 오류와 미망에 빠짐이 없이 자기의 종합철학을 구성할 수 없었음은 명백한 일이라 하겠다.

 

 

 

 

 

 

 

 

 

 

 

 

 

 

 

 

 

7. 사회에 있어서의 법의 역할

 

이러한 오류에 빠진 것은 스펜서만이 아니었다. 홉스에 충실한 19세기의 전 철학은 원시인을 금수의 무리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들은 소가족으로 분립하여 살며 상호간에 식물과 여자를 구하여 싸우고 있어 자비로운 권력이 나타나서야 비로소 그들 사이에 평화가 도입되는 것으로 보기로 고집해 왔다. 헉슬리와 같은 박물학자마저 이러한 홉스의 터무니없는 견해를 반복하여 [1885년에]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 즉 소수의 우수한 개인들에 의하여 최초의 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인간은 당초 만인에 대한 각인의싸움을 하며 살고 있었다고 [그의 논문 생존경쟁-자연의 법칙참조]. 이처럼 헉슬리와 같이 학식 있는 다윈주의자마저 사회가 인간의 손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동물계에 인간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벌써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선입견의 뿌리 깊음은 이처럼 강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선입견의 역사를 더듬어 간다면 그 근원이 종교 속에 있다는 것은 쉽게 발견될 것이다. 요술자妖術者, 기우사祈雨師, 샤만교의 주사呪師, 내려와서는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승려, 그 후는 그리스도교의 목사 등의 비밀결사는 항상 일반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믿게끔 하려고 노력해 왔다. 세계는 죄 속에 매몰되어있어 주사나 요술사나 성자나 목사들에 의한 인자한 개입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악의 힘이 인간을 사로잡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그들만이 인간이 범한 죄를 벌하기 위하여 온갖 불행을 인간의 머리 위에 퍼붓는 일이 없도록 마신魔神을 달랠 수 있다고.

원시 그리스도교는 확실히 승직자僧職者에 관한 이러한 선입견을 약화하려고 했다. 헌데 그리스도교회는 영원의 불에 대한 복음서 자체의 말씀에 의거함으로써 도리어 그것을 강화하고 말았다.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가사자可死者로서 이 세상에 강림했다는 신의 아들 예수라는 관념 자체도 역시 이러한 견해를 확인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후 성스러운 종교재판소에 대하여 그 희생자들에게 극히 잔인한 고문을 가하는 것을 허락하고 천천히 회개할 시간의 여유를 줌으로써 저 세상에서의 영겁의 고통을 면하게 한다는 구실 아래 희생자들을 화형에 처하여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더욱이 가톨릭교회만이 이런 방식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원리에 충실한 모든 그리스도교회는 투성이로 된 인간들을 교정하기 위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새로운 고문과 공포를 발명했다. 지금도 천사람 중의 구백구십구 명까지가 한발旱魃, 지진, 역병疫病 따위의 자연 재해는 죄 많은 인류를 정도正道로 바로잡기 위하여 모종의 신이 하늘에서 내리신 업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국가는 그 대학에서 타고난 사악한 성질이란 신앙을 지지해 왔고, 지금도 역시 지지하고 있다. 사회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필요성과 도덕법’[그것은 교묘한 바꿔치기로 성문법과 동일시되게끔 만들어진다.]의 침범에 대하여 과하여지는 형벌에 의하여 사회 속에 도덕적 요소를 고취하기 위하여 작용하여야 할 권력의 필요성을 논증하는 것, 그리고 이 권력이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끔 하는 것, 그것은 국가의 사활에 관한 중대 문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사람들이 강권의 힘으로 도덕적 원리를 부식할 필요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당장 지배자들의 고매한 사명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말겠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전 교육 - 종교적, 역사적, 법률적, 사회적인 전 교육은 인간이 만약에 그들이 제멋대로 방치될 것 같으면 야수로 타락하고 만다고 하는 사상으로 침투되어 있다. 강권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서로 물어뜯을 것이다. ‘군중에게서 기대되는 것으로서는 단 한 가지 야수성과 만인에 대한 각인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이들의 군중은 만약 그들 위에 선정된 사람들 - 승려, 입법자, 재판관 및 그들의 조수인 경관과 사형집행인이 없었던들 반드시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반적 전투를 못하게 제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이야말로 사람들을 교화하여 법률을 존중케 하고, 규율을 학습케 하고, 사람들의 고집 센 마음속에고상한 관념이 발달하여 언젠가는 형태刑笞와 감옥과 교수대가 금일보다 그 필요성을 감하게 되는 날까지 사람들을 엄격히 지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1848년에 추방된 어떤 왕이 가련한 나의 신민들이여! 짐이 없으면 너희들은 멸망하리라고 말한 것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우리는 또 자기네 영국인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일족의 자손이고, 그런 까닭으로 열등 인종위에 군림하여 선정을 베풀어 줄 의무가 있다고 믿고 있던 영국의 한 상인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헌데 과연 우리는 이와 같은 과대망상적 자부심을, 어느 국민이건 대다수의 잘난 체하는 치들 속에서 발견하는 일이 없을 것인지.

 

이와 반대로 인간사회와 제도의 발달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이상과는 전혀 다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상호부조와 방위 및 평화를 일반적으로 확보할 목적으로 인류가 창조한 습관이나 풍속은 대개 이름도 없는 군중에 의하여 산출되었다는 것이 곧 그 결론이다. 그리고 이 습관이야 말로 금일 생존하고 있는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해서도 또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를 가능케 한 바의 것이다. 소위 인류의 지도자, 영웅, 입법자들은 사회 속에 관습법에 의하여 만들어져 온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역사에 첨가하지 않았음을 과학은 우리에게 명시하고 있다. 그들 중의 최량의 지도자, 영웅, 입법자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조차 이들의 관습법적 제도에다 형태를 부여하고 그것을 인가했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의 자칭 비호자庇護者들의 태반은 그들의 개인적 권력의 형성을 방해하는 그런 관습법적 제도를 타파하거나 아니면 자기의 개인적 이익 또는 자기의 계급의 이익에 합치하게끔 그것을 개악하려고 어느 시대에나 노력했던 것이다.

빙하시대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아득히 먼 태고시대에도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사회 속에서 소중히 준수되어온 일련의 습관과 제도들이 만들어져 공동생활이 가능케 되고 있었다. 그 후도 인류발달의 전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조건들이 발생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생활, 상호부조, 평화의 보장이 이들의 이름도 없는 군중의 창조력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과학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아주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즉 일체의 법률은, 그 상상의 기원이 어떠한 것이건 간에 - 그것이 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되건, 혹은 또 그것이 현명한 입법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논하여지건 - 여하튼, 일체의 법률은 기존의 관습을 고정하여 항상적恒常的 형태로 결정結晶시키거나 아니면 그것을 확대하거나 했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릇 고대 법전은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자로 기록되거나 혹은 돌에 새겨 넣어진 관습과 전승傳承의 수집에 불과했다. 다만 이 경우 법전은 이미 만인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습 외에 무장한 호전적 소수의 부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약간의 새로운 규칙을 부가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들의 소수자에게 유리한 불평등과 예종隸從의 새로운 관습은 이러한 법규에 의하여 강화되도록 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모세의 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 죽이지 말라, 너희들 훔치지 말라, 너희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그런데 이들의 훌륭한 행동의 규칙에다 그는 이렇게 부가했던 것이다. ‘너희들 이웃사람의 처, 그의 노예, 그의 당나귀를 취하지 말라.

이리하여 그 결과 모세의 입법은 오래도록 노예제를 합법화함과 함께 부인을 노예나 태마?馬와 같이 다루기를 허락한 것이다. 그 후 그리스도교는 너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했다. 헌데 여기서도 당장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부가되었다. ‘노예는 자기의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 ‘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력은 없다. - 이와 같이 해서 주인과 노예와의 구별을 합법화하고, 신성화하고, 당시 로마를 지배하고 있던 악당들의 권력을 성화聖化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진수라 할 만한 용서라는 지고의 이념을 가르치는 복음서조차 다른 편으로는 언제나 복수하는 신에 관하여 말하고 그것에 의하여 복수를 설교하고 있다.

로마제국 몰락 후의 이른바 만족蠻族- 고르인 , 론고바르도인, 게르만인, 색손인, 슬라브인 -의 법전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들의 법전은 일찍이 행하여지고 있던 복수의 법칙[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를, 상해에는 상해를, 죽음에는 죽음을] 대신에 당시 일반으로 보급되어 있던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관습, 즉 상해나 살해에 대하여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관습을 입법화했다. 이와 같이 만족의 법전은 씨족시대에 지배한 혈수제血讐制와 비교하면 진보한 것이기는 했다. 허나 동시에 그것은 이 시대에 희미하게 나타난 자유인의 계급 분화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노예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고 [이 경우 배상금은 노예의 주인이 받는다], 자유인의 경우는 얼마, 수장首長의 경우는 얼마의 금액을, 이런 식으로 이들의 부족법전은 규정했다. 후자의 경우 배상금은 가해자에 대하여 필생의 노예를 의미할 만큼 고액이었다. 이와 같은 배상액의 차이가 규정되도록 된 애당초의 사상은 틀림없이 싸움에서 살해된 수장의 가족은 가장을 살해당한 보통 자유인의 가족의 경우보다 훨씬 많은 것을 잃었다고 하는 데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전자는 후자보다 더 많은 배상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이 법률로 전화轉化함과 함께 인간의 계급분화는 그 후 오래 합법화하게 되고 금일까지 우리는 이러한 분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만큼 견고하게 법제화하는 결과로 되었다.

이것과 같은 것이 금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입법에서도 또한 발견된다. 말하자면 전시대에 행하여진 억압이 입법화되어 항상 그 뒷시대에 전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페르시아제국의 부정은 그리스에 전해졌다. 마케도니아의 부정은 로마로 이행했다. 로마제국과 동방의 참주제僭主制의 압제와 잔학은 갓 생긴 어린 만족의 여러 나라와 그리스도교회에 전송傳送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 과거는 법률에 의하여 미래를 얽어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 필요불가결한 보장의 전부, 민족적 생활양식이나 농촌공동체나 중세 제 도시에서의 사회생활 형태 등의 전부, 또한 부족간의, 내려와서는 그 후 국제법의 기초로 된 공화제 도시간의, 관계의 전 형태 - 한마디로 말해서 배심원의 재판제를 포함한 상호부조와 평화옹호의 형태의 전부는 무명의 민중의 창조적 천재가 산출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고대의 법전에서 금일에 이르는 모든 법률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에서 구성되고 있다.

즉 그 하나는 만인에 의하여 유익한 것으로 승인된 일정한 관습적 생활형태를 확인, 고정시킨 것이다. 다른 편으로, 둘째 요소는 기존 관습에다 붙인 부가물 - 그것은 종종 단순한 부가물이긴 하나 음험한 방식으로 기존 관습을 정식화定式化한 것으로서, 그 의도하는 바는 주인, 전사, 왕후王侯, 승려 등의 발생 도상의 권력을 착안시켜 굳혀 놓는 데에, 즉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신성화하는 데에 있다.

과거 40년간에 행한 사회발전에 관한 양심적인 많은 학자들의 과학적 연구는 이상과 같은 결론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준다. 앞에서 말한 그러한 이단적 결론을 학자들 자신이 대담하게 정식화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들의 노작을 읽고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것은 필연적이다.

 

 

 

 

 

 

 

 

 

 

 

 

 

 

 

 

 

 

 

 

 

 

 

 

8. 근대과학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지위

 

아나키즘은 19세기의 위대한 지적 운동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앞에 나온 여러 장에 논술한 바에서 시사되고 있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포함시켜 전 자연을 포괄하는 현상의 역학적 해명에 바탕을 둔 우주관이다. 그 연구방법은 자연과학의 방법이니 이 방법에 의하여 일체의 과학적 결론이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경향은, 자연은 온갖 현상 - 인간의 사회생활과 그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 문제를 포함시켜 -을 포섭하는 종합철학을 기초 닦음, 그럴 적에 전술한 바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꽁트나 스펜서가 범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서 그것을 수행함에 있다.

그런 까닭에 아나키즘은 분명코 근대생활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에 대하여 여태껏 낡은 형이상학적 신앙에서 해방되지 못한 정치적 당파나, 또한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로는 사회주의적 당파가 제공하는 해답과는 다른 해답을 주고 또한 이들의 당파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자연과 인간사회의 완전히 역학적인 관념의 구성은, 사회생활과 그 발달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학적 부문에서는 이제 막 착수했을 뿐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립된 몇 가지 성과는 -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었음에 불과하다 - 전술한 성격을 벌써 띠고 있다. 법철학에서도, 도덕이론에서도, 경제학에서도, 또한 제 국민과 제 제도의 역사연구에 있어서도, 아나키스트들은 형이상학적 결론에 만족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결론의 자연과학적 기초 붙임을 탐구하는 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헤겔, 쉘링, 칸트 등의 형이상학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로마법이나 교회법의 주석자註釋者, 학식 있는 국가법의 교수들, 형이상학적 정치경제학자들의 영향 아래 서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연과학자의 견지에서 최근 4,50년간에 수행된 일련의 업적에 입각하면서 이들의 학문 영역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에 대하여 명쾌한 답을 주려고 노력한다.

각종 형이상학적 관념, 이를테면 세계정신’, ‘창조적인 자연력’, ‘물질의 사랑의 흡인력’, ‘이념의 화신’, ‘자연의 목적과 그 존재 이유’, ‘불가지적不可知的인 것’, ‘정신의 영기靈氣에 고취된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된 인류따위의 관념이 이제야 유물론적인[역학적 내지 동력학적] 철학에 의하여 포기되고 이들의 용어의 배후에 감추어진 일반화의 맹아가 구체적인 사실의 언어로 번역되었듯이, 우리는 사회생활의 사실에 대할 때,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해 가려고 한다.

형이상학자는 인간의 지적 생활과 감정생활이 정신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라고 자연과학자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는 이와 같은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명?지식?감정의 제 현상에 대한 자기네의 연구를 참을성 있게 추진하여 이것들이 모두 물리적, 화학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들의 자연법칙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이와 똑같이 헤겔의 학설에 따라 일체의 진화는 ??을 표현한다느니 법의 목적은 정의의 확립이고, 그것은 지고의 이념의 물적 실체화라느니 하는 따위의 설교를 아나키스트에게 들려줄 때, 혹은 또 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라고 아나키스트에게 질문할 때, 그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자연과학이 현대처럼 발달하고 있는데 여전히 이러한 케케묵은 것을 믿고 있는 낡아빠진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 것은, 또한 자연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물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으로 자연을 본 원시적 미개인의 말투로 여태껏 지껄이고 있는 뒤떨어진 인사가 현재도 생존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라고.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듣기 좋은 말에 승복하는 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들은 언제고 반드시 단지 무지無知- 즉 불완전한 연구를 - 감추는 것이거나 아니면 더욱 나쁘지만 미신을 감추는 데에 유용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가 이런 종류의 말을 들을 때 그들은 그것을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흘려버린다. 그들은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사회관념 및 제도의 연구를 계속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발전은 이들의 형이상학적 정식을 갖고 판단할 때 생각하기보다 사실인즉 훨씬 무한히 복잡한 [또한 실천적 목적에 대하여 일층 흥미로운] 것임이 명백하다.

 

우리는 최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구성함에 있어서 추존하는 변증법적 방법이란 것에 대하여 다변多辯을 농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어느 자연과학에 의해서도 이것이 승인되지 않듯이, 우리도 이 방법을 승인하지 않는다. 금일의 자연과학자에 대하여 이 변증법적 방법이란 것은 오래전에 이미 사멸한 것, 다행히 과학의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인 것을 상기시킨다. 19세기에 있어서의 여하한 발견도, - 역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에 있어서의 어느 발견도 변증법적 방법에 의하여 성취된 것은 아니다. 무릇 이들의 발견은 유일의 과학적 방법인 귀납법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의 개인적 및 사회적 생활은 꽃의 피어남과 같이, 또한 개미나 벌의 사회생활의 발전과도 같이, 자연적 현상이니까 우리가 꽃에서 인간으로, 또한 해리海狸의 정주지定住地에서 인간의 도시로 연구를 진행해 나갈 때, 지금까지 우리의 연구에 극히 유효했던 방법을 저버리고 형이상학의 영토에서 다른 방법을 빌려올 까닭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연구에 사용된 귀납법은 그 효능이 입증되었고, 19세기 백년간에 그 이전의 과거 이천 년에 걸친 기간에 있어서 보다도 더 많은 과학의 진보를 가져왔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인간사회의 연구에 이 방법이 적용되기 시작했을 때, 이것을 버리고 헤겔이 부활시킨 중세 스콜라철학으로 되돌아가도록 요구되는 어느 대목에도 마주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자기의 부르주아적 교육을 신봉한 자연과학자들이 다윈주의의 과학적 방법에 의거한답시고 우리에게 설교하기를 너희보다 약한 자를 모두 절멸하라. 이야말로 자연의 법칙이다라고 말할 때에도 이들의 학자가 사도邪道에 빠지고 있다는 것, 그 따위 법칙은 있지 않다는 것, 자연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 이러한 결론은 전면적으로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동일한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손쉽게 논증할 수 있었다. 우리들로 하여금 믿게끔 만들려고 하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즉 부의 불평등은 자연의 법칙이고 자본주의적 착취는 훨씬 유리한 사회조직의 형태라고 하는 명제 말이다. 다름 아닌 자연과학의 방법을 경제적 사실에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과학 - 정치경제학을 포함해서 -의 이른바 법칙이란 것은 법칙 근처에도 못간 것이고, 단순한 주장 또는 가설에 불과할 뿐더러 아직 실제로 검증된 일조차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두서너 가지 더 부언하겠다. 과학적 연구가 풍부한 성과를 가져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 있어서다. 즉 연구가 일정한 목적을 갖고 또 그리고 특정의 정확히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코자 하는 의도를 갖고서 계획된 때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연구는, 해결을 위하여 제기된 문제와 우리의 세계관의 기본선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명료하게 이해되면 될수록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문제가 우리의 세계관의 일반적 테두리 속에 확고히 편입될수록 그 해결도 보다 용이한 것으로 된다.

그런데 아나키즘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겠다. 여하한 사회형태가 소여所與의 사회에 있어서, 따라서 또한 인류 일반에 있어서 행복의 최대량을, 그런 까닭으로 또한 생활력의 최대량을 가장 잘 보증할 것인가’ - 나아가 여하한 사회형태가 가장 잘 이 행복의 총계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발달 시킬 것인가, 즉 행복을 보다 완전하고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 되게 할 것인가라고.

이것은 또 겸하여 진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진화를 이러한 방향으로 촉진시키고자 하는 소망이 아나키스트의 사회적, 과학적, 예술적 등등의 활동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9. 아나키스트의 이상과 선행의 제 혁명

 

아나키즘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실제생활의 지시하는 바에서 나온 것이다.

1789?93년의 프랑스대혁명의 동시대인인 고드윈은 혁명기에 혁명의 제력諸力에 의하여 탄생한 정부 권력이 이번에는 역으로 혁명운동의 발달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으로 된 사정을 그의 눈으로 직접 목도했다. 그는 또 영국 의회의 그늘에 숨어서 영국에서 무엇이 행하여지고 있었던가를 알았다. 그것은 공유지의 강탈이고, 유리한 정부 관직의 매매이고, 빈자의 아이들이 영국 전국에 파견된 특별 계원에 의하여 모집되어 작업장에 몰아세워지고 랑카시아의 공장에 보내어지고, 거기서 떼를 지어 죽어 갔다는 것 등이었다. 고드윈은 또 다음 사실을 이해했다. 즉 정부는, 가령 그것이 자코뱅당의 유일 불가분의 공화국이라 하더라도, 필요한 혁명을 - 사회적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는 것, 혁명정부라 할지라도 모든 정부가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의 수호자이고 특권의 보존자라는 이유 만에 의해서도 머지않아 혁명의 장애물로 전화轉化한다는 것이다. 혁명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법률, 권력, 질서, 재산권 기타 노예적 과거로부터 계승한 각종의 미신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아나키즘의 사상을 고드윈은 이해하고 표명했던 것이다.

고드윈 뒤에 나타난 제2의 아나키즘 이론가 푸르동은 1848년의 좌절한 혁명을 체험했다. 그도 역시 그의 눈으로 공화국 정부가 범한 범죄를 바라보고 동시에 루이 블랑의 국가사회주의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확신했다. 1848년의 운동기간에 얻은 체험의 생생한 인상 아래 그는 (19세기에 있어서의) 혁명의 일반적 이념을 쓰고 여기서 대담하게 국가의 폐지와 아나키를 선언했다.

끝으로 인터내셔널에 있어서도 아나키즘의 이념은 마찬가지로 혁명 직후 즉 1871년의 파리코뮌 뒤에 성숙했다. 코뮌의 평의회 - 그것은 당시의 전 혁명당파의 대표[자코뱅주의자, 블랑키스트, 국제주의자 등]를 매우 적절한 비율로 포함하고 있었는데 -의 완벽한 혁명적 무력, 런던에 설치된 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의 마찬가지 무능 및 영국에서 발송하는 지령에 의하여 파리의 운동을 지배하려고 하는 어리석고도 유해한 요구권 - 이와 같은 두 가지 교훈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었다.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바쿠닌을 포함한 인터내셔널의 여러 성원들은 일체의 권력의 해독에 대하여 - 비록 그것이 코뮌이나 노동자의 인터내셔널에 있어서처럼 자유로 선출된 것이라 할지라도 - 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로부터 몇 달 지나, 매년 개최하도록 된 대회 대신에 1871년에 런던에서 가만히 소집된 비밀 협의회 석상에서 채택된 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의 결정은 노동자의 국제결사에 구축된 정치권력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백일하에 폭로했다. 이 불행한 결의의 결과, 그때까지 경제적 혁명적 투쟁, 즉 고용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조합의 직접투쟁에 기울여 왔던 인터내셔널의 힘은 정치운동과 선거와 의회운동으로 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힘이 헛되이 낭비되고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의는 런던의 총무위원회에 대한 라틴연합 - 스페인, 이탈리아, 쥬라 및 베르기의 일부에 의한 공공연한 반항을 일으켰다.[프랑스에서는 인터내셔널은 엄중히 금압되고 있었다.] 아나키즘운동은 이 반항에서 발생하여 금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아나키즘운동은 언제나 어떤 거대한 실천적 교훈의 인상을 받고 발생했다. 그것은 생활 자체의 훈계에서 나온 것이다. 허나 일단 발생하고 보면, 그것은 즉시 자기의 이론적, 과학적 표현과 기초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과학적이라 함은 불가해한 은어隱語로 가장하지도 않거니와 케케묵은 형이상학과 결부하는 것도 아니라 그 시대의 자연과학 속에 자기의 기초를 발견하고 스스로도 자연과학의 한 부문部門으로 전화하려고 한다는 의미다.

 

동시에 아나키즘은 자기의 이상의 전개를 위하여 꾸준히 일했다.

어떠한 투쟁도, 만약 그것이 무자각한 것이라 한다면 - 만약 그것이 자기의 목적의 구체적, 현실적 파악을 결하여 있다면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파괴와 파괴로 이끌어가는 투쟁의 시기에, 파괴하려고 하는 것 대신에 출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 관념을 마음속에 갖고 있을 것, 이것이 긴요하다. 현재 존재하는 것 대신에 새로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에 관한 다소나마 명확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지 않고서는 지금 존재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비판하기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현존제도의 비판자라면 누구나 그 심중에 의식적으로선 무의식적으로건 이상 - 즉 보다 나은 것에 대한 관념 -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자본주의를, 또는 전제주의를 파괴하자. 그런 뒤에 무엇이 그 뒤에 올 것인지 알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는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만에 의하여 힘이 산출된 예는 없다. 사실인즉 이렇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그가 공격하는 것 대신에 새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에 관하여 얼마쯤의 관념을 품고는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러시아에서 전제주의를 파괴하기 위하여 몸을 바친 투사들의 어떤 이는 가까운 장래에 영국형 또는 독일형의 헌법의 수립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다른 이는 아마도 자기네의 당의 강력한 독재 아래 종속하는 공화국을, 또는 프랑스형의 군주주의적 공화국을, 혹은 또 북미합중국형의 연방공화제를 꿈꾸고 있다. 끝으로 제3의 사람들은 국가권력을 일층 제한할 것을 - 즉 서로 연합의 메뉴대로 결합된 각 도시, 코뮌, 노동조합 및 기타 모든 집단에다 보다 큰 자유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사람은 누구나, 현재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에 대체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서의 명료한 또는 막연한 무엇인지의 관념을 갖고 있다. 즉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면 국가공산주의를, 그것도 아니라면 끝으로 농업생산물과 공업생산물과의 생산, 교환, 소비를 위한 다소간에 공산주의적 결사의 관념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각 당파는 이와 같이 미래에 관한 자기의 관념을 갖고 있다. 그것은 국민의 정치?경제생활의 일체의 사실에 대하여 각 당파가 제각기 판정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상이고 그것은 또 각 당파가 그 이상에 접근하고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좀 더 잘 전진하기 위한 행동수단을 발견케 한 것이다.

아나키즘은 일상투쟁 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나키즘도 또한 애써 자기 자신의 이상을 구상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이 이상, 이 목적, 이 희구는 그것을 달성하는 행동수단의 면에서 아나키스트들을 마침내 다른 일체의 정치적 당파로부터, 마찬가지로 또 대개의 경우 사회주의적 당파로부터도 분리시키게 되었다. 왜냐하면 후자의 제 당파는 구래舊來의 로마적?교회법적 국가의 이상을 보유하고 이것을 그들이 꿈꾸는 미래사회로 전하여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10. 아나키즘

 

각종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고찰에 이끌려, 그리고 또 최근의 역사의 교훈에 유의하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나키스트는 국가권력을 수중에 넣으려고 노력하는 일체의 정치적 당파와는 전혀 다른 사회관을 구성하게 되었다.

우리가 마음속에 그리는 사회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거기서는 각 성원간의 관계가 과거의 억압과 횡포의 유산인 법률에 의해서 규제되지를 않고 또한 일체의 권력자[그 권력이 선거에 의하여 얻어졌건 상속권에 의하여 얻어졌건 간에]에 의해서 규제되는 일이 없이, 오로지 자유로 성립한 상호의 합의에 의하여,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자유로 승인된 습관이나 풍습에 의하여 규제되는 그런 사회이다. 이들의 습관은 법률이나 미신의 영향아래 경화되거나 고정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생활의 새로운 제 요구와 과학 및 발명의 진보에 부응하고 또한 점점 합리적으로 되고 점점 숭고한 것으로 되어 가는 사회이상의 발달에 일치하여 부단히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하여 - 여기에는 남에게 자기의 의지를 강제하는 아무런 권력도 없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도 없고, 생활에 있어서의 일체의 정체도 없다. 거기에는 자연의 생활 자체에 보이는 바와 같은, 어떤 때는 빠르게 어떤 때는 느리게 진행하는 끊임없는 전진이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각 개인에게 행동의 자유가 허용되고 각자 타고난 천분을 그리고 그 개성을 - 요컨대 각자 자기 속에 갖고 있는 독자적 개성적인 것을 피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하한 행위도 사회적 형벌의 공포나 초자연적인 신비적 보복의 두려움에 의하여 개인 위에 과하여지는 일은 없다. 사회는 개인에 대하여 이 개인이 소여 시점에 수행하기를 자발적으로 승낙 아니 하는 일을 일체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함께 만인에 대하여 완전한 평등의 권리가 주어진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강제도 없는 평등인의 사회를 승인한다. 더욱이 이러한 일체의 강제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평등인의 사회에서는 성원의 반사회적 행위가 사회에 대하여 중대한 위협으로 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자유인들로 구성된 사회는 현대의 우리들의 사회보다도 훨씬 잘 이들의 반사회적 행위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금일의 사회는 사회도덕의 옹호를 경찰, 스파이, 감옥 - 요컨대 그것은 범죄의 대학인 바 - 간수, 사형집행인 및 재판관들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반면, 자유인의 사회는 무엇보다도 반사회적 행위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금일까지 이들의 기본원칙을 실제로 실현한 사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들의 원칙을 실현시키려는 희구는 어느 시대에나 인류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일류의 어떤 부분이, 비록 일시적이나마 종래에 그들을 억압해 온 권력을 전복시키는데 성공했을 때, 혹은 또 뿌리를 내린 불평등[노예제, 농노제, 전제, 일정한 카스트 또는 계급의 지배권]을 배제하는데 성공했을 때, 그리고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빛이 사회에 침투했을 때, 이런 때에는 언제나 민중이, 억압된 사람들이, 전술한 기본원칙을 비록 그 일부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실현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하나의 사회이상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항상 사람들을 지배하고 사람들에게 법률을 규정해 주기를 바라왔던 거의 모든 철학자, 정치가들이 고취해온 것과는 본질적으로 질이 다른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아나키즘은 일찍이 한 번도 특권계급의 이상이었던 일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때에 따라 다소간 자각한 대중의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아나키즘의 사회이상을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금일의 용어법으로 말하면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란 의미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유토피아란 말은 저술가가 이론적으로 바람직하다고 관념한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회관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할 것으로, 사회 속에 성취되고 있는 사물의 관찰에 기한 관념에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플라톤의 공화국, 법왕들이 몽상한 보편적 교회, 나폴레옹의 제국, 비스마르크의 몽상, 신생이란 위대한 이념을 초래해야할 구세주의 출현을 대망하는 시인들의 메시아니즘 등이 곧 그것이다. 그렇지만 아나키즘과 같이 사회의 진화 속에 이미 나타나고 있는 제 경향의 연구에 기초를 둔 미래상에다 유토피아란 말을 적용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여기서 유토피아적 공상의 영역을 벗어나 과학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경우, 유토피아 운운하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은 경향이 재삼 인류사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으니만큼 더욱 더 그릇된 견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향이야 말로 이른바 관습법 - 즉 유럽에서 5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기간에 통용해온 법의 원천이 되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경향은 3세기 간 국가적 생활형태의 실체를 견문한 후, 이제야 다시금 문명사회 속에 대두하게 되었다. 문명사를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라고 그 중요성을 간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아나키즘이 가능한 이상, 실현될 수 있는 이상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이상이 실현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다, 라고. 하지만 이 말에 대하여 우리는 잠깐 18세기 말의 일을 상기해 보자. 북미합중국이 건국된 일 말이다. 군주제 이외의 방식으로 상당히 광범위한 영토에 걸친 사회를 구축코자 하는 희구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보였던 것이다. 헌데 이제는 남북 양 아메리카의 여러 공화국들이, 다음으로는 프랑스공화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은, 공화주의자 쪽이 아니라 군주주의자 쪽이 바로 유토피안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유토피안이란 자기의 개인적 소원에 지배되어서 이미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경향을 주시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는 벌써 과거의 것으로 되어버린 사물에다 지나친 안정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과거적, 일시적인 역사적 조건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연구의 첫 대목에서 말했듯이, 아나키즘적 사조의 기원을 더듬어 보면, 우리는 언제나 그 주요한 원천으로서 다음 두 가지에 마주친다. 즉 한편으로는 계급적 조직과 권력관 일반에 관한 비판이고, 다른 한편은 과거의 그리고 특히 현재에 있어서의 인류의 전진적 운동 속에 발견되는 경향의 분석이다.

아득히 먼 석기시대로부터 이제까지 인간이 자기네의 동료 중의 어떤 자에게 - 비록 그가 가장 지식이 있고 대담하고 현명한 자라 할지라도 - 일단 권력의 보유를 허락하고 보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 생각이 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은 자고로 이러한 권력의 확립을 막기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내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들의 부족이나 민족, 내려와서는 농촌의 공동체와 중세의 길드[인접 주민의 길드, 수공업이나 기예技藝의 길드, 상인의 길드, 사냥꾼들의 길드 등등], 그리고 끝으로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각 자유도시 - 이것들은 모두 민중 속에서 일어난 제도였다. 그것들은 외래의 정복자들이나 혹은 또 그들 자신의 씨족, 부족 도시의 개개 성원들이 자기의 수중에 권력을 휘어잡는데 대항하기 위하여 민중 자신에 의하여 -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 수립된 제도들이다.

마찬가지의 민중의 경향은 전 유럽의 민중적 종교적 운동 속에, 종교개혁의 선구가 된 보헤미아의 후스 일파의 봉기나 아나밥티스트[재세례파]의 운동 속에 나타나 있었다.

그 후 1793?94년에는 프랑스에서 다시금 마찬가지 사조와 행동이 파리의 각 와 기타 대도시 및 숱한 소 코뮌의 자못 독립적이고 건설적인 활동 속에 보인다. 다시 그 후 영국과 프랑스에 근대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때, 가혹한 탄압법을 물리치고 이 두 나라에서 형성된 노동조합 속에 같은 경향이 나타났다. 여기서도 우리는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자기를 방위하려고 하는 똑 같은 민중적 정신작용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의 제 이념 - 고대 중세 - 푸르동 - 슈티르너

 

아나키스트적 성질을 띤 민중의 운동은 문헌 속에도 나타나지 않는바 아니다. 사실 우리는 고대 철학자들 중에 벌써, 즉 중국의 노자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티포스와 견유犬儒학파 및 제논과 스토아학파 중에 아나키스트적 제 이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민중 가운데서 나온 것이지 소수 귀족의 학자들 가운데서 싹튼 것은 아니었다. 뿐더러 이들의 학자는 민중의 운동에는 별로 동정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사상가들은 대개 민중의 운동을 언제나 고무해온 이 깊은 이념을 해명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철학자 또는 학자들은 강권적 경향과 계급제도적 규율의 정신 편에 서기를 택하는 것이었다. 과학의 여명기에도 그들이 즐겨 종사한 연구대상은 통치의 기술이었다. 따라서 아나키스트적 경향을 띤 철학자들의 수가 정말 얼마 안 된다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중의 한 사람의 철학자는 그리스의 스토아주의자 제논이다. 그는 (전제적) 정부가 없는 자유로운 공동체를 역설하여 그것을 플라톤의 공화국에 나타난 국가주의적 유토피아에 대립시켰다. 제논은 벌써 인간에 있어서의 사회성의 본능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본능은 이기주의적 자기보존의 본능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자연이 발달시킨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국경을 넘어 결합함으로써 전 세계적 코스모스를 수립하여 법률도, 재판소도, 사원도 필요치 않고 상호의 노력勞力을 교환하기 위한 화폐도 필요치 않게 될 시대를 예견했다. 그의 용어 자체도 금일 아나키스트들이 쓰는 표현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아르바의 사교司敎 마르코 지로라모 비다1553년에 국가에 대한 그리고 국가의 법률과 국가의 최고의 부정의에 대한 마찬가지의 반대론을 역설했다. 같은 사상은 후스주의자들[특히 15세기의 고에키]과 초기의 재세례파들, 그리고 9세기에 있어서의 그들의 선구자인 아르메니아의 합리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16세기 전반의 라브레, 17세기 말의 페느론, 특히 18세기 후반의 백과전서파 디도로도 같은 사상을 전개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그것이 프랑스대혁명 기간에 약간의 실천적 적용을 봤던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정치?경제적 원리를 처음 서술한 것은 1793년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고찰의 저자 영국인 윌리엄 고드윈이었다. 그는 아나키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 근본원리를 아주 훌륭히 밝혀 법률을 공격하고 국가가 필요치 않은 까닭을 논하고 재판소의 폐지에 의하여 비로소 진정한 정의가 - 즉 모든 사회의 유일의 진정한 기초가 달성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산권에 관해서 그는 뚜렷이 공유共有주의를 요구했다.

푸르동은 처음으로 [무지배자라는 의미에서의] ‘아나키란 말을 사용했고, 그리고 또 부자에 의한 빈자의 억압을 방어함과 함께 피지배자들을 통제 아래 놓으려는 그런 정부를 세우려고 하는 무익한 노력을 사정없이 비판한 최초의 인물이다.

푸르동은 국가사회주의의 모든 형태에 대한 적대자였다. 당시[19세기의 30년대 및 4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국가사회주의의 일당一黨파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래서 푸르동은 이와 같은 혁명의 전 계획을 맹렬히 비판했다. 로버트 오언에 의하여 제안된 노동권勞動券의 제도를 기초로 해서 그는 상호주의의 관념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바로 일체의 통치적 정부를 무용의 사족이 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푸르동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상품의 교환가치는 사회에 있어서 당시 각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서만 계산되는 것이므로 사회에 있어서의 상품의 전 교환은 노동권의 지불을 맡는 국민은행을 매개로 행하여 질 수 있다. 그리고 청산소는 각 은행이 금일 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국민은행의 전 지점의 수지결산을 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온갖 사람들에 의하여 교환되는 노동은 등가等價로 될 것이다. 뿐더러 국민은행은 생산자의 조합에 대하여 그 생산에 필요한 상당액을 화폐로서가 아니라 노동권으로 대부貸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부는 무이자로 된다. 왜냐하면 은행의 경비를 마련하는 데는 1년에 대부 총액의 1퍼센트 또는 그 이하로서 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이자 대부라는 제도에 의하여 자본은 그 유해한 성격을 상실하고 착취의 수단이 되기를 그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푸르동의 자기의 상호주의의 제도를 상세히 전개하여 국가와 (통치적) 정부가 불필요하고 유해하다는 사상을 사실로써 논증했다. 그럴 적에 그는 영국인의 선구자들이 있었음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의 강령의 경제학적 부분은 이미 1824년에 영국에서 저명한 경제학자 윌리엄 톰슨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었다[톰슨은 공산주의자로 되기 전에 상호주의자였다]. 또한 같은 사상은 그 후 영국의 톰슨 문하들 - 존 그레이(1825?1831), 호지스킨(1825?1832) J.T.블레이(1839)에 의해서도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저자는 푸르동과 그의 문하들처럼 아나키즘을 정식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 영국의 포크스웰 교수가 안톤 멘가의 주목할 만한 책 노동전수익권勞動全收益權[비엔나, 1886]의 영역에 붙인 서문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 사실 아나키즘의 사조는 이 시대의 영국 사회주의의 전체 속에 분명히 맥박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합중국에서는 조사이 워렌이 같은 경향을 대표했다. 그는 처음에 오언의 콜로니 뉴 하모니의 일원이었는데 그 후 공산주의의 반대자로 되고 1827년에 신시티에서 생산물을 노동시간으로 계산원 가치를 기초로 해서 노동권에 의하여 교환하는 상점을 열었다. 이러한 제도는 1865년에 이르기까지 공평상점’,‘공평점’, ‘공평가라는 명칭으로 존속했다.

생산에 소요된 노동량에 의하여 가치를 계산하는 방식에 기초하여 행하여지는 교환이란 이념은 독일에서도 1843년과 1845년에 모제스 헤스 및 칼 그륀에 의하여, 다른 한편으로 스위스에서는 빌헬름 마르에 의하여 주창되었다. 그들은 바이트링의 국가공산주의적 교설의 주장자들[그것은 프랑스의 바브프주의자들의 문하였다]에 반대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중에서 상당히 많은 동조자를 모으고 있던 바이트링의 국가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독일에서는 한 사람의 독일인 헤겔리안 막스 슈티르너[본명 요한 카스파 슈미트]가 나타나 1845년에 유일자와 그 소유를 냈다. 이 책은 그 뒤에 J.H 막케이의 손으로, 말하자면 재발견되어 아나키스트 서클에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의 일종의 선언문으로 간주되어 큰 선풍을 일으켰다.

슈티르너의 저작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고 또한 만약 권위주의적 공산주의가 승리를 거둔다면 수립되어질 터인 새로운 폭정에 대한 반역이다. 슈티르너는 분명한 헤겔학파의 형이상학적 사상가로서 사색하여 자아의 복권과 개인의 존엄성을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아모랄리즘[무도덕주의]’이기주의자의 조합을 논설한다.

그러나 이미 아나키스트 저작가들, 최근에는 프랑스의 V.바시 교수가 그 흥미로운 노작 아나키스트적 개인주의, 막스 슈티르너[파리, 1904]에서 지적했듯이, 이 종류의 개인주의는 완전한 발달을 사회의 전 성원에 대해서가 아니라 가장 유능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요구하는 것이어서 만인의 발달에는 무관심하다. 따라서 그것은 금일 국가의 비호 아래 소수 귀족이나 부르주아를 위해서 행하여지고 있는 교육독점의 가면을 쓰고 복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특권적 소수자에 대한 충분한 발달의 권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독점은 그것에 상응하는 독점적 입법에 의한 보호와 국가로 조직된 강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사실상 이들의 개인주의자의 요구는 그들 자신이 강하게 비판하는 국가와 권력이란 이념으로 불가피하게 후퇴한다. 그들의 입장은 스펜서나 맨체스터학파라 불린 경제학자들의 입장과 유사하다. 그들 역시 국가에 대한 맹렬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항상 국가를 최선의 보호자로 삼는 재산독점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시 국가의 전 기능을 승인하는 데서 끝나고 있는 것이다.

 

 

 

 

 

 

 

 

 

 

 

 

 

 

 

 

 

 

 

 

 

 

 

 

 

 

 

 

 

 

 

11. 아나키즘()

 

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사회주의 제 이념 -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자와 상호주의자

 

이상에서 우리는 프랑스혁명과 고드윈에서 시작하여 푸르동에 이르는 아나키즘 이념의 발전을 살펴봤다. 그 후의 발전은 국제노동자협회 - 즉 보불普佛전쟁 발발 직전의 1866?70년 간에 노동자에게는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고 부르주아에게는 크나큰 공포를 일으킨 이 협회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협회가 -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즐겨 주장하듯이 마르크스에 의하여 창설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지하듯이 그것은 1862년 런던에서 열린 제2회 만국박람회를 방문하러온 프랑스 노동자 대표들과 그들을 영접한 영국노동조합 대표 및 약간의 영국 급진파들과의 회견의 결과였다. 이 방문으로 생긴 유대는 1863년의 폴란드반란에 즈음하여 열린 동정의 집회를 기회로 일층 강화되고 익년匿年에 드디어 협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미 1830년에 영국에 전국적 대 노동조합이 창립되었을 때, 로버트 오언은 국제적 전 노동조합을 수립하려고 계획한 바 있었다.

그러나 영국정부가 전국조합에 대하여 야만적 박해를 가하는 폭거로 나갔기 때문에 이 생각은 포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인터내셔널의 이념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국에서는 미적지근히 그을리고만 있었지만 프랑스에서 지지자를 얻게 되었다. 1847년의 혁명이 패퇴한 후 프랑스인 망명자는 이 사상을 갖고 합중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인터내셔널를 통하여 전파했다.

1862년에 런던을 방문한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거의 모두 푸르동주의자 즉 상호주의자였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의 노동조합원들은 주로 로버트 오언의 학파에 속하고 있었다. 영국의 오언주의는 이리하여 프랑스의 상호주의와 손을 잡았고, 그 결과 노동자의 유력한 국제조직의 창조를 보게 되었고, 주로 경제적 지반 위에서 고용주와 싸웠으니 순 정치적인 급진적 당파와는 일체 절연하려고 노력했다.

사회주의적 노동자들 간의 이들의 두 주요 경향의 결합은, 마르크스 기타의 사람들 가운데서 공산주의자들의 비밀적 정치결사의 잔당에 의한 지지를 발견했다. 이 비밀 정치조직은 바르베스와 블랑키의 비밀결사의 잔존분자들을 규합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독일에서의 바이트링의 비밀 공산주의적 결사와 같이 그 원류가 바부프의 음모단에서 나오고 있었다.

 

전출의 장[5]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1856?62년은 자연과학과 철학의 비상한 고조高潮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또 유럽과 아메리카에서의 급진사상의 거의 전반적인 정치적 부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들 두 가지 운동은 노동자 대중을 각성시켰으니, 그들은 자기 자신의 어깨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과업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1862년의 만국박람회는 세계 산업의 위대한 축제로 보였고 노동자의 자기해방 투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국제노동자협회가 일체 구식의 제 정당과의 절연絶緣을 소리높이 선언하고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기의 해방을 쟁취할 결의를 표명했을 때, 그것은 도처에서 깊은 감명을 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인터내셔널은 라틴계 제국에 급속히 펴져 나갔다. 그 전투력은 얼마 안가서 위협적인 규모로까지 도달했다. 다른 한편으로 각 연합조직의 대회나 전 인터내셔널의 연차대회는 사회혁명이란 어떤 것이 아니면 안 되는가, 또 그것은 어떻게 해서 성취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노동자 자신들이 스스로 토의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은 노동 대중의 창조력을 자극하고 그들로 하여금 생산과 소비를 위한 새로운 결합 형태를 탐구케 했다.

당시는 어디서나 머지않아 유럽에 대혁명이 일어나리라고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혁명이 취해야 할 정치적 형태에 대하여, 그리고 또한 혁명의 제1보가 어떠한 것이냐에 대하여 다소나마 명료한 관념은 아직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전혀 대립하는 사회주의의 여러 사조가 한 당에 모여서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협회의 지배적 사상은 경제적 지반에서 행해져야할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직접투쟁 - 즉 부르주아지가 합의하는 입법에 의하지 않고 노동자 자신이 힘으로 자본가로부터 양보를 뺏어 내어서 마침내 그들을 완전히 항복시킨다는 그런 방식으로 수행하는 노동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자본가의 굴레에서 노동자를 해방하는 사업은 어떻게 해서 달성될 것인가. 생산과 교환의 신 조직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1864?70년의 사회주의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것은 꼭 1848년의 파리에 설치된 공화국의 헌법제정의회에 참집한 각종 사회주의적 학파의 대표들의 경우와 같았다.

1848년의 프랑스의 선구자들 - 그들의 다양한 희구는 콘시데란에 의하여 구세계에 직면한 사회주의에서 보기 좋게 요약되고 있다 -과 마찬가지로 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도 하나의 깃발 아래 규합되지는 못했다. 그들은 가지각색의 해결책 사이를 동요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어느 것도 지성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을 만큼 정당하지도 명확하지도 않았다. 뿐더러 진보적 지성의 소유자인 사회주의자 자신들에 있어서조차 자본과 국가권력을 존경하는 관념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는 못했기 때문에 통일은 더욱 어려웠다.

이들의 각종 경향을 훑어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우선 프랑스 공산주의자[블랑키스트들]의 비밀결사의 형태로 프랑스대혁명의 자코뱅주의의 직계 - 즉 바부프의 음모단 후계자들 및 독일의 공산주의자들[공산주의자동맹]이 있었다. 이들 양파는 어느 것이나 1793년의 의심할 바 없는 자코뱅주의의 전통 속에 생명을 잇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들은 1848년에는 언젠가 운이 돌아오는 날이면 음모에 의하여 - 또한 아마도 독재자의 조력을 얻어 - 국가의 정치권력을 수중에 넣고, 1793년의 자코뱅의 결사를 모범으로 해서[물론 이번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하여]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수립하려고 꿈꾸고 있었다. 이 독재야말로 - 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 입법에 의하여 공산주의를 강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온갖 종류의 억제적 법률과 과세에 의하여 재산소유의 상태는 극히 곤란하게 되어 이윽고 소유자는 재산소유의 고통을 면하고자 이것을 숫제 국가에 인도하는 편이 도리어 행복하게 느껴지도록 될 것이다. 다음으로 농민군이 파견되어 전답의 경작을 하게 될 것이다. 공업생산도 같은 반 군대적 방식으로 조직되어 똑같이 국가의 손으로 운전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인터내셔널 창립 당시도 여전히 사회주의자 간에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도 프랑스에서는 블랑키스트 간에, 독일에서는 라사르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 간에 지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로버트 오언의 학파에 속하는 영국 노동자들은 이러한 자코뱅적 견해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사업을 위해서도 또한, 국가권력에 의거할 것을 단연코 인정하지 않고 주로 노동조합의 활동에 의거하려 했다. 영국의 오언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바라지 않았다. 반면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로 조직되고 상호결합한 공동체나 집단에 그들은 큰 의의를 부여했다. 이들의 공동체나 집단이야말로 토지와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이용함과 동시에 그들의 생산을 공동으로 저장할 것이다.

그들은 생산의 필요에 따라 혹은 집단적으로 혹은 단독으로 일할 것이다. 공동체와 집단에서의 노동의 보수 및 공동체 상호 간의 교환은 노동권에 의하여 행하여질 것이다. 이 노동권은 공동체의 경지와 공장 또는 작업장에서의 활동에 소비된 노동시간의 양을 표시한다. 그리고 각 공동체는 개인적으로 제조하여 교환을 위하여 공동 창고에 인도된 생산물에 대하여 노동권으로 지불할 것이다.

노동권에 의한 보수報酬라는 이 사상은 전술한 바와 같이 푸르동과 상호주의자의 사회개혁안에서도 채용되고 있었다. 그들도 또한 혁명에 의하여 탄생되어야 할 사회에 있어서의 국가권력의 간섭을 부인했다. 금일 경제적 사항에 관하여 국가의 기능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용한 것으로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교환은 민중은행과 청산소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다른 한편으로 교육, 위생상의 조치, 필요한 기업 활동, 교통수단 등은 각기 독립한 공동체의 손으로 운영될 것이니까 -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교환에 있어서 화폐 대신에 노동권을 발행한다고 하는 이 동일한 사상이, 단 이 경우 일체의 토지, 광산, 철도 및 공장의 국유화란 이념과 결합되어 주장되고 있었는데, 이 사상은 1848년에 페쿠르와 비다르라는 두 사람의 주목할 만한 저작가에 의하여 제창되었다[양인의 존재는 금일 사회주의자에 의하여 편협하게 무시되고 있다]. 그들은 이 체제를 콜렉티비즘(집산주의)란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비다르는 뤽산부르위원회의 비서였다. 그리고 페쿠르는 1848년의 헌법제정의회의 일원이고, 당시 이 문제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논문을 썼다. 그는 여기서 그 자신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사회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헌법제정의회가 실시로 옮겨 놓기만 하면 될 충분한 법률의 형식으로 자기의 체계를 상세히 전개했다는 것이었다.

인터내셔널 창립 당시 페쿠르와 비다르 양인의 이름은 그들의 동시대 인간에서조차 전혀 잊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양인의 사회조직의 사상콜렉티비즘이란 이름으로 마치 새로운 발견물처럼 야단스럽게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인터내셔널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제 이념 - 생 시모니즘

 

앞에서 말한 각종 사회주의 학파와 나란히 생 시모니즘의 이념도 있었다. 이 이념이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은 1848년 이전이었으나 그 후도 여전히 인터내셔널의 성원의 사회주의적 견해에 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재능 풍부한 다수의 저작가들과 사상가, 정치가, 역사가, 나아가서는 산업인들이 30년대와 40년대에 생 시모니즘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여기서는 철학에서의 오귀스트 꽁트, 역사가로서는 오귀스탄 티에리, 경제학자 중에서는 시스몬디의 이름을 드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무릇 이 시기의 사회개혁자들은 이 파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생 시모니스트들은 이렇게 말했다 - 인류의 진보는 지금까지는 노예가 농노로, 그리고 농노가 임금노동자로 전화한 데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야 임금제까지도 폐지하고 이와 함께 전 생산시설에 대한 사유제까지도 소멸시켜야 할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은 변화를 불가능하다고 봐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부언한다. 왜냐하면 사유제도 권력도 이미 역사의 과정에서 적잖이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달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유재산의 폐지는 일련의 조치에 의하여 점차 행하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 시모니스트들은 말한다[이 들의 조치에 대하여 프랑스혁명이 이미 선례를 보였음을 상기하자]. 이들의 조치는 예컨대, 국가가 상속에다 중세를 과함으로써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넘겨주는 사유재산을 점점 많이 수탈함을 허락할 것이다. 이리하여 사인私人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사유재산의 부분은 점점 줄어들고 사유재산은 차차 자취를 감출 것이다. 어째서 그러냐하면 부자 자신도 문명의 사멸기에 속하는 특권을 버리는 편이 유리하다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에 의한 자발적 재산 포기와 입법적 방책에 의한 상속 폐지는 생 시모니스트의 국가로 하여금 토지와 산업의 유일의 소유자로, 노동의 최고 규제자로 전화케 하고 예술, 과학, 산업이란 3기능의 절대적 수장, 즉 지휘자가 되게 할 것이다.

사회의 각 성원은 이들 3부문 중의 하나에서 일하고 생 시모니스트의 국가의 역군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국가의 정부는 최량最良의 인사’ - 즉 과학, 예술, 생업이란 3三界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의 계층제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것이다.

생산물의 분배는 다음과 같은 정식에 따라 행하여질 것이다. 즉 능력에 따라 각인에게, 일에 따라 각 능력에게.

이와 같은 미래의 계획 외에도 생 시모니스트학파와 이 학파에서 나온 실증철학은 19세기에 일련의 주목할 만한 역사적 노작을 산출하여 권력,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참으로 과학적인 견지에서 검토했다. 이들의 노작은 금일까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생 시모니스트들은 이른바 고전학파, 즉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의 경제학을 냉엄하게 비판했다. 이 경제학파는 후년 맨체스터학파란 이름으로 유명하게 되고 소위 국가의 무간섭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생 시모니스트들이 산업적 개인주의와 자유경쟁이란 원리에 대하여 싸우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처음에 군사국가와 그 계층적 구별에 대하여 싸웠을 때 비판했던 그 동일한 오류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결국 국가의 전능을 승인하게 되고, 자기의 질서를 - 콘시데란이 이미 지적했듯이 - 불평등과 권력 위에, 또한 행정적 계층질서 위에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정치적 계층질서에다 제사적祭司的 성격마저 부여하려고 했다.

생 시모니스트들은 이처럼 전 사회에 의하여 생산된 재화를 각인에게 제각기 순 개인적인 부분을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와 옷소매를 나누었다. 그들의 많이는 경제학상의 우수한 노작을 내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재화의 생산이 사회적 행위 - 전 세계적인 행위라는 관념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 이 점이 생각났던들 생산된 재화의 총량에서 각 생산자에게 넘겨줘야할 부분을 정확히 결정짓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인정하지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을.

이 점에 관하여 공산주의자와 생 시모니스트와의 사이엔 뿌리 깊은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양편이 다 같이 개인과 그 권리를 무시했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가 개인들에게 허용한 것은 겨우 그들이 자기네의 관리와 통치자를 선출하는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생 시모니스트들도 한 가지로 이 권리를 마지못해서 승인했다. 하지만 이전에는 그들은 이 선거권마저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나 생 시모니스트에 대해서나 매일반으로 각 개인은 국가의 관리에 불과하다. 이카리아 항해기를 쓰고 아메리카에서 공산주의의 콜로니를 건설한 카베에 있어서 자코뱅적 공산주의와 개인의 압박은 가장 완벽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사실 카베의 이카리아 항해기에는 도처에 권력, 즉 국가를 - 각 세대世帶의 부엌에 이르기까지 발견할 수 있다. ‘조리調理의 지침을 각 가정에다 배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이카리아공화국은 다시 나아가 국가가 시인하는 식물食物의 일람표를 작성하여 농민과 노동자에게 그 식료품을 생산시켜 이것을 배급한다. 카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구라도 국가가 배급하는 이외의 식물을 가질 수 없으니까 국가에 의하여 승인 안 된 식품을 누구도 먹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고 하겠다.”[이카리아 항해기5, 1848, 52]

다시 나아가 위원회는 식사의 회수, 시간, 그 길이, 그릇의 수와 식물의 종류, 식사의 순서까지 규제한다고 하는 형편이다. 의복에 관해서는 위원회가 일정한 형을 지정하여 각인은 그의 사회적 지위와 상태를 표시하는 제복을 착용한다. 항상 같은 것의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태반이다.

이만큼이나 질서와 규율이 지배하고 있다고 카베는 환성을 올리고 있다.

누구든지 공화국의 허가 없이는 아무것도 출판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게다가 저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쳐 정식으로 면허를 얻은 뒤가 아니면 안 된다.

카베의 유토피아가 꼭 그대로의 형태로 인터내셔널 내에서 다수의 신봉자를 갖고 있었다고는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그 정신은 잔존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것은 아주 확실하다 - 그리고 우리는 권위주의자, 특히 독일의 공산주의자들과 행한 논쟁에서 이것을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 즉 금일에 와서는 어림도 없는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되고 있는, 앞에서 말한 그런 엄격한 규제가 당시는 슬기로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비판에 대하여 사람들은 카베의 말로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확실히 공산체는 부자유와 속박을 강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주요한 임무가 부와 행복을 산출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중의 번거로움이나 낭비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한 농업생산과 공업생산을 절약함과 함께 그 생산력을 10배나 올리기 위하여, 사회가 일체를 집중하고 처리하고 지휘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사회는 일체의 의욕, 일체의 행동을, 자기의 규칙, 자기의 질서, 자기의 규율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좋은 시민은 명령되지 않은 일체의 일을 자발적으로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이카리아 항해기5,403)

가장 난처한 일은, 권위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은 신조를 여태껏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카베가 말한 것처럼 결국 공산체제는 공화국의 대통령 아래서와 마찬가지로 군주 아래서도 실현가능하다고 하는 신조 말이다. 이 이념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길을 열어준 것이고, 또한 그 후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적 반동에 직면하여 대수롭지 않게 방임의 태도를 취하는 것을 허락한 이념이기도 했다.

 

끝으로 인터내셔널 창립 당시에 프랑스와 독일에 다수의 신봉자를 거느리고 있던 루이 블랑의 학파에 대하여 한 마디 해야겠다. 이 학파는 독일에서는 라사르파라는 마무리 진 집단으로 규합하고 있었다. 이들의 사회주의자는 국가신봉적 경향의 지지자도, 그 이전의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보고 있었다. 즉 만약에 혁명에 의하여 탄생하고 사회주의적 견해에 의하여 고취된 정부가 노동자를 원조하여 광범한 노동자의 생산협동조합을 조직하게 하고 그것에다 필요한 자본을 정부가 대부한다면, 산업시설을 자본가의 손에서 노동자의 수중으로 옮아가도록 할 수 있으리라고. 이들의 협동조합은 국민생산의 광범한 일대 조직으로 결합될 것이다. 만인에게 평등한 보수제도가 과도적 조치로서 승인될 것이다. 그러나 각 생산자의 필요에 따라 행하여지는 생산물의 분배가 언젠가는 달성되어야할 최종 목적일 것이다.

그것은 콘시데란이 아주 정당하게도 지적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 국가에 의하여 통치된 공산주의적 생 시모니즘이었다.

광범한 국가신용제도에 의거하여 극히 저리低利로 국가로부터 대부를 받아 자본가적 생산과 경쟁할 수 있게끔 국가의 명령으로 알뜰히 원조된 이들의 노동자의 조합조직은 머지않아 산업에서 자본가를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조합조직은 농업에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러한 경제적, 사회주의적 목표다. 그것은 부르주아 정치가의 단순한 민주주의적 이상인 것은 아니다.

무릇 이들의 제 이념은 1848년 이전의 사회주의적 선전에 의하여, 그리고 또 1848년의 2월 혁명 및 6월사건에 의하여 탄생한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세목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변용을 가지면서 인터내셔널 내부에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상호간 견해의 거리는 컸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들의 학파의 신봉자들은 다음의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모두 장래의 혁명의 기초에 강력한 정부가 놓이지 않으면 안 되고 이 정부는 나라의 경제생활을 그 수중에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점이 곧 그것이다. 그들은 모두 중앙집권적 계층적인 국가조직을 승인했다.

다행히도 이들의 자코뱅적 제 이념과 병립하여 그것과 대항하는 형태로 푸리에주의자의 이념이 또한 존재했다. 다음에 이 이념의 검토로 옮아가자.

 

 

 

 

 

 

 

 

 

 

 

 

 

 

 

 

 

 

 

 

 

 

 

 

 

 

 

 

 

 

 

 

 

 

 

 

 

 

 

12. 아나키즘()

 

인터내셔널에서의 사회주의 제 이념 - 푸리에주의

프랑스혁명의 동시대인 푸리에는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났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문인門人- 특히 푸리에의 사상에다 과학적 성격을 붙여준 콘시데란 -에 의하여 널리 보급되고 있었으므로 인터내셔널의 가장 교육 있는 성원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푸리에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푸리에의 영향력을 이해하는 데는 다음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사회주의의 역사를 서술하는 서적에 흔히 지적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푸리에의 지배적 이념은 부의 생산을 위한 자본과 노동 및 재능의 결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요한 목적은 이윤추구를 위하여 행하여져 필연적으로 성실치 못한 대규모의 투기로 이끌어가는 일체의 생산물의 교환을 행하는 자유로운 국민적 조직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이와 같이 그의 이념은 저 파리의 민중이 지롱드당원을 국민공회에서 추방하고 생활필수품에 대한 최고가격법이 가결된 후, 1793?94년의 과정에서 프랑스혁명이 실현코자 한 이념을 부활시킨 것이다.

콘시데란이 그의 저작 구세계에 직면한 사회주의[이 책을 금일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크게 추천하고 싶다] 가운데서 말하고 있듯이, 푸리에는 금일의 착취의 온갖 추악한 형태를 제거하는 수단을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직접적 관계의 수립에, 다시 말하면 생산지에서 직접 받아서 직접 소비자한테 건네주는 생산물의 보관자 - 그 소유자가 아니라 -의 역할을 다해야할 공동체의 중개적 대리자를 설치하는데서 발견했다.

이러한 조건 아래 상품의 가격은 투기의 대상이 되기를 그칠 것이다. 가격에는 운송 저장 및 집무에 소요된 거의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실비가 가산될 뿐일 것이다.

푸리에는 어릴 때 일찍부터 양친을 도와 상점에서 일하면서 장사의 나쁜 측면을 실컷 경험했고 상업에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상업과 싸우기로 맹서하고 있었다. 장성해서 프랑스혁명의 시대에 그는 저 투기 - 처음에는 교회나 귀족한테서 몰수된 국유재산의 매매에 즈음하여, 나중에는 전쟁의 시대에 발생한 온갖 물자의 가격 폭등에 즈음하여, 끔찍한 투기를 소상히 목격한 것이다. 그는 또 자코뱅당의 국민공회도 테러도 이들의 투기를 제지하지 못하는 것을 봤다. 그래서 그는 사회화된 교환제도가 없는 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승려와 귀족에게서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달성된 경제적 혁명의 성과도 헛된 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그는 상업의 공유화의 필요를 이해했고 이 방향에서 생 퀴로트가 1793년과 94년에 시험한 기도를 평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제 그는 이 이념의 사도使徒로 되었다.

푸리에의 의견에 의하면 생산품의 보관자인 자유코뮌은 생활필수물자의 교환 및 분배라는 대문제의 해결을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코뮌은 금일의 상인이나 협동조합처럼 그 소유자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대리인에 불과하고 생산품을 분배하기 위하여 창고에 수납하는 한편, 소지자로부터 일체 공세를 징수하지 않고, 또한 물자의 변동을 틈타 투기를 하는 일도 없다.

소비와 분배를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이 기도는 푸리에를 가장 심원한 사회주의적 사상가의 한 사람이 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농업코뮌 또는 공업코뮌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합체한 농?공업코뮌의 전 성원이 파란지를 구성하도록 제안했다. 이들의 코뮌은 토지, 가축, 농구, 기계를 하나로 결합하여 토지를 경작하고 혹은 공장에서 일함으로써 토지, 기계, 공장 등이 성원 전체의 공유에 속하는 것으로 보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자본에 대하여 각인이 공헌한 액을 엄밀히 계상計上할 것이다.

두 가지 주요 원칙이 파란지에서 준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푸리에는 주장한다. 첫째로, 그것은 불유쾌한 노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체의 노동은 항상 사람들을 유혹하게끔 조직되고 배분되어 다채다양한 것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로, 자유로운 결합을 바탕으로 세워진 사회에는 여하한 강제도 용납되어서는 아니 되며 또한 강제가 필요할 이유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파란지의 각 성원의 개인적 필요에 대한 다소 신중한 주의와 각종 성격의 특수성에 대한 약간의 관용이 있다. 그리고 농업, 공업, 지적?예술적인 각종의 노동을 하나로 결합한다. 그 결과 현대의 사회제도 아래서는 종종 해악이 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인간적 격정 - 그리고 항상 그것이 강제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는 이러한 격정마저 진보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파란지의 성원은 머지않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격정의 본질을 인식하여 그 사회적 적용의 방도를 찾아내면 족한 것이다. 새로운 사업, 위험한 모험, 사회적 태동, 변혁의 갈망 등은 이들의 격정에 필요한 배출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하기는 아직 푸리에가 국가적 이념에 집착을 남기고 있긴 하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공동체 조직을 시험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진정한 조화의 선구자로 되어야할 단순한 조화를 우선 시험해 보자고 군주의 참가를 앙청仰請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프랑스 국왕에게 인류를 사회적 혼란에서 구출하는 명예를 위탁하여 전 세계의 조화의 창설자, 해방자가 되게 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초기의 저작 중의 하나에서 말했다. 그는 이 동일의 이념을 1808년의 네 가지 운동의 이론에서도 되풀이하고 있다. 그 후도 그는 루이 필립 왕에게 이 목적의 실현을 위탁했던 것이다[페라랑, 푸리에, 그 생애와 교설4114].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최초의 준비의 시도에 관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조화또는 보편적 조화라 붙여진 사회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는 여기서는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조화는 부분적으로도입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변혁은 사회?정치?경제?도덕 등 일체의 관계에 있어서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푸리에가 국가의 비판에 착수했을 때, 그는 꼭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철저한 비판을 했다.

정치적 무질서는 사회적 무질서의 결과이고 그 표현이다. 불평등은 부정의로 전화하고 있다. 권력이 그 이름 아래 행동하는 국가란 것은, 그 기원에 있어서나 그 원리에 있어서나 특권계급의 봉사자이고 잔여계급에 대립하여 자기네의 이익을 지키는 옹호자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 밖에도 이러한 어조로 비판이 전개되고 있다.

푸리에의 제 원칙이 완전히 적용된 결과 출현해야할 조화적 사회에서는 도무지 강제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푸리에는 프랑스혁명의 패배 직후에 문필활동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회문제의 평화적 해결로 기울고 있었다. 그는 자본과 노동 및 재능 간의 결합이란 원칙을 승인할 필요를 역설했다. 그 결과 파란지가 생산하는 재화의 가치는 세 부분으로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제1[총액의 반 내지 12분의 7]은 노동의 보수에, 2[12분의3]는 자본에, 3[12분의 2 내지 3]은 재능에 충당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인터내셔널 내부의 푸리에 문하들의 태반은 그의 체계의 이 부분에는 큰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는 푸리에가 글 쓰고 있던 당시의 영향이 보이고 있다고 그들은 보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푸리에의 교설의 근본적 특징에 유의하고 있었다. ,

1) 자유코뮌 즉 독립한 작은 지역이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기초가 되고 단위로 된다.

2) 코뮌은 그 내부에서 생산된 모든 생산물의 관리자이고, 일체의 교환의 중개자이다. 그 것은 동시에 소비자의 결합체이고, 대개의 경우 동시에 또, 생산의 단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위에 그것은 직업집단 또는 생산자 그룹의 연합이기도 할 것이다].

3) 이들의 코뮌은 상호간에 자유로 결합하여 연합, 지방, 국민을 형성한다.

4) 노동은 매력적인 것이 될 것을 요한다. 그것이 없고 보면 노동은 언제나 고역일 것이 다. 그리고 이것이 달성되지 않는 한 여하한 사회문제의 해결도 불가능하다. 이것을 달성 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그리고 노동은 금일에 있어서 보다 훨씬 생산적인 것으로 되 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

5) 이런 종류의 코뮌에 있어서 조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하한 강제도 필요치 않다. 세론의 영향만으로 충분하다.

생산물의 분배 및 소비에 관해서는 극히 다양한 의견이 표명되고 있다. 인터내셔널 창설 후 사회주의의 제 이념은 점점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868년의 브뤼셀대회, 1869년의 바젤대회에서 인터내셔널은 절대 다수로 경지, 임야, 철도, 운하, 전신 등, 나아가서는 광산과 기계에 대한 집산제를 선언했다. 집산제와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의 수탈을 승인함으로써, 인터내셔널의 반권력주의적 성원들은 콜레티비스트[집산주의자]라 칭하여, 마르크스, 엥겔스 및 양인의 신봉자들의 국가주의적 중앙집권적 공산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바부프와 카베의 권위주의적 전통을 지닌 프랑스의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확한 일선을 그었다

1867년에 J. 기욤 - 그 자신도 콜렉티비즘의 선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에 의하여 공간公刊사회주의론, 마찬가지로 그의 주저인 인터내셔널 - 기록과 회상[1905?10년에 파리에서 4권본으로 공간되었음], 끝으로 기욤이 생디칼리즘의 백과전서에 최근 기고한 인터내셔널에 있어서의 콜렉티비즘에서, 인터내셔널에 있어서의 가장 활발한 연합주의적 성원들 - 바르랑, 기욤, 도 페프, 바쿠닌 및 기타의 동지들에 의하여 콜렉티비즘이란 말에 붙여진 정확한 의미의 상세詳細가 논술되고 있다. 그들의 언명에 의하면,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그들은 콜렉티비즘이란 말 아래서 비권위주의적 연합주의적 또는 아나키스트적 공산주의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콜렉티비스트라고 자칭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우선 그들이 반권위주의자라는 것을 역설했다. 그들은 수탈을 완료한 사회에서 소비가 취해야할 형태를 사전에 결정하려고 아니 했다. 그들에 대하여 중요한 것은 사회를 엄격한 틀 안에다 억지로 가두어넣는 짓을 하지 않겠다는 희구이고, 이 점에서 그들은 진보적 그룹에 대하여 가장 광범한 자유를 보류하려고 했다.

불행히도 인터내셔널 내부에 씨 뿌려진 집산제라는 이념은 바젤대회 후 10개월이 지나서 보불전쟁이 일어난 당시, 노동자 대중 간에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 결과 파리코뮌 때에도 이러한 집산제 실현의 방향으로의 진지한 기도는 전혀 없었다. 코뮌이 괴멸한 후도 연합주의적 인터내셔널은 그 주요한 이념 - 즉 사회혁명을 실현코자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직접투쟁을 실행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세력을 반권위주의적 조직으로 결집한다고 하는 이념의 존속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리하여 미래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배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아나르코 코뮤니즘이란 의미로 해석될 콜렉티비즘의 이념은 약간의 신봉자에 의하여 계속 선전되고 있었으나 그것은 한편으로 공산당선언의 제 이념을 포기하기 시작한 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전개한 국가집산주의의 관념과 충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블랑키스트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와 충돌했다. 그것은 또 푸르동에 의한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의 가혹한 비판의 영향 아래 1848년 이후 라틴 제국諸國의 노동자 대중 간에 착근着根하기 시작한 공산주의 일반에 대한 널리 퍼져있는 편견에 맞닥뜨렸다.

이 저항은 극히 강력했다. 그래서 이를테면 스페인 - 여기서는 연합주의적인 인터내서녈이 노동조합의 광범한 연합체와 밀접히 연결되고 있었다 -에서 당시나 훨씬 그 뒤나 콜렉티비즘이라 하면 단지 집산제의 주장으로만 받아들여졌고, 반국가적 이념을 강조하려면 콜레티비즘이란 말에다 별도로 및 아나키란 말이 첨가되었다[anarquia colectivismo ]. 그런데다가 그럴 때 생산자와 소비자의 개개의 집단이 여하한 - 공산주의적인, 그렇지 않으면 그 이외의 - 분배방식을 취할 것인가는 미리 결정짓지 않고 남겨 두었다.

끝으로 금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방도에 관해서는 인터내셔널의 활동가들은 푸리에가 이에 관하여 말한 것에다 큰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에 혁명적 상황이 성숙해 가고 있다고 느꼈고 더욱이 1848년의 혁명보다도 훨씬 심각하고 전반적인 혁명이 박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노동자들은 정부의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들 자신의 힘을 다하여 자본으로부터 그 수중에 쥐고 있는 독점을 탈취할 것이라고 보았다.

 

파리코뮌이 준 충격 - 바쿠닌

 

이상 각장에서 행한 개관에서 인터내셔널에서의 아나키즘의 이념이 어떠한 터전 위에서 발전하고 있었는지 밝혀졌을 것이다.

그것은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자코뱅주의와 지방적 독립 및 연합이란 이념과의 혼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다 같이 - 방금 우리가 본 바와 같이 -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중앙집권적 이념이 1793년의 자코뱅주의의 직계라 한다면, 지방의 독립적 행동이란 이념은 1793?94년의 파리의 제 지구 및 제 코뮌의 건설적이고 혁명적인 강력한 활동의 유산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두 조류 중에서 전자 즉 자코뱅주의 편이 우세했다.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부르주아 지식인의 태반이 자코뱅적 정신의 소유자이고 노동자는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노동자 대중 간에서 혁명사상에 새로운 방향을 잡아주기 위해서는 파리코뮌과 같은 거대한 중요성을 가진 사건이 필요했다.

18707월에 가공可恐할 보불전쟁이 일어났다. 나폴레옹 3세와 그 조언자들은 필연적으로 닥쳐올 것이 예측되고 있던 공화주의의 혁명에서 제국帝國을 구출코자 이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은 프랑스의 소멸과 제정의 파멸, 티에르와 간벳다의 임시정부 및 파리코뮌을 초래했고, 계속해서 마찬가지의 기도가 상 에티엔느, 나르본느 기타의 남프랑스 제 도시에서, 그 후는 스페인의 바르세로나와 카르타제나에서 발생했다.

인터내셔널에 대하여 - 적어도 발생한 사건에서 교훈을 끌어내어 생각할 줄 아는 성원들에 대하여 - 이들의 코뮌의 봉기는 하나의 계시였다. 파리의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사수한 사회혁명의 붉은 깃발 아래 이들의 봉기는 라틴 제 국민 속에 일어날 장래의 혁명의 정치적 형태가 어떠한 것이 아니면 안 되며 또한 아마도 어떠한 것이리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1848년에 생각되었던 그러한 민주주의적 공화국이 아니라 코뮌 - 자유롭고 독립한, 그리고 아마도 공산주의적인 코뮌인 것이다.

민중혁명의 시기에 그 성공을 확보하려면 어떠한 정치적 및 경제적 방책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당시의 지성을 지배한 혼란이 파리코뮌에도 감돌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인터내셔널 내부에 나타난 이러한 지적 혼란은 코뮌에도 지배하고 있었다.

자코뱅주의자도 코뮌주의자[자치주의자]- 말하자면 강권적 중앙집권주의자도, 연합주의자도 파리의 봉기에 다 같이 등장하여, 이윽고 코뮌 내에서 양파 간에 충돌을 빚어냈다. 가장 전투적인 분자는 자코뱅주의자와 블랑키스트 중에 있었다. 그러나 블랑키는 투옥되고 있었으며 블랑키스트 지도자들 - 태반이 부르주아였던 - 간에 그 선구자인 바부프주의자들의 공산주의적 이념이 거의 소실되고 있었다. 그들에 대하여 경제문제는 코뮌이 승리를 거둔 뒤에 다루지 않으면 안 될 문제였다. 이런 견해가 당초부터 아주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민중적인 공산주의적 견해는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다. 뿐더러 파리코뮌이 단명으로 끝난 결과 이러한 견해는 확립되기에 이르지 못했다.

이와 같은 조건 아래 패배는 순식간에 닥쳐왔다. 공포의 밑바닥에 떨어졌던 부르주아지의 사납게 설치는 복수를 볼 때, 코뮌의 승리는 경제적 지반에서의 정복과 병행하는 발전으로써 민중이 코뮌 수호에 궐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정치적 혁명을 달성하려면 이것과 병행하여 경제적 혁명이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파리 코뮌은 또 하나의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그것은 라틴계 제 국민 간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념을 선명히 했다.

자유코뮌 - 이것이 바로 사회혁명이 취해야 할 정치적 형태인 것이다. 설사 전국이, 설사 모든 이웃 나라가 이러한 행동양식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일단 어떤 코뮌의, 어떤 지역의 주민이 그 생활필수품의 소비의 사회화를 결의하고 또 이들의 물자의 교환과 생산의 사회화를 바란다면, 그들은 이것을 그들 자신, 그들의 손으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들이 이것을 한다면, 만일 그들이 이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전력을 기울인다면, 그들이 뒤떨어진 적대적인 또는 무관심한 부분을 포함한 전 국토의 사태 진전에 정신을 쓰고 있을 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힘을 자기 자신의 코뮌 속에 발견할 것이다. 혁명의 발목에 감겨 붙은 무거운 짐과 같은 이들의 뒤떨어진 분자를 질질 끌고 걷기 보다는 이들과 공공연한 일전을 감행하는 편이 좋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만약 자유?독립의 코뮌을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정부가 필요치 않다면, 만약 전 국민적 정부가 타도되고 국토의 통일이 코뮌의 자유연합으로 달성된다면, 마찬가지로 중앙의 시정市政도 또한 유해무익한 것으로 될 것이라고. 개개의 코뮌 내부에서 결정해야할 사항은 한 국가 전체에 있어서보다 훨씬 간단한 것이 되고, 시민의 이해관계도 훨씬 단순하고 모순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따라서 코뮌에 있어서의 생산자, 소비자, 기타 각종 그룹 간에 일치를 보기 위해서는 연합주의의 원리로 족할 것이다.

 

파리코뮌은 다시 진정한 혁명가들을 괴롭힌 어떤 문제에도 또한 해답을 주었다. 프랑스는 두 번에 걸쳐 사회혁명을 실시하려고 꾀했다. - 더욱이 두 번 다 중앙정부를 개재시켜서 했던 것이다. 1793?94년에는 지롱드당원 추방 후 사실상 평등, 말하자면 참된 경제적 평등을 엄격한 입법조치로써 도입코자 했다. 다음으로 1848년에는 헌법제정의회를 통하여 사회민주주의적 공화국을 실현코자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두 번 다 프랑스는 실패했다. 헌데 이제야 생활 자체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자유코뮌이 곧 그것이다. 코뮌 자신이 자기의 영역에서 혁명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그것은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이념은 아나키라는 이상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는 푸르동의 저작 19세기에 있어서의 혁명의 일반 이념속에 깊이 실천적 이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나키의 이념이었다. 라틴 제 국민들의 진보적 인사의 사상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라틴계 나라들의 사이에서만 -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라틴계 스위스 및 와론계 주민의 사이에서 만이었다. 이에 반하여 독일은 프랑스에 대한 승리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끌어냈다. 그들은 국가의 중앙집권주의에 무릎을 꿇고 절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로베스피에르적 단계 속에 파묻혀 있어 자코뱅주의자의 역사가들이[실정과는 정반대로] 논술하고 있듯이, 자코뱅 글라브를 숭배하고 있었다.

견고하게 집중한 권력을 갖추어 여하한 국민의 독립에의 경향에 대해서도 적의를 갖고 대하는 국가, 관료진의 견고한 계층적 중앙집권 및 강대한 정부 권력 - 독일의 사회주의자와 급진파가 도달한 것은 이러한 결론이었다.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승리는 사실인즉 1870년의 프랑스가 갖고 있던 모집병 제도에 대한 독일의 일반 징병제도에 의하여 가능케 된 거대한 군대의 승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승리는 혁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제2제정의 부패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미상불 프랑스제정을 위협하고 있던 혁명이 독일의 침략에 의하여 방해되지 않았던들 그것은 전 인류에 이익을 주는바 컸을 것이었다.

이리하여 파리코뮌은 라틴계 제국에 아나키즘 이념의 발달을 촉진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의 권위주의적 경향이 점점 강하게 전 인터내셔널을 위협하게 된 결과, 이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적 경향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코뮌이 무너진 후에 런던으로 망명한 프랑스의 블랑키스트들의 도움을 얻고 총무위원회에 부여한 권력을 이용했다. 총무위원회는 협회의 행동강령 속에 정해진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직접투쟁을 부르주아의회에서의 선동으로 바꿔치기해버렸다.

이 쿠데타는 인터내셔널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열게 했다. 어떤 맹신가라도 자기 자신의 일을 정부의 손에 위임하는 결과가 - 가령 그 정부가 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의 선임의 경우처럼 민주주의적 원리에 입각하여 선출된 정부라 할지라도 -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으로 되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스페인, 이탈리아, 쥐라, 와론계 벨기에 및 영국 일부의 각 연합이 자치론자들이 총무위원회의 권력에 대항하여 궐기했던 것이다.

이제야 미하일 바쿠닌의 모습 속에 인터내셔널에서 발전하고 있던 아나키스트적 경향은 강력하고 정열적인 옹호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쿠닌과 쥐라연합의 우인들의 주위에 스위스와 스페인의 젊은이들로 된 작은 서클이 결집했고, 그들은 바쿠닌의 사상의 폭넓은 전개에 기여했다.

바쿠닌은 역사와 철학 상의 광범한 지식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힘찬 일련의 팸플릿, 논문, 서한 속에 근대 아나키즘의 제 원리를 확립했다.

그는 대담하게 국가를 그 전 조직, 전 이념, 전 경향에 걸쳐 완전히 배제한다고 하는 이념을 천하에 천명했다. 일찍이 국가는 역사적 필연이었다. 그것은 종교적 카스트가 장악한 권위에서 발전해 나온 제도였다. 그러나 금일은 국가의 완벽한 배제야 말로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왜냐? 국가란 자유와 평등의 부정否定에 불과하고, 만인의 이익에 봉사해야할 것을 실현코자 할 때조차 착수된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국민, 모든 지방, 모든 코뮌은 이웃에 대한 위협으로 되지 않는 한,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자신을 조직함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가 아니면 안 된다. 이른바 연방이니 자치니 하는 원리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것들은 단지 중앙집권국가의 권력을 은폐하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 코뮌의 완전한 독립, 자유코뮌의 연합 및 코뮌 내부의 사회혁명 즉 현존 사회의 국가적 조직에 대체되어야 할 생산을 위한 협동조합적 결합 - 이것이야말로 바쿠닌이 논한 바와 같이 과거의 암흑에서 현대문명의 면전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이상이다.

개인은 그의 주위의 만인이 자유롭게 되는 한에서만 자기도 자유롭게 될 뿐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념을 품는 한편 바쿠닌은 동시에 사회혁명의 열렬한 선전자였다. 당시 사회주의자의 태반은 사회혁명의 박두를 예견하고 있었으나 바쿠닌은 바로 이 혁명을 타오르는 불과 같은 격렬한 말로 그 서한이나 저작에서 주장했던 것이다.

 

 

 

 

 

 

 

 

 

 

 

 

 

 

 

 

 

 

 

 

 

 

 

 

 

 

 

 

 

 

 

 

 

 

 

 

 

13. 아나키즘()

 

현상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관념

 

1848년의 전야에, 또한 그 후 인터내셔널에 이르는 기간에, 국가에 대한 반역이 사회와 그 위선적 도덕에 대한 개인의 반역이란 성격을 띠고, 더욱이 주로 부르주아의 젊은 세대 가운데 나타났다고 한다면, 이제야 노동자들 간에서의 이 반역은 일층 심각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금일 국가가 밀어주는 압박과 착취에서 해방된 새로운 사회형태의 탐구로 변화하고 있다.

인터내셔널도 그것을 창립한 노동자들의 자각에 있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혁명에 의하여 갱신된 사회가 취해야 할 미래상의 맹아를 비춰주는 노동자의 제 집단의 광범한 연합이 아니면 아니 되었다. 말하자면 그 미래의 사회란 금일의 통치기구와 자본주의적 착취가 자취를 감추고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 아래 아나키스트의 이상은 개인적인 것이기를 그쳐야 했다. 그것은 사회적인 이상으로 된 것이다.

양 세계의 노동자들이 그들을 갈라놓는 국경에 상관없이 직접 관계를 맺고 서로 상대편을 잘 알게 됨에 따라 그들은 사회문제를 훨씬 잘 연구, 해명하게 되고 자기네의 힘에 대하여 일층 자신을 갖게 되어 갔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내다보았다. , 가령 민중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공업노동자가 공장이나 작업장을 소유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산업을 관리하고 국민생활의 필수품의 생산에 그것을 활용하게 된다면 사회의 기본적 필요를 빠짐없이 광범하게 공급하기가 용이할 것이다. 최근의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그 성공을 보증한다. 그럴 때 제 국민의 생산자는 바른 기초 위에서 국제적 교환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작업장과 공장, 광산, 농업, 상업을 잘 아는 사람에게 이것은 아무런 의문 없이 아주 명료하다.

동시에 국가가 그 관료적 계층제도와 역사적 전통의 중압과 함께 독점이나 착취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새 사회의 도래를 방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정을 깨달은 노동자의 수는 점점 불어날 뿐이다.

역사상 국가는 토지의 사유권을 한 계급을 위하여 확립하고, 그 독점권을 유지시킴으로써 발달해 왔으며, 이리하여 누구보다도 지주계급은 지배계급으로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 자신이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기네의 결합 가운데서 이 독점을 타파하는 수단을 찾지 않고서 어찌하여 이러한 수단을 국가가 제공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19세기의 과정에서는 국가는 공업소유권, 상업, 은행을 부유한 계급의 수중에 독점시키고 농촌의 공동체에서 토지를 수탈하여 농민을 중세로 억누르고 이들의 부유계급을 위하여 값싼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강대화한 것이다. 이 특권을 배제하기 위하여 국가는 과연 여하한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통치기구는 이들의 특권을 창조하고 유지할 목적으로 발달해 왔는데 도대체 다름 아닌 이들의 특권을 배제하는 역할을 그것이 맡을 수 있겠느냐 말이다. 이 새로운 기능은 그것에 알맞은 새로운 기관을 과연 필요로 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이 새로운 기관은 이제야 노동자 자신에 의하여 국가와는 아무 상관없이 노동자 자신의 조합, 노동자 자신의 연합 속에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국가에 의하여 출생하고 강화되어온 특권이 소실할 때 국가도 또한 그 존재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일단 인간관계가 착취자 대 피착취자의 관계이기를 그친다면, 전혀 새로운 사회집단 형태가 생길 것이다. 부자가 빈자의 노동을 착취함에 의하여 일층 부유하게 되게끔 짜여 있는 현존 기구가 무용화하자마자 생활은 단순화할 것이다.

지역적 결합을 위한 독립한 코뮌 및 사회적 기능별로 결합한 노동조합의 광범한 연합 - 그럴 적에 양자는 서로 연결하여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지주를 제공한 것임 - 이라는 이념은 아나키스트가 해방된 미래사회의 있을 법한 조직을 구체적 현실적인 방식으로 구 상하는 단서로 되었다. 다시 그 위에 코뮌 및 노동조합과 병립하여 개인적 관계로 맺어지는 집단 - 이를테면 온갖 종류의 목적을 충족시킬 필요에서 생기는 무한히 다양한 일시적 또는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무수한 집합체가 여기에 첨가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결사는 이미 현금의 사회에서도 정치적 또는 직업적 집단과 별도로 숱하게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 종류의 결사는 그물눈처럼 서로 얽혀서 가지각색의 사회적 요구를 - 소비, 생산, 분배, 교통, 위생조치, 교육, 침략에 대한 상호방어, 상호부조, 지역방위, 나아가서는 또 과학상, 예술상, 문학상의 요구와 오락의 요구 등등 모든 것을 충족시킬 것이다. 이들은 모두 활기에 차서 사회적, 지적 환경의 새로운 요구와 새로운 영향에 응답하면서 재빨리 이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와 같은 사회가 다양한 기호와 요구가 발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광범위하게 다수의 주민을 가진 지역에 자라나 발달한다면, 여하한 권위주의적 강제도 벌써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머지않아 만인의 눈에 명백하게 될 것이다. 권력에 의한 이러한 강제는 사회의 경제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무용지물일 뿐더러 대부분의 반사회적 행위를 저지하는 데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현금의 국가에서 사회생활에 필요불가결한 도덕적 수준을 향상, 유지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평등의 결여이다. 평등 없이 1793년에 표현된 말로 하면 사실상의 평등없이 - 정의의 감정의 일반화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정의는 평등주의적인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헌데 우리들의 계급사회에서는 평등의 감정이 한 걸음마다, 한 순간마다 패배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정의의 감정이 사회의 풍속 습관에 침투하려면 평등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가 가능케 되는 것은 평등자의 사회에서 뿐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강제의 필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강제력에 호소하려는 욕구는 벌써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금일 행하여지고 있는 것처럼 법률상의 또는 신비적인 형벌의 공포에 의하여, 혹은 우월자로 인정된 인간에 대한 복종에 의하여 혹은 또 공포심 내지 무지로 말미암아 창조된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궤배에 의하여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벌써 전혀 없다는 것을 만인이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헌데 현금의 사회에서는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은 지적 예종隸從, 개인적 창의의 억압으로, 도덕적 수준의 저하로, 또한 진보의 정체停滯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평등주의의 환경에서는 인간이 안심하고 자기 자신의 이성에 지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성은 이러한 환경에서 발달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주위의 사회적 습관의 각인刻印을 띨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전 능력의 완전한 발달을 - 개성의 충분하고 완전한 발달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금일 부르주아가 우수한 천분天分을 지닌 자에 대하여 인간성의 완전한 발전을 달성하는 수단을 제공한다고 떠들고 있는 개인주의란 것은 자기기만自己欺瞞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찬양하는 이 개인주의란 것은 독특한 개성의 발달을 저해하는 것이다.

허구한 나날을 개인적 이윤의 추구에 지새우며, 그 결과 전반적 빈곤으로 전락해 있는 사회에서는, 가장 유능한 사람도 자기의 생존을 지탱하기에 필요한 제 수단을 획득하기 위하여 격렬한 경쟁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성의 자유로운 발달에 필요한 일정한 여가를 간신히 얻게 된 극소수의 사람들은 어떠냐 하면, 이 여가를 이용함에 있어 그들은 현금 사회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하나의 조건이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부르주아적 범속성凡俗性의 법과 관례와의 속박에 복종할 것, 그리고 너무 지나치게 신랄한 비판 또는 반역의 행위에 의하여 이 범속성의 왕국을 동요시키지 않을 것, 이것이 그 조건이다.

개인의 충분하고 완전한 발달이 허락되는 것은 부르주아사회에 아무런 위협을 안주는 인간, 말하자면 부르주아사회에 대하여 흥미있는 인물이기는 하나 위험하지 않은 인물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나키스트는 관찰의 결과로 얻어진 논거에 기하여 미래에 관한 예견을 한다.

사실 우리가 18세기 말 이후 교육 받은 계층 간에 지배해온 사조를 분석할 때 부르주아 간에도, 부르주아적 교육을 받고 자기 자신도 부르주아에 한축 들기를 바라고 있는 노동자들 간에도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적 경향이 극히 강력하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반대로 반권위주의적, 반중앙집권적, 반군국주의 및 자유합의의 이념은 노동자 간에도, 또한 훌륭한 교양을 갖고 다소라도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부르주아적 지식인 간에도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다.

사실 다른 저작[빵의 정복이상호부조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금일에는 국가와 교회의 테두리 밖에서 온갖 종류 - 경제[철도회사, 노동조합, 기업자조합, 농업협동조합, 수출조합], 정치, 학술, 예술, 교육, 오락, 선전 등 -의 요구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기천, 기만의 결사를 자유로 구성하려고 하는 강한 경향이 있다. 기왕에는 의심할 바 없이 국가와 교회의 의무였던 것이 금일은 자유로운 제 조직의 활동부문으로 되고 있다. 이 경향은 점점 현저한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 자유로운 제 조직이 몇 천 개씩 등장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입김이 교회와 국가의 탐욕스런 권력욕을 숨죽이는 것으로써 충분하다. 자유에 대한 두 개의 노회老獪한 적인 교회와 국가의 권력이 더욱 제한되는 날이면 자유로운 조직은 보다 광범하게 그 활동영역을 확대할 것이다.

미래와 진보는 이 방향에 있다. 그리고 아나키는 바로 이 양자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부정

 

아나키스트의 경제관에는 경제학이 여태껏 방황하고 있던 혼돈상태의 영향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사회주의자 간에도 그렇지만 아나키스트 간에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의 대립이 있다.

사회주의자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는 모든 사회주의적 당파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도 현존 토지 사유제도 및 생산수단의 사유제도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동시에 그 결과이기도 한 금일의 생산구조와 함께, 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또 현대사회가 고대의 제 문명과 같이 붕괴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러한 제도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변혁을 달성하는 수단에 관해서는 아나키스트는 국가사회주의의 모든 당파와 완전히 소매를 나누고 있다. 말하자면 아나키스트는 생산을, 적어도 그 주요 부문을 국가의 수중에 거두어들이는 국가자본주의 가지고는 사회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의회에 의하여 임명된 대신들의 지휘 아래 현금 국가의 손에다 우편이나 철도를 넘겨주어 운영케 하는 것은 우리가 품은 이상은 아니다. 우리의 견지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임금노예제이고 새로운 형식의 착취일 따름이다. 우리는 이것이 임금노예제와 착취의 폐지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지 않으며 이 목표에 이르는 하나의 과도적 형태라고 믿지도 않는다.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를 폐지한다고 하는 참되고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한,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사회주의와 손잡고 나왔다. 양자가 다 같이 사회혁명을 예상하고 그 도래를 대망했다. 다만 사회혁명의 결과 등장해야할 사회의 반권위주의적 형태에 대하여 양자가 의견을 달리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국가사회주의자의 대부분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으나 그 유력한 한 당파가 자본주의의 착취를 폐지할 필요는 전혀 없고 우리의 세대에 대한, 그리고 또 금일 우리가 경과하고 있는 경제발달의 단계에 대한 문제는 착취를 완화하는데 있을 뿐이고, 이를 위해서는 자본가에 대하여 약간의 법적 규제를 강제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는 사상에 물들 때, 아나키스트는 단연코 그들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에 아나키스트는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자이다. 즉 자본주의적 착취의 폐지를 미래에 바란다면, 우리는 금일부터 전력을 기울여 그 배제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는 벌써 금일 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 - 광산, 공장, 교통수단, 무엇보다도 생산자의 생존 제 수단 -을 자본가의 손에서 생산자의 집단의 수중으로 직접 넘겨오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또 우리는 생존수단을 현금의 부르주아국가의 수중에 넘겨주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 유럽의 사회주의 제 정당은 금일 있는 그대로의 부르주아국가에 의한 철도, 생산, 철광 및 석탄광, [스위스에서는] 은행, 알콜 전매의 국유화를 요구하고 있다. 헌데 우리는 부르주아국가에 의한 이러한 공동재산의 취득에서는 근로자, 생산자 및 소비자의 수중으로 나라의 부가 인도되는 것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의 하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바로는 그것은 자본가를 강화하여 반항하는 노동자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자본가의 힘을 키워주는 수단인 것이다. 자본가 증에서도 현명한 인사는 이 일을 잘 간파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들의 철도 자본은 철도가 일단 국유재산으로 되어 국가의 손에 군대식으로 운영되면 훨씬 안전한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사회현상을 그 총체에 있어서 전망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음 점에 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공리로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지 않고서 사회변혁을 준비할 수는 없다. 이 방향으로 걸어가지 않는다면 목적지로부터 멀어질 뿐이다라고.

 

그리고 실제로, 만약 생산과 교환을 의회, 각료, 현금의 관료들의 손에 넘겨주는 데서 착수한다면, 그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스스로 생산의 주인이 되는 시점에서 떨어져 나감을 의미할 것이다. 국가가 대자본의 종자從者인 이상, 금일 이들의 무리는 당연히 대자본의 도구다.

새로운 독점을, 더욱이 틀에 박히듯이 구 독점자의 이익이 되도록 신설하면서 과거에 성립한 독점을 파괴한다는 것이 도대체 될법한 말인가.

교회와 국가는, 특권계급이 대두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할 때, 일체의 특권과 잔여의 민중에 대한 권리와의 합법적 소지자가 되고자 의거하는 정치권력에 지나지 않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란 이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한 지배자 상호간의 보증을 확립하는 제도인 것이다. 국가는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특권계급의 지배를 강화할 목적으로 몇 세기에 걸쳐 정비되어 만들어내어진 것이다. 그 결과 이제 교회도 국가도 이들의 특권을 제거하는데 유용한 힘이 될 수는 없다. 하물며 이들의 특권이 제거된 때에 등장해야할 사회조직의 형태는 더욱 될 수가 없다.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국민생활 속에 매양 새로운 경제형태가 나타날 때마다 - 이를테면 노예제가 농노제로, 농노제가 임금노예제로 교체할 때마다 - 새로운 정치적 결합의 형태가 나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는 것을.

교회가 인간을 옛적의 미신의 속박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또한 인간에게 자유로 받아들여진 새로운 윤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일찍이 한 번도 이용된 예가 없듯이, 또 일체의 인간의 평등, 연대성, 통일의 감정이, 입을 벌리기만 하면 모든 종교가가 이구동성으로 설교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의하여 주어진 것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고서야 비로소 인류 간에 널리 전파되었듯이, 이와 똑같이 경제적 해방이 성립하는 것도 국가 속에 표현된 낡은 정치적 형태가 분쇄될 때가 아니고서는 가망이 없다. 금일 국가가 그 관료 간에 분배하고 있는 사회적 기능을 대신 수행할 새로운 조직 형태를 인간은 찾아낼 필요가 있겠다. 이것이 되지 않는 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라. 아나키즘이 노력하는 것은 이러한 새로운 사회생활 형태가 꽃피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개화는 근대적 지식의 도움을 얻고 민중의 창조력이 발휘되어, 위대한 해방운동이 성취된 과거의 어느 시점에나 항상 그랬듯이 금후도 또한 기필코 달성되리라고 본다.

그러니만큼 아나키스트는 입법자의 역할도, 다른 일체의 국가적 활동도 거부한다. 우리는 법률에 의하여 사회혁명을 발생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법률은 비록 그것이 헌법제정의회에 의하여 길거리의 대중적 압력 아래 채택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가결될 수 있을 것인가, 의회에서는 다종다양하게 대립하는 제 이해를 화해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보니], 또한 그것이 이미 채택된 뒤의 것이라 하더라도, 요컨대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할 것의 승낙에 불과한즉, 민중 속에 위치한 활동가들이 그 에너지, 그 창의, 그 조직적?건설적 재능을 마음껏 행사하도록 부르는 초대장에 그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법률의 정식定式과 원망願望을 현실생활의 사실로 전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또한 그 용의가 있는 힘들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은 인터내셔널의 출현 이래 금일에 이르기까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직접투쟁의 목적으로 산출된 노동자의 제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왔다. 이 투쟁은 일체의 간접적 행동보다도 훨씬 노동자의 생활을 얼마만큼이라도 개선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또 자본주의 기구와 그것을 지지하는 국가가 사회에 초래하는 해악에 대하여 노동자의 눈을 열어 주었고 동시에 자본가와 국가의 개재를 허락하지 않고서 관계자 상호간의 소비, 생산, 직접적 교환을 어떤 식으로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노동자의 사고를 일깨워 주었다.

 

자본과 국가의 간섭에서 해방된 사회에서의 노동생산물의 분배형식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나키스트의 견해는 분열해 있다.

가령 국가가 금일에 이미 철도, 우편, 교육, 상호보험, 국토방위를 그 수중에 넣고 있는 것과 같이 생산과 교환수단까지도 소유하게 된다면, 그 때 출현할 새로운 형태의 임금제도에 반대하는 점에서는 모든 아나키스트가 일치한다. 이미 국가가 장악한 힘[조세, 영토방위, 국교회國敎會 ]에다 이러한 새로운 힘, 즉 산업의 힘까지 첨가한다면 거기서 나올 것은 압제의 새로운 무서운 도구일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 아나키스트의 대부분은 아나르코 코뮤니즘의 해결책에 결집하고 있다. 문명사회에서 가능한 코뮌주의의 형태는 단 하나 아나르코 코뮌주의의 형태라는 견해가 점차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 있다. 코뮌주의는 본질적으로 평등주의이고, 더욱이 일체의 특권의 부정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진 무지배사회가 가능키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만인에 대하여 공동으로 생산된 최소한의 생활물자를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리하여 코뮌주의와 아나키즘은 필연적으로 상호 보완하는 두 개의 이념이다.

그러나 코뮤니즘이란 큰 조류와 나란히 아나키즘 속에 개인주의의 복권復權을 발견하는 또 하나의 조류도 여전히 존재한다. 끝으로 이 조류에 대하여 약간 부언하겠다.

 

개인주의적 조류

 

아나키즘에 있어서의 개인주의적 경향이란 지나간 시대의 유물처럼 생각된다. 말하자면 이왕에는 생산방법이 금일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 그러한 능률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고, 그런 시대에 코뮌주의라 하면 일반적인 궁핍 및 예속화와 같은 것으로 보이고 있었다.

60년 이전에는 미상불 사소한 여유도, 약간의 여가도, 남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극소수의 인간에게만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독립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소수의 특권자에 속하지 못하게 될 날을 일종의 공포심을 갖고 내다보았다. 당시 푸르동이 프랑스의 전 생산을 1인당 15스으라고 계산하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금일은 벌써 이 장애는 없어졌다. 농업에서도 공업에서도 인간 노동력의 거대한 생산성이 달성된 결과[졸저 전원, 공장, 작업장참조], 만인에 대한 고도의 복지 수준을, 현명하게 조직된 코뮌주의적 노동으로 극히 용이하게, 더욱이 단시일 내에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벌써 조금도 의심할 바 없다. 더욱이 이 때에 각인은 하루 4,5시간의 노동이 요구될 뿐이고 적어도 하루 5시간의 아주 자유로운 여가의 시간을 만인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코뮌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반대론은 벌써 근거가 박약한 것으로 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개인주의적 조류는 금일 두 개의 주요한 지맥으로 갈려져 있다. 첫째는, 슈티르너의 의미에서의 순 개인주의자이다, 이 경향은 최근에 와서 예술적 향기가 높은 니체의 저작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상세히 논하지 않겠다. 이미 앞에서 나온 한 장에서 말했듯이, 개인의 확립이란 것은 형이상학적이어서 실생활에서 거리가 멀다. 또한 그것은 일체의 해방의 기초를 이루는 평등의 감정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끌어 간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남을 지배하려고 욕망하면서 자기를 해방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뿐더러 그것은 개인주의자라 자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족, 승려, 부르주아, 관료 등 그들 자신을 대중보다 우월한자라고 자부하는 소수자에게 접근케 하며 국가, 교회, 법률, 경찰, 군부 기타의 오랜 세월에 걸친 온갖 압제는 다름 아닌 그들 특권적 소수자의 존재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의 지맥은 푸르동의 의미에서의 상호주의자들로 형성된다. 이들의 아나키스트는 사회문제에 해결을 구하여 노동권에 의한 생산물의 교환을 도입하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조직을 형성하려고 했다. 노동권은 주어진 공업적 수준에 있어서 어떤 대상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 수 또는 공공의 이익으로 인정된 기능을 수행하는데 개인이 소비한 시간 수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는 그러나 사실인즉 결코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동주의[코뮤니즘]와 개인주의 간의 타협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보수에는 개인주의가, 반면 생산수단의 소유에 관해서는 공동주의가 채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중성은 우리가 보는 바로는, 이런 형식의 제도가 운영될 적에 극복이 안 될 장애물일 것이다. 두 개의 대립하는 원리, 즉 한편으로는 일정한 날까지 생산된 모든 것을 공유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된 것에 대하여 개인주의를 보존한다. 게다가 그때 이러한 개인주의 원리는 취미도 수요도 무한히 다양한 사치품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나 평가가 한결같이 정해져 있는 생활필수 물자의 생산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러한 원리로 사회가 조직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다음과 같은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즉 거대사회에서 산업이 발달해 있는 경우 지방에 따라 기계와 생산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정말이다. 이러한 차이가 있는 까닭으로 어떤 기계를 갖고 같은 양의 노동을 투하한 결과 다른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보다 2배나 3내의 생산량을 올릴 것이다. 이를테면 금일의 직물산업의 경우 직기織機의 성능에 대단한 차이가 있으니까, 한사람의 노동자가 관리할 수 있는 직기의 수는 3대에서 20[노오스로프식 직기]까지로 차이가 난다. 다른 한편으로 또, 상이한 생산부문에서 개개 노동자가 소비하는 근육노동과 두뇌노동과의 힘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차이를 고려한다면 과연 노동시간이 생산물의 매매교환상의 척도로서 쓸모가 있는지 어떠니 하는 문제가 나올 것이다.

현금의 상업적 교환이라면 이야기는 알만하다. 그러나 노동력이 매매되는 상품이기를 그쳐서 벌써 거래대상이 아닌 노동시간이란 것에 평가의 기초를 두는 매매교환은 이해하기 어렵다. 노동시간이 생산물의 등가[오히려 근사치적 평가액]를 산정하는 데에 쓸모가 있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에 공동주의적 원칙이 승인되고 있는 사회에서 뿐일 것이다.

만약에 개인적 보수란 이념에 대한 양보로서 단순노동시간에 대한 보수 외에 미리 수업修業의 연한을 요하는 숙련노동에 대한 특별의 보수를 도입하거나 직원의 계층제도에 있어서의 승급의 기회를 설정하거나 한다면,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 폐단을 제거하는 수단을 강구하고자 하는 현금의 임금제도의 특징을 부활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상호주의자의 이념은 아메리카합중국의 농업에서 다소간의 성공을 거두고 있으니 거기서는 약간의 대농장조직에서 작용을 계속하고 있는 듯하다. 이 역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 하겠다.

 

상호주의자에 접근하는 것은 아메리카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이니 그들은 19세기 50년대에 S.P. 앤드류스, W. 그린, 후에는 리산다`스푸너, 그리고 금일에는 여러 해에 걸쳐 자유지를 발행하고 있는 벤자민 터커에 의하여 대표된다.

그들의 이념은 푸르동에서 유래하고 있으나 동시에 허버트 스펜서에서도 나오고 있다. 그들은 아나키스트를 구속하는 단 하나의 법이 있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일에 스스로 종사한다는 것이다, 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개개인 및 개개 집단은 제각기 하고자 하는 대로 행동할 권리가 있으며, 가령 그렇게 할 힘이 있기만 하다면 전 인류를 복종시켜도 상관없다. 만약에 이들의 원리가 전면적으로 적용된다면 하등 위험할 것은 없다고 터커는 말한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힘은 다른 모든 개인의 마찬가지의 권리에 의하여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의견으로서는 형이상학에 과대한 경의를 갖고 공상적 억측을 함부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자가 그렇게 할 힘이 있기만 하다면 전 인류를 복종시킬 권리가 있고, 더욱이 이 권리는 타인이 가지는 평등한 권리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말투는 그야말로 변증법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실제생활의 영역에 발을 붙이고 있는 우리에게는 성원의 한 사람의 일이 다 성원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고 그 다수에게 무관계한 그런 사회 또는 다소간의 공통한 사항을 가지는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체를 상상해 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물며 성원 간의 부단의 상호관계가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각인의 관심을 조금도 환기하지 않고 사회에 대하여 자기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도 행위 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생각해 보려고 해도 그것은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겠다.

그런 까닭으로 터커는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국가 비판론을 전개하고 개인의 권리의 강력한 변호론을 펴는 일방, 타면으로는 개인의 토지소유권을 승인하면서 결국은 개인주의자의 시민들이 서로 동류간의 싸움을 연출하지 않도록 한답시고 국가를 재건하기에 이른 것이다. 허기야 터커는 국가에 대하여 그 성원을 옹호할 권리만을 승인했다. 하지만 금일 보이는 바와 같은 막대한 권리를 갖춘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기의 권리와 기능이 승인되기만 하면 충분한 것이다.

미상불 국가제도의 역사를 검토해 본다면, 개인의 권리의 옹호라는 이 구실 아래 세워지지 않은 국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법률, 침해된 개인을 보호할 권한을 받은 관리들, 법률의 적용을 감시하기 위하여 세워진 계층제, 법률의 원류를 연구하기 위하여 개설된 대학, 법의 이념을 신성화하는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계급제도, 병역의 의무, 그 전매권, 끝으로 그 해악과 그 압제 - 이 모든 것은 타인에 의하여 침해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한다고 하는 이 제일의 구실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다.

이상 간략하게 개관한 것만 가지고도 어째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체계가 부르주아적 지식인간에 신봉자를 가졌을 뿐 근로자 대중 간에 거의 보급되지 못했던가 그 이유가 판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가 그 동지인 공동주의자에 대하여 퍼붓는 비판의 중요성을 승인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들은 아나르코 코뮌주의자가 중앙집권주의나 관료주의 편으로 빠져 떨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일체의 자유사회의 제일의 원천인 자유로운 개인에 항상 정신을 쓰도록 설득한다. 낡은 미신에 빠져 버리는 경향은 진보적 혁명가들 간에서조차 너무도 많이 보인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아는 바이다.

금일 아나르코 코뮌주의는 노동자 간에 - 특히 라틴계 제국의 노동자 간에 - 확고한 지반을 구축하고 있으며 그들 노동자는 다소간에 목전에 박두한 혁명행동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벌써 국가의 혜택에 신뢰를 두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제 정당의 무익한 선동의 권외에 노동자의 전투력을 단결시키고 선거라는 허황한 기구와는 별개의 유효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을 헤아릴 수 있도록 된 노동운동은 아나르코 코뮌주의의 제 이념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예상하더라도 이는 필시 과대한 희망적 관측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도시와 농촌과의 근로대중 간에 진지한 운동이 전개되기 비롯할 때, 아나키즘의 방향을 향하여 무엇인지가 기도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는 1793년 및 1794년의 프랑스 인민에 의한 그것보다도 훨씬 심각한 것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14. 아나키즘의 약간의 결론

 

아나키즘의 기원과 그 원리를 서술한 후, 이번에는 우리의 이념이 현대의 과학과 사회운동 가운데서 차지하는 지위를 좀 더 정확히 결정하는 두서너 본보기를 제시하겠다.

예컨대 사람들이 대문자를 쓴 법에 관하여 법이란 진리의 객체화이다라느니, ‘법의 발전법칙은 인간정신의 발전법칙이다라느니, 혹은 또 법과 도덕은 동일하다. 다만 형식에 있어서 다를 뿐이다라고 언명할 때, 우리는 이런 따위의 듣기 좋은 문구에 대하여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가 그랬듯이 마이동풍으로 흘려버린다. 이와 같은 문구를 써놓은 사람들은 그것을 심원한 진리라고 확신하고 이러한 사상에 생각이 미치기까지 많은 정신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가는 사도邪道에 들어서고 있으며 이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문구가 표현하는 것은 아주 황당무계한 기초 위에 구성된 무자각적인 일반화의 시도에 불과할 뿐더러 사람들을 최면술에 걸려고 명문구로 흐려놓은 일반화에 불과하다.

기왕에는 법률에다 신적神的 기원을 부여하려고 노력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직물織物의 진화나 벌이 꿀을 만드는 방식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법 관념의 기원과 그 발달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의 노작을 이용함으로써 우리는 가장 원시적인 미개인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습속과 법 관념을 연구하고 역사상의 각 시대의 법전을 통하여 금일에 이르기까지의 법률의 점차적 발달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앞에 나온 한 장에서 말한 결론에 도달한다. 즉 일체의 법률은 이중의 기원을 갖고 있으니 이점이 바로 관례에 의하여 세워져 어떤 시대의 어떤 사회에 존재하는 도덕적 규칙을 표시하는 관습에서 법률을 구별하는 것이다. 법률은 이들의 관습을 확인하고 그것을 결정結晶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소수 지배자와 군인의 이익에 봉사하는 새로운 제도를 슬쩍 도입하려고 항상 이 관습에 편승한다. 이를테면 법률은 노예제도를, 또한 계급분화를, 그리고 가장家長, 승려, 군인의 권력을 도입하거나 신성화하거나 한다. 또한 그것은 농노제도를, 후에는 국가에의 예종을 슬쩍 끌고 들어온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그런 줄도 모르는 사이에 멍에를 쓰게 되어, 벌써 유혈의 혁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 멍에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시대나 사태는 이렇게 진행해 왔고, 그리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같은 사정은 금일의 소위 노동입법에 대해서도 말하여진다. 이 입법은 노동자의 보호를 공인된 목적으로 구가하면서 실상은 은연중에 스트라이크가 일어날 때 국가에 의한 강제적 중재[강제적 중재란 - 이 무슨 모순이랴]란 관념을 집어넣고, 혹은 일일 최저 몇 시간이라는 식으로 강제노동 시간의 원칙을 삽입한다. 이리하여 스트라이크에 있어서 철도의 군대식 착취의 길이 열리고 또는 이전의 법률에 의하여 토지를 빼앗긴 아일랜드의 농민의 소유권 상실에 법적 인가를 부여한다. 혹은 또 질병이나 노령보험이나 실업보험의 제도마저도 도입되나, 이것으로써 국가는 노동자의 매일每日을 통제할 권리와 의무를 손에 넣어 국가와 관료의 인가 없이는 노동자가 제 맘대로 휴가를 할 수조차 없게끔 할 권리를 확보한다.

그리고 이런 사태는 사회의 일부가 사회 전체에 대신하여 법률을 제정하는 한, 금후도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자본주의의 주요한 지주인 국가권력을 항상 증대시켜 간다. 일반적으로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는 동안은 이 사정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만큼 고드윈 이래 아나키스트는 일체의 성문법을 부인하는데 일관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는 누구나 어느 입법자보다도 몇 갑절이나 정의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아나키스트에게 정의란 평등과 같고 평등 없이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반론이 우리들 앞에 제출될 것이다. 즉 법률을 부인함으로써 우리는 일체의 도덕을 또한 부인하게 된다. 칸트의 이른바 정언적定言的 명령을 우리가 인정 안 하기 때문이라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러한 반대론의 어법 자체가 우리의 이해理解를 초월한 것이며, 우리에게는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것은 도덕성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자가 그것을 불가능하고 기이한 것으로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상대방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것이다. ‘이 정언명령이란 말로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려 하는가. 당신은 자기의 주장을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번역할 수 없는가. 이를테면 라프라스가 고등수학의 공식을 만인에게 알려지는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처럼. 대학자란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던 것이다. 어째서 당신도 그렇게 하지 않는가라고.

실제로 보편법칙정언명령이니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미는 남이 너에게 대하여 하여지고 싶지 않은 것을 너도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관념이 만인에게 있다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단히 좋다. 우리도 [허치슨이나 아담 스미스가 한 것처럼] 어디로부터 이 도덕적 관념이 인간에게 생겼는지, 어떻게 해서 그것이 발달해 왔는지 연구하자.

다음으로 정의의 관념이 얼마나 평등의 관념을 함축하고 있는지 연구하자. 이것은 극히 중요한 문제다. 왜 그런고 하니, 타인을 자기와 평등한 자로 생각하는 사람만이 남이 너에게 하여지고 싶지 않은 것을 너도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에 따를 수 있겠기 때문이다. 농노 소유자나 노예상인들이 보편법칙이나 정언명령을 농노나 흑인에 대하여 승인할 수 없었음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농노나 흑인을 평등자라고 인정 안 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의 이 말이 옳다면 불평등의 관념이 주입되어 있는 곳에 도덕성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지 검토해보지 않으려는가.

끝으로 우리도 퀴이요처럼 자기희생이란 무엇인가 분석해 보자.

그런 뒤에 인간의 도덕적 감정 - 예컨대 이웃사람에 대한 평등사상에 표현된 감정이 발달하는데 역사상 가장 많이 기여한 것인 무엇인지 검토해 보자. 이 세 가지 연구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떠한 사회조건과 어떠한 사회제도가 미래에 대하여 최선의 결과를 약속하는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종교가 법률에 의하여 수립된 경제?정치적 불평등이, 나아가서 또 법률, 형벌, 감옥, 재판관, 옥리獄吏, 사형집행인이 도덕 감정의 발달에 얼마만큼 기여하는 것인가를 이해할 것이다.

이 모두를 하나하나씩 상세히 연구하자. 그래서야 비로소 우리는 도덕에 대하여, 그리고 법률, 재판, 경찰관의 도덕적 감화에 대하여 유효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중간한 지식의 천박하고 피상적임을 은폐하는데 소용이 있을 뿐인 거창한 말들은 쓰지 않는 편이 좋겠다. 이들의 과대한 망언도 어떤 특정의 시기에는 불가피 했을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일찍이 유익했던지 어떤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금일은 우리가 정원사나 식물학자가 식물의 생성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연구하는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현하의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의 연구에 착수할 수 있는 정세에 있으니 그와 같이 해보지 않으려는가.

 

경제학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완전히 개방된 시장에 있어서는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에 의하여 계산 된다”[리카도, 푸르동, 마르크스 기타 참조]고 경제학자가 말할 때도 이 주장이 이러한 권위자들에 의하여 말해졌으니까 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노동이 상품의 가치를 계산하는 참된 척도이다 라고 주장하면 아주 사회주의적으로 들리니까 라든지, 하는 이유로 이 주장을 우리가 신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명제가 올바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제군이 그렇게 언명함에 의하여 제군은 가치와 노동량이 필연적으로 비례하는 것이고 그것은 꼭 낙하하는 물체의 가도價度와 낙하의 계속하는 초수秒數가 비례하는 것과 완전히 같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생각이 미치지 않는가. 이와 같이 하여 제군은 이 두 가지 크기 사이에 특정한 양적 관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군은 양에 관한 단정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인 계량을, 다시 말하면 양적으로 계산된 관찰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교환가치는 필요노동의 양이 증대할 때에 증대한다고 제군도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아담 스미스도 이미 결론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 이들 두 개의 양은 정비례하여 한편은 다른 편의 척도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것은 비유하면 명일의 강우량은 청우계晴雨計가 일정한 계절에 특정의 장소에서 설정된 평균점 이하로 몇 밀리 내려갔는가, 그 양에 비례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큰 잘못이다.

청우계의 강하와 강우량과의 사이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최초에 주목한 사람, 그리고 매우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돌은 겨우 1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돌보다 훨씬 큰 속력을 얻는다는 것을 처음 인정한 사람은 과학적 발견을 한 사람이다[아담 스미스는 이것과 같은 일을 가치에 관하여 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자의 뒤에 나타나 강우량은 청우계가 평균점에서 내려간 저울눈의 양에 따라 계량된다느니, 낙하하는 돌이 통과하는 공간은 낙하의 시간에 비례하고 그것에 의하여 계량된다느니 주장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말을 지껄이고 있을 뿐이다. 뿐더러 이런 사람은 과학적 탐구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의 저작은 과학적인 것이 아님을 - 비록 그 책이 과학적 은어隱語에서 빌려온 용어로 장식되어 있다 할지라도 -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상품의 가치와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을 정밀한 척도로 확정하는 데는 정확한 데이터가 결여되어 있다는 핑계를 한다면, 그것은 근거 없는 구실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자연과학에서는 두 개의 양이 상호 의존하여 한편이 불어나면 다른 편도 불어난다고 하는 이와 같은 허다한 상관관계의 사례가 있다. 예컨대 식물의 성장속도는 무엇보다도 그 식물이 받는 열과 광의 양에 의존한다. 또한 총포의 반동은 탄약통의 화약의 양을 증가하면 증대한다.

그러나 무릇 학자라 이를만한 학자라면 - 양자의 양적 관계를 계량함이 없이 - 이상의 결과로서 식물 발육의 속도와 그것이 받는 열량, 그리고 총포의 반동과 탄약통彈藥筒의 화약량은 정비례한다고 하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을 주장하겠는가. 만약에 한편이 2, 3, 10배로 증가한다면 다른 편도 같은 비율로 증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바꿔 말하면 가치와 노동량에 관하여 리카도가 이후 주장되고 있는 바와 같이, 양자는 한편이 다른 편에 의하여 계량된다고 논하는 그런 과학자가 있겠는가.

이러한 종류의 관계가 두 개의 양사이에 존재한다고 하는 가설을, 즉 가정을 만들어 놓고서 대담무쌍하게도 이 가설을 법칙이라고 제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단정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은 오직 경제학자나 법학자들 즉 자연과학에서 법칙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편의 지식도 안 가진 사람들뿐이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양 사이의 관계는 극히 복잡한 것이니, 이는 가치와 노동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교환가치와 노동량은 서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한편이 다른 편에 의하여 계량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적한 것은 아담 스미스였다. 그는 각 물품의 교환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하여 계량된다고 말한 뒤에 [상품의 가치를 연구한 후] 즉시 이렇게 부언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즉 원시적 교환제도 아래서는 그러했다 할지라도 자본주의 제도 아래서는 벌써 그렇지 않게 되었다고. 이는 완전히 옳다. 강제노동과 이윤추구의 교환이란 자본주의 제도는 이와 같이 단순한 관계를 파괴하여 노동과 교환가치 사이의 관계를 변경시키는 여러 가지 새로운 원인을 도입했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경제학에 종사하는 일이 못된다. 그것은 관념을 혼란시켜 경제학의 발달을 방해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가치에 관하여 앞에서 지적한 바는 거의 모든 경제학적 명제에도 들어맞을 것이다. 이들의 명제는, 금일에는 확고부동한 진리로서 - 특히 과학적 사회주의자라고 즐겨 자처하는 사회주의자들 간에 - 받아들여져, 얘깃거리도 안 될 만큼 나이브(소박)하게 자연법칙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헌데 이들의 소위 법칙의 대부분이 옳지 못한 것일 뿐더러 이들의 법칙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마저 만약에 그들의 수량적 명제를 마찬가지로 수량적 연구에 의하여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만 된다면 곧 이들의 법칙이 그릇된 것임을 스스로 납득하리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들 아나키스트에 대하여 경제학은, 경제학자들 - 부르주아 진영에 속하건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 서있건 -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는 것과는 약간 다른 형태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본래 과학적, 귀납적 방법은 이들 양쪽 경제학자의 관여하는바 아니므로 그들은 자연법칙이란 표현을 함부로 쓰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어떠한 의미의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무릇 자연법칙은 조건부란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자연법칙은 항상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이러한 조건이 자연 속에 발견된다면, 결과는 이러이러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만약에 교차하는 점의 양면에 등각等角을 짓게끔 한 직선이 다른 직선과 엇갈린다면, 그 결과는 이러이러한 것으로 될 것이다. 만약에 성좌星座 간에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운동 만이 두 개의 물체에 작용하고 그리고 무한이 아닌 거리에서 이들의 두 개 물체에 작용하는 다른 물체가 없다면, 이들 두 개 물체의 중심重心은 이러이러한 속도록 서로 접근할 것이다[이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이러한 식이다. 항상 여기에 만약에가 달려있다. 어떤 조건이 붙어 있다.

결국 경제학의 이른바 법칙이나 이론이란 것은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 명제에 불과하다. 만약에 어떤 나라에 국가가 [조세의 형식으로] 강요하려는 조건, 그리고 국가가 토지, 공장, 철도 등의 소유자로 인정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제공되는 노동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1개월도, 아니 반 개월조차도 살아갈 수 없는 다수의 인간이 항상 있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이러이러한 것으로 되리라’.

지금까지에는 언제나 경제학은 이와 같은 조건 아래 일어나는 일의 열거로 끝났지 조건 그것을 열거하거나 분석하는 일은 없었다. 경제학은 이들의 조건이 개개의 경우,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도, 이들의 조건을 버티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도 검토하지 않았다. 설사 이들의 조건이 어디에선가 언급된 경우에도 곧장 잊혀 버리고 말았다.

경제학자는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깨끗이 잊어버릴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들의 조건의 결과로서 유래하는 제 사실을 숙명적으로 확고부동한 법칙으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의 경제학에 관해서 말하면, 그야 물론 이들의 결론을 약간 비판하고 혹은 다른 방식으로 약간의 결론을 해석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학도 또한 예에 빠지지 않고 앞에서 말한 조건을 망각하고 항상 자기 자신의 길을 계속 걷지 않았다. 그것도 역시 전철을 밟아 구태의연한 상태에 있었다. 사회주의 경제학이 [마르크스에 있어서] 달성한 최대의 성과도 요컨대 형이상학적 부르주아적 경제학의 제 정의定義를 섭취하여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보라, 제군의 정의를 받아들여도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역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이와 같은 얘기라면 팸플릿 같은 데서는 기분 좋게 들리겠지만 과학으로 되기에는 거리가 멀다.

일반으로 학으로서의 경제학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본다. 그것은 자연과학으로서 다루어져 새로운 목적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리학이 동식물에 대하여 차지하는 것과 비슷한 지위를 경제학은 인간사회에 대하여 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사회생리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으로서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사회의 부단히 성장하는 수요와 그것을 충족하기 위하여 쓰이는 각종의 수단의 연구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이들의 수단을 분석하여 그것이 어느 정도로 과거 및 현재에 이 목적에 적합한 것인지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끝으로 [베콘이 오래 전에 지적한 것처럼] 모든 과학의 최종 목적은 예보와 실제생활에의 적용에 있는 이상, 경제학도 금일의 모든 수요를 가장 잘 충족시키는 수단, 말하자면 최소의 에너지 소비[경제]에 의하여 인류 일반에 대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단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다음의 것이 명백할 것이다. 즉 우리는 부르주아 경제학 및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 서있는 경제학자들의 대부분의 결론과는 몇 가지 점에서 아주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그들에 의하여 지적된 몇 가지 상관관계를 법칙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사회주의론은 그네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 우리가 현실의 경제생활 가운데 관찰하는 발전경향의 연구에서 도출한 결론은 원망願望과 가능성에 관하는 그들의 결론과 크게 차이를 가진다는 것, 바꿔 말하면 그들이 도달하는 귀결이 국가자본주의 및 집산주의적 임금노동제임에 반하여 우리의 그것은 자유공동주의라는 것 등이다.

우리가 잘못이고 그들 편이 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 중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릇되었나를 검토코자하면 그것은 어떤 저술가의 논설에 대한 또는 설하려고 한 것에 대한, 비산친식 주해註解에 의하여 할 수도 없으려니와 헤겔의 3부작을 원용함에 의해서도, 하물며 저 변증법적 방법에 호소하는 방식에 의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자연과학의 제 사실을 연구하는 그런 방식으로 경제관계의 연구에 착수함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나키즘은 언제나 이 동일한 방법에 의하여 사회의 정치형태 특히 국가에 관한 아나키즘 독특한 결론에 도달한다. 아나키스트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형이상학적 명제에 굴복할 수 없다. ‘국가란 사회에 있어서의 최고의 정의는 관념의 확증이라느니, ‘국가는 진보의 도구이고 그 담당자라느니, ‘국가 없이는 사회가 없다는 따위의 주장 말이다. 아나키스트는 자기의 방법론에 충실히 따라, 흡사히 자연과학자가 개미나 벌이나 북국의 호반에 집을 지으려고 날아오는 새들의 사회를 연구하는 것과 똑 같은 태도로 국가의 연구에 대처한다. 우리는 이미 10장과 12장에서 된 짧은 요약 과거의 정치형태 및 미래의 있을 수 있는, 그리고 바람직한 진보에 관한 연구 성과를 말했다.

부언하면 우리들의 유럽문명[우리가 속하고 있는 과거 15세기 간의 문명]에 있어서 국가는 16세기에 이르러 발생한 사회생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은 일련의 원인의 영향 아래 생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졸저 국가와 그 역사적 역할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시기 이전에는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국가는 - 로마적 형태로는 -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국가가 역사의 교과서 가운데 존재한다면, 그것은 역사가들의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고 이들의 역사가는 프랑스왕조의 계보를 메로빙거가의 수장首長에까지, 러시아의 그것을 류리크까지 소급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참 역사의 빛에 비춰보면 근대국가는 중세 제 도시의 폐허 위에 구축되었을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군사적 권력으로서의 국가 및 근대정부의 사법과 교회 및 자본주의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제 제도라는 것이 밝혀진다. 역사상 이들 네 개의 제도는 상호 보강하면서 발달해 왔다.

그것들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서가 아니라 서로 굳게 결합되어 있다. 그것들 사이에는 인과의 연결이 있다.

국가란 요컨대 인민에 대한 지배 권력과 빈민의 착취를 각자가 보장하기 위하여 지주, 군부, 재판관 및 목사 간에 맺어진 상호보험회사와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기원이고 그 역사다. 그리고 금일에 와서는 그 본질을 이룬다.

국가를 유지시켜 그 원조를 받아가지고 동시에 자본주의를 배제할 것을 꿈꾼다는 것은, 국가란 것이 본래 자본주의의 발달을 조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언제나 자본주의와 더불어 성장하고 강화되어온 이상, 그것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노동자의 해방을 교회나 시저주의의 도움을 얻어 성취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邪道이다. 하기는 19세기의 30년대, 40년대, 심지어 50년대까지도 사회주의적, 시저주의적으로 공상한 숱한 몽상가들이 있었다. 더욱이 이 전통은 바부프의 시기로부터 금일까지 계속되고 있다. 허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직까지도 이와 같은 환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 너무도 소박하다고 하겠다.

경제조직의 새로운 형태에는 정치조직의 새로운 형태가 필연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변혁이 혁명을 통하여 급격히 발생하거나, 아니면 점차적 진화에 의하여 완만히 생기거나, 여하튼 경제와 정치의 양면의 변혁은 서로 손잡고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적 해방을 향한 일보, 일보, 즉 자본에 대한 진정한 승리의 하나하나는 동시에 권력에 대한 승리 - 정치적 해방을 향한 일보일 것이다. 그것은 당사자 전원의 지역적, 직업적 및 기능적인 자유로운 협정의 방식으로 되는 국가의 멍에로부터 풀려 놓임이라 하겠다.

 

 

 

 

 

 

 

 

 

 

 

 

 

 

 

15. 행동의 수단

 

아나키즘이 그 연구방법이란 점에서나 그 근본원리한 점에서나 강단講壇과학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동배同輩와도 큰 차이를 가지는 만큼 행동의 수단에 있어서도 또한 이들 양자와 다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법?법률?국가관에서 보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점점 증대하는 종속 속에 진보의 보증을 찾아낼 수도 없겠거니와 하물며 사회혁명에로의 접근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은 생산의 무질서 상태, 즉 이른바 국가의 무간섭의 이론에 있고, 국가는 자유방임의 정식을 실시한 것이다, 라는 따위의 천박하고 피상적인 사회평론가들의 입버릇을 우리가 되풀이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옳지 않으니 말이다. 정부는 적빈赤貧상태로 몰아 세워진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용하여 이윤을 추구할 자유를 자본가들에게 제공한 반면, 19세기의 과정의 어디서도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할자유를 준 일이 없었다.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자유방임의 정식을 일찍이 한 번도 실제로 적용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프랑스에서는 저 사나운 혁명적자코뱅의 의회마저 스트라이크에 대하여, 조합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나폴레옹 제국이나, 되살아난 왕조나, 부르주아 공화제 하의 사정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영국에서는 1813년에 스트라이크를 한 혐의로 교수형에 처하여지는 형편이었는데, 1831년에는 노동자가 대담하게도 로버트 오언의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한 탓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유형되었다. 60년대가 되어서도 노동의 자유옹호라는 주지의 구실 아래 스트라이크 참가자는 강제노동에 보내어지는 형편이었다. 금일에 와서도 1903년에 영국의 어떤 회사는, 노동조합이 스트라이크에 즈음하여 노동자가 공장에 들어가 취업하는 것을 그만두게 했다는 혐의로 [이른바 피켓팅] 회사 측에 1275천 프랑의 손해액의 지불을 명하는 판결을 했다. 리용에서의 아나키스트의 소요와 몬소광산에서의 노동자들의 운동의 결과 겨우 1884년에 노동조합의 설립이 허가되도록 된 프랑스에 대해서는 불문가지다. 벨기에, 스위스[아이로로에서의 학살을 상기해보라!], 더군다나 독일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새삼 부언할 필요도 없겠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가 그 조세에 의하여, 또한 그 손으로 만들어 놓은 독점에 의하여, 얼마나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를 꼼짝달싹도 못하게 손발을 묶어 공장주에게 인도하고, 그들을 빈궁의 밑바닥으로 밀어 넣었던가를 상기해야겠다. 영국에서는 지방의 귀족들[그들은 단지 재판관에 불과했고 지주는 결코 아니었다] 이 공유지를 횡취하여 그들의 영유로 귀속시킴으로써 공유지를 파괴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현재도 역시 니콜라이 2세의 정부의 손으로 농민의 공동체에서 토지를 갈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새삼 재언할 것도 없으리라.

끝으로 이집트, 통킹, 트란스발과 같은 정복된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여태껏 모든 국가는 예외 없이 온갖 종류의 거대한 독점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매년 각국의 의회가 새로운 독점을 철도, 전차, 가스, 수도, 전기, 학교, 기타 만반의 영역에서 만들어내고 있는데, 마르크스가 과거의 조건으로서 말한 본원적 축적을 새삼 끄집어낼 필요도 없을게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일찍이 한 번도 어느 국가에도 1년이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자유방임의 체제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항상 국가는 자본의 지주이고 지지자이고, 또한 직접 간접의 창조자이기도 했고, 금일도 여전히 그러하다. 따라서 무간섭의 체제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은 대중의 빈곤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논증코자 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에 대해서나 허용될 일이지 사회주의자가 노동자를 보고 이 동일한 문구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착취에 저항하는 자유는 여태껏 일찍이 한 번도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도처에서 이 자유를 싸워서 얻기 위하여 일보, 일보, 미증유의 희생자로 싸움터를 메우면서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간섭과 그리고 단순한 무간섭이상의 것이 - 원조, 지지, 비호의 손이, 항상 착취자의 이익만을 위하여 내밀어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는 달리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주의가 역사 속에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간에, 코뮌주의로 접근하기 위하여 정치관계에 있어서 사회주의 독자의 형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회주의가 묵은 정치적 형태를 이용할 수 없음은 그것이 종교적 계층제도와 그 교설을, 또한 제정 내지 독재적 통치형태와 그 이론을 이용할 수 없음과 꼭 마찬가지다. 무슨 방식으로든지 사회주의는 대의정치 체제보다 훨씬 민중적으로 되어 고대 로마식의 포럼으로 일층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대의제에 의존함이 좀 더 적게 되고 자치제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871년에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꾀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1793?94년에 파리코뮌의 각 구를 비롯해서 기타의 여러 군소 코뮌도 또한 이것을 시도한 것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의 정치생활을 바라볼 때, 거기에는 도시 및 농촌의 독립 자주의 코뮌이 형성되어 이것들이 가지각색의 숱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제각기 특수하고 특정한 목적으로 체결된 연합적 협약에 의하여 결합하는 아주 뚜렷한 경향이 싹트고 있다. 이들의 코뮌은 전 주민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필요물자의 생산자로 점점 전화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코뮌의 경영으로 운영되는 전차 외에도 원거리에서 몇 개의 도시의 연합체에 의하여 부설되는 수도가 있고, 다시 가스, 전등, 공장의 동력도 코뮌의 손으로 운영되도록 되었다. 나아가서는 코뮌의 탄갱炭坑이나 유제품공장, [토케이에 있어서의] 결핵환자를 위한 산양 방목장 또는 온수 배급과 채소밭의 경영 등이 있다.

물론 독일 황제도, 스위스에서 권좌에 오른 자코뱅당원도, 이 목표로 전진하는 자는 아니다. 그들은 반대로 과거로 눈을 돌려 국가의 손에 모든 것을 집중시켜 지역적 및 직능적 독립의 일체의 흔적을 파괴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사회에 있는 진보적 부분이다. 거기에는 국가의 테두리 밖에서 조직되어 점점 국가에 대신하여, 한편으로 중요한 경제적 기능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가 여전히 자기의 직무로 자인하고는 있으나 여태껏 한 번도 적당한 방식으로 이행할 수가 없었던 제 기능까지도 장악하려는 경향이 분명히 보인다.

교회의 사명은 민중을 지적 예속상태에 붙들어 매어 두는데 있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사명은 민중을 반 기아상태로 경제적 예속 속에 가두어 두는데 있다. 이제 우리는 이들 두 개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안 뒤에는 벌써 우리가 점점 증대하는 국가에의 종속을 진보의 보증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제도는 이론가의 희망대로 그 성격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개인의 최대한의 완전한 해방 속에, 개인과 집단과의 일층 광범한 창의의 발달 속에, 동시에 또한 국가의 직권의 제한 속에 - 그 확대가 아니라 - 진보를 구한다.

우리가 전진이라 생각하는 것은, 우선 첫째로 16세기 이래 사회를 깔아뭉개고 계속 자기의 직권을 증대시켜온 정부권력의 배제로 향하는 운동이고 둘째로는 협약과 일시적 계약의 요소의 최대한의 발달 및 특정의 목적에 따라 발생하여 각자의 연합에 의해서 사회 전체에 번져있는 다종다양한 집단의 독립성의 일층 광범위한 발달로 향하는 운동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구조는 결코 최종적 형태를 취하는 일이 없이 부단히 생명에 넘쳐있고, 따라서 순간마다의 필요에 따라 그 형태를 변해가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진보관, 또는 미래에 대하여 바람직한 것[만인의 행복의 총량을 증대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투쟁을 위한 전술의 형성으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 전술이란 모든 집단에 있어서, 또 모든 개인에 있어서 최대한의 개인적 이니셔티브를 발달시키는데 있고, 그럴 적에 행동의 통일은 목적의 동일성에 의하여, 그리고 또 모든 이념이 자유로 표현되고 진지하게 토의되어 그 결과 올바른 것으로 인정된 때 필시 가지게 될 신념의 힘에 의하여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아나키스트의 모든 전술 위에, 또한 그들이 결성하는 일체의 서클의 내적 생활 위에 자기의 각인을 눌러 찍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정부의 수중에 중앙집권화 하여, 그 결과 전능으로 될 국가자본주의가 닥쳐오도록 일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국가의 테두리 밖에서 사회의 새로운 조직형태를 희구하는 진보의 조류에 역행해서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사회주의의 참된 역사적 과제를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그들의 심각한 사상적 혼미 - 절대주의적, 종교적 편견의 유물이 있다고 우리는 보며,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싸운다. 노동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국가기구를 말짱하게 그대로 유지하고 다만 권력자를 바꿀 뿐으로 사회주의의 기구를 도입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또한 노동자의 지성을 도와서 그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생활형태의 탐구로 향하게 하는 대신에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범죄이며 하나의 역사적 과오라고 우리는 보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혁명의 당파이고, 따라서 우리가 역사 속에서 연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과거의 혁명의 발생과 발전이 아니면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역사에 부여해온 그릇된 국가주의적 해석에서 역사를 해방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기록된 각종의 혁명사 속에서 우리는 아직 민중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며 혁명의 기원에 관하여 아무것도 아는 바 없다. 봉기 전야의 민중의 절망적 상태에 관한 서론에서 보통 되풀이되는 관용어는 이러한 절망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해서 개선 가능성의 희망과 신시대의 등불이 나타났고, 반역정신이 어디로부터 발생하고 어떻게 해서 퍼져 나갔는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여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책을 내버리고 우리는 원 자료로 대결하여 민중 속에 일어난 각성의 경로에 대하여, 또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행된 민중의 역할에 대하여 그 어떤 정보를 얻고자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프랑스혁명을 무엇보다도 자코뱅 글라브에 의하여 지도된 거대한 정치운동이라고 내다본 루이 블랑과는 달리 이 혁명을 이해한다. 우리는 프랑스혁명 속에 무엇보다도 우선 위대한 민중적 운동을 발견한다. 그리고 특히 농촌에서의 농민운동의 역할을 [농민 반란에 관한 위원회의 보고자 그레고아르 목사가 역사가 시로세르에게 말한 것처럼 모든 촌락이 자기 자신의 로베스피에르를 갖고 있었던것이다] - 말하자면 봉건적 농노제의 유물의 배제와 각종의 욕심 많은 돈놀이꾼이나 지주들의 손으로 농촌공동체에서 약탈한 토지의 농민에 의한 수탈 - 예컨대 농민들은 특히 프랑스 동부에서 이 일에 성공했다 -과를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던 운동의 의의를 인정한다.

4년간에 걸쳐 계속된 농민봉기의 결과 혁명적 상황이 출현했고 도시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코뮌주의적 평등으로의 경향이 발전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지는 왕과 귀족의 권력을 착실히 무너뜨려 이 대신 이제 자기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려고 교묘하게 활동하여 권력을 증대시키게 되었다. 이 목적으로 부르주아는 완강하게 사정없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어 내려고 서둘러 이 국가에다 일체를 병탄倂呑시킴과 함께 부르주아지에게 재산권[혁명 때에 그들이 약탈한 재산에 대한 소유권까지 포함시켜]을 보증시키고, 동시에 또 빈민을 착취할 완전한 자유와 국부를 법률적인 제한 없이 마음대로 투기할 자유를 그들을 위하여 인정케 했다.

이 권력, 이 착취의 권리 - 이 일방적 자유방임 -를 부르주아는 실제로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기 자신의 정치형태 - 중앙집권국가에 있어서의 대의정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자코뱅당원에 의하여 산출된 이 국가주의적 중앙집권 속에 저 나폴레옹 1세는 제정 수립의 알맞은 지반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0년 지나 꼭 같은 방식으로 이번은 나폴레옹 3세가 1848년 경 프랑스에 발전하고 있던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적 공화제의 이상 속에 있는 제2제정 수립을 위한 제 요소가 완전히 마련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실로 70년에 걸쳐 모든 지방생활을 깔아뭉개고 도시와 농촌에서의 일체의 이니셔티브뿐만 아니라 국가의 테두리 밖에서의 이니셔티브[조합운동, 노동조합, 사적私的회사, 코뮌 등]도 압살한 이 중앙집권적 세력에 의하여 프랑스는 금일까지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다. 이 국가적 약속을 타파하려는 최초의 기도 - 그러므로 새로운 역사상의 제1기를 개척한 기도 -1871년에 가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의 손으로 비로소 행하여졌을 뿐이다.

우리는 다시 한걸음 나아가 이렇게 주장한다. 즉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중앙집권국가의 수중에 노동수단의 사회화를 꾀한다고 하는 망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와의 수립에 향해진 그들의 기도가 필연적으로 몰고 갈 결말은 곧 공상의 파산이요, 또한 군사독재일 것이라고.

 

여기서는 우리의 견지를 확증하는 각종의 혁명운동을 분석하기를 할애하고 다음과 같이 언명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즉 우리가 이해하는 장래의 사회혁명은 자코뱅 독재도 아니려니와 국민공회나 의회 내지 독재자의 손으로 행하는 사회제도의 변혁도 아니다. 혁명은 일찍이 한 번도 이런 방식으로 추진된 예가 없다. 만약에 노동자의 봉기가 실제로 이러한 방향을 더듬어 간다면, 그것은 아무런 지속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파멸이 약속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이해하는 혁명은 광범하게 확대하는 혁명이고, 그 사이에 대중이 봉기하는 지방의 모든 도시, 모든 농촌에서 민중이 스스로 사회의 재건사업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중 - 즉 농민과 도시의 근로자 -이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지령을 기다리지 않고 다소간에 광범한 코뮌주의적 원칙에 입각하여 스스로 건설적, 계몽적 활동을 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첫째로 만인에게 먹을 것과 집을 주도록 수배하고, 다음으로 만인의 식량, 주택, 의복의 공급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폭력에 의하거나 또는 선거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40년대의 프랑스에서 이름 붙여지고 아직까지도 독일에서 호칭되고 있는 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이건, 혹은 또 환호성으로 영접되고 또 선출되어 성립한 임시정부이건, 그리고 또 국민공회이건, 우리는 일체 그런 것에다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러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미리부터 단언하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개인적 기호에서가 아니다. 혁명의 물결에 번롱?弄되어 정부의 자리에 밀어 올리어진 사람들은 결국 충분히 요구를 총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역사 자체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도저히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원리 위에 사회를 재건하는 일에 당하여 고립한 인간은 아무리 현명하고 아무리 헌신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필경 무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을 위해서는 경작지, 주택, 운전 중의 공장, 철도, 선로를 달리는 객차, 기선 등의 현장에서 일하는 대중의 집단적 정신이 없으면 안 된다.

고립한 개인도 묵은 사회형태의 파괴가 성취되기 시작할 때, 이러한 파괴를 위한 정당한 표현 내지 정식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이 파괴의 작업을 다소라도 넓혀서 나라의 일부에서 생긴 사태를 전 지역에 확대하는 일이겠다. 그러나 법률에 의하여 이 파괴의 작업을 강요하는 것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특히 1789?94년의 혁명사가 증명하고 있는 바다.

새로운 생활형태는 혁명 후 묵은 생활형태의 폐허 위에 탄생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신 형태가 민중의 건설작업 속에서, 한꺼번에 수천 군데에서 행하여지는 작업 속에서, 스스로 형태를 갖추지 않는 한, 어떤 정부라 하더라도 그것들의 표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라서 1789?94년의 혁명의 제 사건의 과정에서, 지방자치체와 파리코뮌 및 그 제 지구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인지를 추측했을 것인가. 또한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인가. 미래를 법에 복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능한 것은 그 주요한 경향을 추측하여 그 길을 말끔히 닦아 놓는 일이다. 우리가 하고자 애쓰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회혁명의 과제를 이와 같이 파악하는 이상 아나키즘이 현존 국가에서의 권력 장악을 목표로 내거는 강령에 동조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이 권력 장악이 평화적 방법으로 달성되지 않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싸우지 않고서 자기네의 권력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저항도 않고서 순순히 몰수를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편으로 사회주의자가 정부의 일부로 들어가 부르주아지와 권력을 나누게 된다면, 이에 따라 그들 사회주의자는 불가피하게 퇴색한 자가 되어갈 것이다. 그러지 않을라치면 사회주의자의 기관지機關紙 상에서도 인정하다시피, 수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훨씬 강력한 부르주아지가 그 권력을 나누어 가질 권리를 사회주의자에게 인정할 리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영국 또는 독일에 봉기가 일어나 사회주의의 임시정권의 등장이 가능케 되었다 하더라도, 민중 자신의 건설활동을 결할 것 같으면 그러한 정권은 전혀 무력하고, 얼마 안가서 혁명의 방해물 즉 브레이크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반동의 대표자 즉 독재자의 발판 될 것이다.

혁명의 준비기를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어떠한 혁명도 의회 기타 어떤 대의집회의 저항이나 공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혁명은 민중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더군다나 미상불 어떤 혁명도, 주피터의 두뇌에서 튀어나오는 미네르바와 같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장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무릇 혁명은 어느 것이나 부화기孵化器 외에도 진화기進化期를 갖고 있었고, 그 기간에 민중은 당초에는 극히 조심성 있는 요구를 내어놓다가 극히 완만한 걸음걸이로 차차 혁명정신에 침투되어 간다. 이리하여 그들은 점점 대담무쌍하게 되어가서 자기네의 힘에 자신을 얻고 절망의 정지상태를 벗어나 점차 자기네의 강령을 확대해 간다. 당초의 온건한 건의가 마침내 혁명적 요구로 전화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수중에 권력을 장악할 만큼 강력한 공화주의의 소수파가 탄생되는 데는 1789년에서 1793년에 이르는 4년간이 프랑스에 필요했다. 부화기에 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당초는 개개인이 자기들의 주의에 발견하는 사태에 깊이 마음이 동요하여 개별적으로 반역한다. 그들은 대부분 이렇다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러나 사회의 무관심을 이들의 전초의 덕택으로 흔들어 놓인 것이다.

현상에 만족한 자도, 마음이 좁은 사람들도, 이제는 다음과 같이 자문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게 되었다 - 도대체 무슨 까닭에 이들의 젊은, 성실한, 힘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자기네의 생명을 내어던졌을까, 라고. 벌써 무관심한 채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찬부贊否 간에 태도를 밝혀야 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사상은 각성했다.

조금씩, 사람들의 소집단도 마찬가지로 혁명정신에 침투되어 갔다. 그들도 때로는 부분적 성공을 획득할 것을 기대하고, 이를테면 스트라이크에 승리하여 자식들에게 빵을 사다줄 수 있다거나 가증可憎스런 관리를 추방한다거나 하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반역하고 나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극히 빈번히 아무런 성공의 기대도 갖지 않고서 반역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벌써 그 이상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에 선행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반역행위, 더욱이 1회나 2회나 10회의 반역이 아니라 몇 백 번이란 봉기인 것이다. 어떤 인내에도 한도라는 게 있다. 이는 금일의 아메리카합중국에서도 보이는 바다.

러시아에 있어서의 농노제도의 평화적 폐지에 대하여 종종 지적들 한다. 허나 그럴 때, 일련의 긴 농민폭동의 역사가 그것에 선행하여 있고, 이것이 바로 농노제 폐지를 이끌어 왔다는 것은 전혀 잊히고 있거나 아니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의 반란은 50년대에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1848년 혁명의 반향이거나 아니면 1846년의 가리시아에서의 농민반란의 반향이었다. 그리고 해마다 점점 러시아 전토에 확대하여 점점 심각한 것으로 되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나운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는 1857년 알레산드르 2세가, 드디어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에게 서간을 보내어, 농민의 해방을 약속하기까지 계속했다. ‘앉아서 밑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기보다는 위로부터 해방을 주는 편이 낫다고 하는 저 게르첸의 명언 - 그것은,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하여, 모스크바의 농노제 지지에 고루한 귀족들의 면전에서 되풀이되게끔 된 말이다 -은 단순한 위협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혁명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이것과 같은 일이 좀 더 큰 정도로 발생했다. 일반적인 법칙으로서 어느 혁명의 성격도 그것에 선행하는 폭동의 성격과 목적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니 오히려 그뿐만 아니라, 역사의 사실로서 다음과 같이 확정할 수 있겠다. 즉 아무리 심각한 정치혁명도 만약에 혁명이 시작된 후에 일련의 지방적 폭동의 형태로 계속하지를 않고, 또한 만약에 인심의 동요가 1906년과 1907년의 러시아의 경우처럼 개인적 복수의 성격을 취하는 대신에 폭동의 성격을 띠는 일이 없었다면 결코 성취하지를 못할 것이라고.

따라서 장래 올 혁명의 성격을 결정하는 폭동의 선구先驅 없이 헛되이 사회혁명을 대망하고 이러한 희망적 관측에 빠지는 것은 유치하고 어리석다. 전반적 봉기가 마련되고 있다고 호언하면서 그러면서도 이들의 폭동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은 벌써 범죄라 할 수밖에 없다. 헌데 선거의 선동운동에만 정력을 쏟으면서 노동자에 대하여 그들이 사회혁명의 모든 혜택을 입게 되리라고 애써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 혁명정신이 역사적으로 고조된 국민 속에 발생하는 개개의 폭동적 행동에 대하여 악의에 찬 온갖 욕설을 퍼붓는 것은 스스로 혁명과 일체의 진보에 대한 방해물 - 언제나 변치 않고 그리스도교회가 그러했던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혐오해야할 방해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16. 결론

 

이 이상 아나키즘의 제 원리와 아나키즘의 행동강령의 전개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현금의 인간지식 속에서 아나키즘이 차지하는 지위를 제시하는 데는 앞에서 논술한 바로서 충분하겠다.

아나키즘이란 자연과학의 귀납?연역방법에 의하여 얻어진 종합을 인간의 제 제도의 평가에 적용하려고 하는 기도이다. 그것은 또한 평가에 입각하면서 인간사회의 각 단위에 대하여 최대량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유, 평등, 우애로 향하여 나가는 인류의 걸음을 예지豫知하려고 하는 기도이다.

아나키즘은 자연과학에서의 지적 운동의 불가피한 결론이다. 이 지적 운동은 18세기에 비롯하여 프랑스혁명의 좌절 후에 유럽에 승리의 함성을 올린 반동으로 말미암아 침체한 후, 50년대 말에 이르러 다시금 전면적으로 떨치고 일어섰다. 이처럼 아나키즘의 근원은 18세기의 자연과학적 철학 속에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이 자기 자신의 완전한 터전을 닦은 것은 19세기 후반의 초두에 일어나 인간의 제 제도화 사회의 자연과학적 기초에 의한 연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과학의 부흥 이후의 일이었다.

1820년대와 30년대의 독일의 형이상학적 철학자의 득의만면으로 자랑삼던 소위 과학적 법칙이란 것은 자연과학의 방법 이외의 여하한 방법도 승인 아니 하는 아나키즘의 세계관 속에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아나키즘은 일반으로 인문과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모든 과학에도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려고 한다.

이 방법에 의거하고, 또한 이 방법론의 영향 아래 최근에 이루어진 일체의 연구를 이용함으로써, 아나키즘은 인간에 관한 모든 과학의 종합을 구성하려고 힘쓰는 동시에 최근의 민족학적 연구에 의하여 전하여진 자료를 기초로 또한 그것들을 일층 확대하면서, 법이나 정의와 같은 것에 대한 통설적 관념을 재검토하려고 한다. 아나키즘은 18세기의 선구자들의 노작에 의거하면서 국가에 대립하여 개인을 옹호하는 편에 서고, 또한 역사적 제 조건에 의하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에 대항하여 사회의 편을 들려고 한다. 아나키즘은 또한, 근대과학의 손으로 수집된 역사적 자료를 이용함으로써 금일 점점 그 압박을 증대시키고 있는 국가권력이 우리들 유럽인에 대해서는 15세기와 16세기 이래 비로소 대두한 유해무익한 상부구조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 내어진 상부구조이고, 이미 고대에는 로마와 그리스 멸망의 원인을 이루고, 다시 동양과 이집트에서의 제 문명의 모든 중심지의 붕괴의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역사의 경과 속에서 지주, 재판관, 군인, 승려를 공통의 이익 속에 통합할 목적으로 형성된 권력, 그리고 또한 역사 속에서 다소라도 보장된 자유의 생활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를 매양 방해해온 권력 - 이 권력은 시저주의, 제국주의 내지 교회가 사회혁명의 도구로 되지 못함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무기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아나키즘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정작 해악은 자본가가 잉여가치또는 순이익을 자기네의 손에 넣는데 있다기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순이익 또는 잉여가치가 가능케 된다는 사실 그것에 있는 것이다. ‘잉여가치가 존재하는 것은 다만 몇 백만의 인간이 그 노동력과 지식을 이것의 존재를 가능케 할 만큼의 저렴한 값으로라도 팔지 않고서는 생활을 해나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에서 우리가 첫째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소비에 관한 장이고, 또한 혁명에 있어서 해야 할 최초의 의무는 의식주가 만인에게 보장될 방식으로 소비를 재편성하는 일이 아니면 안 된다. 1793?94년에 우리의 선배들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생산에 관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 사회의 제일의 필수품이 가급적 빨리 충족되게끔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까닭에 아나키즘은 장래 올 혁명을 단지 금화 대신에 노동권을 사용하거나 또는 금일의 자본가들 자리에 자본주의 국가를 갖다놓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혁명 속에 국가 없는 자유코뮌주의에로의 제일보를 찾는다.

아나키즘의 이러한 결론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그 해답은, 한편으로는 아나키즘의 기초의 과학적 비판이,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생활이 우리에게 명시할 것이다. 허나, 아나키즘이 의심할 여지없이 전혀 올바른 한 가지 점이 있다. 아나키즘이 사회 제 제도의 연구를 자연과학의 한 부문으로 보고 형이상학과는 영원히 옷깃을 나누고, 현대과학과 금일의 유물론 철학과의 구성에 유용한 방법을 자기의 사유방법으로서 채용한 것, 바로 이것이다. 그 결과, 가령 아나키즘이 그 결론에 있어서 어떤 오류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깨닫기는 아주 용이하다. 그러나 우리의 결론을 검증하려고 하면, 그것은 모든 과학이 거기에 기초를 두고 있고 또한 일체의 과학적 세계관의 발달이 거기에 의거하고 있는 과학적 귀납?연역적 방법을 쓰고서야 비로소 가능케 될 것이다.

 

 

이 논문은 1909년 런던 프리덤 사에서 출판되고 그 후 1916년 미극의 마서 아스 사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 양쪽이 서로 대차大差가 없다. 그 외에 볼드윈이 편찬한 혁명논문집에도 이 논문이 합본되어 있으나 대단히 생략되어 있다. 이 역서에는 이들 3자가 참조되었다.

 

 

 

 

 

 

 

 

 

 

 

 

 

 

 

 

 

 

 

아나키즘의 도덕

 

 

 

1

 

인류의 사상사는 한 번 요동하는데 수세기를 요하는 진자振子(시계추 같은 것)의 요동搖動을 연상케 한다. 장기간의 수면기를 지난 후에 각성의 기간이 오는 것이다. 그때 사상은 당국자 - 즉 지배자, 입법자, 승려 -들이 세심히 주의하여 사상을 속박하여 놓았던 사슬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다.

사상은 사슬을 끊어 부순다. 사상은 지금까지 자기를 잘 익혀 오던 모든 것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자기를 양육하여준 종교적, 정치적, 법률적 편견이 공허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찾아나갈 연구로 출발한다. 그 새 발견으로 우리들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새로운 과학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의 적년積年의 적 - 지배자, 입법자, 승려 -은 졸지의 그들의 패배로부터 회복한다. 그들은 점차 그들의 허물어진 힘을 다시 집결하여 새로운 요구에 그들을 적합시키도록 그들의 신앙과 법전을 개작改作하고 다음에 그들이 대단히 유효하게 교양해 오던 사상과 성격의 노예성을 이용하고 또 사회의 일시적 혼란도 이용하고 다시 어떤 사람들의 나태와 기타의 탐욕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최대의 희망을 이용하여 저 자들은 먼저 교육에 의하여 아동들을 잡고 파고 들어가서 슬금슬금 저희들의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동의 의지는 연약한 것이다. 그들을 위협하거나 유혹하기는 대단히 용이하다. 그들(지배자, 입법자, 승려)은 그것을 실행한다. 그들은 아동을 아주 겁쟁이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는 지옥의 고민상苦悶狀의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들려준다. 그들은 벌을 받은 사람들의 고뇌와 용서할 줄을 모르는 신의 복수를 아동들 앞에서 가장 당연한 일처럼 허풍을 치며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에 그들은 아동으로 하여금 질서의 벗답게 만들기 위하여 형벌과 고문의 무서움을 지껄여가면서 어떤 혁명가들의 폭동의 경우를 실증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승려는 아동으로 하여금 법률관념에 습관이 들도록 하고, 신의 율법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하여 무엇보다 더 잘 복종하도록 시킨다. 또 법률가는 국가의 법률을 잘 준수하도록 신의 율법을 늘어놓아 이야기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굴종의 습관이라고 하는 것을 말로는 익히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노예적이면서 동시에 강권적인 종교적 성벽性癖은 이 굴종의 습관에 의하여 다음 세대 사람들의 사상이 보수保守하고 지지하여 가는 것이다. 노예적이며 동시에 강권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양자가 항상 서로 제휴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수면기의 막간에는 도덕과 같은 것은 아주 논의도 되지 않는다. 종교적 제의祭儀와 법률적 위선이 대용으로 된다. 민중은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무의식적으로 그저 습관과 무관심에 끌려간다. 그들은 기성의 도덕에 대하여는 이것을 옹호하는 일도 이것을 반대하는 일도 조금도 괘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행동이 자기들의 직업과 일치하게 되도록 외관을 장식하기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사회의 도덕적 평면은 점차로 저하하여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퇴폐기의 로마의 도덕이나 구제도의 도덕이나 혹은 중산계급 우월기의 종말의 도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 있어서 선하다, 위대하다, 관용하다, 혹은 독립적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조금 씩 조금씩 곰팡이가 피어서 내버려둔 주머니칼 모양으로 동록銅綠이 쓸고 만다. 허위가 덕행으로 되고 평범함이 의무로 된다. 자기를 부유하게 하고 자기의 기회를 붙잡아 가지고 사물의 여하를 막론하고 자기의 지혜와 열심과 정력을 다한다고 하는 것이 부유계급 또는 부르주아답게 보이는 것을 그 이상으로 하고 있는 빈민 군중의 표어가 되어 있다. 다음에 지배계급과 법관, 승려와 좀 유복한 계급의 타락이 격심하여 짐에 따라 사람들의 반항을 환기하게 되어 마침내 진자는 다른 방향으로 동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점차 청년은 자기를 해방한다. 그들은 그 편견을 내던져버리고 비판을 하기 시작한다. 사상은 최초 소수자들 사이에 어렴풋이 눈이 떠지는 것이나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각성은 대다수에까지 파급되어 간다. 이와 같이 하여 충동은 일어나고 반항과 혁명이 이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마다 도덕의 문제가 재연된다. “어째서 나는 이 위선적 도덕의 원리에 따르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하고 종교적 공포로부터 해방된 두뇌는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도덕이라는 것은 의무로써 속박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다음에 민중은 모든 기회를 봉착하지만 그들 자신으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도덕적 감정에 대하여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이 인간성에 한해서만 있는 특권이라고 믿고 있는 한, 즉 그들이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동물이나 식물이나 암석에 이르기까지 더듬어 가보지 않는 한에는, 그들은 도덕을 설명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해답을 그 시대의 과학에서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전통적 도덕이라고 할까, 아니 차라리 도덕의 본거本據, 그것을 봉쇄하고 있는 위선의 근저가 동요할 것 같으면 동요할수록 더욱더욱 사회의 도덕적 평면이 앙양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민중이 도덕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있을 때 바로 이러한 때야말로 도덕적 감정이 가장 진보하는 것이다. 도덕이 성장하고 앙양되어 정련精鍊되는 것은 바로 이때다.

 

이러한 일이 18세기에 일어났다. 1623년에 이르러 그 저작 밀봉蜜蜂의 이야기와 그것에 첨부한 주해를 가지고 영국을 매도한 익명의 작가 만드빌( Mandeville)은 도덕의 미명 하에 알려지고 있는 사회적 위선을 대담하게 공격하였다. 그는 소위 도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과 또는 우리가 그 시대의 도덕법전에 의하여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욕이 얼마나 반대로 이 법전의 통제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욱 더 악한 방면으로 나가고 있는가를 교시하였다. 그는 푸리에(Foulier)와 같이 정욕에 대하여 자유의 천지를 요구하였다. 이 자유의 천지가 없이는 정욕은 잔악한 행위로 타락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그 시대에 있어서의 동물학적 지식의 결핍 즉 동물의 도덕을 무시하였던 점에서 그는 자기 깐에 유루遺漏없이 도덕적 관념의 기원을 양친과 지배계급과의 재미있는 아첨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설명하였다.

얼마 후에는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및 백과전서가들에 의하여 도덕적 관념에 대한 맹렬한 비평이 나오기 시작하게 된 것은 세인이 주지하는 바이다. 또 우리들은 1790년경의 자유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기억하고 다시 또 우리들은 법률 준수자들 사이에도, 또 애국자들 사이에도,심지어는 지상至上존재자()’에 대한 의무나 도덕적 비준에 대하여 현혹하고 있는 자코뱅(Jacobins)당이나 퀴이요(Cuyau)와 같이 의무도 도덕적 비준도 일체 부정하는 허버트(Hebertistes)파의 무신론자들 사이에도 도덕적 정감의 더욱 더 높은 발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째서 도덕적이 아니면 아니 되나?”- 이것이 12세기의 유리唯理주의자나 16세기의 철학자나 18세기의 철학자와 혁명가들이 직면했던 문제였다. 그 후대에 와서 이 문제는 영국의 공리주의 벤덤(Bentham)과 밀(Mill) 사이에, 또 부흐너(Buchner)와 같은 독일의 유물론자들 사이에, 다시 또 1860년으로부터 70년까지의 러시아의 허무주의자들 사이에, 그리고 자유사회주의 윤리학(사회도덕과학)의 유명한 청년 창설자 - 유감스럽게도 너무 일찍이 요사夭死한 퀴이요 -에게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최후로 이것은 금일의 청년 자유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인 것이다.

! 좋다!

20년 전 러시아 청년들은 이 문제로 인하여 열정적으로 떠들어댄 일이 있었다. 한 젊은 허무주의자가 그 우인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부도덕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그는 그 우인에게 하등의 평온한 생각을 주지 못하던 사상을 행동으로 나타냈다. “나는 부도덕자가 되겠다. 그런데 어째서 부도덕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가? 그것은 성서의 의지인 까닭인가. 그러나 성서라고 하는 것은 바빌로니아인이나 헤브라이인의 전통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호머의 시집과 같이 수집하고 긁어모은 전통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바스크(Basque)인의 시나 몽골인의 신화를 지금도 아직 수집하고 있지만,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면 나는 동양의 반개인종半開人種의 정신상태로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나는 칸트가 지상명령에 대하여 즉 오인吾人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그것의 심저沈底로부터 나에게 주어져온 그 신비적인 명령에 대하여 말씀하였고 나에게 도덕적이 되라고 경고하였다고 하여서 그 까닭으로 나는 도덕적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이 지상명령이 가끔 나에게 술을 마시라고 명령할 수 있는 어떤 다른 명령보다도 큰 권위를 나의 행동 상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은 우리의 무지를 은폐하기 위하여 발명되어진 섭리라든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그 어구와 같이 언어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닌 어구에 불과한 것이다.”

혹은 하천 탁류에 떨어진 지나가던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하천으로 뛰어들어 내가 빠져 죽는 편이 그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내가 보고서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행복스럽다고 나에게 믿도록 설복하는 벤담 덕택으로 나는 도덕적이 아니어서는 아니 되는가?”

혹은 또 이와 같이 교육되었기 때문에 나는 도덕적이 아니면 아니 되는가? 나의 모친이 나에게 도덕을 교훈하였던 까닭으로 그대로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친, 우리들의 인자하시고 순박하시지만 무식하신 모친이 이와 같은 허풍선이 사례를 얼마든지 교훈하여 주셨다고 말하는 그러한 이유만으로 나는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고 여왕을 찬미하고 재판관 앞에 머리를 수그리는 것일까?”

나는 편견을 받아가진 - 그 누구 모양으로 나는 그러한 편견으로부터 자기를 해탈시켜야 하겠다. 가령 부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혐오할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억지로 나 자신을 부도덕으로 나가게 하겠다. 흡사 내가 어린 아이인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유치한 노릇을 하지 않도록 자기로서 억지의 노력을 하던 것과 같이.”

종교에 의하여 남용되던 무기를 싹둑 꺾어버리는 것은 부도덕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감행하겠다. 가령 그것이 도덕이라고 하는 미명이 씌워진 어구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의 머리 위에 덮어씌운 위선에 대하여 방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모양으로 러시아의 청년은 그들이 구세계의 편견과 결연히 손을 끊은 때에 생각하기를, 그리고 강권이 얼마나 존경되어져 있다손 치더라도 어떠한 강권의 앞일지라도 무릎을 꿇지 않고 이성에 의하여 확립되어져 있지 않는 한에는 어떠한 원칙일지라도 인정하지 않는 까닭에 이 허무주의 아니 자유사회주의의 기치를 들고 나서는 것이었다.

다시 한마디 더 부가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의 교훈을 쓰레기통 속에 던져버리고 일절 도덕의 체계를 불살라 버린 뒤에 허무주의의 청년들은 그들의 선조가 복음이라던가 양심이라던가 지상명령이라던가 혹은 공리주의자의 승인된 편익’(L'int?ret bien Conpels) 이라던가 하는 것들의 통제 하에 실행하여온 도덕보다도 무한히 탁월한 도덕적 습관의 핵심을 그들의 한가운데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나는 도덕적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 문제가 여기에서 적당하게 제기되어 있는가, 않은가를 고찰하고 인간의 행동의 동기를 분석하여 보자.

 

 

 

 

 

 

 

 

 

 

 

 

 

 

 

 

 

 

 

 

 

 

 

 

2

 

인간은 각종 각양의 방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의 선조가 설명하려고 할 때에 그들은 대단히 단순한 방식을 가지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금일에 와서도 이 설명을 하는데 가톨릭교의 어떠한 우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나서 자기의 길을 자기가 걸어 나가고 있지만 그러나 조금도 느끼는 바가 없이 자기의 왼편 어깨에 악마를 얹어놓고 오른편 어깨에 천사를 메고서 걷고 있다. 악마가 그로 하여금 악을 행하라고 독촉할 것 같으면 천사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못하도록 만류하려고 한다. 그래서 만약 천사가 이겨서 그 사람이 덕을 떠나지 않고 나갈 것 같으면 다른 3명의 천사가 그를 떠메고서 천당으로 데려간다. 이 모양으로 무슨 일이나 감탄할 만큼 잘 꾸며대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러시아의 나이 많은 유모들은 애기의 셔츠 칼라 단추를 빼지 않고서 어린 애기를 침상에 결코 눕히지 않고 턱 밑의 따뜻한 곳에는 호위의 천사가 잘 수 있도록 열어 놓아두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는 애기가 자고 있는 틈이라도 애기를 들볶아댈 것이라고 여러분에게 타이를 것이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개념은 지금은 벌써 과거지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옛 이야기는 없어질는지 모르나 그 근본적 관념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상당히 교양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벌써 악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관념은 유모의 그것에 비하여 그리 많이 합리적으로 되어있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철학의 명목을 가지고 채색을 한 학구적 술어術語 하에 악마와 천사를 가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에 와서 악마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라던가 정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사양심또는 영혼이라고 하는 말로 바꿔놓아지고 창조신의 사상의 반영이라던가 또는 석공이 말하는 것처럼 대 건축사라고 하는 말로 대용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은 두 개의 서로 적대하는 요소간의 투쟁의 결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들 두 개의 요소 중의 하나 - 영혼 또는 양심 -이 다른 요소 - 육 또는 정욕 -에 대하여 우세한 정도에 정비례하여 인간은 도덕적이 되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영국의 철학자, 그 후에는 백과전서가들이 이들 원시적인 관념에 반대하고서 악마도 천사도 인간의 행동에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선이건 악이건 유용하건 유해하건 간에 모두가 단일한 동기 즉 쾌락의 욕구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때 우리의 증조부들께서 놀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모든 종교적 결사, 그 중에도 바리새의 다수 종파들은 부도덕한 자들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들은 사상가들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이 사상가들을 종교의 난적亂賊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후대 세기가 점점 진전함에 따라 마찬가지 사상이 벤담, 존 스튜어드 밀, 체르니 체프스키(Tcherny Chevsky)와 기타 다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재차 채용되었을 때, 또 그들의 사상가가 이기주의 즉 쾌락에 대한 욕구가 우리 인간의 행동의 참으로 모든 동기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입증하기 시작한 때 저주는 배가하였다. 저자는 언론 억압의 모의에 의하여 금지되고 저자는 악인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이론으로부터 그래도 더욱 진실한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어린 아이에게서 최후 한 조각의 빵을 탈취하여 먹었다고 하자. 온 세상 사람들은 이 남자 녀석은 무서운 이기주의자이며 또 이 남자 녀석은 단지 자기애自己愛에만 끌리는 욕심쟁이라고 지칭하는데 일치하리라.

그러나 여기에 별개의 한 사람이 또 있어서 그 사람은 온 세상 사람들이 보고서 유덕有德한 사람이라고 다들 일치하게 칭찬한다고 하자. 그는 자기의 최후 한 조각의 빵을 기한飢寒에 쓰러지는 사람에게 내어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히기 위하여 단 한 벌밖에 없는 코트를 벗어주었다고 하자. 그런데 도덕론자들은 그 종교적 망상에 집착하여 즉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 인인애隣人愛가 자기부정自己否定의 점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 사람은 이기주의자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감정에 끌려가고 있다고 하리라. 그러나 조금 반성하여 볼 것 같으면 우리는 이 양자 행동의 인도人道에 대한 결과에는 얼마만한 큰 상위相違가 있다 할지라도 그 동기는 오히려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 동기는 즉 쾌락의 탐구이다.

만약에 최후 1매의 셔츠를 벗어준 사람이 그 셔츠를 벗어주는 데서 하등의 쾌락도 느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어린 아이로부터 빵을 탈취하는 데에 쾌락을 느꼈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것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짓은 실제 그 사람에게는 불쾌 천만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까닭에 주는 것이다.

만약에 일반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의의를 가진 어휘를 새로운 의미로 사용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불편이 없다고 하면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이 사람들은 이기주의라는 충동 하에 행동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상을 자극하는 형식에서 그것을 표현하는데 의하여 사상을 명석하게 하고 관념을 정확케 하는 동시에 이들 두 가지 행동은 두 가지 상이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화를 타파하기 위하여 실상은 전술한 것과 같은 말을 한 것일 것이다. 그들은 쾌락의 추구 또는 그것과 맞먹는 고통의 회피라고 하는 동일한 동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가장 잔인한 악당, 35,000명의 파리 사람을 학살한 지롱드당의 한 사람이나 또는 주색에 탐하여 가지고 전 가족을 학살한 암살한暗殺漢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그 순간 영예 또는 금전에 대한 욕망이 모든 다른 욕망에 비하여 우월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연민의 정이나 또는 동정심까지도 이 한 가지의 갈망에 의하여 그 순간 그만 사라지고만 것이다. 그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그들의 본성의 요구를 만족케 하도록 행동한 것이다. 또는 이러한 강렬한 격정을 일으킬 일은 별문제로 치고 자기의 친우를 시기하고 누구에게서든지 맥주 값을 구하려고 할 때 마다 거짓말을 하고, 또는 아무 까닭 없이 허풍 치는 것이 좋아서 거짓말을 하고, 또는 교활한 까닭에 남을 항시 속이는 비열한 남자를 예로 들어보라. 또 자기의 처나 애첩에게 보석, 패물을 사주기 위하여 노동자를 학대하는 고용주를 예로 들어보자. 그 외에 여러분의 마음대로 어떠한 악한이라도 예로 들어보라. 그 자들도 역시 충동에 끌려서 행한 것밖에 아니다. 그 자들은 욕망의 만족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들은 자기에게 인고忍苦를 주는 것을 피하려는 요구의 만족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전 생애를 피압박자의 해방을 위하여 희생으로 바치다가 급기야는 단두대에 올라간 러시아의 허무주의자와 같은 사람들과 이러한 상기의 악한들과 비교하여 말하는 것부터 우리는 수치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들 두 개인의 생활의 결과는 인도에 대하여 거대한 차이가 있다. 그 까닭으로 우리는 일방一方에 대하여는 존경과 숭배를 바치도록 느끼지마는 타방他方에 대하여는 천시하고 배척하고 싶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제군이 이러한 순교자, 지금 막 처형을 하게 된 부인과 이야기를 하여본다면 그녀가 방금 교수대로 걸어가며 최후의 시간이 일초, 일초 가까워 오는 그때일지라도 그녀는 자기의 생이나 사가 노동자로부터 도취盜取한 금전으로 생활하는 비열한 악한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교환하기는 진저리나게 싫다고 말할 것이다. 그녀의 생활에서 즉 괴물과 같은 권력과 투쟁하는 데에서 그녀는 자기의 최고의 환희를 통절히 느끼는 것이다. 투쟁 이외의 일체, 즉 자본벌資本閥의 추악한 환락도 비루한 인고忍苦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조소할 만한 것이며 번뇌할 만한 것이며, 또 연민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 등은 살고 있어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먹기만 하는 밥버러지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그녀는 대답하리라. “나는 지금 죽어도 영혼이 살고 있다고 하리라.

 

우리는 물론 우리의 생활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무의식의 거대한 계열 즉 기계적 행위에 불과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지금 여기에는 말하기를 그만 두기로 하고 인간의 사려 있는 의식적 행위에 대하여서 우선 말하는 바이다. 인간은 그 사려 있는 의식적 행위에서 항상 자기에게 쾌락을 주는 것을 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대단히 술을 잘 마신다. 그리해서 자기의 신경계통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신경의 흥분을 술에서 구하는 까닭에 매일 매일 금수禽獸 상태에까지 자신을 저하시키고 만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술을 도무지 마시지 않는다. 가령 술이 유쾌하다는 것은 알지만 술을 마시는 것보다도 다른 좋은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까닭에 자기의 사상을 신선히 지니고 자기의 정력을 풍부하게 지니고 싶은 까닭에 아무 주류도 마시지 아니한다. 그러나 정교한 요리 종목 표를 한번 보고서 자기가 가장 즐겨하는 것을 충분히 먹기 위하여 즐기는 음식일지라도 거부하는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재판관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어떻게 행동을 할 것일까?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쾌락을 구하거나 또는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다.

 

어떤 부인이 초면의 내방객에게 주기 위하여 자기의 최후의 한 조각 빵을 내놓을 때, 또 자기도 기선 갑판 위에서 떨고 있기는 하지만 추위에 고통 받고 있는 다른 부인에게 입히기 위하여 자기의 한 겹의 남루한 의복을 벗어줄 때, 그 부인은 가기가 떨고 굶주림을 느끼는 것보다도 다른 주린 사람이나 추위에 떨고 있는 여자를 보는 편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까닭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부인은 고통을 회피한 것이며 그 고통에 대하여는 다만 그것을 느낀 그 사람만이 그 느낀 아픔의 정도를 알고 있는 것이다.

퀴이요가 인용한 이야기의 오스트레일리아 인이 자기가 아직 친족의 피살을 복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관념 하에 그 고민으로 쇠약하여 갈 때, 또 그가 자기의 비겁을 통탄하여 수척해지고 창백해져서 복수 행위를 감행하기까지는 생기가 돌아서지 않을 때, 그는 자기를 포로하고 있는 감정으로부터 해방하고 쾌락의 최고인 내적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러한 행위를 하고 때로는 영웅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원숭이의 일군一群이 사냥꾼에게 사살되어 쓰러진 자기들의 한 동료를 보고서 그 사냥꾼의 천막을 포위하고 총으로 위협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료의 시체를 요구할 때, 그리고 마침내 그 떼거리들 중의 장로라고 할 만한 놈이 기세당당하게 천막 안으로 들어와서 우선 사냥꾼을 위협하고 그 다음에는 애원을 하다가 최후에는 애처롭게 읍소하기를 마지 아니 하다가 사냥꾼이 감동되어 그 시체를 내버려줄 것 같으면 그것을 신음하여 호읍하던 무리가 삼림森林 속으로 운반하여갈 때, 그 원숭이들은 제 한 몸뚱이의 안전을 고려하기보다도 훨씬 강한 동료에 대한 연민의 정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감정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다른 감정에 비하여 우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동료란 놈이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동안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생활은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감정은 미물微物, 금수禽獸로 하여금 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갖은 짓을 다 해보지 않으면 아니 될 만큼 고통스럽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 칭하는 저 사악한 짐승 같은 것이 불을 질러놓은 화재 밑에 불구덩이가 된 개미집 속으로 개미가 수천만 리 씩 들어 덤벼서 그들의 유충을 구출하려다가 죽어갈 때, 그들은 역시 그들의 자손을 구출하려는 열망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 중의 허다한 부인들이 그 자녀에게 베풀고 있는 주의보다도 훨씬 심심한 주의를 가지고 양육해온 그들의 유충을 운반해 가져가려고 갖은 방법을 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곤충이 너무 강열한 열선을 회피하여 미온微溫한 광선을 찾아갈 때, 또는 식물이 그 화륜花輪을 태양 편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하고 또는 야음夜陰이 접어드는데 따라 그 잎을 오므려 모을 때, 이들의 생물은 역시 고통을 피하여 쾌락을 구하는 요구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서, 이 점은 개미도 원숭이도 오스트레일리아인도, 순교하는 기독교도도, 또는 자유사회주이자도 다 동일하다.

쾌락을 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은 유기계有機界의 행동의 일반계(혹은 세인은 법칙이라고 한다)이다. 유쾌를 탐구하는 일이 없이 생활 자체는 불가능하리라. 유기조직은 붕괴하고 생활은 정지되고 말리라.

 

이와 같이 인간의 행동과 행위의 계통이 어떠하였던지 인간은 그 천성의 열망에 복종하는 데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행동일지라도 무관심한 행동이나 가장 마음을 끄는 행동이나 똑같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개인의 요구에 대하여 일체 똑같이 지도되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자기로 하여금 행동케 하여라. 그는 그 행동에 있어서 쾌락을 발견하고 혹은 고통을 피하고 또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이런 행동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십분 확립된 사실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이기주의설이라고 칭하는 것의 진수眞髓를 파악하고 있다.

매우 좋다. 그러나 이 일반적 결론에 도달하고서 우리는 무엇인가 개량됨이 있는가?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진리를 정복한 것이다. 모든 편견의 근저에 가로놓여 있는 한 개의 편견을 타파하여 놓은 것이다. 모든 유물론적 철학은 그 인간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이 결론 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은 모두 무관심하다고 어떤 사람들은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나 그러나 그것이 될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검토하지 않으면 아니 될 문제이다.

 

 

 

 

 

 

 

 

 

 

 

 

 

 

 

 

 

 

 

 

 

 

 

 

 

 

 

 

 

 

 

 

 

3

 

우리는 인간의 행동은(인간의 사려있는 의식적 행동을 말함이다. 무의식적인 습관에 대하여는 뒷장에서 논술코자 한다.) 일체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검토하였다. 도덕적이라고 명칭 되는 행위, 부도덕이라고 명칭 되는 행위, 대단히 존경할 헌신과 비열한 비행, 인심을 끌만한 행위와 배척할만한 행위, 이런 것 일체는 공통의 근원으로부터 출발하고 모든 것이 개인 천성의 어떤 요구에 응답하여 행하여지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그 목적으로서 쾌락의 추구와 고통 회피의 염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앞장에서 이 점을 검토하였으나 그것은 이 견해를 지지하기 위하여 제공할 수 있는 다수 사실을 매우 간략하게 총괄하였음에 불과하다.

이 설명이 종교적 원리에 지금도 아직 침염浸染되어 있는 자들로 하여금 얼마나 절규되고 있는지는 용이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초자연을 용납할 하등의 여지도 없다. 그것은 영혼불멸의 관념을 포기한다. 만약 인간이 자기 천성의 요구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뿐이라고 하면, 만약 인간이 이일로 치면 의식이 있는 자동기自動機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면 불후의 영혼이라는 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너무나 불소不少한 쾌락을 갖고 너무나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다른 세상에서 어떠한 종류의 대상代償을 받을 것을 몽상하는 사람들의 최후 은닉처인 영혼불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편견 속에서 자라나고 또 너무도 자주 민중을 기만하던 과학에 대하여 거의 신뢰를 하지 않고 있는 민중의 사상보다도 오히려 감정에 의하여 유도 되고 있는 민중은 그들의 최후 희망을 그들로부터 탈취하여가는 그런 설명을 거부한다.

그러나 전세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혁명가들이 처음으로 인간의 행위의 자연과학적 설명(상관이 없다면 이기주의설이라고 말해도 좋다)에 대하여 들을 적마다 이상에서 말한바 청년 허무주의자와 동일한 결론을 그것으로부터 끌어내고 그리고 열심히 도덕을 타파하라고 부르짖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가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인가?

또 인간은 자기의 천성의 요구에 응하여 각양의 행동을 하는데 불과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행동은 일체 선악이 무차별한 것이다. 선도 악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의 생명을 내던져버리기까지 해서 물에 빠져 죽게 되는 사람을 구출하는 것이나, 혹은 또 자기가 방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익사케 하는 것이나 ,양자 공히 똑같은 가치의 두 행위이다. 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활동한 교수대 위의 이슬로 쓰러지는 순교자나 자기의 친우에게서 물건을 도적해오는 비열한 무뢰한이나 양자가 똑같은 동일 가치의 인간이다 - 양자가 다 같이 자기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는 까닭에 - 라고 결론을 내리기에 바쁘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우리는 어떠하다고 말하면 좋을까?

만약 그들이 더욱 진일보하여 좋은 향내도 나쁜 냄새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장미화는 방향芳香이요 얼초蘖草는 악취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째 그러냐하면 양자가 공히 분자의 진동인 것밖에 다를 것이 없는 까닭이다. 또 씀바귀의 쓴맛이나 수밀도水蜜桃의 감미나 다 같이 분자의 진동일 뿐인 까닭에 좋은 맛 나쁜 맛의 구별이 있을 리가 없다. 육체에 있어서도 미추美醜의 별도 없을 것이며, 현우賢愚의 별도 있을 리가 없다. 어째 그러냐 하면 미추, 현우는 역시 유기체의 세포 내에 작용하는 화학적 물리학적인 진동의 결과에 불과한 까닭이다, 라고 이론을 붙여 말한다면 - 만약에 그들이 이와 같이 억설을 한다면 그들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광인의 논리를 가지고 횡설수설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논리를 취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좋을 것인가?

 

우리의 대답은 단순하다. 그 저서 밀봉蜜蜂이야기에서 1724년에 그와 같이 논술한 만드빌과 1860년 내지 70년경 러시아의 허무주의자 또 금일의 파리 청년 아나키스트 등이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은 그들이 순전히 무의식적으로 지금도 아직 편견, 즉 기독교적 교육의 편견의 와중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얼마나 무신론적이며 얼마나 유물론적이며 또 얼마나 자유사회주의자 답게 그들은 자기를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교회의 신부나 불교의 개조開祖 등이 논술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행동은 만약 그 행동이 육에 대한 영의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면 그것은 선이며 만약 육이 영에 대한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악이요 만약에 그 행동이 이 양자 중에 어느 편의 승리도 아닐 것 같으면 그것은 선악 무차별일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에 의하여서만 행동이 선인지 혹은 악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라고 함은 이런 존경하는 장로님의 말씀일 것이요, 그리고 우리 연소한 친구들이 기독교나 불교의 교부敎父들을 모방하여 역시 이에 의하여서만 우리는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다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일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말한다. “보라, 금수들을 그것들은 불멸의 영혼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의 행동은 단지 그들의 천성의 요구에 응하여 행할 것뿐이다. 이것이 금수들 사이에는 선한 행동도 악한 행동도 없는 일체가 무차별하다는 이유다. 그리고 금수들에게는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보응報應도 없으며 형벌도 없다는 이유다라고. 그리고 우리 연소한 친구들은 오귀스틴(St. Augustine)이나 석가모니 등의 중언부언하는 어구를 채용하여 인간은 금수에 불과하다. 그 행위는 단지 천성의 요구에 응하여 행하여지는 것뿐이다. 이것이 인간들 사이에는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있을 수 없는 이유다. 일체는 선악 무차별이다라고 말한다.

 

이성에 역행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말하면 그것은 지금도 아직 형벌과 응보라는 이 저주할 관념이다. 또 그것을 만약에 행위가 초자연적 영감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선이요 만약 초자연적 기원이 결여하여 있다면 그것은 선악 무차별하다고 하는 종교적 교육, 종교적 교훈의 이 배리적背理的 유물이다. 다시 또 그것은 오른편 어깨 위의 천사와 왼편 어깨 위의 악마의 전설에 대하여, “악마도 천사도 다 쫓아버려라, 그리하면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여러분에게 일러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고 큰소리로 조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까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똑같은 옛 관념이다.

악마와 천사를 어깨에 얹어놓고 있는 목사가 상주常住로 존재하고 있어서 모든 유물론적인 덧칠도 그것을 은폐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나쁜 일은 재판관이 갑에게 대한 태형의 선고와 을에게 대한 법적 응보를 가지고 상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자유사회주의의 원리를 가지고서 말할지라도 형벌과 응보와의 관념을 근절하기에는 그다지 충분치 못한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도 재판관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단순히 얼초는 악취가 나는가? 독사는 나를 무는가? 거짓말쟁이는 나를 사기詐欺하는가? 그리고 식물, 파충류와 인류는 각각 그 천성의 요구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인가? 고 말할 것뿐이다. 좋다, 그러면 나는 나, 나로서 악취의 식물이나 독을 가지고 남을 죽이는 독사나 동물보다도 더욱 유해한 인간이 나를 증오하는 나의 천성의 요구에 응종應從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 결과 내가 아직 지기知己가 될 광영을 갖지 못한 악마나 내가 독사보다도 더 증오하는 재판관에게 의논하거나 하지 않고서 행동할 것이다. 나와 나의 반감을 공통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모두 우리들의 천성의 요구에 응종하는 것이다. 양자 어느 편에 이론이 있는가? 따라서 어느 편에 힘이 있는가를 검토하여 보자.

이것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검토하려고 하는 바이며 성 오귀스틴이 선악의 판별을 하는데 특별히 다른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더욱 더 유효한 다른 기초를 동물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연구 그 자체에 의하여 발견하리라, 일반 동물계에서는 곤충으로부터 인류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를 성경이나 철학에 문의하지 않고서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원인을 그것들의 천성의 요구 중에 있는 것이다. 즉 종족 보존과 따라서 각 개인의 최대 가능량의 행복에 있는 것이다.

 

 

 

 

 

 

 

 

 

 

 

 

 

 

 

 

 

 

 

 

 

 

 

 

 

4

 

모세교, 불교, 기독교 및 회교 등의 신학자들은 선과 악과를 구별하기 위하여 신의 영감에 의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야만이거나 문명이거나 무학이거나 유식이거나 사악하거나 친절하거나 정직하거나 교활하거나, 자기는 선한 행위를 하고 있는가, 악한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항상 알고 있다. 특히 자기가 잘 못한 행위를 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항상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반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그것은 신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은 자기들의 입장으로부터 양심이라든가 신비적인 명령이라든가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설명을 한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문구가 다른 것 외에 종교가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를 형성하여 생활하는 동물도 역시 인간과 똑 같이 선과 악과를 구별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대단히 단순하고도 더욱 대단히 현저한 사실을 어떻게 평가해야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선악 개념은 인간의 그것과 동일 성질의 것이다. 각종 동물류 중의 가장 잘 발달해온 대표 - 어류, 곤충, 조류, 포유류 - 중에도 그 개념은 동일한 것이다.

18세기의 사상가는 이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아니 되어서 다시 망각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이 사실의 모든 의의를 제창하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요 역할이다.

 

개미의 연구 관찰자로서 그를 도저히 추종할 수 없는 포렐(Forel)은 꿀을 먹어서 밥통을 잘 배불린 개미가 배고픈 다른 개미를 만났을 때 후자 즉, 배고픈 개미는 즉시 전자, 즉 배부른 개미에게 먹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작은 곤충들 사이에는 주린 동료가 자기와 같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꿀을 토해 내놓는 것이 배부른 개미의 의무인 것이다. 자기가 자기 차례에 돌아온 몫을 가진 때에 같은 개미굴에 사는 다른 동료 개미에게 대하여 먹이(사료) 나누어 주기를 거절하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정당하지 않은 것일까는 개미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틀림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은 극히 나쁜 일이라고 대답하리라. 이러한 이기적인 개미는 다른 종족의 적보다도 한층 가혹한 취급을 받으리라. 만약에 이러한 일이 두 개의 다른 종족 간의 전쟁 중에 일어나는 일이 있다면 개미들은 그 이기적인 동료를 처치하기 위하여 전투를 중지할 것이다. 이 사실은 실험에 의하여 입증한 것으로서 어떠한 의혹도 용납되지 않는다.

또 무슨 빵조각이나 쌀 같은 것이 떨어져있어서 모두 와서 먹을 것을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을 때에 그 작은 사회 전체에 통고하지 않고서 혼자만 알고 먹는다는 것이 정당한가 아닌가를 여러분의 정원에 살고 있는 참새들에게 물어보라. 지푸라기를 절도한 새가, 자기가 사방에서 탐색하여 모으기가 귀찮다고 해서 인접한 딴 새집에서 다른 새가 주워 모은 지푸라기를 절취하는 것이 정당한 행위인가 아닌가를 울타리에 앉은 참새들에게 물어보라. 그 참새는 그 놈은 대단히 나쁜 놈이라고 대답하고서 절도한 새에게 날아 모여와서 그 놈을 쪼아 자빠뜨릴 것이다.

혹은 같은 집단에서 사는 한 모르모트가 다른 모르모트에게 대하여 자기의 지하 저장소에 접근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그 모르모트 집단에게 있어서 정당한 일일까 아닐까를 물어보아라. 그들은 그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라고 대답하고서 그 인색한吝嗇漢과 모든 방법을 다하여 싸움을 하리라.

최후로 동일 종족의 일원이 부재중에 그 사람의 천막에 있는 먹을 것을 다른 일원이 먹는 것은 정당한가 아닌가를 원시인, 예컨대 추크체(Tchoukche)인에게 물어보아라. 그는 만약에 그 사람이 자기로서 자기의 식료를 구득할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하였다면 그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라고 대답하리라. 다른 면에 있어서 만약에 그 사람이 쇠약하였다던가 혹은 궁핍하여 있었다면 그 사람은 먹을 것을 발견한 장소에서 식사를 취하여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는 그 사람은 자기의 모자나 혹은 칼 또는 매듭을 맺은 노끈이라도 좋으니까 그것을 그 장소에 놓아두고 가야 한다. 그것은 집에 없던 동족 엽사獵師가 귀가하여서 친구가 다녀간 것으로, 적인賊人이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여두면 좋은 것이다. 이러한 용심用心이 천막 부근에 약탈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으로부터 동료를 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과 유사한 수천의 사실이 인용될 수 있다. 또 선악의 개념은 인간들 사이에 있어서도 또 다른 동물들 사이에 있어서도 얼마나 동일한 형태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수많은 서적이 저술될 수 있는 것이다.

 

개미, 새 모르모트, 원시인은 칸트의 저서를 읽은 일도 없었으며 교회의 교부나 모세의 서적 같은 것도 읽은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 선악에 대하여 동일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이 이 관념의 밑바닥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를 잠시 반성하여 볼 것 같으면 여러분은 개미, 모르모트 및 기독교도, 혹은 무신론의 도덕학자들 사이에 선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종족 보존에 유용한 일인 것이며, 또 악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종족 보존에 유해한 일인 것임을 즉시 알게 되리라. 벤담이나 밀이 발표한 바와 같이 선이라는 것은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 종족에 대하여 선량한 것을 일컬음이다.

선악의 관념은 이와 같이 종교나 신비적 양심과는 하등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의 종족 보존상에 자연적 요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시조, 철학자 및 도덕학자가 우리에게 신의 실재나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그들은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 한 마리 한 마리의 참새가 조그마한 사회에서 실행하고 있는 일을 개작改作하고 있음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 있어서 유용한가? 그러면 그것은 선이다. 이것은 유해한가? 그러면 그것은 악이다.

 

이 관념은 하등 동물들 사이에서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또 일층 진보한 동물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하게 실행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진수는 항상 동일한 것이다.

개미들 사이에서는 그것은 개미굴 이상에는 확대하여 있지 않다. 그 모든 사회적 습관, 그 모든 선행의 규칙은 그 한 개미굴 중의 개개 구성원에게만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개미굴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의 개미굴은 다른 개미굴을 동일 종족에 속하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단 어떤 예외인 사정에서 공통의 재해가 양자 상에 떨어질 때는 별문제이다. 마찬가지로 파리의 룩셈부르크(Luxembourg)공원의 참새는 자기들끼리 상호간에 놀랄만한 양식으로 상호부조를 하지만 룩셈부르크공원으로 감히 모험하고 간 몽그(Monge) 거리로부터 날아온 참새와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리라. 그러므로 야만인들은 타 부락의 야만인들을 자기네 부락의 풍습을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 사람에게는 물건을 팔아도 관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판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사는 사람으로부터 다소간이고 도둑질한다는 것이다. 사는 사람이거나 파는 사람이거나 어느 편이거나 간에 하나는 언제나 팔려지고있는 것이다. 쥬크체 인은 자기와 같은 부락사람에게 물건 파는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같은 부락사람에게 대하여는 하등의 토의를 하지 않고 주고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인은 마침내 그들과 더욱이 가장 단순한 파포(Papouas)인과의 관계, 즉 최초 언뜻 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호관계이지만 그러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그는 그들의 연대성의 원리를 전 인류에게 그리고 동물에게까지도 점차 확대시키리라. 관념은 확대한다. 그러나 그 근저의 진수는 동일한 것이다.

 

타면에 있어서 선악의 개념은 이미 받아가진 지성 또는 지식의 정도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것에 관하여 불가변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원시인은 그 연로한 양친이 사회의 무거운 짐으로 되었을 경우에 - 주로 아주 대단히 무거운 짐처럼 되었을 경우에 - 이 연로한 양친을 잡아먹는 것을 대단히 정당한 일 - 즉 인종적 입장으로 보아서 유리한 일 -처럼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또 원시인은 각 가족에게 2,3인의 자식을 보육할 뿐으로 그 이상 새로 출생하는 자식은 살해하여 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친은 자식이 3세가 되기까지 젖을 먹이며 기르는 그 자식의 신상에 모친의 애정이 더욱 더 충분히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회를 위하여 유리하다고 생각하였을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생존 지지支持의 수단이 벌써 석기시대의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문명인은 두 개의 악, 즉 연로한 어버이를 잡아먹을까, 그렇지 않으면 만인의 불충분한 영양을 취하여 졸지에 연로한 어버이나 연소한 자식이나 쌍방이 다 같이 살아갈 수가 없게까지 될 것인가. 이 양자의 악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그러한 야만인의 가족 형편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당시 존재하여 있던 사정에 있어서 미개인은 그것으로 십분 정확히 사고하여낸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전에 우리의 심경으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 자신을 바꿔놓지 않으면 아니 된다. 실로 선교사가 오세아니아사람들에게 그들의 연로한 친족이나 그들의 적을 잡아먹는 것을 폐지하도록 교양한 이후 그들이 괴혈병의 참사를 입어 희생이 되어있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

 

사고의 방식은 변화할 수 있다. 인종에 있어서 무엇이 유용한가. 또 무엇이 유해한가를 평가하는 관념은 변화한다. 그러나 근저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동물계의 전 철학을 한마디 말로 총괄하려면 우리는 개미, , 모르모트, 인간이 다 같이 한 개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도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너희가 하고자 원치 않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부언하기를 그리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지옥으로 보내질 것이다고 한다.

전 동물계의 관찰로부터 발생한 도덕은 다음 말로 총괄할 수가 있다. 동일한 경우에 있어서 너희들이 남에게 원하는 바를 너도 타인에게 행하라.”

그리고 거기에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이것은 단순히 충고라는 것을 알아라.”그렇지만 이 충고는 사회를 형성하고 사는 모든 동물들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얻은 경험의 성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도 또한 한 사회적 동물의 대 군중들 사이에는 이 원칙상에서 행동하는 것이 습관적으로 되어있다. 진실로 이것이 없었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각 인종은 자기들이 싸워나가지 않으면 아니 될 자연의 장애물을 정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 동물과 인간의 사회를 관찰함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은 확실히 이것이 대단히 단순한 원리인가? 또 그것은 통용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여서 이 원리가 습관으로 변하였으며 부단히 발달을 하는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검토하려고 하는 문제이다.

 

 

 

 

 

 

 

 

 

 

 

 

 

 

 

 

 

 

 

 

 

 

5

 

선악의 관념은 인간성 그 자체 내에 존재한다. 인간은 지적 발전이 어떠한 단계에 도달하여 있든지 간에, 또 얼마만한 정도의 관념이 편견과 개인적 이해의 생각에 의하여 애매하게 되어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생활하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유용한 것을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고찰하고 거기에 대하여 유해한 것을 악이라고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그것이 감정과 구별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막연한 이 개념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인류에 대하여 결코 반성하여본 일이 없는 기만인幾萬人이나 되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부족 또는 종족만을 알고 있으며 민족을 거의 알지 못하고 인류라는 것까지는 더구나 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류라는데 대하여 유용한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의 좁은 이기적인 이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부족들과의 연대성의 감정에까지도 도달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사실은 언제 어느 시대에서나 대단히 사상가들의 두뇌를 점령하고 있던 문제로서 지금도 아직 그것은 그들의 두뇌를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나의 견해를 표시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의 설명은 변할지라도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곤란한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할 즈음에 논술하여 두기로 한다. 그런데 우리의 설명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 그것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사실은 그 인류에 미치는 결과와 함께 여전히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혹성의 기원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혹성은 변함이 없이 공전을 계속하고 그 중의 한 개는 우리들을 그것과 함께 공간에 운행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종교적 설명에 대하여 말하였다. 만약 인간이 선악을 판별한다 할지라도 이 관념을 인간들에게 불어넣는 것은 신이다, 라고 신학자들은 말을 한다. 유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들이 토구討究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다만 그 창조주의 명령에 따르고 있기만 하면 좋은 것이다. 우리는 야만인의 무지와 공포의 성과인 이 설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나쳐 보아두자.

또 다른 자(예컨대 토머스 홉스)는 이 사실을 법률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즉 인간들 중에 정사선악正邪善惡의 생각을 발전시켜 놓은 자는 법률임에 틀림없다고 독자 여러분은 자기 혼자서 이 설명을 판단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법률은 인간의 천성이 복종을 거절하는 그 착취를 일삼는 소수자에게 유용한 각종의 명령을 인간이 수락하는 도덕적 계율 속에 끌어넣기 위하여 인간의 사회적 감정을 단순히 이용하였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다. 법률은 정의의 생각을 발전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역용逆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도 지나쳐 보아두자.

또 우리는 공리주의자의 설명에 그쳐두지도 말자. 인간은 자기의 이해관념으로부터 도덕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리라. 그래서 전 인류들 사이의 연대감이 그 기원은 무엇이 되었든지 현재도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공리주의적 설명에도 어떠한 진리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면적인 진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더 전진하여 보자.

우리가 도덕적 감정의 기원을 추론하는 데에 대하여 일부분에 있어서 확실히 도움 되는 바 있는 것은 역시 18세기의 사상가이다.

종교적 편견에 의하여 침묵 중에 재워지고 또 확실히 반종교적인 사상가들 사이에서까지도 거의 알지 못하고 있던 도덕적 감정의 이론이라고 하는 명저에서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도덕적 감정의 진정한 기원에 관한 연구에 비로소 손을 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 중에서 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단순히 동정이라는 생각 중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여러분은 어린 아이를 때리는 사람을 본다. 여러분은 맞는 아이가 아파할 것을 알리라. 여러분의 상상은 아이 신상에 가하여진 고통을 여러분 자신이 역시 고민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가련한 고민 그대로 안색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겁쟁이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아이를 때리고 있는 맹수 같은 자에 달려들어 그 아이를 그 자에게서 구해 내리라.

이 예증은 그 자체에서 거의 일체의 도덕적 감정을 설명한다. 여러분의 상상이 강력하다면 강력할수록 여러분은 생물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것들이 느끼는 바를 더욱 여러분 자신의 생각 속에 잘 그려볼 수가 있을 것이고 마침내 여러분의 도덕적 감정은 첨예화하고 미묘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여러분 자신을 바꾸어 놓도록 마음이 끌리면 끌릴수록 더더욱 여러분은 그 사람 신상에 떨어진 고통, 그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매욕罵辱, 그 사람을 희생하도록 한 부정의를 통감하고 마침내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 고통, 그 매욕, 그 부정의를 방지할 수 있기 위한 행동을 촉진을 하게 되리라. 그래서 여러분이 경우에 따라 환경에 따라 또는 여러분 자신의 사상과 상상과의 예민성에 따라 여러분의 사상과 상상이 촉진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관습 되어 있다면 있을수록 더욱 더 도덕적 감정은 여러분들 사이에 성장하고 더욱 더 그것이 습관적으로 되리라.

이상이 아담 스미스가 풍부한 예증을 열거하여 전개한 바이다. 그가 이 책을 저작할 때는 아직 연소하였을 때였다. 이 책은 경제학에 관한 그의 노년시대의 저작에 비하면 훨씬 우수한 것이다. 종교적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그는 도덕성의 설명을 인간 천성의 물리적 사실에서 탐구하였다. 그러나 어용 신학이나 비어용 신학의 편견, 이것이 이 논문으로 하여금 1세기 간이나 검정색 뚜껑 속에 간직해 둘 수밖에 없었던 소이였다.

아담 스미스의 오직 한 가지 오류는 이 동일한 동정의 생각은 그 습관적 단계에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동물들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다윈이 말사스로부터 아무 것도 채용하지 아니 하였던 것을 잊어버린 다윈 학도들 중의 속화俗化된 자들은 그야말로 연대성의 감정은 사회를 형성하고 생활하는 모든 동물들의 주요한 특징이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독수리는 새를 탐식하고 이리는 모르모트를 탐식한다. 그러나 독수리거나 이리거나 다 각각 사이飼餌를 사냥할 때에 있어서는 상호부조를 한다. 참새도 모르모트도 다만 영리하지 못한 것만이 포획되는 것으로 맹수, 맹조猛鳥에 대하여 대단히 유효적절하게 그들 자신들의 결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동물사회에 있어서 연대성은 지배계급이 우리들을 업신여기는데 가장 적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 공덕을 칭송하는 저 생존경쟁설보다도 훨씬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자연법칙이다.

우리가 동물계를 연구하여 생존경쟁은 재해가 있는 경우와 침범하는 적에 대하여 각 생물들이 지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연대성과 평등의 원칙이 동물사회에 발달하여 있다면 있을수록, 또 그것이 습관적으로 되어 있다면 있을수록, 더욱 더 생존을 지속하고 고난과 적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진출할 기회를 많이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 아는 바이다. 사회의 각 성원이 타 성원 각자와의 연대성을 느끼는 것이 철저하면 할수록 모든 진보의 주요한 요인이 되는 두 가지 성질 즉, 일방에는 용기, 타방에는 자유스러운 개인 발의가 그들 모든 성원 중에 더욱 더 완전히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동물사회 또는 동물의 소집단이 이 연대성의 감정을 상실하면 상실할수록 - 그것은 극도의 결핍이거나 극도의 풍부이거나의 결과로서 일어날 수 있는 - 더욱 더 진보의 두 가지 요인, 즉 용기와 개인 발의가 멸살滅殺된다. 마침내 그것들은 소실되어서 패퇴에 빠지고 그 적의 앞에 도괴倒壞 되고 마는 것이다. 상호 신뢰가 없다면 투쟁은 불가능하고 용기도 발의도 연대성도 없어진다. - 그래서 아무런 승산은 없는 것이다. 패배는 확실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날 재론하기로 한다. 우리는 얼마나 동물계와 인간계에 있어서 상호부조가 진보의 법칙이요, 또 얼마나 상호부조가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용기나 개인 발의와 함께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소질을 가지고 있는 종족에게 승리를 확보케 하는 가를 허다한 실례를 가지고 증명할 수가 있다. 지금은 사실을 열거하기만 하면 족하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 우리가 제기한 이 문제에 있어서 상호부조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기로서 평가할 수가 있으리라.

거기에서 우리는 지구상에 출현한 동물생활의 창시초로부터 차차 연속하여온 기백만년 간 이 연대성의 감정이 작용하여 왔다는 것을 상정하자. 우리는 어떻게 이 감정이 점차로 습관으로 되고 유전에 의하여서 가장 미소한 유기체로부터 그 자손 - 곤충류, 조류, 파충류, 포유류, 인간 -에게로 계계승승되어 왔다는 것을 상정하자. 그래서 우리는 동물에 있어서는 먹을 것이나 혹은 그것을 소화하는 기관과 같이 필요불가결한 도덕적 감정의 기원을 이해하게 되리라.

이 이상 태고로 소급하여 올라가서 단순한 미생물의 군거群居로부터 시발한 복잡한 동물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지라도 도덕적 감정의 기원은 이것쯤으로 좋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 문제를 수 페이지의 한계 안에 압축하기 위하여 극히 간략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신비적인 것, 아무런 감상적인 것이 없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미 충분히 논술하여 두었다. 개체와 종족과의 이 연대성이 없이는 동물계는 결코 발달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 그 현재의 완전에까지 도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구상의 가장 진보하였다는 생물도 지금도 아직 수중에 유영하고 있는 미세한 점과 같은 것의 하나로 되어 있었을 것이요, 현미경으로 볼지라도 거의 식별할 수 없을만한 그러한 것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까지라도 가지고 있었을까? 어째 그러냐 하면 세포 자체의 초기 군단群團은 투쟁에 있어서 연합의 일례인 까닭은 아니었을까?

 

 

 

 

 

 

6

 

이와 같이 동물계를 편견이 없이 관찰함으로써 대개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이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한다. 이 원칙이라는 것은, 즉 동일 경우에 있어서는 네가 대우 받고 싶다고 원하는 바와 같이 타인을 대우하라고 말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물계의 진화를 세밀히 연구할 때, 우리는 전술의 원칙, 즉 한 마디 말로 번역할 것 같으면 연대성은 개인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개인들 사이에 행하여지는 투쟁으로부터 결과하는 모든 순응작용보다 훨씬 무한히 대단한 역할을 동물계의 발전상에 연출하여 왔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대단한 정도의 연대성이 발견되게끔 되어있음이 명백하다. 동물의 계급에 있어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원숭이의 사회에서도 연대성을 실행하고 있는 경탄할만한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방향을 향하여 더욱 한걸음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자연이 그 도정상途程上에 퍼부어놓은 온갖 장애물들 사이에 생존하면서 인간들로 하여금 그 약소한 종족을 보존케 하고 그 지능을 발전시키는 일을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아직 석기시대 정도에 있는 원시사회에 대한 주도한 관찰은 얼마나 대단한 정도에까지 동일사회의 성원이 그들 사이에 연대성을 실행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실천적 연대성이 역사상 최악의 시대에서 일지라도 결코 정지하지 않았던 소이이다. 지배, 노예제도, 착취 등 일시적 사정이 이 원칙을 부인케 한 때일지라도 오히려 그것은 허다한 사람들의 사상의 심저에 횡재橫在하여 악한 제도에 대하여 강경한 반발을 가져오도록, 즉 혁명을 초래하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그렇지 않았다면 사회는 사멸하고 말았으리라.

동물이나 인간의 대다수에 있어서는 이 감정은 습득한 습관 즉 행동에 있어서는 부단히 망각되어 있을 때일지라도 마음속에는 항상 현존하고 있는 원칙으로 되어 있는 것이요, 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 되어있는 것은 동물계의 모든 진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진화는 오래 전부터 대단히 장구한 세월을 두고 계속하여 왔다. 그것은 수억 년으로 헤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도덕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보다는 사지를 네 발로 삼아서 기어 다니는 습관을 가지려는 편이 도리어 인간에게 있어서는 용이하리라. 동물 진화의 과정에서는 도덕적 감정이 발생한 편이 인간의 직립자세의 발생보다도 선행하였던 것이다.

도덕의식은 후각이나 촉각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구비되어있는 자연적 기능이다.

법률이나 종교도 역시 이 원칙을 선전해오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단순히 자기들 자신의 명령과 정복자, 착취자, 승려 등의 이익을 위한 법률명령을 장식하려는 데에서 이 원칙을 절취하였음에 불과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승인된 정의인 연대성의 이 원칙이 없이 그들은 어떻게 인심을 포착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들은 제각기 이 원칙을 의복으로 삼아서 자기들을 은폐하고 있다. 강자에 대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보호자로서의 자세로 분장하여 그 지위를 유리하게 하는 강권도 마찬가지다.

법률이나 종교나 강권을 내던져버림에 의하여 인류는 자기네들로부터 빼앗아갔던 도덕적 원칙의 파악을 회복할 수가 있다. 그것을 비판할 수 있기 위하여 회복하라. 그리고 승려와 재판관과 지배자들은 이 도덕적 원칙을 오손하고 지금도 아직 오손하고 있는 그 간음행위로부터 도덕적 원칙을 깨끗이 해놓으라.

그러나 교회와 법률이 도덕적 원칙을 이용하였다는 이유로 도덕적 원칙을 부정한다는 것은, 코란에 매일 목욕하라고 교훈하였다고 하여서 나는 목욕을 하지 않겠다, 위생가 모세가 헤브라이인에게 돈육豚肉을 먹지 말하고 금하였다고 하여서 나는 돈육을 탐식하겠다, 사리아트(코란의 보유補遺)3년간 경작하지 않고 내버렸던 토지는 일체 공동체의 소유로 될 것을 요구하였다고 하여서 나는 토지의 공유에 반대하겠다고 호언하는 것과 같은 일로서 똑같이 불합리한 것일 것이다.

아나키즘의 근본 원칙은 자기가 대우받고자 원하는 것과 같이 타인을 대우하라고 하는 것이 원칙 외에, 즉 평등으로서의 이 원칙, 그것 이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또 누구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고서 어떻게 자기를 아나키스트로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남에게 지배됨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실 그 자체에 의하여 우리는 아무 사람에게 대하여도 지배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기만됨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항상 진실 외에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이 사실 그것에 의하여 우리는 아무 사람도 기만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항상 진실을 말하고 진실 외에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모든 진리를 이야기 하는 것을 약속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노동의 성과를 우리로부터 절도 당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이 사실 그 자체에 의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노동의 성과를 존중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실로 어떠한 권리에 의하여 우리는 자기의 경우에는 어떠한 방식을 가지고 취급되기를 요구하지만 타인을 취급할 경우에는 전연 그와 반대의 다른 방식을 가지고 대하기로 결정할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의 평등의 생각은 이러한 관념에는 반항한다. 상호관계에 있어서 평등은 그로부터 생기는 연대성과 함께 생존경쟁에 있어서 동물계의 가장 유력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평등이라 함은 공평이라는 말이다.

우리 자신에게 나는 아나키스트다.”라고 공언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받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런 방식으로 타인을 대우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사전에 이미 공언하고 있는 바이다. 또 우리는 우리들 중의 어떤 자가 그의 힘이나 교지巧智나 또는 능력을 사용할 경우에 우리에게 반대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될 그런 방식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는 그런 불공평을 관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공언하고 있는 바이다. 공평과 동의어인 만사에 있어 평등, 이것이 행위 그 자체에 있어서 아나키즘이다. 우리가 투쟁을 선언하는 것은 법률과 종교와 강권과의 추상적 삼위일체에 대하여서 뿐만 아니다. 아나키스트로 됨에 의하여 우리는 법률, 종교, 강권의 일체, 우리의 심중에 주입해 놓은 바의 그 허위와 교지와 착취와 타락과 악행 - 한 마디 말로 말할 것 같으면 불평등 -과의 대 파란에 대하여 투쟁을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의 방식에 대하여 그들의 사고의 방식에 대하여 투쟁을 선언한다. 지배되는 자, 기만당하는 자, 착취당하는 자, 매음賣淫시켜지는 자 등이 그중에 다른 사람보다도 우선하여 우리의 평등의 관념은 상해 당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매음하지 않고, 착취하지 않고, 기만하지 않고, 남자도 여자도 지배하지 않는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평등이라는 이름에서이다.

 

그러나 만약에 자네가 대우받고 싶은 그대로 항상 남을 대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자네가 생각한다면, 사정의 여하를 불구하고 자네는 어떠한 권리를 가지고 폭력을 사용하는 것인가? 여하한 권리를 가지고 자네는 자네네 국가에 침입하여온 야만인이거나 문명인에 대하여 대포를 겨눌 것인가? 여하한 권리를 가지고 자네는 착취자를 축출할 것인가? 여하한 권리를 가지고서 폭군뿐만 아니라 독사 한 마리일지라도 죽일 것인가?”고 따지는 말을 아마 들을는지도 모른다. - 가끔 와서 이렇게 묻는 자도 있다.

여하한 권리? 법률에서 채용하여온 이러한 말 한마디로 여러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분은 내가 이러한 일을 하여서 행동을 잘 하였다고 내가 자신하고 있는가 여부를 알고 싶은가? 내가 존중하는 사람들은 내가 잘하였다고 생각할 것인가? 여부를 알고 싶은가? 이것이 여러분의 묻는 바일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다 확실히!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런 유해한 일도 하지 아니 하였던 버마인이나 소르인을 침략하러 갔었다고 하면 우리 자신을 영맹獰猛한 야수와 같이 살해될 것을 원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자식이나 우인에게 대하여 만약 내가 침략자에게 가담하여 있었다면 나를 죽여 다오하고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렇다 확실히! 만약 우리가 우리의 원칙을 거짓말로 사칭하여 선조로부터 전해온 유산을 가지고 타인을 착취하기 위하여 사용하려고 점유하였다면 우리는 축방逐放되어야 할 것을 원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까닭에. 그렇다 확실히! 만약에 본심으로부터 사람이 유해한 인간이 된다면 그 사람을 죽여 달라고 미리 요구할 것인 까닭에. 만약 그가 폐위된 폭군의 지위에 있다고 하면 총검을 그의 심장에 쏘아 박아달라고 애걸할 것인 까닭에.

처자를 가진 백 사람 중에 구십구 사람까지는 만약 자기 자신이 미쳤다고 하는 것을 본 정신이 들어 감지한다면 애지중지하는 처자에 대하여 어느 때 어디서 그들에게 위해를 가할까보아서 공구恐懼하는 나머지 그는 자살하려고 기도할 것이다.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가 자기의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자기 자신이 위험물로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그가 그렇게 되기 전에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느 날 이르쿠츠크에서 한 사람의 폴란드인 의사와 사진사가 광견狂犬에게 물렸다. 사진사는 그 상처를 작열한 철로 지져버렸으나 의사는 단지 자기의 상처에 부식제腐蝕劑를 발라두었을 뿐이었다. 그는 나이도 젊었고 외양도 아름다웠으며 원기가 넘쳐났었다. 그는 민중운동에 헌신하였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처벌되어 기결감旣決監에 투옥되었다가 최근에 막 출옥한 때였었다. 박학다재하고 그중 지성에 탁월하였던 그는 경이적인 치료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환자들은 그를 숭배하였다.

 

6일 후에 그는 개에게 물린 팔이 퉁퉁 부어 올라온 것을 발견하였다. 의사인 그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공수병恐水病이 속발續發한다는 것을 무심히 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는 급급히 그와 한 가지로 의사로서 유형을 받고 있는 한 우인에게 달려가서 스토리키니네를 조금 다오! 얼른 자네 부탁하네! 이 내 팔뚝을 봐라.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 시간도 채 못 지나서 나는 광자狂者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자네에게도 다른 우인들에게도 달려들어서 막 물어댈 것이다. 어서 주게나! 스토리키니네를 조금! 나는 죽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자기가 위험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자 죽여 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우인은 주저하였다. 그는 공수병에 대하여 어떠한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다. 용감한 한 부인의 조력을 구하여 그는 시작하였다. - 그러나 두 시간 후에 그 청년의사는 우인과 부인에게 달려들어서 입으로 거품을 내뿜으면서 물려고 덤벼들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그는 본 정신이 들었다. 다시 스토리키니네를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나 공수병의 발작은 다시 일어나 무서운 경변痙變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유의 사실을 얼마든지 많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 중에서 인용할 수가 있다. 양심 있는 사람은 자기가 타인에 대하여 죄악의 원인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독사나 폭군을 죽인 때 자기 자신은 잘 하였다고 하는 의식을 느끼는 소이연所以然이며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상찬賞讚이 자기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소이이다.

 

페로브스카야와 그 동료들이 러시아의 황제를 죽였다. 전 인류는 유혈의 참극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농노의 해방을 허락한 사람에게 대하여 동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한 것과 같이 그들이 그렇게 권리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행동이 일반에게 유용하다고 인정하였던 까닭은 아니다. 3인 중의 2인까지는 그것이 유용하였던가의 여부를 지금도 아직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황금을 갖다 준대도 페로브스카야와 그 동지들은 자기들이 폭군이 되기를 수긍하지 않을 것을 느꼈던 까닭이다. 이 활극에 대하여는 하등의 아는 바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이것이 혈기왕성한 청년의 허장 객기가 아니라는 것과, 궁중 간신배적 음모가 아니라는 것과, 또 권세를 잡으려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를 희생해서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폭군을 증오한 까닭이다.

이들 남자와 여자들은 죽일 권리를 획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들을 하였다. 흡사 루이스 미셸에 대하여 그녀는 강탈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들을 하고 혹은 또 좁쌀빵으로 생활을 하면서 게다가 기시네프가의 재보財寶 12만을 탈취함에 있어 총검을 단단히 들고서 재보를 지키고 있는 호위병에게 일체 책임을 지우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준비를 다한 테러리스트 동지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들은 탈취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하던 것과 같이.

 

방채防寨에 대하여 행사하였다거나, 혹은 십자가의 그늘 밑에서 행사하였다거나, 인류는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획득한 사람들의 두상頭上에 폭력을 가할 권리를 부정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행동이 인심에 심각한 인상을 갖게 한다면 그 권리는 획득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것이 없다고 하면 이러한 행동은 그것이 유용하거나 안하거나에 불구하고 단순한 야만적 사실로 되고 말 것이며 사상의 진보에 있어서 하등의 중요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민중은 그 중에 폭력의 교체 환치하여서 단지 한 착취자에 교대하여 다른 착취자로서 환치하는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리라.

 

7

 

우리는 지금까지 의식적인 사려가 있는 행동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에 대하여 논술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적 생활과 병행하여 그보다 훨씬 광범한 무의식적 생활을 우리는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무의식적인 생활의 관념을 파악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에 있어서 연출하는 거대한 역할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작야昨夜에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는 단추를 무심코 끼려고 할 때 자기가 뻔히 다른 데 옮겨놓은 물건을 무심코 집으려고 손을 내밀기도 한다. 어떻게 우리는 매일 아침 의복을 입는가를 주의하여 보면 잘 알 것이다.

무의식 행위는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지껄이는 말씨, 미소를 하는 모양, 눈썹을 찌푸리는 시늉 내지는 논쟁이 벌어졌을 때 열중하거나 냉담하거나 하는 그 태도 등은 무목적, 무의식한 것으로서 우리의 조상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이전의 조상으로부터 유전해 받아온 습관의 결과이거나(성낸 인간과 성낸 짐승과의 사이에 그 표정이 유사한 것을 좀 주의하여 보라) 그렇지 않으면 의식적이건 무의식이건 습득한 것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대한 행동의 양식은 이렇게 습관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가장 도덕적인 습관을 습득한 사람은 악마가 자기에게 악을 행하도록 촉진할지라도 지옥의 고통과 천당의 환락을 상기함에 의하여 비로소 자기가 악을 행하기를 정지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일삼는 소위 선량한 기독교도보다는 확실히 우량하리라. 자기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우하는 것은 인간에게도 모든 사회적 동물에게도 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습관으로 되어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이거나 일반적으로 이러이러한 사정 하에서는 어떻게 행동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가를 자기에게 반문할 것조차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주저할 일이 있고 그의 뇌수腦髓의 각종 부분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는 일이 있다고 하면 - 어째 그러냐 하면 뇌수는 매우 복잡한 기관으로서 그 모든 각종의 부분은 어느 정도까지 독립하여 동작하는 까닭이다 - 그것은 사정이 예외적인 것으로 어떠한 복잡한 경우이거나 혹은 강렬한 정열 하에 있을 때에 한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생길 때는 그 사람은 상상함에 있어 자기를 자신에게 반대하고 나오는 사람과 처지를 바꾸어서 자기가 이러한 방식으로 취급되고 싶은가 아닌가를 자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로 인하여 장차 품위와 이익을 손상당하게 되어있는 사람과 자기와를 귀일하기가 가능하다면 가능할수록 더욱 그 사람의 결의는 도덕적으로 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의 친우가 들어와서 자네를 그 사람의 위치에 바꾸어 놓고서 상상해 보아라. 그 사람이 자네에게서 대우 받는 것과 같이 자네가 그 사람에게서 대우 받는데 의하여 자네는 번뇌할 작정인가?”고 묻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물어물할 때 평등의 원칙에 호소할 뿐이며 백중 구십구의 경우는 습관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술하여온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는 아직 무슨 일이나 훈계할 작정으로 한 말이 없었다는 것은 명료하다. 우리는 다만 동물계나 인류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실의 양식을 제시하였음에 불과한 것이다. 이전은 교회가 인간을 도덕화 하기 위하여 지옥을 끌어내다가 인간을 협박하여 왔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반대로 인간을 부도덕화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재판관은 그들이 사회로부터 절취하여온 사회적 원칙이라는 명의 하에서 뇌옥牢獄과 태형笞刑과 교수대를 가지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재판관은 목사, 장로 등과 동시에 지구상으로부터 소멸하여 버릴 수 있다는 사상, 그것은 모든 색채의 강권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의 재화災禍가 왔다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판관과 그 자들의 선고와 항쟁하기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비준, 도덕에 대한 의무까지도 폐기한다. 우리는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바를 하여라. 자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째 그러냐 하면 인류의 대다수는 그 교양의 정도와 그들이 현행하고 있는 궤도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는 완전성의 정도에 비례하여 사회에 유용한 방향을 향하여 항상 행동하고 행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는 까닭이다. 흡사 자식들은 인류라고 칭하는 족속에 속하고 있는 부친으로부터 출생하였다는 단순한 이유로 자식은 이 다음 두 발로 보행할 것이며 네 발로 보행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확신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충고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충고를 함과 동시에 우리는 이 충고는 만약에 자네 자신의 경험과 관찰이 이 충고에 순종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네 자신에게 인정되지 못한다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라고 부언하여 둔다.

우리는 한 청년이 몸을 구부리고 가슴과 폐를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우리는 그에게 단정하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머리를 들고 가슴을 쭉 펴도록 충고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폐를 압축하지 말고 심호흡을 하도록 충고를 한다. 어째 그러냐하면 이것은 폐결핵에 대한 그의 최선의 예방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가 폐의 기능을 이해하고 자기로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자세를 택할 수 있도록 그에게 생리학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을 우리는 도덕의 경우에서도 할 수가 있다. 우리는 다만 충고할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으로 그리고 이에 대하여 그것이 자네에게 있어서 선이라고 생각될 것 같으며 그것에 순종하여 행하여라고 부언할 것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치고, 또 누구든지 범할 수 있는 비사회적 행동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서라도 사회는 공공연히 그 사람을 벌할 권리가 없는 것이라고 치고,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선이라고 보이는 것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있어서 악이라고 보이는 것을 미워할 자격을 기각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미워하라. 그것은 어떻게 미워해야 할까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를 아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 자격을 보유한다. 그리고 이것만이 동물들의 모든 사회에 있어서의 도덕적 감정을 지지하고 또 발전케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까닭에 그것은 인류에게 있어서도 더욱 더 중요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한 가지 일을 원할 뿐이다. 그것은 현재 사회에 있어서 이런 두 개 감정의 자유 발전을 저해하는 일체의 것, 우리의 판단을 사도로 유도하는 모든 것 - 제왕, 교회, 착취 및 재판관, 승려, 지주, 착취자 -을 배제하는 일이다.

무뢰한이 가장 빈곤한, 가장 처참한 부인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제일 감정은 증오, 그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악한이 주막집 숙박료를 내달라고 요구하는 주인 노파를 살해한 그날 우리가 그 악한을 노상에서 만났다면 그 남자보다도 그 주막집 노파의 머리에 탄환을 쏘아대는 것이 좋지나 않을까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대뜸 그 악한의 대갈에 탄환을 쏘아댈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남자를 여기까지 이르도록 만들어 놓은 모든 가증, 가악한 일을 우리가 상기할 때, 또 그 남자가 음란한 서적으로 인하여 불량해진 환상이나 되지못한 서적으로부터 암시를 받은 사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암흑闇黑한 중에 그들이 방황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감정은 분열한다. 그래서 만약 다른 날에 무뢰한이 모든 무뢰한을 일괄 통합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남자나 여자나 아동을 냉연冷然히 살해하여온 재판관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들었다면, 또 만약에 이 남자가 이러한 생각을 가진 광열병자 중의 한 사람의 수중에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다면, 그때 무뢰한에 대한 우리의 모든 증오는 소실되리라. 그것은 비겁한 위선적인 사회와 그 승인된 소위 대표자 등에 대한 증오로 변해지리라. 악행이 법률이라는 명칭 하에 행하여질 때 그 장원長遠한 계열의 앞에는 무뢰한의 모든 악행은 소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워하는 바는 이것들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의 감정은 부단히 이와 같이 분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많았거나 적었거나 간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현사회의 방조자라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구태여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가? 착취와 굴종 위에다 기초를 두고 존립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성질은 퇴폐한다.

그러나 굴종이 소실될 때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리라. 그때 우리는 지금 인용한 바와 같은 복잡한 경우에서일지라도 우리의 감정 중에 미워하고 또 사랑할 힘을 느끼게 되리라.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동정과 반감과의 감정에 대하여 이미 자유의 경지를 시여하였다. 우리는 부단히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도덕력을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가 도덕적으로 박약한 것과 비겁한 것을 증오한다. 끊임없이 우리의 저서와 언론과는 비겁에 대하여, 기만에 대하여, 음모에 대하여, 도덕적 용기의 결핍에 대하여 느끼는 바 증오를 표시하여 왔다. 우리는 세속적 교육의 감화를 받아왔기 때문에 평등관계가 우리들 사이에 수립되는 날에는 소멸되어 버리리라는 그 허위의 외관 하에 우리의 부자유를 은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혐오의 생각을 배반한 것을 느끼는 바이다.

선악의 개념을 일정한 수준에 보유하고 그것을 상호간에 상통케 하는 데에는 이 생각만으로 충분하다. 이 생각은 벌써 사회에 재판관도 목사도 승려도 없어지게 된 때 도덕적 원칙이 그 의무적 성질을 상실하고 단순히 상호간 평등의 관계로서 생각하게 될 때 더욱 더 유력하게 되리라.

그뿐 아니라 그러한 관계가 수립되어지는데 비례하여 더욱 고도의 도덕적 관념이 사회에 앙양되리라. 우리가 지금 분석하려고 하는 것은 이 개념이다.

 

 

 

 

 

 

 

8

 

이상 우리가 논술하여온 분석은 다만 평등의 단순한 원칙을 제시하였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신이 대우 받고 싶다고 생각한 바와 다른 방식으로 타인을 대우할 권리가 있다고 억단臆斷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또 자신은 기만되고 착취당하고 학대 받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 그러나 타인에게 대하여는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반항하고 또 반항하도록 타인을 유도하고 왔었다. 허위와 야수적 행위와 증오해야 할 것이라고 우리가 논술하여온 이유는 그것들이 도덕의 법전에 의하여 상찬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는 만인 평등심에 위배되는 까닭이요, 만인에게 대하여 평등은 공허한 한 구절의 언사만은 아닌 까닭이다. 그중에도 그것은 그 사상과 행동과의 방식에 있어서 진실한 아나키스트인 사람들에게 위반하는 까닭이다.

 

만약 이 단순한 자연스러운 명백한 원칙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면 대단히 고귀한 도덕 모든 도덕론자들이 교육하여온 일체를 포함하는바 도덕이 그 결과로서 생겨나리라.

평등의 원칙을 도덕의 교훈을 종괄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이상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 이보다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은 즉 개인을 존중하는 일이다. 우리의 도덕인 평등을 선언함에 의하여, 아나키즘을 선언하는데 의하여 우리는 도덕론자가 항상 주장하는 바를 자신들에게 다 인수하여 놓은 한 권리 즉 어떤 사상의 명칭하에서 개인을 절단하는 권리를 상정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이 권리를 용인치 않으며 우리 자신에게 대하여도 또 다른 어떠한 사람에게 대하여도 우리는 개인의 충분하고도 완전한 자유를 승인한다. 우리는 개인에게 대하여 풍부한 생존과 그의 능력의 모든 자유발전을 승인한다. 우리는 개인들에게 아무 것도 부과하고 싶지 않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종교적 도덕에 반대하고 푸리에가 설정한 원칙에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때 푸리에는 말하기를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로 자유롭게 하여라. 그들을 절단하지 말라. 오늘날까지 종교가 너무도 많이 갔다가 다녀온 것과 같이. 그들이 정하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그들의 격정 그것까지도 두려워하지 말라. 자유사회에서는 격정은 결코 위험한 것이 아니다.”.

만약 제군이 제군의 자유에 대하여 기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또 만약 제군이 타인으로 하여금 제군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또 만약에 아무개라 하는 자의 광폭한 비사회적인 격정에 대하여 제군도 똑 같이 제군의 강력한 사회적 격정을 가지고 대항케 한다면 그렇다면 제군은 자유를 두려워할 아무 것도 갖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이상의 명칭 하에서 일지라도 개인을 절단하는 관념을 부정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적당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으로 보이거나 악으로 보이건 간에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동정이나 반감을 기탄없이 표현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우인을 기만하였다고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버릇이요, 또 그의 성격이다. 과연 그렇다. 그러나 거짓말쟁이를 경멸하는 것도 역시 우리의 성격이며 또 버릇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성격인 까닭에 우리는 기탄없이 하겠다, 경멸하겠다. 지금도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러한 놈에게 우리의 품에 안아주거나 또는 그놈과 친절하게 악수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맹렬히 그 자에게 대하여 우리의 적극적인 격정을 가지고 대항하리라.

이것이 우리가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전부이다. 이것이 사회에 있어서 평등의 원칙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의무의 전부이다. 그것이 평등의 원칙의 실행인 것이다.

그러나 살인범이나 자녀 유괴범에게 대하여는 어떠한가? 단순히 피의 갈증으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는 극히 희소하다. 이러한 인간은 치료를 요하는 환자이며 회피해야할 광인이다. 유괴한에 관하여는 우리는 먼저 그것에 관하여 사회가 아동의 감정을 사도로 유혹 도발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고찰하여 보자. 그러면 우리는 방탕아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일은 일체 이러한 일은 도덕적 퇴폐의 대근원인 자본주의, 종교, 사법, 정부 -가 생존을 소실하기까지는 완전히 소청掃淸될 수가 없다고 언명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늘부터라도 실행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실행 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회가 이 평등의 원칙밖에는 알지 못한다면 또 만약 각 사람 사람이 단지 장사꾼의 공평만을 실행하고 종일 자기가 타인에게서 수득收得하는 이상의 아무 물건도 타인에게 주지 않으려고 고심하고 있게 된다면 사회는 자멸하게 되리라. 평등의 원칙, 그것이 우리 관계에서 소멸하리라. 어째 그러냐하면 만약 그것이 지지되게 될 형편이라면 단순한 공평이라는 것보다도 더욱 더 웅대하고도 더욱 애정적이며 또 더욱 생기발랄한 무엇이 부단히 생활 이면의 근저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정의보다 위대한 것이 여기에 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온정과 지성과 선의에 충일하고 그 감정과 지성과 활력을 하등의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서 인류 봉사에 바친 위대한 인물이 결핍해 있는 것을 결코 아니다.

이러한 정신과 감정과 또는 선의의 풍부는 모든 면에서 적당한 형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주위에 있는 우매한 자의 주장에 반대해서 스스로 진이요, 이라고 믿는 일을 향하여 탐구의 걸음을 내디디기 위하여 자기의 정력을 경주할 수 있도록 일체의 다른 쾌락을 거부하고서 진리를 따라 나가는 열렬한 추구자 중에도 있다. 그것은 날마다의 자기의 식사까지도 버리고 세계의 양상을 일변해야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자신하는 발명을 추구하면서도 그에게 시중을 드는 한 부인이 자기 자식에게 대하듯이 그를 봉양하려고 가져온 빵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서 생활하는 발명가 중에도 있다. 그것은 예술이나 과학의 환락도 가정생활까지도 그것들이 만인에게서 공존, 공영, 공동 향유하게 될 수 없는 한 이것이 도리어 고통꺼리라고 생각하고 세계의 후생을 위하여서는 불행도 박해도 우습게 생각하면서 활동하는 열렬한 혁명가들 중에도 있다. 그것은 침략의 흉포를 듣고서 문자 그대로 애국심의 영웅담에 의하여 의용대에 그 이름을 등록하고 풍설과 기아 중에 용감히 진군하여 마침내 쏟아지는 탄환 밑에 쓰러져가는 청년 중에도 있다. 그것은 그 유소幼少한 동포와 한 가지 성루城壘를 향하여 달리고 빗발같이 쏟아지는 포탄 중에 엄연히 서서 코뮌 만세라고 절규하면서 서거한 저 기민한 지성의 소지자, 혐오와 동정과를 훌륭히 구별, 선택할 힘을 가진 파리의 무의무탁한 유랑아 중에도 있다. 그것은 악을 목격하고서 그 결과가 자기에게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자문할 여가도 없이 반항하고서 다른 모든 사람들은 등을 굽힐지라도 자기만은 직립하고 서서 부정의를 폭로하고 공장의 비열한 전제 공장주, 감독의 대폭군인 착취자에게 낙인을 찍어온 사람 중에도 있다. 최후도 만약 우리가 우리들의 산 눈을 뜨게 할 수고를 한다면 그리고 인간 생활의 그 근저에 횡재하고 그들이 받는 착취와 압제에도 불구하고 각양각종의 방식으로 그 자신을 전개할 수가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은 무엇이었던가를 주목한다면 모든 무수한 봉사적 행위 즉 너무 저명하지 않고 따라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또 거의 항상 보답도 없는 무수한 봉사적 행위가 부단히 관찰될 수가 있는 것으로서 (특히 부인들 사이에) 이러한 행위 중에도 그것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남자와 여자들 중의 어떤 사람은 매몰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큰 장면 내부에 있어 배후 역을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진보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이런 것이 인류가 이러한 사람들을 존경을 가지고 포옹하고 신화를 가지고 포장한 소이이다. 그것은 그들을 찬미한다. 그들을 옛 이야기와 시가詩歌와 비사秘史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의 많은 사람들에게 결핍되어 있는바 용기와 선과 사랑과 헌신적 정신을 상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기억을 청소년들에게 전한다. 그것은 가정과 친우와의 좁은 범위 내에서만 활동하던 사람들을 상기도 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가정 전설로서 존숭한다.

이러한 남자나 여자가 진정한 도덕 그 이름에 상부하는 유일의 도덕을 이루어 놓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것은 모든 관계상에서 단순한 평등에 불과하다. 그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인류는 비열한 돈 셈이나 하고 지나는 탁류 중에 늙어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미래의 도덕 즉 우리의 자손이 돈 셈이라 하는 일을 폐지할 때, 그리고 모든 정력과 용기와 사랑과를 가장 적용하는 일은 이러한 힘의 필요가 가장 강하게 느낀 경우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하는 관념 하에 성장할 때 거기에 출현할 그 도덕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곧 이러한 남녀들이다.

 

이러한 용기, 이러한 헌신은 어느 때든지 존재하였었다. 그것은 사회적 동물들 사이에도 발견된다. 그것은 가장 퇴폐한 시대에서 일지라도 인간들 중에 발견된다.

그러므로 종교는 항상 그것을 유용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유통 화폐로 변하고 말았다. 만약 종교가 지금도 아직 생명이 붙어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그들이 이 헌신과 용기에 항상 호소하는 까닭이다. - 무지는 별문제로 치고, 그리고 혁명가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호소하는 것도 이것이다.

이것은 설명하려는 데에서 각종의 학파들의 도덕론자가 이전에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은 오류에 함입하고 있다. 모든 신비적인 힘에서도 또 영국의 공리주의학파에 의하여 묘한 형태로 상정된 장사꾼 식의 회계에서도 똑 같이 독립하여 이러한 용기나 헌신의 진실한 기원을 지시한 것은 젊은 철학가로 무의식적으로 자유사회주의자였던 기요(Guyau)이다. 칸트파도 실증주의자도 또는 진화론적 철학자도 똑 같이 실패한 이 점에서 이 자유사회주의의 철학자는 진로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용기와 헌신과 같은 이러한 성질의 기원은 자기 자신의 힘의 느낌이다.” 라고 기요는 말하였다. “그것은 확대하는 것을 요구하는 장일한 생명이다. 자기 속에 자기가 행동할 수 있는 성능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동시에 무엇을 행동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인가를 의식하는 것이 된다.”

각인이 그 생활에 있어서 느끼는바 그 의무에 관한 도덕적 감정, 즉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로써 설명하려고 하던 의무에 관한 도덕적 감정은 그 자체를 행사하고 자기로 하여금 제공하도록 요구하는바 생활의 과잉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힘의 의식이다.”라고 기요가 말하였다.

모든 축적된 힘은 그 선행되어왔던 장애에 대하여 압력을 창조한다. 행동하려고 하는 힘이 행동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많은 말을 허비하고 많은 저서로 된 이 도덕의 의무성모두 생활 지지의 조건은 생활의 확대이다.’ 라는 개념에 귀착되는 것이다.

식물은 개화하는 일로부터 자기를 방어할 수가 없다. 때로는 개화하는 것은 사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심려는 무용한 짓이다. 수액은 변함없이 빨아올린다.”고 청년 아나키즘의 철학자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의 힘과 정력에 충일한 때도 역시 동일하다. 힘은 그의 체내에 축적한다. 그는 그의 생활을 확대한다. 그는 타산 없이 공급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도 꽃과 같이 꽃피는 때 죽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걱정할 것 없다. 수액은 빨아올린다. 만약 수액이 있다고만 하면.

강건하여라, 정서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충일充溢하여라. 그리하면 제군은 제군의 지성과 제군의 애정과 제군의 행동력을 타인들 사이에 광범하게 살포하게 되리라. 이것이 모든 도덕적 교훈이 동양의 금욕주의의 위선을 탈피하고서 도달할 경지이다.

 

 

 

 

 

 

 

 

 

 

 

 

 

 

 

 

 

 

 

 

 

 

9

 

인류가 진실한 도덕인에게서 상찬을 받게 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서 그들의 지성과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행동을 제공하도록 그들을 촉진하는 그들의 정력과 생명의 충일, 그것이다.

강대한 사상가로서 지적 생명이 창일漲溢하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의 사상을 살포하기를 요구한다. 만약에 사상이 타인에게 전파되지 않는다면 사색은 아무 쾌락도 없는 법이다. 자기가 고통을 인내해가면서 어떠한 사상을 탐구한 후, 그것을 깊이 주의하여 은닉해 두었다가 이 다음 자기의 명의를 가지고 그것에 꼬리표를 붙이려는 사람은 극히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이다. 강력한 지성의 사람은 사상을 가지고 달려 나가서 제 힘껏 그것을 살포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 사람이 사상을 다른 사람과 함께 향유하지 못하고 사방에 살포할 수 없다면 큰 불행이다. 어째 그러냐하면 여기에 그의 생명이 있는 까닭이다.

이 점은 감정에 관하여도 동일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뇌가 요구하는 이상의 눈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의 존재가 정당화할 수 있는 이상의 환희의 수용력을 가지고 있다.”고 기요는 자연으로부터 파악한 상찬할만한 두어 마디 말로써 도덕의 전 문제를 이와 같이 종괄하여 말하였다. 고독한 존재는 불행하고 불안하다. 어째 그러냐하면 이러한 존재는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타인과 함께 향유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어떤 위대한 쾌락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느끼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생활하고, 우리가 분투하고, 우리가 투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원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의지, 우리의 활동 정력을 행사할 필요를 느낀다. 행동하고 활동하는 일은 인류의 대다수가 요구하는 바이다. 이러한 까닭에 불합리한 사정이 남녀로 하여금 유용한 일로부터 분리할 때는 그들은 해야 할 무엇인가를 고찰하고 그들의 활동 정력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무슨 무용하고 의의 없는 의무까지도 발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론과 종교와 사회적 의무등을 발견한다. - 그들도 무엇이나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자신이 갖기 위하여 그들이 무용舞踊을 할 때 그것은 자선을 위한 일이다. 그들이 사치한 의복을 만들기에 몰두할 때 그것은 귀족의 체면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주의主義에 적합하다고 한다.

우리는 동포를 부조하기를 요구하고 인류가 애를 써가면서 멋을 부려오던 마차에 손질을 좀 해달라고 요구한다. 아무리 하여도 우리는 그 주위를 떠들어대면서 빙빙 돌기만 하고 있다.”고 기요는 비유해 말하였다. 이 손질을 해달라는 요구는 대단히 큰 것으로서, 그것은 아무리 저급한 동물이라도 모든 사회적 동물 사이에는 발견될만한 일이다. 연일 정치면에 있어서 소용없이 낭비되는 활동력의 거대한 양은 인류라는 마차에 조력하려는 의욕, 아니 죽어도 그 주위에서 떠들어대기만 하고 서둘기만 하는 그 표현이 아니고 무엇일 것이냐.

 

물론 이 의지의 풍요즉 행동에 대한 갈망이 감정의 빈약과 창조력이 없는 적성에 의하여 수반할 때에는 나폴레옹 1세나 비스마르크와 같은 세계를 역행하도록 강행하려는 가면자假面者 밖에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으리라.

한편, 충분히 발달한 감수성을 결한 정신적 풍요는 지식의 진보를 방해하는데 불과한 문학적, 과학적 연구와 같은 그러한 불모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리라. 최후로 위대한 지성에 의하여 인도되고 있지 못한 감수성은 자신이 모든 애정을 경주하는 남자의 어떠한 수성獸性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일체를 희생에 공하려고 하는 여자와 같은 그러한 인물을 생겨나게 하리라.

만약 생활이 진실로 풍요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그것은 동시에 지성에 있어서나 감정에 있어서나 또 의지에 있어서나 풍요하게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와 같이 모든 방면에 있어서 풍요한 것이 진정한 생활이라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유일한 것이다. 이러한 생활의 한 순간을 위하여 그 한 섬광이라도 파악한 사람은 장생불사의 생명을 맛보는 것이리라. 이러한 창일한 생활이 없다면 인간은 일찍부터 노쇠해버리는 것이며 무능한 존재가 되어서 꽃이 피기도 전에 위축하고 마는 식물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생명 없는 생활은 만년 쇠퇴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청년은 부르짖는다. 살아서 생명을 사방에 살포하기를 요구하는 수액樹液에 충만한 진정한 청년은 부르짖는다. 대개 사회가 폐퇴廢頹에 함입할 적마다 이러한 청년으로부터 나오는 돌격은 새로운 생활이 진흥할 여지를 조성하려고 과거의 경험적, 정치적, 도덕적 형태를 파괴한다. 가령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투쟁에 있어서 쓰러질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수액은 아직도 오르고 있다. 청춘에 있어서 산다는 일은 그 결과의 여하에 불구하고 꽃이 피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그 결과를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영웅시대에 대하여는 말하지 말고 일상생활만을 생각할지라도 자기의 이상과 일치하지 않고서 산다는 일이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대의 사람들은 이상理想을 조소嘲笑한다는 것을 가끔 듣는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까닭인가를 이해하기는 용이하다. 이 이상이라는 말이 너무도 가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그 반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건전한 일이다. 우리도 역시 왕왕 이렇게 매욕되던 이상이라고 하는 말을 새 관념과 일치하는 더욱 새로운 말로써 대치해 놓기를 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말은 무엇이 되었던지 사실은 동일하다. 모든 인류는 그 이상을 가지고 있다. 비스마르크도 자기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 아무리 기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 즉 혈과 철과 정부라고 하는 이상이었다. 비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이상을 가지고 있다. 가령 그것이 감벳다의 은의 욕장浴場과 스롬베트를 요리하는 일이거나 스롬베트와 욕장을 매수하기 위하여 지불해야할 수많은 노예를 가지고 강제하는 그러한 귀찮음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그러한 것들 외에 더욱 숭고한 이상을 의식하고 온 사람들이 있다. 금수의 생활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굴종, 허위, 악 신앙, 음모, 인간관계의 불평등은 그에게 증오의 생각으로 충만케 하였다. 자신도 그 대신에 굴종하고, 거짓말쟁이가 되고, 음모가가 되고 타인의 신상에 권세를 부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 어떻게 그에게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만약에 인간들 사이에 더욱 좋은 관계가 존재하여 있었던들 생활은 얼마나 더 훌륭히 좋은 것이 될 수 있었는가를 별견瞥見하고 있다. 그는 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욱 더 좋은 관계를 수립하기에 성공할 힘을 자기 자신에게서 느끼고 있다. 그는 이상이라고 칭하고 있는바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상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어떻게 해서 그것은 일방으로는 유전에 의하여, 타방에 있어서는 생활의 인상印象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최대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서전에서나 다소간이나마 진실로 그 이야기를 고백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목전의 사실이다. - 가변적이며, 진보적이며, 항상 살아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외계의 영향에 드러내 놓아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환락의 최대 다량, 생의 환락의 최대 다량을 주워주는 그것에 대한 대부분 무의식적인 감정이다.

인생은 이 이상의 감정에 응답하는 조건에서만 신선하고 풍요하고 감각에 풍부한 것이다. 이 감정에 거슬러서 행동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이 그 자체 상에 반발적으로 왜곡되어 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벌써 화합되지 못하는 그 생기를 잃고 있다. 여러분의 이상에 생생히 불충실하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지와 활동력을 마비함으로써 종언을 고하리라. 여러분은 이전에 알고 있던 생기와 결의의 발랄성을 벌써 회복하지 못하게 되리라. 여러분은 무기력한 사람이 되리라.

한번 여러분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독립해서 활동하는 신경 중추와 뇌 중추와의 합성물로서 바라볼 때는 거기에 하등 신비하다는 것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경쟁하고 있는 각종의 감정 사이를 준순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문득 유기체의 조화를 파괴하게 되리라. 그리고 여러분은 의지가 없는 병자가 되게 되리라. 여러분의 생활의 예리함은 감멸減滅되고 말리라. 여러분은 쓸데없이 타협을 요구하리라. 여러분의 행동이 여러분의 뇌수의 이상적 개념과 일치하고 있었을 시대의 여러분은 완전히 강렬히 생기발랄하였던 사람은 아니게 되리라.

 

 

 

 

 

 

 

 

 

 

 

 

 

 

 

 

 

 

 

 

 

 

10

 

그러므로 이 논을 매듭짓기 전에 우리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라고 하는 이 두 개 용어에 관하여 일언하려고 한다. 이 두 개의 용어는 부단히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 영국의 학파가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여기에 대하여 논술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는 영국의 도덕학자들이 수립하려고 노력하던 이 구별을 두 개 용어 중에 볼 수가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하여주기를 원하는 바와 같이 너도 타인에게 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것을 이타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차라리 우리는 더 한층 높은 처지를 취하여 각 개인의 행복은 자기의 주위의 모든 사람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르긴 모르되 비교적 행복한 생활이 타인의 불행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혹 수년간은 가능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영속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사세些細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파탄될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평등인의 사회에서 가능한 행복에 비교하면 실로 비참한 것이며 비열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반적인 선을 지향하고 나갈 때는 반드시 여러분은 선량한 행동을 하게 되리라고 말하는 바이다. -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이타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단지 사실을 진술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는 기요의 말을 의역하여 보자. “강건하여라. 여러분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위대하라. 여러분의 생명을 모든 방면에 발전시키라. 정력에 있어서 될 수 있는 한 풍부하여라.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하여 생물 중에서 가장 사회적인 또 사교적인 것이 되라. 만약 여러분이 충분하고도 완전한 풍요한 생활을 향락하기를 원한다면 항상 충분히 발달한 지성에 의하여 인도되어 투쟁하고 위험한 속으로 모험을 하여라 - 어째 그런가 하면 위험은 그 자체의 큰 쾌락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여러분의 역량을 투입하라. 그것을 타산 속에 붙여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위대하고 선량하다고 느낀 모든 것들 속으로 투입하라. 그리하면 생애에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일이 생길지라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심장이 여러분의 그것과 일체가 되어 고동하는 것을 느끼리라. 타면에 있어서 여러분이 비겁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심장이 여러분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할 때 우리는 이타주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투쟁하고 위험에 직면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수중에 뛰어드는 일 등은 인간에게만 한한 일은 아니다. 고양이에게도 있다. 우리에게 역행하는 불평등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보리밥 덩이로 생활하는 일, 애정에 불타는 것과 같은 사람들과 우리 자신이 조화하는 것을 느끼는 일, 또는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끼는 일, 이런 사실은 나약한 철학자들에게는 모르면 모르되 희생을 의미하리라. 그러나 정력과 힘과 생기와 청춘에 충일한 남녀에게는 그것은 생명의 의식적 환락이다. 이것은 이기주의인가? 혹은 이타주의인가?

 

통칙적通則的으로 이타주의적 감정과 이기주의적 감정과의 사이에 예상되던 충돌상에 그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도덕론자들은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충돌이 진실하다면 또 만약 개인의 이해가 실제로 사회의 그것과 충돌하고 있는 것이라면 인류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동물의 어떠한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 현재의 발달에까지 도달하지 못하였을 것이 확실하다. 만약 군체群體의 복지를 위하여 노작하는 것이 모든 개미들에게 있어서 큰 쾌락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 개미의 군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개미는 현재의 상태 - 곤충류 중의 최고의 발달을 한 동물, 즉 확대경 밑에서도 감별하기가 곤란할만한 뇌수를 가지고 그리고서도 인간의 보통 뇌수와 거의 한가지로 유력한 뇌수를 가진 동물 - 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조류가 그 이동함에 있어서, 또 새끼를 양육하기 위한 용의주도함에 있어서, 또 맹조로부터 그들의 사회를 방어하기 위한 공동동작에 있어서 심심한 쾌락을 발견함이 없었더라면 조류는 지금 현실에 도달하여 있는 것 같은 발달상태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류의 형은 진보하기는커녕 그 대신 퇴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펜서가 각 성원의 복지가 종족의 복지 중에 융화하리라는 시기를 미래에 전망할 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였었다. 즉 만약에 각개 성원과 사회와의 양자가 모든 시대에 있어서 귀일하여있지 않았더라면 진화는 동물계의 그만한 것까지도 결코 실현될 수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각개 성원의 복지와 종족의 그것과가 확실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개체 성원이 적지 않게 동물계에도 인류의 종족 중에도 존재하여 있었으며 또 지금도 아직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강렬한 생활을 생활하는 것이 각 개인의 목적인 동시에 생활의 최대 강도는 최대의 사교성에서 또 자기와 타인과의 가장 완전한 귀일성에서 발견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지성의 결함, 오성悟性의 결함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유한한 지성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우둔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의 시대에 있어서도, 또 지질학적 시대에 있어서도 결코 개인의 이해와 사회의 이해가 충돌하였던 일은 없었다. 태고적부터 이 양자는 귀일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항상 완전한 생활을 향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와의 구별은 우리의 견해로는 배리背理이다. 인간이 그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와의 두 개의 감정 간에 실현하고 있는바 그 타협(만약 우리가 공리주의를 믿는다면)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타협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평등의 원칙과 일치하게 생활하기를 원할 때, 생활 현상에 있어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도처에서 평등의 원칙이 유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느끼는 바이다.

우리의 먹을 것이나 우리의 침상이 아무리 변변치 아니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리 밑에서 자는 사람이나 보리밥 한 덩이도 변변히 못 얻어먹는 허다한 사람에게 비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로스차일드이다. 우리가 지적 예술적 쾌락을 누리는 정도가 아무리 근소하다 할지라도 근육노동에 의하여 극도로 피로해서 집에 돌아와서 예술이고 과학이고 쾌락을 느낄 수 없이 그런 것들의 고상한 환락은 애당초 알지도 못하고 살다가 죽고 마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비하면 우리는 오히려 로스차일드이다.(로스차일드는 영국의 세계적 부호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평등의 원칙을 그 결론까지 실현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정과 타협을 하지 않으리라.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반역하는 바이다. 그러한 등등의 사정은 우리의 심경에 대단한 괴로움과 증오감으로 억색抑塞케 하는 바이다. 그러한 등등의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혁명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거슬리는 것들과 장사꾼의 에누리 흥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타협을 배격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에 대하여는 죽기까지 싸울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이 중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 확신을 얻은 사람은 만사는 자연히 변하여 가는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품고서 조용히 재워주기를 원치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이 제목의 최후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도덕적 개념이 완전히 변화할 시대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지금까지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일이 가장 심각한 부도덕이라고 지각한다. 어떤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것은 습관이며 존중되던 전통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우리는 도덕조직이 한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러한 도덕들을 내던져버리고 혁명적 항쟁을 시작하라고 부르짖어 외친다. 그리고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의무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는 비판의 시대인 까닭에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환영하자. 그러한 것은 사상이 사회에 움직이고 있는데 대한 착오 없는 상징이다. 보다 더 높은 도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도덕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인간과 동물과의 연구를 기초로 하여 채택함에 의하여 원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대중이나 사상가들의 관념 속에 그 자체를 형성하고 있는 도덕의 종류를 고찰하여 보았다. 이 도덕은 하등의 명령을 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나 법률이나 또는 정부에 의하여 개인들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이 추상적 관념에 따라서 개인들을 판에 박아놓다시피 하는 것을 절대로 거부하리라. 그것은 각 개인 개인에게 충분하고도 완전한 자유를 맡겨두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의 단순한 기록에 불과한 것이다. 즉 신학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신학은 인간에게 경고하리라. “만약에 자네가 자네들 중에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만약 자네들의 정력이 강렬한 인상도 없고 심심한 환락도 없고 그렇다고 또 심각한 비애도 없는 무미 단조한 생활을 하기에 족할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면, 자네는 평등이라는 말뿐인 단순한 원칙에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평등의 관계에 있어서 자네는 자네들의 박약한 정력에 알맞은 그만한 행복의 최대량을 아마 발견하리라.

그러나 만약에 자네가 자네들 중에 청춘다운 힘을 느낀다면, 또 만약에 자네가 살기를 원한다면 더욱 또 만약에 자네가 완전히 충실하고 창일하는 생활을 향락하려고 원한다면 - 즉 생물이 염원할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알고 있다고 하면, 강건하라, 위대하라, 자네가 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활력이 있으라.”

자네의 주위에 생명의 씨를 뿌려라. 만약 자네가 기만하고 거짓말을 하고 모략을 하고 사기를 한다면, 자네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네 자신을 비열하게 만들고 위축하게 하고 자네 자신이 박약하다는 것을 미리 고백하고 자기 자신의 주인 놈보다도 악열惡劣하다는 감을 느끼고 있는 아내에게 노예의 역할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라는데 주의하라. 만약에 그리하는 것이 자네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 해보라. 그러나 인류는 자네를 야비한 매욕을 받을만한 나약한 자라고 멸시를 하고서 거기에 해당한 대우를 자네에게 하리라. 자네 자신이 힘이 있다는 입증을 갖지 못한 까닭에 인류는 자네에게 대하여 불쌍한 - 다만 불쌍히 여길 뿐인 - 놈이라고 치고 행동하리라. 이와 같이 자네가 자기 자신의 멋대로 자네의 정력을 마비할지라도 인류에게 죄를 돌리지 말라. 다른 면에 있어서 강건하라. 그리고 한 번 자네가 부정의를 보고서 그것을 이러이러한 것 - 생활에 있어서 불평등, 과학에 있어서 허위 또는 타인에게서 받은 고민 -이라고 인정한다면 그 불공평, 그 허위 또는 부정의에 대하여 반항하기 위하여 분기奮起하라.”

 

 

 

 

 

 

 

 

 

 

 

 

 

 

 

 

 

 

 

 

 

 

 

 

 

 

 

 

 

 

 

 

크로포트킨 연보

 

1842년 피요르트 알렉세이비치 크로포트킨 공작은 129일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부친 알렉세이는 1828년의 노토露土전쟁과 1861년의 폴란드 반란 진압에 참가한 군인인 데 후에 장군의 위계位階를 받았다. 크로포트킨 가는 그 선조를 멀리 류리크 왕조 의 일문一門, 스모렌스크 대공으로 소급하는 러시아 굴지의 명문 귀족에 속하고 있다. 모친은 도 코사크의 명문 스리만 장군의 딸로서 핍박당하는 민중에게 온정 을 베푸는 마음씨 착한 부인이었다. 그러나 생모는 피요트르가 3세 때 별세했다. 부친은 그후 바르트 제독의 딸 엘리자베드 카란디노와 재혼했다. 피요트르는 막내 아들이고 형은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르의 두 사람, 매씨는 헬렌 한 사람이었다.

1850년 우연한 기회에 니콜라이 1세의 눈에 들어 황제의 직접 명령으로 장래 근시近侍학 교에 입학하게끔 결정되었다. 그것은 황실 부속의 특권적 궁정학교이니 여기에 입 학한다는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는 바랄 수 없는 최상의 엘리트 코스를 의미했다.

1857년 근시학교에 입학(1862년까지 재학). 이 학교에서 당시의 러시아 제일급의 대학교 수들의 교육을 받았다. 모스크바의 유년학교에 재학 중인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다방면의 서적을 읽고 이 무렵에 벌써 종교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되었다. 또한 칸 트와 헤겔의 철학보다 수학, 물리학, 천문학 등의 연구에 흥미를 느꼈다. 가장 큰 사상적 감화는 다윈에 의하여 주어졌다.

186135일 농노해방령이 발포되었다. 6월에 수석이 된 크로포트킨은 조장에 임명되 었다. 10월에 각지의 대학에서 학생운동이 발생했고 정부는 엄중히 탄압했다. 페 테르부르그 대학은 일시 폐쇄되고 자유주의적 경향의 교수들은 추방되었다. 알렉 산드르 2세는 반동정책으로 기울어졌다.

1862년 근시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크로포트킨은 자기 앞에 열린 입신출세의 문을 스 스로 닫고 뜻밖에도 시베리아연대(아무르의 코사크기병대)의 사관을 희망했다. 5 월에 페테르부르그에 대화재 사건이 돌발했을 때 정부의 반동노선과 탄압은 일층 엄중하게 되었다. 6월에 시베리아로 출발. 62?67년 간 시베리아 체재 중 군대 근 무를 하는 한편 시베리아 각지에서 지리학적 답사에 종사했다.

18631월에 폴란드반란이 발생했다. 시베리아 유형이 된 폴란드 정치범들의 비참한 운 명을 목도했다.

1867년 퇴역을 결심하고 동년 초 시베리아에서 러시아로 돌아왔다. 가을에 페테르부르그 대학의 물리?수학과에 입학. 한편으로 71년까지 러시아지리학회의 지세과地勢科 간 사로서 근무하여 시베리아 기타 각지의 탐험보고서를 발표하여 지리학자로서의 명 성이 점차 확립되었다.

1871년 가을에 핀란드의 조사여행 중 지리학회 간사의 요직에 임명하겠다는 전보를 받았 다. 그러나 이때 그의 심중에 조용한 혁명이 일고 있었다. 그는 이제야 자기 앞에 열려있는 대 학자의 안락한 의자와 명성을 거부하고 혁명가가 되려고 결심했다. ‘자기의 주위에 빈궁과 곰팡이 핀 한 조각 빵을 위한 싸움밖에 없는 때, 어떻게 나에게 그러한 고상한 즐거움을 맛볼 권리가 있겠는가. 내가 고상한 정서의 세계 속에 생활하기 위하여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될 모든 것은 제 손으로 보리를 지으면 서도 제 자식들을 위한 충분한 빵을 못 얻는 사람들의 입에서 빼앗아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 혁명가의 회상)

1872민중 속으로라는 브나로드운동이 시작되었다. 크로포트킨은 우선 스위스의 취 리히를 방문하여 유학생들과 사귀어 바쿠닌과 라브로프의 혁명이론을 알게 되었 다. 그리고 쥬네브에서 니콜라이 우틴과 만났다. 그러나 우틴보다 바쿠닌파의 생 활태도와 혁명사상에 많이 끌렸다. 특히 쥐라산지의 노동자들과 생활을 함께 함 에 이르러 마침내 아나키즘으로 회심回心했다. 당시 로카루노에 체재 중인 바쿠 닌을 방문할 기회 없이 러시아로 귀국하여 차이코프스키의 서클에 가입하고 민 중 속으로의 실천운동에 관여하여 이후 약 2년간 이에 종사했다.

1874년 봄에 체포되어 피요트르 바벨 요새에 금고 되었다. 러시아의 과학계는 일치하여 그의 석방을 탄원했다. 그 결과 황제의 특별한 허가가 있어 옥중에 지필紙筆이 허 락 되어서 러시아지리학회에 제출하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방대한 지리학상의 연구보고가 제출되어 나중에 간행되었다. 동년 가을에 형 알렉산드르도 검거되어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

1876년 괴혈병에 결려 건강이 몹시 악화했다. 재판소 부속병원으로 옮겨졌다. 630일 병원에서 동지들의 조력을 얻어 극적인 탈주에 성공했다. 핀란드를 거쳐 스웨덴으 로 망명, 영국으로 갔다. 얼마 후 쥐라연합의 기욤과 연락이 되어 스위스의 소도 폰에 정주定住하고 아나키스트 인터내셔널의 일원이 되었다.

1877년 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출석하여 마르크스주의적 중앙집권적 경향에 반대했다. 벨기에 경찰의 박해를 받고 런던으로 건너가 대영박물관 부속도서관에 서 주로 프랑스혁명의 연구를 했다. 러시아에서는 유명한 ‘193인의 재판이 시 작되었고, 다른 편으로 베라 사스리치가 도레보프 장군을 쏘아 테러리즘의 개막을 고하고 있다. 프랑스를 거쳐 5월에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 무렵에 독일 황제, 다 음으로 스페인의 왕, 끝으로 이탈리아 왕에 대한 살해미수 사건이 연발, 각국은 스위스 정부에 대한 압력을 가하여 아나키스트를 국외로 추방토록 요구했다. 그 결과 기욤, 슈비츠 게벨 등의 바쿠닌의 직제자들은 스위스에서 추방되었다. 이제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8792월부터 잡지 반역자Le R?volt?를 발행하고 크로포트킨 혼자서 그 대부분을 메웠다. 대성공을 거두어 발행부수가 급증했다. 이 잡지를 통하여 이탈리아, 프랑 스, 스위스, 스페인에 있어서의 아나키스트운동의 재편성이 성취되었다. 동지에 게재한 제 논문은 1885년에 반역자의 말Paroles d'un R?volt?이란 표제로 간 행되어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특히 그 가운데의 청년에 호소함은 거의 세계의 모든 나라 말로 번역되어 막대한 부수가 나갔다.

188131(러시아역에 의함, 서력으로는 13)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 집행위원회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7월 런던에서의 아나키스트대회에 출석 후 그는 러시아정부의 강한 압력에 굴복한 스위스정부의 손으로 국외로 추방되었다. 10월 말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영국에서의 아나키즘의 선전활동을 했으나 전연 반 응이 없었다.

1882년 영국과 같은 무덤 속에 있기보다 차라리 프랑스의 감옥에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가을에 프랑스로 이주. 동년 말 리용의 노동자 간에 불온한 움직임이 빚 어져 프랑스 당국은 치안유지의 필요상 60명의 아나키스트를 검거했다. 리용의 우 익계 각 신문은 크로포트킨의 체포를 요구했다. 1222일에 그는 검거되었다.

188313일에 리용에서 재판에 회부되어 5년의 금고형 판결을 받았다. 리용의 감옥 에, 다음은 크레르보 감옥에 투옥되었다. 크로포트킨의 판결의 부당성을 비난하는 항의의 소리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 스펜서, 빅토르 위고, 크레망소 등의 세계적 명사들이 프랑스정부에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 결과, 크로포트킨에게 특별한 서재가 제공되고 서적도 전혀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과학아 카데미는 그를 위하여 도서를 개방했다. 또한 포도주가 딸린 식사가 제공되고 끽 연도 허가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말라리아와 괴혈병으로 건강이 악화했다.

1886115일에 3년의 금고 후 드디어 프랑스정부는 세계의 여론에 못 이겨 그를 석방 했다. 출옥 후 러시아와 프랑스 감옥에서(1887)를 쓰고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 하면서 자유를 빼앗긴 상태의 인간성에게 무엇이 초래되는가를 논했다. 이 점에서 는 제아무리 문화적인프랑스의 감옥이라 할지라도, 러시아의 음산하기 짝이 없는 지하옥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며 감옥은 국가에 의 하여 지지된 범죄대학이라고 결론한다. 동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활발한 문필 활동으로 들어갔다. 다음은 출판된 연대와 서명이다.

1890아나키스트의 도덕

1892년 파리의 반역지에 기고한 제 논문을 뭉쳐서 빵의 약취La Conquete Pain

1898년 잡지 19세기The Nineteenth Century에 게재한 제 논문을 모아 전원 공장 작 업장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

1899년 자전 한 혁명가의 회상Memoires of a Revolutionist

1901근대과학과 아나키즘러시아어판

1902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in Evolution

1903국가론The State

1905러시아 문학의 이상과 현실Ideals and Realities in Russian Literature

1909프랑스대혁명La Grande Revolutions 러시아에서의 테러The Terror in Russia

1912근대과학과 아나키즘La Science Moderne et L'Anarchie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러시아의 루스키에 베도모치아지에 전부 10으로 서한을 게재하여 대독전對獨戰을 지지했다. 그 이래 세계 아나키즘운동의 지 도자로서 그의 성망聲望은 땅에 떨어졌다.

19172월혁명 발발 후 5월에 40년 만에 귀국했고, 10월혁명 후 19186월에 모스크바 근교 도미도로프촌으로 은퇴하여 빵과 양초의 부족으로 고민하면서 윤리학(1922)의 집필에 전념했다.

192128일 이른 아침 도미도로프에서 사망. 볼셰비키정부는 즉시 국장을 청했으나 측근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거절했다. 장례는 다수의 일반 시민의 참열參列 아래 열광적인 정치적 데모행진으로까지 발전했으며 소비에트정부에 의한 대규모의 아 나키스트 탄압의 동기를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회관晦觀 이을규李乙奎 연보

 

1894. 221일 이정훈李鼎薰2남으로 서울 마포 공덕동에서 출생. 유년시절에 한 문 수학.

1908. 3. 조종래趙鍾來 장녀 정원靜元과 결혼, 11녀를 두다.

1913. 3. 공립 인천상업학교 졸업.

1913. 6. 평안농공은행에 입사, 재직.

1918. 은행 사임. 안동현 구 시가에서 남정南汀 박광朴洸 선생과 무역상 간성덕艮成 德 및 동신공사東新公司를 경영, 내외 동지와의 연락 및 자금 조달.

1919. 대동단 사건 참여, 의친왕義親王을 안내하면서 안동현까지 탈출하다가 신의주 역에서 일경에게 억류되자 안동현 영국상회 이륭양행怡隆洋行으로 도피.

1920. 1월 비밀리 서울 잠입. 연통제(지하조직)를 실시코자 이종욱李鍾郁, 양기탁梁起 鐸 등과 활동하다가 피검, 2년형을 받고 공소, 보석 중 상해로 망명.

1922. 10. 12월 이르쿠츠크 극동혁명자대회 참석차 부회赴會 도중 북경에서 조소앙趙素昻 을 만나 신생 사회주의 국가라는 러시아 정세를 듣고 이르쿠츠크 행을 보류, 북경에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및 북경대학 교수 주수 인周樹人(노신魯迅), 러시아시인 예로생코, 대만 청년 혁명동지 범본량范本梁 등과 교유하면서 사상문제를 연구.

1924. 4. 이회영, 정화암鄭華岩, 백구파白鷗波, 유우근柳友槿(흥식興湜),우관又觀 이정규李 丁奎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정의공보를 석인石印 간 행.

1926. 중국 동지 이석증李石曾, 심중구沈仲九 등의 요청으로 일본 동지 암좌작태랑岩 佐作太郞, 석천삼사랑石川三四郞과 함께 국립상해노동대학 주비위원이 되었으며 일방 중국 동지 진망산秦望山, 진춘배陳春培, 양용광梁龍光 등과 함께 복건성 남부 25현을 일원으로 한 농민자위군인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를 조직 활동.

1927. 남경에서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 및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동방』 『탈환등 기관지를 간행.

1929. 전명원全明源 이란 가명으로 가장, 길림 경유, 남 호두湖頭에서 북 호두를 거쳐 해림海林 등을 무대로 선배인 우당(이회영, 고 이시영李始榮 백형)과 구파(白貞 基), 화암(鄭賢燮) 등과 연락하여 김야봉金野蓬, 이달李達, 지산芝山 이붕해李鵬 海, 엄형섭嚴亨燮, 이준근李俊根, 이강훈李康勳, 김야운金野雲, 등 재만在滿 동 지와 더불어 만주에서 독립운동 계획을 획책하는 일방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도와서 무력 항일단체인 신민부를 발전적 해소하고 북만 일대의 교민과 독립운동자들의 일치단결을 목표로 한 한족총연합회로 개편하여 김좌진 장군과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과 같이 일면 항일, 일면 적색분자 타도를 구호로 고령자 高嶺子(해림과 산시山市 중간, 서남 15)를 본거지로 하여 활동하다.

김좌진 장군과 군자금 조달 방법으로 도정搗精공장을 경영.

1930.1.20. (1929. 12. 25) 하오 4시 백야 위원장이 공산당 김봉환金奉煥(일명 김일성金 一星), 박상실朴尙實 등의 권총 저격으로 쓰러지자 장례를 위해서 고 백야장군 사회장 장의위원회를 조직하여 장의 준비를 서둘렀다. 시야 동지와 함께 흑룡강 성 재재합이齋齋哈爾를 거쳐서 조남?南, 정가둔鄭家屯, 타호산打虎山 등지를 경 유하여 천진에 도착, 국내에서 나온 신현상申鉉商, 최석영崔錫榮, 차고동車鼓東 동지와 앞으로의 운동을 협의 계획코자 대표회의를 소집, 참석.

1930?32. 천진, 북경 등 생활에서 우당, 시야와 접촉했던 젊은 유학생 중 정래동丁來東, 오남기吳南基, 국순엽鞠淳葉 등과 교유.

1931. 군자금 관계로 시야는 북만으로, 회관은 복건으로 가려고 야음을 이용, 영국기 선 태고양행太古洋行 선상에서 일경에게 잡히다. 국내로 이송 공주형무소에서 2년여의 형을 마치고 출소.

1935. 제일루사건으로 채은국蔡恩國과 재피검, 그 후 3년간 4차에 걸쳐 검거되어 고 초를 겪었다.

1936?44. 배재고보에 봉직.

1945. 9. 자유사회건설자연맹 대표로 피선.

1946. 3열사봉장위원회 봉장위원.

독립촉성국민회 중앙위원으로 피선.

1948. 감찰위원으로 취임, 그 해체 때까지 연임하다.

1954?58. 민주사회당 대표 피선.

1963.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포상을 받음. 저서 시야 김종진 선생 소전

1972. 6.11. 사망.

 

 

 

 

 

 

 

 

 

 

 

 

 

 

 

 

 

 

 

 

 

 

편집후기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은 크로포트킨의 말년의 원숙한 사상을 집약한 귀중한 문헌이다. 저자는 여기서 근대의 자연과학과 사회사상의 논리적 귀결로서 아나키즘을 이해하고 있다.

역자 회관 이을규 선생은 우리나라에서의 아나키즘운동의 개척자요 지도자 중의 한 분이다. 편집자는 일찍이 중학 시절에 선생의 온후한 인격과 고매한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항상 흠모의 정을 잃지 않았다. 원저자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스트 성자聖者라 일컬어질 만큼 인자한 성품의 인격자요, 역자 또한 그 단아하고도 온후한 풍모가 저자와 상통하는 면을 갖고 있다.

역자는 이미 고인이 되셨다. 이 책을 완역한 유고를 10여 성상이나 고이 간직하면서 끝내 출판을 못한 채 숨을 거두실 때, 그 유한이 얼마나 크셨을까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편자는 고인의 서랑壻郞 조한응趙漢膺 동지와 함께 선생에게서 입은 은의恩誼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편집과 교정에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워낙 비재非才인지라 잘못된 데가 많으리라고 본다. 동학 동지 여러분의 시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1972. 10. 10.

 

편자 하기락 河岐洛

 

 

 

 

 

 

 

 

 

 

 

 

 

 

 

 

 

 

 

 

 

 

 

현대과학과 아나키즘

 

1판 발행 1973610

2판 발행 2015

지은이/크로포트킨

옮긴이/이을규

펴낸이/엄동일

펴낸곳/()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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