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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네코 후미코 흔적을 방문하다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개관식에서-
고마츠 류지(小松隆二)
1.문경 박열의사기념관에서의 뜻하지 않은 재회
지난해(2012년) 10월, 한국의 문경에 있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기념하는 박열의사기념관이 개설되었다. 그 개관식 날에, 광대한 전시 시설 한쪽에 위치한 후미코의 전시코너 앞에 서서, 나는 무의식중에 깜짝 놀람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감격의 추억에 빠져들었다. 전혀 예상 하지도 않았지만, 커다란 윈도 속에서, 한자로 적혀있는 『춘추(春秋)』라는 잡지명과 내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윈도 안에 전시되어있는 후미코에 관한 연구연보 첫 번째 란에, 이 두 이름이 기재되어있었다. 전체가 한글로 채워져 있음에도 이 두 가지만은 한자였기에 곧바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춘추』란, 다시 말할 필요 없이 춘추사의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본 기관지다. 동지가 1961년에 게재한 아키야마 키요시(秋山?)의 「가네코 후미코의 회상록(金子ふみ子の回想?)」, 그리고 같은 해 『자유사상(自由思想)』에 발표된 나의 「반역의 여성?가네코 후미코(反逆の女性?金子文子)」라는 소논문이 후미코 연구의 효시로 자리매김 되어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두 잡지 모두 1961년 7월과 같은 달 간행이었다. 내게는 50년만의 재회와 같은 기분이었다.
춘추사와 후미코는 지금부터 80년 전(1931년)에, 그녀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를 간행한 인연도 있다. 동사의 창업을 지원하고, 오랫동안 동사에 협력한 사회사상가 가토 카즈오(加藤一夫)가 부탁해 출판한 것이다.
아마 춘추사도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한 것이 남보다 앞선 연구라는 의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학생시절 쓴 문장도 내용도 서툰 것으로, 무척 부끄러운 정도의 것이었는데, 기념관 연보로 시기적으로 최초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새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50년이나 지난 1960년 대학 4학년이었던 나는, 번역과 사회운동에도 관계하던 엔도 사칸(遠藤斌)씨와 함께 가네코 후미코의 고향 야마나시현 엔잔(山梨??山), 그리고 거기서 오지 깊숙이 들어간 마키오카(牧丘)마을을 방문했다. 거기서는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스즈키(鈴木)선생의 안내로 후미코의 생가, 초등학교, 절과 신사등 연고가 있는 지역을 둘러봤다. 후미코의 친척 몇 사람과도 만났지만, 만나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사회주의자, 특히 사건 관계자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흔적이 남았던 것이다.
그런 조사여행 후에, 정리한 것이 「반역의 여성?가네코 후미코」였다. 문경의 기념관 전시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놀람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그런 50년 전의 일이 오랜만에 떠오르면서 뜻하지 않은 놀램과 동시에 추억의 정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2.박열의사 기념관에 대해
문경은 박열의 고향이다. 한국의 중부, 경상북도에 위치한 농촌지역 소도시로, 인구는 주위를 포함해 8만 명 정도다. 영화 대촬영장(KBS)과 온천이 있다. 사과, 고추, 도자기 등으로 유명하고 그런 축제도 열리고 있다. 한편 논과 밭과 산림이 펼쳐지고, 그 배후는 산으로 둘러싸였다. 거기에는 일본의 농촌이나 산촌과 같은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가을의 결실도 사과, 배등과 같은 과일도 농로나 논두렁길의 잡초도 일본과 거의 변함이 없다.
그 문경에 박열 등의 기념관건설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미 10년 이상 전이었다. 몇 번씩 중단되면서도 끈질기게 매달려, 드디어 문경 전체의 대기념관 건설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는 하나의 계획이 단번에 진행되지 않고, 참을성 있게 10년 정도 걸린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라 한다. 국가에서도 협력해 4000평의 토지를 마련하고, 거기에 자치체의 부담과 기부를 모아 완성시킨 것이었다.
기념관의 명칭은 「박열의사기념관」이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동격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한때는 박열?가네코 후미코기념관과 같은 두 사람의 이름을 붙이자는 안도 있었다 한다. 두 사람을 변호한 변호사 후세 타츠지(布施辰治)도 큰 대접을 받고 있었다.
건물 주의는 광대한 기념공원으로 되어있지만, 그 한쪽 조그만 언덕에 후미코의 기념비?묘소도 건립되어있다. 지역사람들이 일본사람 묘 앞에서 형식뿐만이 아니라, 길게 깊숙히 머리 숙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박열의 묘는 따로 건립되어있지만, 언젠가 같은 곳으로 합칠 것이라 한다. 가난을 떠올리는 박열의 생가도, 공원 입구 가까이에 옛날 그대로 복원되었다.
그건 그렇더라도, 크게 내용이 충실한 시설이었다. 국가도 자치제도 지원했다. 사회사상가?운동가의 기념관으로서는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대우다. 우리들 일본인들도 머문 동안 큰 환영을 받았다. 국가정세와 역사적 인식의 차이도 많이 알게 되었다. 앞으로, 일본 쪽의 협력도 필요하겠지만, 기념관은 새로운 자료가 좀 더 모아진다면 더욱 충실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3.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오늘날 일본에서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두 사람의 흔적과 사상 등은 잊혀지고, 기껏해야 관동대지진 후의 대역사건의 관계자?희생자로 알려진 정도일 것이다. 일반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후미코가 남긴 것이라 한다면, 춘추사 발행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정도다.
제1차세계대전 후의 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박열과 후미코는 공동생활에 들어가, 힘든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사회운동에도 참가한다. 특히 차별받는 편에서 일본의 자본주위와 제국주의적 정책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아나키즘적 사상에서『후토이 센진(太い鮮人)』 『현사회(現社會)』등의 기관지도 발행한다. 그로 인해 관동대지진 때에 보호 검속되지만, 법정 심리를 통해 대역사건에 휩쓸려간다.
대역사건에 대해서는, 박열과 후미코는 천황제와 자본주의 제도의 부정 등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 같은 반역적인 사상이 검사에 의해 대역사건으로 유도, 날조되었다는 것이 후세변호사와 연구자 모두의 이해다. 당국으로서는 대지진하의 조선인에 대한 탄압과 차별에 대한 비판을 돌리는 재료로도 쓸 수 있다는 의도도 있었다. 아직 젊었던 두 사람은, 극형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단순한 반역적인 사상을 구체적으로 대역계획이 있는 것처럼 유도된 채, 용감하게 논쟁을 전개한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사형판결을 받지만, 곧바로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 그 후 후미코는 자선전과 수많은 단가를 남기고, 23세의 어린나이에 옥중에서 액사. 박열은 후미코의 생애와 같은 23년이나 되는 옥중생활을 견디고, 전후 출옥, 이후 조선의 독립에 진력하지만, 한국전쟁 때, 북으로 연행되어,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다.
그렇게 말하자면, 이 글을 쓰는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희미하게 떠오른 것이 있다. 박열이 전후 자유롭게 된 후 후미코를 활자로 남기지 않았던 것은 어째서일까 하고 민중미술의 선구자로 도치키(?木)형무소에 있는 후미코에게 면회 갔던 모치츠키 가츠라(望月桂)에게 내가 물은 적이 있다. 그 물음에 모치츠키는 「오래 살게 된 자신이 후미코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박열을 동정하며 말했다. 내게는 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 같은 두 사람이 시대를 넘어 한국에서는 높이 평가받고 위인으로 기념관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4.가네코 후미코의 조선시절을 찾아서
이번 개관행사에 나는 오랫동안 가네코 후미코를 연구해 온 사토 노부코(佐藤信子)씨 등의 가네코후미코연구회 8명의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후미코 연구자이기도 한 가메다(?田)씨도 가했다. 기념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멤버들은 충청북도에 위치한 산과 강이 있는 고장 그리고 후미코가 「경부연선에 있는 조그만 마을」로 회상하고 있는 부강에 들렀다.
후미코는 겨우 23년이라는 생애 가운데 7년을 조선에서 보냈다. 그만큼 조선시절, 특히 부강에서의 추억은 자서전에서도 상당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 상세한 서술에서 예리한 관찰과 대단한 기억력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 상세한 서술은 후미코가 젊었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친 관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후에 사상가 후미코의 토대가 되는 차별과 박해와 같은 생활상황뿐만 아니라, 부강, 나아가 조선의 생활사?사회사 그리고 일본인 사회의 연구에도 유익한 자료가 되는 일면을 갖고 있다.
그 부강에서 우리들은 그녀가 생활한 숙모 이와시타(岩下)가의 주거지, 통학한 초등학교, 지금은 파출소지만, 후미코의 기억으로는 마을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건물로 당시에는 조선인 단속도 하던 헌병대 자리도 견학했다.
부강초등학교는, 후미코 시절과 같은 곳에 있으며 옛 교사도 일부 남아 있었다. 지금은 이 지방의 부강교육의 중심적 위치에 있다. 거기서 여성인 이춘근(李春根)교장선생에게 환영을 받고 교내의 다른 곳, 후미코가 자주 올랐던 학교 뒷산 등을 안내받았다. 후미코 재학시절의 귀중한 자료등도 제공받았다. 후미코에 대해 알고 있었던 내용도 들었지만, 후미코에 대해서는 동교가 낳은 최대의 위인이자 자랑스러운 인물이라는 높은 평가였다.
후미코에게 조선시절은 좋아하던 공부와 독서 시간을 빼앗기기도 하고, 벌로 영하의 날씨에 집밖으로 쫓겨나기도 한 비참한 학대를 받는 등,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학업성적은 좋아서 본인이 기록한 것처럼, 30명 정도의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성적우등상을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나 「우리학교의 위인?자랑」등으로 평가받을 것이라고는 후미코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8명이 마이크로버스로 초등학교를 떠날 무렵, 교장과 교감으로부터 후미코가 배웠다는 인연으로 부강과 마키오카의 초등학교가 자매교가 될 수 없을까 하는 제안이 있었다. 갑작스런 제안이었지만, 오히려 일본쪽에서 감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여 야마나시현으로 가지고 오게 되었다.
우리들은 일한관계?교류는 정치를 넘어서 시민차원의 교류를 거듭 쌓아가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열과 후미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지금부터다. 이미 전기도 있지만, 또한 다양한 입장의 접근적 연구가 갖춰지면, 비로소 연구에 그 폭과 깊이가 생겨날 것이다. 대역사건의 진실에 대해 한층 더 해명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두 사람의 전체상을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 일한 간에 공동연구의 조건도 정비되고 있다. 그 같은 시점에서, 그녀의 흔적이 재점검되고, 아울러 뛰어난 전기문학이라 해도 좋을 옥중기, 후미코가 남긴 수많은 단가, 그리고 거기에 담겨진 그녀의 생애와 사상에도 새롭게 조명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