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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시인 우에무라 타이(植村諦)와 朝鮮
(조선에서의 체험을 중심으로)
金昌德*
kkccdd@hanmail.net
要 旨
植村諦は生涯の最後の瞬間までアナキストに一貫した激情的な詩人で、特に植民地朝鮮でアナキズム思想によって民衆と供に日帝に?抗した詩人である。今は植村諦を憶えている人?はほとんどいなくなり、無名詩人に等しいと言えるだろう。しかし彼は1929年10月に朝鮮からアナキズム系列の同人誌『矛盾』に短歌「漂泊途上の歌」の?表以?、解放文化連盟の結成に?加して『解放文化』と第2次『?道』をまた1933年8月には擴大再編した解放文化連盟の機?誌『文?通信』の?行などを通して日本の中心的なアナキスト詩人になった。
1935年11月には日本無政府共産黨の委員長として活動中、アナキズム運動に?する大??によって日本無政府共産?及び解放文化連盟は?滅、植村諦も7年におよぶ獄中生活を??した。?後にも自分の思想を曲げずに新日本文??と日本未?派で詩作活動を展開中、1959年?出血によって死亡するまで日本を代表するアナキスト詩人の一人としてアナキズム運動の中心的な役目を果たした人物であった。
特に植村諦に注目することは彼が朝鮮での民衆との??を通じて民衆解放を志向するアナキストとして自?し、詩を通じて日帝に抵抗したという点である。朝鮮で?誌『朝鮮及?洲』の編集者に勤めながら野長?正夫、岡本潤などのアナキスト詩人たちとの交流を通じて植民地朝鮮の?めな現?は?制的で破?的な日帝の苛酷な?奪政策にその原因があることを分かるようになった。1930年5月朝鮮の?立運動家たちとの接?事?が警察に知られて逮捕の代りに朝鮮からの追放によって??するようになった時、彼は徹底的なアナキズム思想による抵抗詩人に?わった。植村諦は植民地朝鮮民衆の苦痛を一?に??し、朝鮮民族の解放を固く信じ、詩を通して日帝に抵抗した代表的なアナキスト詩人であったのでる。
キ?ワ?ド:植村諦, アナキズム, 朝鮮での??, 權力への抵抗
1.서 론
이 글은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우에무라 타이(植村諦)의 작품 중에서, 조선에서의 체험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고자 했던 그의 아나키즘 시의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쓴 글이다. 우에무라 타이에 대해서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무명시인에 가깝지만, 1929년 10월 조선에서 아나키즘 계열의 동인지『矛盾』에 단가「표박도상의 노래 (漂泊途上の歌)」를 발표한 이후, 1931년 10월에는 아키야마 키요시(秋山淸:1904.-1988), 오카모토 준(岡本潤:1901-1978), 오노 토자부로(小野十三?:1903-1996)등과 함께 해방문화연맹을 결성, 이듬해인 1932년 6월 그 기관지로 『해방문화』을 발간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제2차『탄도』를, 1933년 8월에는 해방문화연맹의 기관지인『문학통신』을 발행하면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시인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1935년 11월엔 비합법단체인 일본무정부공산당의 위원장으로 활동 중 아나키즘운동에 대한 대탄압이 가해져, 일본무정부공산당및 해방문화연맹은 괴멸당하고, 우에무라 타이 역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기소되어, 7년간의 옥중 생활을 체험했다. 일본의 패망 후 신일본문학회와 일본미래파에서 시작활동을 전개 중 195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아나키스트 시인의 한 사람으로 아나키즘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우에무라가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조선에서의 체험을 통해 아나키스트로 자각하기 시작했으며, 시를 통해 조선의 민중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고향인 나라(奈良)에서 쫓기듯 조선으로 건너왔을 때, 그는 아나키스트라기보다는 마르크시즘이나 사회사상을 약간 접한 혈기왕성한 휴머니스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우에무라 타이가 조선에서의 1년여의 체험을 통해 1930년 조선에서 추방되어 귀향하게 될 때에는 철저한 아나키스트 시인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시절 마르크시즘의 입장에서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부정하면서 일제에 저항한 일본의 시인으로는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1902-1979), 오구마 히데오(小熊秀雄:1901-1940), 다카무라 코(?村浩:1912-1938)등이 있다. 이들의 시는 다분히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에 의해 쓰여 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우에무라 타이의 시는 이러한 마르크시즘에 의해 생겨나기 쉬운 과대한 통치권력과 권위주의를 부정하면서 자유로운 독립정신과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침범되는 않는 개(個)의 존엄과 자유의 자각을 통한 자유연합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의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의 민중과 하나가 되어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했었다.
우에무라는 과연 조선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으며, 어떻게 민중과 함께 하는 아나키스트 시인으로 성장했던 것인가. 본고에서는 우에무라 타이가 편집및 기자를 담당했던 잡지『조선과 만주(朝鮮及滿洲)』에 발표한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그가 휴머니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 변하는 과정 및 자본주의와 권위적인 권력에 저항하고자 했던 아나키즘시의 특징과 또한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과의 연대를 통해 일제에 적극 저항하려 했던 그의 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조선에서의 우에무라 타이
2-1.조선으로의 탈출
우에무라 타이(植村諦)는 나라(奈良)현 출생으로 그의 나이 20살이 되던 1923년 9월에 초등학교 대용교원이 된다. 이 시기 그의 제자 중에는 시인 이케다 가츠오(池田克己1912-1953)가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승려가 되고자 불교전문학교 2학년을 수료, 검정증을 받아, 이듬해인 1924년 사찰의 주지를 겸하게 된다. 이 당시 나라(奈良)에는『야마토산맥(大和山脈)』이라는 詩誌가 있어, 노나가세 마사오(野長?正夫:1906-1984), 나카가와 시즈무라(中川?村), 니시가와 린노스케(西川林之助), 오토무라 레이코(音村麗子)등이 참가했다. 우에무라 역시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같은 동인이었던 오토무라 레이코(音村麗子)와 첫 번째 결혼생활을 한다. 한편으론 부락해방운동인 수평사운동에 가담하는 등 “진실을 찾아, 세상의 부정과 불의에 대한 반역에 의해” 사찰의 주지직및 교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탈출하듯 조선으로 건너 온 것은 1929년 3월경으로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우에무라의 첫 번째 시집 『이방인』에는 「표박(漂泊)」라는 부제로 16편이나 되는 비교적 많은 수의 시가 나온다. 이렇게 “표박”으로 대표되는 우에무라의 초기 시에서는 아나키즘 사상보다는 쫓겨 온 고향과 고향사람들에 대한의 강한 반감과 원망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시의 주된 시적정서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
-「표박도상」-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지는
배가 닿자마자 달려와
이 나에게 조차 무엇을 달라 조른다.
아직 남에게 줄 뭔가가 남아 있던가
연인도, 친구도, 고향도
모두 버리고 온 나에게
아! 그렇지
친구여, 손을 잡자.
떠돌이인 내게는
이 우정만이 남아 있구나.
-「漂泊途上」-
波止場に待つてゐた乞食は船がつくと?けよつてこの俺にさへ物をねだつてくれる俺にまだ人に與へるものが?つてゐるといふのか?人も、親友(とも)も、ふるさともみんな捨てて?た俺にああそうだ「友よ、手を握らう。」漂泊人の俺にはこの友情だけが?つてゐた。
난생처음 이국땅 조선의 부산부두에 첫 발을 내딛게 된 우에무라는 자신을 향해 구걸하기 위해 다가오는 조선의 걸인을 향해 “아! 그렇지 친구여, 손을 잡자.”며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를 친구로 맞이한다.
인간=개(個)를 중시하고 지배와 권력의 부정을 통한 반항감정을 그 특징으로 하는 아나키즘은 부르주아계급에 의해 억눌려 있는 프롤레타리아라는 피지배계급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민중적인 생활과 표현방식을 추구하는 민중예술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민중예술은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소외층이나 하류층에 특별히 관심을 쏟게 되는 것이다. 아나키즘의 이론적 지도자이며 우리나라의 아나키즘 운동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러시아의 크로포트킨 역시 피압박자로서의 민중의 눈과 감정으로 민중을 위한 예술이 창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당시의 우에무라는 아직 아나키즘사상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이전의 단계였지만 이 시를 통해서 우에무라 본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나키즘적 사고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일체의 권위적인 제도와 억압을 부정하면서, 이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있는 민중들을 지향하며 이들과의 동등한 자유인 연합체를 꿈꾸었던 아나키스트 우에무라의 인식의 표현이었다.
우에무라 타이가 사찰의 주지및 소학교 교원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마을에서의 위치를 버리고 고향 야마토를 떠날 당시의 일본의 분위기는 1925년 제정된 치안유지법이 더욱 강화되어 특별고등경찰법(特高)을 전국적으로 확충하면서, 안으로는 3?15사건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밖으로는 중국대륙에의 침공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같이 군국주의를 향해 치닫던 일본사회의 폐쇄적이고 중압적인 환경과, 특히 자신에게 쏟아지던 주위의 질시과 반감은 근대적인 자각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20대 중반 젊은 나이의 우에무라에게 숨막힐 듯 어디론가 탈출하게 만들었다.
?「표박도상」?
쫓겨 온 고향이다
어찌하여 그것이 슬픈가?
인생은 결국 여행이 아니던가
내가 야마토에 태어난 것은
내가 태어난 날 비가 내렸다는 것과 같은 우연으로
그것이 나의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중략>-
뭔가 호소하는 커다란 힘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나는
쓸쓸이 휘파람을 불면서
몇 번이고 되풀이 하는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여행이 아닌가- 하고.
-「漂泊途上」-
追はれて?たふるさとである
何でそれが悲しからう
人生はつまり旅ではないか
私が大和に生れたことは
私の生れた日に雨が降つてゐたのと同じ偶然で
それが私の人生と何のかかはりがあらう
-<中略>-
何かしら呼びかけてくる大きな力の誘惑に
打ち勝たうと、私は
寂しく口笛を吹きながら
幾度も繰り返すのである
人生は所詮旅ではないか?と。
반항감정과 권위주의에의 강한 부정, 그리고 이에 의한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아나키즘을 생애 근간으로 삼았던 우에무라에게 있어서 고향의 숨 막힐듯한 폐쇄적인 환경은 그로 하여금 쫓기듯 조선으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이 시에서는 고향을 등지게 되었던 20대 중반 젊은이의 감상이 “쫓겨 온 고향” 으로 표현 되었다. “ 4∼5명 친한 친구와 친척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에게서 배웅조차 받지 못하고 트렁크 하나 달랑 안고(四五の親しい友や親戚といふやうなものもあるにはあるがそれ等の人?にさへ見送りも受けずトランクひとつを抱えて” 쫓기듯 떠나게 된 고향이었다.
우에무라에게 있어서의 고향의식이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첫 번째로 자신을 박대하고 질시하던 것들에 의해 쫓겨 온 고향에 대해 끝없는 분만(憤?)과 모멸의 감정이다. 두 번째로는 현재 자기 자신의 힘들고 지친 표박으로 인해 고향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끝없는 애착과 사모의 정으로 타나나며, 세 번째로는 강압적인 국가체제에 의해 청춘을 철저하게 고갈당하고 노작(勞作)의 고통을 인종(忍從)하는 것을 덕으로 알고 있는 고향의 민중들의 모습과, 그런 무지로 인해 우에무라를 향해 드러내 놓고 증오감을 나타내던 고향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 고향의 무지에의 반발과 분노로 끝없이 괴로워했으며, 그런 고향의 민중들을 계몽, 설득할 수 없게 된 자신의 무능에 괴로워하면서 그런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체제 속에서 시인 우에무라는 자기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우에무라의 첫 번째 시집『이방인』(異邦人)이 나왔을 때, 소설가 도요지마 요시오(豊島?志雄)는 이를 두고 반일본국가적인 정신의 발로라고 격찬했다. 고향과 대한 반항감정과 강한 부정으로 인해, 권위주의적인 체제부정을 제일로 삼았던 아나키스트 우에무라에게 있어서 고향은 더 이상 맘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일본국가에의 부정적 정신으로 확대되어 나타났다.
우에무라에게 있어서 “뭔가 호소하는 커다란 힘의 유혹”이란 무엇인가. 진실을 추구하고, 세상의 부정과 불의에 대한 반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표박을 계속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함께 현실에 그대로 안주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이었다. 한편으론 20대 청년인 우에무라에게 있어서 야마토, 학교, 절이라는 좁고 폐쇄적인 현실을 벗어나 미지의 세상에 도전하고자 했던 진취성이라는 두 가지 갈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것은 마지막 부분인 “인생은 어차피 여행이 아닌가” 라는 것과 함께 한 때는 요시노(吉野)의 안라쿠지(安?寺)주지를 지낼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었던 우에무라에게 습관적으로 몸에 배어 있었던 불교적 체념이었다.
2-2. 조선에서의 우에무라 타이
조선으로 탈출한 우에무라는 당시의 경성에서 잡지『조선과 만주』에서 편집자및 기자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론 1929년 10월 도쿄의 아나키즘 문예지인『모순(矛盾)』에 단카(短歌)와 시를 투고 발표한다. 또한 같은 나라 출신의 교원이었던 아나키스트 시인 노나가세 마사오(野長瀨正夫)를 통해, 오카모토 준(岡本潤)을 소개 받아, 아나키즘계열의 시집인 『탄도』(彈道)의 주요 집필진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아나키스트 시인으로 활동한다.
『조선과 만주』는 1908년 3월 창간당시 제명을 『조선』이라 했으나, 일제의 영향권이 만주에까지 미치자 1912년 1월(통권 47호)부터는 『조선과 만주』개명한 잡지로 1941년 1월(통권 398호)까지 34년이라는 최장기간 동안 발간된 월간 종합 잡지였다. 이『조선과 만주』를 통해 우에무라는 1929년 5월호(258호)부터 1930년 4월호(269호)까지 거의 1년 동안 시 11편, 수필6편, 그 외에 45편의 단가를 발표했다.
우에무라 타이의 조선에서의 체험기간에 대해 아키야마 키요시는 1927년 4월부터 1930년 5월까지 약 3년간의 기간 이었다고 하고, 우에무라 타이가 마키 이즈미(眞木泉)라는 필명으로 쓴 본인의 자서전 격인「흑기는 찢어졌다!(黑旗は破れた!)」에서는 대개 1928년부터 1930년 가을까지로 1년 반 정도의 기간이라 했지만, 이는 기억의 부정확함 또는 여유 있게 오가는 도중의 모든 일수를 포함한 것일 것이다. 정확하게는 “처음으로 반도의 붉은 흙을 밟은 지 1개월, 보는 것 듣는 것 모두가 내게는 새로운 경이였다.(始めて半島の ?土をふんで一ヶ月、見るもの聞くものすべてが私にとつて新な驚異である。”. “오늘은 3월 8일이다, 자네가 야마토를 떠난지 벌써 1년이 되었다. 는 편지가 고향의 친구로부터 몇 통이나 왔다.(今日は三月八日だ、君が大和を出てから早や一年になる?といふ?な手紙がふるさとの友から幾通となく投げ?まれる。”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순수한 조선체류는 1929년 4월에서 1930년 4월말까지로 대개 1년 남짓 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에무라의 조선에 대한 첫 느낌은 그의 조선에서의 첫 번째 발표작인 수필 「첫 인상(第一印象)」(『조선과 만주』1929년 5월호)에 잘 나타나 있다. “배가 부산에 닿았을 때 내 머릿속에 퍼득 떠오른 것은 메말랐다는 느낌(船が釜山に着いたとき私の頭に先づピント?たのは?干からびた?感じ”, “주름 없는 하카마같은 느낌이다. 형식적이고 깊이가 없는 인간(ひだの無い袴と云う感じである。通り一片のりくつ以上に?行のない人間”). “재치, 생기발랄함 같은 것이 표정에서 사라져있다(ひらめき、生氣潑?さういふものが顔の表情から消えてゐる”, “어둡고 힘든 인간, 타동적이며 숙명적인 인간의 모습.(暗い苦しい人間,他動的な宿命的な人間の姿。”.에서처럼 당시의 우에무라의 눈에 비친 조선민중들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며 표정이 없는 부정적인 모습이었다. 조선에 갓 오게 된 우에무라의 눈으로는 아직 일제에 의해 저질러지는 강압적인 착취와 억압적인 식민지 지배체제라는 비참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향 나라에서 젊은 혈기에 의해 수평사운동등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권력에 의한 저질러지는 부조리한 식민지 지배체제를 확실히 인식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의 짧은 체험을 통해 민중들의 고통이 바로 일제로 대표되는 권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우에무라 타이는 그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서 아나키즘 사상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행동적인 아나키스트 시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지배권력과의 협력으로 고통 받는 민중을 외면하고 있는 종교를 부정하는 시 「이교도(異敎徒)」(『조선과 만주』1929년 6월호)는 우에무라 타이의 아나키스트로서의 첫 번째 시로 기록된다.
-「이교도」-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기도도 하지 많으며
팔짱 끼고 말없이
-중략-
너처럼 신을 떠 벌린다면
난 차라리 아편에 취해있고 싶다.
찬송가를 부르기 보다는
오베론의 서곡을 듣고 싶다.
너희에게 참회를 들려주기 보다는
배고픔에 우는 사람들에게 휘파람을 불어주고 싶다.
예수 크리스트
그 꺼림칙한 베일에 가려진
당신의 본 모습을 나는 알고 있다.
-「異敎徒」-
讚美歌をうたはず
祈りをなさず
腕を組んで?然と
-中略-
君のごとく神をかき口說くなら
私はむしろ阿片に?ふて居たい
さんび歌をうたふよりは
オベロンの序曲を聞いて居たい
君達に懺悔を聞かせるなら
餓に泣く人?に口笛を吹いてやりたい
イエスクリスト
あの忌まはしいベ?ルに包まれた
あなたの素顔を私は知ってゐる
아나키즘은 권력에 의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반대하고, 강제적이며 파괴적인 국가의 폐지를 요구하며, 경제적인 불평등이 없는 공동체를 이상으로 추구한다. 예술과 아나키즘이 결부되기 쉬운 것은 예술이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고, 아나키즘이 어떤 권위로부터도 해방된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에 의해 인간의 자주성과 독립정신을 훼손시키며 가진 자를 대변하는 종교를 부정한다. 여기서 부정되는 것은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교리와 의식을 통해 조직되고 제도화된 권위적인 권력의 종교, 특히 기독교였던 것이다. 국가권력과 손을 잡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서로를 이용하면서 성장, 발전해온 교회로, 로마제국등 국가권력과 싸우며,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원시기독교는 아니었다. 오히려 원시기독교에서는 아나키즘적인 요소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성경은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누가복음 6장 21절』)라 했으며, 예수 역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누가복음 4장 18절』)기 위해 스스로 모든 고난을 감내했던 것이다.
이처럼 원시기독교는 가난하고, 학대 받는 자들의 친구였으며, 권력자나 부자가 기생하는 모든 권위적인 제도의 적이었다. 또한 원시기독교도들은, 그들의 단체생활에서도 신앙의 순수함을 통해 임의적인 상호부조에 의한 공산제를 실시했었다. 그들의 조직은 극히 자유롭고, 외적인 강제가 없었으며, 오로지 그들의 공통된 신앙만이 그들을 맺어주었으며, 상호간에 평등했었다.
생전 자신이 아나키스트라 불려지기를 원치 않았으나,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점에서 옳다” 라고 분명하게 선언하면서, 사후에 종교적 아나키스트로 분류되는 톨스토이 역시 교회와 국가야 말로 오늘날 잘못된 사회제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허용하는 바탕이 되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와 국가가 연합하려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크로포트킨 역시 권력과 손을 잡은 종교는 끊임없는 세뇌교육을 통해 인간을 스스로 죄인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고, 여기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종교와 교회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다는 점을 주입시키면서 인간을 노예화 하는 등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종교의 모든 해악을 고발하고 있다.
이렇게 아나키즘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부응하고 피지배계급의 의식을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종교, 기독교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발표 할 당시의 일본의 종교 특히 많은 기독교 교회는 군국주의 압력에 굴복해 많은 교회들이 국가신도나 군국주의에 은밀하게 타협했으며, 오스기 사카에(大杉?)가 기독교 신자가 되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던 에비나 단죠(海老名?正:1856-1937)조차 설교를 통해 일본에 의한 한국의 지배를 신의 뜻이라 하는 등 일본의 기독교는 종교의 본의를 잃고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한 침략과 지배체제를 설교를 통해 정당화하고 선전해왔다.
우에무라 타이는 이러한 합법이라는 허울을 쓰고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국가, 종교, 사회라는 제도 자체를 모두 부정했다. 이 시에서 우에무라는 지배자 이데올로기의 하위체제로서의 종교를 거부하고 차라리 “아편에 취해있고” 싶었으며, 가난한 자를 위해 “휘파람을 불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배자의 편에 서서 반항정신을 현혹시키며 복종의 정신, 노예적 정신을 강요하는 종교의 해악성을 “나는 알고 있다” 면서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있다.
이어 1929년 12월호(265호)에 조선인들의 자살에 관한 보고서 형식의 수필인 「어째서 죽고 싶어 하는가?(何故死にたがる?)」를 발표한다. 조선인들의 자살자가 1910년에는 474명이었는데 1927년에는 1975명으로 4배 이상 급격히 증가한 했음을 밝히고, 그중 물질적, 경제적 피폐로 인한 자살자수가 1921년에는 일본인 3명, 조선인 217명이었던 것에 비해, 1927년에는 일본인 27명, 조선인 445명으로 증가하여, 일제에 의한 경제적인 수탈을 강력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약육강식과 자연도태가 문명진보의 근본원리라 주장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나아가 인종주의마저 정당화하던 허버트 스펜서(1820-1903)로 대표되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표시였으며, 이들 조선인 자살자의 상당수는 사회적 약자를 도외시한 무한경쟁과 우승열패로 인한 사회체제에서 낙오되는 자들로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보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자발적인 상호 부조와 협동 관계를 인류진화의 요인으로 삼고 있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적극 채택한 내용이다.
우에무라 타이의 조선으로의 탈출은 조선에서의 어떤 연고가 있어 이 연고를 찾아 왔던 것이다. 그 연고란 이미 조선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동향출신의 노나가세 마사오를 비롯한 아나키스트 시인들이었다. 우에무라 타이가 『조선과 만주』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같은 시기, 같은 잡지에 노나가세 마사오의 시 4편, 오카모토 준의 시 3편, 그리고 사카모토 시치로(坂本七?)의 시가 각각 1편 발표 된다. 이들 아나키스트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혁명가와 반역자의 전기등의 아나키즘 서적을 읽게 되면서”투철한 아나키스트 시인으로 성장했다. 조선에서의 이들 반역적인 아나키스트 시인들과의 교류 사실은 시집『이방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옥상전망」-
-전략-
일찍이 우리는 저 붉은 땅 언덕 위에서 경성 거리를 바라보며
같은 생각과 결의로 서로 손을 맞잡은지 몇 년이 되었나
그리고 자네 지금, 고향을 쫒겨나 여기에 있지.
자네는 지금, 저 지붕들 넘어, 바다 건너 저쪽의
백의의 동포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것인가
-「屋上展望」-
-前略-
曾て二人はあの?土の丘から京城の街をながめ
同じ思ひと決意に手を握り合つてから幾年になるか
そして君今、ふるさとを追はれて此?にゐる
君は今、あの屋根??の向ふ、海の彼方の
白衣の同胞を思い描いているか
당시 서울의 언덕위에서 거리를 내려 보면서 같은 생각과 결의로 서로 손을 맞잡았던 사람은 동향의 시인 노나가세 마사오였다. 그 두 사람의 결의는 우에무라의 첫 번째 시집『異邦人』에 노나가세 마사오가 쓴 「발문에 대신해서(跋に代へて)」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타이(諦)여! 그 때가 가을이었지? 자네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지. 자네의 괴로움. 자네의 적막(寂寞)을. 나는 절실히 알고 있다네. (諦よ。あれは秋であつたか。君は僕の手を握りしめて離さなかつた。君の?み。君の寂寞が。僕にはひしひし分かつてゐたのだが。”
2-3. 조선에서의 추방
일본 아나키즘 詩誌의 출발은 1923년 1월 『적과 흑(赤と?)』이라 할 수 있다. 이후『동라(銅?)』,『바리케이드(バリケ?ド)』,『학교(?校)』 등을 통해 구사노 심페(草野心平), 하기와라 쿄지로(萩原恭次郞), 오카모토 준(岡本潤), 오노 토자부로(小野十三?), 우에무라 타이(上村諦)등의 아나키스트 시인들이 활약했다.
우에무라가 아나키스트로서 처음으로 참가한 시지는『탄도(彈道)』였으며, 이 시지의 창간은 1930년 2월로 1931년 5월까지 모두 7책이 나왔다. 오노 토자부로, 아키야마 키요시를 편집인으로, 오카모토 준, 하기와라 쿄지로, 구사노 신페, 우에무라 타이등을 주요 집필진으로 한 이 시지(詩誌)는, 당시 『동라』와 『학교』,『제이(第二)』이후 중심적인 아나키즘 문학잡지가 끊긴 상태인 도쿄에서 아나키스트 시인들의 거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탄도』제2호(1930년 4월)와 『조선과 만주』268호(1930년 3월)에 그의 특징인 직정적인 시풍의 성숙함 잘 보여준 「개구리가 울고 있다(蛙が鳴いて居る)」를 동시에 발표한다.
-「개구리가 울고 있다」-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의심하고 있는 나의 귀에
계속해 들리는 것이 아닌가.
꾹, 꾹, 꾹, 꾸룩, 꾸룩, 꾸룩, 꾸룩,
땅위는 단단한 얼음에 갇혀 있는데,
개구리가 울고 있는 것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얼음 아래 갇혀있어
눈도 보이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피조차도 흐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머리 위 몇 척의 흑토와 굳은 얼음의 중압을 뚫고
그 영혼에 확실히 봄을 느끼고 있다.
나는 생생하게 방심에서 깨어났다
뜨거운 피가 내 가슴에 용솟음쳐 온다
내일은 어둡다, 모레도 어둡다
빛이 보이는 것은 저 멀리 저쪽이다.
형제들은 개구리처럼 아우성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먼 내일의 빛을
분명히 영혼으로 느낀다.
-「蛙がないてゐる」?
私は私の耳を疑った
けれど疑っている私の耳に
??して聞こえるではないか。
グ、グ、グ、グル、グル、グル、グル、
地上は堅氷に閉ざされているのに、
蛙が鳴いているのだ!!
光のささぬ闇の中で
氷の下に閉じこめられていて
目も見えまい、?も動くまい、血も流れまい。
しかも彼等は頭上幾尺の?土と堅氷の重?を透して
その魂にはっきりと春を感じているのだ。
私は生き生きと放心から?めた
熱い血潮が私の胸にたぎって?る
明日は暗い、あさっても暗い
光の見えるのはずっと遠い向うだ。
兄弟達は蛙のようにわめき叫んでいる
けれど私は遠い明日の光を
はっきりと魂に感じるのだ。
권위의 정점에 위치하는 국가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해방의 사상인 아나키즘을 추구하던 우에무라는 일본의 아나키즘 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국제적인 민중들의 연대에 의한 조선의 민중해방이라는 강렬한 의지를 이 시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마르크시즘에서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연대라는 것은 다분히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약소민족 국가를 해체 흡수 통합하거나 중앙집권에 의한 권력구조의 형태를 띠게 되는 부작용이 상존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했던 연대는 인간사회가 기본적으로 연대에 기초해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연대란 권위적이고 집권적인 구조에 의해 결정, 통제하는 대신에 직접행동이란 개념에서 보듯이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이 갖는 다는 뜻으로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하고 있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의 연대대상은, 일반적으로 민중, 대중, 노동자, 가난한 자 등 국가와 자본에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며, 권력자와 자본가는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에서는 아나키즘 사상에 의한 연대를 통한 조선민중의 해방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당시 점점 가혹해지는 일제의 식민통치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현실에 대한 침묵 또는 관념적 세계로의 도피를 추구하게 하였으며, 민중들은 절망과 절대적 궁핍 속에서 내일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머리 위 몇 척의 흑토와 굳은 얼음의 중압”과 같은 혹독한 탄압과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도 “그 영혼에 확실히 봄을 느끼고 있다.”, “일은 어둡다, 모레도 어둡다”, “빛이 보이는 것은 저 멀리 저쪽이다.”고 우에무라는 조선민중의 해방을 강렬히 원했으며 또한 확신했다.
1930년까지 서울에서 『조선과 만주』에서 활동을 하던 우에무라는,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 관계자들과 자주 연락과 모임을 가진 사실이 일제의 경찰에 알려져 체포당할 처지에 몰리지만,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선총독부의 경무국장이었던 나가모리오카 지로(長盛岡二?)가, 돌아가신 부친의 지인이었기에, 체포대신 조선에서의 퇴거를 당하게 되었다. 결국 1930년 4월 1년여의 조선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도쿄로 향한다.
-「조선을 떠나던 날」-
누가 나의 눈을 흐리게 하려는가
누가 나의 귀를 가리려 하는가
나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아시아의 맨 끝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부정을, 불의를, 위만을, 압살을-
그리고 그 폭풍우 속에서 비참하게도
짓밟혀가는 모든 인간애를
그걸 외면하듯 돌아서는
도망자라 생각지 마라
지금 이 반도의 남단에 서서
부딪쳐 솟구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지그시 참아내고 있다.
끓어오르는 나의 격정을
등 뒤로 느껴지는 천만의 피로 물든 눈동자의 외침을-
친구여! 눈으로 본 것을 어찌 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
-「朝鮮を去る日」-
誰が俺の目を曇らさうとするのか
誰が俺の耳を覆はうとするのか
俺は何も彼も良く知つてゐるのだ
此のアジアの突端に日?に行はれてゐる
不正を、不義を、?瞞を、?殺を-
そしてその嵐の中に?めにも
ふみにじられて行く愛情の生活の??を
それをか?わりもなく捨て去つて行く
旅人と思つて?れるな
今此の半島の南端に立つて
澎湃とした海を眺めながら、俺はぢつと堪えてゐる
湧き上つて?るおのれの激情に
背後に感じる千萬の血ににじんだ瞳の?倒に-
同胞よ、目で見たことが行はれずに居れるか
조선민중들에 의한 혁명과 그 해방을 고대하며, 갈망했던 우에무라 타이가 조선에서 추방되던 날의 심정이다. 조선에 첫발을 내 딛던 날과 마찬가지로 떠나던 날 역시 부둣가에 서서 조선인들을 향해 「동포(친구)」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조선체험을 통해 새롭게 깨닫게 된 조선민중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매일매일의 비참한「폭풍우」 속에서 “비참하게도 짓밟혀가는 모든 인간애”로 표현되는 일제에 의한 모든 범죄행위를, 그는 「부정」?「불의」?「위만」?「압살」이라는, 짧은 단어로 강력하게 규탄하고 있다.
그런 우에무라의 “끓어오르는 나의 격정”이 시 전체에 실감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조선의 민중을 버리고 떠나는 “외면하듯 돌아서는 도망자”가 아닌 것이다. 조선민중들과의 체험을 통해 일제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아무리 “눈을 흐리게 해도”, “귀를 가리려 해도” 자신은 그 “모든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런 “끓어오르는 나의 격정”과 그 안에서 신음하는 조선민중들의 “천만의 피로 물든 눈동자의 외침을”, “지금은 지그시 참아내”지만, 조선의 어두운 실상을 결코 잊지 않고 아니키스트로서 일제에 대한 부정과 저항운동에 뛰어들 것을 “어찌 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결심했다.
3. 결 론
우에무라 타이는 20대 젊은 나이에 약 1년간의 조선에서의 귀중한 체험을 통해 일제에 의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강한 분노를 느끼고 그 부조리한 사회를 타파하기 위한 방도로 아나키즘 사상을 적극 수용했다. 그 이후 전 생애에 걸쳐 투철한 아나키스트로서 시를 통해 권위적인 일제의 지배권력에 대항했던 시인이었다. 우에무라에게 있어서 조선에서의 체험은 그를 아나키스트 시인으로서 특징짓는데 절대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시의 주요 요소로 작용했다. 우에무라가 식민지 조선민중들에게 쏟은 우정과 신뢰는 상호부조를 특징으로 하는 아나키즘 사상을 바탕으로 통제와 권위를 거부하면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민중들과의 연대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선민중에의 깊은 관심은 강렬한 시를 통하여 조선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제에 대한 강력한 고발로 이어지고 나아가 조선민중의 해방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에무라가 아나키스트시인으로 가장 활달하게 활동하던 1930년대는 짧고 미약하나마 일본 아나키즘문학의 전성기라 할 정도로 마르크시즘 문학과 비견될 정도의 문학 활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아나키즘 계열의 시집『解放文化』,제2차『彈道』,『文學通信』을 그리고, 1935년에는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레이코(麗子)와 함께『詩行動』을 창간하는등 아나키즘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담당한다.
이후 마르크시즘으로부터는 허구적, 관념적, 타협적 문학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주도권은 마르크시즘으로 넘어가고, 쓰보이 시게지, 오카모토 준을 비롯한 많은 아나키스트 시인들이 마르크시즘으로 전향하고 만다. 이런 아나키즘의 쇠퇴기에도 우에무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아나키트로 일관했던 시인이었다.
우에무라 타이 시의 특징은 아나키즘의 상징인 반항감정과 권위부정의 정신을 사실적이고 직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소박하고, 획일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점이 시인으로서의 우에무라의 한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이야 말로 예술과 생활을 분리하는 순수예술을 거부하며,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예술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의 예술관을 추구했던 우에무라 타이의 시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에무라는 문학에 대한 기술보다는 작가자신이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자기혁명을 강조한다. 이런 정신혁명을 통한 작품활동이 그의 시를 직정적이며, 주관적이기까지 하게 한 것이다.
“일찍이 아나키스트였던 시인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나키스트인 시인은 셀 수 있을 정도 일 것이다. 우에무라 씨는 그 첫 째라 할 수 있는 시인이다. 우에무라씨가 아나키스트로서 생애 일관했다는 점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선열한 서정시를 계속 써 왔다는 사실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한 무카이 코(向井孝)의 우에무라 추도문은 아나키스트 시인으로서의 우에무라를 가장 짧고 명확하게 표현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동안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일본 아나키즘 문학, 아나키즘 시에 대한 깊은 연구가 이루어 져야 할 것이며 특히 조선민중과의 연대에 의해 일제에의 저항하고 했던 우에무라 타이및 그의 동료시인들에 대한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구승회외(1994)『아나키?환경?공동체』도서출판 모색
레프 톨스토이, 조윤정 옮김(2008)『국가는 폭력이다』달팽이 출판
박홍규(2004)『아나키즘 이야기』이학사
이호룡(2001)『한국의 아나키즘-사상편』지식산업사
相?尙夫(1974)『日本無政府共産黨』海燕書房
秋山?(2006)『秋山?著作集 第8卷 近代の 漂泊』,ぱる出版
秋山?(2006)『秋山?著作集 第11卷 アナキズム文學史』,ぱる出版
秋山?(1974)『アナキスト詩集』,海燕書房
植村諦(1947)『愛と憎しみの中で』,組合書店
植村諦(1932)『異邦人』,民謠レビュ?社
植村諦(1958)『詩とアナキズム』,國文社
植村諦(1980)『?魂歌』,?磁社
クロポトキン,川三四?外譯(1928)「靑年に訴ふ」,『クロポトキン全集』7卷, 春陽堂
豊島?志雄(1967)『豊島?志雄著作集 第六?(?筆?評論?他)』,未?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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