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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kkccdd@hanmail.net
작성일 2015-10-28 조회수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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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나키즘 예술론

아나키즘 예술론

 

크로포트킨의 예술론

 

제군들은 반드시 우리들에게 다가와, 피압박자의 전열에 참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와 장대와 생명 그것은 광명을 위해, 인류를 위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들의 편인 것을 제군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군들이 취해야 할 두가지 길이있다. 제군은 영구히 자신의 양심에 어지럽혀, 어느날 내가 모든 오락을 철저하게 향략하고 있는 동안, 그리고 사람들이 멍청해서, 자기를 그렇게 하는 동안 人道따위는 쓸데 없는 짓이다.고 방언하기까지 이를 것인가, 아니면 제군은 사회주의자의 전열에 서서, 사회의 안전한 변혁을 위해 그들과 함께 행동해야 할 것인가.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제군이 놓여있는 곳의 환경, 노동자를 짐승처럼 취급하는 환경을 버리고, 민중속으로 들러가라. 그러면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여러 나라들에서 특권계급과 피압박계급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곳에서나, 자본가의 지배권에 의해 과해진 노예제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정의와 평등을 기조로 해서 신사회의 기초를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 노동자계급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군들은 알 것이다.

 

제군의 펜과 제군의 화필과 제군의 조각끌과 제군의 사상을, 사회혁명에 도움이 되도록 가지고 와라. 제군의 유창한 문장으로, 제군의 인상깊은 그림으로, 압박자에게 대항하는 민중의 과감한 투쟁의 모습을 그려라.

 

우리가 사회혁명을 희망한다면,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에게 빵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저주스러운 사회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이 반역하는 것은 이런 사회적 불평등을 절멸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혁명이 모든 사람들에게 빵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오늘날 소수의 자들만이 점유하고 있는 오락을 우리들 모두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다. 모든 사람의 정신적능력을 발달시키는 시간의 여유와 가능성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빵이 보증 된 후에는, 시간의 여유를 획득한다는 것이 가장 중대한 목적이다.

 

우리들은, 인간은 음식물이외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아나키스트의 强固함은, 그것이 모든 인간의 재능과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있어, 무엇하나도 무시하지 않는 점이다.

 

문학과 과학은, 모든 금전상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오로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또한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공구(攻究)될 때, 비로소 인간을 발달시킬수 있는 노동중의 그 특이한 위치를 점유할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학,예술은 자유스러운 사람들에 의해 攻究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조건하에서만이, 그것들을 마비시키는 국가의, 자본의 그것으로부터, 부르주아적 비속의 멍에로부터, 그 자신을 해방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모든 국가지배와 마찬가지로, 특허 역시, 산업의 진보를 저해한다. 사상은 특허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특허권은 이론적으로, 절규되어야 할 부정이다. 또한 실제에 있어서도, 특허는 발명의 급속한 발달에 대해서 커다란 장해의 하나가 되는 결과를 불러 일으킨다.

발명의 정신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사상의 각성, 대담한 사상이다. 현대의 모든 교육은 이 대담한 사상을 쇠멸시키는 원인에 지나지 않는다.

 

영감(靈感)이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단지 위대한 사상만이, 예술에 영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상에 의하면, 예술은 창조와 동의어이다. 예술은 전인미발지에 착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드물게,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직업적 예술가는

새로운 지평선을 감질하기에는, 너무나도 위선적이다.

또한 이 영감이란 서적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영감이란 실생활에서 추출 하는 것이다.

 

박물관은 일종의 골동품이다.

 

그리이스의 조각가가 대리석을 조각할 때는, 그는 그 도시의 정신과 심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감정도, 광영있는 그 모든 정통도, 작품속에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단결한 도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사상의 공유라하는 것도 이미 없어졌다. 도시는, 서로 모르는 인간들과, 또는 타인을 희생시켜 자신만 부유해지려는 것 외에는 어떤 공통의 이해가 없는 인간들의 우연한 집합이다. 조국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적인 은행가와, 넝마주이가 어떻게 조국을 공유할수 있단 말인다.

 

예술이란 공동으로 보지(保持)하는 이상에서 영감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군들은 노동에서 돌아오는 길에, 석양을 보아야한다. 제군은, 그 멋진 경치를 자신의 눈으로 보려면 농민들 사이의 한명의 농민이 되어야 한다.

고기잡는 시를 이해하려면, 제군은 낯이나 밤이나, 어부와 함께 해상에 나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자기가 고기를 잡고, 파도와 싸우며, 폭풍을 만나고, 거친 노동후에, 고기가 가득찬 무거운 어망을 끄는 즐거움과, 그것이 텅비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실망감 역시 경험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힘을 이해하여,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표현하기에는, 제군은 공장안에서, 창조적인 노동의 고통과 괘감을 알고, 용광로가 타오르는 오염에서 금속을 단련하고, 기계의 생명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민중의 감정을 묘사하려면, 제군은, 사실, 민중의 감정 그것에 침투해있지 않으면 안된다.ki

예술작품은 생활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활 그것은 예술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빵의 쟁취)

 

우리들의 노동에 의해 생활을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들을 지도해 주기 위해 필요하다, 라는 것챁은 구실로, 유한자 계급의 존재를 허용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동안에는, 이 유한자들은 항상 사회일반의 도덕성에 대한 흑사병의 소굴이 될 것이다. 그 생애중에, 새로운 만족에서 새로운 만족을 추구하며 걸어다니는 유한한, 퇴폐한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연대성의 감정등을, 존재의 토대에서 근본적으로 전멸시키고, 그리고 매일의 생활에서는 하등한 자기만족을 중대시하면서 추구한다. 이런 종류의 인간은 항상 살벌한 도락벽(道樂癖)에 의해 진퇴한다. 그들 주위의 모든 것에 흑사병균을 전염시킨다. 지갑과 동물적인 관능향락에 의해, 그는 부인도, 어린아이도 타락시킨다. 그는 또한 예술과, 신문을 타락시킨다. 아니 모든 것을 타락시킨다. 그는 또한 민중의 봏로자를 팔아버린다. 그 향략의 유일의 원천인 지갑을 잃거버릴것 같은 때에는, 자신이 자살하기에는 너무나도 겁이나 할수 없으므로, 자기나라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것을 하게 된다.

 

후에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사회생활에 들어갈 때에는, 그들은 사회와 독서에 의해, 물방울이 돌을 뚫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일, 매시간, 끊임없이 이(법률에 대한)편견이 인상지어진다. 역사책, 정치학, 사회경제서적등 그 어느 것이나 모두 법률에 대한 존경의 생각을 집어 넣어준다. 자연과학조차도, 신학과 강권설에서 받아들인 잘못된 표혀넙으로, 항상 법률에의 존경의 생각을 우리들 가슴속에 확보해 두려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들의 오성을 흐트려트리려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지식은 끊임없이 안개속에 휩싸여, 항상 법률에 대한 존경이 유지되는 것이다. 신문도 같은 역할에 노력한다. 신문에는, 법률에 대한 존경을 선전하고 있지 않은 기사는 하나도 없다 해도 좋다. 그러나 그곳에서 조차도, 2,3면 기사는 매일처럼 법률의 무력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률에 대한 굴종이라는 것은 일종의 도덕이 되었다.

 

 

대담함은 이미 문학이랑, 희곡이랑, 음악에도 이르렀다. 마음이 제군들에게 말하는 대로, 대담하게 말하라, 써라, 그려라, 작곡하라!

 

노동자는 어떤 일정의 기계에 대해 생애중 노예가 된다.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가 나쁘기 때문으로, 기계 그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과도한 노동과 온생이 같은 것을 반복하는 단조함은, 손으로 하는 것일지라도, 간단한 기구로 하는 일일지라도, 기계가 하는 것이라도, 그 폐해는 변함이 없다.

 

아나키즘이 자본주의및 국가의 쇠사슬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려하는 방향의 현대사상속에서 이루고 있는 사업과, 어떻게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는가, 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가정적노예제와, 인간의 개성의 극단한 무시와, 아버지의 전제와, 아내와 자식의 위선적복종등의 풍속적 기관이, 마치 움직일 수 없는 그물망처럼 발달했다.

 

니힐리즘은 무엇보다도 우선 문명인의 습관적 허위라 할 것에 도전했다. 절대적성실이라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성실이란 이름아래, 그들자신의 이성이 인정할수 없는 미신과, 편견과, 풍속과. 관습을, 그들 자신들이 타기하고, 또한 타인에게도 그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성의 권위이왜의 어떤 권위의 앞에서도 무릎 꿇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제도와 관습을, 분석, 해부하여, 모든 종류의, 다소라도 가장한 궤변에 반항했다.

 

크로포트킨에 있어서의 예술적 소질은, 하나는 그 혈통에서, 다른 하나는 그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군은 그 양심을 침묵시켜 스스로 노예로 끝나 버릴 것인가. 혹은 옛 관습을 부수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 모든 부정 불의를 절멸하기 위해, 우리들과 함께 행동하는 사람이 될것인가.

 

제군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하는 성화는 단순히 연기만 뿜고 있는 심지와 같은 것으로, 제군이 이 성화를 여전히 종전처럼 계속한다면, 제군의 예술은 이윽고 야점상인의 장식이나, 사구려 신문의 3류소설과 같은 것으로 타락할 것이다

.

하지만 제군의 심장의 고동이 실로 인류의 그것과 동음을 울린다면, 또한 참된 시인처럼 제군이 생명을 듣는 귀를 갖게 된다면, 제군의 주위에 파도치는 고통의 격랑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과, 광갱(鑛坑)에 쌓여잇는 시신과, 성채(城砦)아래 누어있는 시체와, 시베리아의 눈속과 열대의 고도해변에 묻혀지려는 방랑자 일단과, 도한 용감과 비겁과, 고상한 결의와 저급한 교활과의 투쟁에, 패자는 고통에 울부짖고, 승자는 편안하게 웃는, 이런 절망의 분투를 보고, 제군은 도저히 손을 끼고 방관할 수 없이, 제군은 스스로, 피압박자의 열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미와 장관과 생명은, 광명과 인도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의 편이 되는 것을 제군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제군은 제군의 지위를 버리고, 항상 제군이 금수시하는 평민들 속으로 들어가 봐라.

민중속으로 들어가, 진리와 정의와 평등을 위해 부단한 싸움을 하라. 청년으로서 이것보다도 그 어떤 귀한 어떤 것 생애에 바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이유로, 재래의 예술의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것을 보았다. 예술은 모두 어용예술로,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착취, 강박하는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보았다.

     일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몰을 본 일이 있어야 한다. 농부의 멋을 눈 속에 담아 두기 위해서는 그들과 나란히 농부가 되어 본 적이 있어야만 한다. 고기잡이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밤낮의 모든 시간을 어부와 함께 바다에 나가서 당신 스스로 고기를 잡아 보고, 파도와 싸우고, 폭풍우를 만나고, 그리고 거친 노동 후에 무거운 어망을 들어올리는 즐거움 또는 그것이 비어 있는 것을 본 때에 실망을 경험해 봐야만 한다. 인간의 힘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고 그것을 예술 작품에 표현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공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창조적 노동의 피로와 즐거움을 알고, 용광로의 강렬한 불꽃으로 쇠를 벼리고, 기계에서 생명을 느껴본 적이 있어야만 한다. 요컨대, -당신은 민중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 투신해야만 한다.

 

크로포트킨의 예술론은 세 가지 발전단계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예술 그것을 전체로서 부정했던 시기이다. 명백한 예술 부정론이다.

 

권위에 대한 부정의으로서의 예술

크로포트킨은 모든 예술의 부정, 배격하게 되었다.,

예술은 모두 어용예술로,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착취, 강박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제군은 제군의 선인이 영감한 성화가, 오늘날 제군의 예술에서는 전혀 결핍되어 있어, 예술이 단지 평범용렬(平凡庸劣)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가.

자연의 샘물을 맛보는 듯한 환희에 의해 만들어진 문예부흥시대의 모든 걸작은, 지금 시대의 예술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저술가, 시인, 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위선자 일대는, 눈에 눈물을 흘리며, 민중의 궁상을 떠들어 대지만, 우리들의 운동을 돕기 위해, 아직 우리들 쪽으로 온 적이 없다.

두 번째는 기성의 예술은 어째서 타락했는가? 영감은 어째서 예술가의 서재에서 생겨나지 않게 되었는가.

크로포트킨의 경제이론을 이루는 특징의 하나는 분업의 부정에 있다. 분업을 자본주의제도의 한 기둥으로 보고 있느 것이다. 현대의 예술, 과학, 수공업 그 외의 상업등 모든 것은 이 분업에 의해 위축하고,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분업대신에 集業制度의 채용을 주장한다. 집업- 근육노동과 지식노동의 융화, 일치뿐만이 아니라, 각 노동부분에 있어서도, 각인이 교차해서 노동에 종사하는 제도-는 현재의 물적, 심적인 모든 아계를 광정할수 있을 것이다.

분업제도- 어느 전업이, 반드시 다른 어떤 다른 전업과의 사이에 지배와 피지배와의 관계가 생긴다. 지식자와 노동자의 지배관계가 생긴다. 조직자와 실행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식자와 노동자, 이런 양자간의 계급적 대립은, 분업제도에 의해 비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중세예술과 새로운 예술

유럽의 도처에 흩어져 있는 당시의 공회당과, 무수한 교회와 탑과 문등의 장식과 그 외 모든 건축을 상세히 보면, 더더욱 감탄을 금할수 없게 된다. 예술의 조국인 이탈리아는 물론, 전유럽기 이런 종류의 건축물로 덮혀있다. 모든 예술가운데에서도, 특히 사회적예술인 건축이 그렇게 최고의 발달을 이루었던 것은, 그 자신이 상당히 깊은 의미이다. 이 예술이 이정도까지 이룩할수 있었던 것은, 상당히 뛰어난 사회적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세의 건축은, 그리이스의 예술과 마찬가지로, 도시생활에 의해 생겨난 우애와 단결과의 사상에서 솓아난 것이다. 거기에는 대담한 투쟁과 승리를 거치지 않으면 얻을수 없는, 대담함이 있다. 도시의 모든 생활에 넘쳐나는 건강함이 나타나있다.

         

 

--종교의 해악에 대하여----

이와 같은 선입견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면, 그 근원은 종교 속에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될 것이다. 요술사, 기우사, 샤머니즘의 주사, 내려와서는 앗시리아의 이집트의 승려, 그 후는 크리그트교의 목사등의 비밀결사는 항상 일반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믿게끔 하려고 노력해 왔다. <세계는 죄 속에 파 묻혀>있어 주사나 요술사, 성자나 목사들에 의한 인자한 개입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악의 힘이 인간을 사로잡는 것을 막을수 있었고, 그들만이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하여 온갖 불행을 인간의 머리 위에 퍼붓는 일이 없도록 마신을 달랠수 있다고.

원시 그리스크교는 확실히 성직자에 관한 이러한 선입견을 약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크리스크 교회는<영원의 불>에 대한 복음의 말씀에 의거함으로써 도리어 그것을 강화하고 말았다.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죽을 자로서 이 세상에 강림했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관념도 역시 이러한 견해를 확인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후<거룩한 종교재판소>에 대하여 그 희생자들에게 극히 잔인한 고문을 가하는 것을 허락하고 천천히 회개할 시간의 여유를 줌으로써 저승에서의 영겁의 고통을 면하게 한다는 구실 아래 희생자들을 화형에 처하여 서서히 죽어 가도록 하는 것을 허용했던 것이다. 더욱이 카톨릭 교회만이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원리에 충실한 모든 그리스도교회는 <>투성이로 된 인간들을 교정하기 위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새로운 고문과 공포를 고안해 내었다.

 

 

 

아나키즘 시의 미학과 상징

 

 

1992년의 베를린 노동자회의의 사상

 

1. 국가나 정당이 현재의 경제?노동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나아가 국가나 노동임금 체제 두 가지를 폐지하기 위해선 자유연합 또는 자유노조를 구성?실천해야 된다.   

2.경제사회적 독점구조는 농민?산업노동자?지식노동자 모두의 자유롭고 자주적인 연대에 의해서만 폐기될 수 있다.

3.땅과 자본의 공동소유에 의해 독립된 자주적 생산과 분배를 실천해야 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국가나 정당이 아닌 사람들 스스로 운용할 수 있느 경제구조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4. 모든지역. 지방, 국제적 연대에 근거한 자유스러운 동의에 의해 공동이익을 추구하고 연합된 힘으로 개인의 자율과 독립을 가져와야 한다.   

5.인종?국가를 넘어선 국제적 연대로 각자의 삶을 향상시키고 자유로운 규율하에서 공동체 이념을 강화한다.   

6.정부의 횡포, 재벌의 독점적 경제행위를 막기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한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화하기 위한 노력이다. 국가나 정당을 배제하려는 이유가 거이게 있고 경제활동을 강화시키되 개인의 기회균등을 잃지 않기 위해 경제행위 양식을 상호동의에 두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서구의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라는 것이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제국주의적 추상의식에 사로잡혀 법앞에 평등 또는 자신만을 위한 권리식으로 잘못된 보편주의, 잘못된 개인주의에 의해 강화되어 왔다면, 아나키즘은 그러한 법을 전제로 하지 않는 대신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법인가를 지속적으로 묻는다.

 

아나키즘이 우리에게 주는 미학은 철저한 개인의 자유에서 오는 열린 미학이다 더 나아가 독자나 감상자들이 스스로 상징을 발견하는 자유의 미학이다.

 

아나키즘 미학자들에 있어서 시의 상징은 단어나 문장의 차원에서 짜 맞추어지는 것이 아닌, 보다 넓은 의미에서 시적 대상과 현실의 관련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므로 시를 쓰는 자유와 읽는 자유를 확대시키게 된다.

로텐버그가 스스로 개인적인 선언이라 부른 선언과 꼴라쥬느느 상징과 관련해 문학작품과 대상사이를 넘나드는 미학 하나를 보여준다.

1.시와 실제 삶 둘 다가 실험 도는 경험대상이 되어야 한다.

2.시 창작행위는 인간자유의 반만을 소모할 뿐이다.

3.시를 쓴다는 것은 정신적정치적 억압에서부터 해방되고자 함이며, 상징에 묶인 시는 인간자체를 속박시킨다.

4.인간의 권리 찾기야 말로 시의 본질이다.

5.해방의 시란 신비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언어적이거나 구조적이 되어도 안되며, 시인 자신의 일상적 삶과 분리되어서도 안된다. 인간성과 일상적인 삶 자체를 침범하는 크고 작은 제도를 뜯어내야 한다.

여기서 4의 시의 본질이란 말은 아나키즘의 본질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아나키즘 시인이 활용하는 방법은 평범한 일상어의 사용, 이야기, 즉 내용을 담고 있을 것, 대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것, 사람이나 지방이름을 그대로 밝히는 것이다. 그들은 언어적으로 비틀린 상징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피하기 위해 대상이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줄수 있는 기법을 발달시켜 왔다.

 

아나키즘 예술론

아나키즘은 권력에 의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반대하고, 권력=국가의 폐지를 요구하며, 경제적인 불평등이 없는 공동체를 이상으로 추구한다. 예술과 아나키즘이 결부되기 쉬운 것은 예술이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고, 아나키즘이 어떤 권위로부터도 해방된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예술행위란 모든 인간이 갖는 본능적인 권리라고 보기 때문에 작품 자체보다는 그 창조의 행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창조란 일상생활과 격리된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생활과 일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과 생활을 분리하는 소위 순수예술관을 아나키즘은 거부한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다. 이러한 아나키즘의 예술관은 바로 오늘의 민중음악활동, 민중연극활동, 민중벽화운동, 민중영화 운동등을 전형적인 민중예술로 인정한다.

 

아나키즘 예술론의 기본구조

권위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예술

프르동은 1865년의 예술의 이론과 그 사회적 목적에 관하여에서 예술가를 추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나키즘은 과거의 대예술이 민중의 예속상태를 영원히 가능하게 한다는 이유에서 반대한다. 그리고 미래의 예술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것이어야 하고, 인간이 국가등의 강제권을 갖는 제도의 간섭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크로포트킨은 그의 저서에서 - 예술은 모두 어용예술로,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착취, 강박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제군은 제군의 선인이 영감한 성화가, 오늘날 제군의 예술에서는 전혀 결핍되어 있어, 예술이 단지 평범용렬(平凡庸劣)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가.

자연의 샘물을 맛보는 듯한 환희에 의해 만들어진 문예부흥시대의 모든 걸작은, 지금 시대의 예술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저술가, 시인, 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위선자 일대는, 눈에 눈물을 흘리며, 민중의 궁상을 떠들어 대지만, 우리들의 운동을 돕기 위해, 아직 우리들 쪽으로 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예술에 관한 모든 권위의 폐기를 주장하지도, 예술가를 무조건 배척하지도 않는다.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자유롭게 창조하느 예술은 이성적인 범위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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