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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과 무교회
-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을 중심으로
구 미 정(숭실대 외래교수)
1. 들어가는 말 - 국가를 믿은 ‘죄’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새삼 ‘국가’의 의미를 되묻게 하는 계기였다. 국가는 운명이라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국적’을 부여받고, ‘국민’의 일원이 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해오던 습성에 제동이 걸렸다. 여전히 국가를 ‘종교’마냥 맹신하는 사람이 있기(많기)는 하지만, 그 사건을 “국가가 국민들을 산 채로 수장시킨” “명백한 살인”사건으로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감언이설도 국가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기에 역부족이다.
한 시인은 세월호 참사를 당하여 한때 국가를 믿었던 자신의 순진함이야말로 ‘죄’라고 고백한다. “나는 그대들을 잘 모릅니다/ …… / 다만 한때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이었습니다/ 나는 나이 많은 시인이고 그대들은/ 치킨이나 피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날면 하늘이 모자라는 새파란 국민이었습니다/ …… / 그대들이 죄 없이 가라앉는 동안/ 부자들은 돈을 세고 /올드보이들은 표를 계산하고/ 이 나라는 그대들의 주검을 세는 게 일이었습니다/ …… 그대들에게/ 이 나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하면/ 나 또한 그런 나라의 금수만도 못한 시인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전제한 뒤,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다. 문제는 이 나라에서 태어나 이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다고 하여 모두가 ‘국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가는 ‘국민’만 보호하지, ‘비국민’까지 보호할 의무가 없다. ‘비국민’은 국가의 관심범위 밖이다. 예컨대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국민’이라면, 국가가 저들을 산 채로 수장시키는 짓 따위는 감히 하지 못했을 테다. 또 500일이 넘도록 진실 규명을 요구하며 거리를 배회하는 유가족들이 ‘국민’이라면, 국가가 저토록 그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억지소리로 모욕하며 침을 뱉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다.
국가는 항시 국민과 비국민을 이항대립구도로 나누어 관리하고 지배해 왔다. 국가의 ‘서비스’ 대상이 되는 국민이란 어디까지나 ‘선별된’ 국민, 곧 자본권력을 장악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잘난 이들’이지, 가난하고 무지하여 국가로부터 복지혜택‘이나’ 바라는 ‘못난이들’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가의 본질이 ‘과잉국가’라는 점이다. 국가는 이른바 ‘국가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에게 제동을 거는 유일한 장치인 ‘헌법’조차 간단히 무시하며 언제든지 초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어쩌면 불행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에만 자신의 역할을 한정짓는 국가란 다만 ‘이데아’일 뿐,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는 항상 과잉국가라는 사실 말이다.
큰 틀에서 인류 역사가 인간 자유의 확대를 도모하고 실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다면,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는커녕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도착(倒錯) 현상을 빈번히 경험하는 이 때, 아나키즘(Anarchism)에서 지혜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긴요하고도 지당하겠다. 가장 단순한 정의로 아나키즘은 “반(反)권력, 무(無)지배를 관철하는 철두철미한 인간(個我)사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나키즘의 인간형을 구현한 인물로 예수만한 이도 없다. 예수는 당시 유대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맞서 투쟁하였는데, 그의 눈에 이 타락은 유대교의 가르침이 인간을 강제하는 규율로 바뀌고 유대교의 의례가 인간을 속박하는 제도로 바뀐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자유로이 신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종교적 실천이 타율(他律)에 물들게 되었다. 이처럼 도착된 종교현상을 원상회복시키는 게 예수의 투쟁이었다.
헤겔의 말로 하면, “예수는 사람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데서 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이 신적인 가치라고 생각했다.” 이때의 도덕성은 당연히 개인의 자유와 자율에 기반한 것으로 어떤 외적 권위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 하여 예수는 자신의 인격을 신적인 권위와 같은 위치에 자리 잡게 하는 방식으로 유대교와 날카롭게 대립했다는 것이 헤겔의 설명이다. 말하자면 헤겔은 기독교야말로 자유의 이념에 기원을 둔다고 보았다.
이 글은 아나키즘과 기독교, 그 중에서도 ‘무교회(無敎會)’를 조망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난 아나키즘 요소들을 찾아보는 작업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기독교 역사에서 이러한 특징들이 거세된 맥락을 짚어보고, 일제강점기 때 이 땅에 출현한 무교회와 아나키즘의 관계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 대화는 양자를 더욱 건강히, 풍성히 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본다.
2. 아나키스트 예수
복음서가 소개하는 예수의 첫 행적은 광야에서 40일 간 고행하다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것이다.(마태복음 4:1-11; 누가복음 4:1-13) 마귀의 첫 시험은 ‘밥’과 관련이 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예수에게 마귀가 다가와 유혹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이에 예수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는 대답으로 간단히 시험을 물리친다. 그러자 마귀는 다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유혹한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이번에도 예수는 성경을 인용하며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 섬겨라’ 하였다.”는 말로 마귀를 물리친다.
이때 인용된 성경은 모두 구약성서로, 그 중에서도 모세의 가르침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밥과 관련해서는 예수가 밥의 가치를 전면부정하지 않은 채 다만 사람이 ‘밥만 먹고’ 혹은 ‘밥 때문에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천명하는 반면에, 국가권력과 관련해서는 이를 하나님과 대립된 것,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파악하며 자신은 결코 사탄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선을 긋는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은 바로 그 장면 뒤에 예수의 첫 설교를 배치했는데, 이 또한 구약성서에 바탕을 둔 것이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복음 4:18-19)
여기 나오는 ‘기쁜 소식’(福音)은 그리스어로 ‘유앙겔리온’(euangelion)이다. 본래 신약성서가 성립된 1세기 로마제국 시대에 이 단어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이나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복음서 저자들은 로마제국의 통치와 연관된 ‘유앙겔리온’을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전유(專有)했다. 바로 예수의 등극, 곧 화려하고 웅장한 로마 황실에서 태어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신의 아들이 아니요 초라하고 볼품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가 참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예수는 아우구스투스의 통치와 전혀 다른 통치를 선보일 텐데, 그 나라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Basileia tou theou)다. 이 용어는 명백히 로마제국(Basileia ton romaion)을 겨냥한 대항개념임에 틀림없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마태복음 20:25-28)
로마 제국이 출현하기 이전, 강대국들의 잇단 침략전쟁과 이에 따른 식민지 경험으로 유대 민족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유대 민족만이 아니다. 지중해 연안의 약소국들이 다 그랬다. 『다니엘서』는 그 시대를 위로하는 책이다. 저자 자신이 책을 쓸 당시인 기원전 160년대 초 시리아의 상황 대신에 그보다 300년 전 가상적인 메소포타미아의 상황 속에서 살았던 다니엘이라는 유대인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강대국에 포로로 끌려가 거기서 당하는 치욕과 고난, 이를테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거나 풀무 불에 던져지는 따위의 고통을 유대 민족 전체의 고통으로 형상화하면서, 네 청년이 그 고난의 시기를 신앙의 힘으로 잘 견뎌낸 것처럼 유대 민족도 그럴 수 있기를 희구하는 내용이 핵심 골자다.
특히 7장에 보면, 그동안 유대 민족이 겪었던 식민지배의 경험이 네 마리 짐승들에 빗대어 표현되어 있는 게 흥미롭다. 먼저 등장하는 ‘사자’는 바빌로니아 제국이다. 유다 나라를 멸망시켜 디아스포라로 이끈 장본인이다. 두 번째 나오는 ‘곰’은 메대 제국이고, 세 번째의 ‘표범’은 페르시아 제국이며, 네 번째의 ‘괴물’은 마케도니아 제국이다. 이 네 번째 제국은 앞의 세 제국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무섭고 흉악한데, 알렉산더 대왕이 만든 마케도니아 창병부대를 바라보는 약소국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 지역을 이처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제국주의적 침략이 일찍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처절한 식민지배의 경험 속에서 유다 민족은 ‘인자’를 고대했다. 앞선 제국들의 식민 통치를 심판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어줄 구원자 말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메시아(Messiah) 대망사상’이라고 부른다. 메시아가 히브리어라면, 그 말의 그리스어 번역은 ‘그리스도’(Christos)다. 언젠가는 구세주(救世主)가 나타나, 그간 겪었던 ‘짐승들의 통치’ 말고 반드시 인간다운 통치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지중해 세계에 팽배했는데, 이런 지도자상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인자’(人子)다.
예수가 태어날 무렵, 그리스 공화정을 끝내고 로마 제국을 연 최초의 황제 옥타비아누스(BC 63-AD 14)가 스스로를 ‘아우구스투스 사바스토스’(Augustus Savastos)라고 칭한 것은 이러한 민심을 읽었다는 증거다. 그는 자신이 지중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준(Pax Romana) 구세주(Savastos)로, 헌법보다 위에 있는 ‘지존무상’의 통치자(Augustus)라고 선포하며 그러한 칭호를 제정했다. 예수가 공생애에 들어섰을 무렵 로마 황제는 옥타비아누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BC 42-AD 37)였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호수의 명칭도 ‘디베랴’로 바꾸고, 호수 서쪽에 ‘디베랴’ 도시를 건설한 일은 유명한 에피소드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조명하면, 그 자체가 불온하지 않을 수 없다. 현존질서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든다. 예수의 혁명적인 가르침의 알짬인 ‘산상수훈’(山上垂訓)에 잘 나타나 있다. 현존질서에서는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등등이 불운하거나 불행한 사람, 게으르거나 무능력한 사람으로 폄훼되지만, 예수가 열어젖힌 새로운 질서에서는 이들이야말로 ‘복 있는 사람’으로 부상된다.(누가복음 6:20-21; 마태복음 5:1-12) 반전(反轉)도 이런 반전이 없다.
아나키스트로서 예수의 면모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마가복음 12:17)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이 나온 문맥은 ‘그들’이 예수를 책잡으려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예수에게 보내어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가복음 12:14) 물은 게 계기다. 그들이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교권주의자들이다. 평소라면 앙숙이었을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도 악을 도모하는 일에서는 갑자기 ‘절친’인 척 손을 잡는다. 이에 예수는 데나리온(로마 은전) 한 닢을 가져오라 하더니, 그 동전에 새겨진 초상이 누구의 것이냐 묻는다. 당시 로마 주화에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것은 그 주화의 소유권이 황제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황제의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것 말고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땅과 땅 위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신명기 10:14) 심지어 돈은 “일만 악의 뿌리”(디모데전서 6:10)로서 ‘칼’과 결합되기 일쑤이니, “칼을 쓰는 자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복음 26:52)는 예수의 말은 로마 권력에 대한 저주요 심판이나 마찬가지겠다. 예수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지, 다른 맥락과 뒤섞이면 안 된다.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전부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은 국가권력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표시일 뿐, 다른 의미가 아니다. 이 여인의 ‘계시적’ 행동이 십자가를 지기로 한 예수의 결단을 지지하고 고무했음은 물론이다.
예수는 세속의 어떤 권력이나 권위도 용인하지 않았다. 당대의 종교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되어 어떻게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고 있는지 버젓이 보았기에, 그 자신이 신성모독 혐의로 불법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침묵은 재판절차에 묵묵히 복종하는 이의 태도로 볼 수 없다. 불의한 재판절차에 대한 적극적 항의요, 불의를 일삼는 종교적·정치적 권위에 대한 전적 부정의 의미다.
예수 사후,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뜻을 철저히 받들었다. 예수의 가르침, 곧 ‘복음’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사도행전 2장 44-45절)
이른바 초대교회의 정체를 ‘기독교 마르크시즘’로 설명하는 이도 더러 있지만, 차라리 ‘기독교 아나키즘’이 더 적절할 것이다. 주로 정치적 지배에 경도된 마르크시즘과 달리 아나키즘은 모든 영역의 지배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하여 마르크시즘과 아나키즘이 모두 프랑스 혁명기에 출현하였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음에도, 전자의 기본적 파토스가 평등이며 그 출발점이 사회인 데 반해, 후자의 파토스는 자유이며 그 출발점은 개인이라는 차이 인식이 상당히 중요하다. 아무리 ‘공동의 복지’를 위한다는 고상한 명분이라도 그것이 하나의 인격을 짓밟는 일이라면 이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나키즘의 대의라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둔 채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분투하는 목자-예수야말로 아나키스트의 원형인 것이다.
3. 김교신과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 불온사상으로 낙인찍혀 금기시되어 있던 시절,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가 보지(保持)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순교를 불사하며 저항했다. 그러나 자기들의 신앙이 로마제국의 국교라는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자, 갑자기 이전의 신념을 철회하고 일체의 ‘다른’ 신앙과 사상에 대하여 규제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헤겔의 용어에 기대면, 기독교는 예수가 맞서 투쟁하였던 바로 그 “실정적(實定的) 신앙”의 자리를 꿰차는 반동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예수와 아나키즘 혹은 초기 기독교와 아나키즘의 연결고리는 쉬이 찾아볼 수 있으나, 제도종교 혹은 권력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도리어 아나키즘의 주적(主敵)이 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혹자는 기독교를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으로 구분하여, 실정적 신앙으로 둔갑한 것은 가톨릭일 뿐, 프로테스탄티즘, 곧 개신교는 그에 항거하기 위해 나왔으므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교황의 자리에 목사가 올라서는 이율배반을 낳고 말았다. 해서 바쿠닌(Mikhail Bakunin) 같은 무신론적 아나키스트가 ‘신은 악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은 것도 충분히 일리 있는 ‘반항’이다.
‘무교회주의’는, 한 마디로, 미완의 종교개혁을 더욱 철저화 하기 위해 대두되었다. 한데 얼핏 듣기에 ‘무교회주의’는 그 어감이 상당히 부정적이다. 마치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 옮긴 번역용어가 ‘정부를 타도하겠다는 발상’ 쯤으로 들리는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아나키즘을 번역하면서 무정부주의라거나 반민주주의 혹은 비권위주의 등, ‘무’(無), ‘반’(反), ‘비’(非) 따위의 부정적인 접두사를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박홍규의 지적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가 생각하는 아나키즘은 ‘자유·자치·자연’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된다. ‘자유롭게, 자치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나키즘의 바른 이해란다.
아나키즘과 무교회가 이 땅에서 처음 출현한 시기가 모두 1920년대라는 발견도 새롭다. 무교회주의는 원래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가 주창한 것으로, 그의 제자인 여섯 명의 조선 청년들, 곧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유석동·양인성에 의해 1927년 조선에서 첫 선을 보였다. 이들이 우리도 한번 가장 ‘조선적’이면서 가장 ‘기독교적인’ 신앙공동체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게 한국 무교회의 시작이다.
1920년대는 일본 식민통치 세력이 통치전략을 ‘문화통치’로 바꾸고 기독교의 비정치화를 획책하던 시기였다. 조선총독부의 3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19-1927 재직)가 파란 눈의 선교사들을 모셔놓고 이른바 ‘영적인 사업’에만 몰두하시라 권고했을 때, 정작 속내는 따로 있었다. 정치적인 문제에서 손을 떼라는 뜻이었다. 이러한 상부의 지령에 순응하여 당시 제도교회들은 외래에서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과 날카로운 단절을 도모하는 한편, 무교회주의 역시 일본에서 수입된 불온사상이라 매도하며 자신들의 ‘친일’(親日)을 은폐해 나갔다. 무교회에 대한 오해와 공격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기는커녕 확대재생산되자, 할 수 없이 김교신(金敎臣, 1901- 1945)이 입을 열었다. 한국 무교회의 창립멤버 중 ‘리더’로, 이들이 발간하던 월간잡지 『성서조선』의 주필을 맡은 이다.
우리에게 무교회를 논하는 이 중에는 우리가 우치무라 선생에게서 무교회주의를 전공한 사람인 줄 아나 이는 대단한 오인(誤認)이다. 근래에 공산당 노국(露國-러시아를 이름)에서 훈육받은 청년들이 그 주의를 선전할 사명을 띠고 월경(越境)하거나 혹은 군관학교 교육받은 청년들이 침입하여 모종의 운동에 헌신한다는 보도에 놀란 경험을 가진 인사들은 우리의 무교회도 곧 그렇게 추상하고야 만다. 그러나 우리가 10년에 걸쳐 우치무라 선생에게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경’이었다. ‘복음’이었다. 설령 우치무라 선생의 내심에는 무교회주의란 것을 건설하며 고취하려는 심산이 있었다 할지라도 내가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서의 진리’였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에 관한 왈가왈부의 변론을 당할 때는 우리는 대개 유구무언하니, 이는 우리가 전공한 부문이 아닌데 저편에서는 훨씬 열정적으로 공구(攻究)한 문제인 듯이 보이는 까닭이다.
김교신은 ‘무교회주의’에서 ‘주의’가 붙는 것에 불편해한다. ‘복음주의’와 ‘복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맹목적 기독교인들이 허다한 오늘, 새삼 빛나는 지성이 아닐 수 없다. 김교신의 목소리는 마치 자기를 어느 ‘주의’(ism)에도 가두지 말라고 항변하는 것 같다. ‘주의’는 닫힌 생각이며 굳어진 교의로, 살아 있는 진리를 도리어 화석화한다. 그러니 자기를 무교회‘주의자’라고 단정하여 부르지 말란다. 자기는 그저 자기일 뿐이란다. “영웅이 못 되어도 ‘나는 나’요, 신학설이 변천하여도 ‘나는 나’다. …… 무교회를 논(論)하든지 신앙을 의(議)하든지 우선 ‘나는 나’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할 일이다.” 말하자면 아무 ‘주의’, 모든 ‘주의들’에 끊임없이 저항(protest)하는 정신이야말로 무교회의 알짬이라는 선언이다. 이어지는 김교신의 변(辯)을 더 들어보자.
무교회주의는 기성교회를 공격하는 것이 본연의 사명이라고 하나, 나의 무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다. 현금 조선기독교계의 쌍벽이라고 할 만한 장감(長監-장로교와 감리교) 양교파는 적극단 문제 발생 이래로 자멸을 목표로 분쟁 또 분쟁이요, 다음 가는 성결교파는 성결치 못한 문제로 탈퇴성명 또는 법정고발로써 이 역시 자멸할 때까지 상격(相擊-서로 갈등함)할 것이다. 무슨 독심(毒心-독한 마음)으로써 이에 일격을 가하랴. 교회 내에 경애할 만한 성도가 존재함을 부인함이 아니나 교회 전체로서 볼 때에 그 정리(整理)와 부흥에 희망을 두지 못함은 현 교회 내의 두령(頭領)들의 심리와 일반이다. 그러므로 교회 개혁 운운의 일체의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성서의 진리를 배우며 자신을 초달쳐서 그리스도의 족적을 따르려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래도 무교회주의라고 부르고 싶거든 부르라.
1930년대의 한국교회 지형도는 이렇게 복잡했다. 밖에서는 3·1운동 이후 돌연 ‘순수 신앙’을 부르짖으며 현실에 안주하는 기독교를 향해 맹렬한 비난이 퍼부어지고 있는 가운데, 안에서는 그에 아랑곳없이 분열과 갈등만 일삼으며 서로 으르렁댔다. 이런 토양 위로 무교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여기서 김교신 등의 스승인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 잠시 살펴봐야겠다. 우치무라는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7-8세 쯤 ‘메이지유신’이 일어났으니, 일본에 대대적인 ‘서양화’ 바람이 불던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셈이다. 사무라이 집안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우치무라 역시 서양의 기술문명을 습득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 여겼다. 클라크(William S. Clark) 선교사가 세운 삿포로농업학교에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거기서 클라크 교장의 청교도 정신에 감명을 받고 개종까지 하게 될 줄은 그 자신도 미처 몰랐을 테다. 학교 전체에 풍기는 기독교 냄새가 싫어, 일본 귀신(가미)에게 기독교를 없애달라고 빌기까지 한 그가 아니던가.
우치무라는 1876년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일곱 명의 형제들끼리 일주일에 세 번씩 모여, 서로 돌아가면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소그룹을 만들었는데, 예배도 없고 찬송도 없이 그저 성경책만 놓고서 각자 연구한 내용을 나누는 이 방식이 후에 우치무라의 ‘트레이드마크’인 ‘무교회’로 발전했다. 그에게 무교회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완성시키는 제2의 종교개혁이었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엄격한 성직제도에 반대하여 ‘만인사제주의’를 주창했음에도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전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또 개신교회가 이 성례전의 집행 권한을 오로지 안수 받은 목회자에게만 허용함으로써 ‘저지된 운동’으로 끝나버렸다고 평가했다. 하여 성서에 나타난 교회상을 복원하자는 것이 그의 무교회인데, 이는 “제도가 아닌 사랑의 사귐이며 조직 또는 단체가 아니라 영혼의 자유로운 친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인간에게도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이 두드러지게 표출된 일화가 ‘불경사건’(不敬事件)이다. 미국 유학 후 우치무라는 도쿄제일고등중학교(지금의 동경대학교 교양학부)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0년 10월에 <교육에 대한 칙어(勅語)>가 헌법에 이어 반포되었는데, 이는 국가와 천황, 그리고 도덕의 근원을 하나로 이어 묶어 신민(臣民)의 윤리를 강요하려는 의도였다. 1891년 1월 9일, 학교에서 이 칙어에 참배하는 의식이 거행될 때, 우치무라는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 앞에서 단호히 칙어참배를 거부했다. 이것이 유명한 ‘불경사건’이다.
그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독립의 정신’과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낱 인간이 만든 칙어에, 그것도 인간을 국가와 천황의 노예로 굴종시키는 칙어에 ‘참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러일전쟁이 발발할 즈음에는 아예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하고 나섰으니, 일본인들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반일분자’요 ‘매국노’라 욕할 일이었겠다. 결국 그는 학교를 사임해야 했다.
여기서 무교회와 아나키즘의 뚜렷한 접점을 보게 된다. 우치무라가 ‘독립의 정신’이라 표현한 것을 아나키즘으로 바꾸어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우치무라의 ‘독립’은 “외국선교사로부터의 독립에서 시작하여 일본 국체론적 정통으로부터의 독립, 교회로부터의 독립으로 발전하고, 끝내는 조직 일반, 제도 일반을 거부하는 ‘독립’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정신의 해방과정을 가리킨다.
이 대목에서 그의 국가관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치무라는 ‘불경사건’에서 분명 국가에 맞섰다. 그러나 바쿠닌처럼 열렬하게 국가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부정한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비판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국체’(國體)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강했다고 제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는 두 개의 제이(J), 곧 예수(Jesus)와 일본(Japan)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는 것이다.
우치무라에게 애국심은 국가가 잘못 하는 일에 반기를 들며, 국가가 잘못 가는 방향에 제동을 거는 정의로운 실천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은 “근저적(根底的) 급진주의”야말로 우치무라 사상의 알짬이었다. 우치무라의 ‘일본식 기독교’는 김교신으로 하여금 나야말로 “아무런데도 조선인이로구나!”하고 깨닫게 한 그런 기독교였다. 『김교신 평전』을 쓴 전인수는, 김교신의 일본 유학을 한 마디로 결산하라면 바로 이 깨달음이라고 요약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동해안을 가로지르는 연락선 갑판 위에서 있던 김교신은 비로소 사해동포의 허상, 조선인도 일본인과 다르지 않다는 꿈을 깰 수 있었다. …… 다른 조선인과 구별됨으로써 조선인을 초극하여 세계인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가 이제 자신을 진정 다른 조선인과 일치시키고 조선인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이다.”
김교신은 조선을 사랑했다. 그가 주도한 조선무교회는 하나님과 조선을 사랑하는 모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는 구호가 이 모임의 정체를 말해준다. 『성서조선』 이라는 잡지 이름은 그 정신의 압축이다.
다만 우리 염두의 전폭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 두 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가장 보배로운(最珍)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 하나를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지한 조선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김교신은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이라고 강조한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 성서를 조선에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과학조선’을 건설하자 하고, 혹자는 ‘농업조선’을 중흥하자 하며, 혹자는 ‘상공조선’이니 ‘공산조선’이니 저마다 여러 방편을 제시하지만, 자기는 죄다 동의할 수 없단다. “이런 것들은 모두 풀의 꽃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아서 오늘 있었으나 내일에는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모래 위(砂上)의 건축이라 풍우를 당하여 파괴됨이” 심할 것이므로, 오직 ‘성서조선’만이 답이라고 한다.
이때의 기독교는 ‘전적(全的) 기독교’의 성격을 지닌다. 당시에도 ‘무늬만 기독교’, ‘반만 기독교’, ‘일요일에만 기독교’인 신자들이 많았지만, 김교신의 무교회는 달랐다. 김교신 자신의 말로는 “김치냄새 나는 기독교”란다. 한국인의 밥상에 반드시 올라가는 음식이 김치다. 무릇 한국사람이라면 일요일만이 아니라 매일매일 김치를 먹어야 산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역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배운 자나 부자만 먹는 기독교 말고 가난한 사람, 못 배운 사람도 먹는 기독교여야 한다는 게 김교신의 생각이다.
그가 ‘건강한 생활인’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자신 누구보다 열심히 성서를 공부했고, 또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나름대로 ‘(무)교회’를 이끌었음에도, 소위 목사 안수를 받지 않고 교사로 일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 보기로, 김교신은 ‘유한’(流汗) 계급이야말로 심지(心志)가 가상하여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만민 구원의 대업이 완성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유한(流汗) 계급이라 했다. 유한(有閑)이 아니다. 생산보다 소비가 으뜸이 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삶의 여유’를 만끽하는 후자가 더 부러움의 대상일 것이다. 구슬땀을 흘리며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생산직’ 노동자를 천시(賤視)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러나 김교신은 성서에서 경애할 만한 인물로 ‘세리’ 마태,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의사’ 누가 등을 꼽는다. ‘노예’ 빌레몬이 그 뒤를 이으며, ‘천막직공’이었던 바울 및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빼먹지 않는다. 물론 예수의 아버지나 예수 자신도 ‘목수’로 생계벌이를 했다. 반면에 당대의 지식권력과 종교권력을 대변했던 유한(有閑) 계급, 곧 전문사제층은 예수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김교신에게서도 비난의 화살을 피하지 못한다.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김교신 식으로 말을 만들면, 유한(流汗) 계급의 ‘기술’(技術)은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유한(有閑) 계급의 ‘심술’(心術)은 백해무익하다.
4. 나가는 말 - 공동체 아나키즘을 꿈꾸며
우치무라와 김교신은, 비록 한 쪽은 일본제국의 국민이고 다른 한 쪽은 일제에게 무단 병합당한 식민지조선의 비국민으로 삶의 좌표가 극과 극이었지만,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에서 일본제국을 비판했다. 그 신념이 바로 무교회다. 무교회는 하나님과 사람(個我) 사이에 어떤 권력이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제도와 조직이 주는 안락함마저 거부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아나키즘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
김교신의 무교회는 다른 말로 ‘생활신앙’이었다. 또는 교회사학자 양현혜의 표현을 빌면 ‘생애교회’였다. 그가 사람들, 특히 양정고보 시절의 제자들이나 『성서조선』 동인 및 독자들과 맺은 관계를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김교신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공장 노동자들이었다. 그가 『성서조선』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옥고를 치르고 교직을 박탈당한 뒤에 고향에 내려가 취직한 곳이 흥남질소비료공장이었는데, 이곳을 택한 이유는 자신의 ‘무교회’ 철학에 따라 노동과 신앙이 결합된 건강한 ‘생활공동체’를 실험하기 위함이었다.
일종의 군수공장으로, 5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징용되어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고 있던 그곳에서 김교신이 ‘생활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는 세세히 열거하지 않겠다. 다만 그가 ‘밑에서부터 위로’ 조직하고자 한 이 공동체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따로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이 공동체야말로 바쿠닌이 말한 ‘국가 이후의 공동체’, 곧 “정치적 국가의 폐허 위에서 자유의 생산조합과 공동체, 온갖 언어와 국적의 사람들을 무차별로 포옹하는 지역적 연합체의 형제적 동맹이 전적으로 자유에 의해 건설되어 ‘밑에서부터 위로’ 조직이 이루어지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라고 예언한 바로 그 공동체가 아니냐 말이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논(論)할 것이 아니라 생활할 것”이라는 그의 말이 마침내 몸을 입게 되었다는 점도 덧붙여야 한다.
김교신의 무교회는 ‘공동체 아나키즘’과 상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공동체 아나키즘은 인간 생활의 많은 부분이 가정·학교·교회·기업 등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사적 단위들을 통해 영위되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처럼 자생적인 중간집단은 국가와 별개의 독립조직으로, 국가에 기원을 갖고 있지 않다. 이들 중간집단들에 권력이 분산되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국가의 독재가 저지되며 개인의 자유도 비교적 잘 보장받게 될 것이다. 공동체 아나키스트들은 공동체야말로 국가를 대신할 현실적인 선택지라고 믿는다.
김교신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정체화하지 않았다. 다만 각성한 인간주체로, 일체의 권위와 권력에서 자유롭게,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신을 섬기고자 몸부림쳤을 뿐이다. 아울러 그에게 신을 섬기는 일은 인간을 사랑하는 일과 하나였기에, 그의 무교회는 자기만족적 개인구원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희생적 사회구원의 매개체로 승화되어, 엄혹한 일제강점기, 그것도 서슬 퍼런 ‘전쟁동원기’에 폭력의 광기로부터 제자들과 조선 노동자들을 구제하는 ‘구원의 방주’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는 인간의 공동체 실험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함을 일러준다. 안으로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밖으로는 공동체에 대한 지배를 관철시키고자 부단히 획책하는 국가의 욕망 때문에 제아무리 호기롭게 시작한 공동체도 그리 오래 가기 어렵다.
그렇다면 무교회와 아나키즘의 대화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무릇 사람이란 어떤 역사의 시간을 살고 있든지 간에 권력과 권위, 조직과 제도가 주는 안온함에 쉽사리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가 아닐까. 김교신의 무교회가 ‘생활신앙’, ‘생애교회’로 번역될 수 있다면, 그 무교회는 개인의 인격과 습관 속에 뿌리내린 아나키즘으로도 재번역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각성한 개인들이 하나 둘 모여 함께 현존 지배질서에 저항하면서 더 많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사랑이 보장되는 대안질서(예컨대 기독교적 용어로 하면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고 또 실험한다면, 그것이 곧 공동체 아나키즘이 되는 게 아닐까. 설령 실패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실패라면 아름다운 역사로 기억되지 않을까. 진정 불행한 것은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피폐한 우리 영혼의 현주소가 아닐까.
하여, 살아있는 자, 저항할 것! 죽음이 입을 벌린 채 살금살금 다가오는데도 ‘가만히 있기’ 없기! 이 명제야말로 진정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실체이며, 아나키즘의 정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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