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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5-12-03 조회수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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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나키즘과 무교회-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을 중심으로” 에 대하여(토론문)-박 규 환(Ph.D.기독교역사학,그리스도대학교)

<토론문>

 

 

아나키즘과 무교회 -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을 중심으로에 대하여

 

 

 

박 규 환(Ph.D. 기독교역사학, 그리스도대학교)

 

1. 무교회(또는 무교회주의)를 중심으로 기독교와 아나키즘 사이의 대화를 시도한 구미정 박사님의 논문 아나키즘과 무교회 -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아나키즘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인식이 파다한 상황에서, 게다가 아나키즘을 무법성이나 테러리즘으로 오해하고 무교회 역시 한낱 이단사설쯤으로 취급하기 일쑤인 현실에서 시의적절할 뿐 아니라 그 뜻 또한 매우 깊다고 하겠습니다.

 

2. 논문은 먼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는 아나키즘 요소, ()권력, ()지배를 관철하는 철두철미한 인간 사상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콘스탄티누스 체제의 출현으로 전면화한 뒤틀린기독교 역사에 대한 성찰의 준거를 제시합니다. 예수의 복음은 이른바 로마의 평화’, ‘가이사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임을, 예수의 몸짓은 곧 기존하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에 대한 부정이자 도전이었음을 명료하게 규명함으로써 기독교와 국가를 동일시하거나 국가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혼동하는 어떠한 행태도 반()복음일 수밖에 없음을 뚜렷이 하였으며,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바로 그 예수의 복음에 터하여 기독교 아나키즘의 정체를 확립하였음을 밝혀 주었습니다. 이어서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이래 제도종교 혹은 권력종교로서 기독교가 예수의 복음으로부터 이탈하여 아나키즘의 주적이 되어버린 사실을 상기하고 종교개혁조차도 그 뒤틀린 현실을 되돌려놓지 못한 상황에서 미완의 종교개혁을 더욱 철저화하려는 뜻에서 무교회주의가 대두하였음을 지적하면서 김교신과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사상과 그에 담긴 아나키즘의 요소를 논구하고 있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우치무라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독립의 정신으로서, 이는 조직 일반, 제도 일반을 거부하는 독립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정신의 해방과정을 뜻하는 바, 독립정신은 아나키즘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김교신 무교회의 알짬 또한 아무 주의’, 모든 주의들에 끊임없이 저항(protest)하는 정신에 있습니다. 두 사람의 무교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떤 권력이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제도와 조직이 주는 안락함마저 거부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아나키즘을 구현하고 있으며, 그것이 불경사건으로, ‘성서조선으로, 노동과 신앙이 결합된 생활공동체로 드러났습니다.

 

3. 이 논문은 무교회와 아나키즘의 관계를 조망함으로써 결국에는 기독교의 본질을 꿰뚫어 이를 되찾고 참다운 인간상과 사회상을 그리도록 이끌고, “과잉국가비국민으로서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도착현상자유로이 신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종교적 실천이 타율에 물들어버린 도착된 종교현상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바로 그 도착현상원상회복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합니다. “()권력, ()지배로 일관된 예수의 삶과 초기 기독교, 그리고 바로 그 예수로 돌아가고자 하는 무교회를 통해 개인의 인격과 습관 속에 뿌리내린 아나키즘국가 이후의 공동체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확인하였으며, 덧붙여서 권력과 권위, 조직과 제도가 주는 안온함에 쉽사리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체득한 각성한 개인들대안질서를 상상하고 실험하는 일이야말로 참다운 프로테스탄티즘이며 아나키즘이라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예의 무교회주의논의와 아나키즘논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귀한 논문을 발표해 주신 구 박사님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4. 박사님의 논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무교회가 넓은 의미의 아나키즘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 깊이 동의하면서도, 현실에서 권력지배를 가장 강력하게 관철하는 장치가 국가인 만큼 국가관이야말로 무교회와 아나키즘의 접맥을 논하는 데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국가관을 좀 더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를테면 우치무라가 국가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부정한 것 같지는 않다거나 그가 비판한 것은 일본의 국체이지 그 이상이 아니라는 설명과 우치무라의 애국심을 거론하는 대목은 본질상 과잉국가일 수밖에 없는 국가에 대하여 지나치게 느슨한 태도로서, 아나키즘과는 왠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치무라는 비록 비전론을 주창했지만 반전(反戰)하지 않고 참전하여 전사(戰死)”하는 실천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을 결여하였고, 식민지 조선 문제에 대해서도 인간적 동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혹시 우치무라의 무교회가 기독교 혹은 인간의 삶의 방식 전반에 관련되기보다 교회론에 국한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김교신이 당시 조선 기독교에 널리 퍼져있던 정교분리신학이나 로마서 13장에 기초한 국가권력의 신수설(神授說)’ 등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 그도 예수처럼 국가권력의 기원을 사탄에 두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구 박사님께서는 김교신의 흥남질소비료공장 활동을 그의 무교회철학에 따라 노동과 신앙이 결합된 건강한 생활공동체를 실험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이를 바쿠닌의 국가 이후의 공동체공동체 아나키즘과 연결 지었습니다. 무교회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이상(理想)이 국가 이후 또는 국가를 넘어서는, 국가 바깥의 공동체 곧 대안 사회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 수긍하면서도, 현지 징용 형식으로 입사하여 노무 복지 관리 업무를 수행하였던 김교신의 공장 활동에 대하여 과연 그 정도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김교신은 교회가 기독교의 정도(正道)에서 탈선하였음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다 보니 무교회또는 무교회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고 고집하거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일정한 형식으로 속박하려는 교회주의에 대하여 무교회(주의)’로 맞섰고, 무교회조차도 그 정신을 상실하면 가차 없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교회라는 용어가 지닌 의미상의 혼란을 고려할 때, 지금은 무교회+주의가 아니라 +교회주의로서 무교회주의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지 않을는지요. 특히 제도화한 교회 조직의 유지와 확장을 우선하는 태도,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교회의 제도와 전통을 앞세우는 행동, 교회의 직제나 교리를 신성시하는 성향따위의 교회주의가 만연한 현실인 만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주의를 반대한다는 뜻으로서 +교회주의가 개혁 지향성을 더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다시 한 번 구 박사님의 훌륭한 연구에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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