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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5-12-03 조회수 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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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사상과 아나키즘의 연관성에 대한 시론(試論)적 고찰 -이 덕 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유학사상과 아나키즘의 연관성에 대한 시론(試論)적 고찰

 

이 덕 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머릿글

 

유학은 아나키즘과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유학은 양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한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학이라는 명칭이 어느 순간 유교(儒敎)로 변한 것처럼 유학의 본질도 많이 변해왔다. 공자와 맹자는 불우한 정치사상가로 왕도정치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학의 두 비조(鼻祖)는 그래서 모두 은거한 채 제자교육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두 사람이 실제 주장은 훗날 양반 사대부들의 지배이념이 된 유교와 상치되는 것이 적지 않다. 물론 고대 유학도 아나키즘과 상치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분질서를 고착화하는 듯한 내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공자나 맹자가 추구했던 이상 사회의 모습은 아니었다. 특히 중세 유학인 주자학이 교조화하고 난 다음에는 유학은 유교라는 종교 차원으로 변해 사회변화를 가로막는 역기능을 수행했다. 그래서 주자학을 극복하려는 양명학이 등장했는데, 양명학은 공자나 맹자가 추구했던 왕도정치의 본질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이 글은 유학 내에서 아나키즘적 요소를 찾기 위한 한 시도인데,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다.

 

2. 공자 사상의 아나키즘적 요소

 

유학의 비조인 공자는 하은주(夏殷周) 시대를 이상으로 삼았는데,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짓지 않았다. 논어』 「위령공에서 공자는 가르치는 데는 계급이 없다有?無類고 말했다. 여기에서 류()가 무슨 뜻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류가 계급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이 말은 여러 논란을 낳았다. 특히 유학을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이용했던 성리학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남송의 주희(朱熹)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이 류()자를 모호하게 해석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사람의 본성은 다 착하지만 그 류()에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다른 것은 기질과 습관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는 가르칠 때는 사람이 다 착함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류()의 악함을 다시 의논해서는 안 된다.”(주희, 논어집주)

주희는 류()를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뜻하는 것으로 모호하게 해석했다. ()를 계급으로 해석하면 사대부 계급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공자의 뜻이었다는 성리학의 기본 전제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주희의 해석을 거부하고 류()를 보다 분명하게 정의했다.

 

()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족류(族類)니 모든 벼슬아치(百官)와 만백성(萬民)으로 나뉘어 귀하고 천하다는 구별이 있다. 하나는 종류(種類)니 구주(九州:중국)와 사이(四夷:이민족)로서 (중국과) 멀고 가까운 것으로 구별한다. 가르침이 있다면 대부분 대도(大道)로 돌아간다. 이것이 무류(無類). ……하늘이 중심()을 줄 때 귀천을 두지 않았으며 멀고 가까운 것도 없었으니 가르침이 있으면 모두 같았다. 이것이 무류다”(정약용, 논어고금주)

 

정약용은 류()를 두 종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벼슬아치와 일반 백성의 구분을 뜻하는 계급이다. 또 하나는 중국민족과 다른 민족을 나누는 민족 분류다. 정약용은 하늘이 사람을 내릴 때는 귀천의 구별을 두지 않았고, 멀고 가깝고의 구분도 두지 않았다天之降衷, 無有貴賤, 無有遠邇다라고 해석했다. 즉 인간 사이에 인위적으로 나눈 계급적 분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면서 정약용은 가르침이 있으면 모두 같았다有敎則皆同라고 인간은 교육을 받으면 모두 같은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공자는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3. 맹자의 역성혁명론과 아나키즘

 

흔히 유학을 왕조(王朝)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학의 어떤 부분들이 왕조 유지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충효(忠孝)를 기본 이념으로 삼아 부모에 대한 효도를 군주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원래 부모에 대한 효도가 먼저였던 효충(孝忠)의 순서가 군주에 대한 충성이 먼저인 충효(忠孝)로 바뀐 것처럼 이 역시 원래의 의미와는 달라진 것이다. 군주에 대한 충()은 조건부 충인데 이를 부모에 대한 효()와 등치시키거나 더 앞세움으로써 절대적 충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공자와 함께 유학의 비조(鼻祖) 중의 한 명인 맹자는 무조건적인 충효를 말하지 않았다. 맹자는 제()나라 선왕(宣王)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 선왕이 ()이 걸()왕을 내쫓고, ()가 주()왕을 정벌했다는 데 그런 일이 있었는가?”라고 묻자 맹자가, “()에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선왕이,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묻자 맹자가, “()을 해치는 자를 적()이라고 하고, ()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고 합니다. 잔적(殘賊)한 사람은 한 사내一夫라고 이릅니다. 한 사내 주()를 베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했다(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

()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나라의 신하였던 탕(:은나라 시조)이 임금이었던 걸왕(桀王)을 쫓아내고, 역시 은()나라의 신하였던 무(:주나라 시조)가 주왕(紂王)을 시해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다. 맹자는 그런 사례가 전()에 실려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선왕은 이것이 옳으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르다는 답변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시해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일부론(一夫論)인데, 주목할 점은 제 선왕에게 직접 한 말이라는 뜻이다. 현직 임금이었던 걸()이나 주()를 쫓아내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이론이 나왔다. 유학이 극도의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도 있지만 혁명의 이론으로도 전환될 수 있는 배경이 이 역성혁명론에 있었다.

모시주(毛詩注)』 「상송(商頌)무왕이 주를 정벌한 것을 혁명(革命)이라고 이른다라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정당성을 천명했다. 또한 모시주(毛詩注)』 「대아(大雅) 문왕(文王)조는 ()를 독부라고 하는데, 다시 천자로 복위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상서(?書:서경)』 「태서(泰誓)에는 나를 어루만져주면 임금이지만,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즉 고대 유학에서 말하는 군신(君臣)관계는 절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였다. 그 기준은 군주가 아니라 일반 백성이었다.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백성이었다.

 

맹자가 말하기를,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은 그 다음이고, 임금이 가장 가볍다. 그래서 구민(丘民:들판의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大夫)가 된다(맹자(孟子), 진심(盡心)()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된다. 그러나 천자가 되려면 구민(丘民), 즉 일반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성혁명은 곧 민중혁명으로 전환할 수 있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임금이 되는 것을 하늘의 명이라는 뜻의 천명(天命)이라고 말하는데, 하늘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들판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백성은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민귀군경(民貴君輕)’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오기도 했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곧 천심(天心)이라는 사상이 배경에 깔려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조에, 대서(大誓)에서 말하기를, “백성들이 바라는 바를 하늘은 반드시 따른다.”고 했다는 구절이 있다. 대서(大誓)상서(?書)』 「주서(周書)태서 상(泰誓上)’을 뜻하는데, 여기에서 무왕이 하늘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니 백성들이 바라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고 말한 것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란 말 역시 유학의 주요 개념 중의 하나이다.

임금을 쫓아냈거나 죽였어도 역적이 아니라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은 맹자가 처음 만든 이론이 아니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상서』 「태서에 이미 나와 있는 것처럼 그 이전부터 세상의 주인은 국왕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라는 유학 사상이 뒷받침되어 나온 것이었다. 나중에는 역성혁명론이 새 왕조를 개창한 인물에게 천명이 내린 것으로 합리화하는 논리로 악용되지만 맹자가 당초 말한 역성혁명론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맹자에 따르면 구민(丘民) 백성 중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임금이 될 수 있는 기준이 바로 구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고대 유학이 계급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 성리학의 극복과 양명학의 등장

 

춘추좌전(春秋左傳)소공(昭公) 25년조에 무릇 예()는 하늘의 이치天經이고, 땅의 의리(地義)로서 백성이 행해야 할 길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 천경지의(天經地義)라는 말이 나왔다. 하늘의 이치이고 땅의 의리라는 천경지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이를 인간사회의 질서에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서 당대의 지배질서에 대한 해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중세 유학이 심성론(心性論)으로 흐른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사회의 지배질서를 하늘이 부여한 질서인 것처럼 합리화하기 위한 성격도 있었다. , 천경지의를 인간의 성()으로 확대 적용시키면 지배계급의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수구사상이 되는 것이다. 당나라 한유(韓愈)원성(原性)에서, “성이란 사람이 태어나면서 함께 태어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때만 해도 이를 인간의 계급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선의 설순(?循)?진 삼강행실 전(進三綱行實箋)에서, “그윽히 살펴보건대 임금과 아비와 남편은 하늘에 근본되고 신하와 자식과 아내는 땅에 근원되었으니, 바로 천경지의(天經地義)의 정해진 이치로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군주=부친=남편은 하늘의 질서, 즉 천경이고, ‘신하=자식=아내가 이에 따르는 것은 땅의 의리, 즉 지의라는 뜻이다. ‘천경지의를 인간사회의 질서로 확대시키면서 지배계급의 지위를 하늘이 부여한 땅의 질서로 신격화한 것이다. 성리학이 지배계급 위주의 사회질서를 고착화하는 도구가 된 주요한 논리가 이것이었다.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의 주요 이론이 심성론은 현세의 실천 이론이었던 유학을 종교적 차원의 유교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문제는 심성론이 인간 사회의 계급질서를 하늘이 부여한 질서인 것으로 호도했다는 점이다. 송나라 성리학자 정이천(程伊川:1033~1107)이 주창해서 남송(南宋)의 주희(朱熹:1130~1200)가 계승한 성리학의 주된 명제인 성즉리(性卽理)은 인간의 본성인 성()을 천리(天理)라고 주장했다. 청나라의 고증학자 대진(戴震:1724~1777)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에서 육경(六經)과 공자, 맹자의 말과 전기(傳記) 및 여러 문헌에는 리()자를 많이 볼 수 없다. 지금은 비록 어리석은 사람도 패려하고 방자한 사람도 일을 처리하거나 사람을 책망할 때 문득 리()자를 끌어대는데 이는 송()나라 이후에 서로 전해지면서 습속이 된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송나라 이후에 생겨난 것이었다.

주희 등의 성리학자들이 육경은 물론 공자나 맹자의 말에서도 찾기 힘든 리()를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은 이유가 있었다. ()를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 승화시키면서 인간사회의 질서까지 하늘이 부여한 질서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인 성을 곧 리()라고 주장하면서 그 성에 계급적 질서를 부여하면 인간이 만든 후천적 질서가 하늘이 부여한 선천적 질서로 확장되게 된다. 즉 인간이 만든 계급질서를 부정하면 곧 하늘의 뜻까지 거스르는 것이라고 호도할 수 있었다. 성리학의 성즉리(性卽理)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사물의 이치를 궁극에까지 이르러 나의 앎을 극진하게 한다는 주희의 격물치지(格物致知)론은 결국 사대부들만이 궁극적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었다. 격물치지를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물력을 학문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대부들밖에 없었다. 성리학이 먼저 알고 난 후에 실천하라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도 많은 철학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지만 결국 이 논리에 따르면 오랜 기간 동안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연구한 사대부 계급만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귀결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양명학(陽明學)을 집대성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14711528)이 주희(朱熹)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의 성즉리(性卽理)설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었다. 왕수인은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의 심즉리설을 계승해 심과 리를 하나로 보았다. 그래서 왕양명은 주희의 성즉리(性卽理)설과 심과 리를 나누어보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했다.

 

주자의 소위 격물(格物)이라는 것은, 사물에 나아가서 그 이치를 궁구한 데 있다.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곧 모든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나아가 그 이른바 일정한 이치定理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마음으로써 사사물물 가운데 이치를 구하는 것으로 심()과 리()를 둘로 나눈 것이다.”왕양명, ????전습록(傳習錄)???? ()

 

왕왕명은 성리학자들이 성()을 곧 리()라고 주장하면서 심()과 리()를 둘로 나누어 인식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을 심()이 즉 리()라는 심즉리(心卽理)설을 주창했다.

 

무릇 사사물물에서 그 이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어버이에게서 효도의 이치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 어버이에게서 효도의 이치를 구한다면 효도의 이치는 내 마음에 있는가, 그 어버이의 몸에 있는가? 가령 과연 어버이의 몸에 있다고 한다면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내 마음에는 효도의 이치가 없다는 것인가?”왕양명, ????전습록(傳習錄)???? ()

 

그래서 왕양명은 (:마음)이 곧 리()이다. 천하에 마음 밖의 일이 있고 마음 밖의 리가 있겠는가?”라면서 주희의 성()이 곧 리()라는 성즉리(性卽理)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곧 리()라는 심즉리(心卽理)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주희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맞서서 양지(良志)를 주창하고, 주희의 선지후행(先知後行)에 맞서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 것이다. 지행합일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바로 양지(良知)였다.

왕양명은 심의 본체가 천리(天理)이며, 양지란 바로 마음의 본체이자 내적 천리로, 인심에 선천적으로 부여된 지()라고 보았다. 양지는 많은 학문 과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격물치지와는 달리 인간이면 누구나 부여받은 선천적 지()이다. 그래서 이 양지는 신분제를 부정하는 논리로 전환될 수 있었다.

양명학이 이황을 비롯한 조선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산 이유는 성리학과 달리 신분제를 부정하는 논리로 전환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양명은 “(사람이 본래 갖고 있는)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은 우부(愚夫우부(愚婦)나 성인(聖人)이나 같다〔?전습록?()고 갈파했다. 양지와 이에 따르는 양능은 계급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는 선천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성리학의 성즉리, 격물치지, 선지후행 등의 이론이 인간사회의 계급적 질서를 하늘의 질서로 호도할 수 있는 반면 왕양명의 심즉리, 양지, 지행합일 등의 이론은 인간이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론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양명학이 갖고 있는 이런 기능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 철학 이론을 대표하고 있는 북경대학교의 중국철학사는 왕양명의 철학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당시 정주(程朱)의 학설은 이미 굳어버린 교조(敎條)로 바뀌었고 지주계급 사대부의 공명(功名)을 얻는 도구로 전락해서 드디어 사람의 마음을 속박하는 역량을 점차 잃게 되었다. 이에 왕수인은 통치계급의 입장에 서서 육구연의 주관적 유심주의(唯心主義: 관념론)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사람의 주관의식을 강조하여 유가(儒家)의 도덕 규범이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본래부터 내재한 선험의식이라고 주장하면서 주관적 유심주의의 사상체계로 정주학설을 대체하고자 하였다. 그로써 봉건사회 질서의 정신 역량을 홍호하고 당시 봉건통치의 정치적 위기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왕수인의 철학을 주관적 유심주의, 곧 주관적 관념론으로 규정짓고, 봉건 통치계급의 체제 유지 이념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역사 및 철학의 해석에서 필수불가결한 당대성(當代性)의 원칙을 무시한 교조적 해석에 불과하다. ·(宋明) 봉건사회에서는 인간사회의 계급을 천경지의(天經地義)로 합리화한 주자학의 논리를 대체한 것만으로도 양명학은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5. 대동사상과 한국의 유학자들

 

양명학의 가치는 사해동포 사상, 만물일체 사상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무릇 성인(聖人)의 마음은 천지만물을 일체(一體)로 삼으니 천하 사람에 대해 안과 밖, 가깝고 먼 것이 없고 무릇 혈기 있는 것은 모두 형제나 자식으로 여기어 그들을 안전하게 하고 가르치고 부양하여 만물일체의 생각을 이루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천지를 하나로 보는 만물일체 사상이다.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을 하나로 볼 수 있었던 만물일체의 사상이 나올 수 있었던 데는 뿌리가 있었다. 유학사회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대동사회(大同社會)가 그것이었다. 유학의 정치사회 이론에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대동사회로 본다. 이는 제()나라 공양고(公羊高)????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세상을 난세(亂世소강(小康대동(大同)으로 나누어 해설한 삼세지학(三世之學)으로 체계화된 이론이기도 하다. 난세는 그야말로 어지러운 사회이고, 그 다음이 소강사회이며,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대동사회이다. 대동 사회는 원래 공자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 대도(大道)가 행해질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大道之行天下爲公],”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대동사상은 동양 사회의 개혁적 정치가들이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공통으로 추구했던 이상 사회의 모습이기도 했다. ????예기???? ?예운?편은 대동 사회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대도가 행해질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발탁해서 신의를 가르치게 하고 화목을 닦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거나 자신의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편안히 인생을 마칠 수 있었고 젊은이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었다. 과부·고아·홀아비·병자를 다 부양했으며 남자는 직업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었다. 재물이 낭비되는 것은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신이 소유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음모도 생기지 않았고 도둑질도 일어나지 않았고 난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바깥문을 잠그지도 않았는데 이를 일러 대동이라고 한다.

대동의 동()에 대해 주석에서, “동은 화해[]와 평등[]과 같다.”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처럼 공자가 말하는 대동사회는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였다. “자신이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동사회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노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회였다. 또한 사회의 재부를 사회 구성원 모두의 것으로 여기는 사회였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회가 위기에 빠질 때는 평등이 무너지고 소수에게 권력과 부가 독점될 때였다. 그래서 사회가 위기에 빠질 때는 대동사상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청조(淸朝) 말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의 이론적 지주였던 강유위(康有爲)1901년 완성한 대동서(大同書)에서 중국 사회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유위는 대동서에서 전 인류의 대동사회를 주창하면서 정치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하며 경제에서는 모든 재화를 공유(公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사람들에게 개인 소유의 재산이 없으면 집안도 없고 국가도 없는無家無國의 화해(和諧)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고 해석한다.

강유위의 이런 사상은 대동서이전에 이미 예기』 「예운편을 보고 형성된 것이었다. 그는 예기』 「예운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술정변(무술변법:1898) 전의 강유위는 예운주에서 다음과 같이 공언하였다. 인류사회 발달의 최고 단계는 천하가 공유되는天下?公대동사회이다. 이 사회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나라가 나라를 압박하고, 인간이 인간을 압박하는 현상이 없다. “귀천의 구분이 없고 빈부의 차이도 없으며, 사람과 귀신 간의 분별도 없고 남녀의 차등도 없다군주제도가 없어지고, 국가는 사회성원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 되어 다시는 한 사람이나 한 가족의 사유물이 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서로 사랑하며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재부를 일부 떼어내어 공유재산으로 삼아서 사회적으로 노동능력을 상실하고 양육할 사람이 없는 성원들을 부양하고 교육시킬 수 있다. 사람들마다 공유재산에 의해 양육되기 때문에 사유재산을 쓸 데가 없다이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마땅히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러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은 공공의 도리를 근본으로 삼으며”, 국가 간의 경계, 가족 간의 경계가 없고, 모든 압박과 멸시가 소멸된다. 그는 이와 같은 사회를 사람들마다 모두 공정하고 사람들마다 모두 평등한대동사회라고 불렀다

 

이러한 내용들이 바탕이 되어서 강유위는 대동서를 썼는데, 그는 대동서에서 유사 이래 인류사회를 각종 고통이 충만한 사회라고 선포했다. 또 인류의 고통을 조성하는 원인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각종 경계와 차졀이라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차별은 국가 간의 차별과 종족 간의 차별, 신분적 차별, 남녀 간의 차별, 가족 간의 차별, 빈부의 차별은 물론 심지어 인간과 동물 간의 차별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강유위가 말하는 고통에는 노동인민만의 고통이 아니라 부자와 귀족, 심지어 제왕까지도 겪는 고통을 포함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는 명시적으로 아나키즘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의 기저에는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에 의해서 사회가 발전한다는 상호부조론이 깔려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강유위의 대동사상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얼마나 직접적 영향을 끼쳤는지는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 독립운동가들, 특히 아나키스트들이 양명학과 대동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조선에서도 사민평등 사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유학자들이 존재했다. 조선의 신분제가 갖는 가장 큰 문제는 노비제도였다. 조선의 노비는 재산처럼 여겨졌을뿐만 아니라 대대로 세습되었다. 그래서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같은 경우는 노비 관계의 송사에서 무조건 주인 말만 듣고 완악한 노비라고 지목하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이런 대안을 제시했다.

 

송사란 것은 반드시 양쪽 말을 다 들은 후에 그 시비를 결정하는 것인데, 그런데 홀로 노비의 말은 듣지 않는데 노비의 말이 도리어 옳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이익, ????성호사설????, ?인사문?, 노비)

 

그러나 이는 노비의 말에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는 차원의 견해지 노비 제도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익은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해서는 한번 천한 종이 되면 천만 년이 가도 면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런 학대와 고통은 천하고금에 통하여 있지 않던 일이었다라고 그 가혹함을 비판했지만 노비제도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성호 이익보다 앞선 선비였던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 조선의 유학자들 중에서는 노비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적극적인 견해를 피력한 경우이다. 유형원은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해서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노비를 재물로 여긴다. 무른 인간은 모두 동류(同類)인데, 어찌 사람이 사람을 재물로 여길 이치가 있겠는가? 옛날에는 나라의 부()를 물을 때 말의 수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비록 천자나 제후라도 다만 이런 이치에 따라 사람에게 일을 맡겼지 사람을 재물로 여기지 않았다.”(유형원, ????반계수록????, 26, 노비)

 

유형원은 조선에서 노비를 재물로 여기는 행태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그가 인간은 모두 동류(同類)라고 말한 것은 공자가 가르치는 데는 계급이 없다有敎無類고 말한 것처럼 사람은 모두 같다는 전제로 말한 것이다.

 

지금 본국의 풍속은 즉 사람의 부()를 물을 때 반드시 노비와 전지를 가지고 말하니 이 또한 그 법이 틀렸다는 것과 그 풍속이 고질이란 것을 볼 수 있다”(유형원, ????반계수록????, 26, 노비)

 

그런데 유형원은 조선의 노비제도는 너무 오래되어 풍속이 되었기 때문에 무조건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노비를 자세하게 등록해서 다음 세대까지만 노비신분을 세습시키도록 기한을 정하자고 주장했다. , 당대에 직접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란 생각에서 다음 세대에 폐지하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대신 임금을 주는 고공(雇工)노동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유형원은 비록 재야학자였지만 노비제도를 당대에 즉각 폐지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수천 년 내려온 노비제도를 당장 폐지하자는 주장은 재야 선비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성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다음 세대까지만 노비 세습을 허용하고 그 다음부터는 폐지시키자는 주장은 노비제도의 즉각 폐지를 둘러싼 혼란을 완화하고 점차로 신분제에 기초한 노비노동에서 임금제에 기초한 고공노동으로 전환하는 것이 노비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이라고 본 것이었다.

순조 1(1801) 1월 순조가 내노비(內奴婢)와 시노비(寺奴婢)를 혁파하고, 이어 내수사, 각 궁방, 각사의 노비안(奴婢案)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도록 명한 것은 이런 흐름이 나름의 결실을 본 것이었다. 이때 순조는, “궁시 노비(宮寺奴婢)를 혁파하려던 것은 선조(先祖)의 뜻이었으니 내가 의당 계술해야 하겠다.”라고 말해서 공노비 혁파가 정조의 뜻이었음을 밝혔다. 정조는 실제로 ?노비공(奴婢貢)의 폐단을 혁파하는 데 대하여 묻는 하교?에서 내노비와 사노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 폐단을 혁파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연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정조는 노비제도를 폐지하고 고용(雇用)의 법을 만들 것을 대안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끝내 시행하지는 못했다. 양반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순조 즉위 초 정조의 이런 정책이론을 본 받아서 각 공노비안, 즉 노비문서를 돈의문 밖에 거두어 모아서 소각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와 순조 즉위 초로 이어지는 이런 정책의 흐름들이 정조 사후 정권을 장악한 노론벽파, 그 중에서도 소수 벌열이 정권을 독차지하는 세도정치로 퇴행되면서 노비혁파 문제는 수면 아래로 잠복하게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조선이 끝내 멸망에 이르게 되는 주요한 요소가 되고 말았다.

 

6. 꼬리글

 

동양 유학 사상에도 사민평등을 주장하는 사상들이 있었다. 또한 군주의 축출과 심지어 군주를 살해하는 것까지 합리화하는 사상도 유학 내에 존재하고 있었다. 공자와 맹자가 주창한 이런 사민평등 사상과 백성 중심 사상은 유학이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면서 그 본뜻을 잃어가게 되었다. 특히 성리학은 공자, 맹자를 비롯해서 육경(六經)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리()를 유학의 주요 이론으로 끌어들여 인간사회의 차별을 유학의 근본 사상인 것처럼 호도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양명학이 등장하게 되었고, 유학이 가진 사민평등 사상이 다시 제기되었다. 그 핵심에는 공자가 제시한 대동사상이 있었는데, 청말의 사상가 강유위는 ????대동서????에서 사민평등과 국가의 해체까지도 주장하는 것으로 공자의 대동사상을 계승하게 되었다.

강유위의 대동사상이 한국의 유학자들이나 유학적 성향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깊게 교류했던 손문(孫文)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가 ????예기???? ?예운?에서 말한 공자의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점이나 이회영이 김종진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대동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은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이 대동사상을 아나키즘적 관점에서 수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시사하는 것이다. 한국 아나키즘이 단순히 서구사상의 영향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동양 전통사상의 토대 위에서 아나키즘이라는 서구사상을 수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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