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자료
자료실 > 문서자료
이름 김창덕 이메일 kkccdd@hanmail.net
작성일 2016-01-09 조회수 2083
파일첨부
제목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문경 기념관 건설과 뒤바뀐 사진

180px-Kaneko[1].png

문경 기념관 건설, 뒤바뀐 사진

사토 노부코(佐藤信子)

남편인 박열과 함께 가네코 후미코를 현창하는 기념관 개관이 다가오고 있다. 연내에 개관예정이라고 한다.

박열의 고향, 한국의 문경시에 14천평방 미터(4천평)의 기념관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지상 2, 지하 1층의 기념관이 이미 완성, 박열, 가네코 후미코, 후세 타츠지의 귀중한 자료 역시 전시되어있다.

원내에는 정자와 복원된 박열의 생가, 기념탑등이 점재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가 있다.

200410월 처음으로 후미코의 묘소를 찾아 갔을 때, 그것은, 기념관 기공식 2주일 후였지만 건설예정지 지면에는 줄이 쳐져 있었다. 공원 부지 내는, 토지 조성 중으로 블도저가 멈춰져있었다. 그런 가운데 박씨 문중 산의 묘지에서 옮겨진 후미코의 묘지만 아름답고 장중하게 정리되어 완성되어있었다. 그 일면에는 잔디가 심어져 공원묘지 같았다.

2006년에 방문하니 기념관이 세워지고 내장공사가 반 정도 이루어졌다. 공원 내에 나무가 심어지고, 뒤의는 잡목산, 정면 저 멀리까지 이러지는 밭들, 그 앞으로 이어지는 산들, 풍요한 자연 속에 조화를 이룬 기념공원처럼 느껴졌다.

2008년에 방문하자, 공원의 나무들이 우거지고, 건물도 늘어났으며, 주차장도 만들어져 훌륭한 공원이 완성되었다. 조금 높은 언덕의 정자에 모여 담소하고, 전망을 즐겼다. 기념관의 내장, 기구설치도 끝나고 2층의 숙박실까지 견학할 수 있었다.

기념관 건축이 완성하자, 지금까지 모은 전시자료 뿐만 아니라, 필요한 자료를 더 모으기 위해 관계자들이 고심, 2010년에는 2번에 걸쳐 내일(來日), 야마나시(山梨)에 오신 기념관 준비단장인 박정진씨는, 2003년에도 마키오카(牧丘)에 온 적이 있었다. 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된 것은 2001년으로 10년에 걸쳐 기념관 준비로 분투했다. 그리고 후미코에 대한 높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초의 완성예정보다 늦어져, 개관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기념관 건설로 박열과 후미코에 대한 이해가 커졌다. 작년 후미코의 기일에는 참배객이 모였는데 그 중에는 후미코가 다녔던 부강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모습이 있었다 한다.

후미코가 학생이었던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의 교사는 따로 였으며, 교정에도 울타리를 설치해 조선인 학생의 출입을 금지했다고 한다. 과거의 울타리를 제거하고 묘소참배를 위해 온 동창생들, 나아가 부강초등학교에는 후미코 기념비 건립이 계획되고 있다고 한다.

기념관은 한국과 일본과의 울타리를 털어내고 참된 이해를 쌓아갈 장이 될 것이다.

2006년 가네코 후미코를 연구하는 조촐한 모임을 유지들과 함께 시작했다. 자서전을 읽고, 회원들이 연구 발표하며, 후미코 기일의 추도식을 거행한다. 그런 활동 속에 한국과의 공동연구의 장을 한국과 일본에서 해 왔다.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에는 박열과의 만남과 공투(共鬪) 그리고 어린 시절 조선에서의 7년간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과의 공동연구는 귀중하며, 나아가 기념관 개관으로 앞으로 연구의 연대의 끈은 더욱 강고해질 것이다.

되돌아보면 기념관 개관 준비를 통해 이미 많을 것을 배웠으며 기념관 완성을 향한 밝은 기대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 6,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생겼다. 후미코(文子)의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이 동성동명의 가네코 후미코(金子フミ)씨의 것으로 판명 났던 것이다. 19282월에 스즈키 분지(鈴木文治)의 선거응원을 위해 달려온 동경노동부인동맹(東京??婦人同盟)의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일본봉공조합:日本縫工組合)이었다. 진공사의 사람들(進工舍?)의 사주(舍主)인 아나곤씨가 인터넷에서 지적하셨다.

한 권의 책에 「박열·후미코 사건의 후미코로 이 다른 사람의 사진이 게재된 것은 197735년 전,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잡지와 단행본에 이 사진이 사용되어, 후미코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던가. 표지에도 사용되기도 했다.

후미코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아나곤씨 덕분에 오류를 알게 되었다. 너무 감사드린다.

9년 전 박성진, 박정순, 김동석씨가 마키오카(牧丘)의 가네코 생가를 방문해, 기념관이 건립과 그에 대한 협력을 부탁했다. 그 때 뭔가 후미코의 유품은 없을까요라는 물음에 유족인 고마에(こま)씨는 경찰이 두려워 후미코의 유품을 모두 태워버려 아무것도 없습니다.고 대답하셨다. 전후에 흑색전선사(黑色戰線社)에서 출판된 후미코의 시집을 드리셨다. 그 자리에 있었기에 대화를 엿들었다.

또한 어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사건 당시 경찰관이 집 주변을 에워싸 밖으로 나올 수도 없었다고 옛날 일을 괴로운 듯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고 고마에씨가 되풀이 말씀하셨다.

226개월의 짧은 생애로 마지막 3년은 옥중에 있었던 후미코였다. 성인이었던 후미코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적었으며, 많은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뒤바뀐 사진을 알아채지 못한 데에는 후미코의 이런 사정이 있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날조된 사건으로 전후 밝혀졌다. 후미코는 인간평등의 신념에 일관했으며, 국가권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통해 식민지하 조선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연대했다. 이번 뒤바뀐 사진문제에서 새삼 후미코의 혹독했던 생애와 맞부딪힌 느낌이 든다.

이 사진의 오류를 많은 사람이 알게 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 이 사진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기념관 개관 후, 부디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산인회보(山人會報) 140

2012425일자에서

 

이전글 한국 아나키즘의 과제와 자유공동체운동 -이문창-
다음글 2015 한국아나키즘학회 자료집- 아나키즘과 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