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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6-03-08 조회수 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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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나키스트, 한국사회를 말한다 -이문창-

아나키스트, 한국사회를 말한다: 2012

 

자유공동체와 통일

                                                                                                                                               이문창(자유공동체운동자연합 준비위원)

 

1.머리말

아나키스트는 지금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한반도의 분단 현실, 동북아시아의 안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런 것들을 국가주의, 시장자본주의와는 대척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자유공동체주의 방식으로 그 해답을 도출해보고 싶다는 것이 이글을 쓰게 된 동기다.

주지하다 싶이 아나키즘은 인간의 자유 평등과 상호부조를 최상의 가치로 삼고 이를 억압하는 정부 등 권력조직과 일체의 경제적 사회적 구속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 많은 선열들은 이 사상을 가지고 민족의 생존권 탈환을 위해 피를 뿌렸으며, 특히 각국 동지들과 동아시아의 자유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해 가지고 항일전선에 신명을 바쳤다. 이와 같은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반권력, 반자본주의 투쟁은 해방 후의 혼란기에 들어와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들은 단지 생각이나 말로서만이 아니라, 일면 반권력 투쟁, 일면 자유사회 건설의 길을 실천적으로 개척해 욌다. 그런 과정에서 도달한 중간결론이 민중사회에 자유공동체의 모형을 실험해보고, 그것을 자유연합방식으로 전국에 확산시켜보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유공동체는 무엇이며, 자유연합 방식의 사회설계란 어떠한 것인가?

이 글에서는 해방 후 한국아나키스트들이 실천해 온 자유사회운동의 궤적을 간략하게 더듬어 본 기초위에서, 분단체제로 인한 정치적 부자유, 경제적 불평등의 억눌림에 사는 공동운명체로서의 남북 풀뿌리민중에게 '자유공공체운동'이 왜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았다. 그에 따라 실지 민중생활에 적용하는 데 필요한 자유공동체의 요건을 매뉴얼 형식으로 초안해 본 다음, 마지막으로 주어진 주제인 한반도의 통일문제와의 연관선상에서 그것이 과연 동북아 평화설계 작성에 가치있는 기여가 될 수 있는가를 따저본 것이 이 글의 내용이다.

한마디로 한국아나키스트들이 최초에 생각한 자유공동체란 한국민중이 직면한 생존적 위기를 민중 스스로의 자주협동 역량으로 타개해 가는 데서 새로운 동력을 발견해보자는 것이었다. 그 평화민중의 공동생활에너지를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원리에 적용시켜 확대발전시키는 데서 한반도의 위기 극복과 통일은 물론, 동북아시아 전역의 평화체제 수립에 기여하자는 것이 그들의 야심찬 경륜이었던 것을 부언해 둔다.

 

2. 분단시대 한국아나키스트운동의 궤적

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때, 한국아나키스트들은 민족적 자주권 쟁취와 자유평등의 통일사회 건설을 당면한 사명으로 알고 궐기했었다. 그러던 것이 북쪽에 소련식 공산주의를 이데오로기로 하는 국가사회주의체제가 등장하고 그에 대응하여 남한에 반공을 이념으로 하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정권이 들어서게 되니, 아나키스트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국민의 자유 인권을 최고의 가치로 보장한다는 남한사회에서 마저 '공산주의로 착각될 수 있는 어떤한 의사표시도 위험시'되는 공포분위가 조성되었다. 이렇듯 험난한 시대, 더욱이 6·25전쟁과 같은 사지를 헤치고 나오면서도 정치, 사회 양면에 걸친 한국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연면히 지속되었다. 그 경과는 대략 아래와 같다.

해방 후 한국 아나키스트의 정치운동으로는 40년대 후반의 독립노농당(대표 유림)을 위시하여,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민주사회당(대표 정화암, 이을규)과 민주통일당(대표 양일동)을 꼽을 수 있다. 자유와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에 기초한 계급없는 사회를 열망하는 아나키스트가 사회운동 아닌 정치운동을 우선시한 데는 식민지에서 겨우 해방 된 민족으로서 자기 주권정부를 수립하는 과제만큼 급한 일은 달리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강대국에 의한 남북 분단으로 장차 이 나라가 이북의 스탈린주의나 이남의 제국주의 매판자본주의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 것이 분명하니, 우선 아나키스트가 해야 할 당면과제는 한반도 전체를 통괄하고 전체 한국 민중이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주정부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구상한 정치형태는 어떠한 것이엇던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방자치조직에 토대하여 완전한 자유연합의 평등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으며, 정부란 국민생활의 생산 소비관계를 숫자 본위로 조정하는 일종의 조정적 사무기구로서, 철저하게 권력 및 산업의 중앙집중화를 배제하고 개인과 사회집단의 자유와 자치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그런 체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요컨대 이러한 이상과 전략을 가지고 정치운동에 뛰어든 한국아나키스트의 정당운동은, 그 어느 것도 대중조직이나 자금 줄이 튼튼한 본격적인 정당이라기보다는 소수의 혁명적 이념집단 내지는 반독재 개혁투쟁의 상징적 존재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

해방 이후 정치운동 아닌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그룹으로는 자유사회건설자연맹(자련,1945.9)과 그 협동체인 농촌자치연맹 및 ·노동자자치연맹이 있고, 그 맥을 이어 활동한 국민문화연구소(민문연, 1947)와 순정아나키스트그룹을 지향한 한국자주인연맹(1973) 등을 들 수 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8·15의 광란정국에서 67명의 아나키스트동지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로, 새나라 건설에 이바지 할 가장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사상적으로 연구 계몽 선전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들은 '완전한 자유평등의 상호부조적 신조선은 완전한 지방자치체의 자유연합으로 건설된다'는 신념 아래 실천기관으로 조선농촌자치연맹과 한국노동자자치연맹을 조직해 가지고 민중의 자주의식 고취와 자치생활훈련에 임했다. 자련의 맥을 실질적으로 계승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 연구를 목적으로 출범한 국민문화연구소의 젊은 동지들은 6·25전쟁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농촌자치연맹의 전통을 끈기있게 이어갔다.

민문연의 농촌 자유연합운동은 자유당 독재정권 타도에 앞장섰던 4·19청년학생들이 그 혁명정렬을 농촌으로 경주하는 데서 시동이 걸렸다. 민문연은 4·19교수단 데모에서 중심역할을 했던 이정규 등 아나키수트 선배들의 격려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농촌운동 대학생단체들의 연락처 겸 훈련기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모인 대학생들은 여름·겨울방학 동안 전국 주요 향촌 자연부락을 순회하며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갔으며, 농촌 청소년들을 모아가지고 문고·문화반 등 학습조직을 만들게 하고 그들이 스스로 공동생활 훈련을 하도록 협력했다. 그런 한편으로 학생들은 수시 왕래가 가능한 서울 근교지역(남양주 진건)의 농촌청년들과 교류하면서 집중적인 자주협동 농촌운동의 표본지역계획을 세우고, 그 기반 위에 농공균형발전을 지향하는 운동과 농촌공동체 조성활동을 추진했다. 농촌수산운동은 학생들의 부탁으로 프랑스 농촌을 시찰하고 돌아온 불문학자 손우성교수의 제창에 따라 이루어진 일종의 경공업 직종 기술보급운동이었으며, 당시 농촌 빈곤층 유휴인력을 자율취업 방식으로 소득 증대에 결부시킬 수 있는 다시 없는 묘책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학생농촌활동이 단순한 문자계몽 수준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수익을 올리고 지역산업을 일으키는 농촌공업화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크로포트킨의 <전원 공장 작업장>을 본 뜬 공동체 조직이 아나키스트 선배동지들의 지도하에 남양주 진건, 양평 용문, 평창, 용유도 등지를 비롯한 전국 10여개 지역에서 순전히 대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의 창의에 의해 개척되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개발독재의 철권을 휘두르던 70년대 초, 민문연에 모여 활동하던 농촌활동청년학생들을 고무하고 유형무형의 사상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한국자주인연맹의 노장아나키스트들이었다. 자주인연맹은 민주사회주의연구회 사무실을 거점으로 아나키즘운동사 편찬작업을 서두르던 재경아나키스트들이 중심이 되어 '자주인의 자유연합사회 건설'을 강령으로 내걸고 19736월 결성한 아나키스트 단체이다. 당시 민문연의 아나키스트 및 청년학생회원들의 활동은 중앙집권적 획일화를 지향하는 권위주의정권의 압축성장정책과 새마을운동에 정면으로 맞서 농촌 자주화운동과 도시 소비자의 생활협동운동 등 두가지 큰 가닥으로 전개되었다.

농촌자주자위운동은 1971년 가을 농촌활동학생들이 '농촌 자주화의 문제점'이라는 주제로 평가보고회를 가진 끝에 그간 관계를 맺어오던 전국 각지역의 농촌지도자들을 초치하여 일대 토론회의 장을 마련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회의 끝에 농촌활동가들은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강행하려는데 맞서 순수한 민간의 힘으로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전농운)를 조직해서 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그들은 "농가 스스로의 생존권을 수호하고, 촌락공동체의 자치기능을 신장하여 도시와 농촌의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는 결의 아래, 각자 주거지역 마을공동체 중심으로 상호부조의 경제기반(토지, 양곡 등)을 확충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자주협동의 전통문화를 발굴하는 데 힘썼다. 전농운 활동가들은 또한 상호간에 우수종자의 교류 또는 유기농법의 도입을 목적으로 활발한 농사정보의 교류에 힘쓰는 한편, 마을 단위 공동출하조합을 만들어 도시 소비생활 조직을 개척하는데 주력했다. 민문연에 연락본부를 둔 전농운은 회원들의 활동경과를 비교평가하기 위해 매년 1차 정기총회를 열었으며, 때로는 정부 의 일방적인 농업 농촌 말살정책에 항의하는 성토대회를 전국농민단체 공동주최로 열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 민문연 활동의 또 다른 한자락은 도시 주민의 생활협동운동으로 나타났다. 생활협동운동은 농촌활동가 출신의 20여 도시회원들이 농촌 회원들의 출하활동에 호응하여 실험소비조합을 구성해 가지고 안전 먹거리의 초보적 공동구매활동을 전개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 실헙소비조합을 통해 그들은 매번 농촌과 연락하여 안전 농산물을 직접 공급 받는 활동을 하였으며, 한 거름 나아가 강남, 강북 등 시내 각 지역 주거단지의 주민들에게 홍보하여 5 내지 20세대 단위의 공동구매조직(생활반)을 구성하도록 권유했다. 이 소조직을 통해 주부들은 쌀, 계란, 마늘, 고추, 채소 등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공동으로 주문하고 공동으로 구입하는 길이 열렸을 뿐 아니라, 이웃 간에 막혔던 벽을 허물고 자연스럽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동생활의 장을 만들고 있었다. 이 실험소비조합운동이 후일 '남서울주민 생활협동단지' 또는 동부서울생활협동조합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일본생협운동과도 연대관계를 맺어 활발한 정보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이 운동에 관여했던 젊은 활동가들과 아나키스트 동지들 간에 활발하게 논의되던 화두는 '무원칙한 생산제일주의 경제를 소비자 주권 중심의 사회생리체제로 전환시킬 방안이 무엇이냐' 하는 데 대해서였다. 그 첩경이 바로 이웃 간의 소그룹 활동을 통한 소외대중 스스로가 자기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자기조직화에 발벗고 나서게 하는데서 생활협동공동체망을 펼쳐나가게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유신독재와 신군부 등장의 암울하던 시기중 존재했던 이런 활동들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도 뼈아푸게 반성되는 것은 그 동안 민문연 활동의 기관차 역할을 하던 청년학생들이 모두 군화 발에 쫓겨다니느라고 풍비박산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 학생들 대부분은 오직 군부타도, 민주화 투쟁에 사생을 거는 과정에서 꿈과 낭만을 잃은 가여운 신세가 되어버렸으며, 우리 아나키스트들의 능력이 그들을 감싸않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아나타까운 일이었다.

 

3. 왜 자유공동체인가

인간 소외의 권력이나 자본을 부정하는 사상인 아나키즘은 자유로부터 시작해서 자유로 끝나는 사상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자유는 인간 각자에게 자연이 부여한 모든 힘과 능력과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이것들을 상호에 활용하도록 하는 생동하는 구체적 가능성인 것"으로, 그러기 때문에 자유는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하거나 보류해서는 안되며, 개개인의 자유와 전체의 복지를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데 특징이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행동적 아나키즘의 선구자인 바꾸닌은 일찍이 이웃의 자유가 자기자신의 자유에 대한 필수조건임을 강조하여 "자유는 개개인의 그리고 모든 사람의 전체적인 연대성 속에서만 정당하고 완전하다. 고립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자유의 사회적 성격과 노동의 관계를 강조하여, "인간은 집단적, 즉 사회적 노동에 의해서만 비로소 외적인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런데서 바꾸닌은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이자 부정이며, 자유없는 사회주의는 노예이자 야만이다"라고까지 극언하여, '자유'의 개념 안에 '평등'의 관념을 완벽하게 용해시키는 데서 인류의 생활조직에 대한 습성을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냉전시대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남북 분단체제로 인한 인간 소외와 사회 갈등 현상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장 긴급한 시대적 과제로 생각하고, 그 대안으로 고전적 아나키즘 사상의 재확인에 따른 "풀뿌리로부터 출발하여 자유·평등의 자유공동체사회를 건설하자"는 논을 제창하고 나섰다. '자유평등의 자유공동체'인가? 분단체제 하의 남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과 대조하여, '자유공동체'는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았는가?

 

분단 이래 남북한정권은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을 각기 달리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생활에서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상반되게 규정해 왔다. ,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로서 개인 존중과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강조되었던 데 반해, 인민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철저한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했던 북한에서는 처음부터 개인의 존재 자체가 용인될 수 없었다. 북한에서 말하는 자유는 '국가사회의 통일 즉, 수령··대중의 통일 속에서 누리는 자유'라는 개념이며, 평등 또한 국가가 조절하고 통제하는 계획경제 하에서의 타율적 평등이다. 그런 가운데 국가가 모든 재화와 이윤을 소유하고, 개인은 직업동맹 청년동맹 여성동맹 등 근로단체 중 반드시 하나에 가입해서 공동노동과 대중학습활동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으며, 심지어 인간생활의 보금자리인 가정까지도 당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이렇듯 국민을 집단주의제도에 예속시키는 데서 출발한 북한정권은 60년대부터 김일성 유일영도체제를 확립하고, 주체사상탑, 개선문, 백두산 밀령신화 등 일련의 허황된 '사회주의 대가정' 건설계획을 강행하는 과정에 국고를 탕진하고 경제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탈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종래의 폐쇄노선을 고집하던 북한정권은 국제적 고립에 직면할 수 밖에 없게 된 데다 국내적으로 95년부터 연 3년간의 수해와 가뭄으로 인해 대기근이 발생하고 경제가 완전히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김일성의 사망으로 권좌를 세습한 아들 김정일 은 '유훈통치니 '고난의 행군'이니 하는 스로건을 내걸고 개혁개방과는 거리가 먼 과거 회귀적인 정책을 견지했다. 한거름 더 나아가, 98년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은 헌법을 자신을 국방위원장으로 하는 '선군정치'체제로 개정한 다음, 3단계로케트 실험발사를 감행한 데 이어 대미제네바 협정으로 중단했던 핵시설 복구를 공언하여 대외관계를 한층 긴장시키는 쪽으로 몰아갔다. '선군정치'"군대는 곧 인민이며 국가이며 당이다"가 말해 주듯 종래의 '병영사회국가체제'를 전 국력을 총동원한 본격적인 정규군국가체제로 격상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김정일은 북한이 직면한 내우외환을 2400만 생령을 볼모로 잡아 정면돌파하겠다는 뱃장을 과시하였다.

그 밑바닥에서, 자연재해로 인한 대기근에다 인위적인 죽엄의 행군까지 강요 당하기에 이른 북한민중은 지금 어떻게든 살아남느냐, 아니면 긂어죽지는 말아야하지 않느냐의 막다른 골목에서 절체절명의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그런데서 수많은 남녀가 죽엄을 무릅쓰고 국경선 또는 바다를 탈출하여 기약 없는 난민의 행렬에 끼어들고 있다. 그 외의 절대다수 해골만 남은 생령들이 내 고장 내 삶의 터전만은 지켜야 한다는 비장한 일념에서 배를 움켜쥐고산으로 들로 풀뿌리 캐러다니기에 여념이 없으며, 그 중에서도 보다 악빠리들은 보안대원들과 온갖 승강이를 벌여가며 장마당을 벌리기에 목숨을 걸고 있단다. 이것이 바로 자기 또는 자기 가족의 생명을 담보해 줄 자 오직 자기 뿐이라는 깨달음으로 사생결단에 나선 북한민중들의 처절한 자기조직화 과정이 아닌가.

 

한편 남한에서는 처음부터'자유민주적 기본질서'아래 각인의 자유 평등에 대한 인권이 헌법조문으로만 보장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4·19학생혁명을 거쳐 '6월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정치민주화'의 차원에서 시민의 힘으로 쟁취하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치적 민주화란 단순히 권위주의적 권력의 틀을 제거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어서, 그 이후에 발생되는 자유방임적 시장경쟁의 모순을 왜소한 생령들이 어떻게 버티어내느냐 하는 난제에 부디치게 된다. 우선 민중이 조우했던 '87체제' 이전과 이후시기, 즉 군부독재시대와 민주화시대를 문제제기의 차원에서 재조명해 보자.

5·16군사정변은 4·19혁명으로 깨어나기 시작한 민중의 민주주의의식을 채 뿌리도 내래기 전에 산산이 짓이겨 놓았다. 박정희소장을 수령으로 하는 군인들은 쿠데타의 성공으로 국가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자,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해가지고 군 일색의 군대식국가를 출범시켰다. 그때부터 박정희 군사정권은 행정의 효율화를 구실로 지방자치제를 걷어치운데 이어 모든 관료조직을 중앙권력에 복속시켰으며,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내외정보를 물샐틈 없이 장악한 가운데 재건국민운동(후일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가행정력을 최저 밑바닥에까지 침투시켰다.

이렇게 출발한 개발독재권력은 수출 주도형 공업화정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 과실을 몽탕 일부 소수 특권계층에 몰아주고 독점재벌을 집중육성하는 데 주력한 나머지 사회를 완전히 양극화시켰으며, 한편으로 압축성장의 중화학공업을 개발한다는 미명아래 전통적인 농업과 경공업의 기반을 깡그리 파괴시켜버렸다. 이로 인해 농촌과 중소도시가 해체되고 거기서 발생한 수백만의 생민들이 일조일석에 생계수단을 잃고 거리로 낳앉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발생한 피눈물 나는 저임금노동력을 바탕으로 불량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무분별하게 대도시를 팽창시키고 산업을 난립화, 집중화시키는 가운데 민중생활을 점점 더 어려운 구렁텅이로 몰아 간 것이 이른바 오늘의 산업화요 경제 발전의 자랑거리란다.

그 결과로서 전체경제의 80%를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경제는 지금 만성적인 글로벌신용경색으로 인한 세계적인 경제침체의 늪에서 헤여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사상 최대의 이익을 냈다고 자랑하는 재벌기업으로 인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가 줄줄이 도산을 당하고 있으며, 치솟는 물가와 늘어나는 부채를 감당할 길 없는 소시민들이 아무 희망 없이 쪽방살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정규직 일자리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청년들의 절규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비싼 등록금을 내려달라고 울부짓는 학생들의 고힘소리가 거리를 메우고 있다. 기타 빈민문제, 노인문제, 보육문제 등 서민경제가 파산직전인 데도, IMF 외환사태 이후 역대정부가 한 일이란 필경 상위 1%'탐욕'을 위해 99%의 서민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간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서 민중의 분로는 약육강식의 경제시스템과 국민의 부를 독차지하고 있는 1%의 상류층을 정조준하기에 이르렀다.

 

이상에서 대충 살펴본 바, 그간 남북 권력 당국의 정책 수행 현장에서 드러나는 가장 뼈아픈 공통점은 권력이나 돈의 위력 앞에 인간의 가치가 가랑잎만도 못하다는 점이다. 이 인간부재·인간소외 현상은 남북한에 한한 것이 아니라 거대화, 다량화, 효율화에 매달려 살고 있는 근대문명권 전체의 개질이라는 데서, 그것을 문제시 하는 것 자체를 넌센스라고 보는 것이 오늘의 세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근대화가 민중을 노예화하고 작취하는 괴물로 돌변했을 때, 우리는 이 근대화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환언하면, '인간 자유' '인간 존엄'에 대한 도덕적 기반 자체를 무너트린 오늘의 정치 경제 양식을 얼마나 더 그대로 두고 보아도 되느냐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의 아나키스트의 문제제기는 바로 이러한 '인간 자유에 대한 절규'를 기본 출발점으로 해서, 민중 스스로가 자기를 해방하는 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절규나 모색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고독한 민중의 생존현장에 파고 들어 하나가 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다. 왜냐하면 아무리 짓눌리고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와도 내 삶 내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지고 헤쳐나갈 자는 필경 민중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절박한 위기에 직면해도 그것을 정면돌파하여 자력으로 살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 풀뿌리 생명체의 정칙이며 운명자결의 원리! 이 자주 자발적인 원리에 따라 민중 각개가 스스로 앉아있는 그 자리로부터 들고 일어날 때, 덕은 외롭지 않다('덕북고')는 이웃과의 협동이 이루지기 마련이며, 운명공동체로서의 연합이 밖을 향해 외연을 확장해 나가기 마련이다. 이것이 우리 아나키스트가 말하는 자기조직화의 자유공동체다. 재언하자면 자유공동체는 위에 있는 누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중앙에 앚아 누구를 호령하는 것도 아니다. 자유공동체운동은 직접 생활하는 삶의 현장에서 각기의 필요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합의하고 서로 협력하는 데서 기초적인 생활안전망,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같은 생각에서 생겨난 망과 망끼리가 밖으로 자유 평등의 원리에 따라 연대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데서 우리가 않고 있는 모든 난제를 풀어나가자는 거이다.

4 자유공동체의 기본요건

자유공동체는 한마디로 국가주의, 시장자본주의와 거리를 두고,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열린 자치사회를 지방 분산적으로 실천하려는 집단이라는 데서 일반적인 공동체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러한 사회개혁 실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형태의 강제와 권위를 배제하는 것이 우선적인 전제조건이다. 모든 형태의 강제와 권위! 그 억눌림 아래서는 자유도 공동체도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공동체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뜻을 같이 하는 뜻있는동지들의 결속체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정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정의감에 불타면서도 공동선에 헌신할 수 있는 열정적인 지식인, 청년, 학생 또는 활동가가 모여들어야 하며, 상호간에 끊임없는 자주학습과 공동생활훈련을 통해 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새사회의 설계를 짜야 한다. 뜻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인적 결합이 상호 연락망을 구성해가지고 정보를 교환하며 자유공동체운동의 선구역할을 해야 한다. 그들이 민중의 대해 속으로 파고들어 민중과 일체가 되어 개척해 나가야 할 사회가 바로 자유공동체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 속의 하나의 구성분자일 뿐, 지도자도 영웅도 아니다.

자유공동체의 주체는 민중 스스로이다. 스스로의 자유를 스스로 쟁취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로 뭉친 백성의 결집체이다. 자유공동체는 1%도 안되는 이리떼들에게 매양 속고만 살아온 민중이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운명을 투표용지 한 장에 내맛기고 기다릴 수 없다는 각성에서, 그리고 자기를 구해줄 자는 종당 벼랑 끝에 선 자기 뿐임을 깨달은 데서 궐기한 민중 스스로의 삶의 안전망이며 사회안전망이다. 요컨대 자유공동체는 .상위 1%의 탐욕에 분로하는 99%의 민중이 바탕이 된 직접행동체이다.

그러나 자유공동체는 어느 한 편파 또는 계급에 치우친 헤게머니를 거부하며, 광범하게 문호를 열어놓은 상태에서 언제 누구라도 입퇴가 자유로운 민주적 결사체를 지향한다. 또한 지연이나 혈연 등 문화적 다양성이 서로 존중되는 가운데 관심점만 같으면 어느 다른 결사체와도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연대관계를 넓혀나갈 수 있는 유연성을 가춰야 한다.

자유공동체는 권력 또는 자본을 축으로 한 권위적 사회통합방식을 거부하고, 성원 각자의 개별적 생활필요를 공통분모로 해서 자발적이며 자유의사에 따른 정의의 사회연대화를 추구한다. 그런 가운데 공동체는 누구나가 각자의 인간성과 자주적 인격에 바탕을 둔 개성과 창의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평등의 공간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기초 위에서의 자유합의에 의한 협력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끝으로 자유공동체가 민중의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의 피와 정이 통하는 생명력 있는 조직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다음 몇가지의 보다 실천적인 기본요건을 가출 때 성립된다. ,

 

1) 자유공동체의 기본 단위는 지연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자연마을(지금은 형해만 남았지만), 또는 일상적으로 얼굴을 직접 맞대고 공동활동을 할 수 있는 범위의 연대관계를 공동유대로 하여 발기한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지음으로서는 적당한 수준으로 크기를 넓혀도 무관할 듯.

2)자유공동체는 각개가 서있는 장에서 자기 주체성을 중심점으로 원을 그리는 가운데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동심원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확산시키며, 공동체와 공동체 간의 연대 또한 같은 원리로 외연을 넓힌다. 각개 또는 각집단은 상시 자연환경과의 조화에 관심을 기우리며, 어떤 형식으로든지 땅()에 발을 부치게 하는데 유의한다.

3) 공동체 내에서의 개체와 개체, 개체와 전체의 관계는 타의 인간적 존엄성과 자유를 절대 존중하는 가운데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남에에게 베풀라'는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상대에 임한다. 이 경우 각개는 항상 독자적 인격의 수련에 힘쓰며 품위와 긍지를 유지하는 가운데 이웃과 관계에서 신뢰를 축적한다.

4) 자유공동체는 생활안전, 사회안전의 보금자리를 자주협동의 공동노력으로 건설하는 데서 출발하여,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공동생활을 자주 자치 협동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5) 자유공동체의 가입탈퇴는 절대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미가입자라 하더라도 관리 상의 제한된 실무 외에는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6) 자유공동체의 시발점은 같은 환경에서 살며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소규모 연구모임을 만들어 가지고 강연, 토론, 연수교육 등 상호 자율학습활동을 하는 데서 싻을 티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러한 공동생활훈련 과정을 통해 구성원 각자의 지적 인격적 연마는 물론, 자연스럽게 상호간에 신뢰와 협력망이 구축되고, 다양한 잠재능력을 상호 인지하고 개발하는 데서 조직의 총체적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한편 상호 자율학습과정은 면 대 면의 오프라인과 인터넷에 의한 온라인 활동을 병행하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7) 휴면상태에 있는 각인의 재능과 노동력을 착취 당함이 없이 십이분 발휘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발굴하는데 서로 힘쓰며, 그 축적 위에 현안의 제반 복지문제를 외부 의존 없이 필요에 따라 향유할 수 있는 일연의 생활안전망 사회안전망을 짜는데 공동체의 역량을 결집한다.

8) 자유공동체는 법인화에 의해 외부에 대항해서 농지, 기금 등 최소한의 공동유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보유할 수 있으며, 생산소비의 직접유통을 활성화하기 위해 농공 중심의 소규모 생산활동, 신용조합 및 협동조합 등 비영리 사회기업을 자주관리 형태로 개발 운영한다. 또한 고물가, 금융경색 등 외부의 경제파동에 대한 대처수단으로 대안적 교환수단(대안화폐와 같은)을 적극 강구 보급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공동체 안팍에서의 자유경쟁은 개인의 근로이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잉여가치를 공동체의 복지활동에 환원할 것을 원칙으로한다.

9) 회의는 연차총회, 임시총회 및 분과회의로 나누어 시행하고, 연차총회에서는 결산보고,사업계획 또는 예산심의 및 임원 위촉 등을 다룬다. 모든 회의는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한다.

10) 임원은 공동체에 대한 무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름 없이 무보수 윤번제로 봉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1) 농어촌과 농어촌, 중소도시와 중소도시 간의 매개역할을 할 수 있는 자유공동체와 자유공동체 간의 다원 다양한 유대관계를 차이를 존중하는 평등의 기초 위에서 다층적으로 확대 발전시킨다.

4. 민중적 통일운동과 그 지평선 넘어

자유공동체운동 방식의 통일전략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와 통일에 대한 정세의 심각성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분단체제가 굳어진지 60여년이 되는 이제, 한반도의 통일논의는 단순히 남북간의 체제나 이념적 차원을 떠나서 주변제국들의 이익구도까지가 서로 얽힌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어간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물론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은 탈냉전으로 고립상태에 빠진 북한이다. 국제환경의 변화에다 극심한 경제난 등으로 수세에 몰린 북한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생존전략의 일환으로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고 나서는 돌출행동을 감행했다. 북한이 핵 개발카드를 꺼내들고 미국을 향해 단독협상에 응할 것을 촉구하자, 부시 미행정부는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북한정권이야 말로 '악의 축'의 하나여서 타도의 대상이지 협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반격한데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 어중간에 중국이 개입하여 3자회담, 4자회담으로 오락가락하던 논의를 남북한과, ···러 등 관련제국이 모두 참여하는 비핵화 6자회담을 성사시킴으로, 한반도문제에 대한 논의가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안전문제를 다루는 자리로 포괄되었다.

2003년부터 베이징에서 시작된 6자회담은 회수를 거듭하는 동안 9·19공동성명(4차 회담, 2006.)에다 2·13 공동합의문(6차회담)을 발표하는 등 나름으로의 성과가 없지 않았다. 이 성명과 합의문은 북한에 충분한 보상을 주고 '핵 불능화조치'를 취한 다음, "동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노력"을 약속하는 이정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6자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들어난 북한의 불성실한 태도로 사태가 걷잡기 어려운 방향으로 비화하게 되었다. , 북한은 회담 어중간에 두 번 씩이나 핵실험(2006, 2009)및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여 회담의 순조로운 진행을 방해했으며, 그에 따른 유엔의 강경 제재조치가 반복되는 가운데 6자회담 자체가 공중분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급기야 천안함·연평도사태(2010. 3, 11)를 둘러싼 남북한 긴장국면은 한미일동맹 대 북중러동맹을 재연하는 구도로 발전하였고, 더욱이 중국과 미국이 한때 서해상에서 무력시위까지 불사할 정도로 위험수위를 넘나들게 되었다. 이렇듯 미중관계가 공존에서 대결국면으로 급선회하면서, 이제는 북핵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그 불똥이 어디로 어떻게 번져나갈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 되어가고 있다. 어쩌다가 60여년이나 끌어온 한반도의 국지적인 분단문제가 또다시 그 끝을 알 수 없는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긴장관계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것인가?

이제는 그동안 논의되어오던 통일방식의 판 자체를 뒤없고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를 위한 통일이며 통일운동 추진의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가를 깊이 반추해 보아야 하며, 잘못된 것이 있으면 당연히 그것부터 바로잡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자면 이 땅의 주인이어야 하는 백성들은 일제 식민지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방 후 지금까지도 제대로 주인 대접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미소 두 점령군에 의해 국토가 두 쪽으로 분할당하고, 그들에 의해 세워진 남북의 두 대립 권력, 그것은 이미 백성들에게 있어 또 다른 상전집단일 뿐이었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지금도 늦지 않았다. 통일은 당연히 처음부타 이 땅을 지켜온 백성들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따라서 통일을 되찾는 사업 또한 앞으로도 이 강산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할 우리 백성들 스스로의 몫이라는 데 대한 깊은 통찰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주의적 통일방식이란 그 간 보았던 것처럼 아무리 선의로 해석한다 하드라도 흡수 겸병이 아니면 권력집단간의 세력균형을 위한 적대적 의존관계의 유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운명의 조타수는 바로 나 뿐이라는 데 대한 민중의 깊은 자각이 요구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서도 존재한다. 지금이야 말로 민중이 민중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이 땅의 주인 자리를 되찾느냐 영원히 노예의 쇠사슬에 묶여 지낼 것이냐의 분기점임을 맹성해야 할 때다.

그렇다면 한국의 아나키스트는 앞으로 자유공동체운동에 의해 분단문제·통일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다고 보는가? 궁극적으로 아나키스트에게 있어 통일이란 민중의 '삶의 자유'를 탈환하는 과정 그 자체일 뿐이다. 따라서 민중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의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으로서의 자유공동체운동과 통일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며, 자유·평등·상호부조의 평화로운 민중생활을 기층으로부터 시작해서 차곡차곡 자기조직화해 가는 과정이 바로 통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바꾸닌이 즐겨 쓰던 '아래에서 위로 주변에서 중앙으로'의 아나키스트 통일전략이며, 자유공동체 조직방식이기도 하다.

자유공동체 통일방식에서 보다 중요한 요소는 운동의 주체가 되어 견인차역할을 할 민중의 자발적 에너지가 폭발단계에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우리 민중은 이미 봉건시대나 왜놈 밑에서 노예생활에 안주하던 우매한 민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후퇴할 곳도 피해 갈 길도 없이 내 운명은 내가 뚫고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한 불사조가 바로 오늘의 우리 민중이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끈질긴 항쟁을 통해 독재권력을 무너트라고 민주화혁명을 승리로 이끈 것이 바로 남쪽의 시민들이다. 또한 남쪽 백성들의 이 자기결정의지에 고무되었다고나 할까, 당장 누구도 담보해 줄 자 없는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국경 너머로 탈출하는가 하면, 내가족의 호구대책부터 세워나가기 위해 텃밭 가꾸기, 장마당 가꾸기에 사생결단의 혈투를 하고 있는 것이 북쪽 백성들이 아닌가.

여기에 자유공동체· 자유연합운동에 더욱 힘을 실어줄 민중에너지의 또다른 원천은 전세계 170여개국에 산재해 살고 있는 700여만 재외 동포의 존재다. 그들은 일제에 의해 삶의 터전을 배았기고 대거 만주로 연해주로 일본으로 망명의 유랑생활을 하게 된 데서 시작하여, 분단시대에도 조국의 사랑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미국을 위시한 세계 각지로 빠져나갈 수 밖에 없던 기민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재외동포들은 각각 자기가 떨어진 자리에서 옷두기처럼 솟아나 그 사회의 유용한 성원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모국의 통일과 세계화에 관심을 갖고 장차 그 가교역할을 하는데 유용한 자원이 되리라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다.

이렇듯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 즉 운명 자결의 원칙를 깨닫고 솟구쳐 올라오는 풀뿌리 한민족의 평화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이 민중에 의한 자주협동적 자유공동체의 평화에너지를 원동력으로 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주변 다문화시민들 간의 다양한 교류협력이 중첩되는 날 한반도의 긴장 해소는 물론, 얼키고설킨 동북아시아의 집단적 안보질서문제는 비로소 그 타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과학기술의 시대요, 정보·교통의 혁명시대가 아닌가.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난 일을 즉각즉각 알 수 있으며 이웃나라 내왕이 이웃집 드나들기보다 더 가까워지게 됨에 따라, 국경의 의미가 없어지고 인간을 물리적으로 얽매어 온 모든 개념에서 자유로운 시대다. 그러니 이제는 통일을 넘어서서 더 넓은 지평을 바라 볼 때다, 그것이 우회하는 듯 하면서도 더 직접적인 통일의 길이기도 하며 우리가 세계평화운동의 허브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그 것을 향해 더 큰 자유공동의 집을 지어나갈 때이다. 동북아 자유공동의 집, 세계평화 자유공동의 집으로 뭉쳐나갈 때이다.

저유공동체운동 전개과정에서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동북아시아 제지역 주민들의 안전보장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국내운동과 연계해서 국제적으로 발전시키느냐 하는 문제다. 이 또한 해당지역마다의 평화민중을 중심으로 자유공동체운동을 기층부터 시작하는 것이 원칙이며,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동북아시아를 전쟁의 화약고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국가주의, 패권주의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한 대응태세를 가추는 일이다. 이렇게 출발한 국제적 자유공동체운동의 당면과제는 항상 불씨를 안고 있는 동북아시아 차원에서의 집단안전망 구축이지만. 궁극의 목표가 글로벌 차원에서의 세계평화로 귀결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다만 그 안보관리의 기저를 민중생활과 직결되는 기층 자유공동체에 둔다는 것이 국가 간의 세력균형이 최대의 목적인 유엔 등 국가연합기구의 기능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 밖애 없다.

이러한 평화민중의 자유공동체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집단안전망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행동전략으로서는 첫째, 1920년대 후반 한, , , 대만, 피리핀, 베트남, 인도 등 각국 아나키스트들이 중심이되어 상하이, 텐진, 푸젠 등지에서 전개했던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경륜을 적극 되살려, 운동자 간의 협력을 강화하고 민중과 더불어 공동생활훈련을 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긴요하다. 둘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구상을 여기에 선별적으로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 역내 각국의 활동자가 중심이 되어 몇개 소지구(작은 규모의 내외지 농공 교류의 축이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중소도시)를 공동선정해서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다민족 다문화의 자유공동체 평화지대를 선포한다. 이 공동지대를 중심으로 주기적인 포럼을 여는 데서 시작하여, 풀뿌리 민중들간의 평화로운 생산생활능력 향상에 주안점을 둔 제반 공동생활의 협력체제를 실험해 볼것이다. 셋째, 인터넷을 통해 170여개국에 산재해 있는 재외동포의 에너지를 적극 활용하여 자유공동체운동을 홍보하고 각 나라에 그 뿌리를 내리게 하는 데 주력한다. 등 등

 

5. 맺음말

총체면에서 자유공동체 논의가 전체적 위기 극복 차원에 비중을 두다 보니 국지적 공동체의 직접 생활이슈가 소홀해 졌고, 그와 함께 모든 대소 문제를 한 데 묶으려는 데서 생기는 무리 또한 없지 않았다.

대체로 아나키스트의 자유공동체 논의를 실천으로 옮기는데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운동 추진의 실체를 어디서 어떻게 발굴하여 재구성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 점에 있어 우리는 그동안 농촌활동을 통해 자유공동체운동의 선구역햘을 해오던 국민문화연구소 청년학생들의 온축을 대단히 귀중하게 생각한다. 그 뒤를 이어 극소수 고참들이 아직도 남아 옛 활동의 여맥을 이어가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 또한 정겹기조차 하다.

이제 자유공동체운동의 불씨를 되살려 오늘의 시점에서의 실천 가능한 몇가지 당면과제를 열거해 본다면,

첫째, 이 글에 실린 내용은 문제제기 차원의 한낯 제한된 시론에 불과한 만큼, 국가주의, 시장주의로부터 자유로운 독자적인 자유공동체운동의 개념과 체계를 정립해나가는 작업.

둘째, 전국 각지역 밑바닥에서 소외된 풀뿌리 민중과 연대하여 비정부 차원의 생활안전망, 사회안전망을 실험하고 있는 열성적인 활동가 또는 그룹을 발굴하고 소통 연대하는 장이 시급하다. 이를 위한 헌신적인 청년 학생들의 광범한 참여와 활발한 의견 교환이 요망된다.

셋째, 어느 한 지역을 공동실험지구로 지정해서 계획적으로 공동육성 해보는 계획.

넷째, 연구조사, 교육 훈련, 홍보 및 온 오프 네트웍 활동 등을 팀 별로 활성화시키는 일.

 

궁극적으로 자유공동체 논의는 한반도 평화정착문제 또는 동북아 집단안보문제와 마찬가지로 지금으로서는 하나의 몽상이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 있을 수 없는 것을 현실화하는 것이 유토피아라고 할 때, 문제는 오히려 그 염원이 얼마나 절실하고 합리적인 것이냐의 여부에 달렸다고 보아야 한다. (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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