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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유공동체인가
이 문 창
"아나키는 코뮌주의로 통하며 코뮌주의는 아나키로 통한 다. 양자는 다같이 현대사회의 지배적 경향인 평등 추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
< 머리말 >
아나키즘은 자유 평등 상호부조를 최상의 가치로 하여, 이를 억누르는 일체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의 아나키스트 선열들은 이 신념을 바탕으로 하여 조국과 동포의 생존적 자유를 되빼았기 위해 신명을 바쳤으며, 특히 같은 처지의 이웃나라 각국 동지들과 동아시아의 자유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여 공동전선을 펼치고 싸웠다. 이와 같은 우리 선열들의 반 패권, 반 자본주의 투쟁은 해방 후의 혼란기에 들어와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가 연합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 점령되었을 때,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적 자주권 쟁취와 자유 평등의 통일사회 건설을 당면한 사명으로 알고 궐기했다. 그러던 것이 북한에 소련식 공산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등장하고, 그에 대응하여 남한에 반공을 이념으로 하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니 아나키스트들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절박한 상항 속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단지 말로서만이 아니라, 일면 반 패권주의 투쟁, 일면 자유사회 건설의 길을 실천적으로 개척해 왔다. 그런 과정에서 도달한 우리나름의 중간 결론이 민중사회에 자주협동의 자유공동체 모형을 실험해 보고, 그 것을 자유연합 방식으로 전국에 확산시켜보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유공동체란 무엇이며, 특히 분단으로 인한 정치적 부자유, 경제적 불평등의 억눌림 속에서 신음하는 공동운명체체로서의 민중에게 자유공동체운동이 왜 대안이 될 수있는가? 한마디로 한국아나키스트들이 단순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민중의 실제생활 속에서 터득한 자유공동체란 평화민중이 직면한 실존적 위기를 민중 스스로의 자주협동 역량으로 타개해 나가는 데서 새로운 동력을 발견해 보자는 것이었다. 민중의 그 순박한 공동생활에너지를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원리에 적용시켜 자주자발적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데서 스스로의 자유를 회복함은 물론, 분단된 한반도의 위기 극복과 동아시아 전 지역의 평화체제 수립에 선도적 역할을 하자는 것이 우리 아나키스트들의 야심찬 당초의 구상이요, 그간의 지나온 경과였다.
< 왜자유공동체인가? ><오오<오< 왜 자유공동체인가 >
한마디로 자유공동체운동이란 기왕의 어떤 학자가 책상머리에 홀로 앉아 머리를 짜낸 사상이 아니며, 어떤 혁명가나 정치지도자가 권력의 힘으로 변혁을 시도하는 식의 그런 대안은 더욱 아니다.
'경제적 작취와 정치적 사회적 노예화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줄 주체는 민중 스스로이다. 따라서 자유공동체는 '인간자유에 대한 절규'를 출발점으로 해서 스스로의 자유를 스스로 쟁취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로 뭉친 백성들의 결집체여야 한다. 더 이상 투표용지에 속고 살 수만 없다는 각성에서, 그리고 자기들을 구해줄 자는 종당 벼랑 끝에 선 자기들 자신뿐임을 깨달은 데서 같은 처지의 이웃끼리 동병상련으로 서로 결속하여 서로의 아픈 곳 가려운 곳을 서로 보살펴가며 공동의 자위자치태세를 가추려는 민중 스스로의 삶의 유기적인 안전망이 곧 자유공동체이다.
자유공동체는 공동체 자체의 자유가 어느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침해 당하는 것을 경계하며, 어느 한 두 지도자나 편파 또는 계급의 헤게모니에 편중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또한 어느 거대한 외부의 정치력이나 자본의 일방적 침투를 용인하지 않으며, 억지로 배당한 것이 아닌 평등화를 공동의 자유의지로 실현할 것을 기한다. 노동과 관련된 모든 유기적인 경제활동이 관계자 상호 간에 또는 전체 구성원 간에 자유합의로 운영하며, 누구에게도 문호가 항상 열려있는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이렇듯 너와 나, 개체와 전체 간에 직접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조화를 이룬 자치체란 점이 종래의 권위적 마을조직과 차별되는 점이다.
한편 자유공동체는 그 규모면에서 일상적으로 손과 손을 맛대 직접교류를 할
수있는 지근 거리의 풀뿌리자치를 지향한다. 그래야만 구성원 상호간의 이해관계
도 훨신 단순화되고 모순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지금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지방자치법의 기초자치구란 우선 그 규모면에서 시와 군 범위로
덩치가 커 주민의 의지와는 상관 없는 중앙정부의 말단 행정조직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진정한 풀뿌리자치의 복원을 위해서는 읍·면·동이나 그보다도
더 작은 단위에서 주민들이 동내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드릴 수 있는 근거리 지
역공동체를 중심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런 작은 풀뿌리공동체들이 서로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연대체를 구성해나가는 데서만이 전체 사회구조를 진정한 유기적 연
대체로 변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무엇부터 할 것인가 >
끝으로 우리가 자유공동체운동의 불씨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살려 실천에 옮가기 위한 당면 고려사항으로는
첫째, 항일 반 권력투쟁과 자유연합사회 건설에 신명을 바치셨던 선구자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현사회의 부정불의에 분로하고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데서 자유공동체운동에 참여하려는 열정적인 동지들을 어디서 어떻게 발굴하고 규합할 것인가?
두째, 그런 동지들이 모여 자주학습·공동생활훈련을 실행하는 과정에 필요한 사안은 어떠한 것이며, 자유공동체운동의 이념과 행동체계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
셋째, 시범케이스로서 한 두 지역을 택해 그 지역 주민들과의 협력하에 자유공동체의 기층조직을 만들어 실험해 볼 방법은 없는가?
넷째, 현재 전국의 도시와 농촌 등 각 지역에서 법과 행정의 뒷받침아래 우후죽순처럼 태동하고 있는 귀농 귀촌운동, 마을공체운동, 협동조합운동 등이 어떻게 하면 '죽엄의 키스'에 사로잡히지 않고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할 수 있게 할 것인가? 이들이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상호연락 및 정보교환을 하도록 유도할 수는 없는가?
다섯째, 자유공동체운동은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원칙에 입각한 사회 구조개혁운동이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전체사회의 한 세포단위인 지역사회 내에서의 전체와 개체, 개체와 개체, 집단과 집단 등 다양한 공동생활문제를 정의롭게 조절해 나가는 데 필요한 리더쉽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풀뿌리자치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공동체문화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행조건으로서 정치의 지방분권화 조치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일부 시민단체들 간에서 "이제는 중앙집권체제에서 벗어나 지방분권체제로 국정운영의 틀을 기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공론이 일기 시작한 것은 특히 주목할 만 하다. 그간 우리 사회는 효율화니, 획일화니 압축성장이니 하는 허울 좋은 근대화시책에 떠밀려 환경 파괴와 농촌의 해체, 그리고 모든 자원과 사람의 일방적인 수도권 집중 등으로 몸살을 알고 있다. 그런가운데 소모적인 정치갈등, 지역적 불균형과 반곤 실업 소외 범죄 등 온갓 심각한 사회문제들이 그것으로부터 야기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추세 아래서, 사람과 백성들이 숨쉬고 살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건설하기 위해 지방분권화는 자유공동체운동의 첩경이라 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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