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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아나키스트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아나키스트들의 화원 베이징
1920년대 중국 베이징은 아나키즘의 일대 화원을 이루고 있었다. 동방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이때처럼 거물 아나키스트들이 한 도시에 집거하고 활동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마치 일본 ‘메이지(明治) 데모크라시시대’에 사상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각종 이념과 사상이 난만했던 도쿄에 비유된다.
베이징대학 총장 채원배(蔡元培)를 비롯하여 신세기파의 오치휘(吳稚暉)ㆍ이석증(李石曾) 등이 베이징에 자리잡고, 중국의 대문호 파금(巴金)과 루쉰(魯迅)이 있었다. 여기에 러시아 맹인 시인이면서 아나키스트인 에로생코ㆍ타이완의 임병문(林炳文)과 범본량(范本樑)도 베이징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일본 아나키즘의 비조라 할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세례를 받은 일본 아나키스트들도 드나들었다.
이것이 중국에서 최초의 한인 아나키즘 단체라 할 수 있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무련)이 결성되는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 먼저 1920년대 동방의 정세와 아나키즘에 심취한 독립운동가들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국내에서는 3ㆍ1혁명의 거족적인 항쟁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고, 그 결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대단히 어려운 여건에서도 대첩을 이루었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또 많은 희생을 치렀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탄압에도 노동자 총파업 등 노농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만큼 희생자도 많았다.
1920년 1월에 국제연맹이 결성되고,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창립되었다. 공산당 창립은 중국 대륙을 격동시켰다. 코민테른은 세계공산화 전략의 일환으로 중국을 주목하고 보이틴스키를 베이징으로 보내 중국에서 공산주의 이념에 밝은 베이징대학 교수 이대교(李大釗)와 5ㆍ4운동의 지도교수 진독수(陳獨秀) 등을 만나게 하였다. 이로써 중국에 공산주의이데올로기가 크게 전파되었다.
1923년 2월 국민당의 손문이 광동에서 대원수에 취임하고, 1924년 1월에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과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을 죽이려한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자경대와 경찰에 의해 6.000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박열 등 한국 아나키즘운동가들을 대역죄로 몰아 구속하였다.
이즈음 동양 각국에서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여파로 사회주의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짧은 기간에 당세를 키워서 국공합작을 이룰만큼 세력을 이루었다. ‘무련’이 창립된 1924년 경 님 웨일즈는 한국독립운동의 사회적 지형을 의열단의 예를 들어 이렇게 적었다.
1924년 조선의 계급관계가 뚜렷이 변화해서 조선의 정치방향이 전반적으로 재조정될 시기에 이르자 의열단은 세 갈래로 분열되었다. -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이 세요소는 이전부터 무정부주의 철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같은 대열 속에 공존하고 있었지만, 결사가 하나의 결합력을 갖는 단위로 되어왔던 것이다.
이렇게 분열된 이유는 조선자체의 대중운동이 상당한 수준까지 솟구쳐 오르고 있었으며 1924년에 이르러 대중운동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의 발전은 의열단원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정당성을 새로이 증명해 주었다.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가들의 인식은 어땠을까, 무련의 창립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몇 해 후 ‘무련 선언문’을 지었던 신채호의 경우를 통해 일별할 수 있을 것 같다.
1916년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진화론에 입각해서 민족주의운동을 전개하던 신채호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목격하면서 점차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사회개조ㆍ세계개조론과 결합된 대동사상을 수용하게 되었고, 1919년 3ㆍ1혁명에서 드러난 민중의 힘을 목격한 이후로는 점차 민중해방을 표방하는 사회주의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3ㆍ1운동의 성과물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였지만, 임시정부가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이에 반대하여 반임정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교론과 준비론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노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즘을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고,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을 정립해나갔다.
이회영ㆍ유자명ㆍ이을규 등 ‘무련’창립
1924년 4월 말 어느날 이회영ㆍ유자명ㆍ이을규ㆍ이정규ㆍ정화암ㆍ백정기 등이 베이징에서 무련을 창립하였다. 대부분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에 반대, 무장투쟁론을 주창하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다.
신채호는 1924년 3월부터 생활고를 해결하고 집필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베이징 근교에 있는 사찰 관음사에 들어가 승려생활을 하고 있었고, 유림(柳林)은 이때 성도대학(成都大學) 재학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베이징 이회영의 거처는 독립운동가들의 집합소역할을 하였다. 좌우보혁을 불문하고 그의 집으로 찾아들었다. 이회영의 집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느냐가 독립운동의 연륜과 동일시한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이회영의 집에는 그간 여러 채널을 통하여 아나키즘을 습득한 인사도 적지 않았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회영을 중심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실망하고, 밀물처럼 밀려드는 사회(공산)주의 조류에 대응하고자 하여 무련을 창립했을 것 같다. 창립 멤버였던 정화암의 증언을 통해 무련의 창립 배경을 살펴보자.
북경에 있을 때에, 러시아인으로 장님인 에로생코(Eroshenko)라는 시인이 있었지. 아주 유명한 시인인데, 그 사람이 일본으로 갔다가 일본에 더 있지 못하게 되니까 북경으로 왔던 것입니다.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지요. 이때 북경대학에는『아큐정전』으로 유명한 노신(魯迅)이 역시 교수로 있지 않았습니까?
이 두 교수가 무정부주의자 즉 아나키스트(anarchist)의 영향을 주었는데, 우리도 그들과 교류하다가 거기에 젖었지요. 특히 에로생코는 볼셰비키혁명 이후의 러시아 현실에 대해 많이 말해 주었어요.
볼셰비키혁명 이후에 크론스타트(Kronstadt)라는 곳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 수병들의 반란을 레닌이 무자비하게 진압해 수많은 수병들을 죽인 사실, 또 우크라이나에서 농민들의 반란을 탄압하고 학살한 사실을 자세히 들었어요.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구나”하고 새삼 깨달았지요. 그래 자연히 아나적(的)인 사고방식에 하루하루 깊이 젖어들게 되었지요.
무련의 창립멤버는 단촐했지만 면면은 독립운동이나 향후 아나키즘운동에 일당백의 투사들이었다. 여기에 신채호와 유림 등 맹장들이 참여하고 여러 젊은 투사들도 가입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독립의 사상노선은 일제 강권을 부인하기 위해 소련의 볼셰비키 노선이나 적화(赤化)의 독재정치를 피하고 항일투쟁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반강권, 반군국의 아나키즘에 공명할 수밖에 없었고, 임시정부 조직과정의 파벌현상에 염증을 느낀 북경의 운동자들은 자유연합의 아나키즘적 조직원리를 채택하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무련의 창립멤버인 이정규는 이회영 등이 독립운동의 이데올로기로서 아나키즘에 공감하게된 사연을 증언한다.
목적이 방법과 수단을 규정하는 것이지 방법과 수단이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는 이 논리로 볼 때에 한 민족의 독립운동이란 것은 그 민족의 해방이며 자유의 탈환일진데 또 이런 해방운동, 혁명운동이란 것은 자각과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들에 의해서 추진되는 까닭에 그 운동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의식이 강한 이런 운동자들에게 맹목적인 복종과 추종이란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있다면 거기에 그런 예가 있다면 오직 운동자들의 책임감과 사명감에서 타협과 양보에서일 것이니까, 가지고 있는 강권중심의 사고에서 그런 행동을 가지고 명령과 복종으로 해석할 뿐이지 이 세상에는 결코 강권적인 권력중심의 명분조직으로 혁명운동이나 해방운동이 이루어진 예가 없는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크로포토킨의 영향으로 한국 아나키즘의 이론가가 된 유자명은 자신들이 당시 사회사상의 대세처럼 번지고 있던 마르크스즘에 동의하지 않고 아나키즘에 경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그 때 조선인민의 앞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민족해방 투쟁이 중요한 과업으로 나섰으므로 민족모순이 중요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맑스와 엥겔스가「공산당선언」에서 제출한 계급투쟁에 관한 일부 학설을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이때로부터 점차 무정부주의자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정의공보’ 기관지 발행
창립을 선언한 무련은 아나키즘의 홍보와 선전, 맹원을 모집하기 위해 이회영의 지원으로 기관지『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행하였다. “일본 관헌의 감시가 매우 심했고, 우리가 자금이 너무 없었어요. 이틀에 한 끼, 그것도 좁쌀밥으로 한 끼밖에 못 먹은 때가 많을 정도로 생활난이 심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정의공보』는 순간으로 9호까지 발행하였다.
무련은 기관지로서 순간『정의공보』를 석판으로 발행했다. 우당이 약간의 자금을 조달한 것이다. 이 순간지는 중앙집권적 공산주의와 파벌주의적 독립운동자들을 비판하면서 자유연합의 조직원리에 따라 모든 독립운동세력들이 서로 협조하고 서로 제휴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독립운동 단체들의 영도권 쟁탈의 싸움과 한 집단내에서의 자리다툼에 대하여 냉혹한 비판을 가하고 모든 독립운동 단체들이 무정부주의적 자유연합의 원리 아래 전력을 집결할 것을 강력히 호소해 나갔다.『자유공보』는 9호까지를 내고 자금 부족으로 부득이 휴간했다.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무련을 조직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활동을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기 어려웠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의 본령대로 강고한 조직체제보다 각자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였다. 이회영은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베이징에 남고 정화암ㆍ이을규ㆍ이정규ㆍ백정기 등은 1924년 9, 10월 경 상하이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다시 합류하여 “중국 아나키스트 노검파(盧劍波)ㆍ진위기(陳偉器)ㆍ대만인 아나키스트 범본량ㆍ장홍수(莊弘秀) 등의 화남아나키스트 연맹과 손잡고 노동자들의 사상계몽과 조직화에 노력하는 한편, 1925년 상해 5ㆍ30운동에도 참가하였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주물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화남아나키스트연맹과 손잡고 노동자 사상계몽에 힘쓰는 한편 상하이 공당연합회를 확충하는데 노력하였다. 무련은 1926년 크로포토킨의『법률과 강권』,『무정부주의자의 도덕』등 10여 편의 관련 소책자를 번역하여 아나키즘을 소개하였다.
무련이 창립되고 활동할 무렵 베이징에는 류기석 등이 중심이 되어 또 하나의 아나키즘 그룹이 조직되었다. 중국 아나키스트 향배량(向培良)ㆍ이패감(李沛甘)ㆍ파금(巴金) 등과 손잡고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흑기연맹을 조직한 것이다. 이들은『동방잡지』를 발행하여 아나키즘을 연구하고 선전활동을 벌였다.
1926년 3월에는 심용해와 여군서 등이 베이징에서 중국어로『고려청년』이라는 아나키스트 잡지를 발행하고, 9월에는 류기석과 심용해ㆍ오남기ㆍ정대동 등이 중국인 정모(정某) 등을 포섭하여 크로포토킨연구그룹을 결성하여 각국 아나키스트단체와 연계하면서 간행물 등을 교환하였다.
1920년대 중국에서 활동한 한국 아나키즘운동 단체 중에는 1927년 10월~1928년 3월 사이에 베이징에서 결성된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연맹)을 빼놓을 수 없다. ‘연맹’은 『탈환』이라는 기관지를 1928년 5월부터 한ㆍ중ㆍ일 3개국어로, 격월간 발행하였다. 이 역시 자금 사정으로 9호까지만 발행되었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부정하면서, 생산자 자치를 위주로 하는 자유평등원리상에 기초한 신사회로 자본주의사회를 대신할 것을 주창하였다.
그런데『탈환』은 무련에서 정간중이던『정의공보』를 개제하여 1928년 5월부터 속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탈환』은 중국의 한국아나키즘운동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이념ㆍ이론지의 역할을 하였다.
『탈환』지 창간호를 보면 1928년 6월 1일 발행으로 되어 있다.
영어 제목은 The Conquest이며, 표지에 “하나님에게 폭탄을 던지자!”와 “각종 자본주의를 박멸하자!”라고 쓰여 있다.
영어 이름을 The Korean Anarchist Federation in China라고 표기하고 있다. 창간호 증간호는 1928년 6월 15일 발행되었는데, “모든 빼앗긴 자유를 탈환하자!”와 “만인이 다 탈환한 모든 자유의 주인이 되자!”라는 구호를 제시했다. 여기서 탈환이란 말은 크로포토킨의 『빵의 탈환Conquest of Bread)』에서 나왔을 것이다.
밀정처단하고 나석주 의거 주도
무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조선에서 무지배ㆍ무강권ㆍ무착취를 보장하는 아나키즘사회를 구현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강도일본’을 조선과 중국에서 축출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그래서 무련은 의열단ㆍ다물단과 손잡고 폭렬투쟁을 전개하는 데도 거릿끼지 않았다.
이회영ㆍ유자명ㆍ신채호ㆍ김창숙 등은 1923년 베이징에서 항일 지하비밀단체인 다물단(多勿團)을 창단하였다.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아들 규준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고, 신채호가 선언문을 쓴 다물단은 의열단과 함께 1925년 3월 30일 거물급 밀정 김달하를 처단하였다.
독립운동 단체를 분열시키고 유림출신 김창숙을 총독부 어용기관인 경학원 부제학으로 훼절시키고자 접근하다가, 이 사실이 김창숙에 의해 폭로되고, 다물단원 이기환과 의열단원 이인홍이 김달하를 그의 집에서 처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직접 행동에 나섰던 두 사람은 중국 경찰에 구속되어 투옥되고, 이회영의 딸 규숙이 체포되어 1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으며, 무련의 간부들은 가택수색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무련이 깊숙이 개입한 또 다른 의열투쟁은 1926년 12월 28일 서울 남대문 부근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거였다. 이회영ㆍ김창숙 등은 1925년 봄 내몽골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부지 매입과 황무지 개간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김창숙이 은밀히 입국하였다. 하지만 모금액이 3.500원에 그쳤다. 기지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에는 크게 모자랐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기로 하였다. 임시정부의 김구 등과 협의하여 의열단원 나석주를 국내로 밀파하여 적의 주요 건물을 폭파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동양척식회사 등의 투탄사건이다.
김창숙이 가져온 돈으로 권총과 폭탄을 구입하고 국내잠입의 비용을 주어 거사케 한 것이다.
나석주 의사는 의거 후 순국하고, 김창숙은 1927년 2월 밀정의 제보로 일경에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 일제 패망 때까지 옥살이를 하였다.
무련은 이에 앞서 1925년 여름 임시정부ㆍ의열단과 합동으로 베이징에서 암약하는 일제의 밀정 김창수를 처단하기로 준비하다가 임정 측 민모의 위약으로 이 공작은 실패로 끝났다.
무련, 한국아나키즘운동의 원류
1928년 5월 난칭에서 신채호 등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동방연맹)을 결성하였다. 한국ㆍ중국ㆍ대만ㆍ베트남ㆍ인도 등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동방연맹’을 결성하면서 “국제적 유대를 강화하여 자유연합의 조직원리 아래 각 민족의 자주성과 각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고, 서기국 의원으로 이거국 등을 선출하였다. 기관지『동방』을 발행하였다.
‘동방연맹’은 얼마 후 이를 주도한 신채호가 국제위폐사건으로 구속된 데 이어 창립멤버 이을규 그리고 무련을 주도했던 이회영이 조직의 확대를 위해 1932년 만주로 가던 중 다이렌에서 피체되었으며, 이를 전후하여 이정규ㆍ유림 등이 일경에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면서 활동이 중지되었다.
돌이켜보면 무련의 창립은 참가자가 많지 않고 활동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선의 엘리트들이 자본주의와 사회(공산)주의를 배척하면서 조선과 동방을 넘어 인류구원의 이념체계로서 아나키즘을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한국아나키즘운동사의 원류에 속한다. 이후 중국 관내는 물론 만주ㆍ조선ㆍ일본 등지에서 아나키즘 단체가 속출하면서 맥을 이어갔다.
특히 중국에서는 앞에서 소개한 아나키즘 단체 외에 조선혁명자연맹,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이 창립되고, 국내에서는 흑기연맹, 흑색청년연맹, 관서흑우회,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이 속속 결성되어 항일투쟁과 아나키즘세상의 구현에 진력하다가 일제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놀라운 사실은 명칭에는 ‘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등을 내걸고도 자본주의ㆍ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아나키즘이데올로기를 선언문이나 강령에는 채택했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에는 ‘반자본ㆍ반공산’이라는 무련의 정신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려는 원초적인 본능”인 아나키즘이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패악이 극성을 부리는 오늘날 인류의 대안으로 거듭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련이 1928년 4월 베이징 대회에서 채택했던 선언문에서, 무련의 목표와 이념적 지향성을 찾게 된다. 창립 후 참여한 신채호의 작품이다.(발췌)
무련 선언문
세계의 무산대중, 그리고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피와 가죽과 살과 뼈를 짜 먹어온 자본주의 강도제국 야수군(群)은 지금에 그 창자, 배가 터지려 한다.…민중은 죽음보다 더 음산한 생존 아닌 생존을 계속하고 있다.
최대다수의 민중이 최소수의 짐승 같은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살을 찢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의 군대 까닭일까, 경찰 때문일까, 그들의 흉측한 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는 그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발달 성장해온 수천 년 묵은 괴물들이다. 이 괴물들은 그 약탈행위를 조직적으로 백주에 행하려는 소위 정치를 만들며, 약탈의 소득을 분배하려는 소위 정부를 두며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지위를 누리고자 하여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지위를 누리고자 하여 반항하려는 민중을 제재하는 소위 법률ㆍ형법 등의 조문을 제정하며 민중의 노예적 복종을 강요하는 소위 명분ㆍ윤리 등 도덕율을 조작한다.
(…) 민중이 왕왕 그 약탈에 견디다 못해 반항적 혁명을 행한 때도 있지만 마침내 기개 교활한에 속아 다시 그 강도적 지배자의 지위를 허여하여 '이폭역폭(以暴易暴)'의 현상으로 역사를 반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곧 다수가 야수들에게 유린을 당해온 원인이다.
(…)우리 민중은 참다 못하여, 견디다 못하여(…) 재래의 정치ㆍ법률ㆍ도덕ㆍ윤리 기타 일체 문구(文具)를 부인하고자 한다. 군대ㆍ경찰ㆍ황실ㆍ정부ㆍ은행ㆍ회사 기타 모든 세력을 파괴하고자 하는 분노의 절규 ‘혁명’이라는 소리가 대지 위의 구석 구석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울림이 고조됨에 따라 그들 짐승의 무리도 신경을 곤두세워 극도로 전율하는 인광으로 우리 민중이 태도를 살펴보고 있다.(…)
우리 민중은 알았다. 깨달았다. 그들 짐승의 무리가 아무리 악을 쓴들, 아무리 요망을 피운들, 이미 모든 것을 부인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세계를 울리는 혁명의 북소리가 어찌 갑자기 까닭없이 멎을소냐. 벌써 구석구석 부분부분이 우리 민중과 그들 소수의 짐승 무리가 진형(陣形)을 대치하여 포문을 열었다.
알았다. 우리의 생존은 우리의 생존을 빼앗은 우리의 적을 섬멸하는 데서 찾을 것이다. 일체의 정치는 곧 우리의 생명을 빼앗는 우리의 적이니, 제일보에 일체의 정치를 부인하는 것,(…) 그들의 세력은 우리 대다수 민중이 부인하며 파괴하는 날이 곧 그들이 존재를 잃는 날이며, 그들의 존재를 잃는 날이 곧 우리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ㆍ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날이요 곧 개선의 날이니 우리 민중의 생존할 길이 여기 이 혁명에 있을 뿐이다.
우리 무산 민중의 최후 승리는 확실한 필연의 사실이지만, 다만 동방 각 식민지의 무산대중은 자래로 석가ㆍ공자 등이 제창한 곰팡내 나는 도덕의 ‘독’ 안에 빠지며 제왕ㆍ추장 등이 건설한 비린내 나는 정치의 ‘그물’ 속에 걸리어 수천 년 헤메다가 일조에 영ㆍ독ㆍ일 등 자본제국 경제적 야수들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압력이 전속력으로 전진하여 우리 민중을 맷돌의 한 돌림에 다 갈아 죽이려는 판인즉, 우리 동방민중의 혁명이 만일 급속도로 진행되지 않으면 동방민중은 그 존재를 잃어 버릴 것이다.
그래도 존재한다면 이는 분묘 속(…) 우리가 철저히 이를 부인하고 파괴하는 날에 곧 그들이 존재를 잃는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