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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8-10-29 조회수 1538
파일첨부 가메다 히로시.hwp
제목
1920년대 박열, 가네코 후미코의 활동-가메다 히로시

1920년대 박열, 가네코 후미코의 활동

<불령사, 예심신문, 대심원에서의 주장>

 

가메다 히로시(?田博토스키나아 편집인

 

 

 

1. 시작하면서

지난해 6월 지금의 일본국가에 있어서 공공연히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한 공모죄인 법률이 제정되었다. 공모죄의 본질은 일본 제국시절에 남용된 대역죄, 치안유지법과 마찬가지로 사회운동가를 탄압, 날조하기 위한 법률이다.

정부, 자민당, 공명당에 의한 연립정권, 총리대신 아베는 자위대를 군대로서 일본이 전쟁 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 헌법을 개악하려 하고 있다. 그 때문에 평화를 원하는 아시아인, 세계인들과 연대하는 사회운동의 확산을 두려워해 몇 가지 법률을 제정, 개악해 왔다.

지금 자민당이 준비하려는 새 헌법 초안에서는 일왕을 상징에서 국가원수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상황 하에서 대략 100여년전 일본제국 내에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함께 싸운 사실을 검증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2 전사(前史)

도쿄 사회주의 유지자 결의

1907년 도쿄에 결집한 아시아 사회주의 활동가의 영향을 받아 직접행동파와 의회주의파로 분열되었던 일본의 활동가들은 공동 성명문을 발표한다. 721일의 도쿄 사회주의 유지자 결의인 것이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자유, 독립, 자치의 권리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책은 만국평민계급 공통의 이익에 반대하는 것이므로 일본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보장 할 언책에 충실하기를 바란다가 전문 오사카 평민신문(大阪平民新聞)』『사회신문(社會新聞)으로 게재되었다. 이와 함께 같은 해 여름에 도쿄에서 인도, 중국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아주화친회(亞洲和親會)가 발족했다.

 

일본사회주의동맹의 결성과 해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생활로 고투하던 1920년의 여름 사회변혁의 움직임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해 일본사회주의동맹이 결성. 오랜 사회주의자 이외, 실질적인 사회주의자가 잇달아 출현한 사회주의자의 단결.

1014일의 시점에서 약 1천명의 참가 신청. 오스기 사카에는 여름에 도쿄로 내방한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세계 공산당)으로부터의 밀사와 접촉. 조선의 활동가는 이증림(李增林)으로 추정. 오스기는 상해에서의 코민테른 주최 극동사회주의자회의에 비밀리에 참가. 10월에 열린 코민테른의 보이친스킨, 중국 공산당 설힙을 준비하던 진독수(陳獨秀) 등이 참가한 회의. 한편 일본사회주의자동맹은 관헌의 허를 찌르고 결성대회로 고지했던 1210일 전날 밤인 일 9일 모임에서 결성을 선언한다.

 

협동 노선을 선택한 오스기 사카에

 오스기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제공받은 활동자금으로 공산주의자 곤도 에이조(近藤榮藏), 다카쓰 마사미치(高津正道) 등과 협동해, 이듬해인 19211월에 노동운동을 주간으로 복간시키고, 아나?볼 협동노선진행 중인 러시아혁명을 소개했다.

1월에 발행된 주간 노동운동창간호는 일면에 (일본의 운명)이란 논문이 무기명으로 게재되어 ....노동자는 모든 사회적 사건에 대해서, 노동자 자신의 판단, 노동자 자신의 상식을 쌓아라. 그리고 그 상식을 구체화하는 위력을 얻기 위한, 충분한 단체적 조직을 가져라라며 노동자 주체의 변혁을 호소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만남

가네코 후미코는 1921년 여름이 되자 조선의 활동가로 공산주의자인 정우영, 김약수, 그리고 아나키스트인 정태성 등과 알게되면서 교우를 시작한다. 11월이 되어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는 히비야(日比谷)의 일품요리집, 통칭 이와사키 오뎅집의 여급으로 입주해 일하며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는 야학으로 전환한다. 거기서 나중에 동지가 되는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를 알게된다.

조선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의 만남에는 궁극의 평등주의, 일왕 존재의 부정이라는 사상으로 이어진다.

 

흑도의 간행

박열은 3?1운동에 참가해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 온다. 도쿄에서 생활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 활동가들과 함께 흑도회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조선인들에 의한 사회주의 단체 결성은 이것이 처음으로 박열과 후미코의 교우범위가 겹친다.

19224월이 되자 박열은 영국 황태자 내방에 대비한 예방검속으로 요도바시(淀橋)경찰서에 16일간 검속된다. 그 검속에서 풀려난 직후 세타가야(世田谷)의 이케지리(池尻)에서 후미코와 동거에 들어간다. 도쿄 에바라군(荏原郡) 세타가야 이케지리의 길로딘사의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와 나카하마 테쓰(中浜?)도 활동을 개시한다.

 7월에 창간된 운동지 흑도는 박열이 편집하고 연락처는 두 사람의 주소인 세타가야 이케지리. 후미코도 문장을 게재. 흑도회의 결성 선언을 게재.

공산주의계의 멤버는 집필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나노가와(信濃川) 사건

박열은 8월에 조직된 시나오가와 학살 진상조사회에 조사위원으로 참여. 시나노가와 사건은 19228월 요미우리 신문이 최초로 보도. 시나노가와에 조선인 노동자의 시긴, 몇 구가 떠다닌다는 자극적인 표제.

 당시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사건으로 불린 사건의 발각. 실제로 사체가 발견된 것은 상류 나카쓰가와(中津川)로 겟토(穴藤) 발전소를 건설 중이던 노동자. 사건 발각 후 동아일보는 기자를 니가타(新潟) 현지로 특파해 수력발전소 건설현당인 겟토지구를 중심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 학살 조사와 취재를 바탕으로 연재기사를 게재. 97일에 조사회 주최 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문제 연설회가 간다(神田)에서 열리지만 도중에 해산.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사회주의자와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처음으로 협력해 개최한 집회. 박열은 연설회에서 현지조사를 보고하고, 나아가 서울의 사상연구회로부터 초대받아 시나노가와 학살 진상보고연설회에 출석. 1회 메이데이를 계기로 요구된 노동조합의 연합도 이 1922930일에 전국노동조합연합회로서 대회가 열렸다. 자유연합주의와 중앙집권주의의 세력다툼에 의해 창설은 실패. 생디칼리즘의 신장과 7월에 대회가 열린 일본공산당의 조직활동강화로 분기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흑우회의 결성

같은 달 흑도회 분열도 시작되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9월경 공산주의자파 회원과 무정부주의파 회원들과 사상에서의 충돌로 분열해 무정부주의측은 흑우회, 공산주의측은 북성회를 조직했습니다(가네코 후미코 제5회 신문조서, 24124)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운동지 후테이 센진(鮮人)--불령선인을 비꼰 이름을 동인제로 발행, -- 1월에 창간호를 발행, 테두리 밖에 후테이 센진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12월에 제2호 발행, 가네코 후미코는 소위 불령선인이란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 해 싸웠을 때만이라는 표현이 있고, 그 앞은 활자가 깨져있어 결론은 모르지만 직접적으로 체제를 비판한 것이다.

다음해인 1923315일의 제3호의 타이틀은 관헌의 개입으로 현사회로 개제. 후미코는 1919년의 3?1독립운동을 기념해 재일조선인 제군에게조선□□기념일이라는 기사를 쓴다. 모든 것이 활자가 깨져있었으며 게다가 붓으로 먹칠을 하는 바람에 무슨 표현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불령사의 결성과 활동

3월말 경 두 사람은 도쿄 도요타마군 요요하타조 도미가야로 옮기고, 불령사,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는 조선과 일본의 활동가 그룹을 시작. 흑우회에 가입한 동지도 참가.

5, 가네코 후미코는 메이데이 집회, 데모를 벌이다 검거된 보고를 기사로 한다.

「……메이데이 날, 저는 다른 4, 5명의 동지와 함께아타고(愛宕)경찰서의 신세를 지고하룻밤을 보냈다...…『현사회4). 27일 불령사 1차 정기모임이 열려 조선의 수평운동인 형평사에 대한 격려를 상의한다.

 

628일 불령사의 제4회 정기모임이 열려 박열은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출옥을 나카노의 도요타마에서 맞이하고 불령사에서 환영회를 연다.

630현사회4호가 발행. 후미코가 쓴 깨진 유리창에서에는 4월의 어느 사건으로 박열이 체포되어 후세 타츠지 변호사에게 구원을 부탁하러 간 일 등이 기록되었다.

 

흑우회의 내부 대립

731, 니야마는 오스기 사카에를 찾아가 다음날의 흑우회에서의 강연을 부탁. .

81일 흑우회 정기모임이 열리지만 박열과 구리하라 카즈오와 니야마 3명 출석. 83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흑우회 주최의 조선문제 연설회도 중지 명령을 받았다.

86일 오스기의 강연으로 니야마의집에 10명 정도가 모였지만 오스기 본인이 바쁘다고 해서 강연은 취소. 흑우회 해산 이야기도 나온다. 오스기는 개조잡지에 게재하는 투옥에서 추방까지라는 제목의 파리 라상태 교도소의 옥중기를 10일에 탈고. 이후에 다른 논문과 함께 일본 탈출기로 단행본으로 엮여진다.

 

니야마 하츠요는

818일 자유인사에서 열린 오스기 사카에의 이야기를 경청하러 가고 19일에는 시바공원 노자협조회관에서 기계연합의 총회를 방청. 20일 네즈곤겐(根津權現)의 대실에서 오스기 사카에, 모치즈키 카쓰라(望月桂), 이와사 사쿠타로 등 2,30명이 모인 무정부주의자의 연합조직 문제의 상담회가 열렸으며 니야마는 정()과 함께 그 모임에 간다. 김중한, 홍진유가 왔으나 박열, 가네코 후미코는 불참.

29일 아침에는 경시청의 내선계가 니야마를 찾아와 사상이나 교제의 범위를 묻는다. .

그 사이 박열의 꿈으로 끝난 폭탄 입수 계획이 동지들 사이에서 가시화되고 그룹 내에 문제가 생긴다. 니야마 하쓰요, 김중한, 홍진유 등은 오스기 사카에 주변의 모임에도 참가. 이 와중에 관동 대지진을 만난다.

93,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행정 집행법 제 1구호를 필요로 한다고 인정하는 사람에 대해 필요한 검속을 가한다에 의해 검속된다. 불령사 동지도 순차적으로 검속된다.

 

계엄령과 학살

진재 후, 유언비어로 민중들에 의한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 또한 사회주의자도 국가 권력에 학살. 마쓰오 쇼이치(松尾章一)관동 대지진과 계엄령(2003, 吉川弘文館)에서 관동 대지진 시의 유언비어 출처의 연구에서 세 가지 설이 있다고 기술.

첫째는 지배권력설. 경시총감 아카이케(赤池), 경시청관방 주사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郞) 등이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를 통해 추밀고문관을 거쳐 천황에게 계엄령을 재가케 했다. 그러나 정식 절차는 아니었다.

2는 지배권력과 민중동시설,

3은 민중 자연 발생설.

 

노동 운동11(192571일 발행)에 지진 직후의 계엄 사령관 후쿠다 마사타로를 노린(19249) 와다 쿠타로(和田久太?)재판(1925627, 3회 공판정)에서의 의견진술이 게재되었다.

후쿠다 마사타로를 노린 이유에 대해 조선인, 중국인, 사회주의자에 대한 학살의 복수다.

 

진재 후의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논문

11월에는 나카니시 이노스케가 조선인을 위해 변론함부인공론12월 합병호로 집필. 「…그것은 바로 조선인의 불령행동이라는 유언비어였습니다. 그에 대한 일본인의 강한 증오와 반격이었습니다.……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한 지식, 감정의 착오는 이 근대적 역사의 사실이 낳은 불행이라고 해도 절대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불행이 지금 더욱더 일본인들의 잠재의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학살에 대한 책임을 직접 추궁하고 있지는 않지만, 진재 후의 종합잡지에서도 재해의 글이 거의 없는 가운데 극히 드문 논문이었다.

 

불령사에 대한 날조

1020, 가네코 후미코, 박열 및 불령사 동지는 치안경찰법위반으로 "예심 청구". 불령사가 비밀 결사에 해당한다는 용의로 오사카 아사히신문은 제목에불령선인 비밀결사 대검거라고 보도하고 있다.

 

3. 1924514일 제12회 예심신문

 

가네코 후미코는 천황 국가 비판을 전개.

인간은 인간으로서 평등해야 합니다.따라서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자격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생활의 권리를 완전하게 그리고 평등하게 향수해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만세일계의 천황이라든지 형식상으로든 통치권을 부여받았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토지에 태어난 인간의 최대의 치욕이며, 일본 민중의 무지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  

19251028, 대심원은 공판 개시를 결정, 가네코 후미코, 박열은 야마자키 게사야(山崎今朝?), 후세 타쓰지(布施辰次) 등을 변호인으로 선임.

 

1925530일의 제20회 신문에서 예심판사 누마 요시오

형법 제73조 황실에 대한 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게 되면 일이 중대하고 관할도 대심원 관할이 되므로......황태자 전하의 결혼을 기해 전하에게 위해를 가하려 계획했던 것이 틀림없는가" 라고 묻고 후미코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

 

190810월부터 시행된 73조는 천황, 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또는 황태손에 대해 위해를 가하고 또한 가하려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는 단순한 조문으로 모두 사형으로 규정. 대일본제국헌법을 정점으로 한 법제도 가운데에서 실체적으로 천황과 그것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에 이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묶어두는 것으로 존재.

 

31924122

일본의 제도에서 정신적으로도 견딜 수 없는 학대를 받았습니다

일본의 국가사회제도에 대한 피고의 생각

1계급은 황족이며

2계급은 대신 그 밖의 정치 실권자이며,

3계급은 일반 민중입니다.

저는 제1계급인 황족은 정확히 섭정궁 전하는 몇 시 몇 분에 출문이라는 것과 같은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불쌍한 희생자이며 황족은 정치의 실권자인 제2계급이 무지한 민중을 속이기 위해 조종하고 있는 가엾은 괴뢰이며 꼭두각시 목각인형이라고 생각합니다.

 

4회 피고인 신문조서 1924123

19222월경 박열을 알고 청년조선(靑年朝鮮)의 박열의 시 개새끼(コロ)에서 힘찬 반역적 기분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끼고 처음으로 박열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알고 그 인상을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의 집에서 박을 만나 그 후 수차례 그 사람과 왕복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주의(主義)와 성()에 있어서도 동지이자 협력자로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예심 법정에서 발언하고 있다.

어떤 조선인의 사상에서 일본에 대한 반역적인 기분은 없앨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1919년 조선에서 독립 소요의 광경을 목격하고, 저조차 권력에 대한 반역의 기분이 생기고, 조선 분들이 하시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타인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치솟았습니다

 

 

 

 

1924123일 제 4회 신문 조서.

5회 신문조서 1923124

제가 박과 서로 알게 되기 전 1921년 가을쯤인가 박은 원종린, 서상일, 서염파(徐焰波)등 여러 조선인 주의자를 규합해 흑도회(黑濤會)라는 명칭의 사상연구회를 조직하고 흑도(黑濤)라고 이름 붙인 기관 잡지를 발행했습니다. 이 모임은 제가 박과 함께 되고난 후에도 계속 이어졌으므로 저도 여기에 가입했습니다만 19229월경 공산주의파의 회원과 무정부주의파 회원과의 사상에서의 충돌로 분열해 무정부주의자 측은 흑우회(黑友會), 공산주의자 측은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했습니다

......무정부주의자로서 회원은 회원의 자유의사를 제약하지는 않습니다. 이 주의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회원의 유지는 권력에 반항하고 이를 파괴하려는 것이므로, 그 유지 사이에는 직접행동에 취할 것을 의논한 적도 있습니다

 

6회 신문조서 1924125

: 박열은 김중한에게 폭탄입수를 부탁한 적이 있는가.

: 있습니다.

저과 박의 사상과 의도하는 바는 전 회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저도 이와사키 오뎅집에 있었을 때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모든 어중이떠중이를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이와사키 오뎅집에 드나드는 정치꾼들에게 제국의회의 내부모양을 여러 가지 상세하게 물어 본 적도 있습니다. 박도 저와 동거하기 이전부터 그 같은 일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박은 동거하게 되면서 서로 이전의 비밀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박과의 사이에 비밀은 없습니다. 박에게 온 편지는 제가, 저한테 온 편지는 박이 거리낌 없이 개봉해 읽을 정도입니다.

그런 관계로 박은 저에게, 1921년 가을 쯤 사상을 공감한 근해 항로의 선원에게 역시 폭탄입수를 부탁한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와 박은 동거하기 이전 히비야(日比谷)공원과 진보초(神保町)의 중국 요리집에서 만나, 그와 같은 복수의 (광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그런 정도였으므로 저와 박은 거기에 공감해 동거할 것을 결의하고, 동거 후에는 시종 그런 계획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19231월경 저와 박은 김중한을 알게 되고 그 후 교제하면서 그 인물이 비교적 확실해 보였기 때문에, 동년 5월경 저와 박이 의논한 끝에 박이 김에게 상해에서 폭탄을 입수해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와 박과의 동거의 제1 조건이 거기에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시종 그런 의논을 했습니다.

: 피고는 어째서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 전하를 소위 폭탄 대상의 하나로 삼았는가.

: 나는 일본의 천황이나 황태자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은혜나 원한을 갖고 있지 않다.」「오히려 만세일계의 천황인지에게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통치권을 부여해 왔다는 점이 일본의 토지에 태어난 인간의 최대 치욕이며, 일본민중의 무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천황이 지금 호흡하고 있는 옆에서 수많은 인간이 불에 타 죽었다는 작년의 참사는 바로 천황이 실은 미련한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어리석은 민중의  단순함을 조소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평등한 인간의 생활을 유린하는 권력이라는 악마의 대표자는 천황이며 황태자입니다

 

19317월 발행, 춘추사 간, 구리하라 카즈오(栗原一夫) 편집

「……정상에 올라서면 부강이 눈 아래에 한눈에 보인다.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헌병대 건물이다. 카키복의 헌병이 마당으로 조선인을 끌어내어, 옷을 잡아 벗기고 벗긴 엉덩이를 채찍으로 때리고 있다. 하나, , 헌병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온다.얻어맞는 조선인의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의 자연을 접하면서 자유로운 자신을 되찾으려 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살아 있던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라고 학대에 지배된 정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스스로 이루려 했던 것이다. 이 소녀 시절부터 후미코가 품었던 자립을 위한 의지는 도쿄에서 유일한 여자 친구이자 동지인 니야마 하쓰요, 그리고 조선과 일본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를 거쳐 한층 강화되어 궁극의 평등주의, 천황의 존재 부정이라는 사상으로 이어진다. 박열과 만나 그에게 힘을 찾아낸다.

저 일본인이에요. 하지만 조선인에 대해 별다른 편견 따위 없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내게 반감을 갖고 계신가요.(전출 자서전) 라며 동지로서 교제를 시작했다.

 

이다 토쿠타로(飯田?太?)

대심원 판결 후, 가네코 후미코를 면회하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박열과 후미코에게 사형선고가 있었던 다음날인 326일 정오경 나는 이치가야형무소의 면회인 대기실 옆의 자갈밭에서 나카니시 이노스케 군 부인과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모두 조선인 뿐이었다.후미코를 만나러 상경한 어머니 (부인공론265월 게재)

 여기엔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재판을 지원한 사람들이 주로 조선의 동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4 대심원 공판에 대한 지원

1966320일 일본 오사카 주재의 조선 아나키스트가 발행한 자아성』《「CHIGASEI라고 난외에 표기. 창간호에서 '박열특별공판, 조선의 예복으로 몸을 치장하고 박열 즉 박준식 법정에 서다. 방청금지. 226일 오전9시 대심원 법정에서 개정되었다. 이날 조선인 및 주의자 검거 수 십 명, 경계가 엄중한 오사카의 길로딘사 공판과 동서 모두 근래 보기 드문 형국이다.라고 편자가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이 26년의 일본에서의 아나키스트와 대역죄 탄압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 아나키스트가 발행한 기관지, 도쿄의 대심원 법정에서 검속된 조선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 길로딘사 공판, 두 개의 공판에는 또한 의열단과도 연관을 갖는다.

 

검속된 자는 흑색청년연맹의 활동가였다.

동 연맹의 창설은 전년인 1925년부터 아나키즘계의 그룹, 노동조합 유지의 공동 행동 속에서 자유 연합주의에 근거하는 연락 조직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준비되었다.

12, 9일 준비회를 열고 15일에 참가 20개 단체, 61명으로 총회를 개최, 결성. '결성선언서'를 배포하지만 다음날 발매 반포금지 처분을 받는다.

경보국조" "?현대사 자료 아나키즘 "みすず書房종래의 아나키즘 운동사에 있어서는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대심원 공판 각각이 개별의 사건, 사상으로 파악되어 상호의 연관은 깊이 추구되지 않았다.

 

 

 

 

 

 

의열단

20년부터 21년의 사회주이동맹에 대한 탄압

의열단으로부터 박열의 폭탄 입수 계획, 후루타 다이지로, 나카하마 테츠, 와다 큐사타로 등의 폭탄 입수 계획.

 신채호는 의정원의 전원위원장으로 추대되지만 이승만에 대해 "그는 없는 나라까지 팔아치운다...."라며 격렬하게 반대해 결별. 북경에 돌아와, 항일 운동에 분투.  

1921년경 베이징대학의 중국인 교수, 아나키스트인 이석증과의 교류로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고 고토쿠 슈스이에 공감. 1922년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고문으로 가입. 의열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으로 일관한 의열단은 신채호의 운동정신과도 맞아떨어졌다. 독립운동이 민중혁명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판단,

1924년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재중국조선아나키스트연맹의 기관지 정의공보에 논설을 실으면서 아나키즘 운동에 기운다.

1927년 난징에서 설립돼 일제 본국을 포함해 아시아 각 지역의 아나키스트가 참여한 동방무정부주의연맹에 가입, 기관지인 탈환』『동방에도 중심적으로 관여하고 글을 게재했다. 고토쿠 슈스이를 높이 평가해 기독말산론을 한역해 중국 아나키즘 잡지 신보(晨報)에 게재.

19284월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의 북경동방연맹대회부터 본격적으로 아나키즘 혁명운동에 참가, 대만의 기륭항에서 체포된다. 1929107일자 동아일보에는 고토쿠 슈스이의 책을 읽고 공감하고 가장 합리적이다고 법정에서의 발언이 게재. 1931년 체포되기 전의 초고 조선상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됐다. 형기를 3년 남기고 병이 악화, 1936221일 음력 뇌일혈로 사망.

 

조선혁명선언 모두

1,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애고, 정권을 빼앗고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모두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川澤), 철도, 광산, 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자르고, 도끼로 끊고, 토지세, 가옥세, 인구세, 가축세, 백일세(百一稅), 지방세, 주초세(酒草稅), 비료세, 종자세, 영업세, 청결세, 소득세 그 외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해 혈액은 있는 대로 다 흡수되고, 약간의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개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다. 대다수 민중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경작해 그 일 년 내 소득으로 일신(一身)과 처자의 호구 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먹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치어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이하 생략

1926년 여름,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추도 행동으로 진우연맹사건에 대한 치안유지법의 날조 탄압

 

5. 총론적으로

1900년대 동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

중국과 일본의 활동가

아나키즘 사상. 고토쿠 슈스이의 크로포트킨 저술의 번역

일본어에서 중국어로의 번역

 

고토쿠 슈스이의 대역 사건 -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후퇴' 정체.

그러나, 신해혁명, 중국에서의 혁명

동아시아에도 영향

 

 

조선유학생에 의한 일제로 부터의 독립운동의 준비

31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 탄압

의열단에 의한 무장투쟁, 박열 등의 일제 본국에서의 활동

 

아나키즘 사상과의 만남

흑도회, 흑풍회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만남, 가혹한 탄압

1930년대 조선 본국에서의 노동운동 활성화

자유 연합의 이념에 입각한 운동의 확산

일본의 아나키즘 운동에 대한 치안 유지법 탄압

농촌 청년사 사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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