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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8-10-29 조회수 1300
파일첨부 구리하라 야스시.hwp
제목
1920년대 일본 아나키즘 운동에서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구리하라 야스시-

1920년대 일본 아나키즘 운동에서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구리하라 야스시(栗原康)

 

 

들어가면서

1918년 일본에서는 쌀소동이 발발하고 그 여파로 연이서 파업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젊은이들이 많이 읽었던 것이 오스기 사카에(大杉?)였다. 오스기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의 이론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사상은 아나키스트 노동운동가뿐만 아니라 더욱 광범위하게 파업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파업에 대한 지원을 계기로 젊은이들의 소집단이 잇달아 생겨나고 그것이 노동운동이라는 목적조차 뛰어넘어 원래 생각지도 않았던 것 같은 운동이 시작되었다. 또한 여기에 3?1운동 후 일본에 건너 온 박열 등이 합류하고 행동스타일을 공유하면서도 또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한 애초부터 목적을 설정할 수 없고 거기서 어떤 것이 시작되는지 알 수도 없는,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감당할 수도 없는 그런 힘이 거칠게 몰아치는 곳에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의 매력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노동 운동은 기분이다

오스기 사카에는 노동운동의 근간은 파업이라고 한다. 그 파업론으로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자아의 기탈(自我棄脫)이라는 글이다. 오스기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타인에 의해 강요된 자아를 참된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다 좋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노동자로서의 자아. 사실은 그렇게 돈 따위가 없어도 인간은 그렇게 쉽게 쓰러지지 않는데 막상 회사생활이 시작되면 아아! 자본가님이 돈을 주시니까 우리가 살아 갈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깐 자본가님의 명령에는 절대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노예인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당연해 지면 자본가에게 평가받게 되고, 너는 쓸 만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즐거워진다. 노예근성이다.

 오스기는 그런 자아의 껍질을 한 장, 한 장, 벗겨버리라고 한다. 벗겨내도 벗겨내도 껍질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완전히 벗겨내 아무것도 없을 때, 그 제로에서부터 타인의 것이 아닌 참된 자신의 생의 생장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가 하면, 파업이고 싸움이다. 오스기는 말한다. 자본가를 후려갈겨라. 대개는 질 것이다. 하지만 져도 좋다. 거기서 오기를 부린 유쾌함은 절대 잊지 못한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요컨대 큰 싸움이 벌어져 경찰에 붙잡혀도 좋다, 회사에서 잘려도 좋다, 거기서 자신의 뜻을 주장 할 수 있다면 그 자는 이미 노예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가를 맹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자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한다, 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을 갖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자. 한번은 자신을 제로로 만들어 새로운 자신의 삶을 되찾자. 자아의 기탈유쾌하다. 노동운동은 기분인 것이다.

 

파업을 넘은 파업으로

실제로 당시의 파업은 싸움이었다고 한다. 노동자가 떠들기 시작하면 자본가측이 불량배 고용을 통해 힘을 키운 후 억지로 따라오게 하려고 하므로 그것이 큰 난투극으로 변한다. 공장에 불을 지르거나, 또는 항상 경찰에게 당하니까 먼저 잠복하고 있다가 경찰서에서 뛰어 나올 때 붙잡아 강으로 던져버린 등 그런 일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해고되어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젊은이도 나타났다. 그런 그들이 또한 대활약했다. 어느 공장에서 파업이 있다는 것을 듣게 되면 좋은 싸움이 될 수 있을 거라 해서 거기로 지원하러 간다. 그리고 다시 돼지우리에 던져지고 다시 나와서 싸움으로 체포되는 등. 싸움꾼들이다.

그리고 그런 젊은이들이 파업 이후 오스기의 노동운동사 등에 머물며 침식을 함께 하면서 서고 얼굴을 알게 되며 마음이 맞는 녀석들끼리 모이기 시작한다. 오사카에서는 세입자 투쟁이라고 해서 연립가옥의 집세를 내지 않고 법률을 구사해 눌러 앉고 결국에는 집단으로 눌러 앉아 버티는 등의 그러한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도쿄에서는 길로딘사의 나카하마 테츠(中浜?)처럼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 일용직 노동자를 모으는 무리도 나타났다. 더구나 그들이 하는 것은 략쿠(リャク), 약탈행위였던 것이다. 특별히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협상할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을 수탈하는 부자들로부터 직접 돈을 걷어 들이라고. 빵의 쟁취였다. 나카하마는 그런 하층에 대한 문제관심 속에서 시나노가와(信濃川)조선인 학살사건의 조사에도 관여했다.

어쩌면 나카하마 등은 만약 노예의 삶을 강요당하는 자아가 문제라고 하면 타도 대상은 천황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천황은 현신인(現神人)으로 적자인 신민이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그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것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존재하는 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 오직 그것 뿐이다.그렇다면 신이라고 불리는 녀석을 폭탄으로 날려버려 그 미망으로부터 인민을 떼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지배에 복종하게 되는 자신을 날려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난 놈을 해치우고 자기 자신도 죽이는 것이다. 이런 문자 그대로의 제로가 되라....자아의 기탈. 파업이 당초의 목적을 뛰어넘어 간다. 파업을 넘어선 파업이다.

 

불령(不逞)이 아니다, (후테이)

그런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인 것이 박열이었다. 혈권단처럼 친일파들에게 주먹을 날린 것도, 당시 싸움집단 같은 움직임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으며, 히로히토를 폭파하려했던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박열이 스스로의 약점을 바꾸어 오히려 그 약점을 무기로 바꾸려 했던 점이다. 여하튼 박열이 만든 단체가 불령사, 발간한 잡지의 하나가 후테이 센진(鮮人)이다. 불령(不逞)이 아니다, (후테이).

당시 일본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조선인은 불령선인이라고 불리며 불량배의 상징처럼 말했지만 그렇다면 바꿔버리면 되는 것이다. 일본에 건너 온 조선인은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시나노가와 사건처럼 일용직의 고된 노동을 혹사당하며 노동에 내몰리거나 대들기라도 하면 학살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령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열은 움직이지 않고 거리낌 없이 무너뜨리는 이론이라는 글을 썼다. 반 노동이다. 박열은 이렇게 말한다. 이 자본주의는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노동은 신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고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면 된다. 그럼 어떻게 무너뜨릴 건가? 랴쿠()인 것이다. 철저하게 불령해서 이 더러운 세상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한다. 움직이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어쩌면 철저하게 불령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어떻게 봐도 좋다는 것이다. 박열은 우주 만물도 멸망하자고 하고, 가네코 후미코는 지금 있는 것을 때려 부수자고 하지만 이 점이 박열 등의, 특히 터무니없는 행동력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세상은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 그렇다면, 이제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뭘 해도 좋고 뭐든지 상관없는 뭐든지 해라. 이 세상을 벗어나라. 절대 자유다.

 

마지막으로

요즘 다니엘 콜슨이라는 사상가가 아나키즘 철학 소사전에서 프랑스의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을 재평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디카, 한 번 도 균형을 이룬 적이 없는 합성력이었다고. 중요한 것은 통일된 조직이 아니다. 뭔가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싸우고, 하지만 정신이 들면 흩어지고, 그때까지 자신들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을 하기도 한다. 그런 유상무상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때, 권력이나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아나키적인 힘이 생겨나는 것이다. 틀림없이 박열이 일본에 와서 해 주었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불령(不逞)이 아니다, (후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오스기 사카에[자아의 기탈] (오스기 사카에 전집 제3ぱる출판, 2014)

오스기 사카에 노동운동 이론가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오스기 사카에 전집 제5ぱる출판, 2014)

헨미 키치조(逸見吉三) 묘비없는 아나키스트 상(墓標なきアナキスト)(삼일서방,1976)

가메다 히로시(?田博), 히로하다 켄지(廣畑硏二) 나카하마 테쓰(中浜?) 감춰진 대역죄(토스키나아 회, 207)

박열 움직이지 않고 거리낌 없이 무너뜨리는 이론(구리하라 야스시 편미친 듯 피어라, 프리덤 아나키즘 안소로지치쿠마문고 2018)

다니엘 콜손아나키즘 철학 소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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