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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8-11-14 조회수 1693
파일첨부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육삼정 기의.hwp
제목
시민강좌 7강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육삼정(六三亭) 의거’-조광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육삼정(六三亭) 의거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주요 인물과 활동

육삼정 거사 실패와 밀정

 

 

 

이런 사람이 있었다.

여기 사람이 있었다.

 

대인이 그립지 않습니까.

거인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도골선풍(道骨仙風)의 인물을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느 시대인들 사람 갈증이 없겠습니까마는, 요즈음은 유난히 그렇습니다.

광간(狂簡)과 청광(淸狂)이 무슨 대단한 국보나 되듯 귀한 대목에서 은근한 자신감과 의연한 기풍에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전형이 있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저는 1920-30년대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스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유자명, 이회영, 신채호, 이정규, 이을규 그 이름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거인들이시지요. 거기에 더해 원심창 백정기 등 형형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육삼정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두 가지 에피소드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작년 10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권력집중과 장기집권을 위해 당 헌장을 개정까지 한 이후 적지 않은 반발과 비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을 통제하고 비판 지식인들을 탄압해서 억지로 누르고는 있지만, 모든 중국인들이 잠잠한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베이징 대학에 위안페이(元培)자유학부라는 곳이 있는데요, 베이징 대에 진학한 기왕 우수한 학생들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소수에게 전공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공부할 기회를 주는 곳입니다. 경직된 중국식 대학 교육에 비판적인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는데, 1917년부터 10년 동안 총장을 하며 베이징 대학의 학풍을 만들었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를 기념해서 그의 이름을 따 학부 명을 지었습니다.

자유와 포용을 강조한 차이위안페이 총장은 아나키스트였습니다. 그는 리스쩡(李石曾) 우즈후이(吳稚輝) 등과 함께 청말민초 시기를 대표하는 아나키스트로 이론 이전에 인격과 품성에서 대인이자 거인이었습니다. 단단한 이론체계를 갖춘 아나키스트 라기 보다는 생활 아나키스트였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과도 깊은 교유가 있었지요. 그의 또 다른 대단함은 혁명과 분열의 시대에 좌우보혁을 가리지 않고 큰 인재들을 베이징 대학으로 모은 데도 있습니다. 그의 임기 중에 후스(胡適)와 루쉰(魯迅) 등이 초빙되었고, 천의(天義)파 아나키스트였으나 사상적 변절을 겪은 류스페이(劉師培)마저 오랜 수소문 끝에 초빙하여 생의 마지막 열정을 다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 차이위안페이 자유학부답게 시진핑의 시대착오적인 구상을 비판하며 그 학부 교수 3명이 사표를 낸 것입니다. 리천젠(李沈簡) 장쉬동(張旭東) 어웨이난(顎維南) 등이 그들인데, 사회주의 국가주의의 관방 중국만 있는 게 아니라 그래도 소수이긴 하나 군자 중국 반골 중국이 있다는 표현이어서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김훈의 소설 공터에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김훈 작가의 부친은 김광주 선생입니다. 김훈은 빚만 남겨놓고 가신 아버지 때문에 대학을 3학년에 그만 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 했는데, 가족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사회와 나라의 사람으로 살았던 부친에게 애증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김훈은 아버지와 관련하여 어려서부터 삼국지읽느라 인생 버렸다라고도 했는데, 그건 다소 반어적 회고라고 생각합니다. 김광주 번역본 삼국지수호지는 당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였지요. 제가 중학교 때 처음 읽었던 삼국지수호지가 바로 김광주 문고본이었습니다.

김훈은 강호에 사는 듯 호방하고 의연한 부친의 글을 어려서부터 가까이 하고 살았습니다. 때로는 얼근하게 술에 취한 부친이 불러주는 원고를 받아 적기도 했습니다. 김훈의 놀라운 필력은 그렇게 이어지고 다듬어진 것이겠지요. 다만 세상물정 모르는 부친이 술빚만 잔뜩 남기고 떠나신 탓에 서둘러 생활을 책임지게 된 것을 푸념한 겁니다. 부친에 대한 그런 오랜 애증을 근작 공터에서로 표현했고, 독자로서 저는 그 소설을 드디어 부자가 화해를 하는구나 하며 읽었습니다. 그 소설엔 아버지의 상하이 시절 이야기가 더러 나옵니다. 그리고 장례 때 문상 온 노 혁명가들의 이야기도 나오지요. 김훈은 예의 각박하고 건조한 단문적 문장으로 별일 아닌 듯 무심하게 썼지만 거기엔 상당한 사연들이 들어 있습니다.

김광주는 1930년대의 근 10년을 상하이에서 지내며 여러 아나키스트와 교유했습니다. 그는 1965년에 발표한 상해시절회상기에서 독립운동의 한 거점이었던 가형 김동주의 만주 포리병원에 의탁해 있던 시절부터 상하이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가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 일 그리고 김구와 김두봉 조완구 등 임정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사들과의 교유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작품들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죽거니 미처 귀국하지 못한 동지들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중 특히 김광주가 그리워 한 인물 둘이 아나키스트 정해리와 이하유입니다.

정해리와 이하유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단원들로 김광주에게 멘토 역할을 했던 인물들입니다. 김광주에게 정해리는 함께 인성학교에 근무했던 동료이자, 아나키즘의 훈도를 받게 해준 스승이기도 합니다. 김광주는 회상기에서 정해리는 철두철미 권력과 지배를 부인하는 자유주의자였고 인권 평등주의자였다. 사회의 불순 죄악은 제거하는데 항상 인생은 용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의요 신념이었다.”라고 하며, 일제 타도 밀정 근절 등을 절규하는 격문을 써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명의로 뿌렸던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다만 김광주는 정해리의 권력과 지배를 부인하는 사상에도 공감하고 함께 여러 성토문을 작성하기도 했지만 직접 행동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습니다. 행동가이기 보다는 문학청년이었고, 남화연맹도 당시 학생이었던 그를 굳이 의열 투쟁에 참여시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광주가 그리워 한 또 한 사람 이하유는 일본에서 흑우연맹 회원으로 활동하다 중국에 망명한 인물로 말 보다 행동이 앞서는 과감무쌍한 청년이었습니다. 김광주는 그를 항전 8년을 중경에서 활약하고 무사히 조국에 돌아왔으나 얼마 안 되어서 우연하고 기이한 식중독으로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상이니 주의니 하는 것을 떠나서 더불어 말할 수 있는 벗, 그 중에 하나이던 이하유를 잃어버린 서글픔을 나는 깊이 가슴에 간직한 채 늙어가고 있을 뿐이다.” 라며 그리워했습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주요 인물과 활동

 

근대 아나키즘의 사상과 운동이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건 20세기 초입니다. 일본은 고도쿠 슈스이가 의회주의를 포기하고 직접행동론을 주장한 1906년부터이고, 중국은 일본의 천의파와 프랑스의 신세기파가 활동하기 시작한 1907년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은 다소 늦은 1919년 이후에 재일 유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중국에 망명하고 있던 독립투사들이 아나키즘 단체를 조직하면서부터입니다. 다만 1907년 도쿄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하여 결성한 동아시아 최초의 반제국주의 단체 아주화친회(亞洲和親會)’에 조소앙을 비롯한 다수의 한국인들이 참여한 기록은 있습니다.

한국 아나키즘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가혹한 식민지 상황에서 시작되었다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존 크럼은 한국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색채가 너무 진하다. 한국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에서 출발하여 민족주의 때문에 타락했다.”고 했고, 한국 아나키즘 운동은 충격적이고 일탈적이다.”라고도 했습니다. 크럼의 평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겠으나, 반식민지 해방투쟁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한국 아나키즘의 수용과 운동에 깊이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우당도 아나키즘을 사상적 기조로 삼은 이유를 현재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가장 실체적인 이론이오, 가장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남화연맹은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중국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일본과 중국 그리고 국내의 아나키스트들이 상하이 조계에 모이면서 결성된 비밀 결사입니다. 19304월에 유자명 유기석 정해리 등이 조직하였고, 그 해 말 이회영이 합류하면서 구심점이 됩니다.

강령과 활동 그리고 주요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육삼정 의거와 밀정

 

육삼정 거사는 2의 윤봉길 의거를 구상했으나 실행하기 전에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등 3명의 의사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실패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육삼정 의거라는 표현도 있지만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공사 암살 미수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은 지 1년 뒤에 1933317일이었고, 목표는 주 상하이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것이었으며, 장소는 아리요시가 중국 정부 인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기로 한 요정 육삼정이었습니다.

아리요시는 당시엔 주 중화민국 전권공사였으나 1935년에 초대 중화민국 대사를 지내게 되는 거물 외교관입니다. 1904년부터 2년 동안 부산 영사로 근무한 바 있고, 스위스 대사와 국제연맹 일본 대표 그리고 브라질 대사도 역임했습니다. 그는 대중 온건파로 강경한 정책을 펴던 본국 군사정부와의 입장 차이로 1936년에 퇴임하게 됩니다.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그나마 온건한 외교적 수단을 주장하는 소리는 묻히게 된 것이지요.

아리요시는 윤봉길의 거사로 부상당한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 공사의 후임으로 19329월에 상하이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1898년 한커우에 부임한 적이 있고, 1909년에는 상하이 총영사를 역임한 바 있어 중국 사정에 정통했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어 그 자신 상하이 도착 성명에서 과거 오랜 기간 중국에 근무하면서 각계의 도움으로 대과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공정한 관찰 공평한 판단으로 여러 문제를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국민정부가 있는 난징으로 가서 뤄원간(羅文幹) 외교부장과 만나 일본 정부는 만주국을 승인하려 하니 중화민국의 배일 행위를 자제하라는 본국의 강경 의사를 전달합니다. 만주 사변에 이어 1차 상하이 사변으로 중국의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던 시기에 침략적인 일본을 대표하는 아리요시는 남화연맹의 거사 이전에 이미 중국인들에게도 공공의 적으로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다시 20일 후 아리요시가 신임장을 봉정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이동하는 노정에 중국 칭방(靑幇)의 암살단이 폭발물을 설치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아리요시가 육군대신 아라끼(荒木)에게 거금을 받아 국민당 정부 요인들을 매수하려한다는 정보를 접합니다. 아리요시의 목적엔 당연히 중국 정부가 한인 항일 운동에 도움을 주지 못하게 막으려는 시도도 포함되지요.

이 대목에서 원심창의 구상이 나옵니다. 원심창은 193211월 텐진의 일본총영사관 폭탄 투척 사건 이후 상하이에 돌아와 다음 작업을 구상했는데,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중국의 반일 감정을 이용한 아리요시 암살이고 다른 하나는 상하이 주재 미국 총영사를 암살하여 미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요시 암살 미수 사건의 핵심은 밀정 때문에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밀정의 문제는 아나키스트들이 기왕에도 엄중하게 여기던 사안으로, 1931년 한 중 아나키스트들이 함께 만든 항일구국연맹의 결성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친일민족반역자의 숙청이었습니다. 산하에 흑색공포단이란 행동대를 두고 중국 아나키스트의 재정과 무기 공급 도움으로 왕징웨이 저격 등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밀정은 친일민족반역자 중에서도 가장 대응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유자명은 밀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일본 특무의 숫자가 특히 많고 수단도 교활하고 여러 가지인데 참 듣는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한다. 또 깊이 잠복하는데 어떠한 구멍이든지 다 파고든다. 철도 은행 주식회사 교육 문화기관 무릇 사람들이 활동하는 장소에는 그들의 특무가 분포되어 있고, 아무리 편벽한 곳이라 할지라도 조선족이 사는 곳은 그냥 두지 않는다. 적의 특무인 수는 망명자인 수의 3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특무들은 망명자들의 심리 특점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행동방침을 제정한다. 예를 들면 망명자가 활동 경비를 수요하면 그들로 하여금 은행 등 금융기관을 습격하게 유인하고 그들이 성공하게 한 다음 긴 선을 늘려 큰 고기를 잡으려 한다. 가는 길에 도망치려는 자들이 망명자들의 연락처를 충분히 폭로하게 한 다음, 대만이든 대륙이든 마음대로 도망가게 놔두었다가 마지막에 저들이 처 놓은 함정에 빠지게 한다. 이러한 함정 때문에 많은 망명자들이 그냥 생명을 희생한 것이 적지 않다.”

일본의 밀정 공작은 참으로 집요하고 교묘했습니다.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점으로 연결되어 극소수의 사람만이 파악하고 관리하는 것이지요. 현실은 영화 암살밀정에서 보는 이상이었을 겁니다. 우당 자신이 마지막 사업으로 만주에 가서 독립 기지를 세우려 다렌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도 밀정의 밀고 때문이었습니다. 홀로 기선에 승선하여 만주로 가는 우당이 형님 석영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걸 조카 이태공과 연충렬이 엿듣고 일본 첩보기관에 밀고한 겁니다. 천하의 우당의 가족이 밀정이었습니다.

육삼정 사건이 미수에 그치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밀정의 개입이고, 결국 일본 경찰의 역스파이 공작 반간계(反間計)였습니다.

육삼정 사건의 전말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우선 원심창이 아리요시 암살을 구상한 데서 시작합니다. 그 계획을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 야마다 가쿠베에(山田角兵衛)가 탐지하고, 밀정으로 활용하던 저널리스트 오키(?)에게 접촉을 명합니다. 원심창과 이규창이 35일 오후 2시 프랑스 조계의 광저우반점에서 오키를 만나 서로 중요한 정보들을 교환합니다.

이 대목에서 미스터리한 점이 있습니다. 첫 만남에서 허심탄회하게 결정적인 정보들을 공유할 정도라면 누군가 아주 신뢰할만한 인사가 그 자리를 주선했다는 뜻인데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원심창의 소개로 정화암도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오키라는 통신사 직원을 만나 적이 있다고 회고한 걸 보면 확실한 중재자가 있었거나 아니면 아나키스트로서의 연대를 과도하게 신뢰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만남에서 원심창은 텐진 일본 영사관 폭탄 사건은 자신이 주도했으며 함께했던 류기석은 베이징에 잠복 중이고, 거사 자금은 푸젠의 췐저우항일회(泉州抗日會)가 제공했는데 13천 달러 중 남은 7천 달러는 중국인 모씨가 보관중이다(야마다의 보고서엔 이 중국인이 사실 유자명일 가능성이 크다고 적고 있다). 상하이의 미국 총영사는 일본도로 암살하여 범인이 일본인인 것처럼 꾸민다. 아리요시 암살은 폭탄으로 한다. 등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오키는 아리요시가 317일 육삼정에서 송별연을 한다고 전했고, 이에 원심창은 아리요시 승용차의 종류와 번호 등을 알아달라고 합니다.

당일 저녁 원심창은 백정기 이강훈의 거주지에 흑색공포단’ 8명 등 모두 11명을 모아 이 소식을 전하며 거사를 구체화합니다. 원심창은 일본은 만주국을 키워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려한다. 그러면 조선과 중국의 혁명은 당분간 전망이 없다. 아리요시는 장제스 국민정부 군사위원장을 4천만 원에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고 동북 지역에서 무저항주의를 취하게 하려한다. 그가 지참한 거액은 일본 민중의 고혈을 짠 것이고 장제스의 행동은 매국적이므로 우리는 아나키스트로서 이런 밀약을 폭로해야 한다.”고 하며 아리요시 암살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317일의 연회부터 장제스 매수설까지 모두 일본 경찰이 밀정을 시켜 제공한 허위정보입니다.

흑색공포단전원이 자원하여 그날은 집행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모여 정화암의 제안으로 추첨을 한 결과 백정기와 이강훈이 당첨됩니다. 나중에 이강훈의 회고에 의하면 형식은 제비뽑기였으나 사실은 백정기와 이강훈이 뽑히도록 사전에 조정해두었다고 했습니다.

열흘 정도의 사전 준비 작업으로 원심창은 오키를 자주 만났고, 유자명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거사를 지원하기 위해 모입니다. 그 사이 단원들은 언론 보도용으로 사진을 찍고, 발표할 성명을 작성하고, 도주 계획을 세우지요.

그러는 동안 일본 경찰의 준비 또한 착착 진행됩니다. 야마다는 오키를 통해 계속 원심창 등과 긴밀히 연락하게 하고 심지어는 집행자들과 일본 청주로 송별주까지 나누게 합니다. 그리고 종국엔 일망타진을 위해 당일 욱삼정에서 200미터 떨어진 송강춘이란 중국음식점에서 대기하게 하지요. 그리고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은 거기서 체포됩니다. 백정기는 복역 중 1934년에 사망하고, 이강훈과 원심창은 해방 후 출옥하여 이강훈은 홋날 광복회 회장을 역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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