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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9-01-16 조회수 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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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러시아에서의 아나키즘 운동

러시아 아나키즘운동

 

   

서 론

 

아나키즘이란 산업혁명에 의해 이루어진 정치적 경제적 집중화의 급속한 진전에 대한 반발운동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집중화된 정부에 대한 적대감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에 대하여 깊은 증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사회주의자들과 일치된다. 이처럼 아나키즘은 억압에 대한 반항이라는 인간의 감정에 깊에 뿌리잡고 있는 사상이다.

 

이런 아나키즘이 짜르의 전제정치가 극도로 횡포를 발휘한 러시아에서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아나키즘은 서구의 아나키즘이 현학적이고 지적인 아나키즘인데 반해 실천적이고 혁명적인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러시아는 스텐카 라진과 에멜리안 푸가체프의 농민반란 등에서 배태된 러시아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이처럼 자연적으로 아나키즘이 발달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조건에 바탕을 두고 러시아의 아나키즘은 러시아 혁명과정을 통해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다.

 

하지만 우리는 러시아 아나키즘운동에 대해서 거의 듣지 못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세력을 겨룰만큼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알고 배우는 역사가 항상 승자의 역사라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역사는 혁명과정과 혁명후에 시작된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 간의 투쟁에서 승리한, 승리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만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르게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우리는 이런 편향을 떨쳐버리고 올바르게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러시아의 아나키즘운동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이 발달하게 된 이유와 러시아 아나키즘의 발달과정, 대표적 사상가인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의 사상, 그리고 이런 아나키즘 운동이 러시아 혁명적 상황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어떻게 쇠퇴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본 론

 

1.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적 전통

 

러시아 아나키즘은 나로드니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나로드니키 사회주의의 주된 支柱의 하나는 러시아 민족에게는 로마 법적인 재산 관념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유재산의 절대성은 항상 부정되고 있었다. 러시아 인의 마음속에는 귀중한 것은 재산의 원칙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태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기독교적 입장이었다. 농촌공동체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러시아 의 독창적 산물이었으며, 이상적 형태였다.

 

이런 나로드니키의 사상은 아나키스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러시아인의 공동체적 사상과 더불어 또하나의 러시아 정신이 아나키즘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즉 러시아인은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재료가 될 수 있도록 유순하게 제 스스로를 바치는 국가 중심적인 민족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반항과 소란, 무정부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러시아 인의 디오니소스적인 소질은 무정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텐카 라아진과 푸가체프는 성격적으로 러시아적인 인물이었으므로 그들에 대한 추억은 민중으로부터 좀체로 사라지지 않았다.

 

또 사상적 바탕을 보면, 러시아 인텔리겐챠에게 있어 국가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국가는 "그들"이었으며 ""이었다. 모든 권력은 악이며 죄가 된다는 사상이 러시아인에게는 깔려 있었다. 러시아인들에게는 이런 독특한 성향과 사상적 바탕으로 인해 아나키즘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닦여 있었던 것이다.

 

2. 러시아에서 초기 아나키스트들의 조류

 

20세기초 로마노프제국 시대에 출현한 아나키스트 운동은 사실 러시아 과거 역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할 수 있다. 수세기 이전부터 러시아 국경지방에서는 아나키즘적 요소가 강한 거센 인민들의 봉기가 있었다. 볼로트니코프와 스텐카 라진으로부터 불라빈과 푸가체프로 이어진 이러한 대중봉기의 유산은 바쿠닌, 프로포트킨 그리고 그들의 아나키스트 제자들에게는 풍부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초기에 아나키즘운동은 기독교적 형태를 취했다. 1971년 구금된 덕호버 종파의 일원들은 "신의 자식들에게는 짜르나 통치적 권력, 그 밖에의 어떠한 인간의 법률도 필요하지 않다"라고 선언했다. 이런 움직임은 1880년대 툴라, 오렐, 사마라 지방,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아나키스트 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한 레오 톨스토이와 그 추종자들의 기본교리도 그러한 종파들과 마찬가지인 그리스도교 정적주의(Christian quietism)였다. 톨스토이주의자들은 정부를 압제의 사악한 수단이라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혁명적 행동 역시 증오와 폭력의 원인으로 보아 회피했다. 그들은 유혈을 통해 사회의 개혁을 얻을 수는 없으며 단지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울 때만 사회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또 다른 사상적 근원으로 1840년대 러시아에 푸리에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전파했던 페테르스부르그의 페트라셰브스키 써클이 있다. 이들은 소규모의 자발적 공동체에 대한 신념과 함께 일단 정부에 의해 주도되어온 인위적 구속이 제거되기만 하면 인간은 조화를 이루고 살 수 있다는 낭만적 확신을 가졌던 것은 부분적으로 푸리에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이와 비슷한 견해를 19세기 중엽의 슬라브인 숭배주의자들, 특히 집중화된 관료적 정부를 '원칙적 악'으로 규정했던 콘스탄틴 아크사코프에게서 볼 수 있다.

 

농민반란, 아나키스트적 종파들, 톨스토이주의자, 페트라셰브스키 써클, 슬라브인 숭배주의자, 그리고 알렉산더 헤르쩬 등의 풍부한 유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는 20세기까지 혁명적 아나키스트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바쿠닌과 크로토트킨의 주도하에 아나키즘 운동의 철학적 기반이 갖춰지쟈 아나키즘운동을 조금씩 조직화되면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3. 바쿠닌

 

1세기전 아나키즘은 유럽혁명운동내의 주요한 세력이었고 아나키즘의 선두주자이고 에언자였던 미하일 바쿠닌의 이름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경쟁적 관계의 지도자였던 칼 맑스와 함께 유럽의 노동자와 급진적 지식인들 사이에 잘 알려져있었다. 그러나 맑스와는 반대로 바쿠닌은 혁명의 이론가와는 반대로 활동가로서 주로 평판을 받았다.

 

바쿠닌은 귀족지주의 가문에서 태어나 장교교육을 받았다. 1840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러시아를 떠나 그는 모든 형태의 독재에 대항하는 혹독한 투쟁에 자신의 생을 바쳤다. 1849년 드레스덴 봉기 중 체포된 그는 8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으며, 그 중 육년을 표트르폴과 쉴뤼셀부르그 요새의 가장 음침한 짜르러시아 지하감방에서 지냈다. 그는 종신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을 받았으나 간수의 눈을 피해 탈출해 전 유럽의 급진적 그룹의 경모의 대상이 되게 한, 세계 일주의 센세이셔널한 항도에 올랐다. 이처럼 바쿠닌은 독특한 인간적인 매력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그에 바탕을 둔 사적 유물론이 세계의 법칙성과 경제관계에 중점을 둔데 반해, 바쿠닌은 그런 법칙들을 거부했다. 그는 '선험적 사고'나 예정되거나 인지된 법칙'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바쿠닌은 사회 변화가 '객관적인'역사적 상황의 점진적 성숙에 달려 있다는 견해에 반대했다. 반대로 그는 인간이 그들 스스로 자기 운명을 그려낼 수 있으며, 그들의 인생이 추상적인 사회학적 공식이라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강제로 밀어넣어질 수 없다고 믿었다.

 

또한 맑스의 혁명이 잘 조직되고 자신의 계급성에 대해 깨달은 노동계급, 즉 논리성을 가진 노동자계급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바쿠닌의 혁명은 인간의 본성적 측면이었다. 즉 바쿠닌의 혁명은 인간의 내면적 욕망, 자유에의 욕구, 평등의 열정, 반란의 신성한 본능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었다. 맑스의 사상이 후에 레닌의 전위이론으로 탈바꿈하면서 전위조직에 의해 이끌어지는 혁명이었다면 바쿠닌은 조직된 혁명을 거부했다. 즉 조직된 혁명은 권력과 억압을 폐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 권력을 이양시키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바쿠닌에게 있어 혁명은 자연발생적인 것이고 반란의 본능은 특정한 계급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임무가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대중의 공유물이었다. 바쿠닌은 농민과 룸펜프롤레타리아를 혁명에 대한 원초적인 정력과 거친 본능을 가진 세력으로 보았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는 중간계급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기술노동자와 조직화된 공장노동자들이 아니라 사슬말고는 아무것도 빼앗길것이 없는 "문명화되지 못한, 상속받지 못한, 문맹의 상태인" 수많은 사람들이라고 그는 보았다. 이런 혁명적 견해는 바쿠닌의 초기 범-슬라브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미래에 슬라브 민족주의의 중요성을 정확히 예측했고 슬라브의 혁명이 유럽의 사회적 변환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맑스의 견해에서 근본이 없는 지식인들은 그들 자신의 계급을 구성하지 못하고 부르주아지에 통합되는 요소일 뿐이었다. 지식인들은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미미한 역할을 가진 중간계급의 "부스러기"였다. 그러나 바쿠닌에게 있어 지식인의 역할은 혁명적 힘에서 민중에게 지식을 주고, 민중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민중의 자유를 위해 이를 쓰고 의견이나 사상의 독립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바쿠닌은 제1차 인터내셔널에서 맑스와 대립했던 아나키즘의 대표적 사상가였고, 이런 바쿠닌의 사상은 그의 수제자인 크로포트킨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게 된다.

 

4. 크로포트킨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그의 스승인 바쿠닌과 마찬가지로 루직가의 귀족의 보호아래 성장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그의 스승과는 다르게 폭동을 선동하지도 않았고 소규모 혁명주의자들의 손에 권력을 장악하게 하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바쿠닌의 이론을 다시 재정립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을 결합시켰다.

 

그는 봉기가 "최소한의 인원과 쓰라림"으로 치뤄질 수 있는 온건한 것이기를 열망했다. 물론 테러의 역할을 그가 무시한 것은 아니고 최소한의 저항수단으로서 가치를 인정했다. 또한 크로포트킨은 바쿠닌과는 달리 혁명의 준비과정으로 소요를 방법으로 삼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비밀결사에 대한 편집광적인 모습을 보였던 세르게이 네챠예프라는 인물을 저지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이처럼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온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크로포트킨 잫신은 비밀스러운 계획이라든지 지도적 위원들이라든지 엄격한 규율 같은 것들로 무장된 '전문적 혁명가들'의 비밀 모임에 어떤 의의도 부여하지 않았다. 인테리들의 역할로 적합한 것은 일반 대중에게 선전을 퍼뜨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 봉기를 앞당기게 하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혁명가들의 비밀조직이라는 스승의 구도에도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독창적인 사상은 '상호부조론'에 있다. 그는 개인적 생산능력에 기반을 둔 어떠한 분배구조도 노예적 임금제도의 또 다른 한 형태일 뿐이라고 간주했다. 그것은 각자의 생산성의 측정과 생산품과 그에 따른 용역의 분배를 관리하기 위한 권위주의 체제를 노동자들의 연결체 안에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임금의 원칙을 필요의 원칙으로 대체했다. 그의 눈은 소규모 아나키스트 공동체의 자발적 창조성으로 돌려졌다.

 

그래서 그의 눈은 인류속에 존재해있는 결속과 우애의 정신으로 함께 일하는 경향을 증명하는 데로 돌려졌다. 그는 시베리아의 황무지의 덕호버(모든 외부적 권위를 거부한 러시아의 농민 종교집단) 원시부족, 스위스의 주라산맥에 있는 시계제조업 공동체에서 겪은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상호부조론을 역설한다.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아나키즘운동에서 양 봉우리를 차지하는 위대한 사상가들이었고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5. 1905년 혁명시 나타난 아나키즘 운동

 

1905년 봉기에 아나키스트들은 주로 테러라는 방식에 의존해 참여했다. 1905년 혁명기간 중 아나키스트 그룹들은 "비온 뒤의 버섯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나키스트 조직에서 인원이 늘어났고, 러시아 서부지역에서 아나키스트 조직은 비알리스톡으로부터 바르샤바, 빌나, 민스크, 리가 등의 도시와 그로드노, 코브노, 고멜같은 보다 도시들로 번져나갔다.

 

새로운 아나키스트 조직들의 공통된 목표는 미래의 자유사회를 향한 길을 내기 위해 자본주의와 국가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가열된 논점은 혁명에 있어서 테러를 어떤 위치에 놓느냐 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두 그룹이 한편에 섰다.

 

Chernoe Znamia(이후 CZ)Beznachalie(이후 Bez)가 그들로, 이들은 부르주아 세계에 대한 완전히 테러적인 입장을 선전했다.

 

CZ(검은 깃발)는 제국에 있어서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들의 최대 집단으로,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조직이라 자처했으며, 각 개인이 자지가 필요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공동체라는 크로포트킨의 목표를 신봉했으나 그들의 전술은 직접적인 음모와 폭력이라는 바쿠닌의 영향을 받았다.

 

CZ와 마찬가지로 광신적인 호전적 아나키스트 소그룹으로 페테르스부르그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Bez(Without Authority)가 있다. 이들도 역시 자신들을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적 에고가 집합적 실체의 요구보다 우선한다고 본 막스 슈티르너, 벤자민 터커,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아류들인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역시 CZ와 마찬가지로 '무동기'테러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하지만 이들과는 달리 온건한 노선을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즉 크로포트킨의 '빵과 자유'그룹의 온건한 노선을 추종해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 선전을 퍼뜨리는 정도로 만족하는 그룹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CZBez처럼 주목받지 못했다.

 

또 다른 그룹으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이 있다. 이들은 테러리스트 전술에게 가장 강력한 비판을 퍼부었다. 러시아 국내에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제1지도자는 다닐 노보미르스키('새세계의 인간', 본명은 야코프 키릴로브스키)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크로포트킨과 그의 동료들이 행위에 의한 선전과, 그 밖의 개별적 테러를 인정한 것에 대해 비난했다.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인 테러는 파업, 보이코트, 사보타지, 공장주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정부재산의 몰수 등과 같은 '경제적 테러'라고 그는 주장했다.

 

1905년의 분위기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의 테러리스트 계열은 당연히 주도권을 가진 것으로 보여졌다.

 

6. 1917년 혁명시기에 나타난 아나키즘 운동

 

1917년 전반을 통하여-아나키즘이 국경지대에서 더 강세를 보였던 1905년과는 달리-운동은, 더이상 압제 정부의 본부가 아닌, 혁명의 바로 최정점이 되어 있던 페트로그라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미국과 서유럽의 망명지로부터 생디칼리스트들이 당당하게 돌아온 그 해 여름 이전까지 '붉은 페테르'의 대부분의 아나키스트 조직들은 아나키스트 공산주의노선에 따르고 있었다. 수도와 그 부근의 지역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그룹들은 곧 페트로그라드 아나키스트 연합(Petrograd Federation of Anarchists)이라는 느슨한 조직으로 묶이게 되었다.

 

2월혁명은 아나키스트들에게 무척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임시정부와 사유재산이라는 한 쌍의 멍에를 제거하기로 결정한 아나키스트들은 '부르주아'국가의 즉각적 파괴를 갈구하고 있던 러시아의 유일한 또 하나의 급진적 그룹 볼셰비키에게서 자신들과 공통된 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이리하여 1917년 두 번의 혁명을 겪는 동안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는 임시정부 타도라는 목표하에 서로 협조하게 된다.

 

10월 혁명이 끝나고 멘셰비키 정부가 타도되자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위원회를 구성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대기업들, 특히 수도 전체 노동자의 약 25에 가까운 인원을 채용하고 있던 국영 제련공장들에서 생산과 분배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다.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공장이나 작업장을 감독하는 역할을 요구하게하거나 지역 위원회를 조직하게 하는 기본적 충동이라는 것은 사실 정치적 파당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실행하기를 원하는 급진적인 아나코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의 통제를 실현하려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과 대립을 하게 된다.

 

10월 혁명이 끝나고 볼셰비키들이 '소비에트정부 수립'이라는 구호를 내세우자 아나키스트들은 당황하게 된다. 또한 봉기 다음날 볼셰비키가 자기 당원만으로 구성된 인민위원 중앙평의회의 창설은 큰 충격을 주었다. 이리하여 차츰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를 질책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191817일부터 14일까지 제1차 범러시아 노동조합회의(First All-Russian Congress of Trade Unions)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의 대부분은 볼셰비키로서 '노동자들의 통제의 중앙집권화'를 결정한다.

 

7. 볼셰비키 정부의 탄압과 아나키즘 운동의 몰락

 

브레스트 리토브스크 조약은 아나키스트들과 볼셰비키당 사이의 불화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검은 수호대'를 조직해 독일과의 전투와 사유재산의 점유에 나선다. 그러던 중 1918Cheka의 무장유격대가 아나키스트 센타를 습격하여 수십명을 살상하고 수백명을 체포했다. 곧 체까는 모스크바, 페트로그라드를 급습했고 지방에까지 확산되었다.

 

이에 CZBez의 휴계자 그룹들이 다시 일어났고, 소규모의 핵심적 무법자 집단이 '허리케인'이나 '죽음'의 이름을 걸고 활동했다.

 

하지만 1918년부터 1921까지 내전이 치열해짐에 따라 아나키스트들은 백군과 치명적인 전투를 벌이는 볼셰비키에게 원조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빠졌다. 논쟁이 거듭된 끝에 볼셰비키에 협조하기로 하고 아나키스트들은 백군과의 전투에 나선다.

 

내전이 끝난 후 볼셰비키는 다시 아나키스트들의 탄압에 나선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름을 날렸던 마흐노의 부관들이 사살당했고, 체까는 전국적으로 아나키스트 클럽과 조직을 공격했다. 그 박해의 정도는 점점 더 심해져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투옥을 항했다. 크로포트킨도 개인적 박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시골의 초라한 목재 가옥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그러던 중 19213월 제10회 당대회 직전, 페트로그라드의 스트라이크의 물결에 따라 1905년 혁명 이후 항상 혁명의 선두에 섰던 영광스러운 크론슈타트 군항의 수병이 소비에트 지도자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외쳤다. '소비에트의 개선, 비밀투표의 부활, 노동자, 농민, 아나키스트, 좌익 사회주의자의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 사회주의자 및 저항운동을 한 노동자의 석방'이 요구되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피폐한 국내에 이상에 불타는 '3혁명'을 주장하는 크론슈타트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프랑스의 스파이에 사주된 제정파 장교가 지휘하는 반혁명 음모집단으로 꾸며버렸다. 드하체프스키가 이끄는 정부군은 핀란드 만의 얼음을 피로 물들이면서 크론슈타트를 함락시켰다. '반란'은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를 분명히 드러내어, 정치적 양보는 있을 수 없지만 경제적으로는 [네프]가 채택되었다. 또한 이 크론슈타트의 '항쟁'은 제10회 당대회에서 분파활동금지와 중앙위원의 제명이 비밀리에 결정되는 등 강력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대중적 창조성과 자유로운 논쟁을 분쇄한 이 결정은 스탈린 시대 이후의 소비에트 연방의 진로를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결정 후에 탄압은 더욱 노골적이 되었고, 이에 우려한 국외의 아나키스트들과 반발이 따르자 레닌은 잘 알려진 아나키스트 수감자들을 해외망명을 조건으로 석방한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혁명과정에서 죽고, 적군에 배신당해 죽거나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어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아나키스트들의 몰락은 세가지의 이유로 정립될 수 있다.

 

첫째는 그들이 그렇게 믿고 신뢰했던 러시아 인민들의 정치적 의식이 아직 낮은 수준에 있어서 전위를 주장하는 볼셰비키의 노선에 인민들이 따랐다는 점, 둘째는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이 받고 있는 구속을 해결해 줄 방안으로 바쿠닌의 초광신적 기질이나 크로포트킨의 설익은 듯 보이는 낭만주의를 받아들이길 꺼렸다는 점, 세째는 아나키스트 강령 자체의 속성인 어떤 종류를 막론한 교조적 조직에 대한 격렬한 적의가 자체의 공식적 운동으로의 성장을 저해했다는 점이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아나키스트 그룹 역시 내부적인 분파간의 논쟁이 치열해 통일된 노선을 취하지 못했다는 점도 들 수가 있다.

 

 

결 론

 

 

이상으로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운동의 발흥과 전개, 소멸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아나키즘이 가진 순수한 이상,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의 소멸'이라는 이상은 현재까지도 그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상당히 달라져야 겠지만. 하지만 그 순수한 이상은 인민대중에 의해 선택되지 못했다기 보다는 정부를 장악한 볼셰비키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권력욕에 불타는 지식인들의 손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패배된 사상으로 역사속에 묻혀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에 와서 아나키즘의 이상이 다시 불타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소련과 동구권의 해체는 아나키스트들의 탄압에서 비롯된 사회주의의 변형이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즉 소련의 맑시즘이 관료적, 억압적으로 변형된 것은 스탈린 때의 기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바로 혁명과정에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고, 그 결과로 소련은 붕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승자의 역사만을 기록하는 역사가의 손에서 아나키즘은 그 빛을 잃었으나 그와는 무관하게 발전하는 역사는 다시 아나키즘의 역할을 부활시켜 놓았다. 세계적인 탈중심화와 연방제, 지방분권화, 반관료제,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시도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아나키스트들의 투혼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역사는 다시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즘 참고문헌>

 

러시아 아나키즘 운동에 대한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폴 애브리치, [러시아 아나키스트 1905], 예문.

2. 폴 애브리치,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예문.

3.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러시아 지성사], 종로서적.

4. 宋田道雄編, [러시아 혁명의 기록], 형성사.

5. Paul Avrich, [Anarchist Portraits], Princeton Univ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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