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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9-01-16 조회수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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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마 시에 나타난 아나키즘의 수용

청마 시에 나타난 아나키즘의 수용

 

 

목 차

 

1.문제 제기

2.주체적 본연의 자아 찾기(만주이주 이전의 시)

3.자주국으로서의 겨레 찾기의 모색(만주 시기의 시)

4.무권력 무권위 국가 건설의 바램(해방공간의 시)

5. 인위의 법도 비판 및 자연 질서로의 회귀(6·25 이후의 시)

6. 마무리

 

발행자명 문학과언어학회

학술지명 문학과언어

ISSN 1225-0422

19

1

출판일 1997. 12.

 

 

 

 

 

 

 

청마 시에 나타난 아나키즘의 수용

 

 

정 대 호

경북대 강사

1-003-9702-08

pp.195-216

 

 

 

1.문제 제기

한국아나키즘운동사에 보면 청마 유치환이 아나키스트의 시인임을 밝히고 있다. 1) 청마 자신은 192823세때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가서 1929년 귀국하게 되는데 이 때 한창 일본에서 힘차게 나타나고 있던 <아나키스트>시인의 작품에 공감을 느꼈다고 회고하고 있다. 2) 또한 청마 자신은 1940년 봄에 만주로 가게 되는데 이 시기의 그의 삶을 회고하는 글에서 "나의 주변에는 많은 <아나키스트>와 그 동반자들이 있었고 따라서 내게도 항상 일제 관헌 의 감시의 표딱지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녔다"라고 표현했다. 이를 입증하는 기록으로 1937생리동인으로 함께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박노석의 글을 볼 수 있다.

 

1939년 초여름.1급 요시찰인 나는 국내에서 지내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 국외로 도망 칠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 마침 그때 북경에 있는 R이란 고향 친구가 나타났다.

나는 기회는 이 때다 생각하고 그와 며칠을 어울리는 동안 북경에서 중경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루트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그와 북경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비장한 심장으로 고향을 떠나 부산에 내려 왔다.

부산에는 전일(全一)이라는 마음의 벗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하숙방에 기식을 하면서 초조하게 북경으로 떠나갈 것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사태는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벌써 일 경의 감시 속에서 단 한발짝도 국외로 나갈 수 없다는 정보였다.

나는 도리 없이 표류의 신세가 되어 전일과 더불어 청마,정성수 등과 어울려 술마시는 것 으로 울적을 달랬다. 3)

 

청마의 시에서 아나키즘적 특징이 확연히 보이는 첫작품이 19381019동아일보에 발표된 생명의 서이다. 이로 보면 청마가 아나키즘의 사상을 인생의 가치관으로 수 용한 것이 생리동인으로 활동하면서인 것 같다. 그 이전의 시에 있어서도 현실에 관계 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인식에서 청마 나름대로의 일정한 가치관의 시각이 획득 된 것이 이 무렵 같다. 그러나 청마 자신이 지접 아나키스트 시인임을 밝힌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청마의 시에서 일생동안 변화하지 않은 가치관을 말한다면 1928년 무렵부터 읽기 시작한 독서 체험을 토대로, 1937년 동인 활동을 하면서 교우관계로 알게 된 아나키스 트들의 영향을 입어서 형성된 아나키즘적 사고라고 생각된다.

 

2.주체적 본연의 자아 찾기(만주이주 이전의 시)

청마 유치환이 대외적으로 발표한 첫작품인, 193112문예월간에 발표한 정적을 보면 '단양 아래 점점히 쪼그린 적은 돌맹이'라고 하여 거대한 세계 앞에서 왜소한 자 아인식을 보여준다. 1933년에 발표한 박쥐에서도 '저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서/호올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라고 하여 현실을 ''으로, 자신의 행위를 몰래 홀로 서러운 춤을 추는 존재로 인식한다. 19361조선문단에 발표한 깃발에 오면 다소 변화가 보인다. 깃발을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여원한 노스 쟈의 손수건'이라고 하여 영 원한 이상을 향한 동경을 보인다. 그러나 이를 다시 '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 은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하여 여전히 이룰 수 없다는 한계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전의 시들에 비하여 자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더 분명함 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청마의 세계인식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는 19381019동아일보에 발표한 생명의 서에 오면 확연히 달라진다. 현실세계에 대한 가치평가도 분명해진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열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그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의 전문>

 

이 작품을 쓴 시기가 시에 나타난 것처럼 청마 자신으로 볼 때 내외적으로 삶에서 가장 갈 등이 치열한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외적으로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속화되는 시기였다. 내 적으로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고 친일의 삶을 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반일의 극단에 서기도 힘들었다. 이에는 현실적 시련이 너무 힘든다고 생각했는지 도 모른다. 그 외의 남은 선택은 청마 자신의 표현처럼 은둔자의 삶을 사는 길만이 있을 뿐 이다. 그것마저도 창씨개명이니 신사참배니 하는 것들이 끝없이 자신을 괴롭혀 그렇게 쉽지 는 않았다. 최소한의 자신을 지키며 살려는 지식인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은 거대한 폭력으 로 보인다. 기본적인 상식을 잃어버린 억지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그가 사는 현실의 삶을 '병든 나무'와 같은 것으로 보고 새로운 삶의 세계를 모색하 게 된다. 이 때 그가 모색한, 건강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으로 '아라비아 사막'이 생 각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1연의 내용에서 청마의 문명과 원시에 대한 양분법적인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이를 홍기삼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문명적인 인간과 짙은 원색의 프리미 티브한 자연과의 대조" 4) 라고 하였다. 청마는 그가 사는 현실의 삶을 문명으로 파악하였다. 즉 서구의 자본주의 문화 를 현대문명으로 파악할 때, 현재의 일본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그것이 외부로 나타난 것이 제국주의의 형태였다. 그가 공부한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의 반대 편에 서는 지식이므로 그것 이 더 분명하게 인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문명국의 거대한 도시 문화의 환락의 이면에는 속이고 빼앗는 약탈의 문화와 권모술수의 상업주의의 본 모습이 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보았다. 이러한 문명은 건강한 삶이 아닌 병든 삶이다. 왜냐하면 문명의 삶은 따뜻한 가슴으 로 사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파악한 세상에 대한 지식이 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현실의 삶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에서 '아리비아 사막'깃발에서 동경의 세계로 나타난 '푸른 해원'에 비하여 훤 씬 더 구체적 공간이다. 현실적 한계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단순한 동경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세계의 추구로 한 단계 더 나아간 곳이라 할 수 있다.

 

1연에서 그가 현대 문명의 대안으로 파악한 문명 이전의 원시의 세계의 본질은 2연에서 비 교적 소상히 나타나 있다. 그것은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는 사막의 세계이다. 다시 말하 면 백주대낮의 세계이다. 백주대낮의 상대적 개념으로 우리는 밤의 세계를 설정할 수 있다. 밤의 세계가 어둠과 암흑과 권모술수의 세계, 즉 속고 속이는 세상이라면 낮의 세계는 모든 것이 숨김 없이 드러난, 가식이 없는 세계이다. 모든 것이 사멸한 허무와 적막의 사막 세계 인 것이다. 거기서 인생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삶을 참자아로 그는 파악했다. 그 것을 누구와 더불어 하는 것도 아닌 고고한 단독자로서 말이다. 이 때 그가 지향하는 생명 의 본연의 자아는 정해진 도달점이 없는 것이다. 목표가 없는 의지의 지향, 이를 허무(도달 점 혹은 목표점이 없는)의 의지라고 한다. 이러한 무한의 의지를 가진 사람을 니체는 초인 이라고 불렀다.

 

3연에서 단독자로서 세계 앞에 당당히 맞섰을 때, 자신의 본연의 참모습과 만날 것이라는 신념에 차 있다. 그가 파악한 본연의 참모습이 사물의 원래의 물성임을 알 수가 있다. 청마 가 그토록 현재의 모든 문명의 삶을 거부하고 찾아 나선 것이 원시의 물성이라면 여기서 우 리는 그의 니체에 대한 수용 못지 않게 아나키적 수용도 읽어낼 수가 있다.

 

또한 이 시의 끝에서 청마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를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도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어 우리는 그를 의지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마는 '원 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우지 못하거든'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거든'은 경상도의 말로 '-'의 뜻을 가진 말이다. 즉 가정·조건을 의미하는 어미이다. 이 시의 마지막 행은 목숨 을 건 결연한 의지를 보여 준다. 이것은 청마가 나타낼 수 있는 최후의 결연한 의지이다.

 

이 시와 같은 내용의 갈등과 의지가 나타난 또 다른 작품으로 일월, 바위, 해바라 기 밭으로 갈려오, 단애(斷崖), 송가(頌歌), 내 너를 세우노니등을 들 수가 있다.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적 유풍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하되

삼가 애련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임일레라

<일월중에서>

 

이 작품은 19394문장3호에 발표된 시이다. 1, 2, 3연에 나타난 '백일', '머언 미 개적 유풍', '성신', '비와 바람'은 다 같이 원시의 세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백일'을 광 명의 세계로 해석을 많이 하는데 그렇게 보아 광명을 추구하는 삶으로 보아도 무난하지만 이 '백일'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말로 '백주 대낮'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렇 게 보면 이 시 역시 생명의 서에서 보여주는 내용과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러 한 문명과 원시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시작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는 바위에서도 마찬가 지로 나타난다. "애련에 묻들지 않고/희노에 움직이지 않고/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억년 비정의 함묵"을 지키는 '바위'는 바로 이러한 원시의 자연의 세계를 의미한다.

 

3.자주국으로서의 겨레 찾기의 모색(만주 시기의 시)

청마의 만주 이주는 1940년 봄에 이루어진다. 청마는, 만주 이주를, 국내에 있을 때에는 새 로운 삶의 공간에 대한 모색으로 여겼으나, 막상 만주에 도착해서는 겨온 것으로 인식한 다. 생명의 서에서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고 하여 현실적 삶을 벗어난 새로운 곳으로 원시의 세계를 찾았는데 그 원시의 세계가 현실적으로 실현된 곳이 만주이다. 그러 나 그는 만주에 도착하자 "아아 나는 예까지 내쳐 왔고나"(새에게에서)라고 탄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내면에 만주는 찾아온 곳이 아니라 겨 온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만주로 떠나 오면서 "장안을 나서서 북쪽 가는 천리" "이 길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안 하리니"(의주에서)에서 보여준 결연한 의지와는 모순된다. 여기서 우 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청마의 만주행의 의미이다. 청마의 만주행은 기약없는 유랑의 길 이 아니라 농장 관리인이라는 안정된 삶을 뜻했기 때문에 다른 만주 유이민의 시에 나타나 는 정서와는 다르다.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겨온 사람들과는 달리 이 길은 선택의 길이라 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주에 도착한 후 첫번째 반응이 원시의 삶의 공간에 대한 절망이 다.

 

홍안령 가까운 북변의

이 광막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에 본 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 속으로 끝 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나를 다시 과실(過失)함이려뇨

이미 온갖은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의 길에

내 열 번 패망의 인생은 저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임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 고 서면

나의 탈주할 사념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차장도 이백 리 밖

암담한 진창에 가친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

<광야에 와서의 전문>

 

이 작품은 19407인문평론에 발표한 작품이다. 만주에 온 직후의 작품임을 알 수 가 있다. 그가 만주로 온 것은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왔다. '화툿장'을 만지 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다. 그의 삶은 어느새 또 다른 방황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만주로 온 것은 국내에서의 삶을 탈주하기 위해서 왔으나 이제 여기서 또 다시 탈주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 여겼을 때, 그는 '암담한 진창에 가친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라는 절망 감에 빠진다. 만주에 와서 청마가 절망한 가장 큰 이유는 그 자신의 문제였다. 그가 기대했 던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관념적인 이념으로서의 삶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념적 이념으로서의 삶이 현실적인 실제의 삶과 거리감이 크다고 인식될 때, 이 념으로서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느껴졌다. 여기서 우리는 청 마가 "고향도 사랑도 회의도 버리고/여기에 굳이 입명(立命)하려는 길"(절명지에서)로 만주를 찾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본 본연의 자아를 실현하는 삶이다.

 

인사를 청하면

검정 호복(胡服)에 당딸막이 빨간 코는 가네야마

핫바지 저고리에 꿀먹은 생불은 가네다

당꼬바지 납작코 가재 수염은 마쓰히라

팔대장선 광대뼈는 구니모도

방울눈이 친구는 오오가와

그밖에 제멋대로 눕고 앉고 엎드리고

샛자리 만주캉* 돼지기름 끄으는 어둔 접시등 밑에

잡담과 연초 연기에 떠오를 듯한 이 좌중은

뉘가 애써 이곳 수 천 리 길 이적(夷狄)의 땅으로 끌어온 게 아니라

제마다 정처 없는 유랑 의 끝에

야윈 목숨의 우로(雨露)를 피할 땅뺏이를 들고 찾아

북만주도 두메 이 노야령(老爺嶺) 골짝까지 절로 모여든 것어어니

오랜 인욕의 이 슬픈 40대 들은

부모도 고향도 모르는 이

철 없이 업히어 넘어 들은 이

모두가 두 번 고향 땅을 밟아 보지 못하여

가다오다 걸어 들은 우리네 사람이 전하는 고국 소식을 들은 밤은

흥이 오르면 빼주()에 돼지 발쪽을 사다 놓고

저건네 갈미봉도 부르고

어하 농부도 부르고

저기 앉은 저 표모(漂母)도 소년은 이로(易老)하고도 부르고

속에서 피눈물 나는 흥에 겨워 밤 가는 줄 모르나니

아아 카인의 슬픈 후예 나의 혈연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언제나 우리 나라 우리 겨레를

반드시 다시 찾을 것을 나는 믿어 좋으랴

괴나리 보따리 하나 들고 땅끝까지 기어 간다기로

우리는 조선 겨레임을 잊지 아니하고 죽을 것을 나는 믿어좋으랴

좋으랴

 

*=만주 방, 온돌 모양

<나는 믿어 좋으랴의 전문>

 

이 시에서 몇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이 시에서 청마의 만주 이주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나라 우리 겨레를/반드시 다시 찾을 날이 있을 것을 나는 믿어 좋으랴 '에서 그의 만주 이주의 이유가 '우리 나라 우리 겨레를' 다시 찾기 위한 모색의 길임을 알 수 있다. 청마가 아나키즘의 영향을 입었음을 앞에서 보았다. 아나키즘의 주된 주장이 외세로부터의 완전 자주독립, 완전한 자립에 있다면 그는 그가 찾아 나선 그 길이 보이지 않음을 짐작한 것 같다. 그것은 그가 만난 사람들이 가네야마, 가네다, 마스히라, 구니모도, 오오가와에서 보는 것처럼 창씨개명을 하고 호복, 핫바지, 당꼬바지를 하고 살아가는 모습 에서 민족의식이 없이 현실에 안주하여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청마의 생 각으로는 "아무리 일제의 독수가 악착 같다 할지라도 이 같은 후미진 광야 끝에서야 그 치 욕스런 창씨라는 것쯤 않고서도 모면할 수 있었" 5) 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이 이러한 기대는커녕 "개중에는 일제의 위세를 빌려 그 것이 마치 제 것인양 내세워 본토인을 모멸하고 착취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본토인은 오히려 망국지민과 거지를 합친 의미로서 우리 겨레를 꺼우리팡스라고 불러 멸시하고 증오 까지 하였으니 더욱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 6) 이것은 그가 생각했던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살 아가는 것이다. 국내에서 그토록 자신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그 가 만주에 와서 절망에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마가 만주에 와서 절망한 또 다른 이유는 이곳도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본연의 삶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문명사회의 또 하나의 틀인 힘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인위 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십이월의 북만(北滿)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에 모호(模糊)히 저물은 삭북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함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열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는 무뢰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한 사변(思辨)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의 전문>

 

이 시의 내용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시는 북만주의 네거리에 내걸 린 비적의 머리 두개를 보고 쓴 시다. 이 시에서 '너희 죽어 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 느뇨'에 대한 물음에 '이는 사악이 아니라/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와 같을 수 있도 다'라고 답한 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것을 정당한 이치로 보느냐, 아니면 정당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세상의 이치로 보느냐에 따라서 내용상의 상당한 차이를 가져올 수가 있다. 이 부분을 읽는 데에는 '혹은 너의 삶은 즉시/나의 죽음 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니리'때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먼 원 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인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의식으로 인해 일어난 한 현상으로 파악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청마는 이 시에서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법도''각박한 거 리'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비적의 머리 두 개를 보고 '다시금 생명의 험렬함과 그 결의를 깨닫'는다고 했다. 아나키즘의 원리는 다아윈식의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으로 인한 적자 생존 의 원리를 비판하고 상호부조의 공동체적 삶의 원리를 추구한다. 이렇게 본다면 '각박한 거리'는 인명을 계구와 같이 여기는 율의 처단을 비판적 안목으로 파악했다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같다. '생명'이라는 표현도 청마의 시에서 앞에서 본 것처럼 인간 본연의 자아 그대로의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생명의 험렬함을 깨닫고 생명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결 의를 깨닫게 된다. 무뢰한 넋이지만 그가 명목을 비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7)

 

4.무권력 무권위 국가 건설의 바램(해방공간의 시)

청마는 19456월 해방을 바로 2개월 남겨놓고 귀국한다. 그는 그의 귀국을 "초라히 비취 는 나의 행색이여"(돌아와서에서)라고 하여 초라한 귀향으로 인식한다. 이는 국내의 여 건이 별 변화가 없었으므로 그의 귀국을 그렇게 표현했다. 해방을 맞이하여 그는 새로이 마 음을 가다듬고 새로 나라를 세우는 일에 뛰어들게 된다. 8·15직후 그는 같은 지방 출신의 김춘수 김상옥 윤의상 전혁림 등 "고향의 몇몇 동지들과 힘을 합쳐서는 하마 불붙기 시작한 좌우 진영의 싸움 속에서" "향토문화의 재건과 계몽을 自進自擔"기 위해 통영문화협 회를 발족하여 "수 삼년 동안 보람을 느끼며"일했던 것이다. 8)

 

경상도 구석진 갯촌에서 올라온 나는 한 개 촌뜨기

 

서울! 서울아 너는

얼마나 거룩하고 가슴 설레는 이름이더냐

온갖이 눈부시고 아름다와 세상에도 화려한 곳!

모든 개화와 문명이 거기 모여

사람들은 모두가 호화롭고 호사스럽고

학문 높고 지체 높은 어른들도 또한 많아

언제가 가지 가지 어려운 나랏일을 공론하는

서울아 너는

그렇게도 우러르는 우리의 꿈나라가 아니더냐

 

그러나 서울아

남대문을 들어서면 너는 지옥의 저자다

거리 거리에 쏟아 넘는 엄청난 인간의 밀물들과

그 새를 서성대며 아귀같이 소리소리 부르짖는 장삿군과

내닫는 차들의 비명과 쓰레기더미어찌 그뿐이랴

오직 정권을 탐하는 선동 기만 야합 폭력과

온갖 대회와 결정서와 허구를 빚어내는 정당에

일신의 포복 영달을 꾀하는 모리 탐관의 좀도둑들!

이 모든 악덕과 파렴치와 독선과 동족의 유혈은

요컨데 서울아 그대로 조선아

너는 아비규환 개똥밭이 아니더냐

 

여기 길이 있다

오월의 푸른 하늘 아래 먼 보리 이랑 끝없이 물결치는 고개 넘어

몇 그루 소남엔 언제난 먼 여울소리 걸리어 외로이 울고

철따라 나비 날고 뻐꾹이 애틋이 울고

때때로 가랭이 걷어 붙인 사나이 지개 받쳐 쉬고 가고

읍네 갔던 아낙들 석양이면 총총히 돌아오는 호젓한 길이 있다

 

서울아 너는 일찌기

이 길을 생각이나 하여 보았느냐

네가 알려지도 않는 이 길

아득히 잇닿고 얽히고 뻗고 다시 끝없이 잇닿아

까맣게 너를 모르고 사는 이 길

그 으리으리한 육조대로(六曹大路)가 아니라 정권이 아니라 권력이 아니라

애닯게도 면면한 족속의 지낸 성상과 그 미래를

오직 지키고 받들어 배()어 있는 그 이름없는 길을!

<서울에 부치노라의 전문>

 

이 시에서 2연은 멀리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이고, 3연은 가까이 가서 본 서울의 모습이며, 4 연과 5연은 작가가 기대하고 바라는 서울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3연의 내용은 현실의 서 울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아비규환의 아귀다툼이 된 시장판의 삶을 살아가고 있 다. 이는 장사치, 정치가, 관리 등 어느 한가지도 마찬가지다. 청마는 이러한 현재의 서울의 모습을 '아비규환의 개똥밭'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 서울의 모습은 단순히 서울의 모습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조선의 모습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면 청마가 추구하는 국가의 상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그가 추구하는 국가의 모습은 유토피아적 아나키즘의 세계관이 구 현된 세계이다. 청마는 영웅사관을 믿지 않았다. 그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하여 "나의 피는 나의 조국! 사실로 나의 생명인 나의 피, 나의 피인 나의 생명은 반만년의 아득한 역 사와 전통과 정서 속에서 결과된 소산이요, 결정이요, 조국 그것인 것"이라고 하여 개인은 국가의 부분으로 보았으며, "조국을 받들어 지켜온 이는 왕조나 어떤 지도자나 특권 계급이 아니라 어떠한 곤욕에도 저들의 애환에 첨부하여 어리석디 어리석게 살아온 무수한 겨레 자 신들"이라고 하여 국가는 소수가 아니라 어리석은 다수의 백성들에 의하여 지켜온 것이라고 하였다. 9) 즉 국가와 개인에 대하여 개인은 국가의 한 구성원이며 국가의 바탕은 인민에 있다고 파악 한 것이다. 개체적으로 이상적인 삶이란 청마식으로 말하면 생명의 세계 즉 생명의 본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4연에서 보여주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의미한다. 5연 에서 부정적으로 보여주는 육조대로의 현란한 문명도 아니며, 정권이나 권력을 지향하는 삶 이 아니다. 그가 지향하는 무권위, 무권력의 정부는 바로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 이다. 이러한 청마가 지향하는 이상적 세계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고대룡시도(古代龍市圖)이다. "이 휘황한 벽력(霹靂) 사이를 사람들은 사람들로/호사롭 게 더불어 봉황을 어깨에 얹은 이/봉의 눈 나룻 푸른 젊은이/나부끼는 흰 눈섭의 동안(童 顔)의 늙은 이/모두가 늠늠한 가운데 유연히 옷자락을 끌고/지나치며 서로 공손히 읍하고/ 어깨치며 호탕한 웃음도 섞어/……중략……/고대(古代)의 기나긴 하루 해가 저물도록"(고 대용시도의 일부)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권력도 없고 다툼이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 해 인간으로서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루지는 국내에서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조국의 현실은 청마의 바램 과는 자꾸만 거리가 멀어져 갔다. 해방 직후 고향에서 자치단체를 만들어 몇 동지가 학교 운영을 돌려 받으러 한 학교에 갔을 때, 일인 교장의 독기와 저주에 찬 어조의 말을 그는 지나칠 수 없었다. "미국의 州界나 구라파 열국의 아프리카 분할 방법을 보았느냐고 말하며 이어 三八선으로서 미국과 소련에 분할당할 게라고 즉 너까짓 것들이 까불지마는 역시 너의 나라는 미쏘의 식민지를 못 면할 것이라는 말투" 10) 가 바로 그것이다. 미쏘의 외세는 외세로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 통한(痛恨) 은 외세를 등에 업은 온갖 분열로 나타났다. 여기에 "우리들 자신내의 온갖 패덕의 슬픈 원 인이" "그 운명의 선은 우리가 그렇게도 희약하던 해방의 감격 속에 우리들도 모르는 새 이 미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 11) 이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로 나타나자 청마는 다시 현실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눈을 뽑아 북악의 산성 위에 높이 걸라

망국의 이리들이여

내 반드시 너희의 그 불의의 끝장을 보리라

 

쓰라린 쓰라린 조국의 오랜 환난의 밤이 밝기도 전에

너희 다투어 그를 헐벗기어 아우성 치며

일찌기 원수 앞에 떳떳이 쓰지 못한 환도(環刀)이어든

한낱 사조(思潮)를 신봉하여

골육의 상쟁을 선동하여 불놓기를 서슴지 않고

보잘것 없는 제 주장을 고집하기에

감히 나라의 망함을 두러하지 않나니

매국이 의를 일컫고

사욕(私慾)의 견구(犬狗)는 저자를 이루고

오직 소리 소리 패악하는 자만이 도도히 승세하거늘

나의 눈을 뽑아 북악의 산성 위에 높이 걸라

일찌기 악한 것이 끝내 영화하고

불의가 의를 낳음은 보지 못했느니

오늘에 이르러 너희의 행패가

드디어 또 한번 원수를 이 땅에 이끌어

그 무도한 발길에 무찔러 조국의 산하가 마르고

사직의 주추에 잡초가 더욱더 우거지고

망국의 성터 위에 별들이 모여 떠는

수많은 겨레의 생령이 죽어 가는 날이 다시 없기를

아아 늬가 어찌 기약하료

내 반드시 너희의 이 불의의 끝장을 보리라

 

그러나 조국이여

양춘(陽春)이라 봄이 오면

아지랑이 날으는 이 강산에

진달래 철 따라 피어 널림이

아아 서럽지 서럽지 아니한가

<조국이여 당신은 진정 고아일다의 전문>

 

청마는 조국의 오랜 환난의 밤이 밝기도 전에 다투어 아우성치는 현실 앞에서 민족의 앞날 때문에 또 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국의 현실은 가히 혼란과 분열의 아우성을 이루었다. 외적 앞에서 쓰지 못하던 환도를 들고 동족의 살해를 서슴지 않는 정치적 암살, 사조를 앞세워 골육상쟁을 하는 무리, 매국이 의를 일컫고, 소리소리 패악하는 자만이 승세 하는, 악이 선을 몰아내고 행세하는 세상을 보면서 청마는 또 다시 원수를 이 땅에 이끌어 조국의 산하가 마르고 국가의 운명이 기울어 수많은 겨레의 생령이 죽어가는 날이 올 것 같 아서 민족의 앞날에 대해 우려하고 불의의 세력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 민족의 편에서 진정 고뇌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일선에서 밀려나고 외세를 등에 업은 자들이 사조를 앞세워 민족을 분열시키려 하는 현실을 보고 동족 상잔에 대한 우려를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477월 조선에 한 달 비 내리다에서 "썩어진 조선의 마음 위에/한달 아닌 아홉 해를 홍수비 내려라/일찌기 청초(靑草)도 뜻있어/의로운 무덤에 삼가 오르지 않 았거늘/모외사대(慕外事大) 사색편당(四色偏黨)의 탈을 뒤집어 쓴/백귀야행(百鬼夜行)의 소 돔의 나라 조선이여/아직도 이 나라의 해와 달이 비침을 지허할지니/불 아닌 천의(天意)의 은혜하는 이 한달 비에/아하 너희 달갑게 썩어지라 썩어지라"라고 노래하여 외세를 등에 업 고 그 외세로 편당을 앞세우는 무리들로 횡횡하는 조선의 현실에 저주를 보낸다. 이러한 내 용은 눈추리를 찢고 보리라에서 모외사대와 사색편당하는 자들에 대해 "오늘이야말로 뜨거운 손과 손 가슴과 또 가슴으로/말 없이 서로 묵약하여야 할 우리네가/내 형제끼린 원 귀 모양 질투하고 모함하고/나라보다는 당파를 앞세우고/도리어 남 나라를 조상같이 위하고 아부함이 없는가"라고 하여 그들의 본 모습을 들추어 내어, 그들이 자당(自黨)의 권세를 위 해 민중의 복지를 팔고 그릇된 주장으로 백성을 우롱함에 대하여 청마는 "눈추리를 찢고 나 의 똥창까지 드려다보리라"라고 하여 분노한다. 그리하여 그는 "아아 나의 겨레여 우리는 마땅히 망멸(亡滅)할진저"라고 탄식하기까지 한다.

 

청마는 자신이 추구하는 완전 자립의 자주 국가가 외세를 등에 업은 꼭두각시들의 출현에 의해서 그 실현 기능성이 점점 소실되는 것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 는 현실의 적극적인 관심에서 점차 소극적인 관심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울릉도에 오면 "멀리 조국의 사직의/어리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울릉도중 일부)라고 표현하게 된다.

 

5. 인위의 법도 비판 및 자연 질서로의 회귀(6·25 이후의 시)

6·25의 체험은 청마로 하여금 삶의 무상감을 느끼게 하고 인생의 허무를 자각하게 한다. 그는 전쟁 중 종군시인으로 전쟁터를 따라 다닌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공산당에 대한 적 개심은 거의 없다. 단지 인민을 괴롭히는 전쟁을 증오할 뿐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총칼 앞에 서 무수히 죽어가는 것을 그는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보고 그는 인위의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그의 초기 시에서 보여준 생의 무한 의지에서 이 시기에 생의 허무를 느끼게 된 연유는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3)

 

이 시기 이후의 시에서 청마의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매우 약해진다. 이 시기에 오면 청 마의 시의 특징은 노장적 세계와 불교적 세계의 수용을 들 수가 있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세계관에 대한 강한 거부의 태도를 나타낸다. 14) 그러나 이 시기에서도 그의 현실 비판의 촉수가 뻗어 있는 시에 있어서는 여지 없이 아나키 즘의 요소가 나타남을 볼 수가 있다.

 

버릴 대로 버려진 여기 반역의 무덤 위에

우거진 쑥대도 노하여 허허허 웃는가

진실로 너희 인간이었기에

한 개 빨가숭이,원죄의 십자가를 지고

이 굴욕의 골고다에 견마로 버리었거니

절치(切齒)하고 무릅쓰는 이 단죄의 채찍이

제 아무리 모질고 가혹할지라도

윤리란! 법도란! 도덕이란!

그 엄청난 가면과 위선과 허구를 겨러<>

끝까지 조소 부정하는 너희의 행위야말로

차라리 꽃같이 진한 목숨의 산화 (散華)!

다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그 무도(無道)

너희 허구로 다시 고발하라

 

이미 값 치지 않은 저희와 나의 삶이었기에

혈육도 피하는 이 능멸과 모멸인즉

아예 두려워하고 뉘우칠 바 없건마는

나의 길을 먼저 간 형제여

그 어느 날 마침내 추운 영혼이

구월의 문전에서 남루히 이르러

고아처럼 채수리고 흐느끼지 않을가를

내 오직 저허하고 분히 여길 뿐이거니

 

저 썩어진 인간에게 버림받음이야

우거져 마른 쑥대도 허허허 웃으랴

<감옥묘지의 전문>

 

이 시는 1953년에 나온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에 실린 작품이다. 이 시에서 보면 인위 의 법인 윤리, 법도, 도덕을 부정하는 것을 잘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만주 시기 의 시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오면 이러한 생각은 더욱 자 주 보이게 된다.

 

인위적 세계 질서의 초월은 자연적 질서의 세계로 나아감을 말한다.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쟎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저녁 놀의 전문>

 

앞의 시와 같은 시집에 실린 시이다. 여기서도 자연의 ''과 정치 권력인 '', '사또', '대 감'이 뚜렷한 대비가 되어 나타난다. 전자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 으로 대하고 있음에 반해 후자는 인간 위에 굴림하는 존재로 '거들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 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오면 해방 직후의 시들에서처럼 정치에 비판적인 자세는 견지하지만 직접 적인 참여는 하지 않는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청마의 현실적인 직업 또한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학교 교장으로서 비교적 안정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는 그 당시의 사회로 보아서 사회의 지도급 인사에 속한다. 이러한 여건은 청마의 정치적 행위의 운신의 폭이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직접적인 정치 세계에 대해 울릉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으로서의 한계의식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6. 마무리

앞에서 청마의 시에 나타난 아나키즘 요소의 수용을 보아 왔다. 청마의 삶과 시들을 보면 아나키즘적 요소가 그의 삶의 가치관의 하나로 수용된 것이지 그가 이 사상의 실천적 운동 가는 아니었는 것 같다. 청마시에 아나키즘적인 사상이 형성되게 된 요인은 앞에서 본 것처 럼 그의 독서 체험과 교우관계의 영향으로 볼 수가 있다. 김종길의 글에 의하면 그는 과묵 하고 말이 별로 없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인간적 기질이 어떤 한 경향에 깊이 빠져 그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하지 않은 것 같다. 수용은 하되 맹목적인 함몰은 하지 않은 연유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청마의 시에서 아나키즘적 요소를 정리해 보면 만주 이주 이전에는 주로 본연의 자아를 지키며 사는 삶을 추구하게 하여 수단과 예속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자주인으로 자신을 지키게 하는 노력을 하게 하였으며, 만주시기의 시에서는 자주인으로서 자주국가를 찾기 위한 모색을 하게 했다. 이는 크게 보아 그 당시가 일제의 강점하에 있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가 없다. 남의 나라의 탄압을 받는 백성으로서 자주국 가의 자주인으로 살기 위한 열망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청마는 해방 공간의 시 기 즉 건국을 눈 앞에 두고 구체적으로 아나키적 이상국가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를 위해 일종의 정치활동도 해 보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민족사 는 전개되고 만다. 외세를 등에 업은 꼭두각시들이 남과 북에서 민족의 자주를 팔아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그는 그의 정치참여의 한계를 느낀 것 같다. 이러 한 적극적 정치 참여에서 정치 방관자로서의 물러남은 그로 하여금 한 사람의 국민으로 비 판자의 입장에 서게 한다. 일제 강점기하의 만주에서의 입법이 일제의 기득권 세력에 의한 모순에 찬 인위의 법이라면 남북 분단기의 입법 역시 분단을 미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의 입장에 선 법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위의 법은 인간의 상식과 양심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 인위의 질서인 법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된 다. 이는 인간이 만든 윤리, 도덕도 마찬가지다. 다시말하면 청마가 추구하는 윤리, 도덕, 법 은 현실적인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차이점에 놓이는 것이 자연적 질서의 세 계이다. 이는 기득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만민평등의 입장에 섬을 의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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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한국아나키즘운동사,형설출판사,1989,p.211. 권구현의 아나키즘 예술론의 배후에는 연극계의 유치진, 시단의 유치환 이경순 홍두표 홍 원, 문예이론의 이향 등 많은 아나키스트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2) 유치환, 나의 시 나의 인생, 구름에 그린다, 서울, 신흥출판사, 1959, p.19.

3) 박노석, 악필과 양주, 백운산뻐꾸기, 태화출판사, 1984, p.89.

4) 홍기삼, 청마론,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 서울, 현암사, 1970, 12. p.293

5) 유치환, 나의 시 나의 인생, 구름에 그린다, p.49.

6) 앞의 글, p.49.

7) 상세한 논의는 1995문학과 언어16집에 나오는 필자의 졸고 청마의 만주 시기의 시에 나타난 절망의 이유 고찰참고.

8) 유치환, 나의 시 나의 인생, 구름에 그린다, p.55.

9) 유치환, 나의 시 나의 인생, 구름에 그린다, p.59.

10) 유치환, 나의 시 나의 인생, 구름에 그린다, p.54.

11) 유치환, 나의 시 나의 인생, 구름에 그린다, p.54.

12) 청마의 이러한 우려는 19506.25로 나타났으니, 청마의 현실 진단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의 정세 판단의 정확함은 청마가 정치적 입장에서 어느 한 편의 극단에 서지 않고 온전히 민족적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편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객관적인 판단의 냉정함을 잃어버리고 자기파의 입장에서 유리한 해석을 하게 되므로 때로는 객관적인 시야를 잃어 버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게 된다.

13) 상세한 논의는 송암 정교환 박사 화갑기념논총(1955)에 실린 졸고 청마 유치환의 시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고찰참고 및 윤미길의 논문 유치환 소고-노자와 장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어교육한국국어교육연구회27-28합병호, 1976,5.)를 참고바람.

14) 이 부분은 졸고 청마 유치환의 시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고찰참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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