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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9-06-19 조회수 1847
파일첨부 토쿠 슈스이(幸德秋水).hwp
제목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반전운동과 조선 -김창덕-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반전운동과 조선


                                    국민문화연구소 -김창덕-


성장과 부조리에 대한 자각
슈스이라는 이름은 스승인 나카에 초민이 붙여준 이름으로 본명은 고토쿠 덴지로(幸?傳次?). 1871년 9월 23일(음력), 고치현(高知?) 하타군(幡多郡) 나카무라초(中村町: 지금의 시만토시<四万十市>)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기헤이지(喜平次), 모친 다지(多治)의 3남. 집안은 대대로 약재상 겸 양조업을 운영했으며 부친 대에는 촌장을 지냈을 정도로 명문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의 격변 속에서 가운은 기울어갔다. 더구나 부친은 슈스이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고토쿠 집안은 모친 다지의 연약한 어깨에 의지하게 되며 고난의 시절을 맞이한다.
그런 고토쿠 집안에서 장남인 가쿠타(嘉久太)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차남인 가메지(?次)는 부친인 기헤이지의 친형 집안의 양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슈스이는 막내이면서도 모든 책임과 고생을 떠맡게 되면서 궁핍한 생활이 항상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그는 면학에 열중한다. 나카무라 중학교 재학 중에 당시의 풍조를 따라 그 역시 예외 없이 자유민권운동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1885년 6월 태풍피해로 인해 중학교가 폐교되면서 공식적인 교육은 거기서 멈추게 된다. 이후 정규 교육 대신에 1888년 11월 동향의 역시 자유민권운동가인 나카에 초민(中江兆民:19세기 후반 일본의 사상가, 철학자, 변호사. 프랑스 사상의 영향을 받아 철저한 자유주의 사상을 전개)의 서생이 되어 그를 통해 한문학과 영어를 집중적으로 교육받게 된다. 이는 그가 후에 저널리스트로 글을 쓰는데 다양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게 한 배경을 만들었다.
그가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고 아나키즘 운동에 헌신하게 된 것은 이런 유, 소, 청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크게 작용했다. 이전에 자랑스럽던 가문과 여유 있는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세기 말이라는 격변기에 급속히 무너져가던 몰락의 아픔을 깊이 맛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주간『평민신문』제10호)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도사(土佐)에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자유 평등설에 심취한 것, 유신 후 일가친척의 가세가 기우는 것을 보고 동정을 금할 길 없었던 일, 자신의 학비가 없는 것을 분하게 생각하며 운명의 불평등을 느꼈던 것......”  등을 지적했을 정도였다.

이런 불우한 환경 속에서 1893년 그의 나이 22세의 젊은 나이에 초민의 추천으로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주재하는 『자유신문(自由新聞)』에 입사해 영문전보나 신문잡지 번역을 담당한다. 이어 1898년 2월 『만조보(萬朝報)』에 입사한다. 이 시기의 고토쿠는 아직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외교 정책에서는 국민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적 외교에 편들기도 했으며, 특히 조선에 대한 군사 행동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타락한 번벌 정권을 지켜보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를 통해 도덕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1898년 11월 가타야마 센(片山潛) 등의 권유로 사회주의연구회에 참가해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어 1901년 5월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창당에 『만조보(萬朝報)』기자로 참여해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선언하고 이를 전후해 1901년 4월 그의 처녀작인 『20세기 괴물 제국주의』를 간행한다. 이 책의 서문은 우치무라 간조(?村鑑三)가 맡는다. 이 책은 청일전쟁 이후 전개되는 내셔널리즘과 군사외교 정책에 반대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실태를 분석한 것으로 과학적 사회주의로 파멸과 타락으로 치닫는 제국주의를 물리칠 것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고토쿠가 처음부터 제국주의에 대해 저항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 『20세기 괴물 제국주의』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일본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론을 적극 지지했다. “외교의 안중에는 오로지 이해관계가 있을 따름”으로 “감정이 개입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만조보』 1898.8.16.) 이는 당시 고토쿠의 철저한 현실적 외교론의 입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런 그의 주장은 일제의 침략주의에 대해서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조선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러시아가 굳이 조선을 탐낸다면 일본과 ‘결전 ’을 벌일 각오가 필요할 것”(『만조보』,1900.8.3)이라 하여 당시 일본의 주류적 조선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1902년에는 논문집 『장광설(長廣舌)』을 발표한다. 이것은 그동안 여러 신문과 잡지에 실린 평론 34편을 단행본으로 묶은 평론집으로 여기서는 제국주의의 파멸과 제국주의가 초래한 참상과 해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에 사회주의의 필요성과 그 필연적 도래를 설파해 일반 지식인들의 이해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무정부당 제조”와 “암살론”등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절망이 무정부주의와 암살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해 중국의 혁명가뿐만 아니라 신채호를 비롯한 많은 한인 운동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1903년 7월 『사회주의 신수』를 출간하고 러?일 전쟁 개전 전년인 1903년10월12일 에는 시류에 따라 “대러 개전”으로 기울던 『만조보(万潮報)』를, 후에 일본공산당의 초대위원장을 지냈던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와 연명으로  “퇴사의 변”을 내고 퇴사한다. 같은 지면에는 그들과 같이 반전을 주장하던 우치무라 칸조(?村鑑三)의 “퇴사의 변”이 게재된다.

“우리 두 명은 불행하게도 대러문제에 관해 『만조보』와 의결을 달리하기에 이르렀다.우리가 평생 사회주의의 견지에서 국제 전쟁을 보면, 귀족, 군인들의 사투로 국민 다수는 그로 인해 희생을 당한다는 것, 독자 제군 이미 본 지상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의 의견에 관용했던 『만조보』도, 근일 외교의 시국이 절박함을 알고 전쟁에 대해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만약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거국일치, 당국을 도와 맹진해야한다,.... 이에 우리는 『만조보』에서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오래 침묵하고 그 소신을 말하지 않는 것은 지사의 사회에 대한 본분, 책임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퇴사를 청하게 되었다.”   

이들의 반전운동은 당시 일본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당시 요코스카해군공창에서 견습공이었던 아라하타 칸손은 가두에서 이 글을 읽고 평생을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만조보』를 퇴사한 이들은 1903년 11월에는 “평민사”를 창설해 주간 『평민신문』을 발행한다. 여기에는 사카이 토시히코 외에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 니시카와 미쓰지로(西川光次?), 기노시타 나오에(木下?江) 등도 참가한다. 이 신문은 발간 3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현실로 닥쳐온  러? 일 전쟁 대한 반전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개전 직전이었던(선전포고는 1904년 2월 10일이지만 실제로는 1904년 2월 9일 일본의 연합함대가 인천항 바깥에서 러시아 함대를 향한 일방적인 포격으로 개전) 1904년 2월 7일자 『평민신문』13호 사설에서

“전쟁이 자본가, 은행가 등 소수 특권계급의 이해의 산물”이라는 점을 들어 강하게 비판했다. 나아가 개전 이후에도 “우리는  전쟁이 이미 다가왔지만 오늘 이후에라도 우리의 입이 있고, 우리의 붓이 있으며 지면이 있는 한 전쟁반대를 절규할 것이다.”면서 그 각오를 적었다.

나아가 “선전포고”로 부터 1개월 정도 지난 3월 13일자 동지 18호에는, 그 사설에서 “러국사회당에 보내는 글(?露?社??書)”을 게재한다.

“제군들, 오늘 일?러 양국의 정부는 각각 그 제국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멋대로 병화를 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의 안중에는 인종의 구분이 없고, 지역의 구분이 없으며, 지역의 구분이 없고, 국적의 구분이 없다. 제군과 우리는 동지다, 형제다, 자매다, 결코 싸워야할 이유는 없다. 제군의 적은 일본인이 아니다, 실로 지금의 소위 애국주의이며, 군국주의다. 그러므로 애국주의와 군국주의는 제군과 우리의 공통의 적이며 세계만국 사회주의자 공통의 적이다. 제군과 우리와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는 이 공통의 적을 향해 용감한 전투를 벌여야 한다. 따라서 지금은 가장 중요한 시기이며 또 실은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니다. 우리는 안다. 제군이 결코 가장 좋은 시기를 놓치기 않는다는 것을. 우리 역시 우리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논설은 동지의 영어로 번역되어 게재되었으며 각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이스크라』도 회답을 보냈으며 그것은 “노국사회당으로 부터”라는 타이틀로 『평민신문』7월 24일자에 게재된다.

같은 해인 1904년 8월에는 암스테르담에서의 제2차 국제사회주의자대회(제2차 인터내셔널)에 일본인으로 유일하게 참가한 가타야마 센(片山?)은 당시 교전 중이던 러시아의 대표 G.V.플레하노프와 함께 부회장에 선출되어 단상에 올라가 부전을 맹세하는  굳은 악수를 나눴다.
이어서 1904년 11월 『평민신문』 1주년 기념호에 사카히 토시히코와 공역으로 『공산당 선언』을 게재하나 즉일 발매금지 되고 1905년 2월에는 필화 사건으로 금고 5개월의 형을 받고 스가모 감옥에 투옥된다. 하지만 옥중에서 크로포트킨의 저작에 빠져들고, 1905년 7월 28일 5개월간의 투옥생활을 마치고 출옥 후 당시 미국에 있던 혁명가 앨버트 존슨 앞으로의 서간을 보낸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처음 『마르크스』파의 사회주의자로서 감옥에 갔습니다만, 출옥할 때는 과격한 무정부주의자(radical Anarchist)가 되어 속세로 되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사형 또는 무기도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위험천만하므로 이런 무정부주의의 확장운동은 완전히 비밀로 진행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진보와 성공을 이루기에는 오랜 세월과 인내를 요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신은 고토쿠가 어느 정도 아나키즘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1905년 1월 29일 거듭되는 발매금지로 『평민신문』은 폐간하는데 그 종간호는 마르크스의『신라인 신문』을 본떠 전 페이지를 붉은색으로 뒤덮었다. 거기에는

“고별! 하지만 영원한 고별은 아니다. 그들은 정신까지 죽일 수 없다”라는 프라일리그라트(HermannFerdinandFreiligrath)의 시를 소개했다. 이어 10월 평민사도 해산하고 만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그는 확실한 아나키스트였다기보다는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이상주의자였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는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앞(1905년 6월 25일자)으로 다음과 같은 써 보냈다.

“나의 출옥 후의 욕망은 대단히 많다. 마루노우치(丸の?)에 대강당을 건축해 동지들의 연설 집회장으로 하고 또 그 일부를 편집국으로 만들어 큰 일간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그 하나다......북해도 또는 조선에 전원을 구입해, 수백 명의 농부와 이상적 생활을 하면서 조용히 순수함을 키우는 것이 그 네 번째다.”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
인간은 누구라도 그 사람 나름의 이상을 그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실현을 위한 행동이 동반하는 경우는 드물다. 고토쿠는 가까이 접한 유교사상과 그리고 소년시절 나카에 초민 밑에서의 어려운 수학을 통해 성장하고, 끊임없이 하나의 이상사회를 추구했다. 그것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아나키즘의 이상에 일치하게 되고, 드디어 
“권력 무력으로 강제적 통치하는 제도가 없어지고 도덕인애로 결합하는 상호부조 공동생활의 사회”(「옥중에서 세 변호사에게 보낸 진술서」)의 구상에 도달했다. 동시에 그 이상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합법적이며 간접적인 의회정책론에서 스스로의 책임으로 스스로의 주장과 권리를 행사하는 직접행동론의 입장으로 바뀌어 갔다. 거기에 이르러 그의 아나키즘도 비로소 하나의 체계로 형태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나키스트로서의 고토쿠의 행적은 아나키즘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함께 아나키즘을 테러리즘 또는 니힐리즘과 똑같은 의미로 생각하던 그때까지의 시점을 차단하는 역할을 떠맡았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아나키즘이 사회 운동 속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도 비로소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철저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죽음의 직전까지 그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때까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아나키즘=테러리즘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씻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도 그 낡은 관념의 희생이 되어 단두대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일단 일본 국내의 탄압과 병든 몸을 쉬기 위해서라도 1905년 12월부터 6개월간 미국을 방문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수많은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를 갖는다. 이를 통해 종래의 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그것을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던 고토쿠에게 있어서 미국체재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새로운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1906년에 들어서자 그 방향이 한층 명백해졌다. 예를 들면 같은 해 2월에 일본 국내에서 성립한 일본사회당의 출범에 보낸 “맹화로 뛰어들자”(「一波萬波」) 에서도 아나키즘적 색채가 강한 시점을 엿볼 수 있다.
 
“내각, 선거, 정당, 대학, 문예, 종교, 도대체 뭐란 말인가. 노동자의 혁명, 세계적 혁명의 노도광란이 전 우주를 덮는 이 때 그것들은 과연 뭐란 말인가. 혁명 앞에 그것들은 과연 단 한 푼의 가치라도 있는가. 창백한 학자와 문사는 신에게 아부하고, 부에 무릎 꿇을 때, 나는 우리 노동자와 서로 껴안고 다가올 혁명의 맹화에 뛰어들겠다.”

여기서는 내각 등 기존의 조직 하나하나에 의문을 던지고 다가올 혁명에서의 노동자의 역할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대지진을 경험으로 현실에서의 상호부조를 실감하며 아나키즘에 공감하게 된다. 이런 여러 경험을 얻고 고토쿠는 1906년 6월 23일 출발 때와 같은 요코하마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인 6월 28일 쉴 틈도 없이 간다(神田) 긴키칸(錦輝館)의 귀국환영회 자리에서 유명한 “세계혁명운동의 조류”라는 제목의 귀국 제 일성을 남겼다.
직접행동파 선언으로 알려진 이 연설에서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일본의 상황을 살피고 아울러 동지들의 반응을 살펴보려는 의미도 있었으며, 주의 깊게 

“앞으로 과연 어떤 수단과 방책으로 나가야 하는지........ 나는 지금의 일본의 국정에 어두워 감히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다, 단지 내가 보고 들은 구미 동지들의 운동의 조류가 어떤가를 보고하는 것에 그칠 뿐”이라고 보류하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러나 주로 독일의 아나키스트 아놀드 롤라의 『사회적 총동맹 파업론』에 의거하면서 일본에서 추진되어온 온건한 의회주의에 의문을 던지고 세계의 새로운 조류는 직접행동론이라는 점, 말하자면 “노동자의 혁명은 노동자 스스로 해야 한다”, “총동맹파업”을 제창하며 아나키즘에 의한 직접행동을 향해 동지들에게 호소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아나키스트로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특히 1907년 1월 일간 『평민신문』을 발간하고 2월 5일호에 “내 사상의 변화(余が思想の?化)”를 발표해 “노동자계급이 필요한 것은 정권의 쟁탈이 아니라 빵의 쟁취다”라고 직접행동파의 선언을 하면서 초기 사회주의운동 속에서 완벽하게 아나키즘의 입장을 확립시켰다.

이 당시에는 여전히 일제에 의한 탄압은 혹독했었고 사회운동은 정체 상태에 빠져있었기에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때였다. 청년들은 고토쿠의 반의회주의, 소위 직접행동론에 몰려들었다. 특히 고토쿠를 포함해서 그런 신조류를 기대하는 자들은 러?일 전쟁 이후의 노동자의 동향이 더한층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또한 청?일, 러?일 양 전쟁을 계기로 촉진된 급속한 공업화는 생산의 대규모화와 노동자의 증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러?일 전쟁 후 공황에 의한 물가폭등과 노동 불안은 노동조합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결기하게 만들었다. 특히 공업, 광산의 대기업에서는 노동력 육성기구의 정비와 맞물려 노사관계가 변모하고 있었으며 동요가 심했다. 그 현상이 빈번한 쟁의와 그 대규모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같은 추세가 고토쿠에게 그리고 그 동조자들에게 직접행동론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갖게 했다
1907년 2월 제2회 사회당대회를 통해 고토쿠 슈스이가 이끄는 직접행동파가 당내의 주류가 되지만 곧바로 『평민신문』을 발매금지하고 사회당의 결사금지와 탄압을 강화했다. 그러나 고토쿠는 역시 굴하지 않고 반전론집 『평민주의』를 간행하지만 즉일 발매금지된다. 1907년 5월에는 독일의 아나키스트 롤라(Roller,Arnord)의 『사회적 총파업론』의 번역을 완성했는데 이는 이듬해인 08년 비밀 출판한다.

 

메이지에게 보내는 공개장과 대역사건
그 무렵 미국에서 대역사건의 간접 원인이 되는 하나의 사건이 발발했다. 고토쿠가 미국 체재 중 결성에 참가한 「사회혁명당」이 『암살주의(The Terrorism)』(제1권 1호)라는 타블로이드 신문 크기의 인쇄물을 1907년 11월 3일 천장절에 여러 곳에 게시, 배포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 인쇄물은, “일본 황제 무쓰히토(睦仁)군에게 보낸다”라는 메이지 일왕ㅔ게 보내는 공개장의 형태를 취한 것이었다. 이미 표제부터 기발하지만 그 내용은 일제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족하 알고 있는가. 족하의 선조라고 칭하는 진무(神武)천황이 무엇인가를. 일본의 사학자는 그를 신의 아들이라 하지만 그것은 단지 족하에게 아첨하는 말로 허구인 것이다. 자연법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그 또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원인류에서 진화한 자로 특별한 권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새삼 우리들이 떠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로 시작되어,  “무쓰히토군 족하, 불쌍한 무쓰히토군 족하, 족하의 목숨은 절박해지고 있다. 폭렬탄이 족하의 주변에 있어 이제 막 폭발하려 하고 있다. 안녕 족하여”라고 끝맺고 있는 것에서도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그들은 일왕의 신성을 깨부수고 천황제의 역사와 본질을 가차 없이 지탄했다. 그리고 유린되어 노예의 지위로 떨어진 일본 민중의 해방을 위해 일왕에 대한 반항과, 그리고 모든 “압제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리즘의 선언인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도저히 공표할 수 없었던 내용이지만 미국에서 자유의 공기를 만끽하던 혁명청년에게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고 공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단 일본에 전해지자 단순한 허세로는 끝날 수는 없었다. 이를 일본 국내에도 관련된 문제로 인식해 신속하게 대응했다. 가능한 한 모든 수단 방법을 써서 이들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자들을 박멸하기 위해 나섰다. 그 당면 목표가 바로 목표는 직접행동파, 특히 고토쿠를 중심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이처럼 이 사건은 대역사건의 또 하나의 간접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고토쿠는 이후 지병이 악화되어 휴양을 겸해 1907년 10월 고향인 나카무라로 귀향한다. 고향에서 건강에 주의하면서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의 번역에 매달렸다. 이를 통해 고토쿠는 아나키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고토쿠에게 있어서 무척 신선한 것이었다.

“우리들이 지금 말하려는 것은 무정부공산주의 사회, 즉 개인의 절대자유를 인정하고 어떤 강권도 허용하지 않으며 인간을 강제로 노동에 내몰 필요가 없는 사회다. 우리들이 사회와 그 정치조직을 고찰하는 것은, 강권학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하는 것이지만 - 즉 국가를 기점으로 해서 아래로 개인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스러운 개인을 기점으로 해서 자유스러운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생산, 교환, 조세, 정부 등을 논하기 전에 우선 개인의 욕구와 그것을 만족시킬 수단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크로포트킨은 “자유합의”와 “자발결행”의 필요를 말하고 또한 혁명에서의 “사상과 결행의 용기”를 호소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구성원들을 중심에 놓고  그 자유와 행복 위에 비로소 모든 기구가 구성되는 사회, 국가를 위해 정부를 위해 인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민을 위해 조직이 있고 기구가 있는 사회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1908년 7월 21일 고토쿠는 고향을 떠나 도쿄로 향한다. 8월 14일에 도쿄에 도착하기까지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 의사를 비롯해, 우치야마 구도(?山愚童) 화상 등을 만나지만 그가 들렀던 동지들이 이윽고 대역사건에 휘말려들게 된다. 그들 사이에 오가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말하자면 울분을 푸는 정도의 여담에 지나지 않았다. 너무나 혹독한 탄압에 대해 최소한 입으로나마 저항을 시도했던 푸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모두 일제에 의해 위험한 음모로  날조되고 결국에는 대역사건으로까지 엮여지게 되는 것이다. 
1909년 3월에는 간노 스가와 동거에 들어가고 부인이었던 모로오카 치요코(師岡千代子)와 이혼한다. 하지만 동지였던 아라하타 칸손의 여자였던 간노 스가와의 동거는 이후 수많은 동지들의 이반을 불러왔으며 아라하타의 경우 출옥 직후 권총으로 살해하려하기 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 1909년 10월 하얼빈 역에서 결행된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을 축하하는 의미의 그림엽서가 1910년 5월 샌프란시스코 평민사의 오카 시게키(岡繁樹)에 의해 발간 후 배포된다. 원래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척살한 직후 고토쿠 슈스이가 그의 의거를 기려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의 초상이 들어간 기념엽서를 발행하나 발매금지 처분을 받자 재차 미국에서 발간한 것이다. 이 사진엽서에 고토쿠가 안중근의 거사를 기리는  한시를 기록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와 조선의 독립운동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배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舍生取義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며
 殺身成仁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루었네
 安君一擧  안중근이여 그대의 일거에
 天地皆振  모든 천지가 전율했다

 

 또한 엽서 아래는 다음과 같은 영문설명이 첨부 되어 있다.
“안중근 하얼빈에서 이토공작을 암살한 조선의 순교자이다. 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의 오랜 관습에 따라 절단된 좌수 약지는 시역(弑逆)의 각오를 나타낸 것이다. 사진 상부에 표시된 글자는 탁월한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덴지로가 쓴 시의 복사로 순교자의 용감한 행동을 칭찬하고 있다.”

결국 1910년 5월 25일 대역사건의 발단이 되는 미야시타 타키치의 체포가 있었으며 이어 6월 1일 고토쿠도 체포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1월 1월 18일 고토쿠 이하 계획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동지도 포함해서 24명에게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는다. (직후에 12명은 감형).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역사건의 판결에 대해 러시아의 여성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을 비롯해 아나키스트 그룹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항의활동이 전재되지만 판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1911년 1월 24일 도쿄 이치가야에서 고토쿠 슈스와 동지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고 간노 스가만 그 다음날인 25일 사형이 집행된다.
그 직후인 1911년 02월 고토쿠가 옥중에서 탈고한 『기독말살론(基督抹殺論)』을 간행된다. 이 책은 증쇄를 거듭해 그 인세는 사카이 등에 의해 12명 사형수의 유족고, 옥중에 있는 동지들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지원비용으로 충당되었으며 또한 1920년 초 옥외 메이데이 개최 비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대역사건의 성격 및 이시카와 다쿠보쿠
고토쿠 슈스이의 대역사건은 그 실체가 불명한 것으로 그냥 당시의 폐쇄적인 상황을 말에서나마 위안을 얻고자 했던 젊은이들의 분풀이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설사 그것이 대역죄에 해당된다고 해도 그 당사자인 미야시타나 간노 스가 정도일 뿐이지 나머지는 그 실체도 몰랐고 대개가 며칠 정도면 다시 나올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국주의의 완성을 통해 동아시아와 특히 조선에 대한 강제 침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런 내부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한 일제는 한반도에 이어 대륙으로의 침략을 앞두고 자체의 내부 정리 및 결속을 위한 사전 정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최종단계가 대역사건이었다.

대역사건에 대해 당시 유명한 소설가 도쿠토미 로카(?富蘆花)는 슈스이 등의 사형을 저지하기 위해 형인 도쿠토미 소호(?富蘇峰)를 통해 가쓰라 수상에게 탄원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 슈스이 등이 처형되고 곧이어 1911년 2월에 가와카미 조타로(河上丈太?)등과 「모반론(謀叛論)」을 강연해 학내에 큰 소동을 일으킨다.
특히 대역사건의 결과는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에게도 사상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커다란 충격이었다. 다쿠보쿠가 아나키즘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대역사건 발생 전후에서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일 년 정도의 기간이었으며, 그는 사건을 전후해 크로포트킨의《청 년에게 고함(?年に訴ふ)》이라는 소책자의 탐독을 통해 당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과 인간 소외의 원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런 사회적 모순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본 사회에 새롭게 떠오른 구조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으며, 대역사건 희생자들의 심정을 공감하게 되었다.

 

-코코아 한잔-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과 자기 몸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그리고 그것은 성실하고 열성적인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이다.
끝없는 논쟁 뒤
싸늘하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스푼 홀짝거리며
혀끝에 닿는 그 씁쓸한 맛으로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프고도 슬픈 마음을.
 

고토쿠 슈스이와 동아시아 공동체 그리고 조선
고토쿠의 조선에 관한 관심은 주로 러?일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 고토쿠의 저서에서 보이는 조선 관련 내용을 순서를 쫓아 확인 해 본다.
우선 1904년 1904년 6월 19일 주간 『평민신문』32호에 「경애하는 조선(敬愛なる朝鮮)」이란 제목으로 일본의 침략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조선은 일찍이 중국과 인도의 학예와 기술, 도덕, 종교를 일본에 전해준 가장 오랜 대은인이다. 그런데도 일본이 이에 대해 갚은 것은 예로부터 오로지 침략 하나밖에 없다. 조선인의 눈으로 보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은 침략자라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어서 1904년 7월 17일 주간 『평민신문』36호에 「조선병탄론을 평하다(朝鮮倂呑論を評す)」를 발표한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한국인을 경멸하고 학대하는지, 양식 있는 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이 일본인과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합동이 아니라 병탄이다. 한국인은 노역에 시달릴 뿐이다.”
 
세 번째로는 1907년 7월 21일자 『오사카평민신문』과 『사회신문』에 각각
 “사회주의 유지자" 라는 이름으로 사카이 토시히코와 함께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강화에 대해 항의문을 공표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자유, 독립, 자치의 권리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은 만국 평민 계급 공통의 이익에 어긋나는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한 독립 보장의 언책을 완수하는데 충실하기 바란다 .위와 같이 결의한다”

 

네 번째로  1907년 8월 11일 『사회신문』“도덕론”에서

 

“우리 일본인은 퉁구스족에 비하면 선을 행하는 범위가 넓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인에게는 하면 안 되는 것도 조선인에게는 해도 된다고 한다.”

이어 다섯 번째로 1907년 10월 5일 『오사카 평민신문』에서는

“조선 문제에 관한 우리 동지의 비제국주의 결의가 서구 사회당과 무정부당 기관지에 소개되어 대단한 찬성과 동정의 의견이 모였습니다.”

이 기사 내용은 1907년 7월 21일자 『오사카평민신문』,『사회신문』의 결의 내용에 대한 외국의 반응을 소개한 것이다.

 

또한 귀향 중이던 1908년 1월 1일 『고치신문(高知新聞)』의 「병중 방언」에서는

“필리핀인, 베트남인, 조선인 중에 또한 기개가 있고, 학식 있는 혁명가 결코 적지 않다. 그들의 운동이 단순히 한 나라의 독립, 한 민족의 단결 이상으로 나오지 않을 동안은 그 세력이 매우 보잘것없을지라도 만약 동양 각국의 혁명당으로 그 속에 국가의 구별이 없고, 인종의 구별도 없이 곧바로 세계주의,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대연합의 형성하기에 이른다면 20세기의 동양은 참으로 혁명의 천지가 될 것이다.”

 

이는 고토쿠의 국제주의를 나타낸 것으로 이는 1920년 10월 5일 오스기 사카에에 의한 상해  코민테른 사회주의자 대회에의 출석과 1923년 1월 5일 아나키스트의 국제적 연맹 결성을 논의하기 위한 일본 탈출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1928년 7월 중국 난징에서 이정규(李丁奎), 모일파(毛一派), 왕수인(汪樹仁)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 베트남,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각국 아나키스트들의 단결과 국제적 유대의 강화, 그리고 자유연합의 조직원리 아래 각 민족의 자주성과 각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이상적 사회의 건설을 향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결성에 이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 고토쿠의 동아시아 공동체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활동으로는 1907년 4월 발족한 아주화친회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아주화진회는 일본의 우익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원조를 목표로 했던 손문의 중국동맹회에 반발해 고토쿠의 영향을 받은 중국인 아나키스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였다. 참가자로는 중국에서는 장태염(章太炎),장의손(張懿孫: 장계:張繼), 유사배(劉師培: 유갑숙劉申叔),하진(何震),소만수(蘇曼殊)、진독수(陳獨秀)등이 참가했다. 여기에 고토쿠 슈스이(幸?秋水),다케우치 젠사쿠(竹?善朔),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등 일본인 아나키스트가 관계했으며 이후 한국인 가운데 조소앙이 참가했다.
이 아주화친회는 반제국주의?민족독립을 목표로 삼았으며 당시 유행하던 손문을 중심으로하는 「대아시아주의」에 비해 「반제국적 소아시아주의」를 주장했다.

 

이어서 단재와 고토쿠 슈스이와의 관계를 짧게 살펴보자.
단재가 아나키즘에 공명한 것은 황성신문사에 재직하던 1905년경 장광설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아나키즘을 확실하게 이해했다고 하기 보다는 처음으로 인지하게 된 시점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주로 1913년 이후 상해로 건어가 유사배(劉師培)의 논문을 읽으면서 그 과정에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이해할 정도로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갔을 것이다. 또한 북경에서는 이회영과 왕래하면서 그를 통해 아나키즘에 대해 깊숙이 이해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토쿠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단재는 “일본에 오직 고토쿠 슈스이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1929년 재판정에서 진술할 때도 고토쿠 슈스이의 저서를 읽은 후부터 아나키즘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발언에서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은 고토쿠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1929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참조해 보자.

재판장: 그  후 일본 무정부주의자 행덕추수(幸德秋水)의 저작 한 책을 보고 공명하여, 이필현(李弼鉉)의 소개로 동방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했는가.
신  : 幸德의 저서가 가장 합리한 줄은 알았으며, 동방연맹에 가입한 것은 이필현의 소개가 아니오.
재판장: 동방연맹에는 대정14년 경 입회했으며, 그 때 이필현과 안일(安一)이 있었던가?
신     :  일본의 연대를 써보지 못하여 대정 몇 년이란 것은 모르며、어쨌든지 지금부터 삼 년 전 여름에 입회하였노라.
재판장: 동방연맹이라는게 사회를 변혁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국을 건설하자는 건가.
신  : 모르오
재판장: 동방연맹에의 가입하는 수속은 어떤가?
신  : 수속은 없고 누구라도 할 수 있소.


고토쿠 슈스이의 재평가 작업
아나키스트들은 후에 「고토쿠 사건」「대역사건」이라고 했다. 1945년 발견된 「옥중수기」이하,「예심조서」「증거물사」등도 사료로서 발굴되어, 천황 무쓰히토(睦人), 메이지 전제정부의 대탑압의 실태의 기초적인 연구에 쓰인 것이 50년대에서 60년대이다. 「대역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 발족. 사카모토 세이마(坂本?馬)를 중심으로 재심청구가 이루어지고 간노 스가의 보제사인 도쿄 요요기의 쇼슌지(正春寺) 등에서 매년 1월 기념집회가 열린다.

1960.02.23 - 「대역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발족.
1961. 1.18 - 재심청구 운동
1967. 7. 5 - 최고 재판소, 재심청구를 기각.
1971.      - 사형 60년 묘전제. 유품전시회
1981.      - 사형 70년 묘전제. 기념강연.
1983.      - 슈스이 절필시 건립. 
1996. 2   - 고토쿠 슈스이 연구회 설립. 매달 학습회 개회.
1998      -「회보 슈스이(?報秋水)」발행.
2000.3    - 「고토쿠 슈스이르 현창하는 모임(幸?秋水を?彰する?)」결성.
2000.12   - 나카무라 의회에서 「고토쿠 슈스이를 현창하는 결의」를 채택.
2009년    - 시만토시(四万十市)청사 내의 도서관에 「슈스이 자료실」을 설치.
1996.4.1  - 와카야마 니미야시의 조센지(?泉寺) 대역사건을 되짚어보고 옥중에서
            자살한 다카키(高木)의 승적을 복원(명예회복).
            이밖에 우치야마 구도를 비롯한 3명의 승려에 대한 복권.
 2001.8.25.  와카야마 니미야시에서「대역사건 희생자를 현창하는 모임」이 결성.

 

고토쿠 슈스이 절필시


??成敗且休論
千古惟?意?存
如是而生如是死
罪人又?布衣尊

자질구레한 성공 실패에 대해 새삼 왈가왈부하지 말자.
예로부터 지금까지 소중한 것은 삶에 대한 의욕.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어가지만
죄인이 되어 새삼스럽게 무관 평민의 존귀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형 선고일에 (1911년 1월 18일)-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반전운동과 조선

 

참고:

아주회친회 규약

 아시아주의 모든 나라는 인도에 석가, 산스크리트교가 있으며, 중국에는 공맹·노장·양자의 학이 있고, 또 페르시아에 광명을 숭배하는 자라투스트라(Zarathushtra)가 있어, 종족은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침략을 당하지 않았다. 남쪽의 제도는 모두 인도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해의 인민은 대체로 중국의 교학을 존숭하며, 침략은 적었고 오직 인의(仁義)의 자만이 존중됐다. 백여 년래 유럽인이 동쪽으로 진출해 아시아주의 기세는 나날이 쇠약해졌다.

  단지 정권과 병력이 약체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 종족이 스스로 비하하게 되고, 학술은 이미 쇠퇴해, 공리에만 열중하고 있다. 인도가 먼저 멸망하고, 중국이 만주로 멸망했으며, 말레이의 여러 종족 또한 백인의 소유가 되었고, 베트남, 미얀마도 이어 잠식당해, 필리핀이 먼저 스페인에 정복당해 도중에 독립했지만, 또 다시 미국인에게 병합됐다. 단지, 태국, 페르시아 만이 겨우 존립하고 있지만, 그 쇠퇴는 상당히 심하다.

  슬프도다. 옛날 천산의 삼십 육국은, 터키, 위구르에 공격당하고, 그 종족은 전멸했다. 장래 중국, 인도, 베트남, 미얀마, 필리핀 제국이 삼십 육국의 뒤를 쫓는 일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

우리가 이 것을 거울삼아 아주 화친회를 창건해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스스로 자기 민족을 지킨다.

장래 이민족을 구축해 숲과 같이 서로 늘어서 자립하고, 동방, 남방이 결집해 서로 도와서, 다발로 뭉친 갈대와 강고한 기세가 되고, 다수 종족의 동맹을 맺어, 격절했던 구래의 우호를 회복한다.

그로 인해 우리, 브라만교, 불교,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진흥시키고, 자비 측은에 힘써, 서방의 노예의 거짓도덕을 배척하여 아리아종의 명칭이 백인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며, 무분별한 학(불교)이 형이하의 학(서양 과학)에 굴복하지 않도록 한다.

 

  우리 친밀한 종족은 숫자가 많고, 아직 전부 결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인도, 중국 두 나라를 중심으로 조직한다. 생각건대 동방의 옛 국가에서는 이 두 나라가 크고, 두 나라가 다행히 독립을 얻으면 아시아주를 지키는 성벽이 될 수 있었고, 십 여의 이웃나라도 이에 의해 침략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선 이 두 나라에서 모임을 창건하는 것이다. 모든 아시아주 민족에서 독립주의를 갖는 자는 함께 맹약을 맺기 위해 부디 참여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향을 피워 기도하고 맞이할 것이다.

 

 

규약

명칭

첫째, 본회는 아주화친회라고 명명한다.

 

취지

하나, 본회의 취지는 제국주의에 항거해 아시아주의 이미 주권을 잃은 민족에게 각 독립성을 얻게 하 는데 있다.

하나, 무릇 아시아주의 사람 인 자는 침략주의를 주장하는 자를 제외하고, 민족주의, 공화주의, 사회주 의, 무정부주의를 불문하고, 모두 입회할 수 있다

 

의무

 하나, 아시아주 여러 나라에는 외국인에게 잠식당해 먹이가 된 자가 있으며, 이민족에게 지배되어 노예 된 자가 있고, 그 쇠약비참은 상당히 심하다.

 그러므로 본회의 의무로서 상호부조에 의해 각각 독립을 얻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 아시아주 여러 나라에서 만일 한 나라에 혁명이 일어나면 다른 나라의 회원은 직간접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이 미치는 한 상호원조를 해야 한다.

 , 무릇 회원이라는 자, 모든 구원을 버리고 자주 통신사, 상호 친목을 다지고 감정을 더욱 다지며 더욱 깊이 서로 알아, 각자 마음을 다해서 함께 회무에 협조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고 또한 각자는 이를 자신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본회를 돕는 자, 동정하는 자를 권유해 입회시키고, 능력이 미치는 한, 분회를 세계 각국에 건설한다.

 

조직

 하나, 무릇 회원인 자는, 매달 한 번 모여야 한다.

 , 무릇 회원인 자는, 전체회원 명단과 주소록을 보존해야 된다. 개회 시, 신회원을 명단에 기입 하고, 또 각 회우에게 소개한다. 모두 무보고서를 발표하고 각 국의 회원이 보낸 보고편지 등을 읽고 다시 각지의 분회에 보고한다. 약간의 회비를 모아 임시비용에 충당하지만, 종이와 펜과 우 송비를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을 한도로 한다.

 , 모임 안에 회장, 간사의 직은 없고, 각 회원에게 모두 평등의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각자는 친목평등의 정신에 의해, 능력을 다해 본회의 취지에 부응해야 한다. 어느 나라에서 온 회원인가를 불문하고 모두 평등 친목을 제일로 한다.

  현재 총부를 도쿄에 설치하고 중국, 봄페이, 조선, 필리핀, 베트남, 영국 등의 각지에, 편지의 도착, 발송을 위한 장소를 정해 통신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산재한 각 회원이 모두 회의 사무를 알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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