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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후테이 센징》《현사회》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
국민문화연구소 김창덕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2월에 처음 만나 그 해 5월 도쿄 세타가야 이케지리(世田谷池尻) 셋집을 얻어 동거에 들어간 이후 1923년 9월 3일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보호검속이란 명목으로 투옥되기까지 대략 16개월간 함께 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투쟁을 펼친다. 그들의 투쟁 활동은 당시 함께 했던 동지들의 증언, 그들 스스로가 남긴 기록, 그리고 일제의 탄압 기록 등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그들이 발간한 3가지 제호와 6호에 이르는 잡지의 내용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가장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에 그들이 발간했던 《흑도(黑濤)》와 《후테이 센징(太い鮮人)》 그리고 《현사회(現社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사의 내용과 특징 그리고 이들 잡지에 소개됐던 광고의 내용과 성격을 통해 박열 가네코 후미코의 투쟁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발간했던 6호에 이르는 기관지와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잡지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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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號 |
黑濤 1號 |
黑濤 2號
LA NIGRA ONDO |
不逞鮮人 1號 |
不逞鮮人 2號 |
現社會 第3號 |
現社會 第4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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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1922.7.10 |
1922.8.10 |
1922.11 |
1922.12 |
1923.3.15 |
1923.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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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면 |
4 |
4 |
4 |
4 |
24 |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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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소 |
○발행,편집,인쇄: 박열
○흑도 발행소
주소: 도쿄 세타가야 이케지리412 |
○발행,편집,인쇄: 박열
○흑도 발행소
주소: 도쿄 세타가야 이케지리412 |
미상 |
미상 |
○박열 발행소
○현사회 발행소
○不逞鮮人社
주소: 도쿄 세타가야 이케지리412) |
○박열 발행소
○현사회 발행소
○不逞鮮人社
주소: 도쿄 요요기 도미가야147
※주소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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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
5전 |
5전 |
미상 |
미상 |
정가:50전
노동자:5전 |
정가:50전
노동자:5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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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료 |
1행:1엔
1단:30엔
전면: 엔 |
1행:1엔
1단:30엔
전면:100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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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1엔
1단:2엔
전면:50엔 |
1행:1엔
1단:2엔
전면:50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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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
박열
후미코 외 3명 |
박열
후미코 외 4명
※中西伊之助의 기사 |
박열
후미코 외 1명 |
박열
박문자 외 1명 |
박열
후미코 외 9명
(일본인 7명
조선인 2명) |
박열
후미코 외
12명
(일본인 7명
조선인 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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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건수
및
특징 |
<1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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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건>
※동정란에 독립 운동에 관한 내용 급증. |
<9건>
박열:4건
구로세:1건
박열, 후미코 공동:1건
○볼셰비키에 대한 비판과 피차별민에 대한 기사 증가. |
<6건>
박열:2건
박문자:1건
○이전의 잡지에 비해 조악한 느낌과 기사의 수 및 광고 격감. |
<21건>
박열:2건
후미코:2건
○검열 과정에서 삭제된 내용이 다수.
○일본인 기고사 급증.
○동정란 증편. |
<21건>
박열 2건
후미코:1건
○볼세비키에 대한 비판.
○개인 및 단체 동정란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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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호가 각각 다른 것처럼 《흑도》와 나머지 《후테이 센징》《현사회》는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각 기관지의 성격과 그 특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흑도》의 성격과 내용
《흑도》의 성격
《흑도》는 1922년 7월과 8월 2회에 걸쳐 발간된 기관지로 이 잡지의 성격은 다음의 기사내용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약자의 외침, 소위 불령선인의 동정 및 조선의 내정을 아직 피가 경화되어 있지 않은 많은 일본인에게 소개하기 위해 여기에 흑도회의 기관지로서 잡지 《흑도》를 창간한다. 우리의 앞길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장애물을 모두 정복했을 때, 그리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되돌아 봤을 때, 그 때 우리의 날은 오는 것이다. 그때야 말로 참된 일선융합(日鮮融合)! 아니 만인이 갈망하던 세계융합이 실현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국가적 편견도 없으며 민족적 증오도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그때를 위해 미력을 다할 것이다......”(《흑도1호》 -창간에 즈음해서-)
“널리 일본, 중국, 대만, 조선을.........아니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희망은 갖고 있지만, 그것이 아마추어의 서툰 재주의 슬픔. 마음먹은 대로 안 돼, 결국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조선에 관한 것을 보도하기로 했다.”(《흑도1호》 -낡은 공동주택 2층에서-)
이처럼 애초 《흑도》의 창간은 일제에 의해 침탈당하는 조선의 실상을 외부 특히 일본사회에 알림으로서 일제의 폭압을 고발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당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던 독립투쟁을 알림으로서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고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그 대상은 조선과 일본을 넘어서 전 아시아를 상대로 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당분간은 가까운 조선에 한정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흑도》는 표면적으로는 당시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범사회주적인 내용의 잡지라고 했지만, 그 내역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중심으로 하는 아나키즘 운동의 기관지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제호를 보면 제1호는 “黑濤會 機關紙 《黑濤》”라고 되어있지만, 2호에는 1,3면에는 제1호와 같은 표기이지만 2,4면의 경우 상단에 《LA NIGRA ONDO》라는 “흑도”의 에스페란토어 표기로 되어있다. 에스페란토어와 아나키즘과의 관계는 그 역사를 함께 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아나키즘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 아시아에서 가장 빨리 아나키즘과 함께 에스페란토어를 도입했으며,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의 경우 1906년 6월 일본 에스페란토 협회 설립에 참가해 아나키스트들에게 에스페란토어를 보급했다. 박열 역시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와의 교류를 통해 아나키즘을 이해했으며 이와 함께 에스페란토어를 습득했을 것이다. 따라서 잡지《흑도》에 에스페란토어 제호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 그 잡지가 아나키즘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다음의 기사 역시 아나키즘의 입장에서 쓰인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자아를 살며 매일의 일거일동의 시작은 모두 자아에서 찾아야 한다.......우리는 철저한 자아주의자로 인간은 서로 물어뜯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친하고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는 각인의 자아의 자유를 무시하고 개성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불합리한 인위적 통일에 철저하게 반대하고 전력을 다해 그 파괴에 노력한다.”(《흑도》1호 -창간사-)
이처럼 《흑도》는 아나키즘이 강조하는 “상호부조”, 즉 서로의 자아를 존중하는 유연한 형태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자아를 중심으로 자각과 개성의 존중을 내세운 선언문은 당시 오스기 사카에(大杉?)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아나키즘의 성격과 내용을 같이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개인적 사색의 성취가 있어 비로소 우리들은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유주의를 과시하더라도, 그 자유주의 그것이 타인의 판단에서 빌려 온 것이라면 그 사람은 어쩌면 마르크스의, 또는 크로포트킨의, 사상의 노예다. 사회운동은 일종의 종교적 광열을 동반함과 동시에 아무튼 그런 노예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노예여서는 안 된다」”(《오스기 사카에 전집》 제1권 -개인적 사색-)
이처럼 권력과 권위에 굴하지 않고 자아가 명령하는 대로, 개성에 따라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모든 노예적 속박, 모든 지도자적 윤리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며 자립한 인생을 쌓아가는 것이야말로 오스기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 아나키즘의 모티브였으며 이런 성격을 이 《흑도》의 선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흑도》의 폐간 이후 새롭게 발간된 《후테이 센징》 1호에는 “흑도는 사정이 있어서 2호로 폐간했다. 이미 대금을 납부한 제군에게는 이번 호 《후테이 센징》을 보낸다. 이전처럼 아껴주기 바란다.” 이 짧은 공지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호는 《흑도》에서 《후테이 센징》으로 바뀌지만, 그 발행 주체는 여전히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였다.
또한 《흑도》의 기고자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해 이강하, 신염파 등 당시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었으며 광고에 등장하는 모치즈키 카쓰라(望月桂), 미야지마 스케오(宮嶋資夫), 福田狂二(후쿠다 쿄지) 등 역시 당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일본인 아나키스트였다는 사실을 살펴 볼 때 《흑도》의 주도권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중심으로 하는 아나키즘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흑도》가 폐간에 이르면서 박열을 중심으로 하는 아나키즘계의 흑우회와 김약수 등을 중심으로 하는 마르크시즘계의 북성회로 분열되었다는 내용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흑우회, 흑도회가 해체해 이번에 특히 신염파(申焰波), 서상일(徐相一), 홍진우(洪鎭祐)군 등의 순아나키스트의 손에 의해 흑우회라는 것이 생겼다.....북성회, 이것도 흑도회 해체 후 볼세비스트인 김약수(金若水), 송봉우(宋奉禹), 정운해(鄭雲海)군 등의 손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후테이 센징》 2호 -동정, 개인과 단체- )
《흑도》의 특징
이처럼 《흑도》는 아나계 중심의 잡지이기는 했지만 “불령선인의 동정”란에서 당시 국내에서 벌어지는 독립운동에 관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을 전재한 것이나 “개인소식”에서는 당시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모든 계열운동가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편으로는 사상을 떠나 조선의 독립운동을 알리고 이를 고취하고자 했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흑도》에서 가장 인상 깊은 기사는 《흑도》2호에 기고한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글이다. 이 글은 1922년 상해에서 일제의 육군 대장이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폭살하려했던 김익상, 오성륜의 거사를 간접적으로 소개한 내용이다. 1887년 생으로 당시 나이 35세였던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는 식민지 조선에서 신문기자 활동을 하던 중 광산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고발한 것으로 인해 일제에 의해 투옥된 적이 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2년 2월 조선에서 소설 《적토에 싹 트는 것(?土に芽ぐむもの)》을 당시 일류 출판사였던 개조사(改造社)에서 발간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다.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단편소설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이어 1923년 2월에 《너희들의 배후에서(汝等の背後より)》등과 같이 식민지 조선에 깊은 관심과 동정을 하던 당시 대작가였다.
이 당시 나카니시 이노스케와 박열 후미코와의 동지적 관계는 예상 외로 깊었다. 즉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에 대한 제1회 청취서(1923년 10월 8일)에서 밝혀진 것처럼 1923년 6월 28일 당일 나카니시의 출옥을 박열이 직접 나카노(中野)의 도요다마 형무소로 마중하러 나갔으며 불령사에서 환영회까지 열게 된다. 또한 박열과 후미코가 대역사건에 몰려 감옥에서 보낼 때 아낌없는 지원을 한다. 1926년 11월에는 옥중의 박열을 면회 한 후 《박열 군의 대해 ?겨울 일기-》라는 수필을 남긴다.
“벌써 3년이나 만나지 않았다. 그렇다. 진재 전 나의 출옥을 마중 와 주었을 때 만나고, 그것 뿐으로, ······내가 올해 여름 조선에 갔을 때의, 그쪽 이야기를 하니 무척 즐거운 듯이 듣고 있었다.······B군은 3년의 옥중생활에서도 힘들다는 점은 조금도 없었다.·····”, “오늘, 아내가 F씨를 만나기로 했다” 고 하자, “그런가! 라며 즐거운 듯이 허허 웃었다.”(《문예전선》제3권 1926. 1)
이렇게 당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서 인정을 받았던 나카시니의 기고는 《흑도》를 발간하던 박열과 후미코에게는 자신들의 활동이 인정을 받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커다란 격려 그리고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는 박열 후미코의 활동이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에 널리 알려지고 상당히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테이 센징》의 성격과 내용
《후테이 센징》의 성격
1922년 가을 사상의 상위로 인해 흑도회가 분열한 후 아나계를 중심으로 흑우회가 결성된 것은 알려진 내용이다. 흑우회 결성 직후인 1922년 11월 박열과 후미코는 새로운 기관지로 월간 《후테이 센징(太い鮮人)》을 발간한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용어를 일본어 발음만 같고 내용은 전혀 다른 “후테이 센징”으로 바꾸어 비꼰 것이다. 이 잡지의 쪽 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4쪽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흑도》와는 많은 면에서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우선 기사 수의 대폭적인 감소다. 《후테이 센징》에의 기고자를 보면 구로세 하루키치(??春吉)라는 당시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던 아나키스트의 자기 고백글인 “어떤 문답”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박열의 기사로 채워졌다. 후미코의 기사는 1호에 단 한 번, 2호에서는 박문자라는 이름으로 “소위 불령선인이란” 기사가 단 한편 소개될 뿐이다. 아마 흑도회의 분열이 예상치 않았던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으로 많은 동지들의 이탈에 대비해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던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기사 수에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잡지의 형식에서도 미숙함을 드러냈다. 《흑도》의 경우 거의 완전한 형태의 잡지로 발행소, 정가, 광고료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만 《후테이 센징》에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 모든 것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광고의 내용과 그 수에 있어서도 단 하나 “미쓰코시 백화점”뿐으로 이 잡지가 급하게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후테이 센징》의 내용
《후테이 센징》은 흑도회가 분열 후 아나계 만의 기관지이다 보니 자연히 《흑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이 급증한다. 그것은 다음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에는 현재 두 개의 공산당이 있다. 고려공산당과 한성공산당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전위를 맡고 있다.……작년 말 공산당비 8만 몇 천원 인가를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사취해, 조선총독부의 양해를 얻어 형사 동반으로 기생과 요리집에서 써 버린 것이다.……… 또한 한성공산당 쪽은 친일파로 문탁(文鐸), 노병희 일파와 경기도 경찰부의 경부 황모 등이 원래의 노동대회를 먹잇감으로 만들었지만 그것도 앞서 말한 젊은 운동가 등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그들은 노동대회에서도 쫓겨났다. 도대체 국제공산당이란 것은 뭘 하든 제대로 된 인간은 없는 건가. 잘 난체 하는 것 같지만 조선에는 이런 녀석들 외에 진지하고 순수한 젊은 운동가가 넘쳐나는데.”(《후테이 센징》 제1호 -조선의 사기공산당-)
위 기사는 아마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을 다룬 기사내용일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볼셰비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운동권에서 아나키즘이 볼셰비즘을 압도하던 시기라서 그런지 이 기사에서 볼셰비즘에 대한 완곡한 비판 등은 보이지 않는다.
이어서 같은 잡지의 다음과 같은 기사 역시 이런 볼셰비즘의 비판에서 나온 글이라 할 수 있다.
“5년 전 즉 1917년 11월 7일 그 날은 러시아의 ○○을 타락으로 이끈 최초의 날이다. 볼셰비키가 로마노프가를 대신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최초로 착취한 날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이 날을 기억하라, 또 다시 이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후테이 센징》 1호 -기억해야할 날?!-)
일본에서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이 본격적인 분열을 일으키고 드디어는 아나?볼 논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시기는 이 기사가 나오기 대략 1년 전인 1921년 5,6월에 집중한다. 1921년이라는 해는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운동 전반의 성장과 함께 전투화가 진행되던 시기였으며, 또한 “아나?볼”대립이 두렷해지는 해이기도 했다. 이전부터 아나키즘 운동이 활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함께 볼셰비즘의 빠른 성장도 있었다. 그로 인해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양쪽의 대립이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1921년 여름이 되자 이런 “아나·볼” 논쟁은 급속히 확대했다. 나아가 그해 연말이 되자 더욱더 치열해져 그동안 억눌렸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흐르듯이 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아나?볼 양 쪽 모두 신랄하게 논진을 펼치고 자설(自說)에 대한 옹호와 반대파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볼셰비즘은 《노동》《전위》《무산계급》을 중심으로, 아나계는 오스기 사카에의 제3차 《노동운동》《관서노동자(?西??者)》등을 중심으로 언론에서나 실천 운동에서 대립을 극명하게 전개하던 시기로 결국 오스기를 중심으로 하는 아나계는 볼셰비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나는 너무 뒤늦게나마 공산당과의 제휴가 사실상으로 또한 이론상으로도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한 그 이상으로 공산당은 자본주의 모든 정당과 마찬가지로, 더구나 더욱 방심할 수 없는 우리들 무정부주의자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오스기 사카에《탈출기》)
《후테이 센징》 1호에 이런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이 소개된 것은 바로 이런 아나?볼 논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로 아나키스트였던 박열 역시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글을 자신이 직접 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사회》의 성격과 내용
《현사회》의 성격
《현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제호만 바뀌었지 내용은 《후테이 센징》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사회》의 첫 호는 2호까지 발간된《후테이 센징》의 뒤를 이어 각각 3호와 4호로 발간되었다. 이어서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이전의 두 잡지에 비해 대폭적인 증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흑도》와 《후테이 센징》의 경우 전체 4쪽에 불과했던 지면이 갑자기 24쪽으로 증면된 것이다. 양적인 증가뿐만 아니라 기사 수와 참여자, 그리고 광고의 수 역시 급증한다. 특히 기고자의 경우 박열과 후미코 외에도 흑우회 회원들, 그리고 일본 거주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 거주 일본인, 오키나와, 아이치(愛知), 오사카(大阪), 그리고 수평사와 같은 특수 부락민들의 투고가 눈에 띈다. 심지어 어떤 일본인은 박열을 “형”이라 부르며 박열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친근감까지 보여주고 있다.
“박열 형!
《후테이 센징》고맙네. 젊고 힘찬 자네의 모습이 생생하다. 사지 않을 수 없다.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으니 매호 백부씩 보내주게. 그리고 또 창간호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니 50부정도 빨리 보내주게. -이하 먹칠로 판독 불가-“(《현사회》3호 -불령 오키나와인으로부터-)
“.... 신슈 오카다니(信州岡谷)의 동지를 대표해 사실을 보고합니다.
1월 22일 신슈 오카다니 후루야 나오히토(古屋直人) 박열 형“( 《현사회》3호 -비밀폭로-)
이처럼 박열 후미코의 생각과 활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흑도》와 《후테이 센징》 등을 통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고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독자층을 늘려갔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투고가 급증한 주된 이유로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한 생산력의 급격한 증대와 노동자 수의 증가, 그리고 당연히 나타나게 되는 경제적 사회적인 모순을 절감하게 된 결과일 것이다. 이런 사회적 모순은 특히 1920년 3월의 주가폭락과 그에 따른 경제 공항 등으로 격심해졌다. 1차 대전 중에는 활황으로 임금인상과 전시 특별수당이 지급되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그 이상으로 물가가 폭등했기 때문에 노동자 생활의 불안정과 궁핍은 증대했다. 거기에 공황이 가해져 물가의 폭락, 공장의 축소와 폐쇄가 이어지고 실업의 불안도 밀려왔다. 자각한 노동자는 물론 일반 민중들까지 불만을 쏟아 부을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모인 곳이 바로 《흑도》《후테이 센징》《현사회》였던 것이다.
《현사회》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의 하나로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많은 기사가 먹으로 지워졌다는 점이다. 1쪽에서 2쪽에 걸쳐 소개된 박열의 글은 문장 전체가 통째로 지워졌으며 후미코의 글 2곳 “재일조선인 제군에게”, “조선의○○기념일” 역시 모두 먹으로 지워져 전혀 그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밖에도 오가와(小川), 이필현, 충청남도 천안의 불령 일본인 이카이 마사오(猪飼?佐夫), 불령 오키나와인 시로타(城田), 아나키스트 스기노 사브로(杉野三朗)의 문장 역시 부분적으로 지워져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심지어는 개인 동정란 역시 상당 부분 지워져 있는 상태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잡지에 대한 탄압이 강화된 것은 아마 제호는 《현사회》로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제의 눈에 거슬리는 글이나 선전 등이 조선사회뿐만 아니라 일본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미침으로서 일제의 특별한 감시와 통제가 필요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사회》의 내용
《현사회》의 기사 내용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후테이 센징》에 이어서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현사회》 4호에는 박열이 쓴 “조선의 민중과 정치운동-사기꾼 권력광들을 물리치자-”라는 논문을 읽을 수 있다. 이 논문은 1922년 7월 15일 가타야마 센(片山潛),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도쿠다 규이치(德田球一) 등과 같이 일본 공산당 창립에 참여한 야마가와 히토시(山川均)를 비판함과 동시에 도쿄의 일부 조선인 유학생 등이 그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박열은 “정치나 권력은 그 본질에서 소수의 사람이 자신들의 지배적 지위를 옹호하고 다수의 정직한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한 무기”라고 단정하며 볼셰비즘의 본질을 공격한다. 나아가 “ 지금 소위 무산계급 독재정치 하에 있는 공산 러시아의 실상”이란 “노동자는 이전 제정시대의 로마노프 가에 결코 뒤지지 않는 소수 권력광적인 공산당원과, 잔인무도한 비밀경찰(체카)의 학대와 압박 하에 지금도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고 전하고, 동경의 볼셰비키 조선인 유학생들을 향해 “자네들은 일본의 볼셰비키가 똥을 떡이라고 한다면 곧바로 그것을 기꺼이 뱃속에 받아 들일건가?”하면서 공산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어서 《현사회》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특징으로는 피차별 부락민들의 참여와 함께 그들에 대한 박열의 관심과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수천 년이래 조선의 사회에서 온갖 전통적 모욕과 압박을 견뎌온 동포의 일단, 전 조선에 산재하는 40여만의 백정계급은 앞서 각지에 형평사를 조직해 계급타파, 자유평등을 목표로 해서 불공평한 사회를 향해 과감하게 반항운동을 개시했다.”(《현사회》4호 -조선의 형평사 운동에 대해-)
이 기사 외에도 박열의 형평사에 대한 관심은 이 잡지가 발간된 1923년 6월 30일을 전후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그해 5월 27일 불령사 1차 정기모임에서 형평사에 대한 격려를 의논했으며, 이 신문이 발간된 이후인 8월 11일에는 형평사로 격려문을 보내기도 한다. 이런 박열의 관심과 격려에 대해 일본의 수평사 소속인 나카무라(中村)라는 이름으로 “불령 특수 부락민으로부터” 라는 제목의 기사가 《현사회》4호에 소개되기도 한다.
“《현사회》 고맙네
삭제가 많아서 질려버렸다. 이렇게 당하고 나면 더욱 말이 하고 싶어진다. 써라! 써라! 새까맣게 될 때까지 써 갈겨라, 그런 후에 삭제당하는 게 원래 바라던 게 아닌가.
2개월 만에 사바로 나오니 형평사라는 것이 나왔다. 이게 뭔가 하고 물으니, 조선에서의 백정 해방운동이라고 한다. 조선의 천민(백정) 40만의 단결......일어나라, 일어나라 백정, 조선의 천민 40만. 일본에 300만의 형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현사회》4호 -불령 특수 부락민으로부터-)
자금 조달 및 광고의 내용
“랴쿠”에 의한 자금 조달
박열과 후미코는 공동생활과 잡지를 발행하면서 나름대로 역할을 나눠 활동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모든 잡지의 발행인과 발행소에는 박열이 대표자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잡지 발간에 따른 섭외, 기사 청탁 및 편집 등 외부와의 관계는 박열이 주도적으로 맡았을 것이다.
“박열은 건강하기만 하면 좀처럼 집에 있을 수 없는 남자다. 즉, 자신의 건강으로 빈약한 지갑을 메운다는 고맙지도 않은 필요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발을 덜 닳게 하기 위해서라도 일요일 오후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에 있다. 염려 말고 놀러 오기 바란다.”(《후테이센진》 2호 -찢어진 미닫이문에서-)
이에 반해 후미코는 《흑도》1호에는 임시 사환으로, 그리고 《흑도》1,2호와 《현사회》3호의 광고란에 조선인삼 상인 박문자로 소개 되어 있듯이 주로 잡지 발간에 따른 자금 조달을 위해 광고를 받아 오거나 또는 후원금을 받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낯에는 유지들 방문에, 광고를 얻으러, 혹은 빵 값을 얻기 위해 좀처럼 여유가 없다. 오늘 밤도 지금 막 돌아왔다. 곧바로 어두운 전등을 끌어 내리고 낡은 책상을 넓지도 않은 방 한가운데로 끌어다가 또다시 싸구려 잉크를 적시기 시작한다. 매일 밤의 일이지만, 그래도 오늘 밤은 그럭저럭 글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종이 조각이 어질러진 방도 어쩐지 기쁘다"(《흑도》1호 -낡은 공동주택 2층에서-)
이들은 매달 잡지를 발행하고, 가정을 꾸려가야 했으며 또 자신들의 숙소 겸 발행소에 드나드는 동지들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변변한 직장이나 수입원이 없었던 이들에게 자금 조달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우선 자금 조달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첫 번째는 잡지 판매 수익과 인삼 판매, 그리고 광고 수입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이들이 발간하던 잡지의 가격은 《흑도》는 5전, 《후테이 센징》은 미상, 《현사회》가 50전이나 주 독자층인 노동자들에게는 5전이었다. 하지만 한 번에 약 300부 정도 발간해 이를 모두 한 부에 5전씩 받고 판매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판매를 통한 수익이라는 생각 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외부 세계에 알리는 것이 주 목적이었으므로 잡지 판매를 통한 수익은 애초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광고료를 보면 《흑도》가 1행 1엔, 1단 30엔 전면 100엔, 《현사회》의 경우 1행 1엔, 1단 2엔, 전면 50엔 등, 쪽수가 대폭 늘어난 《현사회》쪽의 광고료가 더 저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흑도》의 광고료 책정은 실제로 그렇게 받는다고 하기 보다는 외부에 알리기 위한 다분히 형식적인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현사회》 쪽이 더 현실적인 가격이었을 것이다. 《후테이 센징》에서는 아예 광고료 이야기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아마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광고 수익 보다는 비상수단에 의한 광고 수익이 많아서 생긴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아가 조선인삼상 박문자의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 조선인삼 역시 정상적이고 투명한 수입원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보다는 주로 소위 랴쿠(약탈과 약취에서 온 말로, 노동자 계급이 착취된 것을 약탈한다는 명목으로 회사와 자본가 그리고 명사로부터 자금을 강요해 운동이나 생활에 이용하는 것)에 의한 인삼 판매 및 광고 획득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훗날 소설가로 이름을 알린 히라바야시 타이코(平林たい子)는 당시 “랴쿠”에 참여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글로 남기고 있다. 타이코를 처음으로 이 “랴쿠”에 데리고 간 것은 가네코 후미코 였다.
“후미코씨는 겉이 너덜 해져 양말이 드러나 보이는 낡은 신발을 신고, 무슨 속셈인지, 주름 없는 빛바랜 낡은 옷(한복으로 추측할 수 있다)을 입고 조선인삼 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우리는 긴자(銀座)의 ××시계가계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인삼 사세요! 하고 후미코씨는 침을 뱉듯이 말했다.………뭐라고? 필요 없다고? 나를 뭘로 보는 건가?………후미코씨는 그런 말투로 말하고 나서는 《후테이 센징》이라는 잡지를 보자기 속에서 꺼냈다…… 나는 그때 그녀의 이름이 얼마나 알려졌는지 감탄하게 되었다.”(1928년 『부인공론』 12월호 )
후미코의 “랴쿠”가 처음부터 성공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수없이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차츰 그 요령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받아온 당시의 광고 중에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모든 잡지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미쓰코시 고후쿠텐(三越?服店) 즉 미쓰코시(三越)백화점 광고다. 1904년 12월 일본 최초의 백화점으로 탄생한 미쓰코시는 당시 상류사회 여성들이 모이는 도쿄의 2대 명소 중의 하나였다. 그런 미쓰코시가 “백중절 선물은 미쓰코시의 것으로”라는 전면 광고를 《현사회》 3호와 4호에 실었다. 이렇게 발간 부수 300부의 빈약하기 그지없는 잡지에 매번 호의적으로 광고를 실은 것은 박열 후미코의 운동에 대한 지원 보다는 아마 “랴쿠”에 의한 결과물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삿포로 맥주, 에비스 맥주, 마쓰야 백화점의 커피점, 위스키와 커피 등을 취급하는 마쓰야 (松屋)커피점, 심지어는 후미코의 아버지 분이치(文一) 살던 하마마쓰(浜松) 신문사의 광고까지 등장한다. 이런 것들을 살펴보면 이들 박열과 후미코, 특히 후미코의 자금 획득, 즉 “랴쿠”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치열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들의 후원
이어서 자금 조달의 또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활동에 호의적이었던 지식인들로 부터의 후원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은 당시 유명한 작가였던 아리시마 타케오(有島武?)가 있다.
아리시마는 1907년 직접 런던의 크로포트킨을 방문하면서 아나키즘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운동에 직접 뛰어들기 보다는 후원을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후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篤) 등과 《시라카바(白樺)》 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카인의 후예(カインの末裔)》《타고난 고뇌(生まれ出づる?み)》《한 송이 포도(一房の葡萄)》《어떤 여인(或る女)》등 후세에 남는 작품을 발표한 대작가이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부르주아 출신의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계급분열 사회에 살고 있다는 모순점에 대하여 고민하며 자기부정으로 기울어 허무적인 절망감을 보이던 시기였다. 결국은 1923년 6월 9일 유부녀였던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와의 정사로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특히 1922년에 부친에게 물려받은 홋카이도(北海道)의 광대한 농장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넘겨 준 것으로 유명하다. 1922년 11월 오스기 사카이가 파리로 국제아나키스트 대회에 참석 했을 때는 그의 도항비용을 후원하기도 했다. 박열 역시 김중한에게 상해로 가서 폭탄을 입수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아리시마 타케오에게 부탁했지만 아마 거절 당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리시마 타케오를 통해 어느 정도의 찬조금을 받았을 것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특히 후미코와 아리시마 타케오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있다.
“어떤 소설가의 배려로 지금 저는 제 자서전을 쓰고 있습니다. 9월이나 10월쯤에 어느 여성잡지에 실릴 거라 하니까 꼭 한 번 읽어 주세요. 조선에서 생활하던 때의 일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인을 소개하고 당시 제가 겪었던 일들을 낱낱이 얘기함으로써 세상의 많은 어머니들이 이 글을 육아자료로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1923년 6―7월경 부강초등학교 재학 당시의 은사 핫토리 토미에(服部富枝)에게 보낸 편지)
여기서 어떤 소설가란 아리시마 타케오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어느 여성잡지”란 당시 아리시마와 연예관계에 있던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가 편집을 맡고 있던 《여성공론(婦人公論)》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당시 《여성공론》은 수만 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최대 상업지로 이 잡지에 자신의 글을 싣는다는 것은 후미코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자 긍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탑깝게도 후미코의 자서전이 이 여성지에 소개되기 전에 아리시마와 하타노의 동반자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후미코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광고의 내용
<잡지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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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號 |
黑濤 |
不逞鮮人 |
現社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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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
2호 |
1호 |
2호 |
3호 |
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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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광고 |
○望月桂
○中山啓
○宮嶋資夫
○布施辰次 |
○??春吉
○神近市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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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布施辰次
○??春吉
○浜松新聞社長 吉田錦城 |
○布施辰次
○??春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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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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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자동맹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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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자동맹
○형설회
○흑노회
○조선무산자
동맹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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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지광고 |
○《전진》
○《노동자》
○《노동주보》
○《비평》
○《사회사상》
○《신우》
○《정진》
○《씨 뿌리는 사람》
○《자유인》
○《대중시보》
○《노동운동》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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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씨 뿌리는 사람》
○《我等》
○《사회사상》
○《자유인》
○《대중시보》
○《신우》
○《정진》
○《신우》
○《열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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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
○미쓰코시
백화점 |
○《我等》
○《민중운동》
○《노동주보》
○《학지광》
○《정진》
○《노동자》
○《사회사상》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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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等》
○《민중운동》 흑우회 기관지
○《자천》
○《문화신문》 조선어
○《자유생활》
형설회 기관지
○《愛聖》
전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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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광고 |
○가토 카즈오
저작집
○총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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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노자》
○가미치카 이치코저《마을의 반역자》
○쓰지 준《부랑만어》
○미야지마 스케오《개의 죽음까지》
○엔도 도모지로《무정부공산주의 근본 비판》
○총문각
○시모데 서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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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니시 이노스케 저작
○사회문제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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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신광》
○수평사 관련《수행의 행자》
○정연규 저《생의 번민》
○《방랑의 하늘》
○나카노 이와사부로 저《박빙을 밟고》
○《간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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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조선인삼
○정진회 유지
○신일본건설사
○미쓰코시 백화점 |
○조선인삼
○중화요리
도도정
○후지다 호세이 식당 |
○다하라 시계점 |
○미쓰코시
백화점 |
○조선인삼
○하마마쓰신문
○맥주 광고
○미쓰코시
백화점 |
○만년필 광고
○마쓰야 커피점
○미쓰코시
백화정 |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총 6호에 이르는 동안 《후테이 센징》을 제외하고 매회 20건 가까운 광고가 소개되고 있다. 미쓰비시 백화점이나 커피점 등과 같은 상업적 광고도 소수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광고는 사회운동가나, 그들의 단체, 또는 기관지와 같은 출판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를 개인과 단체로 분류해 그 성격을 정리해 본다.
개인 광고
○가토 카즈오(加藤一夫)와 자유인사(自由人社): 박열의 아나키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1923년 6월 17일 불령사 제3회 정기모임에 가토 가즈오(加藤一夫)를 초대해 혁명이상 및 혁명시의 조직이라는 강연이 있었을 정도였다.
○모찌즈키 카쓰라(望月桂): 간이식당 헤치마(へちま)를 경영하면서 거기에 출입하던 히사이타 우노스케(久板卯之助) 등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노동청년』에 함께 하고 북풍회(北風會)에 출석한다. 1917년 민중본위의 민중예술운동을 제창하며 오스기 사카에, 가토 카즈오 등과 함께 민중본위의 예술운동 제창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평민미술연구회, 평민미술협회를 결성. 노동자, 사회주의자 사이에도 회화를 보급했으며 1919년 흑요회(黑耀會)를 이어 대역사건에 휘말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구원을 위해 온 가족이 매달렸다.
○후세 타쓰지(布施辰次):인권변호사겸 사회운동가로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적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1919년 2.8 독립선언 시최팔용, 송계백 등의 변호를 맡았으며,1920년대에는 의열단원 김지섭 의사의 변호를 맡았다. 또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기도 하였다.
《흑도》1호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변호사 후세 타쓰지”로 나아가 《현사회》3,4호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벗, 변호사계의 반역자 후세 타쓰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후세 변호사는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미야지마 스케오(宮嶋資夫): 1914년 봄 노점에서 우연히 구입한 『근대사상』을 통해 오스기 사카에의 아나키즘에 공감해 교류를 한다. 1916년 1월 최초의 소설 『갱부(坑夫)』를 발간하지만 곧바로 발매금지가 되고 지형까지 압수된다. 이 소설은 아시오동산 폭동 후의 핍색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용감히 싸운 한 노동자가 파멸해 가는 모습은 그린 노동문학의 걸작이다. 하지만 1917년 11월의 하야마(葉山)의 히가게찻집(日陰茶屋)사건을 계기로 오스기와 멀어진다. 1921년 4월에는 다카오 헤이베(高尾平兵衛), 요시다 하지메(吉田一), 와다 키이치로(和田軌一郞) 등과 노동사를 결성, 신문 『노동자』를 발간한다. 1922년 3월 『제 4계급의 문학』을 출간해 노동자의 계급적 정신에 의한 새로운 문학창조를 주장했다. 미야시마의 경우 당시 아나키즘 문학가는 대부분이 시인이었던 것이 대해 유일하게 소설가였다. 미야지마 스케오의 개인 광고는 《흑도》1,2호에만 보인다.
○엔도 토모지로(遠藤友四朗):《흑도》2호에 이름만 소개 된다. 《매문사》에서 활동했으나 광고 당시는 국가사회주의자로 변신 중, 이후 천황신앙과 황민의식 고취에 앞장선다.
○쓰지 준(?順):1912년 이토 노에(伊藤野枝)와의 연애사건으로 다니던 우에노 여학교에서 쫓겨나며 실직. 1921년 스티르너의 『자아경(自我經)』(『유일자와 그 소유』의 완역)을 발행. 박열과 후미코의 허무주의는 이 책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구로세 하루키치(??春吉): 구로세의 광고가 3차례나 등장하는게 재미있다. 광고에서 스스로를 “대일본제국 사회주의 동지 공인 스파이”라고 했듯이 1920년 조문회가 열려 심사를 받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끝난다. 아마 이 점을 광고의 내용으로 실은 듯하다.
○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 岩三?)와 《박수를 밟고(薄水を踏みて)》: 오키노는 와카야마(和歌山)사범학교 졸업 후 소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1906년 오이시 세이노스케를 통해 아나키즘을 접한다. 특히 1922년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과 만주를 여행하고 나서 이듬해 1923년 《박수를 밟고(薄水を踏みて)》발간, 이 책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한다.
단체 및 기관지
○노동사 《노동자》:요시다 하지메를 중심으로 1921년 4월-1922년 5월. 이후 《민중의 힘으로》로 개재.
○자유인사《자유인》:가토 카즈오를 중심으로 오가와 미메이(小川未明), 나카하마 테쓰(中浜?) 등이 참여한 잡지로 1922년 1월부터 즉 이 광고가 소개되던 시기는 가토 카즈오의 개인잡지 성격이 강했다.
○노동주보사 《노동주보》:야마자키 케사야(山崎今朝?)를 중심으로 1922.2-1923.4월까지 발간.
○《노동운동》과 오스기 사카에: 1920년대 일본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중심에는 오스기 사카에를 비롯한 노동운동사가 있었다. 이들의 기관지 《노동운동》이 박열 후미코의 잡지에 광고 출연했다는 사실은 이들 부부의 활동이 일본의 주류 아나키즘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1919년 8월 오스기를 중심으로 이토 노에(伊藤野枝), 와다 큐타로(和田久太?), 곤도 켄지(近藤憲二), 히사이타 우노스케(久板卯之助), 무라키 겐지로(村木源次?) 등과 함께 “노동운동사”를 결성하고 그 해 월간지 《노동운동》 발간한다. 《노동운동》은 3차에 걸쳐 발간되는데 이 광고에 실린 무렵은 《노동운동》으로 1922년 12월 26일부터 1923년 7월 1일까지 발간한다. 1921년 1월에 발간된 제2차 《노동운동》은 “아나?볼”공동으로 간행했다.
○《노동자》라는 광고는 《흑도》1호와 《현사회》3호에 각각 1회씩 등장한다. 하지만 발행처는 각각 다르다. 《흑도》의 《노동자》는 1922년 4월 15일부터 그래 5월까지 요시다 하지메(吉田一), 다카오 헤이베(高尾平兵衛) 등을 중심으로 발간한 “노동사”의 기관지이며, 《현사회》에 나오는 《노동자》는 1922년 12월 모치즈키 카쓰라가 기타코갓초(北甲賀町)의 순다이(駿台)클럽 내에서 방을 하나 빌려 운영하던 “도쿄동인 도안사(東京同人 圖案社)”에서 창간한 “흑노사(黑勞社)”의 기관지 였다. 여기에서 모치즈키가 주재하는 “흑요회(黑耀會)” 의 제3회 “민중예술 전람회”, 가토 카즈오의 “자유인 연맹” 그리고 오스기 사카에의 제2차 《노동운동》도 여기에서 시작했다. 즉 당시 아나키즘 운동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사회사상사 《사회사상》:1922년 4월 -1930년 1월까지 발간
○種まき社《씨 뿌리는 사람(種蒔く人)》:1차는 1921년 2-4월까지, 2차는 1922년 10월부터 1923년 9월까지. 고마키 오우미(小牧近江)를 중심으로 반전, 평화 인도주의적 혁신사상을 기조한 잡지였다.
○무아원(無我苑)《무아의 사랑(無我の愛)》《애성(愛聖)》:《무아의 사랑(無我の愛)》은 이토 쇼신(伊藤?信)을 중심으로 발간한 잡지로 나중에 《애성》으로 개재. 이토 쇼신은 무아애(無我愛)운동을 일으켜 많은 지식인과 청년층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현존하는 박열의 유일한 친필 서신문에서 수신인으로 등장하는 운노 토모쥬(海野友壽)씨가 이토 쇼신의 제자였다.《현사회》4호에 전면 광고로 소개된다.
○인쇄공 조합 신우회 기관지《신우》:신우회는 1917년 4월 발족한 아나계 노동조합으로 기계공조합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오랜 운동의 역사를 가졌다. 1919년에는 조합원이 1500명에 달해 일본 아나키즘계 노동운동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신우》는 신우회의 기관지로 1918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총 76호 발간한다. 이후《정진》과 합동한다.
○신문공 조합 정진회 기관지《정진》: 1919년 6월 도쿄의 신문 인쇄공을 중심으로 하는 혁진회의 후신이다. 1920년 1월 19일 발족하고 조합원은 대략 400명이며 기관지로 《정진正進》을 발간한다. 정진회는 신우회에 비해 조합원 수는 적었지만 대부분이 전투력을 갖춘 투사들이 중심이다. 1921년 초 정진회와 신우회의 유지가 모여 ‘SS회’가 결성하는데 이는 양 조합의 머리글자를 딴 비밀단체였다. 이 단체는 1921년 이후 노동계 전체의 아나키즘화와 생디칼리즘화에 크게 공헌한다. 《흑도》이후 박열 후미코의 잡지에 소개되던 시기는 바로 이들 노동운동 단체가 일본의 노동운동에서 최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박열 후미코가 발간했던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의 광고에 참여했던 개인이나 단체 등을 살펴보면 1920년대 일본의 아나키즘 운동 단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 단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의 순수한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노회》를 비롯해 《무산자동맹회》《형설회》《학지광》《민중운동》《자천》등 아나키즘과는 거의 무관한 단체까지 포함하고 있어 이들의 활동이 아나키즘이라는 좁은 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모든 종류의 사회운동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는 일본, 그리고 전 조선에 걸쳐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특히 문학 작품과 작가 소개가 많았던 점은 이들 잡지의 미래가 철학과 문예 등을 통한 운동의 사회화 그리고 다양화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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