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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19-07-29 조회수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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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의 아나키즘 독립운동에 대해

이 글은 근사단 모임에서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을 소개할 때 준비한 자료입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

 

 

국민문화연구소 김창덕

 

 

 

 

아나키즘이란

오늘날 국가 기구와 관료화 확대와 강화, 기계화와 그에 따란 획일화 진행, 생산중심주의와 인간 경시의 보편화 같은 현대사회의 모순에 직면해 인간=() 중시와 권력=지배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는 것이 아나키즘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나키즘은 일반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다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항상 유동적이고 국가에서 일어나는 운동도 다양해 한 시점에 완전히 포괄할 수 없다는 애매한 생각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국가와 시대, 그리고 개인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이런 다양성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집단으로서는 다루기 쉽지만 그 반면 막상 닥치면 집중력을 잃고 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1920년대 일본에서의 전환의 시대는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운동의 영역 즉 국가나 지역 그리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아나키즘의 상위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강한 동지애였던 것이다. 이런 동지애야말로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아나키즘의 큰 특징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제와 싸웠던 것이다.

 

 

<개요>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은 1920년 무렵부터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으로 건너간 유학생·노동자들 중에서 민족해방운동의 한 이념으로서 싹트기 시작하여 점차 국내로 전파되었다.

 

1.중국에서의 운동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1920년대 중국의 북경은 아나키즘의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아나키즘에서 이 시기처럼 거물 아나키스트들이 한 도시에 집거하고 활동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당시 이회영(李會榮), 신채호(申采浩), 유자명(柳子明), 이을규(李乙奎), 이정규(李丁奎), 정화암(鄭華岩), 백정기(白貞基) 등은 1923년 북경에서 자유의지·자주연합에 의한 아나키즘의 독립운동노선에 합의했다. 특히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운동의 구심점은 있어야 하겠지만, 정부형태일 필요는 없는 것으로 행정체제로서의 정부가 아니라 각 계열의 각파가 협력할 수 있는 연합기관의 필요성을 생각했다. 이에 19244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정의공보를 발행했다.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27년 후반 아나키즘운동의 활력을 위해 위 연맹의 명칭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으로 개칭하고 기관지 탈환을 발간했다. 탈환19285월부터 한3개 국어로, 격월간 발행했지만. 이 역시 자금 사정으로 9호까지만 발행되었다. 탈환이란 말은 크로포토킨의 빵의 탈환Conquest of Bread)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흑기연맹

이 운동과는 별도로 1924년 북경에서는 북경민국대학의 유기석(柳基錫), 심용해(沈龍海) 등이 중심이 되어 중국인 아나키스트 향배량(向培良), 이패감(李沛甘), 파금(巴金) 등과 손잡고 조직한 단체로 기관지로동방잡지를 발행했다.

또한 19263월에는 심용해와 여군서 등이 북경에서 중국어로고려청년이라는 아나키스트 잡지를 발행하고, 9월에는 류기석과 심용해오남기정대동 등이 중국인 정모() 등을 포섭하여 크로포토킨연구그룹을 결성하여 각국 아나키스트단체와 연계하면서 간행물 등을 교환하였다.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서의 활동

이후 1928614일 한인아나키스트들은 상해에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한다. 프랑스 조계의 화광의원(華光醫院)에서 한국인 유서, 일본인으로는 사노 이치로(佐野一朗), 야타베 유지(谷田部勇司),아카가와 하루키(赤川啓來), 중국인 모일파, 왕수인, 등몽선, 역자기, 오극강 등과 협의 후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인도, 필리핀 등 7개국 대표 200여명이 회합하여 연맹을 결성. 연맹은 각국의 아나키스트 연대를 강화하고 자유연합의 조직원리 하에 각 민족의 자주성과 각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이상적 사회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 이회영은 이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 운동이란 논물을 발표해 한국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은 진정한 독립운동이며 한국에서의 진정한 해방운동, 즉 무정부주의운동은 곧 독립운동이라고 역설했다. 기관지 동방을 발행하지만 현존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미상. 하지만 이정규가 1928820일 간행한 동방동방무정부주의자에게 고한다는 논문을 게재하고 이회영은 창간호에 묵란을 게재한다.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이와는 별도로 19284월 신채호는 천진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를 소집해 동방 무산민중의 단결과 투쟁을 호소했다. 이에 이필현(李弼鉉), 타이완인 임병문(林炳文) 등과 협력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여기서는 전 세계의 무산대중과 특히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을 국제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 대결시키고 무산대중의 해방을 위한 만국노동자의 굳은 결속을 호소하는, 신채호가 기초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단재는 자금 확보를 위해 활동하던 중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만주에서의 활동과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김종진(金宗鎭)과 김좌진을 중심으로 전개된 아나키즘 활동이다. 충남 홍성 출신의 김종진은 1923년 중국의 운남 강무당을 제16기로 입학해 19254월 졸업했다. 192512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와 교류하지만 분쟁이 심각한 것을 알고 만주로 근거지를 옮길 것을 주장하고 유자명을 통해 의열단 및 다물단과 접촉했다.19269월 만주로 향하던 중 천진의 이회영을 방문해 장시간 독립문제와 신사회구조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 기회를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했으며 이를 만주에서의 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이어 192710월 말 만주에서 족형 김좌진을 만난다. 당시 김좌진은 신민부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신민부를 1920년대 후반 북만지역에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단체로 남만주의 정의부, 참의부와 함께 중요한 단체였다. 여기서 김좌진은 김종진을 군사부위원으로 참여시켰는데 이는 김좌진이 김종진의 아나키즘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192812월에 신민부를 개편해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한다. 여기에는 김좌진, 권화산, 김종진, 이을규와 이달, 김야봉, 김야운, 이덕재, 엄형순 등 주요 간부는 아나키스트가 포진하고 있었다.

또한 19297월 김종진(金宗鎭), 김야봉(金野蓬), 이달(李達), 이덕재(李德裁) 등이 모여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한다. 이들은 200만 재만동포의 생존권 보장에 중점을 두고 농민의 경제적 협동체로서의 농촌자치조직과 교민교육의 강화에 힘쓰는 운동계획을 제기했다.

하지만 볼셰비키와의 대립으로 인한 1930120일 김좌진 암살을 시작으로 김야운, 김종진 등의 암살로 인해 만주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들은 19318월 하순 일본군의 만주침략 이후 거의 만주 지역에서의 운동기반을 상실하고, 북경 등지로 철수해 2년여에 걸친 만주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이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의열단

1920년대 중국내 한인 아나키즘 운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항일독립단체이다. 의열단은 191911월 만주 길림에서 조직된 단체로 김원봉을 단장으로 아나키즘 색채가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의열단은 폭력투쟁이라는 직접행동을 통해 일본의 지배, 착취, 친일파들의 전횡에 맞선 것이다.

의열단은 유자명의 영향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했으며 민족주의적 테러활동에 아나키즘적 논리를 대입시켰던 것이다. 유자명은 1921년 천진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이래 의열단 투쟁에 아나키즘적 급진적 투쟁이론을 제공하는 정진적 지주로 활약했으며 의열단 간사를 저술해 그들의 활동을 기록에 남길 만큼 의열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의열단의 급진적 테러활동은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이론적 요구가 필요했으며 이에 1922년 겨울 유자명이 김원봉과 신채호를 연결해 의열단 선언이 탄생한다.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1929년 결성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만주사변 등으로 상해로 철수한 아나키스트를 규합해 1930년에 전시체제로 조직한 단체다.

신채호는 아나키즘의 국제 연대를 위한 자금 모집 중에 19285월 피체되었고, 이정규는 192810, 이을규는 1929년 짐종진, 김좌진 등과 한족총연합회에서 활동 중 19309월 피체 되었다. 이에 중국 내 한인 아나키스트 중 이회영, 정화암, 유자명 등의 원로들과 유기석 등의 젊은 단원들이 모여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협의한 것이 바로 남화한인청년연맹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30420일 맹원(盟員)으로 유자명(柳子明), 유기석(柳基石, 일명 柳絮), 장도선(張道善), 정해리(鄭海理), 정화암(鄭華巖), 안공근(安恭根), 오면직(吳冕稙이현근(李炫謹) 등이었다.

이 연맹은 아나키즘을 추구하며 일본의 폭력과 독재를 저항하는 급진적 독립운동을 추구했다. 따라서 의열단과 유사한 무력 투쟁이 주요 활동이었으며, 자금 조달과 선전 활동도 벌였다.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항일구국연맹흑색공포단육삼정 사건

당시 상해에는 국내, 만주 지역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여들었으며, 이에 따라 193111월 초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한국인 이회영, 정화암, 백정기 등 7명과, 중국인 왕아추(王亞椎), 화균실(華均實) 7, 일본인으로는 전화민( 오수민( 등 한국·중국·일본 3국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그 활동계획으로는

1)적 군경기관 및 수용기관의 조사, 파괴, 적 요인 암살, 중국인 친일분자의 숙청.

2)중국 각지의 배일선전을 위한 각 문화기관의 동원 계획 수립.

3)이상에 관한 인원 및 경비의 구체적 설계.

이상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193111월 프랑스 조계의 백정기 숙소에서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친일분자 왕정위(王精衛)의 저격, 하문(厦門)의 일본영 사관폭파사건 등으로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뒤이어 남화한인청년동맹에서는 1933317일 상하이 진주 일본군사령부와 아라요시(有吉明) 공사가 중국정부 요인의 매수공작을 위해 중국 요리점 육삼정(六三亭)에서 연회를 베푸는 기회에 기습공격을 가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육삼점 사건. 또한 남화연맹은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협력하여 친일부역자들의 처단에 주력하여, 19331218일 상해에서 일본군과 내통한 옥관빈(玉觀彬), 325일에는 친일분자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동년 11월 안휘성 남부 상요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겨 한중합동유격대를 조직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다.

1938년부터 이 유격대는 중국군 및 연합군과 협력할 목적으로 2개의 한국청년전시공작대를 편성해, 학도병 귀순공작과 포로구출공작을 담당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이 공작대는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42년 항전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아나키스트 유자명(조선혁명자동맹)과 유림(조선무정부주의자동맹)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임시의정원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전 민족 통일전선운동에 참가했다. 이처럼 중국과 만주에서의 한국아나키즘운동은 일제는 물론 세계의 모든 강권주의와 군국주의의 폭정을 부정하고 자유와 독립이 보장된 자유연합의 평등사회를 이상으로 하면서 투쟁수단으로 폭동과 암살 등 테러리즘을 채택했다. 나아가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단일 공동전선의 수립을 급무로 인식하여 민족해방전선과 계급해방전선을 서로 융합시켜 모든 계열의 통합에 주력했다.

 

2. 일본에서의 운동

 

◇《흑도회

3.1운동 이후 일본 내 한인단체로 192011월의 고학생 동우회가 있다. 고학생과 노동자의 상호부조를 표방한 친목단체로 박열과 정태성 김약수 백무 최갑춘 황석우을 중심으로 약 200여명의 회원을 보유했다. 이 당시 오스기 사카에와 이와사 사쿠타로를 통해 아나키즘 사상이 유입했다. 이후 19211129일 박열, 조봉암(曺奉岩), 김약수(金若水) 등에 의한 일본 최초의 한국인 사상단체인 흑도회가 조직됐다.

 

◇《흑우회》《불령사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그러나 192212월 흑도회는 아나키즘을 지향하는 박열, 백무, 서상일, 이용기, 이옥기 등의 자유연합적 아나키스트 계열의 흑우회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김약수, 김찬, 김종범, 이명건 등의 중앙집권적 볼셰비키의 북성회로 분열되었다.흑우회는 기관지 후테이 센징(불령선인)(2호를 발행하고 현사회로 개제)을 간행했다.

이들은 19235월 최규종, 홍진우, 장찬수, 육홍균 등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해 김중한을 통해 상해에서 폭탄을 구입하기로 계획한다.

19239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일본의 사회주의 동조세력과 조선인 박멸의 구실로 이용하여 한국인들을 학살했으며, 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대역사건으로 옭아매었다. 박열과 가네코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무기로 감형되어 복역 중, 가네코는 옥사하고 박열은 194510월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석방되었다.

 

◇《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

이후 일본에서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선 1924.09.04 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설립된다. 이는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재일한인 노동자들이 설립한 노동단체로서 당시 최대 규모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후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중반까지 아나키즘계열의 대표적인 노동운동단체로 활동하였다.

 

2불령사

1926.12.12. 장상중, 원심창, 이홍근, 박망, 차고동, 박희순 등이 박열의 불령사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불령사를 재건, 기관지로 흑우2호까지 발간.

 

◇《흑우연맹

1928.01.15.에 도쿄에서 결성한 단체로 신간회 결성에 반발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원심창, 장상중(張祥重), 한하연(韓河然), 이시우(李時雨), 하경상(河璟尙) 등을 중심으로 반공산주의의 기치 아래 결성한 단체였다.

이 단체의 흐름을 살펴보면 1921흑도회를 기점으로 해서 1923풍뢰회》 ⇒ 《흑우회, 1926흑색청년연맹》 ⇒ 《불령사(不逞社)》 ⇒ 흑풍회(黑風會)로 이어지다가 이에 이르러 흑우연맹으로 개칭한 것이다. 기관지호조운동(互助運動)을 발행한다.

주요 활동으로는

19282월 친일 노동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 충돌했으며, 같은해 6월 신간회 동경지회사무소를 습격했고, 8월 한하연이 친일 융화단체인 대동협회(大同協會)를 습격하기도 했다

19295월에는 메이데이 시위를 주최하여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과 공동으로흑기(黑旗)아래 참여하라는 책자를 인쇄·살포하면서 약300명이 흑기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다가 다수가 체포되었다.

 

193081일 이문열(李汶烈)을 기관지 발행책임자로 선정하고 홍승우(洪承祐)와 협력해 81흑색신문(黑色新聞)》 창간호를 내었으나, 전투적 기사로 인해 압수당했으며 창간 이후 계속된 압수와 재발행의 저항 속에 19355월 폐간했다. 흑색신문만으로는 선전수단이 중단될 우려가 있어 홍성환(洪性煥)과 한하연은 1932자유코뮨사를 창립하고 『자유코뮨을 발행했다.

1932.12.20. 잡지자유코뮨발행.

도쿄에서 흑우연맹의 홍성환(洪性煥)과 한하연이 1932자유코뮨사를 창립하고 자유코뮨을 발행한다.

 

1920년대 초반의 운동과 1920년 후반과 30년대의 운동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1920년대 초반의 흑도회, 흑우회, 불령사의 경우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직접행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면, 1930년의 경우 흑우연맹이나 기타 노동조합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 및 자유연합주의에 의한 노동운동을 들 수 있다.

 

이처럼 1930년대 조선자유노동자조합》《조선동흥노동동맹》《극동노동조합등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노동단체들은 반공산주의 투쟁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특히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반동단체인 상애회와의 투쟁을 마무리한 뒤 공산주의 일파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의 투쟁을 개시하였다. 나아가 조선자유노동자조합조선동흥노동동맹과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공산주의자와 투쟁하였다.

1934년 메이데이 기념행사에는 조선일반노동조합조선동흥노동동맹이 공동으로 참가하여 노동자의 해방은 자유연합주의다”, “노동자농민의 적 파쇼를 타도하라”, “제국주의전쟁 절대 반대”, “무산계급진영 내의 지도배를 축출하라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반파쇼투쟁과 반공산주의투쟁을 전개하였다.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독재가 파시스트독재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서 공산주의를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고 공산주의자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까지 반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930년 중반 이후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이 침체되면서 대공산주의투쟁 역시 침체의 길을 걷는다.

 

3. 국내에서의 운동

1919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 전환으로 1920년대 초에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3개 민간 신문이 허가되어 간행되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들은 세력 형성을 위한 노동조합이나 그 연구를 위한 조직체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찬성한 지식인들이 당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각종 노동자 조직을 결합하는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는데 그 처음이 바로 1919(19202)조선노동연구회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의 참여는 거의 없이 지식인들의 노동문제와 신사조 즉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연구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본격적인 노동단체는 아니었다. 이에 이 연구회는 27일 자진 해산하고 이 연구회의 중심인물인 박중화(朴重華), 오상근(吳詳根박이규(朴珥圭) 10여 명에 의해 한국 최초의 근대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19209월 말경 서울 천도교강당에서 이 단체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기관지로 공제8호까지 발간했다.

공제에서 유진희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를 자주 인용하기도 했다. 나아가 이 공제회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고순흠의 경우 일제 시대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의 한 명이었다. 그는 19세때인 1909년경 노자의 성소설을 깨닫고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의 이론을 섭렵하면서 근대적인 아나키즘 이론을 수용했으며 특히 고토쿠 슈스이를 존경했다.

그의 글 조선노동공제회 창업의 동기와 전말에서는 볼셰비키의 침투로 인한 고질적인 사대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로 인해 파괴되었다고 강조한다. 이는 공제회 내부의 볼셰비키와 아나키즘과의 알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단계에서 그는 이미 아나키즘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고순흠은 일본에서 일본에서 아나키즘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1927년 제주도에서 아나키즘을 지향하는 우리계(宇利?)에 참여하였다.이에외도 공제에는 아나키즘을 소개하거나 아나키즘 사상에 의한 사회분석 글들이 다수 소개되고 있다.

이 당시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상호부조론은 인기 있는 글로 이는 국내의 사회주의 운동에 아나키즘 성격이 강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920년대 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은 주로 일본 유학생들의 영향이 강했다. 3.1운동 이후 급속하게 사회주의 운동이 증가했으며 국내로 돌아 온 그들에 의해 아나키즘 운동이 진행되었다.

1923조선혁명선언의 발표와 박열 사건 이후, 국내에서는 서울, 대구, 평양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각종의 아나키즘 운동단체가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아나키즘 운동은 1924년 이후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하는 흑기연맹과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진우연맹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주로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흑우회가 결성되었으며 1920년대 최대의 조직은 평양을 중심으로 결성된 전국 규모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이었다.

국내에서 시도된 최초의 아나키즘 조직은 일본에서 일시 귀국한 박열이 19232월 이강하(李康夏) 등과 함께 조직한 흑로회(黑勞會)가 있다. 중요 멤버로는 권태룡(權泰龍), 정창섭(鄭昌燮), 이덕영(李德榮), 구태성(具泰成), 김창근(金昌根), 양희석(梁熙錫) 등이며,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강연회를 개최하고 아나키즘을 선전하였는데 경찰의 습격으로 중단되었고, 그 뒤 이강하는 대전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20년대 최초의 본격적인 아나키즘 조직은흑기연맹이다. 192412월 서울과 충주를 중심으로 아나키즘 사상에 공감한 청년들이 연합기관을 만들고자 조직 결성위해 19253월 서울 수문사(修文社)에서 취지서와 강령을 작성하고 5월초 창립대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경찰에 의해 무산되고 이들은 검거되었다. 발기인은 서천순(徐千淳), 곽철(郭徹), 신영우(申榮雨) 한병희, 홍진유, 서상경 등이었다. 이중 서상경과 홍진유는 박열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불령사의 멤버로 박열의 대역사건에 연좌되었다가 면소된 상태였다. 흑기연맹역시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함께 대구의 진우연맹(眞友聯盟)이 있다. 19259월 대구에서 조직되었는데 이 역시 불령사 멤버로 박열의 대역사건에서 면소된 서동성과 방한상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박열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연맹을 조직하고 노동운동에도 관여했다. 특히 192511월 방한상이 이치가야 형무소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면회하고 오사카 나고야 도쿄 등지에서 자아인사의 구리하라 카즈오, 무쿠모노 운유, 길로딘사의 관계자들과 교류하면서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이와 함께 윤우열이 주도하고 살포한 허무당선언이 있다. 아나키즘 운동을 하던 윤우열(尹又烈)192511월대구 자택에서 작성, 그해 말 서울로 올라가 등사하여 전국적으로 발송한 것이다. 이 선언서는 그 발상이나 문체가 대체로 신채호(申采浩)조선혁명선언과 비슷하다.

내용은 일제에 대한 폭파, 방화, 암살 등 직접혁명을 주장하는 과격한 문구로 되어 있고, 192613일자 경성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포악한 적의 압박 하에 고통받는 민중이여, 허무당의 깃발 아래로! 일거에 적을 무찌르라! 허무당만세 조선혁명만세!”라고 맺고 있다.

이 사건 관련자는 대구청년동맹의 간부이며 자유노동조합원인 윤우열과 경성청년회원 하은수(河銀水), 한성강습원 강사 안병희(安秉禧), 저술가 양명(梁明), 경성청년회 러시아어 교사이며 한글학자인 이윤재(李允宰) 등이다.

경상남도 안의(安義)에서의 아나키즘 운동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3.1운동 직후 손명표, 최륜, 최태호 등이 중심이 되어 청년회를 조직하고 회관을 건립해 농민과 부녀자에 대한 야학과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초기에는 마르크시즘에 경도했으나 관동대지진 이후 아나키즘에 기울었다.

대구진우연맹사건을 계기로 김재현, 이진언, 이시우, 하경상, 최영주, 우한용 등을 중심으로 아나키즘 연구회를 조직하고 하종현이 크로포트킨과 오스기 사카에의 저서를 들여와 학습모임을 가졌다.

이후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은 1926년과 27년에 걸쳐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이 1927년 신간회의 결성과 맞물려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 간에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 전개되며 이후의 한국 아나키즘을 주도한다.

그 첫 번째로 1927년 강원도 이천에서 이은송(李殷松)을 중심으로 100여명의 청년이 모여 조직한 이천자유회(伊川自由會)였다. 192788일 이천면 김영(金瑩)의 집에서 국가의 존재와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산주의적 아나키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시도했다. 이 사건의 연루자는 100여명이었으나 최후 에 4명으로 압축되었다. 이 사건은 아나키즘 운동이 단순한 사상적 계몽운동의 범위를 벗어나 대중의 조직적 실천운동으로 발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어서 1927년 원산을 중심으로 이향(李鄕조시원(趙時元김연창(金演彰유우석(柳愚錫한하연(韓何然) 등이 조직한 대중적 청년 비밀조직인 본능아연맹이 있다. 그 당시는 공산주의계열의 북풍회(北風會화요회(火曜會) 등 각 분파가 세력확장에 열중하던 시기이며, 이주하(李舟河김삼룡(金三龍강기덕(康基德장기욱(張基郁) 등 거물급들이 원산과 경성을 빈번히 왕래하고 있어, 원산에서의 아나(아나키즘)와 볼(공산주의) 양 계열의 격돌은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양쪽 충돌의 도화선이 된 것은 본능아연맹측과 청년회간의 경리장부사건, 원산여자청년회에서 개최한 강연회에서의 충돌사건이었다. 이 때 본능아연맹의 유우석·한하연과 서수학(徐洙學)이 중상을 입고 응급치료를 받다가 서수학이 사망하니, 유우석은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되어 1927121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3년 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 7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정당방위로 판명되어 무죄 선고되었다. 그러나 장기욱이 고소한 상해죄부분은 유죄가 인정되어 벌금 30원의 판결을 받았다. 이러는 동안 볼셰비키측이 원산청년당을 추진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본능아연맹간에 여러 차례의 연쇄적 충돌이 일어나 일본경찰의 개입을 초래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원산의 본능아연맹(本能兒聯盟)이후 평양, 안주, 단천, 철산 등 각 지방에 여러 흑우회가 조직되었다. 우선 1927년에 평양에서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가 조직되었으며 주요 회원으로는 이홍근(李弘根최갑룡(崔甲龍이주성(李周聖승도경(承道京최복선(崔福善한명호(韓明鎬이효묵(李孝默김주붕(金周鵬채은국(蔡殷國이시헌(李時憲곽정모(郭正模송선택(宋善澤오치섭(吳致燮황지엽(黃智燁전창섭(全昌燮이중화(李重華김찬혁(金贊爀김병순(金炳淳양제로(楊濟櫓이성근(李成根) 등이었다.

또한 같은 해 단천흑우회(端川黑友會)가 조직되었다. 회원은 조중복(趙重福임중학(林仲鶴김낙구(金洛九강창기(姜昌磯) 등이다. 1929년에는 안주흑우회(安州黑友會)가 조직되었다. 회원은 안봉연(安鳳淵김한수(金翰洙이순창(李順昌박동위(朴東?김노태(金魯泰한명룡(韓明龍김용호(金龍浩) 등이다.

이 밖에도 1930년의 철산흑우회(鐵山黑友會)가 조직되어 정철(鄭哲홍형의(洪亨義김이원(金利元)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 여러 조직을 대표해서 192988일 관서흑우회는 임시총회를 개최해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1110, 11일 양일간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준비위원으로 이홍근·최갑룡·채은국·조중복 등을 선임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조선공산당의 조직이 제1차에서 4차에 걸친 거듭되는 대검거로 거의 괴멸상태에 빠졌다. 또 아나키즘 진영에서도 각 지방의 산발적인 조직이 거의 완전히 적발되는 등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대회일자가 가까워져 각지에서 대표자들이 계속 평양으로 모이자 평양경찰서는 집회금지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함경남도의 조중복과 임중락은 대회날짜에 맞추어 천리길을 걸어왔다.충청남도의 장재욱(張在旭신현상(申鉉商), 함경남도 정평의 차고동(車鼓東), 홍원의 홍성환(洪性煥), 강원도 양양의 김한(金翰), 원산의 김경진(金京鎭) 등은 평양역에 도착하자 곧 일본경찰에 잡히거나 숙소에서 붙들려 강제 추방되었다. 농군으로 변장해 봉천에서 압록강을 건너 잠입한 유화영(柳華永 : 柳林)은 평양 시내에 은신했으나 결국 같은 해 1111일 붙들려 봉천으로 호송되었다. 동경(東京)동흥노동조합(東興勞動組合) 대표 유현태(柳玄台)는 평양역에서 붙잡혀 동경으로 호송되었다.

이와 같은 추방·구금·도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회는 좌절되었다. 관서흑우회의 이주성·승도경·김찬혁 등은 경찰처벌령 위반을 구실로 구류처분을 받았다. 양화직공조합(洋靴職工組合)의 이효묵은 노조원으로서 흑색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최갑룡은 무직부랑자라는 죄명으로 구류처분되어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인 19291111일 아나키스트들은 전열을 정비해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이는 이전의 산발적인 아나키즘 조직과는 달리 이론적, 실천적으로 아나키즘 이론에 충실했던 최초의 조직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아나키즘 운동의 부진함을 타개하기 위해 전국적 조직에 의한 단체들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만들어진 단체였다.

 

강령으로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코뮌을 기초로 자유연합에 의한 사회로 변혁할 것,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고 지방 분산적 산업조직으로 개편할 것, 그리고 계급적·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고 전인류의 자유·평등·우애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채택했다. 운동방침으로 적색운동자와 대립적 항쟁을 하지 말 것, 농민대중에 대한 운동을 진전시킬 것, 다른 민족적 단체에 가입하지 않을 것 등을 정했다.

 

그리고 지방의 조직사업으로 김정희는 원산에서 청년에게 아나키즘 교양을 시킬 것을 계획하고, 청년회원을 지역적으로 정리해 마을별로 협동단을 설치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임중학·조중복은 19307월 단천에서 신흥청년연맹을 조직했다. 그러나 원산에서 원산일반노동조합과 어용노동단체인 함경남도노동회의 분규에 원산청년회가 개입한 사건을 계기로 19314월 김대관(金大觀)이 조직한 협동단이 발각됨으로써 19317월 간부 13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함께 19283월 용강을 중심으로 조직된 관서지방의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전사(黑戰社)도 기관지 흑전(黑戰)5호까지 발간했다. 주로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호구, 오병현, 김유조, 이학의 등이 평안남도 용강군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1929611일 용강군 다미리의 한 마을에 씨름 대회가 열릴 때 "농민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붙였고 이 밖에 투쟁목표를 일제권력의 상징인 일왕 암살과 중요기관의 파괴에 두었으나 19297월 이후 김호구를 비롯한 여러 조직원들이 붙잡혀 사실상 해산되었다.

이후 1930년 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은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이후 거의 조직기반을 상실하고, 침체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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