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육사 시에 나타난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로서의 생애
조동범(시인,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1. 들어가는 글
이육사는 민족주의 문학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아나키즘 활동을 한 사실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육사 시의 아나키즘적 특성에 관한 일부 연구 성과가 있지만 이육사의 시는 문학계와 교육현장에서 주로 민족주의 문학으로만 알려졌다. 물론 이육사의 삶과 시가 민족주의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육사의 시를 저항을 기반으로 한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함으로써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편협한 시각은 이육사 시의 본질을 놓치게 만드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김경복은 “독립운동과 관련짓는 해석의 도식성과, 역사적 삶의 가치와 문학적 가치를 혼동하여 평가하는 것”이 문제라는 김홍규의 의견을 언급하며 이러한 편향적 시선을 경계한다.
이육사의 시는 다양한 시적 감수성을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투쟁적 민족주의 이외에도 시련, 방황, 좌절 등의 현실 인식과 개인적 감정 등을 작품 속에 수용함으로써 당대의 현실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이육사의 작품은 지나치리만큼 독립에 대한 투쟁적 열망에만 맞춰 이해됨으로써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나키즘과 관련된 논의는 더욱 미약한 실정이다. 이육사의 시를 아나키즘으로 분석한 몇몇 논문이 있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아나키즘이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며 이견이 없다. 다만 이육사의 삶과 아나키즘과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육사의 아나키스트로서의 생애는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이육사의 생애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고 그런 이유로 인하여 이육사는 민족주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육사의 아나키스트 활동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은 매우 미약하다. 하지만 이육사가 일본 유학 시절 흑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이나 의열단 단원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의식이 깊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이육사의 생애와 시를 아나키즘과의 관계를 연구한 논문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을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이육사가 아나키스트로 활동한 이력이 확실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민족주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아나키즘과 아나키즘 문학이 역사와 문학사의 비주류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육사의 시를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의 관점으로 분석한 논문은 김경복, 민명자, 정대호 등의 논문이 있으며 김윤식 역시 이육사 시의 아나키즘적 특성에 주목한 바 있다.
김경복은 이육사의 시를 아나키즘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주의 사상으로 영역을 넓혀 분석했다. 이육사가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처음 확립한 것은 아나키즘을 접하면서였다. 하지만 후에 사회주의 단체와 연관을 맺으며 사회주의 전반으로 사상적 토대를 확대한다. 김경복은 이육사의 시가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문학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파악했다. 아나키즘이 사회주의의 한 갈래라는 점에서 이육사의 시를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파악한 김경복의 주장은 타당하다. 이와 같은 김경복의 주장은 김희곤이 쓴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육사는 “1927년 4월에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하는데, 유월한국혁명동지회는 이후에 “상하이에서 결성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으로 흡수, 해소”된다. 이 단체를 주도하던 이들은 “대개 사회주의운동가 가운데서도 주역급”이었다. 이육사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한다. 따라서 “육사도 이 무렵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 접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민명자는 이육사와 유치진의 시를 아나키즘에 초점을 맞춰 분석했다. 아나키즘은 크게 사회적 아나키즘과 개인적 아나키즘으로 분류한다. 민명자는 이육사의 시를 상호부조적 공동체를 지향한 사회적 아나키즘으로 파악했다.
정대호는 이육사의 의열단 활동에 주목하여 육사 시와 아나키즘의 상관관계를 다뤘다. 이육사의 의열단과 관련한 아나키즘 활동은 육사 시를 새롭게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육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민족주의 관점으로 파악할 수도 있지만 이육사가 아나키즘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사실은 이육사의 민족주의가 아나키즘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윤식은 이육사가 아나키즘을 근간으로 결성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특히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와 「절정」을 아나키즘 시로 분류했다. 김윤식은 아나키즘 문학을 “한갓 신기한 외래사조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육사의 시를 민족주의 문학으로만 분류하지 않고 아나키즘 문학 계열로 분류한 사실은 이육사 시의 아나키즘적 특성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육사의 생애와 아나키즘과의 관계를 제시하여 그의 실천적 삶이 어떻게 아나키즘이라는 문학적 특성으로 발현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시인의 생애와 작품의 경향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육사가 아나키즘을 자신의 중요한 사상적 근간으로 삼고 실천했다는 점은 그의 문학적 자세와 긴밀한 관계에 놓인다. 그 이유는 이육사의 시가 독립에 대한 실천적 의지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육사의 실천적 생애와 문학은 별개의 것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에 나타난 아나키즘에 대한 논의는 가치를 지닌다. 또한 개별 작품을 아나키즘적인 관점으로 분석함으로써 이육사 시에 나타난 아나키즘의 특성을 세밀하게 파악하고자 했다.
2. 이육사의 생애와 아나키즘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와 의병장 허형(許?)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여섯 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첫째 이원기와 셋째 이원일, 넷째 이원조도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육사는 일본 유학 시절 아나키즘 단체 ‘흑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한다.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구속된 이래 전 생애에 걸쳐 17차례 투옥된다. 당시 수인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고 한다. 1929년 출옥하여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에 다녔다. 이때 정의부, 군정부, 의열단 등의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의열단 활동을 통해 아나키스트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여 1기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이 무렵 중국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노신(魯迅)을 만나기도 했다.
이육사가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한 시기는 그리 길지 않으며 남긴 작품 역시 많지 않다. 1935년 『신조선』에 「황혼」을 처음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시 이외에도 한시,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썼다. 남긴 작품으로는 시 36편, 시조 1편, 한시와 번역시 6편 등이 있다. 1941년까지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지속적으로 가담했다. 1941년 폐병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여 요양하기도 했으나 1943년 다시 북경으로 가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같은 해 7월 귀국했다가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 된 이후 옥사했다. 1946년 동생 이원조에 의해 『육사시집』이 출간되었다.
이육사의 생애 가운데 흑우회와 의열단 활동은 그의 사상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흑우회와 의열단이 모두 아나키즘을 근간으로 조직된 단체이기 때문이다. 이육사는 일본 유학 시절 흑우회 활동을 했으며 의열단에 가입하여 이정규 등과 교류했다. 이육사가 흑우회와 의열단 활동을 한 것만으로도 아나키즘에 대한 이육사의 관심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육사의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가 아나키스트로서 자의식을 지니고 활동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육사가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적 근간으로 삼은 것은 정치적 입장에서도 의미 있는 것이지만 문학적으로도 중요한 사실이다. 이육사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독립운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데, 이러한 집안 분위기는 성장기의 이육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기를 지나 자의식을 갖게 될 무렵 이육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단연 아나키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육사는 흑우회에 가담한 이래 지속적으로 아나키즘 활동을 했으며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다. 따라서 이육사의 독립운동 활동은 아나키즘 독립운동의 한 갈래로 이해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는 크게 민족주의 계열과 마르크시즘 계열 그리고 아나키즘 계열로 분류된다. 이육사를 흔히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가 흑우회를 통해 현실 인식을 확고히 했고 의열단 활동을 통해 실천적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사실은 이육사가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많은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는 아나키즘의 쇠퇴와 더불어 일반 대중에게 다른 계열로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단재 신채호 역시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아나키즘 독립운동가라기보다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졌다.
이육사가 가담하여 활동한 흑우회는 박열, 최규종, 정태성, 한현상 등이 결성한 아나키즘 단체이다.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는 흑우회의 “기관지 『후데이센징』, 『현사회(現社會)』, 『민중운동(民衆運動)』 등을 발행”하기도 했다. 흑우회는 흑도회에서 분화된 단체이다. 흑도회는 1921년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결성한 최초의 아나키즘 단체인데, 이후 아나키즘 계열인 흑우회와 공산주의 계열의 북성회로 분화된다. 이육사는 일본 유학 시절 흑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흑우회는 일본에서 다양한 항일 집회와 노동자 집회를 개최하고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육사가 아나키스트로서 흑우회 활동을 했다는 것은 그의 사상적, 문학적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사상적으로는 이육사의 독립 투쟁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며, 저항과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문학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활약한 노동운동가인 김태엽은 육사가 아나키스트 모임인 흑우회(黑友會)의 회원이었다고 기록”했다.
흑우회의 본거지는 죠시가야꾸(雜司谷區)에 있었다. 회원으로는 서상한 · 신영파 · 홍진유 · 최규종 · 김철 · 이육사(청포도의 시인, 북경에서 사망) · 이기영 · 이홍근 · 김묵 · 이경순(시인) · 박홍곤 · 박열 · 장상중, 그 외에도 일본인으로 소우에이이치로 · 쿠리하라이치부 등이 있었다. 흑우회에서는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이와사사쿠타로 · 가토오이치부 등을 밤에 초청하여 강의를 듣고 모자를 벗어서 돈을 걷어 다과회를 열곤 했다.
이에 대해 이육사 평전을 쓴 김희곤은 김태엽이 “육사를 일본에서 만난 적이 한 차례도 없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서술내용에도 부정확한 곳이 눈에 띈다”는 이유로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박열과 함께 활동했다고 한 대목에서 결정적인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이육사가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것은 “1924년 4월인데, 박열은 이미 1923년 9월 3일 체포되어 해방되기까지” 출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육사가 박열과 함께 흑우회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같은 흑우회 멤버였던 박열의 존재를 알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이육사가 박열과 함께 흑우회 활동을 한 것이든 아니든 흑우회 멤버였다는 점에서 아나키스트로서 활동을 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육사는 아나키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의열단은 1919년 중국 지린성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의열단은 적극적인 무장 항일 활동을 통해 일제에 저항했다. 의열단은 일제 경찰서와 기관을 폭파하거나 일본군과 밀정을 암살하는 등의 무장 투쟁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의열단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워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육사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 졸업생으로 의열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육사가 흑우회 활동에 이어 의열단 활동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이육사의 생애에 아나키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재확인 시켜준다. 이육사의 의열단 활동과 관련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기도 하다. 강창민은 이육사의 의열단 활동이 단순히 이정기의 이념적 지향에 동조하여 협조한 것이거나 의열단에 가입하기는 했으나 ‘김원봉의 의열단’ 해체 이후 의열단 활동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육사가 아나키즘을 정신적 지향으로 삼은 의열단의 단원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분파에 가담했느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아나키즘이라는 큰 흐름 속에 자신의 정신적 지향점을 설정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육사가 아나키즘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그의 역사 의식에 있어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 김희곤은 이육사의 아나키즘 활동에 대해 “만약 그가 아나키즘에 한쪽 발을 디뎠다면, 민족문제에 대한 심각한 번뇌를 비로소 경험하기 시작한 출발점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김희곤의 이와 같은 주장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한국 아나키즘의 특성을 생각하면 타당한 것이다. 앞서 밝힌 바처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크게 민족주의 계열, 마르크시즘 계열, 아나키즘 계열로 나뉜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는 민족주의 계열과 마르크시즘 계열을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나키즘의 쇠퇴로 인하여 후대에 이르러 제대로 평가받고 기록되지 못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 마르크시즘 계열과 함께 폭넓은 세력을 과시했다.
그동안 이육사의 생애에서 아나키즘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것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아나키즘의 운명 때문이었다. 체계적인 조직을 거부하는 아나키즘은 점점 세력이 약화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이육사 역시 아나키즘이 아닌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평가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아나키즘 독립운동사 역시 아나키즘의 위축과 함께 실제보다 축소되어 전해지게 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한국 아나키즘과 한국 아나키즘 독립운동사는 상당히 넓은 저변과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상당수의 지식인과 작가가 아나키즘과 아나키즘 문학에 동조하여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 문학인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이육사가 아나키즘에 투신했다는 사실은 독립운동, 민족의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이다.
물론 이육사가 아나키즘 단체인 흑우회와 의열단 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아나키즘만을 자신의 정신적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이육사는 분명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사회주의 계열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민족주의 계열로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많은 이들이 아나키즘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로 방향 전환을 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육사 역시 아나키즘과 함께 다른 사상적 기반을 받아들이거나 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육사의 사상적 출발이 아나키즘이라는 점과 아나키즘과 연계되어 자신의 사상적 지향을 펼치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육사의 아나키스트로서의 행보와 문학 세계는 어떤 연관 관계를 맺는가? 많은 경우 작가의 생애와 작품은 별개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상가이자 활동가였던 이육사는 문학과 행동을 분리시켜 바라보지 않았다. 이육사는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라고 말했다. 그런 만큼 이육사는 작품과 행동을 일치된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아나키즘 단체에 가담하여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 활동을 한 것은 그의 문학 세계와 깊은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 이육사의 시에 조국을 잃은 슬픔과 독립에의 의지가 주를 이루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정대호는 “육사는 문학과 작가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1925년 이후, 그의 인생의 대다수를 차지한 의열단원으로서의 활동은 그 의열단의 중심 사상인 아나키즘적 세계관이 그의 문학에 나타나게 하였음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주장한다. 아나키즘은 누구의 억압도 받지 않는 완전한 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이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이육사가 아나키즘에 투신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 역시 이러한 해방과 자유에의 의지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육사의 시가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는 것은 이러한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의식이 작품에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 이육사의 시에 나타난 아나키즘
이육사의 “저항정신은 다만 관념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 혁명적 의지”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육사는 자신의 삶과 문학을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그는 실천적 행동과 작품의 방향성을 일치하고자 했다. 실제로 이육사의 작품은 시인의 실천적 삶의 양상이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동안 실천적 삶이 드러나는 이육사의 작품은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이해되고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육사가 아나키즘을 사상적 근간으로 삼고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사상적 근간과 문학적 의지를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육사의 시는 아나키즘을 근간으로 창작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본성과 순리에 따르는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무강권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는 아나키즘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라는 점에서 독립적인 이즘ism으로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자유, 해방, 자연, 평등 등의 문제가 우리 삶의 보편적 가치라는 점에서 아나키즘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아나키즘만의 개성적인 문학적 특징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가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적, 문학적 지향점을 삼고 작품을 창작했다면 작품 속에 나타난 보편적 가치는 보다 더 섬세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삶의 보편적 가치를 단편적으로 파악할 경우에 그것은 이즘ism을 통해 ‘순정 아나키’의 상태를 지향할 수 없게 된다. 아나키즘은 어떠한 억압도 없는 ‘무강권주의’를 지향한다. 이와 같은 세계는 단순히 자유와 평등을 지향한다고 해서 다가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무강권주의’로서의 아나키의 세계는 보다 강력한 사상적 의지를 통할 때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가 아나키즘을 삶의 지향점으로 설정했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이육사의 시는 대부분의 작품이 실향, 독립에의 열망 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 문학 작품이 일관된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작가의 사상적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런데 이육사 시의 시적 지향은 아나키즘이 아닌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아나키즘이 마르크시즘과의 문학 논쟁에서 패배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다. 또한 ‘무정부주의’로부터 비롯된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는 이육사의 작품을 아나키즘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나키즘 진영은 민족주의나 마르크시즘 진영과 함께 독립운동의 주요한 주체였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즘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던 이육사가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작품에 담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육사가 내세운 자유에의 갈망과 의지는 아나키즘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물론 이육사가 남긴 모든 작품을 아나키즘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아나키즘의 흔적이 직간접적으로 나타나는 작품은 일부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작가가 남긴 모든 작품의 하나의 경향을 담는 것이 아님을 감안할 때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육사가 남긴 36편의 시 중에서 몇몇 작품은 아나키즘의 특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상실과 좌절을 드러낸 여타의 작품의 경우에도 ‘무강권주의’를 지향하는 아나키즘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시적 경향을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육사의 사상적 의지가 확고하다는 점에서 당시 아나키즘 진영이 펼쳤던 독립에의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꼭 한 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하고 그 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볼 동방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軍需夜業)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의 행상대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火田)에 돌을 줍는 백성들도 옥야천리(沃野千里)를 차지하자
다 같이 제멋에 알맞은 풍양(?穰)한 지구의 주재자로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 단단히 다저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보자
앵속(罌粟)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향연엔
예의에 꺼림 없는 반취(半醉)의 노래라도 불러보자
염리(厭離)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이란 항상 거룩합시니
새별을 찾아가는 이민들의 그 틈엔 안 끼여 갈 테니
새로운 지구에단 죄 없는 노래를 진주처럼 흩치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 십이성좌 모든 별을 노래하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전문
이 작품은 이육사의 시 가운데 아나키즘 성향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별’은 일반적으로 지향점이나 이상적 세계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이상 세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상적 세계를 지향하는 태도가 아나키즘만의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별’을 두고 아나키즘 인식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아나키즘이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가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이 무강권을 지향한다고 해서 무강권이 곧 아나키즘으로 해석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별’을 통해 아나키즘만의 특화된 지점을 포착하는 것은 어렵다. 이러한 점은 대부분의 아나키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런 경우에 작품의 아나키즘적 특징은 작가의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의식을 통해 분석해야 한다.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사상적 지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지향은 작가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미치고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육사가 아나키스트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점에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는 아나키즘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아나키즘적 특성은 ‘별’ 이외에도 나타난다.
이 시에서 아나키즘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보자”이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와 억압받지 않는 삶을 추구하지만 개인주의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의 한 갈래이며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은 모든 이가 억압받지 않는 세계를 희망하지만 억압받는 노동자와 농민의 삶에 특히 주목한다. 따라서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일구는 행위는 아나키즘이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絶頂)」 전문
「절정」은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와 더불어 이육사의 대표적인 아나키즘 시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시는 억압의 고통의 양상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가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보자”라고 말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희구의 형태를 띤다면, 「절정」은 현재 가해지고 있는 억압과 고통을 드러낸다. 미래를 향한 희구의 형태는 이육사의 대표작인 「광야」, 「청포도」 등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절정」에서 이육사가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방식은 비극에 기반하는 것이다. 「절정」에 나타난 억압과 고통은 아나키즘이 극복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세계이다. 아나키즘은 억압과 고통의 세계를 벗어난 ‘무강권’의 세계를 추구한다. 「절정」은 억압과 고통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그 반대 지점에 있는, ‘무강권’이라는 아나키즘을 표현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이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전문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청포도」 부분
「광야」에 등장하는 “초인”은 그동안 독립 등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타당하다. 그리고 ‘초인’이 독립을 상징하는 것이든 아니든 억눌린 삶이 해방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초인’은 모든 억압으로부터 놓일 수 있게 하는 존재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일제강점기이기 때문에 억압으로부터 놓이는 것을 독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광야」의 ‘초인’은 독립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보다 본질적이고 인류 보편의 정서인 해방, 무강권, 자유 등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광야」의 ‘초인’은 아나키즘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존재이며 동시에 아나키즘이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청포도」의 “손님” 역시 독립 등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작품 역시 일제강점기 우리의 현실을 기반으로 쓰인 작품이다. 하지만 범위를 넓혀 분석하면 우리의 삶이 가닿고 싶은 본질적 원형의 세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청포도”는 “손님”과 연결되어 파악할 수 있는 시어인데, 김재홍은 “청포도”를 “단순히 익어가는 사물이기보다 전설과 꿈이 내용으로 충만되는, 관념으로서의 과일”이라고 했으며, 김창완은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가 조화를 이루어 맺히는 희망과 꿈”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청포도”는 독립된 세계를 갈망하는 정서가 나타나는 시어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갈망하는 삶의 원형과 연관을 맺는 시어가 된다. 이러한 시적 의지는 아나키즘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4. 마치는 글
자금까지 이육사의 아나키스트로서의 생애와 작품에 나타난 아나키즘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이육사는 민족주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생애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활동한 시인이었다. 물론 이육사의 전 생애가 오로지 아나키즘만을 위해 투신한 것이거나 그의 모든 작품에 아나키즘적인 경향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아나키즘 시인으로서의 이육사의 모습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사상적, 문학적 지향은 지속적으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육사는 일찍이 흑우회와 의열단에 가담하여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다. 그리고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의 역량은 자연스럽게 문학적 지향점으로 전개되었다.
아나키즘이 이육사의 생애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이육사의 작품의 경우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민족주의 이외에 아나키즘이 영향을 끼쳤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동안 이육사의 작품을 논할 때 아나키즘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의 작품은 민족주의 문학 계열로 다루어졌으며 독립운동가의 모습 역시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파악되었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아나키즘 활동을 펼친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로서의 이육사의 모습은 주목받지 못했다.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 경향을 파악할 때 아나키즘이 제대로 전급되지 않는 것은 비주류로 밀려나 사라진 아나키즘의 역사적 사실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아나키즘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계열, 마르크시즘 계열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마르크시즘 계열 모두에게 공격을 받으며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아나키즘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아나키즘 문학의 경우에도 민족주의 문학 진영과 마르크시즘 문학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민족주의 문학 진영은 아나키즘을 허무주의라고 비판했으며 마르크시즘 문학 진영은 기회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아나키즘 문학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아나키즘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나키즘은 그 어떤 이즘ism보다 보편적 삶의 가치를 위해 투쟁했으며 아나키스트 역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아나키즘 문학 역시 예술적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작품 속에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은 이와 같은 아나키즘의 사상적, 문학적 지향을 수용한 것이었다. 물론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에 민족주의의 관점이 중요한 지점인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때 나타나는 민족주의는 아나키즘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육사는 아나키즘을 통해 민족의 미래를 모색하고자 했다. 또한 아나키즘 문학 작품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파악하고 제시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육사의 민족주의는 아나키즘을 통해 발현된 것이다.
아나키즘을 민족주의나 마르크시즘과 다른 것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아나키즘 문학 역시 민족주의 문학이나 마르크시즘 문학과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아나키즘이나 아나키즘 문학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거나 우리 민족의 현실을 작품에 반영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민족주의 문학과 접점을 이루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해방과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시즘, 마르크시즘 문학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은 아나키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민족주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이육사의 전 생애에 걸쳐 변모한 사상적, 문학적 지향에 대한 연구는 더욱 섬세하고 면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육사가 자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아나키즘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문학적 출발점과 지향이 아나키즘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은 아나키즘과의 상관관계를 통해 재검토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