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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관 이정규 선생 약력
우관 이정규 선생은 1897년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장봉리에서 출생하여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도일, 게이오대학 재학 중 1919년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고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교통망 설치, 의친왕 망명 추진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북경대학 경제학과에 편입, 수학하였고 중국, 러시아, 대만, 일본 등 동양 각국의 아나키스트들과 교유하며 북경세계어전문학교 설립, 호남성 이상농촌 건설, 국립상해노동대학 설립, 복건성 농민 자주·자활·협동방위운동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아나키즘 관련 소책자 10여 권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 등 우당 이회영 선생이 이끄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 중 상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후 다시 국내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3년을 복역하는 등 7년여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8·15해방을 맞아 아나키스트의 결집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 조직을 주도하고 조선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조직, 선언 강령을 기초하였으며, 국민문화연구소를 설립하였습니다. 1946년 국학대학 출강을 시작으로 교육계에 투신하여 성균관대 부학장, 부총장, 청주대학 학장, 성균관대 총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4·25전국교수단 시국선언 발표 및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1962년 국민문화연구소 회장으로 취임하여 대학생 농촌활동을 지도하며 농촌 영세층의 자주협동적 생산생활능력 향상을 위한 국민수산운동을 추진하였고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 창립의 산파역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에 이어 건국 후에도 계속하여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공동체 사회 건설과 인재 양성을 위해 진력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한국의 선구적이고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서 국민문화연구소 회장을 퇴임한 후에도 지역사회 공동체운동에 헌신하다 전 재산을 국민문화연구소에 기증하고 1984년 88세로 서거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