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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20-01-06 조회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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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립대전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묘역

번호

이름

 

활동 내용

1

1묘역

37

정찬진(丁贊鎭)

1904-

경상남도 통영 출생.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20년대 중반 무렵 아나키스트들의 활동 장소였던 도쿄나가노(中野)의 계림장(鷄林莊)을 중심으로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 그곳에서 알게 된 김호구(金豪九), 이학의(李鶴儀) 등과 1928년 천황암살, 중요기관의 파괴를 투쟁목표로 하는 비밀결사 일성단(一聲團) 조직, 동지규합을 위한 선전물을 인쇄하여 내외로 우송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김호구 등은 한국으로 돌아가 실천운동  「흑전사사건으로 검거되지만, 정찬진은 사건과는 연좌혐의가 없었다, 30 6 이성훈(李聖勳)등과 「흑색노동자연맹 결성,  연맹이 활동을 정지하는 38 1월까지  중심멤버로 활동했다. 31 만보산사건 비판연설회에서 격문을 배포하다 검거, 이듬해 32 8월에는 「동흥노동동맹의사 무소명도와 관련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11 공무집행 방해로 10개월의 형을 받는다. 33 6 출소해 곧바로 「반나치?파쇼민중대회(71 개최) 사전검거를 당하고, 동년 8월에는 오우영 등과 남조선수해구원활동을 계획하지만 실패한다. 19734월 문경의 가네코 후미코 묘비건립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함.

2

62

이규학(李圭鶴)

 

1923년경에 북경에서 우당 이회영의 둘째형인 이석영의 아들인 이규준과 이회영의 장남 이규학, 그리고 이성춘 등 청년들이 유자명과 협의하여 다물단(多勿團) 조직했으며, 신채호가  선언문을 작성했다. 다물단19253월경 의열단원 이인홍(李仁洪), 이기환(李箕煥) 등이 일제의 밀정이었던 김달하(金達河)를 북경에서 제거하는 등의 직접행동을 전개했다.

3

72

김종진(金宗鎭)

1900.12.26-1931.7.11

호는 시야(是也). 충청남도 홍성군 출생. 191937일 홍성의 민중투쟁의 선두에서 싸우다 검거되지만, 3개월 후 미성년이기 때문에 석방된다. 그후 서울에서 항일지하운동에 참가. 탄압이 강해져 망명. 상해임시정부의 소개로 운남군관학교에 입학해 4년을 지낸다.. 이 무렵 만주의 조선농민을 둔전병으로 훈련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구상을 갖기 시작했다. 259월 군관학교를 졸업 후 상해에서 백정기(白貞基)와 만나, 천친의 이회영을 방문해 아나키즘 사상에 공감한다. 2710월 먼 친척인 신미부의 김좌진을 찾아가 그의 동의를 얻어 재중국아나키스트에게 협력을 구한다. 297월 해림(海林<黑龍江省)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하여, 이강훈(李康勳),이달(李達), 엄형순(嚴亨淳), 이준근(李俊根), 김야운(金野雲) 등이 참가한다. 7 21 신민부를 개편해 아나키즘의 원칙에 의한 농민의 자치조직 한족총연합회 결성한다. 8 총연합회의 임원이 선출되어, 김좌진이 위원장에, 이을규가 교육부위원장이 된다. 김좌진의 암살 후, 연합회의 운영을 중심적으로 맡아, 각지의 아나키스트에게 지원을 요청, 동년 정화암, 백정기, 오면식, 이규숙(李圭淑)과 이현숙(李賢淑<이회영의 딸>)등이 한족총연합회 모여든다. 그러나 이듬해 31 7 이준근(李俊根) 김야운(金野雲)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고, 7 11 당시 총연합회 조직선전  농무위원장이었던 김종진은 해림역전 각산 조영원(趙永元) 집으로 유인되어 어디론지 납치되어 소식불명이 된다.  사건을 전후해 아나키스트들은 북만주를 떠나게 되면서,한족총연합회의 운동은 끝나게 된다.

4

104

윈심창(元心昌)

1906.12.1-1971.7.4

호는 훈(). 경기도 평택 팽성면 안형리 출생. 고향에서 초등학교 졸업 후, 경성중학 2학년 때 3?1독립운동이 일어나, 14세의 몸으로 운동에 참가하여 큰 영향을 받는다. 서울 중동중학교 촉성과를 졸업 후, 2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크로포트킨과 오스기 사카에 등의 서적을 읽고 이론적으로 아나키즘을 신봉, 이윽고 실천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26년에는 최유종(崔圭悰)과 도쿄의 조시가야(雜司)에 거처를 빌려 흑색운동사의 간판을 걸고 독자적으로 운동을 전개. 또한 동년 11월에는 장상중, 육홍균(陸洪均)등과 흑색전선연맹을 조직하고, 일본인 단체인 흑련(黑連)에도 가맹했다. 또한 박열 등의 불령사를 재건하여, 기관지 『흑우(黑友)』 2호를 간행했다. 이듬해 272월 탄압을 피하기 위해 불령사흑풍회(黑風會)로 개칭하여 적극적으로 운동을 전개, 특히 공산계열 단체와 격렬하게 대립, 동년 2월에는 신간회, 조선청년동맹을 습격하여 사법처분을 받는다. 이 무렵 고이시가와(小石川)에 설립된 조선동흥노동동맹흑풍회산하의 아나키즘계 노동단체가 되지만, 그 간부가 되어 노동운동에도 참가했다.281흑풍회흑우연맹으로 개칭, 동년 5월에는 아나키즘계의 자유노동조합원이 조선노동총동맹으로 옮겨간 것을 발단으로, 도쿄조선노동조합북부지부를 습격, 폭력행위처벌법위반으로 검거되었다. 또한 296월에는 도쿄유학생학우회의 운동회에 반대해, 운동회 개최준비위원회장이었던 신간회 도쿄지부사무소를 습격,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도쿄 유학생학우회 사건). 그로 인해 현장에서 체포되어  요다마(豊多摩)형무소에 수감되었다. 30428일 예심 중에 보석으로 형무소를 출옥,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목표로 일본을 탈출, 한국을 거쳐 북경에 도착, 이듬해 31년에는 상해로 가서 아나키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나아가 테러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의 중심적 멤버로 활약했다. 333월 백정기, 이강훈 등과 함께 상해의 요정에서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공사를 암살하려했으나 실패 후 체포된다(六三亭義擧). 나가사키 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최종심에서 무기징역이 된다. 그는 항상 동지들을 격려하고, 이성(異性)의 혁명가와의 생활을 거부했다. 그의 성격은 너무나도 온순하고, 감상적이었지만, 한편으론 냉정한 영단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고 양일동은 평하고 있다. 가고시마(鹿?島) 형무소 복역 중, 도쿄유학생학우회 사건으로 도쿄로 이송, 도쿄대심원에서 징역 5년이 추가되어 가고지마 형무소로 송환,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후, 박열 등과 함께 신조선건설동맹 창설해 부위원장에 취임, 「재일조선거류민단에서는 사무국장, 중앙본부부단당, 중앙본부단장, 고문을 역임했다. 또한 해방 직후 「임시정부 「독립촉성선전총본부사이의 간극을 상호부조의 실천적 정신으로 봉합시키고, 또한 선전활동을 겸해 민정을 살펴보기 위해 원심창을 비롯한 무명회 또는 자련의 멤버들이 지방유세를 떠난다. 55년에는 「조국평화통일촉진협의회 주요멤버로 활약, 59년에는 『統一朝鮮新聞 창간해 대표상임고문에 취임, 또한 65년에는 「한국자주통일동맹」 일본본부를 결성해 대표위원이 되었다.

5

2묘역

151

한하연(韓何然)

1903.12.18-1960.3.26

별명, 하현(河鉉),하원(河源),소용선(小龍善) 경상남도 부산출생으로, 16  양친을 따라 강원도 준양(准陽)으로 이주해 화전민 생활을 보냄. 18세때 원산불교포교당에서 경전을 읽고, 철학과 문학에 몰두. 26년 함경도 원산에서 이향(李鄕), 조시원(趙時元), 유우석(柳愚錫 유관순의 오빠)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그룹을 만들고, 비밀결사인 「본능아연맹(本能兒聯盟) 결성하였으며, 대중적인 청년단체인 원산청년회를 중심으로 사상계몽 운동을 했다. 27 4 원산청년운동의 단일화를 둘러싸고, 아나키스트 그룹과 공산주의계 청년들이 투쟁(원산청년회사건), 쌍방에 사상자가 나오면서 검거되어 함흥지방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지만, 공소하여 28 7 고등법원에서는 무죄가 되었다. 동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흑우연맹(黑友聯盟) 가입, 원심창(元心昌), 정태성(鄭泰成) 등과 함께 기관지호조운동(互助運動) 발행에 참가했으며, 최복선(崔福善) 등과 「자유청년연맹 조직해 활동함. 친일단체인상애회(相愛會) 「대동협회(大同協會),공산계의조선유학생학우회등과도 투쟁, 29 6월의 학우회사건으로 징역2,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았다. 30 4월에 보석되어, 32년에는 홍성환(洪性煥) 등과 함께 「자유코뮨사 설립하여 『자유코뮨지를 발행했다. 1930 8 1 창간한 「흑우연맹 기관지 『흑색신문 편집위원. 8·15직후 아나키즘에 입각해 사심 없이 대중 계몽과 민족적 자주 자결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전국에서 67명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조직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약칭 자련)재일본흑우연맹원으로  김금순, 이시우,이동순과 함께 참가한다. 또한 임시정부와 독립촉성선전총본부 사이의 간극을 상호부조의 실천적 정신으로 봉합시키고, 또한 선전활동을 겸해 민정을 살펴보기 위해 한하연을 비롯한 무명회 또는 자련의 멤버들이 지방유세를 떠난다.

6

715

최갑룡(崔甲龍)

1904.5.29-1998.01.14

부산 좌천동 출생. 어린시절 황해도 겸이포(兼二浦 지금의 송림松林) 이주. 소년공으로 겸이포의 미쓰비시(三菱) 제철소, 22 부터는 평양의 양조회사에 근무하지만, 24 11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 당초 동거했던 한원렬(韓源烈), 이홍근(李宖根) 영향으로 아나키즘에 이끌려 셋이서 독서회를 갖는다. 그후 메지로역(目白驛) 근처에 살며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 「흑우회 자주들러, 흑우회 간부들과도 교류하게되었다. 265월 메이데이에에는 이홍근과 함께 참가하려 했지만,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실패했다. 27년 여동생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 동년 12월에 한국 관서지방의 아나키스트 연합체로 「관서동우회<關西同友會=1 후에는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 개칭> 조직했다. 29 11 평양에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 개최를 계획하지만, 당국은 집회금지하고 대표자에 대한 일제검거에 들어가, 동경에서온 「동흥노동동맹 대표는, 기차를 내리자 마자 곧바로 체포되었다. 난을 피한 최갑룡 등 대표자들은 대회 예정일에 비밀리에 모여,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連盟) 조직하지만, 이듬해 3 조직이 노출되어 최갑룡  9명이 체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된다. 해방 이후 평양에서는 조만식을 필두로 오윤선, 홍기주, 박현숙, 김병연, 이주연  다수의 기독교계 원로와 민족주의계 인사들이 집결해 「평남치안유지윈원회,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시켰는데 여기에 최갑룡을 비롯해 이홍근, 채은국, 김용호  「관서흑우회 아나키스트들도 참여했다. 또한 「한국자주인연맹(韓國自主人聯盟) 결성해 대표간부를 지냈다. 1978년 형설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아나키즘운동사의 편집위원회으로 참가했다. 19734월 문경의 가네코 후미코 묘비건립준비위원회 총무위원으로 활동함.

7

964

류자명(柳子明)

1894.1-1985.4

호는 우근(友槿), 흥제(興提) 충청북도 충주 출생. 1912 수원농림학교 입학. 16 졸업해 충주의 농업학교와 보통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3?1운동에 참가. 동년 창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위원이 된다. 12월 서울로 올라와 이을규.이정규 등 아나키스트와 접촉해 아나키즘에 빠진다. 224월 북경으로 건너가 신채호, 이회영 등과 친교. 244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에 참가. 또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가맹, 상해와 광주에서 활동한다. 27 6 무한으로 건너가 「동방피압박민족연락회의 결성. 28 한구(漢口)에서 공안국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중생활을 보낸다. 29 가을 천주(泉州) 「여명중학에서 가르치고, 30 1 상해의 입달학원(立達學園) 고중부(高中部) 농촌교육과로 옮긴다.  무렵 「화공의원(華光醫院)에서 파금(巴金), 모일파(毛一派), 노검파(盧劍波) 등과 친교를 맺는다. 31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 결성에 참가한다. 33 프랑스에서 귀국한 마종융(馬宗融)?나숙(羅淑) 부부와 친교를 맺는다. 37 11월에 결성된 민족운동 좌파의 통일조직인 「조선민족전선명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조선혁명자연맹) 대표로 참가하고, 기관지 『조선민족전선 편집을 맡는다. 38 10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의용대 조직하자 지도위원이 된다. 40 3 심중구(沈仲九) 정부고문을 하고있는 북건성으로 건너가,복건성 농업개진처(福建省農業改進處) 근무한다. 44 9 중경에서의 조선혁명각당파의 통일회의에 참가. 46 3 타이페이(台北) 대만성 농림처 합작농장에 근무하면서 1947 200여개의 합작농장을 설립하는  대만의 농업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50년 한국으로 귀국하고자 했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장사(長沙)호남농학원(湖南農學院)」 교수가 된다. 1985 91세로 장사에서 세상을 떠나지만 그후 17년이 지난 2002년이 유골이 되어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8

965

심용철(沈龍徹)

1914-2001

심여추의 동생으로 일명 극추() 천주에서 아나키즘 운동에 관여.

9

3묘역

624

이하유(李何有)

1909-1950

일명이 종봉(李鐘鳳). 인천 출생. 이갑규(李甲奎)의 장남으로 이을규.이정규 형제의 조카에 해당한다. 2912월 중앙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으로 1년간 옥중생활을 한다. 32년 도쿄로 건너가, 일본대학 사회학과 재학 중에 흑우연맹 가맹한다. 유학생 예술단사건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고, 36 「남화한인청년연맹 오면식(吳冕植) 등의 권유를 받아 중국으로 건너간다. 유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도 참가해,유자명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 기관지남화통신(南華通信) 발행에 참가한다.

39 항일전쟁의 제일선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나월환 등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조직하여, 정치조장으로 활동. 42 부대 내의 내분으로 나월환이 살해되자 대원2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군법회에 나서게 되지만 1 후에 석방된다. 해방  47 3 정화암과 함께 오치휘(吳雉暉)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학전관(朝鮮學典館) 「신채호학사 설립. 그후 귀국한다.

10

4묘역

163

이을규(李乙圭)

 

별명 회관(晦觀). 又觀 이정규의 형. 서울 공적동에서 이정훈의 차남으로 출생.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평안농공은행에 재직하다 1918년에 사직하고 안동현 구시가에서 남정 박광과 무역상 간성덕(艮成德) 「동신공사 경영하면서 내외 독립운동자와 연락과 자금조달에 힘썻다. 1919년에는대동단사건관여하여 의친왕을 안내해서 안동현까지 탈출하려다가 일경에 억류되자 안동현 영상으로 도피했다. 1919 3?1운동 , 상해에서 설립된임시정부 국내와의 비밀연락망구축을 위해 서울에서 활동한다. 20 1월에 서울로 잠입 「연통제 실시코자 이종욱,양기탁 등과 활동하다가 피검 2년형을 받고 공소, 보석 중에 상해로 망명한다. 23 3 이정규와 함께 북경의 이회영의 집에서 동거한다. 22 10월에 일루크스극동혁명자대회 참석하러 가던도  북경에서 조소앙을 만나 신생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의 정세를 듣고 일루크스행을 보류하고 북경에서 우당, 단재 북경대학교수인 주수인(루쉰), 러시아 맹인 시인 에로셍코 대만청년혁명동지 범본양 등과 교유하면서 사상문제를 연구하고 24년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에 참가한다. 27 5월경 상해에 와있던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 집을 이정규와 함께 방문한다.   이와사 등과 함께 복건성의 「민단무장편련처(民團武裝編鍊處)활동에 참가한다. 29 만주의 자치조직의 하나인 「신민부 김종진으로 부터의 의뢰를 받고 만주로 간다. 동년 7 해림(海林흑룡강성)에서 김종진과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 나아가 김종진, 고자성(高自性) 등과 함께 「신민부?군정파의 지도자 김좌진에 대해 아나키즘에 의거한 자치조직을 만들 것을 설득하고, 7 21 「한족총연합회 창립을 실현, 간부회에서 교육부위원장이 된다. 30 1 20 김좌진이 공산당원에게 암살되어, 김종진과 함께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뒷받침하려 한다. 동년 4 일본의 은행에서 거액의 자금을 사취해  신현상 등을 맞이해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자 회의가 열려, 활동자금을 얻기 위해 김종진과 함께 여기에 참가하지만, 신현상(申鉉商) 등이 관헌에 체포당하는 바람에 자금획득이 실패로 돌아간다. 동년 9 군자금 모집 , 천진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 판결을 받는다. 33 11 2 출옥. 34 서울에서 이정규 등과 함께 체포되지만 불기소 처분(1 사건). 설득력을 지닌 이론가로 「조선의 크로포트킨이라고 불렸다. 저서에 『시야 김종진선생전(是也金宗鎭先生傳) 있으며, 사이쿄(西京二)번역으로어느 조선인 아나키스트의 전기(ある朝鮮人アナキストの?記)라는 이름으로 일본 아나키즘 센터 발행 아나키즘(アナキズム)(1974·75)5회에 걸쳐 게재되었다. 1978년 형설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아나키즘운동사의 편집위원회에 참가했다. 8·15직후 아나키즘에 입각해 사심없이 대중 계몽과 민족적 자주 자결의 태세를 가갖추기 위해 전국에서 67명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조직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약칭 자련)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맹원으로 이정규와 함께 참가한다.

11

480

최낙종(崔洛鍾)

 

하기락, 한하연(韓何然), 이시우(李時雨), 하경상(河璟尙)  와세다, 도쿄대학의 학생들과 사회주의 연구모임을 조직, 아나키즘 선전활동을 했다. 1926 9 10 창립한 「동흥노동동맹에서 이정규(李政圭) 함께 대표. 1931 4 흑우연맹에서 기획한 흑색신문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1927 9 10 최상렬과 함께 조선인 위생인부들을 결속시켜 「관동동흥노동동맹 조직하고 원심창, 이홍근, 장상중 등으로 선전대를 편성해 조선노동자들의 합숙소를 순방하면서흑우 개제한 『자유사회 배부했다. 매호마다 발매금지 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기관지를 선전활동에 이용했다. 1929 재동경의 아나키즘 노동단체인 「동흥노동동맹 센쥬부(千住部) 책임자로 활동, 30 메이데이에서는 비라살포로 29일간 구류된다. 31년에는 「흑우연맹 기관지인흑색신문』 편집위원의  사람이 된다. 33 「시바우라노동자자유연합 조직해 『자련신문(自連新聞)호외 등을 간행했다. 또한 한국어 명함 인쇄 등을 했으며, 33 2 동포로부  인쇄시설을 사들여 삼문사(三文社) 설립, 이후 동경의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이 발행하는 인쇄물의 인쇄를 맡는다. 33 자신이 조선동흥노동동맹 시바우라지부(朝鮮東興??同盟芝浦支部=50 정도의 조직) 간행물을 발행한다,

12

730

홍성환(洪性煥)

1906-1975

재도쿄 조선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연맹 간부. 1932 11 한하연(韓何然) 등과 「자유코뮌사 창립, 기관지자유코뮌 발행한다. 『흑색신문만으로는 아나키즘 사상을 충분히 선전할  없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이듬해 33 3 자금부족으로 폐간한다. 동년 여름 상해의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공사 암살미수사건으로 체포된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등이 나가사키(永崎) 압송된다는 사실을 알고, 양일동, 최학주 등의 동지들과 함께 구원활동을 전개, 11 대표로 나가사키에 파견된다. 34 9월에는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關西地方 거주 동포구원을 위해, 재동경 조선인 아나키스트단체와 일본인 단체 자유연합조합이 주최한 의연금모집 운동에 참가, 또한 35 5월에는 「흑우연맹 사무소 이전 과정에서 이전비를 강요했다고 해서 이동순과 함께 체포된다. 1973 4 문경의 가네코 후미코 묘비 건립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함. 1978년 형설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아나키즘운동사의 편집위원회으로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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