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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나키즘 |
일본의 아나키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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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내 용 |
연,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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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회당 결성. 다루이 토키치(樽井藤吉) 등 7∼80명 하지만 7월7일 금지 |
1882. 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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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연구회(社會主義硏究會)」결성. 고토쿠 슈스이, 기노시타 나오에(木下?江), 가타야마 센(片山?) 등 |
1898.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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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연구회」를「사회주의협회」로 개칭. |
1900.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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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당(社?民主?)」결성. 가타야마 센(片山?),아베 이소(安部磯雄), 기노시타 나오에(木下?江), 고토쿠 슈스이(幸?秋水) 등 |
190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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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의 논문집 『장광설(長廣舌)』출판. 증국어로 번역되어 같은 해 중국에서도 출간. |
19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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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무정부주의(近世無政府主義)』 발간. |
1902.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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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 『사회주의신수(社會主義神髓)』 출간 |
190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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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사(平民社)」결성. 기관지로 주간 「평민신문(平民新聞)」 |
1903.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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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신문」폐간. |
1905.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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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 니시카와 미쓰지로(西川光次?) 필화사건으로 투옥. |
1905.2.28~
1905. 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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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사」해산. |
1905.10.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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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 도미(渡米). |
1905.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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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 설립: 일본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 |
1906.2~ 19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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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 미국에서 귀국.「세계 혁명운동의 조류」 |
1906.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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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1.05 |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이하 기독청년회)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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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 등에 의해 「평민사」재건. 일간 「평민신문」(2차)을 발간. |
1907.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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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오 동산(足尾銅山)에서 갱부에 의한 대폭동 발생. |
1907. 2.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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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 제2회 대회에서 의회정책파와 직접행동파의 충돌. |
1907. 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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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화친회(亞洲和親會) 결성. ※손문 주변의 대아시아주의에 비해 반제국적 소아시아주의를 주장. |
1907. 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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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평민신문』,『사회신문』에 조선의 독립을 주장 |
1907. 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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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절 사건: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 등 재미 사회혁명당 |
1907.11.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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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사건(赤旗事件) 발발. |
1908. 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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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1 |
대한흥학회 결성. 1910년 재일 한인단체의 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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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0.26 |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처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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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평민사의 오카 시게키(岡繁樹) 안중근 의사의 사진 그림엽서를 발간 배포. |
19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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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사건 발발 |
1910.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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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사건으로 고토쿠 슈스이 검거. 이후 26명 기소 |
1910.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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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8.29 |
(국치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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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문사(?文社) 설립. 1919년 2월 해산. |
1910.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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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5. |
조선 유학생 친목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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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회(友愛?)결성. 스즈키 분지(鈴木文治) 등 15명으로 결성. |
1912.0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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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상(近代思想)」 발행. 오스기 사카에, 아라하다 칸손 1914년 9월 폐간.
1915년 10월 2차 「근대사상(近代思想)」을 복간 이듬해인 1916년 1월 4호로 종간. |
1912.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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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0.27 |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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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산시로 일본을 탈출 |
1913.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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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04 |
도쿄 조선 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之光)』 발간. 1930.4 종간 통권 2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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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4.7.28.~1918.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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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
1914년 노동자 대상의 최초의 조선인 단체 「재판조선인친목회」 오사카에서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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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기 사카에, 아라하타 칸손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평민신문(平民新聞)」발행. 1915년 3월 6호로 폐간. |
1914.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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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상(近代思想)」복간. 그러나 1916년 1월 4호로 종간. 활발한 언문일치 운동에 의해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의 참여. |
191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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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마 히가게(葉山日陰) 찻집 사건. |
1916.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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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01.23 |
도쿄노동동지회(東京勞動同志會) 발족. 1920년 1월 25일에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生同友?)로 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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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발발 19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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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식자공조합 신우회(信友?) 결성. 활판공조합(1899년)→성우회(誠友會:1900년)→구우회(1907년)→신우회.
모치즈키 카쓰라 「평민미술협회」를 창설. |
1917.4.15
19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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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대상의 평이한 신문 『노동신문』발행. 2,3,4호 모두 발금 |
19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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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회의 와타나베 마사타로(渡?政太?) 사망. 생년은 1873년. |
1918.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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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마현(富山?)의 어부 아내들에 의한 쌀소동 발생. (시베리아 출병) |
1918.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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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9.1 |
나고야의 한광수(韓光洙일명 한세복) 무정부주의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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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 종전 1918.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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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이란 해는 한국과 일본의 사상과 문화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해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3.1독립만세운동과 중국의 54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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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치즈키 카쓰라 혁명예술연구회 「흑요회(黑耀會)」결성. 만인이 예술가라는 민중예술론을 주장. |
19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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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4.10 |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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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사」결성. 기관지로 『노동운동』 |
1919.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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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인쇄공 조합「정진회(正進?)」 결성. 1919년 6월 결성한 혁진회의 후신. |
1919.12.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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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25 |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 고학생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강습회, 무료치료, 순회강연, 기숙사설치, 직업소개 등 상호부조에 전력. 기관지 〈동우 同友〉 이는 이후 의거단 철권회 등을 거쳐 흑도회로 이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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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경제공황 발생 19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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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04 |
서상한을 중심으로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황족의 정략결혼의 식장에 폭탄 투척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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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메이데이. 우에노 공원에서 10명의 참가자. |
192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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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의 성공으로 노동조합동맹회(??組合同盟?) 결성. |
192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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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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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기 사카에 상해의 코민테른 사회주의자 대회 출석 |
1920.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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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1 |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의 뒤를 이어 조선인 학생 15~16명 의거단(義擧團)결성, →철권단(鐵擧團)→ 혈권단(血拳團), 박살단(撲殺團), 등으로 명칭을 바꾸어 계속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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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주의동맹」결성. 1921년 5월 28일 해산. |
1920.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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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기 사카에아나?볼 합동으로 제2차「노동운동」 발행. |
192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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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에서 아나?볼 양파 공투의 종말과 대립의 개막 |
192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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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회(友愛?)가 노동조합동맹회에서의 탈퇴를 계기로 신우회(信友?), 정진회(正進?) 등의 자유연합주의가 동맹회의 결정적 세력이 된다.(노동운동에서의 아나키즘 계 주도권 장악) |
1921.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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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1.29.
∼1922.10 |
흑도회 결성.
박열, 김약수(金若 ), 원종린, 임태룡, 백무 등 20여명의 재일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아나키즘 사상 운동 단체.
기관지로 『흑도(黑濤)』를 발간.
『일본에서 아나키즘 운동 단체의 변화』
1921년 흑도회를 기점 ⇒ 1923년 풍뢰회, 흑우회 ⇒ 1926년 흑색청년연맹 ,불령사(不逞社) ⇒1927년 1월 흑풍회(黑風會) ⇒
1928년 1월 흑우연맹으로 개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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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계 만의 제3차 「노동운동」발행. |
1921.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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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최 극동민족대회. 이 시기에 이르기 까지 아나계의 주도 |
19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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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딘사 결성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 나카하마 테쓰(中浜?) 외에 구라치 케이지(倉地啓司) 등. 일본 아나키즘의 테러리즘 |
1922.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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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12 |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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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타 우노스케(久板卯之助) 사망. |
1922.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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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타(八幡) 제철소 쟁의 발생(아나 운동의 절정기) |
192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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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공산당 창립) |
1922.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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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9.7 |
시나노 가와(信濃川) 진상 조사회 주최「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문제 연설회(新潟?朝鮮人??者虐殺問題演?)」.박열 나경석 등이 현지조사를 보고, 나카하마는 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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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조합총연합결성대회」,일명「일본노동조합연합(日本??組合連合)」개최.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에서 아나?볼 결별. |
1922. 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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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07~8 |
박열, 가네코 후미코, 이강하, 신염파(신영우), 가토 스에키치(加藤末吉) 등 『흑도(黑濤)』발행. 2호까지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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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1 |
풍뢰회(風雷會), 흑우회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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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1~
12.30 |
『후테이센진(太い鮮人)』발간. 2호 이후에는 『현사회』로 개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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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2.26 |
흑도회가 분열되어 공산주의자들은 김약수(金若水),김종범(金鍾範) 등 중심으로 한 북성회(北星會)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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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기 사카에 아나키스트 국제적 연맹 결성을 토의하기 위해. 상해에서 프랑스로⇒ 2월 13일 마르세이유 도착. |
192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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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 |
「조선혁명선언」
신채호, 이회영(李會榮), 유자명(柳子明) 등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혁명관을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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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아방가르드, 아나키즘 시지 『적과 흑(赤と?)』 창간. 동년 5월 4호를, 이듬해 1924년 6월에 호외를 내고 모두 5책으로 종간. 허무주의적인 성격과 함께 참여시인의 대부분이 아나키스트로 이 시기 니힐리즘에 의한 아나키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
19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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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2.21 |
혹노회(黑勞會 )결성. 박열(朴烈), 이강하(李康夏)를 중심으로 국내 최초로 조직된 아나키즘 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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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계 노동자 유지에 의해 『조합운동』 창간.
오스기의 『노동운동』이 인텔리 중심이었던 것에 비해 『조합운동』은 노동자 중심. . |
1923.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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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3-6 |
박열, 가네코 후미코 『후테이센진(太い鮮人)』을 개재해 『현사회』 발간. 3월에 3호, 6월에 4호를 내고 종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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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3 |
『민중운동』발간. 한국어로 된 최초의 아나키스트 잡지로 단 1호로 끝난다. 흑우회 내에 세워진 민중운동사에서 신염파(신영우), 김중한, 서상일(서상경), 서동성, 홍진유 등이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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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4 |
불령사 조직. 박열에 의해 흑우회 활동과는 별도의 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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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기 사카에 파리 생드니에서 메이데이 연설. 이로 인해 체포 되어 강제 출국. |
192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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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8 |
김중한, 니야마 하쓰요에 의한 『자천(自擅)』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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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3 |
박열 ,가네코 후미코 요요기 도미가야(富ヶ谷)의 자택에서 세다가야(世田谷)경찰서에 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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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처 이토 노에, 조카 다치바나 무네카즈(橘宗一)가 헌병사령부로 납치되어 아마카스 대위 등을 대표로 하는 군부에 의해 학살. |
1923.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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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딘사의 다나카 유노신(田中勇之進) 아마카스 대위의 동생을 습격하지만 실패. |
1923.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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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딘사에 의한 고사카(小坂) 사건 발생. |
1923.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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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가 히로히토를 저격한 대역사건 발생. |
1923.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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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지주의(純白紙主義)」. 이에 따라 「아나」계는 아나키즘=자유연합계와 단순한 반총맹계로 분해해 갔다. 그와 동시에 순화된 아나키즘계는 당연한 일이지만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서의 세력관계에서도 중심적 지위에서 추락해 간다. |
1924.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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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4.20 |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신채호(申采浩), 이회영(李會榮) 등을 중심으로 조직. 기관지로 『정의공보』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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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전선』발간. 이는 문학에서의 공동전선을 의미. 하지만 「정치주의 문학」에 대한 비판으로 아나키스트가 단념하고 또한
이 시기 이후 아오노 스에키치(?野季吉)가 목적의식론을 기치로 내걸고 아나계를 축출한 후 마르크스주의가 프로문학의 주도권을 쥐는<프로藝>의 성립(1926.11)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아나계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19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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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사의 와타 큐타로(和田久太?),무라키 겐지로, 길로딘사의 후루타(古田)가 오스기 학살 당시의 게엄사령관이었던
후쿠다 마사타로(福田雅太?)를 저격했으나 실패 후 체포. |
192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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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9.4~
1937.2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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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 설립.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재일 한인 노동자들이 설립한 노동단체로서 당시 최대 규모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이후 「조선인자유노조와」함께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중반까지 아나키즘 계열의 대표적인 노동운동 단체로 활동. 항일 운동과 반공산주의적 경향을 띤 본 동맹은 순정 아나키즘을 띤 「조선자유노동자조합(朝鮮自由勞動者組合)와 다소 차별성을 갖는다. 즉 총파업 대신 일반노동자들의 노동쟁의에 대한 지원이나 구호활동 등 경제투쟁을 전개한 것과 생산자소비조합 관리나 언론교육 등 일상활동을 강조한 것은 아나키즘 사상 중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적 경향을 띠었다 할 수 있다.
1934년 1월 「조선일반노동조합(朝鮮一般勞?組合)」으로 일부 통합되었으며 이어 1934년 11월 「조선노동자합동조합」으로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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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2 |
흑기연맹(黑旗聯盟) 서울에서 발기. 1923년 9월 박열(朴烈) 등의 대역사건에 연관된 불령사(不逞社) 멤버인 홍진유(洪鎭裕), 서상경(徐相庚) 등이 예심에서 석방되자 귀국해 신영우(申榮雨), 서정기(徐廷夔), 한병희(韓昞熙), 이복원(李復遠), 서천순(徐千淳), 이창식(李昌植), 곽철(郭徹), 이기영(李基永)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조직. 하지만 이듬해 5월초 경찰에 의해 탐지되어 일제히 검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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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방랑 시인 고토 켄타로(後藤謙太?) 옥중 자살. |
1925.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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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키 겐지로(村木源次?) 사망. |
1925.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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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2.22 |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결성 대회. 도쿄 에서 도쿄 조선노동동맹회와 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를 비롯한 12개 단체대표 63명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결성대회.
<전개 과정>
1922년 조선인자유노동조합 손영식(孫永植)
1922년11월 도쿄 조선노동동맹회를 결성 이헌, 김천해, 백무, 손영식 등
1922년 12월 오사카 조선노동동맹회 김약수(金若水), 김종범(金鍾範) 등
1924년 재인 조선인 노동운동의 통일 제창 이헌, 김상철(金相哲), 송장복(宋章福)
1925년 2월 22일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1929년 12월 해체 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합류
1930년 1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내에 「조선인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노동자〉라는 기관지를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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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04.25 |
흑기연맹(黑旗聯盟)의 서천순(徐千淳) 외 7명,서울에서 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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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계에 의한 일본노동조합평의회(日本??組合評議?) 약칭 평의회 설립. |
19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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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07 |
함흥정진청년회(咸興正進靑年會)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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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09 |
진우연맹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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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 처형. |
1925.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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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01.04 |
허무당 선언서 배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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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01.16 |
조선인신신회(朝鮮人新進會)결성. 오사카에서 김태엽(金泰燁), 고제균(高濟均), 윤혁제(尹革濟) 등을 중심으로 오사카 지역의 재일한인들의 주거권 확보와 해고 방지문제, 직업소개 등 생존권과 관련한 여러 현안들을 해결하고 민족운동 전개에 앞장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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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지방의 17개 아나키스트 단체와 노동조합 유지에 의한「흑색청년연맹(?色?.連盟)」(약칭흑련<黑連>)결성. |
1926.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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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청년연맹(흑련)의 긴자(銀座)사건. |
1926.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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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3.20
~ 4월 |
『자아성(自我聲)』 김태엽(金泰燁)이 오사카에서 자아성사(自我聲社)를 설립해 발간. 김태엽이 편집, 발행, 인쇄를 맡았으며, 동인으로는 김돌파(金突波=김태엽), 이춘식(李春植)이 있었다. 2호까지 나왔으며「CHIGASEI」라고 표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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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5 |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에게 사형 판결. 이후 무기로 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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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7 |
흑색청년연맹 후원 하에 「조선문제연구회」개최.
참가자는 500여명이었으며 주연사로는 이와사사쿠타로, 곤도켄지(近藤憲二), 핫타슈조(八太舟三). 이외에 타케료지(武良二), 히라노 쇼켄(平野小劍), 모치즈키 카쓰라(望月桂) 등도 참가. 내용은 조선문제의 해결은 정치적, 교육적, 종교적으로는 절대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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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全國??組合自由連合?)」(약칭 전국자련) 결성. 참가 조합은 4연합회 23조합에, 홋카이도 지방 2조합을 합쳐서 계 25조합, 15,000여명의 조합원. 기관지로 월간『자유연합』 (편집, 발행인 오쓰카 테이자부로<大塚貞三郞>)을발행.
조선자유노동자조합(朝鮮自由勞動者組合) 참가. |
1926.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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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名古屋), 기후(岐阜)에서 「중부흑색청년연맹(中部?色?年連盟)」결성, 이후 홋카이도(北海道), 도호쿠(東北), 조선, 중국, 등 각지에서 흑련(?連) 결성. |
192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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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7 |
진우연맹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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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도치기(?木) 형무소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1903년생) |
1926.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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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의 아나?볼 대립
아오노스게요시(?野季吉)가 『문예전선』 1926년 9월호에 「자연 성장과 목적의식(自然生長と目的意識)」을 발표. 이를 계기로 문학에서의 아나?볼 공동전선은 파멸, 이윽고 대립으로 향한다. |
19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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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1 |
흑색전선연맹 조직 (원심창, 장상중, 육홍균, 이홍근, 정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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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2.12 |
박열의 불령사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불령사 재건(장상중, 원심창, 이홍근, 박망, 차고동, 박희순 등)
기관지로 『흑우』를 2호까지 발간. 이듬해 27년 10월 탄압을 피하기 위해 불령사를 흑풍회로 개칭하고『흑우』는『자유사회』로 개)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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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0 |
불령사를 흑풍회로 개칭하고 기관지『흑우』는『자유사회』로 개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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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2-
1935.11월경 |
조선자유노동자조합(朝鮮自由勞動者組合) 조직:
재일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재일본조선노동조합총연맹’(약칭 재일노총)을 결성해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옹호와 민족운동을 전개하자, 장상중(張祥重)과 오우영(吳宇泳) 등 흑풍회(흑우회 후신)의 한인아나키스트들은 이에 대응할 목적으로 결성. 강동부(江東部), 야마테부(山手部),지부를 두었다. 그리고 조선자유노동조합의 주도 하에 에바라 조선일반노동자조합(荏原朝鮮一般勞動者組合)과 오키조선일반노동조합(大岐朝鮮一般勞動組合)등이 결성되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의 전국적 노동단체인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全國??組合自由連合?)」(약칭전국자련)에 가맹했으며, 일본인 아나키스트 핫타 슈조, 니 이타루, 모치즈키 카쓰라 등이 좌담회와 강연회에 참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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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해방』 창간. 『문예전선』에서 분리해 온 아나카스트 문인들에 의한 월간지로 그해 12월까지 총 11호 발간. |
19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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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2 |
도쿄조선인단체협의회 구성 1925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결성 이후 전개된 3.1기념투쟁, 국치일투쟁, 관동(關東)진재조선인학살추도회 등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성과를 더욱 더 활발히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결성
상애회를 제외한 민족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계열의 연합으로 구성.
총 26개 단체 참여: 공산계: 재일 노총을 비롯 11개 단체. 민족주의는 학우회 등 9개 단체.
아나계는 흑풍회, 조선자유노동자조합 야마테부와 강동부, 조선인 배달인조합, 조선동흥노동동맹, 오기조선인일반인노동조합 등6개 단체 참여. 하지만 운영을 둘러싸고 공산계와 대립, 결국 동년 12월 아나계 탈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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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3 |
조선에서의 문학의 아나?볼 논쟁: 김화산이 아나키즘 입장에서 발표한 〈계급예술론의 신전개〉(조선문단,1927.3)를 통해 본격적인 아나?볼 대립이 시작. 원래 다다이스트였던 김화산이 이 시기에 이르러 아나키즘을 주장하는데 이는 일본에서의 아나볼 논쟁과 동향과 추이에 편승한 혐의가 있으며, 이후의 진행 과정 역시 일본에서의 아나?볼 논쟁을 약간의 시차를 두고 그대로 재연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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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4. 1 |
본능아연맹을 결성(원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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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6.11 |
흑전사(黑戰社,일성단) 조직(평남 용강)
주로 도쿄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김호구(金豪九), 오병현(吳秉鉉), 김유조(金裕祚), 이학의(李鶴儀), 김양복(金養福), 송주식(宋柱軾), 장명학(張命學), 박유성(朴有成) 등이 국내에 들어와 농민의 의식화 운동을 적극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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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사 내의 아나키스트 조직인 「전국수평사해방연맹」을 결성. |
19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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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8.8 |
자유회 조직(강원도 이천) 아나키스트 운동의 대중적 실천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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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9.8 |
노동자 자유동맹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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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9.10 |
관동동흥노동조합 조직 최낙종, 최상렬 등 위생인부들이 중심으로, 원심창, 이홍근, 장상중 등이 선전대를 조직해 조선노동자들의 합숙소를 순방하면서 『흑우』를 개재한 『자유사회』를 배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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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자련(全?自連) 제2대회. 도쿄 아사쿠사 혼간지(本願寺) 내 서측 별원 신코(心光)회관. |
1927.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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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2.22 |
관서동우회(關西同友會) 1년 후에 관서흑우회로 개칭 조직. (평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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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01.15 |
「흑우연맹 결성.
신간회 결성에 반발해 원심창, 장상중(張祥重), 한하연(韓河然), 이시우(李時雨), 하경상(河璟尙) 등을 중심으로 반공산주의의 기치 아래 결성. 그 과정으로는
1921년 흑도회를 기점으로 해서 1923년 풍뢰회⇒흑우회,
1926년⇒흑색청년연맹⇒불령사(不逞社)⇒흑풍회(黑風會)로 이어지다가 이에 이르러 흑우연맹으로 개칭한 것이다.
기관지『호조운동(互助運動)』을 발행.
<주요 활동>
○1928년 2월 친일 노동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 충돌했으며, 같은 해 6월 신간회도쿄 지회 사무소를 습격했고,
○8월 한하연이 친일융화단체인 대동협회(大同協會)를 습격.
○1929년 5월에는 메이데이 시위를 주최하여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과 공동으로 〈흑기(黑旗)아래 참여하라〉는 책자를 인쇄· 살포하면서 약 300명이 흑기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다가 다수가 체포되었다.
○1930년 8월1일 이문열(李汶烈)을 기관지 발행 책임자로 선정하고 홍승우(洪承祐)와 협력해 8월1일 『흑색신문(黑色新聞)』 창간호를 발간했으나, 투쟁적인 내용으로 압수, 창간 이후 계속된 압수와 재발행의 저항 속에 1935년 5월 폐간했다.
또한 『흑색신문』만으로는 선전수단이 중단될 우려가 있어
○홍성환(洪性煥)과 한하연은 1932년 자유코뮨사를 창립하고 〈자유코뮨〉을 발행.
○1933년 4월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전국자련대회(日本全國自聯大會)에 참가했으며, 5월 메이데이 행사에서 제기된 반(反)파쇼, 반실업, 반제(反帝)의 삼반투쟁(三反鬪爭)에 적극적으로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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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 |
흑우연맹에서 원심창, 장상중, 오치섭 등이 중심이 되어 호조운동(互助運動)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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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5 |
「조선자유예술연맹」을 조직. 기관지로 1930년 2월 10일 예산의 문예광사에서 『문예광(文藝狂)』을 발간. 이는 한국에서 공산계열에 대항해 아나계 문인들의 첫 번째 모임이자 기관지로 권구현, 이향, 이홍근이 중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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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31 |
홍영우(洪泳祐)를 중심으로 도쿄에서 자유청년연맹 결성. 기관지로 『자유청년』을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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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2.4 19시 |
평양 기림리 최갑룡의 집에서 관서흑우회 제1회 정기월례회를 개최. 관서흑우회는 이외에도 「농촌운동사」, 「자유소년회」, 「사회생리학연구회」 등의 간판을 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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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2 |
흑우연맹과 상애회(相愛會)와 충돌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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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 작가 와타 큐타로(和田久太?) 옥중 자살. |
1928.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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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3.11 |
문학에서의 아나.?볼 대립.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성명 발표문 「금후의 예술운동」을 통해 아나계의 「조선자유예술연맹」활동을 기존의 <카프>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프로문학운동을 교란 시키는 활동으로 여겨 이에 대해 축출을 결의. 이를 통해 아나 볼의 본격적이 대립과 결별이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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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3월 |
흑전사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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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8일까지 전국자련(全?自連)이 아나키즘파와 생디칼리즘파 강령 개정을 둘러싸고 분열.
[아나키즘계]전국자련, 조선동흥노동동맹, 농촌문제연구소 ,아나키즘연구회, 민중의 해방사, 난카이(南海)자유인사.
[아나르코생디칼리즘계] 일본자협, 오시마공동사(大島共?社), 제2북부소비조합, 네리마(練馬)소비조합, 흑기사, 공학사(共學社)외,
(『문학통신』제1호) |
1928. 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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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5 |
상해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共産主義者聯盟)을 결성. 이 단체는 4년 전에 폐간된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복간하는 의미에서 그 해 6월 1일자로 『탈환(奪還)』을 발간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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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6 |
흑우연맹 신간회 동경지회 사무소 습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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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7 |
1928년 4월 중국 톈진(天津)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
동년 7월 한국, 중국, 필리핀, 일본, 대만, 안남(安南) 등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이 난징에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 서기국 위원으로 이정규(李丁奎), 모일파(毛一派), 왕수인(汪樹仁) 등을 선출하였는데, 이는 톈진에서 조직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확대조직이다. 일본인으로는 사노 이치로(佐野一朗)와 야타베 유지(矢田部勇司)가 참여했다. 기관지로는 8월에 『동방(東方)』발간했으며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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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8 |
흑우연맹의 한하연이 친일융화단체인 대동협회(大同協會)를 습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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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2.18 |
충주의 「문예운동사」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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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경제공황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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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3.25 |
조선동흥노동동맹에서 『해방운동(解放運動)』발간. 조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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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4.22 |
단천흑우회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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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노동조합자유연합협의회」(약칭 일본자협<日本自協>내지는 자협<自協>) 발족.
이로서 아나계 노동조합은 「자련」과 「자협」으로 분열 |
19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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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8.5 |
관서흑우회 임시총회(평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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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1.11 |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을 결성.
1929년 평양에서 개최하려다가 실패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의 후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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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산시로「디나미크(dynamique)」 창간. |
192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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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2.30 |
극동노동조합결성
조선자유노동자조합사무소에서 결성되었으며 재일본 한국인아나키스트의 연합을 도모하고 항상 조선자유노동자조합과 동일한 행동을 취하였으며 ,사무실까지 같이 사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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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2.10 |
『문예광(文藝狂)』발간. 이는 충남 예산의 문예광사에서 발간한 아나계 문학잡지로 김화산(방준경)과 이향이 중심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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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4.20 |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결성.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상해로 철수하여 전투체제로 개편한 단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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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5.14~ |
흑기노동자연맹(黑旗勞動者聯盟), 흑색노동자연맹을 결성. 정찬진, 이성훈 등이 재일 한국인 노동자들을 결집해 공산주의와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편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 투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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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5. 30 |
신흥청년연맹(단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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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8.1~
1936.5.6 |
『흑색신문』창간: 흑우연맹 회원들이 노동단체인 「동흥노동동맹」과 「자유청년연맹」과의 협력으로 발간한 월간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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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07.31 |
안주흑우회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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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7 |
김좌진 추도회 및 강연회 개최.(원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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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청년사」결성 모임 |
193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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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5.1 |
『자유논전(自由論戰)』발행. 이는 장상중의 개인적 아나키즘선 전지로 1000부 발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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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발발 193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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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메이데이에서 자련과 자협의 공동투쟁.
(5?15 사건) |
19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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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협계 기관지「흑기 아래로(?旗の下に)」창간. |
1932.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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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1.11~1932.12.6 |
아나키스트 시인 전한촌(全寒村 일명 전춘섭) 크로포트킨의 『법률과 강권』 500부 발행.
하지만 1932년 12월 6일 발행금지 처분을 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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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2.20 |
잡지『자유코뮨』 발행. 흑우연맹의 홍성환(洪性煥)과 한하연은1932년 자유코뮨사를 창립하고 〈자유코뮨〉을 발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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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2.16 |
『시바우라(芝浦) 노동자뉴스』발간. 조선동흥노동동맹지부(芝部)에서『흑색신문』과는 별도의 선전지 『시바우라(芝浦)노동자뉴스』를
발행. 이 를통해 아나키즘 선전에 노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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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1933.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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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3.17 |
백정기(白貞基),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등이 주중 일본대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에 대한 암살미수. 일명 육삼정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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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파로 갈려져 있었던 아나키즘 작가, 시인, 평론가 등의 문화운동그룹이 「해방문화연맹(解放文化連盟)」을 결성. |
19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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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9 |
전춘섭(全春燮)이 아나계 문예잡지를 발행하기 위해 토민사(土民社)를 창립하고 『토민(土民)』을 창간. 9월 12일부터 이듬해 6월 5일까지 7호를 냈지만 「내용과격」으로 매호 발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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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조직. |
193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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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全國??組合自由連合?)」(자련)과「일본노동조합자유연합협의회」(자협)의 합동. |
19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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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21 |
조선자유노동자조합(朝鮮自由勞動者組合)과 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이 합동해 조선일반노동조합(朝鮮一般勞?組合)으로 통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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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자 연맹」에서「무정부공산당」으로 개칭 결성. |
1934.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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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자련)와 일본노동조합자유연합협의회(자협)의 합동대회 |
1934.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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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7 |
전춘섭(全春燮)이 시집 『무궤열차(無軌列車)』를 간행, 곧바로 발금처분과 함께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 30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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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1.1 |
도쿄조선민보(東京朝鮮民報)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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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1 |
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이 조선자유노동자조합(朝鮮自由勞動者組合)과의 합동을 통해 1934년 1월 21일 임시총회를 열고조선일반노동조합(朝鮮一般勞?組合)으로 통합되자 일부가 조선노동자합동조합으로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했다. 이듬해 7월『조선노동자합동조합뉴우스』를 5호까지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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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청년사(農村?年社) 전국에서 350명 검거. |
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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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3.2 |
『조선동흥노동뉴스』발간. 조선동흥노동본부에서 정찬진과 홍성환이 발행, 편집, 인쇄를 담당. 제1호를 신고하지 않고 발행·반포했으며 과격한 기사로 인해 발행금지 처분을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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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메이데이, 전쟁 전 마지막 메이데이로 여기에 자유연합파에서 약 300명 참가. |
193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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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6.14 |
오사카의 민중시보사에서 이신형(李信珩), 김문준(金文準)이 중심이되어 『민중시보』 발간. 한국어 반월간으로 27호까지 발간했으며1936년1월1일 폐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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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공산당사건발생. |
1935.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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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청년사사건 |
1935.1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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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당사건과 농청사사건의 충격으로 겨우 숨쉬고 있었던 아나키스트 단체는 무참히 뭉개지고 아나키즘운동 전반 역시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우선 자련의 중핵이었던 도쿄인쇄공조합이 해산. 이어 합동에 앞장섰던 해방문화연맹도 해산. 이듬해인 1936년 초에는 아나키즘 운동의 최후 거점이었던 자련도 결국 해산. 더구나 그 해산이 해산성명이나 명확한 수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소멸의 형태를 취했다는 사실이, 극심한 탄압과 아나키즘 진영의 냉혹한 후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해서 1932년 경부터 싹튼 아나키즘 운동 재건의 기회는 무정부공산당사건과 그것에 뒤이은 가차 없는 탄압 속에서 또 다시 뭉개져 버리고 말았다. 노동운동을 바르게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단숨에 혁명운동으로 돌진하려했던 오진은 지금까지도 아나키스트가 되풀이해서 발을 들여놓는 함정이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노동운동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뿐만이 아니라 아나키즘과도 관계없는 사건을 연이어 일으킨 것, 그로인해 당초의 의도가 일반인이나 아나키스트들이 고려할 여지도 없이 아나키즘 운동 전체가 노동자와 대중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겨진 상태에서 종언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 거기에 일본의 전전 아나키즘 운동의 마지막 비극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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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1 |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유기석, 유자명, 정해리, 이경손, 심규백 등이『남화통신(南華通訊)』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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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사건 |
1936.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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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공에 의해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의 깃발을 내건 도쿄인쇄공조합 재건
그러나 2.26사건과 중?일전쟁으로 반동화가 더한층 진행되는 속에서의 결성과 재건이었으며, 더구나 겨우 십 수 명의 동지적 결합으로는 조합으로서의, 또는 아나키스트 단체로서의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해도 좋았다. 대외적으로는 1937년 2월에 전국평의회계의 도쿄출판노조(다카쓰세이도,다카노미노루<高野實>등)와 「전시(全市)인쇄공생활옹호동맹」을 결성한 것이 주목받은 정도였다. 그리고 2년간 존속한 후 거의 모든 조합이 소멸하거나 산보(産報)조직으로 해체되었으며 1938년에 아나키즘계 최후의 조합인 도쿄인쇄공조합에 몰린다. 후에 후루카와 케이, 후루카와 신, 와타비키 쿠니노부 등 인쇄공에 의한 공제단체와 같은 「상호회(相互會)」와, 일부가 스페인 혁명에 의용군으로 뛰어들려 했던 기도가 있었을 뿐 도쿄인쇄공조합을 마지막으로 전전의 조직적인 아나키즘 운동은 기나긴 잠 속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
1936.8-9
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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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교사건 중일전쟁 돌입 1937. 7) |
1937.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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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0 |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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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31 |
흑기노동자연맹(黑旗勞動者聯盟) 해체. 이를 마지막으로 일본에서의 한국인 아나키스트 단체는 완전히 해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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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해를 마지막으로 전전(戰前) 일본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은 조직적인 틀을 갖춘 것으로는 종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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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次世界大? 발발 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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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6 |
건달회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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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전후 일본의 아나키즘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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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청년동맹결성 |
194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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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200 여명이 참가해 도쿄 시바(芝)의 일본 적십자사 강당에서 「일본아나키스트연맹」(전국위원장 이와사사쿠타로(岩佐作太?), 서기장은 곤도 켄지(近藤憲二) ,이사카와 산시로(石川三四?) ) 하지만 아나키즘의 계몽 이외에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이 1970년 전후에 해산. 후계 조직으로 맥사(?社)가 설립되어 1960년대 전후의 전공투 활동에 촉발되어 학생조직으로 자유사회주의평의회(CSL)를 형성. |
1946.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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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아나키스트연맹의 전후판 기관지인 주간 3차「평민신문」 발행. |
1946.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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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연맹 주최 오스기 사카에 기념 강연회 개최. |
1946.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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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자치동맹결성.「아나키즘에 대한 회의와 아나키즘의 수정을 의도」(『평민신문』10.11 합병호 ,46년 12월 25일) 하는 일부가, 「공산당과의 공동투쟁과 폭력투쟁방법 포기」를 호소하며 연맹을 탈퇴해 결성. |
1946.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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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아나키스트연맹의 분열. |
195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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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르코생디칼리즘파는 「아나키스트연맹」을 결성. (1955년에「일본아나키스트연맹」으로 개칭) 68년 11월 해산. |
19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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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아나키즘파「아나키스트클럽」을 결성. |
19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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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투 운동 중 일대전공투예술학부투쟁위원회(日大全共?芸術?部??委員?).
○간사이 지역의 아나키스트는 소조직, 소그룹의 경향을 이탈해 아나키스트 혁명연합(ARF, 아나혁련), “아나키스트, 분트”
○간사이의 주요 대학의 아나키스트 연합의 조직과 지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아나키즘 경향이 있는 조직으로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연속 기업 폭파 사건.
○치사카 쿄지(千坂恭二), 작가 이시카와 준(石川淳), 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 배우 아마 모토 히데요(天本英世),
영화 평론가로 『영화 비평』 편집장인 마츠다 마사오(松田政男).
이와함께 사토 마사루(佐藤優)와 후쿠다 카즈야(福田和也) 역시 아나키즘을 언급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1999년 시애틀 국제회의 이후 반세계화. |
1968년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