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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 선생전
단기 4296년 5월 10일 인쇄
단기 4296년 5월 20일 발행
저자 겸 발행인 이을규 李乙奎
인쇄처 한흥인쇄소
비매품
이 글은 1963년 위와 같이 발간되었으나 그 후 절판이 되어 이 글을 읽기 원하는 분들을 위해 사단 법인 국민문화연구소에서 재작성한 것 입니다. 저자의 원문을 거의 그대로 옮겼으나 한자는 한글로 바 꾸고 인명이나 지명, 그리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처음 한 번은 한자를 병기倂記하였습니다.
시야 김종진 선생전 차례
머리말 …… 3
1. 선생의 소년시대…… 4
2. 기미독립운동과 봉천·북경으로의 망명 …… 4
3. 운남군관학교에 유학 …… 10
4. 군관학교 졸업과 상해로 귀환 …… 13
5. 입만入滿할 동지 규합 행각 …… 16
6. 우당 선생 방문과 사상 전환 및 북만행 …… 20
7.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계획 입안 …… 24
8. 각 지방 실정 조사 여행 …… 30
9. 신민부 개편을 전제한 사상 조정 …… 36
10.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 …… 39
11. 신민부 개편과 한족총연합회 결성 및 그 사업 …… 41
12. 한족총연합회의 발전과 좌익과의 충돌 및 백야 장군 조난 …… 45
13. 무정부주의자 대표회의 및 북만으로 동지 집결 …… 48
14. 한족총연합회의 내부 정돈과 선생의 조난 …… 52
곡哭 시야 동지 …… 55
비명碑銘 …… 56
머리말
재작년 겨울에 고 시야 김종진 동지의 유고遺孤 성한成漢 군이 내방하여 신축辛丑년 즉 단기 4294년 12월 26일이 자기 선고先考의 회갑일임을 고하고 그날을 기념하는 일을 여余에게 상의하여 왔다. 즉 자기 선고의 유품을 가지고 허장건비虛葬建碑하며 선친의 소전小傳을 간행하려는 것이었다.
성한 군은 4세의 유아로 어버이를 여의었으니 그의 영상은 기억에 아련할 뿐 그의 역사는 더구나 알 리가 없다. 그저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고 30 전후로는 무정부주의자로서 활약하다가 최후에 공산 적마赤魔의 손에 피살되었다는 정도의 지식이다.
어렸을 때에 부모의 애육愛育을 받고 자라서 부모를 효양孝養하는 것이 사람 생활의 떳떳한 상도常道이건만 이 불행 불효의 성한은 어버이를 똑똑히 뵙지도 못하였으니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바칠 기회가 어디에 있으며, 유해조차도 찾지 못하였으니 묘소가 없고 묘소가 없으니 남과 같이 성묘의 예까지도 행할 복이 없다고 오열 호소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이요 자식 된 자의 뼈에 사무친 당연한 한일 것이니 고인의 살아남은 한 동지로서 스스로 등에 찬 땀이 흐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빈한한 생활에서 얼마 되지 않은 봉급을 분분分分 절약하여 제반 비용을 마련하여 놓았으나 선친의 옛날 동지로는 70 고령의 노인이 두세 분 계실 뿐이라고 이 문제를 여에게 부탁하여 자기 선고의 일대기를 집필하여 달라는 데에는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국운이 기울어진 이래 수많은 의인 열사가 나왔지만 시부시자是父是子의 칭예稱譽를 받을 자손을 가진 자 몇이나 될 것인가. 시야는 사유복死猶福이라고 머리 숙여 합장하였다.
이러한 성한 군의 지극한 효와 성에 감동되어 졸문열필拙文劣筆임을 무릅쓰고 감히 집필할 것을 쾌락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붓을 드니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실의 상세詳細도 문제려니와 연대의 정확을 그의 일대에 걸쳐 기필期必하기란 지난至難한 일이다. 그래서 고인의 유족들을 비롯하여 고인과 관련이 있던 인사들을 찾아 가능한 범위에서 필자의 모르는 사실과 미세한 연대를 고증하기 연여年餘의 세월을 소비하여 이 소전의 끝을 맺었으나 권卷을 이루고 보니 소루疏漏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마치 완전한 그릇에 흠집을 내놓은 듯 고인에게 죄송함은 물론 유족과 동지 여러분에게 미안함을 스스로 느끼었다. 오직 이 소전이 발표된 후에 다방면의 인사들과 재세在世하신 여러 동지들의 손으로 보철補綴 수정되었으면 행심幸甚한 일이라고 빌고 바랄 뿐이다.
단기 4296년
저자 씀
김종진 선생 소전小傳
1. 선생의 소년시대
김종진 선생의 아호는 시야是也라고 일컬었다. 이조李朝 절사신節死臣 안동후인安東后人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제11대손이요 참봉參奉 영규泳圭 씨의 제4자로 단기 4234년 음12월 26일에 충남 홍성군洪城郡 구항면龜項面 내현리內峴里에서 탄생하니 모친은 청송靑松 심沈 씨요 10세 때에 재당숙 학규學圭 씨에게 출계出繼하니 양모는 은진恩津 송宋 씨다. 선생은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며 그 형형炯炯한 안광은 사람을 위압하는 듯 그의 강인한 의지와 고매한 성격을 상징하였다. 이러한 천부의 자질을 가진 선생에게는 선원仙源 이래 계승되는 입절사의立節死義하는 올매운 피가 맥맥히 흘러있으며,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듯이 지방적으로 한말 항일 의병의 호서湖西 본거지로 이름 높은 홍성에서 생장하였으니 김복한金福漢, 이설李? 등 의열들의 항일정신에 감화된 바도 컸었다. 이러한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선생이 민족과 사회, 그리고 인류를 위하여 살신성인할 각오를 가지고 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선생은 8세 때에 서당에 입학하여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홍성에도 소학이라고 공립 보통학교가 있었으나 배일사상에서 물론 보통학교에는 입학치 않았던 것이다. 선생은 총명한 재질의 소유자로 그의 한문 실력은 일취월장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신시대의 지식에 대한 갈망의 도度도 높아가서 틈만 있으면 그때의 그 불충분한 참고서를 가지고 탐독 자수自修하였다. 그러하기 수년 사이에 한문은 사서四書를 읽었고 수리數理와 지력地歷의 지식도 상당한 진보를 보였다. 이와 같이 신체와 학식이 괄목하게 성장됨으로 인근에서 소년노성小年老成이라는 칭예稱譽까지 받게 되어 나이 13세 되는 단기 4246년 봄에 남양南陽 홍순극洪淳棘 씨의 2녀 종표宗杓 소저와 결혼하게 되니 소저의 나이는 16세였다.
당시는 일제의 철체鐵諦에 짓밟힌 직후인지라 헌병정치 밑에서 총검의 행패는 도시보다도 향촌에서 더욱 심하였으니 선생의 불패발랄不覇潑剌한 정신은 자연히 의분에 넘치는 항일정신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분통 억울한 꼴을 목도할 때마다 비록 어린 때이지만 떨리는 주먹을 몇 번이고 불끈 쥐었으며 빨리 성장하여서 이 한과 분을 풀며 이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에 아로 새겼다. 이리하여 선생의 항일독립의 정신과 기백氣魄은 날이 갈수록 철석같이 굳어만 갔던 것이다.
2. 기미운동과 봉천, 북경으로의 망명
그러한 원한의 세월은 흘러서 선생의 나이 18세인 기미년을 맞았다. 때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개조의 대기운大氣運에 발을 맞추어 약소민족들의 민족자결 자주독립의 운동이 한창 일어날 무렵이었다. 일제 10년의 질곡에서 벗어나 민족자결 원칙 아래 우리도 자주독립을 기하고자 마침내 3월 1일을 기하여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과 무저항 비폭력의 행동 준칙으로서 공약 3장이 발표되었다.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이 인류의 소리요 민족의 절규는 기미 3월 7일 홍성에서도 울려 나왔다. 선생은 홍성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백의민족의 원한을 풀 때는 왔다. 남녀노유는 다 같이 일어나라.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고 군중의 선도에서 선동 지휘하였다. 이로 인하여 현장에서 주동자로 일경에 피검되어 수삭數朔을 옥중에서 고초를 겪다가 동년 6월 말에 미성년이라 하여서 석방되었다. 선생은 내현리 본가에서 옥고를 풀 겨를도 없이 기허幾許의 노비路費를 마련하여 귀가한 지 수일 후에 급급急急히 집을 떠나 상경하고 말았다. 이것은 옥중에서의 체험과 견문으로 결심한 바로서 오직 자기희생의 결사투쟁을 위하여서였다. 즉 현대적인 지식과 아울러 세계 대세에 대한 명확한 통찰력을 가지고 조직적인 부단한 투쟁을 함으로써만 우리의 독립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까닭에 일시가 급하게 서둘렀던 것이다. 지식을 널리 구하며 동시에 조직적인 운동을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둘러서 떠난 이 이향離鄕의 걸음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걸음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선생은 상경 즉시로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였다. 물론 정상적인 공부에 보다는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선생의 진학은 자신의 영귀榮貴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서이며 따라서 독립운동자로서의 자질을 기르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까닭에 입학과 동시에 교내외의 교우관계를 넓히기에 전력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는 전 국민이 자주독립의 의욕에 불타고 왜적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어 있던 때니만큼 그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학생들의 끓어오르는 의분과 항일독립의 드높은 기백은 가위 충천의 기세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얼마 안 되는 시일에 시내 각 학교에 연락망을 폈으며 그것이 곧 운동의 조직망으로 화하여져서 비밀연락, 비밀출판, 비밀회의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본래 당시의 각 학교는 독립운동자들의 소굴이 되고 연락기관이 되어있던 판이라 왜경의 감시의 눈은 학교와 학생들의 배후에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것은 물론이다. 매일같이 모 학교의 모某가 잡혀가고 모 학교가 수색을 당하였다는 등 소식이 전하여졌으며 그런 통보를 받을 때마다 운동자들은 누구나 마음을 죄며 주변을 조심하면서 문서 보따리를 싸들고 조석으로 거소를 옮기는 것이 그들의 생태였으니 선생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수많은 연락관계에서 선생의 성명이 자주 드러나고 관계자들에게서 관련된 사건의 내용이 드러나니 선생을 추적하는 적의 수색대의 독수는 점점 신변을 위협하였다. 선생이 전전하던 시내의 친척의 집과 친지의 집은 차례로 수색을 당하였으며 적의 감시망은 점점 퍼져 나갔다. 할 수 없이 근교 산곡山谷 간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였으며 깊은 밤에 모르는 농가를 찾아서 야노野老에게 일야숙一夜宿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전전 피신하는 것도 일시적인 것이지 오래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마침 선생의 백씨인 연진淵鎭 씨가 북만北滿으로부터 봉천에 잠입하여 국내외와 연락책임을 맡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선생은 봉천으로 탈출할 것을 꾀하였다. 적의 엄중한 수색망 속에서 일체의 활동은 중지되고 전전도피轉轉逃避에 전 신경을 경주할 바에야 내형乃兄과 같이 만주에서 활동하는 것이 효과적이 아니냐 하는 데서 국외 탈출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단기 4253년 4월에 서울을 탈출 입만入滿하여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씨의 백씨인 이석영李錫榮 옹 댁에다 근거를 두고 만주 상해 및 국내와의 연락을 하는 연진 씨를 봉천 교외에서 만났다. 생후 처음의 외국이요 또 오랜 도피 끝에 탈출한 망명 행각이라 심신의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형제 일실一室에서 순여旬餘를 두고 피로를 풀었다. 그 후 선생은 백씨의 일을 방조幇助하면서 해외 각지의 우리 교포들의 사정을 공부하다시피 조사하던 때에 북만에서 내방한 연진 씨의 동지인 홍경식洪景植으로부터 북만北滿 방면과 노령露領 등지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독립군들의 충천한 의기와 그 무기 준비에 급급한 현황, 따라서 재정적 빈곤상황 및 각지 운동단체들의 활동상황, 지방 교민들의 생활 실정들을 상세히 듣고 뛰는 피 불붙는 정열을 걷잡을 수 없었으나 모든 일은 계획적이어야 하겠다는 데서 냉정을 지켜 시세를 관찰하면서 활동계획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홍경식 씨로부터 자기의 이번 걸음은 국내로 무기를 반입하여 직접행동을 하러온 것이니 이 반입에 있어서 적극적인 협력을 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선생은 공동히 직접행동을 하자고 한다면 그 계획 여하를 깊이 검토하여서 응낙 여하를 정하였을 것이나 단지 운반에 협력하여 달라는 것인 까닭에 즉석에서 쾌락하고 운반 포장 및 역두까지의 반출에 협력하였는데 불행히 봉천奉天 역두에서 무기와 아울러 홍경식 씨가 일경에 수색 체포되니 홍 씨의 기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선생은 기민하게 그 현장을 도피하여 위기를 모면하기는 하였으나 체포된 홍 씨에게서 관계자의 전모가 드러나니 봉천 지방에서 선생은 몸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북만으로 갈까 상해上海 북경北京으로 갈까 망설이던 끝에 연진 씨의 의견에 따라서 북경으로 재망명하기를 결정하고 이석영 선생의 소개로 옹의 계씨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선생을 찾아 북경을 향해 떠나기로 하였다.
때는 단기 4253년 가을이었다. 황량한 만주의 가을, 쓸쓸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날 밤 삼경이었다. 몸에 익지 않은 중국옷으로 변장하고 심양瀋陽 역두 캄캄한 한구석에서 형제가 묵언의 악수로써 작별을 한 선생은 침침한 찻간에 몸을 싣고 적의 호구를 무사히 벗어나느냐 않느냐의 기로에 선 아슬아슬한 판이라 형제의 이 이별이 영결의 구슬픈 작별일 줄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기차는 드디어 봉천역을 지나고 황고둔皇姑屯역을 떠나니 선생은 천우天佑를 감사하면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인생행로의 스릴을 맛본 쾌감을 ‘추풍기혜秋風起兮여 역수한易水寒이로다. 장사일거혜壯士一去兮여 불복환不復還이로다.’ 하는 고인의협古人義俠의 시구詩句로 읊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길에는 산해관山海關, 천진天津 등의 난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차중에는 안봉선安奉線과 달라서 한인韓人이라고는 그림자도 없으니 밀정이 횡행하는 때지만 해롭지는 않으나 낯선 초행길에 어쩐지 고독, 불안, 초조가 말할 수 없이 스며드는 듯하였다. 이러한 불안초려不安焦慮의 일주야를 겪고서 북경 전문前門역(정양문正陽門역)에 내려 인력거를 잡아타고 서투른 몇 마디의 중국말로써 가까스로 우당 이회영 노老선생을 찾았다. 미지의 초대면이었으나 반갑고 아쉬운 나머지에 장지壯志를 품은 사나이의 눈도 앞이 흐려지더라는 것이다.
선생은 우당 선생의 소개로 각 방면의 인물들을 만났다. 지도자급 인사는 물론 수많은 청장년들도 만났다. 우리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북경에도 우리의 독립운동자들의 중심인물들이 당시에 다수 집결되어 있었으니만큼 선생은 우리 독립운동의 현황과 진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각 방면의 인사를 골고루 찾았던 것이다.
선생이 만난 인사 중에 주요한 분은 홍성 의병의 노장인 고광古狂 이천민李天民(세영世永)을 필두로 청사晴蓑 조성환曺成煥, 성암醒菴 이광李光, 해산海山 김국빈金國斌, 진산震山 한흥교韓興敎, 우성雩城 박용만朴容萬, 한세량韓世良 등 중노년층과 최용덕崔用德, 서왈보徐曰甫, 송호宋虎, 장자일張子一, 간송澗松 박숭병朴崇秉 등 청장년층들이었다.
수개월을 두고 이런 분들과 만나서 가지가지의 주장과 의견을 들으며 자기주장과 의견을 말하는 사이에 여러 가지 의문과 의혹이 생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개인적인 영웅심, 즉 지나친 공명심이라든지 또는 시대착오적인 양반의식, 봉건관념에서 솟아나는 차별의식이 때때로 그들의 언동에서 발휘될 때에, 그리고 그들의 우월감과 배타적인 태도를 볼 때 그의 성과 열로써는 그것이 의아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운동을 어떻게 하면 된다는 확고한 신념과 방안이 서있지 않은 것같이 느껴졌을 때 더욱 그러하였다. 선생으로서는 그들이 독립운동에 헌신분투하신 분들인 까닭에 그분들은 문자 그대로 살신성인 하실 오직 희생정신의 권화勸化이신 분들로 믿었으며 풍부한 경험과 경륜을 가지신 분으로 숭배하여왔기 때문에 그러한 점을 어느 분에게서 보았을 때는 특별한 자극을 받는 듯 의혹과 아울러 아연하였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선생은 자기의 경솔에서 또는 인식 착오에서가 아닌가 하고 반성하면서 고민도 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노선배인 우당 옹을 찾아 여러분을 만나서 그러한 불완전 불충분한 결함 있는 인간을 만전萬全한 사람으로 보고 왔다는 것이 과오일 뿐 아니라 또 인간이 본래가 완미完美 만전할 수 없는 존재인 까닭에 그런 신인神人같은 사람이라야만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일할 수 있다는 그런 견해는 시정해야 할 것이요 오직 스스로 자기의 부족과 결함을 반성 시정하는 노력이 있기만 한다면 그가 곧 한 운동자로서 촉망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선생은 더욱 우당 선생을 존경하고 조석으로 그를 찾아 국내외의 정세 변화를 듣고 우당 선생의 경험담도 듣게 되었다. 보재溥齋(이상설李相卨)와 더불어 한말에 항일 구국하려던 가지가지의 계획, 해아海牙밀사사건에 내시內寺를 중간에 놓고 고종 황제와 교섭하던 이면사, 합병 후 솔가率家하고 만주 서간도에 이민하여 둔전 양병하려던 계획, 무관 양성을 위한 신흥新興학교 창립 전말, 이민이 실패하자 자금 조달을 위하여 국내로 잠입하여가지고 귀족들과 궁중을 연락하던 끝에 고종 황제를 국외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의 대외적 활동을 꾀하고자 귀족 민영달閔泳達에게서 5만원의 운동비를 염출시켰다는 등의 우당 옹의 경력담인 동시에 우리 독립운동의 이면사를 들은 것도 이때였었다. 이러한 선배들의 경험담에서 선생은 다시금 독립운동의 성취라는 것이 한 민족의 운명을 건 문제이니만큼 지극히 어렵고 지극히 복잡다단한 과업이라는 것과 장시일을 두고, 아니 세기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의 정열적인 노력과 희생이 얽혀서 비로소 결실을 보는 운동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거듭 자계하고 결의를 새로이 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북경에 온 이래 비로소 적의 독수毒手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 그날그날을 보내게 되었으니 생각하면 기미 3월 이래 1년 유有 반半의 불안과 위험의 연속에서 해방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전지대에서의 생활도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서 새로운 초조와 불안이 감돌게 되었다. 이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반성에서 오는 내면적인 것이었다. 자기가 피난 온 신세가 아닌 바에야 안전지대라고 하여서 안일을 탐하는 것으로 능能을 삼을 수 있는가. 운동의 실천을 꾀하지 않고 입으로나 떠드는 것을 운동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쓸데없이 이역의 고생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양심적이 아니겠는가. 풍성학려風聲鶴?로 남도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유행에 따라 독립운동자를 가장한다는 것은 위선자의 타기할 행위가 아닌가. 인생은 짧고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안일만을 생각하고 귀중한 하루하루를 무위로 보낼 수가 있는가. 만주에서는 풍찬노숙을 하면서 봉옥동鳳玉洞에서, 청산리靑山里에서 수많은 청년 의열들이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혈투를 하지 않는가. 안전지대에서 긴장이 풀린 내 자신이 반역자요 배신자가 아닌가 하는 이러한 반성 자계로써 때로는 밤을 뜬눈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이런 깨끗한 정신 자기 자신을 매질하는 이 자성적 태도는 선생이 일생을 통하여 변함없이 일관하여 가진 생활태도였다.
이러한 고민 중 자기의 앞길을 결정하려는 시기에 외부로부터 전하여 들리는 소식은 그의 고민을 배가시켰다. 즉 상해, 북경 등지의 독립운동자들 사이에는 개인 중심의 파벌싸움과 소위 지방열적인 파벌 대립이 점차로 노골화 하여졌다는 것과 남북 만주의 그 가시밭 같은 고난의 절정에서도 원수 같은 패싸움으로 동족끼리 골육상잔하는 비극을 연출하였다는 비보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불행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꾸짖고 저주를 하면서도 이러한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닌가, 자신이 분개는 하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불순이 없는가, 또 그렇지 않을 훈련이 있고 수양이 있으며 경륜이 있고 포부가 있는가 하는 자탄과 세사世事에 대한 개탄을 거듭하면서 자기 진로를 모색하고 계획하는 이 어름에 그 해도 저물어서 세말歲末이 닥쳤다. 이판에 세모歲暮고 과세過歲니 하는 따위에 관심이 있으랴만 그래도 이역 수천 리의 절역絶域에서 해를 넘기게 되니 감개무량함은 비길 데가 없었다.
이즈음에 하루는 장자일이 서간도에서 왔다는 한 청년과 내방하였다. 우선 서간도 지방의 실정과 북간도의 청산리전투의 개황과 일부 분자들의 알력 혼란상을 들었다. 이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남북, 동서를 막론하고 우리 한인사회의 고질적인 증상이라 하였다. 게다가 노서아露西亞 혁명 세력을 배경삼아 고려공산당이 탄생하였으니 독립운동 진영 내에 사상적 파벌이 하나 더 늘게 되었다고 개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파벌적 대립이라는 것엔 무슨 필연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니 그들은 이것이 민족성의 결함에서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여기에 대해 선생은 만일 민족성의 결점으로 대립 알력 상잔의 패싸움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우리 민족은 멸망할 운명의 백성이란 말과 다름이 없는 말이니 그렇다면 민족 단결로써 독립을 성취하자는 말은 헛소리의 자기기만이며 자기부정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적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내부의 허점에 대해서도 싸워 이길 의지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자리에서 3인은 앞으로 우리 청년들은 어떠한 진로를 취할 것이냐 하는 화제를 중심으로 앞날의 활동 방침을 논의하였다.
이 문제에서 3인 사이의 의논이 양론으로 갈리었다. 즉 현재 세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유린당하고 있어서 현대 문화에서 뒤떨어져 있고 경제적으로 몰락되어가고 있는 정세 하에서 우리 독력으로 일제와 항쟁 독립한다는 것은 한 이상 밖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파쟁을 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한다는 것도 모두 다 이 뒤떨어져 있는 데서 원인이 된 것이니까 현실을 무시하지 말고 국제관계의 전환 기회를 외교적으로 이용하여서 독립을 쟁취하는 도리 밖에 없다. 체코나 파란波蘭이 그 좋은 예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 청년들은 그 사이에 공부에 전념하여서 후일에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일설이요, 또 하나는 물론 그런 이유를 내세울 수 있을는지 모르나 결국 독립의 쟁취라는 것은 타력 의존에서가 아닌 자력으로써 빼앗긴 자유를 찾는 것이니까 만일 자력으로써가 아니고 국제적 세력 관계에서라면 마치 청일전쟁 뒤에 우리 대한제국이 독립하였던 것과 같은 허수아비 독립이 아닌가. 그렇게 간어제초間於齊楚하여서 제 실력으로가 아니고 남의 틈에서 얻은 독립은 또 다른 그런 국제관계가 일어날 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독립을 다시 빼앗기는 법이니까 비록 세계적 대大세력을 가진 일본일지라도 우리는 실력으로 대결할 작전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 힘의 대결이라는 것은 곧 제국주의 일본의 군사력에 대항 할 수 있는 무력을 백여만의 교포가 살고 있는 남북만南北滿에서 기르는 수밖에 없으며 부족하더라도 이러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외교적으로 국제간의 형세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 청년들은 군사면의 훈련을 쌓으며 이 방면의 조직에 전력을 기울여야할 것이라는 것이 다른 하나의 설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 서로 열변을 토하였는데 선생은 그 후자의 편이었다. 이런 후 수일을 두고 이 문제에 대하여 잠심潛心 검토 연구 모색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4254년 신유辛酉 신춘을 맞이하여 선생은 확고한 자기의 단을 내리었다. 즉 한국 독립은 항일 무력대결을 제1 수단으로 하여야 할 것, 이 무력의 조직과 훈련은 만주 교포를 중심으로 할 것, 그러기 위하여는 중국 관민들과의 유대를 공사 간에 깊이 맺을 것 등 기본 노선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 방향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즉시 만주로 갈 것인가, 가는데 어떠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등을 결정하는 데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만주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서 여러 선배들과 청년 동배同輩들을 찾아 의견을 듣고 사정을 캐어 알아본 결과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즉 현재 만주에서 독립군이 청산리나 봉옥동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여서 왜적이 약한 것도 아니요 적의 전술 전략이나 용병작전보다 우리가 우세하였던 까닭이 아니라 우리는 지리에 익숙하고 막다른 골목에선 그야말로 배수의 진에 처해 있는데 반하여, 적은 대부대를 협애한 산지로 몰아넣으면서 우리를 무장비의 적수赤手인양 얕본 데에 적의 패인이 있는 것이니까 앞으로의 항쟁을 위하여는 적과 대결할 수 있는 군사적 학식과 훈련을 쌓은 유능한 지휘자가 있어야겠는데 재만 독립군 중에 그러한 지휘자가 얼마나 있는가, 또 현재로는 재정적으로 곤란을 극한 처지에서 상호대립 알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미래 만주의 한교韓僑는 궁핍한 농민들로서 국내에서 밀려나간 문화의 혜택에서 제외 되다시피 된 사람들인데 그들을 포섭하여 지휘 훈련해야할 입장에 있는 인사들이 상호 불화 반목에 영일寧日 없으니 이는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운동자들 전체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따라서 그들에게 불신을 받을 것이니 현재로서는 누가 만주엘 가든지 절대의 성심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교포사회에 발붙일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더욱이 앞으로 왜적의 대만對滿 간섭은 더욱 악랄惡辣을 극極할 것이며 중국 관헌들은 왜적에게서 위협과 농락을 받아 우리 운동자들에 대한 태도가 변하여질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모든 점을 고려할 때에 20대의 무명 청년으로서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더욱이 자기 개인의 생활조차 해결할 재간도 없이 만주로 간다는 것은 위국爲國 애족愛族의 순정뿐이지 운동을 위하여 하등의 보탬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궁핍한 재만 동포들을 괴롭히는 기생자寄生者를 하나 더 첨가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으며 자칫하면 파 싸움에 무지몰각한 일개 원병援兵 노릇밖에 되지 않을 위험도 다분히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만주로 가면 이미 쌓여진 토대가 있고 유능 유위한 인재가 많을 터이니 자기는 일병一兵 일졸 一卒로서 봉사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순진한 마음에서라기보다는 너무 세상모르는 안이한 판단에서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내 자신이 재만 교포들을 교육 훈련시킬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연후에 입만해야 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 수년간은 헛된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절대 불가결의 귀중한 준비 기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의견에 대체로 청장년층에서는 동의자들의 많았으나 장노년층에서는 반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운동의 중추가 되어야할 순진한 청년들이 이런 이유 저런 구실로 일선에서 후퇴하면 그동안은 운동을 중단하자는 것이냐, 그 공백은 누구보고 계속 담당하라는 것이냐, 결국 지나친 공리적 사고다 ? 라는 것이 장·노년층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한 단안을 내리기만하면 실행하고야마는 선생은 그 실행을 우당 선생과 상의한 결과 군사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으려면 결국 중국에서 기회를 만들어야 되는데 그것은 중국 요로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았는 예관?觀 신규식申圭植 선생, 성재 이시영 선생에게 소개하면서 “만일 여의하여 뜻대로 소원의 교육과 훈련을 받게 되거든 항상 자중 자계하여 정진할 것이며 군 자신이 개인이 아니라 외국인을 상대할 때 한 민족과 국가의 대표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3. 운남雲南군관학교에 유학
선생은 4254년 1월 말에 북경을 떠났다. 4, 5삭朔의 짧은 시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조급 초조한 나머지 지난하였던 북경을 떠나니 시원하기도 하였다. 진포선津浦線을 경유하여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휘황찬란한 현대 도시 상해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성재와 예관을 찾아서 자기의 포부와 사정을 말하고 앞길의 지도를 청하였다.
이 두 분은 수차 만나는 자리에서 청년들의 일선에서의 후퇴를 걱정하면서도 앞으로 닥쳐올 인재난에 대비하는 의미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마침내 운남성 독군督軍 당계요唐繼堯 씨에게 간곡한 친서로써 선생을 소개하여 주었다. 하필이면 선생을 왜 중국의 오지인 운남성 독군 당 씨에게 소개하게 되었을까? 그 경위는 때마침 당 씨에게서의 사자使者가 예관 선생을 찾아와서 당 씨의 친서를 전하면서 당 독군이 한국독립운동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만일 한국 청년들 중에서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휘하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도 북경 이래로 중국어를 공부하여왔지만 동서를 가릴 줄 모르는 중국어를 가지고 문자 그대로 해륙 만리의 운남행을 결행한 이유도 예관 선생의 지시대로 그 사자가 불일 출발 귀환할 것이니 언어도 불통인데 더욱이 초행이니 계제가 잘 되었다고 하는 바람에 안심하고서 만리장정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 행지行止의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나니 한편으로 시원도 하고 몽상도 하지 않던 미지의 지방 운남에 대한 호기심도 컸었다. 그 지방으로 가려면 그곳에 대한 예비적 지식을 가져야겠다고 생각되어 곧 중국어 교재와 운남 지방에 대한 참고서 수종數種을 구한 선생은 삼국지를 읽은 관계로 운남 귀주貴州가 남만南蠻 맹획猛獲의 근거지였다는 데서 공포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발勃은 삼척미명三尺微命이라 노출각구路出各區를 동자하지童子何知아’ 하던 중국 당대唐代 소년 문호 왕발王勃의 남유작객南遊作客하는 낭만도 자신이 맛보는 듯 황홀한 심경에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당 독군의 사자와의 소개 연락은 물론 예관 선생이 수고를 하여 주었고 그 사자를 따라 떠남에 있어서는 염치 불고하고 그에게 자신을 짐짝처럼 맡겼다. 그의 지시대로 말하자면 눈치껏 움직이는 괴뢰같이 행동하였다. 2월 말 석양이 비낀 상해 태고太古양행 부두에서 광동廣東행 선편에 올라탔다. 선생 일행의 행정行程은 안남安南국 해방海防항까지 선편으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전월?越철도편으로 하내河內를 경유하여 운남성 수부首府 곤명昆明까지 가는 것인데 그때에는 보통 객선으로는 상해 안남安南을 연락하는 정기 항로가 없기 때문에 향항香港이나 광동서 갈아타기로 하고 광동 가는 선편을 이용하였었다.
생후 처음 경험하는 외양外洋 항해요 동시에 장도長途 여행인데다가 반벙어리 신세이니 걱정도 되었으련만 젊은이들의 일이라 걱정보다는 신기스럽기만 하였다. 화물선이니만큼 복주福州 하문廈門 선두仙頭에 기항하여 향항까지에 18일이 걸렸으며 향항에서 신가파新嘉坡행 선편을 기다리느라고 5일간을 머무르는 사이가 지루하기는 하였지만 선생은 정상적인 교육의 예비지식으로 중국어를 충분히 습득해야 하였으므로 선중에서나 여관에서나 기회 있는 대로 그야말로 수불석권手不釋卷하고서 동행자인 당 독군의 부관에게 배우고 배운 것을 문답하여 익히고 하는 바람에 피차 여행의 무료無聊를 잊을 수가 있었다. 향항에서 갈아타고 해방에 내린 것은 3월 말일, 이곳은 벌써 여름이었다.
당 독군의 부관은 초행인 선생을 위해 해방에서 1일간 휴식하고 가자는 것이나 그의 출장 기간이 지나서 심려 중인 것을 선중에서 들어 알므로 선생은 지나친 누를 끼치지 않고자 곤명 행 기차로 즉시 갈아탈 것을 권고하여 주식晝食을 마치자마자 곧 떠났다. 이 선변線邊은 경봉京奉선이나 진포선에서 보는 중국 풍경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평야지대를 지나고 나서 운남 국경에 가까이 갈수록 험준한 산령과 계곡을 맴도는 선로 연변의 가지가지 풍물의 이취異趣라든지 웅장한 산악 계곡의 미는 참으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바가 있었으나 그런 것보다 가장 선생에게 자극과 흥분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은 불란서佛蘭西인들의 안남인은 물론 중국인들에 대한 모멸적인 차별대우였다. 본래 전월철도는 불국佛國과 중국의 합판合辦 경영이었다. 그러나 이 합판이라는 소위 합동은 명목상의 것이었고 실제는 불국인의 전권專權 경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안남인 승객은 원칙적으로 구미歐美인들과 차량을 달리 하였으며 일등 객차에는 같이 탄다 하여도 좌석을 달리하여 안남인들은 물론 중국인들과도 같이 앉지 않는다는 것이 법처럼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비록 일등객이라 하더라도 서양인 옆에 안남인이나 중국인이 자리 잡고 앉으면 그들은 당연한 권리인 양 딴 자리로 옮기라고 명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모르고 선생이 어떤 서양인 옆에 앉으려 하였더니 동행하는 부관이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그러한 사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내심으로 분개하면서 차내의 공기와 다른 찻간의 사정을 살펴보니 과연 그런 것을 추측하여 알 수 있었다. 뿐 아니라 안남인들의 간구艱苟한 모습, 강압에 비뚤어진 그 비굴한 자태를 볼 때에 동병상련하는 연민의 정이 떠올라 마치 일제의 총검 밑에서 허리를 못 펴고 지내는 우리 동포를 대하는 듯 비분의 격정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러한 비인도적이며 야수 같은 침략자들에게 정의와 인도를 호소하며 파리와 상해 불佛 조계지에서 우리 독립운동자들이 비호를 받고 협력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부관과 서로 필담을 섞어서 서투른 말로 한중 양국이 빨리 각성하고 협조 단결하여서 이들 침략자를 퇴치하자고 굳은 맹서를 하였던 것이다.
이런저런 모든 점에서 신기와 감격과 흥분과 비분의 2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곤명 역두에 하차한 것은 4월 2일 반야半夜였다.
부관의 친절한 안내로 여관에서 장도의 피로를 풀고 익조翌朝 독군부로 당 독군을 찾아서 예관의 친서를 전하였더니 동반 안내한 부관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며 무관학교장과 교도대장을 초치하여 선생을 소개하면서 인국隣國 혁명 청년이니 언어와 습성을 잘 모르는 형편이므로 모든 편의를 아끼지 말고 적극 선도하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슨 불편한 일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자기에게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지나친 친절과 은근한 배려에는 참으로 감사할 말이 없었다. 오직 각고면려刻苦勉勵하여 당 독군의 후배 지도에 대한 열성과 한국독립에 대한 의협과 인류애의 거룩한 정신에 보답하겠다고 필담 섞어서 말하였더니 당 씨는 지극히 만족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면서 교장과 대장에게 부탁하였으니 안심하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로 교도대敎導隊에 입대하여 한 대생隊生이 되기는 하였으나 교장의 특별한 지시로 언어 기타 수업과 훈련을 위한 보충교육을 우선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일체의 생활을 일반 대생들과 같이 하면서 한 명의 배속된 특별 지도대장에게서 따로 어문에 대한 개인교수를 가진 것처럼 특수교육을 임시 받는 셈이었다. 날이 갈수록 언어는 숙련이 되고 문장에 대한 실력도 늘어서 불과 4,5 삭에 수강과 훈련에 지장이 없을 만큼 되니 동배同輩들이나 교수대장들에게서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그들은 선생에게 친절히 대하고 진심으로 존경도 하였으며 그리하여 한국의 심웅沈雄은 천재적인 인물이라고 전全 대隊에서 평판이 높았었다.
여기에서 한마디 말하여 둘 것은 선생이 북경에 도착한 후부터 성명을 변하여 심웅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변성명은 비밀의 보장과 안전을 위하여 필요하였으며 또 변성명하는 것이 일종의 해외에서의 유행적인 형식이기도 하였으므로 선생도 변성명을 하였는데 자당慈堂의 성을 따서 심 씨라고 중국식의 보통형인 자字 이름으로 웅이라고 하여서 중국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물론 한인 사이에서도 친교가 아닌 사이에서는 대략 심웅으로 알려졌었다.
당시 중국은 군웅이 할거하다시피 하여서 운남성은 당 씨의 천하요 왕국인 양 되어있어 당 씨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가 있었으니 동료는 물론 학교와 대내隊內의 간부들까지도 선생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데다가 선생 자신의 재질才質과 정려精勵하는 노력이 남보다 뛰어났을 뿐 아니라 외국 사람이라는 점에서 더욱 이채를 띠어 전 대내에서 평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선생은 그럴수록 북경 출발 당시의 우당 이회영 옹의 말씀을 회상하면서 자기 자신이 일 개인이 아니라 한 민족의 대표자요 전 독립운동자의 대표라는 반성을 잊지 않았다. 동료들 사이와 학교 당국에 극공겸양極恭謙讓하는 태도를 지켰던 것이다.
입대 후 반년이 지나고 1년이 지나는 사이에 완전한 중국 청년으로 행세할 수 있게 언어와 습속에 숙달하여졌으며 독서에도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으니 학교의 학과學課에 대한 것은 힘을 쓰지 아니하고서도 그날그날의 학과에 뛰어난 성적을 얻게 되었으므로 비로소 선생은 제2년부터 틈만 있으면 또는 틈을 내어서 과외로 많은 참고서를 탐독하였다. 도서실을 지키다시피 도서 속에서 살았었다.
교도대는 일본의 유년학교와 하급 간부 양성소를 합쳐놓은 것 같은 내용의 곳인지라 훈련과 학과가 반반이었으므로 훈련을 마치고 학과 강의가 끝나기만 하면 심웅은 도서실에 가야 만날 수 있다는 조롱까지 받을 만큼 정려 탐독하여서 1년여에 수많은 종류의 서적을 읽었다는 것은 더욱이 군대생활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교장에게서 선생에 대한 보고를 들은 당 독군은 감탄한 나머지 선생을 특별히 불러 환대하면서 한국에는 동량지재棟梁之材가 있다!고 선망의 찬사를 연발하므로 선생은 오히려 자괴함을 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교도대 2년의 코스를 마치고 선생의 나이 22세 되는 4256년에 운남강무당講武堂(통칭 군관학교)에 제16기생으로 입학하였다. 2년간의 세월을 두고 군사학의 입문이라고 할까 기초학이라고 할까 하는 초보 교육과 훈련을 교도대에서 받았으므로 강무당의 2년간 과정은 전술 전략의 전문적인 것을 비롯하여 군사학 각 분야에 긍亘한 것을 전공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정말 사관의 교육과 훈련을 받는 것이다.
강무당에 입학 후 선생은 다시금 각오를 새로이 하였다. 즉 앞으로 2년간에 완전한 독립군의 한 지휘관이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토대와 발판이 되는 재만 동포를 지휘 계몽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의였다. 이러한 각오 아래 매일같이 조석으로 자기 노력에 대한 자아비판을 잊지 않았다. 더욱더 애석촌음愛惜寸陰하는 알뜰한 그날그날을 보내면서 당 독군에 대해 감사와 한중 관계의 친선을 위하여 월 1차의 예방을 잊지 않았다. 청년 장교들과의 결탁도 학생의 신분으로 용이한 것이 아니었으나 외국인에 대한 환대에서 그러한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 유위한 청년 장교들과 교우를 맺게 되었으며 한중 상호 협조하여 다음날 침략자를 구축하는데 서로 연환連環이 되자고 굳게 약속하였던 것이다.
만주에서 둔전양병하는 식으로 재만 동포들을 단결 훈련하여 항일 일전을 꾀하고자 하면 중국 주권하의 만주인지라 중국 당국과 긴밀한 관계가 맺어져야 할 것이니까 장래를 위하여 중국 청년들과 깊은 친교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이 강무당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느 날 학생대장의 소개로 금반 제16기생으로 입학한 대전 출신 김노원金魯源 씨를 만났다. 인간 4희四喜 중의 하나가 타향에 봉고인逢故人이라더니 이역에서 동포를 만나는 중에도 동향 사람을 만나니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반가움이었다. 그도 항일 구국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남중국을 거쳐서 장래를 기약하면서 운남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일면여구一面如舊하여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의지하는 바람에 세월은 가는 줄 모르게 빨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났다. 벌써 중국 오지의 오지인 운남성 곤명에 온 지도 어언 3년이 되었다. 벙어리 놀음을 하면서 이곳 곤명 땅에 찾아든 그 과거를 회고하니 까마득한 옛일만 같았다. 저간這間 수년 사이에 상해 북경은 어떻게 변하였으며 남북 만주 일대의 독립군과 운동자들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강무당 제1년을 마치고 나면서부터 부쩍 간절하여졌다. 앞으로 1년만 더 지나면 이제는 책임 있는 독립군의 지도자로서 응분의 공헌을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러한 소식들이 궁금하여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국내의 소식은 알아볼래야 알 길이 없는 까닭에 단념하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상해를 거치는 신문이나 편지가 1개월에 오는 것은 빠른 편이요 2개월 아니면 3개월 걸리는 것도 있는 까닭에 외부 소식에 대하여서는 갈증이 나면서도 단념할 밖에 딴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졸업을 1년 남기고 앞날에 대한 고민이 새삼스러이 많았다. 그와 동시에 초조한 심정은 비길 데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김노원 씨와 더불어 동병상련하는 위로를 하였으며 졸업 후 앞날에 대한 계획과 설계를 서로 의논 검토하는 것으로 자위를 삼았으나 그런 앞날의 실제 문제를 놓고 생각할 때 자신의 지식 ? 이 3년여를 두고 배우고 읽고 훈련한 ? 의 천박과 미흡을 뼈아프게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규율에 과대한 저촉이 안 될 정도에서 밤잠을 안 자다시피하면서 참고서를 읽고 실제 문제에 대한 난제를 연구하기에 몰두하였다. 이로 인해 당번 장교에게 힐책도 당하였으며 종래에는 교장과 대장에게 불려가게 되어서 할 수 없이 자신이 처해 있는 특수한 사정과 앞으로의 지대한 사명의 완수를 위하여 짧은 이 준비기간을 이용하느라고 부득이 죄과를 범하였다는 고백을 하고 관용을 빌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백을 들은 학교 당국은 선생의 입장과 결의에 깊은 감동과 격려를 표시하면서 그 후부터는 더욱 선생을 존경하게 되고 졸업까지에 행동의 자유를 허하는 한편 독서 연구에 모든 협력과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면서 1년의 시간을 가는 줄 모르게 보내고 4258년 4월에 강무당을 졸업하니 시원도 섭섭도 가릴 바를 몰랐다. 수년을 두고 계획하고 준비한 노릇이지만 막상 졸업을 하고 운남을 떠난다 하니 나의 갈 곳이 어딘가, 나를 받아줄 곳은 고사하고 찾아갈 곳이 어느 곳인가 ? 마치 일조에 고아가 된 듯한 서글픈 감회는 비록 철석간장鐵石肝腸의 선생에게도 없을 수 없었다.
4. 군관학교 졸업과 상해로 귀환
졸업 후 규정에 의하여 성省 내內 각 부대에 3개월간 배치 근무를 마치고 7월말에 당 독군을 왕방하여 그동안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고별을 하였다. 그랬더니 당 독군은 수년간의 객고를 위로하고 재학 시에 정려精勵 분투하여 항상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강무당을 빛나게 하여주었다고 칭찬하면서 “귀국이 일제 철체 하에 있는 한 고국으로 지금 돌아간다는 것은 의의가 없는 일이니까 군들이 닦은 학식과 기능이 귀국의 독립에 기여할 수 있을 시기가 올 때까지 불편하고 답답하더라도 딴 곳에 갈 생각 말고 나와 같이 있는 것이 어떠한가. 물론 제군들이 돌아가서 기회를 만들어야 할 줄로 안다만, 그러나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란 더욱이 현대에 있어서는 국제적인 관계의 변화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침략자의 질곡을 벗기는 어려운 일이니까 깊이 생각하여서 나와 같이 있으면서 그 기회를 기다려라”고 간곡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너무도 고마운 권유이어서 즉석에서 거절을 하지 못하고 10여 일을 기다리다가 김노원과 함께 당 씨를 다시 찾아가 한국독립운동의 운명도 나라의 그것과 같이 청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에 달려있다는 것과 우리가 토대를 닦고 조직을 하고 훈련을 함으로써 비로소 국제간의 기회도 노릴 수 있겠다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독군에게서 받은 무한한 은혜를 한중 양국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공헌함으로써 보답하겠다고 완곡한 고별인사를 하였더니 당 독군은 진정으로 섭섭한 표정을 지으면서 앞날의 건강과 성공을 빈다고 악수를 청하고 나서 비서에게 명하여 다액의 경비까지 주게 하였으며 함께 기념촬영도 하였다고 선생은 성심껏 대해준 당 씨의 후의를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8월 중순 선생은 김노원 씨와 더불어 입만 활동의 대계를 품고 곤명을 떠나 도중 광동에 들렀다. 광동은 남중국의 한 정치 중심지로서 당시는 장개석蔣介石의 국민정부가 북벌을 준비하느라고 서두르고 있을 때라 우리나라 운동자들이 다수 이곳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잠시 형편을 알아보려고 들른 것이었다. 선생은 그곳에서 의열단 계의 여러 사람들을 만났으며 중국 공산당 계열에 속하는 황포黃浦군관학교 한국 학생들과도 만났다. 이렇게 각 방면으로 재在광동 우리 청년들과 접촉하느라고 수일 예정이던 일정이 3개월이나 지나고서야 이곳을 떠났다.
선생이 광동 체류 수개월간에 받은 인상은 환멸뿐이었으니 소위 독립운동자라고 자처하는 청년들이 의연히 사대사상적 사고를 벗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는 노서아에, 민족주의자들은 중국과 미국에 맹종하려는 듯한 것과 또는 중국 국민혁명에 편승하여 취직 출세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은 까닭이었다. 독립은 자력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찾는 것이지 타력에 의존하여 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죽어도 자신을 주체로 하여 타력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운동자들 중에서도 청년들이 저와 같이 자주정신이 박약하고 일신의 출세와 생활 안정에 급급 무반성하다면 큰일이 아닌가. 이렇게 개탄을 거듭하면서 불쾌한 인상을 가슴에 지닌 채 광동을 떠나 상해에 도착한 것은 4258년 12월이었다.
선생은 광동에서 얻은 인상이 너무도 심각하였기 때문에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이곳 인사들도 같은 상태에 놓여있지 않은가 하는 의아를 품고 각 방면의 인사들을 대하였다.
우선 임시정부 제공諸公을 찾았다. 이시영, 김구金九, 조완구趙琬九, 이동녕李東寧, 이상룡李相龍 등 제씨였다. 수년 사이에 임정 내부도 대립 불통일로 조각조각 갈라져 있었다. 당시 임정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불법 전횡에 대하여 의정원에서 탄핵 파면을 결의하고 박은식朴殷植 옹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난 후 기다幾多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하며 이동녕의 국무총리 사임 문제로 우여곡절의 풍파가 중중重重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파란 중에서 제도의 탓도 아니었건만 대통령을 국무령이라고 개편하여 서간도에서 온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선출하고 이탁李? 김동삼金東三 오동진吳東振 윤세용尹世茸, 김좌진金佐鎭 등을 국무원으로 선출하였으나 거부하는 등 문자 그대로 혼돈 난마의 와중이었던 판이니 본래 고무적인 낭보를 기대하였던 것은 아니나 그래도 실망과 환멸이 너무 컸다. 그 중에서도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김좌진이 국무원에 선임되었다가 불취임하였다는 사실이다. 선생이 금반 만주로 향하여 가는 데는 은연중에 백야白冶 김좌진을 기대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어찌하여 북만에서 무력투쟁을 하는 분이 이 정치 와중에 드는 것인가. 또 선임되었으면 무엇 때문에 불취임 하였던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도 하고 한편으로 의혹도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접촉에서 선생은 임정계열 위位 제공諸公은 상해 한구석에서 임정을 가지고 떠드는 것이 곧 독립운동의 전부인 듯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그들 누구에게서나 공통히 받았었다. 임정 기구를 개편하느니 법통을 찾아야 하느니 명령 계통을 세워야 하느니 하는 등의 문제를 중심하여 이합무상離合無常하게 혼선을 일으키면서 온 정력과 시간을 거기에 낭비하고 실지의 문제에는 오히려 등한한 태도였다고 하여도 변명무로辨明無路다.
그렇게 임정 제공에게서 환멸을 느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청년총동맹의 정태희鄭泰熙나 여운형呂運亨 등 좌경 일파들의 진실과 성의는 조금도 없이 허위와 가장, 농락과 이용으로 시종하는 데에는 극도의 증오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선생이 운남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나온 유위한 청년이라는 것과 또 독립 투쟁을 위하여 만주에서 결사적인 활동을 획책할 것이라는 점에서 세력 확장을 꿈꾸는 그들에게는 더구나 무당무파인 선생 같은 이들은 참으로 이용가치가 많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따라서 선생이 타와 접근하는 것을 시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들 이외에도 유자명柳子明을 만나서 의열단과도 접촉하였으며 황훈黃勳을 인연하여 다물단多勿團과도 교섭을 하여 보았다. 이들은 다 중국 남부에서 활동할 것을 원칙 삼다시피 정하고 있어서 만주에서 활동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곳의 운동에는 절망을 가지는 듯하였다. 만주의 여려 가지 현황을 들어볼 때에 가능하면 유위한 다수 청년 동지들이 일단一團이 되어 가는 것이 진정 사반공배事半功倍이겠는데 직접행동을 목적하는, 또 그 실적을 가진 의열단義烈團이나 다물단이 모두 이런 태도를 취하고 보니 더욱더 실망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하루는 번민한 끝에 자기를 소개하여 운남까지 보내준 예관 묘소를 찾아 고인의 영전에 감사의 일주향一柱香을 피워 참배하고서 귀로에 백범 선생을 자택으로 찾아 갔다가 우연히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를 만났다. 백범白凡의 소개로 그가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운남을 떠나서 광동에 들렀을 때에 여러 사람들에게서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말을 들었고 상해로 온 후도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도 만나 보았으니 무정부주의자들과도 만나서 그들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자고 하던 차이라 백정기를 만난 것을 기회 삼아서 그들의 일파와 상면하게 되었으니 곧 회관晦觀 이을규李乙奎, 우관又觀 이정규李丁奎 형제를 비롯하여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 등이었다.
대체로 그들은 직접행동파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였고 무정부주의라고 하여도 극단의 자유주의자라고 공산주의자들이 비방하듯이 조직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독재적인 강권을 배격하고 권력의 집중을 거부하며 자치적인 연합적 합의체로서 자유연합 조직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념적으로 개성의 자유와 권위를 존중하고 생명의 존엄을 확인하며 사회는 사회 각원의 상호부조하는 협동체로서 각자의 자주 창의와 상호 협력으로써만 발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자들의 조직도 그들 자신의 창의와 협동을 꾀할 수 있는 이 자유연합의 조직이론으로써 정돈하여야 된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한 조직 내부에 권력이 집중되어있지 않으니 세속의 감투싸움이나 자리다툼이 없다는 것이요 각자가 자기의 맡은 책임만 다하면 그만인데 여력이 있으면 남을 도와주어도 권력의 그늘이 없는 까닭에 간섭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권력과 명예와 이해로 난투하는 꼴만 보고 진저리를 내던 선생에게는 이들의 오활迂闊 담백淡白한 청류淸流적인 사람들이라고 보이는 반면에 실지 운동에 과연 어떠할 것인가 하는 의문도 없지 않았으나 어쨌든 인간적으로 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느껴졌었다. 그래서 축일逐日 상종하면서 사상을 논하고 각 지방의 운동 상황을 서로 검토하며 실천적인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하는 사이에 재만 교포를 계몽하여 조직화하며 둔전양병의 기반을 닦는 것이 급무라는 점과 독립운동 선에서 적색 공산주의자들과는 일선을 획劃하여 경계하여야 하겠다는 등에 의견이 일치되어 만주행에 동지를 규합하여 가고자 하는 선생에게는 더욱 친근하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우연한 한 사건이 생겼다. 당시 상해에서는 여운형이 일본 낭인과 중국 친일 정객들과 상종한다는 풍설이 떠돌았다. 즉 일본의 낭인 두목 두산만頭山滿의 수족으로 내전양평內田良平, 말영절末永節 등 낭인들이 상해에서 인도 독립운동자라고 하는 사쓰트리와 더불어 아세아민족대회를 개최할 것을 획책하고 친일 중국 정객인 전 복건성 실업청장이던 오산吳山과 교섭하여 여운형과도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문을 다물단 이 모 군과 백정기가 듣고 와서 이런 편복류??流들에게 일격을 가하여 독립운동 전선을 정화하고 앞으로 이러한 타협적인 회색분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하겠다는 것이 백정기 일파의 의견이었다. 그들의 의협적인 태도라든지 민족적 정의감에는 선생도 동감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여 볼 때에 상해 천지의 소문이나 남의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느냐도 문제려니와 더욱이 여 씨는 현재 일본 공산주의자 좌야학佐野學 등과 매일 같이 상종하고 있는 것을 아는데 아침에 공산주의자와 만나고 저녁에 일본 낭인 두산만 일파 인과 만난다는 것은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에야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러니 풍문에만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 확실성 여하를 몸소 확인해야 된다고 선생은 주장하였다. 그랬더니, 여 씨는 한 달 전에 막사과莫斯科에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연설하고 한 달 후에 북경세계주일학교대회에 자칭 한국 대표로 출석하는 자이라고 모두들 도리어 선생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며칠이 지나 선생은 백정기와 다물단 이 모 씨와 같이 그 소문이 진실이란 것을 확인하고 여운형을 찾아 사실을 추궁하면서 철권의 일격을 가하였기는 하였으나 좌우에서 말리는 틈을 타서 탈주하는 바람에 십분의 응징을 가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건이 ‘여 씨 피습’이라 하여 한동안 상해의 화제가 되었으나 불조계佛祖界 안에 살면서 일본 상인과 결탁 모리하던 일부 교포 도배들에게는 경종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동행동을 취하고 나서부터 더욱 더 무정부주의자들과 친하게 되었지만 그때까지 사상적으로 아직 거리가 있었었다. 4259년 봄 4월 어느 날 다물단 이 군과 같이 회관 이을규를 찾아갔다가 우당 이회영 옹에게서 온 편지로 인연하여 우당이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간에 서로 친하게 지내기는 하였지만 자기들의 동지적 내면 문제이었으므로 우당이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은 비밀에 붙였던 것이었다. 선생은 경모하는 우당 선생이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는 데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만주로 가는 길에 꼭 우당 옹을 만나 사상 방면에 대하여 논의하여 볼 것을 마음에 기약하였다.
5. 입만할 동지 규합 행각
마침내 4259년 4월 말 김노원 씨와 선생은 상해를 떠났다. 양자강을 소상遡上하여 남경南京, 한구漢口, 무창武昌, 성도成都 등지에 결집하여있는 한국 청년들을 설득하여 그들과 일단이 되어서 만주의 무대를 재개척하자는 선생의 지론을 그대로 실행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상해에서 무정부주의자들 일부는 쾌락을 하였으니 입만 연락만 하면 곧 만주로 올 것이니까 앞으로 각지에 들러서 다수의 청년들을 만나면 상당수의 동지가 나올 것이고 마음 든든하였던 것이다.
남경에서 금릉金陵대학 재학생인 이원근李元根, 김산金山 등을 만나고 그들로 인하여 수십 청년들을 알게 되어 상론하여 보았으나 동조자를 얻지 못하였다. 하루는 뜻밖에 운남강무당 출신이라는 이준수李俊秀를 만나 일면여구一面如舊하였다. 그도 뜻과 사세事勢가 얼맞지 않아서 불우한 시일을 보내면서 포부를 펴볼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터라 수일을 두고 논의한 끝에 동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남경은 교포로서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각지로 왕래하는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므로 다수한 동지자가 있을 줄 믿었던 것이 실패된 것은 섭섭한 노릇이었으나 이준수 씨 한 분이나마 동조자를 얻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삭 여의 시일을 허비하고서 동년 5월말 이준수, 김노원과 더불어 남경을 떠나서 한구로 향했다. 도중에 기선이 안경安慶에 기항하였는데 이 안경 기항이 선생 일행 3인에게 재액在厄을 일으켰다. 당시 중국 각 도시에서는 거년 5월 30일 상해에서 야기되었던 대일영對日英 총동맹파업의 여파로서 일화日貨 배척운동이 치열하던 때이라 각 개항장과 시, 읍에는 학생들 및 청년 단체들로써 조직된 일화 수색단이 있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일체의 물화를 조사 색출하여 몰수 소각하며 일본인들의 여행자까지도 조사 축방逐放하는 등의 강경한 배일운동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다. 선생들이 탄 기선이 안경에 입항하였을 때에 이 수색단이 올라와서 행객行客을 조사하여 화물목록대장을 가지고 일본 물품을 적발하는 판에 선생 일행은 면모가 중국인과 다르고 언어가 이상하다는 데서 별다른 행패는 없었지만 하선 명령을 받고 배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어 부득이 수일간 여관에서 감시를 받으며 조사를 당하였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중국인이라고 속일 필요도 없고 굳이 속이려면 시일이 걸릴 것이 염려되어서 사실대로 한국 혁명가임을 밝혀서 일본인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으나 이런 일로 3일간이나 지체되었다. 한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수색단 안경시 책임자들은 호린好隣의 혁명 동지에게 무례천만이었다고 사죄를 하면서 굉장한 대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즉시 떠날래야 차기 선편까지는 5,6일을 더 기다려야 하겠는데 그동안 묵은 여관비를 치르고 나면 출발까지의 여관비와 선가船價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수색 책임자들에게 너희 때문에 끌려 내려서 여비를 다 썼으니 변상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진퇴유곡 어찌할 도리 없이 그저 걱정만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수색단에서 선생을 모시러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결국 일행 3인을 초대하여 만찬을 같이 하면서 선생을 보고 일화 검색관으로 그 색출에 협력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과 같이 일본인을 찾아내며 일본 물품을 식별하는 것은 물론 중국인 보다는 한인이 나을 것이나 그렇다고 이곳에 머물러서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3인이 구수鳩首 밀의密議한 결과 선생 일행은 아래와 같은 사유로 수색단의 청을 승낙하기로 하였다. 즉 단시일에 끝날 일이요, 또 왜놈들을 중국 천지에서 내쫓는 것은 곧 우리 운동의 근거지를 확대 공고히 한다는 뜻에서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며 한중 양국이 다 같이 일제를 상대로 투쟁하는 이 마당에 더욱이 간접 직접으로 중국 사람들의 원조와 협력이 우리 독립 투쟁에 중요한 조건이 되어 있는 이때이므로 동병상련의 정리로나 혁명가적 도의로서나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비가 떨어졌으니 아무리 서둘러 보았자 당장에는 어쩔 방법이 없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안경의 염천 무더운 거리의 점포를 무장 청년대를 데리고 수색하는 일을 매일 같이 계속하여 수삭을 보냈다. 왜적에 대한 복수를 소극적인 방법으로나마 하여 본다는 쾌감도 쾌감이려니와 이런 치열한 수색 소각으로 인하여 배일열排日熱이 고조되고 범람하던 일본 물품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는 사실에는 스스로 쾌재의 환성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안경시 시민대회 시 일화 저지 운동의 보고강연회에서 ‘회불당초悔不當初’라는 연제로 배일 선동 연설을 하였을 적에는 청중의 그 열광적인 환호란 굉장하였었다. 선생은 연설에서 “중국 국민은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다. 이기적인 소아를 버리고 전 민족이 반성 회오悔悟하여 단결할 때는 왔다. 그러한 반성이 없이는 외적 침략에서 반사半死 상태에 빠진 중국은 죽고 만다. 죽은 후에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회불당초!’다. 그 실증으로 당신들의 이웃나라 한국이 있지 않은가. 이 망국한의 뼈저린 나를 보라”고 외치고 하단하였던 것이다.
제 고장에다 제 강산에다 피땀의 거름을 주지 못하고 남의 산천에 피와 땀을 뿌리며 헤매는 한국 망명 지사들의 비분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선생 일행이 안경을 떠난 것은 그해 깊은 가을 11월 초순이었다.
습윤한 장강長江의 가을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시구 그대로 ’풍엽적화 추슬슬楓葉荻花秋瑟瑟‘의 정경이었다. 이 쓸쓸한 강상江上의 길로 다수한 청년 남녀와 지방 유지들의 석별의 환송을 받으면서 선생 일행은 안경을 떠났다.
때는 광동의 국민정부가 북벌을 단행하여 북벌군이 북상한다는 정보가 유포되었고 벌써 지방에서도 그런 풍설이 떠돌기 시작하여 인심이 동요하던 때니만큼 지방 경찰과 헌병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수개월 전에 안경에서 조사를 받고 끌려 내린 놀란 가슴이라 선실에서 얼굴도 내놓지 못하고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은 채 5일간의 여정을 마친 후 한구漢口에 내린 것은 밤늦어서였다. 여관에 들어가서 북벌군의 편의대便衣隊가 무창武昌에 대량 잠입되었다는 소문이 유포된 까닭인지 점검이 엄중한 것을 보고 선생 일행은 놀랐다. 곧 운남, 광동 등지와 내왕 서신들을 없애버리고 북경에서 온 학생이라 꾸며 겨우 위기를 면하였다. 익일에 한구에 있는 한교韓僑의 집을 찾아갔다가 다행히 다물단의 황훈을 만나서 한구 무창 일대의 한국 청년들의 동향을 듣고 그날부터 격강隔江 상대하여 마주보는 무창을 넘나들면서 각 방면 청년들을 만나 만주 방면으로 갈 것을 권유도 하며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기에 바빴다.
이와 같이 3인 일행이 무한에 모여 있는 청년들과 분주히 왕래하고 있던 중 12월 중순 쯤 되어 별안간 무창에서 전화戰禍에 휩쓸리고 말았다.
당시 무창에는 북방계 조항석趙恒錫의 부대가 위수衛戌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하루는 반야에 편의대가 동 시내에 잠입하여 북벌군과 내외 호응하여가지고 접전이 벌어지니 부득이 선생 일행은 무창 서남 방면으로 밀리어 나갔다. 사세가 이와 같이 급박하니 행리行李가 있을 리 없고 노비의 준비는 물론 있을 까닭이 없다. 졸지에 진퇴유곡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지경이었다. 그래서 피난민의 틈에 끼여서 먹다 굶다하며 정처 없이 밀려가는 것이 호북성湖北省 경境을 지나서 호남성湖南省 상덕常德까지 가게 되었다. 노비라도 있었더라면 전쟁 와중일지라도 그 지경을 벗어나 북향할 별도의 활로를 꾀하였겠지만 수중에 분전分錢이 없는 이 마당에서 3인 장한壯漢의 일행은 전운이 뒤덮인 이때에 잘못 덤비다가는 도망병이나 전장에서 흔히 있는 흉도凶徒로 오인된대도 벗어날 도리가 없어 그저 신세 한탄만 하면서 가는 대로 가자는 것이 무창에서 수백 리 노정인 상덕까지 밀려온 것이었다.
상덕에서 비로소 조항석군軍의 궤멸潰滅된 상보詳報를 듣고 북상하는 북벌군의 뒤를 따라 무창으로 회정回程하는 길에서 장교를 붙잡고 인사를 건네니 의외에도 운남강무당의 선배 여呂 모 씨였다. 타향에서 고인故人을 만난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참으로 사지에서의 구세주였다. 무창으로 간대도 전란 통에 지인들은 사산四散하였을 것이요, 한구도 북벌군이 무력 점령할 계획이라는 까닭에 일전一戰의 화를 면할 수 없다 하여서 한교들도 피난하여 흩어졌다고 하니 신변에 집분集分이 없는 선생 일행으로서는 여 씨를 만난 것이 절처봉생絶處逢生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ㅣ 여 씨는 선생들의 초췌한 행색을 보고 하는 말이 당분간은 이 전란이 계속될 것이니까 이렇게 해서 여기에서 방황하지 말고 우리 북벌 혁명군에 협력하라고 하면서 혁명군 제3로군 사령관 주조무朱朝武에게 소개하여 주는 것이었다.
주 사령은 씩씩한 청년 장군이었다. 그는 현재 북상 중에 있는 북벌군 속에서 한국 동지들이 다수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우리 한국 청년들의 처지에 깊은 동정과 이해를 표명하면서 “귀국의 동지들이 우리 혁명군에 협력하여 분투하여주는 것은 이것이 혁명가들의 의리나 동정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혁명의 완성이 한국 독립의 발판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니 이렇게 상호간에 불가분의 연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귀공들은 우선 우리 부대를 도와 일해주기 바란다.”고 권하였다. 만주행이 일시가 급하기는 하나 전란에 휩싸인 지금의 이 지경에서 달리 도리가 없어 승낙을 하고 제3로군 제5사단 제1연대 훈련관이 되었다. 이것이 4260년 1월의 일이다.
이때에 무창은 이미 북벌군에 의하여 점령되었으며 한구의 조계지도 영英조계는 북벌군에게 점령되어서 영국이 파병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조계지의 중국 회수를 인정하고 외교적으로 다른 기득권을 확보하느냐 하는 영국의 태도 여하도 있고 하여 시국은 어수선하고 긴장될 대로 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벌군의 내부를 보면 본래 장개석 정부의 북벌계획이 국공합작을 기본으로 세워졌던 까닭에 중국 국민당의 좌파와 장개석 직계파 그리고 좌경 친공산파와 3파 합작이어서 한구, 무창 방면은 담연개譚延?, 진우인陣友仁, 등연달鄧演達 등 좌경 내지 친공파가 중심이 되어 있어서 북상군 중의 장개석 직계군은 호남성, 호북성 계界에서 방향을 돌려가지고 강서로 직충直衝하여 남창南昌을 점령하고 직계 및 방계군을 합하여 남경과 상해를 점령하는 일방 남경을 수도로 선언하니 대세는 무한 중심의 좌경파와 남경 수도 중심의 장개석 파로 갈려 대립이 날로 뚜렷해져 갔다.
그러다가 4260년 5월에 장개석은 반공의 깃발을 들고 상해 남경에서 총공회總工會 산하 노조 간부를 구금하면서 숙청을 단행하니 무한武漢은 좌익계의 수도가 되고 남경은 장계蔣系의 우익파의 수도가 되었다. 결국 무력으로 북벌 도상에서 내부 분열을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6월경의 전세였다.
이러한 판국에서 선생 일행은 충실히 제3로군 제5사단 제1연대 훈련관으로 복무하면서 시국 전변轉變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차에 6, 7월 성하盛夏 중 돌연 제3로군이 긴급명령을 받고서 광동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기미를 안 무한 좌익군은 퇴각하는 제3로군을 포위 내침하여 일대 혼전이 벌어졌으며 이 통에 선생의 제1연대는 낙오하여 사산되고 말았다.
그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들의 소속 부대의 제3로군은 장 씨의 방계인 광서廣西파의 부대로서 좌익군을 포위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호북성 주변에서 적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상부작전으로 무한 좌경군을 포위 섬멸하고자 동 방계군과 교체하여 장 씨 직계군을 투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주조무의 광서군인 제3로군은 광동으로 철수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부대는 사산되어 5사단의 본대를 찾을 길도 없거니와 찾을 수 있다 치더라도 남의 내쟁內爭에 보람 없는 희생을 무릅쓰고 쫓아다닐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3인이 의논한 끝에 무창으로 돌아가서 하루 빨리 북만행을 실행하고자 서둘렀으나 모든 사정이 매우 절박하였다.
내쟁이라고 하지만 이번 좌우의 전투에서는 상호 적개심이 대단하여서 포로가 되는 때에는 전장戰場 강도로 몰아서 총살하기도 하였다. 이런 형편이니 투항하기도 어렵고 도피를 하려면 군복을 벗어야겠는데 바꾸어 입을 옷이 없는데다가 압축하는 포위망을 탈출할 방법과 수단이 막연하였다. 그래서 전선이 수습되는 동안 군복은 벗어버리고 내의 바람으로 수중에서 모피謀避하는 수밖에 딴 수단이 없었다. 마치 급하면 담이라도 뛰어넘는 격이다. 이것이 6월말 경 호남성 진주辰州 동정洞庭호반에서의 일이었다.
수일간 탄우彈雨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몸으로 워낙 급한 판이라 물속에 뛰어들기는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견디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대륙성 기후인 까닭에 호남, 호북이 중부 중국에서도 덥기로 이름난 곳이지마는 피로와 공복에 시달린 몸이니 춥고 떨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3인이 서로 부둥켜안고서 떨리는 몸을 서로의 체온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가 해가 서산을 넘어서 산그늘에 안계眼界가 흐려지면 물에서 기어 나와 호반에 매어놓은 주인 없는 배에 기어 올라가 쉬다가 야음을 타서 오이와 호박을 훔쳐서는 공복을 채우곤 하였다. 이러한 참경 속에서도 혁명가로서의 의지와 낭만은 그들로 하여금 “소지노화월 일선 초강 어부가 비인 배笑指蘆花月 一船 楚江 漁夫가 비인 배”라 콧노래를 부르며 이 3일간의 고난을 유연悠然히 보내게 하였다.(호남성이 본래 중국 고대의 초楚의 지경地境이니 그런 낭만적인 기분이 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사중구생死中求生의 이 고초를 겪고서 전재민戰災民 구호대의 구호를 받아 갱생을 얻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민간 외교위원장 매梅 씨의 극진한 호의로 3인 일행이 쇠약 피로한 심신을 두 달 이상 요양을 하고 건강한 몸으로 한구로 돌아온 것은 9월 초였다. 수삭 동안의 운명이 기구도 하였거니와 그래도 유암화명柳暗花明한 호운好運이었다고 서로 전도前途를 낙관 위로하면서 만주행의 단행을 토의하였으나 즉석 출발하여야할 이 마당에 노비가 문제였다. 3인이 한구, 무창을 넘나들면서 1순을 두고 구한 것이 겨우 1인분의 노비밖에 되지 않아서 되는 대로 분산 입만하기를 결의하고서 우선 시야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김, 이 양 씨는 권유하는 것이었다. 사실로 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나 선생은 선발대로 떠나는 책임의 중한 것 보다는 이 고난 속에 양 씨를 남겨두고 헤어지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마음 아팠다.
이것이 다시 만나지 못할 영별永別임이 예감 되었던 것이나 아니었던가.
6. 우당 선생 방문과 사상 전화 및 북만행
선생은 9월 중순이 좀 지나서 단신 만주행의 장도에 올랐다. 경한선京漢線을 타고 바로 북경으로 우당 옹을 찾았다. 그러나 우당 선생은 벌써 천진天津으로 반이搬移하고 없었다. 이미 북경에 왔으니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찾아서 저간의 소식이나 알아보려고 진산 한흥교, 청사 조성환, 간송 박숭병 등 제씨를 찾았으나 혹은 타처로 떠나고 혹은 출타 부재여서 만나지 못하고 민국民國대학 북경대학에 유학하는 학생들을 만나 대략의 소식과 정세를 듣고서 서서히 여러 사람을 다시 찾기로 하였다. 그러나 형편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첫째로 여비도 여비려니와 당시는 봉천奉天 장작림張作霖이 북경을 점거하고 대원수로 군림하면서 북상하는 북벌군을 방어하기에 혈안이 되어 산서성山西省의 염석산閻錫山을 토벌코자 전단戰端이 벌어진데다 한국 사람들은 남방과 통모通謀하는 분자들이라고 감시가 심하였으므로 기류寄留 수일 만에 할 수 없이 북경을 떠나 천진으로 우당 선생을 찾았다.
우당 선생은 7순 노령에 천진 남개南開 일우一隅 단간 토막 셋방에서 고아 아닌 고아 남매를 데리고 영락한 생활이 궁핍 절정의 처지였다. 노선생의 그 비할 데 없는 절박한 처지를 보고 눈물이 앞을 섰다. ‘국파가망國破家亡에 신기로身旣老!’ 이것이 망국한이 아니었던가. 노사老師의 손을 잡고 무언의 낙루를 하니 노선생도 자못 감개무량하여서 “그간의 소식은 때때로 들었는데 수년의 고초가 과연 어떠했는가? 그러나 고초는 고초일망정 이제는 분명 대장군이 되었구나” 하고 잡은 손을 어루만지며 낭낭한 웃음으로 일좌一座의 공기를 씻어 놓는 것이었다. 그동안 수년 사이에 노선생은 빈곤과 분한忿恨이 뒤얽힌 망명의 쓰라린 생활 때문에 평소에 그렇게 명랑한 성격임에도 이제 노쇠와 심려로 초췌해진 그 용모를 대할 때에 정의를 위한 투쟁의 생애란 것이 얼마나 괴롭고 어려운 것이라는 것과 아울러 혁명가의 운명의 다난 기구함을 새삼스러이 느끼는 동시에 옹의 철석같은 견인한 의지와 목적을 위한 몰아적인 자기희생의 정신에는 그저 고개를 숙여 경모할 따름이었다. 옹은 건강을 염려하는 선생에게 내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운동을 타개 발전시킬 묘안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면서 군들이 북만행을 한다니 근래에 처음 듣는 낭보라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만나자마자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로부터 장차 앞으로 올 모든 문제와 각지의 제반 사정 등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됐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12,3세의 어린 규호圭虎 군이 장만한 염반鹽飯이 아닌 염죽鹽粥을 가져 왔다. 한 그릇 죽에 호염胡鹽 한 접시를 놓고 노사의 쇠한 용모를 쳐다보니 선생의 눈에는 저절로 안개가 서리었다. 그러나 노선생은 조금도 그런 데는 개의치 않고 상해 북경 등지의 운동자들의 무반성한 처사에 열을 올리며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앞으로 북만에 가거든 제군들은 그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하며 도도한 열변으로써 우리에게 성공이 오고야만다고 운동에 대한 전망을 말하며 식사를 잊어가면서 격려를 거듭하였다. 선생은 우당 선생의 진면목을 이때에 다시금 재인식하는 듯 느끼었다. 여기에 이르러 선생은 ‘나도 한 혁명가로서, 남의 선배로서, 또 인간으로서, 저와 같이 일생을 통하여 변함없는 열과 성을 가져야된다’고 스스로 뉘우치고 또 맹서하는 것이었다.
화제는 돌고 돌아서 사상문제에까지 이르렀다. 상해에서 회관 이을규 등의 무정부주의자들과 만났을 때에 우당 선생도 무정부주의자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던 까닭에, 또 선생 자신도 상해에서 그들과의 교류에서 의기상투된 바 있었던 까닭에 이 사상문제에 대해서 항시 존경하는 우당 옹을 만나 철저한 토의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바라 토론은 진지한 공감 속에서 장시간 계속되었다. 선생은 자기의 사상적인 태도를 결정하고자 먼저 우리 독립운동의 방법론과 독립 후에 실현할 구체적인 사회 형태며 정치적 구조 및 경제 질서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토의하다가 마침내 옹의 무정부주의로 전환한 동기를 묻자 옹은 말하기를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무정부주의로 전환하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다만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생각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나의 그 사고와 방책이 현대적인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상통되니까 그럴 뿐이지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식으로 본래는 딴 것이었던 내가 새로이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라고……. 또 일부 사람들의 말과 같이 내가 황실 중심의 보황파保皇派였다면 물론 180도의 사상 전환이라고 하겠지만 과거 한말 당시로부터 기미 직전까지 내가 고종 황제를 앞세우려고 한 것은 복벽復?적인 봉건사상에서가 아니라 한국 독립을 촉성시키려면 세계적인 정치문제로서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하여야 하겠는데 그러자면 누구보다도 대내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그를 내세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데서 취한 한 방책에 불과하였던 것”이라고 말하고 마치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씨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해로 데려가려던 생각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이렇듯 옹의 태도가 가림이 없이 나오니 선생도 솔직하게 무정부주의자들의 방법론으로서 자유연합의 이론이란 너무 공소空疏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우리의 독립운동자적 견지에서 볼 때 도저히 그런 이론을 가지고서는 안 될 것이라고 추궁하였더니 옹의 답이 “독립운동자의 견지에서 나는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모든 운동자들이 자기 사상은 어떻든 간에 실제에서 무정부주의의 자유연합의 이론은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며 기미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기미 후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들 사이에 단원 자신들의 자유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 강제적인 명령에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으며 그러한 단체가 어디 있는가. 남들이 강철의 조직이라고 하고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적로赤露와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이 확립된 후의 말이지 그들도 혁명당으로서의 혁명 과정에서는 운동자들의 자유합의에서 행동하였던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또 옹은 “목적이 방법과 수단을 규정하는 것이지 방법과 수단이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는 번연한 이 논리로 볼 때에 한 민족의 독립운동이란 것은 그 민족의 해방과 자유의 탈환일진대, 더욱이 이런 해방운동 혁명운동이란 자각과 목적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 하는 것인 까닭에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요, 자의식이 강한 이 운동자들에게 맹목적인 복종과 추종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있다면 거기에는 오직 운동자들의 자유합의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이론으로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강권적인 권력 중심의 명령 조직으로써 혁명운동이나 해방운동이 이루어진 예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 수행되는 운동인 까닭에 설혹 합의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치더라도 공통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만큼 양보 관용하여 소수인 자기들의 의견을 양보하거나 보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인 것이다. 만일 강제로 일을 한다면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일은 실패에 돌아 갈 것이다. 그러니까 동서를 통하여 소위 해방운동이나 혁명운동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운동이고 운동자 자신들로 자유의사 자유결의에 의한 조직적 운동이었으니까 형식적인 형태는 여하튼지 사실은 다 자유합의이 조직적 운동인 것이었다.”고 설파하였다.
선생은 옹의 해설에 동의하면서 우리 운동선상의 모든 불미스러운 분규와 난투는 그것이 지방적 색채건 또는 개인 중심의 것이건 권력 중심의 지배욕에 원인한 것이므로 우리의 운동선의 정화와 정리를 위하여 의자 다툼을 근절하는 방안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왔는데 권력 집중을 배격하는 자유합의의 이론에 근거한 조직이라면 속칭의 ‘감투’가 없으니 가장 적절한 방안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옹의 말이 자기 개인적인 욕심이 없이 오직 일만을 위하여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쓸데없이 자기 고집이 없이 공정한 사물의 판단이 내려지는 것이며 솔직히 남의 옳은 의견에 따를 수 있는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군도 자기의 고집이 없이 남의 옳은 의견에 찬동하는 것을 보면 혹시 무정부주의자적인 기질의 사람이라고 하여 방안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론 끝에 선생과 옹 사이에 일치된 의견으로서 자유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서 국가와 민족 간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섰으면 그 원칙 아래에서 독립된 민족 자체의 내부에서도 이 자유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니까 민족 상호간에도 일체의 불평등 부자유의 관계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는 것과 자유합의로써 운동자들의 조직적인 희생에서 독립이 쟁취된 것이니까 독립 후의 내부적 정치구조는 물론 권력의 집중을 피하여 지방분권적인 지방자치제의 확립과 아울러 지방자치체의 연합으로 중앙 정치구조를 구상하여야 하겠다는 것이며, 경제 관계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 재산의 사회화를 원칙으로 할 것과 동시에 경제는 사회적 계획하에 관리되어야 하는데 사회적 자유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관리와 운영이 합리화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교육은 물론 사회적인 전체의 비용으로써 부담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토의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자 선생은 옹에게 이것이 무정부주의의 이론과 어떻게 합치되느냐고 말하니 옹은 무정부주의는 한 사회개혁의 원리인 까닭에 그의 기본 되는 자유합의 이론과 자유평등의 원칙을 살려서 그 사회 현실에 맞도록 실현하면 될 것이니까 우리가 지금 논의한 바 그런 모든 점은 새 사회의 기본으로서 한국의 무정부주의자들도 대략 다 찬성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와 달라서 통일성을 꼭 요구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 민족의 생활 관습 및 전통과 문화적 경제적 실정에 맞추어서 그 기본 이념을 살리면 될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선생들은 다시 우리가 그런 이념으로써 독립을 완수하였다 할 때에 이념을 달리하는 국가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닌가라고 국제문제를 논의하였다. 결론으로서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의 세계, 즉 하나의 세계를 이상 하는 것이니까 세계가 하나의 생활계획권으로 되어가지고 즉 이해 상관되는 공통관계를 가지고 계획 조정하는 세계기구가 형성되어서 세계는 각 민족 및 공동생활 관계를 가지는 지역적으로 확립된 사회군群(국가군)이 자유연합적 세계연합으로 일원화될 것이다. 그러니까 각 민족적 단위의 독립된 사회나 지역적인 공동생활권으로 독립된 단의 사회가 완전한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 자체 내부의 독자적인 문제나 사건은 독자적으로 해결하고 타와 관계된 것이나 공동적인 것은 연합적인 세계 기구에서 토의 결정하여 관계 각자가 실행하게 될 것이다. 또 그 단위 사회는 독립된 주권이 확립되어 있으니 한 국가가 아니겠느냐고 할 것이나 그것을 국가라고 하여도 무방하지만 세계연합의 일원인 까닭에 마치 북미합중국의 각 주가 독립된 헌법을 가지고서 연합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까닭에 각 주가 단지 한 주이지 독립국가는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한 사회라는 말과 한 국가라는 말이 동일 개념의 어휘가 될 것이라고. 그렇지만 그것은 궁극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니까 별개의 문제로 하고 현재와 같은 국제관계에서도 적로赤露와 같이 1국민, 1민족이 특수한 이념과 정치 태세로서도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을 상정할 때에 독립 한국은 어떠한 것인가 생각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한국으로서는 대외적인 접촉이 이해 대립되는 관계이기 때문에 별수 없이 한 독립된 국가로서 국제관계가 맺어져야 할 것이며 치안 국방의 문제도 일어날 터인데 이런 외교 국방 국제무역 문화적 국제교류 등의 모든 문제는 중앙 연합기관(정부)이 다루게 될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은 실제적인 문제로서 현실에 대하여 이론과 배치되지 않는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 앞으로 토구討究 되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는 것이다.
수일을 두고 선생은 옹과 같이 격론도 하며 고집을 세우기도 하면서 진지하게 사상 문제를 토의하였는데 선생 말에 의하면 우당 옹은 인간은 벌써 선사시대부터 상호부조 협동 노작하는 본능, 즉 사회적 본능이 뿌리 깊이 박혀있어서 때로는 이기적인 투쟁도 하지만 그보다는 양보와 협동으로써 상호간에 더 큰 이익을 보았을 뿐 아니라 고립하여서는 생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충돌과 투쟁을 피하고 타협 이해로써 생존의 본질적 과제를 쭉 해결하여왔고 현재도 그러한 방법으로 해결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의 증오와 불신은 이것이 과도적인 것이요 본능적 불변의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태고로부터 연면히 이어온 인간성의 성선性善을 주장하였다 한다.
이때에 옹에게 상해에 있는 구파 백정기로부터 서신이 왔다. 상해에 있는 무정부주의 동지 중에 회관과 우관이 중국 동지 이석증李石曾 심중구沈仲九 등의 요청으로 국립 상해노동대학 주비籌備위원이 되었으며 멀리 일본에서도 암좌작태랑岩佐作太郞 및 석천삼사랑石川三四郞 양 동지가 참가하였다는 소식과 중국 동지 진망산秦望山 진춘배陳春培 양용광梁龍光 등이 복건성福建省에서 전개하고 있는 농민자위군 운동에 참가할 것을 요청 받아 회관 형제와 유서柳絮가 가담하여 복건성 남부 25현 민단편련처民團編鍊處라는 자위군을 조직하여가지고 활동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소식은 선생에게 입만을 독촉하는 듯하였다. 만주행을 목적하고 상해를 떠난 후 세월은 어언간 1년 반이 흘러가 버렸다.
노쇠한 우당 옹의 건강을 보고 또 처참 고독한 생활을 보고 차마 고별을 못하는 선생에게 옹은 적막 울분한 근래의 침체된 생활 중에 시야를 만난 것이 소침銷沈한 기분을 전환시키고 새로운 의욕을 북돋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작별을 매우 섭섭히 생각하면서도 앞으로 할 일이 태산 같으니 부디 건강에 유의하라고 재삼 당부를 하며 격려하여 주는 것이었다.
만나면 반갑고 떠나면 섭섭한 것은 이간의 상정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노인과 작별할 때에 더욱 그런 정을 느끼는 것인데 선생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봉별逢別이 무수하였지만 천진 역두에서 우당 선생과 작별할 때처럼 영결이나 하는 듯이 북받치는 서러움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건은 서러움이라기보다는 분한憤恨이요 박해에 대한 격정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우당 옹에게 건강을 빌고 각지와의 연락을 부탁하면서 차창으로 노선생의 섭섭해 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눈물어린 눈을 감은 채 천진 역두를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7.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계획 입안
이렇게 천진을 떠나 적경敵警들의 감시를 피하면서 비로소 입만, 중동선中東線 목단강牧丹江 역전으로 족형族兄 백야 김좌진 장군을 찾아 만났다. 그래서 이만하면 적년積年의 숙원이 이루어졌다고 만열滿悅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4260년 10월 하순이었다.
여장을 풀고 나니 긴장은 풀리고 여독인 양 노곤하기 짝이 없는데 그래도 앞으로의 해나갈 모든 문제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는 온 일이지만) 다시 이 현지에서 세밀한 계획을 짜야겠는데 도착 직후부터 연달아 찾아오는 손님들로 인하여 촌시寸時의 여가도 없었다. 백야 장군과도 서로 가정의 소식을 들으며 지구知舊들의 안부를 전하고 들었을 뿐 다른 일에 대한 논의는 할 틈이 없이 수일을 지내었다.
병을 칭탁하고 며칠 동안 들어앉아서 상해, 한구, 북경, 천진, 광동 등 여러 곳에다가 연락 편지를 띄우고 만주에서의 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숙고하기에 바빴었다.
선생의 만주에서의 운동이란 위에서 거듭 말하여온 것과 같이 한국 독립을 위하여 둔전양병하자는 계획이다. 말로는 누구나 쉽게 만주에는 백만, 2백만의 한교 농호가 있으니까 그들을 조직 훈련시켜 무장을 한다면 민족 독립을 위하여 일대 세력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요 한낱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실지로 볼 때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지난한 일이다. 기미 전후 20년에 그 꿈이 아직까지 꿈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비록 기미 직후 독립군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치더라도 그것은 세계적인 민족자결의 풍조와 아울러 거족적인 대운동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반동적인 독재와 침략자의 발호가 고조되어가고 있는 때가 아닌가. 과연 둔전양병이 가능할 것인가. 뿐 아니라 기미 후 수년 사이에 재만 재중의 운동자들이 교민들에게서 거둔 막대한 자금을, 그 출혈적인 혈세를 효과적으로 사용치 못하고 파벌과 개인 중심의 세력 다툼에 낭비하다시피 하여서 교포들에게 신망을 잃고 있으며 게다가 또 적색분자들이 전선을 내부적으로 교란 분열 시키는 이 마당에 더욱 꿈같은 일이 아닌가.
이러한 것을 다 알고 또 지금은 상상치 못할 어려운 문제와 애로가 중첩할 앞날을 상정想定하면서도 (비록 정열과 신념이 있다 치더라도) 이런 어려운 일에 자기 몸을 던지는 데에는 누구나 당연히 계획과 준비가 있어야할 것이며 설사 미리 마련된 안이 있다할지라도 현지에서 재검토하는 것은 마땅히 있어야할 일이었다.
필자는 이제 선생이 입안한 계획을 말하기 전에 선생이 평소부터 품고 온 몇 가지 견해를 말하여 두고자 한다.
이것이 그 계획안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첫째로, 선생은 정의 필승을 굳게 믿고 있었다. 자유평등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이것이 전 인류의 나아가는 대행진의 길이니 한국 독립도 민족자결 원칙에 의하여 민족 자유평등의 대도를 걷는 민족적 운동인 동시에 전 인류적인 운동이다. 그러니까 한국 독립운동은 이것이 민족적 인류적 정의의 운동인 동시에 이 운동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정의의 운동에 자기를 버리는 사중구생死中求生하는 신념을 가진 운동자들에게 승리와 성공은 당연히 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둘째로, 민족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은 동서의 사실史實로 보아 일시적 흥분이나 충동으로 또는 무계획, 비조직적으로 성공한 예는 없는 것이다. 세기를 두고 치밀한 계획과 완전한 조직으로 근기根氣 있게 장기 투쟁을 계속하는 데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만전을 기한 장기전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본래 자유라는 것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며 빼앗긴 것을 자력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독립운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장기 투쟁을 전개하는 데는 인적 물적 조건으로 또는 지리적인 조건에서 만주를 근거지로 삼는 것이 제일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셋째로, 선생의 재만 한교에 대한 인식이다. 선생이 보는 재만 한교는 일제와 만주 토착 지주들에게 착취와 박해를 받아오는 빈사상태의 유랑민들이다. 이들은 예의염치를 논할 여지가 없는 절박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는 1왈 의식주요, 2왈 토지요, 3왈 협조와 비호의 따뜻한 손길이다.
그들에게는 지도자보다는 능력 있는 개척의 동료가 더 필요하며 책임을 지우기 전에 덕으로 대하여야 하고 부담을 시키기 전에 이익을 먼저 주어야 한다. 의식족이衣食足而 지예절知禮節은 만고의 진리이다. 문자를 알고 일 터전인 경지耕地가 생겨야 희망이 생기고 용기가 샘솟아서 생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안거낙토安居樂土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야만 반성이 생기고 동정심이 일어나며 의무감 책임감이 생겨서 조국 광복의 대의를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재만 한교가 그렇게 되고서야만 비로소 만주가 한국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근거지가 될 것이라고 선생은 신앙화 되다시피 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선생은 이와 같은 신념을 가진 동지를 구하는 것이며 그러한 동지들이 모여야만 실추된 독립운동자들의 위신과 신망이 자연히 회복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상의 정신과 신념과 이해를 근거하여서 선생은 입만 즉시로 다음의 제 계획을 입안하여가지고 이 안을 중심하여 각 방면에 걸쳐 동지를 설득 획득코자 하였던 것이다.
◇ 만주를 근거로 한 한국 독립운동의 기본계획 안
1. 만주 전역을 수개 구역으로 분할할 것
만주는 광막한 지역이어서 그것을 단일 운동 구역으로 조직하기는, 더욱이 현 정치적 정세 하에서는 어렵다. 설사 가능하다 치더라도 효율적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두만豆滿, 압록鴨綠 양 강 유역의 한만韓滿 국경을 비롯하여 지역적인 지리적 조건과 우리 한교들의 집중 거주하는 조건들을 참작하여 수개 지구로 구분하여서 각 지구를 교통과 인구의 중심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조직 확대하면서 그 각 지구를 연합조직으로써 총 단결할 것.
2. 지방 실정의 조사 파악
모든 계획은 반드시 모든 실정을 정밀히 조사하여 과학적인 준비를 갖춤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조사는 철저를 기하여야 한다.
가. 교포의 분포, 생업의 종별, 생활 실태 및 생활 정도, 문화 정도의 조사
만주 한교에 대한 조사처럼 부정확한 것은 없다. 일제들의 통계적 조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들 자신의 조사란 것도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통일된 기관이 없기 때문에 원시적인 숫자에 불과하다.
인구의 조사가 그러한 실태이니 일보를 더 나아가서 그들의 생업별 조사, 생활 실태와 생활 정도의 조사라든지 문화 정도의 조사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추상적인 구구한 주관과 억측으로 이룩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과학적이고 모호한 근거 위에 민족운동 백년의 대계를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조사가 운동에 절대적인 선행 조건이 되어야 한다. 우리 운동의 토대가 되는 이런 제 조사에 우선 착수하자는 것이다.
나. 독립운동 단체, 무력 단체의 실황 및 그들의 실력, 즉 단원 수, 내부 조직력, 무장의 상황, 대 민중 신임 정도 등 조사
이것은 항일 독립투쟁의 주동 세력의 조사인 동시에 독립운동자로서는 자기 자체의 반성이요 자기 자신의 실태 파악인 것이니 운동계획 수립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의 것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야 백전백승이니 이것은 곧 지기인 것이다.
다. 교육기관, 종교단체, 문화 및 사회단체의 조사
전항인 ‘나’ 항의 조사가 항일 독립투쟁의 주체세력의 조사라면 이 기관 및 단체들의 조사는 방계적 준 독립투쟁 조직의 조사이며 때로는 이것이 의장擬裝한 투쟁 단체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재만 동포들은 일부 일제의 집단이민 농장이라 치더라도 재만 한교사회의 풍조가 항일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교포 집단이라고 하면 당시에 있어서는 그 명목과 목적이 어떠하든지 항일적인 집단으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더구나 이런 교육, 종교, 문화, 사회의 모든 단체를 조사하여 실태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이것도 곧 항일 세력을 결집하는 데에 필요 불가결한 요건이다.
라. 한교 중 중간적 회색분자의 실태 조사
이상의 가, 나, 다 등 각 항이 독립운동의 지기적知己的인 자체 파악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독립운동자의 투쟁 대상이 될 일제 세력의 침투 가능한 우범지대이기 때문에 이것 역시 조사 파악하여 두는 것이 운동계획 추진 상 필요한 자료가 된다.
마. 적색 공산분자의 조사와 그 분포 및 부락 침투 상황
적색분자는 당시에 있어서 파쟁적인 색채가 농후하여져서 각 운동 단체에 분별없이 우군인 양 가장 침투하여 조직 내부에서 분열을 조장하며 내부 교란을 일삼아 종국에는 그 조직을 파괴시키고 마는 반동분자요 파괴분자들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개인적 행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당략이요 운동방침이었으며 그들의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각 지방에서 여러 가지 혼란과 분열과 불통일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들의 존재는 종래와 같이 항일 대열의 우군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운동 선상에서 감시 제거되어야 할 한 개의 측면적 적으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니 이들의 실태 조사는 운동상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바. 적경敵警에 대한 분포 상황 조사
- 적 군경의 수와 밀정의 수 및 그 분포, 명단, 그 활동 실태 조사-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정면의 적에 대한 조사이니 이것이야말로 지피知彼하는 근본적인 조사인 것이다.
사. 각 지방에서의 중국 관변 및 중국 지방사회인들과의 접촉 관계 조사
이상에서 거듭 말한 바와 같이 선생은 처음부터 만주거나 중국 본부거나를 막론하고 이 나라의 주인인 중국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우리 운동을 추진하는데 한 중요한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만주와 같이 국경을 1위수葦水로 마주대고 있는 지대에서는 더욱 중시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니만큼 관민을 막론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친밀히 하면서 항일전선에서 공동한 이해관계가 있다는 순치상관脣齒相關의 의식을 깊이 넣어 주자는 것이다. 즉 항일투쟁에서 한중 공동전선을 펴자는 것이다.
3. 교포 조직화와 지도 훈련 계획
전항의 제종諸種 조사 계획은 전략상 지피지기를 위하여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인데 이러한 자료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항일 독립투쟁의 조직과 지도 훈련 계획이 확립되어야할 것은 물론이다. 이하의 제항에서 그 개요를 듣기로 한다.
가. 농촌의 경제적 협동체로서의 농촌 자치조직을 확립
농민들의 조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 자신들이 필요에 의하여 상호 단결하여 맺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발적 창의적인 조직이야말로 공고한 투쟁체로 전화轉化할 수 있는 것이니 종래의 교포들의 조직이란 것은 일부 식자 간에 결속된 것이어서 대중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구한 저력 있는 저항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며 간혹 농촌의 조직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도자들 중심의 것으로 실생활과 직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칭은 어떠하였든지 사실에 있어서 농민 자신의 자의적인 조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한 지도자의 유무에 그 조직의 존망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의 재만 독립운동을 확대 강화하려면 민중 속에 뺄 수 없는 깊은 뿌리를 박아야 할 터이니 그러자면 주민 자신들의 생활을 위한 공동체로서 그들의 경제적 협력 기구를 조직하고 그것을 중심하여 인보隣保 상조하는 농촌 자치체를 확립하여야할 것이다. 그래서 이미 집단 거주하는 지방에서는 물론이고 분산되어있는 농민들을 집단화시키고 유랑하는 농호는 정착시켜서 주민 상호간에 경제적으로 상호관계가 맺어져야만 비로소 토착 지주나 토호들의 박해에 대항하여 궁핍에서 탈피할 수 있으며 경제적 자립을 촉성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조직적 단결은 파괴되거나 해체될 수 없는 강고强固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이해상관의 경제조직이요 동시에 생활조직이라야만 비로소 주민 각자의 능력과 창의가 발휘될 것이므로 주민들의 생활훈련과 개선, 직업 보도輔導 및 농경 영농방법의 개선을 촉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농민들의 생활조직이 확립되어서 재만 동포의 삶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부력富力이 증진되어간다면 이 조직은 곧 우리의 항일투쟁의 조직이요 이 증진되는 부력은 곧 항일투쟁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될 것이다.
나. 재만 아동 및 청장년에 대한 교육계획
우리 독립운동자 중에서 교육에 대해 등한시하는 사람은 없다. 교육으로써 전 국민을 정신무장 시키자는 것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뜻있는 인사의 공통된 의견이었던 것이니만큼 운동 장기 계획자인 선생으로서는 더 말할 것 없이 지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장기 원대한 교육계획으로서 다음과 같이 4급의 교육기관을 구상하였다.
1) 소학(4년제)
재만 교포 중에 농촌 자녀를 위하여 소학을 4년제로 하여서 8세로부터 11세까지에 일반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실천적인 훈련 교육을 시키는 동시에 정신적으로 어린이들에게 국가 민족 사회와 자기 개인과의 연대적 관계를 정당히 인식시키고 상호 협동생활을 자주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습성이 생기게 한다. 따라서 자유를 찾기 위하여서는 신명을 바치는 자유평등의 수호자가 되도록 그 품성을 배양하고 성실, 자기희생, 관용, 협조의 정신을 기른다.
2) 중학(3년제)
중학은 학과와 실습을 반반으로 하여 일반적인 과학교육을 시키는 일면에 농촌생활에 필요한 제반 기술을 실지로 습득케 하며 전교생을 기숙사에 수용하고 상호 협동의 자치생활을 목표하여 실습지의 경작을 사생師生 공동으로 하여 그 수확으로써 식량에 당當케 하며 연료도 소탄燒炭, 벌채伐採 등을 공동히 하여 충당케 하는 등 일제 생활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니까 오전에 혹은 오후에 학과를 가르치고 반일은 실습을 위주 하는데 농경, 채벌, 소탄 등 공동작업 이외에 학생 각자의 지망에 따라 농촌생활에 필요한 기술로서 농구 생산의 간이한 철공, 토목, 건축과 필요한 측량, 목공 등 기술을 반드시 습득시킨다. 이러한 학과와 기술을 연마시키는 동시에 이들에게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도록 그들의 정신을 일상생활을 통하여 훈련시키며 상호협동 노작하는 활동 중에서 용기와 견인堅忍하는 기개를 기르게 한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동기방학과 농한기에는 준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앞으로의 항일 구국 대열에서의 중견적 임무를 담당할 수 있는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다.
3) 성인교육과 교양강좌
가) 성인교육
성인교육은 남녀 30세 이하 20세 이상 청장년을 대상으로 하여 생활개선, 직업보도, 국민생활을 위한 상식 강좌 등을 중심으로 교육 내용을 짜고 일면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이들로써 앞으로의 항일군을 조직할 계획인 것이다.
나) 교양강좌(정기 순회 강좌)
전 주민들의 계몽을 위하여 일정한 기간에 부락 중심으로 민족적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공산주의 비판과 세계정세, 아울러 생활개선을 위하여 순회 선전하는 강좌다. 공산주의자들의 침투 교란과 일제 주구의 암약의 해독을 막기 위하여 필요 시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빈한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민들의 생활태도가 비과학적이고 인습적이고 허례虛禮, 무계획적이기 때문에 이 생활개선의 계몽 선전이 시급한 것이다.
4) 단기 훈련반(1년간)
군대 편성에는 반드시 정예한 간부의 양성이 수반되어야 하므로 중학 출신의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군사에 관한 단기 교육훈련으로써 그 임任에 당當케 했다.
4. 각 운동단체와의 통일 합작 협동 및 각 지역과의 연락을 위한 원칙
합하면 살고 헤지면 죽는다는 것은 미국 독립선언의 일구를 빌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항일투쟁에서 뼈저리게 체험한 진리다.
세계적인 기세로 등장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상대하여 싸우는 우리의 독립투쟁이니 거족적 총 역량을 집결하여 혈전을 시도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뻔한 일인 까닭에 해내외에서 수많은 단체와 운동자들이 항상 입버릇처럼 통일과 단결을 부르짖어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볼 때에 어느 곳, 어느 때의 통일공작 합작운동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분열과 혼란을 조성하고 말았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동일한 목적을 가지는 사람들이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통일 단결하는 터에 어째서 분열과 혼란이란 괴현상이 야기되었던가. 그 원인을 구명함으로써 우리 운동의 발전 강화를 위하여 한 전기를 획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선생은 그 원인을 이런 데에서 찾았다. 즉, 사실에 있어서 독립이란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신명을 바쳐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봉건적인 지배사상과 인습적인 분파적 습성은 항상 자기를 앞세우는 개인 중심의 사고를 가지게 하여 남에게 협력 협조하기는 기피하면서 도리어 자기에게 협력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버릇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잠재의식이 자기의 소이小異를 대동大同에 희생하여 바칠 줄을 모르고 제 고집만을 부리게 한다. 이것이 자라서 자기가 중심이 못하면 일이 실패될지언정 협력하지 않는다는 반동적인 결과까지 가져오고 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대목적을 위하여 통일하자 합작하자 할 때에 으레 문제되는 것은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하는 것이요 간부의 의자를 몇 개씩 분배하느냐 하는 것이 관심사가 되어서 통일 합작 공작 끝에는 운동단체와 개인들이 갑 단체, 을 조직으로 반드시 조취모산朝聚暮散 하였다. 그러니까 일부 사람들의 냉혹한 비판과 같이 우리 통일 단결 공작은 분열 공작이라고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당면하여 선생은 만주에서의 운동에서 통일과 합작을 도圖하려면 어떠한 원칙에 어떠한 조직으로 할 것이냐에 심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종래에 남들이 하여오던 그러한 권력 중심의 조직 원칙을 가지고서는 선생 자신이 비록 신기묘산神奇妙算을 가졌다 치더라도 남들의 전철을 밟을 것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서 새로이 시도하여 보려는 원리 원칙이 천진에서 우당 옹과 토의한 자유연합의 이론이었다.
선생은 각 운동단체의 완전한 자주력을 인정하고 대목적을 위한 행동 통일을 도하여 상호협조하며 지역과 지역과의 협동을 꾀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보교환, 인재의 상호 교류를 위하여 단체와 단체, 지역과 지역 사이에 자유연합적인 조직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 합작 공작의 원칙이라면 각자 단체와 지역이 자주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단지 투쟁에 있어서 상호 협동작전이 필요할 때에 공동으로 임시적 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이니까 각자가 역량에 따라서 공작을 분담할 수밖에 없으므로 주도권이니 간부 배정이니 하는 문제로 상투적인 분규가 일어날 리 없으며 상호 필요할 때에 정보교환, 인사의 교류 등 요청에 의하여 협력을 할 것이니까 이러한 협동에는 지배라든지 지휘라든지 하는 문제로(상호 요청에 의하여서이니만큼) 분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단계를 거쳐서 서로의 이해가 깊어지고 상호의 협동과 협조가 깊어짐에 따라 완전한 단일 조직화하는 단결과 통일의 기회가 촉진될 것인데 그러한 기회가 왔다 치더라도 권력의 집중이나 지배의 질서가 인정되면 또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날 것이니까 단결 통일에 있어서 의연히 자유연합의 원리를 생명으로 지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상이 만주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선생의 포부며 계획인 동시에 이것으로써 선생의 인생관 사회관을 엿볼 수 있었다.
벌써 선생이 내만한 지 반삭이 지나서 11월 중순이었다. 북만의 11월 중순이라면 심동深冬이다. 때마침 내객이 그친 조용한 시간을 타서 선생은 백야와 노변爐邊 한담閑談의 시국담 끝에 만주 각 단체 현황과 정세를 듣게 되었다.
백야 장군의 이야기는 전년에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에 피선 불취不就한 전후 사정을 해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미 후 남북만 각지에 산재한 수많은 독립운동의 조직과 단체들의 소장변천消長變遷한 자취를 더듬어 내려와 현재 서간도 중심의 참의부參議府와 길림의 正義部 및 길림 북방 소만蘇滿 변경 일대의 신민부新民府로 운동선이 대체적 정리를 보았다는 것과 이상의 3부도 군웅할거식으로 정립하여가지고 상호 시기, 반목질시하는 추태를 지양하고 대동단결하자하여 금춘에 길림에서 3부 합작 공작을 진행하다가 불행히 왜적들의 간계에 의하여 소위 길림 대검거로 길림 성내에서 수백 명의 한교들이 피검되는 바람에 3부 합작 공작은 그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중지되었으며 불행 중 다행으로 피검되었던 교포들은 중국 조야의 호의로써 무사 석방되었으나 그 후 수개월 사이에 김동삼 씨 등 다수한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다시 검거된 후 재만 한교들의 독립운동 진영은 현재까지 완전한 정돈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길고긴 말하자면 만주에 있어서의 한국 독립투쟁 10년사를 밤을 새워가면서 들었다.
살을 에어내는 듯한 북풍이 휘몰아치는 밤에 듣는 사람, 말하는 사람의 눈에서는 분한의 눈물이 서로 종횡하였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뒤에 선생은 자기의 기초한 계획안을 백야에게 제시 설명하면서 역전 노장에게 검토를 구하였던 바 이에 대하여 백야는 숙고 정독하여 보겠다고 쾌락하면서 우리도 앞으로 장기 투쟁을 해야겠으니까 당연히 이러한 구체적인 계획안이 있었어야 했을 터인데 재만 운동자들에게는 아직 그것이 없어 무용의 내분과 좌익의 농락을 당하여 온다고 개탄하는 것이었다.
8. 각 지방 실정조사 여행
우선 만주 각 지방의 실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하겠기에 선생은 먼저 신민부 영향하에 있는 각 지방을 비롯하여 동만東滿 지방 즉 북간도 일대를 일순一巡 답사한 다음에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재검토를 하여야 하겠다고 강조하였던바 백야도 전폭적인 찬의를 표하고 그 실행을 촉구하였다.
당시 북만 일대의 정세로는 지방 농민 내지 전 주민(한교)들의 동태 파악과 아울러 그들에 대한 설득이 시급을 요하는 문제이었다. 왜냐하면 만주 전역에 거쳐서 본다면 그 궁핍한 교포들의 출혈적인 부담으로써 각 지방 한교들의 독립운동이 지탱되어 왔던 것은 거듭 말한 바거니와 그러니만큼 그중에는 무리도 없지 않았던 것이니 그 일례로서 무장 청년들의 지나친 언동이 교포들의 빈축을 받게 되면 그때마다 칩복蟄伏하여 있던 친일 주구 배輩는 물론 좌익 도배들 까지도 이러한 사실을 침소봉대로 지방 민심을 선동 교란하여 주민들과의 사이를 중상 이간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그 틈에 부식하고자 광분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북만 일대에서는 신민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가지고 백야 장군을 폭군이니 마왕이니 저주하면서 신민부를 모략 파괴하려 하였던 까닭에 백야로서도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처하여 실태 파악과 대 교포 설득 공작이 절실히 요망되었었으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지방 실태 조사에 겸하여 백야 장군의 대변자로서 설득 공작의 임무를 띠고 지방 순회를 떠나게 되었다.
선생은 떠나기에 앞서 각 지방과의 연락망과 그 중심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얻는 동시에 각지의 지리 기타 실정을 예비지식으로 알아두기 위하여 민무閔武, 오지영吳智泳, 권화산權華山, 이붕해李鵬海 등 제 씨와 매일 상종하는 데에서 관계 자료를 수집하여가지고 4261년 신정 초순에 여정에 올랐다. 이것이 만주에서의 선생의 활동 제1보였던 것이다.
선생의 순방 예정을 보면 중동선과 길돈吉敦선의 편리를 이용할 예정으로 먼저 해림海林을 출발하여 목릉穆稜, 밀산密山 지방을 더듬고 나서 영안寧安 동경성東京城 등지를 편답한 다음 서북으로 오상五常, 서란舒蘭, 액목額穆 등 제 지방을 다녀 돈화敦化까지 왔다가 다시 방향을 동남으로 돌려 백두산 북록北麓인 안도安圖, 장백長白, 무송?松을 일순하고 돌아서서 몽강?江, 화전樺甸을 거쳐 북간도인 화룡和龍, 연길延吉, 왕청汪淸 등 제諸 현縣을 방문하고 돌아올 작정이었다. 그러자면 자연 반년 남짓한 시일이 걸릴 것이니까 될 수 있으면 중간에서 철도나 마차를 이용할 수 있는 대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 만주의 교통은 발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교 농민들의 거주지가 대부분 신개지新開地였으므로 그들을 찾는 데에 기차나 마차를 이용할 수 없어 그대로 눈길을 백리, 2백리씩 걸어야 했고 기차를 탄다거나 마차를 타는 것은 몇 번이 아니었다. 또 집단부락이라 하여도 당시에는 수십 호의 부락도 드물었고 백리 주변의 지역에 점점이 산재한 한교들의 호수가 기백 호가 된다는 것은 북만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한교들의 부락을 찾는 것은 광막한 수천 리의 북만 일대를 정처 없이 헤매는 것과 같은 노릇이었는데 그것도 왜경의 세력이 직접 미치는 곳은 물론 그 주구들이 터 잡고 있는 지방이나 소위 조선민회라는 즉 왜 영사관의 지시 아래에서 조직된 한교들의 위장 교민회가 있는 지역을 피해서 다녀야 했으니 지리에 서투른 선생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직망을 통하여 소개된 동지를 찾아가면 먼저 적정을 탐색 조사하여야 했으며 그 부락에 주의를 요하는 인물이나 사정을 알아두어야 했다. 그 지방에서의 행동에 필요한 이런 모든 것을 안 다음에야 그 지방 사람들을 대하게 되니 참으로 만주에서의 운동도 국내에서의 운동에 비길 만큼 중첩한 난관과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지방의 중심인물들을 호별 방문하고 때로는 인근 부락민들을 집합해 놓고서 이역 절지絶地에서의 그들의 고생살이를 위문하고 국내외 정세를 들어서 격려를 하여주는 것이 여행 중에 공식화된 행동이었다. 물론 이 지방에서 저 지방으로 통과할 때에 연도에서 우리 동포들의 농가를 보면 찾아 들어가서 위문하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그들의 참담한 생활을 눈앞에 보면서도 직접 분전分錢의 도움도 주지 못하고 빈말로 돌아서는 것이 여간 마음 아픈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만주에서도 이민의 역사가 오래고 따라서 우리 동포들이 밀집하여 살고 또 부력도 축적되어있는 동만東滿 일대(북간도)를 빼놓고는 한교들의 농가라는 것은 참으로 형편이 없었다. 그 중에도 함경도, 평북지방의 이민들과 기타 도의 이민들과의 상태가 또한 말 아니게 달랐다. 대체로 보아 만주 전체에서의 한국 이민들의 공통된 현상으로서 함경도와 평북 사람들은 격강隔江하여 가까이 사는 관계로 만주 사정을 잘 아는 까닭이겠지만 처음부터 계획을 세워 이주하여 오므로 입주 정착하여 일가를 형성하는 성공률이 높은데 반하여 기타 도의 이민들, 그 중에서도 경기 이남의 이민은 집을 꾸리고 사는 것이라든지 그들의 생활태도라든지 판이하게 달랐다.
그 예를 들어보면 함경도 사람이나 평북 사람들은 한 지방에 오기만 하면 그곳에서 으레 정착 영주할 것을 생각하였으며 반드시 어떠한 깊은 발연(주=?)이 있어가지고 입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한 지방에 금년에 한 호가 들어왔다면 명년이나 내명년에는 그들의 후속 부대로 10호, 20호가 꼭 들어 닥쳤다. 신이주자가 온다는 것은 선발대며 척후병을 파견하는 셈이었다. 만주 생활에 대한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착 발전하는 것이 쉬웠고 또 생활태도와 습성이 형식과 낭비적 허례에 흐르지 않으며 보다 근로하고 절검 질박하기 까닭에 입만 하여서 실패하는 율이 적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주하기만 하면 1, 2년 만에 풍창파벽風窓破壁일망정 토피土皮 벽돌(흙벽돌)로 자기 소유의 집이 지어지고 창호窓戶가 방풍할 만큼 발려지며 방안에는 갈자리(노蘆전석席)라도 깔아서 흙바닥에 그대로 앉지는 않았고 수평의 채전采田일망정 텃밭을 장만했다. 그런 생활태도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주 1년 안에 반드시 초근목피를 가지고서라도 다음 해의 농량農糧 기타 영농의 밑천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타도의 사람들은 그 토지에 정을 붙이고 정주할 생각이 없이 이주하면서부터 더 좋은 곳을 찾아 옮겨갈 꿈을 꾸며 그 때문에 그곳에서의 생활이 영주성이 없는 그날그날의 하루살이고 보니 토막일 망정 집다운 집을 제대로 꾸리고 살 생각을 하지도 않거니와 더구나 생활 습성이 허례 나태한 까닭에 집 꼴이고 생활의 상태가 미개 야인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집과 생활 모습만 보고도 본적이 어느 도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금반 여행에서 선생이 직접 얻은 경험인 동시에 만주에 있어서의 우리의 운동은 물심양면으로 그들의 생활개혁을 하는 것이 근본이 된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이번 길에 선생의 발자취가 간 곳을 보면 길림성의 밀산, 직릉稷稜, 영안, 오상, 액목, 돈화 등 각 현과 봉천서의 안도, 장백, 무송, 몽강, 화전 등 각 현으로서 광막한 수천 리의 지역이었다. 그 넓고도 넓은 지역에 우리 한교들의 농호가 골고루 분포되다시피 퍼져서 중국 농민들로서는 몽상도 못하는 불모의 습지 소택沼澤을 잘 손질하고 이용하여 옥토로 만들어가지고 색북만주塞北滿洲에서 수백만 석의 백미를 생산하게된 것을 생각할 때 우리 동포들의 기적 같은 위력을 거듭 예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우리에게 정치적 경제적 배경이 있었더라면 이 위력이 더욱더 빛나는 효과를 내었을 것이며 동시에 정당한 대가를 받았을 것이 아니냐 하는 억울한 한숨도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선생은 간 곳마다 동포들에게 “우리가 국가의 독립을 달성하여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생활로써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국가적 독립이 확보되어 있었더라면 여러분 재만 동포들은 만주 개척의 공로자로서 영예를 받으며 우리의 근로의 피땀에 응분의 대가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중국 지주의 주구와도 같이 불모지를 옥토로 만들어 놓으면 그 땅은 지주에게 이런 구실 저런 구실로 빼앗기고 또다시 다른 불모의 땅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지 않았는가. 이 뼈아픈 처지를 왜적에 역이용 당해 이제까지 우리는 정치적 이용거리가 되어오지 않느냐. 그러기에 독립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며 우리 후대 자손들의 복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니 우리는 눈앞의 일시적 고통과 희생을 참고 이겨서 영원한 번영을 이룩하자. 한국 독립이 이룩되는 날 이러한 억울과 치욕은 영원히 사라진다. 만주 개척의 진정한 공로자인 여러분이 한국 독립의 선봉대가 되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라고 목멘 호소를 하였었다.
이런 호소를 하고 그들에게서 애끓는 하소연도 들으며 지방 사정도 말하는 사이에 그들과 지방 지도자들과의 관계도 눈치채게 되었다. 그 까닭에 독립운동자들의 집단이나 또는 무장단이 넘나드는 지방과 그들이 상주하고 있는 지방에서는 그네들과 주민인 우리 교민과의 사이가 어떠한가를 세심하게 알아보기에 노력하였으며 불화가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주민들에게서 찾아보려고 애썼었다.
그런데 주의할 일은 소위 좌익이란 자들이 그 지방에 끼여 있거나 넘나드는 곳에서는 반드시 운동자 상호간에는 물론이요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화와 알력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자들 중에서도 무장부대들에 대하여는 각지의 주민들이 어쩐지 경계하고 경원하는 눈치였으니 이는 운동자들의 반성을 촉促해야 할 통탄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운동자들로서는 그들은 그들대로 고충이 있고 난관이 있었으며 더욱이 무장부대에 그것이 컸다. 즉 그들은 적을 토벌하고 적 기관을 파괴하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에 항상 국경을 넘어 국내로 들어가서 왜 경찰서, 주재소 등을 폭파하며 왜경과 주구들을 사살하고 친일 부호들을 소탕하는 것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왜경 세력권인 북간도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민족을 위하여 희생적 모험을 감행하는 그들에게는 후방 안전지대의 우리 농민들이 응당 안식처를 제공하며 생활을 보장하여 주어야 할 터인데도 빈한한 탓도 있지만 때로는 따뜻이 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위협을 느끼는 듯이 접하였다. 그것은 일반 주민들의 인식 부족도 있지만 그런 부대원의 개중에는 마치 권력이나 쥔 듯이 위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넘나드는 지방이나 그들의 대오가 주둔하고 있는 지방에서는 지방민들에게 배척을 받는 예가 많았으니 이것을 선생은 통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용감무쌍하게도 수십 일씩 산곡 간에서 풍찬노숙하면서 적 경찰은 물론 국경 수비의 적병을 상대로 육박전을 하였다는 것이나 회령會寧, 무산茂山 등지로 깊숙이 침공하여 적의 시설이라면 면소面所, 소방서 등 행정 관서거나 주재소, 헌병대 등을 막론하고 일체를 심야 삼경에 닥치는 대로 방화, 폭파, 살육을 감행하였다는 무용담을 들을 때에 참으로 그 용기, 그 정열, 그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에는 머리가 저절로 숙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뿐 아니라 이 용감한 게릴라 부대들이 7, 8명, 혹은 수십 명씩 한 달에도 몇 번이나 끊이지 않고 침공하였던 까닭에 왜적이 할 수 없이 국경 경비를 위하여 독립 수개 대대를 주둔까지 시키었던 것을 생각하여 볼 때에 그들의 근소한 사람의 약점에서 나온 잘못은 깊이 책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선생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선생은 주민들에게는 그들의 지성과 충의를 찬양하고 운동자의 행동에 뒷받침이 되도록 책임감과 애국심에 호소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그들 무장 동지들에게는 우리의 먹는 한 그릇 조밥과 한 덩이의 감자가 모두 저 굶주리고 헐벗은 불쌍한 동포들의 민족에게 바친 혈세라는 것을 눈물로써 부르짖어 반성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길고긴 8개월의 장도 여행은 끝이 났다. 엄동과 3춘을 그리고 삼복염천도 다 가버린 8월 하순에 양풍凉風과 더불어 해림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귀로에선 예정 코스를 뒤바꾸어서 즉 돈화敦化에서 서남西南으로 화전, 몽강, 무송을 먼저 돌아가지고 장백, 안도를 들러서 연길, 화룡, 왕청 등지는 그 외곽지대를 통과했다. 왜냐하면 안도에서 장마에 막혀있는 동안에 화룡, 연길 등 지역에는 근자에 왜경과 조선민회들이 발악을 한다는 경고를 들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외곽지대를 통과하면서도 수차 동지들의 입초立哨 경계하에 밤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지가지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앞으로 연구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도 많이 얻었지만 그러한 수확과 아울러 만주운동에 공헌자인 여러 선배며 동배들과 교우관계가 맺어진 것 또한 다시없는 기쁨이었다. 나중소羅仲昭, 황학수黃學秀, 전성호全盛浩, 이을李乙, 이홍래李鴻來, 양현梁玄, 김명하金明河, 이익구李翊求, 김덕선金德善, 권중행權重行, 오재형吳在亨, 오상세吳祥世, 백종열白鍾烈, 문우천文宇天, 주혁朱赫 등 외 수십 인의 제제다사濟濟多士가 그들이었다.
귀환한 후 선생은 수일간 노독을 풀고 산시山市로 백야 장군을 찾아서 각지의 정세보고와 아울러 결론으로서 아래와 같은 의견을 부연하였다.
제1로, 각지의 주민들의 상태가 구구하게 다르지만 대략 공통하게 기아선상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지도적 지위에 있는 인사들이나 운동자들까지도 속수무책으로 포기해버려서 그들 농민들은 악독한 만주 지주들의 무제한 착취의 대상이 되어있으며, 한편으로 일제 침략자들 앞에 무방비적인 농락 대상에 놓여있는 데다가 또 적색분자들이 농락의 마수를 뻗치어 감언이설로 꾀고 있으니 그들의 앞으로 닥쳐올 운명이 처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에 그들의 정착 안주를 위하여 지주와 한인 유랑민들 중간에 우리 지도층 사람들이 서서 대변자의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요 동시에 중국 현지 당국과 긴밀한 연락을 위하여 보호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피약탈자인 우리 동포들은 박해를 받다 못하여 왜 영사관에 호소할 것이며 호소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왜적들은 한교를 보호하는 양 자진 대변하여 자기편을 만드는 동시에 우리 운동자들의 근거지를 파괴 박탈하며 아울러 중국 당국을 강압 침해하는 기회와 구실을 주게 될 것이니 이것은 적으로 하여금 한중 친선을 저해하는 양 민족의 이간의 길을 열어주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게 할 것은 뻔한 일이다.
뿐 아니라 우리 운동자들이 적극적인 방책을 강구하여 그들을 정착 단결시키지 않으면 지도할 길이 없으며 그들의 생활을 직접 지도하지 아니 하고서는 우선 경제적 안정을 얻지 못할 것은 물론 현재의 그 반半야인적野人的인 미개상태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활이 불안하고 미개 야인적이면 약한 신체에 병마가 붙듯이 공산분자들의 온상이 될 여지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런 모든 점이 우리 독립운동자들의 거점과 토대가 붕괴되는 과정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우리 운동자들은 하루 빨리 그들 농민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한 개척자가 되어가지고 그들의 이익을 도모하며 공동생활 속에서 그들의 생활을 지도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자발적으로 단결을 기도企圖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자연히 그들에게서 세상을 보고 비판하는 능력이 생기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고서야만 세기를 두고 대일 항전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확고한 근거지가 이 만주 천지에서 이룩될 것이 아닌가. 이것이 기도되지 않고서는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앞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밖에 없다.
제2로는, 우리 농민에게 가하여지는 외부적인 압력이다.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바로는 우리 농민들이 받는 외부적 압력에는 3종이 있었다. 첫째로 중국 토착 지주와 자본가들의 압력이니 이 무리한 압력 때문에 우리 농민들이 정착 안주하고 싶어도 불가능하게 된다고 보아도 좋다. 왜냐하면 그 지주들이 과거에는 습지 소택이 불모지라고 하여 저율로 임차하여 주었던 것을 지금에 와서 옥토가 되고 고가의 백미가 생산되니 무리한 조건으로 임차의 지대地代를 올리고 모든 악조건을 내세워서 해약을 한다는 것이며 또 농자農資를 대여한다 하더라도 고리高利, 무자비한 수단을 써서 자립을 불능케 한다는 것이 그 압력의 하나요, 둘째로서는 왜적들이 세계적 조류에 따라서 또는 시세 변천과 우리 이민들의 생활과 지식 정도가 향상됨에 따라서 우리 이민에 대한 방침과 정책을 변경하였다는 것이다. 종래에는 한교들의 단결을 엄금하던 자들이 독립운동이 치열한 후에는 그들도 주구를 시켜 자기편의 조직을 만들어서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적의 대 민중 공작이니 즉 조선민회를 비롯하여 무슨 회, 무슨 회 등의 복면伏面 단체를 만들어가지고 우리 민족 자체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며 이간하여 동존상쟁을 시킴으로써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 운동자들이 일대 맹성猛醒 아래에서 결연한 각오가 서지 않고서는 적의 공세에 지탱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셋째의 압력은 국제 공산도배들의 압력이다. 이 공산도당들은 중국과의 정치적 타협으로 중국 각지에서의 활동이 활발한데다가 더욱이 이 북만 일대는 소련과 직접 접속되어있는 관계로 해서 소련에 조종당하기 가장 편리한 곳이다. 그리고 소련으로서도 일제의 침략 거점인 만주를 교란하는 데에는 중국인 보다 더 효과적인 존재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바인데 국제공산당이 반제국주의와 약소민족 해방을 표어로 내걸고 있으니 사대사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 한국 사람에게 이 얼마나 매력적인 유혹이겠는가. 그래서 각지의 빈곤한 농민들은 이중삼중으로 흡수되기 쉬운 처지에 놓여있으니 이들보다 우리 독립운동자들이 먼저 선수를 써서 농민들을 설득 조직화하지 않고서는 만주 일대에서 그들의 발호로 인하여 우리 운동은 근저로부터 거세당하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다행히 그러한 최악의 결과가 오지 않는다 치더라도 만주의 한인사회는 친소, 친일, 독립자주의 3파로 정립鼎立되는 가공可恐의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상이 선생의 말하는 각지 농민들이 받는 외부 압력의 세 가지라는 것이다.
다음은 마지막 제3으로 우리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각 지방 현상이다. 각 지방의 현황을 볼 때에 소위 각지의 조직 체계가 서지 않고 또 운동원들이 지적 수준이 낮은데다가 훈련조차 되어있지 않을 뿐 아니라 운동자로서의 자각이 없이 즉흥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니 그 결과는 물어볼 것 없이 명백하다. 으레 단체 대 단체 간에나 동지 상호간에 불통일이 생기고 근소한 이견에서도 마찰과 알력을 일으켜서 대사를 그르치는 예가 없지 않을 것이요 그 까닭에 왜경이나 적마들에게 침투할 기회를 주는 이적利敵의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또 당연히 가져야 할 각오가 없기 때문에 주민들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 즉 처지의 다른 것과 공사에 대한 인식이 똑바로 서있지 않아서 쓸데없는 일로 불화가 주민들과의 사이에 조장되는 예도 없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경제적인 곤란으로 운동이 정체되어 있으니 이 모든 점에 대하여 우리 운동자들로서 적절한 타개책이 수립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 현실을 볼 때에 모든 것이 우리 운동자들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난문제를 해결 타개하여야할 위치에 있는 우리 운동자들의 현상이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그런 약체의 조직과 훈련이 안 된 무력한 분자로 구성된 진용이라면 침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결론으로는 우리 진영의 자체 강화인데 우선 동지 중에서 중견이 될 핵심 분자를 이념적으로 결속시키고 그 결속된 핵심 분자로써 각지의 중견들을 훈련시켜서 전 운동선의 정신적 통일을 기하여야 할 것이며 그러자면 먼저 공통된 이념과 거기에 따르는 강령 정책 등을 검토 확립하여가지고 그것을 동지 훈련에 한 교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한 단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 독립운동 전선에서 적어도 어느 부분만은 공통된 강령과 정책을 수립하여 엄수하여야 할 것이니 예를 들면 왜적에 대한 항전 대책, 대 공산당의 행동 통일 강령 및 독립운동 단체 상호간의 협동 강령 등이 그것이다.
9. 신민부의 개편을 전제한 사상 조정
이상과 같이 보고와 아울러 결론으로서 선생의 견해를 피력하자 백야 장군은 현 실정을 정확히 보았다고 동감하면서 그동안 선생이 초안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계획안을 제삼 읽었다고 밝히고 선생이 지금 피력한 결론으로서의 견해가 그 계획안과 상통된다 하며 찬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그 이념적인 결속이 문제가 아니냐고 백야 장군은 말하였다. 그는 또 구체적으로 말하여 무슨 주의主義를 가지고서라야 될 터인데 그 주의에 대한 선생의 견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었다.
선생의 견해는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계획안에도 엿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런 이념이란 것은 꼭 주의라야만 된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이념의 원류를 캐 올라가면 반드시 한 사상의 체계에나 주의에 귀결될 것이니까 일반에게 쉽게 이해케 하는 방법으로 무슨 주의에 유래한 건설 이념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하여 백야에게 이론적인 설명을 가하였던 것이다.
선생이 이념적으로 결속되어야 되겠다는 것은 당장 만주에서의 운동의 방침을 정하는 데서부터 각인각색으로 이론을 가질 수 있으며 또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도 서로 수화불통水火不通 되는 견해와 비판을 가질 수는 있는 것이지만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의견이 같다면 방침을 정하는데 있어서나 어떠한 특수한 문제를 논의하는데 있어서 상호 조화 타협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 근본 되는 의견이 대립되어 있다면 그것은 시발점에서부터 방향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에 조화나 타협이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진다 치더라도 일시적인 것으로 항상 내홍內訌의 요인이 되어가지고서 발전은 고사하고 자체 분해의 운명이 오고야 말 것이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이념의 결속과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속을 기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독립운동의 목적과 내용부터 규정해야 된다고 선생은 주장하였다 독립운동은 온 국민이 다 같이 잘 살기 위한여서다. 일제에 빼앗긴 민족적 자주권과 개인의 정치적 경제적 자유 인권을 되찾아서 억울과 착취가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운동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민족으로서의 자주권과 개인이 가져야할 자유 인권의 침해는 누구에서도 즉 이족異族에게는 물론 동족 상호간에서도 용인할 수 없는 생명적 침해라고 우리 독립운동자들은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자가 목적하는 사회나 국가는 특권과 차별이 인정되지 않는 만민 평등한 사회, 전 국민이 완전한 모든 자유를 향유하고 자유 발전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대기본원칙 밑에서 독립운동의 모든 수단과 방법이 그 원칙에 상위되지 않도록 연구 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러한 점을 고려치 않는다면 결과는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적색분자들과 같아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존재와 존엄까지 부정 말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 것이다.
이런 정신과 신념을 공통의 기조로 하고 만주에서의 운동도 재만 전 한교의 권익 옹호를 근본 조건으로 세워야 하며 따라서 우리 운동자는 그들의 인격과 의사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안거安居 생업生業할 수 있도록 보호 지도하여야 할 것이니 그러자면 그 중요한 제1의 방책으로서 그들 상호가 단결하여 자주 자치하는 생활환경을 만들도록 지도 조장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동포들이 정착 안주하여 단결할 계기를 만들어 놓은 연후에 교육과 훈련에 착수하여야 될 것이라고 선생은 주장하면서 백야 장군에게 전술한 계획안을 재강조하고 신민부를 개편하여 재만 동포 자신의 조직으로 만들어야만 능히 대외적으로 적색분자들의 침투 교란을 막을 수 있으며 또 사상적으로 능히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떠드는 자들을 구축驅逐할 수 있을 것이요 왜적들과도 장기 항전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 샘솟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물론 현재에 있어서도 신민부나 기타 여러 단체가 모두 우리 재만 한인들 자신의 조직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사실대로를 엄격히 말하여 볼 때에 수백만 한교들이 자기 자신의 조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민중에게서 동떨어져 있다. 민중 자신이 자발적으로 이룬 것이 아니요 일부 지도자와 일부 권력 분자들의 항일적인 지배 조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일반 민중이 그 조직을 마음으로 지지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자진하여 부담하는 의무금으로써 지탱되는 것이 아니니 현재의 이 모든 조직은 대체로 권력 조직이요 민중에 군림한 관청화된 기관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분들의 집단이요 기관이라고 표면으로는 존경하는 척 하면서도 내면으로는 위협과 공포를 느끼어서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우리 동지들의 성스런 희생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냉대와 경원을 당하는 현실이 아닌가. 거기다가 왜적과 적색분자들에게 모략중상할 구실까지 주게 된 까닭에 백야 형에게 마왕 폭군이라는 가공할 오명을 씌우게 된 것이라고 솔직히 털어 놓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백야도 선생의 충언을 달게 받았다. 그런 실정을 자인하는 까닭에 선생의 협력과 지지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 후 앞으로의 구체적인 방책을 수립하는 데에 백야 장군과 장시일을 두고 서로 의견과 지혜를 짜내다시피 하였으나 동지를 어떻게 어느 방면에서 구해야 하느냐가 두고두고 백야의 고충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만주 일대에서 더구나 동지들 중에서는 이러한 철저한 사상이 확립된 사람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니까 상해, 북경 등지에서 구하여 오는 것이 첩경이라고 권고하고 나서 선생이 운남을 떠나 광동, 상해, 남경, 무창, 한구, 북경, 천진 등지를 편답하면서 수많은 청년을 접촉하여 보았다는 것과 그들의 대부분은 공명심에 날뛰는 투기사投機師로 보였으나 그 중에서 상해, 북경, 천진 등지에서 만나본 무정부주의자들이 그래도 비교적 공정하고 올바른 운동자로서의 양심과 정열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을 말하였다. 그들이 그런 주의를 가지게 된 동기는 기미 후 파쟁과 명리에 날뛰는 추태를 수없이 보아왔고 겸하여 그런 불순한 투쟁의 와중에서 운동자들의 권위 신망이 실추되어 순진한 열혈 청년들이 무용無用의 희생을 당하는 것을 목도한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분연히 권력과 지배를 증오 배격하여 무정부주의를 절규하게 되고 보니 그들은 담담한 무사無私 무욕의 사람들과 같이 되어 권력이나 자리다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오직 일이 되는가 안 되는가가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유일한 초점으로 생각하게 되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과 결합하는 것이 좋다고 백야에게 권고하였으며 그들과 상해에서 서로 결탁하여 북만에서 활동할 것을 약속하였을 뿐 아니라 대선배인 우당 선생에게서 무정부주의에 대한 개요를 듣고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에서 보는 무정부주의, 즉 독립 한국의 건설 이론으로서 또는 투쟁과정의 이론으로서 무정부주의가 어떠한가에 대하여 수일을 두고 토의하여보았는데 선생으로서는 가장 철저하고 또 대공對共 사상전에서 가장 적절한 이론이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때에 중국의 장개석이 좌익 공산분자들을 숙청할 때에 무정부주의자인 이석증, 오치휘, 채원배 등과 결탁하였다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고 덧붙여서 그들과 제휴하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비교적 솔직 성실한 백야 장군은 즉석에서 그들의 일파를 북만으로 오게 할 수 없는가, 그 인수人數는 몇이나 되는가, 그들의 성명은 누구누구이냐고 서두르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생각하였다. 3부 합작 공작이 실패 되고난 후일지라도 아직 각지에 산재한 신민부의 조직이 형해나마 그대로 남아 있는데 상해에 있는 색다른 무정부주의자들을 일시에 대량 초치한다면 무슨 불화가 또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데서 백야에게 충고하였다. 즉 그들을 한꺼번에 여럿을 초치하지 말고 우선 몇 분만을 오도록 하여서 먼저 이곳 여러 동지들과 인간적으로 진실한 관계가 맺어지도록 할 것이며 우리도 그들을 맞이하는 준비로서 자체의 정비와 아울러 그들이 와서 무난하게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도록 하자고 조심성 있는 권고를 하면서 그들 중에서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화암 정현섭, 구파 백정기 등과 우당 이회영 노선배 중 누구든지 몇 분이 오면 차차로 그들 전원도 올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즉석에서 천진 우당 선생과 상해 회관에게 북만으로 즉시 오도록 서신으로 초청을 하였던 것이다.
4261년 9월에 부인 홍종표 여사가 장녀 동한東漢을 데리고 미지 수천 리의 만주로 부군을 찾아왔다. 선생으로서는 이별 후 10년 만의 상봉이었다. 꿈에도 예기치 못한 이 해후에는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고인이 말했다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홍 여사의 용단으로 인하여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정의 낙을 보게 되기는 하였으나 선생으로서는 10년 경영의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시기였으니 가정생활을 향유하고 있을 때가 아니요 그럴 생각을 낼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동분서주 앉을 사이도 없이 돌아다녔다.
그때에 맺어진 동지가 석두하자石頭河子에 김야봉金野蓬, 산시에 이달李達과 지산芝山 이덕재李德載, 해림에 이붕해, 엄형순嚴亨淳, 신안진新安鎭에 이준근李俊根, 밀산에 이강훈李康勳 등이었다. 이들과 더불어 항상 앞으로의 건설 이념과 투쟁이론을 구수鳩首 의론하면서 간간이 백야와 동석의 기회를 만들어 의견의 교환 조화를 도모하던 때에 상해로 연락한 서신이 반루返淚되어 오고 천진 우당 선생에게서 회신이 왔다. 저간에 상해에서는 우관 이정규가 일본 동지들과 같이 왜경에 검거되는 바람에 전원이 근거지를 남경南京으로 이전하였다는 소식과 우당 선생은 여러 가지 관계에서 빠른 시일에는 입만 하기 어렵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래서 다시 남경으로 회관에게 몇 동지가 즉시 출발하라는 최촉催促을 하고 그들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선생은 일에 대한 열성도 열성이지만 백야에게 대한 신의에서 이들이 하루빨리 와야겠다고 초조하던 때에 회관에게서 월여 후에 회답이 왔다. 길림에서 만나 선후책을 먼저 검토 결정하여서 더 필요하다면 동지들을 데려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선생은 그 편지를 백야에게 보이면서 이분들이 이렇게 앞뒤를 재는 이유는 오랫동안 운동선에서 경험한 분쟁 때문에 즉 단체 대 단체, 그중에서도 사상을 달리하는 단체와의 협동에서 뼈저린 고통을 겪은 까닭이라고 말하고 이만큼 신중한 태도로 나옴으로써 이들과의 결합에는 하등의 유감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백야 장군은 4262년 1월에 길림에서 중단되었던 3부 합작 공작의 선후책을 협의한다는 연락을 받고 선생에게 동료의 1인으로서 동행하기를 요구하였다. 선생도 회관과 길림에서 만나기로 한 일자가 또한 1월 하순이었기 때문에 겸해서 동반하여 떠났다. 길림에서 백야는 수일간 두류逗留하면서, 그러나 큰 성과도 보지 못하고 현지 사정이 홀홀忽忽하여 중동선으로 회환하고 말았다. 선생은 회관을 기다리느라고 객창의 무료를 견디고 있는 사이에 우연히 무창, 한구에서 상종하였던 무정부주의자 월파月波 유화영柳華永(주註= 해방 후 환국하여 유림柳林이라 이름 했음)을 만났다.
월파를 만나서 회관 이을규가 북만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것을 의논하였다. 그래서 회관이 올 것을 전제하고 그를 맞이하여 공동 추진하여야할 운동에 대하여 기본이 될 문제가 무엇이겠느냐, 즉 외래자로서 알아야할 모든 점을 우선 조사하고 그것을 중심하여 가장 문제 되는 운동의 본거지를 어디에 둘 것이냐에 대하여 서로 논의한 끝에 선생의 의견에 따라서 중동선을 중심지로 삼자고 하였다. 선생의 주장으로서는 길림을 중심한다면 결국 여러 방면과의 관계에서 아주 서투른 지방이요 또 지방 중국 관헌과의 관계에서도 상당한 시간을 두고 토대를 쌓아야 되겠는데, 격변하는 이 중대한 시기에 그것은 시간의 낭비라는 점에서 지역적으로 북방에 치우쳤다 치더라도 중동선 일대는 신민부의 직접적인 영향하에서 백야 장군의 지도력 권내에 있는데다가 백야가 현재 우리와 동일 보조를 취할 수 있게 되어 있으므로 중동선이 가장 적지라고 생각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월파는 과연 백야가 우리와 동조할 것이냐고 그의 태도에 의혹을 가지는 것이므로 선생은 백야와 1년 유여를 두고 서로 조석으로 운동에 대한 견해를 교환 검토하여 앞으로 모든 면에서 서로 협력하자는 것을 진심으로 허락하였다는 경위를 말하고 지금 백야 장군은 자기 진영의 인재 부족을 통절히 느끼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그의 진의를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강조하여서 월파도 운동의 중심권을 중동선에 두자는 선생의 의견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10.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동맹 결성
이러는 동안에 남경으로부터 회관 이을규가 길림에 도착하였다. 고대하던 사람을 만나고 보니 3인의 반가움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회관은 전명원全明源이라 변명變名을 하기로 하여 전 선생으로 행세하였다. 3인이 4, 5일간 고도古都 길림에 두류하면서 길림 주변의 명승고적을 찾아 만주의 자연과 문물을 구경하고 선생이 인도자가 되어 길림을 출발하였다. 돈화까지는 기차 편으로, 그리고 돈화에서 중동선 해림까지는 육로로 보행할 것을 작정하였다.
중로中路에 경박호鏡珀湖를 우회할 것이냐에 대하여 논의한 끝에 아직 해빙기가 멀었으니 빙상으로 경박호 위를 그대로 통과하게 되었다. 광막한 천리 평야를 설상으로 도보 횡단한다는 것은 장쾌한 일이었다. 일행이 천리 설원을 횡단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회고 예견하는 정담政談이 종횡하는 중에 유명한 경박호에 당도하였다. 백설이 뒤덮이었으니 호수인지 평원인지는 분간할 수가 없었으나 이것이 호수 속이라고 하니 다리가 떨리었다.
일직선으로 남호두南湖頭에서 북호두에까지 80여 리의 거리인데 광막한 자연경은 처처절경일 뿐 아니라 그 무한량한 수량을 이용 관개하여 수전수전 개간으로 집단 정착한 무수한 한인 부락이 호수 주변에 점점點點 산재하여 있다. 선생은 이미 편답한 경험자이라 이 집단부락들을 방문 위로하면서 발길은 동경성東京城을 거쳐 영고탑寧古塔 고도를 지났다.
이 영고탑에서 3인 일행은 고적을 두루 살피며 우리 선조들의 자취를 더듬어 감개 자못 깊었다고 한다. 이렇게 위문하고 답사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정론政論을 주고받으며 길림 출발 2개월 만에 목적지인 중동선 해림역에 도착하니 때는 4262년 3월 하순이었다. 설해빙원雪海氷原의 북만에도 그립던 봄소식이 깃들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날부터 회관과 월파는 선생과 동거하는 식구가 되었다.
3인 일행이 도착하였다는 소문은 원근에 퍼졌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사방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이 원래객遠來客을 환영하느라고 모여 들었다. 해림에 있는 김야운金野雲은 물론 석두하자의 김야봉, 산시의 이달, 지산 이덕재, 해림시장의 이붕해, 엄형순, 신안진의 이준근, 밀산의 이강훈 등. 산시에서는 백야가 찾아와 해림소학교에다 회관, 월파 양 동지 환영회를 열고서 드물게 보는 큰 잔치를 차리는 동시에 수일을 두고 운동 전반에 걸친 기본 문제와 현지 실정에서 보는 당면 문제들을 가지고 진지한 토론을 계속하였다.
토론의 중심은 선생의 지론인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계획안’이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강력히 대두하는 적색분자들에 대한 어떤 사상적 방위책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 또한 중요한 것이 었는데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계획안’에 대하여는 다소의 이론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큰 반대 없이 동의를 얻었으되 대 적색분자의 사상적 방위 문제는 갑론을박으로 의견이 백출하다가 결론을 보지 못하는 동안에 월파와 백야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기도 하여서 선생과 회관이 조화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 까닭은, 사상은 사상으로라야 막을 수 있는 것이니까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월파가 주장한데 대하여 백야는, 주의는 주의로라야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주의가 구극究極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요 동시에 우리 민족이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인 이상에야 그 목적을 위하여 또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할 것이지 꼭 남들이 주장하여오는 무슨 주의라야 될 것은 아니라고 한 데서 격론이 벌어졌던 것이다.
백야는 자기의 결론으로서 이런 문제는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뿐 아니라 단결과 협동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때에 자칫하면 운동자들 자체 내부에 파란을 야기 시킬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비록 동지들 사이의 격의 없는 자리라 치더라도 신중히 다루어야할 문제이니까 이것은 시야, 회관 양 동지의 의견에 따라 연구 과제로 하여서 보류 재검토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얼마 아니 있다가 월파는 길림으로 돌아가고 백야, 회관과 더불어 선생은 해림과 산시를 격일하여 넘나들면서 신민부 개편 문제와 대공 사상문제를 가지고 논의한 끝에 신민부 개편을 선생에게 책임 입안토록 하였다.
백야가 이 신민부 개편을 무엇보다도 서두는 이유는 거년에 이범석李範奭 씨가 백야와 분리하여 흑룡강성으로 간 후에 진영의 정비가 완비되지 못한 때에 적색분자들의 침투공작과 아울러 백야에게 대한 모략중상이 지방적으로 노골화 하였으며 3부 합작이 장시일을 끌다가 좌절됨으로 자연히 내부적으로 긴장이 풀리어 해이한 공기가 조성되어 가고 있으니 자칫하면 자체 분해의 위기가 올 것이 아니냐 하는 원려에서였다.
선생이 신민부 개편을 입안하는 동시에 대공 문제는 이것이 사상문제이니만큼 민중에게 대한 철저한 계몽에서만 효과를 거둘 수 있으므로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무시 유린하는 까닭에 그것은 강권적 노예적이며 사대주의적 독재사상이라는 것을 지적 폭로하여 민족 자주 독립과 국민의 자유 인권을 위하여 투쟁하는 우리로서는 배격하여야 될 반동사상이라는 것을 적극 계몽 선전하자고 하는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에 선생을 중심하여 회관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백야 장군도 자주 접촉한 까닭에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해도 생기었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여 민중생활에서 자유 창의의 자유합의적인 조직생활을 주장하는 무정부주의는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선생과 백야 장군과의 사이는 서로 이해가 깊어지고 신뢰가 두터워져서 운동의 방략에 일치를 보게 되고 사상에도 이해 관용하게 되었으므로 선생은 동년 7월에 해림소학교에서 사상적으로 완전 일치된 동지들로써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그 책임위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연맹은 아래의 강령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강령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 무지배의 사회의 구현을 기한다.
2.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자주 창의로 또는 상호부조적 자유합작으로써 각인의 자유 발전을 기한다.
3. 각인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 응하여 소비하는 경제 질서 확립을 기 한다.
당면 강령
우리는 재만 동포들의 항일 반공사상 계몽 및 생활개혁의 계몽에 헌신한다.
우리는 재만 동포들의 경제적 문화적 향상 발전을 촉성하기 위하여 동포들의 자치 합작적 협동조직으로 동포들의 조직화 촉성에 헌신한다.
우리는 항일 전력戰力의 증강을 위하여 또는 청소년들의 문화적 계발을 위하여 청소년 교육에 전력을 바친다.
우리는 한 개의 농민으로서 농민 대중과 같이 공동 노작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영농방법의 개선 및 사상의 계몽에 주력한다.
우리는 자기 사업에 대한 연구와 자기비판을 정기적으로 보고할 책임을 진다.
우리는 항일 독립전선에서 민족주의자들과는 우군적인 협조와 협동작전적 의무를 갖는다.
이런 강령 아래에 모인 동지는 이준근, 이강훈, 이붕해, 이덕재, 이달, 김야운, 엄형순 등 17명이었으니 이 연맹이 만주에서 무정부주의자의 조직으로는 처음이었다.
이즈음에 선생은 해림 서남 15리쯤 되는 신안진에 우거寓居를 옮기고 그곳에서 장남 성한成漢 군이 출생하였는데 선생은 만주에서 얻은 기념이라 하여 이름을 ‘만주리滿洲里’라고 불렀던 것이다.
11. 신민부 개편과 한족총연합회 결성 및 그 사업
선생이 신안진으로 이사함으로써 회관은 산시로 가서 백야와 동거하게 되니 선생도 매일 같이 산시로 백야를 찾았다. 그때마다 3인이 구수회의를 거듭한 끝에 백야는 신민부 개편은 시야의 계획안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결론지으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강령을 보니 우리와 그들이 앞으로 표리表裏가 되고 이신동체二身同體가 되어도 혼란과 마찰이 없이 일치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되니까 교육과 사상계몽, 생활개선의 지도는 그 연맹에서 맡도록 하는 동시에 개편하는 우리 조직에는 전원 참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선생과 회관도 백야가 그만큼 이해와 신뢰가 깊으니 그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즉시 재만주무정부주의자연맹 월례회의에 백야 장군의 요청을 부의하여 가결을 보았다.
선생은 아래와 같이 신민부 개편 요령을 기초하였으니 백야는 그 안에 동의하고 즉시 산시, 해림 중간의 석하石河 역전 교포 농가에다 신민부 주요 간부회의를 열어 수일 연속 토의한 끝에 재만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니 다년간의 투쟁사를 가진 신민부는 역사적인 발전적 해소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한족총연합회의 조직 대강大綱
본 연합회의 목적과 사업
본 연합회는 재만 한교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향상 발전을 도모하며 동시에 항일 구국 의 완수를 위하여 재만 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주 자치적 협동 조직체임.
2. 본 연합회는 본회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아래의 사업을 행한다.
1) 교포들의 집단 정착 사업, 교포의 유랑 방지, 집단부락 촉성
2) 영농지도와 개량, 공동 판매, 공동 구입, 경제적 상조금고 설치 등을 목적하는 협동조합 사업
3) 교육, 문화사업 죽 소학, 중학의 설립 운영, 각지 조직의 연락 및 교포들의 소식, 교포들 의 생활개선, 농업기술 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 순회강조, 순회문고 설치, 성인 교육 과 장학제도
4) 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 군사훈련
5) 중학 출신자로써 군사간부 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의 설립 운영
6) 항일 게릴라부대의 교육 훈련, 계획 지휘를 맡으며 지방 치안을 위한 지방 조직체의 치 안대의 편성 지도 등을 위한 통솔부 설치
3. 의사 기관과 집행부
각 부락 자치반은 반민 총회를 결의 기관으로 하여 사업계획, 예·결산의 심의 및 책임자와 대표자의 선거를 행하며 구 분회에는 각반 대표자회의, 지역연합회에는 구 분회 대표자회, 총연합회에는 지역 대표자 및 구 분회 대표자 총회를 결의기관으로 하여 사업계획, 예·결산 의 심의 결정 및 각 조직과의 관련 사항의 심의, 각 부서 책임자의 선거를 행한다.
집행부의 부서는 총연합회에 위원장, 부위원장, 농무農務, 교육, 군사, 재정, 조직·선전, 사 회 보건, 청년, 총무의 각 부를 설치하고 각부에는 부 위원장과 차장을 둔다. 섭외는 총무부 가 맡는다.
각 지역연합회 이하의 조지기의 집행부서는 총연합외의 부서에 준하여 그 지방 실정에 맞 도록 적의適宜하게 둘 것.
선생이 기초한 재만한족총연합회의 조직 요령은 이상과 같은 것이었는데 이런 내용의 것을 가지고 조직을 어떻게 진행 시키는가에 대하여 논의한 끝에 조직은 우선 하향적인 방법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어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본 연합회가 완전한 자치를 주장하느니만큼 당연히 기본체가 되는 부락 단위 조직부터 상향적으로 조직하여 올라와야 할 것이나 만주 한교의 현 실정이나 신민부의 잔존한 조직 실태가 이론 그대로의 실행이 어려운 실정이므로 부득이 하향식으로 각 조직의 임원을 임명하고 조직을 완료한 후에 각 조직에 합리적인 선거를 단행하여 재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총연합회의 임원을 임명하였다. 형식은 임명이나 주요 간부의 공천에 의한 것임을 물론이다.
총연합회 위원장에 백야 김좌진, 부위원장에 권화산, 농무 및 조직 선전 시야 김종진, 교육 회관 전명원(이을규), 군사 이붕해, 그리고 한청암韓靑岩, 정신鄭信, 박경천朴耕天, 강석천姜石泉 제씨가 각각 그 부 위원장에, 이달, 김야봉, 이덕재, 엄형순 등 제씨가 부 차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이것이 동년 8월 초였다.
이와 같이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총연합회의 임원이 결정됨에 따라 지방 조직을 행하는 방법으로서 먼저 지방으로 조직선전부가 중심이 되어 그 대원을 파견, 선전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각지의 조직을 책임질 수 있는 적격자를 물색하게 하여 우선 각지 조직 책임자로 그들을 임명하기로 하여 주시 조직선전대를 파견하였다.
해림을 중심하여 이서以西 일면파一面波까지 제1대, 이동以東 오참五站까지 제2대, 길림에서 돈화까지의 연선沿線 일대에 제3대를 파견하고 선생은 뒤따라 대원들의 활동상황을 시찰차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백야의 권고로 총연합회의 제반 획책을 위하여 출발을 중지하였다.
조직선전대가 떠나간 지 수삼 주일이 지나자마자 각지에서 반응을 보여 지방 주민들의 환영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직접 연락으로 또는 간접으로 전하여 왔다. 계속하여 들어오는 이런 보고와 접하는 조직선전의 책임자로서의 선생의 기쁨은 컸다. 이것은 자기의 계획의 정확성과 자기의 대원에게 준 지시 내용이 현실에 적정하였다는 자부에서보다는 하루 빨리 효과가 나서 동포들의 생활이 안정을 얻음으로써 우리의 항일 구국의 기반이 튼튼하여지기를 열망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되풀이 지적한 바와 같이 현시現時 만주 사정으로 볼 때에 주민들은 신민부나 기타 독립운동 단체들을 일종의 권력 단체로 대하고 또 그 단체 자신들도 지배자 연然하게 한교 농민들을 대하였던 까닭에 서로의 사이에 일막一幕의 간격이 있어 왔으며 게다가 적색분자와 일제 주구배가 중간에서 이간을 붙이기도 하여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사이에 놓여있는 때에 신민부 자신이 자진 해체를 하고 선두에 서서 동포들의 불만을 대변하며 불행과 곤궁을 위로하여 어루만져 주었으니 교포의 환영을 받음은 당연하였다. 다 같이 서로 협력 협조하여서 자주 자치하는 힘으로 누구의 지배나 누구의 힘에도 의지하지 말고 우리 생활의 안정 발전을 도모하고, 내 생활을 내 힘으로 하는 사람만이 항일 구국을 할 사람이요 서로 협동 부조하여 일치단결하는 집단만이 진정한 구국단체라고 주장하고, 그 까닭에 앞으로 우리가 발족한 이 한족총연합회는 우리 동포들 자신의 단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단체와 같이 일부 사람들이 조직하여가지고 농민 여러분을 지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과 편리와 장래를 위하여 여러분들이 자기들 부락에서 자치반을 만들고 그 반들이 모이어 구 분회를 만들며 그 분회들이 지역 연합회를 만들어가지고 그들이 또 모이어 총연합회를 만들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 농민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 조직한 자주 자치하는 자기 기관이라고 설명하고 우리들은 여러분이 반을 조직하여서 대표와 책임자를 뽑아놓으면 여러분에게 이 운용運用을 맡기고 떠날 뿐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또 확약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과거의 모든 단체와 같이 권력을 쓰며 허세를 부리지도 않으며 공산당들과 같이 모략이나 또는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식의 궤휼詭譎이나 오만도 없이 그저 자기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아무 이기적인 사심이 없이 다 같이 일하며 서로 도와서 우리의 생활을 빨리 향상 발전시키자면 유랑하지 말고 서로 부락으로 집결하여서 안전하게 인보隣保 상조하며 살자고 하는 데는 누구 하나 반대할 이유도 없었으며 또 토지의 교섭 주선에는 중국 지주와 중국 관청과의 교섭을 대행하여 준다고 하니 이런 고맙고 편리한 일이 또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복이요 캄캄한 밤중에 햇빛이었다. 이렇게 되니 각지의 조직은 급속도로 진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각지에서 순조로이 조직이 진행되어가니 선생도 선생이려니와 백야 장군의 기쁨은 형언할 수가 없이 컸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위기에 당면하여 있던 신민부이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운동을 같이 해 본 적이 없는 선생과 그의 동지인 색다른 주의자들과 결탁하여 역사가 있는 신민부를 일부 동지들 간에 이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하여 해체하고 났으니 백야 장군으로서는 남모르게 혼자만의 걱정이 없을 수 없던 터인데 천만다행으로 연달아 각지에서 환성이 일어나고 있다 하니 참으로 작약雀躍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야는 선생과 회관을 붙들고 자기가 혼자 걱정하고 염려하였던 것이 이 얼마나 식견이 없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던가, 여러분들에게 미안과 실례를 저지른 것이 아니냐고 거듭 사과하였던 것이다.
한족총연합회의 초 출발이 이렇게 급진전을 보게 되니 일제의 영사관과 그 주구들의 당황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간도間島 공산당사건 이래 진용을 재정비하여가지고 지하로 각 방면에 침투하려고 기회를 노리는 적색분자들에게도 절대 절명의 비보였다. 그래서 이 일당들이 동서로 몰려다니며 발악을 부린다는 풍설도 떠돌았다. 이것은 한족총연합회로서도 추측하였던 바이니 한족총연합회의 조직이 완전해진 지방에는 적색분자는 절대로 발붙일 수가 없게 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그들의 발악적인 방해공작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연합회 측에서는 각지에 일제 주구들과 적색분자들의 준동을 특별히 감시하라고 시급히 지시하였던 것이다.
조직의 제1, 2, 3대 즉 중동, 길돈 양兩 선線 지대의 조직선전대의 공작이 끝나는 대로 동경, 영안 및 왕청, 연길, 화룡 등 동만 일대의 조직에 착수하기로 계획하는 동시에 인재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급히 북만중학 기성期成을 서둘렀다.
광막한 지역에 현재도 대소 부동의 구구한 형식적인 소학小學이 수많이 있기는 하나 앞으로도 계속하여 총연합회가 각 반 별로까지 소학을 세워야 할 판에 당연히 북만에다 수개의 중등학교를 창설하겠다는 계획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지금 총연합회가 발족한 지 월여에 북만중학교 설립부터 기성하려고 서두르는 이유는 일거양득으로 딴 이유가 있었다. 총연합회가 각지에다가 조직을 하고 다음에 그 운영이 적정하게 되어야만 보람이 있겠는데 그러자면 조직과 동시에 그 간부들을 훈련시키어서 각지의 조직이 동일한 정신과 방법과 규제하에 운영되어야 할 것이니까 그러한 훈련기관이 곧 학교이므로 북만중학을 빨리 기성하여서 그것을 이 훈련소로도 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과 회관의 발의인 이 북만중학 기성에는 의외로 간부들 중에서 반대 의견이 컸다. 그들의 반대 의견은 주로 우리 총연합회가 발족 직후인 이 마당에 허다한 기초적인 준비공작이 많은데 선후를 가리지 않고 학교 설치부터 착수하자는 것은 일의 본말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이며 또 지금의 상태로는 중학이 설립되었다 치더라도 자녀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뿐 아니라 중학교를 선생의 계획과 같이 설립하려면 교지와 실습지용으로 수백 수천 향?(일경日耕)의 적당한 토지가 있어야 할 터이니 그것을 갑자기 구할 수도 없거니와 있다 치더라도 재정이 없는 우리로서 어떻게 구입하거나 임대하겠는가, 게다가 북만 벽지에서 갑자기 교원을 어떻게 구하여 오자는 것인가 등이 반대의 골자였다.
이에 대하여 선생은 교지는 적당한 지점을 발견하기만 하면 지주에게 교섭하여서 임차하면 현금이 없어도 될 수 있는 것이며 교원은 국내외에 있는 청년 동지 중에서 자격자를 물색하여 오기에 어렵지 않고 건물은 토피 벽돌을 찍어서 지을 수 있는 것이니까 인력 동원만 하면 될 것이요, 자제를 학교에 보낼 실력이 있는 가정이 몇이나 있겠느냐 하지만 우리의 실력으로 처음서부터 다수한 학생을 받을 수 있는 설비를 갖출 수도 없는 터이니까 학생 수가 적은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우리가 계획하는 대로 기숙사에 수용하여서 일체를 자급 자활케 하자면 학생 수가 너무 많을 것을 염려할지언정 학생이 적다는 것은 기우에도 지나친 것이다. 지금 발족 시초에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지만 이 학교 설립을 서두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각지 간부들의 훈련이 시급한 때문이라 역설하고 이 학교 기성은 속담에 ‘배 먹고 이 닦는’ 격이라고 열변을 토하여서 반대론을 봉색封塞하고 만장일치의 찬성을 얻어서 즉석에서 지방 인사들과 연합하여 북만중학 기성회를 만들게 되니 백야 장군은 선생의 민완敏腕에 오직 감탄할 뿐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기성회와 연락을 하여 교지 물색을 한 결과 해림과 산시 중간의 서남 15리 허許에 있는 고령자高領子에다 1천향의 면적인 1천 일경의 토지를 예정지로 하여 지주와의 임대차 계약을 추진하기로 하고 선생이 교섭을 위하여 길림으로 지주를 찾기 수삼 차에 걸쳤으며 선생 단독으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백야, 회관과 같이 3인이 양 차에 걸쳐 교섭한 결과 겨우 허락을 얻게 되었다.
중국인 지주들은 우리 동포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가혹한 조건을 내세워 말 못할 착취로 막대한 치부를 이루었음에 불구하고 간혹 유랑하는 우리 동포들에 얼마 되지 않는 농자금을 떼였다 하여서 농토를 교섭하면 그네들은 입버릇처럼 한국 사람은 신용이 없느니 어쩌니 하고서 거절하는 체 하여가지고는 지대를 올리며 임차 조건을 가혹히 하는 것이었다.
선생이 이번에 한 교지 교섭도 그런 예의 하나였다. 그러나 수차의 교섭에 백야 장군까지 출동하게 되니 돈밖에 모르는 중국 지주도 선생의 열성에 감복이 되고 백야 장군의 성망聲望에 눌리어 한중 호린의 민족적 우의를 말하며 학교 교지를 제공할 것을 쾌락하고 임차료는 지점을 확정한 후에 적당히 계약하자고 하였다.
12. 한족총연합회의 발전과 적마赤魔와의 충돌 및 백야 장군 조난
모든 일이 이와 같이 착착 진행되어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서 한족총연합회는 교육기관까지 정비한다고 하여서 각지에서 주민들의 축하 대표들이 오고 격려의 편지가 연달아 왔다.
뿐만 아니라 산재한 농민과 유랑하는 품팔이 농부들까지도 차차로 결집하여 집단부락을 형성하는 자취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총연합회가 발전을 하니 공산주의자들도 할 수가 없었던지 총연합회가 결성된 지 2개월이 되는 때에 일본서 적색운동을 하던 김남천金南天이라는 자가 신안진으로 선생을 내방하여 타협을 청하므로 선생은 그에게 인도에 위배되는 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인간 본연의 자태로 돌아와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민족의 해방과 인류 자유해방의 대열의 선두에 서라고 타일렀더니 김남천 등은 할 수가 없다는 듯이 그러면 우리가 날짜를 정하여가지고 인민 앞에 서로의 주장을 토론하여서 민중의 판단을 받자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 자들을 성토하는 것은 이때라고 생각하고 쾌히 허락하여 선생의 이웃 동리의 부농 송태준宋泰準 씨 집 앞뜰에서 서로의 주의 주장을 동민 앞에 발표하기를 약속하고 일자를 정하여 일대 격론이 벌어지게 되니 이편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회관, 이달 등 3인의 연사요 저편은 김남천 외 2인이었으며 청중은 동민 백여 명이었다.
양편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상대편의 결점을 추궁하였는데 선생 일동이 상대편의 죄악상 즉 만주에서의 그들의 반민족적 비인도적인 행동을 열거 성토하여 민족의 죄인이요 인류의 반역자라고 단죄하고 소련의 주구들은 물러가라고 호령을 하자 청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일제히 호응하는 바람에 그자들은 10여명 일당이 형세 불리함을 알고 탈토脫?와 같이 도망하였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소문은 빨리 퍼져서 공산주의자들이 총연합회에 꿈쩍도 못하고 성토만 당하고 갔다는 것을 중동선 일대가 다 알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공산도당들도 총연합회에는 수화水火를 가리지 않고 대항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따라서 갖은 소문이 다 돌았다. 공산당들이 작당을 하여가지고 습격을 하느니 노서아에서 암살대가 오느니 하는 구구한 풍설이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10월부터 총연합회의 사업으로 산시에다 정미소를 차리고 대표자로는 물론 백야 위원장이었지만 농무 소관이라 하여서 직접 책임자는 선생이었다. 그래서 정미 공장을 신축하고 기계를 설치하며 도로를 수축修築하는 등의 감독과 지시를 선생과 백야 위원장이 교대하여가며 하였다.
당시에 중동선 일대에는 한교 농민들이 모여들어서 상당한 호수에 달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개척 농지에서 생산되는 미곡만도 매년 수만 석에 이르게 되니까 길림성 주변에서와 같이 당연히 동포들의 정미공장이나 위탁 판매업자가 있어야만 중국 상인에게 농단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한족총연합회가 동포들의 편의와 이익을 도모하는 견지에서 이 도정搗精 공장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사업을 계획하니 본래 생소한 영리적인 것이라 애로와 난관이 많은 중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큰일이었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조직공작대의 보고를 받고 상의하여서 하루가 멀다고 매번 수십 통의 회답 및 지시 통신을 내어야 했으며 길림으로 교지 교섭을 위하여서도 서둘러야 되었고 그런데다가 또 생소한 정미공장까지 관리 경영에 책임을 져야하니 선생과 같은 정력가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30 장년이라 치더라도 건강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백야 위원장을 비롯하여 한족총연합회 간부 일동이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구국 지성救國至誠에서 분투하는 사이에 4263년의 신춘은 밝았다. 온 동지들의 희망과 기대는 컸다. 이 새해야말로 한족총연합회의 운동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획기적인 해라고 신안진 선생의 우거에서 성공을 빌며 결의를 새로이 하는 축배를 올렸다.
기대와 희망에 찬 축복의 신춘 벽두에 그러나 북만에 큰 비운이 닥쳤다. 아니 전 민족운동에 메울 수 없는 불행이 왔던 것이다. 만주운동의 대들보가 부러진 것이다. 호사다마라는 말은 예부터 일러왔지만 하늘이 어찌하여 이 민족에게 이런 지나친 시련을 주는 것이냐. 4263년 1월 20일(음 4262년 12월 25일) 오후 4시경 백야 위원장은 공장 수리를 지시하러 나갔다가 공산당원인 김봉환金奉煥(일명 김일성金一星)의 조종을 받은 그의 일당 박상실朴尙實(일명 박상범朴尙範 김신준金信俊)의 권총 저격을 받고 넘어지니, 슬프다 재만 한교 2백만은 눈물로 앞이 캄캄하였고 일제 주구와 적마들은 미친 듯이 좋아 날뛰었다.
꾸준히 이 난국을 끌고 오던 거인이 넘어지니 이야말로 키 잃은 배와 같이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은 갈피를 못 잡았다. 흉변을 당해서 원귀?鬼가 된 고인을 위해서보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통곡하였던 것이다. 의외의 일을 당하고보니 모든 사람이 손발이 움직여지지 않고 있을 때에 선생은 남달리 비통하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즉시로 권화산 부위원장에게 건의하여 비상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사태 수습을 협의케 했다.
이 회의에서 먼저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고 그 흉도의 일당을 완전 소탕할 것과 이번 사태로 인하여 지방 한교사회에 일으킨 불안한 공기를 빨리 가라앉히도록 하며 지방에 파견한 조직선전대원을 소환하여 각지 정세를 자세히 듣는 동시에 앞으로의 우리의 태세를 위하여 전체회의를 열어서 구체적인 토의를 하여보자는 선생의 제의에 만장일치의 찬성을 얻어 각지 파견대의 소환을 단행하는 동시에 군사위원장 이붕해 동지를 중심하여 청장년 중 기민한 사람들을 선발하여가지고 임시 치안대를 급조하여 중동선 일대의 사린四隣을 엄중 방어하는 한편 중국 치안당국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범인 수색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백야 장군의 장의 일체는 회관 전명원이 책임자가 되어서 상가의 유족을 비롯하여 권 부위원장과 합의 하에 장의위원회를 광범위로 조직하여 고 백야김좌진장군사회장의위원회라 명칭하고 치상治喪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엄동 중이라 영하 20도 이하 30도를 내려가는 북만에서 곧 매장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니 우선 초빈初殯을 하여 안치하였다가 해동 후에 정식 장례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런 모든 일에 권 위원장 노인을 모시고 선생이 심혈을 다하여 사태 수습과 정돈에 중추적인 임무를 하였었다.
군사위원장 이붕해 씨의 지휘로 조직된 치안대 일부는 그날 밤으로 해림역 근교에 있는 적마의 소굴을 급습하여 김봉환 외 1명을 잡는 동시에 놈들의 문서를 압수하여서 이번 흉계가 김봉환의 지휘라는 것과 직접 하수자가 박상실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나 하수자 박상실은 끝내 잡지 못하였으므로 수일간 엄중한 조사를 마친 후 김봉환 외 1명을 처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당 수명을 처단하였다고 하여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중동선 일대 지역이 소만蘇滿 국경지대이니만큼 적색분자들의 침투로가 바로 이곳인 까닭에 그들이 가장 많이 잠복하여 있는 곳도 이 일대의 지역이므로 김봉환 등이 처단되자 각 지구에서 준동하던 놈들의 도당에게서 갖은 소문이 떠돌았다. 이다음에는 시야가 암살된다, 혹은 회관 전명원과 간부 일동이 암살의 대상자라느니 하는 따위의 풍설이었다, 인심은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치안대는 물론 전원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위를 경계하였으며 간부 전원도 지방의 안전을 위하여 주야 동원되었다.
이런 소란한 중에 각 지방에 파견되었던 조직선전대원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차차로 지방의 인심은 가라앉았다. 이 동안에 선생은 물론 신안진에 돌아가지 못하고 산시에서 철야 지휘로 밤잠도 못 잤던 것이며 이웃 중국인들은 구정이라고 소란할 정도로 신년 기분에 떠들썩한데도 한족총연합회를 중심한 한인 부락의 전체는 긴장된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그날그날을 보냈음은 물론이었다.
음력 구정도 지나고 일기도 풀리기 시작하니 한족총연합회와 고 백야장군사회장장의위원회는 장례 거행에 착수하였으며 일방으로 북만중학 기성회 사업과 지방조직 문제 등을 취하여 분과 별로 토의를 계속하였다.
권화산, 오지영 양 옹은 백야 장군 장지를 찾느라고 사방으로 답사한 끝에 산시 해림 중간의 석하石河역 동북방 산록에다 정하고 치산 산역을 시작하여 4월 중순에 장례를 거행하게 되니 만주 지방에서는 물론 국내외에서도 다수한 조객이 운집하여 수천 명이 모여들어 고인의 위업을 아끼어 기리며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울부짖음으로 눈물바다를 이루니 이날이야말로 해와 달도 빛을 잃었고 산천초목도 고인을 위하여 흐느꼈던 것이다.
이 장례 중에 선생은 비통과 피로에 지친 중에도 용의주도하게 조객들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이붕해 동지와 더불어 경계에 분주하였으며 또 조객의 귀환하는 연도에도 안전을 고려하여 사방으로 간부를 파견 지휘하여 사고 예방에 신경을 썼었다.
그러나 이때에 왜적의 영사관은 중국 지방 관헌을 협박하여 앞세워가지고 장례 수일 뒤에 석하 묘소를 돌아보고 백야 장군의 우거를 수사하는 등의 발악까지 하였던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정세는 변하여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장군의 유족들은 유해를 모시어다가 고향인 홍성군에 이장하였다.)
일제의 영사관이 장군의 묘소와 우거를 수사하고 가자 지방 주민들의 공포는 다시 커졌으며 이것을 이용하여 적마들은 다시 풍설을 돌리어 놈들의 암살단이 재침공 한다느니 방화단放火團이 내습한다느니 하여 인심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음모와 모략을 일삼았다. 한족총연합회는 하는 수 없이 대외적인 조직 공작과 북만중학 기성회 공작을 임시 중지하고 선생이 선두에 서서 간부 일동과 더불어 방비를 엄중히 하는 한편 지방 치안과 인심 안정에 주력하였다. 물론 중국 치안당국과도 연락을 긴밀히 취하여 적마들의 근거를 뽑기에 성의 있는 협력을 얻었던 것이다.
이러느라고 월여의 시일을 보내고 나니 활동 자금이 고갈되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는데 길림에 있는 고령자 토지의 주인으로부터 북만중학 교지의 획정과 임차계약을 하자고 대리인이 파견되어 왔다. 선생은 긴급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협의한 결과 사세 부득이 하니 그 대리인에게 백야 장군의 조난 경위를 설명하고 사태수습이 되는 대로 즉시 길림으로 왕방할 것을 약속한 다음 그 대리인을 대동 고령자의 지점만을 획정한 후에 지주에게 전후 사정을 잘 말하여 달라고 부탁하여 보내고 말았다.
13. 무정부주의자 대표회의 및 북만으로 동지 집중
매일같이 간부회의는 열렸다. 그러나 재정적인 난경을 타개치 않고는 모든 계획은 그림의 떡이었다. 이러한 위기에서 선생을 비롯한 간부 일동이 우수에 싸여 있을 때에 회관 전명원에게 북경에 있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동지로부터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대표회의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이 왔다. 이 대표회의 소집의 목적은 국내에 있는 동지들이 수만 원의 운동자금을 가지고 나온 까닭에 각 지역의 조직 대표자회의를 열어서 앞으로의 운동을 계획하자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선생과 재만 무정부주의자연맹원들에게는 물론 한족총연합회 간부들에게도 참으로 기사회생의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전체회의를 열어서 파견할 대표자를 선출하니 초청을 받은 회관 전명원과 선생이 결정되어 즉시 한족총연합회 간부회의를 열어 운동자금 획득을 위하여 북경으로 선생과 회관을 파견할 것을 결의하였다.
선생과 회관은 시각을 지체치 않고 여정에 올랐다. 귀환할 때까지 한족총연합회는 현상을 유지할 것을 간부들에게 주의시키고 경비를 각별 엄중히 할 것을 부탁한 것은 물론이다.
선생과 회관은 중로의 위험을 피하여 흑룡강성 제제합이빈齊齊哈爾濱을 거쳐서 조남?南 정가둔鄭家屯 타호산打虎山 등지를 경유하여가지고 수천 리를 우회하는 여정에 아무 사고 없이 3일 만에 천진에 도착하였다.
지체 없이 교외 북관北關 소왕장小汪庄이라는 빈민촌으로 우당 선생을 찾아 세 분이 너무 반가운 바람에 오열까지 하였다. 여름 짧은 밤을 새워가며 만주에서의 모든 경과를 보고하고 백야 장군 조난의 시종始終을 말하였으며 노선생도 그동안의 지난일과 금반 국내에서 신현상申鉉商 동지가 미곡상을 하던 최석영崔錫榮 씨와 계획하여 운동자금을 만들어가지고 함흥咸興을 돌아서 차고동車鼓東 동지와 동반하여 왔다는 것과 북경에서 각지 동지들과 앞으로의 운동을 협의 계획하고자 대표자회의를 열기로 하였다는 전후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다.
날이 밝자 다시 우당 선생을 작별하고 천진을 떠나 무사히 북경 전문역에 도착하니 때는 6월 하순 폭양이 내려쬐는 어느 날 오후였다. 수삼 년 전 북경을 떠나던 그때의 거리와 가두의 풍경은 다름이 없었다. 산도 예 보던 청산이요 물도 예 보던 녹수라더니 북경의 거리는 변함이 없건만 선생이 만주에서 겪은 풍파도 풍파려니와 백야 동지를 잃고 떠나온 것을 생각하니 북경 거리를 달리는 마차 속에서도 감개가 자못 무량하였다.
선생은 회관과 같이 북경 서단패루西單牌樓 서편에서 공우公寓생활(북경에서 하숙을 공우라 함)을 하는 정래동丁來東, 오남기吳南基, 국순엽鞠淳葉 등 북경 민국대학 학생을 찾았다. 이들은 학생 동지로서 신현상, 차고동 양 동지의 연락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신, 차, 최석영 세 사람이 내방하여서 적년의 회포를 서로 이야기하면서 국내의 운동 상황과 사회정세를 듣고 금반에 최석영 씨의 책략 아래 호서湖西은행에서 8만원의 거금을 꺼내기는 하였으나 국외로 반출하는 데 난점이 많아 일부만을 가져 왔다는 것과 잔여의 것은 북경에 안전한 연락 장소가 결정되는 대로 가져올 계획으로 홀홀히 도피 탈출하였다는 자세한 경과를 이야기 들었다. 동시에 북경에 있는 동지들과의 협의에서 북경에서 각지 대표회의를 열게 된 전후 사정도 들었으며 상해 복건 방면의 동지들도 불일간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선생과 회관은 북경 동지들이 베풀어 놓은 위로회 석상에서 만주의 지방 정세 특히 한교들의 모든 사정을 비롯하여 우리 독립운동 각 진영의 현황과 적색분자들의 준동하는 정황 및 독립운동 진영과의 적대적 대립관계를 상세히 보고 설명하면서 백야 장군이 영도하던 신민부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족총연합회를 창립하여 한교들의 민중적 자치기관으로서의 사명을 가지는 동시에 이것이 우리 독립운동의 민중적 토대가 되어서 명실공히 항일 구국 운동을 민중운동화하자는 계획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간에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여서 한족총연합회 운동에 적극 협력하여 교육과 사상계몽에 또는 농민들에 대한 생활개선과 직업보도 등을 책임지고 지도하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여 일좌에 모인 동지들을 흥분과 감격에 몰아넣었다. 이때에 선생은 다시 말을 계속하여 앞으로 각지의 동지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여러 동지들이 만주 운동에 대하여 절대적인 이해와 성원을 가지도록 협력 권고하여 줄 것을 미리 부탁하였었던 것이다.
며칠이 되지 않아서 상해에서 구파 백정기, 지강芝江 주열朱烈(김성수金性壽), 황웅黃雄과 학생 2,3인이 왔으며 또 수일 후에 복건에서 상해를 경유하여 화암 정현섭이 왕해평王海平(장기준莊
麒俊), 양여주楊如舟(오면직吳冕稙), 김동우金東宇 등 동지와 작반作伴하여 내도하였다.(주= 오면직, 김동우 양 동지는 은율殷栗 군수 암살사건으로 평양형무소에서 사형되었음)
각지 대표들의 도착하는 시일이 십 수 일을 두고 서로 달랐던 까닭에 그동안에 서로의 의견 교환은 되어 있었으므로 즉시 전체회의를 열고 각지의 보고가 끝나자 제의사항이 토의되는 자리에서 선생은 만주에 대한 제의사항으로서 각지 동지들이 만주 기지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재정적인 면에서는 물론 인적인 점에서도 우선적으로 총력을 기울여서 민족 대계의 기반을 만주에다 닦자고 호소하여서 만장일치로 이 제안을 승인 결의하는 동시에 국외의 운동은 만주운동을 중심할 것과 물적 인적 모든 것을 만주운동에 집중 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 동지들과 연계를 가지고 하여오던 각지의 중국 운동에는 동지의 의리로나 또는 중국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우리가 생각하는 만주 운동을 강력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니까 중국 운동에도 적극적인 성의를 가지고 자기 책임을 다 하고자고 하는 것을 부대하여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서 각지의 계획안을 검토하면서 국내외 사정을 참작하여 분과적으로 신중 검토하여 앞으로의 기본 방침을 결정하려 할 그 중요한 순간에 예기하지 않았던 돌발사건이 일어나서 전면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회의가 연일 계속되던 중 어느 날 새벽에 분산 합숙하던 대표들의 한 숙사宿舍가 중국 경찰을 앞세워가지고 온 일경에 급습되어 시야, 회관, 신현상, 최석영, 정래동, 오남기, 국순엽, 차고동 제 씨가 중국 경찰에 구속되어 버렸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정치 정세를 보면 장작림이 일군에게 폭사당한 후 장학량張學良이 아비의 원수를 갚자고 부하 중의 친일분자를 숙청하고 장개석 남경정부에 순종하였으나 북경 일대에는 풍옥상馮玉祥이가 남경정부에 대립하고 있다가 마침내 물러나게 되어 산서의 염석산과 연결하여 남경정부의 장개석과 화해 공작을 하던 판이라 북경의 정국이 미묘하던 때였다. 이때에 신, 최 양 씨가 국내에서 호서은행의 대금을 꺼내가지고 종적을 감추고 말았으니 일경 당국은 이것이 반드시 국외로 유출되어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화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 그 수색에 광분하는 동시에 국경선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중국 각지의 적 기관에도 통보하여 그들의 체포를 명하였던 까닭에 적의 대사관 경찰은 조선 안에서 일어난 강도단의 일당이 북경에 잠입하였다고 사칭하고 그 체포를 의뢰하는 한편, 혼미한 정국을 이용하여서 중국 경찰을 매수하여 앞잡이로 내세우고 왔으니 할 수 없이 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원 유서(유기석柳基石)가 염석산 부하 중견들과 친교가 있었던 관계로 왜적들의 허위 모략임을 폭로하면서 중국 주권의 침해라고 역설하여 최석영, 신현상 양 씨만이 적에 인도되고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동지들은 무사히 석방되었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신, 최 양 씨 외에 다 무사히 돌아왔으나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었다. 한번 놀란 판이라 비밀히 자리를 옮기면서 회의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회의의 내용이 전연 달라졌다. 지금까지의 회의는 앞으로 어떻게 적극적인 투쟁을 하느냐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찬 것이었으나 이 풍파를 겪고 난 뒤부터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대한 소극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풀이 죽고 기운이 떨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 중에서도 만주에서 온 회관과 선생의 실망은 대단하였다. 가위 진퇴유곡의 옴치고 뛸 수 없는 형편이 만주 대표들의 처지였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북만 한교의 지도자인 백야 장군을 잃고 나니 한교 사회는 비록 한족총연합회가 있다 치더라도 아직 토대가 잡히지 않은데다가 왜적과 적마들의 발악은 날로 심하여지고 독립운동의 지도적 지위에 있던 운동자들도 어리둥절하여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위에 더구나 운동자금이 군색해지니 이것을 타개할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제2의 백야로서 등장하기는 바랄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북만의 농민운동 같은 독립운동일지라도 재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또 한족총연합회가 농민의 자주 자치를 표방하느니만큼 농민에게 무리한 부담을 지울 수도 없어 난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절대 절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천래天來의 복음같이 국내에서 운동자금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호언을 하며 동지들을 위안시키고 떠났던 것인데 불의의 이 사건으로 국내에 두고 왔다는 그 자금은 물론 신, 최 양 씨가 지니고 왔다는 그 얼마의 금액마저 적에게 압수되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수천 리 북만 길을 무전여행 하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게 되었다. 또 노자나 가지고 간들 무면도강동無面渡江東이지 무슨 낯으로 동지를 대하며 앞일을 어떻기 수습하여 나가야 할 것인가, 앞날이 막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다가 당시 중국신문에 동만東滿 한교 공산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북간도 일대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나가지고 일제 주구는 물론 민족운동자, 지주, 종교인, 교육자들에게까지도 반동분자라고 하여서 방화, 살육 등 파괴를 감행하였으며 봉건 도덕을 파괴 타파한다고 부녀자에게 음행 윤간까지 자행하였다는 등 흉포 무쌍한 기사가 발표되었으니 이것이 일시적 일부 무뢰한들의 거사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이입삼李立三의 방략이라고 하여서 당의 지령으로 야기된 폭동인만큼 곧 북만에까지 파급될 것이 아닌가. 선생과 회관은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초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세에서 거듭한 회의 끝에 선생은 즉시 북만으로 귀환하여 사태 추이를 정관하면서 내부 결속을 굳게 하고 회관은 자금운동을 하기 위하여 복건으로 급행하여 중국 동지의 원조를 요청하기로 하고 중국 각지의 동지들은 북만 사정과 운동의 장래를 고려하여 조속한 시일 안으로 만주에 집중할 것 등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회의는 풍파만 겪고 하등의 결과도 없이 끝을 맺었으나 각지에서 온 십 수 명 대표의 귀환 노비가 또 문제였다. 그 중에도 제일 먼저 떠나야할 선생의 노비였다. 하는 수 없이 정래동, 오남기 등 학생 동지들의 학자學資를 거두기로 하였다. 장마가 퍼붓는 어느 오후에 북경 재류 동지들이 차려놓은 석별의 만찬을 마친 후 선생은 각지 대표들과 조속한 시일 안에 북만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굳은 악수로써 고별하였으며 회관은 북경 정양문正陽門 역두까지 나가서 무언의 이별 악수를 하면서 별루別淚를 걷잡을 수 없었는데 이 별루가 영결永訣의 한루恨淚가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하였으랴.
선생은 떠난 지 3일 만에 무사히 산시에 도착하여 즉시로 한족총연합회와 재만무정부주의자연맹의 임시회의를 열고서 북경에서의 모든 전후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주기 위하여 회관 동지가 복건 방면에 자금 운동으로 떠났으니 불원에 중국 동지들에게서 상당한 재정적 원조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여서 동지들의 용기를 고무하였으니 선생의 초조한 심정은 남모르게 커져만 갔었다.
선생은 권화산 부위원장 및 이붕해 등 한족총연합회 간부들과 비밀회의를 열어서 산시 해림 등지의 사린四隣에 방비를 더욱 충실하게 하는 동시에 동만 일대에 정보원을 급파하여 공산 폭도들의 여세가 북만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태세를 취하게 된 까닭은 이 폭도들의 잔인무도한 야수 같은 행동이 너무도 무궤도하여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이 비일비재하였던 까닭이다. 무고한 예수교도들을 생나무에다 매달고 껍질을 산 채로 벗기며 학교 교원을 산채로 십자가에다가 못을 박고 부녀자에게 난행을 하며 사람을 산 채로 묶어놓고 살을 불에다 달구어 담금질을 하는 등 차마 인간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끔찍스런 짓들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선생이 돌아온 후 만반의 비상대책을 세우고서 회관에게 기쁜 소식이 있기를 고대하던 때에 의외의 비보가 북경으로부터 날아들었다. 회관이 복건으로 가는 도중에 천진에서 적경에 잡혔다는 것이다. 즉 회관은 선생과 작별한 후 10일 만에 북경을 떠나 천진의 우당 선생을 만나 모든 일을 의논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영국 기선 태고양행太古洋行 배를 타고 천진 부두를 출항하려는 찰나에 적경에게 붙들린 것이다.
이 비보는 선생에게 더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이것을 사실대로 동지들에게 발표할 것이냐,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이냐,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비밀에 붙여둘 수도 없지 않은가. 참으로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선생은 남몰래 수삼 일을 고민하던 끝에 권화산, 이붕해 등 간부들에게만 사실을 발표하였으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긴급 총회를 열어서 회관의 피체는 재중국 전 운동전선에 막대한 타격이며 백야의 조난과 아울러 북만운동에는 이 위에 없는 치명적 손실이니 이것을 타개하기 위하여서는 더욱더 단결을 굳게 하는 동시에 중남부 중국에 산재한 동지들을 북만으로 집결하게 하는 수밖에 딴 방법이 없다는 선생의 주장으로 북경, 상해, 복건 등지에 있는 동지들을 즉시 북만으로 초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은 연락이 상해, 북경, 천진, 복건 등지로 날아 들어가자 각지 동지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여 북만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되고 보니, 첫째로 북만에 가면 우리들이 맡을 일이 무엇이냐, 둘째로 남에게 의뢰하지 않고 자력으로 생활을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셋째로 막연히 수의 제한 없이 오라고 하지만 실제로 일에 필요한 인원수는 몇이며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는가, 넷째로 노비를 주선하여 줄 수 있는가 등 의문점이 허다하였다.
이러한 통지를 받자 선생은 한족총연합회와 재만무정부주의자연맹 임시회의를 열고 토의한 결과 첫째의 문제는 그들이 오면 한족총연합회의 근거지인 중동선 일대 그 중에도 산시, 해림, 고령자, 석하 등지의 소학에다 배치하여 자녀교육을 담당시키면 소학이 있는 곳은 대체로 큰 부락이요 중심지이므로 교사도 되고 지방조직화 공작은 물론 그 지방의 생활지도와 개선 등에 일체 지도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니까 지금 우리로서 가장 문제되는 지방 인심의 안정에 절대적인 효과를 거둘 것이니 인수人數는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고, 둘째 문제는 각 학교에 배치가 되면 생활을 그 직업 자체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며 셋째의 문제는 이상과 같이 인수는 많을수록 좋은 형편이니까 문제가 아니요 가족 동반이라야 더욱 지방 사정으로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넷째의 노비 문제가 어려웠으므로 각지에서 노비만은 자변自辨토록 하게하고 이 뜻을 즉시 각지에 통지하였다.
원래 각지에서도 노비에 대하여서는 즉시 출발 내만來滿하라니까 그렇지 실상 재만 동지들에게 재정적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지 않은 까닭에 각지에서도 급히 서둘러서 천진 우당 선생 우거에 모인 것이 10월 말이었다.
정화암, 백구파, 김지강, 왕해평(장기준) 등과 왕해평의 부인이요 우당 선생의 따님인 이규숙李圭淑 및 우당 선생의 막내 따님 이현숙李賢淑 등 일행 15인이 떠나게 되었다. 우당 선생도 동행하실 계획이었으나 뒷일이 거리낄 뿐 아니라 과연 노선생으로 동절을 앞두고 서투른 지방에서 건강이 지탱할까 염려되어서 명춘이나 후일 안정된 때에 오시게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중국인으로 완전 변장하고 일행이 3일 만에 산시에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선생을 위시한 여러 동지를 만나게 되니 이 일행의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선생의 기쁨이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족총연합회 동지들은 천백의 원군을 얻은 양 용약勇躍하였다. 더욱이 이규숙 자매의 몸에서 단총短銃이 10여 정 나오고 그들의 행리 중에서 탄환과 폭탄이 10여 개가 튀어나오니 일좌가 경탄과 환희의 쾌야快也를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규숙 남매의 대담 무비함에 모든 동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4. 한족총연합회의 내부 정돈과 선생의 최후
수일을 두고 초조와 우수 중에서 남모르게 속을 썩이고 있던 선생은 비로소 용기백배하여 며칠간 피로를 풀게 한 다음 동지 일행을 각지에 적절히 배치하고 선생 자신은 배치된 곳곳을 역방하면서 주민들과의 사이를 원만 융화되도록 주선하였던 것이다.
다수한 새 사람들이 들어와서 각지에 분산 배치되어가지고 정직 순박한 언동으로 노유를 막론하고 그들과 괴로움을 나누며 손을 잡고 지도하니 모두들 신뢰감을 갖게 되어 학부형들은 물론 원근의 일반 주민들도 이제야 우리 부락에 참다운 지도자가 왔다고 존경하게 되었다. 시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들에 대한 소문과 아울러 내부 정돈을 꾀한 한족총연합회가 전면적으로 사업을 추진하여 불원에 북만중학도 예정대로 개교한다는 소문까지 사방에 퍼졌다.
북만의 동기冬期는 길고도 길었다. 음력 연말연시의 농한기를 통하여 지방 조직과 사상계몽 생활개선과 지도 등 2대 목표를 가지고 선생이 선두에서 각지에 배치된 동지들을 동원하여 각 부락으로 순회강연을 하며 학생과 직원으로 구성한 간이한 극단을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는 등으로 주민들에게 상호부조의 협력과 자주 자치적 단결로만 우리가 발전할 수 있고 독립을 완수할 수 있다고 협동 자주의 정신을 고취시키니 그 효과는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전 주민은 부락 부락이 예외 없이 자진하여 한족총연합회의 지도에 따라 반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심이 안정되고 주민이 혼연 단결하여 한족총연합회로 뭉치어 활발히 운동이 전개되니 이에 공포와 위협을 느끼고 이것을 파괴하려는 자 또한 많았다. 왜 기관과 주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적마들도 왜경에 못지않은 파괴자였으며 한편으로 소위 독립운동을 가장한 일부 인사 중에도 시기와 질투의 찬 눈초리로 비방하는 부류가 있어서 항상 놈들은 총연합회의 활동에 주의와 감시를 암암리에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엄동이 지나고 봄철이 찾아들자 선생에게는 새로운 걱정이 생기었다. 새로운 동지 중에 가장 열렬한 맹장인 구파 백정기 동지가 북만 혹한의 탓이었는지 고질인 폐병으로 3월부터 신음하기 시작하다가 4월부터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 구파와는 이전 상해 시절부터 유달리 친한 터이었을 뿐 아니라 이번 북만에 온 이래로 더욱더 모든 면에 의기상합하여 여러 가지 앞일을 계획하던 이때에 병석에 누운 것은 선생으로서는 걱정 중의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월여를 두고 치료를 거듭하다가 4월 말 경에 병세가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화암과 상의한 끝에 화암이 보호하여 상해로 가서 의약의 충분한 치료를 받도록 하고 5월 중순에 북만을 출발하고 말았다.
사람이 느는 것은 몰라도 주는 것은 안다더니 열성의 맹장이 둘이 줄고 보니 선생의 마음은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이 구파와 화암 두 동지가 출발한 후 일순一旬이 지나지 않아서 돌연 적경이 중국 지방치안 당국과 강력히 교섭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수사하려고 한다는 정보가 선생에게 들어왔다. 그 원인은 화암과 구파 양 동지가 합이빈을 통과하는 때에 미행하는 적경의 주구를 저격 사살하고서 적의 경계망을 탈출하였던 까닭에 적경들은 이것이 한족총연합회의 소행이라고 하여 그 근거를 이 기회에 수사 파괴하려는 흉계였다. 선생은 이것은 적들의 모략중상이라고 역설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중국 경찰도 적경들의 간섭에 대항하는 항일 의식에서 우리를 동정한데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위험은 이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절박하여 왔다. 이 절박하여오는 위험이란 적마에게서였다. 적마들과 왜경들은 마치 서로 연락이나 한 듯이 상호 교대하여 파상적으로 공격해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왜적과 공산주의자들은 다 같이 양면의 적이라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본래로 말하면 공산주의자도 항일 구국의 일익으로 인정되었던 것이지만 국제공산당의 조종 아래에서 점점 반동화하여가지고 현재에 와서는 민족정신이나 감정은 물론 인간적 양심조차도 없는 병적인 국제공산당에 맹종하는 기계며 주구로 되어서 민족을 배반하며 인간을 반역하기까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저 적마들을 같은 민족이요 같은 사람이라는 견지에서 항상 관용하는 까닭에 수동적으로 대하게되니 언제나 선수를 빼앗기기를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서 왜경이 다시 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7월 초순에 왜적들과 보조를 맞추는 듯이 한족총연합회의 중추인물인 선생과 재만무정부주의자연맹원들을 제거하는 것이 놈들은 계획이 성취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적마들은 암암리에 도당을 대량 잠입시키어가지고 7월 초순을 기하여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선봉이요 한족총연합회의 간부 차장인 이준근, 김야운 양 동지를 석두하자 백야 장군의 계씨季氏인 시정時旌 김동진金東鎭의 집에서 저격 살해하였으며 또한 북만 독립운동의 거인 시야 선생도 해림 역전 각산覺山 조영원趙永元의 집으로 유치하여 어디론지 납치해 가버렸다. 동지들은 오랫동안 그 종적을 찾아 사방으로 헤매었으나 전혀 알 길이 없으니 이것이 시야 동지의 최후였다.
그리하여 시야는 북만에서 재만 한국독립운동자 그 중 한사람의 이름으로 적마의 손에 의하여 시체도 없이 살해되었던 것이다. 적귀赤鬼들은 죽어서도 조국독립을 부르짖고 인류의 자유를 외칠 것을 두려워함인지 그의 시체마저 죽여 버렸던 것이다.
단기 4264년 7월 11일, 육신과 아울러 그의 정신이 영원히 사라진 시야 마지막 날인 이 날을 동지들은 유족과 더불어 그의 순국일로 정하였다.
슬프다, 선생은 31세로 인생의 끝을 맺었고 십유 년의 혁명투쟁은 그 막을 내렸다. 그의 유족으로는 부인 홍종표 여사와 장자 성한, 장녀 동한, 차녀 옥한玉漢의 삼남매가 있으며 차녀 옥한은 유복녀로서 선생 조난 후에 고령자에서 출생하였다. 거수巨樹가 넘어지면 사방이 환하게 트이건만 선생이 가니 사방이 캄캄하고나.
哭 是也 동지
정열과 냉철을 겸비함이 혁명가로서 갖추어야할 조건이라면 동지는 그것을 아울러 갖춘 완전한 혁명가이었으며, 관용과 성실과 다정이 인생으로서 갖추어야할 미덕이라면 동지는 이 미덕을 갖추어 가진 사람이었다. 국난이 닥쳐와 국망가파國亡家破한 지 반세기에 수많은 의인 열사가 배출하였으며 겨레와 나라를 위하여 성스런 희생을 바쳤다. 그러나 완전한 한 그릇을 이룬 것은 동지가 아니었던가. 혁명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갖기 드문 미덕을 갖추었고 일가를 이룬 포부와 경륜을 지녔으며 진취적이요 인도적인 투철한 사상을 품고서 민족과 인류의 영원한 앞날을 위하여 싸운 끝에 넘어지고만 동지가 아니었던가.
동지의 조난은 동지 한 사람의 조난이 아니라 민족의 수난이며 인류의 수난이었다. 동지의 혁명 투쟁의 막이 닫히자 한족총연합회의 막도 내려졌으며 전 만주 한교는 희망을 잃었고 몇 날이 아니 가서 왜적은 만주사변을 일으키어 병탄倂呑하고 말았다.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할 것이랴.
만주에 한교가 2백만이 있으되 동지가 없으니 텅 빈 벌판이 되었고 충용한 구국 청장년이 만 천이 있으되 동지가 없고 보니 무장약졸無將弱卒처럼 되고 말았고나. 아 슬프다.
내가 슬퍼함은 동지를 위하여 그대의 죽음을 슬퍼함이 아니라 겨레와 인류의 앞길을 위하여 하나의 등대가 꺼졌음을 슬퍼하는 것이요, 내가 서러워함은 동지의 요절夭折을 아껴 서러워함이 아니라 동지의 포부와 경륜을 펴보지 못했음을 서러워하는 것이다. 등대가 꺼졌으니 민족과 인류의 행로가 캄캄하고나. 아, 슬프고 서럽다.
碑 銘
同志의 성명은 金宗鎭이요 호는 是也다. 단기 4234년 음 12월 26일 忠南 洪城郡 龜項面 內峴里에서 출생하니 李朝 丙子 節死臣 安東后人 仙源 金尙容 공의 11대 손이요 參奉 泳圭 공의 第四子로 모친은 靑松 沈 씨다.
동지는 8세에 서당에 입학하여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1세 때에 재종숙 學圭 씨에게 出繼하니 양모는 恩津 宋 씨다. 3·1운동 선언이 선포되자 동지는 3월 7일 홍성 민중 시위 대열을 선동 지휘타가 주동자로 被禁 되어 數月 옥고를 겪고 동년 6월에 미성년이라 하여 석방 후 곧 상경하여 중동중학 속성과에 학적을 두고 지하운동에 분주하다가 적의 毒牙가 미치자 4253년 4월에 奉天으로 망명하여 令伯氏 淵鎭 씨와 같이 내외 연락을 하던 중에 국내로 무기를 반입타가 洪景植이 피금 되자 4253년 秋에 재차 北京으로 망명하였다.
북경서 홍성 의병의 노장 古狂 李世永 씨와 北軍政暑 대표 靑蓑 趙成煥 선생 및 독립운동의 거성 友堂 李會榮 선생 등 다수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내외 정세를 靜觀타가 운동자로서의 자신의 교육과 훈련의 필요를 깨닫고 결연히 上海로 임시정부 법무총장 ?觀 申圭植 씨를 찾아 그의 소개로 雲南省 督軍 唐繼堯 장군을 왕방하고 4254년 4월 雲南省 군관학교 교도대에 입대하여 교도대 2년, 군관학교 2년 반의 교육과정을 밟아 무인으로서의 실력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의 지식을 갖추고 4258년 9월에 졸업 후 곧 상해로 돌아오니 저간의 독립운동 진용은 격변하여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3파로 완연 鼎立되었다. 동지는 이들 3파와의 접촉에서 무정부주의자들과 肝膽相照되어 실제 운동의 본거지인 북만으로 총 집결할 것을 約하고 입만 동지를 규합코자 4259년 春에 南京, 漢口, 武昌 등지로 1년여의 고초를 겪다가 天津으로 우당 이회영 옹을 방문하고 다년간의 숙원지인 北滿 中東線으로 新民府의 지도자요 동지의 족형인 白冶 金佐鎭 장군을 찾으니 때는 4260년 10월이었다. 백야로부터 북만의 제반 정세를 듣고 동지는 각 지방 실정과 敵情을 시찰코자 중동 吉敦沿線 及 長白 撫松 등 백두산 北麓 산간지대를 일순 후 4261년 8월에 돌아와 백야 장군에게서 전 운동 조직의 개편 재훈련과 교민에게 항일 반공 사상 계몽의 철저 및 교포와 운동자의 단결이 喫緊함을 건의하였다. 이는 동지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무시 유린하는 점에는 일제나 공산주의자가 동일하므로 赤魔는 항일의 우군이 아니라 측면의 적이라 보았다. 4262년 7월에 사상계몽 단체로 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고 그 대표자가 되었으며 백야 장군의 위촉으로 신민부의 개편 정비를 책임 입안하다. 동년 8월 교민의 자치조직체로 在滿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고 일체 조직을 일원화하여 그 조직부 위원장 겸 농무부 위원장에 취임한 후 사상계몽과 적색분자 제거, 農戶의 집단 정착 및 중심부락에 소학교 설립 及 중앙지역에 北滿中學을 기성하고 주경야독 계절 수학의 길을 열어 민심의 안정과 신뢰가 높아지니 적마와 일제 走狗의 흉계 모략은 격심하여 4263년 1월에 적마 손에 백야 장군이 암살되었으나 그 치명적인 난국을 동지는 민속 과감하게 수습하였으며 4263년 春에 북경에서 개최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대표대회에 북만 대표로 참석하여 민중운동이 크게 활기를 띠니 적마들은 극도의 위협을 느끼어 마침내 4264년 7월 11일 중동선 海林驛 교외로 동지를 유인한 후 어디론지 납치 암살하니 31세를 일기로 겨레와 인류의 자유를 위한 동지의 투쟁은 막을 닫았고 한족총연합회 운동도 終焉을 고하였다. 재만 한족 독립운동의 거성이 이렇게 떨어지니 민족의 앞길이 캄캄하였다. 슬프다, 그 올매운 넋이 없으랴만 유해조차 찾지 못했으니 아! 英靈을 위로할 길이 없고나. 이 원한을 품은 유족과 동지들이 동지의 유지를 길이 전하며 그 영령을 길이 받들고자 楊州郡 瓦阜面 德沼里 仙源 墓下에 동지의 유품을 유해 삼아 葬하고 충혼을 기념코자 建碑하니 이 아니 仙源의 내림인가. 아! 슬프다. 유족으로 부인 南陽 洪宗杓 여사와 장남 成漢 장녀 東漢 차녀 玉漢의 3남매가 있다.
단기 4295년 12월 일
同志 又觀 李丁奎 謹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