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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관?우관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김창덕(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목 차>
Ⅰ. 회관, 우관의 독립운동의 의미
Ⅱ. 대일항쟁으로
1. 대일항쟁의 출발점
2. 중국 망명과 아나키즘의 수용
Ⅲ 중국에서의 항일투쟁
1.아나키스트 혁명가
2.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와 크로포트킨주의
3. 마흐노프쇼치나와 천영이속(泉永二屬) 민단편년처(民團編練處) 운동
4. 바쿠닌의 연합주의와 동방무정주주의자연맹
5. 만주에서의 투쟁과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6. 재만한족총연합회
Ⅳ 해방 이후 신조국 건설을 위한 운동
1. 자유사회건설자연맹
2. 전국아나키스트대회와 독립노농당
3. 민주사회당
Ⅰ.회관과 우관의 독립운동의 의의
아나키즘은 “개인이 평등한 입장에서 자유롭게 협력하는 사회”의 창조를 목표로 하는 정치사상이다. 따라서 국가에 의한 지배나 자본가에 의한 지배나 모든 형태의 히에라르키 지배에 반대한다.이런 점에서 아나키즘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폐단이 극단에 이르게 된 유럽에서 그 경종의 의미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아나키즘이 유입된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대외 침략과정에서 야기된 증세문제와 노동문제 그리고 침략전쟁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경우에는 19세기 이후의 암울한 현실과 무기력한 민중을 계몽하려는 의미에서 출발했다고 할 있다.
하지만 이에 비해 한국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의 시작은 다소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다. 즉 한국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의 출발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점증하는 일제의 침략전쟁, 특히 일제의 한반도 침략에 대한 투쟁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3?1운동 이후 민족적 자각의 절규인 동시에 인격의 해방을 부르짖는 인격의 각성의 따라 일제의 침략 하에서 인권의 유린과 경제적 착취로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한민족이 지배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생존권을 탈환하자는 운동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당시 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를 풍미하던 러시아 혁명의 흔적이 우리의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또 다른 권력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나아가 약속민족에 대한 침탈을 공공연하게 자행하던 러시아 혁명의 실상이 알려지고 나아가 3.1운동 이후 알력과 암투, 그리고 심한 분열로 “정치의 불순성에 혐오를 느낀 자들이 특히 청년의 정의감에서 정치와 정부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은 조국이 처한 식민적 상황에 대한 인식과 함께 뚜렷한 민족주의의 경향을 띠고 있었으며 그들은 조국의 독립과 함께 독립 쟁취 이후 아나키즘을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운동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식민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동북부, 상해, 북경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제의 심장인 일본 땅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중국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은 1923년 신채호와 유자명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선혁명선언에서 기초하며 이에 당시 북경에 머물던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 백정기 등이 참여한 1924년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회관 이을규와 우관 이정규 형제(이하 회관, 우관으로 칭한다)는 3?1운동을 전후해 중국으로 망명한 혁명가로 일제에 피체되기 까지의 10여년 동안 중국에서의 적집행동을 통한 항일투쟁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자유사회건설자연맹, 그리고 민주사회당의 결성에 참여하면서 아나키즘이 꿈꾸는 “억압이나 강요가 없는 자유의사로써 의존하여 사는 자유연합의 사회 즉 자유연합 조직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생애를 바친 아나키스트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Ⅱ. 대일항쟁으로
1. 대일항쟁의 출발점
회관은 1894년 음력 2월 21일 이정훈(李鼎薰)의 2남으로 서울 공덕동에서 태어났으며 우관은 그보다 3년 후인 1897년 음력 10월 7일 인천의 장봉도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이들 형제 위로 장형인 갑규가 있는데 회관, 우관 뿐만 아니라 갑규를 포함한 3형제 모두 일찌감치 투철한 민족의식과 함께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품고 있었다. 회관과 우관의 경우 약관을 전후한 나이에 일찌감치 대일 항쟁의 길에 뛰어들었으나 장형인 이갑규의 경우 직접적으로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에 장남으로서 회관과 우관이 비운 집안을 지켜야 했으며 가족을 부양하고 고향을 일궈야 했다. 특히 회관, 우관 두 아우에 대한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이들의 대일 투쟁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예를들어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단 방한 시 미국의원환영위원으로 활약하던 우관과, 이종학, 정화암 등이 일제의 압박을 피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당시 인천에서 운수업을 하던 이갑규의 도움을 받아 감시와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이갑규의 차남인 하유 이종봉은 이런 부친을 대신해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유는 중동학교 재학 시절 광주학생운동에 뛰어들어 1년간의 옥중생활을 지낸 강한 민족의식을 지닌 투사였다. 이후 일본대학 사회과 재학 중 흑우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 1936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기초로 강력한 대일 투쟁을 전개했다. 1939년에는 나월한과 함께 항일전선의 제일선인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해 직접 일제와의 투쟁을 이어가며 중국에서 해방을 맞이했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다.
뿐만 아니라 하유의 빙장인 오연 김복형 역시 3?1운동 참가 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와 흥사단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밖에도 이들의 외가인 한양 조씨 집안 역시 강한 민족의식과 함께 이들의 독립운동에 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술한 대로 이갑규의 도움으로 피신해 있던 이종학과 정화암이 일제의 감시가 엄중해지면서 더 이상 인천에 머물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외가인 한양 조씨 집안이 모여 살던 장봉도로 건너가 몸을 피했다는 기록은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장봉도에 도착하니 이정규의 외숙이 반가이 맞아 준다. -중략- 그분은 우리를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우리는 그집에서 며칠을 쉬었다.”고 말한대로 이들 외가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지 역시 독립운동 과정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참고로 회관은 1908년 3월 그의 나이 15세 때 같은 외가인 한양 조씨 조종래(趙鍾來)의 장녀 정원(靜元)과 100년 가약을 맺게 된다.
회관은 그의 나이 20세인 1913년 3월 인천공립상업학교(지금의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년 6월 평안농공은행 의주지점에 근무하게 된다. 농공은행(農工銀行)이란 1906년 3월에 제정하고 공포된 「농공은행조례」에 의거해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던 지금의 지방은행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회관이 입사할 당시 전국에는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 함경농공은행, 평안농공은행, 경상농공은행 외에도 전주와 광주에도 설치되었다. 표면적인 설립 목적으로 조선의 농업과 공업의 발달과 개량을 위한 자금 대부 등을 내세웠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 보면 당시 조선으로 건너 온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각종 사업자금을 지원하는게 주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업무를 대행하면서 일본인들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정착을 위한 농지 구입자금까지 제공했던 것이다. 이후 1918년 농공은행을 모체로 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 설립되면서 이에 흡수되어 해체되었는데 바로 그해 회관이 농공은행 의주지점을 사임했던 주된 이유가 바로 이렇게 일제에 의해 저질러지는 실상을 직시하게 되면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지가 더욱 강렬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직후 압록강 건너 안동(지금의 단동시)으로 건너가 남정 박광의 도움으로 간성덕 및 동신공사라는 무역상을 차리고, 국내외 동지 간에 연락과 자금조달의 역할을 했다.당시 회관이 주로 취급했던 물품은 곡물로 그 시작은 1918년 8월 안동현에서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회관에게 도움을 주었던 박광은 만해 한용운의 수제자로 일찍이 1909년 청소년으로 조직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꾸려 항일 활동을 펼쳤던 투사였다. 따라서 박광과의 교류를 통해 회관의 대일 항쟁 의식은 더욱 구체화되었을 것이다.
당시 안동현은 한반도와 만주를 이어주던 곳으로 일제에 의한 강제병탄 이후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 애를 먹었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영국영사관이 설치되어있었고 그 영사로 아일랜드 출신의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1880~1943)가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륭양행은 상해와 안동 사이의 정기항로를 유지하면서 화물과 여객을 수송했으며 또한 대영제국의 치외법권이 미치는 곳이었다. 특히 당시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벌이던 아일랜드 출신의 쇼는 자연히 우리의 민족 운동에 깊은 동정을 가졌고, 우리 독립운동가를 도왔던 인물이었다.이처럼 이륭양행은 1919년 초부터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교통기관이었으며, 회관이 활동하던 안동 구시가의 간성덕은 그 중계기관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따라서 이 안동현에서 간성덕을 중심으로 했던 활동이야말로 회관의 본격적인 대일투쟁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 아우인 우관 역시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회관과 마찬가지로 우관 역시 1914년 18세 때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호농공(漢湖農工)은행 공주지점에 취직했으나 일본인 주임과의 충돌을 계기로 곧바로 사직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후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학우회)에서 서무부원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대일항쟁의 길에 들어선다. 또한 1919년에는 동경 유학생 2?8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3월 초 3?1독립선언문과 일본 각계에 보내는 통고문을 한기악(韓基岳), 계인상(桂麟常), 안승한(安承漢)과 인쇄해 배포하기도 했다.
이후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 것이 그해 3월이었다. 1919년 4월 상해에 도착해 임시정부에 합류하는데 곧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법기관 의회였던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1919년 7월 7일부터 1920년 1월 20일까지 충청도 대표로 활동한다. 이 시기의 두드러진 우관의 대일 투쟁으로는 1919년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교통망 구축사업이었다. 교통국은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으로 그 주된 활동은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이를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다시 임시정부의 기밀문서 등을 서류를 국내로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아가 독립운동을 위한 인물의 소개 및 무기의 수송과 전달 그리고 임시정부 활동을 위한 군자금의 모금 등이 주된 업무였다. 우관은 임시정부 교통국 안동지부 사무국장이었던 홍성익, 김준기 등과 함께 교통망 설치를 계획하기도 한다.
이 교통망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바로 이륭양행 2층에 있었던 안동교통국이었으며 회관이 운영하던 간성덕은 중계기관으로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여 기밀문서 및 위험물 수송을 담당했다.
이어서 회관의 본격적인 대일 투쟁기록으로는 1919년 11월의 “의친왕 망명사건” 일명 “대동단 사건”을 들 수 있다. 대동단 또는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란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한 때 친일집단이었던 일진회(一進會)의 총무와 평의원을 지냈던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비밀 항일 결사조직으로 전협은 불과 20여세에 자신이 저질렀던 한 때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나라를 위해 나섰던 것이다.항일 독립운동을 주 목적으로 하던 대동단은 귀족이나 관리, 유림과 종교인, 상공인, 청년학생 등 당시 사회의 유력층을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했다. 회관이 어느 시기부터 이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는지 확실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해 11월의 “의친왕 망명사건”에서 핵심 요원으로 참여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3월 결성 당시부터 가입해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대동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망명시켜 임시정부에 참여시키려던 계획이었다. 전협, 정남용(鄭南用), 김가진 등이 의친왕을 상해로 탈출시켜 조선의 왕실이 결코 합병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의친왕의 입을 통해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제2차 독립선언을 발표해 국내외의 여론을 고취시키고, 이를 통해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려 했던 것이 주된 목표였다. 이를 위해 같은 해 10월 10일 대동단 총재인 김가진과 전협이 먼저 상해로 탈출해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안창호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서 동년 11월 9일 회관을 비롯한 정남용, 한기동, 송세호(宋世浩) 등이 의친왕과 함께 수색역을 출발해 열차편으로 압록강을 통과해 11월 12일 만주 안동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의친왕의 탈출계획을 사전에 감지한 평안북도 경찰부에서 파견한 경부(警部) 요네야마(米山)에게 발각되어 임시정부로의 참여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되고 말았다. 결국 의친왕은 다시 서울로 호송되고 나머지 대동단원들은 연이어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이 사건의 주모자인 전협과 최익환은 징역 8년과 6년, 나머지 관련자 20여 명도 최고 5년에서 최하 2년까지 언도받았다. 이 거사에서의 회관의 역할에 대해서는 1920년 12월 28일의 신문에서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피고 이을규는 정남용 등과 共히 同夜 11시 경 수색역으로부터 李堈공의 신변에 附添하야 봉천행 열차에 탑승한 후 우 피고 송세호와 합하였고 도중 송세호는 평양에 하차하여 관헌의 경계를 탐사하고 이어 열차로 안동현에 도착하기로 하여 동역에 降車하고 피고 정남용, 이을규는 이강공을 감시하며 다음 11일 오전 11시경 국경 밖이 되는 안동현에 도착하여 동역에 하차하였는데 경계의 경찰관에게 발견되어 이강공은 보호를 受 하고 피고 정남용은 체포되었고 피고 이을규는 그 장소에서 도주하였더라.”
이처럼 회관의 임무는 의친왕을 안동까지 무사히 호위하는 역할로 일제의 마수가 덜 미치는 중국 안동까지 일제의 경찰의 눈에 띄지 않게 하면서 무사히 의친왕의 탈출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하지만 목적지인 안동역에 이르러 잠깐의 안도의 한숨을 쉬는 평소 의친왕을 알고 지내던 일본 형사 요네야마의 감시에 걸려들어 의친왕은 서울로 압송되고 회관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영국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륭양행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 회관은 임시정부와 서울 간의 원활한 연락을 위한 연통제를 완성하기 위해 양기탁, 강태동, 우관 등과 함께 재차 서울로 잠입해 지하조직을 결성 중 그해 1월 대동단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복역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해 11월에 회관은 보석으로 석방된 이후 곧바로 상해로의 망명을 결심하고 이듬해인 1921년 초 중국으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당시의 상황을 화암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이을규의 석방은 우리의 독립운동 의욕을 더욱 굳혀 주었고 나의 해외탈출 결의를 재촉하였다”고 하면서 당시 독립운동, 특히 화암의 투쟁의지에 당시 27세였던 젊은 회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2. 중국 망명과 아나키즘의 수용
때마침 같은 시기인 1921년 초 당시 온양금융조합에서 금전출남을 맡고 있던 진수인이 그의 친구 최익수와 공모해 조합의 돈을 빼내어 중국으로 망명하자는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이 두 사람과 함께 회관과 우관 형제 그리고 정화암과 이종락이 동행을 결심한다. 이종락은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1919년 11월 정화암과 처음 만난 이후 1920년 8월 미국의회의 방한에 맞춰 우관, 정화암과 함께 시위에 참가 도중 체포 직전에 우관과 탈출에 성공했던 활동 이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의주에서 이종락의 대학 동창이었던 김전기의 도움을 받아 은행원을 가장해 탈출을 시도했다.
우선 6명이 2명씩 조를 편성해 3번에 걸쳐 탈출하게 되었다. 제1진으로 회관과 진수인, 제2진으로는 우관과 최익수, 제3진으로는 화암과 이종락이 출발하기로 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이들 6명은 안동을 거쳐 봉천으로 이어서 천진을 거쳐 상해로의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을 대하는 중국 현지의 실상은 실망이었다. 당시 대표적인 민족주의 계열로 여겨졌던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는 그 투쟁방법에서 외교론에 비중을 두었는데 그로 인해 일부 강력한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운동가들은 결국 임시정부를 떠나고 말았다. 3.1운동이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진행된 결과에 따른 반발심과 더블어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의 침체, 그리고 당시 그들이 의존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서구열강의 속성을 간과했던 임시정부의 투쟁 방법에 대해 반발심을 품고 무언가 좀더 적극적이고 새로운 투쟁을 모색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단재 신채호나 우당 이회영 등이 이런 임시정부의 실정에 회의를 느끼고 사상적 방황을 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당시 중국 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으로 알려진 우당 조차도 “정부라는 조직형태를 취하는 것을 반대했다. 우리가 지금 문제로 하는 운동의 조직이란 것은 그러한 행정적인 조직형태를 가지고서 해결될 것이 아니라 ?중략- 그러한 조직을 가지고서는 그렇지 않아도 허영과 지배욕이 우리 운동자들 중에는 가득차 있는데 그 정부라는 명칭으로 인하여 서로 지위와 권력 등을 중심하는 분규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며”단호하게 임시정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임시정부의 제1차에서 3차에 걸친 임시의정원 명단을 보면 단재 신채호를 비롯해, 성재 이시영, 우당 이회영 등의 이름을 읽을 수 있으며, 이어 1919년 4월 30일에서 1920년 1월 20일까지의 제7차 임시의정원에도 단재 이외에도 유자명, 김창숙, 이정규 등등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이후로는 이들의 명단이 완전히 빠지고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회의론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상해임시정부를 등지거나 소외된 독립운동가들이 우당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우당 이회영은 1919년 하반기부터 북경에 터를 잡고 있었다. 신채호, 박용만, 김창숙도 그리고 김달하도 아직은 일본밀정혐의로 살해되지 않고 살아서 이들과 교류하고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가 우당의 집에 드나들고 있었다. 모두 궁상에 찌들고 뿔뿔이 으슥한 집에 몸을 붙이고 살지만 ‘해방’을 위한 일제와의 투쟁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었다”고 한 것처럼 회관과 우관을 비롯한 적극적 대일 투쟁파는 우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투쟁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에 회관과 우관 형제는 좀더 적극적인 투쟁 방법을 찾아 나섰는데 그것이 바로 1917년 혁명의 열기로 가득했던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로 세운 프롤레타리아 정권으로 그 충격은 단지 러시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면서 이에 회관을 비롯한 우관과 화암 등 세 명은 직접 러시아 혁명을 몸으로 체험하고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우선 이들은 러시아 치타(Chita)에 위치한 국립원동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여운형에게 부탁했으나 이들 3명의 공산주의 사상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이후 안병찬의 소개로 김만겸을 만나 일크스크에서 열리는 극동노동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공산당에 입당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회관과 우관 그리고 화암은 입당 수속까지 마쳤다. 하지만 이때 북경에서 유자명과 조소앙을 만나게 되면서 방향이 급선회하게 되었다. 이미 서유럽 여행을 막 끝내고 북경에 도착해 있던 조소앙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권력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러시아 볼세비키 정부의 권력통치의 실체를 깨닫게 된 것이다. 또한 같은 시기 일본에서 추방되어 중국으로 건너온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맹인 시인 바실리 예로센코(Vasili Eroshenko)를 통해서도 러시아 공산정권의 실상을 파악하게 되면서 결국 러시아행을 단념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921년 12월의 일이었다. 이후 베이징에 작은 전셋집을 얻어 살면서 이회영, 유자명 등과 접촉하고 나아가 당시 북경대 총장 채원배와 이석증 등과 알게 되면서 또 하나의 사회주의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회관과 우관이 짧은 순간이나마 한 때 볼세비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주된 이유로는 그 당시까지만해도 사회주의 영역에서 아나키즘과 볼세비즘의 확실한 분화가 있기 전 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나키즘이 볼세비즘을 압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는 일본의 전체 사회주의를 대표해서 1920년 10월 5일 일본을 탈출해 상해의 코민테른 사회주의자 대회에 참석했을 정도였다. 나아가 오스기 사카에는 1921년 1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노동운동에 활용했을 정도로 당시의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의 대세였으며, 대체로 1922년경 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도권은 아나키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러시아 혁명의 실태를 정확히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사회의 변혁을 둘러싼 전략과 전술의 근본적인 상이점으로 인해 아나키즘과 볼세비즘은 본격적인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된다.
결국 1922년 7월 일본공산당의 창립을 계기로 아나키즘과 볼세비즘은 공동투쟁의 막을 내리고 드디어 대립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중국 역시 1911년의 신해혁명 이후 유사복(劉師復)의 선전과 이석증(李石曾)의 교육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아나키즘은 1919년 5?4운동을 통해 최절정기를 맞이한다. 예를들어 1920년에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상해공단자치연합회의 경우 모두 37개의 단체가 가입할 정도였다. 이 시기에는 모택동 조차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밝힌 적이 있을 정도였다. 중국 마르크스 주의의 원류라 하는 이대조(리다자오:李大釗)역시 그의 마르크스주의에는 톨스토이와 크로포트킨에게 영향을 받은 아나키즘의 색채가 강하게 담겨 있었을 정도였다.하지만 1919년말부터 마르크시즘이 점차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거치면서 1922년부터 본격적인 아나?볼 대립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1927년의 광주코뮌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영역에서의 주도권은 완전히 마르크시즘으로 넘어가게 된다.
회관과 우관 등이 본격적인 투쟁을 위해 공산당 가입과 함께 러시아행을 고민하던 시기가 바로 이런 아나?볼 대립의 암운이 짙게 깔리면서 본격적인 대립을 예고하던 시기였기에 어쩌면 회관이나 우관처럼 사회주의 투쟁을 생각하던 운동가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히 예정된 혼란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1921년 말부터 1923년에 걸친 약 2년의 베이징 생활을 거치면서 회관과 우관은 우당 이회영(李會榮), 단재 신채호(申采浩), 북경사대 교수였던 노신(루쉰:魯迅) 형제, 러시아의 맹인 시인 예로생코, 대만의 혁명동지 범본량(范本梁) 등과 교류를 하면서 아나키즘이야 말로 조국의 독립을 펼치기 위한 최선의 사상으로 받아들였으며 체계적인 아나키즘 이론 습득과 함께 급진적인 아나키스트 혁명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Ⅲ 중국에서의 항일투쟁
1.아나키스트 혁명가
이 당시 회관, 우관을 비롯해 우당이나 단재, 그리고 우근(友槿) 유자명(柳子明) 등과 같은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몇 가지 큰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강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원래의 전통적인 아나키스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물론 민족주의에도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생각하는 민족주의자란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지배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지극히 불순한 세력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백군과 적군 양쪽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던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의 리더 마흐노(Nestor Ivanovych Makhno)역시 “마프노주의 운동은 적과 백 양쪽의 독재와 싸웠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에게도 저항”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전통적인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우당을 비롯한 회관, 우관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와 아나키즘과는 아무런 이론상의 상이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장애요인이 될 수 없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오히려 아나키즘에서 강조하는 자유연합의 논리를 앞세워, 국민당이나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이나 연합을 통해서 자신들의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실제로 1929년 7월 만주에서 시야 김종진(金宗鎭)과 회관, 화암 등이 중심이되어 결성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의 기본강령에서도 “우리는 항일 독립전선에서 민족주의자들과는 우군적인 협조와 협동작전적 의무를 갖는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로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이들 아나키스트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바로 “자유연합”의 실현이었다. 우당 이회영은 이에 대하여 “독립운동자의 견지에서 나는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남들이 강철의 조직이라고 하고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적로(赤露)와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이 확립된 후의 말이지 그들도 혁명당으로서의 혁명 과정에서는 운동자들의 자유합의에서 행동하였던 것”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동서를 통하여 소위 해방운동이나 혁명운동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운동이고 운동자 자신들도 자유의사, 자유결의에 의한 조직운동이었으니까 형식적인 형태는 여하튼지 사실은 다 자유합의의 조직적 운동이었던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에 따라 우당과 회관, 우관을 중심으로 했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은 “자유연합” 즉,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운동이야말로 조국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어서 세 번째로 이들은 자본주의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강렬하고 냉혹한 비판을 가했다. “독재권을 장악하고 인민을 구사하는 정치는 옛날의 절대왕권의 정치보다도 더 심한 폭력정치”라고 주장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확실한 반감을 표시했다.
예를 들어 1948년 동대문 밖 창신동의 정광용 회장 댁에서 발족한 설형회에서 행한 묵당 양희석의 짧은 발언은 아나키즘의 원리가 자본주의 물론 공산주의와도 대척점에 았다는 점을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자본주의자는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이불까지 빼앗아 극소수끼리만 덮으려 하고 공산주의자는 추위에 떠는 다수를 위해 소수자가 가진 이불을 몽땅 뺏어버리려 하지만, 아나키스트는 소수자와 다수자 어느 누구도 희생이 되지 않도록 모두를 따스하게 해준다.”라는 양희석의 아나키즘의 원리야 말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불신과 혐오의 감정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는 항상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영역을 통과하다 체포된 자는 자루에 산채로 묶어넣고 강위로 떨어뜨려 익사시키거나 땅구덩이에 생매장 하는 등등 서로가 잔인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곤 했었다.
이런 아나키즘의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6?25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3월 회관, 우관 형제를 비롯해 윤재남, 이동준, 김기남, 유정렬 등 15인이 모여 세계반소토공(反蘇討共)연맹을 발기, 선언 강령까지 마련했던 것이다. 그 강령의 가장 첫 번째가 우리는 이론과 사실로써 공산주의의 파괴적 반사회적 마성을 폭로하여 적색 공산주의의 근멸(根滅)을 기함이라고 밝혔을 정도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은 아나키즘의 뚜렷한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북경에서 지내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은 아나키즘에 대해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다 되었다거나, 무정부주의로 사상을 전환하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다만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생각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나의 사고와 방책이 현대적인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상통될 뿐 본래는 딴 것이었던 내가 새로이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고 밝혔으며 또한 1923년 9월경 우관이 양도촌을 이상촌으로 개발하기 위해 만주에서 이민과 농지개척의 경험을 듣고자 우당을 찾아가서 의논했을 떄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장시간 주고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깊은 관심과 함께 이후 그의 사상이 점차 아나키즘으로 변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처럼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회영을 비롯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의식적으로 아나키즘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사고와 방책을 쫓는 과정에서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인 항일독립을 획득하기 위해서 아나키즘 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2.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크로포트킨주의
이렇게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와 독립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진 후 우당을 중심으로 강력한 대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새롭고 강력한 조직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의 임시정부의 조직형태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며 대신에 그들이 원했던 것은 “실제 운동에 있어서 각 방면과 연락하여 운동에 상호 중복이 없이 마찰이 없이 민속히 진행되도록 지도할 수 있고, 협동 협력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과 조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심점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정부의 형태를 갖춘 것이 아니라 여러 계열과 파가 서로간의 협력을 통한 연합기관이었다. 그 구상의 결과가 바로 1924년 4월 말 베이징의 우당의 집에서 결성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었다. 이 연맹을 결성하게 된 동기에 대해 정화암은 “우리의 운동을 당시의 이론적 기반을 갖춘 사상적 토대 위에서 추진함으로서 대외적인 호평을 얻기 위해, 또 관동대진재 때의 일제 만행에 대한 보복심리에서”라고 밝히고 있다.
연맹 창립 당시의 멤버로는 우당을 비롯해, 회관, 우관, 정화암, 구파 백정기, 우근 유자명 등 6명이었다. 여기서 1923년 초 아나키즘 이론에 따른 직접행동을 주장하고 이를 대일 투쟁의 방편으로 삼았던 단재의 경우에 “북경 순치문내(順治門內)의 석등암(石燈庵)에 칩거하며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섭렵하고 역사편찬에 몰두”하느라 참석하지 못했다. 그 외에도 단주 유림(柳林)의 경우 성도대학(成都大壑)에 재학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고 한다.
연맹은 『정의공보(正義公報)』라는 기관지를 석판(石板) 순간(旬間)으로 발행했으며 이에 필요한 자금은 우당이 전적으로 부담해 9호까지 발행했다. 『정의공보』의 내용은 우당의 편집방침에 따라서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주의 진영 내의 잘못된 생각을 비판하여 독립운동을 정도로 이끌어 가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볼세비키 혁명이론을 비판함으로서 공산주의와 대결”해 갔으며, 이뿐만 아니라 “흥사단의 무실역행(務實力行)론이나 국민대표회 비판”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발행 자금을 부담하던 우당의 생활형편이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고 ‘짜도미’라는 하층민이 먹는 것에 강냉이를 섞어 죽을 멀겋게 쑤어 연명할 정도”로 까지 힘든 형편이다보니 『정의공보』는 9호를 마지막으로 결국 자금난으로 휴간을 하게 되었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활동 내용은 대체로 기관지 『정의공보』를 통한 선전활동과 친일분자들에 대한 응징 등에 머물렀으며 그밖에 특별이 활발한 활동은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내부의 재정난과 점증하는 일제의 탄압 그리고 기본적으로 조직을 부정하는 아나키즘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활동이 개인적인 영역에 한정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회관과 우관, 구파는 그해 9월에 상해로 떠나고 화암 역시 한 달 늦은 10월에 상해로 향한다. 우근 유자명은 그대로 베이징에 남게 되어 각각 흩어지게 되면서 개별적인 투쟁의 시기로 들어서게 된다.
상해에서의 회관, 우관 형제는 1924년 11월 상해 조가도의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서의 취업한다. 이 공장의 공정사인 유태계 독일인 마첼(Machall)의 도움으로 회관 형제를 포함해 화암, 그리고 의열단의 이기연은 좋은 대우 속에서 폭탄제조 기술을 배웠다. 의열단의 김원봉 역시 이 마첼의 도움으로 이 철공장에서 비밀리에 폭탄을 제조했다고 한다. 마첼은 이들에게 특별 대우해주었으며 노임으로 8원씩을 받았다. 이후 중국인 공두에 의한 여공 사건으로 공장을 그만 두게 되었으나 마첼은 마지막으로 30원씩이나 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끝으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26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동지들과의 거의 모든 연락이 끊어지게 되면서 극도로 곤궁한 생활을 하게된 우관은 우당의 격려 속에서 영국 런던의 프리덤 프레스(Freedom Press)사에서 간행한 크로포트킨의 『법률과 강권』, 『무정부주의의 도덕』 등을 비롯한 바쿠닌, 말라테스타, 르끌뤼의 팜플렛 10여 편을 번역했다. 회관 역시 우관과 함께 이 시기에 크로포트킨을 집중적으로 접하고 연구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27년 10월에 들어서자 회관, 우관 그리고 유자명, 안공근, 정화암 등은 본격적인 아나키즘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그동안 이름뿐이었던 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으로 개칭하고 1928년 6월 1일에는 우관의 주도로 기관지 『탈환(奪還THE CONQUEST)』을 발간한다. 그런데 그 『탈환(奪還THE CONQUEST)』의 내용이란 바로 크로포트킨 아나키즘 이론의 선전 그 자체였다. 특히 기관지 『탈환(奪還THE CONQUEST)』의 제호 영문표기가 “CONQUEST”인데 이는 크로포트킨의 대표적인 저서인 『빵의 쟁취 (The Conquest of Bread)』에서 차용했을 정도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탈환』 창간호 증보호에 회관은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소(訴)함』을 번역해 소개한다. 회관이 쓴 역자 주에는 “이 글의 원문은 크로포트킨이 프랑스에 체류할 때 불어로 저술한 것으로 이미 세계 20여 개의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조선말로도 일본 동경의 근독사(勤讀社)에서 번역하였으나 동지의 입장으로 옮긴 것이 못되어 오역과 누락 심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당시 회관의 크로포트킨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했으며 “설득력을 지닌 이론가로 조선의 크로포트킨이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나아가 1973년 회관이 번역한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을 그의 서거 1주기를 맞이해 그의 사위인 조한응에 의해 창문각에서 출간하기도 했다.이 조한응 역시 회관의 유지를 이어 크로포트킨 전집 등 아나키즘의 도서를 출판 보급하는 것을 자신의 평생 숙원사업으로 여기고 정년퇴직 후 전문 출판사를 차리는 등 의욕적으로 크로포트킨을 알리는 일에 매달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회관과 조한응이야말로 대를 이어 크로포트킨을 한국에 알린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회관, 우관 형제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아나키즘은 바로 크로포트킨주의로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크로포트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20세기 초 無政府共産主義(Anarco-Communism)라는 이름으로 한중일 세 나라에 고루 수용되어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한국의 申采浩 柳子明, 중국의 師復 巴金, 일본의 幸德秋水 大杉榮 등 대표적인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이 모두 크로포트킨주의자”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는아마도 자연과학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논리를 강조하는 크로포트킨의 사상체계가 당시 동아시아의 전통적 윤리와도 근접했으며 나아가 그가 주장하던 반제국주의, 반군국주의가 당시 동아시아의 상황 속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3. 마흐노프쇼치나와 천영이속(泉永二屬)민단편년처(民團編練處) 운동
1925년 3월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이 사망하고, 그 후 실권을 잡게 된 장개석에 의해 북벌이 시작되면서 1927년에 난징(南京)에 국민정부가 성립되고 이어 1927년 4월 중순 난징을 비롯한 상해, 항주, 소주에서의 총파업과 무장봉기가 철저한 탄압을 받게 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은 사실상 붕괴되면서 중국은 내전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를 양성하고 노동조직을 이끌어나갈 노동단체의 간부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노동대학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 노동대학의 계획 및 설계는 이석증, 오취휘, 장정강과 같은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이었으며 우관은 이들과의 동지적 우애와 친교, 그리고 국외자란 신분으로 적극적으로 조정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결국 우관을 중심으로 회관, 그리고 일본인 아나키스트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등이 주비(籌備)위원이 되어 그해 7월 1일 노공요원 양성소를, 이어 9월 1일에는 대학을 시업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어 주비위원회를 통해 교수와 강사로는 20, 30년간 프랑스 유학경험을 갖고 있는 일본의 아나키스트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 프랑스의 석학 에리세리크류의 동생 폴리크류를 초빙하는 단계에서 회관과 우관형제는 복건성 농민운동 문제로 인해 손을 놓게 된다. 하지만 이 「상해노동대학」이야말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적 연대의 실험장이었으며, 교육으로 아나키즘 사회를 건설하자는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오랜 집념을 담은 뜻 깊은 공간으로 평가받고있는 것이다.
이어서 천영이속(泉永二屬)이란 천주부의 진강(晉江), 혜안(惠安), 동안(同安), 금문(金門)의 4현과 영춘부의 영춘(永春), 안계(安溪), 대전(大田), 영안(永安)의 4현을 일컫는 말이다.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란 이 지방이 토비가 많은 지역이어서 그들로부터 오는 피해를 막기 위하여 청장년들을 훈련시켜 자기 고향은 자기가 방어한다는 자치, 자위를 목표로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민단의 훈련기구였다.
이 사업은 1927년 6월 하순 중국인 아나키스트 진망산(秦望山)이 양용광(梁龍光)과 함께 노동대학 설립 문제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회관, 우관 형제를 방문해 천주(泉州)를 중심으로 농민 자위 조직 건설에 동참할 것을 제의하면서 시작했다. 당시 복건성에는 토비와 공산분자들이 자주 농촌의 부락을 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는데 이를 막기 위한 농촌 자위운동이었다.
결국 회관, 우관 그리고 중국인 아나키스트 오극강(吳克剛), 일본인 아나키스트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이 격렬한 토론을 벌인 끝에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복건(福建)에서 국민당 지원 하에 무장 자위 조직으로 농민들을 조직화하는 사업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여기에는 한국인 아나키스트로서 회관, 우관 외에 유기석, 이기환, 정화암 등과 함께 중국의 아나키스트로는 양용광, 진망산, 대금화, 곽기상이 이어서 일본에서는 아카가와 하루키(赤川啓來), 이와사 사쿠타로 등이 이에 참여한 국제연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조직으로는 본부 위원장에 진망산이, 비서장에는 우관이, 회계는 회관이 맡았으며 유기석, 양용광이 선전 교육부, 이기환 등은 훈련지도부를 맡아, 본격적인 간부훈련 교육으로 1927년 7월1일 우관의 양성소에서의 강의가 시작했다. 우관은 이 운동이야말로 “우크라이나의 혁명가 네스톨 마흐노가 조직한 지역공동체와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구상을 가지고 이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즉 이것은 아나키즘 역사에서 단순히 저항적인 집단에 불과했던 아나키즘을 크로포트킨의 이상에 근거해 1918년에서 1921년 사이 최초로 우크라이나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운동이었다. 경제적, 군사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지역회의와 자발적인 노동자, 농민 및 군인을 위한 협의회 설치 등 아나키즘에 근거하는 자유주의적인 코뮌 즉, 마흐노프쇼치나의 구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운동은 위로부터의 강권에 의한 지도가 따르는 볼세비키의 방침과는 달리 아래로 부터의 내발적 혁명의 싹을 찾아 키우고자 했던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권력의 철저한 부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운동이야말로 우크라이나 농민의 본능적 운동과 마찬가지로 참된 의미의 아나키즘에 의한 사회혁명을 이루고자 했던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볼세비키의 배신과 탄압으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마흐노 역시 볼세비키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다. 우관은 이 좌절된 아나키즘의 역사, 즉 자유주의적 코뮌(마흐노프쇼치나)을 중국땅에서 다시 실현시켜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28년에 들어서면서 안계 산악의 5천명의 토비가 천주를 습격해 왔고 해군육전대가 토비소탕을 구실로 다시 쳐들어 옴으로써 민단의 운영을 위협하여 재정적인 운영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결국 이 민단운동은 웅대한 게획을 가지고 거창하게 출범했지만 당시 중국 정정의 혼탁과 재정난으로 인해 결국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만 10개월 간의 우여곡절 끝에 1928년 5월 초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결국 민단운동이 해체되자 회관, 우관, 화암 그리고 일본 동지인 이와사 사쿠타로와 아카가와 하루키 등은 상해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1928년 5월 상해로 철수한 회관, 우관 형제와 정화암, 유기석 등은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결성에 이른다.
4. 바쿠닌의 연합주의와 동방무정주주의자연맹
1928년에 결성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07년 4월 도쿄에서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아주화친회(亞洲和親會)와 사회주의강습회의 전통을 이어 받은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화친회(亞洲和親會)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우선 아주화친회는 동아시아 최초의 반제국주의, 동아시아 국제주의의 연대조직으로 여기에는 한국, 중국, 일본 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다.
우선 이 아주화친회의 규약을 보면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아시아에서 주권을 상실한 민족에게 각각 독립을 달성시키는 것”이라며 제국주의에 확실한 반대의 입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 아주화친회처럼 반제민족주의를 내세운 조직은 따로 없었다. 이 단체는 물론 “아시아인으로 침략주의를 주장하는 자를 제외하고, 민족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를 막론하고 모두 입회할 수 있다” 고 했으나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실질적으로는 아나키즘을 지향하는 단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직으로 “모임에는 회장, 간사의 직이 없이 모든 회원이 모두 평등한 권리가 있다”. 든가 “본회의 의무로서 상호부조에 의해 각각 독립을 얻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상호부조는 크로포트킨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아나키즘적 요소와 아시아민족 해방이라는 주장이 결합해 아시아 연방의 구상으로까지 어어지게 된 것이다.
아주화친회에서 논의된 아시아 연방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정확이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구상의 출발이 오스기 사카에(大杉?)에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오스기 사카에는 사회주의 강습회 제 5회(1907.11.10), 제 6회(1907.11.24), 제 8회(1907.12.22)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바쿠닌의 연합주의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공안조사자료에 의하면 제 8회 강습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사상으로는 동양연방을 만들어 안전한 평화동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서 현재의 국가를 파괴할 수단에 나서야 한다. -중략- 정의에 의하지 않고 국권에 의지하는 자유, 즉 국법상의 자유는 거짓으로 봐야 할 것이다. 동양연맹은 그러한 것을 모두 배척하고 진정한 동맹에 의해 단체를 조직해야 한다. 우리의 동맹은 권리라든가, 명예라든가 하는 가면적 정의를 배척하고 완전히 자연적 자유평등의 동맹에 의해 단체를 만들려는 것이다.
오스기의 이 강연은 바쿠닌의 저작인 「연합주의, 사회주의 및 반신학주의」중에서 그 첫 번째인 「연합주의」부분을 기본으로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스기는 이런 바쿠닌의 이론을 바탕으로 동양연방이라는 것을 만들어 구주연방(歐洲聯邦), 미국연방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함으로서 장래의 무정부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동방무정부의자연맹의 결성은 바쿠닌의 연합주의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초기 아나키스트들이 아주화친회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사회를 향해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맹의 결성을 위해 1927년 9월 북경에서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인도 등 6개국의 대표자 120명이 참가해 대회를 가졌다. 이어 1928년 4월 천진에서 개최된 각국 아나키스트 대표대회를 거쳐, 6월14일 상해 프랑스 조계 이매로에 위치한 화광(華光)의원에서 “조선인 유기석, 일본인 강희동(아카가와 하루키의 이명), 중국인 모일파, 왕수인, 등몽선, 역자기, 오극강 등이 협의 후”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안남, 인도, 필리핀 등 7개국 대표 200여명이 화합하여 연맹을 결성하고 서기부 위원에 이정규, 적천계래, 모일파, 왕수인을 임명”했다.
또한 연맹은 동방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이 단결하여 국제적 유대를 강화하고 자유연합의 조직원리 아래 각 민족의 자주성과 각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이상적 사회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우관은 이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란 논문을 보내 “한국의 무정부주의운동은 진정한 독립운동이오 한국에서의 진정한 해방운동, 즉 무정부주의운동은 곧 독립운동”이라고 역설하고 각국의 지원을 호소하여 이회영의 논문이 결의안으로 채택되었다.
이 연맹은 중국인 아나키스트 이석증이 지원했으며 두 차례에 걸쳐 대회를 개최했다. 또한 우관이 담당하던 서기국에서 제 1차 사업으로 기관지 『동방』을 발간하기도 했다. 『동방』은 현존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고 있지 않지만 우당 이회영은 창간호에 축하 묵란(墨蘭)을 게재했으며 우관은 「동방무정부주의자 제군에게 고한다」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연맹에서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에 의한 한국의 강점 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석규가 한국의 대표로 상해까지 갔으나 이미 폐회된 뒤였으며 일본에서도 대표를 파견하려 하였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우관은 1928년 9월부터 상해노동대학에 출강했으나 일본 영사관의 음모로 인해 일본인 동료 아카가와 하루키와 함께 10월 말 상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12월 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된다,
재중국 아나키즈트 투사 중 뚜렷한 존재였던 우관의 피체는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전반에 큰 충격이었으며, 결국 동지들은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뿔뿔히 흩어져야 했다. 결국 1919년 중국 망명 이후 줄곳 함께 일제에 맞서 싸워왔던 회관과 우관 형제의 공동투쟁은 막을 내리고 회관 홀로 중국땅에 남아 일제와의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국내로 압송된 우관은 치안유지법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1932년 3월 만기 출옥한다.
5. 만주에서의 투쟁과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이 시기 중국 내에서의 독립운동의 상황을 보면 상해의 임시정부 외에도 북경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만주 서간도 중심의 참의부, 길림의 정의부, 소?만 국경 부근의 신민부(新民府) 등으로 나뉘어 있다가, 신민부가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개편되고, 한족총연합회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와 협조하여 만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회관이 전명원(全明源)이란 가명으로 가장해, 길림에서 시야 김종진을 만난 것은 1929년 1월 말경이었다.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온 김종진(金宗鎭)은 아나키즘 운동의 거목인 이회영의 영향을 받아 만주 일대에서 김좌진과 함께 농촌자치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회관의 북만주행은 우당의 중개 역할로 사전에 시야와 합의된 것이었다. 이들은 1929년 3월 하순에 목적지 해림(海林)에 도착해 이후 회관과 시야와 함께 기거하며 만주에서의 새로운 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여기에 김야운, 김야봉, 이달, 이덕재, 이붕해, 엄형순, 이준근, 이강훈, 그리고 백야 김좌진이 모여서 운동전반에 걸친 여러 문제와 특히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해 집중 논의한다. 특히 당시 만주에서 강력히 대두하던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책으로 회관과 시야를 중심으로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갔다. 또한 이들과 접촉하면서 백야 역시 아나키즘에 대해 상당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 이에 백야는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며 민중생활에서 자주창의의 자유합의적인 조직생활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이야말로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회관과 시야 그리고 백야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가 생기면서 만주에서의 운동에 대한 방향이 일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그해 7월 해림소학교에서 창설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었다. 여기에는 회관 외에도 사상적으로 완전히 일치된 백정기, 정화암, 김야봉(金野蓬), 이달(李達), 이덕재(李德裁), 이붕해(李鵬海), 엄형순(嚴亨淳), 이준근(李俊根), 이강훈(李康勳), 김야운(金野雲) 등 17명이 모였으며 이는 만주에서의 최초의 아나키즘 단체라 할 수 있다. 연맹은 다음과 같은 세 개의 강령을 결의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 무지배 사회의 구현을 기한다.
2.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자주 창의로 또는 상호부조적 자유합작으로써 각인의 자유 발전을 기한다.
3. 각인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 응하여 소비하는 경제 질서 확립을 기한다.
강령에 나타난 “무지배의 사회”야 말로 당시 만주에서의 중국의 군벌과 일제의 탄압 그리고 각종 독립운동 단체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던 재만 한인들에게는 절실한 과제였던 것이다.
이어서 “상호부조적 자유합작의 정신”과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 응하여 소비하는 경제 질서 확립”이란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을 반영한 것으로 만주땅에서의 생존방법과 함께 생산과 소비에 대한 개인의 규정은 아나키즘운동에서의 경제문제에 대한 원칙을 밝힌 것으로 이는 이론뿐만이 아니라 실제 운동에서도 아나키즘을 반영하고자 했던 의도로 아나키즘이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면 강령으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재만동포들의 항일, 반공사상의 계몽 및 생활개혁의 계몽에 헌신한다.
우리는 재만동포들의 경제적, 문화적 향상발전을 촉성키 위하여 동포들의 자치합작적 협동조직으로서 동포들의 조직화에 헌신한다.
우리는 항일전력의 증강을 위하여 또는 청소년들의 문화적 계발을 위하여 청소년교육에 전력을 바친다.
우리는 한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같이 공동노작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영농방법의 개선 및 사상의 계몽에 주력한다.
우리는 자기사업에 대한 연구와 자기비판을 정기적으로 보고할 책임을 진다.
우리는 항일독립전선에서 민족주의자들과 우군적인 협조와 협동작전적 의무를 갖는다.
이 당명 강령을 보면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성격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우선은 당시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주류인 크로포트킨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적 농촌의 건설이다. 이어 항일운동에서의 공산주의 배격과 함께 민족주의와 협동전선을 강조하고 있다. 나가가 공동경작과 공동소비라는 코뮨식 사회를 이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6. 재만한족총연합회
이런 회관과 시야를 중심으로 조직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바탕으로 그동안의 신민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1928년 8월 아나키즘적 성격이 강한 재만한족총연합회(한족총연합회)로 개편했다.이 한족총연합회의 위원장에는 김좌진, 부위원장에 한청암, 정신, 교육위원장에는 회관, 그 부위원장에 박경천, 군사위원장에 이붕해와 부위원장에 강석천을 임명하고 각부 차장에는 이달, 김야봉, 김야운, 이덕재, 엄형순 등을 임명하였다.
이 임원명단을 보면 대부분의 중요 간부에는 아나키스트가 포진하고 있어 이 조직이 아나키즘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한족총연합회의 성격으로는 무엇보다 그 목적과 사업에서 재만 한인들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항일구국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재만동포의 총력을 결집한 교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 책임을 천명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아나키즘의 성격을 가진 자주 자치의 방법을 통해 재만 한인의 생존권과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기관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의 6가지 사업 목표를 내세웠다.
1) 교포들의 집단 정착 사업, 교포의 유랑 방지, 집단부락 촉성
2) 영농지도와 개량, 공동 판매, 공동 구입, 경제적 상조금고 설치 등을 목적하는 협동조합 사업
3) 교육, 문화사업 죽 소학, 중학의 설립 운영, 각지 조직의 연락 및 교포들의 소식, 교포들 의 생활개선, 농업기술 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 순회강조, 순회문고 설치, 성인 교육 과 장학제도
4) 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 군사훈련
5) 중학 출신자로써 군사간부 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의 설립 운영
6) 항일 게릴라부대의 교육 훈련, 계획 지휘를 맡으며 지방 치안을 위한 지방 조직체의 치 안대의 편성 지도 등을 위한 통솔부 설치등 이었다.
한족총연합회가 이렇게 만주에서의 혁명근거지로 기반을 잡아가는 데는 회관 외에도 백야와 시야, 등의 헌신적인 노력이 큰 역할을 했지만 특히 과묵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실천력이 뛰어났던 아나키스트 회관의 경륜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한편 한족총연합회는 특히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그 이유로는 우선 김좌진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나아가 한족연합회의 성격이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하면서 공산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한족총연합회와 공산주의는 각자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서로 침범을 하지 못하고 극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1월 24일 총사령관이었던 백야가 공산주의자인 김종환과 박상실의 흉탄에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시야, 이준근, 김야운 등 동지들이 연달아 피살되면서 운동 자체에 위기를 맞는다. 더구나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의 유조호 사건(柳條湖事件) 조작으로 발발한 만주사변을 거쳐 본격적인 일제의 대륙침략으로 이어지면서 만주에서의 활동은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직전인 1930년 2월 신현상이 최석영과 함께 예산의 호서은행에서 5만 8천엔이라는 거금을 빼내어(호서은행 사건) 차고동과 함께 만주를 경유해 북경으로 들어왔다. 이에 동년 4월 이 자금을 바탕으로 하는 장래의 운동방침을 토의하기 위해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자 회의가 소집되어, 회관을 비롯해, 우당, 시야,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 등이 모였다. 이에 우당 이회영의 제안으로 만주에 총력을 집중하고, 상해, 복건, 북경에 연락부를 둘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부터 이들을 추적해 온 일제 경찰에 의해 모두 체포되어 거금의 자금을 이용하고자 했던 원대한 계획은 무산되고 신현상 등은 국내로 압송되어, 동년 12월 공주법원에서 신현상과 최석영은 징역 4년의 판결을 받는다.
결국 1930년 9월 초 만주에서의 운동을 위한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시야는 북만으로 가게되고, 회관은 복건으로 가서 중국 동지들로부터 자금을 구해보기로 했다. 천진에서 우당과 헤어져 영국 여객선 태고양행(太古洋行)을 기다리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일제 영사관의 경찰에게 호서은행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된다.이후 국내로 이송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1933년 11월 2일 만기 출옥한다.
이후 1932년 3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우관과 함께 1934년 10월 서울 관훈동의 제일루에서 아나키즘 운동을 재개하기 위해 회관, 우관 그리고 오남기 등과 활동계획을 수립하던 중 체포되었다. 그 사건에 대해 일제는 “오래동안 잠잠하던 해내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다시 서로 연락을 취하여 가지고 무슨 책동을 하려고 하여 점차 조선 내로 집중하는 기미를 탐지하고 그만 질풍신뢰로 검거를 시작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수 명의 동지들의 일석 회식이 일경에게 문제되어 허구의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으로 번져 소위 제일루사건”이 날조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우관과 채은국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1936년 2월 징역 3년형 판결을, 그리고 회관과 오남기, 최학주는 불기소 처분되었다.
Ⅳ 해방 이후 신조국 건설을 위한 운동
1. 자유사회건설자연맹
광복이 되자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귀국해 우선 통일된 단일 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1945년 9월 29일 종로 장안빌딩에서 67명의 아나키스트가 모여 결성한 자유사회건설자연맹(FSBF Free Society Builders Federation이었다. 이 연맹은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의 창립 멤버였던 회관과 우관 형제가 중심역할을 했으며 회관이 그 대표역을 맡았다.
이 연맹의 선언은 “우리는 지하로부터 복면을 벗고 표면으로 나왔다. 우리는 침묵을 깨트리고 만천하에 우리의 주의와 주장을 천명하고자 자에 선언한다.”고 하여 일제 치하의 비밀활동이 아니라 본격적인 아나키즘 활동의 재개를 선언한 것이다. 또한 그 강령을 보면
1.오등은 독재정치를 배제하고 완전한 자유의 조선 건설을 기한다.
2.오등은 집산주의 경제제도를 거부하고 지방분산주의의 실현을 기한다.
3.오등은 상호부조에 의한 인류 일가 이상의 구현을 기한다.
이 강령은 광복 후 최초로 조직한 아나키즘 단체의 강령으로 광복 후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기본적인 이론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강령은 크게 정치, 경제, 사회 세 분야의 기본적인 구조를 천명한 것으로서 첫 번째는 정치조직에 대한 것으로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 즉 공산주의사회를 배격하고 자유주의적 정치체제, 즉 아나키즘사회를 건설한다는 원칙이고, 두 번째는 경제조직에 대한 것으로 공산주의의 집산화된 경제질서가 아닌 아니키즘의 경제원리인 계약에 의한 자유연합적 경제를 건설하자는 것이며, 세 번째는 사회조직에 대한 것으로 크로포트킨의 공산주의적 아나키즘의 핵심원리인 상호부조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를 재구성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강령은 외세의 압제에서 벗어나 최초로 조직한 한국 아나키즘단체가 신사회를 아나키즘사회로서 건설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한편 우관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성격에 대해 “연구기관이나 사상적 선전기관으로 영국의 페이비언소사이티(Fabian Society)와 같은 조직을 두고 그런 사상적 배경 하에 농민과 노동자 대중을 조직, 단결시키는 대중조직으로서 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조직하여 좌익들의 교란에 대비하며 독립한국의 내일을 준비케 하자는 것이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1945년 10월 하순 조직된 농촌자치연맹은 최갑룡에게 부탁했으나 생활의 불안정으로 맡지 못하고 대신 회관과 조시원이 맡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런 조직을 결성한 주된 이유로서 “해방 후 좌익에서 경자유전의 원칙하에 농경지는 농민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농민이 호응한다면 진통이 장기화되고 신생 한국은 건전한 발전이 자해당할 것이 라고 판단하고 기선을 제하기 위해서 우선 농민들의 단결을 서둘렀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노동자자차연맹은 농업의 발전에는 필수적으로 공업의 발전이 따라야 한다는 인식 하에 아나키즘적 자치적인 공업 조직을 구상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또한 모든 생산기관의 주인은 그곳에 소속된 노동자라는 아나키즘의 기본 원리에 따라 모든 생산 시설의 접수를 주장했다.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권은 불가침이며 민주사회에서 금단의 줄이기는 하지만 다행이 우리에게는 왜적이 우리 노동자의 피땀을 뽑아서 만든 공장과 재산”이므로 노동자가 그것을 당연히 되찾아야 하는 “탈환”의 근거와 이유가 분명하다고 했다.
이런 원칙이야말로 “공장은 공인에게”라는 아나키즘 원칙의 한국적 형태로 직공도 공장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이러한 원칙이 실현된다면 비록 자본주의 국가라도 실질적으로는 피고용의 임금노동자가 없는, 대립과 투쟁이 없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인식 하에 각 공장별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자 조시원, 차고동, 조한응, 윤홍구 등이 활동했다. 이어 아나키즘의 기본 원리에 따라 다음과 같이 노동자자치연맹의 원칙을 정했다.
노동조합은 직업별 조합이 아닌 산업별 조합으로 조직한다.
노동자는 공장의 주인의 자격과 지위를 갖는다.
공장 소유권이 국가에 있든 개인에 있든 공장 운영에 노동조합 대표가 참여하며 노동자는 이익의 분배를 받는다.
2. 전국아나키스트대회와 독립노동당
해방 직후 국내의 공식적인 아나키즘 조직으로는 전술한 대로 회관과 우관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사회건설자연맹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유림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조직한 조선아나키즘총연맹이 있었다. 우선 이들은 1946년 4월 21~23일 경상남도 안의의 명승지 용추사에서 전국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참가자는 97명으로 광복 후 국내에서 개최된 아나키스트대회 중 최대 규모였다. 여기서 회관은 유림, 신재모와 함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진 박석홍의 국제 정세에는 소련의 팽창주의와 식민지 독립투쟁의 특징에 대한 국제 정세 보고가 있었으며 이어 우관의 국내 정세 보고가 있었다. 우관은 일제의 식민주의 결과로 인한 한국의 피폐상에 대하여 적시한 다음 미국과 소련의 분할 통치와 국내 정정에 대하여 언급하고 조선의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은 비자주, 비민주, 비통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어서 “정부 수립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원칙”에 대한 토의를 벌인 후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통일정부는 중앙집권 정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반대로 권력이 분산되면 될수록 국민들에게 가까워진다고 하는 지방자치와 직장자치의 방향인 것이다. 즉 권력이 최대한 분산되며 이런 자치체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통해 통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조선 아나키스트는 문자 그대로 무정부주의자(Non-Governmentist)가 아니라 비타율정부주의자(Heteronomous-Governmentist),또는자율정부주의자(Autonomous-Governmentist)”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어서 이에 대한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
1. 인간의 자유, 각인이 만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만인이 각인의 자유를 보장한다.
2. 평화의 옹호, 일체의 침략적 무력의 거부, 무력은 인민의 자기 새활 보위의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3. 생산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 일제 강점기에 착취당한 노동을 보상하기 위하여 생산수단은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며, 착취한 지주의 토지도 같은 방법으로 농민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지금의 주변상황을 볼 때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당의 조직과 운영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46년 7월 7일 선언문을 발표하고 위원장에는 유림이 그리고 회관, 양일동, 이시우, 신재모, 방한상이 집행위원에 선출된다. 독립노동당은 한국 아나키즘운동사에서 최초의 정당일 뿐만 아니라 그 정강과 정책은 아나키즘의 이념을 현실사회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해방 이후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노력 결과이기도 했다. 독립노동당은 1948년 8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원심창, 장상중, 한현상을 중심으로 일본 특별당부를 결성하고 재일동포의 조국 통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그러나 독립노동당은 6.25동란으로 인하여 기능이 정지되고 그들의 사상단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도 중지 상태에 함입하고 말았다.
3. 민주사회당
이 독립노동당과 관련해서 회관과 우관 형제의 생각은 묵당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정당 비참여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독립노동당의 명단에 그들의 이름이 없는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정당 무용론을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아나키즘을 구현할 수 있는 정당이란 “아나키즘은 인간 생활 전반에 걸친 자유와 평등 원칙을 주장하므로 ‘데모크라시’의 자유, 평등의 원칙을 확대하고 발전시켜서 경제면까지 적용하도록 ‘데모크라시’를 광의로 확대하여 해석하면 아나키즘의 이론이 된다”는 의미의 것이었다. 이에 정치의 이데올로기인 ‘데모크라시’를 경제의 이데올로기로 확충 해석하며 국제사회의 원리로서 발전시킨 ‘데모크라시’의 완수가 즉 사회주의의 완수라 하고 이를 민주사회주의라고 했다. 나아가 아나키즘의 정치활동은 민주사회주의적이며 그들의 ‘아나키즘’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1956년 11월 15일 민주사회당을 발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와함께 회관은 민주사회당 대표로 피선되고 우관 역시 사무실 운영을 위한 경비를 최해청과 함께 부담하게 된다.
이러한 민주사회당은 회관과 우관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생각했던 순수한 아나키즘과는 다소 성격에서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는 이론과 정책에서 겨룰 수 있으며 나아가 당시 부패한 우익의 보수 정당에도 자극을 줄 것으로 생각했기에 참여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 회관은 1961년 1월 21일의 「통일사회당」의 결성에도 참시 참여하기도 했으나 이는 오랜 동지들의 참여 부탁을 거절할 수만은 없었던 회관의 고육책이기도 했을 것이다.
회관과 우관의 이런 정치적 노력은 해방 이후의 극심한 좌우대립과 곧이어 터진 6.25전쟁 등으로 인해 그 설 자리를 읽어 버리고 위치를 잃어버리면서 결국에는 종언을 고하게되었다. 하지만 회관과 우관이 꿈꾸던 아나키즘적인 이상사회 건설은 정치와는 별개로 그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살아있다. 그것이 바로 「국민문화연구소」를 통한 농민운동과 문화운동이었으며 새로운 시민운동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회관과 우관의 아나키즘은 다른 아나키스트 운동가들과는 약간의 차이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독립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직접행동에 의한 무력항쟁을 호소했다면 회관과 우관의 경우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아나키즘에 의한 이상사회 건설에 좀더 무게를 둔 전략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아나키즘적인 이상사회 건설이 중국에서의 민단편년처 운동이나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한족총연합회, 이어서 해방 이후에는 자유사회건설자연맹, 그리고 민주사회당 결성 등으로 시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민문화연구소를 통해 그 꿈들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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