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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21-12-27 조회수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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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하유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인식 (김명섭)

이하유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인식

 

김 명 섭(단국대학 연구교수)

 

 

<목 차>

 

 

1. 가계와 성장

2. 일본 유학과 중국 망명

3. 남화한인청년연맹 활동

4.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활동

5. 조선학전관 편집위원 활동

6. 자유사회건설자연맹 활동

 

 

 

1. 가계와 성장

하유(何有) 이종봉(李鍾鳳, 1909.9.161950. 3. 28) 선생은 경기도 인천시 송현동(松峴洞)에서 평창후인(平昌后人) 이갑규(李甲奎)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회관(晦觀) 이을규(李乙奎, 1894~1972)와 우관(又觀) 이정규(李丁奎, 1897~1984)의 조카가 된다. 본적은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199번지이다. 삼촌뻘인 이을규의 출생지는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이며, 이정규는 경기도 부천군 북도면(北島面) 장봉리(長峰里)로 되어 있다.

집안 형제의 출생지가 이렇게 달리 되게 된 이유는 갑규·을규·정규 3형제의 부친인 이정훈(李鼎薰, 1867~1947)이 본적인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에 거주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의 난을 피해 인천 앞바다인 장봉도(長峰島)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증광(增廣) 진사(進士)인 이정훈은 탁지부 주사로 임명되어 서산(瑞山)의 재무서장(財務署長)으로 봉직했다.

이정훈은 장봉도로 생활터전을 이전한 후에 지역주민들의 생활안녕을 위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장봉2리 중심가인 평촌(平村) 앞에는 1901년 대흉년 당시 기근으로 굶주린 장봉 주민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배고픔을 덜어주었다는 내용의 구황시혜불망비(救荒施惠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에는 진사(進士) 이정훈과 함께 전 참봉(參奉)으로 주민들의 교화와 봉사에 기여한 조용교(趙鏞敎, 1853~1923)를 기리고 있다. 한양조씨 대대로 인천지역의 유지인 조용교는 이미 이정훈의 동생 관훈(觀薰, 1880~1956)에게 따님을 시집보낸 장인으로서, 두 집안은 사돈지간이 된다. 이후 이정훈의 차남 을규에게도 한양조씨 일가 친척을 결혼시키니 두 집안의 세교는 매우 두텁게 이어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갑규는 풍수해와 해적의 피해가 심했던 장봉도를 떠나 1917년경 충남 논산군 두마면(豆磨面) 현암리(玄岩里)로 이주해 살았다. 이 곳에서 장남 종린(鍾麟, 1908~1973)에 이어 차남 이종봉(하유)은 두 번째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15세가 되던 1923년 서울로 올라와 종로구에 있는 중동중학(中東中學)에 입학하였다. 그가 본적지인 서울 마포구 상수동으로 다시 올라오게 된 이유는 부친 갑규가 당시 의친왕의 중국 망명을 추진한 대동단(大同團)사건으로 인해 구속된 동생 을규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하유(종봉)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중동학교(中東學校, 현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중동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였다. 1906년 관립 외국어학교 내 한어야학으로 설립된 이 학교(1대 오세창 교장)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최규동(崔奎東)1914년 경영권을 인수한 이래 한글학은 물론 일본어와 중국어?영어 등을 비롯해 산수와 부기 등 신식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로 유명하였다. 이하유는 이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보아 중동학교를 졸업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던 중 22세 되는 193010월 광주학생사건의 주동자로 피검됨으로 인해 약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가 어떻게 광주학생의거에 관여했는지, 어떻게 피체되어 투옥되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이 무렵 삼촌인 이을규와 이정규도 중국에서 이회영을 비롯한 재중국 아나키스트활동과 관련한 별도의 사건으로 각각 국내에 압송되어 복역 중이었으니, 세 숙질이 같은 시기에 같이 옥고를 치렀던 셈이다.

 

 

2. 일본 유학과 중국 망명

1932년 출옥한 이하유는 곧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대학교 사회학과에 재학하였다. 그는 일본 도쿄의 나가노(中野)野方町에 있는 조선인학생 숙소인 계림장(鷄林莊)에서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한인 고학생과 노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192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세워진 기숙사였지만, 계림장은 한하연(韓河然)?정찬진(丁讚鎭원심창(元心昌) 등 아나키스트들이 운영권을 장악하면서 점차 항일 고학생들의 생활거점으로 활용되었다. 계림장에서는 재일 아나키스트단체인 흑우연맹의 정찬진과 후일 중국 청년전지공작대에서 같이 활동하는 박기성(朴基成나월환(羅月煥) 등과 같이 기숙하며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하유는 일본대학에 재학하면서 흑우연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박열의 유지를 받들어 흑우회에 이어 1928115일 창립된 흑우연맹은 1936년 해체시기까지 항일투쟁은 물론 반공산주의 활동과 선전활동, 노동운동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 그는 아나키즘 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이하유는 1934년 유학생 예술단사건으로 일본 경시청의 수배를 받게 되었다. 이 무렵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던 오면직(吳冕稙, 일명 楊汝舟)이 일본 도쿄에 있던 흑우연맹의 동지 이동순(李東淳)에게 유능한 동지를 보내달라는 위촉을 받고 그를 추천하였던 것이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상하이로 망명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1934627일 이규창 등 동지들과 상하이에서 고 백정기 선생 추모모임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해 봄에 상하이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19346월 중국으로 망명한 이하유는 곧 아나키스트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일본을 탈출해 중국으로 망명한 직후 일본의 흑우연맹 기관지인 흑색신문36(1935.3.18.)에 이하유의 글로 보이는 논설이 실렸다. ‘何有라는 필명으로 게재된 글의 제목은 <식민지 교육정책의 去益 악화(1)>37(1935.4.22.)<新渡학생제군에게 -墮落학생배를 소탕하라(2)>라는 제목의 논설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일본의 교육 정책자들과 선생들이 조선인들의 지적 향상을 목적하고 가르침이 아니고, “조선의 역사, 언어, 풍속, 습관을 없애 고유의 문화를 파괴하고 일본의 정신을 주입하여 완전히 일본의 노예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놈들의 근본정신이다. 이러한 정신 하에 시행하는 교육제도인즉 어찌 문화향상을 바랄 수가 있겠으랴.”라고 비판하고 있다.

 

3. 남화한인청년연맹 활동

1930420일 류자명(柳子明)과 류기석(柳基石장도선(張道善정해리 등에 의해 조직된 남화한인청년연맹(이하 남화연맹)은 상하이 프랑스조계지 김신부로(金神父路) 133호에서 창립되었다. 이들이 채택한 강령은 당시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기관지인 자유연합신문에 게재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 우리들의 모든 조직은 자유연합 원리를 기본으로 한다.

-. 일체의 정치적 운동과 노동조합지상운동을 부인한다.

-.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한다.

-. 가짜() 도덕적 종교와 가족제도를 부인한다.

-. 우리들은 만인이 절대적으로 자유평등한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한다.

 

이후 19319월 일본의 만주침공이 본격화되자, 더이상 국내와 만주·일본 등지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된 아나키스트들이 상하이로 몰려와 대거 가입하였다. 텐진에서의 이회영 일가를 비롯해 북만주 한족총연합회에서 철수한 정화암(鄭華岩백정기(白貞基이을규(李乙奎), 그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인 원심창(元心昌)과 나월환(羅月煥)?박기성(朴基成)?이현근(李炫瑾)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하유를 남화연맹으로 이끈 정화암은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남겼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선 베이징에서 며칠 동안 쉰 다음 상하이로 갔습니다. 이회영이 이미 와있었고 백정기도 결핵을 치료하고자 이미 와 있었지요. 여기에 양여주, 유자명, 김지강, 유서, 엄형순, 이용준, 나월환, 원심창, 박기성, 정해리, 이하유, 유산방 등 혈기왕성한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들었지요. 나는 그들과 협의하여 19319월 종전의 무련(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필자 주) 산하에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남화구락부를 두는 한편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했습니다...남화한인청년연맹은 청년들이 직접 행동을 취하는 것에 치중을 했어요. 그것은 전부 백범과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희생된 동지들의 수가 한 30명에 이르지요..”

 

이들은 기관지로 남화통신을 발행했는데,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19361월부터 19376월호까지 5개뿐이어서 초창기 자료는 확인할 수 없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연변 출신의 동지 극추(克秋) 심용철(沈溶澈)은 그의 회고록에서 전우 리하유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리하유는 위인이 유순하고 상냥하였으나 강인한 성격이 또 숨어 있어 어떠한 곤난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그는 상하이에 처음 올 때 한어를 몰랐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입을 열기 무안해 하지만, 그는 손발을 놀리면서 한족들과 말을 걸었으며 모르면 남들과 허심히 물었다.(중략)...그후 생활이 좀 나아지고 우리들은 프랑스조계지로 옮기었으며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간하고 출간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간행물을 출판하는 친구로 되었다. 이 시기 이 간행물의 주요 투고인은 류자명 선생이고 류수인도 하남성 개봉(開奉)에서 일부 원고를 부쳐 보내기도 하였다. 편폭이 차지 않을 때에는 하유가 일본 서적 중의 무정부주의 논술에 대한 것을 번역하여 보충하였다. 글자 새기는 일은 내가 전문하였다. 등사판, 파라핀지, 인쇄 잉크 등은 내가 책임지고 구입하였다. 일본의 물건이 중국의 물건보다 좋고 나 또한 한화(漢化)한 사람이어서 언어, 행동 등에서 적들이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보아낼 수 없었다....(중략) 남화통신은 한 달에 한기씩 내게끔 하였다. 프린트, 책 묶음, 우편송달 등은 나와 하유가 같이 하였다. 이듬해 가을, 나는 폐부가 불편하여 하남의 류수인한테 갔다가 그 이듬해(1937) 봄에 상하이에 다시 돌아와 상하이시교의 남상(南翔)에서 이 간()물을 계속 출판하였고, 하유와 내가 그냥 같이 일하였다. 이해 가을, 일본이 ‘8.13’ 상하이전쟁을 발동하여 우리는 남상에서 조계지로 철퇴하였다. 나와 하유 그리고 한족 부부가 한 칸의 정자칸을 함께 이용하였다. 그들 부부가 침대를 하나 사용했다. 매일 거리에 나가 채소를 사는 일을 하유가 혼자 담당하고 화식을 한족 여자가 책임져 하유는 많은 부담을 털어 버리었다.

 

이 무렵 함께 기관지와 선전물을 만들며 이하유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이가 있으니 문학도인 김광주(金光洲, 1910~1973)이다.

 

(남화한인청년연맹-필자 주) 그 지도적 인물을 정화암(鄭華岩)과 일본대학을 마치고 영길리 10호로 날 찾아서 나타났던 열혈청년 이하유(李何有)였으며, 이들이 또한 백범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하유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과감무쌍한 혁명청년이었는데, 항전 8년을 중경에서 활약하고 무사히 조국에 돌아왔었으나 얼마 안되어서 우연하고 기이한 식중독으로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상이니 주의니 그런 것을 떠나서 더불어 말 수 있는 벗. 그 중의 하나이던 이하유를 잃어버린 서글픔을 나는 깊이 가슴에 간직한 채 늙어가고 있을 뿐이다.

 

19378월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단시일 내에 상하이 일대와 화북지역을 석권하게 되자, 이하유는 심극추와 함께 급히 복건성(福建省) 푸저우(泉州) 지역으로 피신하여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당시의 상황은 극추(克秋) 심용철(沈溶澈)의 회고를 통해 살펴보자.

 

이해(1937) 가을, 일본이 ‘8.13’ 상하이전쟁을 발동하여 우리는 남상(南翔)에서 조계지로 철퇴하였다. 나와 하유 그리고 한족 부부가 한 칸의 정자칸을 함께 이용하였다. 그들 부부가 침대를 하나 사용했다. 매일 거리에 나가 채소를 사는 일을 하유가 혼자 담당하고 화식을 한족 여자가 책임져 하유는 많은 부담을 털어 버리었다. 이듬해(1938) , 나와 하유는 앞장서서 복건성 천주(泉州)에 왔다. 하유에게 말할 때, 이는 선인들 발자취를 찾는 것이었다.(중략).....나와 하유가 천주에 온 후 얼마 안지나 정화암 선생이 상하이에 가솔을 안치한 후 천주에 왔다. 그는 하유와 함께 中山路에 있는 리오산 선생(조선말 대황제의 동생 義親王 李綱)이 생활을 유지하는 만년필점에 와서 거주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하유는 하문고랑서(夏門鼓浪嶼) 영국 조계지의 한 조선의사가 꾸린 병원에 가서 거주하였다. 매일 할 일이 없으니 그는 해수욕장에 가서 일광욕을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한달간에 윗몸의 껍질이 세층이나 벗기어졌다고 한다. 어느 하루 일본해군이 갑자기 고랑서와 하문시를 습격하고 점령하였다. 하유는 쿵쿵 포 소리가 울리는 사이에 난민들 속에 섞이어 천주로 돌아와 위험을 벗어났다. 총망시 탈출하여 몸에 일전 한푼 지니지 못하였고 옹근 하루 밤 하루 낮을 걸었으며 밥알 하나 입에 넣지 못하였다. 후에 나와 친우 로자운(盧慈云)은 성복주전시민중교육지도원훈련반(省福州戰時民衆敎育指導員)에 시험을 쳐 들어가 공부하고, 하유는 중경에 가서 의용대활동에 참가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갈라진 후 7년 후에야 다시 상하이에서 만났다.

 

복건성에서 이하유는 이을규·정규 두 숙부가 10년 전인 1927년경 중국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민단편련처 활동(농민자위운동)을 하던 발자취를 돌아보며 각오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이하유는 이후 샤먼(廈門)으로 나와 동지들과 연락한 후 그해 6월경 柳基石이 보내준 여비를 받아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홍콩을 거처 꽝저우(廣州), 다시 탈출하여 치창(朞江)에 이어 충칭(重慶)으로 후퇴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합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구 주석의 장남인 김인(金仁김동수(金東洙이재현(李在賢, 별명 李海平), 노복선 등 젊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전지공작대 조직 준비에 들어갔다. 이하유는 우선 중국인을 합한 약 50명의 선무공작대를 편성하였고, 작곡가 한유한(韓悠韓, 본명 韓亨錫) 동지의 연극 아리랑공연을 통해 전후방 중국 군민을 위무 격려하는 문화선전 활동을 하였다.

 

4.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활동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은 자율적인 독립군 조직으로 적의 후방교란과 정보수집, 일본군으로부터 탈출해 오는 조선인 장병의 흡수 등 전공을 세웠다. 한국청연전지공작대는 193910월경 중국 충칭(重慶)에서 결성되었다. 柳州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던 한국국민당 내의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대원인 이하유을 비롯해 김강(金東洙김인(金仁이재현(李在賢) 등과 나월환·박기성 등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남화연맹 맹원들이 주축이 되었다. 주도 인물들이 일찍이 일본 유학하며 아나키즘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나월환, 박기성, 이하유)과 상하이·류저우 등지를 무대로 함께 지하공작을 전개했던 사실 등이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 결성과정과 관련하여 박기성은

 

어느 날인가 羅月煥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끼리 우리나라 일을 해보도록 하자고 종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쉽게 그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월환과 李何有는 끈덕지게 나를 찾아와서 같이 우리나라의 일을 하자고 종용하여 하는 수 없이 나도 찬성했다.

어느 날 이 말을 柳子明에게 했더니, 그의 말이 그 불덩이들만 모여 있는데, 자네가 끼게 되니 내 마음이 놓이네, 잘 부탁하네하는 것이었다. 내가 언젠가 유자명 씨에게 얘기했을 때는 묵묵부답이더니, 어떻게 되어 그 때는 찬성했는지 그의 의중이 의문스럽기도 했었다. 아무튼 나는 곧 중국군대에 사표를 내고 전지공작대를 만들어 갔다.

 

당시 중국 신문에서는 “30여 명으로 출발한 이 청년전지공작대 중에는, 중국의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군관이 12명이나 있으며,” 그 밖의 대원들도 수년간 중국군사기관에서 복무하였거나, 상하이나 동북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청년지사들이라고 보도하였다.

결성 과정에서 중국군사위원회의 허가와 김구의 지원도 받았지만, 임정과는 상관없이 독자성을 견지하였다. 결성 당시 대장은 나월환, 부대장은 김동수(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 졸업생, 한국국민당청년단 출신), 정치조장은 이하유, 군사조장은 박기성(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1기 졸업생), 선전조장은 이해평(李在賢, 학생훈련소·한국국민당청년단 출신)이 맡았고, 대원으로는 조시제(趙時濟, 조소앙의 장남맹조화(孟兆和, 한국특무대독립군 출신현이평(玄以平, 현익철의 조카김인(金仁, 김구의 장남) 등이 참여하였다. 대원은 28명으로 시작해 1940년 광복군 5지대로 편성될 무렵 100여 명을 상회하였다.

결성 직후인 19391118일 충칭을 떠나 섬서성 시안(西安)으로 이동한 전지공작대는 시안시 二府街 29호에 본부를 설치하고, 중국군 34집단군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후쭝난(胡宗南) 장군의 스승인 중국인 아나키스트 엽정수(葉?秀)와 호 장군의 비서이자 의형제인 후바오이(胡保一)이라는 중국인 아나키스트의 공이 컸다는 정화암의 회상으로 미루어 전지공작대원들이 대부분 아나키스트인 사실이 아나키즘에 호의적인 후종난 사령관이 이끄는 34집단군과의 연대를 가능케 한 것으로 보인다.

기관지로한국청년(韓國靑年)을 발간하였는데, 편집인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선전조, 발행인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인쇄인은 중국문화복무사 섬서지사’, 통신처는 서안 경자(京字)88호 사서함이며 순한문으로 씌어졌다. 발간사에서는 전지공작대 결성의 의의와 임무에 대해 설명하였다.

기관지의 편집은 전지공작대 시기에는 선전조장인 이재현(해평)이 맡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가 척후공작에 나간 뒤에는 광복군 제5지대 정훈조장인 이하유가 맡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필명들을 사용하였기에 누가 작성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실제 이하유가 필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何友’, ‘何來’, ‘등으로 쓴 글이 적지 않다. 1(1940.7.15.)에 실린 글로는 <우리 중국항전 참가가 갖는 의의>(何友), <압수된 6통의 편지>(何 譯) 등이 있고, 2(1940.9.15.)의 글로는 <동북지역 한국농민의 생활 실태>(何友), <동북의 중한의용군>(何來), <옛 친구를 그리며>(何友) 등이 있다. 이후 제3·4기 기관지에는 같은 필명이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나월환 사건으로 이하유가 체포되어 참여하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전지공작대의 가장 큰 활동상으로 중국군 지원 및 중국군민과의 유대 강화를 목적으로 한 연극공연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중국군에게 보낼 솜조끼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4천여 을 마련한다는 목표로, 19391019·20일 저녁 7시 반 두 차례 충칭 대양자청년회(大樑子靑年會)에서 연극을 공연하였다. 시안으로 출발하기 전 고별도 겸한 공연의 제목은 국경의 밤·삼강호(三江好)·중봉(重逢)등이었다.

서안에 도착한 직후 일부 대원은 대항산(太行山)으로 출발해 유격전에 참가하였고, 잔류대원들은 연극공연을 통해 중국 군민과의 친선을 도모하였다. 1940520일부터 10일간 시안 성안 남안문(南院門) 가설극장에서 거행된 국경의 밤·한국의 한 용사·아리랑연극공연은 중국 군관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이 연극 공연은 대장인 나월환이 대회주임을 맡았고, 한유한(韓悠韓, 劇務主任구양군(박기성, 총초대현이평(玄以平, 糾察長) 등이 주관하였다.

비슷한 시기 전지공작대는 서안부녀회가 주관하는 모금운동에 동참하는 뜻으로, 아리랑공연의 수익금 ×천원을 부녀회에 전달하였다. 부녀회에서는 이 돈으로 하복을 만들어 전방의 중국군 병사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당시 아리랑공연을 관람한 중국 기자의 글에는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연극을 공연하는 전지공작대원들의 열정과 정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연극에 출연한 한국청년 동지들은 곧 戰線으로 가 적과 전투를 벌이게 될 용사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重慶에서 西安으로 왔다. 피 흘리는 전투를 통해 자유해방의 큰길을 개척하려는 투사들이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의 포효처럼 돌연 징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연장의 분위기는 일순 긴장되어 관중석의 잡음이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저희는 정식 연기자가 아닙니다.” “저희는 장차 전방으로 떠날 전투원입니다. 이번 위문공연을 통해 전방에 있는 병사들에게 조금이나마 존경과 열정을 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열렬한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라도 많은 敵寇를 무찌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보고를 마쳤다.

국경의 밤은 압록강변의 한·중 의용군이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와 철조망 진지를 뚫고 들어가 일본군을 섬멸하고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이다. 이 연극에서 대장 나월환이 일본초병, 이하유·배아민이 한국혁명군’, 전영(田榮)동북의용군’, 현이평이 일본군관배역을 맡았다. 한국의 한 용사1940년 정월 23일 섬서성 남영제 성내에서 일어난 실제 상황을 극화한 내용으로, 일본헌병대 통역원 출신의 전지공작대원 박동운(朴東雲)이 포로로 붙잡힌 중국인 유격대원을 구출하고 일본헌병대 기밀문서를 탈취하여 전지공작대로 합류한 194013일의 실화를 극화한 것이었다. 일본헌병대 통역원에는 실제 주인공인 박동운, 나월환이 일본 헌병대장, 김성호(金成浩)가 일본 헌병, 이하유가 일본 헌병, 전영이 일본 육군부대 통역원, 배아민이 중국 유격대 대장 배역을 맡았다. 가극 아리랑40년 전 금수강산 한반도가 일제에 의해 유린되어 부부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가담 활동하며 포화 속에서 혈전감투한다는 줄거리였다. 촌녀 역의 심승연(沈承衍)과 목동 역을 맡은 예술조장 한유한이 열연하였다.

이러한 전지공작대의 공연은 당시 시안에서 발행되던 신문인 西北文化日報·西京日報·工商日報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공연대가 지나간 지역에는 아리랑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의 연극 공연은 중국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중 공동항일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공연대는 국내외 정치사절 역할까지 했는데, 연합군 측의 시찰단 등 귀한 손님이 올 때면 반드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당시의 공연에 대해 한유한은 내가 맡고 있던 아동극단의 승리무곡, 하일대(下一代), 소산양(小山羊) 등이었고, 영국의 국회의원 시찰단이 왔을 때는 전국 유명극단과의 경합을 물리치고 환영공연을 하기도 했다.”고 회고하였다.

전지공작대 대원들은 중국 34집단군 태항산유격대(太行山遊擊隊) 정훈부(政訓部)에 배속되어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활동을 벌였다. 모집한 한인청년들은 서안(西安)으로 후송되었고, 전지공작대에서는 34집단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中央戰時幹部訓練團) 4단 내에 개설한 특과총대학원대(特科總隊學員隊)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 약칭 한청반’)에 이들을 수용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청년들은 중국군 소위로 임관되는 동시에, 전지공작대 대원으로 편입되었다.

한청반은 2개 구대로 편성되었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광복군 5지대로 편성된 후에는 지대장인 나월환이 대장으로 운영을 총괄하였고, 부대장 겸 제1구대장: 김동수, 2구대장: 박기성, 정치지도원: 이하유, 군사교관: 조시원·조경한·송호성 등이 전술·역사·정신교육 등을 담당하였다. 19411월 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개편된 직후인 이해 2월부터는 2기생 교육이 시작되었고, 19422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3기생을 배출했다.

전지공작대는 194111일 광복군총사령부에 의해 제5지대로 편입되었다.신년 단배식이 끝난 오후 1시경 시안시 이부가에 있는 전지공작대 본부 대강당에서 거행된 제5지대 성립식에는 임시정부 조성환 군무부장, 황학수 광복군총사령 대리를 비롯한 서안총사령부 간부 전원, 전지공작대 대원 등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나월환은 5지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징모제5분처 주임위원 직도 겸임하였다. 부지대장은 김동수, 정훈조장은 이하유, 훈련조장은 박기성, 공작조장은 이재현이 각각 맡았다. 이후 한유한(韓愈韓, 韓亨錫)이 중국군 전시공작간부훈련단 제4단 음악교관으로 있으면서 전지공작대의 예술조장으로 합류했다.

하지만 임시정부와 나월환 대장의 한국광복군 편입방침은 전지공작대 대원들의 충분한 동의나 협력 없이 갑작스럽게 추진되어 내부 불만과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임정에서 전지공작대를 산하에 포섭하려고, 대장인 나월환을 중경으로 불러 귀빈관에 투숙시키고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증언은 당시의 상황을 뒷받침해 준다. 중경 임시정부가 대장 나월환만을 회유하여 가장 강력한 부대로 성장하고 있던 독립부대인 전지공작대를 무리하게 중앙집권적 광복군총사령부 휘하의 예하 부대로 복속시켰다는 내부 대원들의 불만이 생겨났던 것이다. 또 한편 나월환과 이하유의 갈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재현은 절제된 몸가짐으로 대원들과 동고동락하는 이하유가 동지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자, 나월환은 이를 눈에 띄게 시기하게 되었고 이런 가운데 대원들의 불만은 더욱 커지고 나월환과 이하유와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것이라 분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원들간의 내부 갈등은 나월환 대장 암살사건이라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사상 가장 불미스런 사건을 잉태하게 되었다.

1942313·1절 기념식을 마친 후 제5지대 본부에서, 호종남 부대에서 제공한 영화관람권을 대원들에게 나누어주던 중, 동료 대원들에게 살해되었다. 사건 발생 후 임정에서 주모자들의 처단을 요청하는 서한을 34집단군 호종남 사령관에게 보냈고, 이에 후보이 등이 나서서 모든 한인 무장세력이 반드시 임정의 통솔 아래 영속되어야만 할 것이 아니라, 어느 항일전투력이나 다 같이 중국군의 우군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로써, 나월환을 살해한 박동운만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 관련자 10여 명의 간부들은 16개월간의 고초를 겪은 후 1944년 봄 모두 석방되었고, 그해 가을 2지대 대본부로 복귀하였다.

나월환 지대장의 피살로 인해,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성장해가던 제5지대는 핵심간부들이 체포되어 광복군 전체에 큰 동요와 혼돈을 초래하며 활동이 마비되었다. 사건 직후 광복군 총사령부 편련처장인 송호성이 지대장에 임명되었지만 물러나고, 194241일 제2지대로 새롭게 편성되었다. 새로 편성된 제2지대장은 총사령부 참모장인 이범석(李範奭)이 직접 맡았다.

5. 조선학전관 편집위원 활동

전쟁이 끝난 후 이하유는 시안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상하이에서 정화암(鄭華岩류자명(柳子明) 등 선배들과 만나 혼란에 빠진 교민사회를 재정비하였다. 이어 리스청(李石曾우즈후이(吳稚輝빠진(巴金) 등 중국 아나키스트동지들의 세계학전관건립사업과 협력하여 조선학전관신채호학사창설 사업에 전념했다. 세계백과사전인 세계학전’(The World Encyclopedia) 편찬에 맞춰 한국의 역사문화를 소개하는 한국판(Korean Edition)’을 출판하려 했던 것이다.

세계학전 편찬 사업을 위해 리스청은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에게 부탁해 상하이 시내에 건물(愚園路 749-51)을 무상으로 빌린 후 3천여 권의 도서를 마련하며 자료수집에 나섰다. 조선학전 편찬을 위한 조직은 세계학전조선전관(世界學典朝鮮典館)’이고, 이사장은 중국인 리스청(李石曾), 총편집에 량가락(楊家駱)과 정화암, 편집에 강천택(姜天鐸이하유·장계니(張契尼김파(金波) 4명이다. 학전관의 사무관리는 이하유가 전적으로 맡았다. 조선학전관에서 작성한 <조선문제, 우리의 관찰과 건의>란 논설을 번역한 이하유는 세계학전관의 취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중국의 자유주의 원로 李石曾 선생을 중심으로 프랑스 영국 등 20 여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로 조직된 세계학사(世界學社)에 소속된 세계학원(世界學院)에서는 세계인류의 상호우애와 상호부조로써 세계문화 향상을 기하고 각국 각 민족의 입장에서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조사연구하여 세계문화 발전에 기여하자는 양심적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세계학원에는 참가국 각자의 학전부(學典部)”를 설치하고 대국은 대국대로 소국은 소국대로 자국의 진정한 역사와 문화를 발표하여 일개의 세계 신문화 창작을 창도하여 세계문화향상과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각국은 자국의 學典中外에 발표하여 세계 一家의 상호부조와 자유와 평화를 선양한다는 취지에 찬동한 駐華 조선혁명동지 정화암·유자명·정치화·이오산·이하유 등 제씨는 세계학사 세계학원에 가입하여 조선학전관을 1946년 상하이에 설치하고 중국혁명동지 이석증 오치휘(吳稚暉파금(巴金양가락(楊家駱주세(朱洗) 등 제 학자와 협력하여 신흥조선의 민족문화건설로서 中韓과 세계문화합작공작에 노력하고자 다음과 같이 조선문제에 관한 관찰과 건의라는 一文을 조선학전으로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출판하여 세계각국에 발표하였다. 조선학전관은 현재 상하이 우원로(愚園路) 749-51호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 중인데 그 학전관에서 출판한 중국어판을 이하유가 번역한 것을 다음에 소개한다. 그런데 세계학전관으로는 유럽에서 일찍이 유대학전, 미국학전, 흑인학전, 프랑스학전, 중국학전 등이 발간되었고 조선학전은 19473월에 초판을 발간하고 같은 해 4월에 재판까지 나왔다.

이러한 사업 취지에 호응하여 각 참가국들에서는 속속 학회를 설치 운영하여 그 연구성과가유태학전,영국학전,흑인학전,프랑스학전,중국학전등으로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아나키스트인 정화암과 류자명·정치화(鄭致和이강(李剛이하유 등도 가입하여 조선학전관을 설립해 19473조선학전1호와 재판에 이어 세계학전-조선판(설명과 목록)을 발행했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중국의 아나키스트 학자들이 모두 협력해 중문과 영문으로 출판해 세계 각국에 배포하였다. 조선학전1호에는 <조선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관찰과 건의>가 실렸는데, 이 논설은 국내 언론에 <조선 문제에 대한 중국의 여론>이란 글로 소개되어 주목을 끌었다.

 

조선반도는 아시아대륙 동부 해양으로 뻗친 거대한 팔이다. 2차 세계대전은 침략과 반침략의 청산 전쟁이었는데애석한 것은 반침략 전쟁에 참가한 강국들이 피 침략의 약소국들에 대하여 그를 과분(瓜分)할 장물로 보거나 혹은 자기들의 군략적 기지로 볼 따름이다. 그런데서 조선이 카이로회담에서 획득한 자유의 서광이 다시 암흑에 빠질 뿐 아니라 국토가 다시 양대 강국 제일선의 도살장으로 변하고 3천만 동포가 장차 양대 강국 제1선 전쟁의 희생자로 될 것이다.

 

즉 이 글에서는 조선 문제가 마땅히 카이로회의의 결의를 근거로 하여 미국과 소련 군부가 치안을 유지하면서 조선 인민의 자유의지로서 자주독립정부를 성립시켜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결국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였다. 이렇듯 조선학전관 사업과 신탁문제 해결에 몰두하던 이하유는 1946915일 상하이 호서(濩西)에 있는 중국학전관의 큰 연회청에서 한·중 동지들의 축복을 받으며 화가인 고 오연(吾然) 김복형(金福炯, 1896~1942)의 차녀(永載, 1912~1967)와 결혼했다. 그는 신혼가정을 꾸리고 문화생활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백과사전 출판의 꿈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격화되어 상하이가 공산군에 점령됨에 따라 성취되지 못하였다.

 

6. 귀국 후 자유사회건설자연맹 활동

중국의 국공내전을 피해 이하유는 상하이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1947827일 교포 359명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회관, 우관 두 숙부와 여러 선후배 동지들을 만나 자유사회건설자연맹에도 가입 수속을 마쳤다.

심상치 않은 해방정국의 정세 하에서 이하유는 아나키스트들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대중 계몽과 청년 훈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고 남화연맹 동지인 김광주(金光洲)와 함께 출판사인 애미사(愛美社)를 설립하고 빵과 자유·스페인혁명과 두르티등 사상계몽 서적을 간행 배포하였다. 또한 중국에서의 옛 동지인 오남기(吳南基)와 정래동(丁來東김광주(金光洲송지영(宋志英)과 함께 한·중 양국의 친선과 문화교류를 위해 조직된 한중문화협회에서 월간지로 한중문화를 간행하였다.

이하유는 친동생으로 노동운동가인 이종연(李鐘燕)을 비롯해 양희석(梁熙錫유정렬(劉正烈조한응(趙漢膺) 등 소장 동지들과 함께 아나키스트청년연맹(일명 자유청년동지회)’을 조직하여 상호 협력하는 연대 활동을 하였다. 이하유는 194951905년부터 해방까지 순국한 애국지사들 추모하기 위해 발행된 독립혈사(서울문화정보사 발행)에서 <백정기의사편>을 집필하였다. 세계학전관의 사업도 꾸준히 전개했는데, 19488월 네델란드(和蘭)에서 열린 세계문화인대회에 참석한 중국의 아동문학가 예쥔젠(葉君健)의 참관기인 <세계문화인대회에 출석하고>를 번역해 한국잡지에 소개하였다.

나아가 이하유는 서울에서 고학을 하는 청년들의 모임인 설형회의 창립 1주년 기념집회인 1949년 때는 긴박한 내외정세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맡았다. 이하유는 이 강연에서 미소 냉전 하에서의 한반도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예리하게 풀이해 주면서, “이럴 때일수록 우리 청년들이 좀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백절불굴의 신념으로 정진해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격려를 하였다. 그는 쾌활하고 재기 발랄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아주 행동적이어서 이문창 등 젊은이들이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그렇듯 불꽃 튀는 정열을 가진 아나키스트 이하유가 19505?30선거에 마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려 입후보하였다. 그러나 그해 328일 돌연 급성 위출혈로 갑자기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했으니 그의 나이 약관 42세이다. 이하유의 장례식은 330일 청량리 서울위생병원에서 가졌다.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신세계공원묘역에 묻혔다가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3개월에 예언대로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1973년 건립된 그의 묘비는 동지인 묵당 양희석이 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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