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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21-12-27 조회수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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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연 김복형의 나라사랑(허영빈)

오연 김복형의 나라사랑

 

허영빈(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목 차>

 

 

1. 간단한 이력

2. 가족사항

   3. 임시정부 시절

   4. 흥사단 시절

   5. 남화연맹

   6. 일제의 임정과 남화연맹 사이 와해 기도

   7. 후기: 제자 요몽곡과의 만남

 

 

1.간단한 이력

도산안창호전집 제10권에 실린 흥사단 단우의 이력서와 일제때 발급받은 호적등본과 중국의 호적등본을 종합해보면 보면 김복형은 1896513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동외동 12번지에서 안산(安山) 김씨 후손으로 아버지 김 주 (金 柱) 어머니 양 씨 (梁 氏) 사이에 삼남으로 태어났다. 형 이름을 관형觀炯이라고 한 명만 적은 것으로 보아 다른 한 명은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인다. 8살부터 14살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14살부터 16살까지 사립 익원(翊原)학교에서 수학했다. 1919년 삼일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국내에서 사는 것에 위험을 느껴 혼자 상해로 망명하다.

 

상해임시정부 원년(1919) 9월부터 11월까지 임시정부 내무부서기 그후 노동국서기로 근무했다. 이 사실은 일부 남아있는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의 사령사항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한문에 능하고 특기는 산술이고 취미는 원예와 미술이라고 썼다. 191911월부터 남경에서 신흥사단新興士團에 참가하다, 128단우로 등록되어있다. 19219월부터 19241월까지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수학하고 졸업하다. 1924225자 동아일보 2면을 보면 미술계의 두 수재라는 제목으로 동년 115일 상해미술학교를 졸업한 김복형과 한광우를 기사화하고 있다. 상해미술학교는 당시 중국에서 이름난 미술대학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재학중 내내 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김복형은 중국에서 더 머물며 중국의 미술을 더 연구하고 싶다고 하면서 미술은 우리나라에서 아직 실제로 긴급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여의하면 우리 역사상 실적이나 또는 조상부터 전하는 예술을 상고하는 것이 소원이지만 비록 긴급한 것은 아니지만 다소 공헌할까 합니다라고 했다. 미술을 좋아하고 공부한 그가 미술 연구가 지금 긴급한 것은 아니라는 그의 말에는 의주에서 삼일운동에 참가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고 신흥사단에 가입한 그로서는 독립운동이 우선이라는 뉘앙스를 깔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같이 졸업한 한광우는 북간도 용정 출신으로 한광우는 본명이고 중국에서는 한락연이란 이름으로 중국의 피카소라고 알려졌다. 1929년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1937년까지 머물며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결합된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구축하고 중국 화단에 새로운 화풍을 도입했다. 용정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한 인물이고 용정시에 가면 그를 기리는 락연공원한락연기념비도 있다. 삼일운동 후 그는 상해로 가서 전차회사와 인쇄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며 공산주의사상에 접근했으며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1년 프랑스 공산당에도 가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미술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한다. 말년에 그는 실크로드 소수민족의 민속과 석굴벽화 모사작업을 벌리다가 1947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다. 정수일 교수는 실크로드 문명기행에서 둔황석굴 10호굴에 오래 머물며 한광우의 일생을 5페이지에 걸쳐 둘러본다. 10호굴 주실에 한락연의 빛바랜 사진을 발견하고 나서이다. 같은 연변출신이기도 하다. 2005년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공을 인정하여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2.가족사항

가족사항을 보면 처는 연안김씨 김연덕과 최 씨 사이에 의주군 선성면 소류초동에서 1893826일 장녀로 태어난 김재희(金在熙)이다. 둘 사이에 1910년 장녀 경재(庚載) 1912년 차녀 영재(永載) 1915년 삼녀 정재(定載) 1918년 장남 홍락泓樂(金圭에서 중국도착후 개명) 19244녀 명재(明載) 1928년 차남 봉락(鳳樂)42남을 낳았다. 장남 홍락에게서 1953년 손자 광릉(廣陵)이 태어나고 증손자 철명(哲鳴)1985년 태어난다.

 

상해미술학교룰 졸업한 후 19259월부터 19307월까지 강소성립 송강松江중학 교원으로 근무하고 다시 19307월부터 19357월까지 강소성립 태창太倉사범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 1925년 교원으로 생활인 안정이 되자 의주에 남아있던 처와 세 딸과 장남을 상해로 데려온다. 오연은 자녀의 교육에 힘을 쓴 것 같다. 장녀 경재는 193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상해해관총서에 취업하여 일했으나 폐결핵으로 1951년 사망한다. 이녀 영재는 1934년 전신국에 잠시 근무하다가 상해해관으로 옮겨가 근무하다가 일제 패망후 시안에서 상해로 온 하유 이종봉과 19469월 결혼하고 19478월말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하다. 하유는 1950530선거에 출마하려고 하면서 자신과 동지들의 유세를 다니다가 위출혈로 급서하다. 영재는 6.25동란 중 미8군에 특채되어 비행기로 중국군을 상대로 하는 중국어 선무공작에 투입되기도 하였고 부산에 내려가서는 미군 제2병참기지사령부가 운영하던 해피마운틴 고아원 겸 소아과병원 (행복산 유아원의 영어명칭이 해피마운틴으로 부산시 사하구의 아미산 아래 있던 최대의 고아원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아과전문병원이라고 알려졌다)에서 통역비서로 근무했다. 상해에서 외국인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중국어는 물론 영어가 능통했기 때문인 모양이다. 1967년 만성적인 꽃가루 알레르기성 천식으로 사망한다. 아마도 아버지의 원예 취미가 이 딸에게 내려간 것 같다. 원예 취미와 미술 유전자는 외손녀 이원영과 이원영의 딸에게도 내려간 것 같다. 삼녀 정재도 1940년 상해해관에 근무하게 되었다. 1994년 심혈관병으로 사망하다. 당시 상해해관은 수재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이었다고 하니 자식들이 모두 수재였던 모양이다. 장남 홍락은 1943년 대동대학을 졸업하고 전력계통에서 일을 하다가 최후에 강서성 전력설계원에 근무했다. 1982년 사망하다. 2남 봉락은 상해교통대학 화공과를 졸업했으나 문화혁명당시 35三反五反의 와중에 공격을 받아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며 미혼으로 사망하다. 4녀 명재는 상해외무학원에 근무한 남편과의 사이에 일남일녀을 두었는데 아들은 상해외자기업에 근무하였고 딸은 뉴욕에 이민 가서 살며 두 딸을 낳았다.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한 후 한국에 사는 영재는 홍콩의 친지를 통하여 상해의 형제들과 편지를 가끔 주고 받았으며 약재 등의 물건도 보냈다고 하나 영재가 1967년 사망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1989년말 중국과 자유롭게 상호방문이 허락되자 연변에 사시던 심극추(심용철) 선생과 국민문화연구소의 이문창 선생과 연락이 오고갔다. 영재의 외동딸이자 오연의 외손녀 이원영이 간절히 상해의 외가 소식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전하자 심극추(심용철) 선생은 1948까지 드나들던 오연의 집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며 찾아가 보았다. 원래 주소 하비로霞飛路 락안방樂安坊 4호 현재 주소 상해 회해중로淮海中路 6134호로 예전과 변함이 없다고 했다. 상해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상해임시정부 옛건물과도 가까운 곳이다. 오연의 손자 김광릉을 만나보고 사진도 몇 장 받아서 이원영에게 보내와 교신이 시작되다. 이후 독립유공자 표창 수속을 서울과 상해에서 진행하여 1998년 제53주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3.임시정부 시절

1919년 의주에서 삼일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국내에서 사는 것에 위험을 느껴 혼자 상해로 망명하다. 상해임시정부 원년(1919) 9월부터 11월까지 임시정부 내무부서기 그후 노동국서기로 근무했다. 이 사실은 일부 남아있는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의 사령사항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안도산일기를 보면 도처에 안도산이 내무부총장과 노동부총장을 할 때 그의 비서로 일한 것으로 보인다. 김복형의 외손녀 부부가 상해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하였을 때 이층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전시된 안도산과 같이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 놀라고 기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몇 년 후 다시 가니 그 사진을 볼수 없었다. 언제까지 임정에서 일하였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도산일기에는 임정의 요원들과 연락할 때 김복형을 시킨 것을 알 수 있다. 후술하는 일제의 임정과 남화연맹의 와해기도도 김복형이 임정과 남화연명에 모두 관여했기 때문에 일제가 김복형을 체포하여 이용하려 한 것이다.

 

심극추의 나의 회고 186쪽을 보거나 손자 김광릉이 작성한 공적서를 보면 윤봉길 홍구공원사건 후 선언문을 중문과 영문으로 작성하여 상해의 각신문사에 193259일 보냈는데 이는 오연 김복형이 작성한 것으로 김구 선생을 엄호하여 상해에서 피신시키고 나서이다. 광복후 김구주석이 조국으로 귀국하는 도중 상해에 머물 때 집에 오셔서 오연 깁복형의 장남 김홍락을 접견하시고 친필로 써서 주신 글과 사진이 남아있다.

 

 

4.흥사단 시절

도산 안창호의 일기로 남아있는 것은 19201월부터 8월까지와 19211월과 2월분이다. 이 일기에 적힌 김복형의 발자취는 우선 1920225일 도산은 김복형을 직접 면접하여 입단 문답을 하고 다시 26일 김항구를 대신 시켜 입단문답을 한 후 입단식을 거행한다. 안도산전서 상권을 보면 입단문답의 내용이 상세하게 나오는데 여간 자세하고 까다로운 질문이 아니다. 27일에는 유상규와 김복형을 불러 간단한 훈시를 한다. 315일 김복형에게 여비를 주어 광둥을 기반으로 한 중국의 군벌 첸쫑밍陳炯明(진형명)을 만나게 한다, 411일 도산의 인척이기도 하고 가장 신뢰하는 동지이기도 한 동오 안태국선생이 돌아가시자 414일 안정사로 공원묘지에 안장하고 당일 임정에서 도산에게 외교를 담당하라는 청을 오연 김복형을 시켜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곤란하다는 말을 전하게 한다. 오연 김복형이 임정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임정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이리라. 420일 오후에는 김복형을 비롯한 6인과 반송원半淞園에 가서 봄경치를 구경하고 오다가 동아여사라는 곳에 저녁을 같이한다. 김복형은 이미 그 정도로 도산의 측근인물이 되었다. 반송원은 당시 상해 남쪽의 사설공원이었다. 반송이란 이름이 두보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상당히 볼만 한 정원이었던 모양이다. 도산이 바쁜 일정속에서 측근을 데리고 봄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531일 임정 국무원 회의를 열고 모스크바로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등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선전직원 김병조 차리석 양제시와 노동국의 유상규 전재순 김복형 등을 불러 대동여사에서 점심을 같이한다. 620일에는 김복형을 시켜서 임정 직원 중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상의해서 총리의 사직을 만류하라고 한다. 물론 도산 본인도 당사자를 만나 강력히 만류를 하였지만 안 되니 측근 사람들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국무총리인 이동휘가 구미외교는 반드시 자기를 거치라고 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불복하고 그간 여러 가지 이승만의 독단을 비판하고 불신임하면서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76일 김복형이 첸쫑밍(진형명)을 방문하고 도산에게 주기 위하여 얻어온 필통이 첸쫑밍 책상에 있던 것임을 박은식에게서 들어 알고 도산은 자신에게 감복하는 김복형의 인격을 알게되다. 그리고는 박은식과 같이 한번 오라하다. 79일 도산은 박은식과 더불어 김복형(원문에는 김복군이라고 형이 탈자되었으나 76일자 일기와 비교하면 김복형임을 알 수 있다)을 찾아가 대동여사에서 점심을 같이 한다. 여기서 포타프(러시아 장군)와 여운형과 같이 첸쫑밍을 방문하고 약속한 이야기를 전한다. 레닌 정부에게 요구하여 시베리아 지역을 빌려서 한인 군영을 조직하여 6사단을 만들고 중국군과 합동하여 북경정부를 전복하고 후에 한국의 독립을 이루자고 했다 한다. 군인이 있어야 국가를 유지하지 군인의 실력이 없고는 국가를 통치하지 못하리라고 하는 첸쫑밍과 공감하면서 도산의 의사를 묻지 않고 도산을 총책임자로 하기로 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도산은 이 소리를 듣고 이런 계획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불가능함을 일기에 세세히 적고 있다.

 

722일 유기준 집에 가보니 이광수 이원익 김흥제 오인석 김복형 등이 모여 김립의 서신사건을 논하면서 그를 폭거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도산이 이를 말리면서 비밀리에 타협을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다. 김립金立은 한일합방이후 하바롭스크 등에서 이동휘와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서자 이동휘 국무총리 아래 국무원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는 이동휘와 함께 임시정부에서 모스크바와 연락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서신사건은 김립이 총리를 사직한 이동휘에게 보내려던 밀서를 이원익이 빼돌려 안창호 이광수 등에게 전달함으로써 생긴 파동이다. 이후의 일기를 보면 도산 안창호가 그를 엄히 꾸짖는다. 그후 김립은 레닌이 임정에 보낸 자금을 이동휘 휘하 공산당 조직에만 사용한 사건으로 임정의 성토대상이 되어 김구가 보낸 청년들에 의해 1922211일 상해 자베이 거리에서 암살된다.

 

727일 도산 안창호가 미의원단을 만나기 위하여 홍콩으로 배편으로 출발할 때 차리석 김복형 등이 부두로 나가 환송하다. 85일 도산은 홍콩에서 불란서 선박으로 홍콩에서 상해로 돌아와 김복형으로부터 그간의 경과를 보고 받는다. 밀서를 보낸 김립이 각총장과 유력인사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이후 충성을 다하겠노라 맹세하고 도산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고 한다. 192123일 미국의 양순진으로부터 송금한다는 편지는 받았으나 송금수표는 오지 않았으므로 김복형을 시켜 조사해보라 하다.

 

그 이후의 일기는 없으나 가족의 기록으로 보거나 안도산전서 상권에 실린 주요한 이 쓴 전기 228쪽을 보면 19215월부터 19278월까지 안창호 선생의 비서로 임시정부의 많은 문서를 작성하고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19217월부터도 상해미술학교를 다니면서도 아직은 혼자 몸이기 때문에 도산 안창호 선생 측근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 안창호 전집에 나오는 도산과 찍은 많은 사진으로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을 확신할 수 있다.

 

도산 안창호전집 제6300쪽을 보면 김복형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총장 안창호 차장 현 순 경무국장 김구 비서국장 이유필 아래 1919831일부터 1031일까지 서기로 일한 것으로 적혀있으나 가족의 기록에는 상해임시정부 원년(1919) 9월부터 11월까지 임시정부 내무부서기 그후 노동국서기로 근무했다고 한다. 기록과 기억에 차이가 있으나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한 사실은 일부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의 사령사항으로도 확인할 수 있고 도산의 일기로 추정하여도 확인할 수 있다.

 

도산 안창호전집 제7312쪽 원동단우 현상조사표를 보면 송강 淞江3중학교 교원으로 근무중인데 거주지가 남경이다. 도산 안창호전집 제877쪽에는 제8회 원동대회 기부자 명단에도 김복형이 포함되어 있고 87쪽에는 192253일 흥사단 제8회 원동대회에서 김복형은 이사부에서 선임한 준비위원으로 일한다. 307쪽에는 1923년 원동단우 조직표에는 제15반장으로 상해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있고 87쪽에는 192427일 흥사단 제10회 원동대회에서 김복형은 준비위원장으로 일한다. 437쪽에는 1925년 원동단우 일람표상에도 이름이 나오는데 거주지가 남경시 동쪽 진강鎭江이고 입단년도가 1920년으로 적혀있다.

 

흥사단 기록으로 볼 때 남경에도 살았고 진강에도 살았고 상해에서 여러 주소지에 살았다. 최종 거주지인 하비로 안락방 4호에는 보증금을 낸 기록으로 볼 때 대개 1938729일 이후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손자 김광릉 부부가 이집에 살고 있다. 현재 주소는 상해 회해중로淮海中路 6134호로 주소만 바뀐 것이다.

 

 

5.남화연맹

오연 김복형이 무정부주의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정화암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는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봉길 거사와 관련하여 정화암이 남화연맹측의 거사 계획을 회고하는 장면이다. “일본의 상해점령은 장치중의 근위부대와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했으나 결국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1932429, 일본은 전승을 자축하고 전쟁에 임하였던 그들 군인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하여 일본천왕 히로히도의 생일인 이날 천장절기념식을 겸한 전승축하식을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는 이 기념식이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기념식에 참석하는 일본군부 요인들을 폭파시켜 버리겠다는 거사계획을 짜나갔다.

기념식 정보는 중국인 동지의 소개로 알게된 일본인 종군기자를 통하여 입수하였고, 그는 식전에 참석할 거물급의 명단과 식이 거행되는 시간과 순서 등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구파 백정기는 이 식전에는 자기가 꼭 폭탄을 던져야겠다면서 자못 흥분되어 그 의기가 대단했다. 오만무쌍한 일본의 기를 꺾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고 우리의 민족정기를 보여 주겠다는 우리의 결심은 대단하였다. 그때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라면 어느 누구나 이런 생각은 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였을 것이다.

 

임정의 김구도 이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김구 역시 남화연맹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라 생각하고 안공근을 시켜 나와 친분이 두터운 김오연에게 남화연맹측의 거사계획 여부를 탐문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계획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오연이 이를 알 리가 없다. 오히려 나는 김오연으로부터 당일 그 식전에 참석한 내빈들은 11시까지 전부 퇴장하고, 그 뒤에는 군인들과 고관들만 남게 되어 있으므로 그때 거사키로 결정했다는 임정측의 비밀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6.일제의 임정과 남화연맹 사이 와해 기도

일제가 임시정부와 남화연맹 사이를 와해시키려고 김오연을 체포한 사건이 있다. 정화암의 이 조국 어디로 갈것인가?”에 이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댜.

 

당시 그는 상해에서 태창중학교 교사로 있었고 딸들은 해관에 다녔다. 그는 허장로와는 처남 매부간이었고 허장로 집에는 조카 허열추가 기숙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허열추가 집에서 나오다가 일본형사들이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허장로와 김오연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므로 김오연 때문에 허장로 집을 수색하려는구나 하고 직감했다. 허열추는 그길로 김오연에게 가서 빨리 피신하라고 일러 주었다. 김오연은 그 길로 나에게 왔다. 우리 세집은 서로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후 3시쯤 김오연의 딸 영재가 일본형사들이 집을 수색하고 갔다고 알려 왔다. 말썽 될만한 편지나 사진 서류같은 것은 날쌔게 감추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발각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별스런 증거가 없다고는 하지만 집을 수색할 정도라면 이것은 심상치 않은 것이며 김오연을 체포할 계획이 돼있는 것이 아닌가? 그를 체포할 계획이라면 그집 부근에는 반드시 형사가 잠복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여 사흘 동안 내 방에서 같이 지냈다. 그는 사흘 동안이나 외출도 못하고 방안에만 갇혀 있자니 무척 답답했다. 그래서 그는 불란서공무국으로 가서 내용을 알아보겠다고 나섰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경찰에 수색을 당할 이유가 없으며, 더구나 자기는 중학교 선생으로 불조계에 사는데 일본형사들이 가택수색을 하다니 이를 불란서공무국에 항의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만류도 듣지 않고 나갔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위혜림으로 하여금 알아 봤더니 이미 일본영사관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는 불란서 공무국에 찾아가 교육자를 정치문제에 관련시켜 가택수색을 하면 자유로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항의하면서 초빙장까지 내보였다. 초빙장이란 학교에서 선생으로 와 일해 달라는 서류다. 김오연이 불란서공무국에 와 떠드는 것을 보고 그곳에 근무하는 러시아사람이 일본영사관에 전화로 알려 체포해 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가 체포돼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집에서는 물론 모든 사람들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취조과정에서 일본형사는 그가 한구청당漢口淸黨운동 때 중국공산당과 관련되었던 사실을 추궁하였던 것이다. 그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것을 알았을까?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화암과 안공근뿐인데...,“ 김오연은 자기가 잡혀오게 된 동기를 알만했다. 취조형사에게 화암과 안공근 두사람 중에서 누가 이것을 말해 주었는지를 물었다. 형사는 안공근에게서 들었다고 대답했다. 안공근은 러시아어가 유창했다. 그는 불란서공무국의 정보담당인 러시아인과 친분이 있었고 이 러시아인은 일본영사관 사람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나와 안공근과 김오연과의 사이를 알아낸 일본영사관은 남화연맹과 애국단 사이를 이간시켜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비극을 연출시킬 계략으로 계획적으로 김오연을 체포 구금해놓고 넌지시 이것을 그에게 일러준 것이다. 안공근은 내가 애국단을 이간시키려 한다고 오해하고, 위혜림이나 김오연에게 피해를 주면 화암이 가만히 있지 않고 어떤 반격을 해오겠지 하는 생각에서 김오연의 과거를 들추어 불란서 공무국 러시아인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일본영사관은 위혜림에게 전후사실을 알려 비극의 서막을 계획하려고 했다. 남화연맹과 애국단 사이에 어떤 참극이 벌어질 수 있는 사태가 되었을 때 김오연을 석방시키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밉다고 할지라도 안공근의 이러한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노릇이다. 같은 민족으로서 더구나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을 뿌리뽑기 위해서 같이 싸우고 있는 사람으로서 조그마한 감정 때문에 이민족에게 보이는 이러한 추태는 마땅히 규탄되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일을 들고 일어나 안공근과 시비를 하게 되면 진짜 일본놈들의 게략에 말려들어 버린다. 그들의 계략을 간파한 내가 어찌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겠는가. 더구나 내가 시비를 따지고 나선다는 것은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 돼 버리는 것 이외에 얻는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우선 김오연을 빼내 놓아야할게 아니오. 영사관에 가 잘 이야기해 보시오.“ 그길로 위혜림은 일본영사관으로 가 남화연맹과 애국단의 감정이 지금 날카롭게 대립되어 금방 어떤 참극이 벌어질 듯 하니 김오연을 내 보내서 그것을 부채질하도록 하라고 꼬였다. 오연은 워낙 허약한 체질에다가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시달림을 받아 몸이 극도로 쇄약해진데다가 4개월을 심문하여도 별 증거가 나오지 않자 가석방형식으로 김오연을 석방한다.

 

만일 일본측이 계획한대로 우리와 애국단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경우 김오연은 물론 위혜림까지도 신변에 위험이 초래될 것이라는 협박을 위혜림은 영사관으로부터 받았다. 위혜림은 그런 협박에 구애받을 사람이 아니다. 김오연이 분개하여 당장에 안공근을 만나싸움을 시작하겠다고 설쳤다. 나는 위혜림에게 일본놈들이 그런다해서 우리가 애국단과 진짜 싸우게 되면 득보는 것은 일본놈 뿐이오. 일본형사들이 물어오거든 곧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만 대답하시오.“ 이렇게 차일피일 시간을 끌게 되니 일본영사관에서는 김오연을 철저하게 감시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는 있었으나 감방과 같은 생활을 계속하게 되다. 그 때 할일이 없게 된 그는 바둑으로 시간을 보냈고 바둑책도 하나 편찬하였다. 1841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제가 상해의 조계지를 모두 점령하고 박해가 더 심해지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큰 고생을 해보지 못한 그는 견뎌내지 못하고 1942828일 음독 자살했다. 유서도 없이 인생하기 지난호‘(인생은 어찌 이다지도 지루한가)라는 짤막한 쪽지만을 남겼다. 독약을 먹고 자살한 후 상해 만국공원에 안장을 했으나 문화혁명 당시 묘지를 파헤치고 평토화하여 유골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외손녀 이원영과 외손자사위 허영빈이 상해를 방문하여 유골을 국립묘지로 모셔오려고 했으나 유골이 없다고 했다. 상해에 손자 김광릉이 세운 김복형 가족묘지가 있으나 오연 김복형의 처와 두 딸과 두 아들의 유해만 묻혀있다.

 

정화암은 그의 죽음의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얼마 안 가서 일본이 패망한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중국 각지에서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될 때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민족해방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고 반문을 해봤을 것이다. 그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를 가장 이해해줄 화암마저 자기를 만나주지 않으니 희망을 잃고 고민을 했을 것이다. 멀쩡하게 교편을 잡고 있던 그를 미끼로 우리 남화연맹과 임정과의 이간책을 썼던 일본놈들이 정화암은 한없이 미웠다.

 

정화암은 김복형이 너무나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일화를 남기고 있다. 어느 비오는 날 나(정화암)는 그를 찾아간 일이 있다. 나를 보고 그는 대뜸 서가호엔 뭐하러 갔다 오시오.“하였다. 하도 신기하여 아니 내가 서가회에 갔다 오는 줄은 어떻게 아시오?“ ”이렇게 앉아 있어도 화암이 뭐 하는지 다 알고 있소.“하면서 껄껄 웃었다. 그날 서풍이 불고 있었는데 내 옷이 젖은 정도를 보고 행선지를 알아 맞췄던 것이다. 하기는 중국최고의 미술대학이라는 상해미술전문학원을 내내 우등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자식들도 모두 그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모두 수재였던 모양이다. 머리 좋은 사람이나 둔다는 바둑도 김복형은 잘 두어 중국의 바둑고전을 현대문으로 번역한 십삼기경十三棋經을 남겼다. 딸 셋이 모두 상해해관을 다녔다는데 수재가 아니면 들어가기 어렵다는 직장이었고 아들들도 대동대학과 교통대학을 나와 엔지니어로 근무를 했다.

 

10세기 중국조선족 역사자료집에 실린 심극추의 나의회고를 보면 135쪽에 정화암은 허상련장로(오연 김복형의 매부) 정치화(허렬추) 김오연부인 등과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김오연부인은 매번 자녀들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또한 심극추는 일제가 망한 후 시안에서 상해로 온 하유 이종봉과 만나 휴일이면 오연선생의 집에 놀러가서 오연의 딸들과 아들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유 이종봉이 둘째 딸 김영재와 19499월 결혼을 하게 된다.

 

 

7. 후기: 제자 요몽곡과의 만남

우관 이정규가 성대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어느 날 청강 김영기 교수가 족자를 하나 들고 총장실을 방문했다. 청강은 교수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치바이스(제백석?白石)에게 사사받은 화백이다. 김청강의 부친 해강 김규진은 중국 북경에 가서 10여년간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와 작품활동을 하다가 능통한 중국어 실력과 특출한 서법 때문에 영친왕의 서사로 활동한 분이다. 족자는 김청강이 여름방학이면 대만에 가서 대만의 화백들과 교류하며 당시 대만의 역사박물관을 창설하고 관장으로 있던 요몽곡(姚夢谷야오멍구)로부터 받았두었던 것으로 교수휴게실이 썰렁하니 걸어두고 보자고 내놓은 것이다. 막상 펴놓고 족자의 화제를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다.

 

予年十八 從韓國名?家 金吾然先生

激抗戰期中 先生奔走復國 爲日人所給後 遂不知所終値

金晴江先生 訪華詢 以吾然師下落 則?然不知其處

題此志 予懷念之?

庚子 姚夢谷 識

 

내가 18세에 한국의 유명 화가 김오연선생을 따랐었다.

격렬히 항전할 때에 선생은 조국광복을 위해 분주하여 후일 일본이 상해를 점령한이후에 마침내는 어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김청강선생이 대만을 방문하였을 때 물었으나 오연사부의 마지막을 알 수가 없으니 그 장소 또한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스승에 대한) 나의 뜻과 서글픈 심정을 적는다.

경자년(1960)에 요몽곡 적다

 

글의 내용은 그가 18세때 사사한 오연 김복형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아닌가? 요몽곡은 1912년생이니 18세때는 1930년이라 김요연이 태창사범에 근무할 때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백과사전 바이두(百度)를 뒤져 요몽곡 이력을 뒤져보니 태창사범에서 유명한 회화의 거장 김오연(중국발음 진우란) 등으로부터 사사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인사치례로 적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관 이정규 총장이 족자의 이 글을 읽고 요몽곡과 김오연의 관계를 설명하자 청강 김영기교수는 이 족자를 이 총장이 가져가야 할 물건이라며 주었다. 청강 김교수가 요몽곡에게 오연 김복형은 이미 상해에서 사망하고 김오연의 둘째 딸 김영재와 외손녀가 한국에 살고 있으며 이총장이 사돈임을 알렸다. 이후 편지가 오고갔으며 요몽곡은 사매인 둘째딸에게 매화 그림을 보내왔다. 우관이 총장 시절 자매결연 관계인 대만의 정치대학을 방문하고 강연도 하시면서 요몽곡을 만났다. 그 때 요몽곡이 다른 그림을 하나 그려 주었고 고궁박물관의 도록을 선물로 받아왔다. 요몽곡은 그후 몇 차례 한국을 오가며 중국고궁박물관의 소장품을 가져와 명동의 중국 대사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70년초 우관의 집을 방문하여 김오연의 외손녀 이원영을 대만에 데리고 가서 그림 공부를 시키겠다고 초청했다. 허나 집안 사정 때문에 초청을 받아들여 대만으로 유학갈 수는 없었다.

 

 

 

참고문헌

 

도산안창호전집 제1~14, 도산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안도산전집 상중하, 도산기념사업회, ()범양사 출판부

 

연변조선족자치주 우리역사기행 / 용정 용문교, 해란강|작성자 혹성공주

 

실크로드 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래출판, 2006

 

나의 회고, 심극추, 중국조선민족문화예술출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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