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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유의 자유사회 운동과 청년들
이 문 창(국민문화연구소 고문)
“청년은 사회의 주인공으로 사회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총책임자이다. 즉 사회의 근간이며 원동력이다. 청년은 노인처럼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난관을 돌파하고 미래의 새로운 이상 건설을 위해 분투하는 기개를 가지고 있다.”
- 『남화통신』 제2호(1936. 6.) ’우리 청년의 책임과 사명‘에서 -
하유何有 이종봉李鍾鳳 선생(1909~1950 이하 경칭 약)은 해방 전후 국내외에서 한국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한 혁명가이다. 그는 그의 길지 않은 불꽃 튀는 젊은 일생을 중국에서 조국 광복운동을 위해, 또는 국내에서 저유사회 건설운동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분이다. 먼저 이하유의 성장 배경과 의식 형성 과정부터 살펴보자.
이하유는 1909년 9월 16일 인천에서 평창후인平昌后人 이갑규李甲奎 공의 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실학파 활동과 깊이 관계가 있는 서울 근기近畿 남인 출신으로 특기할 점은 초기 한국 천주교 순교사殉敎史에 깊이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즉 조선 천주교의 창시자 이승훈李承薰(1756~1801)이 바로 멀지 않은 같은 집안으로, 그로 인해 모든 친척들이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한말 갑오동란(동학농민전쟁) 때는 관훈觀熏, 정훈鼎熏, 두 할아버지 형제가 난을 피해 인천 앞바다 장봉도로 이사를 갔다가 10여 년이 지나 다시 육지로 나왔다.
이하유가 처음 나서 자라던 시기 20년은 강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온 민족이 식민지 노예로 전락하던 시대였다. 그의 성장기 의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로 인해 일생을 혁명사업으로 시종하게 되는 데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발 벗고 나선 회관悔觀 이을규李乙奎, 우관又觀 이정규李丁奎 두 숙부의 영향이 컸다 그로 인해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면서도 부친 갑규甲奎 공은 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평생을 경향으로 쫓겨 다니며 말없이 뒷바라지에 골몰했던 것이다.(이하유의 집안은 3·1운동 직전인 1918년부터 10년간 충남 논산군 두마면 입암리에 은거하다가 세 숙질이 모두 일경에 피검된 후에야 그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서울로 다시 이주했다.)
이하유는 그런 와중에서도 중동중학을 다녔고, 그가 광주학생사건에 연좌되어 투옥생활 하던 거의 같은 무렵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중진인 두 숙부(회관 이을규와 우관 이정규)가 각각 별도의 사건으로 국내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거나 복역 중이던 시기였으니, 말하자면 세 숙질이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이 옥고를 치렀던 셈이다.
1932년 출옥 후, 하유는 혁명의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사회학과에 재학 중 흑우연맹에 가입, 자유사회 혁명의 사상적 수련을 쌓았다. 그러다가 ‘유학생예술단사건‘으로 경시청의 수배를 받게 되었을 때, 상해의 양여주(오면직)로부터 이동순(흑우연맹 맹원)에게 “중국에 와서 일할 만한 동지를 보내 달라”는 위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1934년 중국으로 탈출한 하유는 그길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남화통신』을 편집 간행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 직접투쟁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때 만났던 동지 극추克秋 심용철沈容澈은 그의 회고록에서 ‘전우 이하유’라는 타이틀로 “이하유는 위인이 유순하고 상냥하였으나 강인한 성격이 또 숨어있어 어떠한 고난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요컨대 “하유의 독특한 특성은 과감하게 고난을 헤쳐 나가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떠한 험난한 일도 그에게는 작은 일로 보였었다”며 그의 쾌활하고도 성실한 인격을 극찬하고 있다.(2002, 20세기 중국조선족역사자료집 181~5)
이하유 일생 중 가장 처절했던 활동의 절정기를 묻는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중일전쟁 초기의 청년전지공작대 활동을 지목하게 될 것이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단시일 내에 화북지역을 석권하자, 하유는 상해에서의 『남화통신』 간행 활동을 잠시 멈추고 복건성 하문·천주지역으로 피신하여 사태의 추이를 잠시 정관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회관, 우관 두 숙부가 10년 전(1927~8) 중국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민단활동(농민자위운동)을 하던 발자취를 돌아보며, 이제부터는 우리가 대일전쟁의 전면에 나서서 중국 민중과 일체가 되어 왜적을 분쇄할 때라는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그때부터 하유는 홍콩을 거처 광주로 전지를 뚫고 다녔고, 거기서 다시 탈출하여 중경으로 후퇴하는 우리 임시정부의 대 부대와 만나는 과정에서 김인金仁(백범의 장남), 김강金剛(東洙), 이해평李海平(載賢), 노복선 등 우리 젊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전지공작대 조직 준비에 들어갔다. 하유는 우선 중국인을 합한 약 50명의 선무공작대를 편성하였고, 작곡가 한유한韓悠韓(향식) 동지의 연극 ‘아리랑’ 공연을 통해 전후방 중국 군민을 위무 격려하는 순무활동을 하였다.
이하유 일행은 1939년 중국의 임시수도 중경에 도착해서 이미 그곳에 와있던 나월환羅月煥, 박기성朴基成 동지 등과 합세하여 정식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는 백범 김구 주석의 주선 하에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장개석 총통의 재가를 얻어, 서북의 국방을 맡고 있는 중앙군 제34집단군 사령관 호종남 장군에게 소개되었다. 그렇게 해서 본망本望의 제1선에 다시 진출하게 된 하유 일행이 중국군의 협조로 섬서성 서안에 공작대 본부를 두었을 때, 그 당시의 조직은 대장 나월환, 부대장 김강, 정치부장 이하유, 훈련부장 박기성, 선전부장 이해평(재현) 등이었다. 그렇게 해서 불과 16명으로 구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중국군과 협력하여 활동을 개시, 적의 후방 교란과 기밀을 탐지하며 적에게 끌려나온 우리 학병들을 귀순시켜 단시일 내에 인원수가 100여 명으로 불어남으로, 명실 공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제1차로 중일전쟁 실전에 참전한 역사적인 부대가 되었다.
그런 기초 위에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됨으로써 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그 뒤에 다시 제2지대로 개편)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월환 대장에게 불의의 변고가 발생했던 것은 더없이 불행한 일이었다. 나월환 변사사건으로 인해 전지공작대 20여 명이 호종남부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게 되고, 특히 한창 뻗어나가던 우리 혁명동지들의 기세가 한때나마 풀이 죽게 되었던 것은 광복군 전체로서도 대단히 불행한 일이었다.
후일 이해평은 ‘이하유 동지 26주기 추모식’에서 “하유는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자력이 있으며 그의 열정에 넘치는 행동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꽃을 일으켰던 것이다.”라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그에 이어 “올바른 일이라면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며 동지들을 위한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았다”고 이렇게 고인을 그리워했다.
“그는 백절불굴의 의지와 평민적인 생활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한 실천력을 가진 청년으로 동지들 사이에 무형의 지도력과 감화력을 소유하였으며 그의 무언의 행동력과 의협심 및 깊은 의리에 감복하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이하유는서안을 떠난 지 반년 만에 상해에 도착하였다.상해에서 정화암鄭華岩, 유자명柳子明 등 노장 선배들과 만나 혼란에 빠진 교민사회를 재정비하는 한편으로, 중국 동지들의 ‘세계학전관’과 협력하여 ‘조선학전관’ 및 ‘신채호학사’ 창설 사업에 매달리느라 귀국 길이 늦어졌다. 조선학전관 저 『조선 문제, 우리의 관찰과 건의』에서 이하유는 세계학전관의 취지에 대해 요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세계학전관世界學典館은 중국의 석학이자 원로 아나키스트 이석증李石曾이 종전 후 상해에서 프랑스, 영국 등 30여 개국의 진보적 석학들과 연대하여 설립한 연구 기구다. 이 연구 조직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하나로 취합함으로써 국가 흥망의 정치사보다도 그 나라 문화 개척의 기록을 세밀히 조사해서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강대국에 눌려 작취를 당하는 민족이라 할지라도 그 민족으로서의 숭고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아무리 작은 나라라 할지라도 세계 속의 한 국가로서 떳떳이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그 나라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 그렇게 모여진 각국의 진정한 역사와 문화를 연구 발표하여 하나의 세계적 문화 공작을 창도함으로써 세계문화 향상과 세계평화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그에 의해 각자 자국의 학문적 성과를 세계학전관을 통해 중외에 알리고 종합함으로써 세계일가의 상호부조와 자유평등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그런 사업 취지에 호응하여 각 참가국들에서는 속속 학회를 설치 운영하여 그 연구 성과가 『유태학전』 『영국학전』 『흑인학전』 『프랑스학전』 『중국학전』 등으로 발간되어 나왔고, 그것을 종합 평가하여 집대성하는 일로 세계학전관은 바쁘게 돌아갔다. 여담이지만 그 당시 노 아나키스트 이석증은이 목적 달성에 전념하느라고 장사사범학교 시절 제자이던 모택동의 북경 방문 요청까지 사양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이 세계학전관에는 중국에 잔류하고 있던 우리 혁명동지 정화암, 유자명, 정치화鄭致和, 이오산李吾山(剛), 이하유 등도 가입하여 조선학전관을 설립(1946, 상해 우원로 749-51)하는 동시에, 『조선학전』 초판(1947. 3)에 이어 재판(다음 달)까지 간행하고 있다. 이 『조선학전』 발행 작업에 중국 측의 이석증, 오치휘吳稚輝, 파금巴金, 주세朱洗 등 제 학자들이 모두 협력해서 국문, 중문, 영문으로 출판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하였다는 것이다. 『조선학전』에는 ‘신흥 조선의 민족문화 건설로써 중국과 세계문화 합작 공작에 노력하고자’ 하는 내용과 함께 ‘조선 문제에 관한 우리의 관찰과 건의((이하유 역)’ 라는 문건이 당시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어 주목을 끌었다.
“조선반도는 아시아대륙 동부 해양으로 뻗친 거대한 팔이다. … 제2차 세계대전은 침략과 반침략의 청산 전쟁이었는데… 반침략 진영인 연합국이 승리 후 … 가석한 것은 반침략 전쟁에 참가한 강국들이 … 피 침략의 약소국들에 대하여 그를 과분瓜分할 장물로 보거나 혹은 자기들의 군략적 기지로 볼 따름이다. 그런데서 조선이 카이로회담에서 획득한 자유의 서광이 다시 암흑에 빠질 뿐 아니라 국토가 다시 양대 강국 제일선의 도살장으로 화하고 3천만 동포가 장차 양대 강국 제1선 전쟁의 희생자로 될 것이다. …… 우리는 이 위기를 당하여 조선민족의 전도前途를 위해서나 전 세계 인류 개개인의 전도를 위해서 대성질호大聲叱呼를 하지 않을 수 없다. … ”
이렇듯 조선학전관 사업에 몰두하던 이하유는 1946년 가을 상해에서 한·중 동지들의 축복을 받으며 고 오연吾然김복형金福炯의 차녀(영재永載)와 세계학전관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잠시나마 신혼가정을 꾸렸다. 여기서 잠시 그의 처가, 특히 이미 고인이 되어 부재한 장인의 사연에 대해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다.
오연 김복형은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상해로 도피하여, ‘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한 미술, 문학, 서예, 바둑 등 모든 분야에 재질이 뛰어난 인사였다, 게다가 그는 성격이 대단히 총명 쾌활하고도 성실해서 주위에 항상 계파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런데서 일찍부터 흥사단에서 도산 안창호의 신임을 받으며 문건 작성 및 연락 업무를 담당(『도산일기』 여러 곳에도 그의 이름이 ‘復’으로 나온다)하였다. 그런 한편 김오연은 부인과 2남 4녀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상해 태창太昌중학에 교직을 갖는 등 프랑스 조계 내에서도 비교적 발이 넓은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그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거사건’으로 졸지에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풀려난 후에도 장기간 감옥 못지 않은 요시찰의 쫓기는 몸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더 버티기 어려워 마침내는 태평양전쟁 초기 “인생이 어찌 이다지도 지루한가!(人生何其支離乎)라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상해에서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해방 후 귀국 길에 상해에 도착한 임정의 백범 김구 주석은 고 김오연의 유가족을 찾아 위문하고 친필 서명을 한 자기 사진까지 남겼다는 것이다. (중공 치하에서 그의 유족들이 ‘반 우파투쟁’이니 ‘문화혁명’이니 하는 갖은 곤욕을 치렀지만, 현재는 손자 김광릉이 홀로 남아 옛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1947년 말 이하유는 중국 활동을 일단 마무리하고 부부가 동반해서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회관, 우관 두 숙부와 여러 선후배 동지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자유사회건설자연맹에도 가입수속을 마쳤다.
그 무렵의 국내사정은 완전 자주통일 독립의 꿈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고, 바야흐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안 자체가 소련 측의 입북 거부와 미소 양군 즉각 동시 철수 주장으로 난관에 부딪치던 때였다. 그런 판세에서 좌익은 좌익대로 우익은 우익대로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다 보니 중간파나 순수한 민족주의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듯 심상치 않은 정세 하에서 이하유는 아나키스트들이 먼 앞날을 내다보고 손댈 수 있는 일이란 대중 계몽과 청년 훈육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그때부터 김광주金光洲동지 등과 출판사(愛美社)를 차려놓고 『빵과 자유』 『스페인혁명과 두르티』 등 사상계몽 서적을 간행 배포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묵당?堂양희석梁熙錫, 수곡樹谷 유정렬劉正烈, 계봉溪峰조한응趙漢膺,군소群素이종연李鐘燕(친제) 등 소장 동지들과 자유합의로 뜻을 모아 아나키스트청년연맹(일명 자유청년동지회)을 조직하고 각자 자기 주변의 청년 그룹을 지도 훈련하면서 느슨하게 상호 협력하는 자유연대 활동을 하였다. 그 시절에 우후 죽순처럼 난립하던 청년단체란 좌우를 막론하고 모두 그때그때의 이슈에 따라 제각기 거리에 떠도는 젊은이들을 끌어 모아 정치 공작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정작 청년들 자신의 신상문제나 장래를 걱정해 줄 만큼 인자한 단체나 지도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판국에 하유를 비롯한 아나키스트 동지들은 청년문제를 단순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판이했다. 즉 ‘청년들이야 말로 이 땅의 미래를 담당할 주인공으로서 그들을 어떻게 길러내느냐 하는 데 민족의 운명이 좌우 된다’고 보는 것이 그들이 관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청년들을 지금의 노예적 생지옥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자기 스스로 개척하도록 일깨우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지적 인격적 자기수련과 상호 의존의 공동생활 훈련의 길을 자주적으로 개척하도록 지도하자는 것이 아나키스트청년연맹의 일차적 과업이었다. 그렇게 지도하던 그룹 중의 하나가 바로 ‘설형회’라는 이름으로 새로 모이기 시작인 독학, 고학을 하는 청년들의 모임으로 그 활동 사례를 다음에 약술해 본다.
설형회가 발족하던 시기는 국제연합이 가능한 지역에서 만의 선거를 최종적으로 결의(1948. 2.26)한 데서 남한 단독선거가 불가항력의 단계에 접어들던 때였다. 그런데서 특히 기왕에 ‘완전 자주독립‘이니 ’임정봉대운동‘이니 하고 다니던 반탁 진영 청년들의 낙담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실망만 하고 있거나 누구를 탓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무능무력을 반성 통감하던 청년들에게 무엇보다도 먼 앞날을 내다보는 혁명선배들의 권유가 큰 작용을 하였다. 즉, 원로 동지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이제부터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깊이 반성하며 개아의 인격을 연마하고 실력을 기르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권고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선배 동지들의 격려에 힘을 얻은 청년들이 그때부터 독서활동을 중심으로 자주학습 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처음에는 좋은 책(그 당시 서점에서 베스트 셀러였던 데일 카네기의 『우도友道』)를 구해 서로 돌려가며 읽는 데서 시작하여 소그룹끼리 틈나는 대로 모여 독후감을 교환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그 단계에서 청년들은 유정렬, 조한응, 양희석, 박제경, 최연택 등 자유사회건설자연맹 및 흑백회의 제 선배들 또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하유의 청년연맹과도 협의하여 본격적으로 가칭 설형회의 발족 준비 작업에 들어섰다.
온 세상이 정치다 경제다 하며 광란하던 1948년 봄 어느 날 정광룡(영), 허정인, 이문창, 하덕용, 박의양, 장건주, 최병곤, 강상기, 홍원태 등 20 여명의 독학, 고학하는 청년들이 창신동 뒷골목 한 구석에 모여 열심히 ‘설광에 조독照讀하며 형화螢火를 채집해서 등화를 대신 한다’는 내용으로 된 발기취지서와 강령, 규약 초안을 낭독해가며 설형회 결성총회를 열었다. 그렇게 발족한 설형회가 주말마다 소그룹으로 나누어 회원들의 직장이나 주거지에서 독후감 발표회와 계몽교양활동을 동시에 시행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러다가 회원 수가 왕창 늘어나자 때때로 전체의 학습대회를 진관사, 봉원사 등 야외나 중구 저동의 자유사회건설자연맹 강당을 빌려 열었다. 그런 모임에는 으레 자유청년연맹, 흑백회 등 선배 동지들이 가세하여 지도위원으로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특히 설형회 창립 1주년 기념집회 때는 이하유가 ‘긴박한 내외정세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양묵당이 ‘아나키즘 개설’을 주제로 열강을 하였다. 이하유는 이 강연에서 미소 냉전 하에서의 한반도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예리하게 풀이해 주면서, “이럴 때일수록 우리 청년들이 좀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백절불굴의 신념으로 정진해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격려를 하였다.
그렇듯 불꽃 튀는 정열을 가지고 후배들을 훈육하던 아나키스트 이하유가 돌연 급성위염으로 별세(1950. 3.28)하는 이변이 발생하고, 그런지 불과 3개월에 그의 예언대로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6·25 전쟁으로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한 속에서도 설형회 청년들은 그의 유언을 그대로 실천에 옮겨 미래 이상의 새로운 싹을 틔우는 일에 분골쇄신 했던 것이다. 그것이 뒷날 4·19 학생들의 자유농촌운동이었고, 그것이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뒤를 이어받은 국민문화연구소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을 후일 우관 이정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설형회 젊은 동지들의 노력으로써 단속적인 회합이나마 가지게 되어서 그 덕분에 곁가지이긴 하지만 연구소가 일루의 여천餘喘을 이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의 의지와 노고를 높이 칭양하고 싶은 것이다.” (1974 이정규 365, 『우관문존』 ’회고와 전망‘에서)
일제 강점 하에서 일찍부터 두 숙부들의 뒤를 따라 ‘탈환혁명‘의 제일선에 섰던 아나키스트 하유 이종봉 동지가 42세를 일기로 급서했을 때, 그의 일신상에 남은 것이라곤 다만 국내활동 3년 동안 훈육하던 청년들, 그리고 갓 태어난 일점혈육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일점혈육 원영園英은 선친 유고 후 할아버지들의 품에서 대학까지 나와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고 부군 허영빈許永彬과의 사이에 두 딸까지 낳아 모두 훌륭하게 성취시켰다. 그에 그치지 않고 하유의 외동딸은 학생시절 농촌활동에 뛰어든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국민문화연구소의 ’손으로 생각하라‘라는 수산授産운동을 청년 대중에게 실천적으로 보급하는 가운데, 선친의 못 다한 유지 유업을 오늘에 계승 발전시키고자 전력투구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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