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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22-12-05 조회수 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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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흑도』『후토이 센징』『현사회』와 동지들

흑도』『후토이 센징』『현사회와 동지들

 

 

 

김창덕(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국민문화연구소 이사)

 

목 차

.머리말

.흑도1

1.흑도1호의 특징

2.흑도1호의 동지들

3.흑도광고란의 동지와 단체

.흑도LA NIGRA ONDO 2

1.흑도2호의 특징

2.흑도2호의 개인 광고와 동지들

.후토이 센징1

1.후토이 센징1호의 특징

.후토이 센징2

1.후토이 센징2호의 특징

.현사회3

1.현사회3호의 특징

2.현사회3호의 동지들

.현사회4

1.현사회4호의 특징

2.현사회4호의 동지들과 기사

3.현사회4호의 주요 단체와 기관지

.자금 조달에 대해

1.잡지 구독료

2.광고 수익

3.지식인들의 후원

.맺는말

 

.머리말

 

1919년이라는 해는 강압적인 일제의 식민 통치 저항하는 우리민족의 의지가 3?1운동이 분출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도 커다란 변화와 전환을 가져온 해였다. 특히 일본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신사조의 도입, 러시아혁명과 쌀소동의 발생, 이어 노동자의 수와 노동문제의 증대를 통해, 대전 후에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단숨에 확대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였으며 그는 그해 10월 잡지 노동운동창간하며 본격적인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의 이론가로 활동했으며 그의 사상은 아나키스트 노동운동가뿐만 아니라 더욱 광범위하게 파업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 3.1운동 이후 만세운동만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를 실감한 많은 유학생들이 대거 함께 했던 것이다. 그들은 관심의 폭을 사회문제와 노동문제로, 더 나아가 직접행동을 통한 조국의 독립운동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박열은 191910월 항일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도일해 원종린, 김약수 등과 함께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과의 교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아나키즘을 접하고 직접행동을 통한 항일운동에 뛰어든다.

박열의 본격적인 항일운동은 의거단(義擧團), 철권단(鐵擧團), 혈권단(血拳團), 박살단(撲殺團), 그리고 혈거단(血擧團) 등으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을 이어간다. 이어 192111월 정태성, 김약수, 정태성, 조봉암 등 20여명과 함께 흑도회(黑濤會)를 설립한다.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영역에서의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즘의 구분히 명확치 않았으므로 흑도회를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단지 조국의 식민지 현실을 타개할 수 있다는 순수한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명칭이 혹도회(黑濤會)였다는 것은 이 단체가 아나키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는 아나키즘이 프롤레타리아의 영역에서 대표성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열의 운동에 더욱 큰 자극과 힘이 되었던 것은 19222월 가네코 후미코와의 극적인 만남이었다. 이들은 그 해 5월 도쿄 세타가야 이케지리(世田谷池尻)에 셋집을 얻어 동거에 들어간 이후 192393일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보호검속이란 명목으로 투옥되기까지 대략 16개월간 동거하면서 항일 운동과 함께 천황제의 모순에 적극 저항했다. 이들 부부의 투쟁기록과 나아가 그들과 함께 했던 동지들의 기록은 그들 부부가 발간한 세 가지 제호에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여기서는 박열, 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직접 참여하고 발간했던 흑도(黑濤)1,2, 후토이 센징(鮮人)1, 2호 그리고 현사회(現社會)3호와 제4호의 기사와 광고 내용을 통해 활동의 성격 및 함께 했던 동지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흑도(黑濤)1

 

1.흑도(黑濤)1호의 특징

발행일

1922710

발행소

黑濤출판소(도쿄 세타가야世田谷 이케지리池尻 412)

발행, 편집, 인쇄인

박열

발행 면수

4

가격

5

광고료

11, 130, 전면:

기사 투고자

박열, 후미코, 이강하, 신염파, 가토 스에키치(加藤末吉)

전체 기사 건수

17

 

우선 잡지흑도(黑濤)의 발간 목적을 잘 알 수 있는 것으로는 흑도(黑濤)1호의 제1면에서 밝힌 창간사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약자의 외침, 소위 불령선인의 동정 및 조선의 내정을 아직 피가 경화되어 있지 않은 인간미 있는 일본인에게 소개하기 위해 여기에 흑도회의 기관지로서 잡지 흑도(黑濤)를 창간한다. 우리의 앞길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장애물을 모두 정복했을 때, 그리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되돌아 봤을 때, 그 때 우리의 날은 오는 것이다. 그때야 말로 참된 일선융합(日鮮融合)! 아니 만인이 갈망하던 세계융합이 실현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국가적 편견도 없으며 민족적 증오도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그때를 위해 미력을 다할 것이다......”(흑도1-창간에 즈음해서에서-)

이어 등장하는 선언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 잡지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자아를 살며 매일의 일거일동의 시작은 모두 자아에서 찾아야 한다.......우리는 철저한 자아주의자로 인간은 서로 물어뜯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친하고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는 각인의 자아의 자유를 무시하고 개성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불합리한 인위적 통일에 철저하게 반대하고 전력을 다해 그 파괴에 노력한다. - 중략-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고정된 주의는 없다. 인간은 일정한 틀에 짜맞춰졌을 때 타락하고, 사멸하는 것이다.”(흑도1-선언-에서)

 

널리 일본, 중국, 대만, 조선을.........아니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희망은 갖고 있지만, 그것이 아마추어의 서툰 재주의 슬픔. 마음먹은 대로 안 돼, 결국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조선에 관한 것을 보도하기로 했다.”(흑도1-낡은 공동주택 2층에서에서-)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흑도발간의 목적은 일제에 압정에 신음하는 약자의 외침즉 불령선인들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기 위한 것으로 자신들과 뜻을 함께 하는 일본인, 나아가 장차는 전 아시아를 상대로 실상을 알리겠다는 의미였다.

나아가 선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흑도는 개(), 즉 개인의 중시, 또는 구성원의 주체성 중시라는 아나키즘의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흑도아무것도 고정된 주의가 없는즉 범사회주적인 내용의 잡지라고 했지만,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나키즘의 성격, 특히 당시 일본의 아나키즘을 선도하는 오스기 사카에의 영향이 뚜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은 결코 미리 정해진, 즉 잘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이 아니다. 각자가 거기에 한 글자 한 글자 써 가는 백지의 책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 중략- 관념과 이상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커다란 힘이다, 빛이다. 그러나 그 힘과 빛도 자신이 쌓아온 현실의 지상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만큼 약해져간다. 즉 그 힘과 빛은 그 참된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글자 한 글자, 한 칸 한 칸씩 써온 글자 거기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개인적 사색의 성취가 있어 비로소 우리들은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유주의를 과시하더라도, 그 자유주의 그것이 타인의 판단에서 빌려 온 것이라면 그 사람은 어쩌면 마르크스의, 또는 크로포트킨의, 사상의 노예다. 사회운동은 일종의 종교적 광열을 동반함과 동시에 아무튼 그런 노예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노예여서는 안 된다”(오스기 사카에 전집1-개인적 사색-에서

이처럼 흑도는 아나키즘에서 강조하는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절대자유를 강조했으며 상호부조, 서로의 자아를 존중하는 유연한 형태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이런 자아를 중심으로 자각과 개성의 존중을 내세운 선언문은 당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의 아나키즘과 그 성격을 같이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흑도회가 오스기 사카에와 이와사 사쿠타로의 협력을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2.흑도(黑濤)1호의 동지들

흑도1호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외에도 이강하, 신염파, 가토 스에키치加藤末吉 등의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아나키즘에 의한 사회변혁을 꿈꾸던 젊은 동지들이었다. 이들의 기사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강하

흑도1호에서는 우리들의 호소라는 단편기사가 보이는데 여기서는 무산계급의 힘든 현실을 알리고 이와 함께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우리들 무산자 계급은 세계의 도처에서 호소하고 있다. 자유를 얻기 위해, 평등을 얻기 위해, 빵을 얻기 위한 뜨거운 피의 호소인 것이다. 우리 무산자 계급은 그들 브루주아의 압박과 약탈로 인해 처참한 피의 역사를 쌓았다. 지금 여전히 그런 상태다.......”

 

이강하는 1923120일 서울에서 결성된 흑노회(黑勞會)의 멤버로 그 주된 취지는 현재 모순 많은 생활을 버리고 평생의 일거일동을 자유스럽게 참사람답게 일반이 이상하는 곳으로 가기를 실행하자였으며 그 사무소를 서울 시내 의주통 1정목 138번지에 두었다.

흑노회1923년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조직된 최초의 아나키즘 운동단체였다. 이들은 아나키즘 선전활동 등을 통해 사회개혁을 추구했으며 실제로 1923324일 천도교 강당에서 민중연예대회강연회를 개최하여 아나키즘을 적극 선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강연회는 일제 경찰의 습격으로 중단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이강하는 대전감옥에 투옥되어 그곳에서 옥사하고 만다. 이후 흑노회의 뒤를 이어 1938년 양희석(梁熙錫), 고인찬(高麟燦), 이희종(李喜鍾) 등이 중심이 되어 아나키즘 사상 연구 단체인 선구독서회先驅讀書會를 조직했다.

신염파(申焰波)

흑도1호에는 어떤 방의 벽에서가 있다.

 

일체의 불합리한 인위적 통일을 배척해야 한다. 절대적 진리, 대법칙은 쓸모없다.- 반드시 새로운 진리, 새로운 법칙을 창조해야 한다.”

 

이 짧은 글이야말로 아나키즘에 의한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호소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정을 통한 창조였던 것이다. 인간을 개성을 옥죄는 사상이나 이즘”“인위적 통일에 대한 부정을 통한 새로운 창조였던 것이다. 아마 신염파가 이 글을 썼을 당시에는 다다이즘과 니힐리즘이 새로운 사조로 널리 알려진 시기로 신염파 역시 이런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나아가 이글은 19231월 쓰보이 시게지(?井繁次), 하기와라 쿄지로, 오카모토 준 등이 시작한 적과흑(?)에서의 부정과 파괴를 통한 새로운 창조와 그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붉은 심장의 광렬과 모든 사상을 말살하라!

우리는 지금 시정에 유포되고 있는 모든 이즘을 부정한다 ? 부정한다!

우리의 존재는 부정 그 자체다!

부정은 창조다!

창조는 허무다! 부정하라! 부정하라! 부정하라!

그렇게 함으로서만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생활자가 될 수 있다.

(적과흑 운동 제1선언」『적과 흑4, 1923.5)

 

신염파는 신영우(申榮雨:1903.2.13.-?)의 또 다른 이름으로 수파(授波), 또는 남흥(南興)라고도 했다.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1921년 동경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고학 중, 박열을 만나면서 흑도회, 흑우회에 참가한다. 1923년 박열사건 이전에 귀국한 후 이후 서울의 흑기연맹에 참가한다. 흑기연맹192412월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아나키즘 운동단체로 신염파 외에도 서정기(徐廷夔), 徐相庚(서상경), 한병희(韓昞熙), 이복원(李復遠), 서천순(徐千淳), 이창식(李昌植), 곽철(郭徹), 이기영(李基永) 등이 참여했다.이후 조선일보기자, 이어서 1933년에 만몽일보(滿蒙日報기자의 활동 경력이 있는 아나키스트였다.

 

가토 스에키치(加藤末吉)

흑도1호에서는 시 흑도와 에세이의적의 도화선2편을 기고한다.

 

흑도

?

-전략-

은근히 다가오는

흑도 흑도야말로

신이 보낸 마취제

신이 보낸 평화의 순간

 

! 친구여 이 순간을 영원히 영원히 이어가자

흑도의 물보라가 일으키며

영원히 생을 이어가자

 

여기서는 창간호의 시 답게 흑도야말로 영원한 생명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신의 선물로 인식하고 그리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1872년 생으로 1902년생인 박열보다 30세 위인 가토 스에키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 교사로 에세이교단의 교사(?壇上?師),교실내의 아동(?室??童),교사가 되려는 사람을 위하여(?師たらんとするのために)등을 남겼으나 구체적인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는다.

 

3.흑도(黑濤)광고란의 동지와 단체

이밖에도 흑도1호에는 수많은 동지들이 개인 광고를 통해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알리고 이와함께 흑도에 강한 연대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 이름과 단체는 다음과 같다.

 

모찌즈키 카쓰라(望月桂)도쿄 동인 도안사

모찌즈키는 화가, 삽화가로 아나계 기관지의 삽화를 도맡아 그렸다. 모찌즈키가 도치기(?木)형무소의 가네코 후미코에게 마지막으로 면회를 가서 그린 초상화는 후미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간이식당 헤치마(へちま)를 경영하면서 거기에 출입하던 히사이타 우노스케(久板卯之助) 등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노동청년에 함께 하고 와타나베 마사타로(渡?政太?)북풍회(北風會)에 출석한다. 1917년 민중본위의 민중예술운동을 제창하며 오스기 사카에, 가토 카즈오 등과 함께 민중본위의 예술운동 제창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평민미술연구회, 평민미술협회를 결성. 노동자, 사회주의자 사이에도 회화를 보급했으며 1919흑요회(黑耀會), 이어서 박열이 대역죄로 날조되어 최후의 법정에 섰을 때 착용했던 하카마와 예복은 모치즈키가 준비한 것이었다. 1923610일의 불령사 정기모임 에는 특히 모치즈키 가쓰라의 강연회가 있었다.이외에도 테러리즘의 실패로 감옥에 구금된 와다 큐타로, 무라키,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 등을 부모처럼 보살핀 것도 모치즈키와 그의 가족이었다.

나카야마 아키라(中山啓)상문사

아나키스트 시인으로 시선구자先?者등을 남겼으나 정확한 기록은 미상이다.

 

프롤레타리아 변호사 후세 타쓰지(布施辰次).

후세 타쓰지는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로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적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19192.8 독립선언시 최팔용, 송계백 등의 변호를 맡았으며, 1920년대에는 의열단원인 김지섭 의사의 변호를 맡았다. 또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흑도1호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변호사현사회3호와, 4호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벗, 변호사계의 반역자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미야지마 스케오(宮嶋資夫)와 소설 갱부(坑夫)

1914년 봄 노점에서 우연히 구입한 근대사상을 통해 오스기 사카에의 아나키즘에 공감해 교류 한다. 19161월 최초의 소설 갱부(坑夫)를 발간하지만 곧바로 발매금지가 되고 지형까지 압수된다. 이 소설은 아시오(足尾)동산(銅山) 폭동 후의 핍색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용감히 싸운 한 노동자가 파멸해 가는 모습은 그린 노동문학의 걸작이었다. 하지만 191711월의 하야마(葉山)의 히가게찻집(日陰茶屋)사건을 계기로 오스기와 멀어진다. 19214월에는 다카오 헤이베(高尾平兵衛), 요시다 하지메(吉田一), 와다 키이치로(和田軌一郞) 등과 노동사를 결성해, 신문 노동자를 발간한다. 192234계급의 문학을 출간해 노동자의 계급적 정신에 의한 새로운 문학창조를 주장했다. 미야시마의 경우 당시 아나계의 대부분이 시인이었던 것에 대해 유일한 소설가였다. 미야지마 스케오의 개인 광고는 흑도1호와 제2호에만 보인다.

 

福田狂二(후쿠다 쿄지)신일본 건설사

후쿠다는 와세다 대학 중퇴 후 중국으로 건너가 혁명에 뛰어든다. 1914일본노동당을 결성해 간사장이 된다. 19182월 보통선거 청원 데모를 계획하다 검거된다. 같은 해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신사회의 신문지법 문제로 불경죄로 기소되어 징역 3년 판결을 받고 출옥 후 바로 박열의 흑도1호에 참가한 것이다. 후에 우익으로 전향해 황도신문(皇道新聞)을 발행하고 일제 패망 후에는 방공신문을 발간해 반공운동을 벌인다.

 

 

 

 

.흑도LA NIGRA ONDO 2

 

1.흑도2호의 특징

발행일

1922.8.10

발행소

黑濤출판소(도쿄 세타가야世田谷 이케지리池尻 412)

발행, 편집, 인쇄인

박열

발행 면수

4

가격

5

광고료

11, 130, 전면: 100

기사 투고자

박열, 후미코, 이강하, 신염파,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

무엇보다 제호흑도와 병기된 LA NIGRA OND흑도(黑濤:The black wave)”의 에스페란토어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에스페란토어와 아나키즘은 역사를 함께 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아나키즘의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일본의 경우 아시아에서 가장 빨리 아나키즘과 함께 에스페란토어를 받아들였으며,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의 경우 19066월 일본 에스페란토 협회 설립에 참가해 아나키스트들에게 에스페란토어를 보급했다. 이렇게 잡지의 제호 흑도(黑濤)를 에스페란토어LA NIGRA OND와 병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잡지가 아나키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흑도2호에서도 이강하는 전선에 나타난 마지막 흉계라는 기사에서

 

온정주의는 그들 부르주아가 우리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마지막 흉계다. 우리는 철저하게 정의로서 녀석들의 부정한 아성을 장사지내야 한다. -중략- 녀석들의 흉계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널려있다. 우리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총보다도, 칼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이 흉책으로 우리들이 가장 잘 속는 것도 이 흉책이다. 형제여 저들의 흉계에 속지마라! 긴장하라! 저들이 떠드는 말에는 전혀 개의치 마라!”

 

이 글에서 이강하는 3?1운동 이후 일제가 민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잠시 보여준 흉계즉 소위 문화정치의 실체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는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거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했으며 한글 신문의 간행을 허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격의 정책으로 실제로는 민족에 대한 탄압이 더욱 교묘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흉계는 일제의 의도대로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이광수의 예처럼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민족 지도자 중 일부는 일제의 이런 유화 정책에 속아 일제의 자치권 획득을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염파 역시 1호에서와 마찬가지로 시 ()를 소개하고 있다.

 

! 거기에 생명이 빛난다.

거기에 희망의 불꽃이 타오른다.

거기에 행복의 씨앗이 뿌려진다.

 

! 강한 자아를 위해

타오르는 신념으로 흘려보내라!

그 새빨간 피를! 소중한 선혈을!”

 

하지만 흑도2호에서 가장 주의 깊에 봐야 할 것은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참여라 할 수 있다. 나카니시는 2면에 한 자루의 촛불(一本?燭)라는 에세이를 발표한다.

여기서 자본가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고달픈 일상을 그리고 있으며 기사 중간에 육군대장을 저격한 불령선인.... 그 다음의.....는 내 눈에는 더 작아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라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는 1922328일 상해에서 일제의 육군 대장이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의 폭살을 기도했던 의열단원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의 상해 황포탄 의거를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1887년 생으로 당시 35세였던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는 박열보다 15세 연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신문기자 활동을 하던 중 광산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고발한 것으로 인해 일제에 의해 투옥된 이력을 갖고 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22월 조선에서 소설 적토에 싹 트는 것(?土ぐむもの)을 당시 일류 출판사였던 개조사(改造社)에서 발간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다.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단편소설 불령선인(不逞鮮人), 이어서 19232월에는 너희들의 배후에서(汝等背後より)등과 같이 식민지 조선에 깊은 관심과 동정심을 갖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대작가였다.

이런 나카니시 이노스케와 박열, 후미코와의 동지적 관계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즉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에 대한 1회 청취서(1923108)에서도 밝혀진 것처럼 1923628일 당일 나카니시의 출옥을 박열이 직접 나카노(中野)의 도요다마(豊玉) 형무소로 마중하러 나갔으며 불령사에서 환영회까지 열어주었을 정도였다. 이에 나카니시 역시 박열과 후미코가 날조된 대역사건에 몰려 감옥에서 지낼 때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192611월에는 옥중의 박열을 면회 한 후 박열 군의 대해 ?겨울 일기-라는 수필을 남기고 있다.

 

벌써 3년이나 만나지 않았다. 그렇다. 진재 전 나의 출옥을 마중 와 주었을 때 만나고, 그것 뿐으로,............내가 올해 여름 조선에 갔을 때의, 그쪽 이야기를 하니 무척 즐거운 듯이 듣고 있었다..........B군은 3년의 옥중생활에서도 힘들다는 점은 조금도 없었다..........”, “오늘, 아내가 F씨를 만나기로 했다고 하자, 그런가! 라며 즐거운 듯이 허허 웃었다.”(문예전선31926.1)

 

위 글에서 B는 박열, F는 후미코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당시 프롤레타리아 문학계에서 나름 활동의 폭을 넓히던 나카시니의 참여는 박열과 후미코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들 부부의 활동이 일본의 사회주의 영역에서 점차 뿌리를 내리고 알려지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또한 개인 소식란에는 19201도쿄노동동지회를 조직하고 같은해 428일의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의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와의 정략 결혼 식장에 폭탄을 덜질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시폭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411일 체포되어 4년간 복역한 아나키스트 서상한(徐相漢)의 옥중 소식을 전하고 있다.

 

서상한군 재작년 폭탄사건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군()4년의 선고를 받고 지금 도쿄 감옥에서 복역중. 지금 독서에 빠져있다고 한다.”(흑도2개인소식)

 

이어 조선독립대동단의 총재였던 동농 김가진이 그해 726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병환으로 사망했음을 알리고 있다.

 

조선독립대동단의 영수 동롱 김가진 옹이 지난 79일 상해 불조계에서 병마로 사망했다.”(흑도2개인소식)

 

단체 소식란에는 1921년 일본 도쿄에서 이필호, 정명원, 이상봉, 이상현, 유진걸, 유연표, 이종모, 최영복 등에 의해 조직되었던 고학생 단체 형설회에서 기관지 형설을 발간했다는 소식과 함께 서울의 조선무산자동맹에서 기관지 무산자를 발간할 예정임을 알려주고 있다.

 

고학생 형설회에서는 7월 초순 그 기관지 형설을 창간했다.”

경성의 조선무산자동맹회에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무산자를 발간한다고 한다.”

(흑도2단체소식)

 

2.흑도2호의 개인 광고와 동지들

이어흑도2호에 개인 광고를 통해 연대를 했던 동지들은 다음과 같다.

 

엔도 토모지로(遠藤友四朗)와 저서무정부공산주의의 근본 비평

1918매문사에서 활동했으나, 광고 게재 당시는 국가사회주의자로 변신해 국가사회주의를 창간한다. 이후 천황신앙과 황민의식 고취에 앞장서면서 정신적인 일본주의를 고취하기에 이른다.

 

쓰지 준(?順)과 저서부랑만어(浮浪慢語)

1912년 이토 노에(伊藤野枝)와의 연애사건으로 다니던 우에노(上野) 여학교에서 쫓겨나며 실직한다. 1921년 스티르너의 자아경(自我經)(유일자와 그 소유의 완역)을 발행. 박열과 후미코의 허무주의는 쓰지 준이 번역한 이 책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구로세 하루키치(??春吉)대일본제국 사회주의 동지 공인 스파이

구로세의 개인광고는흑도2호와 현사회4호에, 그리고 후토이 센징鮮人1호에서는 어떤 문답(ある問答)이라는 글을 직접 기고하는 등 적극 참가자였다. 1905년 모지(門司)에서 소총 60, 6연발권총 40, 탄약 1만 수 천개 등을 빼돌려 도쿄나 한국으로 이송할 계획이었지만 경계가 심해 실패한다. 1911년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대역사건에 분개해 보복을 결심하고 상경하지만 체포된다. 19193월간 자본과 노동을 창간하고 노동동맹회를 창설한다. 그해 528일 시계공 조합을 결성해 정공사(精工舍)노동조합 61명의 파업을 주도하지만 실패. 이 과정에서 스파이로 의심받는다. 광고에서 스스로를 대일본제국 사회주의 동지 공인 스파이라고 한 것은 이 사건을 의식한 것이다.

 

가미치카 이치코(神近市子)와 저서 마을의 반역자(反逆者)

일본의 저널리스트, 여성운동가, 작가, 평론가. 19128세이토(靑?)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여성운동가로 활동한다. 1916년 오스기 사카에(大杉?)를 둘러싸고 처인 호리 야스코(堀保子), 이토 노에(伊藤野枝)와 사각관계인 히가게야마차야(日蔭茶屋事件)으로 유명해진다. 오스기에 대한 살인미수죄로 2년간 복역한다. 이 글은 출옥 후 나온 것이다. 일본 패망 후에 정치가로 변신해 좌파사회당 및 일본사회당에서 출마해 중의원 의원을 5차례 역임했다. ?

 

.후토이 센징(鮮人)1

 

1.후토이 센징(鮮人)1호의 특징

발행일

1922.11,

발행소

도미가야()

발행, 편집, 인쇄인

불기

발행 면수

4

가격

불기

광고료

불기

기사 투고자

박열, 가네코 후미코 외 1

1922년 가을 본격적인 아나?볼 대립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흑도회가 분열한 후 아나계를 중심으로 흑우회가 새롭게 결성되고 결성 직후인 192211월 박열과 후미코는 새로운 기관지로 월간 후토이 센징(鮮人)을 발간한다. 처음에 제호를 후테이 센징(不逞鮮人)이라 했지만 경시청의 불허로 발음이 엇비슷하고 내용은 전혀 다른 후토이 센징(鮮人: 담대한 선인)으로 바꾸었지만 난외의 제호는 그대로 후테이 フテイ(不逞)로 고집했다. 우선 후토이 센징의 발간 목적을 보면

 

일본사회에서 무척 오해받고 있는 불령선인이 과연 무턱대고 암살, 파괴, 음모를 도모하는 자라고 하지만 철저하게 자유의 염원을 불태우는 살아있는 인간인가를, 우리들과 서로 닮은 경우에 있는 많은 일본의 노동자 제군에게 고함과 동시에...”

 

이처럼 권력이 불령선인으로 매도하는 조선인들이 실은 불령한 무뢰배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염원하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일본의 민중들 특히 노동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토이 센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흑도회의 분열로 인한 내용의 기사의 내용과 기고자 수의 대폭적인 감소세다.

기사의 수를 비교해 보면 흑도1호와 제2호에서는 17, 25건이었던 것이 후토이 센징1호와 제2호에서는 9, 6건으로 급격히 줄어든다. 외부 기고가 없어지고 대신 거의 대부분 박열과 후미코의 기사로 채워진다. 이는 아마도 흑도회의 분열이 예상치 않았던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으로 많은 동지들의 이탈에 대비해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던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기사 수에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잡지의 형식에서도 미숙함으로 나타났다. 흑도의 경우 거의 완전한 형태의 잡지로 발행소, 정가, 광고료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만 후토이 센징에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 모든 것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광고의 내용과 그 수에 있어서도 미쓰코시(三越) 백화점뿐으로 후토이 센징이 광고섭외를 충분히 할 수 없을 정도로 급하게 발간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어 후토이 센징1호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의 급증과 아나키즘에 대한 깊은 이해였다.

 

조선에는 현재 두 개의 공산당이 있다. 고려공산당과 한성공산당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전위를 맡고 있다.……작년 말 공산당비 8만 몇 천원 인가를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사취해, 조선총독부의 양해를 얻어 형사 동반으로 기생과 요리집에서 써 버린 것이다.……… 또한 한성공산당 쪽은 친일파로 문탁(文鐸), 노병희 일파와 경기도 경찰부의 경부 황모 등이 원래의 노동대회를 먹잇감으로 만들었지만 그것도 앞서 말한 젊은 운동가 등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그들은 노동대회에서도 쫓겨났다. 도대체 국제공산당이란 것은 뭘 하든 제대로 된 인간은 없는 건가. 잘 난체 하는 것 같지만 조선에는 이런 녀석들 외에 진지하고 순수한 젊은 운동가가 넘쳐나는데.”(후테이 센징1?조선의 사기공산당-)

 

이 기사는 아마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을 다룬 기사내용일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볼셰비즘에 대한 강한 부정에서 나온 것임에는 틀림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흑도회의 분열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아나?볼대립은 있었지만 볼세비즘에 대해 우위에 있었던 아나키즘계로서는 여유가 있는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 기사에서 볼셰비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자제하고 있다.

이어서 같은 잡지의 다음과 같은 기사 역시 러시아 혁명의 본질을 고발함과 동시에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기사라 할 수 있다.

 

“5년 전 즉 1917117일 그 날은 러시아의 ○○을 타락으로 이끈 최초의 날이다. 볼셰비키가 로마노프가를 대신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최초로 착취한 날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이 날을 기억하라, 또 다시 이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후토이 센징1-기억해야할 날?!-)

 

위 기사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민중이라는 두 자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비판과 노동가치설 등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기도 하지만, 만약 마르크스의 국가적 사회주의 사상이 실현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전제 정부 가운데 최악의 것이 될 것이라고 강력한 경고를 하기도 했다.

특히 바쿠닌과 터커는 레닌이 권력을 잡기 훨씬 이전부터 붉은 관료정치의 위험에 대해 마르크스의 제자들에게 경고했었다.나아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야말로 노예제도라는 지배와 착취에 기반을 둔 경제형태로 결국은 모든 사람이 임금 수급자가 되고, 국가만이 임금 지불자가 되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 역시 이런 아나키즘의 볼셰비즘에 대한 경계는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이어왔으며 본격적인 분열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아나?볼 논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시기는 이 기사가 나오기 대략 1년 전인 19215, 6월에 집중한다. 1921년이라는 해는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운동 전반의 성장과 함께 전투화가 진행되던 시기였으며, 또한 아나?대립이 두렷해지는 해이기도 했다. 이전부터 아나키즘 운동이 활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함께 볼셰비즘의 빠른 성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양쪽의 대립이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1921년 여름이 되자 이런 아나·논쟁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그해 연말이 되자 더욱더 치열해져 그동안 억눌렸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흐르듯이 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아나?볼 양 쪽 모두 신랄하게 논진을 펼치고 자신들에 대한 옹호와 반대편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볼셰비즘은 노동』『전위』『무산계급을 중심으로, 아나계는 오스기 사카에(大杉?)의 제3노동운동』『관서노동자(?西??者)등을 중심으로 언론이나 운동 영역에서 극단적인 대립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결국 오스기 사카에를 중심으로 하는 아나계는 볼셰비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상당히 늦긴 했지만 공산당과의 제휴가 실제로는 이론상으로도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 이상으로 공산당은 자본주의의 다른 정당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안심할 수 없는, 우리들 무정부주의자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후토이 센징(鮮人)의 발간은 이런 아나?볼 대립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후토이 센징(鮮人)2

 

1.후토이 센징(鮮人)2호의 특징

발행일

1922.12

발행소

도미가야()

발행, 편집, 인쇄인

불기

발행 면수

4

가격

불기

광고료

불기

기사 투고자

박열, 가네코 후미코 외 1

????후토이 센징???? 2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사는 제1면에 나오는 박열의 ?「아세아몬로주의에 대하여(亞細亞モンロ?主義いて)-라는 제목의 기사다. 박열은 조선에 동정심을 갖고 있다는 일본의 권력자 및 대변자들을 위시해 아세아협회, 아세아청년회 등이 조선인들을 향해 아시아 인종은 아시아 인종으로 단결하고.....백색인종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소로운 이야기라고 비판하고, ‘조선에 동정적인척 하는 나카노(中野), 우에하라(植原), 사토(佐藤), 요시노(吉野), 마쓰모토(松本)도 모두 그렇다. 우리들에게는 모두 추악하다. 우리들 조선인은 조금이라도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는 안된다고 호소하지만 이런 후토이 센징에서의 외침은 19242월 당시 예심판사였던 다테마쓰(立松)에게 건네준 장문의 글 한 불령선인이 일본의 권력자 계급에게 전한다에서 더욱 자세하고 강력한 선언문으로 거듭나게 된다.즉 그는 당시 일본의 허울좋은 문화정치와 소위 민권운동가들이 갖고 있던 한계에 대해서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기사로는 박열의 아나키즘 예술론을 알 수 있는 기사 내용이다.

 

고대 조선의 예술은 실제로 찬란했던 것 같다 - 중략- 하지만 그 지극히 정교한 예술품이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 사정없이 착취당하는 약한 민중들의 붉은 피와 땀과 뜨거운 눈물의 결정품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 일본에서 싸구려 인도주의 센티멘터리스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등 바보들은 광하문 파괴에 무척 가슴을 아파하는것 같은데, 이 움직일 수 없는 인간착취의 사실을 보고 그것을 무조건 찬미하는 그들은 인도주의의 방패 속에 숨어 그들 자신 착취계급의 울타리 안에 숨어 있은 것이다.”조선 고대미술을 배격한다=예술에 나타난 인간 착취의 사실=

 

아마 위 기사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광화문 철거 반대 운동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22년 일제는 경복궁 앞에 거대한 대리석 축조물 조선총독부를 세우기 위해 그 자리에 있던 광화문을 철거 또는 이전하기로 했다. 이에 야나기는 정면으로 이를 비판하며 19227월 동아일보에서 장차 잃게 될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철거반대 여론 형성에 앞장섰다.

 

!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뜻 아닌 죽음의 운명을 당하고 얼마나 무참히 생각하는가? k는 너가 맛보지 아니하면 엇지 할 수 업는 괴로움과 쓰림을 생각하고 적지 아니한 동정을 보내고저 하노라. ! 불쌍한 너의 영이여! 만약 네가 갈 곳이 업스면 나 잇는 곳으로 와 주며 네가 죽은 후에는 이 문자 중에 살아다고.

 

결과적으로 야나기의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 덕분에 가까스로 철거 위기를 모면한 광화문은 1926년 자리만 이전한고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야나기의 한국 문화에 대한 헌신과 노력은 당연히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기의 박열은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권위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예술”“모든 예술의 부정과 배격”“예술은 모두 어용예술로,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착취, 강박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크로포트킨의 예술론처럼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을 억압하거나 인간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대건축물에 대한 아나키즘적 거부반응에서 나온 글이다.

 

 

.현사회3

 

1.현사회3호의 특징

발행일

1923315

발행소

박열 발행소, 현사회 발행소, 不逞鮮人社

주소: 도쿄 세타가야世田谷 이케지리池尻412

발행 면수

24

가격

정가:50, 노동자:5

광고료

1:1, 1:2, 전면:50

기사 투고자

박열, 후미코 외 9(일본인 7, 조선인 2)

 

현사회는 일제에 의해 후토이 센징이라는 제호가 과격하다는 이유로 금지하게 되어 부득이 제호만 바꿔 제3, 4호 출간한 것이다.

제호를 현사회로 바꾼 것에 대해서는 제3호 첫 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다.

 

국가나 자본가들은 단발마의 고통 속에 그들 특유의 난폭함을 유감없이 휘두르고 있다. 세상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실제 서로 긴장할 수 밖에 없는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는 생각다 못해 지면이 모자라는 듯한 후테이 센징(フテイ鮮人)을 바꿔 미력하나마 대대적으로 현사회를 향해 활약할 것이다.”(월간 후테이 센징개제 현사회3)

따라서 잡지 현사회는 당시 일제가 안고 있는 현사회의 각종 모순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일제에 의해 자행되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고,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이전의 후토이 센징에 비해 전제 면수가 4쪽에서 24쪽으로 대폭 증면했다. 이런 양적인 증가 뿐만 아니라 기사 투고자 수, 그리고 광고 건수의 급격한 증가 역시 큰 특징의 하나였다.

현사회3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박열의 기사는 일하지 않고 먹어치는 이론(?かずにどんどん)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밑에서는 사회는 노동을 하지 않고 먹고 지내는 자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자가 노동에 종사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본가의 배를 살찌우고 그만큼 현사회의 목숨은 연명될 것이다. 그러므로 속히 노동에서 벗어나 일하지 않고 먹어치워야 한다. 그것이 현사회에서 일함으로써 자본가의 배를 잔뜩 불리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현사회3-일하지 않고 먹어치는 이론(?かずにどんどん)-)

 

이는 박열의 노동에 대한 명확한 부정의 발언이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노동은 신성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일하지 않고 지금의 체재를 무너뜨리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어서 먹고 살기 위해 거대 권력에 불령(후테이)”하자는 것이다. 철저한 불령을 통해 세상을 바꾸자는 주장인 것이다.

이런 박열의 주장은 19241229일 도쿄 감옥에서 작성한 움직이지 않고 거리낌 없이 무너뜨리는 이론에서 더욱 구체화 되었다.

 

현대의 자본주의적 사회제도에 반대하는 모든 노동자여! 충분히 과감히 용감하게 그리고 헌신짝처럼 다른 것으로부터 부과되는 노동의 부서를 포기하라! 그리고 충분한 자유로 마음껏 행동하는 것이다. 즉 소위 가장 다루기 어려운 불한당, 상습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이보다 달리 우리들의 비참한 현재의 경우로부터 흡혈귀인 부르주아에 대한 절대적 복종의 노예생활에서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중략- 가장 저주해야할 현대사회는 단지 이 소위 불한당, 범죄패거리의 힘에 의해서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불령한다는 바로 만물의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박열이 활동하던 당시 일본의 휩쓸던 아나키즘적인 니힐리즘과 아방가르드를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불을 질러라! 폭탄을 날려라!

독을 퍼뜨려라! 단두대를 설치하라! 정부에, 의회에, 감옥에, 공장에, 인간의 거리에, 사원에, 교회에, 학교에, 도시에, 마을에! -중략 - 붉은 피로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게 더럽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죽어갈 것이다.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으며, 평화가 있다.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허무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나의 선언

 

이런 생각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절대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허무주의, 즉 니힐리스트 박열 특유의 행동력으로 절대자유를 얻고자 하는 박열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현사회3호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로는 일제의 삼엄한 검열과정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기사가 먹으로 지워졌다는 점이다. 일단 표지에서부터, 이어 1쪽과 2쪽에 걸쳐 소개된 박열의 글은 문장 전체가 통째로 지워져 무슨 내용인지 전혀 확인이 불가능하다. 후미코의 글 중 재일조선인 제군에게,조선의○○기념일역시 문장 전체가 먹칠이 되어 그 내용을 전혀 짐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밖에도 오가와(小川), 이필현, 충청남도 천안의 불령 일본인 이카이 마사오(猪飼?佐夫), 불령 오키나와인 시로타(城田), 아나키스트 스기노 사브로(杉野三朗)의 문장 역시 부분적으로 지워져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심지어는 개인 동정란 역시 상당 부분 지워져 있는 상태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잡지에 대한 탄압이 강화된 것은 아마 제호는 현사회로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내용에서는 일제의 눈에 거슬리는 글이나 선전 등이 조선 사회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미침으로서 일제의 특별한 감시와 통제가 필요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기사 제공자 즉 투고자 수의 급증이다. 이들 투고자 중에는 박열과 후미코 외에도 흑우외회원, 일본 거주 일본인 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 거주 일본인, 오키나와, 아이치(愛知), 오사카(大阪), 그리고 수평사와 같은 특수 부락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범하게도 자기 스스로를 어느 불령선인(一不逞鮮人)”, “재선불령일본인(在鮮不逞日本人)”, “불령특수부락민(不逞特殊部落民)”, “불령유구인(不逞琉球人)”, “도사의 불령선인(土佐不逞鮮)”, “하마마쓰의 불령선인(浜松不逞鮮人”, “아이치의 불령일본인(愛知不逞日本人)”, “오사카의 불령일본인(大阪不逞日本人)”, “상해의 불령선인(上海不逞鮮人)”, “재중국광동의 불령일본인(在支那廣東不逞日本人)”처럼 그들 스스로를 후테이(불령)이라 하며 박열, 후미코의 후테이(フテイ)”저항에 적극 연대하려는 의지를 보여줬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일본인 독자는 박열을 이란 애칭으로 부르며 박열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친근감까지 보여주고 있다.

 

박열 형!

후토이 센징고맙네. 젊고 힘찬 자네의 모습이 생생하다. 사지 않을 수 없다.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으니 매호 백부씩 보내주게. 그리고 또 창간호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니 50부 정도 빨리 보내주게. -이하 먹칠로 판독 불가-”(현사회3-불령 오키나와인으로부터-)

 

“.... 신슈 오카다니(信州岡谷)의 동지를 대표해 사실을 보고합니다.

122일 신슈 오카다니 후루야 나오히토(古屋直人) 박열 형”( 현사회3-비밀폭로-)

 

이런 사실은 박열과 후미코의 기관지 발행은 일제의 탄압과 볼셰비즘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흑도후테이 센징등을 통해 활동이 알려지고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독자층을 늘려갔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투고가 급증한 주된 이유 중의 하나로는 당시 일본의 민중들이 당면했던 경제적, 사회적 모순을 절감하게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3월의 주가폭락과 그에 따른 경제 공항 등으로 격심해졌다. 1차 대전 중에는 활황으로 임금인상과 전시 특별수당이 지급되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그 이상으로 물가가 폭등했기 때문에 노동자 생활의 불안정과 궁핍은 증대했다. 거기에 공황이 가해져 물가의 폭락, 공장의 축소와 폐쇄가 이어지고 실업의 불안도 밀려왔다. 자각한 노동자는 물론 일반 민중들까지 불만을 쏟아 부을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상황 속자들이 자신들을 대변해준다고 믿고 모여든 곳이 바로 흑도』『후토이 센징』『현사회였던 것이다.

 

2.현사회3호의 동지들

현사회3호에서 볼 수 있는 동지들은 다음과 같다.

김한(金翰)조선무산자동맹회

1905년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 후 1912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와 천진 등지에서 반일 운동에 참가한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법부장. 19205월 서울에서 원우관(元友觀) 등과 함께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 가운데 하나인 조선공산당을 결성. 19221조선공산당의 합법 사상 단체로 무산자동지회를 결성하고 상무위원이 되었다. 19231월 김상옥(金相玉)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았고, 19274월 출옥. 1929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 19302월 소비에트 러시아로 갔으나 일본 밀정 혐의로 사형당하였다.

 

장상중(張祥重19011961.7.12.)

경상남도 울산 출생으로 장찬수(張瓚壽, 張讚壽)라고도 했다. 1918년 경 도일. 191911월 무렵부터 친일파 처단을 목표로 하는 박열의 철혈단(鐵血團)등에서 활동, 강한 체격과 통쾌한 철권으로 친일파를 전율시켰다. 이후 흑도회를 비롯해 19234월에 조직된 불령사의 멤버로 활동. 1923년 동년 8월말 오스기 사카에의 요청으로 도쿄의 네즈(根津)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동맹의 모임에 김중한과 함께 참가한다. 1926흑우회잔류자들과 함께 일본인 아나키즘 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한다. 19272월 도쿄에서 조선인 아나키즘 노동단체인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을 결성. 193211재일본무산자부당탄압항의동맹재일본조선무산자거주권획득동맹을 조직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 일본에서 출간된 운명의 승리자 박열의 공저자 중 한 명이다. 1961712일 식도암으로 도쿄대 병원에 입원 중 728일 오후 820분 사망.

 

정태성(鄭泰成:1901.8.28.-?)

함경남도 단천군 북두면 신덕면 출생으로 정태성(鄭泰星), 정태성(鄭太成)이라고도 했다. 192011월 고학생과 노동자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도쿄에서 만들어진 조선고학생동우회에 가입, 192111월 동우회회원 박열, 김약수 등과 함께 첫 번째 재일조선인 사상단체 흑도회를 결성하지만, 모임 내부의 사상대립으로 분열, 192211월 박열 등과 아나키즘을 표방하는 흑우회를 조직했다.

또한 19234월 박열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불령사 가입하고, 동년 9 박열 등과 함께 검거되지만, 면소되면서 석방된다. 1926년에는 「흑우연맹등을 조직해 활동을 이어간다. 해방 이후에는 1946 「신조선건설동맹 결성에 참가해 선전부장이된다. 1946120일 정태성을 비롯해 이강훈, 박훈, 서상한, 이옥동, 김정주 등 아나키스트계 동지들과 재일본건국청년동맹신조선건설동맹으로 개편한 다음 그 출범 사업으로 재동경순국의사유골봉안회(회장 서상한)를 구성하여, 일본 각지에서 무참히 처형되어 혼백조차 찾을 길 없는 항일 의사들의 유골을 수습하는 일에 앞장섰다.

 

백무(白武:1901-?)

백만조(白晩祚)라고도 했다. 대구 출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박열 등과 함께 192011조선고학생학우회에 가입한다. 192111흑도회에 참여. 1922자유노동동맹결성에 참여. 이후 볼세비즘으로 전환. 1922년 여름 도쿄조선노동동맹회실행위원으로 선임. 그해 7월 니가다현(新潟?)에서 일어난 시나노가와(信濃川) 학살사건을 규탄하는 연설을 한다. 19231북성회결성에 참여. 그해 7북성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연사로 서울 평양 등 7개 도시에서 순회 강연한다. 19242동아일보배척운동을 주도한다. 그해 3조선노동동맹회일본노동총동맹이 주최한 관동대지진 피학살 일지선(日支鮮)노동자 합동추도회에 김천해와 함께 조선인 대표로 참가한다. 해방 후 194610월 이후 재일본조선인연맹경제국장, 서기장으로 선임. 19481재일본조선인연맹13차 중앙위원회에서 민족자주연맹의 노선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자기비판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이어 이 연맹에서 제명되었다. 195411월 일본에서 재일본조선남북평화통일촉진준비회발족에 참여.

 

한세복(韓世復:?-?)

한광수(韓光洙)의 다른 이름으로 경북 칠곡군 북삼면 낙계동 출생. 191891일 나고야(名古屋)에 머물며 인삼행상을 하던 한광수는 나는 무정부주의를 신봉하며 주의를 위해 활동함으로서 신체의 자유는 속박되더라도 주의는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밝혔다. 1919410일 나고야에서 동지 마쓰이 히로부미(松井廣文)가 경영하는 신문 대공론(大工論)에 부사장으로 입사한다. 여기서 일제에 저항하는 망민독어(亡民獨語)를 편집 또는 게재함으로서 기소되어, 신문지법 위반으로 1920114일 벌금 100엔을 선고 받는다. 19201월 아이치(愛知)현에서 일본거주 한국인 간의 친목을 모도하고 일치협력하며, 근면저축을 장려하며 특히 지식보급에 노력하며 인격향상을 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선인노동민우회(鮮人勞動民友會)를 결성했다.

 

 

.현사회4

 

1.현사회4호의 특징

발행일

1923.6.20

발행소

박열 발행소, 현사회 발행소, 不逞鮮人社

주소: 도쿄 요요기(?) 도미가야()147

발행 면수

26

가격

정가:50, 노동자:5

광고료

1:1, 1:2, 전면:50

기사 투고자

박열, 후미코 외12(일본인 7, 조선인 5)

이어서 현사회4호에 가장 눈에 띄는 특징으로는 피차별 부락민들에 대한 연대의식과 애정이었다.

 

수천 년이래 조선의 사회에서 온갖 전통적 모욕과 압박을 견뎌온 동포의 일단, 전 조선에 산재하는 40여만의 백정계급은 앞서 각지에 형평사를 조직해 계급타파, 자유평등을 목표로 해서 불공평한 사회를 향해 과감하게 반항운동을 개시했다. - 중략- 우리들도 인간인 이상 같은 인간으로부터 추호도 모욕당하고 싶지 않다. 직업에 구분이 있다고 하면 금수의 목을 따는 자 어찌 우리뿐이냐, 우리도 조선 2천만 민중의 한 분자가 아닌가? 애정으로 상호부조의 열매을 맺고, 생활의 안정을 도모해 공존공영을 이룩하기 위해 이에 40여만 우리 백정은 감연히 일서섰다. 조선 경남 진주 형평사” (현사회4-조선의 형평사 운동에 대해-)

 

형평사(衡平社)1923425일 당시 천민이었던 백정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분해방운동이었다. 192233일 일본에서 신분해방을 위해 일어선 수평사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해 조직했던 것이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했던 차별을 해소할 것을 요구했다. 수평사와 형평사 운동에 대해 당시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전국수평사해방연맹을 조직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왔으며 박열 역시 조국의 신분해방 운동에 적극적인 연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박열의 형평사에 대한 관심은 1923527일 불령사 1차 정기모임과 같은해 811일의 불령사 모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8: 먼저 527일의 불령사 정기모임에는 어떤 행사가 있었나.

: 그날의 정기모임 석상에서 저는 처음으로 니야마 하쓰요를 만났습니다만, 그 때는 불령사에 서 형평사로 설립의 축전을 보낼 것을 협의했습니다. 형평사라는 것은 내지의 수평사와 같은 것으 로 백정이라 불리는 조선인이 계급 타파를 위해 조직한 모임입니다. -중략-

811일의 불령사 마지막 모임에 한 번 갔을 뿐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조선 김해의 형평사에 격려의 타전을 했으며, 군산의 형평사에 총독부가 압박한 것에 대한 의문의 타전을 하고, 저는 20전을 냈습니다.

 

나아가 현사회4호는 일본의수평사와 조선의형평사와의 국경을 넘는 피차별민중들의 연대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현사회고맙네

삭제가 많아 질려버렸다. 이렇게 당하고 나면 더 말을 하고 싶어진다. 써라! 써라! 새까맣게 될 때까지 써 갈겨라, 그런 후에 삭제당하는 게 원래 바라던 게 아닌가.

2개월 만에 사바로 나오니 형평사라는 것이 생겼다. 이게 뭔가 하고 물으니, 조선에서의 백정 해방운동이라고 한다. 조선의 천민(백정) 40만의 단결......일어서라, 일어서라 백정, 조선의 천민 40. 일본에 300만의 형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현사회4-불령 특수 부락민으로부터 우메도 수평사 나카무라-)

 

2.현사회4호의 동지들과 기사.

현사회4호에 나오는 동지들과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한현상(韓晛相:1905.5.8.-?)욕구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 판동리(板洞里)출생. 보통학교를 졸업 후 상경 중앙학교에 입학, 재학 중에 감리교에서 세례를 받고, 졸업 후 신학교 입학을 위해 예비교를 다니고 있을 때, 3?1독립운동에 참가하던 중 검거되면서, 식민지 지배의 모순에 눈을 뜨게 된다. 19198월 도일해 정신운동사의 이토 쇼신(伊藤?信)의 집에 들어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다니는 동안 사회주의를 접하고 사회주의동맹에 가입해,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곤도 켄지(近藤憲二) 등의 아나키스트와 교류를 하게 된다. 1922년 봄 평범사의 일을 도우면서 가도 카즈오(加藤一夫)자유인연맹에 가입하고, 이듬해인 19233월 박열(朴烈) 주도의 흑우회에 가입해 현사회(現社會)욕구(欲求)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발표한다. 같은 해 10월에 박열사건으로 검거되어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기소, 이듬해 19246월 모친의 사망으로 보석되었으며, 결국 장상중(張祥重)등과 함께 증거불충분으로 예심면제가 되었다. 그 후에도 몰래 아나키즘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기독교 전도사가 되기 위해 백십자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26년 무렵부터는 신앙과 백십자사에서의 사회사업과 결핵문제에 진지하게 몰두한다. 1939년에는 내부알력으로 백십자사를 퇴직하고, 가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등이 중심이 된 주택 건설사업의 건축길드에 참가해 일본의 패전까지 그곳에서 활동한다. 종전 후 곧바로 박열의 석방운동을 벌이고, 19451027일 한현상이 신병 인수인이 되어 박열을 출옥하게 한다.그러나 박열 등의 신조선건설동맹에는 적극적으로는 참가하지 않는다.

 

육홍균陸洪均:1900.10.1.-1983)소위 다수의 정체

경상북도 선산군 옥성면 우아동 출생. 3?1운동 당시 서울의 농림학교 학생으로 참가했으며 졸업 후에 농림연구소에 근무하던 중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가 번역한 모리스의 이상향(理想鄕)(아리스 1920)를 읽고 사상을 굳히게 된다. 민족혁명을 위해 도일해 도쿄의 도요시마(豊島)중학 4학년에 다니며 노동운동사에 드나든다. 19235월 박열의 불령사에 참가, 박열과 동거하면서 잡지 현사회4(1923.6)소위 다수의 정체를 발표한다. 그러나 동년 93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16명 전원이 검거되지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 3명을 제외한 육홍균 등 13명은 예심불기소 면소가 되어 전원 석방된다. 19265월 장상중, 정태성, 원심창 등과 함께 조시가야에 흑색운동사운동의 재건을 시도한다.

동년 11월 원심창 등과흑우회흑색전선청년동맹로 개정 결성하고, 일본인들의 흑색청년연맹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박열의 의지를 계승하기 명칭을 다시 불령사로 개칭하고, 기관지흑우(黑友)를 발간하지만,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명칭을 다시 흑풍회(黑風會)로 개칭했다. 그후 귀국 해 경상북도 선산군 옥성면에서 겉으로는 농촌피폐구제를 표방하는 사생활사(私生活社)를 조직해, 상무간사가 된다.

 

가토 카즈오(加藤一夫)자유인사(自由人社)

박열의 아나키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1923617일 불령사 제3회 정기모임에 가토 가즈오(加藤一夫)를 초대해 혁명이상 및 혁명시의 조직이라는 강연이 있었을 정도였다.

 

3.현사회4호의 주요 단체와 기관지

이이서 현사회4호에 나오는 주요 단체와 그 기관지의 성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노동사노동자

요시다 하지메를 중심으로 19214월에 창간해 19225월까지 이어지고 이후 민중의 힘으로으로 개재한다.

 

○「자유인사자유인

가토 카즈오를 중심으로 오가와 미메이(小川未明), 나카하마 테쓰(中浜?) 등이 참여한 잡지로 19221월부터로, 이 광고가 게개되던 시기는 가토 카즈오의 개인잡지 성격이 강했다.

 

○「노동주보사노동주보

야마자키 케사야(山崎今朝?)를 중심으로 1922.2에서 1923.4월까지 발간.

 

오스기 사카에의 노동운동사노동운동

1920년대 일본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중심에는 오스기 사카에를 비롯한 노동운동사가 있었다. 이들의 기관지 노동운동이 박열 후미코의 잡지 광고로 나왔다는 것은 이들의 활동이 일본의 주류 아나키즘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19198월 오스기를 중심으로 이토 노에(伊藤野枝), 와다 큐타로(和田久太?), 곤도 켄지(近藤憲二), 히사이타 우노스케(久板卯之助), 무라키 겐지로(村木源次?) 등과 함께 노동운동사를 결성하고 그 해 월간지 노동운동발간한다. 노동운동3차에 걸쳐 발간되는데 이 광고에 실린 시기는 제3차로 19221226일부터 192371일까지였다. 19211월에 발간된 제2노동운동아나?공동으로 간행했다.

 

○ 『노동자흑도1호와 현사회3호에 각각 1회씩 등장한다.

하지만 발행처는 각각 다르다. 흑도에서의 노동자1922415일부터 그래 5월까지 요시다 하지메(吉田一), 다카오 헤이베(高尾平兵衛) 등을 중심으로 발간한 노동사의 기관지이며, 현사회에서의 노동자192212월 모치즈키 카쓰라가 기타코갓초(北甲賀町)의 순다이(駿台)클럽 내에서 방을 하나 빌려 운영하던 도쿄동인 도안사(東京同人 圖案社)에서 창간한 흑노사(黑勞社)의 기관지 였다. 여기에서 모치즈키가 주재하는 흑요회(黑耀會)의 제3 「민중예술 전람회, 가토 카즈오의 자유인 연맹그리고 오스기 사카에의 제2노동운동도 여기에서 시작했다. 즉 당시 아나키즘 운동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사회사상사사회사상

19224-19301월까지 발간

 

○「씨뿌리는 사(まき)씨 뿌리는 사람(種蒔)

1차는 19212-4월까지, 2차는 192210월부터 19239월까지. 고마키 오우미(小牧近江)를 중심으로 반전, 평화 인도주의적 혁신사상을 기조한 잡지였다.

 

○「무아원(無我苑)무아의 사랑(無我)애성(愛聖)

무아의 사랑(無我)은 이토 쇼신(伊藤?信)을 중심으로 발간한 잡지로 나중에 애성으로 개재한다. 이토 쇼신은 무아애(無我愛)운동을 일으켜 많은 지식인과 청년층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현존하는 박열의 유일한 친필 서신문에서 수신인으로 등장하는 운노 토모쥬(海野友壽)씨가 이토 쇼신의 제자였다. 현사회4호에 전면 광고로 소개된다.

 

인쇄공 조합 신우회의 기관지 신우

신우회는 19174월 발족한 아나계 노동조합으로 기계공조합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오랜 운동의 역사를 가졌다. 1919년에는 조합원이 1,500명에 달해 일본 아나키즘계 노동운동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신우신우회의 기관지로 19183월부터 19233월까지 총 76호 발간한다. 이후정진과 합치게 된다.

 

신문공 조합 정진회의 기관지 정진

19196월 도쿄의 신문 인쇄공을 중심으로 하는 혁진회의 후신이다. 1920119일 발족하고 조합원은 대략 400명이며 기관지로 정진正進을 발간한다. 정진회신우회에 비해 조합원 수는 적었지만 대부분이 전투력을 갖춘 투사들이 중심이었다. 1921년 초 정진회신우회의 유지가 모여 SS가 결성하는데 이는 양 조합의 머리글자를 딴 비밀단체였다. 이 단체는 1921년 이후 노동계 전체의 아나키즘화와 생디칼리즘화에 크게 공헌한다. 흑도이후 박열과 후미코의 잡지에 소개되던 시기는 바로 이들 노동운동 단체가 일본의 노동운동에서 최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자금 조달에 대해

 

박열과 후미코는 동거 후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극심한 힘든 매일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필요한 월 생활비는 대충 5,60엔 정도였다고 한다.당시 일반 노동자들의 월급이 10-20엔 정도 일용직의 경우 1.6엔 정도였으므로 이 정도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통과 노력이 따랐을 것이다. 이들 부부의 자금 조달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잡지 구독료

박열과 후미코가 매달 발행한 잡지 부수는 대략 300부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잡지 구독료가 흑도5, 후토이 센징은 미상(대략 5전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매수가 대폭 증가한 현사회50, 하지만 주 독자층인 노동자들에게는 5전이었으나 이마저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을 것이다.

 

현사회불령선인(不逞鮮人)보다 비용이 더욱 든다. 그래서 가능한한 구독료를 받고 싶다현사회3? 깨진 미닫이 문에서-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잡지 판매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어려운 노동자들에게는 제대로 구독료를 받지 못한 경우가 흔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박열, 후미코 부부의 생활은 항상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이러한 극도의 빈곤 속에서도 그들 부부는 운동 및 잡지 발행을 이어갔으나, 결국 아래와 같이 동지들에게 후원을 부탁하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전차요금 52전만 남아있고 쌀은 한 톨도 없고, 연료는 3일전부터 구경도 하지 못했다.”

 

메이데이날 나는 4-5명의 동지들과 함께 빈배를 움켜쥐고 시위활동에 참여했다.”
현사회4? 깨진 미닫이 문에서-

 

이것은 주로 우리 두 사람이 내게 되었다. 추위로 향하는 지금 동지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함고 동시에 후원을 부탁한다.”후토이 센징1? 깨진 미닫이 문에서-

 

2.광고 수익

이어서 이들 부부의 자금 조달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는 광고료를 생각할 수 있다.

광고료의 경우 흑도11, 130엔 전면 100, 후토이 센징은 미상. 현사회11, 12, 전면 50엔 등, 발행 쪽 수가 대폭 늘어난 현사회쪽의 광고료가 더 저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흑도의 광고료 책정은 실제로 그렇게 받는다고 하기 보다는 외부에 알리기 위한 다분히 형식적인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현사회의 광고료는 좀더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광고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이 함께 운동하던 아나키즘 계열의 노동단체나, 개인 활동가, 또는 그들의 저서 소개로 광고료 수익보다는 연대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광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들 아나계열의 광고는 거의 수익이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실제 수익에 도움이 되는 광고도 있다. 그것은 모든 잡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미쓰코시 고후쿠텐(三越?服店)미쓰코시(三越)백화점광고였다. 190412월 일본 최초의 백화점으로 탄생한 미쓰코시는 당시 상류사회 여성들이 모이는 도쿄의 2대 명소 중의 하나였다. 그런 미쓰코시가 백중절 선물은 미쓰코시의 것으로라는 전면 광고를 현사회3호와 4호에 실었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대형 백화점이 발행 부수가 겨우 300부 남짓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불령 집단에 매번 호의적으로 광고를 실은 것은 정상적인 광고는 아닐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삿포로 맥주”, “에비스 맥주”, “마쓰야 백화점의 커피점”, 위스키와 커피 등을 취급하는 마쓰야 (松屋)커피점등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상업 광고가 버젓이 이 불령의 무리에 광고를 내었다. 심지어는 후미코의 아버지 분이치(文一)가 살던 하마마쓰(浜松)의 지역 신문사의 광고까지 등장한다.

어쩌면 이런 광고물들은 정상적인 과정에 의한 광고라기 보다는 특이한 비상수단에 의한 광고 수익였을 것이다. 나아가 조선인삼상 박문자라는 광고에서 나오는 후미코의 조선인삼 판매 역시 정상적인 매매에 의한 투명한 수입원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보다는 주로 소위 랴쿠(:약탈과 약취에서 온 말로, 노동자계급이 착취된 것을 약탈한다는 명목으로 회사와 자본가 그리고 명사로부터 자금을 강요해 운동이나 생활에 이용하는 것.)에 의한 결과였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후미코는 신문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1: 피고는 박열과 동거 후 어떻게 생활방법을 세웠는가.

: 우리들은 조선인삼을 팔거나 회사깡패짓을 하기도 하고, 또는 우리들한테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의 특수한 보조로 생활을 했습니다.

2: 회사깡패는.

: 뭐 말하자면 우리들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현사회에 게재할 광고를 어떤 회사로 따러 가면 그 회사는 광고를 내고 2,30엔의 돈을 뜯기고, 거기다 다른 신문잡지사로부터도 광고게재를 권유 받는 게 싫어서, 그 회사는 우리들한테 5엔이나 10엔의 돈을 주고 우리를 내쫓는 것입 니다.

회사깡패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가네코 후미코 제4회 신문조서 1925.9.21. 도쿄지방재판 소)

 

여기서 회사깡패랴쿠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한편 박열과 후미코는 공동생활과 잡지 발행에 대해 나름대로 역할을 나눠 활동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모든 잡지의 발행인과 발행소에는 박열의 이름이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잡지 발간에 따른 섭외 및 기사 청탁, 그리고 편집 등 외부와의 관계는 박열이 주도적으로 맡았다는 것은 다음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박열은 건강하기만 하면 좀처럼 집에 있을 수 없는 남자다. , 자신의 건강으로 빈약한 지갑을 메운다는 고맙지도 않은 필요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발을 덜 닳게 하기 위해서라도 일요일 오후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에 있다. 염려 말고 놀러 오기 바란다.”(후토이 센진2?깨진 미닫이 문에서-)

 

이에 반해 후미코 경우는 흑도1호에는 임시 사환으로, 그리고 흑도1,흑도2호 그리고 현사회3호의 광고란에는 조선인삼 상인 박문자로 소개 되다. 이는 잡지 발간과 공동생활에 따른 자금 조달을 위해 광고를 받아 오거나 또는 후원금을 받는 것은 후미코의 몫이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낯에는 유지들 방문에, 광고를 얻으러, 혹은 빵 값을 얻기 위해 좀처럼 여유가 없다. 오늘 밤도 지금 막 돌아왔다. 곧바로 어두운 전등을 끌어 내리고 낡은 책상을 넓지도 않은 방 한가운데로 끌어다가 또다시 싸구려 잉크를 적시기 시작한다.”흑도1,-낡은 공동주택 2층에서-

 

훗날 소설가로 이름을 알린 히라바야시 타이코(平林たい:19051972)는 당시 랴쿠에 참여 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은 글로 남기고 있다. 히라바야시 타이코를 처음으로 랴쿠에 끌고 간 것은 바로 가네코 후미코 였다.

 

후미코씨는 겉이 너덜 해져 양말이 드러나 보이는 낡은 신발을 신고, 무슨 속셈인지, 주름 없는 빛바랜 낡은 옷(한복으로 추측할 수 있다)을 입고 조선인삼 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우리는 긴자(銀座)××시계가계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인삼 사세요! 하고 후미코씨는 침을 뱉듯이 말했다.………뭐라고? 필요 없다고? 나를 뭘로 보는 건가?………후미코씨는 그런 말투로 말하고 나서는 후토이 센징이라는 잡지를 보자기 속에서 꺼냈다…… 나는 그때 그녀의 이름이 얼마나 알려졌는지 감탄하게 되었다.”(1928부인공론12월호 )

 

물론 후미코의 랴쿠가 처음부터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수없이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나고 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점차 그 요령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박열과 후미코, 특히 후미코의 자금 획득 수단이었던 랴쿠가 상당히 광범위하고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후미코 뿐만 아니라 당시 아나계 전반의 주요 자금 획득 방법의 하나 이기도 했다.

3.지식인들의 후원

이어서 자금 조달의 또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활동에 호의적이었던 지식인들로 부터의 후원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생각해 볼 수 있는 인물이 당시 유명 작가의 한 사람이었던 아리시마 타케오(有島武?:1878.3.4.1923.6.9)가 있다.

아리시마는 1907년 직접 런던 체재 중의 크로포트킨을 방문해 아나키즘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운동에 직접 뛰어들기 보다는 후원을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후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篤) 등과 시라카바(白樺)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카인의 후예(カインの末裔)』『타고난 고뇌(まれづる?)』『한 송이 포도(一房葡萄)』『어떤 여인()등 후세에 남는 작품을 발표한 대작가이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부르주아 출신의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계급분열 사회에 살고 있다는 모순점에 대하여 고민하며 자기부정으로 기울어 허무적인 절망감을 보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결국은 192369일 유부녀였던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와의 정사로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1922년에 부친에게 물려받은 홋카이도(北海道)의 광대한 농장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넘겨 준 것으로 유명했다. 192211월 오스기 사카이가 파리로 국제아나키스트 대회에 참석 했을 때는 그의 도항비용을 후원하기도 했다. 박열 역시 김중한에게 상해로 가서 폭탄을 입수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아리시마 타케오에게 부탁했다는 내용이 재판기록에도 수 차례 언급되지만 이 때는 아마 거절 당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리시마 타케오를 통해 어느 정도의 찬조금을 받았다는 것은 아래의 조서에서도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3: 어떤 사람이 피고들에게 호의를 갖고 보조해 주었는가.

: 아리시마 다케오입니다.”(가네코 후미코 4회 신문조서(1925.9. 21도쿄지방재판소))

 

 

특히 아래의 내용은 후미코와 아리시마 타케오와의 관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소설가의 배려로 지금 저는 제 자서전을 쓰고 있습니다. 9월이나 10월쯤에 어느 여성잡지에 실릴 거라 하니까 꼭 한 번 읽어 주세요. 조선에서 생활하던 때의 일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인을 소개하고 당시 제가 겪었던 일들을 낱낱이 얘기함으로써 세상의 많은 어머니들이 이 글을 육아자료로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192367월경 부강초등학교 재학 당시의 은사 핫토리 토미에(服部富枝)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서 어떤 소설가란 아리시마 타케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어느 여성잡지란 당시 아리시마와 연예관계에 있었던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가 편집을 맡고 있던 여성공론(婦人公論)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당시 여성공론은 수만 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최대 상업지로 이 잡지에 자신의 글을 싣는다는 것은 후미코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자 긍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탑깝게도 후미코의 자서전이 이 여성지에 소개되기 전에 아리시마와 하타노의 동반자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후미코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맺는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함께 활동하던 1920년대 초는 민족의 독립의지가 분출했던 3?1운동을 통해 이런만세운동만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를 실감한 많은 젊은이들이 현실적인 투쟁 방법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사회문제와 노동문제,그리고 독립운동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활동하던 당시의 일본 역시 러시아 혁명과 1차세계대전 이후의 니힐니즘이나 다다이즘과 같은 신사조의 도입과 함께 노동자와 소작인들이 자신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자본가와 지주의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투쟁방법이 모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나키즘을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은 그런 투쟁 현장의 긴장감 속에서 단숨에 그 영향력을 확대했던 시기였다.이 시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였으며 박열 역시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아나키즘을 접하고 직접행동에 의한 항일 투쟁에 뛰어들었다.

아나키스트 박열의 일본에서의 투쟁은 1919년 도일에서 192393일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보호 검속이란 명목으로 피체되기 까지의 약 4년이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19222월 평생의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게 되면서 더욱 구체화 되었으며 이는 그들이 함께 했던 약 16개월 동안 발행했던 흑도1호와 제2, 후토이 센징1호와 제2, 그리고현사회3호와 제4호 등 총 6가지의 기관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후토이 센징현사회는 당연히 아나키즘의 색채가 강한 잡지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흑도는 범사회주의적 단체인흑도회를 바탕으로 발간되었기에 다소 애매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고자들의 대부분이 아나키스트였다는 점,그리고 제호 자체가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컬러 즉 ()”이 포함되었다는 점, 그리고 흑도의 제호 옆에 에스페란토어 제호가 병기되어있다는 점에서 아나키즘 성격이 강하다 할 수 있다.

이들 잡지에 소개되는 기사의 대부분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맡았지만 그 외에도 재일 한인아나키스트나 일본의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작가 등 다양한 인물들의 기고가 이어졌다. 흑도에서는 이강하,신염파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던 나카니시 이노스케 등과 같은 지식인들의 참여가 눈에 띄었다면 흑도회의 분열 직후 발간된 후토이 센징에서는 거의 대부분 박열과 후미코의 기사로 채워진다. 하지만 현사회에 이르러서는 참가자가 육홍균, 한현상, 노구치 시나니 등과 같은 지식인 뿐만 아니라 일본과 한국, 심지어 중국의 일반 민중, 특히 수평사나 형평사 등 피차별 부락민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이런 특징이야말로 이들 잡지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일본의 민중들 사이에 점차 알려지고 그들 스스로 박열 후미코의 운동에 연대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전개된 아나?볼 대립을 반영하듯 볼세비즘에 대한 비판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아나키스트 운동가, 그리고 모든 노동단체들의 경우 광고를 통해 자신들의 참여를 알리며 확실한 연대의지를 나타냈다. 이런 점에서 박열과 후미코의 투쟁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아나키즘이 시도하던 투쟁이기도 했던 것이다.

박열과 후미코는 이들 6가지의 잡지를 발행하면서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잡지 발행 뿐만 아니라 이들 부부를 찾아 오는 수많은 동지들과의 만남이나 함께 동거하던 동지들과의 생활에는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수입원은 그리 많이 않았다. 300매 정도의 발행 부수인 잡지는 판매 목적 보다는 투쟁을 알리는 소식지의 성격이 강했으므로 판매 수입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어서 광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지들과 단체는 광고 수입을 얻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연대의 의미가 강했으므로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반해 후미코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랴쿠야 말로 이들 가장 큰 수입원이었을 것이다. 후미코가 본업처럼 하던 인삼판매 역시 이런 랴쿠에 의한 강매의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이들 부부의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리시마 타케오와 같은 지식인의 도움이었다. 당시 아나키즘과 같은 사회주의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던 이들 지식인들이 참여는 경제적으로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박열과 후미코가 발간했던 총 6호의 잡지에서 볼 수 있는 기사 투고자나 광고 참여자 등을 보면 1920년대초 일본의 아나키즘 운동 단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 및 단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국내의 아나키즘 단체인 흑노회뿐만 아니라 무산자동맹회』『형설회』『학지광』『민중운동』『자천등 아나키즘과는 무관한 단체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이들의 활동이 아나키즘이라는 좁은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전 사회운동에 걸쳐 있었으며 지리적으로도 일본, 조선 그리고 중국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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