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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23-10-24 조회수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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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22년 「시나오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 일제에 대한 투쟁의 시작-가메다 히로시

1922시나오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 일제에 대한 투쟁의 시작

(信濃川朝鮮人虐殺事件朴烈金子文子日本帝?への?いのまり)

 

 

 

가메다 히로시(?田博)

 

오늘날 일본 국가에서도 「일본인이 아닌 생활자에 대한 배외주의가 지속되고있으며, 악질적인 출입국체제가 유지되면서 유럽에서 필연화되고 있는 국경을 초월한 이주와 노동의 자유를 일본 국가는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법률의 추가 개악에 의해 같은 땅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편리한 노동력으로만 파악하면서 국가에 의한 관리체제 아래서만 허용한다.

거기에는 일본인인가? 아닌가 하는 단순한 구분만이 이루어진다. 필연적으로 배타, 배외의식이 팽배해지고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본제국의 침략과 전쟁사에서 배우지 못한 채, 내셔널리즘이 배양되고 증오마저 생겨나게된다. 민중은 점차 그러한 의식에 얽매여 가게 된다.

이 나라의 계속되는 침략과 전쟁은 근대에 이르러서는 피식민지로부터의 이주노동자, 밑바닥 노동자들은 가혹한 상태 놓이게 되었다. 일제가 강제병합한 한국에서 1919년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여기에 박열이 참가하여 격문을 살포했다. 박열은 한국을 떠나 10월에 도쿄로 이주해 신문배달, 제병공장공원, 인력차부, 우동가게, 야경꾼, 후카가와(深川에서의 차밀이꾼, 중앙우체국 임시 배달부와 같은 밑바닥 일을 종사했다.

이어서 1920년부터 혈거단(???) 등을 조직하여 192111월 한국에서 도쿄로 이주해 사회주의에 많은 관심을 가진 동지들과 흑도(?濤?)를 결성한다. 19222월경에 상해 임시정부의 멤버와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다. 4월에는 영국 황태자 내방을 위한 예방구속으로 요도바시 경찰서(淀橋署) 16일간 검속된다.

 

일본에서의 조선인 대학살, 보아라! 이 잔인한 참극을 하루 17시간의 고역을 강요해 도망치게 되면 총살해 강에 투기」 라고, 1년 후의 학살을 예견하는 듯한 예견을 동아일보』《192281은 보도하고 있다.

 

19227월 요미우리(??)신문이 처음으로 시나노가와(信濃川)에 조선인 노동자의 시체, 몇 구인가 흘러 들어간다라고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했다. 당시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사건으로 불린 사건의 발각이었다. 실제로 사체가 발견된 것은 상류의 나카쓰가와(中津川)였으며 겟토(?)의 발전소를 건설 중이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이었다. 요즘의 연구에서는 나카하마 테쓰(中濱?)는 자유노동자동맹의 일원으로 오스기 에이 등이 발행한 노동운동」 7 《910일 발행호에 현지 보고를 게재했다.

 

현장을 조사한 시나노가와 학살사건의 진상을 보낸다. 시나노가와 (千曲川)의 지류인 나카쓰가와의 하류 8리 정도 거리. 이것이 신에츠 전력회사를 경영하는 대공사다. 감옥방을 만들기에는 절호의 장소였다.”라고 말하고 오쿠라구미(?倉組), 오바야시구미(?林組)가 도급을 받아, 실업자, 자유노동자, 소작인 등의 무리가 100, 200명까지 모아서 화물과 마찬가지로 방으로 끌려온다. 노예 노동자의 공급지는 주로 불경기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규슈(九州), 조선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노동운동7, 1922910.

 

오스기 사카에와 노동운동사 동지들은 8월 크로포트킨, 바쿠닌의 논문 팜플릿을 발행하고 은밀하게 가메이도(??)의 동지 집에서 준비모임을 계속 이어갔으며 20여 명의 발기인에 의해 「『차밀이꾼자신의 굳은 단결을 목적으로 후카가와 도미가와초(深川 富川町)에서 자유노동자동맹을 발족시켰다.

 

나카하마 테쓰(中濱?)나 한국 아나키즘계 노동자 박열의 이름은 보고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박열의 동지들도 참가했다.

 

이 자유노동자동맹의 발족이 축이 되어, 사건이 보도된 지 2개월 가까운 9, 간다(神田)의 미토시로초(美土代町)의 청년회관에서 시나노가와 학살 진상 보고 연설회가 열렸으며 관헌의 보고에서도 천 명 이상의 참가했다고 한다.

 

192297일 오후 7시 미토시로초(美土代町) 기독교청년회관」 《지금은 도쿄 YMCA의 전신 단체가 운영하는 회관. 간타(神田)의 그곳으로부터는 2003년에 철퇴에서 조선인, 일본인 노동자, 사회주의자들이 협동하여 시나노가와 조선 노동자 학살사건 조사회를 주최했다. 관헌의 보고로는 약 1천 명 이상이 모였다. 내지인은 약 500, 조선인 약 500명의 비율의 규모였다.

 

이 모임은 일제 본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의 사회주의자들과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처음으로 협동해 개최한 것이었다.

 

검거된 연사는 구류, 당일의 연사였던 나카하마 테쓰는 회의장에 들어가려 했지만 입구를 경비하고 있던 경관에 막히고, 문 밖에서 니시키마치(錦町) 경찰서에 검거”,

나경석, 박열 양씨의 실시조사 보고 연설이 이루어졌다.”라고 동아일보』《199298

당초엔 오스기 사카에,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등도 연설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박열은 동지들과 함께 선전 비라를 일 만 장 인쇄해 배포하고 전봇대에 붙였다.

 

비라의 문구는

시나노가와 학살문제 대연설회, 문명국이라 불리는, 지금의 일본에 토목공사가 있는 곳, 전국 곳곳에 수많은 형제들은 살아있는 지옥에서 아픈 채찍을 맞고 있는 모습이 있다, 피끓는 사람들이여! 와라, 와라 이 전율할 살인경 타파의 외침을 들으러!!”

 

변사의 이름도 열거되어있다. 정운해(鄭雲海), 나경석(羅景錫), 박열(朴烈), 나카하마 테쓰(中濱哲), 고마키 오미(?牧近江), 정태성(鄭泰成), 백무(?), 나카노 세이고(中野正剛), 마쓰모토 준조(松本淳三),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오스기 사카에(?杉榮), 정해운(鄭海雲), 김종범(?鐘範), 신모(申某), 김형두(??), 이강하(李康夏)

그날의 집회는 불순한 점이 있다고 해서 연설 중지가 이어졌으며 92분에 해산명령을 받고 소란의 언동으로 8명이 조사를 받았다.

 

참가자가 많았던 것은,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의 학살 실태가 불분명하고 진상규명이 이루어지 않았던 것 때문이다. 우선 사건으로 알려진 것은 집회 2개월 전 요미우리 신문이 시나노가와에 조선인 노동자의 사체 몇 구인가 표착하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에 의한다.

그리고 조선에서 발행되는 동아일보가 기자를 파견해 현지로부터의 보고를 연재한 점도 크다.

시신이 흘러온 것은 세 구뿐이었지만, 산 깊은 수력발전소 현장에서는 아직 비밀리에 묻혀있는 사건이 있다고, 당시 사회 상황에서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동거생활을 개시해 7월에 흑도를 창간했다.

박열은 서울의 사상연구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시나노가와 학살 진상보고 연설회에 참석한다.

공산주의와의 차이가 사회주의 운동의 장에서 뚜렷해지자, 아나키즘 운동도 새로운 세대도 가세하고, 오스기 사카에, 나카하마 테쓰, 박열이 가세한다.

 

동아일보는 이상협(李相協) 기자를 특파해 현지조사, 보도를 이어갔다. 연재 기사 니가타(新潟)의 살인 지역=겟토(穴藤) 답사기로서 823일부터 94일까지 12회의 연재, 사설을 4회 게재했다.

 

"일본에서 조선인 대학살 보라! 이 잔인한 참극을 하루 17시간의 고역을 강제해 놓고 도망치자 총살하고 강에 투기하여 독마에 의해 참살된 자 백여 명, 신에츠전력주식회사는 일본 시나노가와라는 강을 이용하여 8년 계획으로 동양 제일의 규모의 대발전소를 니가타현에 건설하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 600, 일본 노동자 600명 등 총 천200명을 사용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그런데 최근 시나노 강 유역에 조선인 노동자 시신이 종종 떠내려와 도카마치(十日町) 경찰서에서 수상히 여겨 자상하게 조사를 한 결과 천하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렇게 학살당한 조선인의 수는 얼마나 될까? 이것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도주 도중 발견되어 살해된 자, 과도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병에 걸려 살해된 자를 합치면 백 명이 채 되지 않을 것 같다.” 연재, 보도를 이어간 동아일보는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발매 금지, 압수된다.

 

한편 일본 내 일본 신문사들의 취재 자세는 후퇴하고 최초로 기사를 쓴 요미우리 무라타 도요아키(村田豊明) 기자는 스스로 보도 내용을 규제해 나간다.

 

나카쓰가와 공사 현장에서의 조선인 학살은 당시에는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으며, 사건으로부터 약 60년이 지나서야 겨우 역사 연구 차원에서 추급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참조했지만 나카쓰가와 수력발전소에서의 조선인 노동자 학대와 학살사건, 동아일보가 게재한 자료 소개」 장명수(張明秀), 니가타 근대사연구(新潟近代史?究)』《1982,

 

니가타현 나카쓰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사토 타이지(佐藤泰治), 재일조선인사 연구(?朝鮮?史?究)」《1985이라는 논문을 발표.

 

사토는 1979년에 착수된 쓰난마치사(津南町史)의 조사에 참여하여 증언이 가능한 옛 노인들로 부터 청취를 했지만, 직접적인 목격 증언자를 찾는데 많은 세월이 흘러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몇 명의 옛 노인들로 부터 들은 증언 조차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1984년 가을, 쓰난마치사 편집자료19에 실어야 할 옛 노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했던 사토(佐藤)의 원고는 엉망이 되고 만다. 언론 보도에도 압력이 있어 1992년의 조선인 학살은 오보로 되고 말았다.

이 논문에서 듣고 쓴 것을 자의적으로 발췌해 본다.

 

여기저기 나무에 익사체가 매달려 있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당연히 하나 하나 경찰에 신고할 것도 없었다”, “인간 기둥이 되어 들어가 있는 건 아닌가? 아마 그런 것 같구나. 물 속에 처넣고 콘크리트를 쳐 부어넣어 .... 꽤 죽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신문 등에 실린 (학살사건)이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문은 있었어요., 실제로 도망친 조선인이 붙잡혀 산 속에서. 둘둘 말아. 겨울에 차가운 강물 속에 던진 것을 봤다니까요, 아버지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만..조선인이 저기에서 시나노가와로 뛰어들었지요..저기서부터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거죠

 

방증으로 학살 현장의 직접적인 증언은 없었지만 무서운 증언은 다양했다.

 

청일전쟁에서 조선을 전쟁터로 삼고 봉기한 농민군에 대한 비대칭적인 무기를 이용한 섬멸전 천황 무쓰히토(睦仁)가 가장 큰 책임자를 거쳐 조선에 대한 왜곡된 정복의식을, 이윽고 귀향한 <천황의 병정>을 통해 일본열도 곳곳에 심어놓고, 차별, 배외의식이 19239월 간토대지진 시 조선인 대학살을 일으킨 것이다.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을 계기로 박열은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는 일본 제국을 타도하기 위한 결의를 다져간다. 그 당시까지도이어 폭탄입수를 모색했지만, 서울데서 김한과 회합한 결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의열단과의 연결이 소중하다고 인식했다.

 

19229월의 박열의 활동을 남긴 자료에서 그려본다.

 

의열단과의 연계

 

역사연구자이자 독립운동가에서 아나키스트가 된 신채호가 기초한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19921)은 독립투쟁의 이념과 구체적 행동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 조선민족은 그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암살 · 파괴 · 폭동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朝鮮總督 及 各 官公吏)

2.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日本天皇 及 各 官公吏)

3. 정탐꾼 · 매국적(偵探奴·賣國賊)

4. 적의 일체 시설물(一切 施設物)”

 

1925조선혁명선언을 인쇄한 팜플렛이 이치가야() 형무소 박열의 독방에서 압수되었다.            

의열단에는 아나키스트 류자명이 가담해 이론가로 활동한다.

 

김약산과 의열단에는 유자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체계적인 조직보다는 아나키즘적인 조직관을 갖게 된 것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김원봉은 폭탄 제조자와 아지트를 의열단에서 확보해 아나키스트들에게도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시켰다.

 

경시청 특별 고등과장, 경시 오카다 키쿠지(岡田喜久治)가 도쿄 지방 법원 검사, 이시다 모토이(石田基)앞으로 의열단에 관한 건을 제출했다. 1924910일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관한 공판서류에 포함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김원봉은 19223월경 조선 내에서 관청 파괴, 고관 암살을 계획하고 조선 내에 폭탄 반입을 할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 인물로 김한이 등장한다. 그러나 김한의 신뢰성에 의문이 생겨 한때 폭탄 수송을 중단했다. 김원봉은 19237, 8월경 동지들을 베이징에 모아, 도쿄 황실 파괴 및 중요한 지위의 관료 암살 계획을 위해 폭탄 반입을 추구하고 자금조달을 꾀할 것이라고 오카다는 보고하고 있다. 

 

보고서에는 박열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지만, 서울에서 박열과 김한은 여러 차례 접촉을 했다. 식민지 하, 일본제국과 함께 싸우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를 얻어야했다. 김한을 통해 박열이 의열단의 폭탄을 입수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며, 일제 경찰의 감시도 만만치 않았다.

 

11흑도회가 분열되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후테이 센징(鮮人)을 창간한다. 란외에 후테이 센징(フテイ鮮人)이라고 게재한다. 그 칼럼에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연명으로 후테이 센징은 진작에 나왔어야 했다.” “박열이 예의 시나노가와 학살사건으로 현장에 갔다가, 볼일이 있어 조선에 귀향하는 바람에 늦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927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 조사회가 열렸다고 기술했다. 박열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박열이 서울의 사상연구회에서 초청받아 시나노가와 학살 진상보고 연설회에 참석이라는 것이 천도교당 모임과 같은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박열은 의열단과 연락하던 김한을 만나고 있다. 또다시 11월에도 만나 폭탄입수 의논을 하고 124일 도쿄로 돌아왔다.

·현대사 자료 3 아나키즘」』, 고마쓰 류지(小松隆二)편 수록. 특별사건 주요 조서1988, 미스즈 쇼보(みすず書房)

 

198942일자 도쿄지방법원 제8회 예심신문조서

 

내가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경성에 보고하러 갔을 때, 같은 곳의 무산자 동맹회, 그 밖에 두세 군데서 김한군과 회견을 하고 뜻을 교환했다.”

 

나는 일본 정부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려면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선전이며 투쟁이기도 하다. 모든 표면적 사회운동은 심각한 운동을 하기 위해, 일본 권력자들의 눈을 속이는 수단이어야 한다.”

 

내 생각을 김한군에게 말했더니 김한군도 이에 공명해 주었고, 여기에 나와 김한군이 서로 연락해 주기로 했다” “게다가 작년 1월경까지 폭탄을 나눠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김상옥 사건 때문에 또다시 어긋니게 되었다.”

 

처음 폭탄 입수가 좌절된 이유를 조선과 만주 국경 부근에서 운반하던 중 장작림(張作霖)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폭탄을 몰수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의열단과의 관계를 묻자 공통의 문제로서 의열단이 일본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나의 사상감정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라고 응답했다.

 

 박열은 의열단과 공감해, 일제 본국에서의 폭탄을 사용하는 투쟁에 대한 의지가 공고해졌음을 말하고 있다.

 

199233월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도미가야()로 이사해 4월에 불령사를 조직한다. 5월에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메이데이에 참가. 불령사는 정기모임을 이어가고 동지들이 모여든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메이데이날, 나는 네댓 명의 동지와 함께 아타고(愛宕) 경찰서에서 탄압을 받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19239월 간토대지진에서 학살당한 조선인은 6천 명 이상이라고 연구자인 야마다 쇼지(??昭次)는 적고 있다.

 

학살당한 오스기 사카에(?杉榮)의 맹우였던 와타 큐타로(?久太?)2년 후에 자신의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은, 계엄령 하에서 조선, 중국 출신의 이주생활자 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가해져, 완전하게 사회로부터 배척을 하려 했던 것이다.

지진 1년 후, 노동운동사의 와타 큐타로(?久太?)와 무라키 켄지로(?源次?)는 나카하마 테쓰(中濱?), 후루타 다이지로(??次?) 등과 같은 길로딘사의 동지들과 함께 지진 이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폭력장치로서의 군대와 경찰의 수뇌에 대해 폭탄등으로 직접 타격을 가하려는 행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192491일 와타 큐타로는 지진 당시의 계엄령 사령관이었던 후쿠다 마사타로(?雅太?)를 권총으로 저격했지만, 공탄에다 탄창의 회전이 나빠 발사되지 못하고 후쿠다는 가벼운 화상에 그쳤으며 와타는 그 자리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와타의 행위는 오스기 사카에 학살에 대한 복수라는 부분만 강조되어 왔었다. 아키야마 키요시(??)니힐과 테러(ニヒルとテロル)(1957)에 수록된 <취봉· 와타 큐타로(?蜂??久太?)>에서 관동대지진 때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伊藤野枝) 등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와타의 가장 큰 동기 중 하나로는 오스기 사카에 부부의 학살에 대한 보복이라고 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법정에서의 의견에서 밝히고 있다.

노동운동(??運動)192571일호의 기사에서 원문을 인용하자면, 우선 선인鮮人)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 적어 두고 싶다.

당시 사회 일반에서 선인鮮人)이라는 말은 널리 유통되었으며, 천황을 정점으로 한 식민하는 국민=일본인이라는 결론적인 입장에서 지배적, 구태여 차별의식을 포함한 용어가 되었는데 이는 당시 이들 활동가들 역시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하는 측의 용어로서, 스스로 자각하고 사용한 것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였다. 침략자의 용어를 공격적으로 전환해 불령(不逞)를 상기시키며 반역하는 용어로서, 자신들의 기관지를 후토이 센징(?)이라는 제목과 함께 란외에는 후테이 센징(フテイ?)이라 게재하고 있었다. 1922.

 

노동운동사의 동지들이 변호인 측의 필기 보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측하지만, 2회 공판정(1925621에서의 와타 큐타로의 발언을 게재하고 있다.

 

나의 이번 행위는, 내가 항상 품고 있는 주의나 사상과는 관계없이, 작년에 지진 재해의 혼란을 이용해 사회주의자, 선인(鮮人)의 방화폭동등의 거짓 유언비어를 쏟아내 불난 곳의 도둑처럼 많은 사회주의자와 조선인, 중국인들이 학살당한 것에 대한 복수다.”

 

어찌 됐든 당시 조선인을 죽여라! 사회주의자를 살려두지 마라!라는 유언비어가 성행했다. 곳곳에서 조선인들은 군중들에게 베여 죽고,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16일에는 우리 오스기 사카에 부부와 6살 조카인 다치바나 소이치(橘宗一)가 헌병대로 끌려가 제군들이 아는 대로 처참하게 살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사의 멤버들이 지진 후 지역주민, 관헌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우리 노동운동사는 91일부터 7일까지 단 한 차례 두 홉의 현미를 분배받았을 뿐으로, 그 외에, 일체의 식료품 분배를 읍내 청년단으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리고 7일에 일제히 고마고메경찰서(駒?署)에 검거되어 나처럼 40도 가까운 열로 누워 있는 것을 이불에 둘둘 말아 유치장에 집어던져졌던 것이다. 이같은 잔혹함! 이에 대한 비분! 그것들이 쌓여 이번의 복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잔인함 속에서도, 특히 우리 오스기 부부 및, 정말 딱하고 안타까운 소이치(宗一)의 학살에 대한 비분이 가장 강하게 내 마음을 움직였음은 물론이다.”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제의 폭력장치는 제국 본국 내에서도 항상, 강권과 강압을 행사해 피침략지 한국의 민중, 그리고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억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재해 때에는 스스로 학살을 자행하고, 배외의식을 잠재화시키고 있는 민중을 선동하여 대학살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박열, 가네코 후미코를 중심으로 하는 불령사 동지들 역시 9월의 대지진을 계기로 차례 차례 검거되어 치안 경찰법 위반으로 1년 안팎의 취조를 당했다.

그 과정에서 박열은 일제의 천황과 그 아들, 나중에 천황인 히로히토를 타도하기 위해 폭탄을 반입하려했던 것이다.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불령사가 관동대지진 직후 군인들로부터 탄압을 받은 경위가 권력측 자료에 기록되어있다.

자료는 고노에(近衛1 양 사단 훈공구상(?功具?)이다. 치중병 제1대 육군 치중병 군조 스즈키 카메오(鈴木?)에게 주어진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치중병이란 군수품 수송을 담당하는 군대를 말한다. 훈공구상이란 임무를 평가하기 위해 자세하게 사정을 기록한 군대 내의 평가의 증거를 말한다.

계엄령 하에 군대는 총동원하여 조선인, 사회주의자 탄압에 관여하였다.

 

위자, 93일 밤 도미가야 초장(경계, 감시의 임무)으로 복무하고, 그날 밤 12시경 도미가야 이시카와(??) 목장 동북쪽, 움푹 꺼진 삼림 속에 조선인 3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체포했다.”

 

지금부터 또다시 대지진이 올 것이니 경계하라고 알리고 도미가야 주민을 집 밖으로 내보내며, 일시 소요를 일으킨 자가 있다.”

 

이는 여진에 대한 경계를 주변에 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소요라고 하면서 법률을 위반한 것처럼 보고를 하고 있다.

 

군조는 우 조선인의 가옥(이시카와 목장 움푹 꺼진 지대 안에 있는 돼지 우리 쪽의 가택으로, 일반 인근의 주민은 수상한 집인 것처럼 불렀다)을 수색한 결과 좌기의 물건을 압수했다.”

 

불령사로의 안내 표시를 하고 멤버들이 드나들던 것을 수상한집이라고 하는 인근 주민의 헛소문을 듣고 수색을 했던 것이다.

소문을 받아들여 수색한 것이다.

지진 재해 후에 조선인, 사회주의자가 경찰, 군대의 표적이 되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압수한 것은 불령선인사(不逞鮮人舍, 표찰), 불령선인사 발행 잡지(후테이 센징:?), 선전비라(일선대강연회:??講演?), 잡지 판매점 명부1, 잡지(자유인), 조선인 명부 그 외 약간.

 

모두가 평범한 문패, 잡지류 등이었다. 그 집의 주인, 가네야마 후미코(??ふみ?, (도치키현(?木?) 사람으로 24세 정도)는 위 압수물건과 함께 경찰관에 인도되었다”, “그런데, 도미가야(?) ○○모는 위 가네야마 후미코를 상당히 비호하면서, 압수물건에 따라 사건 폭로와 함께 발광을 가장한 패도(허리에 차는 칼)을 빼어들고 할복 흉내를 내고 광태를 부렸음에 따라, 위 조선인 가네야마 후미코와 함께 경시청 순사에게 인도되었다.”

여기에서 이름을 잘못 기재했지만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이렇게 체포된 것이다.

 

위 행위는 단순하게 임무를 달성한 것 뿐만 아니라, 경비상 유력한 증거를 찾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과잉 탄압한 군인을 칭찬하고 경비할 필요가 있었다고,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게 평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탄압이 도쿄, 가나가와(神奈川)에서 무수히 자행됐음에 틀림없다.

 

가네코 후미코와 예심법정에서 어떤 조선인의 사상에서 일본에 대한 반역적 기분을 제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1919년 내내 조선에 있으면서 조선의 독립 소요 광경을 목적하고 나조차도 권력에 대한 반역 기분이 들고, 조선을 위한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가 가슴에 치밀어 올랐습니다.” 1924123일 제4회 신문조서·현대사 자료 아나키즘

고마쓰 류지(小松隆二), 1988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국가가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하고 있는 현실을 자신의 7년간의 체험을 통해 충분히 감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3·1독립운동을 후미코는 자신의 사상의 원류로 삼았던 것입니다.

도쿄에서의 박열을 비롯한 조선 아나키스트들과의 만남을 거쳐 가네코 후미코도 19227월에 보도된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사건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갖게 되었으며, 일본제국주의와 천황 타도의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그리고 천황의 아들 히로히토를 쓰러뜨릴 것을 결의한다.

 

일본 제국의 천황이 존재하지 않고, 또한 국가를 부정하고 권력이 없는 평등한 사회의 모습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더욱 깊이 생각하려 했던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예심판사에게 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평등해야 합니다.” “신의 슬하에서 작년과 같은 천재로 인해 수만의 충량한 신민이 죽지 말았어야 합니다.”라며, 만약에 천황이 신이라면, 관동대지진으로 신의 국민은 죽지 않았어야 함을 지적하고, 천황이 신이라는 일본제국의 기만을 폭로하였다.

게다가 그 일왕을 신격화하고 있는 일본제국의 민중은 무지하다고 규탄하고 있다.

 

오히려 만세일계의 천황으로 형식상으로나마 통치권을 부여해 왔다는 것은 일본 땅에 태어난 인간들 사이에서는 가장 큰 치욕이며, 일본 민중의 무지를 증명하고 있는 것” “인간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행동해야 하며” “모든 <>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자각시키기 위해, 저는 도련님을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12회 예심신문조서1924514

 

그러나 19262월의 대심원 법정에서 권력에 대해 반역하는 기분 좋은 상상에 말하자면 환혹되었다” “눈 앞에 폭탄이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라고 했다.

당시, 폭탄을 사용한 투쟁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 폭탄을 입수했다면 자신은 행동할 수 있었을까? 라고 심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다만 천황이 없는 사회야말로 민중이 수평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네코 후미코의 생각에는 변화는 없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관동대지진 발생 후 3일째에 군인들에게 구속되었기 때문에 그후에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경찰서, 감옥 안에서 알 수는 없었다.

대심원이 시작되어 변호인, 동지들로부터 전해졌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다.

전해의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사건에 이어 관동대지진 후의 조선인 학살,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이치가야(?) 형무소에 갇힌 입장에서 분하고, 일본 제국을 무너뜨릴 결의가 강해졌을 것이다.

그것이 예심신문조서에서의 가네코 후미코의 일본 사회를 논한 응답으로 나타났고, 박열은 논문으로서 정리하고 있다.

이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삶은 격동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편견과 차별에 항거한다.

생활 양식으로 우뚝서서, 우리들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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