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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메다 히로시 선생님의 발표문에 대한 토론문
국민문화연구소, 전 한국아나키즘학회회장: 김창덕
가메다 선생은 평생을 비전운동과 평화운동에 앞장서신 아나키즘 운동가이십니다. 특히 일본의 아나키즘 운동을 연구하시면서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을 가장 오랫동안 연구해오신 분이기시도 합니다. 즉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많은 관심과 연구를 해오신 분으로 오늘의 이 발표문은 이러한 가메다 선생의 그 동안의 노력의 결과를 접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발표문을 세 가지 방향에서 나누어 제 나름대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가 일본의 배외의식, 차별주의의 탄생, 이어 두 번째는 시나노가와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의 아나키스트와 의열단과의 접촉, 즉 공투, 연대활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일본의 배외주의, 특히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은 이 논문에서도 밝혔듯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 새롭게 생긴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침략전쟁을 완성하기 위해 일본의 모든 국민을 쉽게 묶어두고 동원하며, 세금을 짜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지금까지는 없었던 “적”을 만들고 이들을 “차별”하는 과정에서 모든 구성원을 국가주의, 내셜널리즘으로 몰아가는 과정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근대사를 보면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이런 노골적인 차별이나 배외의식을 거의 느낄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규슈(九州)로 이주한 조선 도공의 후손들은 그 시기까지만 해도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구태여 일본식으로 바꿀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이들 모두가 일본식 이름으로 변경하게 된 것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배외주의와, 차별의식이 급격하게 생겨나 그 방어의식에서 자연히 생겨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1922년 7월 시나노가와에서 약 1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학살 당한 사건은 바로 이런 배외주의와 차별의식이 극대화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알려지자 그해 8월 서울에서는 “니가카 조선인학살사건 조사회”가 만들어지고, 나경석을 대표로 일본에 건너갑니다. 나경석은 약 2주일간 박열, 김약수 등과 함께 현지조사를 벌이고, 이어서 9월 7일에는 도쿄 간타(神田)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니가타 조선인 노동자 학살문제연설회」를 개최합니다. 여기에는 일본의 니힐리스트 시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나카하마 테쓰(中浜?)도 함께 합니다만 나카하마의 경우 연설회장 출입이 금지되고, 12일간의 구류처분까지 받게 됩니다. 이 연설회는 도쿄에서 열린 최초의 조선인 주최 모임으로 회의장이었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는 수천 명의 청중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 시나노가와 사건을 전후로 우리의 역사과 관련이 깊은 사건이 이어집니다. 우선 이 사건보다 약 한 달 앞선 1922년 6월 일본사회에 충격과 공포를 가져온, 테러리즘을 지향하는 길로딘사가 앞서 언급한 나카하마 테쓰,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 구라치 케이지(倉地啓司), 가와이 코조(河合 康左右) 등을 중심으로 결성됩니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꿈꾸며 자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시킴으로서 기존의 사회체제에 충격과 변화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테러리즘은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의 의열단과의 접속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인 1922년 7월 15일에는 일본공산당이 정식 결성되면서, 이 시기부터 아나키즘과 볼세비즘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21년 11월 박열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범사회주의계의 「흑도회(黑濤會)」가 해산되고 뒤이어 1922년 10월 아나키즘계의 박열, 신영우, 홍진유(洪鎭裕), 서상일(徐相一), 서동성(徐東星), 장상중(張祥重), 김근호(金根鎬) 등 10여명을 중심으로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고, 반대로 공산주의자였던 김약수(金若水), 김종범(金鍾範) 등을 중심으로 「북성회(北星會)」가 결성된 것도 바로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공민(公民) 나경석(羅景錫:1890-1959)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그는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단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 이어 1914년 도쿄고등공업학교(현 도쿄 공업대학) 화공학과 졸업과 동시에 서울의 중앙학교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칩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신상조사서에 의하면 “요즘 오스기 사카에(大杉?), 헨미 나오조(逸見直造) 등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또한 일제의 기록인 (『특별요시찰인정세일반(特別要視察人情勢一斑)』에 의하면, 1914년 7월 중순 「배일조선인(排日朝鮮人)」 정태신(1892.02.07.-1923.08.12.)을 위해 오사카의 하세가와 이치마쓰(長谷川市松) 앞으로 소개장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박열 보다 7세 연상이기도 했던 나경석은 박열 이전에 이미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운동가로 활동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및 오스기 사카에 등과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학살에 충격을 받아, 아나키즘 운동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후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대종교의 포교와 교단개혁에 힘썼으며 자신이 살던 집을 빈민들에게 제공하는 등의 구제사업을 합니다.
한편 나경석은 여동생인 나혜석을 도쿄로 불러 1914년 가을부터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시키고,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됩니다. 나혜석이 지금도 우리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화가로서가 아닐 겁니다.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로 자기자신을 살고자 했던 강렬한 여성 운동가로 더욱 기억될 것입니다. 당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남녀평등이나 여성의 권리, 나아가 당시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등 여성운동가로서의 나혜석입니다.
이런 나혜석의 여성운동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오스기 사카에의 부인 이토 노에(伊藤野枝:1895.1.21 ? 1923.9.16)입니다. 이토 노에에 대해서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구리하라 선생님께서 『마을에 불을 질러 백치가 되어라 이토 오노 전(村に火をつけ、白痴になれ 伊藤野枝?)』, 『이토 노에 셀렉션(伊藤野枝セレクション)』등 두 권의 책을 출간하셨으니 기회가 되시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토 노에는 당시 대표적인 여성잡지인 『세이토(??)』의 편집장으로 당시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였습니다. 자신의 불륜을 당당하게 밝히고, 결혼제도를 부정하며 낙태와 폐창운동, 여성의 정조 등 당시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다양한 화제를 불러온 여성입니다. 이런 이토 노에의 주장이 상당 부분 나혜석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여성의 이야기의 내용이 서로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나혜석과 이토 노예의 직접적인 교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스기 사카에의 맹우였던 나경석을 통해 이 두 여성의 만남을 상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시간을 두고 충분히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1923년 9월 1일의 관동대지진과 일본의 아나키즘, 의열단과의 관계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이 사건으로 인해 아무 죄 없는 6천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은 더욱 자세히 연구되고 알려져야 할 것입니다. 이 조선인 학살과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은 아나키스트들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학살 사건입니다. 노동운동가였던 가와이 요시토라(川合義虎:1902.7.18.- 1923.9.4.) 등 10여명이 9월 3일 가메이도 경찰서에 끌려가 살해당한 가메이도 사건(??事件)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나아가 9월 16일에는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운동가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아내인 이토 노에 그리고 조카 다치바나 무네카즈(橘宗一)가 아마카스 마스히코(甘粕正彦:1891.1.26.-1945.8.20)로 대표되는 군부에 의한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본사회는 충격을 받습니다. 오늘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이해 이 행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역시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학살 100년을 맞이하는 의미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번 9월 16일은 이토 노에의 고향인 후쿠오카(福岡)에서 100주기 추모식을 크게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사건의 주범 아마카스(甘粕正彦)의 이야입니다만, 이 사건 이후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을 마친 후 1926년 가석방 됩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관동군에서 정보와 모략 공작 등을 주 업무로 합니다. 전후 전범으로 처리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인물이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심여추의 동생으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인 심용철(극추:克秋:1914-2001)의 회고록에 의하면 김좌진, 김종진, 이회영을 비롯한 수많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의 살해 뒤에는 이 아마카스를 통한 밀정들이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우리의 올바른 독립운동를 밝히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관동대지진 이후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직접행동에 뛰어듭니다. 제일 먼저 10월 4일 길로딘사의 다나카 유노신(田中勇之進)이 오스기 부부의 학살 주범인 아마카스의 동생 고로(五郞)를 습격하지만 미수에 그치고 체포되면서 길로딘사 최초의 희생자가 됩니다. 12월 27일에는 당시 나이 24세의 아나키스트 청년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1899.11.7.- 1924.11.15.)가 당시 섭정궁인 히로히토 황태자(후에 전범 천황 히로히토)를 엽총으로 암살 기도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도라노몬 사건虎ノ門の事件). 이는 천황을 정점으로 일본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적 행동으로 간주되어 결국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집니다.
1924년 9월에는 관동대지진 1주기를 맞이해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후쿠다 마사타로(福田雅太郞)를 암살하기 위해 노동운동사의 무라키 겐지로(村木源次?1890.- 1925.1.24.)와 와다 큐타로(和田久太?:1893.2.6.-1928.2.20.)가 직접행동에 나서지만 실패로 끝나고 와다는 현장에서 체포되고 맙니다. 이런 와다를 구출하기 위해 9월 3일에는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1900.1.1.-1925.10.15)와 무라키 켄지로가 와다가 구류되어 있는 혼고 모토후지本富士 경찰서의 사환실에 폭탄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어서 9월 6일에는 후쿠다 대장의 집에 소포폭탄을 보내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의 행동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죽음을 당한 수많는 동지들, 특히 오스기 사카에 부부와 동지들에 대한 복수의 의미와 함께 억울하게 희생당한 6천여 명의 조선인들에 대한 복수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직접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무기구입을 위해 조선의 의열단과 접촉합니다. 먼저 1923년 10월 다카지마 산지(高嶋三治:1895.2.11.-1986.8.24.)를 중개역으로 해서 의열단에 접근합니다. 다카야마가 이런 역할을 맡게 된 것은 그만의 특이한 이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카시마는 일찍이 오스기 등과의 교류를 통해 아나키즘을 받아들였으며 조선인 유학생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보다는 일본 데키야업계(일종의 노점상 야쿠자 조직) 거물로 요즘말로 하면 협객이랄까요?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야쿠자 아나키스트로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무튼 이런 과정에서 속에서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과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나아가 의열단과도 연락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다카지만 산지를 비롯해 나카하마 테쓰, 후루타 다이지로, 와다 큐타로 등은 1924년 4월 13일 경까지 약 4-5달 가량을 0서울에 머물면서 구체적으로 수류탄 10개, 권총 5정 등을 의뢰합니다. 당시 의열단에서 제시한 가격을 보면 권총이 1정에 30엔, 폭탄은 1개에 20엔으로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와다 큐타로가 300엔을 마련해 1924년 1월 조선으로 잠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너무 순수해서 그런지 아니면 상대를 너무 쉽게 믿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많은 돈은 모두 떼어먹히고 빈손으로 쓸쓸히 귀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 서울의 을지로 부근에 머물면서 서울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자신들의 감상을 글로 남겨놓습니다. 나카하마의 경우 「어디로 가나?(何?へ行く)」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야기 합니다.
“수염이 어는 겨울의 새벽이었다. /경성의 판자집을 빌려 살고 있었다.
『규(久)는 한강으로 스케이트와 낚시를 보러 나갔다./『테쓰(?)는 조선 연극 분장실로 숨어들어갔다. /『오(大)』는 도시락을 들고 도서관으로 갔다.”
“온돌은 없었지만 / 화로는 있었다. 세 사람은 그 날의 수확을 이야기 했다/ 조선의 밤은 무겁고 힘들었다.”
또한 이들의 경성에서의 활동은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의 『사형수의 회상(死刑囚の思い出)』에 자세히 적어놓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서울에서의 이들의 자취를 따라 들러보고 싶습니다. 만약의 경우입니다만, 이 당시에 이들이 무기구입에 성공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상당히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1925년 1월 24일 무라키 겐지로 죽음을 시작으로 10월 15일에는 후루타 다이지로가 단두대에 올라서고, 뒤를 이어 1926年 4月 15日 마지막으로 나카하마 테쓰(中浜哲)가 단두대에 올라 섬으로서, 1923년 관동대지진시 일제가 저지른 죄에 대한 이들의 복수극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직접행동의 중심에는 오스기 사카에(大杉?)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박열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한 해 전인 1918년 오스기 사카에를 중심으로《문명비판文明批判》《노동신문》등이 발간되면서 아나키즘 운동은 절정을 맞이합니다. 1920년 5월 2일에는 일본 최초의 메이데이가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참가자 10명을 중심으로 열렸으며, 그해 10에는 중국 상해에서 열린 코민테른 사회주의자 대회에 일본의 사회주의를 대표로 해서 오스기가 참석하게 됩니다. 이어 오스기 사카에는 관동대지진 발생 직전인 1923년 1월부터 5월 사이에 아나키스트들의 국제적 결성을 위해 파리에 머물면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이런 사실은 이 시기까지는 일본의 사회주의는 아나키즘에 의해 대표되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오스기 사카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특히 박열의 경우 1885년 생이었던 오스기 사카에와는 12살의 나이 차이로 스승 격인 오스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니힐리즘 선언이나 특히 박열이 옥중에서 작성한 4편의 논문인 「일본 권력자계급에 전한다」, 「나의 선언」, 「무위도식론(無爲徒食論)」, 「음모론」 등을 읽어보면 오스기 사카에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박열뿐만이 아닙니다. 1920-30년대 일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아나키즘 운동, 아나르코 생디칼리즘 운동은 이런 오스기 사카에의 영향 하에 이루어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1910년의 대역사건을 거치면서 수많은 동지를 잃게 된 오스기 사카에로서는, 일제의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감시하고 있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하는 정면투쟁은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개(個)=자아의 중시와 확립, 개인의 자유를 통한 권력에의 저항, 더 나아가 노동운동을 통한 저항이야말로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 1920년대 ?30년대 일본에서 이루어진의 한국 아나키즘 운동의 본질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일제의 권력과 멀리 떨어진 중국에서 전개된 사회주의적 아나키즘과는 그 성격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이나 그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오스기 사카에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메다 선생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박열의 폭탄입수에 대한 것입니다만, 과연 박열은 도쿄로의 폭탄 반입에 성공했을까요? 당시의 엄중한 도쿄 시내의 상황에 비추어 폭탄반입이 성공했을지 의문입니다.
이상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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