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부 특별기획③
|
|
|
|
|
|
|
|
자주인 하기락과 한국철학 연구
|
|
|
|
장 윤 수*
|
|
|
|
1. 철학, 한국철학 그리고 하기락
|
|
2. 하기락의 한국철학 연구
|
|
3. 맺음말
|
1. 철학, 한국철학 그리고 하기락
‘필로소피(philosophy)’를 가리키는 ‘철학(哲學)’이라는 용어가 우리 학계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엽 이인재(李寅梓, 1870~1929) 의 『철학고변(哲學攷辨)』에 의해서이다. 원래 ‘철학’이라는 말은 ‘필로소피’라는 학문 분야를 나타내기 위해서 일본의 철학자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가 1872년경에 조어(造語)한 것이다. 니시는 ‘필로소퍼(philosopher)’의 뜻을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보고, 주돈이(周敦?, 1017~1073)의 『통서(通書)』 「지학장(志學章)」에 나오는 글귀, “성희천(聖希天), 현희성(賢希聖), 사희현(士希賢)” 중에서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희현(希賢)’을 인용하였다.당시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유교 교육을 받았으므로 이러한 대비에 의해 ‘필로소퍼’의 의미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로소피’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희현학(希賢學)’이라 했다가, ‘현(賢)’이 너무 유교적 색채가 짙다 하여 ‘철(哲)’로 바꾸어 ‘희철학(希哲學)’이라 했으며, 그 뒤 자연스럽게 ‘희(希)자’는 떨어져 나가고 ‘철학’만 남게 되었다.
니시의 번역어는 한자 표기가 주된 학술 매체였던 나라들, 즉 한·중·일 동아시아 세 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필로소피’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인재 또한 한국에 서양철학을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니시의 한자 번역어를 채택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철학이 우리 문화권에 도입되던 초기부터 이미 많은 혼란과 의미 착란을 겪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하기락은 평소 ‘필로소피’의 번역어로 ‘철학’이라는 용어가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왔다.그는 1996년 6월 1일, 경북대학교에서 열린 대한철학회 춘계 학술회의 토론회에서 사회자가 토론에 대한 총평을 부탁하자, ‘필로소피’의 번역어 문제를 제기하며 ‘현학(玄學)’이라는 번역어가 무난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기락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갖는 애매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기락 자신이 철학의 ‘자기화’ 작업에 골몰하였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에 어느 정도 의미를 갖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이다. 즉 이때 국내에 설치된 전문학교에서 정식 교과목의 하나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교양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본격적인 철학 학문 활동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형편에서 동양철학, 특히 한국철학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였다. 아직 철학에 대한 정체 해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철학’이라는 분야가 가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에 철학과가 설치되고 동양철학 관련 교과목이 교과과정에 포함된 것은 1925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이후이다. 경성제대에서는 동경제대의 편제를 따라 법학부 내에 철학과를 두고 동양철학 관련 교과목을 ‘지나철학(支那哲學)’이라는 전공과목으로 개설하였다. 그러나 동양철학 관련 강좌가 본격적으로 대학 정규 과목으로 개설된 것은 역시 해방 이후부터이다. 해방 이후라고 해도 교육 내용에 있어서 비약적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으나, 일제시대 일본인 교수들에 의해 독점되던 철학의 관련 과목들이 한국인 교수들에 의해 주체적으로 교육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46년 이후 각 대학에 철학과가 설치되고, 전공과목으로 중국철학사·인도철학사 등 동양고중세철학 전반에 걸친 강좌가 개설되었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이 정치·경제적인 안정에 의해 가라앉게 되자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문화적 주체성의 모색이라고 할 만한 움직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한국문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활발한 논의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고사(枯死) 직전에까지 이르렀던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한국문화와 관련한 강좌가 개설되었으며 이와 관련한 학과도 설치되었다.
이러한 시대사조에 발맞추어, 박종홍(朴鍾鴻, 1903~1976)은 1961년 서울대학교의 학부과정에 정식 교과목으로 한국철학 관련 강좌를 개설하였는데, 이것은 큰 의미가 있다. 즉 우리나라 서양철학계의 거봉으로 평가받는 박종홍이 한국철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연구와 강의 활동을 하였던 것은 이후 우리나라 철학계를 주도하는 그의 제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곧 우리나라 철학계 전반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된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1952년 5월에 경북대학교가 종합대학교로 발족하게 되며, 1953년 3월에 철학과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다. 여러 면에서 박종홍과 비교할 수 있는 이 지역 철학계의 중심인물인 하기락(河岐洛, 1912~1997)이 대구대학 철학과 주임교수에서 경북대학교 철학과 주임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면학 분위기가 조성된다. 당시 하기락은 하이데거 (M. Heidegger)와 하르트만(N. Hartmann) 등 주로 독일철학을 강의하였지만, 한국철학 방면에도 이미 상당한 관심과 문제의식을 보였다.그리고 1960년대 초반 이후에는 한국철학 방면에 관하여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하게 된다.그에게 지도를 받은 경북대학교 철학과 제1회 졸업생 (1953년 졸업) 중에서 유명종, 최승호와 같은 한국 철학계 원로들이 있으며, 또한 문정복, 채수한, 하영석, 김종문과 같이 서양철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동양철학(한국철학)에 있어서 전공자에 버금가는 관심과 조예를 보이고 있는 학자들이 상당수 배출되었다는 점도 하기락 자신의 학문 경향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철학 연구사에 있어서 특히 박종홍, 하기락과 같은 서양철학 전공자들이 한국철학을 관심 있게 연구한 사건을 의미 있게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 ‘한국철학’이라는 분야의 정체 해명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기존의 소수 연구자들조차 대부분이 ‘서당 훈장’ 정도의 학식과 역할을 본질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서양철학에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나타내며 아울러 한국의 전통학문에도 익숙해 있던 이들 학자들의 연구 경향과 성과들이 한국철학 연구사에 있어서 발전의 일대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종홍의 경우는 그 제자들에 의해 학문성과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지만, 하기락의 경우는 아직 제대로 그의 학문이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하기락의 사상 중에서 한국철학(동양철학)에 한정하여 그 연구 성과를 검토하고 그 의의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의 대작인 『조선철학사』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검토하고, 그리고 한국철학 관련 논문들을 분석해 보려 한다.
2. 하기락의 한국철학 연구
여기에서 먼저 하기락의 생애와 문제의식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하기락의 삶과 당시 한국사회의 특징적인 모습들, 그리고 하기락이 현실 사회 속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문제의식들, 바로 이러한 것들이 하기락의 한국철학 연구를 검토하는 데 있어서 선결문제가 된다. ‘하기락은 왜 한국철학을 연구하였는가’ ‘하기락은 한국철학 연구를 통해 무엇을 의도했는가’ 하는 물음들은 개인, 사회 그리고 문제의식의 유기적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사상사적 이해를 통해 풀릴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하여 하기락의 한국철학연구 방면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조선철학사』(형설출판사, 1992)의 구조와 그 철학적 의의를 탐구해 보려 한다. 이 절(節)에서는 하기락이 견지하는 사상사관을 먼저 이해하고, 이를 근간으로 하여 『조선철학사』의 특징, 의의, 문제점 등을 논해 보고자 한다. 이 부분은 본 논문의 가장 중심 부분을 이룬다. 그리고 다음 절(節)에서는 하기락이 쓴 한국철학 관련 논문들을 함께 묶어 검토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특히 한국철학과 관련하여 하기락이 가장 즐겨 사용하던 주제, 독특한 사유방식, 관점 등을 주목할 것이다.
1) 하기락의 수학과정과 문제의식
하기락은 1917~1922년(하기락의 나이 6~12세)까지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1922년(12세)에 안의공립보통학교(安義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여 1927년(17세)에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12세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은 전통 교육[漢學]을 받았으며 그 이후는 현대식 교육을 이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전통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던 6년간은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초기 단계로서, 이후 그의 삶과 학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기락의 수학과정에서 중국 현대신유학의 학자들을 연상해볼 수 있다. 현대신유학 계열의 많은 학자들이 초기에는 전통 한학 교육을 이수하고 이후 본격적으로 서양식 현대 교육을 받았다는 점,그리고 서양철학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다가 마침내는 다시 중국의 전통철학에 되돌아와서 동·서 융합의 거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또한 철학 이론의 ‘자기화’ 구축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하였다는 사실이다. 하기락 또한 초기 6년간의 한학 공부 이후 도일(渡日)하여 본격적인 서구식 교육을 받게 되며, 해방 이후 학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주로 서양철학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게 된다. 그런 후에 결국에는 한국철학에 보다 ‘근원적’인 관심을 갖고서 한국철학(사상)의 정체 해명과 주체성 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기락의 평생을 일관했던 신념은 다음과 같은 그 자신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속박하는 국가 기구, 그것은 죄악이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통치 체제(그것이 비록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통치라 할지라도), 그것은 잘못된 질서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모든 사람을 묶으려는 시도, 이것은 관념상의 폭군이다. 인간은 일체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속박 심지어 도덕적 내지 종교적 속박에서까지도 풀려나지 않으면 안된다.
하기락은 이러한 신념 하에 일체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하는 아나카스트의 입장에 굳건히 서게 되었다.서양철학 그 중에서도 특히 ‘비판적 존재론’의 대가(大家)로서,서양철학의 한계를 직시했던 이론가로서, 그리고 인간을 억압하고 멸시하는 모든 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운동가로서 하기락은 결국 한국철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강단철학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의 장(場)에서 실천될 수 있는 그러한 살아 있는 철학,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긴 주체적인 철학에 깊은 관심을 지녔던 하기락으로서는 한국철학과 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과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전통철학에 대한 간접적인 연구 계기에는 당연히 어릴 적 배웠던 한학(漢學)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2) 『조선철학사』의 구조와 철학적 의의
하기락이 한국철학사를 전개하면서 ‘철학 체계’에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바로 한국철학사 전체를 ‘기(氣) 철학적 전개’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국전통철학사에 있어서 ‘가장 중국적인 개념’이 기(氣)라고 하는 주장은 학계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그렇지만 한국전통철학사에 있어서 ‘가장 한국적인’ 개념을 기(氣)로 이해하며, 한국전통철학의 전개를 기철학의 역사로 기술한 저작은 아직 주목되지 않는다.하기락은 한국철학 체계의 맥락을 세우면서, 상고조선(上古朝鮮)의 기철학에서 시작하여 고대와 중세의 국선도(國仙道)를 거쳐서 근세조선에 이르러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주기론(主氣論),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실학사상,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기철학 등으로 이어지는 학문 전통을 강조하였다.
한편, 하기락은 『조선철학사』에서 ‘통일(統一)’이라는 말을 엄정하게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즉 ‘신라의 삼국통일’, ‘통일신라시대’ 등의 표현은 자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건을 진정한 ‘통일’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이미 하기락의 생애와 문제의식을 통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주체적인 철학을 확립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그였기에 외세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학자들의 ‘한국철학사’ 관련 저작에 비해 백제와 고구려의 사상을 비교적 비중 있게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에 대한 투쟁과정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사관이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바탕해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기락의 『조선철학사』는 모두 4편 1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편 〈상고시대 조선철학〉, 제2편 〈고대삼국 조선철학〉, 제3편 〈중세고려 조선철학〉, 제4편 〈근세조선 조선철학〉이다. 비교적 조선시대 이전의 시기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며, 특히 고대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시대 철학을 ‘전설적인’ 문헌들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철학의 백미(白眉)라 일컬어지는 ‘조선시대의 성리학’ 부분은 이 책 전체 분량의 1/4 정도를 차지할 뿐이다.여타의 한국철학사에 비하면 소홀하게 취급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그 개창(開創)부터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제4편 <근세조선 조선철학〉 제1장 제1절 〈1〉의 제목이 ‘인간의 얼굴을 잃은 창업주들’로 되어 있는 점만 보더라도 저자 하기락이 조선왕조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하기락은 조선시대의 성리사상을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대립시켜 놓고서, 주리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고, 주기론은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주리론의 계열에 있는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간단하게 서술하고 또한 비판적인 시각이 강하다. 그러나 주기론의 계열에 들 수 있는 철학자들의 이론에 대해서는 보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해석하고, 특히 서경덕(徐敬德)의 경우에는 그 철학 체계와 기타 사항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정약용(丁若鏞)의 철학을 주기론으로 해석하고 그를 유물론자로 단정하며, 또한 우리 고유의 정신을 순수하게 계승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한 대단한 철학자라고 평가하였다.
3) 논문 성과 검토
한국철학(동양철학)과 관련된 하기락의 논문은 양적으로 그렇게 많지는 않다.그러나 그의 주된 전공이 서양철학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 자체가 적었다고 볼 수는 없다.
(1) 「화담철학 : 유교철학과 노장철학에 대한 화담철학의 관계에 관한 시론」
이 논문은 하기락이 한국철학 연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저술한 최초의 논문으로서 그의 관심방향과 연구경향을 잘 보여준다. “서언-본체론-현상론-결어”로 구성되어 있는 목차 자체는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초로 작성한 논문의 주제를 화담철학(花潭哲學)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논문이 간행된 1960년 당시는 한국철학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업적이 거의 생산되지 않던 때이다. 박종홍의 한국철학 연구조차 주로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이루어지고 있으며,그 내용도 주로 이황(李滉, 1501~1570)과 이이(李珥, 1536~1584)의 연구에 치중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하기락의 화담철학 연구는 그 자체로 이미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기락은 이 논문에서 먼저 화담철학의 독자적 위치와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화담철학’이라는 용어가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하기락은 왜 하필 최초의 한국철학 연구주제를 ‘화담철학’으로 택했는가? 필자가 보기에, 우선 하기락은 한국철학의 일관된 정신이 주리론보다는 주기론에 있다고 보았으며, 한국의 주기론자 중에서도 가장 초기적 인물이며, 또한 대표적 인물이 서경덕이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연구주제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경향은 이미 앞에서도 확인했듯이 『조선철학사』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사상의 주체성을 중시하여 이를 정립하려 했던 하기락에게 있어서 서경덕의 철학사상은 하나의 시금석이었다.
(2) 「철학에 있어서 주체의식과 화쟁의 논리」
「화담철학 : 유교철학과 노장철학에 대한 화담철학의 관계에 관한 시론」이 하기락의 한국철학 연구의 시초가 되는 논문이라면, 「철학에 있어서 주체의식과 화쟁의 논리」는 그의 연구가 원숙기에 접어들었을 때 생산된 것이다. 앞서의 논문보다는 주제 자체가 갖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더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며 그 연구범위 또한 훨씬 광범위하다.
하기락은 이 글에서, 한국철학의 미래는 ‘화쟁의 정신’과 ‘주체의식의 확립’에 걸어 본다고 하였다. 그리고 ‘화쟁의 정신’이란, 폭넓게 다양한 사상재(思想材)를 섭렵하는 데서 비롯하여 그 가운데서 공통된 동질성을 찾아내는 데에서 성립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수렴의 논리’라고 하였다. 반면, ‘주체의식의 확립’이란 본래의 자기와 타자와의 이질성을 식별하는 데서 일깨워진다고 주장하며, 이를 ‘분석의 논리’라고 하였다.
하기락은 화쟁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이로 원효(元曉, 617~686)를 거론하며, 이러한 화쟁의 정신을 가장 간명하게 표명한 원효의 명제를 “여러 경전들을 통합하여 그 다양성을 하나의 맛에로 귀일시킨다.”라는 사상으로 요약하였다. 그리고 특히 ‘여러 경전’[衆典]에 대해 풀이하기를, 불가경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가·도가의 경전은 물론이고 전승적인(傅承的)인 선도(仙道)사상까지도 통섭하여 불타(佛陀)의 근본정신에 회통귀일(會通歸一)시켰다고 이해하였다.
주체의식의 예로 서경덕과 이이(李珥)의 사상을 거론하며, 여기에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추가한다. 서경덕과 이이의 경우를 주체정신의 예로 든 것은 두 사람의 학문하는 방법과 시각 때문이다. 우선 하기락은 이황의 학문정신을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에서 논한다. 즉 이황이 기대승(奇大升, 1526~1572)과의 논쟁 도중에 자신의 이론인 “사단시이지발(四端是理之發), 칠정시기지발(七情是氣之發)”이라는 구절을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발견하고 자신의 뜻이 주자와 일치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반면 이이는 이기호발(理氣互發)의 문제에 있어서 만약 주자가 그것을 주장했다면 주자 또한 잘못되었다고 하며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제시하였는데, 하기락은 이이의 이러한 주체적 태도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하기락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경덕의 경우에 그 철학체계의 독자성을 인정하였고, 또한 진리에 대한 서경덕의 책임의식과 의연한 자세를 주체의식으로서 높이 평가하였다.
(3) 「유·도·선 삼교의 도(道) 개념」
이 논문 또한 한국사상에 있어서 화쟁의 정신을 확립하고 주체의식을 확립하고자 하는 하기락의 근본의도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물이다. 하기락은 이 글에서 우선 유가와 도가의 ‘도(道)’ 개념을 대립의 관계로 설정한다. 즉 유가의 세속적 도를 ‘정(正) 명제’라 하고, 도가의 탈속적 도를 ‘반(反)명제’로 설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고조선의 ‘수두[神壇] 선가(仙家)’의 ‘도’는 대립되는 유가와 도가의 종합명제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하기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 본토에 비해 동북아시아 문화권이 시기적으로 앞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물론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우선, 하기락이 의거하고 있는 주요 전적들이 견강부회의 성격이 짙으며, 또한 『고기(古記): 삼성기(三聖記)』,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천부경(天符經)』 등은 그 진위(眞僞)부터 문제가 되는 경전들로서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러나 종래 학자들에 의해 ‘미분화’ 혹은 ‘미성숙’한 어설픈 사상으로 평가받던 선가사상(仙家思想)의 ‘복합적’ 측면을 오히려 유가와 도가 사상의 근원 사상으로 이해하고, 선가의 ‘도’ 개념이 유가와 도가의 ‘도’ 개념을 종합한 것이라 이해한 것은 분명 창의적인 견해이다. 어느 민족에게나 아직 사상과 문화가 제대로 발전하기 이전의 미성숙한 모태사상이 있을 것이며, 이 점은 중국민족과 그 사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기락은 바로 이러한 논리적 공백을 이용하였다. 비록 구체적인 전거와 객관적인 사실을 확보하는 데는 문제가 있지만,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는 견해이다.
이 밖에도 하기락은 몇 편의 유가철학 관련 논문을 저술하였다. 「이기설(理氣說)의 존재론적 구조」(『석당논총』 10집, 1985)는 이기론(理氣論)이라는 전통 동양철학의 주제를 서양철학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풀이한 논문이다. 하기락은 이 논문에서 우선 이(理)와 기(氣) 개념의 연원을 살피며, ‘이’ 개념의 성립과정을 천착하였다. 그리고 주리설과 주기설 및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분석하였다. 논지의 전개과정에서 서경덕과 이이 등 한국성리학자들의 이론을 주요하게 취급하고 있으며, 주로 주희(朱熹) 이론과의 대척점에서 사상적 의의를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주리론보다는 주기론의 서술에 보다 강조점을 두고 있다.
3. 맺음말
하기락의 한국철학 연구는 ‘주체의식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전통철학사에서 주기론적 흐름을 중시했으며, 이황에 비해 이이를 상대적으로 존중했고, 그런 만큼 우리 민족의 상고시대 역사와 사상을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한국철학사에서 모든 이질적 대립을 뛰어넘는 ‘화쟁의 정신’을 찾고자 하였다.
하기락이 한국철학 연구를 통해 그토록 열망했던 두 가지 과제, 즉 화쟁의 정신과 주체의식의 확립은 대립되는 것 같으면서도 동일한 측면을 지닌다. 화쟁의 정신이 다양한 사상들 가운데서 동질성을 찾아내는 ‘수렴의 논리’인 반면, 주체성의 확립은 본래의 자기와 타자와의 이질성을 식별해 내는 ‘분석의 논리’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양자가 대립되는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한국철학(사상)의 가장 특징적인 주체성을 바로 화쟁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고, 또한 이러한 화쟁의 정신을 제대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한국철학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첩경임을 인식하게 될 때 결국 두 가지 과제가 하나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기락은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역설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관심은 한국철학 연구에 있어서도 ‘주체의식의 확립’이라는 관점을 강조하였다. 민족 역사의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실천성과 자주 의식을 담지한 사상가들을 주목하였다. 그는 자기와 타자 간의 이질성을 식별하는 ‘분석의 논리’에 철저하였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뛰어넘어 양자 간의 공통된 동질성을 찾아내는 수렴의 논리인 화쟁의 정신을 한국철학사상의 가장 특징적인 주체성으로 확인하였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하기락의 삶과 학문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글은 「하기락의 한국철학연구와 그 의의」를 수정?요약한 것이다. 논문은 『철학연구』 64집 특집호(대한철학회, 1998, pp. 59~81)에 처음 게재되었으며, 『허유 하기락의 삶과 사상 그리고 기억들』(이재성 편, 다르샤나, 2023, pp.351~372)에 다시 수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