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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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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산의 시와 아나키즘 문학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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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동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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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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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화산의 생애와 초기작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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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나키스트로의 방향 전환과 아나키즘 문학론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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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화산의 시적 지향과 아나키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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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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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한국 아나키즘 문학을 논할 때 가장 앞서 언급되는 인물이 김화산이다. 김화산의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바 없고, 따라서 쉽게 접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아나키즘 문학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런 만큼 김화산 문학과 연관된 아나키즘 연구는 김화산의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아나키즘에 대한 김화산의 입장과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마르크시즘 문학 진영과의 논쟁을 중심으로 김화산의 문학적 입장이 논의되었다. 따라서 김화산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분석한 논문은 전무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김화산의 아나키즘 문학인으로서의 입장을 근거로 하여 그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아나키즘 문학으로서의 지향점과 가치를 밝히고자 한다.
김화산의 아나키즘 문학론을 다룬 논문 역시 많지 않다. 김화산을 집중적으로 다룬 논문으로는 유문선의 「총독부 사법 관료의 아나키즘 문학론: 金華山의 삶과 문학 활동」, 김경복의 「김화산 문학의 아나키즘론에 대한 小考」등이 있다. 이외에 아나키즘 문학 연구의 한 부분으로 다룬 홍래성의 「권구현·김화산의 아나키스트로서의 정체성 연구」, 손유경의 「사회주의 문예 운동과 인간 본성의 문제」등이 있다. 전반적으로 한국 아나키즘 문학 연구가 부족한 상황인 가운데 김화산에 대한 논의는 특히 미미하다.
유문선은 김화산의 생애 전반을 탐문하며 불분명한 삶의 궤적을 밝히고 있다. 김화산이 이명인 방준경의 실체와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김화산 문학과 문학론을 파악하는 데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법조인과 문인으로서의 삶을 조명하고 다다이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의 변모 과정과 이유도 제시한다. 그동안 김화산의 생애는 불명확한 부분이 많았다. 또한 여러 이름을 사용한 탓에 그의 작품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김화산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유문선의 논문은 그러한 점을 명확하게 밝혀 연구의 근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김경복의 논문은 김화산을 중심으로 1920년대 아나키즘 문학 전반을 파악했다. 또한 다다이즘 문학과 아나키즘 문학의 관계를 밝히고 있으며 볼세비키스트와 벌인 아나키즘 예술 논쟁에 대한 논의도 전개했다. 그는 아나키즘 문학의 예술성에 대한 인식을 언급하고 민중 의식의 실천과 한계를 분석했다. 김경복은 김화산 문학론에 대한 내용 이외에 작품 분석도 시도했다. 김화산 작품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의미 있는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김화산의 작품 전반을 포괄적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2. 김화산의 생애와 초기작의 문제
김화산(金華山)은 190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방준경(方俊卿)이며 아호인 방원룡(方元龍)을 비롯하여 방따따, 방포영(方抱影), 춘범(春帆)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며 문학 활동을 했다. 1921년 경성보통학교와 1924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김화산은 경성고보 재학 시절 박팔양, 정지용 등과 ‘요람’ 동인을 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김화산이 지면에 발표한 첫 작품은 1921년 동아일보 독자문단에 게재된 「명상(瞑想)의 나라로」로 알려졌으나 홍래성에 의하면 이보다 앞서 발표한 작품이 두 편 존재한다. 김화산이 발표한 최초의 작품은 “1920년 9월 5일자 <조선일보> 4면에 실린 시 「보느냐! 듯느냐!」”이며, 이후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직전인 1921년 2월에 발표한 「가을의 잔듸」다.
「가을의 잔듸」는 “『學生界』 6호의 현상문예란에 게재된”작품이다. 하지만 「명상(瞑想)의 나라로」는 물론이고 「보느냐! 듯느냐!」와 「가을의 잔듸」 역시 작품의 수준이 높지 않다. 두 편 모두 10대 중반에 창작된 작품으로 습작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또한 제대로 된 등단 경로라고 보기도 애매하다. 「명상(瞑想)의 나라로」의 경우에 ‘독자문단’란에 게재된 것이기 때문에 기성 문인의 작품이라고 보기 애매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잔듸」 역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상문예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보느냐! 듯느냐!」의 수록 경위는 불확실하지만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발표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경로로 발표한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이러한 작품 활동을 단순히 습작기 활동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문단 활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
김화산은 1921년 3월 17일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한 뒤 같은 해 4월 경성전수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로 진학했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중 박팔양과 교유했으며 ‘요람(搖籃)’ 동인에 가입하는 등 문학 활동을 본격화했다. 1924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후 법원 서기로 근무 중 1930년 사법관후보자고시에 합격하여 법관이 되었다. 1927년 김기진과 박영희가 내용-형식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계급예술론의 신전개」를 발표해 논쟁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카프(KAPF)가 결성될 때 동맹원이었으나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했다. 문학에 있어서도 아나키즘 문학론을 전개하며 마르크시즘 문학론을 비판했다. 카프(KAPF)의 강경론자인 한설야, 윤기정, 임화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뒤 김화산을 비롯한 아나키즘 분파는 카프에서 제명당했다.
1933년 판사로 근무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가던 김화산은 1934년 『정음(正音)』 3호에 「조선어(朝鮮語) 철자법(綴字法)에 대(對)한 촌감(寸感)」을 마지막으로 문학 활동을 중단한다. 그러나 1934년의 발표작이 「조선어(朝鮮語) 철자법(綴字法)에 대(對)한 촌감(寸感)」 1편에 그치는 데다가, 이 글이 전문적인 작품 활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김화산의 작품 활동은 사실상 1933년에 그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시, 소설, 평론 등과 같은 글이 집중적으로 발표된 마지막 시기는 1933년이다.
이후 김화산은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1933년 8월 조선총독부 공주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으며, 1934년 8월에는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1935년 8월에는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 판사로 임명되어 1940년 5월까지 있었다. 이후 대전지방법원, 상주지방법원, 통영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로 근무했다. 해방 이후인 1947년에는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1959년 3월에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60년 1월부터 8월까지 광주고등법원장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퇴직하여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64년 3월에는 다시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근무하다 1966년 퇴직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사법 부문에 포함되었다. 김화산이 구체적으로 어떤 친일 행적을 했는지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일제 조선총독부 판사로 근무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부역 행위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김화산은 문학 활동을 하던 당시 『별건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본명을 밝히지 말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김화산은 “독자들이 선생의 본명을 알고 십허하는데 발표해도 좋을까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私信으로 알녀주는 것은 관게치 안이 하겟지만 誌上으로는 그만 두어 주십시요. 주위 사정에 거북한 일이 잇서서 아직은... ...”이라고 답한다.그의 사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러한 일이 세월의 흐름과 겹치며 법조인 방준경과 동일인인지 혼동을 준 것은 분명하다. 김화산이 1930년 사법관후보자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된 것과 연관이 된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실제로 당시 조선총독부 사법부에는 판사의 겸업 금지 조항이 있었으며 판사로서 의무를 지키지 않거나 위신을 추락하게 했을 때 징계를 하도록 했다.또한 김화산의 존재와 작품을 불확실하게 한 것은 그가 ‘김화산’이라는 이름 이외에 여러 이름을 번갈아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에 김화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동명이인이 있기에 혼란이 가중된 측면도 있다.
침묵(沈?)의 해(海)를 건너
은둔(隱遁)의 삼림(森林)을 통(通)하야
아! 모든 현실(現實)에 피곤(疲困)한 나의 영(靈)은
명상(冥想)의 구름을 타고
그 산(山)을 넘어 또 그 산(山)을 넘어 검풀은 뫼끗(山頂) 풀은 하날 꿈
의 나라로
나는 안위(安慰)의 피난처(避難處)를 어드랴고 정처(定處)업시 정처(定處)업시 방황(彷徨)하여라
…(중략)…
오! 고독(孤獨)의 쓸?한 바람이여!
오! 비애(悲哀)의 슯흔 눈물이여!
그대는 나로 하야금
차듸찬 월세계(月世界)에 헤매게 하리라
외로운 사막(沙漠)에 울게 하리라
오! 고독(孤獨)의 쓸?한 바람이
여!
오! 비애(悲哀)의 슯흔 눈물이여!
-「명상(瞑想)의 나라로」 부분.
김화산의 시에 대해 유문선은 “그의 시들이 갖는 시사적 의의와는 달리 작품 자체는 별도의 독립적인 논의를 하게 할 만한 분량과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평가한다. 김화산의 작품은 초기작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작품이 습작 수준에 머물고 있다. 「명상(瞑想)의 나라로」은 감정의 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념적 인식을 내세움으로써 작품 전반에 모호함이 나타난다. 1920년대 한국 문학 작품의 양상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습작 초기 흔하게 나타나는 창작의 오류가 그대로 드러난다. 문학 창작을 처음 시도하는 10대 중반 소년의 감상적 인식의 결과라고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다. 다만 이러한 작품이 김화산 문학 전반에 대한 평가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김화산은 정식 등단 절차를 밟거나 시집을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습작기 구분이 모호한 탓이다. 대부분의 작가가 등단 이후의 활동을 중심으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할 때 ‘독자문단’이나 학생 대상 ‘현상문예’ 작품을 김화산 문학의 시작으로 파악하여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김화산 문학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이후에 발표한 작품을 통해 포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3. 아나키스트로의 방향 전환과 아나키즘 문학론 논쟁
김화산은 아나키스트 작가이자 아나키즘 문학론을 전개한 이론가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여전히 한국문학사에서 낯선 존재다. 하지만 김화산은 아나키즘 문학인으로 1920~30년대 한국문학사에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창작 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창작자에 대한 정보가 불분명하여 정확한 편수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각각의 장르 모두 한 권 분량이 되지 않는다. 흔히 김화산을 아나키즘 문학인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화산의 경우에 카프(KAPF)의 동맹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다이스트로서 형식 실험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김화산의 작품은 아나키즘의 관점 뿐만 아니라 다다이즘 측면에서도 파악해야 한다.
A
길。
눈물에 저진 포석로(?石路)-서울의 마음
바람도 업시 나붓기는 점두(店頭)의 기(旗)?기(旗)?기(旗)
열병(熱病)에 걸닌 사람처럼 달음질 하는 차(車)?차(車)?차(車)?차(車)?차(車)
매연(煤煙)-하얀 스카아트
자욱한 연애(戀愛)의 분말(粉末)。
궁등이 큰 여자(女子)에게 ?녀 가는 ?적 말은 신사(紳士)。
사람?사람?사람?사람……………
오오 ?냄새 품어오는 사월(四月)낫의 서울은
정욕(情慾)에 몸달은 이십(二十)줄에든 사나희 로다。
B
푸른 나무닙과 붉은?도 업시 차저온 봄!
머리 길고, 검은 넥타이 한 청년(靑年)아
일초(一秒) 삼십억마력(三十億馬力)으로 광란(狂亂)에 질주(疾走)하는 두뇌(頭腦)와
주머니 속에 일전동화(一錢銅貨)를 가진 비애(悲哀)와
주림과
여자(女子)에 대(對)한 증오(憎惡)와
정거장적(停車場的) 잡다(雜多)한 사상(思想)을 가진 군중(群衆)을 보는가?
오오 나는 길을 걸으며
공중(空中)에 부동(浮動)하는 군중(群衆)의 질타(叱?)를 듯는다 (叱咤의 오기)
-김화산, 「사월도상소견(四月途上所見)」 부분.
「사월도상소견(四月途上所見)」를 통해 근대에 대한 김화산의 인식을 파악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함께 갑작스럽게 전개된 근대인만큼 그것에 대한 인식은 막연한 감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월도상소견(四月途上所見)」에 나타난 “열병”이나 “비애”의 감정은 구체적 인식이나 시적 대상으로 환원되지 못한 채 관념적 인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관념적 인식은 문학을 지나치게 감정적 차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흔히 나타난다. 이 시는 근대적 풍격과 감각이 작품 전반을 이끌고 있기는 하지만 당대의 풍경을 낭만적 태도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경우 비극 역시 삶의 구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물론 형식적인 측면의 새로움이나 근대적 정서 등은 다다이즘을 재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다이즘에 대한 시도는 새로움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지향 이상의 의미를 얻기 힘들다.
『카패?판다라이』
불
불?불
불
색채등(色彩燈)아래 움지기는 풍경화(風景畵)
파-란 페퍼-민트속 그려진 유상(幼想)을
쨔스땐쓰로 흐려바리는
루쥬 어엽분 입을 가진 웨이트레스.
이쪽 커-텐 밋헤는
빠ㄹ간 넥타이 머리긴 청년(靑年) 한놈
함부루 피아노의 키-를 두들기고,
저쪽 테-불에 선
술취(醉)한 XX톇X두사람
오늘도 끗업는 토론(討論)에 밤을 새이는구나.<125>
-김화산, 「1930년 쨔스풍영화(風映畵)의 파편(破片)과 젊은 시인」 부분.
김화산은 「1930년 쨔스풍영화(風映畵)의 파편(破片)과 젊은 시인」에서 근대 도시의 풍경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월도상소견(四月途上所見)」보다 근대의 풍경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시인이 바라보는 시적 대상 역시 개괄적 대상이 아닌 구체적 대상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근대에 대한 감상적 인식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작품 속 “카패”나 “색채등”, “페퍼-민트”, “짜스땐쓰”, “루쥬”, “웨이트레스”, “커-텐”, “피아노”, “넥타이” 등의 문물은 근대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만 작동할 뿐이다. 이러한 시적 대상은 시 전반을 이끌지 못한 채 작품의 미적 구조와 의미로 확장되지 못한다. 기존의 시적 정서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엿보이지만 작품의 외적 양상의 변화만 두드러질 뿐이다. 기존의 시적 존재로 인식한 자연의 반대편에 도시적 감각을 배치했지만 그것만으로 다다이즘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근대 초기의 과도기적 인식과 양상일테지만 그것이 다다이즘 문학 작품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1920~30년대 도시 정서를 빼어나게 재현한 작품이 다수 있다는 점에서 다다이즘 문학 작품의 표현 양상은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김화산은 다다이스트로서 문학론을 전개한지 불과 한 달만에 아나키즘 문학론을 발표하며 아나키즘 문학인으로 변모했다. 김화산에 대해 갖는 의구심 중 하나는 그가 다다이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다다이스트로서의 확고한 입장을 밝힌지 한 달여만에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의식을 내세운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아나키즘과 다다이즘은 주류 질서에 대한 거부와 저항 의지를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다다이즘 문학에 작동하는 거부와 저항의 양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김화산의 방향 전환은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다다이즘과 아나키즘 문학 사이의 간극은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만으로 채우기 힘든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다이즘에서 아나키즘 문학으로의 급격한 변화를 “한갓 신기한 왜래 사조에 대한 호기심”이나 “천박한 사상 선택”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평가는 김화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나키즘 문학 전반에 대해 한국문학사 전반의 평가이기도 했다. 1920~30년대 지식인과 문학인 사이에 아나키즘과 아나키즘 문학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었음을 감안할 때 인색한 평가다. 아나키즘 문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아나키즘 문학이 마르크시즘 문학과의 대결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문학사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결과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는 근대 초기 사상적, 정서적 측면에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다양한 이즘(ism)이 유입되었지만 사상적으로 확고한 논리를 획득하지 못한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아나키즘 문학인 역시 명확한 인식과 논리를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이 다다이즘이나 아나키즘 등 여러 지점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였다. 더구나 다다이즘과 아나키즘의 기존 질서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 둘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 초기에 다다이즘과 아나키즘 모두에 관심을 기울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다다이즘과 아나키즘의 서로 다른 개별적 특성에 주목하여 급격한 방향 전환을 했다기보다, 기존 질서에 대한 극복 의지의 방법론으로 다다이즘과 아나키즘에 주목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다다이즘에서 아나키즘으로의 급격한 방향 전환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나키즘 문학 진영은 마르크시즘 문학 진영과 논쟁을 벌이며 문학의 당파성과 예술성에 대한 입장 차이를 보인다. 김화산 역시 카프(KAPF) 결성 당시 동맹원으로 활동했으나 마르크시즘 문학인들과 문학에 대한 입장 차이를 보임으로써 논쟁을 벌였다. 김화산은 프로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라는 박영희의 입장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윤기정, 조중곤, 한설야, 임화 등이 김화산을 비판하는 등 논쟁이 이어진다. 마르크시즘 문학 진영이 문학의 당파성을 강조한 데 반해 김화산을 비롯한 아나키즘 문학 진영은 문학의 예술성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김화산이 마르크시즘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김화산은 마르크시즘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면서도 문학 작품이 예술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은 영원불멸”하다고 말하며 “아무리 무산계급예술이라 할지라도 이 본질적 요소는 무시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학의 예술성에 대한 김화산의 태도는 예술지상주의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그가 문학의 당파성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마르크시즘 자체에 대한 반감이 아니다. 김화산은 마르크시즘을 내세울 때 당파성을 지나치게 앞세우는 것에 부정적이었을 뿐이다. 문학이 어떤 이즘(ism)을 수용하든 예술성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 김화산은 카프(KAPF)로부터 제명 당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그가 문학의 사회성이나 현실 인식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김화산은 예술지상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그는 문학이 담고 있는 이즘(ism)에도 불구하고 예술성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김화산의 조선총독부 판사 근무 이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단순히 직업인으로서 판사라고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문학인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와 판사로 근무하던 때가 비교적 분명하게 나뉘기는 한다. 1933년을 과도기로 하여 문학인에서 판사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1934년 『정음(正音)』 3호에 「조선어(朝鮮語) 철자법(綴字法)에 대(對)한 촌감(寸感)」을 마지막으로 문학인 활동을 완전히 접었음을 감안하면 문학인 김화산과 법조인 방준경으로 나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의 동맹원이었고 아나키스트 문학인이었던 김화산의 이질적인 면모는 납득하기 어렵다. 생활인 방준경의 삶을 방기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김화산과 방준경의 간극은 너무 크다.
4. 김화산의 시적 지향과 아나키즘
아나키즘 문학론을 통해 김화산은 문학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이때 예술성은 형식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입장이 아니다. 그에게 예술성은 사회성, 정치성이 강조된 작품도 갖춰야 하는 문학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김화산에게 문학 작품은 어떤 경우라도 미적 완결성을 갖춘 ‘작품’으로 존재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화산은 예술지상주의자는 아니었다. 아나키스트로서 그는 비극적 현실 인식을 했으며 그러한 시대상을 작품에 드러내고자 했다. 물론 초기작의 경우에 낭만적 경향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나키즘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한 이후에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다만 이 시기에 다다이즘의 특성을 지닌 작품이 혼재되어 발표되기는 한다. 하지만 다다이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의 변모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고 김화산의 창작 기간이 길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두 양상이 비슷한 시기에 혼재되어 나타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들의 노래는 아모도 읽지 안는다.
우리들의 노래는 아모도 을푸지 안는다.
오오 우리들의 형제(兄弟)!
호미와?삽과?마치로써 일생(一生)을 마치는 우리들의 형제(兄弟)!
피와 땀을 흘니면서도 일전(一錢)의 부(富)와 일분(一分)의 형락(亨樂)(향략의 오기. 필자) 시간(時間)을 가지지 못한 형제(兄弟)!
그네는 한 사람도 우리들의 詩를 읽지 안는다.
우리들의 노래는 무슨 빗치 잇는가
우리들의 노래는 무슨 힘이 잇는가
우리들의 노래는 무슨 뜻이 잇는가
나는 활자(活字)로 그려진 우리들의 환상(幻想)을 본다.
나는 무의미(無意味)한 문자(文字)의 나열(羅列)을 본다.
오오 몃 사람 만이, 보는 도취(陶醉)!
몃 사람의 두뇌(頭腦)에 비약(飛躍)하는 명상(暝想)!
그것이 우리들 이외(以外)에 누구의게 무엇을 주는가.
나는 몰락(沒落)하는 인테리의 검은 거림자를 내 자신(自身) 속에 발견한다.
오오 우리들의 노래!
그것은 명일(明日)의 의사와는 무관계(無關係)다.
짓밟어라
불살어라
우리들의 시(詩)는 무의미(無意味)다.
무의미(無意味)다!
-김화산, 「우리들의 노래」 전문.
「우리들의 노래」는 김화산의 작품 가운데 아나키즘 문학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우리”라는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아나키즘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우리들”은 억압받는 이들을 상정하며 세상은 이들의 존재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들의 삶은 호미와 삽과 망치로 상징화된 현실의 고통을 담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계급적 고통을 제시하며 연대와 평등을 작품화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우리”와 “우리들의 노래”는 아나키스트로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인의 의지이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시적 특징이 아나키즘 문학 이외의 작품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나키즘이 인간 보편의 정서와 현실 인식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이 아나키즘에 대한 의지와 문학론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노래」의 “우리”는 아나키즘에 대한 시인의 의지라고 보아야 타당하다. 또한 “몰락(沒落)하는 인테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시 전반에 “우리”의 반대편에 있는,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을 상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아나키즘적 인식을 파악할 수 있다. 마르크시즘 문학에서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실현하고자 하기보다 “우리”라는 연대를 강조한 것은 아나키즘적 세계관을 드러낸 것이다.
복순(福順)아! 너는 참새와 가치 가볍고 잔소리 만흔 계집아희다.
언제인가 너는 내가 귀공자(貴公子)와 가치 아름답고 고상(高尙)한 정서(情緖)가 업다고 조롱(嘲弄)하엿지.
나는 그 소리가 슯허서 밤새도록 울엇다. 울엇다.
그런데, 그 후 몃 해를 지내서 몃 살을 더 먹은 복순(福順)아!
너는 지금 내가 얼골이 희고 팔이 가느다고 조롱(嘲弄)하는구나.
아아 너는 참새와 가치 가볍고 잔소리 만흔 게집아희다.
나는 또 다시 네 소리가 슯허서 슯허서 밤새도록 울엇다. 울엇다.
내 한아버지와 아버지는 해ㅅ볏에 검은 얼골로 땅을 파다가 도라가섯것만
나는 엇지하야 흙 냄새 나지 안는 서울 저자에 창백(蒼白)한 얼골을 파뭇고 잇나.
그러나 복순(福順)아 실망(失望) 마라. 나의 마음은 무거웁다. 납덩어리 갓다.
허리에 조고만 벤또를 차고 매일(每日) 영혼(靈魂)을 (방매)放賣하는 시장(市場)으로 도라단이는 사이에
나는 명일(明日)의 의사(意思)와 우리가 지금 엇지하야 가난한가를 아럿다.
그리하야 나는 너의 옵바의 동모가 되엿다. 보아라. 너의 옵바는 공장(工場)에서 단련(鍛鍊)한 굵은 팔로써 나의 손을 힘것 쥐지 안느냐. 아아 나의 마음은 불과 가치 탄다.
나는 우름을 끄치고 성난 사자와 가치 뛴다.
미처서 다름질 치는 기관차(機關車)처럼
폭발탄(爆發彈)처럼
너의 옵바와 그 동모들노 더부러 희망(希望)에 찬 명일(明日)의 길로 돌진(突進)하련다.
아아 그러면 복순(福順)아! 참새와 가치 가볍고 잔소리 만흔 너는 또 무엇이라고 나를 조롱(嘲弄)하려느냐.
-김화산, 「복순(福順)이」 전문.
「복순(福順)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적 화자가 복순이는 물론이고 복순이 오빠와도 수평적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식인으로 추정되는 화자는 공장 노동자인 복순이의 오빠와 동무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복순(福順)이」 전반을 지배하는 현실 인식은 평등과 연대이다. 이 작품 역시 싸워 무너뜨려야 하는 적으로서의 계급은 등장하지 않는다. 김화산은 고통 속 이들이 도달하고 싶은 세계를 이야기하면서도 그곳에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적’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가 싸우고 변화시키고 싶은 것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 그 자체다. 김화산의 작품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나키즘적 현실 인식을 구체화한다. 그리고 이렇게 발화하는 방식은 마르크시즘 문학과 차별화되며 아나키즘 문학의 고유한 특징을 작품 전반에 드러낸다.
열풍(烈風).........
눈............
매운바람아. 밋친 것처럼 성난 것처럼 이 몸 우에, 이 도시 우에, 이 땅 우에 맹렬히 불어라.
눈. 하이얀 눈. 이 몸 우에, 이 도시 우에, 이 땅 우에 고요히 고요히 오너라.
네 얼골은 혹독(酷毒)한 추위에 새ㅅ발안 복송아처럼 붉다.
네 손은 어름과 가티 차다. 그러나 네 눈마은 까아만 진주알처럼 빗나는구나.
오오 너는 눈과 가티 희다.
너는 바람과 가티 매웁다.
너의 머리터럭은 훗터진 실마리와 가티 나붓긴다.
너의 뺨우흐로, 억개 우호로 하이얀 눈이 내린다.
너는 우리들의 동지들을 생각하고 우는구나.
얇은 이불과, 맨발로, 뼛속까지 숨여드는 추위에 잠을 일우지 못하고 떠는 동지들을!
오오 얼마나 만흔 동지들이 이 추위에 희생이 되려는가.
얼마나 만흔 동지들이 이 추위에 폐인이 되려는가.
그러나 나의 사람아. 우름을 끄치여라.
이 모진 바람과 모라치는 눈은 우리들의 잠든 영혼을 깨운다.
우리들의 피곤한 혈관에 힘을 준다.
우리들의 선진자는 이 폭풍과 혹한을 싸와이기고 나아갓다.
그들의 철강과 가튼 의사(意思). 뭉치는 힘. 불과 가튼 정열!
오오 나의 사람아.
그들의 걸어나아간 발자최로!
그들의 흔드는 기ㅅ발 아래로!
용감한 출발이 잇서야한다.
지금은 겨울날. 매운 바람이 밋친 것과 가티 소리 질으는구나.
오오 매운 사람아. 힘껏 불어라. 이 몸 우에, 이 도시 우에, 맹렬히 불어라.
눈. 하이얀 눈. 눈. 이 몸 우에, 이 도시 우에, 이 땅 우에 고용히 고요히 오너라.
오오 돌진(突進)!
돌진(突進)!
바람과 눈가온대슨 네얼골은 몹시도 어엽브다.
-김화산, 「출발(出發)」 전문.
「출발(出發)」은 당대의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의 비극적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적 자아의 의지를 제시한다. 이러한 비극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시 전반을 지배한다. “용감한 출발이 잇서야 한다”거나 “돌진(突進)”을 외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태도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시적 화자는 “너는 우리들의 동지들을 생각하며 우는구나”라며 수평으로서의 연대도 강조한다. 이 작품 역시 “겨울날”과 같은 고통 속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출하지만 “우리” 모두 그곳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에 이르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김화산이 지향하는 세계는 우리 삶의 원형 그 자체이며 그것은 순정 아나키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김화산의 작품에 나타난 투쟁 의지는 순정 아나키를 향해 나아가고 싶은 시인의 절박함이다.
물론 「우리들의 노래」, 「복순(福順)이」, 「출발(出發)」 등에 나타난 현실 인식이 아나키즘 문학만의 특성인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 작품에 나타난 현실 인식이 마르크시즘 문학 작품 등과 어떤 변별점을 갖는 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 역시 나올 수 있다. 또한 김화산이 아나키즘 문학 작품이 갖춰야 할 요건으로 꼽고 있는 예술성이 아나키즘 문학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성, 정치성 등 현실에 대한 투쟁 의지 역시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 제기는 그동안 아나키즘 문학을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한국문학사에서 항상 있던 것들이다. 아나키즘 문학에 대한 판단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시인의 의지부터 작품의 내용까지 여러 층위를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바가 인간 본성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아나키즘이 아닌 보편적 인식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많다. 아나키즘은 ‘무강권주의’이자 ‘만민평등주의’다 그리고 가장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한다. 아나키즘과 아나키즘 문학에 대한 이해가 선결될 때 비로소 아나키즘 문학은 우리 앞에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5. 결론
김화산은 아나키즘 문학론을 적극적으로 개진한 흔치 않은 작가다. 근대 초기 아나키즘 문학을 지향한 작가가 적지 않았지만 아나키즘 문학은 이론적 토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마르크시즘 문학 진영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화산의 존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시, 소설, 평론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아나키즘 문학론을 전개하려 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김화산의 문학 활동은 아나키즘 문학 이론을 전개하고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는 마르크시즘 문학 진영과 논쟁을 벌이며 아나키즘 문학이 갖는 의미를 체계화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아나키즘 문학론은 치밀한 논리 속에 전개되지 못했다. 아나키즘이 지니는 기본적인 특성을 개괄적으로 주장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르크시즘 문학 진영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다만 당시 아나키즘 문학인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아나키즘과 아나키즘 문학론을 전개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아나키즘과 아나키즘 문학은 많은 지식인과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김화산의 이러한 노력은 당대 한국문학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아나키즘 문학은 여러 면에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의지와 예술성에 대한 지향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사상적 측면에서 미흡한 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 문학의 의의와 가치를 체계적으로 내세우지 못했으며 작품의 수준 또한 다른 문학 진영을 압도한다고 볼 수도 없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아나키즘 문학이 한국문학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탓도 크다. 아나키즘 문학은 주류 질서로부터 밀려난 탓에 실제 지니는 가치나 성취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나키즘 문학 진영의 작가들이 민족 문학 진영이나 마르크시즘 문학 진영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아나키즘 문학이 축소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김화산에 대한 연구 역시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김화산의 작품과 문학론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김화산을 파악하는 것이 곧 한국 아나키즘 문학사와 문학론을 이해하는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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