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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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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규·이정규 형제의 아나키즘 수용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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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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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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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역적·계보적 배경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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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 망명과 아나키즘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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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재중아나키즘 독립운동과 이정규의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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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재만아나키즘 활동과 이을규의 국내 송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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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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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晦觀 李乙圭(1894~1972)와 又觀 李丁圭(1897~1984)는 한국 아나키즘 독립운동가를 대표할 수 있는 형제다. 특히 이을규는 大同團에 가입해 활동한 인물로 유명하며, 두 형제 모두 義烈團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사의 대표적 항일투쟁단체에 몸담은 인물이었다.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추구함과 더불어 독립 이후의 신사회를 적극적으로 구상한 혁명가로서 독립운동사에 의의를 남겼다.
그들은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실행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고, 그 과정에서 아나키즘(Anarchism, 無强權主義·無支配主義)을 수용한 지점에서 일대 전환을 맞았다. 友堂 李會英과 柳子明, 白貞基, 鄭華岩과 함께 최초의 재중 한인아나키즘 단체인 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이하 무련)을 창립해 조국이 처한 식민지 상황을 인식했고 일제로부터 조선 민중의 완전한 독립, 자유와 평등의 탈환을 추구했다. 이후 형제는 중국과 일본, 대만 등지의 아나키즘 혁명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항일독립운동의 지평을 국제적인 연대로 확장했다. 지역적으로도 北京, 天津, 上海. 泉州 그리고 滿洲를 종횡무진했다. 이와 같은 활동을 인정받아 이을규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3년 대통령표창, 이후 1990년 애족장에 서훈 되었다.
이을규·이정규 형제의 연구 필요성으로는 다음의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그들의 독립운동은 어느 한 시기, 한 지역, 한 사건에만 관여한 데 그치지 않았다. 다방면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중요 독립운동가의 조명은 형제 개개인의 선양으로도 의의가 있지만, 그들의 지역적·계보적 배경 확인 및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연관된 사건 규명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독립운동사의 학술적 확장에 기여할 수 있다.
둘째, 재중국 독립운동가 및 아나키스트들의 국제 항일연대의 과정과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이을규 형제가 모두 주역으로 참여했던 천주민단운동과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활동이라는 현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국제적인 규모를 자랑한 반제국주의 항일연대의 실재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어 이해되는 한국독립운동사상사에서 이을규와 이정규의 활동상은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있어 아나키즘이 가졌던 위상을 실질적으로 드러내 준다. 북경대학에서 러시아 아나키스트 예로센코와의 교류를 통해 아나키즘을 직접 수용했던 형제는 행동뿐만이 아니라『是也金宗鎭傳』, 『又觀文存』과 같은 저술을 통해 아나키즘이 어떠한 사상이었는가를 바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의의를 바탕으로 한국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데 뚜렷한 기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럼에도 형제 중 이을규의 경우, 일찍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서훈 된 독립운동가지만 그를 단독으로 조명한 연구논문 및 학위논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정규에 대해서는 그의 활동을 다룬 논문이 확인되나,그 이후의 연구는 더 나오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미포상 상태다. 다만 이을규의 대표적 공적 중 하나인 대동단 사건을 다룬 논문으로 장석흥의 대동단 연구가 있으며, 형제의 아나키즘 수용 이후 활동과 관련해서 아나키즘 운동사 방면에서의 연구 성과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들 연구에서는 독립운동의 주동자로서 이을규의 비중이 일정하게 인정되고 있다.특히 『한국아나키즘운동사』에서 시작된 한국 아나키즘 독립운동사의 전반적인 연구사에서 이을규는 무련의 창립 맹원이자 천주민단으로 불리는 농촌자치자위운동에 참여한 국제적인 아나키즘 혁명가, 남경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김종진·김좌진과 함께 만주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한 주역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한편 아나키즘 독립운동을 견인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최근까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사의 축적은 사건과 단체 단위로 이해되었던 아나키즘 운동사를 인물 단위로 집중해 보는 동시에, 이전까지 간과되었던 각 인물의 세부적인 배경을 이해하여 각 인물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전체 역사상을 확장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회영, 류자명, 류기석, 원심창, 이규창, 이강훈, 정화암 등의 생애와 독립운동 연구가 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이을규와 이정규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다룬 연구논문의 필요성이 환기된다.
2. 지역적·계보적 배경과 성장
이을규는 본적은 忠淸北道 論山郡 豆磨面 立岩里 27番地로 기재되었으나, 실제 출생지는 京城府 會洞(현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으로 확인된다.원적은 京畿道 仁川府 長峯島였다. 그는 1894년 음력 2월 21일 진사 李鼎薰과 朴氏의 2남으로 태어났으며, 이정규는 1897년 음 10월 7일 장봉도에서 태어났다.이들의 가계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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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규 형제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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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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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한양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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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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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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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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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 이하유(이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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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이정훈은 서울 출신이었지만 장봉도로 이주해 평생을 살았고, 1901년의 대흉작 당시 기근에 시달리던 장봉도의 주민들을 사재로 구제 해주었던 유지로 경기 지역에서 명망을 얻은 인물이었다.큰형인 李甲圭는 형제의 독립운동에 동참하진 않았다고 하나 1920년 이을규 형제 및 정화암 등의 국내활동 중의 피신처 제공과 중국 망명 비용을 원조해준 인물이었다.그의 아들 李鍾鳳(이명 李何有)는 중국으로 건너가 南華韓人靑年聯盟의 맹원이자 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이로 보았을 때 이을규 형제의 가풍에는 기본적으로 愛民 의식이 있었으며 이것이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 광복을 위한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모색한 과정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을규와 이정규는 모두 仁川公立商業學校를 다녔고, 이을규는 1913년 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 5월 黃海道 海州 農工銀行 書記, 그 후 舊 義州 농공은행으로 이직하고 1916년 仁川信用組合 서기, 1917년 安東縣 安東銀行 서기로 재직했다. 그러다 그는 1919년 2월 돌연 사직했다.농공은행은 이미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을 했던 메가타(目賀田種太浪)가 재정·금융을 장악한 가운데 설립된 기관이었는데, 1918년 朝鮮殖産銀行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본격적으로 일제 수탈의 첨병이자 식민지 권력의 자본기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을규의 사직은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그 후 그는 독립운동가로서의 행보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와 관련된 일제 측 기록은 그가 “안동은행에서 사직한 후 오로지 독립운동에 종사하여 上海 및 해외의 不逞鮮人과 조선에 있는 不逞者 사이의 연락을 맡았다”고 기록해놓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곧 1919년 大同團事件 참여로 연결되었다. 그는 대동단에 가입한 뒤 1919년 11월 義親王 李堈의 망명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朝鮮民族大同團(이하 대동단)은 全協, 崔益煥 등이 1919년 3월에 설립한 단체였다. 전협과 최익환은 한때 一進會의 일원이었지만 서울에서 전개된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목도한 후 대동단의 결성을 구체화했으며, 1919년 8월 조직개편에 착수하여 獨立大同團으로서 그 성격을 확정했다.특히 전협은 일진회원이었던 자신의 친일 이력을 반성하며 대동단 결성에 앞장섰다고 하며,일본과의 血戰을 선언 하는 문서 배포도 계획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사회 유력층, 유림과 종교인, 상공인 청년까지 모두 망라하여 대상을 모집했다.
대동단은 전협의 주도하에 의친왕 이강을 上海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고자 했다. 의친왕이 상해로 도착하면 3·1운동에 이은 제2차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독립금 모집 및 독립운동의 촉진을 추진하려 한 것이다. 이을규는 이 일의 수행을 위해 鄭必成이 입단시킨 인물이었다.그는 안동경찰서에서 망명 과정에 필요한 여행 증명권을 얻어 동지들에게 교부했고,정필성과 함께 11월 10일 의친왕을 호위하여 水色을 출발해 중국 安東縣까지의 호송을 담당했다. 이미 10월 10일에는 대동단원이었던 남작 金嘉鎭이 임정에 망명하여 의친왕을 기다리던 상태였다. 의친왕의 망명이 성공하면 閔泳達, 安昌浩를 미국에 보내 高宗이 독살당했음을 증언할 것이라는 등의 일까지 준비할 만큼 대동단사건은 그 규모가 컸다.
그러나 의친왕의 망명은 平安北道警察部에서 파견한 警部 요네야마(米山)에게 그 과정이 발각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또한 대동단사건의 주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이을규는 안동현에서 도주했으나, 1920년 1월 체포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 처벌령 위반,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사기의 죄목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그는 이륭양행으로 피신한 뒤, 체포되기 전까지 姜泰東과 함께 임정에서 송달된 「적의 官吏인 동포에게」, 「남녀 학생에게」 등의 선전물 3,000여 매를 배포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이을규를 포함한 대동단원의 체포와 판결은 申圭植이 임시정부에 발행한 신문인 『震壇週報』에서도 바로 보도되었다.
이정규는 1914년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16년 일본 東京府 게이오(慶應)대학 經濟科에 입학했다. 그러나 1919년 3월 퇴학을 당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1919년 12월 27일, 東京 간다(神田) 오모테진보정(表神保町)에서 朝鮮留學生學友會가 개최되었을 때, 이정규 본인이 “朝鮮獨立을 기획하여 전해주었다.”고 하는 일제 측의 기록을 볼 수 있다.이정규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韓湖농공회사 공주지점에 취직했으나 일본인 주임과의 충돌 때문에 사직 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다닌 후 게이오대학 경제부에 입학하여 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서무부원으로 활동했고,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3·1 기미독립선언문을 일본 각계에 보내는 통고문을 韓基岳, 桂麟常, 安承漢과 인쇄해 배포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을규는 1921년 3월 23일 대동단사건에 대한 경성복심법원 控訴가 기각된 후,保釋으로 석방되었다.그 후 그는 바로 상해로의 망명을 감행했다.이 망명에는 마침 국내로 돌아온 동생 이정규, 그와 함께 독판부에서 추진한 만세운동 후 피신해 온 정화암, 그의 동지 이종락, 온양금융조합에서 복무 중 금융조합의 돈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사취해 온 진수린과 최익수 총 여섯 명이 동지가 되었다. 1921년 3월 중국 安東과 奉天을 거쳐 상해에 도착했다.이처럼 이을규·이정규 형제는 중국 망명에 앞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관된 독립운동 행보를 밟아갔다. 이후 그들의 독립운동은 이회영을 만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여러 국적의 동지들과 국제적 연대를 전개하면서 점차 확실한 방침을 구축해 가기 시작했다.
3. 중국 망명과 아나키즘의 수용
상해에 도착한 뒤 이을규 형제가 마주한 임시정부의 실상은 실망스러웠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독립론의 실패에 따른 독립운동 노선 갈등이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가 있었지만 태평양회의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국민대표회의는 연기 중이었고, 이런 중에도 임정 안팎에서는 이승만의 탄핵 문제와 임정개조 요구가 일어나고 있었다.동지 중 최익수와 진수린은 임정에 남기로 했지만, 이을규와 이정규, 정화암은 다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고자 했다.
우선 이들은 미국이나 러시아 유학을 시도했다. 특히 당시 러시아의 소비에트 정부는 ‘극동 피압박민족의 해방’이란 구호를 내세워 독립운동가들의 호응을 받고 있었다.여기에 치타(Чита) 遠東大學에서 공산당에 입당하면 입학과 학업 일체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은 러시아행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21년 10월 北京에서 이들과 합류하기로 한 류자명이 趙素昻을 통해 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간의 상쟁을 전하면서 세 사람은 공산당 입당과 유학을 파기했다.
이러한 방황 중에 형제가 만난 인물이 우당 이회영이었으며, 그의 집에 출입하면서 이을규 형제와 정화암은 북경에 거주했다. 류자명, 백정기도 이회영의 집을 드나들었으며, 이 외 丹齋 申采浩, 대만의 동지 范本梁 등과의 교류가 있었다. 두 형제 중 이정규는 이 시기(1921~1923)에 北京大學 경제학부 2학년에 편입해 이곳에서 중국인 아나키스트 李石曾, 吳稚暉 등과 魯迅, 러시아 시인 바실리 예로센코(Василий Яковлевич Ерошенко)를 통해 아나키즘을 접하기 시작했다.아나키즘의 수용은 이회영을 시작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정규와 이을규, 류자명, 백정기, 정화암의 사상적 전환이 일어났다.
이을규와 이정규의 아나키즘 수용은 그들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한 이유인 독립운동의 방책을 찾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선 아나키즘을 수용한 인물 중 원로이자 다른 다섯 인물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회영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사상을 전환하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다만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생각하고 실현하고 노력하는 나의 사고와 방책이 현대적인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중략)… (무정부주의가) 상통될 뿐”이었다고 밝혔다.이정규도 아나키즘을 접한 시작은 북경대학에서의 교류였지만 아나키즘을 그의 사상으로 받아들이게 된 과정은 위의 이회영과의 의논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회고했다.크로포트킨에서 예로센코, 다시 여기에서 이회영이 이해한 아나키즘을 수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아나키즘은 反民族主義的 성향을 보이는 전통적인 아나키즘과 달리 크로포트킨(Лётр Кропо?ткин) 아나키즘의 특징인 自由聯合主意에 따라 한국 민족주의 계열과의 합작과 중국·일본·대만의 동지들과 抗日이란 기치 아래의 국제연대를 꾀할 수 있었다. 또한 크로포트킨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 相互扶助論은 일제 측의 社會進化論에 대항하기 위한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논리가 되었다.
1924년 4월, 드디어 이회영·이을규·이정규·류자명·백정기·정화암 여섯 명을 맹원으로 한 최초의 재중국 한인 아나키즘 단체인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연맹, 일명 무련을 결성했다. 무련은 기관지 『正義公報』를 발행했다. 기관지 발행 자금은 전적으로 이회영의 부담으로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한 권도 전하지 않는 상태지만, 『정의공보』는 이회영의 편집 방침에 따라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주의 진영 내의 잘못된 생각을 비판하여 독립운동을 正道로 이끌어 가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볼셰비키 혁명 이론을 비판함으로서 공산주의와 대결”하며 興士團의 務實力行論 비판, 국민대표회의 비판, 관동대지진 이후의 일제 만행 비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의공보』의 발행은 이회영의 생활 형편이 악화되어 자금난으로 휴간할 때까지 石版 旬間으로 총 9호까지 발행되었다고 한다.
무련의 활동은 사실상 기관지를 통한 선전 활동, 친일분자들에 대한 응징 등이었다. 그나마도 내부의 재정난과 더불어, 義烈團의 金達河 암살 사건을 두고 일본 경찰이 그 배후를 아나키스트들로 간주하여 추적하면서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기존의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처럼 ‘단체의 결속’을 동력으로 활동하지 않고, 점조직 및 개인을 기준으로 활동 영역을 한정하려 하는 아나키즘의 성질도 당시 활동에 있어 한계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이을규 형제와 백정기는 1924년 9월, 정화암은 10월 상해로 가서 신변 보호 및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위한 개별적 투쟁을 전개했다.
이을규 형제는 상해로 피신한 이 시기를 전후해 의열단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상해영사관 보고서에 따르면 상해 프랑스 조계 내에서 체포해야 할 불령선인 목록에 이을규와 이정규 모두 ‘義烈團員’으로 확인되고 있다.이 보고서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1924년도 문서에도 김원봉이 이을규 형제가 북경에 있던 당시부터 친밀한 관계로 지내고자 힘썼다고 하는 내용이 확인되고 있는데,무련의 맹원 류자명도 의열단원이었던 만큼, 비록 의열단원으로서의 형제의 실제 활동은 도드라지지 않지만,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몸담고 연합할 수 있는 단체라면 조력하고자 했던 측면으로 보인다.
또한 정화암의 회고에서도 그들이 취업한 상해 철공장이 의열단과 관련된 곳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을규와 이정규, 백정기, 정화암이 취업한 철공장의 사장은 유태계 독일인 마첼(Machall) 혹은 헝가리의 마자르족 사람이 의열단 특히 김원봉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는 내용에서다.그는 무련 맹원들을 공장에서 폭탄 제조 기술까지 가르쳐주었다고 하는데, 『이종암전』에서 의열단의 폭탄 제조를 도운 “도이취” 사람 기술자를 말하는 내용에서 마첼의 존재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점에서 상해에서의 활동과 의열단과의 연관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1925~1926년은 무련에게 있어서 활동상 암흑기였다. 의열단원으로서 일제의 추적을 피해야 하는 동안 자금난과 동지와의 연락이 막힌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이을규와 이정규가 모두 아나키즘 연구에 본격적으로 집중한 때이기도 했다. 우선 이정규는 이회영의 지원 속에서 크로포트킨의 저서 『법률과 강권』, 『무정부주의의 도덕』과 바쿠닌(Михаил Бакунин),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 르클뤼(Paul Reclus)의 팜플랫을 10여 편을 번역했으며, 이을규 또한 연구에 동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아나키즘을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수용한 이을규 형제는 1924년 무련을 결성한 이후, 활동의 사상적 기반을 충실히 쌓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금난으로 어려운 시기에 개별의 신변을 지키기에 급급했지만, 이 시간을 거쳐 그들은 무련 결성 3년 후, 1927년의 이른바 泉州 民團과 1928년 무련을 개칭한 在中國朝鮮無政府共産主義者聯盟, 上海 南京路에서 결성된 국제연대인 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4. 재중아나키즘 독립운동과 이정규의 체포
1925년 孫文이 사망하고, 1927년 중국에서 성립된 蔣介石의 南京 國民政府는 北伐을 개시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을 붕괴시켰다. 한편, 국민정부 측은 중국 공산당에 대항하여 국민정부 내의 노동운동과 노동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國立上海勞動大學 설립을 구상했다. 이를 아나키즘 노동단체의 거점으로 삼고자 한 중국인 아나키스트 李石曾, 蔡元培, 吳稚暉 등은 노동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국제적 성격 속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로 이정규와 이을규, 일본의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이 주비위원을 맡았다.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국제적 연대의 실험장이자 교육을 통한 아나키즘 사회 건설을 추진한 면에서 의미가 있는 상해노동대학에 이을규와 이정규가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은 그들의 위상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유효하다. 특히 이정규는 현실적인 대안 추구로서 이 활동에 동의했다.
그러나 상해노동대학 설립운동은 국민정부와의 결탁이 논란이 되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1927년 6월, 중국 福建省 泉州 지역의 泉永二屬 民團編練處(이하 천주 민단)가 주도하는 농민운동으로 아나키스트들의 역량 집중이 기울어져 갔다. 당시 천주 지역이 남부지역의 크고 작은 군벌과 土匪들이 할거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를 주도한 중국인 아나키스트인 秦望山은 군벌, 공산주의자, 토비로부터 농촌을 자치적으로 방위하기 위해서 간부급 인재를 양성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을규와 이정규, 이와사 사쿠타로, 다른 중국인 아나키스트 吳克剛과 梁龍光 등을 설득해 천주 민단 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설득했고 형제는 논의 끝에 이를 수락하고 이 사업을 노동대학 일과 병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천주 민단에서 이을규와 이정규는 교관과 참모소장 및 각각 회계와 비서장을 맡았다.이정규는 그의 회고에서 천주 민단 운동에 가졌던 기대를 밝혔다. 그는 1921년 우크라이나 혁명가 네스톨 마흐노(Нестор Махно)가 조직한 지역공동체, 크로포트킨의 자유주의적 코뮌이 천주에서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천주 민단은 비적들의 공격과 지역 군벌의 방해, 진망산의 건강 악화 등으로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 중에 천주 민단의 일원이었던 의열단원 李箕煥과 흥사단원 李剛 등 한인 4명이 일본 경찰에 불법 납치된 사건인 廈門事件은 민단 활동에 전환을 맞았다. 이 사건으로 천주 민단이 복건성 각지의 반일운동에 도화선을 그었기 때문이었다. 천주 민단은 廈門反日會를 세워 “이기환 동지를 석방하라!”, “일본 경찰 철수!”,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의 표어를 걸며 반일 시위를 주최했다.여기에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은 민단 단원 40여 명을 이끌고 대만에서 천주로 온 소형 일본 선박을 습격해 8명의 선원을 구금 후, 선박의 일본 국기를 선원들이 직접 찢게 하고 일본영사관이 체포한 한인과의 교환을 요구했다고 한다.비록 민단은 얼마 뒤 해산되고 말았지만, 하문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배일운동 분위기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복건성 각지와 廣東에서의 日貨排斥運動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천주 민단 해산 이후인 1928년 5월 이을규 형제는 정화암과 함께 상해로 돌아왔고 그간의 아나키즘 연구와 현실 경험을 토대로 다시 아나키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무련 활동을 재개했다. 우선 무련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이하 무공련)으로 개칭했고 크로포트킨의 저서 『빵의 탈환』에서 차용한 제목으로 기관지 『奪還』을 발행했다. 이곳의 맹원으로는 기존의 무련 맹원과 천주 민단에서 함께 활동한 류기석이 함께했으며 安恭根이 무공의 근거지를 제공해 주었다.
일제 측 자료에서 확인되는 무공련의 조직 과정은 1928년 2월 상해 프랑스 조계 李梅路 華光病院에서 류기석·韓一元·尹浩然·안공근과 이을규 형제 등이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기관지 『탈환』을 발행, 배포해 온 것으로 조사되었다.그러나 『탈환』 창간 증간호에서는 3월부터 각 방면 대표자들이 서면을 주고받은 뒤 무공련의 선언 등을 고치고 議定했다고 발표했다.
무공련은 자유연합 원리를 기본으로 모든 조직을 운영하고, 모든 정치운동 반대, 운동은 직접 방법으로 하며 정치적 당파가 아닌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는 戰友的 관계를 지속·존중하고 국가 폐지, 私有財産 폐지, 종교 폐지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무련을 조직했을 당시보다 발전하고 구체화 된 독립운동 방략 제시와 신사회 건설의 구호가 들어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공련의 강령은 이을규와 이정규의 깊은 아나키즘 이해에서 나온 결과였다. 이들은 『탈환』의 주된 저자이기도 했다. 우선 이을규는 『탈환』 창간 증간호에서 크로포트킨의 저술인 「靑年에게 訴함」을 번역·해제했다. 1881년에 발표된 이 글은 크로포트킨의 저술 중 가장 널리 읽힌 글로, ‘청년’들에게 그들이 배운 과학과 교육, 그를 토대로 얻은 직업과 기술이 개인이나 소수를 위한 掠奪 쾌락으로 전락하지 않고 사회와 인류를 解放하기 위함임을 의사, 학자 등의 예시를 들어 강조했다. 이을규는 이 글을 『탈환』 창간호에 실으면서 오역과 누락을 정정하는 한편, 결국 청년은 자신이 경험하는 삶 속에서 사회주의(=아나키즘)을 이해하고 ‘사회적 혁명’을 수행하는 직접적인 주체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이어서 이정규는 『탈환』 창간 증간호 첫 장에 그가 작성한 「탈환의 첫소리」를 통해 무공련의 基調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우리(조선)”이라는 『탈환』의 독자가 분명히 제시되었고, 이들을 “死活의 기로에 선 사람”들로 “死滅의 關頭”에 선 우리의 유일한 방법은 ‘되빼앗기’ 뿐임을 천명했다. 곧 ‘日本資本帝國主義’로부터 田土와 살 집과 자유를 빼앗겨 인간성 일체를 빼앗긴 조선이라는 철저한 현실 인식 속에서 全民衆의 단결을 토대로 한 자유와 의식주의 탈환, 民衆直接革命論을 외쳤다.
이 지점은 이정규가 저술한 「혁명원리와 탈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3·1운동을 대표 사례로 내세우면서 “모든 被奪 당한 大衆이 자유로, 자발적으로 단결하여 탈환을 시작하여야겠다. 이것을 크로포트킨 씨는 ?包略取라고 했다.”라고 하며 민중직접혁명론을 분명히 제시했다.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내린 이을규와 이정규의 결론이었다.
민중직접혁명론에 따라, 이을규 형제는 무공 활동과 더불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이하 동방무련)에 참여했다. 동방무련은 1928년 6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安南), 인도(印度), 필리핀(比律賓) 총 7개국의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단체였다.일찍이 류기석은 1926년에 식민지인 인도, 조선, 필리핀, 베트남, 대만 등의 피압박 민중이 협소한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연합대회를 가질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이 결과로 1928년 5월 혹은 6월에 상해 이매로 화광병원에서는 중국인과 한인, 일본인 등 5개국 대표가 모여 동방아나키스트대회를 열었다. 화광병원은 중국인 아나키스트 동지 鄧夢仙이 운영하는 병원이었고 동시에 국제 아나키스트들의 주된 회합 장소로 활용된 곳이었다.이 회의 참여한 한국인이 이을규, 이정규와 류자명 등이었다.특히 이정규는 이곳 화광의원에 주소지를 두고 중국에서 활동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후 1928년 6월 14일 上海 南京路의 요리점 新雅에서 이을규, 이정규, 류기석, 일본인 姜希同, 중국인 汪樹仁, 鄧夢仙, 吳克剛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자유연합의 조직원리 아래 동방무련을 결성했다. 여기에서 이정규는 書記部 委員을 맡았다. 그는 1928년 8월 20일, 기관지 『東方』에 「동방무정부주의자 제군에게 고한다」를 기고해 피압박민중의 국제연대로서 동지의 규합 단결을 도모하며 동방무련 활동에 앞장섰다.그리고 이회영의 논문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을 『동방』에 기고해 각국의 지원을 호소해 “한국의 독립운동은 곧 무정부주의운동”을 동방무련의 결의안으로 채택시켰다.
그러나 동생 이정규의 활동은 동방무련을 끝으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중단되었다. 1928년 10월 동방무련의 간부로서 활동 중이던 이정규가 上海 日本總領事館 경찰서에 검거되고,그 후 국내로 이송되었기 때문이다. 이정규의 체포는 곧 “상해에서 모종 사명을 띄고 조선으로” 들어오려다 부산에서 검거되었다는 보도로 발표되었고, 治安維持法 違反으로 京城地方法院에서의 공판을 받았다.그는 그동안의 독립운동 활동이 유죄가 되어 징역 4년 구형,최종 징역 3년을 받았다.이로써 중국 망명과 함께 전개했던 이을규와 이정규, 형제의 공동 항일독립투쟁은 중단되었다.
5. 재만아나키즘 활동과 이을규의 국내 송환
이정규가 체포된 뒤 이을규가 독립운동의 무대로 삼은 지역은 만주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金宗鎭을 만나 그와 함께 만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종진은 충청남도 홍성 3·1운동에 참여한 뒤 그의 친형 金淵鎭처럼 만주 奉天로 망명했다. 그리고 김연진의 권유로 북경을 갔고, 그곳에서 이회영을 만났다. 그는 항일무력투쟁의 중요성을 깨달아 이회영과 신규식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중국 雲南南陸軍講武學校 제16기생으로 입학했고 1923년 졸업했다. 그 후 1924년부터 上海 임시정부의 義警隊 활동을 한 인물인데,그는 이때 백정기, 이을규, 이정규를 만나며 아나키스트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그 후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이에 대한 자문을 청하고자 1927년 9월부터 한 달간 이회영과 대담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이후 그는 북만주 海琳으로 가 그의 族兄인 金佐鎭과 함께 운동을 전개하다 만주 내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고 아나키즘에 입각한 농촌자치 공동체의 건설과 운영, 무엇보다 제대로 된 항일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신민부의 대대적 개편을 위해 「만주를 근거로 한 한국민족해방운동의 기본계획안」을 건의했다.
김종진은 또한 아나키즘의 사상적 기반을 강화해 줄 아나키스트 초빙을 김좌진에게 요청했다. 이때 초빙된 인물이 이을규였다. 그는 1929년 1월 南京에서 길림을 거쳐 1929년 3월 김종진, 柳林과 함께 海琳에 도착했다.이을규는 김종진과 함께 1929년 7월 만주의 아나키즘 단체인 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이하 재만무련)을 조직했다. 재만무련은 “우리는 재만동포들의 抗日反共思想 계몽 및 생활개혁의 계몽에 헌신한다” 및 “우리는 항일민족전선에서 민족주의자들과는 友軍的인 협조와 協同作戰的 義務를 갖는다” 등의 當面綱領을 채택해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민족주의와 연합을 추진했다. 이러한 재만무련의 강령은 김좌진의 지지를 받았고, 그의 추진에 힘입어 신민부 군정파와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곧 재만무련과 新民府 軍政派의 연합으로 韓族總聯合會가 결성되었다. 한족총연합회의 위원장은 김좌진, 부위원장 權華山, 농무 및 조직선전위원 김종진, 교육위원으로 全明源이란 가명을 쓴 이을규 등이 주요 간부로 임명되었다.한족총연합회는 사실상 김좌진과 이을규, 김종진의 주도와 노력으로 운영되었다. 신민부 군정파는 여전히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공산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재만무련을 수용했고, 재만무련은 만주에서의 운동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신민부와의 연합을 꾀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민부 군정파는 김좌진의 지도력으로 재만무련과 연합한 상태라 한족총연합회의 결속은 언제든 와해 될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朴尙實에 의해 암살되면서 한족총연합회의 활동은 일시 중단되었다. 김좌진 암살사건에 대한 보복조치도 이루어지면서 공산주의자와의 대립이 격화되기도 했다. 김좌진의 사후 한족총연합회는 장례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 권화산을 위원장으로 추대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한족총연합회의 주축은 이을규와 김종진, 곧 재만무련 측이었다. 결국 한족총연합회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이을규와 김종진의 결단을 요구했다.
이는 北京에서 소집된 無政府主義者代表會議(이하 회의)를 통해 해소될 기회를 찾았다. 上海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申鉉商이 1930년 3월 忠南의 湖西銀行에서 58,000원이란 거금을 탈취해 북경으로 돌아오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집결했고, 이 자금의 사용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한 것이 이 회의였다. 여기에서 이을규와 김종진은 만주 대표로 참석하기로 하고 만주로의 아나키즘 독립운동가들의 역량 총결집을 주장했다.회의는 1930년 4월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이을규와 김종진은 탈취한 자금은 만주에서 추진되고 있는 민족해방운동기지 건설에 사용해야 한다고 적극 호소한 것이다. 이에 이회영이 두 사람을 지원할 뜻을 밝히자, 회의는 만장일치로 만주로의 자금과 인력의 총집결을 의결했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 호서은행 사건을 계속 추적했고, 天津 일본영사관이 “조선 강도단이 북경으로 잠입했다”고 속여가며 중국 경찰을 앞세운 결과로 天津 근거지를 급습, 회의의 참석자 신현상, 류기석, 崔錫榮, 김종진, 이을규 등을 체포했다. 당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류기석의 노력으로 대부분은 석방되었지만, 사건의 주동자인 신현상과 최석영은 국내로 송환되었고 자금 58,000원도 압수되고 말았다.
비록 자금은 뺏겼지만, 이을규와 김종진의 호소로 의결된 만주로의 독립운동 역량 결집은 유효한 상태였다. 각자의 방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후 만주로 모이기로 하며 이을규는 복건성의 중국 동지들에게 자금 조달을 도모하고자 했다.그러나 1930년 9월, 천진에서 상해를 거쳐 복건으로 가고자 했던 이을규는 영국 배 太古洋行 위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6, 7개월의 취조를 받은 후 公州로 압송되어, 1931년 3월 4일 公州地方法院 檢事局에 송치되었다.이을규가 이미 호서은행 사건 이후 충남경찰부 측의 수배를 받은 상태였기에 그의 동향을 감시한 일제 측이 그가 활동을 개시하자마자 바로 검거한 것이다.
검사국에 송치된 뒤에도 그는 5개월 여의 예심을 거쳐 유죄 판결을 받고 공판에 넘겨졌다.그가 일찍이 대동단사건의 주역으로 유죄를 받은 뒤 10여 년 만에 다시 잡혀 아나키즘 및 독립운동을 이유로 재판을 받는 만큼 사안이 중대했기에 그의 재판은 비공개로 치러졌다.결국 그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대동단사건으로 받았던 형량을 가산하여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한편, 이로부터 보름 후 그의 판결이 징역 2년으로 언도되었다는 보도가 나왔고, 그는 이 판결에 공소하지 않으면서 1933년 11월 공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했다.
먼저 국내로 송환된 뒤 1932년 복역을 마친 이정규와 1933년 출옥한 이을규는 다시 京城, 平壤, 光州 등지의 아나키스트들과 연락하여 전국적인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은 일명 第一樓事件에 연루되어 고초를 받았다. 이 사건은 일제 측의 ‘선제적 대응’으로 1934년 8월 鍾路 貫鐵洞에 있는 중국요리집 제일루에 모였던 이을규 형제 및 평양 관서흑우회 출신 독립운동가인 蔡殷國 이외 吳南基, 崔學柱 등을 잡아 취조, 송치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실은 치안유지법을 들어 국내의 아나키스트들을 잡아들이고자 한 일제 측의 날조로 벌어진 일이었다. 5명의 송치자 중 이을규는 최종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지만,이정규는 채은국과 함께 공판에 회부 되어 재판을 계속 받아야 했고 이들은 계속 주어진 혐의를 부인했다. 그럼에도 치안유지법 위반 죄목으로 이정규는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치러야 했다.이처럼 이을규와 이정규는 일제로부터 가장 주요한 독립운동가이자 국외에서의 활동을 결과로 옥고를 치르게 한 뒤에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要視察人으로 분류되었다. 출옥 후에도 이들의 동향은 그대로 대대적인 비밀결사 조직 사건으로 날조되었고, 형제의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사라진 1945년 8·15 광복부터 재개될 수 있었다.
6. 맺음말
이을규 형제는 애민의식이 바탕이 된 가풍에서 조국이 일제에 빼앗긴 뒤 도탄에 빠진 민족의 현실을 마주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은 경기지역의 독립운동가이다. 이들은 전민중적인 독립 의지가 폭발한 3·1운동의 한 과정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전개를 모색했다. 특히 대동단사건 이후 형제는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하고자 했고, 우당 이회영과 중국에서의 아나키스트들을 만나면서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략으로서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무련을 창립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서 이들의 정체성은 점차 성숙해져 기관지 『탈환』에서 그 사상과 강령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그 후 형제는 행동으로 독립운동이자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하며 동방무련, 재만무련 등에 주요 인사로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형제는 일제로부터 중국 내의 주요한 독립운동가로서 그 동향을 감시받았고 결국 일제의 체포 공작에 이을규 형제가 모두 검거되어 국내로 송환되었다.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제의 공작으로 인해 두 사람 모두 다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을규와 이정규는 1945년 9월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조직하고, 해방 후 아나키즘을 실현할 가장 최고의 형태이자 독립운동의 연장선으로서 민주주의 운동의 주역이 되어 그들의 생명력을 이어갔다. 이을규는 1946년 현재 효창공원에 모셔진 三義士 국민장 봉장위원회를 조직해 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 유해의 국내 송환을 주도했고, 이정규는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이후 국민문화연구소로 개칭)의 대표로서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이을규는 독립촉성국민회 중앙위원과 감찰위원을 역임하다 1954년 정화암 등과 민주사회당 창당에 참여하는 등 1972년 6월 11일 사망 시까지 민주 혁신 인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인물들의 조명은 그간 정리되지 않았던 아나키즘 독립운동 계열의 인물과 활동 규명에 의의와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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