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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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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을 둘러싼 장캉후(江亢虎)와 스푸(師復)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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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세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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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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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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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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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쟁의 배경
장캉후(江亢虎, 1883~1954)의 중국사회당이 1912년 말 제2차 연합대회에서 세계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아나키즘 등 세 개의 파벌로 분열되었을 때, 중국사회당 내 아나키스트 사간(沙?)은 스푸(師復, 1884~1915)에게 새롭게 만들어질 ‘무정부적’사회당에 가입할 것을 희망하였다. 이때 스푸은 완곡하게 사양하면서도 중국 사회주의 운동이 유아기이므로 사회주의자들이 어느 파벌에 속하든 자신은 그들을 변호할 것이며, 상대방을 비난하는 행동은 자제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던 스푸가 우즈후이(吳稚暉)가 정치에 접근하고 장지(張繼)가 의회에 진출하자 큰 충격을 받고 태도가 돌변하였다. 그는 장지계와 우즈후이에게 각각 편지를 보내 아나키스트가 현실 정치에 참가한 사실을 비판했으며, 이에 우즈후이가 장지를 변호하는 글을 발표하자 두 사람 사이에서 공개 편지의 형식을 빌어 소규모 논쟁이 일어났다.
제1세대 아나키스트 장지, 우즈후이, 리스청(李石曾)의 중화민국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원론에 충실하던 젊은 아나키스트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이들 혈기 왕성한 아나키스트로서는 도덕 계몽 운동이나 유학을 통한 인재 양성과 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아나키즘 혁명의 목표를 성취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였다. 스푸는 일찍이 “우리는 우즈후이 선생이 무정부주의의 선봉장으로 무정부주의를 선전하길 기다렸으나 평담을 일삼고 적극적인 고취를 하지 않으니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해 불만을 드러낸 바 있었다. 그는 진덕회(進德會)나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와 같은 소극적인 운동만으로는 아나키즘의 이상을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구(舊)신세기파 아나키스트와 논쟁하게 된 직접적인 도화선은 중국 최초의 아나키스트라고 평가받던 장지가 정계에 진출한 사건 때문이었다.
신해혁명 시기 누구보다 과격한 혁명파의 한 사람이었고, 민국 초 진덕회의 발기인이자 유법검학회를 지원하던 장지가 정치 참여한 배경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당시 그는 아나키즘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어서 중국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장지가 참의원에 참가해 의장으로 취임하자 이 사건은 곧바로 스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장지에게 보낸 글에서 “무정부주의는 정치라는 것이 사회에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기본 신념으로 한다. 선생(장계)은 과거에 무정부주의를 주장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홀연히 정계에 투신한 것은 과거의 사상을 버리고 변절한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하고, “선생(장지)은 진덕회의 발기인이자 병종(丙種)회원으로 관리나 의원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지금 중화민국 참의원 의장이 된 것은 결국 스스로 진덕회의 병종회원 자격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하면서 해명을 요구하였다.
스푸는 장지뿐만 아니라 우즈후이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장지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였다. 여기서 “장지가 참의원에 참가해 의장으로 취임한 것은 아나키즘의 뜻에 배치되며 진덕회의 규약에도 어긋난다.”라고 지적하면서, “장지 선생은 곧바로 참의원직에서 사퇴해야 하며…아나키스트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변절했으니 스스로 진덕회에서 물러날 것을 선언하고 동지들에게 사죄해야 한다.”라고 했다. 스푸는 우즈후이가 장지에게 참의원직을 사퇴할 것을 권고하도록 요청했다.이런 비판에 대해 장지를 대신해 우즈후이가 그를 옹호하고 나섬으로써 정치 참여를 둘러싼 아나키스트 진영 내부의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논쟁은 스푸의 질의 서신에 대한 우즈후이의 답장 형식으로 전개되었으며 『회명록(晦鳴錄)』에 일부 내용이 공개되었다.
우즈후이는 답장에서 “민국(民國)은 만청(晩淸) 정부와는 달리 공공의 것이다.”라는 전제 아래 난동과 파괴가 없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국가 체제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공화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좋은 제도이며 사회 발전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민국의 정치에는 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치나 정당이 미래에 자연스럽게 소멸되더라도 현재의 과도기적인 단계에서는 불가피하게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즈후이는 정당을 정부가 존재하는 시대의 필요악으로 해석해 아나키즘의 사상적 순수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정당 활동 허용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다.스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논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최근 반면적(半面的) 사회주의를 좋게 말하는 자는 왕왕 정치의 능력을 빌어 사회주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거짓 주장은 사회주의의 오점이기에 족하다. 장지와 우즈후이는 모두 중국에서 무정부주의를 일찍이 선전한 사람들로 수년간 『신세기(新世紀)』에서 전개한 논지는 격렬하였다. 그러나 장지는 이미 의원이 되고 우즈후이도 국민당의 주변을 맴돌며 정당에 날로 접근하고 있으니 사회당과 무정부당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무정부를 주장하는 자가 유정부의 전투를 주창하는 것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기자(스푸)는 무정부를 위해 비통을 금할 수 없다.”
스푸와 우즈후이의 논쟁에 대해 리스청은 일체 말이 없었으며,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리스청은 쑨원(孫文)의 프랑스 공사직 요청을 거절하고 이른바 관직에 나가지 않는 ‘불관주의(不官主義)’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래서인지 리스청과 스푸 사이에 오고간 서신은 주로 운동의 실천 방식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리스청은 스푸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노동조합을 성급하게 조직하기보다는 먼저 노동자에 대한 교육에 착수할 것을 충고하였다.스푸는 이에 대해 동의하면서 리스청을 선구적 아나키스트로 높이 평가하고 “선생(리스청)은 최근 과학 교육과 주의 선전을 하는 데 노력한다.”라고 소개했다.
구신세기파 아나키스트들이 정치 참여한 사실에 크게 실망한 스푸는 이전의 온건한 모습을 버리고 아나키즘 경향의 ‘신(新)’사회당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민성(民聲)』에는 사회당원의 질문과 스푸의 답변 형식으로 사회당원의 사회주의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는 기사가 있다. 예를 들어, 스푸와 타이쉬(太虛, 필명 악무(樂無)) 간의 사회주의 개념에 관한 편지 왕래를 들 수 있다. 타이쉬가 무정부주의를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라는 말로 바꾸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 스푸는 답장에서 사회당의 명칭 문제를 화제로 삼았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는 사회에 대한 학설이지 정치에 대한 학설은 아니라면서, 정치에 대한 학설은 바로 아나키즘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회당이란 명칭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나아가 지금의 사회당이 일반 정당과 유사한 정강과 조직을 가진 것은 잘못되었으며, 지도자 중심의 당 운영은 적절하지 않고, 사회당 강령의 세부적인 내용에 모순이 많다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타이쉬는 사회란 “가족 이상, 국가 이하”의 조직으로, 사회당원이 주장하는 무정부의 목표는 국가를 폐지하는 것이며, 공산의 목표는 가족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스푸는 즉각 반론을 폈는데, 인류 역사를 보면 사회가 성립한 이후에 가족과 국가가 출현하므로 가족, 사회, 국가란 세 가지 개념은 동등한 개념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스푸는 사회당인이 아나키즘을 전통사상과 결합하려는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당시 중국인 가운데 사회주의 이론에 가장 정통해 있던 스푸의 지적은 예리한 것이었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그가 중국사회당이나 사회당에 대해 비판할 때 기본적으로는 동류이파(同類異派)의 우호적인 관점을 취했으며, 일방적으로 매도한 것은 아니었다.
스푸가 구신세기파 아나키스트나 ‘신’사회당의 아나키스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아나키즘의 원칙을 충실히 고수해 중화민국 체제 자체를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정치와 권력을 거부하고 더욱 근본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위안스카이의 독재는 물론 중국사회당을 해산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장캉후의 사회주의도 비판하면서 논쟁이 일어났다.
2.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간격
1914년 4월 중국 아나키스트의 초상이라고 불리는 스푸(원명 劉師復)는 『민성(民聲)』 잡지에다 「손일선 강항호의 사회주의」이나 「무정부공산주의 석명(釋名)」 등과 같은 글을 실어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과 미국으로 피난을 간 장캉후의 사회주의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진행하였다.여기서 스푸는 오늘날 중국인의 생각 속에 쑨원과 장캉후가 사회주의를 주장한다고 하는데, 쑨씨와 장씨의 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했다. 두 사람이 말하는 것은 사회정책일 뿐이지 결코 사회주의라고 할 수 없다면서, 사람들이 이들을 사회주의자로 받드는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비판하였다.특히 장캉후의 중국사회당에서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데, 그것은 유럽의 사회민주당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스푸는 사회주의의 중국적 특성을 인정하지 않은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중국에서 체계적인 무정부공산주의(無政府共産主義) 이론 틀을 만든 인물로, 그 사상체계를 훗날 ‘스푸주의(師復主義)’라고 불렀다.
미국에 있던 장캉후는 여전히 중국 아나키즘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14년 초 스푸가 장캉후를 비판하자, 아나키즘을 둘러싸고 장캉후와 스푸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장캉후는 스푸의 비판에 답변하고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신대륙 통신편』에 「사회주의 학설」과 「중국무정부주의의 활동과 나 개인의 의견」 등과 같은 글을 써서 국내로 보내었다. 특히 장캉후는 「사회주의 학설」에서 공산주의, 집산주의의 정의와 양자 차이, 각파 사회주의의 분배 문제에 관한 주장,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근본 충돌 및 각파 사회주의가 채택한 수단과 방법 등을 소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전 주장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서도 대체로 큰 오류는 없으며 시종 일관되었다고 주장했다. 양자 간 주장을 분석해 보면, 논쟁점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나키즘에 대한 개념(번역어) 문제이다.스푸는 ‘Anarchism’이란 인민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고, 모든 통치를 받지 않으며, 우두머리와 권위를 가지는 기관을 없애자는 학설로, 중국어로는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장캉후가 선전하는 무가정(無家庭)과 무종교(無宗敎)도 포함될 수 있었다. 최근에 크로포트킨(P. Kropotkin)은 “무정부는 무강권(無强權)”이라고 정의한 바가 있다고도 했다.그는 아나키스트는 공산주의를 주장하는데, 여기서 공산주의가 경제와 관련 있는 것이라면, 아나키즘은 정치와 관련 있는 것이라며 서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무정부공산주의’는 최고 개념인데, “자본 제도의 폐지와 공산사회로의 개조를 주장하고, 정부 통치자를 없애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경제상 정치상의 절대 자유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1910년대 중국 사회에서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이 쓰던 용어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에 반대하며 생산기관(토지, 기계 등)과 그 생산물(의식, 주택 등)을 사회공유로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사회주의에는 여러 가지 유파가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공산사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집산사회주의이다. 공산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생산기관과 그 생산물을 모두 사회에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는데, 사람마다 그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 그 수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다. 집산사회주의란 생산기관을 공공에 속하도록 하고, 그 생산물을 사회 혹은 국가가 처리해 분배하도록 하는 것이다.”여기서 스푸는 무정부주의는 사회주의를 아우를 수 있지만, 사회주의는 무정부주의를 포함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아나키즘 이론에는 다른 사회주의 주장도 일부 혼재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장캉후에 따르면, 무정부주의는 anarchism으로 번역어로는 무치주의(無治主義)가 가장 적당하다고 했다. 고드윈, 슈티르너, 톨스토이, 터커 등과 같은 아나키스트는 개인과 개인 간의 사회관계에 주목해 친애로서 무강권, 합의로서 무법률을 주장한다. 사회를 전제로 한 공산주의는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이 대표적인데, 앞의 개인중심적 아나키즘과는 구별된다. 공산을 목적으로 혁명을 수단으로 삼지만,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는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장캉후가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한 사실은 흥미롭다. 엥겔스에 따르면, 정부는 인민을 통치하는 기관이다. 불이든 전기든 기본적으로 선악이 아니며,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생산기관을 장악하면 계급제도와 국가제도는 무용하며 장차 소멸될 것이라 했다.대체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현실적으로 실행될 수 없고, 공산주의적 아나키즘은 이론적으로 통하지 않는다. 근래 서양 서적에는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무정부공산주의에 반대한다면서, 중국인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모른다고 했다.이 점은 스푸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장캉후는 ‘communism’은 공산주의, ‘collectivism’은 집산주의하고 번역하면서, 오늘날 사회주의는 집산주의이지, 공산주의는 아니라고 했다. 보통 집산주의는 사회민주당이 주장하는 것인데, 그가 말한 집산주의에는 마르크스주의도 포함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주장하지, 공산주의란 말은 쓰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이란 말을 사용해 무정부공산주의라고 부른다고 했다. 다시 말해 아나키즘은 공산주의이지 집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각 파벌은 생산 분배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에 당시에는 이런 구분이 가능하였다.
그는 스푸를 직접적으로 비평하면서, “류스푸(劉師復)는 사회당과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순수(純粹)사회주의와 극단(極端)사회주의의 개념도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완전(完全)사회주의, 진정(眞正)사회주의라고 말한다.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생시몽이나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것이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하니 매우 기이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자신은 아나키즘의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앞으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두 개념을 혼용하지 않겠다고 보았다. 장캉후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이미 분리되어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사상은 원래 한 뿌리에서 나와서 거리가 멀지 않으며 공통점도 매우 많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서로 제휴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리하자면, 장캉후는 아나키즘의 핵심이 무종교, 무가정, 무정부의 삼무주의(三無主義)라고 보아 삼무주의가 곧 아나키즘이었다. 그가 발기한 삼이학사(三二學舍)도 삼무 즉 무종교, 무가정, 무정부와 이각(二各), 즉 ‘각진소능(各盡所能,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취소수(各取所需, 각자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의 줄임말이었다. 아나키즘을 ‘삼무주의, 이각학설’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그는 아나키즘을 무정부란 글자로 한정할 수 없으며, 무정부에는 무가정, 무종교의 개념을 내포할 수 없다고 보았다.이에 반해 스푸는 아나키즘은 광범위한 개념을 내포한 것으로, 삼무니 사무니 오무니 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고 보았다.아나키즘이 서양 사회에서는 의미가 넓으나. 중국어에서는 번역어 무정부주의라는 의미가 좁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정리하였다.
둘째, 사회주의(혹은 아나키즘)의 실행방법 문제이다.장캉후는 중국사회당을 만들기 전부터 강권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혁명적 급진 수단에 반대하였다. 사회주의란 “정대 광명의 주의이지 비밀 암흑의 주의가 아니고, 평화 행복의 주의이지 격렬 위험의 주의가 아니며, 건설의 주의이지 파괴의 주의가 아니다.”라고 했다.유일하게 정당한 실행방법은 널리 고취해 다수의 동의를 얻은 후 함께 진행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를 실행하는 기존 방법으로 정치운동, 군무(軍武)혁명, 동맹파공, 암살폭동, 모범(模範)식민, 고취(鼓吹)선포 등 다양한데, 선전하고 고취하는 것말고는 모두 장단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장캉후는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는 토지·자본·기기 세 가지의 공유(公有)를 주장했고, 교육·실업·교통 세 가지는 공영(公營)을 주장했으며, 군비·부세·형벌 세 가지는 점차 줄이다가 최종적으로 소멸시키자고 했다. 유산귀공(遺産歸公)을 결정하면, 후에 재산과 가족 폐단의 뿌리를 단절할 수 있다며, 유산귀공이야말로 대표적인 공산의 한 방법이었다. 그는 옛 사회당 시절 입장을 반성했는데, 과거 사회주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공부가 부족해서 지나치게 이상에 기대어 현실을 홀시하였다. 사회주의 이론을 수입하는 데 장애가 많아 편의적으로 방법을 제시하다 보니, 옛사람의 주장과 현재의 폐단을 모두 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았다.무정부 혁명의 실행방법에서 스푸 등 아나키스트들이 암살과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면서, 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비(非)강권적인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스푸는 장씨의 이른바 “무정부당이 강권을 채용하는 것에 찬동할 수 없다.”라는 말은 실은 “무정부당이 채용한 격렬 수단(무력)에 찬동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격렬 수단을 반드시 강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오늘날 자본가와 신사들이 항상 무정부당을 폭도와 같다는 소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그는 강권과 격렬 수단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강권이란 타인의 자유를 탈취해 권력을 삼기에 강권이라고 말한다. “장씨가 말하는 강권은 아마도 무정부당이 무력으로 정부에 대응하는 것을 잘못 이해한 듯하다. 그러나 무력을 강권으로 여기는 것은 글자 뜻을 오해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무정부주의를 다시 왜곡하는 것이다.”라면서 마치 강도에 저항하기 위해 합리적인 방어를 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라고 주장했다.
덧붙여 무정부당은 모두 격렬한 수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개혁 방법을 주장하는 고드윈, 프루동 등이 있고, 강경 수단을 용인하는 혁명파가 있다. 혁명파 내에서도 두 그룹이 있는데, 조세와 병역을 거부하는 소극적 저항파인 톨스토이 등과 같은 사람이 있고, 암살과 대혁명을 주장하는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과 같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스푸는 교육이란 방법이 사회진화의 원동력이며 자신도 아나키즘 전파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셋째, 아나키즘 혁명과 정치와의 관계 문제이다.장캉후는 정치를 부정하지는 않았는데, “무종교, 무국가, 무가정을 주장하지, 무정치를 말하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자신은 무조건적으로 모든 정치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거부한 것은 관료정치 혹은 강권정치라며, 인민정치 혹은 자치정치에 대해서는 인정했다고 말했다. 정치 만능과 정치 죄악의 두 가지 설에 대해 정치란 본래 두 가지 속성이 모두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국가정치로 정치 죄악의 원천으로 보아 소극적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민정치로 정치 만능의 주축으로 보아 적극적이었다. 실행방법으로 아나키즘이 암살, 폭동, 대파괴를 주장하는 것은 강권으로 강권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보아 이론적으로 자아 모순이며, 사실상 반동을 불러일으켜 무익하고 유해하다고 했다. 그는 유기관(有機關)과 무강권(無强權)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스푸는 이런 주장에 대해 그의 “무정부당이 기관을 부정하는 것에 찬동할 수 없다.”라는 말은 실은 “무정부당이 정부(즉 강권 기관)를 부정하는 것에 찬동할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무정부당이 완전 자유를 주장하고, 일체 정부를 배척하는 것은 실로 무정부주의의 근본 사상이다. 지금 장씨가 찬동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상 무정부주의에 찬동하지 않는 다는 말과 같다.하지만 “무정부당은 강권 기관(=정부)을 배척하고, 자유 기관으로 한다면 절대로 기관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라고 답변했다. 나아가 장캉후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면서, “지금 장씨의 이른바 기관이라는 것은 자유 조직을 위한 기관인가? 아니면 오소리티(Authority, 즉 강권)를 위한 기관인가? 전자라면 당연히 무정부당과 의견이 같다. 만약 후자처럼 오솔리티의 기관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강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라 무정부주의와 반대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무정부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자신만의 해석이 옳다고 하는 것이 맞느냐고 반문했다.
스푸는 장캉후의 이율배반적 행동과 정치에의 접근에 대해 질책하였다. 장씨의 평생 언론을 살펴보면 실로 곳곳이 모순이라고 했다.그는 한때 무정부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무정부당 학자임을 자임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시 무정부당이 아니라며, 공산주의는 시행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한다. 비록 사회주의의 간판을 들고 있지만 실은 정치투기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게다가 그의 머릿속에는 정부를 중시하고 정부를 숭배하는 심리가 있다는 점을 끄집어내었다. 과거 중국사회당의 창당 목적도 대다수 인민의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당을 매개로 삼아 장캉후와 소수인들이 권력을 갈망했다고 본 것이다.
넷째,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상호 관계 문제이다.스푸는 무정부공산주의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이자 완전한 사회주의라고 말하고, 마르크스주의는 ‘불완전한 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라고 평가하면서, 자신의 ‘공산사회주의’ 사상이야말로 가장 정확하다고 믿었다. 그가 생시몽과 마르크스의 주장을 단편적 사회주의라고 말한 데 대해, 장캉후는 이견을 나타내었다.
장캉후는 “바쿠닌과 마르크스가 분열하기 이전에 무정부주의는 실제로 사회주의 안에 있었다. 분리 독립한 후에 무정부당은 특별히 무정부주의의 명사를 썼으며, 사회주의는 오로지 마르크스에게 속하였다. 이로부터 무정부당은 스스로 사회주의를 주장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는 스푸의 주장을 세계 사회당원이나 무정부공산당원들도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라 보았다.
이에 대해 스푸는 “바쿠닌과 마르크스파의 분열 역사는 무정부당과 국가사회당의 분리 역사이며, 비(非)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로부터 탈출하는 역사이다.”라고 했다. 장씨의 주장은 자신만의 생각이며 사회주의란 용어가 마르크스에게만 적용된다고 보는 것은 오류이며, 사회주의에는 공산과 집산 두 파벌이 있다고 했다. 즉 마르크스는 집산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무정부당은 공산사회주의를 주장한다.그에 따르면, 무정부공산주의는 줄여서 무정부주의라고 말하고, 그 당을 무정부공산당 더욱 줄여서 무정부당이라고 부른다.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는 별개의 학설이다. 무정부주의가 정치에 대한 학설이라면, 공산주의는 순수하게 경제에 대한 학설이다. 이를 결합한 무정부공산주의는 완전 자유의 주의이며, 무정부공산사회는 완전 자유의 사회라고 말했다.
장캉후는 스푸 등 아나키스트들이 한편으로는 자칭 사회주의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태도를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스푸는 무정부당이 공격하는 것은 집산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이지 모든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무정부당은 무정부사회주의와 공산사회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캉후가 각국 무정부당원이 사회주의를 공격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말이다.실제로 당시 중국 사회는 각종 사회주의 관련 용어들이 혼재되어 있어서, 서로 개념상의 혼란이 불가피하였다.
다섯째, 스푸와 장캉후의 상호 평가 문제이다.스푸는 장씨 언론의 큰 오류로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하나, 장씨는 생산기관 공유를 주장하지 않으며, 사유재산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는 사회주의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따라서 장씨가 주장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둘, 장씨는 정치에 대해 군비제한과 단일세 채용을 주장하며, 산업에 대해서는 영업자유와 재산독립을 주장한다. 이것들은 모두 국가의 사회정책에 속하지 결코 사회주의의 이름을 걸 수 없다. 셋, 장씨가 주장하는 사회정책들은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따라서 공산이 진화를 정체시키고 무정부가 안정을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스푸는 장캉후의 말을 빌어 “나는 교육평등, 영업자유, 재산독립, 유산제도 폐지를 주장한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공공사회에서 함께 동등한 교육을 받는다. 책임질 나이가 되면 자유 영업(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한다. 재산이 생기면 사유할 수 있다. 각 개인이 독립적이어서 서로 주고받지 않으며, 죽으면 공유로 귀속된다.”라고 장씨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유산귀공을 공산의 정신으로 알고, 영업자유와 재산독립을 사회주의로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비판하면서, 이것은 사회정책에 불과하다고 했다. 장캉후가 공산주의는 오늘날 시행하기 어렵다는 말은 공산을 부정한 것이며, 무기관, 무조직, 무계약의 설을 깊이 믿기 어렵다는 말은 무정부를 부정한 것이라고 보았다.한마디로, 스푸는 그가 이미 무정부공산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대체로 장캉후는 과거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회고하면서 현재까지 큰 변화는 없어서, 기본적으로는 민국 초 중국사회당의 입장과 같다고 했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변화를 보였다. 하나는 그는 공개적으로 아나키즘에 대해 반대하지도 주장하지도 않는다고 말한 점이다.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무종교, 무국가, 무가정을 주장한다는 것이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나키스트들이 사용하는 암살, 폭동, 대파괴 등의 폭력 수단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는 선전하고 고취시키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 실행방법 가운데 근본 방법이라면서, 이 방법은 이익만 있지 폐단은 없다고 했다. 이것이 1914년 논쟁에서 스푸의 비판에 대한 응답이었다.
다른 하나는 장캉후가 마르크스를 사회주의의 창시인으로 보아 역사적 유물론을 받아들인 점이다. 이 사실은 마르크스의 과학 사회주의와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얼마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해했는지는 문제의 여지가 있지만, 1920년 귀국 후 국내에서 강연할 때 마르크스의 과학사회주의가 사회주의의 정통이라고 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장캉후든 스푸든 일본에서 기원한 집산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의 개념어(번역어)에 공통 인식이 결여된 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논쟁한 측면이 없지 않다. 물론 스푸의 주장에 결함이 없지 않았으나,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중국 아나키즘 혹은 사회주의 이론가였음은 틀림없다. 대체로 장캉후의 개혁적 사회주의와 스푸의 급진적 아나키즘 사이의 논쟁에서 스푸가 우위를 점하면서 진행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1910년대의 중국 사상계에서 공산주의란 용어가 아나키즘과 동의어로 쓰인 경우가 많았고, 마르크스주의를 집산주의로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신해혁명 시기 중국사회당의 대표적 기관지였던 『사회당월간(社會黨月刊)』과 『사회세계(社會世界)』 등에 실린 글을 보면, 국가사회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마르크스로부터 찾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3. 그 후
스푸는 장캉후와 아나키즘 논쟁을 하던 1914년 무렵부터 생디칼리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평소에도 “무정부주의의 도덕은 노동과 호조(互助)일 뿐이며, 이 두 가지는 모두 인류의 본능”라고 즐겨 말하였다. 이것은 코뮨적 아나키즘에 생디칼리슴을 결합하면서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음을 암시한다. 그는 “코뮨적 아나키즘을 목표로, 생디칼리슴을 수단으로” 삼아 광저우에 초보적인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보통 프랑스 아나키즘 운동사에서 1894년부터 1914년까지를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시대라고 말한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개인적 아나키즘이나 테러리즘은 소수파가 되었고, 코뮨적 아나키스트와 노동조합적 아나키스트가 주류가 되어 서로 경쟁했는데, 그 영향이 자본주의가 조금씩 발전하던 중국에도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유럽 아나키즘 운동에 큰 충격을 주어 많은 조직들과 잡지들이 폐간되었다.
스푸는 1915년 초 폐병을 얻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고, 그해 3월 27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민성』을 편집하는 일과 에스페란토 저작을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다. 마지막 유언이 담긴 「스푸군이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문명 과학은 본래 부자들의 전리품일 뿐이다. 톨스토이가 통탄해 마지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민성’은 위기를 맞이하여 어쩌면 끝날지도 모른다. 내가 민성을 걱정하는 것은 병을 걱정하는 것보다 더욱 심하다. 아! 만약 민성이 어찌 된다면, 나 또한 진실로 폐결핵을 치료할 수 없다면, 스푸는 장차 무정부주의와 함께 중국의 황토에 묻힐 뿐이다.”라고 비장하게 쓰여져 있다.
한편 장캉후는 미국에서 중국 아나키즘의 흥기를 회고하면서, “나는 사회주의를 매우 신앙했으며, 또한 아나키즘을 연구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중국 수용에서 나 역시 그 소개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무종교, 무국가, 무가정을 기준 삼아 주장했지만, 무정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자신은 무정치는 주장하지 않았는데, 관치(官治) 즉 국가 정치에 반대한 것이지, 자치(自治) 즉 인민 정치는 찬성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글에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대동주의(大同主義)여야 한다. 무릇 대동주의가 아니면 곧 사회주의가 아니다. 만약 국가사회주의가 오로지 국가를 본위로 삼고, 무정부사회주의가 순수하게 개인을 중심으로 삼는다면 모두 대동주의라고 부를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없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장캉후는 미국에서 중국문화를 교육하고 사회주의를 연구하다가 1920년 9월 귀국하였다. 그는 1921년 4월 볼셰비키혁명이 한창이던 소비에트 러시아를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모스크바까지 건너가 1년 가까이 공산주의를 관찰한 후, 1922년 8월 유럽을 경유해 귀국하였다. 그런데 그는 혁명 러시아의 현실에 실망하여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그는 모택동(毛澤東)보다 먼저 이 용어를 사용했다)와 신사회주의(新社會主義)라는 새로운 이론을 들고 정계에 복귀하였다. 선민참정(選民參政), 입법일권(立法一權), 직업대의(職業代議)를 내용으로 하는 신민주주의와 자산공유(資産公有), 지세귀공(地稅歸公), 노동보수(勞動報酬)를 내용으로 하는 신사회주의가 그것이다. 1920년대의 장캉후는 여전히 스푸,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우즈후이, 천두슈(陳獨秀) 등과 더불어 혁신파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나, 그의 절충적인 태도는 곧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비록 장캉후는 중국사회당을 재건(1924년 6월)하고 다시 중국신사회민주당(中國新社會民主黨)으로 개명(1925년 1월)하면서 이런저런 강령과 정책들을 제시했지만, 중국국민당이 북벌을 개시하고 중국공산당이 창당해 세력을 확산하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더 이상 호소력이 떨어졌다. 게다가 북경정변에 따른 선후회의(善後會議, 1924년 10월)에 참가한다든지, 갑자복벽(甲子復?, 1925년 8월)의 추문에 연루되면서 사람들에게 정객으로 낙인찍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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