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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창덕 이메일 guso9662@daum.net
작성일 2025-04-26 조회수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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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정부주의자로서 예수의 삶 - 폴 도르달, 류의근 역

 

부 록

 

 

 

 

무정부주의자로서 예수의 삶

 

폴 도르달*

                                                                                                                                      류의근 역

 

 

 

“[예수의] 개방적인 식탁 교제는 급진적 평등주의 및 사람의 절대적 평등의 상징이자 구현이고 이 평등은 사람 차별의 타당성을 거부하고 사람 사이의 위계의 필연성을 부정한다.”

 

1. 무정부주의자로 의식하는 예수의 자각

 

우리는 자유를 위해 스스로 투쟁하고 거짓된 이분법과 양극화의 함정을 넘어서면서 대신에 역설 속에 머물고자 할 때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 사랑스러운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동적 과정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하게 정적으로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항상 그럴 것이고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것 말고도 우리는 이러한 내적 작업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남의 정체성에 대한 나 자신의 자각을 확실히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교만하다)는 점이다. 저 멀리 있는 역사적 인물인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서라면 특히 그러하다.

그래서 자신이 신인지, 사람의 아들인지, 이스라엘의 왕인지, 또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인지 등등에 대한 예수의 자각이 어느 정도인지 하는 문제는 학계에서 열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기는 해도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16:13-15)라고 질문한 적이 있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영원한 문제에 대한 나의 대답은 현재의 우리 프로젝트에 비추어 볼 때 예수는 [우리가 말한 바 있는]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규정된 그의 정체성에 관해서라면 초기 교회 회의체들은 예수가 동등하게 충분히 인간이고 충분히 신이라는 역설적 교리 즉 그는 신이자 인간이라는 교리에 정착했다. 이러한 실재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가 충분히 인간적이라고 함은 그 자신의 자각이 우리의 것처럼 적어도 어떤 면에서 한계가 있으며 진화한다는 뜻이다. 이는 성경도 지지하는 바이거니와 우리는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기도 즉 어떤 일이 도래할지를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미래에 있을 순교의 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는 소리를 듣는다.그리스도론을 연구하는 학자 토마스 피터 라우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대치는 이럴 것이다. 즉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확신한 만큼,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른 그분에게 가까이 있음을 의식한 만큼 그는 죽음이 다가옴에 따라 인간이라면 경험하는 일체의 공포, 불확실성, 의심과 함께 자신의 죽음을 직면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원형적 무정부주의자로서 이해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우리는 예수의 자기 이해 그 자체에 국한하지 않고 이러한 독해에 일치하는 성경에 기록된 그의 인간적인 말과 행동에 국한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탐구에서 예수를 삼자 즉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 수용하는 관습적인 기독교 신학의 통상적인 이해는 부정되지 않으며 또한 우주적 구원자로서 그의 신성도 역할도 부정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수의 대제사장 사역, 왕 사역은 그의 죽음 이후에 귀속된 신적 직함이고 사역이다. 예수는 결코 스스로 제사장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레위족속의 제사장 계보 속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지상 사역을 하는 동안 왕으로 삼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권위는 부인하지 않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왕이기를 바라거나 주장하지 않았다.그의 자세는 언제나 사람의 종으로서였지 지배자로서는 아니었다.(13:14) 메시지의 저자인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관계적 신뢰와 경배하는 사랑을 배제한 채 남자와 여자에게 강요된 추상적인 규칙과 유체 이탈적인 원칙으로 이루어진 왕좌-관료제로 통치하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는 거절했습니다.”

예수의 신적 자각은 실제 사용 가능한 면에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예언자와 랍비(교사)로서 그의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사역밖에 없다. 예언자로서 그가 수행한 사역에서 예수는 지속적으로 그 당시의 종교적 세속적 지배 체제를 비판하고 시위한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랍비로서 그는 그 영이 우리가 사랑의 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새로운 에덴 동산, 신의 도시를 위해 하나님의 새 사람을 창조하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사람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가르쳤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예수의 자각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인간사에 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었음을 선포하는 선동적인 긍휼의 예언자였다. 그는 사역을 시작할 때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오늘 시작하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있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있다. 나는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며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있다. 나는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있다.”(4:18-19) 예수가 언급한 희년이 일어나는 때는 이렇다. 즉 유대인의 언약에 따르면, 모든 노예들은 자유롭게 될 것이고 모든 부채는 말소될 것이며 가난한 탓에 토지를 잃은 모든 이들은 그 옛 토지를 돌려받을 것이다. 이런 것이 예수가 사역을 시작할 때 공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예언자적 가르침과 행동이 영적 영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세속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을 포함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예수의 영적 사명은 그것이 지니는 정치적 함의와 분리될 수 없다.

앞장에서 조지 우드코크와 니콜라스 월터가 논의한 무정부주의의 특성을 이용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부터 무정부주의자 예수가 어떻게 종교적, 사회정치적 측면에서 기존 사회를 비판하는지를 기존 사회에 반대해서 선동하는 예수의 모습과 함께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기독교 무정부주의자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위계적인 종교 지도자 비판

 

대중문화에서 완곡하게 그리는 부드럽게 말하는 예수상은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의로운 분노의 예수를 직면하게 된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서 감정을 나타내는 예수는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표출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3장의 화가 있다는 진술에서 예수는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사랑의 공화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문을 닫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예수는 그들의 비참한 비본래성과 억압적 행동을 호되게 질책했다. 예수는 사람을 개종하려고 노력하다가 구원을 주지는 못하고 대신에 지옥에 떨어뜨린 종교적 엘리트를 책망했다. “종교적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위선자들이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원근을 마다하지 않고 두루 다니다가, 개종하게 되면 그를 너희보다 더 못된 악마로 만들어 버린다.”(23:15)

그런데 종교적 엘리트에 대한 이러한 예언자적 질책의 진술들이 그 자체만으로 무정부주의적 비판을 구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적 함축을 가지는 것은 화가 있다는 진술 바로 그 직전에 예수가 했던 말이다. 예수는 자신의 대중적 강론을 경청하고 있었던 제자와 무리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바라지 말라. 너희에게는 단 한 분의 지도자 즉 기름부음 받은 사람뿐이다.”(23:8-10) 그렇다면 위계적인 인간적 권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제도 종교는 불필요하고 위험하다. 예수는 자신의 선포와 가르침에서 자신이 도착함으로써 무정부주의적 에덴동산 즉 사랑의 공화국의 재구성을 시작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앞에서 진술한 종교적 엘리트에 대한 예언자적 저주와 위계적 권위에 대한 금지는 예수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지향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예수는 지상의 위계적인 권력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확신했다. 더욱이 이와 같은 위계적인 인간적 권위 금지는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이다. 예레미야는 사랑의 공화국이 시작하게 될 때 하나님이 세울 것이라고 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인 나는 나의 율법을 인간들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 기록함으로써 그들의 의식 속에 넣어 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알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가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31:33-34) 이것이 정확히 예수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약속한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가 너희에게 보내실 성령이 내가 말한 모든 것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실 것이며 또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14:26) 교육자들이 무정부주의적 사회에서 여전히 있을 것이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현대 교육과 교육 기관에서처럼 위계적 지도자가 아니라 대화적 학습의 힘을 키워주는 촉진자로서 기능할 것이다.

 

3. 종교적 위계에 반하는 선동

 

예수는 종교적 엘리트와 위계적인 종교적 리더십의 개념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투적이지만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들에 반하는 선동을 벌였다. 그의 비판은 신랄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사회적 인습을 분쇄하는선동이었고 이는 당시의 종교적 지배에 대항하는 무정부주의적 예언자로서 자기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러 왔고 궁극적 자유에의 길을 가르치러 왔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2)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여준 예수의 널리 알려진 예언자적 행동 즉 환전상을 쫓아내고 탁자를 뒤엎은 행동은 그가 체포되고 마침내 순교하게 된 주요한 무정부주의적 행동이었다. 토마스 라우쉬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제는 예수가 성전에서 극적인 행동을 취했고 이것이 그의 처형의 주요 이유 중의 하나였다는 점에 동의한다.”

예수는 성전이 원래는 명백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수단으로 의도된 것이지만 보통 사람들의 억압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되어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만큼 자신이 하나님의 새롭고 참된 성전이라는 것을 선포했다.

예수는 지배 체제 서사의 위와 아래를 뒤바꾸었다. 종교적 엘리트는 성전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한 반면 예수는 성전을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도록 하는 데 사용하고자 했다. 예수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너희들이 짓는 데에 46년이나 걸린 성전을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했을 때(2:19-20) 종교적 엘리트에게 직접적이고 공공연하게 도전한 것이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포와 함께 예수는 모든 억압적인 제도를 허물 것을 요구했다. 예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 또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지 건물, 희생 제사가 아니었다. 국가나 위계적인 제도 역시 틀림없이 아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에서 시종일관 자신이 이러한 새로운 무정부주의적 실재의 구현이라고 선포했다.

예수는 이렇게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가장 의미 있는 상징으로 취했는데, 이것보다도 더 충격적인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모든 인간도 하나님의 거처라는 성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영으로 가득하다는 이 개념은 예수를 처음으로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배의 규범적인 의미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예수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것이다.”(4:21-23) 하나님에게 본래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또는 신성한 물리적 장소)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불필요해졌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자신이 바로 자신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해 건물이나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는 성령의 거처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 6:19)

나는 예수나 사도들에 의해서 공적 또는 기업적 예배가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치고 모범으로 삼은 것은 위계적이거나 권력 기반의 제도적 형태의 종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사람들을 자유롭고 책임 있게 사랑하는 자를 발전시키는 데 해롭다는 것이다.

4. 정부(제국)에 반하는 비판과 선동

 

예수의 비판과 선동은 종교적 지배 체제에 한정되지 않았다. 성경은 그가 또한 정부 자체의 개념을 공격했다는 것을 지지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여러분의 전형적인 정치 개혁자가 아니었거나 심지어 국가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 확실히 쉽게 확인된다. 그렇지만 예수의 사역 초점이 이사야의 희년 메시지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회당에서 주장한 이후로는 그의 사역이 영적임과 동시에 정치적이었음은 분명해졌다. 그리스도의 무정부(Christi-Anarchy)의 저자인 데이브 앤드류스(Dave Andrew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그는 당시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 감동적인 무정부주의 선언문을 삶의 사명으로 삼고 싶다고 발표했습니다.”그러나 그야말로 예수는 아나키스트 즉 모든 지배 체제, 정부 또는 위계적인 권력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었던가?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광야의 시험에서 시작할 때부터 정치 권력욕을 위험에 이를 정도로 부패한 것으로서 보고 거절했다.(4:8) 그는 우리가 개인의 정치적 출세 도모, 정부, 종교 또는 여타의 주인을 섬긴다면 모든 사람을 자기희생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6:24) 예수는 체포된 후에 자신을 석방할 수도 있고 유죄 선고를 할 수도 있는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지 않았다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다.”(19:11)

더욱이, 예수는 우리 모두에게 정치권력 곧 타자를 지배하는 권력을 가지려는 욕망을 억제하라고 경고한다. 예수는 말하기를, “너희가 아는 대로,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철권으로 통치하고 그 정부의 관리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오용한다. 그것은 너희가 가는 길일 수 없다. 너희 가운데서 통치자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고 최고 지위에 있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여타의 사람에게 종이어야 한다.”(20:25-26) 이는 무정부주의에서 리더십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무정부주의자 리더십은 권력이 아니라 자기희생적 사랑과 종복정신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무정부주의자는 지위상의 권위나 호칭을 거부하고 계층적인 권력관계나 위계적인 제도에 휩쓸리지 않는다.(5장 참조) 신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이 말하기를, “예수는 [로마 제국의] 조직적 불의와 구조적 악에 반대하여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대안적 삶, 근본적인 평등주의의 삶, 차별 없는 인간 교제의 삶, 위계 없는 하나님 교제의 삶을 살았다.”

예수는 권력을 이분법적 시각에서 악한 것으로 보고 권력 그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 사용하는 권력은 반대한다고 분명하게 말하며 선동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만인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 권력과 권위(자유)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서(평등) 행사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5:13) 예수는 사람을 통제하거나 지배하려는 모든 권력에 반대하고 있다. 기독교 무정부주의자 연구자인 자끄 엘륄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는] 예수가 권력의 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권력을 경멸하듯 대했고 권력에 아무런 권위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취하는 형태가 어떻든 권력에 급진적으로 도전했다.”이것을 예수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입증했거니와 마찬가지로 그가 죽기 전에도 매우 통렬하게 입증했던 것이다. 즉 그는 죽기 전에 모든 권력을 가진 것을 알고 저녁 식탁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는 냄새나는 진흙투성이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을(13:3-5) 그렇게 입증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곧 이어서 예수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13:15)

예수의 예언자적 행동은 분명히 반위계적이고 반제도적이다. 그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본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세금 납부에 도전하고 있다는 설명에 관해서 말해 보면(22:15-22), 이 본문에 대해 관습적으로 채택된 해석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통치자에게 복종하고(13:1) 정부에 납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면밀하게 읽어 보면 완전히 정반대인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화폐에 새겨진 상이 우상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악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실제로 가르친 원리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정부의 돈을 호주머니에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푸아티에의 성 힐러리(St. Hilary of Poitiers)4세기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는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은 카이사르의 것은 하나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납세를 옹호했든지 세금을 바쳤든지 간에(17:24-27), 분명한 것은 그가 지상의 권력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요구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버나드 엘러(Bernard Eller)는 이 딜레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는 대단한 무정부주의자였다! 예수는 말하기를, ‘나는 나의 아버지에 속한다. 나는 어떤 지배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어떠한 충성도 (또는 어떤 것도) 빚을 지고 있지 않다. 나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주장하는 어떤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나에게서 무언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유롭다.’”

이 가르침의 본질은 또한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발견된다.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6:24) 여기에 양가성의 문제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위계적인 정부에 대한 복종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영에 의해 인도된다. 더욱이 사도들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5:29)라고 외쳤을 때 이 원리를 명백하게 이해했다.

예수는 이와 같이 모든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반사회적이고 반란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를 종교적으로 고발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사탄에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3:22) 지배 체제의 가장 그릇된 왜곡 중의 하나는 사회의 선을 사회에 대한 그들의 통치와 동등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서구의 지배 체제는 자주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을 두고 급진파”, “선동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또는 다른 정치적 혐의를 불러일으키는 무슨무슨 별명으로 언급한다. 따라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나 지배 체제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들의 지배를 반대하는 누구라도 반항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이와는 가장 거리가 멀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그는 진정한 도덕의 우월한 입장을 견지했고 억압자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수는 성전 공동 구역에서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억압을 혼란에 빠뜨렸을 때 다만 위계적인 종교에 반대하는 선동만이 아니라 유대 사람들을 지배하는 로마의 강요된 질서에도 반대하는 선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로마 정부에 고발한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도 내세웠다.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전복하고 납세하지 말라고 말하며 자신이 카이사르 라고 하였습니다.”(23:2) 그러므로 예수는 분명히 로마 제국에 위협이었고 이것이 그가 (바울과 베드로와 다른 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궁극적으로 체포되어 죽임을 당한 이유였다. 그러나 예수의 선동은 비폭력적 피스메이커(peacemaker)서도 모든 억압자들에 대항하는 천상의 을 가져오는 것이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12:49, 51)

 

5. 평화와 전투적 비폭력의 왕으로서 예수

 

모든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예수의 비판과 선동은 본질적인 비폭력적 피스메이커로서 그랬던 것이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또한 비폭력적 피스메이커가 되는 일이다. 러시아 작가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작품을 통해 나로 하여금 비폭력적이고 무정부주의적 길로 복귀하도록 도와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에 미치지 못하는 많은 논점 가운데 내가 주요하다고 지적한 것은 힘으로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계명이 없다는 점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도착된 예수의 가르침은 여타의 차이점에서보다 바로 이 점에서 더욱 명백하게 나타난다.

콘스탄티누스가 교회를 자기편으로 채택하기 전에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주의자였다. 초기의 교회 법규는 그리스도인들이 군대에서 복무하거나 세상 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맡는 것을 금지했다.

보다 작은 규모의 일부 교회 집단(메노나이트 교단, 퀘이커 교단, 아미쉬 교단, 형제 교단)은 오랫동안 평화와 비폭력의 지지자였지만 과도하게 커진 교회는 여전히 정의로운 전쟁의 비성경적 개념을 지지한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지원하고 폭력을 갈등 해결책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심각한 탈선이다. 분명히 예수는 평화와 비폭력을 실천하라고 제자들을 불렀다.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비폭력적 피스메이킹 요청을 계속해서 무시하는 것은 왜인가? 나는 그것이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에게 공포와 의존을 주입하는 국가와 국가가 채택한 지배 체제(교회, 군대, 경찰, 주류 메디아, 정부 통제의 공교육, 불의한 경제 체제 등등)라고 믿는다. 따라서 여러분이 비폭력에 대한 예수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무시한다면 쉽사리 국가의 제국주의나 희생양으로 삼은 적에게 엄정한 복수를 하라는 국가의 요청을 지지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유한한 존재로서 가지는 자연적인 공포, 이를테면 죽음의 공포, 미지의 공포, 자유로운 삶의 책임의 공포를 부추기는 것은 국가와 그 지원 제도들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실한 추종자가 되는 것은 국가의 소리를 거부하고 대신에 두려워하지 말고 비폭력적 피스메이커가 되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부름을 듣고 준행하는 일이다.(5:9; 3:18)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이 말하기를, “악과 공격에 대한 기독교의 응답은 물론 저항이다. 그러나 비폭력적 저항, 즉 사랑과 기도와 받아들인 고통의 저항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다른 어떤 것을 할 때, 그들은 예수님과의 동행을 멈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에 대한 이러한 저항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다. 기독교 무정부주의자들은 이론뿐인 철학자들이 아니라 반성적 행동가들이다. 이것은 때로는 기독교 무정부주의자들이 분노를 표출하고 이를 비폭력적 행동으로(때로는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을 마주쳤을 때 한 것처럼 극적인 방식으로서도)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전투적인 비폭력적 행동주의는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물리적 폭력으로까지 확대되어서는 안 되지만 국가와 교회에 안주하고 길들여진 사람들이 억압에 반대하여 하나님이 부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 가능성이 다분히 있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 계열의 월별 매일 묵상의 글에서 읽은 내용에 따르면 예수는 정확히 비폭력적인 전투주의자로 묘사된다. “예수는 정의를 증진하고 불의를 억제하는 더 나은 방법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방법은 전투적이고 공격적이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폭력적이지는 않다. 예수의 정의와 칭의의 방법은 십자가의 길이다. [그는 우리의 불의를 우리에게 되돌려주지 않고, 그것을 자신에게 떠넘기고 십자가에서 자신과 함께 죽인다. 예수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음으로써 그를 해치는 사람들에게 되갚는다.(12:20-21 참조). 사실, 예수는 모든 악한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 선한 행동으로 응답한다.(누락부분 삽입-역자 주)] 예수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통제하려고 함으로써가 아니라 변화시킴으로써 악을 멈추게 한다.”전투적 비폭력은 역시 하나의 역설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불의와 마주칠 때 적대적이지만 동시에 평화롭다.

따라서 기독교 무정부주의자들, 헌신적인 예수 추종자들은 예수처럼 겸손하고 온유하지만 역시 그래도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비폭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모든 지배 체제, 특히 제도 교회와 국가에 반대할 때는 전투적이다. 사도 바울의 말씀이 두고두고 우리의 귀에 울려 퍼져야 한다.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처럼 폭력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고후 10:3-4)

궁극적으로, 예수의 비폭력적 선동과 지배 체제의 억압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구현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또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예수를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범형이다. 신학자 데니 위버(Denny Weaver)는 말하기를, “현재로서 특히 중요한 것은 부활을 통한 이 승리가 비폭력적 승리즉 신적 폭력 없는 승리라는 점을 지적하는 일이다. 예수의 제자들, 교회, 예수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기로 헌신하는 사람들은 역경과 죽음 앞에서도 악에 맞서기를 계속하기 때문에 이 승리에 참여한다.”

 

6. 십자가와 부활

 

예수를 본질적인 무정부주의자라고 하는 어떠한 선언도 십자가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져야 한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제일 상징으로서 이론의 여지가 없고 기독교 무정부주의자의 유일한 필수 상징으로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일부 사람들이 한 것처럼 십자가 상징을 무정부주의자를 표시하는 상징과 결합한다면 둥근 원안의 “A”는 여분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는 이미 모든 억압적 통치자와 권력의 해제이자 승리 그리고 그들에 대한 우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2:15) 십자가는 무정부주의의 상징인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와 모든 지배 체제에 반하는 선동의 궁극적 표현이다. 그가 대제사장 가야바, 4두정치의 왕 헤롯, 빌라도에게 선포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그들의 권력은 아무것도아니고 그들의 십자가 처형은 그를 죽이지 못할 것이며 다만 그와 자유의 대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구원 행위에서 세상의 죄를 짊어졌고 백부장이 그를 미친 듯이 채찍질하고 병사들이 그를 교수형에 처했을 때 자신의 등 뒤로 엄청난 압박을 떠맡았다. 예수는 권력에 맞섰고 그러자 권력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야바는 자진하지 않았고 헤롯은 두려워했으며 빌라도는 손을 씻었다. 그렇지만 예수는 그들 모두를 용서했고 백부장은 다만 이 사람은 확실히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응답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23:47)

무정부주의자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 즉 조에(풍성한 삶)는 여러분이 그것을 위해 살 의지가 있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세계를 위해서라면 살 가치가 있는 바로 그것임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똑같이 해야 합니다.”(요일 3:16) 비폭력적 저항은 가장 큰 힘과 개인적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랑으로 충만한 승리자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에 갈 수 있다. 마틴 루터 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위해서 죽을 만한 것이라고 할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제의하는 바입니다.”

예수의 궁극적 선동으로서 십자가는 그가 부서지고 가난하며 비참하게 억압받는 가운데서 억압자에게 직접 호소했고 나만이 너희를 구원할 수 있다”(23:34)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나중에 이것을 영적인 방식으로 해석했다. 즉 바울은 의인을 위해서 죽을 사람이 얼마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체 세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 중 가장 나쁜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었기 때문입니다”(5:7-8)라고 말했을 때 그렇게 했습니다. 역설적 진리는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고 부유한 자, 강한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는 베드로에게 칼로 사는 사람은 칼로 죽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다시 한 번 폭력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세한 폭력이 무기로서 폭력적 상황을 구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신화이다. 십자가의 예수는 지배에 대한 승리가 다만 진정으로 비폭력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성주의 신학자 신시아 크리스데일(Cynthia Crysdale)은 말하기를, “그는 로마 제국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절정에 이르렀고 이는 그의 설교, 주변화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 여성에 대한 그의 대우, 제의 실천에 대한 그의 타파, 원수 사랑에 대한 그의 견지를 통해서였으며 이 모두가 예수가 지배에 대한 대안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만인에게 자유에의 길, 계몽과 참된 인식의 길을 대표한다. 그것은 의미가 지니는 궁극적 역설이다. 그 십자가와 부활은 행동하는 사랑의 공화국의 시작이다. 마커스 보그는 말하기를,

 

성 금요일은 예수의 수난과 그 시대 지배 체제의 충돌이다. 예수는 세상의 죄 때문에

처형되었다. 지배 체제가 그를 죽였다 . 그러나 부활절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이고 예수를 죽인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이다. 예수는 로마에 의해 처형되었

고 하나님에 의해 옹호되었다.

 

7. 십자가?부활 중심의 삶을 살아가기

 

그렇다면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무정부주의자들의 삶의 금형, 다시 말해서 자기에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 상실과 재발견의 삶, 부수고 재건하는 삶의 금형을 대표한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고통을 가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노예가 되고 인간 정부나 영웅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고 공급해 주며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잘못 믿는다.

그러하니, 십자가와 부활은 종교와 국가의 지배 체제에 반하는 궁극적 선동이고 행동이다. 이들 선동과 행동은 십자가로 가서 하나님, 자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사선에 배치하는 것이 조에 즉 부활의 삶(10:10)을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는 범례이다.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자 존 소브리노는 말하기를, “십자가는 예수가 역사적으로 밟은 길의 결과이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은 십자가의 신비로 환원될 수 없다. 기독교 영성은 예수의 길을 따르는 데서 성립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회개 요청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숙고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새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라.’”(13:34) 모든 두려움을 서서히 극복하는 이 급진적 아가페는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떠맡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수의 십자가 삶으로의 부름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방법, 우리가 삶을 조직하는 방법을 회개하고 바꾸라는 부름이고 지배와 억압에 저항하고 반대하라는 부름이며 만인을 위한 사랑의 공화국 건립 사업을 시작하라는 부름이다. 그것이 하늘에 있는 것 같이 땅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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