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나키즘 학교 제2기
일본 아나키즘 운동사
국민문화연구소 회장 김창덕
아나키즘의 본질
아나키즘은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폭력으로도 끌 수 없는 자유를 향한 등불에 주목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의 근본에는 인간, 즉 '개(個)'를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든 발상과 행동의 근간으로 삼는 인간 중심주의가 있다. 아나키즘은 국가, 정부, 자본 등 개인의 외부에서 개인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권위를 거부한다.
또한, 인간 존중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그 과정과 수단 역시 동일한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본다(목적과 수단의 일치). 일시적인 과정이라는 이유로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 아나키즘 운동의 역사를 보면, 인간성을 추구하는 숭고한 사상과 행동이 있었던 반면, 운동을 쇠퇴로 이끌고 대중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긴 파괴적인 측면도 존재했다.
Ⅰ. 아나키즘 사상의 도입 (1882년 ~ 1900년대 초반)
1. 초기의 자생적 흐름
아나키즘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인 1882년 5월, 다루이 토키치(樽井藤吉) 등은 자유민권운동의 흐름 속에서 「동양사회당(東洋社??)」을 결성했다. 이들은 법률적 통제보다 "천부(天賦)의 도의심"에 기반한 사회를 구상했으나 ,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도 전에 해산되어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2. 서구 아나키즘의 도입과 오해
서구 아나키즘 사상은 러시아의 「허무당(?無?, 나로드니키)」 운동과 혼동되어 소개되면서 테러리즘적 측면이 부각되었다. 「무정부(無政府)」라는 번역어는 공포심을 조장했고, 아나키즘은 사회의 적으로 여겨졌다.
3. 최초의 체계적 연구
1902년 4월, 게무야마 센타로(煙山?太?)는 일본 최초의 체계적인 아나키즘 연구서인 『근세무정부주의(近世無政府主義)』를 출간했다. 그는 아나키즘을 '사회의 질병'으로 간주했으나,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를 비롯한 많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사상적 양분이 되어 운동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Ⅱ. 여명기의 아나키즘 - 직접행동론 (1906년 ~ 1911년)
1. 고토쿠 슈스이와 직접행동론의 대두
러·일전쟁 이후 사회주의 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고토쿠 슈스이를 중심으로 「직접행동론」이 부상했다. 고토쿠는 투옥 중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접하며 아나키즘으로 경도되었고, 1906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강연을 통해 의회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며 총파업 등 노동자의 직접행동을 주장했다.
2. 의회정책파와의 대립
1907년 2월, 일본사회당 제2회 대회에서 고토쿠의 「직접행동파」와 다조에 데쓰지(田添?二)의 「의회정책파」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고토쿠는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권이 아니라 '빵의 쟁취'이며 법률이 아니라 의식주"라고 주장하며 의회주의의 무용함을 역설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직접행동파는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로 부상했다.
3. 탄압과 대역사건
직접행동파의 대두는 극심한 탄압을 불러왔고, 1908년 6월 「적기(赤旗)사건」으로 오스기 사카에(大杉?) 등 다수가 검거되었다. 결국 1910년, 미야시타 타키치(宮下太吉) 등의 천황 암살 계획을 빌미로 「대역사건(大逆事件)」이 날조되었다. 이 사건으로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26명이 기소되었고, 1911년 1월 23일 고토쿠 등 12명이 사형당했다. 이 사건은 사회주의 운동을 '겨울의 시대'로 몰아넣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Ⅲ.씨 뿌리는 사람들 -'겨울의 시대'와 운동의 재개-(1912년 ~1918년)
1. 오스기 사카에와 『근대사상』
암흑기 속에서 1912년 10월, 오스기 사카에와 아라하타 칸손(荒畑寒村)은 잡지 『근대사상(近代思想)』을 창간하며 운동 재개의 불씨를 지폈다. 『근대사상』은 인텔리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를 통해 생디칼리즘 연구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이후 이들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평민신문(平民新聞)』(1914)을 창간하며 실천으로 나아갔다.
2. 잊혀진 선구자들
다이쇼 초기 아나키즘의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은 와타나베 마사타로(渡?政太?)와 히사이타 우노스케(久板卯之助)의 활동이었다. 그들은 극빈의 생활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활동하며 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와타나베가 1914년경 시작한 연구회 「북풍회(北風會)」는 수많은 노동자와 청년들을 아나키즘 운동으로 이끄는 요람이 되었다.
Ⅳ."노동자 시대"의 도래와 ‘아나·볼’ 공동전선(1919년 ~ 1921년)
1. 아나키즘과 노동운동의 결합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운동이 급성장하면서 아나키즘은 노동 현장에 깊숙이 침투했다. 인쇄공 조합인 「신우회(信友會)」와 「정진회(正進會)」는 투쟁 과정에서 점차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아 전투적인 조직으로 변모했으며 , 중앙집권적인 회장제를 폐지하고 합의제를 채택하는 등 아나키즘적 운영방식을 도입했다.
2. '아나·볼' 공동전선과 그 파탄
러시아 혁명과 전후 공황 속에서 아나키스트(아나)와 볼셰비키(볼)는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1920년 5월 통일 메이데이가 개최되었고, 12월에는 각계각층의 사회주의자들이 「일본사회주의동맹」을 결성했다. 오스기 역시 러시아 혁명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볼'계와 「제2차 『노동운동』」을 공동 발행했다.
그러나 '볼'계가 비밀리에 코민테른 일본지부 설립을 추진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신뢰 관계는 무너졌다. 오스기는 "공산당은 자본주의 정당과 마찬가지로, 더구나 더욱 방심할 수 없는 우리들 무정부주의자의 적"이라며 결별을 선언했다. 1921년 중반, 사회주의동맹 해산, 제2차 『노동운동』 폐간 등이 연이어 발생하며 공동전선은 완전히 파탄 났다.
Ⅴ. '아나·볼' 대립 시대와 총연합 운동 (1921년~1922년)
1. 대립의 격화와 총연합 운동
공동전선 붕괴 후 '아나·볼' 대립은 노동 현장에서 전면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본의 공세에 맞서 1922년, 전국적인 노동조합 총연합 결성 운동이 시작되었다.
2. 총연합 운동의 결렬
총연합 운동의 핵심 쟁점은 조직 형태였다.
아나키즘계:각 조합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자유연합(自由連合)」을 주장했다.
총동맹계(볼셰비키계): 전투력 집중을 위한 중앙집권적 「합동(合同)」을 내세웠다.
1922년 9월 30일,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노동조합총연합」 창립대회는 이 문제로 인한 극심한 대립 끝에 경찰의 해산명령으로 무산되었다. 이 사건은 '아나·볼'의 완전한 결별을 상징하며 일본 노동운동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
Ⅵ. 후퇴와 테러리스트의 대두 (1923년 ~ 1925년)
1. 관동대진재와 오스기 사카에 학살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진재는 아나키즘 운동에 결정타를 날렸다. 혼란 속에서 9월 16일,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 조카 다치바나 무네카즈가 헌병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에 의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오스기의 죽음은 아나키즘 진영에 메울 수 없는 손실을 안겼고, 운동은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2. 테러리즘의 출현: 길로딘사
백색테러에 대한 복수심과 기존 운동에 대한 절망감은 일부 아나키스트들을 테러리즘으로 이끌었다.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 등이 결성한 「길로딘사(ギロチン社)」는 은행 강도, 요인 암살 시도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괴멸했다. 이러한 행위는 아나키즘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인식을 더욱 심화시켰다.
3. '방향 전환'과 아나키즘의 고립
대진재 이후 노동계 전반에는 보통선거제 실시 전망 등으로 인해 현실적인 의회주의를 용인하는 '방향 전환'의 흐름이 대두했다.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아나키즘 운동은 급속히 고립되었다.
Ⅶ. 전국자련과 순정아나키즘 (1926년 ~ 1930년대 초반)
1. 전국자련의 결성과 내부 대립
쇠퇴 속에서도 재건 노력은 계속되어, 1926년 5월 아나키즘계 노동조합의 전국 조직인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全???組合自由連合?, 약칭 전국자련)」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내부에서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즘」과 「순정아나키즘」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핫타 슈조(八太舟三) 등이 주창한 순정아나키즘은 노동조합과 계급투쟁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을 보였다.
2. 전국자련의 분열과 쇠퇴
이러한 내부 대립은 1928년 3월 「전국자련」 제2회 속행대회에서 폭발했다. 강령 개정 문제를 둘러싸고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아나르코 생디칼리즘파」가 퇴장하며 조직은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아나키즘 운동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Ⅷ. 아나키즘 운동의 합동과 종언 (1930년대)
1. 합동을 향한 노력과 운동의 종식
1930년대 군국화가 심화되자, 위기감을 느낀 아나키즘 진영 내에서는 분열을 극복하고 재합동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1934년 3월 「자련」과 「자협」의 합동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일본무정부공산당(日本無政府共産黨)」 사건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1934년 결성된 이 조직은 중앙집권적 비밀결사 형태를 취하며, 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 행각 등 비합법 활동으로 치달았다. 1935년 11월, 당원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고, 이는 아나키스트에 대한 전국적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과 뒤이은 「농촌청년사 사건」(1935-36)으로 인한 대대적인 검거는 아나키즘 진영에 궤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전국자련을 비롯한 거의 모든 조직이 해체되었고, 1938년 마지막 남은 도쿄인쇄공조합이 해산하면서 전전(戰前)의 조직적인 아나키즘 운동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결론
일본 패전 후 일본의 아나키즘은 '개(個)의 존엄'과 '자유연합'이라는 가치를 추구했으나 , 경제이론의 부재 등 이론적 취약성으로 인해 대중과 유리되는 한계를 보였다.
패전 후 1946년 「일본아나키스트연맹」이 결성되며 재건을 시도했지만, 패전 전의의 분열 구도를 답습하며 사회운동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이후 아나키즘 운동은 권력과 권위의 근절을 추구하는 개인의 자립 사상으로 남을 것인지, 혹은 강력한 반체제 이론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안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