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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한일 시민 연대의 가교 역사
-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저항에서 시작된 100년의 연대를 돌아보며 -
(사)국민문화연구소 회장: 김 창 덕
-목 차-
I. 서론
II. 저항의 연대: 투쟁의 현장과 동지들의 결속 (1920년대)
2.1. 시대적 배경과 불령사(不逞社)
2.2. 대역 사건과 법정 투쟁
2.3. 의문의 죽음과 남겨진 약속
III. 기억의 전승: 동지의 헌신과 지성계의 응답 (1930년대-1980년대)
3.1. 제1의 계승자, 구리하라 가즈오와 『옥중 수기』
3.2. 일본 지성계의 재발견과 공론화
3.3. 형상화된 기억: 한일 양국의 추모비 건립
IV. 연대의 조직화와 확산: 시민 사회의 성장 (1990년대-현재)
4.1. 학술 연구의 심화와 대중적 확산
4.2. 한일 양국 시민단체의 출범과 역할
4.3. 제도화된 교류: 연례 공동 워크숍
4.4. 연대의 확장: 조력자들의 재조명
V. 결론
I.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문제 제기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시민 연대의 역사는 거창한 구호가 아닌, 한 사람의 신념과 헌신에서 시작되곤 한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이 첨예한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국가 권력의 폭력에 맞서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국경을 넘어 연대한 사례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식민 지배라는 비극적 역사로 얽힌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지배국 일본의 국민으로서 피지배국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인물의 존재는 양국 관계의 미래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본 연구가 주목하는 1920년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호황(다이쇼 데모크라시) 이면에 심각한 사회적 모순과 계급 갈등이 분출하던 격동의 시대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3·1 운동의 좌절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거세졌고, 수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새로운 사상을 찾아 현해탄을 건넜다. 이 시기 아나키즘은 국가, 자본, 종교 등 모든 인위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으로서,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국가신도(國家神道) 체제의 억압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에 고통받던 양국의 청년들에게 강력한 해방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바로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와 조선인 박열의 만남과 투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곁을 끝까지 지킨 일본인 청년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夫)의 삶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초월한 ‘동지적 연대’의 살아있는 증거이자, 이후 100년간 이어질 한일 시민 연대의 소중한 초석이 되었다. 그의 헌신으로 시작된 기억의 전승은 이후 세토우치 자쿠초(???寂?)와 같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이름 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어졌고, 마침내 2000년대에 이르러 양국 시민들이 함께하는 조직적인 연대 활동으로 발전했다. 본 보고서는 국가 간의 공식 외교사와는 다른 길을 걸어온, 바로 이 100년간의 ‘아래로부터의 연대사’에 주목하고자 한다.
1.2. 연구 목적, 범위 및 방법
본 보고서의 목적은 가네코 후미코라는 한 인간의 저항 정신이 어떻게 시대를 넘어 한·일 양국 시민 사회의 교류와 연대를 위한 소중한 '가교'가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다. 특히 필자는 2002년 문경에서 열린 ‘한일 대학생 합동 수련회’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처음 알게 된 이래,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한·일 시민 연대 활동의 현장에 참여해왔다. 이러한 ‘참여 관찰자(participant-observer)’의 관점은 문헌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활동의 내적 동력과 관계의 역동성을 생생하게 기술하는 장점을 가지는 동시에, 연구자로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점을 인지하며, 현장 경험과 문헌 연구를 결합하여 역사의 실체에 다가가고자 한다.
연구의 범위는 1920년대 가네코 후미코와 동지들의 투쟁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사후 약 100년에 걸쳐 그의 기억을 보존하고 정신을 계승하려 했던 한·일 양국 시민들의 노력을 추적한다. 연구 방법으로는 양국의 관련 인물, 사건, 단체 활동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하고, 각 사건이 한·일 교류사에서 갖는 의미와 상호 연관성을 해석하는 문헌 연구를 기본으로 한다. 특히 구리하라 가즈오의 회고, 고마쓰 류지(小松隆二)의 논문, 야마다 쇼지(山田昭次)의 평전, 세토우치 자쿠초의 소설 등 선행 연구가 어떻게 후대의 연대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하여, ‘기억의 전승’이 ‘교류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입체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1.3. 보고서의 구성
본 보고서는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 서론에 이어, 제2장 「저항의 연대」에서는 1920년대 제국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아나키스트 그룹 '불령사'를 결성하고, 동지 구리하라 가즈오와 함께 실천적 연대를 모색하는 과정을 살핀다. 또한 관동대지진 이후 '대역사건'으로 체포되어 법정을 투쟁의 장으로 삼았던 과정과 후미코의 의문스러운 죽음, 그리고 남겨진 동지들의 약속을 추적한다.
제3장 「기억의 전승」에서는 1930년대 암흑기부터 1980년대까지, 구리하라 가즈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후미코의 옥중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가 출간되어 그녀의 정신이 세상과 만나는 과정을 다룬다. 이후 1970년대 일본 지성계의 재조명을 통해 그녀의 삶이 공론화되고, 마침내 한일 양국 시민들의 손으로 문경과 야마나시에 최초의 추모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상세히 복원한다.
제4장 「연대의 조직화와 확산」에서는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가네코 후미코에 관한 학술 연구가 심화하고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문화 속에서 재현되는 양상을 분석한다. 또한 2000년대에 들어 문경의 '박열의사 기념사업회'와 일본의 '야마나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가 출범하며 교류가 조직화하고, 2006년부터 시작된 연례 공동 워크숍이 2012년 박열의사기념관 개관을 기점으로 더욱 심화하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다.
마지막으로 제5장 결론에서는 100년의 연대사를 요약하고, 국가주의를 넘어서려 했던 가네코 후미코의 삶이 오늘날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 평화에 던지는 현대적 의미를 조망한다. 그리고 연대의 중심이었던 사토 노부코 회장의 타계 이후, 2026년 후미코 100주기를 향한 향후 연대 활동의 과제와 전망을 제시한다.
II. 저항의 연대: 투쟁의 현장과 동지들의 결속 (1920년대)
2.1. 시대적 배경과 불령사(不逞社)
1920년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가 급진전하였으나, 동시에 심각한 사회적 모순과 계급 갈등이 분출하던 시기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3·1 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거세졌고, 수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새로운 사상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 시기 아나키즘은 국가, 자본, 종교 등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으로서, 제국주의의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에 고통받던 양국의 청년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가네코 후미코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적자(無籍者)로 태어나 친척 집을 전전하고, 7년간 식민지 조선에서 학대받으며 제국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에 주저앉지 않고, 도쿄로 건너와 고학하며 자신의 존엄을 찾고자 했다. 그녀가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눈뜨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의 투쟁에 깊이 공감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00년 전 도쿄 긴자에서, 그녀는 운명처럼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을 만났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부터 사상적 동지임을 확인했고, 기존의 결혼제도를 거부하는 ‘계약 동거’에 들어가며 삶과 투쟁을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의 투쟁에 일본인 청년 구리하라 가즈오가 합류하면서 국경을 넘은 연대는 구체화하였다. 1923년, 문학잡지를 꿈꾸던 스무 살 청년 구리하라는 우연히 박열을 만난 것을 계기로 그의 사상에 이끌려, 박열과 후미코가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그룹 '불령사(不逞社)'에 가입했다. '불령(不逞)'이란 '불온하고 불순하다'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이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낙인찍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으나, 이들은 오히려 그 오명을 투쟁의 이름으로 전유했다. 구리하라는 단순히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을 넘어, 박열과 후미코의 집으로 이사해 짧지만 강렬한 두 달을 함께 보냈다. 이 시기 그는 후미코와 함께 전단을 붙이며 거리를 누볐고, 국적을 넘어 '동지'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를 쌓는 시간을 가졌다. 이는 사상과 신념으로 맺어진 최초의 실천적 연대였다.
2.2. 대역 사건과 법정 투쟁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도쿄를 휩쓸었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회의 혼란과 불만을 조선인에게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폭동을 일으킨다’라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했다. 이에 따라 군대, 경찰, 자경단에 의해 수천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혼란 속에서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 동지들은 ‘보호 검속’이라는 명분으로 체포되었다. 일본 당국은 이들이 히로히토 황태자(후일 쇼와 천황)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 했다는 ‘대역죄’ 혐의를 씌웠다. 이는 관동대학살의 진실을 은폐하고,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을 일소하려는 정치적 공작이었다. 구리하라 역시 이들과 함께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고, 이는 그의 삶이 이미 동지들의 운명과 깊이 결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수감 생활은 구리하라를 더욱 단단한 운동가로 만들었다. 먼저 석방된 그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옥에 갇힌 두 동지를 위한 헌신적인 투쟁을 시작했다. 그의 연대는 단순한 동정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는 후미코가 죽음을 앞두고 자서전을 집필할 때, "거칠지도 미끄럽지도 않은" 원고지를 구해달라는 세세한 부탁까지 들어주며 그녀의 마지막 기록을 도왔다. 또한 방청이 금지된 재판장에도 유일하게 특별 방청을 허가받아, 일본 사법부가 자행하는 불의를 홀로 지켜보는 증인이 되었다. 이는 국가 권력에 맞서 동지의 편에 서겠다는 그의 명백한 선언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박열과 후미코는 혐의를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법정을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함과 천황제의 허구성을 만천하에 알리는 투쟁의 장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재판 내내 조선의 전통 의상을 입고, 판사에게 자신들과 동등한 좌석을 요구하며 권위에 저항했다. "천황 암살 기도는 지극히 정당했다"라는 그들의 당당한 주장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특히 재판 중, 별개의 감옥에 수감된 두 사람이 법정에서 잠시 만나 찍은 사진이 유출되어 신문에 대서특필된 ‘괴사진 사건’은, 이들을 부도덕한 인물로 매도하려는 당국의 의도와 달리,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과 연대를 상징하는 역설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1926년 3월, 사형이 선고되는 순간, 가네코는 "만세!"를 외치며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꺾지 않았다.
2.3. 의문의 죽음과 남겨진 약속
사형 선고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우려한 일본 정부에 의해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하지만 이는 '천황의 은사'라는 형태로 포장되었고, 가네코는 감형장을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며 끝까지 저항의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감형이 결정된 지 불과 석 달 만인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일본 당국은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발표했지만, 그녀의 강인한 의지와 전향을 거부했던 태도를 고려할 때, 자살을 위장한 암살이라는 의혹이 현재까지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구리하라의 연대 정신은 후미코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사형 판결 직전,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와 함께 박열과 후미코의 혼인 신고 증인이 되어주었다. 후미코 사후에는 형무소 측의 방해를 뚫고 참혹한 유해를 직접 수습하는데 함께 했다. 이 필사적인 지원에 대한 보복으로 그는 '진우연맹 사건'이라는 별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출옥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후미코의 삶과 정신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는 죽은 동지와의 약속을 지키고, 그녀의 저항 정신을 역사 속에 영원히 남기겠다는 굳은 서약이었다. 그의 이러한 헌신은 이후 100년에 걸친 한일 시민 연대의 역사를 여는 첫 장이 되었다.
III. 기억의 전승: 동지의 헌신과 지성계의 응답(1930년대~1980년대)
3.1. 제1의 계승자, 구리하라 가즈오와 『옥중 수기』
후미코의 죽음 이후, 군국주의의 광기가 일본을 뒤덮던 1930년대 암흑기에 그녀의 기억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이는 동지 구리하라 가즈오였다. 그는 1931년, 담당 형사에게서 온갖 멸시를 받으며 너덜너덜한 상태로 되찾은 원고를 밤새워 되살려냈다. 그리고 마침내 후미코의 옥중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를 출간했다.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대역죄인’의 책을 출간하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 만약 구리하라의 이 필사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후미코의 저항 정신과 사상은 역사 속에 영원히 묻혔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출간은 단순한 기록 보존을 넘어, 미래 세대가 후미코의 정신과 만날 수 있는 최초의 통로를 연, 그야말로 '불멸의 연대'였다.
3.2. 일본 지성계의 재발견과 공론화
수십 년간 잊혔던 가네코 후미코의 이름이 일본 사회에 다시 등장하여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패전 후 민주화가 진행되던 1960년대와 70년대, 일본의 양심적 지성인들의 노력을 통해서였다.
○고마쓰 류지의 첫 조명 (1961년): 1961년, 학자이자 사상가이기도 한 고마쓰 류지가 잡지 『자유사상(自由思想)』 6호에 「반역의 여성 가네코 후미코(反逆の女性金子文子)」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일본 사회에 후미코를 알렸다. 이는 후미코에 대한 학술적, 대중적 관심이 재점화되는 중요한 신호탄이었다.
○세토우치 자쿠초의 『여백의 봄(余白の春)』과 그 파장 (1971-1973):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일본의 저명작가 세토우치 자쿠초의 소설 집필이었다. 그녀는 1971년 1월부터 잡지 「부인공론」에 후미코의 삶을 다룬 소설 『여백의 봄(余白の春)』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순한 자료 조사를 넘어, 직접 발로 뛰며 후미코의 흔적을 쫓았다. 한국의 문경과 부강을 방문하여 후미코의 동지였던 육홍균, 일제강점기 흑로회 멤버였던 양희석 등 많은 동지들과 면담했으며, 문경에서는 박열의 친척인 박정순 씨의 안내로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를 참배했다. 또한 일본 야마나시에서는 후미코의 친동생이 있는 사에키가(佐伯家)와 생가터를 방문해 취재했다. 이러한 철저한 취재를 바탕으로 1973년 5월, 소설이 단행본으로 간행되자 후미코의 실제 생애와 사상은 일본 사회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녀는 억압에 맞선 여성 해방의 아이콘으로 재조명되었다.
3.3. 형상화된 기억: 한일 양국의 추모비 건립
소설을 통해 높아진 대중적 관심은 마침내 후미코를 기리는 물리적인 공간, 즉 추모비를 건립하는 범시민적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일 양국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력과 국경을 넘는 연대가 빛을 발했다.
○야마나시(山梨) 최초의 추모식 (1973년): 1973년 4월 29일, 가네코 후미코의 생가 앞에 목재 묘표를 설치하고 최초의 추모식이 열렸다. 이 행사에는 불령사 동지 구리하라 가즈오를 비롯해 변호사 나카무라 다카이치(中村 高一),, 재심청구 변호인 모리나가 에이사브로(森長英三郞), 고마쓰 류지, 세도우치 쟈쿠초, 모치즈키 유리코 등 일본인들과 더불어, 「흑우회」의 정찬진, 한현상,이원세 등의 한인 동지들을 포함해 모두 50여 명이 참가했다. 이는 후미코를 기리기 위한 최초의 한·일 합동 행사로서 교류사의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문경 가네코 후미코 묘비 건립: 한·일 연대 협력의 첫 결실 (1973년): 같은 해 7월 23일, 후미코의 유해가 묻힌 한국 문경에서는 '가네코 후미코 묘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여백의 봄』 발간을 계기로 한국의 동지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된 이 사업은, 한·일 연대의 상징적인 결실이었다. 특히 묘비 건립 과정에서 자금이 부족해지자, 일본에서 구리하라 가즈오가 중심이 되어 모금 운동을 벌였고, 그는 직접 모금액을 들고 제막식에 참가해 추념사를 낭독했다. 제막식에는 사회를 본 양희석을 비롯해 정화암, 이지활, 고성희, 육홍균, 이강훈, 한현상 등 수많은 한·일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국경을 넘은 동지애를 기렸다.
○지속되는 교류와 야마나시 시비 건립 (1975-1976): 연대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다. 1975년 3월, 야마나시 생가 앞에서 열린 두 번째 추모식에도 한현상, 정찬진 선생이 한국 대표로 참석하며 교류의 끈을 이어갔다. 마침내 1976년 3월 20일, 야마나시의 생가터 앞에는 '가네코 후미코 시비'가 세워졌다. 이 시비 건립은 같은 야마나시 출신의 여성 아나키스트이자 운동가인 모치즈키 유리코(望月百合子)가 최초로 제안했으며, 제막식에는 구리하라 가즈오와 한현상 등 약 150명의 인파가 모였다. 그로부터 50년 전, 동지를 잃었던 구리하라는 이 비문에 직접 글씨를 새겼다. "인간성의 존엄에 투철하고, 자유를 존중하며, 권력주의를 부정한 신시대의 선구자가 되다." 이는 한평생에 걸쳐 동지와의 약속을 지킨 그의 삶이 담긴 문구이자, 후대의 연대 활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였다.
IV. 연대의 조직화와 확산: 시민 사회의 성장 (1990년대-현재)
4.1. 학술 연구의 심화와 대중적 확산
1990년대 이후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는 움직임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학술 연구와 대중문화 영역으로 확산되며 더욱 조직화하고 대중적인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학술 연구 심화: 1996년 12월,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山田昭次)의 평전 『가네코 후미코』가 가게쇼보(影書房)에서 출간되어 그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98년 9월, 그녀의 자서전인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가 67년 만에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판으로 복간되어, 후미코의 사상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1999년 4월, 야마나시현립 문학관 개관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사토 노부코 선생은 이 자서전을 두고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걸작"이라고 평가하며 그 문학적 가치를 재조명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내 연구의 깊이를 더하는 중요한 성과가 이어졌다. 2018년 1월, 박열의사기념관의 의뢰를 받은 필자의 1년여에 걸친 노력으로 『박열, 가네코 후미코 재판기록』이 완역 출간되었다. 이 재판 기록의 번역은 그동안 접근이 어려웠던 1차 사료를 연구자들이 직접 활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두 사람의 사상과 법정 투쟁의 실체를 더욱 정밀하게 분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아울러 같은 해에 필자는 『가네코 후미코 가집(歌集)』을 번역 출간했는데, 이는 현대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어체(文語?)로 쓰여 있어 해석에 곤란을 겪었던 많은 일반 독자에게, 시어(詩語)에 담긴 가네코 후미코의 섬세하고 강렬한 심정을 그대로 전해줄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대중문화 속 재현: 대중 매체는 후미코의 삶을 더 넓은 대중에게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2년 KBS 「러브스토리」, 2006년 KBS 스페셜 2부작 팩션드라마 '가네코 후미코'가 방영되며 그녀의 강렬한 생애와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심도 깊게 다루었다. 가장 큰 파급력을 가진 것은 2017년 6월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었다. 이 영화는 2019년 일본에서도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어 양국 대중에게 이들의 삶을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영화에서 후미코 역을 맡았던 배우 최희서는 2017년 7월 문경에서 열린 91주기 추모식에 직접 참석하여 추모 헌시를 낭독하며, 스크린 속의 재현이 현실의 추모와 만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4.2. 한일 양국 시민단체의 출범과 역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후미코와 박열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은 마침내 한일 양국에서 조직적인 시민단체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는 산발적이었던 교류를 체계적이고 지속 가능한 활동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한국 ‘박열의사 기념사업회’의 설립과 활동: 한국에서는 2001년 10월, 「박열의사 기념사업회」가 공식 법인으로 등록되며 박열 의사를 기리기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초대 회장은 전 문경시장이었던 박인원 선생이 맡았다. 특히 2002년 7월 문경에서 열린 「한·일 대학생 합동 수련회」는 교류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박열과 후미코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며, 그 자리에 참여한 문경 출신 대학생들조차 이들의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이 행사는 박열과 후미코를 문경 지역과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2012년 10월 9일, 박열 의사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박열의사기념관」이 개관했다. 개관식에는 재일거류민단, 일본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손자 오이시 스스무(大石進) 선생 등 한일 양국의 시민 1,000여 명이 참석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마침내 2018년 11월 17일, 대한민국 정부는 가네코 후미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며 그녀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일본 ‘야마나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의 탄생: 일본에서의 조직화는 2004년 7월 23일 열린 후미코 '탄생 100주년 기념 추도식'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전년의 4~5명에 비해 크게 늘어난 50여 명이 출석하며 높아진 관심을 반영했다. 당시 유족 대표는 "친척들도 지금까지는 꺼림칙한 기분으로 지냈지만 점점 참된 후미코가 이해되면서 그런 기분이 사라지고 있다"라고 말해, 정당한 평가가 유족들의 오랜 고난을 보상해 주고 있음을 시사했다. 같은 해 '기념사업실행위원회'는 문경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006년 6월 4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 함께 배우고, 함께 이야기하며,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후미코를 알리고 싶다"라는 취지 아래 '야마나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가 공식 설립되었다. 연구회는 강연회 및 학습회 개최, 정보 교환 및 국제교류, 추도 활동 및 문경 기념관 지원 등을 구체적인 사업 목표로 설정하고 활동을 이어갔다.
4.3. 제도화된 교류: 연례 공동 워크숍과 기념관 시대
1) 연대의 초석, 연례 공동 워크숍 (2005-2011)
박열·가네코 후미코 선양을 위한 한일 시민 사회의 연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연례 공동 워크숍을 통해 제도화되었으며, 이는 2012년 박열의사기념관 개관 이후의 활동에 중요한 지적·인적 토대가 되었다. 그 초석은 2005년 1월,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서훈 기념 심포지엄 참석차 방일한 한국 국민문화연구소의 이문창 선생이 야마나시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후손 가네코 고마에씨 및 ‘야마나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의 사토 노부코 회장을 만나면서 마련되었다. 이 만남을 결정적 계기로, 양국 시민단체는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공동 워크숍을 개최하며 상호 이해와 신뢰를 축적해 나갔다.
○2006년 (서울/문경): 첫 공동 워크숍은 박열 의사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박열, 가네코 후미코, 동아시아의 미래"라는 포괄적인 주제로 시작되었다. 스즈키 유코의 「아시아 여성의 눈으로 본 가네코 후미코」, 가메다 히로시의 「진우연맹 사건」, 사토 노부코의 「가네코 후미코 자서전, 단가, 편지에서 볼 수 있는 것」, 이문창의 「어째서 가네코 후미코인가?」 등 다채로운 발표가 이어지며 지속적인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2007년 (야마나시/도쿄): 일본에서 열린 두 번째 워크숍에서는 이문창의 「가네코 후미코의 遺志」, 박승한의 「가네코 후미코 비문 건립 과정」 등 양국 연대의 구체적인 역사를 되짚고 그 의미를 공유했다. 또한 도쿄 일본대학에서는 "巴金(파금)과 한인 아나키스트"를 주제로 별도의 워크숍을 개최하여, 시마다 쿄코(島田恭子)의 발표 등을 통해 교류의 지평을 동아시아 아나키즘 네트워크로 확장했다.
○2008년 (서울/문경): "박열, 가네코 후미코와 동지들"을 주제로, 강효숙의 「원종린을 중심으로 한 초기 재일조선인 아나키즘 운동」, 가메다 히로시의 「아나키스트에게의 자의적인 대역죄 적용」 등 심도 있는 발표가 이어지며 학술적 깊이를 더했다.
○2009년 (고베): "불령사에서 동아시아로"라는 주제를 통해, 이문창의 「‘불령사(不逞社)’시대 재조명-평화의 자유공동체를 향하여」 등의 발표로 이들의 사상을 현대 동아시아의 평화 공동체 구상과 연결하며 논의의 지평을 미래로 확장했다.
2) 기념관 개관과 교류의 심화 (2012-현재)
기념관 건립 이전에 축적된 민간 교류의 역량은 2012년 「박열의사기념관」 개관과 함께 질적 전환을 맞이했다. 기념관은 선양 사업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기존의 워크숍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학술 활동을 전개했다.
○학술 연구의 정립과 전문화 (2012-2014): 개관 초기에는 '한국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선양사업과 지방분권'(2013), '광복 이후 박열의 사상과 활동'(2014) 등 전문화된 주제의 학술회의를 개최하며, 그간의 연대를 공식적이고 깊이 있는 학술 담론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민간 교류의 정례화와 대중적 확산 (2015-2019): 이 시기에는 일본 「야마나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와의 연대를 중심으로 매년 7월 23일 기일에 맞춰 문경과 야마나시를 오가며 공동 추도식과 워크숍을 개최했다. 특히 2017년 영화 <박열>의 성공과 2018년 가네코 후미코의 건국훈장 추서는 학술 논의를 넘어 대중적 공감대를 얻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사건의 공동 규명 단계로의 도약 (2022-2023): 최근의 활동은 과거의 성과를 성찰하고 더욱 심화된 주제로 나아갔다. 2022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 현황과 과제' 학술회의를 통해 기존 연구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그 정점은 관동대지진 100주기인 20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을 주제로 개최된 한·일공동학술회의였다. 성주현, 김명섭, 가메다 히로시, 구리하라 야스시 등 양국 학자들은 이 회의에서 관동대학살의 진실과 박열 사건의 연관성을 심도 있게 파헤치며, 선양 사업이 인물 추모를 넘어 제국주의 폭력의 진실을 공동 규명하는 단계로 도약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3) 새로운 100주년을 향한 전망
관동대지진 100주기 학술회의로 정점에 달했던 한일 민간 교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교류의 일본 측 중심축 역할을 해왔던 '야마나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의 사토 노부코 회장이 2022년 10월 별세하고, 2024년 4월 그의 추도식을 거치면서 양국의 공식적인 연대 활동은 잠시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소강 국면은 관계의 단절이 아닌, 지난 20여 년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활동을 재정비하는 숨 고르기로 해석된다. 양국 관계자들은 2026년으로 다가온 가네코 후미코 순국 100주기를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 더욱 성숙하고 의미 있는 형태의 공동 추모 사업과 학술 교류를 재개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며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고 있다.
4.4. 연대의 확장: 조력자들의 재조명
연대 활동은 박열과 후미코뿐만 아니라, 이들을 도왔던 일본인 조력자들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이다. 그는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신조를 평생 실천한 인권 변호사였다. 그는 2·8 독립선언 관련자 및 의열단원 김지섭 의사 등 수많은 조선 독립운동가를 변론했으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재판에서도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4년 10월, 그는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이는 국가를 넘어 정의와 인권의 편에 섰던 일본인의 헌신을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한·일 시민 연대의 폭과 깊이가 더욱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V. 결론
100년의 세월에 걸친 가네코 후미코 관련 한·일 교류사는 한 개인의 저항이 동지의 헌신을 거쳐, 세대를 넘는 조직적인 시민 연대로 성장해 온 장대한 서사이다. 1920년대 그녀의 치열했던 투쟁은 동지 구리하라 가즈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망각의 위기에서 벗어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고, 1970년대 세토우치 자쿠초를 비롯한 일본 지성계의 양심적인 재조명을 통해 양국에 추모의 공간을 마련하는 첫 결실을 보았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이 기억은 문경의 ‘박열의사 기념사업회’와 야마나시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라는 조직적인 시민단체에 의해 체계적으로 계승되어, 매년 공동 학술회의와 추모제를 통해 살아있는 연대로 발전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유산은 명백하다. 그녀는 국가주의가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것에 저항하며 '국가'가 아닌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그녀의 삶을 기리는 과정에서 나타난 한일 시민 사회의 연대는 정부 주도의 공식 외교가 순탄치 않을 때도,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교류가 얼마나 중요하고 강력한 가능성을 지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또한 후미코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십 년간 차별받았던 유족들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명예를 회복하는 과정은, 과거사 문제 해결에 있어 진실 규명과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실질적인 치유를 가져다주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수십 년간 한·일 연대의 중심 역할을 해온 사토 노부코 회장이 2022년 별세하고 2024년 4월 그의 추도식이 열리면서, 양국의 교류는 큰 슬픔과 함께 당분간 중단 상태에 놓이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의 추모식에 한국의 동지들이 참석하며 연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듯, 이 연대의 역사는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가오는 2026년은 가네코 후미코의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 역사적인 시기를 맞아 양국의 시민 사회가 연대 활동을 재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향후 과제는 이 소중한 연대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계승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양국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통합하는 '한·일 공동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주요 연구 성과와 자료를 양국 언어로 번역·출판하는 사업의 정례화, 그리고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콘텐츠(웹툰, 다큐멘터리 등) 개발이 시급하다. 또한 양국 청년들이 함께하는 교류 프로그램을 활성화하여 미래의 연대자를 키워내야 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남긴 저항과 연대의 정신이 시대를 넘어 미래 세대에게도 살아있는 영감으로 이어질 때, 그녀는 비로소 한일 양국의 화해와 평화를 잇는 불멸의 가교로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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