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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중국 아나키즘의 흥망과 역사적 유산
-국가주의 너머의 근대를 상상했던 잊혀진 꿈에 대한 재조명-
김 창 덕
초록 (Abstract)
이 글은 20세기 초 중국 근대 혁명기(약 1900년~1930년대)에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사상적 조류 중 하나였던 중국 아나키즘의 궤적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오늘날 강력한 당-국가 체제인 현대 중국의 역사 서술에서 아나키즘은 공산주의 승리 이전의 미성숙한 단계나 소부르주아적 반동 사조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신해혁명과 5.4 운동 시기,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보다 먼저 유입되어 수많은 청년 지식인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초기 공산당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류 사상이었다. 이 글은 청말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청년들이 왜 '아나키즘'의 이상에 매료되었는지 그 기원을 추적하고, 파리파와 도쿄파로 대변되는 초기 수용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분석한다. 이어 5.4 운동 시기 아나키즘이 '노동 신성'과 '상호부조'의 기치 아래 전성기를 구가했던 과정과, 이후 볼셰비즘(공산주의)과의 치열한 경쟁 및 국민당의 탄압 속에서 정치적으로 패배해가는 과정을 규명한다. 결론적으로 중국 아나키즘은 비록 현실 권력 장악에는 실패했으나, 혁명 권력 내부의 권위주의화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비판자로서의 위치를 점했음을 논증하며, 그들이 남긴 미완의 과제가 현대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주제어:중국 아나키즘, 신해혁명, 5.4 운동, 파리파, 도쿄파, 크로포트킨, 상호부조론, 근공검학운동, 국공합작, 바진(巴金)
Ⅰ. 서론: 역설의 역사와 잊혀진 대안
21세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과 공산당 일당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 '국가'는 중국 사회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실체이다. 이러한 현대 중국의 맥락에서 볼 때, 불과 100년 전인 20세기 초, 중국 대륙에서 가장 폭발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혁명 사상이 국가와 정부의 전면적인 철폐를 주창하는 ‘아나키즘’이었다는 사실은 거대한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중국 근현대사 연구, 특히 중국 본토의 공식적인 역사 서술에서 아나키즘 운동은 오랫동안 주변화되어 왔다. 그것은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가 도래하기 전의 낭만적이고 미성숙한 과도기적 현상, 혹은 혁명의 대의를 저해한 소부르주아적 반동 사조로 격하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론적 역사관은 당시의 역동적인 사상 지형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1900년대 초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넓은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리다자오(李大釗)나 천두슈(陳獨秀)와 같은 초기 공산당의 창건 주역들조차 한때 아나키즘의 세례를 깊게 받았다.
아나키즘은 단순한 외래 사상의 수입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제국주의 침략과 내부 봉건 질서의 붕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중국’과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고자 했던 중국 청년들의 치열한 고뇌가 투영된 사상적 용광로였다. 그들은 국가 부강을 넘어선 인류의 보편적 연대를 꿈꿨고, 경쟁이 아닌 상호부조에 기초한 대안적 근대를 상상했다.
이 글은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에서 지워진 이 뜨거웠던 ‘잊혀진 꿈’을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제국 말기의 위기 상황에서 아나키즘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살피고, 그 전개 과정과 주요 분파들의 특징을 분석한다. 나아가 강력한 경쟁자였던 공산주의와의 대결 및 좌절의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실패한 혁명으로서의 아나키즘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역사적 유산과 질문을 남기고 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Ⅱ. 제국의 황혼과 급진적 부정의 정신
1. 총체적 위기와 ‘구망(救亡)’의 절박함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로 이어지는 청(淸)나라 말기는 ‘백년 국치(百年國恥)’라고 불릴 만큼 중화제국 수천 년 역사상 유례없는 총체적 위기의 시대였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의 침탈이 가속화되었고, 중화 질서의 변방으로 여겼던 일본에게 패배한 청일전쟁(1894-1895)의 충격은 중국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외부적으로는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고, 내부적으로는 태평천국 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란과 황실의 부패로 통치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 시기 중국 지식인 사회를 지배한 시대정신은 단연 ‘구망(救亡)’, 즉 “망해가는 나라와 민족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는 절박한 생존의 질문이었다. 양무운동의 기술적 접근이나 변법자강운동의 온건한 체제 내 개혁, 심지어 쑨원(孫文)의 공화 혁명론조차 혈기 넘치는 청년들에게는 미흡해 보였다. 그들은 중국을 병들게 한 수천 년의 낡은 질서, 즉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위계질서와 황제 지배 체제의 뿌리 자체를 송두리째 뽑아버릴 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처방을 갈망했다.
2. 아나키즘의 수용: 파리파와 도쿄파의 스펙트럼
이러한 지적 갈증 속에서 해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아나키즘이 수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청년들에게 아나키즘은 황제는 물론 국가, 가족, 종교 등 인간을 옭아매는 모든 억압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이었기에, 기존 질서에 대한 파괴 본능과 급진적인 해방 열망을 가진 이들에게 혁명적 복음처럼 다가왔다. 초기 중국 아나키즘은 수용 지역의 지적 풍토에 따라 크게 '파리파'와 '도쿄파'라는 상이한 두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가. 파리파(Paris Group): 과학주의와 반전통주의의 결합
서구 근대 문명의 심장부인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파리파’는 리스쩡(李石曾)과 우즈후이(吳稚暉)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1907년 잡지 《신세기(新世紀)》를 창간하여 크로포트킨, 바쿠닌 등의 사상을 소개했다. 파리파 아나키즘의 핵심은 철저한 ‘과학주의’와 ‘극단적 반전통주의’였다. 생물학도 출신이었던 리스쩡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였으며, 진화론적 관점에서 국가는 인위적이고 일시적인 억압 기구이며 인류는 결국 무정부 상태의 자유로운 연대 사회로 진화할 것이라 확신했다. 이러한 과학적 신념은 중국 전통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유교를 ‘식인(食人)의 예교’라 비판했고, 심지어 우즈후이는 중국의 낙후성이 한자에서 비롯되었다며 한자 폐지와 에스페란토 사용을 주장할 만큼 급진적인 서구화를 주창했다.
나. 도쿄파(Tokyo Group): 전통의 재해석과 여성 아나키즘
반면, 일본 도쿄에서 활동한 ‘도쿄파’는 류스페이(劉師培)와 허전(何震) 부부가 중심이 되어 잡지 《천의(天義)》를 발간했다. 당대 저명한 국학(國學) 대사였던 류스페이는 파리파와 달리 서구 아나키즘을 중국 전통 사상과 접목하려 시도했다. 그는 중국 고대의 이상 사회인 ‘대동(大同)’ 사상이나 ‘노장(老莊)의 무위자연 사상’에서 아나키즘의 원류를 발견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아나키즘의 중국적 토착화를 모색했다.
도쿄파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허전의 ‘여성 아나키즘(Anarcho-feminism)’이다. 허전은 중국 최초의 여성 아나키즘 이론가로서, 여성 억압의 근원이 단순한 남성의 횡포가 아니라 사유재산제와 결탁한 가부장적 가족 제도라는 구조적 문제에 있음을 예리하게 통찰했다. 그녀는 “경제적 해방 없는 여성 해방은 허구”라며, 정치 혁명을 넘어선 가족 제도와 경제 구조의 혁파를 주장했다. 이는 당시 남성 중심의 혁명 진영 내에서도 매우 선구적이고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Ⅲ. 혁명의 파도와 아나키즘의 전성기
1. 직접 행동에서 사회 혁명으로: 신해혁명의 교훈
초기 중국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요인 암살과 같은 테러리즘적 직접 행동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1911년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그들은 당면 적인 청 황실 타도를 위해 쑨원의 혁명파와 전략적으로 제휴하며 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그러나 혁명 직후 권력을 장악한 것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비롯한 군벌 세력이었고, 중국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신해혁명의 결과는 아나키스트들에게 “정치 권력의 교체만으로는 진정한 해방이 불가능하며, 권력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억압을 낳는다”는 그들의 테제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에 아나키스트들은 정치 혁명을 넘어선 근본적인 ‘사회 혁명’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들이 선택한 주된 방법론은 ‘교육’과 ‘계몽’을 통한 밑으로부터의 변화였다. 파리파가 주도한 ‘근공검학(勤工儉學)’ 운동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공부한다”는 기치 아래 고학하는 청년들을 프랑스로 보내 노동과 학습을 병행하게 한 이 운동은, 아나키즘적 삶의 방식을 실험하는 장이었으며 훗날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등 중국 혁명의 주역들을 배출하는 요람이 되기도 했다.
2. 5.4 운동과 아나키즘의 황금시대
1919년 발발한 5.4 운동은 중국 아나키즘의 절정기였다.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을 기치로 폭발한 청년 학생들의 에너지는 기존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는 아나키즘의 정신과 완벽하게 공명했다. 이 시기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를 능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었다.
5.4 시기 아나키즘이 확산시킨 가장 강력한 구호는 ‘노동 신성(勞動神聖)’이었다. 이는 수천 년간 지속된 육체노동 천시 풍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혁명적 선언이었다. 수많은 지식 청년이 이 구호에 감화되어 지식인의 특권을 내려놓고 공장과 농촌으로 들어가 노동자, 농민과 결합하려 시도했다. 또한, 도시를 떠나 사유재산과 계급이 없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신촌(新村) 운동’과 같은 다양한 코뮌 실험이 전개되었다.
이 모든 활동의 이론적 기반에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중국 지식계를 지배하던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 논리가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상황에서, “진화의 진정한 동력은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라는 크로포트킨의 메시지는 절망에 빠진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도덕적 지평과 문명적 대안을 제시하는 희망의 복음이었다.
Ⅳ. 경쟁과 탄압, 그리고 좌절된 꿈
1. 볼셰비즘의 도전과 아나키즘-마르크스주의 논쟁
그러나 아나키즘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중국 혁명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마르크스-레닌주의(공산주의)가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협력했던 두 세력은 1920년대 초반을 거치며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냈다. 핵심은 ‘권력’과 ‘조직’의 문제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위 정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혁명의 필수 경로로 보는 공산주의와, 국가 권력 장악 자체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연합을 추구하는 아나키즘은 양립할 수 없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천두슈 등 공산주의자들과 치열한 지면 논쟁을 벌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결국 ‘당의 독재’, 나아가 소수 지도자의 독재로 귀결될 것이며, 이는 자본가의 독재보다 더 무서운 ‘적색 폭정’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 정치적 패배와 물리적 기반의 붕괴
현실 정치는 조직과 무력을 앞세운 세력의 편이었다.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이라는 거대 정치 세력이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중앙 집중적인 조직을 거부했던 아나키스트들은 급속히 정치 무대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결정적인 타격은 1927년에 찾아왔다. 장제스(蔣介石)가 주도한 4.12 반공 쿠데타와 이어진 백색테러 과정에서 국민당은 공산당원뿐만 아니라 노동운동과 혁명 활동에 가담했던 수많은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을 ‘반혁명 분자’로 몰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학살했다. 이로 인해 아나키즘 운동의 물리적·인적 기반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3. 내적 한계와 문화적 저항으로의 은둔
외부의 탄압뿐만 아니라 내적인 한계도 명확했다. 군벌의 난립과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전시(戰時)에 준하는 위기 상황 속에서, 조직적인 규율과 강제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즘의 이상주의는 현실적인 무력감을 드러냈다. 당장의 생존과 구국을 위한 강력한 힘을 갈망했던 대중들은 점차 조직화된 국민당이나 공산당으로 기울었다.
1930년대 이후 조직적인 정치 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은 와해되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문화와 문학의 영역으로 스며들어 명맥을 유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작가 바진(巴金)이다. 열렬한 아나키스트였던 그의 자전적 소설 『가(家)』는 봉건적 대가족 제도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는 청년들의 고뇌와 저항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수많은 청년을 혁명의 길로 이끄는 기폭제가 되었다. 바진의 문학은 아나키즘이 당시 청년들의 삶과 감정에 얼마나 깊숙이 파고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Ⅴ. 결론: 실패한 역사가 던지는 오래된 미래의 질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중국 대륙에서 아나키즘의 공식적인 종언을 의미했다.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탄생 이후, 아나키즘의 치열했던 역사는 ‘승자의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반동적 사조’로 왜곡되었다.
그렇다면 현실 권력을 잡지 못한 중국 아나키즘은 그저 실패한 역사에 불과한가?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도전은 비록 정치적으로 좌절되었으나, 그들이 제기했던 문제의식과 꿈꾸었던 대안적 근대의 상상은 여전히 중요한 역사적 함의를 갖는다.
첫째, 중국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이 단순히 지배 엘리트만 교체하는 권력의 이동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깨달았던 선각자들이었다. 그들은 혁명 권력 내부의 권위주의화 경향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였으며, 그들의 불길한 예언은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상당 부분 현실로 증명되었다.
둘째, 그들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인류의 보편적 연대와 세계 평화(대동 세계)를 꿈꾸었던 코스모폴리탄들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모순과 더불어, 다시금 강화되는 강력한 국가 권력과 배타적 민족주의의 흐름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100년 전 중국 아나키스트들이 온몸으로 부딪히며 던졌던 질문들?“국가 없는 삶은 가능한가?”, “경쟁이 아닌 상호부조에 기초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관계는 무엇인가?”?은 여전히 유효한, 아니 오히려 더 절실한 현재적 질문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잊혀진 꿈'은 과거의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직 도착하지 않은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오래된 영감의 원천이다.
참고 문헌
김영도·조세현 외, 『한국 아나키즘의 역사』, 이학사, 2015.
아리프 덜릭(Arif Dirlik) 저, 이혜옥 외 역, 『중국 혁명과 아나키즘』, 삼천리, 2013.
이윤경, 「근대 중국의 여성 아나키즘 연구 - 허전(何震)의 여성해방론을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제53집, 2012.
조세현,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책세상, 2008.
조세현, 「근대 중국의 '사회' 담론과 아나키즘」, 『역사학보』 제193집, 2007.
玉川信明, 『中?の?い旗』, 晶文社,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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