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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4대 ‘아나키스트’ 도장깨기
현대 아나키즘의 개념은 대략 윌리엄 고드윈(영국),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프랑스), 막스 슈티르너(독일), 미하일 바쿠닌(러시아) 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던 고대 인물들을 아나키즘이라는 저울로 달아보는 어쩌면 위험한 작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대에도 자연인은 물론, 위인이나 통치자, 구도자들 가운데도 아나키적 향기를 풍기는 존재가 더러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음(예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이번 강좌에선 현대적인 개념의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볼 때 아나키스트로 보여지는 인물 4인에 대한 도장 깨기를 시도해 보려 한다.
◇석가(釋迦·BC560?~BC480?년)-고타마 싯타르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불교의 창시자 석가(釋迦)는 과연 아나키스트인가? 그의 생애가 당시로서는 워낙 길고 다양한 행보를 보여 그를 아나키스트로 단정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에서 보이는 반권위적·탈권위적 성향에서 아나키스트의 향기를 읽을 수 있다.
우선 인도의 오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고 모든 이가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브라만 중심의 지배체제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탈위계적이고 평등주의적 입장이 아나키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또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즉, “스스로를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으라”고 강조한 바, 이는 외부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과 이성으로 진리를 추구하라는 뜻이다. 심지어 자신의 가르침 역시 草芥처럼 무시하라고 제자들에게 설파했다(구어인 프라크리트語로 읊조리거나, 팔리語로 쓰인 초기 경전에 나타남).
석가는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 나그네가 해야 할 일은 뗏목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뗏목은 강을 건널 때만 쓰면 되지,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석가의 가르침 역시 본성이 뗏목과 같다는 점을 명확하게 이해하면, 나쁜 가르침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가르침도 다 버리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마치 장자의 무위자연에 비견되는 아나키스트적 모습이다.
반면에 그는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거부가 없었고, 당시 자신이 활동했던 마가다의 국왕 비마비사라와도 우호적으로 지내 기존 제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전복하기보다 공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정리하자면 석가는 권위적 제도에 비판적이고, 자율성과 평등을 강조했지만, 현실 정치 질서를 거부하거나 대체하려 하지는 않았다. 아나키즘과 거리가 있는 행보다.
하지만 후대에 ‘불교 아나키즘’이라는 장르가 생겨날 정도로 석가와 아나키즘을 접목하려는 시도가 있다. 불교 아나키즘은 국가는 권력으로의, 자본주의는 물질로의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제도이며, 이 두 가지가 압박과 고통을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석가의 관점으로 보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은 상대를 괴롭히는 것밖에 안 되며, 그리고 결국은 지배하려고 한 자기 자신도 괴로워하게 된다는 것. 따라서 지배-피지배의 고약한 틀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축재(蓄財)를 비롯한 부의 집착도, 자본주의자와 상대를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것과 같다. 근본적으로 불교는 자본주의와 대립한다. 이런 점에서 불교와 아나키즘의 연결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묵자(墨子·BC468~BC376년)-本名 墨翟
춘추전국시대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자고 새면 나라가 뒤바뀌는 잔혹한 세상이었다. 이런 탓에 수많은 학설과 학파가 난립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건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儒家)였다.
하지만 본명이 묵적(墨翟)인 묵자(墨子)는 유학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때 노(魯)나라(혹은 宋나라) 출신으로 공자 학파에서 유학을 배우기도 했던 그는(공자의 손자 자사와 동문수학했을 가능성 있음), 유교 사상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고,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묵자는 묵가(墨家)를 창시하고, 모든 사람이 하늘 아래 평등하고, 다 함께 일하고, 같이 나누며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을 설파했다. 한마디로 민중의 철학을 얘기한 것이다.
대개 고대 중국의 사상가가 귀족 출신인 데 비해, 묵자는 천민을 자처하였고,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으로 이뤄진 신흥계급을 대표했다. 동시에 지배계급이던 귀족과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묵가의 사상을 담은 『묵자』는 총 53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골자는 겸애(兼愛)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듯이 우리도 남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혼란한 사회가 안정될 것이며, 이렇게 사람을 대할 때 구분 짓지 말고 모두를 함께 아울러서 아끼고 챙기자는 것이 겸애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또 천자(황제)에게 상과 벌을 내리고, 천자는 관료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관료는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하여 엄격한 수직적 권력구조를 긍정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남을 차별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교의 친족 중심적 사랑을 비판하여, 자기랑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회는 혈연·지연 등으로 뭉쳐서 공동체를 해롭게 만들 것이라 비난했고, 유교의 3년 상이나 궁중 음악 예식 역시 극심한 비효율적 낭비로 보았다.
특히 그 시대에 전쟁이 만연한 것이 서로 사랑이 부족하여 파생되는 부작용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 같은 평등적 사랑은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물자 절약과 전쟁 반대를 주장하여 함부로 전쟁할 수 없도록 방어술을 발전시키고 전파하였으며, 여타 실용 기술에도 관심이 많아 여러 가지를 발명하기도 했고, 언어의 중요성을 알아 단어의 뜻을 명확하게 하는 작업을 펼치기도 하였다.
훗날 중국의 현대 개혁가였던 양계초(梁啓超)가 그를 일컬어 ‘작은 예수요, 큰 마르크스다’라고 평가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의 사상은 당시 중국에서 공자보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유가보다 훨씬 성행했던 학문이자 종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노동자, 상인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약자의 편에 서 있다는 이미지도 있었다.
또한 그는 가족관계나 과거를 묻지 않고 사람들을 모여 살게 하여 상호이익(交利)에 기반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기도 하고, 송나라를 침략하려던 초나라의 왕을 열흘 동안 걸어가서 설득하여 전쟁을 그만두게 한 적도 있었을 만큼 능력이 있었다(아나키즘의 상호부조와 유사).
게다가 전국시대 당대의 천재들은 사상가가 되거나 장군이 되는 수밖에 없었는데, 묵자는 사상가이면서 전쟁도 하였으니 그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섰다. 이 때문에 맹자는 “천하의 학설이 양주(楊朱)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로 돌아간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묵자를 살펴보자.
묵자 사상의 핵심을 요약하면 그는 유가(儒家)와는 전혀 다른 실용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 사상을 전개했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차별 없는 사랑을 뜻하는 겸애, △전쟁과 정복을 반대하는 비공(非攻), △지위와 권위는 혈통 아닌 능력에 따라 주어져야 한다는 상현(尙賢), △사치를 피하고 검소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절용(節用) △윤리적 질서유지의 수단인 하늘의 존재 인정 등이다.
전반적으로 그는 평등사상과 전쟁 반대, 권위 부정과 실용주의로 아나키즘의 얼개와 유사한 사상의 형태를 개진했다.
반면,국가 통제를 부정하지 않았고, 명상상벌(明賞尙罰) 등 질서 있는 사회를 강조한 것과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 등은 비아나키적 성향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묵자는 정확히 아나키스트라 지칭하기는 어렵더라도 아나키스트적 색채를 뚜렷이 드러낸 고대 철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나키적 정서가 충만한 반권위적 사상가’라 칭할 수 있겠다.
◇장자(莊子·BC369~BC286년)-本名 莊周
본명이 장주(莊周)인 장자(莊子)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일화, 『장자-내편』 제1편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대붕(大鵬)과, 제2편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일 것이다.
“북쪽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둘레의 치수는 몇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다.-(중략)-메추라기가 대붕이 나는 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놈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나는 뛰어서 위로 날며, 수십 길에 이르기 전에 숲 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것인데,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곧 장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협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 모든 우주 만물의 저절로 그러한 상태인 도를 따르라는, 흔히 이야기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창한 것이다.
차별적이고 유한한 인간 세계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의 무한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는 ‘소요유의 단계’에 도달하면 무위자연의 진리를 얻는다고 본 것이다.
장자가 어느 날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나비가 되어 신나게 날아다니며 자연을 만끽했는데, 잠시 쉬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보니 인간 장자라는 것을 알았다. 장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도대체 본래 인간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이렇게 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되었던 것이다.
장자는 여기서 바로 도가사상의 본질을 깨달았다. 인간도 역시 모든 우주 만물 속의 하나의 객체로 인정한다면 나비이든 사람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만물을 가지런하게 생각하는 도가의 ‘만물제동(萬物齊同)’사상이며 또한 장자가 주창한 제물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쳇바퀴 돌 듯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현대인들로서는 호접몽이 가끔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의 시간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장자는 또한 곳곳에서 ‘무용지용(無用之用)’, 곧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이 외형만 보고 무시하는 절름발이나, 꼽추, 언청이 같은 불구자를 들어 그들의 입을 빌려 도를 말한다. 이들이야말로 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역설적 우언을 통해 장자는 외형적인 모습에 구애받고 그것을 꾸미는 데 집착하는 세속 인간들의 슬픈 어리석음을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장애인이 절대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과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의 혜안을 볼 수 있다.
그가 만난 기인 혜시(惠施)와의 인연도 빠지면 서운하다. 혜시는 『장자』에도 20번 이상 등장하는 고향 친구다. 송나라 출신의 정치인이자 사상가로 위나라가 주 활동지이며, 혜왕(惠王) 때 재상이 되었다. 혜왕 당시 위나라는 누차에 걸친 전쟁 패배로 쇠약해져 갔다. 그는 강대국 진나라의 위협에 대항해서, 위나라 제나라 초나라가 연합해서 진나라와 맞서는 합종(合縱:세로 연합)을 주장했다. 연횡(連衡:가로 연합)을 주장하는 장의(張儀)와 불화하여 위나라에서 쫓겨난 뒤에 초나라로 갔다가, 고향인 송나라로 되돌아갔다. 이 때 장자와 벗이 되어서 철학을 토론했다. 장자 사상의 핵심 골격은 바로 혜시의 이론에 근거한다. 혜왕이 죽은 뒤에 장의가 권력을 잃었다. 이에 혜시가 다시 위나라로 복귀해서 합종책을 추진했다.
흔히 노자와 장자를 한데 묶어 노장(老莊)사상이라 부르곤 한다. 하지만 노자와 장자 사이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노자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어느 정도 관심갖고 있었던 비해, 장자는 스스로의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몰두하였다. 즉 노자가 세상을 구하기 위한 무위자연에 처할 것을 가르쳤던 반면, 장자는 속세를 초탈하여 유유자적하고자 하였다.
장자의 발언에서 드러나는 아나키적 정서를 살펴보자. 그는 유가, 묵가, 법가 등 모든 규범 지향적 사상을 비판하며, 인위적인 도덕과 정치가 인간을 괴롭힌다고 주장했다(천하편). “성인은 나라를 세우지 않는다”는 발언에서도 아나키즘을 읽을 수 있다. “기계는 손재주를 해치고, 도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말해 기술과 체계, 효율보다 자율 및 직관을 존중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장자와 대표적 서양 아나키스트들(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과의 공통점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시도라 하겠다.
먼저 권력 지배에 관해서 장자는 군주제와 모든 국가권력을 부정함으로써, 국가, 정부, 교회, 자본가들의 모든 권위 해체를 주창한 프루동, 바쿠닌 등과 같은 입장을 보였다.
자연 질서와 관련해, 장자는 무위자연을 주창함으로써 상호부조로 자연 한의 조화를 강조한 크로포트킨과 같은 기조를 보였다.
한편 법과 규범에 관하여는 “모두 억압의 장치”라고 전면 부정항 법과 제도가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자율을 해친다고 본 서양 아나키스트들과 궤를 같이 했다.
개인의 자율성에 관해, 장자는 제물론 등을 통해 개별 존재의 자유와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개인 해방과 자유를 존중한 서양 아나키스트들과 맥을 같이 했다. 전쟁과 관련, 장자는 무력, 형벌, 억압을 모두 부정하여 폭력과 강제 수단을 거부한 서양 아나키스트들과 같은 입장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사유(思惟)의 유동성과 관련해 장자는 호접지몽(胡蝶之夢)과 좌망(坐忘) 등에서 “진리와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는다”고 규정하여 도그마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사유를 강조한 서양 아나키스트들과 같은 스탠스를 취했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아나키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측면에 있어 장자의 아나키적 성향은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는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었고, 혁명을 도모하지도 않았으며, 아나키스트처럼 구체적 실천을 제시하거나 조직한 적이 없다. 은둔자로 철학적 해체주의자이자 정신적 자유주의자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장자를 현대적 의미의 아나키스트라고 명백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사상에는 아나키적 성향이 강력하게 흐르고 있다. 국가와 권위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질서와 규범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강했던 것을 볼 때 그는 동아시아 철학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반권위적인 사유를 펼친, 즉 가장 강력한 아나키스트 성향을 띠었던 ‘철학적 아나키스트’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BC2~AD30년) 本名 예수
결론부터 말하면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 등 4대 성인 중 아나키즘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예수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맥락, 정치적 정의, 그리고 신학적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예수를 아나키스트로 볼 수 있는 이유와 없는 이유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먼저 예수를 아나키스트로 볼 수 있는 이유 세 가지.
그는 우선 기존 질서는 물론, 종교(유대교) 권위에 대해 강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유대교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파, 서기관 등 율법학자들을 겨냥해 서슬 퍼런 비판의 날을 세웠으며, 종려주일 성전에서 좌판을 둘러 엎고 장사치들을 내쫓은 사건(신약 마태복음 21장 12절, 마가복음 11장 15절, 요한복음 2장 13~16절)은 제도화된 종교 권위에 대한 강한 거부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 세속 권력과 신적 권위를 완전히 분리하는 멋진 반격으로 세속 권위에 익숙한 속물들을 곤경에 빠트린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하여 흉계를 꾸미던 중(마태복음 22장 15절), 갖은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예수를 부추긴 후에 예수에게 납세에 관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질문한다( ” 16~17절).
이 질문은 겉으로는 매우 단순하지만 답변이 쉽지 않은 함정 있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만일 예수가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면 예수를 로마에 대한 반역 선동죄로 몰아 고소하고,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하면 매국노로 몰아 백성들이 예수를 배척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여기서 멋진 파격의 답변으로 이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21절).”
결국 그들은 공격에 실패하고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면서 기존의 위계질서보다 평등과 돌봄의 공동체를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아나키스트라 할 수 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에 더해 유대인들이 그를 메시아로서 정치적 해방자, 즉 왕으로 삼고자 했지만, 예수는 그것을 일관되게 거부함으로써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저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에서 그를 “명백한 아나키스트”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서적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에게 감명을 주어 두 사람이 서로 교류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왕권의 부정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가 아닌 예수를 보낸 절대자 여호와의 입장이지만,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은 이 땅에 왕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도 왕을 세워달라고 사사 사무엘에게 요구하자 여호와는 마지못해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면서도 △왕이 자녀를 징집하고 △세 금을 거두며 △노동력을 착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사무엘상 8장)
그 외에도 그늘 아나키스트로 규정할 수 있는 예는 성경 곳곳에 등장한다. 비근한 예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훤칠한 백마를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나귀 새끼를 구해오라고 한 점(마가복음 11장 2절)이나,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일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행보(요한복음 13장 4~5절)는 그가 4대 성인 중 아나키스트에 가장 근접한 인물임을 시사하는 사례들이다.
물론 예수를 아나키스트로 볼 수 없다는 반론도 없지 않다.
첫째, 아나키스트들이 흔히 쓰는 급진적 저항이 없고 언제나 비폭력, 용서, 화해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둘째, 아나키스트들이 권위를 일절 거부하는 것과 달리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질서 안에서 살 것을 요구했다(로마서 13장 1~2절).
결론적으로 예수가 전통적 의미의 아나키스트는 아닐지라도 당시 사회 질서와 권위에 도전한 급진적 인물임이 분명하므로 총체적으로 ‘영적 아나키스트’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자등명 법등명 : 알기쉬운 불교의 첫걸음』 <원공 저> 토방
◇『묵자 』 <묵적 저/신동준 역> 인간사랑
◇『장자,붓다를 만나다』 <정용선 저> 빈빈책방
◇『장자』 <장주 저/김학주 역> 연암서가
◇『노자 도덕경』 <노자 저/ 소준섭 역> 현대지성
◇『성경』 <다수 저> 대한성서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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