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야마나시 문예협회 회장으로 야마나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 대표인 사토 노부코씨가 사망했다. 야마나시 연고의 작가를 연구. 야마나시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이쇼 시대에 권력과 차별에 저항하는 활동을 펼친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을 알리는 데 힘썼다.
사토씨는 현내 중학교의 교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1987년, 「야마나시 어린이 문학 풍토기」(야마나시 국어 교육 연구회편)의 집필에 참가해, 여성 작가를 담당했던 여성 6명으로 「후지자쿠라의 모임」을 결성. 1997년에는 야마나시 연고의 여성 작가 30명을 소개한 「야마나시의 여성 작가들」을 간행했다. 사토씨는 후미코나 시인 다케우치 테루요(竹?てるよ), 가인 아이자와 토시코(相?俊子) 등을 담당했다.
이 밖에 번역가·아동문학자 무라오카 하나코(村岡花子)의 은사 야마다 히로미치(山田弘道), 여성 편집자의 선구이자 수필가로도 활약한 히로세 치카(??千香), 도쿄에서 노동자 시인 그룹의 중심이 되어 시의 힘으로 평화와 자유를 호소한 호시노 히데키(星野秀樹)등을 연구. 야마나시 문예협회 기관지 「이미지네이션」이나 잡지 「고후 문학(甲府文?)」 「가이지(甲斐路)」에서 성과를 발표했다.
야마나시 문예 협회 회장을 사토씨로부터 이어받은 극작가 미즈키 료(水木亮)씨는 공적을 열심히 찾아내는 사토 씨의 자세가 인상에 남았다고 한다. 회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구에도 각오를 가지고 임하고 있었다. 연고지를 방문하며, 자료를 찾고, 관계자로부터 확실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자세를 본받은 젊은 연구자가 나오기를 기대한다」라고 했다.
사토 씨는 2006년 야마나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를 설립해 사망할 때까지 대표를 맡았다.
남아있는 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가운데 사상과 활동을 쫓아 지원자를 알아보고 자서전 「옥중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의 연구를 진행시켰다.
야마나시 시내에서 후미코 추도식을 개최해 한일 연구자들의 공동워크숍도 기획하고, 인간 평등의 신념을 관철한 후미코의 이념, 후미코를 연구하는 의미를 공유했다.
후미코가 다녔던 학교 등 한국의 연고지도 방문했고, 후미코의 남편으로 한국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박열의 기념관이 경상북도 문경시에 오픈했을 때 기념식에 참석했다.
현의 평생학습추진센터 소장 등을 역임하고 연구회 멤버로 한국에 동행했던 오자와 류이치(小澤龍一)씨는 “약자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시점에서 고찰하는 사람이었다. 한국 사람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고 말했다. 연구회 전 사무국장 츠지 시게루(?茂)씨는 “후미코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강했다. 박학했으며, 모르는 것은 사토씨에게 물어보면 된다, 라는 느낌이었다”라고 되돌아 본다.
사토씨는 만주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 전 야마나시 문예 협회 회장 시미즈 쇼조(?水昭三)씨는 “사람을 차별하는 풍조에 이상함을 느겼던 것이, 후미코에게 흥미를 가진 배경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분석.
“반생에 걸쳐 후미코의 모습을 알리며 한국에서도 이해된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성과를 정리한 책을 내라고 권했는데 기회가 없어 안타깝다”며 애도했다.
<타카노 요시히로高野芳宏>